썅년의 미학 썅년의 미학
민서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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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에 대해 쓰기 위해서, 내가 들었던 말들을 일일이 나열하고 싶지는 않다. 걱정과 빈말로 포장한 모욕적인 말들을 다시 되짚으면 기분만 나빠진다. 자존감을 건드릴 정도의 큰 타격을 받은 적도 있고, 여자라면 한번씩 들었을 사소한 말들을 나도 꾸준히 듣고 자랐다. 가까운 사람에서부터 '아는' 사람 불문하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기분 나쁜 말들은 보통 여성성과 외모와 옷차림과 태도에 관한 과한 참견과 관심의 말들이다. 너나 잘해, 하고 싸가지 없이 욕 한번 시원하게 해버리고 싶지만 관계를 망치거나 시끄러워질까봐 '허허허' 웃거나 '네네' (알았으니 얼른 가세요) 속말은 삼키고 대충 대화를 마무리 짓기 일쑤였다. 이건 착한 사람 콤플렉스나 각자의 성향에 관련된 것이 아니다. 수많은 여자들이 자신의 위치 때문에 속시원하게 말할 수 없는 현실이다.

<썅년의 미학>은 저스툰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웹툰을 재구성해 출간된 책이다. 굳이 분류하자면 페미니즘과 관련된 만화지만 딱히 '페미니즘 만화'라고 이름 붙이진 않았다. 그저 여자들이 겪은 수많은 에피소드를 한 컷, 한 컷에 간략하게 담고 나서 상상력을 가미했다. 여자들이 별별 행동과 말들로 상처를 받거나 피해를 입을 때 당당하고 거침없이 거절하는 모습을 담았다. 각 장의 만화 뒷편에는 저자의 짧은 단상이나 실제 경험담을 풀어놓았다. 기억에 남는 저자의 경험담은 지하철 쩍벌남에 일침을 가했다는 이야기다. “지가 다리 벌려 놓고서는 왜 나한테 X랄이야?” 라는 말에 놀라 일어선 남자가 다시 통화를 하는 척 욕설을 내뱉자, “지금 나한테 미친년 이라고 한 거야?”라고 크게 웃으며 모든 승객들의 시선을 주목시킨 일이다. 실제로 이렇게 할 수 있는 여자들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저자 또한 친구와 함께 있지 않았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저자의 경험담이 섞인 만화를 보다보면 이런 상황에선 이렇게 말하라고 알려주는 느낌이 드는데, 그렇게 거절하고 받아치지 못하는 여자들이 바보 같거나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니라고 강조한다. 잘못은 먼저 폭력적인 언행을 한 그 남자에게 있다.

 평생을 옭아매는 성 고정관념, 갑갑한 브래지어와 생리대의 괴로움, 성폭행과 성희롱, 범행의 표적이 된다는 불안, 데이트 폭력과 안전 이별, 나이에 따른 결혼의 압박과, 임신과 육아, 일터에서의 차별적인 대우. 사회가 오랜 세월 동안 방관해왔던 여자가 당하는 거의 모든 일들에 대하여 하나 하나 짚어주는 느낌의 만화다. 얼마 전 읽었던 <악어 프로젝트>가 길거리에서 여자들이 당하는 폭력에 대해 집중한다면, 이 책은 더 범위를 넓혀서 조금 더 가볍고 알기 쉽게 전해주는 느낌이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페미니스트들이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항하는 방식이나 전략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코르셋의 범주에 관해서도 모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여성 개인에게 가해지는 압박도 제각각이고, 그 때문에 그걸 벗기 위한 노력의 정도나 한계도 각자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목적은 모두 같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개인의 자유를 찾는 것이다.” (234쪽)

