빛의 호위
조해진 지음 / 창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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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의 호위, 라는 제목을 발음할수록 따스한 기분이 든다. 게다가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제목을 보면 그 빛은 더욱 밝게 빛난다. 잿빛 세상에서 정처 없이 거닐 때, 혹은 도저히 길을 찾지 못할 때 우연히 빛 - 사람, 목소리, 연결되었다는 마음, 때로는 사물 등 - 의 호위를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인 일이다. 다행이라고만 할까, 때로는 사람을 살릴만한 가장 강한 힘의 빛을 선사하기도 한다.

 작가의 장편소설 『로기완을 만났다』에서 느꼈던 감정은 여전하면서도, 더 깊어진 것도 같다. 작가의 말에서 "이제야 나는, 진짜 타인에 대해 쓸 수 있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고 밝히는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 시종일관 따뜻한 시선으로 타인을 본다. 유대인 등록령으로 지하창고에 은신한 유대인, 불법체류자, 역사적 폭력의 피해자, 직업을 잃은 사람들이 소설의 주인공들이며, 비슷한 사람들이 가느다란 끈으로 만나 서로를 은연중에 다독이고 '호위'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그들은 "두 사람을 태운 전혀 다른 두 척의 배가 똑같은 섬에서, 똑같은 풍랑을 견디며 잠시 표류한 적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빛의 호위')" 서로를 위로한다. 언어를 초월한 교감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용기를 주고 ('번역의 시작'), 사는 게 원래 이렇게 무서운 거냐며 편지로 한탄하기도 하고 ('산책자의 행복'), 만남을 기대하며 서로의 신념을 상상하기도 한다 ('시간의 거절').

  온전히 조해진만의 통일된 감정으로 읽고 싶어서 기다렸던 <산책자의 행복>도 너무 좋았고, 우연히 먼저 읽어본 <사물과의 작별>도 다시 읽으니 더 좋았다. 다른 작품들도 빼놓을 것들이 없었다. 상처를 받아 나약하고 무기력해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힘들지만, 조해진 작가가 써낸 아름다운 언어들이 그 슬픔과 아픔을 중화시키고 있었다. 빛, 철컹하는 기차 소리, 봄밤의 포근한 기억, 라오슈, 언니, 이름, 노래……와 같은 언어들이 두드러져, 소설의 끝에 가려진 주인공들의 따뜻한 내일을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조해진이라는 작가는 내게 이렇게 다가온다. 작은 (이란 단어를 섣불리 판단하여 불끈! 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사람들에 집중하여 그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천천히 보듬어 나간다. 그의 시선과 손길이 참 좋아서, 한동안은 그의 이름이 적힌 소설들에 빠져있을 것 같다.

 

 

57쪽, 번역의 시작
그의 머릿속에서 나는 한글을 깨치지 못한 다섯살 아이로 남아 있었다. 그림이라면 어린 딸아이도 해독할 수 있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을지 모른다. 다리의 길이가 제각각인 의자는 불안감, 식품 판매대에 생뚱맞게 놓여 있는 곰 인형은 외로움, 갖가지 모양의 사탕들로 가득한 유리병은 그리움…… 때로는 불확실한 언어보다 형체가 뚜렷한 사물이 그 순간의 감정을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거라고, 나는 이 공책을 보며 배웠다.

69쪽, 사물과의 작별
긴 이야기의 끝에서 고모가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렇게나 늙고 병들었는데도, 아침에 눈을 뜨면 내가 있는 곳은 여전히 그 봄밤의 태영음반사야.

114쪽, 동쪽 伯의 숲
그의 말을 듣는 동안, 내 마음속엔 삶의 끝자락에 깃발을 꽂고 어제보다 더 큰 부끄러움을 좇아 욕망 없는 정복자처럼 한걸음 한걸음 혼신의 힘으로 걸어왔을 한 인간의 긴 발자취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가 걷는 곳은 언제나 빈 들판이었고, 투명한 계단을 지나 하늘 끝까지 이어진 그 발자취는 자격을 되묻는 것으로 충만했던 내 작은 웅덩이에서 올려다본 한 인간의 별자리처럼 빛났다. 상상보다 더 환하게, 더 고독하게……

128쪽, 산책자의 행복
라오슈, 오늘 저는 부재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건, 영원이라는 시작도 끝도 없는 선 위에서 점멸하는 작은 점, 부재함으로써 존재하는 이선을 생각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라오슈는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어떤 언어가 라오슈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걸까요. 행복한가요, 라오슈? 제가 라오슈에게서 듣고 싶은 말은 사실 그뿐인데, 오늘도 저의 타전은 무력합니다.

