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쇼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6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서은혜 옮김 / 민음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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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문학과 그리 친하지는 않지만, 주워들은 것은 많아 '아쿠타가와'라는 이름은 낯설지 않다. 일본 순수 문학을 창작하는 신인들에게 발판을 마련해주는 '아쿠타가와 상'이 바로 작가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비참한 현실과 신경쇠약으로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작가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작품 해설을 보면 그가 죽기 전 남겼던 마지막 시구 이야기가 있는데, "자조, 콧물만 코끝에 살아남았네" (304쪽)라는 대목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지막 이 시구와 『라쇼몬』이라는 책의 전체적인 느낌이 묘하게 어우러지는 것 같았다.

 

 촌철살인(寸鐵殺人)이란 말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수록된 열네 편의 소설들은 짧지만 정곡을 찌르고, 인간사의 비틀린 지점을 정확히 꿰뚫는다. 인간의 본성을 풍자하거나 ('코', '마죽'), 어떤 한 지점에서 몰려오는 불안 ('다네코의 우울', '꿈') 등을 그린다. 선과 악의 경계를 파헤치고 ('라쇼몬), 인생의 중요한 무언가를 제시하는 우화 ('거미줄', '두자춘')를 그리기도 한다. 가히 천재적이라 할만한 점은, 여섯 페이지 남짓한 짧은 단편에서부터 비교적 분량이 많은 단편까지 어느 하나 비슷한 이야기는 없으면서도, 무거운 주제를 희극과 비극,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특유의 분위기를 형성해 다룬다는 것이다. (이 분위기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나와는 안 맞는 것인데도 중독될 지경이었다.)

 

이는 몇몇 작품에서 절정에 달하면서 절대 잊히지 않을 인상을 남겨주었다. 예술적 욕망과 충돌한 가장 비극적이고 참혹한 장면을 다룬 <지옥변>은 '예술의 이상향'을 꿈꾸었던 그의 실제 마음이 담겨 있었다. 또한 일본의 상상 속 동물들의 세상을 통해 염세적인 시선을 드러낸 <갓파>에는 그가 가장 궁지에 몰렸을 때에 집필한 것으로, 모든 것을 털어놓은 듯한 자조적인 모습도 엿볼 수 있었다. 일본 고전 영화의 걸작으로 꼽히는 「라쇼몬」 (구로사와 아키라, 1950)의 원작이 되기도 한 <덤불 속>이라는 작품은 새로운 형식과 '중유(中有:이승과 저승 사이, 49재)'를 떠도는 인간의 모습을 새로운 형식으로 다룬 것인데, 생동감 있는 영화로 보고 싶은 마음이 진해지는 작품이다.

 

"아뇨, 너무 우울해서 거꾸로 세상을 바라본 거예요. 그래봤자 마찬가지로군요." (259쪽, 갓파)
현실과 가장 가까운듯하면서도, 또 멀기도 한듯한 세계를 그려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인간의 내면과 부조리한 세계를 다뤄낸 (그리고 재밌기까지 한) 작품들 속에서 그 이름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25쪽, 마죽
물론 그는 그것을 누구에게도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아니 그 자신조차 그것이, 자신의 평생에 걸친 일관된 욕망이라고는 뚜렷하게 의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사실 바로 그것 때문에 살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다. 인간은 간혹 충족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욕망을 위해 일생을 바쳐 버리기도 한다. 그것을 어리석다고 비웃는 자는 필경, 인생에 대한 방관자에 불과할 것이다.

48쪽, 라쇼몬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든 하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릴 여유가 없다. 가리고 있다가는 담벼락 아래나 길바닥 위에서 굶어 죽을 뿐이다. 그리고 이 문 위로 실려 와 개처럼 버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뭐든지 가리지만 않는다면…… 하고 하인의 생각은 몇 번이나 똑같은 길을 오가던 끝에 마침내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 ‘않는다면‘이라는 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결국 ‘않는다면‘에 머무를 따름이었다.