책의 마지막 문장인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처럼 생겼다”는 말에 마음이 갔다. 만화를 보면 짐작할 수 있겠지만 저자는 탈코르셋을 하지 않고, 내 취향이 어디서 왔는지를 연구하며 자신에게 어울리는 모습대로 살아가자는 주의다. 발췌한 글이, 탈코르셋을 하지 않는 저자의 합리화로 볼 수도 있겠으나, “진정한 페미니스트의 외모를 나누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고 정답은 없다”는 저자의 말에 어느 부분 동의를 하고 있다. 나는 아직 페미니즘 입문서를 고작 몇개 읽은, 지금 뜨겁게 일어나는 페미니즘 운동에 발도 채 담그지 못한 애송이라서 뭐가 맞는지 틀린지 확신할 순 없다. 그래서 이런 저런 다양한 시도를 하면서 페미니즘에 대해 알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여성들에게 감사하는 마음 뿐이다. 많은 정보들을 접하고 공부해서 내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고심해보는 중이다.

73쪽,
"야한 걸 좋아하지만 너랑은 안 해."
이걸 말하기까지, 내가 얼마나 오래 걸렸는데. 뭐 어쩌라고.
결국, 지금에서야 페미니즘을 접한 우리들의 인생이란, 자신의 지난날을 끊임없이 후회하며 이불을 차다 "아니야, 역시 그 새끼들이 개XX다." 하고 잠드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니 적어도 오늘 밤만이라도, 온전히 그 개-새끼들을 탓하며 잠들 수 있기를. 모두 굿 나잇.

93쪽,
그들은 여성의 가장 사적인 순간, 즉, 여성이 배설하는 장면을 보거나 여성의 생식기를 보는 행위를 통해 비틀린 지배욕을 맛본다고 한다.제 아무리 잘난 여자라도 이런 곳에서 아랫도리를 다 드러내놓고 ‘몰카‘나 찍힌다는 사실에 우월감을 느낌다는 것이다. 여성의 수치심이 곧 자신의 흥분제가 된다는 것. 아아, 도대체 어떤 지질한 인생을 살기에 겨우 그런 거로 흥분하는 걸까? (아, 물론 너희 인생 따위 전혀 안 궁금하다.) 근데 있지, 우리 하나도 안 창피해. 우리는 인간이라서 생식기도 달려 있고 오줌도 싸고 똥도 싼단다. 그래서 그게 하~나도 안 창피해. 창피해야 하는 건 너희들이야. 겨우 그런 걸로 비정상적인 쾌감이나 느끼고 딸딸이나 치는 이 범죄자 X끼들아, 너희들은 우리를 한 번도 지배한 적 없었고, 앞으로 지배할 일도 평생 없을 거야.

103쪽,
남성이 피해자인 불법 촬영물이 유출되면 포털 사이트 검색어 1위지만, 여성이 피해자인 불법 촬영물이 유출되면 음란 사이트 검색어 1위가 된다. 이 비뚤어진 운동장을 지금 바로 잡지 않으면 안 된다. 흔히들 "여자가(는)"라는 말은 행동을 제한할 때 쓰이고, "남자가(는)"라는 말은 행동을 합리화할 때 쓰인다고 한다. (…) 아마 여기서부터 바뀌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여자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으니", 남자도 "감히" 그러지 말라고. 그리고 공평하게, 서로 "그러지 말자"고.

223쪽,
우리에게, 페미니즘에, 여성에게 공감은 필요 없다. 어차피 사람은 타인을 100퍼센트 이해하지 못한다. 몰라도 괜찮다. 손잡아주지 않아도 되고, 눈물을 닦아주지 않아도 된다. 정말 정말 정말, 그래도 돕고 싶다면, 좀 닥치고 있기를 바란다. 여성의 입을 막지 말고, 여성의 앞길을 막지 말고, 여성의 인생을 막지 마라. 돕겠답시고 나대지 마라. 지금 당장 보이지 않는 아군이 아니라면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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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스, 가장 자유로운 결혼 - 프랑스에서 부부 대신 파트너로 살기 북저널리즘 (Book Journalism) 24
이승연 지음 / 스리체어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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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혼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떠돌기 시작하기 전부터 결혼의 필요성에 대해 늘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외로움을 심하게 타지 않는 성향이긴 하지만, 개인적인 성향을 떠나서 왜 결혼과 출산이 의무여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가문과 가문 사이에 오가는 어마어마한 자금들, 소속과 호칭의 변화, 무서울 정도로 다양한 간섭들 등, 많은 것들이 한여름밤의 꿈같은 결혼식 하루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게 어쩌면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행복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두려운 마음이 먼저였다.

