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친구들과 함께 한 짧은 여행

-홍콩 찍고 심천 찍고 (2010.1.8~1.13)

1. 2009년 해가 저물기 몇 시간 전. 한 통의 문자가 왔다.

“건강하고 즐거움이 함께하는 2010년 되길 기도한다.”

이 친숙하고 도발적인 반말투라...짐작은 가지만 확인 문자에 들어간다.

“뉘시더라.”

득달같이 걸려온 전화, 자기도 몰라본다고 기막혀하는 친구, 종학이었다. 전화 연락이 없어도,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지 않아도, 늘 내 마음 속에 늘 같은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는 오랜 옛 친구였다. 그러나, 이런 저런 얘기 끝에 나온 한마디가 나를 질투의 광풍에 휩싸이게 했는데, 며칠 후에 성란, 인자와 함께 중국에 간다는 것이었다. 여행지인 동관이란 곳은 종학이의 남편이 사업차 둥지를 튼 곳으로 남편 보러 가는 길에 친구들을 초대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라, 나만 두고... 말도 붙여보지 않고...

종학이는 나의 오랜 친구이다. 1973년도에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는 29번이었고 나는 30번이어서 일 년간 짝이 되어준 친구였다. 그러고 다음 해 2학년에 올라가서는 내가 23번, 그가 24번이 되어서 다시 짝이 되었다. 키순으로 정한 번호였는데 일 년 사이에 키가 자란 그와 성장을 멈춘 나와는 그때만 해도 거기서 거기였었다.

그러다가 3학년에 올라가서 나는 10번으로 급추락했고 한 뼘을 자란 그는 그만 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Out of sight, out of mind...라던가. 내 눈높이를 벗어난 그는 인자란 친구와 친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성란이란 친구가 그들 옆에 있었다. 질투어린 시선을 감춘 채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종학이와 나는 같은 여고를 가게 되었다.

성란이와 나는 같은 초등학교 출신이지만 중학교에 와서야 친하게 되었다. 성품이  소탈한 그를 한때 “코빼기”라고 부르며 삼각자를 가지고 코끝을 콕콕 장난삼아 찌르던 기억이 난다. 내가 왜 그런 재미없는 별명을 붙였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의미 없는 이름 쓰기를 좋아하는 버릇이 아마 그 때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 싶다.

2년간의 단짝을 버리게 한 종학이의 새 친구 인자. 그는 정열의 화신 같은 존재감을 드러냈다. 잘 웃고 잘 떠들고 노래도 잘하고 흥분도 잘했다. 나와는 정반대였다. 그러던 우리가 종학이를 제치고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길고 긴 백수로 암울한 세월을 죽이고 있을 때 내 옆에 있어준 친구가 인자 이 친구였다.

 

더 따질 것도 없었다. 비자랑 항공권은 진작부터 준비해놓고 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는 이 친구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기로 했다. 비자? 항공권? 그거야 내 전공이란 말씀이지.

2. 1월 4일. 서울. 25.8cm의 폭설이 내리다. 41년 만이란다.

연휴가 끝나고 실질적으로 한해의 업무가 시작되는 날이다. 제일 비용이 저렴한, 3박4일이 소요되는 관광 비자를 이날 신청하지 않으면 여러 골치 아픈 일이 생긴다. 동네 여행사에 신청하면 좋으련만 시간상 하루의 여유조차 없어서 직접 서울 종로에 있는 중국비자 전문 대행업체를 찾아가기로 한다.

오전 6시. 모처럼 서울 간다면서 쫄랑쫄랑 따라나선 중1 짜리 딸아이를 깨워 아파트 밖으로 나오니 눈발이 날리고 있다. 그냥 눈이 내리나보다, 했다. 이른 새벽이라 생각되어 너무 일찍 가는 건 아닌가하고 우려했으나 서울에 내린 폭설 때문에 하마터면 제시간에 닿지 못할 뻔했다. 출근 대란이 있던 날 아침이었으니 8시 30분 이전에 도착한 건 아마도 행운이라고나 해야겠다. 늦어도 8시 40분까지는 와야 한다는 절대 시간 엄수로 전날 밤 밤을 새우다시피 했었다.

종각 입구에서 밖으로 나온 순간, SF영화에서나 봄직한 지구 말세 분위기에 온몸을 떨었다. 이국적이라기보다는 외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낯선 광경이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눈보라를 헤치며 마치 전투에 나선 양 사무실 탐색에 들어가자니 자못 비장감마저 들었다. 대단한 아침이었다.

 

3. 항공권 문제도 해결했다. 처음엔 친구들이 예약한 출발시간과 비슷한 외국항공사 항공권을 탐색해보았으나 결국 친구들이 예약한 OZ 721 홍콩행 아시아나항공권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트래블게릴라>, <탑항공> 등은 여의치 않아 <여행박사>에서 확인해보니 4석이 남아 있어서 어렵지 않게 예약할 수 있었다. 문제는 가격이었다. 지난여름(8월) 홍콩에 갈 때는 대한항공으로 tax 52,900원 포함 413,900원이었는데 이번에는 tax 93,000원 포함 593,000원이 들어갔다. 홍콩은 겨울이 성수기이던가? 하여튼 항공권은 미리미리 확보해야할 일이다.

지난여름, 홍콩엘 다녀와서는 ‘언제나 홍콩에 다시 가보나’했었는데 그 기회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까짓 항공권 좀 비싸면 어떠랴. 친구들과 가는 해외여행도 처음인데.

4. 1월 8일 출발일.

잠 못 이루는 밤, 새벽 3시에 일어나 홍콩 가이드북을 뒤적였다. 홍콩에서의 체류시간은 7시간이다. 지난여름에 이곳을 다녀왔으니 아는 체 좀 하려면 예습이 필요했다. 시험을 앞두고 남 몰래 공부하는 기분이 들었다. 모처럼 가슴이 펄떡거린다.

