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행궁, 공방거리의 어느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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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번 벼르다가 드디어 명재고택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왔다. 다녀와서 다른 사람들이 올린 글과 사진을 보고서야 명재고택이 매우 유명하고 유서 깊은 곳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찍어 온 사진보다도 훨씬 잘 찍은 사진들이 많다는 것도.

 

워낙 유명한 곳이라 조금만 수고를 하면 인터넷으로 온갖 정보를 알 수 있는 곳이라 내 어눌한 설명이 오히려 어줍잖다. 사진만 몇장 올린다.

 

 

 

장독대 뒤로 보이는 집이 명재고택이다. 사실 나는 집보다 항아리 속이 궁금했으나 열어보진 않았다.

 

 

 

 사랑스러운 사랑채.

 

 

 

사랑채 누마루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 풍경이 액자 속에 들어가 있는 듯하다. 일본 교토에서도 이러한 액자 속 풍경을 감상하는 절이 있다. 차이점이라면, 일본은 잘 꾸며놓은 인공적인 정원을 감상하기에 정원가꾸기에 온갖 정성을 기울이는데 반해, 이곳은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감상한다는 점이다. 일본이 폐쇄적이라면 우리는 개방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달리 생각해보면 이렇게 높은 곳에서 온동네를 내려다본다는 건 일종의 감시 기능도 담당했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아래 사진은 교토에서 버스로 1시간 떨어진 오하라의 <호센인>에서 찍었다. 액자정원으로 유명한 곳이다.)

 

 

 

 

 

사랑채 누마루 앞에 있는 금강산 모형의 석림. 일본의 가레산스이식 정원이 떠오른다. 가레산스이는  모래와 바위 등으로 바다와 섬 같은 현상을 상징적으로 묘사한다는 정원양식이다. 소꿉장난 같은 이런 모형 감상은 한국과 일본 누가 원조일까?

 

(아래 사진은 일본 교토의 료안지에서 찍은 사진이다. 전형적인 가레산스이식 정원이다.)

 

 

 

(아래 사진은 료안지 근처의 여느 가정집)

 

 

 

 

 사랑채 누마루 내부. 정면에 보이는 하얀문 뒤에 방이 붙어 있는데 그 내부 모습도 이와 비슷하다. 이런 곳에서 "너는 평생 책만 읽어라."라는 팔자 좋은 형벌(?)이 내게 떨어진다면 평생 달게 받으련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했다.

 

 

 

우리 가족이 머물렀던 작은 사랑채방. 8만원의 하루 숙박비가 아깝지 않은 곳.

 

 

 

우리가  묵었던 사랑방에서 내다본 바깥 풍경. 달밤에 저 앞쪽으로 보이는 400년 넘은 고목 사이로 떠오르는 달을 감상하면 절경이라는데 초저녁부터 이 지역의 특산막걸리인 <뻑뻑주>를 마시고 자느냐고 달구경을 못했다. 고상하고 우아해지려면 아직 멀었다. 뻑뻑주맛? 이름만큼 뻑뻑하진 않고 탄산음료처럼 가볍고 상큼하다.

 

 

 

 

안채의 뒤란 풍경. 저만한 장독대를 옆에 끼고 살아보는 게 내 꿈이라면 꿈.

 

 

 

딸아이가 묻는다, 고르바초프가 누구냐고. "응? 있어. 아주 유~~명한 사람."  사랑채엔 주인되시는 종손분과 고현정이 함께 찍은 사진도 액자에 걸려있다.

 

 

사진은 그렇고.....점심을 먹기 위해 논산 화지중앙시장이란 곳을 찾아갔다. 시장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으나 밥 먹을 곳은 마땅치 않았다. 식당을 겨우 찾으면 문이 닫혀있기 일쑤였는데, 하여튼 구석에 보리밥집이 하나 있어서 쭈뼛거리며 들어갔다. 출입문을 열자 할아버지 서너분이 식사를 마치고 나오셨고 우리는 미처 치우지 못한 식탁에 플라스틱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3,000원을 넘지 않는 메뉴 중에서 2,500원짜리 백반을 주문해서 먹었다. 찰기 없는 밥 한공기와 삭기 시작한 배추김치, 알타리무김치, 고춧잎장아찌, 콩나물, 토종된장국이 나왔다. 배도 고팠지만 밥을 절대로 남겨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박하고 절절한 기운이 들어간 밥상이어서 남김없이 다 먹었다.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께서 차려주시는 밥상이라 조심스럽기도 하고 왠지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젊은 것들이 앉아서 밥을 받아 먹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밥을 거의 다 먹었을 때쯤 할머니 세 분이 2~3분의 시차를 두고 들어오셨다. 시장에서 장사하시는 두 분, 장보러 나오신 할머니 한 분. 늦게 오신 분은 다른 분들의 식탁에 숟가락 하나 더 얹어 드시면 되었다.