213쪽, 문주
- 있잖아요, 왜, 사진의 접힌 부분 같은 거, 펴본 뒤에야 중요한 단서였다는 걸 알게 되는…… 내일 그분을 만나는 게 그런 과정일 수도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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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자들 창비청소년문학 76
김남중 지음 / 창비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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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는 이런 가상의 사회를 배경으로 한 디스토피아 소설을 줄곧 읽곤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흥미가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배경이나 전개 방향이나 갈등 양상 같은 것들이 더는 새롭게 느껴지지 않을 때였다. 재미있게 끝까지 읽지만 남는 게 없는 듯한 개운하지 않은 느낌이 뒤따라왔다. 그러니 이 책에 대한 기대감과 불안감은 50대 50이었다. 기대감은 의외로 청소년 소설이 사랑(성욕을 포함한) 이라는 소재로 엮였다는 점에서 왔다.

 『해방자들』에는 몇 가지 흥미로운 설정이 있다. 이는 소설의 배경이 여섯 국가로 되어 있고, 이 국가의 특장점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국가들은 가장 여유로운 삶을 사는 '렌막'이라는 국가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농업, 수산업, 공업 등의 기술들을 가진 각국의 시민은 자격시험을 통해 렌막의 영주권을 얻는다. 주인공인 '지니'에게도 렌막은 꿈의 도시다. 가난과 위험에 찌든 도시를 벗어나 엄마와는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그래서 밀입국을 시도하고, 그저 풍요롭게만 보였던 렌막이라는 국가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다. 바로, 사랑을 통제당한다는 것. 렌막의 시민들은 복합 예방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아 성욕을 억제당하고, 낳을 수 있는 아이의 수도 부富에 따라 제한된다. 그러한 렌막에 사는 '소우'라는 또 다른 주인공은 주삿바늘이 무서워 예방주사를 맞지 않았다가 곤혹스러운 경험을 한다. 그는 첫사랑에 실패하고, 우연히 '지니'를 만난다.


  한 평론가가 작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모두가 '설마 거기까지는'이라고 안심하고 있을 때, 기습적으로 경계를 넘는 작가"라고. 흥미로운 설정은 당연히 특이한 상황을 낳는다. 밀입국한 여성들을 모아 만든 유흥업소는, 돈이 어느 정도 있지만 아기를 자유롭게 낳을만한 정도는 아닌 남성들에게 '아기 돌보기 체험'을 제공한다. 하룻밤 아빠가 된 남성들은 아기에게 우유를 먹이고, 기저귀를 갈며 환희와도 같은 감정을 느낀다. 나는 이 장면에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일반적인 경계를 넘은 상상은 파격이었다.


 아니, 이 소설 자체가 파격일지 몰랐다. '지니'와 '소우' 의 사랑이 주가 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이는 산뜻하고 가볍게 표현된다. 대신에 '사랑'이라는 감정 대신, 그것을 뺏긴 사람들의 행동이 강렬하고 속도감 있게 진행된다. 자유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과, 이를 탄압하는 국가의 모습은 우리에게 어떤 장면이나 상황을 연상케한다. "그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190쪽)"라고 되묻는 모습은 성인인 나에게도 낯설지 않은 질문이었으며, 교훈은 노골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좋았다. 단,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소설이어선지, 분량과 이야기 면에서 아쉬운 점이 있었다. 유독 눈에 띄는 다양하고 독특한 설정, 재미난 인물들로 진행된 이 이야기가 이렇게 끝나기는 조금 서운한 마음이다.