 

하지만 이 생각이 언제까지나 이어질지는 모르겠다. 배우자로 맞이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는 이상, 아마 나는 비슷한 경로를 밟아나가지 않을까. 무수히 많은 것들과 싸우기보다는 순응하는 식으로. 한국이 다양한 분야에서 많이 발전했다고는 하지만, 나는 우리나라가 사회적으로는 꽤 많이 닫혀 있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프랑스에는 ‘팍스’라는 제도가 있다. 팍스는 두 성인이 서로의 관계를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제도이며, 한국어로는 ‘시민 연대 계약’으로 번역할 수 있다고 한다. 68혁명 이후 프랑스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화하였고, 팍스는 원래 동성 커플을 위한 제도였다. “결혼한 커플과 같은 수준의 사회보장 제도를 제공하면서도 입양 허용 문제는 시간을 두고 논의해야 한다는 합의를 하고 탄생한 제도가 팍스다. (55쪽)” 프랑스에선 동거 상태로 지내는 커플도 많지만, ‘팍스’ 인구 또한 상당하다. 많은 젊은이들이 동거나 결혼 대신 ‘팍스’를 선택하는 이유는 각종 증명서에 팍스 여부가 기록되고 배우자로서의 법적 권리와 의무를 가지며, 세금 공제 혜택과 재산 상속에도 어느 정도 활용할 수 있는 기특한 제도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프랑스에서 유학을 하며 (팍스) 파트너인 ‘줄리앙’을 만나게 되었고, 동거를 하기 시작했다. 한국에 있는 부모님에게는 ‘동거’ 조차도 땅을 칠 일이었기 때문에 꽤 열심히 설득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후 프랑스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위하여 줄리앙과 ‘팍스’를 맺었다. 근사한 식당에서의 식사와 서명 한 번으로 둘은 파트너가 되었다. 둘은 여름이 되면 줄리앙의 부모님 댁에서 휴가를 보낸다. ‘팍스’를 맺은 그들이 자유롭게 부모님의 집을 오가는 것도 재미있지만, 가족 분위기 또한 화기애애하고 자유분방한 것도 특징이다. 식사 내내 가족들이 돌아가며 접시를 내오고, 각자가 필요에 의해 일을 하고, 남성과 여성 구분 없이 자유롭게 대화하며 시간을 즐긴다. ‘시댁’이라고 할 수 있는 줄리앙의 집이 불편하지 않은 건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프랑스의 팍스 제도는 가족의 형태가 변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해 국가가 다양한 가족을 제도 안에서 보호하는 울타리를 만든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61쪽)

 

책을 통해 프랑스의 사회 복지 제도 일부분을 접하니 우리나라와는 달리 ‘사회적 합의’가 충분하게 갖춰진 느낌이었다. 개인의 선택과 권리를 중시하는 프랑스는 성별과 관계없이 각 개인이 활용할 수 있는 복지를 탄탄하게 갖추고 있다. 그리고 그 복지제도를 이용하는 개인들도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다. 프랑스에서 전업주부로 사는 여성은 전체 여성의 14퍼센트라 하고, 보육 시설도 무척이나 활성화되어 있다. 각자가 필요에 의해 일을 하며 육아는 부모 공동 책임으로 자유롭게 생활한다. 세심한 부분까지 고려한 국가의 복지 혜택과 그를 인정하는 사회적 합의, 책임감과 이해심을 갖춘 개인의 인식이 조화롭게 갖춰진 ‘그들이 사는 세상’이 어찌나 부러운지. 한국이 여러 방면에서 변화의 양상을 띠고 있지만, 보다 성숙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 큰 성장이 아닌 사소한 부분도 주목할 필요를 느낀다.