오전6시. 짐이라고 할 것도 없는 가벼운 배낭을 메고 버스정류장으로 나오니 늘 보이던 택시는 보이지 않고 터미널행(전철역) 시내버스가 온다. 새벽이라 빠르겠거니 생각하고 일단 버스에 올랐다. 넉넉잡아 30분 예상했던 버스 탑승 시간이 내 예상을 한참 벗어나 50여분이 걸렸다. 첫 단추를 잘못 채우면 계속해서 일이 어긋나듯 꼭 그 꼴이 될 줄이야. 잔머리 굴려, 버스에서 바로 연결되는 예술회관역에서 내렸건만 하필이면 백화점 연결 통로와 맞물려있는 곳이라 출입문이 굳게 닫혀있는 것이 아닌가. 다른 출입구를 향해 뛰다보니 신기할 정도로 빙판 길도 전혀 미끄럽지 않았다.

왜 있잖은가. 긴 휴가 끝이나 개학 전날, 출근하는 꿈을 꿀 때 그 기분 말이다. 출근 날, 계속 엉뚱한 곳으로 가거나 엉뚱한 사람들을 만나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엉켜버리는 데 그 꿈을 꾸면서 그래도 ‘이건 꿈이야, 어휴’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경험 말이다. 내 꼴이 바로 그랬다. 당황스러웠다. 허나 이건 꿈도 아니고... 아찔하기까지 했다.

인천도시철도의 종점인 계양에서 공항철도로 갈아타고, 내려서는 다시 뛰어 탑승수속을 밟는데 자동기기인 kiosk는 하필이면 내 앞에서 다운되어버리고, 제복 입은 직원에게 부탁하여 긴 줄 제쳐가며 겨우 탑승수속을 마치고나니 출국심사대에 사람들이 한 가득이다. 겨우 겨우 탑승게이트 앞에서 원망의 눈초리 가득한 친구들 얼굴을 보니 그제야 비로소 요의가 느껴졌다. 비행기를 수십 번 탔어도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다.

5. 홍콩에 도착해 밖으로 나오니 종학이의 신랑이 렌터카를 준비해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렌터카 여행이라... 웬 호강? 늘 ‘나 홀로 여행’에 익숙하다보니 공항에서 누군가를 마중 나온 사람들을 볼 때마다 은근히 부러웠는데...ㅋ ㅋ ㅋ  


지난여름에 홍콩에 다녀왔다는 내 경험 덕에 졸지에 홍콩 가이드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솔직히 가이드는 무슨... 짧은 일정이지만 지난번 가봤던 곳만 갈 수는 없잖은가. 그래서 빅토리아 피크와 하버시티, 그리고 지난번에 가보지 못한 홍콩의 명동이라는 코즈웨이베이를 넣었다. 말만 하면 데려다 주는 렌터카 기사 덕에-물론 친구 남편 덕에- 아주 편하고 우아하게 원하는 곳에 갈 수 있었다. 고맙고도 황홀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 코즈웨이베이 쇼핑몰에서 발이 묶일 줄이야. 친구 인자의 본격적인 쇼핑이 시작된 것이다. (친구야 미안해 이런 표현 쓰는 것) 쇼핑 못하고 죽은 귀신이라도 뒤집어썼는지 이 친구, 무아지경에 빠져 쇼핑에 나선 것이었다. 무아지경의 황홀경에 빠져있는 이 정열의 여인의 그 거룩한 몰입에 전염돼 감히 아무도 이의를 달거나 거역하지 못하고 주위를 맴돌 뿐이었다. 나니까 이런 푸념을 늘어놓는 게지 다른 친구들은 불평 한마디 없다. 대단한 인내심이다. ‘오랜 친구’란 가족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고나할까.

6. 1월9일 Shopping Day

호텔방은 두 개가 예약되어 있었다. 종학이 남편 기홍씨의 철저한 준비 덕택이었다. 인자와 내가 하나, 성란이와 그의 고3 짜리 딸아이가 하나.

새벽까지 이어진 인자와의 수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들어볼 수도, 알 수도 없는 사연들이 쏟아져 나왔다.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마음이 짠하고 아팠다.


오전부터 본격적인 쇼핑이 시작되었다. 까르프와 월마트가 있는 곳으로 관광지와는 거리가 먼 곳이었고, 평소 기홍씨와 거래가 있는 상점들이라 마음 놓고 물건을 구입할 수 있는 곳이었다. 기홍씨는 이미 물건 가격까지 꿰뚫고 있었다.

해외여행은 처음인 인자. 여행 간다고 주위 사람들 여럿이 여비를 챙겨주었다 한다. 몸 전체가 기쁨 바이러스인 이 친구의 그 도저한 매력을 어이할까나. 주위 사람들을 챙기기 위해 선물을 고르고 또 고르는 이 친구의 못 말리는 쇼핑 몰입에 오늘도 묵묵히 동참할 뿐이었다.

쇼핑 바이러스 탓이었다. 성란이도 인자 못잖은 품목을 확보하였고, 속으로 투덜투덜 거리며 친구들의 쇼핑을 비웃던 나 역시 덩달아 가방 몇 개를 골랐다. 내게는 여행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인자는 나처럼 뻔뻔하지는 못한 것 같다. 이 나이에 해외여행은 처음인 것도 그렇고, 여행 와서도 끊임없이 주위 사람들을 챙기는 모습도 그렇다. 인자야, 다음엔 선물일랑 잊어버리고 여행 자체에 빠져들기 바래.

7. 거대한 중국을 만나다.

우리가 머문 동관이란 곳은 이를테면 신도시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흔히 중국적인 것이라고 여겨지는 옛 모습을 살펴볼 기회는 별로 없었다. 그저 그들의 일상 속에 잠시 며칠 있어본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관광지에서는 볼 수 없는 진면목을 살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으니..

기홍씨가 동네에 있는 발 마사지 하는 곳으로 우리 일행을 데리고 갔다. 그렇게 여러 번 여행을 다녔어도 발 마사지는, 내게 어색하고 낯선 분야이다. 패키지로 백두산에 갔을 때 딱 한 번 받아보았는데 그저 흉내만 내다 말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곳은 규모부터가 상상을 초월한다. 워낙 이쪽으로는 내가 아는 바가 없기도 하겠지만 호텔방처럼 죽 늘어선 대단한 규모에 그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관광지도 아닌 동네에 있는 마사지 가게들이 원래 이렇게 거대한 지는 잘 모르겠다.