 

 

52쪽,
지니가 분유를 타서 다미 아빠에게 건넸다. 다미 아빠가 아기를 안고 분유를 먹였다. 배가 고팠던 아기는 힘차게 젖병 꼭지를 빨았다. 꼴깍꼴깍 분유가 넘어갔다. 투명한 분유병을 통해 꼭지를 빠는 아기의 입이 동그랗게 보였다. 다미 아빠는 황홀한 눈으로 아기를 바라보았다. 지니는 그런 다미 아빠를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받은 돈을 차마 주머니에 넣을 수가 없었다.


123쪽,
"사실 고맙기도 했어. 이성 생각이 나면 더 힘들었을 테니까. 성욕이라는 건 엄청난 족쇄거든. 수염처럼 깎아도 깎아도 날마다 자라나지. 아침에 면도를 해도 잠시뿐이고 면도를 하지 않으면 하루 종일 개운하지 않지. 그렇지만 말이야, 우리가 놓친 게 있어. 성욕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사랑마저 포기하면 안 되는 거였어. 성욕이 다 사랑은 아니지만 사랑에는 성욕도 포함돼 있거든. 우리는 불필요한 성욕을 제거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꼭 필요한 사랑까지 국가에 내줘 버린거야."

190쪽,
소우의 얼굴을 본 순간 지니는 어떻게든 살고 싶었다. 소우와 오래오래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렇지만 소우의 뒤에는 진다이가 버티고 있었고 자신은 여전히 밀입국자 신분이었다. 소우를 따라간다는 것은 결국 진다이의 손으로 들어가 아빠가 누군지도 모를 아기를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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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7-02-24 0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ㅡ 잘 읽고 가요 . 가상세계 ㅡ 저도 그리 좋아는 않는데 ㅡ이 책은 몰입또 좋더라고요! ^^

시읽는리니 2017-03-04 02:05   좋아요 1 | URL
그장소님, 안녕하세요. ^^ 몰입이 좋아서 술술 읽히는 소설이었습니다!

[그장소] 2017-03-04 08:28   좋아요 0 | URL
네에~ 정말 재미있었어요 . 세계관도 흥미롭고요!^^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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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게 뭔 쓸모가 있어?" 딱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런 식의 말이었다. 가까운 사람에게 듣는 이 말은 살짝 충격이긴 했지만 내가 기분 나빠할까 봐 주저하는 어조가 느껴져서 뭐라 할 수가 없었다. 반박할 타이밍도 없었고, 반박할만한 것도 아니었다. 이미 언제든 예상했던 말이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나에 대해서 한 말이었다. 나는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닌, 남의 책을 읽고 수없이 끄적인다. 그렇다고 어떤 상을 받는 것도 아니고 좋아하는 것을 하는 취미에 불과하다. 이런 쓸모없어 (보이는) 일을 왜 하는지 나도 가끔은 답하기 힘들다. 어느 날 갑자기 강렬한 충동으로 찾아온 어떤 목적을 위해 읽게 될지도 모르고, 별것 아닌 이 행위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지만, 일단은 자연스럽게 내 생활의 일부가 돼버려 시간에 쫓길지언정 절대로 끊을 수는 없게 되었다.

 


 나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 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 그런 식으로 나는 단 한 달 만에 2톤의 책을 압축한다. (10쪽)

 


 고작 몇 년 되지 않은 이 행위를 『너무 시끄러운 고독』 속의 '한탸'와 비교하면 나는 너무나 초라해진다. 삼십오 년 동안 폐지압축공으로 일해온 한탸는 어둡고 답답한 지하실에서 다양한 형태의 폐지를 압축한다. 그러나 매일 트럭에 실려 들어오는 꾸러미 속에는 빛나는 것들이 있다. "꾸러미마다 한복판에 『파우스트』나 『돈 카를로스』 같은 책이 활짝 펼쳐진 채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나뿐이다. (15쪽)" 그는 놀랍게 현존하는 '쓰레기 더미 속의 문학작품'을 정리하느라 쌓여버린 폐지 더미들에 소장에게 핀잔을 들으면서도 멈출 수 없다. 전쟁과 나치 시대, 비밀스럽게 들어온 책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오직 그뿐이다. 그 아름다운 세계를. 압축기에 눌려 존재를 잃게 될 문학들을 만나는 그의 행위는 너무나 숭고하다.