 

● 17쪽,
결혼식을 올린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많은 사람들이 준비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결혼 장소나 절차, 예복 등을 맞추다 의견 차로 다투기도 하고 가족들이나 친척들이 두 사람의 결혼에 개입하는 일도 많다. 이 모든 것을 수개월에 걸쳐 준비했더니, 결혼식 당일은 즐길 새도 없이 지나가 버렸다고 하는 커플도 있었다. 결혼이란 아름다운 일이지만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관습이라는 이유로, 전통이라는 이유로 해야 하는 것만큼 힘든 일은 없다.

● 49쪽,
그의 말처럼 팍스가 모든 면에서 완벽한 제도라고는 말할 수 없다. 팍스를 맺고 사는 모범적인 커플이 있는 반면, 당연히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결혼 이외의 대안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혼이라는 일생일대의 선택을 현명하게 결정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함께 살며 상대방을 파악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 76쪽,
아이를 낳은 커플은 유급 휴가 외에도 매달 이틀의 휴가를 더 사용할 수 있다. 주어진 휴가를 다 쓰더라도 아이들을 위해서 시간을 비워야 하면 회사와 원만히 협의할 수 있다. 내가 회사에 다닐 때도 많은 커플이 아이를 낳기 위해 육아 휴직을 사용했다. 아이 둘의 엄마가 되어서 일정 기간은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직원들도 있었다. 회사 안에서 이들의 업무 방식에 부정적인 의견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각자가 원하는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 각자가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의 업무를 배당해야 한다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아이가 자라면 회사로 돌아와 전일제 근무를 하면 된다. 고심해서 뽑은 사람이 아이를 길러야 한다는 이유로 회사를 떠나는 일이 회사에는 더 큰 손해다.



● 79쪽,
프랑사의 팍스나 스웨덴의 삼보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동거가 곧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실이다. 이들 사회에서 팍스나 삼보와 같은 느슨한 계약 관계는 다양한 가족 형태 중의 하나일 뿐이다. 이런 문화는 어린 시절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사회 보장 제도 덕분에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 105쪽,
한국의 가족관계에 비추어 보면 우리는 여전히 미완성의 관계다. 하지만 부모님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결혼식을 서두르는 커플, 결혼하고 나서 생활 습관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헤어지는 커플들에 비교하면 어떤가. 극단적인 예시일지 모르겠지만,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를 통과한다고 해서 연인, 가족 관계가 굳건해지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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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헤어지는 하루
서유미 지음 / 창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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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푹 찌는 더위에, 바깥은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땀이 흐르니 가만히 책을 읽기도 힘든 여름이다. 더운 날들엔 기분 좋고 상쾌하거나, 때로는 서늘하고 오싹한 책을 읽고 싶다는 마음은 나와 관계없는 줄 알았는데 정도가 심해지니 너무 우울한 책은 몸과 머리로 피해지는 듯하다.

 

