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 요양병원에 계신 엄마를 뵌 게 지난 추석날이었으니 또 무심히 한 달을 보냈다. 남편은 남편대로 딸은 딸대로 바쁜 날들이어서 좀처럼 시간 내기가 쉽지 않았다. 이것도 거짓이다. 지난 주말엔 친구와 어울려 영화를 봤으니까. 지지난 주말엔 친구들과 남대문 일대를 싸질러 돌아다녔으니까.
한 달만에 뵌 엄마는 전보다 더욱 얼굴이 굳어 있었고 말씀도 거의 없으셨다. 전신 중 손만 겨우 움직일 수 있는 엄마는 정신만은 예전 그대로인데, 또렷또렷한 정신력이라는 게 몸이 따라줘야 의미있는 것이지, 몸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정신은 그대로 있는 것이 오히려 더 괴로운 일이 아닐까 싶다.
별 말씀도 없는 엄마는 오른쪽 허벅지가 가려운지 연신 손을 뻗어 가려운 곳을 긁으려고 하시기에 내가 대신 긁어드렸다. 15센티미터 남짓되는 허벅지를 살살 긁기를 30여 분, 종아리까지 가볍게 주무르는데 무릎 부근에서는 우두둑 우두둑 뼈소리가 나고 뼈가 덜커덩거려서 흠짓 놀라기도 했다.
허벅지를 긁어드리면서 이 나이가 되도록 엄마 몸에 이렇게 오래 손을 대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한여름 목욕할 때 등허리 때를 밀어드린 건 언제였던가, 까마득할 뿐이다. 그것도 엄마가 열댓 번 내 이름을 불러야 마지못해 밀어드렸던 기억 뿐이다.
어렸을 때 눈에 이물질이 들어가서 징징거리면 엄마는 아무 망설임없이 내 눈을 엄마의 혓바닥으로 핥아주시곤 했다. 여름에 비가 몹시 오던 어느 날은 초등학교 3학년이나 되는 나를 학교까지 업고 데려다주신 적이 있다. 엄마 등에 업히면서 내내 창피했었는데 엄마는 전혀 개의치 않으셨다.
연세가 드셔서 제대로 걷기가 힘들어졌을 때에도 무거운 짐을 절대로 나에게 맡기지 않으셨다. 엄마와 함께 걸으면서 내가 엄마보다 무거운 짐을 들었던 기억은 거의 없다. 젊었을 때는 쌀 한 가마니 정도는 머리에 이고 다니실 정도로 근력이 좋아서 아버지를 종종 놀라게 하셨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당시 나는 완행열차로 통학했는데, 밤 10시 쯤 기차에서 내리면 대합실에서 기다리시던 엄마가 내 가방을 받아들고 집으로 향하셨다. 가방이 무거워 고생한다면서. 주위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버스에서 학생들에게 자리 양보 받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해요. 애들이 가방이 무거워서 고생이 심해요."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 7년 동안 완행열차로 통학한다는 구실로 나는 내 속옷 한 번 빨아 입은 적이 없다. 교복 세탁은 당연히 내가 해야 한다는 의식조차 없었다. 아들 보다 딸 키우키가 더 힘들었을 엄마는 대신 이런 말씀을 하시곤 했다. "아들 보다 딸이 돈이 더 많이 들어가요."
30여 분 동안 허벅지를 벅벅 긁어드리면서 이 순간마저 머지않아 사라져버리겠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울컥했다. 살이 다 빠져나간 엄마의 살갗는 아무리 긁어도 빨갛게 되지 않았다. 긁다가 문지르다가 다시 긁다가 다시 방향을 바꿔 주무르면서 손 끝으로 기억하려고 애썼다.
아직도 나는 엄마의 전혀 낯선 모습에 적응이 되지 않는다. 깡 마른 몸, 침 흘리는 입, 찡그린 얼굴 표정. 아,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