89쪽, 엄마
도시코의 목소리에는 지금까지 없었던 격렬한 힘이 담겨 있었다. 사내는 와이셔츠 어깨와 조끼를, 이제는 가득 비치기 시작한 눈부신 햇살로 도금하면서 그 물음에 대해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무언가가 앞을 턱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159쪽, 지옥변
요시히데의 그 얼굴을 저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우마차 쪽으로 달려가려던 그 사내는 불이 타오르는 것과 동시에 발을 멈추고 여전히 손을 내민 채 집어삼킬 듯한 눈초리로 차를 휘감은 화염을 빨려들 것처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온몸에 불빛이 비쳐 주름투성이의 추한 얼굴은 수염 터럭까지 똑똑히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커다랗게 치켜뜬 눈이며, 찡그린 입술 언저리, 혹은 끊임없이 씰룩거리는 뺨 근육 등이 요시히데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오가고 있을 공포와 비통함과 경악을 역력하게 얼굴에 그려놓았습니다. 목이 잘리기 전의 도둑이라도, 아니면 시왕청에 끌려 나간 십억 오악 죄인이라도 그렇게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186쪽, 두자춘
큰 부자가 되면 듣기 좋은 소리를 하다가도 가난해지면 아는 척도 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 비하면 얼마나 고마운 마음입니까? 얼마나 애틋한 결심인가요? 두 장춘은 노인이 타일렀던 것도 잊어버리고 엎어질 듯 그 곁으로 달려가더니 두 손으로 빈사 상태인 말의 목을 끌어안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어머니."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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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깐 설웁다 문학동네 시인선 90
허은실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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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좋아"라는 말이 시집에선 허용될 것만 같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좋다는 말 한마디로 충분하다 (때로는 어떻게 말할지 애매해서 쓰질 못하지만). 그러나 여느 때와 다르게 이렇듯 길게 써내리는 이유는 담고 싶은 문장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라고, 애써 핑계를 대본다.


 예전, 대학교 강의 시간에 여성적 글쓰기에 대해 잠깐 언급이 된 적이 있었다. 대표적인 작가도 이름만 붙여서 이야기되었다. 교양 수업이라서 깊게 들어가지 않았기에 그리 영향력 있게 다가오지 않았던 설명이었다. 이 시를 읽으면서 그때의 기억이 났다. 만약 지금이었다면 허은실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밀도 있는 여성의 말', 여성이 온몸으로 부딪쳐 살아온 생애가 실려있는 시집이다. 어쩌면 여성만이 쓸 수 있는 시집인 것 같기도 한데, 시인이 하고 싶던 말이 아주 꼭꼭 담겼다. 은은하면서도 고요하면서도, 강하게  흘러나오는 언어들이 마음에 쏙 박혀온다.


"소풍이라 말하려 했는데 / 슬픔이 와 있다 (12쪽, 저녁의 호명)"
"익숙하던 것들이 먼저 배반하지 / 그러므로 어느 날 / 밥 냄새를 견딜 수 없게 되는 것 / 너의 멜로디를 참을 수 없게 되는 것 (50쪽, 입덧)"


 이토록 슬픔이 진하게 느껴지는 것도 희한한 일이다. 요즘 부쩍 무던하게 넘기곤 했던 페이지가 느즈막이 넘어간다. 한숨이 쉬어진다. 구름에 손이 닿을 것 같은 언덕에서 붉은빛이 돋았다가 어느새 어둑어둑해지는 석양을 닮았다. 저녁의 붉은 노을. 가슴이 벅차오르는 듯, 가장 행복했던 기억과 어떤 불안한 기억과 장면이 동시에 떠오르는 순간들. '한 생애의 후루룩'이라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인생의 초입에 있는 나는 일상에서 벗어나 이 시집을 읽었을 느낌을 상상하는데도 그게 무엇인지 알 것만 같다.


"후루룩 입천장이 데이는 시절 / 어둑신한 부엌에 서서 달그락거리는 / 한 생애의 / 후루룩, (70쪽, 후루룩 - 최승자 시인에게)"


 '다 자라지도 않았는데 늙어가고 있'는 우리는, 매일 똑같은 장면과 비슷한 소음을 듣는 우리는, 사소하고 익숙한 것들에 다치고 뒹구는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며 견디고 있을까. 구수하게 흘러나오는 추억과 눈물이 핑 도는 어린 시절의 냄새 같은 것들, 그때는 떨쳐내고 싶었던 기억들. 설웁다고 말하며, 최승자를 떠올리는 시인 허은실에게서 깊은 아픔을 보다가, 제목에 붙여진 '잠깐'이라는 말에 안심을 한다. 그래, 우리는 잠깐, 잠깐씩 슬퍼하며 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잠깐, 정도라면 충분히 괜찮다. 어쩌면 이 수식어는 시인이 건네준 찰나의 위로인 것 같기도 하다.