두 시간에 85위안(약 15,000원)하는 마사지를 받고 있자니 몸은 노곤해지면서도 좀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하나같이 마른 몸매를 하고 있는 마사지 아가씨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들은 피곤하거나 아플 때 누구한테 몸을 맡기나, 하고. 에이, 쓸 데 없는 생각...

 

규모에서 나를 압도한 곳이 또 있었으니, 바로 식당이었다. ‘나 홀로 여행’에 익숙한 나는 (우리 가족은) 여간해서는 값 비싼 식당에 들어가는 일이 없다. 서민들이 드나드는 허름한 식당에서 한 끼 식사 때우기는 예사여서, 음식이란 그저 배고픔을 면하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마카오에서였던가. 화려한 호텔 뒤에 있는 선술집 같은 식당에 들어가 그네들이 먹는 밥을 가리키며 똑같은 것을 주문해서 먹게 되었는데 끝내는 입맛이 맞지 않아서 도중에 수저를 놓고 말았다. 대만의 직장인들이 즐겨 찾는 현지 식당에서도 우리는 입맛이 맞지 않아 애를 먹었다. 인도의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파는 인도식 만두 사모사를 사 먹을 때는 걸레인지 행주인지 모를 시커먼 행주로 닦아주는 그릇에 담아주는 것을 보고 남편은 끝내 장염에 걸리고 말았었다. 이런 기억은 아주 많은데, 일본에서도 값이 저렴한 대중식당일 경우에는 음식이 느끼하고 기름이 져서 소화해내기가 여간 거북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떠오른 생각 하나. 어느 나라든, 누구나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내놓는 곳은 고급 식당이라는 것이다. 몇 번 먹어보진 않았지만, 큰 호텔 뷔페 같은 경우는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아직 내 입에 맞는 음식을 찾아다닐 생각은 없다. 좀 더 두고 봐야겠지만...

 

이러던 나였으니, 기홍씨가 안내한 식당을 보고는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무리의 일행이 함께 들어갈 수 있는 홀이 100여개나 있는 거대한 식당이었다. 한국에서도 먹어보기 겁나는 바닷가재를 주문한다. 차례차례 나오는 모든 음식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요리란 이런 거야. 종학아, 이 웬수를 언제 갚냐?

옆에 앉은 성란이와 독한 중국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자니 한층 흥이 났다. 여행 오기 전, 술친구 없을까봐 걱정했다는 이 친구. 20대 초반까지 어울리다 이후로 30대, 40대를 건너뛰었으니 모를 수밖에. 그래도 옛 추억에 잠겨 한잔 두잔 잘도 넘어간다. 술김에 한마디 나온다. “성란아, 내가 집에 내려가면 인자보다 너 먼저 불러낼게. 술 한 잔 하자 잉?” “그려, 그려” 성란아, 너가 이렇게 대답한 것 맞지?

8. 짝퉁 왕국, 중국을 만나다.

심천(Shen Zhen), 중국 최초의 경제 특구 지역이라 한다. 홍콩에서 자동차나 열차로 약 40분 걸린다. 이곳을 친절한 기홍씨 덕에 이틀에 걸쳐 구경했다.

흔히들 마카오, 홍콩, 심천을 한 번에 둘러보는 데 나는 시기를 달리하여 각각 따로 따로 경험을 했다. 대만도 따로 다녀왔다. 왜냐? 서로 다른 나라니까. ㅋㅋㅋ

소위 1국가 2체제라 하여 국가로는 중국이라는 한 나라이지만 각각 기존의 체제를 인정하고 유지한다는 것인데, 이는 ‘대만과의 통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놓은 중국 측의 구상으로, 홍콩과 마카오의 주권 회수를 위한 방안으로 우선 적용되었다. 즉, 중국 본토에는 사회주의를, 대만․마카오․홍콩은 자본주의 제도를 시행하는 것이다.’(<홍콩, 천 가지 표정의 도시>유영하 지음)

따라서 이들 지역은 화폐가 모두 다르다. 그리고 심천은 중국에 속해 있어서 중국 비자가 있어야한다. 물론 다른 지역은 무비자 입국이다. 같으면서도 다른 이들 지역을 중국이라는 한 나라로 인식하기에는 사실 좀 무리가 있어 보인다. 마카오의 공기와 대만의 공기가 어떻게 같을 수 있을까.

그러나 심천은 분명 중국에 속한다. 전시적이고 획일적인 모습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확인한 곳이 심천의 관광거리인 세계지창(Window of the World), 스플렌디드 차이나(Splendid China), 그리고 중국민속촌(China Folk Culture Villlage)이다.

 

중국의 명승지를 모형화한 스플렌디드 차이나, 중국의 소수 민족을 모아 놓은 민속촌, 세계의 명소를 축소시켜놓은 세계지창.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짝퉁이라는 것이다.

중국민속촌에서는 그곳에 입주(?)한 소수민족들의 작은 공연들이 성황을 이루는데 그중 티벳의 장족 공연 마당이 내게는 상징적으로 다가왔다. 그들 종교의 진언인 ‘옴마니밧메홈’으로 시작하는 공연은 구경꾼들에게 별 인기를 끌지 못한다.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라를 잃어버린 마당에 뭔 흥이 나겠는가.

힘으로 밀어붙이며, 세계를 삼킬 듯 거대한 입을 가진 중국의 힘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곳, 내가 느낀 심천의 모습이다. 설마 전 세계를 접수하겠다는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짝퉁 왕국으로 만족하길 바랄 뿐이다.

 

9. 누구나 진땀을 흘리지만...

내가 진땀 흘린 얘기는 이미 했었다.