 


 조용하고 구석진 지하실의 고독을 선택한 한탸에게, 우연히 만난 책의 세상은 시끌벅적하다. 세상이 고독하다는 것을 알게 해준 압축기, 세상이 시끌벅적하지만 달콤하다는 것을 알게 해준 책은 그의 삶 그 자체다. 이 삶이 무너졌을 때의 순간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내용이 짧은 만큼 다른 시각으로 해석할 여지도 충분히 있는 책이지만, 나는 한탸의 삶(어쩌면 작가의 삶이었을)에 진한 연민을 보내며 그의 '러브스토리'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체코라는 나라와 전쟁 등 끝없는 억압 속에서, 꿋꿋이 체코어로 책을 써온 작가의 삶이 소설로 현현된 것이었을지도.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주인공의 삶에 매료될 것이다.

 "프로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 (근원으로의 전진)과 '레그레수스 아드 푸투룸 (미래로의 후퇴)", 행복이라는 불행, 너무 시끄러운 고독! 온갖 모순된 것들을 따져보기에 인생은 무지 짧다. 사라질 것들에 슬퍼하고, 비록 일상은 힘들지라도 소중한 것들에 기뻐하는 순간들이기를.

 

 

 

69쪽,
내가 보는 세상만사는 동시성을 띤 왕복운동으로 활기를 띤다. 일제히 전진하는가 싶다가도 느닷없이 후퇴한다. 대장간 풀무가 그렇고, 붉은색과 녹색 버튼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내 압축기가 그렇다. 만사는 절룩거리며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지는데, 그 덕분에 세상은 절름발이 신세를 면하게 된다.

80쪽,
그녀가 치맛자락에 빵 부스러기를 모아 담아 경건한 몸짓으로 불속에 던져 넣었다. 그러고 나면 우리는 불이 모두 꺼진 방안에 누워 천장에 눈길을 고정한 채 빛과 그림자가 춤추듯 일렁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 위에 놓인 맥주 단지를 집어들라치면 해초와 수중식물로 가득한 수족관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아니면 보름달 밤에 깊은 숲속에서 흔들리는 그림자들과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나는 맥주를 마시며 알몸의 집시 여자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흰자위가 반짝이는 눈으로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88쪽,
폐지 더미 속에서 희귀한 서적의 책등과 표지를 발견하는 그 놀라운 순간이 내게는 언제나 축제나 다름없었는데 말이다. 그 즉시 책을 집어들지는 않았다. 플란넬 헝겊을 집어들고 우선 내 압축기의 굴대를 닦은 뒤 내 힘을 다스리며 종이 더미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러고 나서야 그 멋진 책을 펼쳐 들면, 제대 앞에 선 신부新婦의 부케처럼 책이 내 손가락 사이에서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127쪽,
나는 이러고 있는 게 좋다. 저녁 시간에 레트나 대로를 걸어다니는 게 좋다. 공원 냄새, 싱그러운 풀과 나뭇잎 냄새가 강물에 실려와 이제 도로 위에 떠돈다. 나는 ‘부베니체크‘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맥주 한 잔을 시킨 뒤 멍하니 앉아 있다…… 2톤의 책이 잠든 내 머리를 위협하며 호시탐탐 나를 덮치려고 한다. 스스로 걸어놓은 다모클레스의 검이다. 나는 형편없는 성적표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다. 술잔 안의 거품이 도깨비불처럼 표면 위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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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개를 베다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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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도 변함없이 어제와 같았던 것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어제와 달라진 것들을 생각한다. 시큰한 눈에 안경 대신 렌즈를 끼면서 시야가 맑아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 하는 것. 키보드 커버 속에 먼지가 어떻게 앉았는지 의아해하면서 어떻게 닦을지를 고민하는 것. 책장에 채워진 책을 눈대중으로 세면서 내가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는 날을 상상하는 것. 부드럽고 푹신한 베개를 접어서 목 뒤에 넣어 눕고 오늘 있었던 일과, 먹었던 반찬들과 나눴던 대화들과 감정들을 회상하는 것.

