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42 

  그때 나는 도자기를 보는 방법 하나를 배웠고, 그것은 내 세상살이의 무슨 지침처럼 지금까지 뇌리에 새겨져 있다.

  "도자기 진짜 가짜를 어떻게 구별합니까?"

  초짜는 부끄러움을 감추고 물었다.

  "그건 간단하지."

  선생의 대답에 나는 귀를 세웠다. 그 방법이 바로 내가 세상살이의 지침이라고 하는 그것이었다.

  "우선 그 골동을 사다놓고 오래도록 지켜보는 걸세."

  "예?"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선생은 경상도 통영 사투리일 그 말투를 천천히 가다듬으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아까운 돈을 투자한 도자기를 오래오래 지켜보고 있으면, 결국 싫증이 나는 것과 싫증이 안 나는 것으로 나누어진다. 이 가운데 싫증이 나는 것은 가짜일 공산이 크다. 아무리 지켜봐도 싫증이 나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짜인 것이다

  어찌 들으면 근거 없는 논리 같기도 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곰곰 곱씹고, 또 살아오면서 여러 몹쓸 일 겪기를 오래 하다 보니, 그처럼 진리의 금언이 따로 없었다.

           (중략)

  새벽잠이 없어진 지 꽤 오래인 요사이, 나는 선생의 말을 되살리며 어둠 속에 앉아 있곤 한다. 이제까지 나를 오래도록 지켜봐온 사람 혹 있다면 어떻게 여길 것인가. 내 작품은 또 어떨 것인가. 진짜로 올려질 것인가, 가짜로 내려질 것인가. 나 자신 나를 지켜보며 아무쪼록 싫증이 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하리라 하며 오래전의 저 도자기를 여전히 지켜본다.

                                     <오래 지켜보기> 중에서





그러고보니 윤후명의 작품들을 오래 지켜봐왔다.


오래 지켜봐온 것들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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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끼고 사는 책은 버리지 못한다. 

사람은 떠나가도 책은 말없이 남아 있다.

나에게로 와서 내게는 고전이 된 책들.

마지막에 불쏘시개로 쓰일망정 떠나보내지 못하리.



      



몇년에 걸쳐 아파트에 있던 책 중 60~70% 가량을 산골로 옮겼다. 남편의 땀방울로 이루어진 과업이다. 거의 대부분을 지게나 배낭에 담아 20여 미터 폭의 개울을 건너고 언덕길을 올랐다.

헌책방을 할까, 북카페를 할까...오지 중의 오지에서 책방을 하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었다. 그러나 다 꿈같은 얘기. 떠나보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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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3-10-07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상당히 많네요. 한두 권은 몰라도 사진에 나오는 만큼 이동하려면 상당히 힘드셨겠어요.
정리가 잘 된 공간이 북카페처럼 근사해보입니다.
nama님, 좋은 주말 보내세요.^^

nama 2023-10-07 15:00   좋아요 1 | URL
욕심이라면 욕심, 미련이라면 미련 같은 것이지요. 어쨌거나 못 버리겠어요.
감사합니다.^^

은하수 2023-10-07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기만해도 넘 아름다운데요~~~
옮기시느라 고생하셨죠!
저도 이사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떠나보낸 책들 자꾸 생각나는데...진짜 엄청나게 무거워서 고생한 기억이 새록새록^^
나만의 북카페 하세요~~

nama 2023-10-07 15:04   좋아요 2 | URL
떠나보낸 책이 필요할 때가 있지요. 그 안타까움이란.... 그래서 못 버리나봐요.
요즘은 웬만하면 도서관을 이용해요. 책 쌓이는 게 무서워서요.

은하수 2023-10-07 18:07   좋아요 0 | URL
맞아요 맞아요
그런데도 쌓이는건 그냥 어쩔수 없다 하게 돼요^^
 
일본산고 -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에게 미래는 없다, 박경리 유고 산문
박경리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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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나는 철두철미 반일 작가입니다." 라고 말씀하시는 박경리 선생이 문득 그리워진다. 어영부영 자신의 생각이 있는지조차 의심가는 무리들을 보고 있노라면 내 한숨마저 아까워진다.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인간사이지만 이렇게 세월이 거꾸로 흐르리라고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는데... 단호한 반일의 목소리를 이제는 누가 이어 받을까...암울하다.


이 책의 본류는 아니지만 기억에 남는 말씀 두 가지.