성란이...아침마다 우리를 깨워 제시간에 아침밥을 먹게 하던 성란이가 마지막 날 아침엔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이상하다. 역시나 짐을 싸느라고 정신이 없다. 호텔 체크아웃을 앞두고 닫히지 않는 트렁크 뚜껑과 싸우느라고 진땀을 흘리고 있다. 공항버스 놓칠세라 모두들 노심초사다.

 

종학의 딸, 도연이...공항버스에 올라 여권을 확인해보니 엄마 것을 잘못 들고 왔다. 항공권도 엄마 것이다. 엄마는 며칠 더 머물다가 나중에야 가기로 되어 있었다. 고도의 작전이 전개된다. 긴장감 넘친다고 해야 하나, 박진감 넘친다고 해야 하나. 이십 여분 후, 픽업 차 들른 다른 호텔에서 종학이 내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별이 어려워....

인자...저 혼자 독야청청하랴. 설마 했는데 인천공항 세관에 덜미가 잡혔다. 짝퉁 물건을 좀 산 게 들통이 났지만, 이 매력적인 여인네의 진심어린 호소를 누가 무시할 수 있으랴. 무사히 통과.


성란의 딸, 혜원... 멋진 필름 카메라를 갖고 와서 정말 폼 나게 사진을 찍었는데 어쩐 일인지 사진 한 장 뽑을 수 없게 되었단다. 허무감에 진땀 좀 났을 게다, 어린 것이...


종학이 내외...친구들 대접하느라고 정말 진땀 꽤나 났을 게다. 말이 5박 6일이지, 나는 엄두도 못 낸다. 자손 대대로 복 받을 거야. 정말 고마워, 친구야! 
  

 

* 다 쓰고나니 아쉬운 부분이 남는다. 인자가 염색하지 않은 내 흰머리 보기 싫다고 작정하고 준비해온 게 있는데, 바로 일회용 장갑이다. 다행히 염색약은 깜빡 잊고 와서 순간을 모면할 수 있었다. 너니까 내 생각해주지, 하는 감동을 잊을 뻔했다.  

 

** 심천에서 야간에 관람한 대공연이 여운을 남긴다. 말 그대로 '물불 가리지 않는 대륙적인(?) 공연으로 평균 등장인물 50여명의 버라이어티 쇼였다. 사실은 그 공연이 내게는 감당이 안된다. 내 감상이 개입될 여지가 없는 완벽한 쇼였다고나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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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도 홍콩 여행은 결국 쇼핑 여행이었다. 

아주 소박한 여행이라고 자부하는 우리 가족 여행이 이번만은 예외적으로 쇼핑으로 점철되는 여행이 되고 말았으니... 

여행을 끝내고 비행기에서 내리면 세관 심사를 거치지 않는가. 늘 배낭을 메고 다니다 보면 세관을 통과할 때 아무도 가난해 보이는 우리 가방에 시선을 두지 않는다. 나도 사실은 한번 쯤 가방 검사를 받고 싶은 거다. " 가방을 열어 보십시오."  "왜요? 걸릴 게 없는데요?" "그래도 좀 봅시다." "......" 이런 대화를 늘 상상하곤 하는 데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딱 한 번 있긴 있었다. 지난 번 인도 여행에서 돌아올 때 수화물로 부친 우리 배낭 중에서 큰 배낭이 영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이상하다?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있네.' 결국엔 맨 마지막으로 나오는 데 가방 전면에 웬 딱지가 붙어 있어서 읽어보니 문제가 있으니 확인을 받으라는 것이다. 검사대로 가 보니 가방 안에 20센티미터가 넘는 칼이 들어 있어서 걸렸다는 거다. 칼? 우다이푸르에서 산 은도금이 된 장식용 칼이었다. 말이 칼이지 칼날이라고 할 것도 없는 모양만 칼이었다. 게다가 20센티미터도 안된다. 담당자의 주의를 듣는 것으로 끝난 해프닝이었다. 

세 식구가 한 사람 당 티셔츠 한 장과 브랜드 신발 한 켤레씩을 샀다. 브랜드라야 우리가 평소 애용하는 프로스펙스나 아식스 보다 약간 높은 수준에 불과하지만...이 기본 쇼핑 구조에 이런 기회가 또 있겠느냐며 남편이 조금씩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다. 평소 우리 수준보다 약간 높은 티셔츠 한 장 추가, 독일제 트레킹화 한 켤레.(이걸 살 땐 내 인상이 더러웠었다고 한다. 뭘 또 사느냐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거기다가 등산 모자. 옆에서 구경만 하던 딸아이도 모자 한 번 써보더니 마음에 들어한다. " 너 그거 사야, 쓸 일도 없잖아, 학생이..." 내 말에 토라져버린 딸아이. "내께 없어서 맨날 엄마,아버지꺼 쓰잖아." "그랬었구나." 그래서 모자 추가. 

늘 백팩을 지고 다니는 나 역시 욕심이 있어 멋진 가죽 백팩을 사고 싶어했다. 홍콩섬의 스탠리마켓에서 여러 개를 보았지만 검증 안 된 물건들인지라 그냥 포기하고 왔었는데 마침 이곳 shopper's lane의 한 매장에서 자그마하게 생긴 백팩을 하나 찾아냈다. 핸드백보다는 크고 보통의 백팩보다는 좀 작은 크기에 방수 커버까지 갖춘 완전한 백팩이었다. 무엇보다 방수 커버가 마음에 들었다. 빗속 퇴근길용으로 딱이다 싶었다. 값을 치르고 다리도 쉴 겸 실내 벤치에 앉아 각자 전리품을 감상하는데 남편이 내 백팩을 유심히 보더니 한마디 한다. "태그에 웬 아이들 그림이야." 자세히 읽어보니 어린이용 등산용 백팩이었다. 그냥 아동용이라면 어떻게 써볼 셈이었는데 이건 유치원생이었다. 단어도 선명한 kindergarten! 왜 이제야 이 글자가 눈에 들어오나. 그래도 혹시나 해서 어깨에 메어보니 끈 길이는 다 맞는데 모양새가 영 말이 아니었다. 메어보나마나한 일. 추가비용을 치르고 다른 것으로 교환하는 데 옆에 있는 딸아이가 창피하다며 시종 입을 다물고있다. 입가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있는 나 역시 웃음을 무느냐고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 저 청년말이야, 아까 나한테 물건 갖다 준 사람 아니지?" "응, 다른 사람 같애." 그런데 저 청년은 왜 아까부터 우릴 보고 웃는거야?"