 이런 사소한 것들을 소재로 소설을 만들기란 어떨까. 공교롭게도 나는 최근에 평범한 소재로 평범한 일상을 이야기하는 소설을 두 권 읽었었는데, 윤성희의 『베개를 베다』를 읽고 나서 - 단순 취향일지도 모르지만 - 이야기와 작가의 역량으로 만들어진 한 끗 차이를 경험할 수 있었다.


 사실 내게 있던 편견은 소설이란 무엇인가 특별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건 독자의 입장이지만). 이야기든 컨셉이든 문장이든 무엇인가 독특한 연출이 필요한 것이라 여겼다. 그래야 재미가 있고 공감을 사며 독자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윤성희의 소설을 처음 만나는 느낌은 살짝 쇼크였다. 그것은 이 소설이 아주 특이한 것을 지니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평범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쉴 새 없이 내뱉는 이 이야기가 오히려 독특함을 자아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그렇게 흘러가는 평범한 일상들을 세밀하고 빽빽하게, 이를테면 엄마와 백숙을 먹으며 했던 말들 ('못생겼다고 말해줘')과 낮술을 먹고 잠에서 깨 창밖에 있는 아이들을 세는 모습들과 ('베개를 베다') 놀러 온 친구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인터넷으로 검색하는 ('모서리') 것들 같은, 도무지 특별하다고 볼 수 없는 아주 평범한 일상들을 소설은 그린다. 그것이 지루하지 않고 너무도 편안하고 아름답게 읽히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지만, 소설의 백미는 또 있다. 담담한 일상 속에 잔금처럼 그어져 있는 상처들이 감춰져 있다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쓸데없는 짓을 하면서 행복해하는지 알면 깜짝 놀랄 거예요." (87쪽, 휴가)

"난 김민수가 괴롭힐 때마다 스머프 엉덩이를 상상했어." (139쪽, 팔 길이만큼의 세계)

"새벽은 어제와 오늘이 겹쳐지는 시간. 그래서 그 시간에 술이 가장 맛있는 거야." (201쪽, 모서리)


 어떤 고통스러운 순간이 있어도 시간이 지나 잊어가며 살아가듯이, 그 순간들이 떠올라도 꾹꾹 참고 견디며 살아가듯이. 그저 남에게는 별일 없이 사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모습들이 따뜻하게 다가왔다. 언니가 쓴 편지보다 형부가 쓴 편지가 더 많아진다든가 (50쪽, 못생겼다고 말해줘) 아빠가 처음부터 도망갈 생각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다거나 (166쪽, 낮술), 그것들이 죽음이나 상실, 그 어떤 부정적인 것들을 의미하더라도 소설은 아주 소소한 장면들로 살아갈 힘을 선물한다. 그리고 멋 부리지 않은 문장들 속에서 돋보이는 예쁜 말들이 위로가 된다.


 끝으로 너무나 공감이 되었던 해설 속 한 문장을 덧붙인다. 그의 소설을 앞으로도 계속 읽을 것을 약속하면서.

 "윤성희의 이야기는 여전히, '소설' '문학' 대신에 '소설적인 것' '문학적인 것'등을 상대할 필요는 없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소설이지 소설적인 것이 아니고 문학이지 문학적인 것이 아니다." (271쪽, 해설 - 최대 소설의 기도)

 

 

43쪽, 못생겼다고 말해줘
니가 못생겨서 그래. 언니는 말했다. 니가 더 못생겼어. 내가 말했다. 쌍둥이 자매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못생겼다고 싸우는 걸 형부는 재미있어했다. 그때마다 형부는 늙으면 더 못생겨질 텐데, 하고 놀렸다. 그건 세상의 곱지 않은 시선을 견디는 우리만의 주문이었다. 넌 너무 못생겼어. 넌 너무 못됐어. 넌 너무 뚱뚱해. 그렇게 둘이 서로에게 욕을 하면서 우리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62쪽, 날씨 이야기
남편은 늘 늦었고, 나는 밥을 물에 말아 김치랑 먹었다. 대부분 음식들은 먹기도 전에 유통기한이 지나버렸고 나는 미련없이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러곤 다시 장을 봐서 냉장고를 채웠다. 네번째로 자동차 키를 잃어버린 날, 나는 자동차 바퀴를 걷어차며 화풀이를 했다.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았는데 실패한 기분이 들었다. 실패를 한 적이 없어서 실패한 기분이 들었다.

