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독약 창비세계문학 28
엔도 슈사쿠 지음, 박유미 옮김 / 창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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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느 때와 같이 책을 고르다가, <깊은 강>이라는 작품을 발견하였다(물론 발견만 하고 아직 읽지는 못했다). 단조롭지만 큰 물결이 이는 듯한 책이었다. 작가의 이름은 '엔도 슈사쿠'라고 쓰여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가톨릭 신앙에 영향을 받아 평생 동안 신과 구원, 선과 악에 대해 몰두했다는 일본의 대표 작가였다. 그리고 <깊은 강>은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문학적 집합체와도 같은 작품이었다. 흥미가 일었으나, 작가를 제대로 알기 위해선 첫 발돋움을 할 작품이 필요했다. <바다와 독약>은 이러한 점에서 가장 적합한 작품이었다.

 

 소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실제 일본에서 행해진 '큐슈 대학 생체해부 사건'을 소재로 한다. 살아있는 미군 포로를 끔찍한 실험으로 '살해'한 실화를 토대로 하여, 동네 의원 '스구로'의 미묘한 행동과 모습을 지켜보는 화자의 서술, 그리고 과거 생체해부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액자식 구성으로 그렸다. 의문을 제기하는 도입부는 다소 평범하나, 본격적으로 작가의 문제를 드러내는 2장부터가 백미라 할 수 있다. 전쟁통 속에서도 권력싸움이 한창인 대학 병원 안에서 생체 해부 사건에 가담하게 되었던 세 사람의 입장이 차례대로 전개된다.

 

 작가는 생체 실험에 대해 자세히 서술하기 보다는, 세 사람의 내면을 묘사함으로써 '죄의식'의 문제를 끈질기게 묻는 방법을 택한다. 실험 참가를 거절할 용기가 없어 평생 양심에 시달린 의사 '스구로'와, 비슷한 이유로 권력 싸움에 휘말린 간호사 '우에다'보다 더 흥미로운 인간은 '토다'라는 인물이다. 아마도 작가가 가장 공들여 만들었을, 죄의식이 부재한 인간. 그는 수기에서 이렇게 쓴다.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지금 가책을 느껴 이러한 경험을 쓰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예전의 작문 시간 때의 일이나 나비를 훔치고 그 벌을 야마구찌에게 덮어 씌운 일, 그리고 사촌과 간통을 저리는 일이나 미쯔와의 사이에서 벌어진 일을 추악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추악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 무섭다는 건 좀 과장된 이야기이고 이상하다는 표현이 더 알맞을 것이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여러분도 역시 나처럼 한꺼풀을 벗기면 타인의 죽음이나 고통에 대해 무감각한가. 약간의 나쁜 짓이라면 사회로부터 벌받지 않는 이상 별다른 가책이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으면서 오늘까지 살아왔는가. 그리고 어느날 그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진 적이 있는가." (136쪽)

 

  읽으면 읽을수록 소름이 끼치는듯한, 어쩌면 사회적 처벌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일본인 (또는 가해자들)의 모습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 글이다. '모두가 죽어나가는 세상'이라고 체념하기엔 너무 큰 문제 상황 속에서 양심과 죄의식을 잃어버리고 무감각해져버린 인간은, 독약을 한껏 머금은 바다라고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끝으로, 나는 이 책을 최대한 이성적으로 읽어보려 노력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큐우슈우 대학 생체해부 사건'뿐만 아니라 '731부대'가 자행한 끔찍한 마루타 실험에 대하여 알고 있었기에, 그 실험의 대상자에 한국인이 포함되어 있었기에, 전범국가로서 일본이 벌인 참혹한 일들을 열거하기엔 이 공간으로는 부족하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부끄러운 치부를 가감없이 드러내며 인간의 존엄을 탐구했던 작가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46쪽,
‘모두 죽어나가는 세상 아이가. 병원에서 죽지 않더라도 매일밤 공습으로 죽어가는 거야.‘ 스구로는 토다가 오늘 오후 화난 듯이 중얼거린 말을 떠올렸다. 회진이 끝난 뒤 공동 입원실에서는 한바탕 헛기침이 울려퍼지고 환자들이 박쥐처럼 침대를 기어서 오르내리고 있었다. 스구로는 만일 인간의 죽음에 냄새가 있다면 그건 분명 이 어두운 방의 악취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83쪽,
아무래도 좋다. 내가 해부에 참여하기로 한 것은 그 파르스름한 숯불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아니면 토다의 담배 냄새 때문이었는지도. 이것이든 저것이든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생각하지 말자. 잠이나 자자. 생각해본들 별도리도 없다. 나 혼자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세상인 것이다.