쇼핑을 끝내고 밖에 나오니 밤 10시였다. 하나 더 살 게 있었는데 벌써 저 집은 셔터를 내렸다며 남편은 끝까지 아쉬워했다.  

마지막 날, 공항 버스를 타기위해 때마침 내리기 시작한 세찬 빗줄기를 뚫고 나아가는데...느닷없이 남편이 어떤 가게로 뛰어 들어간다. 티셔츠 두 장을 단숨에 고르고 단숨에 값을 치른다. 동네의 허름한 구멍 가게 같은 옷가게에서였다. 그렇게나 찾던 밤색 티셔츠가 아니냐며 흥분해 있다. 말리고 어쩌고 할 겨를이 없었다. 딸아이와 나는 황당한 시선을 주고 받고 있는데 남편은 너무나 즐거워하고 있었다. 화가 나다가도 일순간 안쓰러움 같은 짠한 마음이 들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이삼일 후.  

"우리 또 홍콩에 갈 수 있겠지?" 

"또 가지 뭐." 

"쇼핑 또 하자. 당신 트레킹화 빨리 신어서 닳게 해버려. 그러면 또 사러 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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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의 여행 방법은 이렇다. 

비행기 탑승을 기준으로 전반과 후반으로 나눈다면, 전반은 내가 맡고 후반은 주로 남편이 맡는다. 여행지 선정 및 일정 짜기, 항공권 확보, 여권 관리 및 비자 신청, 가이드북 및 달러 확보, 숙소 탐색 및 예약, 배낭 꾸리기는 내가 전적으로 담당하는 데 물론 남편의 옷이나 소지품은 남편이 챙기긴 한다. 그것마저 내가 해주길 바라는 눈빛이 간절하지만 요것만은 아니 되옵니다. 중간 중간 일이 되어가는 과정을 수시로 말해주지만 남편은 건성으로 들어줄 뿐, 나도 그저 혼자 신이 나서 떠들고 있다고나 할까. 여행은 준비 과정 자체가 이미 여행에 들어간 건데 이 즐거움을 남편은 나누려하지 않는다. 모르는 걸까, 모르는 척하는 걸까. 

내가 완벽하게 꾸려놓은 배낭(이번 여행에서는 세 식구 모두의 배낭 무게를 합쳐도 10kg을 넘기지 않았다.)을 남편이 손에 들고 현관문을 나서면 그때부터 내 임무는 일단락된다. 그리고 일단 비행기에 탑승하면 무수리였던 나는 이제부터 여왕의 자리에 오른다. 남편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여행지 탐색에 나서기 시작한다. 준비 과정에서 온갖 잡다한 정보를 미리 확보한 나를 데이터베이스삼아 지도부터 머리에 각인시킨다. 훌륭한 참모 덕택인지 아니면 타고난 공간지각력 덕분인지, 남편은 내가 그간 노력해온 과정을 단숨에 소화해내는 건 물론 지도력과 통솔력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현지에 도착하면 고개를 몇 번 두리번거리면서 어디로 가야할 지 방향을 잡는다. 내가 남편을 보고 이 부분에서 매번 놀라는 것은 마치 사전 답사를 갔다온 사람처럼 현지 지리를 금방 파악한다는 점이다. "우리 몰래 먼저 와 봤었어?" 한마디 해주면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는 남편, 귀엽다. 

주로 인터넷으로 책을 구입하지만 어쩌다 서점에 가게 되면 꼭 들러보는 곳이 여행관련서적 분야인데, 이곳은 갈 때마다 조금씩 놀라곤한다. 진화라고 해야할까, 진보라고 해야할까. 자고 일어나면 도로가 생기고 건물이 들어서는 것처럼 자고 일어나면 가이드북이 나와있고 여행 에세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이런 변화는 여행 과정에서도 일어나는데... 

분홍색과 하늘색(파랑색)으로 알록달록한 쿠폰북 모양의 항공권을 만져본 적이 언제였던가 싶게 이제는 e-ticket이 일반적이다. 이 e-ticket에 겨우 적응해가고 있는데 이번에는 한 술 더 뜬다. 발권을 무인 발권기에서 하라는 거다. 이 무인 발권기를 kiosk라고 부른 다는 것도 대한항공의 집요한 홍보 때문에 알게 되었다. 이메일로 무인 발권 방법을 알려주기- 이 이메일을 읽어봤는지 확인 이메일 다시 보내기- 출발 전날 휴대폰 문자메세지로 kiosk 사용하라고 압력가하기...완벽한 확인 사살이다.   

항공권 구입 과정에서 처음에는 애를 먹었다. 여행사(<여행박사>)에 대마도행을 일단 예약부터 하고보니 부산대리점으로 자동 연결이 되어서 부산 사람들의 구수한 사투리를 듣게 되었다. 개별 여행은 힘들 거라는 직원의 상담에 의기 소침해져 며칠 대마도행을 고민하다 취소하고 결국 홍콩행 항공권 구입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는데, 그런데 의사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가 사는 곳이 인천이라고 말을 했었건만 부산 출발의 비행편을 예약하는가 하면 인천 출발은 서울 본사에서 알아봐야한다는 것이다. 세상에..자판 몇 번 두드려보면 다 나와있을텐데..귀찮아하는 게 역력하여 모두 취소시켜 환불 조치해버렸다. 