 

계산을 치르고 있는데 할머니들 얘기 소리가 귀에 들어온다.

 

"할머니, 김밥 같은 거 잡수시지 마시고 이런 밥을 드세요. 김밥은 금방 꺼져요."

 

식당을 나서니 금방 배고파지기 시작했다. 과일, 시루떡, 약식, 빵과 쿠키 등을 한아름 사들고 명재고택으로 향했다. 2,500원이 아까워 1,000원짜리 김밥으로 점심을 해결하시는 할머니에 대한 안쓰러움과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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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이 필요한 시간, 교토여행(2013.1.11.~1.15)

 

 

󰁯일정: 1/11~12-교토 시내

           1/13 - 오하라, 교토시내

           1/14 - 키노사키

           1/15 - 키노사키에서 오사카간사이공항으로 이동

 

 

 

기요미즈데라(淸水寺)

도착 첫 날. 이미 시간은 오후로 접어들기 시작했는데 저가항공기를 타고 온 탓에 제대로 된 밥 한 끼 먹지 못했다. 공항에서 먹은 아침밥은, 15분을 기다려야하는 된장찌개, 순두부찌개를 시간상 주문하지 못하고 제일 빨리 먹을 수 있는 비빔밥을 시켰다. 그것도 입맛 없다는 누군가의 주장에 따라 4명이 2인분을 나누어 먹었다. 점심은 간사이공항에서 자그마한 핫도그 하나씩을 먹은 게 전부였다.

 

숙소에다 일단 짐을 풀고 전철로 두 정거장되는 거리를 걸어 다시 교토역에 왔다. 물어물어 버스를 타고, 또 물어물어 기요미즈데라로 올라가는 골목에 접어들었다. 예전에 왔을 때는 청수사를 북쪽 방향에 두고 걸어 올라갔는데 이번에는 정반대 방향으로 올라간다. 지난번에 내려왔던 길로 올라가게 되니 잠시 방향감각이 어리둥절해진다. 가뜩이나 동서남북 구분도 제대로 못하는데.

 

교토 시내에서 제일 예쁜 골목길을 걸어 올라간다. 다양한 상점들이 가장 예쁘장한 모습으로 어깨를 마주대고 있는 곳이어서 눈요기만으로도 이내 즐거워지는 곳이다. 그러나 허기에 지친 우리들에겐 말 그대로 그림의 떡, 몸은 나도 모르게 시식코너가 있는 상점을 기웃거리다 접시에 담긴 무료 시식으로 제공된 각종 간식거리를 찾아 하나 둘 입에 넣기 시작한다. 한참을 골고루 먹다가 그냥 나오기가 미안해서 한 봉지 사들고 나오지만 이미 네 명이 먹은 분량이 이 한 봉지 이상이어서 얼굴이 붉어지지 않을 수 없다.

 

맛있어 보이는 교토 전통 만두를 한 개 사서 4등분해서 먹기도 하고, 이렇게 이것저것 먹어보고 마셔보느라고 청수사 가는 길이 영 더디기만 하다. 해는 저물어 가는데 언제 가려고 이러시나들.

 

청수사. 봄에 벚꽃 구경이 볼만하다는데 늘 여행이 한여름 아니면 한겨울인 내게 청수사를 봄에 볼 확률은...명퇴이건 정년퇴임이건 퇴임이후에나 가능한 한 일일 터. 벚꽃 흐드러지게 핀 모습을 그저 상상으로나마 그려볼 수밖에.

 

 

 

기타노텐만구(北野天萬宮)

잔인하다. 발갛게 꽃눈이 맺혀 머지않아 붉은 꽃망울을 터트릴 매화를 끝내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움을 넘어 잔인함을 느끼게 한다. 2월 25일에 매화 축제가 열린다고 하니 한 달 보름만 지나면 만개한 매화를 볼 수 있으련만 그건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 일뿐이다. 내가 직장에 몸담고 있는 한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일 터. 머릿속으로나마 그려보는 매화는 그래서 더욱 잔인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기타노텐만구에서였다.

 

기타노텐만구는 ‘학문의 신으로 존경받는 스가하라 미치자네를 모신 신사로 합격을 기원하는 수험생들의 참배가 가장 많은 신사’(<교토! 천년의 시간여행>이현진 지음. 한길사)라고 하더니 과연 학생들과 자녀를 앞장세운 부모들로 붐빈다. 보통 500~800엔 하는 입장료도 없으니 우리네 동네 공원 내지는 사랑방 같은 역할을 하는 듯싶다.