130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나는 자신을 양심이 마비된 남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내게 양심의 가책이란 지금까지 쓴 대로 타인의 눈이나 사회의 벌에 대한 공포일 뿐이었다. 물론 자신이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누구라도 한꺼풀만 벗기면 나와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연의 결과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해 벌을 받거나 사회의 비난을 받은 일은 없었다.


183쪽,
‘그럴까? 우린 영원히 지금과 마찬가지일까?‘
스구로는 혼자 옥상에 남아 어둠속에서 하얗게 빛나고 있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거기에서 무언가를 찾고자 했다.
‘양떼구름 지날 때‘ ‘양떼구름 지날 때‘
그는 애써 그 시를 읊으려 했다.
‘뭉게구름 피어오를 때마다‘ ‘뭉게구름 피어오를 때마다‘
하지만 스구로는 소리를 낼 수 없었다. 입안이 메말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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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자를 위한 변명 쏜살 문고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이미애 옮김 / 민음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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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지킬박사와 하이드』와 『보물섬』 이라는 소설로 잘 알려져 있는 소설가 '스티븐슨'에겐 작가의 행복한 명성만 있지는 않았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하던 그는 마흔넷으로 요절하기까지 늘 병을 앓고 있었다. 그러나 위기 속에서도 끈질기게 작품을 골몰하고 집필하였다. 활동적인 삶을 갈망하던 그는 많은 곳을 여행하고 뜨거운 삶을 이어나갔다. 그래서였을까. 국내 첫 번역된 그의 에세이집에선 행복과 죽음에 관한 언급이 여럿 등장하는데, 그의 삶과 연결해 생각하면 책에 등장하는 행복과 죽음의 상반된 이미지의 연결고리를 파악할 수 있다.

 

'젊은이들을 위하여 Virginibus Puerisque'라는 책의 원제도, 인생의 '후배'들을 염려하고 행복의 관해 전하는 작가의 말이 왠지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일 것 같다. 책에는 표제작인 '게으른 자를 위한 변명'을 비롯하여, 다양한 에세이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 진정한 행복을 찾길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담겼다. 행복을 위한 삶과 죽음, 청춘과 노년, 사랑과 결혼, 여행의 맛, 아이와 함께 하는 생활 등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가 포함된다. 철학적 사유와 고뇌가 담긴 글은 그 길이가 아무리 짧다고 하더라도 읽기 쉽지는 않으나, 다양한 은유적 표현과 강렬하고 매력적인 스티븐슨의 문체는 소중한 글들을 깊이 음미하게 한다.

 

그가 전하는 행복론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게으름'인데, (예상했을지 모르나) 이는 아무것도 안 하며 빈둥대는 개념이 아니다. 지나치게 근면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지식보다는 지혜를, 소유보단 진정 원하는 것을, 극도의 분주함보다는 여유로움을, 지배계층이 만들어낸 시스템을 벗어남으로써 행복을 추구하라는 이야기다.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젊은이들에게 그 또한 쉬운 일은 아니나 젊은이의 패기와 용기가 맞붙어 발휘되는 것을 상상하면 그리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이 책을 보고 "그때 용기가 더 있었더라면"이라는 후회 섞인 말로 잠깐 지난 과거를 회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금 늦었다고 아쉬움에만 잠겨 있는 것은 작가의 바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지혜와 지성을 찾고, 고정된 일상과 사회에서 벗어나 게으른 행복을 찾는 것. 이 작은 책 속에 꼭꼭 담긴 작가의 마음이 내게 전해준 용기에 고마움을 전한다.