 


20쪽, 바람이 부네, 누가 이름을 부르네
입안 가득 손톱이 차올라 / 뱉어내고 비워지지 않네 / 문을 긁다 빠진 손톱들 / 더러는 얼굴에 붙어 떨어지지 않네
숲은 수런수런 소문을 기르네 / 바람은 뼈마디를 건너 / 몸속에 신전을 짓고 / 바람에선 쇠맛이 나
어찌 오셨는지요 아흐레 아침 / 손금이 아파요 / 누가 여기다 슬픔을 슬어놓고 갔나요 / 내 혀가 말을 꾸미고 있어요

36쪽, 목 없는 나날
타인을 견디는 것과 / 외로움을 견디는 일 / 어떤 것이 더 난해한가
다 자라지도 않았는데 늙어가고 있다 / 그러나 감상은 단지 기후 같은 것
완전히 절망하지도 / 온전히 희망하지도 / 미안하지만 나의 모자여 /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47쪽, 당신의 연안
나는 당산나무 벌어진 가지 속에 / 돌 하나를 몰래 끼워둡니다 / 당신이 나무를 올려다보며 천천히 한 바퀴를 더 돕니다 /공전은 서로의 둘레를 걸어주는 일




58쪽, 이마
타인의 손에 이마를 맡기고 있을 때 / 나는 조금 선량해지는 것 같아 / 너의 양쪽 손으로 이어진 / 이마와 이마의 아득한 뒤편을 / 나는 눈을 감고 걸어가보았다
이마의 크기가 / 손바닥의 크기와 비슷한 이유를 / 알 것 같았다




84쪽, 바라나시
대답이란 날카로운 물음표 / 아가미를 꿰는 낚싯바늘이어서
가닿지 못할 음역을 / 더듬어볼 뿐
슬픔이라는 타관을 떠돌다 우리는 / 미아가 되어 / 어린 염소를 껴안고 / 오 미아미아 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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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 (양장)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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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설은 머릿속에 아몬드처럼 생긴 '아미그달라' 혹은 '편도체'의 크기가 작아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쉽게 말하면 '감정 표현 불능증'을 갖고 있는 소년의 이야기였다. 그에겐 헤쳐나가야 할 것들이 무수히 많았다. 웃어야 할 때 웃지 않았고, 슬퍼해야 할 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어디서든 튀어 보였다. 엄마는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끈질기게 가르쳤다. 주입식 교육이었다. 문제와 모범답안을 준비하고, 가끔씩 응용문제를 내밀었다. 윤재는 입이 닳도록 외우고 익혔지만, 세상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두 눈 뜨고 볼 수 없어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람에게 동정론이 일정도로 팍팍한 세상이었다. 선천적으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윤재만큼이나 공감에 불능한 인간들이 허다했다.

 

 온갖 부정적인 상황으로 둘러싸인 소설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 따뜻하게 빛나고 있는 것들을 발견했을 때, 마음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소년에게 감정은 없지만, 대신 소중한 존재들이 있었다. 어쩔 땐 눈물을 글썽이면서까지 힘들게 윤재를 교육했던 엄마, 뭐든지 감싸주었던 믿음직한 할멈,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들어주고 언제나 방향을 제시해주던 심 박사, 편견 없이 자신을 바라봐 준 도라, 표현하는 방법은 서툴렀지만 세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 곤이…… 이들이 없었다면 윤재의 삶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까.