환불 조치 전에 그 여행사 사이트를 자세히 살펴보니, 항공권 구입을, (다른 사람의 도움없이) 내 마음대로 항공사를 선택하고 예약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래서 자신있게 환불을 요구했었는데 생각해보니 예약금을 환불하지 않고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같은 여행사이니까. 그러나 귀찮아하던 그 직원과 다시 통화하기가 싫었다. 사람이 오히려 불편한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여행사 직원이 친절할 필요가 없었던 이유가. 항공권 구입부터 공항에서의 발권이 모두 컴퓨터를 상대로 이루어지니, 80년대 초반 일찍 결혼한 친구들의 제주도 신혼 여행 때의 왁자지껄한 공항 배웅같은 것은 구전되어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이제 여행은 배웅도 환영도 없는 일상일 뿐이다. 

이렇게 컴퓨터를 상대로 한 일방적인 구입 행위를 통해 그나마 저렴해보이는 대한항공을 이용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숙소는? 어느 여행관련 사이트에 들어가보니 홍콩 시내 중심가(침샤츄이지역)에 한인 민박이 여러 개 있었다. 그 주소이다  

http://www.hansungmotel.com/ 

http://www.monicamotel.com/ 

http://www.parkmotel.co.kr/

http://www.motelgreenhouse.com/ 

이 외에도 더 있는 것으로 알고있다. 우리는 이 중에서 모니카모텔에 묵었다. 이 숙소에서 좀 놀라웠던 점은, 우리 나라 사람들의 여행층이 다양하다는 것이다. 부모 따라온 10대부터(우리 딸) 머리 희끗희끗한 60대까지를 이 짧은 기간에 모두 보았으니 말이다. 정해진 밥 시간에 식탁에 앉아서 밥을 넘기고 있으면 이들을 향한 호기심이 스멀스멀 일어난다. 말을 걸고 싶고, 누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주기를 은근히 기대해보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아무런 얘기도 오가지 않는다. 묵묵히 밥만 먹는다, 모두들. 낡은 작은 건물의 2층과 3층에 있는 이 모텔의 숙박객은 모두 한국인이다.

외국에 있는 한인 운영 숙소를 단순하게 구분하면 이렇다. 한국인만 찾느냐, 아니면 외국인도 찾느냐. 외국인도 이용하는 숙소라면 일단 기본 서비스는 갖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별 무리가없다. 그러나 한국인만 이용하는 숙소라면 최소 한가지 이상은 눈을 감아줘야한다. 화장실의 수도 꼭지, 샤워기, 변기 등의 시원찮음은 보통이다. 있잖은가.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70~80년대 관광지의 민박집같은 시설을 떠올리면 된다.  

내가 경험한 최악은 파리의 한인 민박이었다. 때는 90년대 중반. 허름한 창고 같은 임시 건물에 칸을 막고 합판을 깔아 마굿간 비슷하게 만든 조악한 시설물이었다. 게다가 아침, 저녁 밥으로는 김치 한 가지가 반찬의 전부였다. 같은 밥상에서 먹던 장기 투숙생이 남긴 계란 부침 한 조각이 그나마 주인 아주머니가 베푼 관용이라면 관용이었다. 그 계란 부침 한 조각에 남편은 끝내 눈살을 찌푸리고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당시 임신중이었던 나는 그 음식에 손을 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모멸감이라니. 그 주인 아주머니는 하루종일 기독교 성가를 크게 틀어놓고 늘 흥얼거리고 있었다. 차라리 뽕짝이라도 틀어놨더라면 덜 미웠을 텐데... 

우리가 3일간 묵었던 홍콩의 모니카모텔은 나의 오래된 구원(오래된 원망)을 한 방에 날아가게 해주었다. 아침, 저녁 식사가 모두 훌륭했다. 반찬을 세어보니 8가지, 국도 얼큰해서 하루의 피로를 풀게 해주었다. 물론 이삼일 있다보니 그 국이라는 것도 먹다 남은 반찬을 한꺼번에 넣어 끓인 것이긴 하지만 아침밥의 국은 그래도 늘 변한다. 해외에서 이 정도의 대접을 받아본 경험이 있었던가. 밥상만으로 이 모니카 모텔은 훌륭했다. 화장실 변기가 시원찮아 늘 물이 줄줄 새는 정도라든가, 세탁 건조기가 없어 세탁한 침구를 실내에서 선풍기로 말리는 바람에 숙소 전체가 세제 냄새에 잠겨있다던가 하는 열악한 부분이 있지만, 허나 숙박비가 저렴하지 않은가. 그래도 깨끗한 숙소가 그리워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늙어가나 보다. 그런데 왜 깨끗하고 멋졌던 숙소보다 늘 꾀죄죄하고 더럽고 보잘 것 없는 숙소만 기억에 남을까.

이 글은 믿을 수 없는 내 기억력을 위해, 나를 위해 남기는 정보이다. 다음에 홍콩에 다시 갈 때를 위한 글이다. 그래서 하나 더.  