122쪽, 베개를 베다
나는 장롱을 뒤져 베개를 찾았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굳이 말을 하자면 세제 냄새가 났다. 베갯잇을 벗겨보니 침으로 얼룩진 자국들이 보였다.그제야 내 베개라는 생각이 들었다. 베개를 베다. 내가 좋아하는 말이었다. 받아쓰기를 할 때 나는 아들에게 종종 그 문제를 내곤 했다. 아들은 꼭 베게를 베다, 라고 썼다. 나는 거실에 누워 베개를 베다, 라고 중얼거렸다. 그러면 잠이 왔다. 마법의 주문처럼.

200쪽, 모서리
내가 찍은 사진과 사촌형의 사진을 번갈아 보던 조가 물었다. 그런데 누구야? 나는 우리 집안에서 가장 똑똑했던 사람이라고 말해주었다. 몇 살인데? 스물일곱. 그러자 조가 우리랑 동갑이야? 하고 물었다. 바보. 흑백사진을 보고도 동갑이란 말이 나오다니. 아니. 스물일곱이었어. 이 사진을 찍었을 때. 그러자 조가 사진을 들고는 가로등 아래로 갔다. 가로등 아래에 서서 조는 사진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났다. 그리고 이유 없이 눈물이 나는 내가 창피해서 눈사람을 발로 걷어찼다. 얼었다 녹았다 다시 언 눈사람은 부서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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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어루만지다
김사인 엮음, 김정욱 사진 / 비(도서출판b)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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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아직 모르고 읽는다. 하나의 시에 머무르다가 어떤 감흥이 오지 않으면 다음 시로 넘어가고, 그것을 계속 반복한다. 그러다가 좋은 시를 만난다. 좋은 시라는 느낌은 때로 한 단어에서, 한 문장에서, 문장을 나열한 행간에서 올 때도 있다. 그런 느낌을 받으면 시인이 단어 하나하나 어떤 마음을 가지고 배치했는지 상상해보기도 한다 (줄곧 이 상상은 아주 짧은 순간에 멈춰버리곤 하지만). 이때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시를 어떻게 읽는지 궁금해진다. 나처럼 읽을까. 아니면 좀 더 구체적인 방법으로, 더 세밀하게 따져보며 읽을까.


 그럴 때마다 시에 관한 해석을 엿볼 수 있는 책을 들춰본다. 좋은 시에 좋은 해석까지 볼 수 있는 금상첨화지만, 이런 책들은 글쓴이의 해석에 갇혀 그 너머를 볼 수 없다는 함정도 있다. 김사인 시인의 시 해설집 『시를 어루만지다』는 이 함정이 비교적 큰 편이었다. 페이지 양면에, 왼쪽엔 시, 오른쪽엔 시인의 해설이 정직하게도 딱딱 붙어있다. 시인의 해석이 궁금하지만, 생각을 열어두기 위해서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는 것을 꾹 참아야 한다. 이런 함정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끝까지 즐겁게 읽었던 것은, 첫째로 시인의 해석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었고, 둘째로, 그가 뽑은 시들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었다.

 

풀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 <묵화墨畵> 김종삼


 책에는 대개 현대시보다는 그 이전의 시를 담았으며, 이름만 들어도 알 듯한 시인의 시도 어느 정도 배제했음을 밝히고 있다. 시인의 입맛대로 뽑은 시라 모든 이들에게 좋을 리는 만무하지만, 이제 막 시를 알기 시작한 내게는 여태껏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한 생소한 시인과 시의 향연이 너무도 즐겁게 여겨졌다. 언젠가 꼭 읽어보리라 다짐했던 김종삼 시인의 시가 유독 눈에 띄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그런 시에 붙은 해설은 역시나 주옥같았다. '시를 어루만지다'라는 제목은 시에 대한 김사인 시인의 생각을 어느 정도 내보이고 있는데, 그는 책의 전반부에 '시에게 가는 길'이라는 이름으로 시를 읽는 준비를 함께 다한다.