 

 결말을 맞이하고, 이어서 책의 뒤편에 실린 작가의 말과 인터넷에 올라온 인터뷰 등을 찾아 읽었다. 손원평 작가는 엄마가 되고 난 후, 아이를 바라보며 소통과 감정, 사랑에 대해서 생각하며 글을 썼다고 했다. "이런 아이라면 사랑할 수 있었을까"라는 상상으로 등장인물을 만들어냈다고도 했다. 작가의 고민은 희대의 살인자가 왜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는지의 고민으로 이어진듯하다. "구할 수 없는 인간이란 없다. 구하려는 노력을 그만두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는 무슨 의미로 그렇게 썼을까. 도와 달라는 손짓이었을까, 아니면 깊은 원망이었을까.(128쪽)" 결국, 인간이 제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게 무엇이냐는 질문이었다. 작가는 무거운 질문에 대한 답을 읽기 쉽고 깔끔한 소설로 대신했다.

 

 언젠가 우리 엄마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포기라는 게 어딨어, 내 아이인데." 소위 문제아라고 불리던 청소년을 감당하지 못하는 부모를 보고 한 말이었다. 사랑, 혹은 희망, 때로는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이거나, 작은 관심으로도 표현되는 따뜻한 감정, 그리고 소통. 이 책이 왜 좋았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39쪽,
침묵은 과연 금이었다. 대신 ‘고마워.‘와 ‘미안해.‘는 습관처럼 입에 달고 있어야 했다. 그 두 가지 말은 곤란한 많은 상황들을 넘겨 주는 마법의 단어였다. 여기까진 쉬웠다. 상대방이 내게 천 원을 내면 거스름돈을 이삼백 원 내 주는 것과 비슷했다.
어려운 건 내가 먼저 천 원을 내는 거였다. 그러니까, 뭔가를 원한다거나 하고 싶다거나 어떤 것을 좋다고 표현하는 일들. 그런 게 힘든 이유는, 여분의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돈을 내야 하는데 나는 사고 싶은 것도 없고, 얼마를 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 잔잔한 호수에 억지로 파도를 치게 만드는 것처럼 버거웠다.

128쪽,
구할 수 없는 인간이란 없다. 구하려는 노력을 그만두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는 무슨 의미로 그렇게 썼을까. 도와 달라는 손짓이었을까, 아니면 깊은 원망이었을까.
엄마와 할멈에게 칼을 휘두른 남자와 곤이는 P.J. 놀란 같은 타입이었을까. 아니면 P.J 놀란과 가까운 건 오히려 나였을까. 나는 세상을 조금 더 이해하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겐 곤이가 필요했다.

162쪽,
몰랐던 감정들을 이해하게 되는 게 꼭 좋기만 한 일은 아니란다. 감정이란 건 참 얄궂은 거거든. 세상이 네가 알던 것과 완전히 달라 보일 거다. 너를 둘러싼 아주 작은 것들까지도 모두 날카로운 무기로 느껴질 수도 있고, 별거 아닌 표정이나 말이 가시처럼 아프게 다가오기도 하지. 길가의 돌멩이를 보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대신 상처받을 일도 없잖니. 사람들이 자신을 차고 있다는 것도 모르니까. 하지만 자신이 하루에도 수십 번 차이고 밟히고 굴러다니고 깨진다는 걸 ‘알게 되면‘, 돌멩이의 ‘기분‘은 어떨까.



245쪽,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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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개의 죽음 그르니에 선집 3
장 그르니에 지음, 지현 옮김 / 민음사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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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내내, 데자뷰처럼 떠오른 장면은 수년 전 내가 어떤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었다. 책에 담긴 감정도, 내가 책을 바라보는 감정도 유사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라는 2년 동안, 내게 온 변화가 크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때도 지금도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해보지 않았다. 운 좋은 일이고 감사한 일이지만, 그렇기에 언젠가 내게 찾아올 슬픔에 대한 두려움은 상상도 할 수가 없다.


읽고 있던 책은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였다. 작가가 어머니를 잃고 난 뒤 일기처럼 써 내려간 글이다. 사람과 동물이라는 대상의 차이가 있지만, 형식을 포함하여 책에 담긴 마음, 슬픔이라는 감정 등 많은 것이 겹쳐있다.