 

"우리는 바닥에 물이 새는 배를 타고 거칠고 위험한 바다를 항해한다. 해군의 구슬픈 옛 노래에서 한 구절을 따오면, 우리는 인어의 노래를 들었고 마른 땅을 결코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안다. 늙거나 젊거나 우리 모두 마지막 유람중이다. 담배 한 대를 가진 선원이 있다면 출발하기 전에 부디 한 모금씩 돌려 피우기로 하자!" (50쪽, 심술궂은 노년과 청춘)

 

 

 

 

23쪽, 엘도라도
삶이 행복할 때 우리는 하나가 다른 하나로 끝없이 이어지는 상승 음계에서 살아간다. 앞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늘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우리는 작은 행성에서 보잘것없는 일에 빠져 살아가고 짧은 기간 너머로 영속하지 못하더라도, 별처럼 도달할 수 없는 희망을 품고 목숨이 다할 때까지 희망의 시간을 늘려 가게 되어 있다. 진정한 행복은 어떻게 시작하는가의 문제이지 어떻게 끝내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가의 문제이지 무엇을 소유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78쪽, 사랑과 결혼의 미로
"아, 잠시만 죽어 있을 수 있다면!" 이라는 톰 소여의 열망을 누구도 잊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그보다는 "해적질을 계속하는 한은 자신의 행동이 절도죄라는 오명을 다시 쓰지 않으리라."라는 두 해적의 결심을 기억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소년 시절의 생각을 알아볼 수 있다. 그런데 소년기는 끝났고 (글쎄, 언제 끝났을까?), 스무 살에 끝나지는 않은 것 같다. 어쩌면 스물다섯에도 완전히 끝나지 않았고, 서른에도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아직도 그 목가적 시기의 한가운데 있을지 모른다."

145쪽, 도보 여행
우리는 너무 바쁘고, 실현해야 할 먼 장래의 계획이 너무 많고, 상상의 성에 착수하여 자갈땅 위에 견고하고 살 만한 저택을 세워야 하므로, 생각의 땅과 허영의 언덕으로 유람을 떠날 시간이 없다. 깍지를 끼고 밤새 난로 앞에 앉아 있으면 실로 시간이 달라진다. 그 시간을 보내며 아무 불만 없이 생각에 잠겨 행복할 수 있음을 깨달을 때 우리의 세계가 달라진다

195쪽, 가스등을 위한 간청
이 별이 그것의 원형만큼 안정적이지 않고 그만큼 밝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또한 그 광채는 최고의 밀랍 양초만큼 우아하지 않다. 그러나 가스등은 더 가까이 있으므로 목성보다 실용적이고 유용하다. 또한 가스등이 창공에서 필요에 따라 하나씩 켜지는 별처럼 고유하게 자발적으로 빛을 발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가스등을 켜는 점등원은 매일 저녁 부리나케 움직였고 즐거운 마음으로 달렸다. 이렇게 천체의 정확성을 흉내 내려는 사람의 모습은 근사한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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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향고양이의 눈물을 마시다 - 나의 선택이 세계 동물에게 미치는 영향 동물권리선언 시리즈 7
이형주 지음 / 책공장더불어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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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위안하기엔 인간은 너무 먼 길을 와버린 것 같다. 지구라는 행성을 입맛대로 바꿔온 인간은 다른 동물들의 삶에 너무도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다. 식생활은 물론, 과도한 개발로 인한 서식지 파괴, 로드킬 등 수없이 많은 문제들이 동물을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와 특히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인간의 쾌락을 위해 희생되는 동물들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목적은 다양하다. 대량 생산, 놀이, 체험, 전통문화, 패션, 건강, 실험... 다양한 이유들에 따라 희생되는 동물의 종과 수도 다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일부 판매자나 기업은 소비하는 사람들을 만족시키고 더 편리하게 동물들을 '다루기 위해' 온갖 방법을 고안한다. 그 과정에서 번번이 학대가 일어난다. 그러나 단지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있는 기업만의 문제일까? 가장 먼저는 '소비자'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자주 외면하거나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사향고양이의 눈물을 마시다>는 이런 소비자들의 작은 선택이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 알려주는 책이다.