 이것을 제대로 신기해하는 일, 그 힘의 정체를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일이 시를 만나러 가는 첫 걸음이다. 수천 년에 걸쳐 축적된 시에 대한 많은 지식들 - 시는 이런 것이다, 또는 저런 것이다 하는 온갖 정의들이며, 정형시, 자유시, 운율, 이미지 등을 동원한 시에 대한 갖가지 분류, 설명, 분석 등 - 이 실은 모두 이 불가사의한 힘에 대한 궁금증의 결과들이다. 그러니 시라는 현상에 닿고자 한다면 선무당 사람 잡는 어설픈 외국이론이나 '유식'에 기대기 전에 이 소박한 물음을 제대로 간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16쪽)


 그는 또한 '매직 아이'를 언급하면서 시 읽기는 "언어들을 2차원의 평면에서 일으켜 세워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로써 새로운 세계를 마주하게 된다는 것이다. 온갖 자유로운 시들이 쏟아져 나오고 시라는 장르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시대에, '시에게 가는 길'이라는 이 책의 도입부가 다소 거창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담은 시와 해설들을 끝까지 읽고 나면 알게 된다. 이 책은 시를 평하거나 어떻게 읽느냐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제목 그대로 시를 어루만지고 사랑하는 시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걸.


 무엇인가 놓치거나 지나쳤다고 두려워하지 말 것. 그대로 즐기되, 2차원의 평면에서만 머무르지 말 것. 책을 읽고 드는 생각이지만 이것은 단연 시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문학에 해당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도 든다.

 

 

7쪽,
지난 20년 동안 대체로 나는, 시 쓰기는 제 할 말을 위해 말을 잘 ‘사용하는‘ 또는 ‘부리는‘ 데 있지 않다고 말해왔다. 시공부는 말과 마음을 잘 ‘섬기는‘ 데에 있고, 이 삶과 세계를 잘 받들어 치르는 데 있다고 말해왔다. 그러므로 종교와 과학과 시의 뿌리가 다르지 않으며, 시의 기술은 곧 사랑의 기술이요 삶의 기술이라고 말해왔다.
생각건대 쓰기뿐 아니라 읽기 역시 다르지 않아, 사랑이 투입되지 않으면 시는 읽힐 수 없다. 마치 전기를 투입하지 않으면 음반을 들을 수 없는 것처럼. 그러므로 단언하자면 시 쓰기와 똑같은 무게로 시 읽기 역시 진검승부인 것이며, 시를 읽으려는 이라면 앞에 놓인 시의 겉이 ‘진부한 서정시‘ 이건 ‘생경한 전위시‘ 이건 다만 사랑의 절실성과 삶의 생생함이란 더 깊은 준거 위에서 일이관지하고자 애쓰는 것이 마땅하다.

37쪽, <墨畵> 김종삼
‘이 하루도‘는, ‘오늘 하루도‘나 ‘오늘도‘와 같지 않다. 모래를 씹듯 꾸역꾸역 나날을 넘기는 이의 쓰디씀과 고독함이 어려 있는 발화, 그 쓰디씀에 대비되어 이어지는 ‘함께 지남‘이 더 눈물겨운 것이다.

117쪽, <참 좋은 저녁이야> 김남호
멀리서 가까이서 죽음의 소식들은 쉼 없이 들려온다. 그 소식들 앞에서의 무력감과 허망함 곁에 이 시를 놓아본다. 정색의 비장과 진지함, 또는 익숙한 탈속의 포즈와 선미가 아니라, 위악과 자조가 섞일망정 비애와 허무를 쉬 내색하지 않으려는 이런 장난기 쪽에 차라리 희망이 좀 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149쪽, <장마통> 박구경
아마도 말들은, 결코 요란하지 않으면서 저를 세심하게, 중하게 대하는 이런 시인을 좋아할 것 같다. 제 할 말이 바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래도 말들이 지닌 표정과 빛깔과 한숨 같은 것을 우선 보고 듣고자 애쓰는, 그런 이를 말들은 더 따르지 않을까. 그런 시인들은 소박해 보이지만 예민하고 적확해서, 무엇에도 양보할 리 없는 언어에 대한 확신과 긍지로 차 있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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