 

"그녀의 죽음 이후, 그 무언가를 새롭게 "꾸미고 만들어가는 일"이 싫다. 그런데 글쓰기는 예외다. 그건 왜일까? 문학, 그것은 내게 단 하나뿐인 고결함의 영역이다. (마망이 그랬던 것처럼). (<애도일기> 235쪽)"

 

"방에서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녀석이 나를 방해했으면, 짐승들 특유의 그 거절 못 할 수법으로 산책을 하자고 보챘으면 하고 바란다. 하지만 녀석이 살아 있다면 이렇게 글을 쓸 필요도 없을 것이고 - 글쓰기는 삶과는 상반되는 것이므로 - 따라서 방해받을 일도 없을 것이다. 글을 채워나갈 종잇장조차 내 앞에 두지 않을 테니까." (<어느 개의 죽음> 65쪽)

 

다른 책 이야기를 이리 길게 하는 것을 용서해주길 바란다. 내가 <애도일기>를 언급하는 이유는, 슬픔의 감정이 어떤 대상에 따라 섣불리 판단될 수 없음을 말하기 위함이다. 누구는 가족을 죽어서 슬퍼하고, 누구는 키우던 반려동물이 죽어 슬퍼한다. 대상은 중요치 않다. 소중한 존재 - 그것이 인간이든, 동물이든, 더 나아가 식물이든 무엇이든 - 를 잃어버린 사람의 감정은 모두가 똑같다. 결핍을 마주한 두 작가가 소중한 존재를 애도하고, 자신의 슬픔을 어루만질 수단으로 선택한 것은 글쓰기였다.

 

 작가 '장 그르니에'는 개의 죽음을 통해 많은 것들을 생각한다. 마음은 말라비틀어진 상태로 접어들고 항시 우울함이 감돌지만, 여전히 감미롭고 충만한 세상을 본다. 고통과 절망, 죽음들과 같은 어두운 단어들과, 행복한 삶과 관계된 아름다운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충돌한다. 작가 "자신 내부의 두 존재가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51쪽)"이다. 결핍을 견디기 위해 그는 종이와 펜을 들어 그 모든 사유에 대하여 기록한다.
 
 죽음을 통해 비로소 삶을 생각할 수 있다고 하던가. 작가는 오랜 세월 함께 했던 '타이오'라는 개의 행동을 추억하기도 하고, 위선적인 인간들과는 다른 동물들의 특성을 그리기도 한다. 어쩔 수 없이 순응해야 하는 자연의 위대함, 그 속의 수많은 인간들이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하기도 한다. 염세적인 시선도 드러나지만 어쩔 수 없다. 그가 글을 쓴 상황 속에서 슬픔을 부정할 수 없었을 뿐이다.

 

 죽음으로 시작된 글쓰기였기에, 텍스트를 넘은 엄청난 우울함이 독자인 나에게도 전달이 된다. 그러나 사랑으로 가득 찬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 위안이 되었다. "사랑하자. 위선과 가식과 자만이 없는 사랑을 하자."라고 말하는 듯한 작가의 조언을 마음에 새기면서 책을 덮는다. 삶을, 삶의 소중한 존재들을 더욱 사랑하게 만들어준 작가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를 사랑하는, 또는 사랑할 마음을 지닌 대상을 사랑하자. 보잘 것 없는 설득력을 이용하려 들지 말고, 우리가 보다 나은 존재라고 믿지도 말자.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놀라운 은총을 기꺼이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우리들을 고립시키는 커튼을 걷고 누군가 우리에게 손을 뻗는다. 서둘러 그 손을 붙잡고 입을 맞추자. 만일 그 손을 거두어들인다면 당신의 수중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테니까. 오직 사랑이라는 행위를 통해서만 당신은 당신 자신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9쪽,
두렵지 않은 수호신의 가호를 빌듯이, 밤에 잠을 청할 때면 나는 녀석을 떠올렸다. 녀석은 그 가혹함과 광대함을 두려워하던 대자연에 내가 접근할 수 있도록 한 중재자였던 것이다. 녀석을 통해서 나는 마음을 달래주는 자연의 속성들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침묵, 잠, 걱정도 후회도 없는 만족, 언제나 눈앞에 펼쳐져 세상을 감싸고 있는 햇빛, 발 아래에서 우연히 찾아낸 샘과 같은 것들 말이다. 녀석을 본보기로 삼음으로써 나는 진정으로 세상에 존재할 수 있었다.