 

쇼 동물이나 모피 동물, 케이지 사육의 문제들은 미디어를 통하여 여러 번 접한 적이 있으나, 이렇게 다양한 이유로 고통받는 동물들이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강한 맹수를 특정 공간에 가둬서 사냥하는 '통조림 사냥',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소를 보고 열광하는 스포츠 '투우', 야생에서 포획되는 순간 폐사 가능성이 6배 높아진다는 '수족관 돌고래', 죽을 때까지 배에 연결된 호스로 쓸개즙을 채취당하는 '사육 곰', 지느러미가 잘려 바다에 그냥 버려지는 '상어'등 인간의 과도한 욕심으로 인해 희생당하는 동물들이 허다했다.

 

저자는 이렇듯 큰 범위로 퍼져있는 동물학대산업을 막기 위하여 한 명 한 명의 도움이 필요하다 말한다. 지나친 스트레스로 정형행동을 보이는 동물을 아이에게 보여주기보다는 '진실'을 들려주며, 여행을 할 땐 동물학대산업이 포함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당장 모든 것을 끊을 수 없지만 소비를 할 때 인간을 위해 희생하는 동물들을 한 번쯤 생각해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덧붙여 저자는 동물 복지에 힘쓰고 있는 '파리 동물원'의 사례를 소개하기도 한다. 동물의 습성에 따라 다양하게 꾸려진 서식지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관람객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동물을 보려면 하루 종일 기다려야 하는 쇠창살 없는 동물원의 모습은 인간에 의해 서식지를 파괴당한 동물들을 위한 진정한 '보호소' 혹은 '동물원'이 아닐까.

 

사실, 이 책에 대해 읽고 글을 쓰기 전 많이 망설였다. 겨울옷을 마련할 때마다 모피동물의 털 (앙고라, 라쿤, 오리털 등)이 포함되어 있는지를 확인하고 동물 실험을 하지 않은 제품을 찾아보지만, 여전히 고기를 먹고 있는 나는 과연 떳떳한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한 블로그 (링크) 에서 이런 '모 아니면 도'와 같은 생각이 오히려 동물 보호와 관련된 발전을 막는 매개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따지면 ㅇㅇ가 더 불쌍해", "그럼 넌 채소만 먹어"와 같은 말들은 실천의지를 없애버리는 사고방식이라고 한다. 완벽한 실천은 무의미하다는 사고방식은 더 많은 무분별한 동물 소비와 동물 학대를 부르고 발전 가능성을 멈춰버리게 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오늘 단 한 가지의 실천만이라도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의 일상은 선택의 연속이다. 무엇을 먹고 쓰고 구매할 것인지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런데 내 선택으로 지구 저편에 있는 동물에게 고통이 주는 산업이 유지될 수도 있다. 그러니 이제는 선택할 때 더 싼 가격이나 지금 당장의 편의가 아니라 다른 생명을 위한 선택을 하는 건 어떨까. 잠깐의 시간을 들이거나 조그만 불편을 감수한 내 선택이 수많은 생명을 살리는 결과를 가져온다니 어깨가 무거우면서도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181쪽)

 

 

 

56쪽,
매일 물웅덩이를 찾아 물을 먹는 코뿔소의 습성 때문에 코뿔소를 찾아내 죽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경험 있는 밀렵꾼이라면 물웅덩이에서 기다렸다가 물을 먹는 코뿔소에 다가가 쓰러뜨리고 뿔을 제거하는 데 7분이면 충분하다. 일단 코뿔소의 무릎을 총으로 쏴 쓰러뜨린 후 아킬레스건과 척추를 칼로 잘라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그러고는 도끼로 코의 뿌리부터 도려낸다. 코뿔소는 즉사하지 않은 상태에서 서서히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그러다 보니 종종 죽은 엄마나 아빠 코뿔소 곁을 떠나지 못하고 마음 아프게 울부짖는 아기 코뿔소가 함께 발견되기도 한다.