  • 가이드북:"여행박사"에서 나온 소책자 <여행박사가 먼저 다녀온 홍콩배낭노트>와 얇은 가이드북 한 권이면 족하다. 이 이상이면 책에 치이게 된다. 가이드북이 진정 본연의 빛을 발할 때는 여행을 끝내고 나서이다. 가기 전에 읽으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여행 후에 읽게 되면 내용이 확실하게 머리에 들어온다. 마치 오답노트를 들여다보는 기분이랄까.  그러나 나는 때때로 가이드북 없는 여행을 꿈꾸어본다. 잘 만들어진 각종 여행 안내서 덕분에 실제 외국어로 길을 묻거나 도움을 청할 일이 거의 없다. 외국어를 잘해야만 외국 여행을 잘할 수 있다는 것도 이제는 수정되어야한다. 적어도 홍콩 같은 대도시에서는 말이다.
  • 교통카드:공항의 customers service center에서 옥토퍼스 카드 구입(보증금 50$ 포함 150$). 온갖 탈 것을 택시를 제외하고는 다 타는 것 같음. 심지어 자판기의 음료수나 뽑기도 할 수 있음. 다 쓰고 나면 출국 전에 구입한 곳에서 Refund, please. 하면 7달러를 떼고 정산해준다. 
  • 우리의 남대문 시장이라는 몽콕 시장은 사람에 치이는 곳, 차분히 쇼핑하기에는 shopper's lane 이 좋음. 몽콕 시장에 있는 왠만한 브랜드는 거의 다 이곳에 있음. 가격도 같음. 
  • 한여름은 피할 것. 야외 사우나라고나 할까. 
  • 홍콩을 상징하는 한 곳을 뽑는다면?....홍콩섬의 에버딘이라는 곳. 잠깐 눈길만 주고 왔지만 참 묘한 풍경을 보여준다. 현대식 고층 아파트를 배경으로 포구에 여러 가지 선박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든다. 꼭 합성 사진 같다. 
  • (2010.8.12 추가기록) 지하철 Centra Staion 과 연결되어 있는 홍콩역에서 간단하게 출국 수속을 밟을 수 있다. In-town checkin이라는 표지판을 따라가면 간단하게 짐을 부칠 수 있어서 나머지 홍콩 여행을 가볍게 할 수 있다. 단, 약간의 수수료가 부과되는 데 수속시 지하철 개찰구처럼 생긴 지점을 통과해야 하는데 옥토퍼스 카드를 사용하면 된다. 몇십 달러가 드는 것 같은데 멋모르고 카드를 찍고 들어가는 바람에 꼼꼼하게 살피지 못했다.(마트에서 물건값 생각지 않고 마구 집어 넣는 습관 때문이리라.)이렇게 몸을 가볍게 한 후 란타우섬으로 가서 케이블카도 한 번 타보고 쇼핑도 하면 되는데, 주말에 케이블카를 타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 엄청난 인파 때문이다....실컷 시간을 보낸 다음에 공항 가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빙빙 돌아가고 갈아타고 하는 전철은 무시하시라. 란타우섬의 통총역 가까이에 있는 버스터미널에서 S1 버스를 타면 10분이면 공항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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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간:2009년 8월 14일~8월 17일 /*환율: 홍콩1$=약 162원

서울 사는 사람이 부산이나 혹은 광주쯤 갔다와서 기행문 따위를 쓰는 일이 있을까?  

홍콩이 그렇다. 바다 건너 다른 나라라기 보다는 좀 멀리 떨어진 여느 도시 같은 인상이기 때문이다. 홍콩과의 실제거리라는 것이, 서쪽 끝인 인천에서 동쪽 끝인 강릉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이기도하다. 연휴나 휴가 때면 10시간 정도는 너끈히 걸리고도 남는 국토 동서횡단에 시달려본 사람은 알 것이다. 홍콩까지의 비행 시간, 3시간, 마음만 먹으면 쉽게 갈 수 있는 거리라는 것을. 

캐세이퍼시픽 항공의 비행기를 싼 맛에 몇 번 타보면 언젠가는 홍콩에 내릴 기회가 오리라고 생각하기 쉽다. 내 얘기다. 그래서 홍콩은 애써 피했다. 어차피 한번쯤 가게 되리라 생각했었다. 유럽 갈 때, 인도 오갈 때, 툭하면 들르는 도시가 홍콩이었다. 그러니 나의 홍콩 경험이란 것이, 참새 방앗간 같다고나 할까, 다음 비행을 기다리며 공항에서 시간 죽이기와 하룻밤 잠을 자면서 날짜를 보내는 bed city(?)가 전부인 셈이다. 결국은 지금까지 기회가 없었다는 얘기다. 흠, 부산에 몇 번이나 가봤던가. 광주는? 마음만 먹으면 주말에라도 갔다올 수 있을 것 같지만 어디 그런가. 

이번 여름 애초의 목표 여행지는 대마도였다. 늘 예산 걱정에 여행지 선정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올해는 특히 대공사에 들어간 남편의 치과 치료로 선뜻 여행에 나서기가 두려웠다. 게다가 늘 나를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내 불우하고 불쌍한 부모형제를 생각하면 우울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학교에서는 방과후 수업으로 몸의 균형이 깨져 몸은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여름방학마저 열흘간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방과후 수업을 해야만 했다. 그래도 별도로 받는 이 방과후수업 수당 덕에 옴짝달싹할 수 있었으니 한편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일찌감치 대마도를 목표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책을 읽어나가다 보니 의외로 공부하는 맛이 났다. 그간 제대로 아는 것도 없었다는 한탄 내지는 자책도 들어 모처럼 겸손해질 수 있었다. 대마도와 관련된 덕혜옹주까지 접근하게 되니 대마도의 역사 지도가 머리에 그려지기도했다. 특히 주강현의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를 통해서 역사를 보는 관점이 육지에서 바다로 확장되는 경험도 하게 되었는데 특히 바다를 무대로 세계를 주물렀던 제국주의 국가들의 활약상(?)은 정말 흥미진진한 읽을 거리였다. 이 책은 주로 우리나라를 둘러싼 식민 제국의 내용들이지만 이 책이 제시한 관점으로 아시아 일대의 국가들을 들여다본다면 무척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홍콩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

 대마도행이 홍콩행으로 바뀐 결정적인 이유는 여행사 직원의 시큰둥한 반응 때문이었다. 대마도는 대중 교통이 여의치않아 패키지로 가거나 자동차를 렌트해야한다고 하면서 걱정스럽게 상담을 해주는 것이었다. 나는 물론 운전면허증마저 없고, 남편은 해외 운전 경험 전무. 패키지 여행은 아직 할 나이가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고....부산 한 번 제대로 못봤다고 날 잡아 부산 가듯 그렇게 가게 되었다, 홍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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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수치 솔레길 트레킹(2009년 8월 5일)  


 *법수치의 소재지는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법수치리이다.   

 

 등산로가 아닌 임도를 따라 트래킹을 다녀왔다. 법수치 계곡에 작은 오두막을 지은 지 4년 만에 실행에 옮긴 일이었다.

   임도. 내가 이 단어를 접한 지는 몇 년 되지 않는다. 임도란 산불방지 등 산림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산에 만든 폭 3m~7m의 인공 도로이며 당연 비포장이다. 아무리 보아도 2m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3m 너비 도로의 실제가 궁금해서 언젠가 직접 실험을 해 본 적이 있다. 30cm 자를 두 번 연속해서 60cm를 재는 것처럼 내 몸이 자가 되어 도로에 누워보니 내 키로 딱 두 번 길이다. 정확하다.