58쪽,
지금도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지만 모두 공허할 따름이다. 이를테면 나는 말라비틀어진 상태에 놓여 있다. 내게 머무르던 감정의 거대한 물결이 모두 빠져나가 버린 것이다. 나를 엄습했던 그 물결 속에 언제까지나 잠겨 있으리라 믿었는데……. 그 물결은 언제고 곧 되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이 메마름을 즐기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이것은 행복이 아니라 결핍이기 때문이다.

63쪽,
6월 1일이다. 새들이 지저귀고, 멀리 암탉이 운다. 기차 지나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수탉이 울기 시작한다. 세상은 더없이 충만해 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나는 실선으로 그려진 세상의 모습 너머, 점선으로 이루어진 형상들을 본다. 내가 본의 아니게 그것들에 눈길을 고정하게 되면, 그 형상들은 실선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수로 불어나고, 마침내 실선으로 그려진 세상의 모습은 사라지고 만다.


84쪽,
우리는 살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살아남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꽃들, 가축들, 우리의 부모들을 잃고도 살아남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잃고도 살아남는다. 생존하는 동안 육신의 여러 부분들이 우리에게서 벗어나지만 그래도 우리는 살아남는 것이다. 훗날 우리는 미래에 대한 꿈과 추억들을 잃고도 살아남는다. 그러고서도 우리는 <산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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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이쯤에서 마치는 거로 한다
한창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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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막힐 때 청량하고 짜릿한 사이다 한 모금이면 세상 천국이 따로 없을 것 같다. 맥주, 그래. 맥주도 좋겠지만, 그보다 알싸하고 씁쓸한 소주 원샷이 어울리겠다. 그리고 당연한 듯이 바다 내음이 물씬 풍기는 곳이 좋겠다. 바다 위에서 배를 타던지, 발장구를 치던지, 저 멀리 수평선이 보이는 명당에 자리 잡으면 더욱 훌륭하다. 지금은 꽃 피는 봄이지만, 이 책을 보고 난 뒤엔 일상에서 벗어난 이런 개꿈 같은 상상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인가요,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언제나 그렇듯 여러 작가의 이름을 대면서 한창훈 작가의 시원한 글이 좋다고 했다. 첫 번째 이유는 뼛속까지 바닷사람인 그에게 떼놓을 수 없는 바다의 이미지 - 그에게 바다는 이미 언급하기 지겨울 정도이지만 - 가 떠오르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말 그대로 시원스러운 글을 지어내기 때문이었다. 그의 시원스러운 글은 이번 책에서 정점을 찍는다. <한겨레 21>에 연재한 글을 모아놓은 것인데 제목이 '한창훈의 산다이'다. '산다이', 생소한 일본어로 오해할 수 있지만 옛날에 'sunday'라는 말에서 유래된, 전라남도 섬 지방의 말이라고 한다. 다양하게 해석되지만, 쉽게 말해 한바탕 신나게 노는 문화다.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작가는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고 술과 담배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공부는 이쯤에서 마치는 거로 한다"라고 선언했다. "이게 나라냐"라고 외치는 지금 우리들에게 그가 선물해주고 싶었던 것이 바로 '산다이'였던 모양이다. 강연이고 뭐고 귀찮은 학생들 앞에서 '문학이고 지랄이고'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던 것처럼, 독자들이 한바탕 웃고 힘낼만한 이야기들을 준비하였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작가도 우울한 사회 현실을 외면할 순 없었지만, 대신 이리저리 비틀어 놀려대거나 정말 살아본 아저씨의 조언을 들려준다. (특히 하면 된다 정신으로 대강 (대강? 대! 강!)의 제왕이 된 이야기를 읽고 얼마나 통쾌하던지!)