" 강원도에 대해 할 말이 많습니다. 가장 혜택받은 곳이 바로 강원도입니다. 환경문제가 갈수록 심해지는 이때에 강원도의 재산은 바로 자연입니다. 무엇이든 멀리 내다봐야 합니다. 나만 사는 게 아닙니다. 자손, 후손들도 생각해야 되지요. 그러나 다들 너무 당장의 눈앞만 내다보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강원도에 올 때는 강원도가 한국의 마지막 보루라 생각했습니다. 자연을 지키는 게 곧 강원도의 자존심과 자부심을 지키는 것이라는 걸 다시 한번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골프장을 보세요. 저는 골프장 짓는 것이 매국행위라고 말합니다. 생명보존 위해 골프를 안 칠 수도 있지 않겠어요. 이 좁은 땅에서 굳이 골프를 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저는 특히 강원도에 골프장 짓는 거 절대 반대합니다. 기골이 좋은 도지사가 와서 꽉 막았으면 좋겠어요. 그 사람은 나중에 반드시 이름이 남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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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343

 영미야, 창근아, 그 시절엔 의리를 매우 중요시하고, 선배를 잘 따랐주. 반일 투쟁했던 선배들의 정신을 본받으려고 했어. 그분들이 대부분 좌익이었고, 그래서 후배들은 유식하면 유식한 대로, 무식하면 무식한 대로 좌익이 된 거라. 그땐 다 그랬주.


1945년 해방 때의 시대상황이다. 이 어렵지도 않은 상식적인 사실을 비틀고 억지를 부리는 무리를 보고 있노라면 화가 나서 가슴이 답답하고 우울해진다. 참으로 뻔뻔한 무리들.



2. 














수채화 같은 글을 읽노라면 가만히 감상에 젖곤하는데...하, 결정적인 단점이 자꾸 눈에 뜨인다.


p. 243

 두 여승은 앳된 소녀였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볼그레한 볼, 도톰한 붉은 입술, 크고 선연한 흰자위와 까만 눈동자, 가늘고 긴 목덜미의 뽀얀 살빛, 처녀성이 눈부신 아름다운 용모였다. 배코 친 파란 머리와 헐렁한 잿빛 승복이 속인의 마음을 공연히 안타깝게 하는데, 정작 두 여승은 여느 소녀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밝게 웃고 새처럼 맑은 목소리로 지저귀고 있었다.


  여승을 그저 여승으로만 볼 것이지, 외모를 하나하나 따지며 대상화하는 건 뭔가. 불편하다.


 p. 163

복지경의 소나기 한 줄기는 농부의 한계체온 이상의 무모한 인내에 대해서 여름날이 줄항복은 하는 것이다. 삼굿 같던 날씨가 제풀에 겁을 먹고 '독한 놈, 이러다 사람 잡지. 내가 졌다' 하듯 난데없는 시원한 바람 한 점을 백기처럼 흔들며 들판을 훑고 가버린다. 돌연한 날씨의 변덕에 농부들은 본능적으로 밭고랑에서 놀라 장끼 고개 쳐들 듯이 벌떡 일어나 건넌골 쪽을 쳐다본다. 아니나 다를까 컴컴한 골 안에서부터 막잠 자고 난 누에 뽕잎 먹는 소리처럼 버석거리며 뽀얗게 묻어 드는 소나기가 미처 피해 볼 새도 없이 순식간에 들판을 유린해 버린다. 유린! 그 얼마나 협쾌한 유린인가. 수절과부가 외딴 골짜기에서 범강장달이 같은 사내에게 겁탈을 당한들 그만큼 협쾌할까.


협쾌란 통쾌하다는 말일 터. 이런 식으로 여성을 비하하고 대상화 하는 표현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지금 시각으로보면 매우 시대착오적이지만 1938년생인 지은이가 살았던 세계에선 이런 시각이 보편적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세계에서 살았던 부모 밑에서 자랐다. 그러니 눈살은 찌푸려지지만 참고 읽는 수밖에. 



위의 두 책을 같은 주제로 열거하는 게 좀 무리인 듯하지만... 사람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 그러나 패러다임을 왜곡하고 시대를 되돌리려는 자들에게는 당당하게 맞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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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3-09-09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대마다 동작하는 무의식적인 인식의 틀이 있긴 하지만 수채화 같은 글에 큰 오점을 남길 구절들이 꽤 있네요.
‘그리운 시절‘중에는 ‘겁탈은 미수에 그치고 말았지만 주호의 모험심이 얼마나 순진하고 아름다운 것인지...‘ 라는 뜨악한 구절도 나옵니다.

nama 2023-09-09 17:13   좋아요 0 | URL
그 시절에는 통용되었겠지만 지금 보면 핀셋으로 뽑아버리고 싶은 문장들이 꽤 있어요.
이런 책이 후세에도 남아 있다면 고전이 되겠지요.
 