<모두가 헤어지는 하루>는 오묘한 제목이었다. 서유미 작가의 깔끔한 문체를 기억하고 있어서 이 책을 고르기도 했지만, 쓸쓸한 기분과 괜찮다는 위안을 동시에 주는 이중적인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읽어보고 싶어진 이유도 있었다. 여름이니까, 유난히 힘든 여름이니까, 쓸쓸한 기분보다는 ‘괜찮다는 위안’을 붙잡아두고 책을 읽었다. 퍼즐처럼 꼭 알맞게 비슷한 분위기로 맞춰진 단편들이 나왔다. 각자의 방식으로 살지만 비슷한 상실의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가 다른 듯하면서도 비슷했다. 청춘이라 불리는 사회 초년생의 이야기부터, 이제는 엄마가 되어버린 딸의 이야기까지, 소설과 소설을 거쳐 시간은 흐르고 각자가 삶을 버텨내면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상실을 버텨낼 수 있는 것에는 수많은 것들이 있을 테지만 그중 별것 아닌 것이 소소한 행복이나 희망을 주기도 할 것이다. 꽤 유명한 로고가 박힌 달콤한 케이크 상자 (‘에트르’), 뜻밖의 인연이 진심으로 쓴 편지 (‘개의 나날’), 별 볼 일 없어 보이지만 늘 함께 하던 사람과 같은 공간에서 무심하게 일상을 보내는 것 (‘휴가’), 이제는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엄마의 어렴풋한 미소 (‘변해가네’)와 같은 것들이. 이런 것들을 보며 우울한 이야기를 견뎠던 나처럼, 소설 속 주인공에게도 마찬가지로 작은 힘이 되어줄 것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단편은 세월이 흘러 엄마의 마음을 체험하게 되는 <변해가네>와 개인적인 사정으로 24시간 사우나에 모여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의 <이후의 삶>이었다. 후반부에 나온 두 작품이었다. 초반부터 등장한 단편들이 우울하고 막막하며 때로는 허탈한 감정까지 드는 와중에, 우울함과 비릿함을 넘나드는 단편에서는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기도 했는데, 뒤로 갈수록 마음이 안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서유미 작가의 장점은 깔끔하고 담백하면서도 감정을 품은 문장과, 장황하지 않고 편안하게 쓰여지는 데 있는 듯하다. 돌직구도 아닌 화려하게 커브를 돌며 들어오는 공도 아닌, 받는 사람의 자세에 맞추어 적당한 속도와 거리로 날아오는 공처럼 말이다. 그의 장편을 흡족하게 읽었던 기억이 아직 남아있어 기대감 때문인지 이번 소설집은 일부 단편이 완벽하게 마음에 들어오진 않았지만, 눈에 밟히는 장면들이 여럿 있었다.

 

 

 

● 20쪽, <에트르>
집에 대한 고민은 새해맞이 케이크로 어떤 걸 고를까,처럼 간단하거나 달콤하지 않았다. 그대로 살겠다는 건 돈을 더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고 이사를 가겠다는 건 서울 밖으로 밀려나거나 큰 방 하나에 거실 겸 부엌이 딸린, 두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을 줄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걸 의미했다. 휴식시간이 줄어들거나 휴식의 공간이 좁아지는 것, 둘 중에 어느 쪽이 더 견디기 쉬울지 선택하기 어려웠다.

● 58쪽, <개의 나날>
나는 이제 기억조차 희미한 초등학교 입학식과 졸업식을 떠올려봤다. 교실과 운동장에 흩어져 사진을 찍던 사람들 사이에서 몰래 셔터를 누르고 사라졌을 장에 대해 생각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나를 보러 왔으면서 나에게 오지 않은 장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 또한 버거웠다. 사진 뒤의 흰 봉투에는 졸업과 입학 축하,라고 쓰여 있었고 5만원이 들어 있었다. 중학생 이후의 사진은 서너장뿐이었다. 머리를 바짝 올려 깎고 여드름이 난 나는 표정이 침울하고 더 뚱뚱해졌다. 그리고 여전히 혼자였다.

● 85쪽, <휴가>
부탄가스와 라면과 번개탄은 잘 어울리는 조합이면서도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 평일 오후에 등산복을 입은 사내가 그것들을 어떤 식으로 사용할지 알 수 없었다. 그것들은 사물이고 비닐에 싸인 상태고 어떤 가능성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비닐봉투 안에 든 것들이 대머리 사내와 함께 멀어져간다는 게 불길했다. 은호는 누구라도 이런 장면을 보면 서늘한 기분에 휩싸이는 건지 자신이 특별히 예민한 건지 생각해봤다. 오늘이 이상한 건지 원래 삶 속에 이런 장면이 늘 섞여 있는 건지도 의문이었다.