86쪽,
우리나라의 경우 동물이 관람객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아예 없는 사육장도 많다. 심지어 안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게 사방을 투명한 유리로 만든 사육장도 있다. 그나마 관람객에게 전시되는 외부 방사장과 내실이 분리되어 있는 동물원도 동물이 숨을 수 있는 공간으로 통하는 문을 잠가 동물들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없도록 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106쪽,
잔인하게 포획된 어린 코끼리를 사람의 명령에 따르도록 길들이는 작업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비인도적이다. 코끼리가 사람을 두려워하도록 길들이기 위해 훈련사들은 새끼 코끼리를 자신의 몸보다도 작은 나무 상자에 구겨 넣어서 꼬박 일주일을 쇠꼬챙이로 찌르고, 매질을 하며 굶기고, 잠도 재우지 않는다. 이를 파잔phajaan 이라고 부른다.

129쪽,
어두침침한 창고의 문을 열면 곰의 크기보다 그다지 크지 않은 케이지가 몇 줄로 늘어서 있다. 몸을 굴리기도 힘들 정도로 협소한 케이지 안에는 가슴에 흰 초승달 문양이 새겨진 곰이 갇혀 있다. 산딸기, 머루 등 과일과 도토리를 좋아해 하루 종일 산을 누비며 먹이를 찾아 먹고, 높은 나무에 올라가 휴식을 취하는 습성이 있지만, 정작 이곳의 곰들은 케이지 안에서 태어나서 한 번도 쇠창살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다. 배에 뚫린 구멍에서는 사시사철 고름이 흘러나오지만 사람이 다가가면 자연스럽게 배를 철창에 갖다 댄다.

150쪽,
진정한 교육은 진실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벨루가의 귀여운 미소 뒤에 숨겨진 슬픈 진실을 숨기고 겉모습만 보여 주는 것은 교육이 아니라 거짓일 뿐이다. 남은 벨라와 벨라가 담긴 푸른 수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것보다 한때 그곳에 살았지만 어린 나이에 세상을 뜰 수밖에 없었던 벨로의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것이 훨씬 더 소중하고 값진 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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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F/B1 일층, 지하 일층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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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물컹물컹한 자의식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이 나라 문학판에 작가 김중혁이 버티고 있음은 하나의 축복이다" 책 뒤편에 적힌 문학평론가(김윤식)의 찬사는 다소 불편한 감은 있지만, 왠지 마구 부정할 수는 없는 말이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재미만 추구하면 시시하고, 너무 무겁기만 하면 부담스럽다. 그 중간을 타기가 무척 어려울 것 같은데 작가 김중혁의 소설들은 이 중간쯤을 교묘하고 재치 있게 머무르는 듯하다.

 

 직접 발을 딛고, 냄새를 맡고, 벽을 만져봐야만 알 수 있는 도시의 느낌이 있다. 이쪽 동네는 저쪽 동네와 다르고, 각 동네에 사는 사람의 성향들도 다르다. 오래전 다른 곳으로 이사를 와서 십 년 동안 거닐지 못했던 나의 옛날 동네는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고, 못 보던 간판들이 생겼다. 벽에 풀이 자라고, 도로도 변했다. 어딘지 모르게 세련되고 발전된 것 같다는 느낌과 아직도 예전 그대로의 공기가 남아 있다는 느낌이 혼재했다. 아마도 그 공기 속에 내 어린 시절의 삶이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도시의 골목 곳곳과, 그곳에 사는 제각기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김중혁의 소설들은 내가 거쳐간 도시의 풍경과 그 속의 이야기들을 떠올리게 한다. 어릴 적 동네 놀이터에 얽힌 믿거나 말거나 전설을 친구들과 속삭이던 모습을 추억하게 하는 ('냇가로 나와'), 도시의 변두리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상상하거나 ('바질'), 미래의 좌절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과 어떤 부정적인 상황 ('유리의 도시')을 그리기도 한다. 독특한 상상력 속에서 작가의 섬세한 시선이 돋보이는 작품도 있다. <1F/B1>은 수많은 건물들의 '사이'에 숨어 도시의 흐름을 관찰하고 돌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크라샤>는 마술이라는 소재를 통해 소멸과 기억에 대하여 이야기를 펼친다.