2016년, 틈만나면 퇴직을 할까 말까 고민하던 때에 이 책을 구입했다. 당연히 책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보니 그럴만도 했다. 뭐랄까. 이 책은 술술 넘기기에는 너무나 교과서 같은 책이다. 마치 예전에 아카데미 토플이나 이재옥 토플 같은 영어학습서를 공부하는 느낌이 난다. 살강, 뼈물다, 주루막, 따비밭 같은 어휘를 검색하고 옮겨 써보는 행위는 새 영어단어를 공부하는 것 같고, 허투루 쓰인 문장이 하나도 없는 완벽한 글은 영어 문장에서 틀린 부분을 찾을 때 처럼 집중력을 요한다. 에세이 쓰기의 모범이랄까 교과서랄까. 문장이면 문장, 내용이면 내용, 감탄하며 읽게 된다. 두꺼운 토플 책 두 권을 샅샅이 공부하고나서야 영어에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는데 이 책을 꼼꼼하게 읽고나면 문리가 좀 트이려나. 트이겠지. 트일 것이다. 훌륭한 책이니까.


<앞자리>라는 글은 하늘을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보고 써내려간 글이다. 옮겨본다.


  기러기 떼의 앞자리는 영광의 자리일까? 희생의 자리일까? 영광의 자리든지 희생의 자리든지 맨 앞자리에서 나는 새가 한 마리 있어야 무리가 형성된다. 앞으로 불쑥 나선 새의 뒤를 따라서 무리(無理) 없이 재편성되는 기러기 떼의 대형으로 보아서 그 앞자리는 자기를 희생하는 자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러기들이 무리의 맨 앞자리를 영광의 자리로 탐냈다면 다툼으로 대형이 흔들려 대장정은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하고 까마귀 떼처럼 흩어졌을지 모른다.

  늦가을 빈들 위를 나는 까마귀 떼를 보면 혼란스럽다. 거기에는 선두가 없든지, 전부 다 선두든지 하다. 오합지졸인 것이다. 선두가 없는 것은 선두가 살신성인하는 자리로 인식되어 기피하기 때문일 것이고, 전부 다 선두인 것은 선두가 영광의 자리라서 서로 탐을 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정도 의식 수준의 무리라면 통제나 질서 유지가 안 된다.

  기러기들은 맨 앞자리의 필요성을 잘 안다. 그래서 존중한다. (중략) 기러기 떼의 앞자리. 기러기들은 그 자리에서 나는 기러기를 고마워할지언정 선망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날지 못하는 자신의 힘 모자람이 부끄럽다기보다 미안할 뿐이다. 그 자리는 유세(有勢)하는 자리가 아니고 살신성인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중략) 

  기러기 떼는 높이 난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는 말은 비단 시계(視界)에 국한된 말은 아니리라. 안데스산맥 높이 나는 독수리는 눈으로 사냥감을 보는 정도지만 추운 밤하늘을 높이 날아가는 기러기 떼는 가슴으로 구만리 장천 너머에 있는 도래지를 본다. 그것은 관점(觀點)을 말하는 것이다. (중략) 

  앞자리로 나서려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것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 없다. 누가 맨 앞자리에 서든지 나는 어차피 끝에서 앞 사람의 날갯짓이 일으킨 상승기류를 얻어 타고 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 앞에서 항로를 잡아 주려는 제일인자에 대한 믿음이 서지 않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p.89~91


'불행'한 나날을 보내는 요즘. 구만리 장천 너머에 있는 도래지를 볼 수 있는 관점을 장착하지 못한 권력자를 허구헌날 보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다. 살신성인하는 자리에서 골목대장 노릇하는 꼴을 보는 건 참으로 민망하고 역겨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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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08-31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살신성인하질 못한다고 생각해요. 내 눈엔 그 사람이 보여요,ㅠㅠ

nama 2023-08-31 15:35   좋아요 0 | URL
저는 욕심보다는 권력욕이 보여요. 권력에 취해 있으니 보고 싶은 것만 보겠지요.

잉크냄새 2023-08-31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이 가 찾아보니 저자 목성균님의 짧은 작품 활동이 안타깝네요.

nama 2023-08-31 15:37   좋아요 0 | URL
저 책 한 권만으로도 존재감이 드러나고, 짧지만 강한 족적을 남겼다고 생각해요.

라로 2023-09-04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전자책 신청을 했는데... 늘 좋은 책을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잘 지내시는지요? 건강은 많이 좋아지셨나요?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나마님.

nama 2023-09-04 15:08   좋아요 0 | URL
그렇잖아도 라로님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공부하느라 몹시 바쁘시구나, 했지요.
좋은 글이 많이 실린 책인데 진도는 빨리 나가지 않아요. 늦은 저녁, 마음에 와닿는 글을 읽다보면 술이 당기기도 해요.
공부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라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