● 171쪽, <변해가네>
"엄마는 어떻게 애를 둘이나 낳았어? 이렇게 힘든데."
나 역시 엄마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하던 때가 있었다. 애 셋을 데리고 혼자 어떻게 살았을까. 이제 엄마는 지난 일의 고단함을 다 잊었을까. 아니면 현재가 희미해지니 과거의 장면들이 더 또렷이 떠오를까.
환갑쯤 되고 보니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그저 그때 힘들었지, 라는 전체적인 인상만 남아 있을 뿐 세세한 내용은 흐릿해졌다. 이 일과 저 일의 경중, 아픔과 후회가 뒤섞여 구별이 어려워졌고 몇개의 장면, 몇마디의 말, 표정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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썅년의 미학 썅년의 미학
민서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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썅년이 될까봐 속으로 삼키고 삼켰던 말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 책으로 세련되고 통쾌란 한방을 날릴 수 있는 여자가 되길 기대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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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은 어떻게 아픔을 기억하는가 -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세월호 추모관까지
김명식 지음 / 뜨인돌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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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공간에 스며든다. 어떠한 과학적 이유를 댈 것 없이, 기억은 선연히 공간 속에 남거나, 공간을 통해 기억을 추억하는 사람들에 의해 특정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특히 아픈 역사가 서려 있는 건축물이나 문화재를 방문하고 직접 발로 걸을 땐 온몸으로 기억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분명 기온은 적당한데 소름이 돋는 것 같고, 반대로 울컥해 열이 올라올 때도 있다. 건축은 소중한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 우리 사회에 작용하고 있을까.

 

 건축은 잘 모르지만 제목에 쓰여 있는 ‘건축’이라는 단어보다 ‘아픔’이라는 단어에 조금 무게를 실어 미리 겁먹지 않고 읽어보기로 했다. 건축 전공자가 아닌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만큼 쉽고 세심하게 건축을 가르쳐주려는 저자의 노력이 초반부터 돋보인다. 건축가로 일하고 있는 저자는 공간, 건물과 건축물의 차이, 예술과의 관련성에 관하여 짚고 넘어간다. “건축은 건축물의 내부성과 도시의 공간성을 동시에 드러내는 이중성을 지닌 형태를 만들어 사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공적인 영역에서도 작동하는 삶의 장치를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3쪽).” 건축은 예술성과 미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내부에서 공간을 활용하는 사람과, 외부에서 비치는 모습을 동시에 고려한다. 때로는 도시의 상징물이 될 수도 있다.

 

 우리에게 고통의 기억을 환기시키는 건축물을 다양한 측면에서 분석한다. 이러한 주제에서 거의 빠질 수 없는 공간은 군사정권 대표 건축가로 이름을 널리 알렸던 김수근의 ‘남영동 대공분실’이다. 1980년대 후반, 그때 그 시절을 영상으로 재현한 매체들을 볼 때 가장 잔인하게 생각했던 내용들이 담겨 있다. 고문을 받는 자가 뛰어내릴 수 없게 완전히 축소한 창문, 몇 층이나 올라가는지 알 수 없게 하는 계단참이 없는 나선형 계단, 소리를 흡수함과 동시에 벽면 너머로 전달되게 하는 타공판으로 만든 벽…… 그리고 어느 하나 치밀하게 계산되지 않은 것이 없는 ‘의도에 걸맞은’ 완벽한 건축 형태. 이런 무시무시한 공간을 만든 건축가의 또 다른 건축물인 ‘경동교회’를 걷는 저자는 선과 악이 혼재하는 건축가의 아이러니한 행보에 관해 생각한다.

 

그리고 뒤이어 그는 평화의 소녀상 옆을 걷는다. 평화의 소녀상이야말로 “타자의 비극이 기록이 되고 역사가 되어 만들어진 가장 명료하고 시각적인 조형물 (97쪽).” 이라고 생각하는 그는 외진 곳에 숨어 있듯 지어져 있는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을 방문한다. 소녀상보다 대사관을 더 보호하는 듯 보이는 국가권력과,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박물관의 위치와 기능에 관해 의아함을 내비친다. 저자의 세심한 관찰력은 다음 공간에서도 이어진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복원된 여옥사가 국내 유일의 여성 독립기념관으로 개관된 것을 보며, 우리가 어떻게 아픔의 기억을 다루고 응시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책의 마지막을 장식한 세월호 추모관도 마찬가지다.