 

"내가 만들고 싶은 도시가 있었다. 모든 골목과 골목이 이어져있고, 미로와 대로의 구분이 모호하고, 골목을 돌아설 때마다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한 또 다른 풍경이 이어지며, 자신이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기도 쉽지 않을 정도로 무수히 많은 갈래길이 존재하는 도시를 만들고 싶었다. 도시의 외곽에는 바다가 있어,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다가 문득 코끝으로 비린내가 훅 끼치는 순간 파도가 자신에게 몰려드는 풍경을 사람들에게 선사하고 싶었다. (32쪽, C1+y = :[8]:)

 

 수록된 일곱 편의 소설들이 모두 재미있었지만, 특별히 좋았던 단편은 책의 맨 앞에 위치해 '이런 소설을 보여줄게'라고 말하는 듯한 <C1+y = :[8]:>라는 작품이었다.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아이들의 거칠고 원초적인 낙서를 따라가다 보면, 도시 속의 작은 도시 같은 보드빈터가 등장한다. 왁자지껄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바퀴자국이 섞인 도시 속 가장 후미지고 눈에 띄지 않는 곳, 숨겨진 골목길을 따라 새로운 장소를 발견하는 경험은 정글 속 못지않게 흥미롭다. 우리가 거닐지 못한 길, 가보지 못한 곳, 도시를 형성하는 작은 하나하나, 도시 속의 '사이'를 쫓는 작가의 섬세한 시선이 좋아서 그의 작품을 더 읽어보려 한다.

 

 

96쪽, 바질
좁은 골목을 걸어 경사가 작은 언덕을 올라가면 사방으로 또다른 골목길이 그물처럼 얽혀 있는 곳이었다. 박상훈은 하늘 위에서 골목들을 꼭 한 번 내려다보고 싶었다. 그물은 얼마나 넓은지, 얼마나 촘촘한지 보고 싶었다. 손가락으로 골목길을 따라 선을 그어보고 싶었다.

133쪽,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
모든 곡선은 직선이야. 앞으로 나가기만 하면 돼.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안개가 더욱 짙어져 있었다.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시간은 충분했다. 오늘밤 안으로만, 아침이 되기 전까지만 모든 작업을 끝내면 됐다.

179쪽, 1F/B1
일층과 이층 사이, 이층과 삼층 사이, 삼층과 사층 사이… … 저는 그 표지판들을 볼 때마다 우리의 처지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특히 숫자와 숫자 사이에 있는 슬래시 기호(/)를 볼 때마다 우리의 처지가 딱 저렇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층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우리는 언제나 끼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곳도 저곳도 아닌, 그저 사이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273쪽, 크라샤
그러나 나는 분명히 안다. 소멸된 것들은 되살아날 수 없다. 그리고 찢어진 것들은 절대 다시 붙지 않는다. 나는 삶과 마술을 때때로 바꾸고 싶어진다. 화장지가 붙는 대신 어머니가 되살아나는 장면을, 스카프가 비둘기로 변하는 대신 돈으로 변하는 장면을, 꿈꾼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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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그래피 매거진 9 김범수 - 김범수 편 - 만들다
김범수.스리체어스 편집부 지음 / 스리체어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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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이나 기술 따위를 들여 목적하는 사물을 이룬다'라는 '만들다'의 사전적 개념은 이미 확장된지 오래다. 디지털 시대로 들어선 지금은 하루에도 수없이 새롭게 '만들어진' 것들을 접한다. 스마트폰을 포함한 디지털 기기 등 사물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웹사이트와 어플리케이션 등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런데 정보의 양만큼이나 무한한 '새로운 것들' 사이에서, 시대를 앞선 것들을 구상하고 개발하는 사람이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 책의 표지에 처음에 '만들다'와 '김범수'라는 이름이 매치된 것을 보고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았는데, 책 초반부터 등장하는 카카오와 카카오 프렌즈 사진들을 보고 그제야 알았다. 하루 종일, 어쩌면 모든 일상을 장악하고 있는 것들 중 하나가 카카오 (그 이외의 것들 : 내 휴대폰 케이스..)인데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바이오그래피 매거진 9호의 주인공은 기업가 '김범수'이다. 8.5호부터 달라진 판형과 형식으로 인물에 대해 상세하게 전달한다. 김범수의 삶과 강연에서 했던 이야기, 인터뷰, 미래와 현재에 관한 세계적인 인물의 대담과 인터뷰 등이 수록되어 있었다.