   임도는 주로 7~9부 능선 높이쯤 되는 것 같은데 물론 아무나 들어가게 하는 것은 아니리라. 남편과 딸아이는 초입에 있는 바리케이드를 돌아서 길에 들어섰고 나는 바리케이드 밑을 통과했으니 말이다. 몇 해 전 산불로 큰 피해를 입은 양양군인지라 산불 관리는 엄격한 편으로 산불이 많이 발생하는 기간에는 산의 초입에 산불 감시인이 상주하다시피하며 산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남편과 내게는 입산금지 지역에도 들어갈 수 있는 ‘증’이 하나씩 있다. <명예산림보호지도원증>이 그것이다. 2007년 1월, 닷새에 걸친 산림청 연수를 받은 덕분에 얻을 수 있었던 ‘증’이다.

  그런데 이 ‘증’이 먹히지 않는 녀석이 있으니 바로 뱀이다. 그렇잖아도 뱀과 공생하는 동네인데 아무래도 이 뱀의 존재에 자꾸 온신경이 집중되는 거다. 이곳은 청정 지역이라 모기마저 얼마나 에너지가 충만한지 한 번 물리면 몹시 가렵고 그 자국도 한참이나 남아있어 주위 사람들이 피부병으로 오해할 정도가 된다. 이런 곳에 뱀이라니. 모르긴 몰라도 한 번 물리면 고생깨나 할 것이다.

  하루 전, 양양 시내에 나가보니 마침 장이 서는 날이다. 좌판에서 생산지 불명의 작은 금속 방울 두 개를 5,000원을 주고 샀다. 이것들을 남편과 딸아이 등산화에 매달아보니 나름 낭만적이고 음악적이면서 무슨 부적마냥 마음 한 구석이 평온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뱀이 청각이 발달했나? 하여튼 방울을 달고 출발은 했는데 그래도 여간 불안한 게 아니다. 트래킹용 샌들을 겁도 없이 맨발에 신고 있는 나는 방울도 없어 더욱 불안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란 걸을 때마다 스틱을 땅바닥에 치면서 땅을 울리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 스틱이지 마당가에 굴러  다니는 부러진 나뭇가지를 남편이 내 키에 맞게 잘라준 것일 뿐, 남편 말마따나 뱀이 나타나면 뱀을 때려잡아야 할 텐데 제발 땅울림에 스스로 물러나 주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그게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길 뿐이다, 뱀아, 제발.....

 

  계속 임도를 따라 걷는다. 길은 셋이 나란히 걸을 수 있는 폭이지만 빗물에 쓸려 내려가서 생긴 바닥의 홈 때문에 딸을 앞세우고 종대를 이루며 걷는다. 장대한 산들이 겹겹이 둘러싸여 있어서 산이 깊고 그늘도 더불어 깊다. 차량이 다니는 도로라서 경사도 그리 급하지 않아 불평 많은 딸아이도 소리 없이 잘 걷는다. 지리산의 오밀조밀한 오솔길이 살짝 그리워지기도 하지만 인적 없는 산길을 호젓하게 걷는 맛도 일품이다. 숨바꼭질하듯 꼬불꼬불한 산길을 걷다보면 어느 새 저 멀리 계곡과 집들이 빼꼼히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아, 저건 누구네 집이네! 반가움도 잠시 어느새 잡풀들로 좁아진 길을 헤쳐가면서 걸어야한다. 이때는 긴장감으로 스릴 만점이다. 꼭 풀 숲 어디선가 뱀이 두 눈을 부릅뜨고 우리를 주시하고 있을 것 같다. 막대기를 더 세게 땅바닥에 두드리며 걷다보니 팔목이 시큰거린다. 그러다가도 야생 산딸기라도 만나게 되면 금세 호들갑을 떨게 된다. “시식용이다.” 라는 남편의 너스레에 즐거워하면서 너 하나 나 하나 먹는다.

 

  2시간 30분이 걸리는 임도를 벗어나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산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를. 그 품이 얼마나 넉넉한지를. 산에서 내려와 이어지는 도로는 진부 방향 강릉 국도인데 아직은 비포장도로라서 옛 길을 따라 걷는 정취는 있다. 허나 너무 덥고 햇볕이 따갑다. 이때부터는 딸아이의 불만이 본격적으로 터지기 시작한다. “내가 (청소년이지) 성인이냐고...(궁시렁 궁시렁)”하면서도 잘만 걷는다. 다시 어성전으로 이어지는 포장도로. 더욱 고역스러워진다.

  어성전의 <주안식당>에서 메밀국수 한 그릇씩을 단숨에 비우고 다시 법수치 계곡으로 향한다. 이제부터는 펜션 단지가 이어지는 길이다. 처음 이 법수치에 왔을 때부터 제일 해보고 싶은 일 중의 하나가 여기 어성전부터 걸어서 올라가보는 것이었다. 드디어 오랜 염원이 이뤄지는 날이었는데....

  트래킹 전, 우리의 산행을 아낌없이 후원해주시던 펜션 <산골여행>의 주인아저씨가 멀리서 우리를 보자 반가워하신다. 여기서 다시 8km 정도는 가야 우리 오두막이 나오는데 더 이상 걷는 것은 무리이다 싶었다. 맨발에 신은 트래킹 샌들도 별 수는 없었다. 물집이 잡히고 살갗이 벗겨져 쓰라렸다. 신제품 트래킹화만 믿었더니 역시 이 고전적인 문제는 해결할 수 없나보다. 이 문제를 해결해주는 트래킹 신발을 개발한다면 대박 중의 대박일 텐데....

 

  결국엔 우리의 오랜 친구이자 이웃인 법수치 주민인 무엽이 엄마가 차를 끌고 우리를 데리러 왔다. 못이기는 척 차에 오른다.


  미완의 트래킹이었다.  

 

  이 길을 우리는 “솔레”라고 부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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