 

“도열해 있는 지상의 묘비를 보면서 일종의 부러움이 생깁니다. 가장 숨기고 싶은 치부, 들키고 싶지 않은 과거, 인류 역사에 있어 이보다 더 잔인한 적이 없었던 독일의 역사를 수도 베를린 한가운데에 ‘명료한 시각적 상징’으로 현실화시키고, 가해자인 자신을 반성하고 피해자에게 사죄하고 그들을 위로하며, 전 세계에 도덕적, 사회적, 정치적 의무를 다짐하는 명쾌한 이 선언이 어찌 부럽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209쪽, 유럽의 학살된 유대인을 위한 기념비 - 독일 베를린)

 

역사의 아픔을 다양한 형태와 상징으로 재현한 건축물들을 꼼꼼하게 설명하여 전해주는 글 뒤편에는 실제로 저자가 강의를 통해 시민들과 토론하고 의문점을 나눈 내용들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책 자체가 일방적이지 않고, 함께 고민하고 공감하고 이해하는 여정으로 느껴졌던 것은. 고통의 기억을 명료하고 효과적으로 재현하고, 그곳을 걸으며 공감하고

 

 

● 94쪽,
이 소녀상보다 더 강력한 상징과 의미 전달자는 없을 것입니다. 예술의 형태로 등장하는 비극과 고통의 구체적인 형상 앞에서, 돌아오지 못한 소녀의 빈자리에 누구든 앉아 함께 하자는 소녀상의 소리 없는 외침을 우리는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행은 힘겨운 투쟁과도 같습니다. 비정상이 종종 정상으로 여겨지는 한국에서는 이곳의 풍경 또한 그리 놀랄 만한 것이 아님을 직접 방문해보면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 119쪽,
발 아래 밟고 있는 얼굴들이 내는 소리는 은유적이지 않고 직설적입니다. 대번에 의미를 알아차리게 되니까요. 한 발자국 옮길 때마다 들리는 울음소리는 벽을 타고 솟구쳐 끔찍한 비명으로 바뀝니다. 함께 걷는 이가 있다면 소리가 겹치면서 더욱 증폭되어 절규와 아비규환의 공간을 경험하게 됩니다. 바닥에 깔려 절규하는 얼굴은 어느덧 기차나 수용소 혹은 가스실에서 죽어간 유대인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이 세상은 악마와 같은 사람들 때문에 살기에 위험한 곳이 아니라, 그것에 맞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 대문에 위험한 곳이라고 했던 했던 아인슈타인의 말이 귓전에 쟁쟁하게 들리는 듯합니다. 처음에는 이웃이 가고 다음에는 친구가 가고 이윽고 내 가족의 차례가 찾아오는 순간,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위로하기 위해선 우리 모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 226쪽,
고통을 기억하려는 것에서 출발하는 기억의 형태화는 사랑하는 존재의 상실, 그 새로운 부재에 대한 아픔을 딛고 만들어진 추모 공간 혹은 기념비입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존재에 대한 찬양이고 기억입니다. 예술의 한 분야로 형태화된 고통의 공간을 통하여 아름다움의 근원을 헤아려보려는 것은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삶, 그리고 각자의 삶 속에서 구체적인 삶의 방식을 찾기 위한 게 아닐까요? 그렇지 않으면 예술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 249쪽,
옆 동료는 세월호 이야기가 나오자 "지겹다, 그만하자. 그만하면 많이 했다"라며 불편한 마음을 드러냅니다. 그는 아이를 사교육 시장에 내몰지 않겠다는 결심을 굳게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고, 직원들에게 비타민을 챙겨주며 "약 드실 시간입니다"라고 농담을 건네 웃게 해주는 사람입니다. 세월호를 향한 그의 태도는, ‘악의 평범함’ 같은 거창한 말을 굳이 끌어오지 않더라도, 조금만 방심하여 생각의 시간을 늦추면 내게도 당도할 일상의 모습일지 모릅니다. 저라는 인간도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붙여진 경비원 감축 표결에 대한 안내문을 읽으며 왜 머릿속에 계산기를 눌러보지 않았겠어요. 방금 현관에서 그분과 웃으며 인사를 나누었으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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