 

"아아, 우리에겐 이렇게 멋진 아저씨도 있다" (출판사 서평 中)
아아, 정말 그렇다. 표준어 거부 운동을 제안하고,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보다 높지 않다고 말하고, 벤치에서 바다의 표정을 읽고, 비혼 선언에 대해 말하고, 잘못됐으면 덤벼들어야 된다고, 그래야 청춘이라고 말하는 이 아저씨는 얼마나 멋진가. 웃기라고 쓴 티가 팍팍 나는 글에서도 좀처럼 시원하게 웃음이 나질 않는 내가 책을 읽으면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취향이 갈릴지라도 내겐 충분히 이 책이 '산다이'였다고 말할 수 있다. 흥겨운 한 판이었다.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무당도 신부도 스님도 목사도, 심지어는 신神도 모른다. 모르는 것 가지고 벌벌 떠는 것처럼 찌질한 짓도 없다. 인생 알 수 없는 덕에 우리는 산다. 젊었을 때의 계획대로 중년 이후를 사는 사람, 나는 못 봤다. 그러니 그런 거 무시하고 친구와 어울려 어기차게 기운이나 발산하자. 그게 생명력이다. 강한 생명력은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 자유로운 영혼. 이거 멋지지 않은가. 위정자들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자들을 무서워한다. 그들이 무서워할 젊은 영혼이 많은 것, 그게 정상적인 국가이다. 그러니 좆도, 산다이 하면서 놀자. 놀아도 내일은 또 오더라. (20쪽)

 

 

 

54쪽, ‘대강‘의 제왕
"이제 대강 좀 해라, 대강."
그는 눈을 번쩍 떴다. 대강이라면 맞아, 큰 강! 이렇게 외치고 나서 엎드려 있는 수많은 쫄따구들에게 자기 땅의 강을 모두 새로이 만들겠다고 선포했다. 물을 가까이해야 한다는 돌팔이의 조언과 도랑을 다뤄서 재미 본 기억도 한몫했지만 제왕은 이른바 ‘가오‘가 다르지 않은가. 강이야말로 자연의 본모습이며 우리는 그저 거기에 깃들여 사는 존재다,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무지몽매들이 들고일어났다. 그는 당연히 듣지 않았다. 거기에 22조라는, 아무리 들어도 감이 안 잡히는, 노동자 김 씨가 하루 종일 일해서 버는 8만 원 보다 어마어마하게 높은 액수의 돈을 쏟아부었다.



126쪽, 공부는 이쯤에서 마치는 거로 한다.
학생들을 만나자. 우선 사과부터 하자. 너희 친구들을 터무니없는 죽음으로부터, 너희들을 충격과 공포로부터 지켜주지 못한 못난 어른이어서 미안하다고 말이다. 그리고 바다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고 싶었다. 미워해야 할 대상은 바다가 아니라 그런 사고를 내고 먼저 도망가 버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뒷수습이라고 한, 아직도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피해자들을 이간질하는 것도 모자라 악랄하게 공격하고 있는, 같은 시대 같은 공간 속의 어떤 사람들이니까.



152쪽, 벤치의 나이테
그 벤치에서는 바다의 표정이 잘 보인다. 바다의 기분이 보인다고 해도 무방하다. 내가 뿜어 올린 담배 연기도 그때 부는 바람의 방향대로 흘러간다. 바다의 1년이 표정을 바꾸며 흘러가는 것을 그곳에서 확인한다. 단순히 나무 몇 개 엮어놓은 것이지만 벤치가 없었다면 무심하게 바다를 바라보는 시간은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194쪽, 북서풍 붑니다. 소주 마십니다
‘북서풍 붑니다, 소주 마십니다. 파도가 하얗게 솟구칩니다, 소주 마십니다. 손발이 얼어갑니다, 소주 마십니다. 입김이 담배 연기처럼 나옵니다, 소주 마십니다‘ 뭐 이런 식이다. 마치 아직도 어선에 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바람에 들창 흔들리는 소리를 배경으로 소주 병을 꺼낸다. 얼른 몇 잔 마셔 외롭고 추운 몸을 덜 춥고 덜 외로운 에틸알코올의 세계 속으로 보내는 것이다. 조금은 비장하고 우울한 미학이다. 그러고 나면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시간이 지나가는 소리로 들린다. 나는 혼자서 말한다. ‘지금 겨울이 지나가는 중이다.‘ 좀 진부한 표현이지만 겨울 바다는 존재에 대해 끙끙 앓는 시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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