 

 

 

 

 

현 카카오 의장인 김범수가 한 일들을 나열하면, 감탄이 쏟아진다. PC 통신 '유니텔' 개발에 참여하였으며 국내 최초의 게임 포털 '한게임'을 설립하기도 했다. 이후 네이버컴 등과 합병하여 NHN이 되었고, 온전히 '만드는 사람'이고 싶었던 그가 회사를 나와 만든 것이 바로 카카오톡이었다. 당시 스마트폰 메신저가 하나둘 등장할 때였는데 카카오톡은 빠른 시장 선점을 목표로 큰 성공을 이루었다. '그의 창업 규모를 상장 기업에 국한하면 용례가 거의 없는(146쪽)' 수준이라고 한다.

 

 김범수 의장이 한국의 대표 벤처 창업가가 되기까지의 일들을 책으로 읽으면서, 그의 성공 비결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세상에 필요한 것을 정확하게 캐치해내는 능력이 일단 우선적이었지만, 매번 위기와 고비를 겪을 때마다, 그리고 새로운 사업을 생각할 때마다 큰 역할을 한 것은 바로 '결단력'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결단력'은 어쩌면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그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사업 성공 확률이 그렇게 높지 않기 때문에 일단 실패를 염두에 놓고 시작해야 돼요. 비가역적인지 아닌지를 곰곰이 따져야 해요. 한번 했다가 다시는 재기할 수 없다면 정말 신중히 결정해야 해요. 한번 했다가 이건 아닌 것 같아서 빨리 돌아오면 그건 손해가 아니라 큰 경험이죠. 그런 의미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말이에요." (217쪽)

 

 

 

 

 "게임이 바뀌었다" 누구도 그에게 '게임이 바뀌었다'고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 역시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 청년이 맞은 현실과 비슷합니다. 열심히 공부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발을 내딛는 순간 게임의 룰이 바뀐 것입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자신을 찾지 않는 현실을 발견합니다. (…) '직'이 아닌 '업'에 집중하십시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나아가 잘할 수 있는 업을 찾아야 합니다." (스타트업 캠퍼스 총장 취임사를 바탕으로 발췌, 각색 80-90쪽)

 

 미국 실리콘 밸리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보고 감명을 받은 그는 현재 후배 인재 양성에 힘쓰는 멘토로써 자리하고 있으며, 또다시 새로운 '만들기'를 구상 중이라고 한다. 기업가로서 성공을 하였지만 10년 뒤 코딩을 배워 무엇인가 만들고 싶다는 그에게는 '개발자'라는 이름이 더 친숙한 것 같다. 사회적 기업과 '행복과 선택'에 대해서 말하는 그는 무척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바이오그래피 매거진 9호의 인물로 김범수 의장을 선택한 것은 아주 탁월했다고 생각한다. 4차 산업이 대두되는 이 시대, AI에 대한 기대와 우려까지 담은 이 책은 무척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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