 

이곳을 굳이 가보게 된 사연은 이렇다. 금각사를 둘러본 후, 20여 분을 걸어서 가레산스이식 정원의 대표격인 료안지에 가서 모래밭에 섬처럼 심어놓은 작은 바위들의 개수가 15개인지를 확인하고, 근처에 있다는 유명한 우동집에서 점심을 먹을 참이었다. 그런데 그 우동집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지나가는 동네 아주머니에게 묻고, 동네 총각에게 묻고, 다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학생을 세워 길을 물었다. 간밤에 숙소에서 일본어공부를 열심히 한 인자가,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웠던 기억을 최대한 되살리며 일본어로 말을 붙였다. 그러다가 잠시 방향을 놓고 설왕설래하면 이내 내가 영어로 물어보는 식이었다.

 

자전거를 탄 20대 초반의 남학생, 50대의 외국인 아줌마들 넷이서 길을 가로막고 물어대며 빤히 쳐다보니 모른다고 가버릴 수도 없어 이마에선 비질비질 땀이 솟기 시작한다. 와중에도 간식거리를 좋아하는 종학은 좀 전에 샀던 곶감을 열심히 먹고 있고 나머지 셋도 질세라 곶감 꼬투리를 알뜰하게 발라내고 있는데, 난감해하던 이 학생이 자기를 따라오라고 한다. 큰 도로변까지 나란히 걸어가며 몇 마디 물어보니, 이 동네에서 살고 있으며 어떤 대학에 다닌다고 하는데, 내가 알고 있는 대학은 교토대학과 도시샤대학 정도에 불과하니 그 대학 이름은 듣고 있어도 듣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이 우동집을 찾기는 틀린 것 같아 다음 목적지인 기타노텐만구로 질문의 방향을 돌렸다. 종학이가 스마트폰으로 찍어온 정보에 의하면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래서 걸어갈 요량으로 물었더니 왼쪽, 오른쪽, 큰 길, 사거리 하며 설명이 한참 길어진다. 언뜻 10번 버스를 타도된다고 한다. 하여튼 이쯤에서 이 학생을 놔줘야 될 것 같았다. 얼른 카메라를 꺼내 이 학생과 친구들을 향하니, 방긋 웃으며 두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는 이 학생. 귀엽기도 해라. 우리만 우물우물 먹고 있는 게 미안해서 좀 전에 손에 곶감 하나 쥐어줬는데 그 곶감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겠다.

 

마침 10번 버스가 정류장에 들어왔다. 하마터면 엊저녁부터 감기로 고생하는 성란을 또 한 번 고생시킬 뻔했다. 500엔짜리 교토 일일투어 버스카드만 소지하면 하루 종일 얼마든지 시내버스를 탈 수 있어서 마침 한 장씩 들고 있는데 어제에 이어 오늘도 본전을 못 뽑고 있었다. 세 번만 타도 본전을 뽑는데 말이다. 허나 여행을 하다보면 곧잘 그렇게 되곤 한다. 일단 걷다보면 웬만한 거리는 그냥 걷게 되는 것이다. 버스비가 아깝거나 택시요금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그냥 그렇게 된다. 게다가 우리 네 친구들은 왕복1시간이 훨씬 넘는 밭길, 산길, 과수원길 등을 걸어야만 다닐 수 있는 중학교를 함께 다녀서 걷는 일에는 기초가 튼튼하다. 그것도 대단히 튼튼하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 기타노텐만구에 왔다. 내 입가에선 나도 모르게 미소가 솟는다. 왜? 대학입시를 앞둔 딸내미를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어서? NO! 내가 대학 들어갈 때 누구 하나 날 위해 교문에 엿가락 한 마디 붙이거나 절에 가서 백일기도를 하거나 하는 일이 없었거늘 나 역시 딸을 위해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터에 남의 나라 신사에 와서 그런 기도를 한다고 좋아하겠는가. 내가 웃는 의미는, 드디어 교토에서 내가 와보지 못한 새로운 곳에 왔기 때문이다. 물론 딸내미를 위해 부적을 나무에 엮고 오긴 했지만.

 

인도의 아그라에 사람들이 가는 이유는 그곳에 타지마할이라는 불후의 건축물이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남편과 딸내미와 인도여행을 할 때도 아그라에 갔었다. 그러나 나는 타지마할을 보러가지 않았다. 비싼 입장료도 마음에 안 들었지만 나는 이미 타지마할을 두 번이나 보았기 때문이다. 처음 타지마할을 보았을 때는 감동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런 경험은 처음 한 번으로 족하다는 것을 두 번째로 타지마할을 보았을 때 절실히 깨달았다. 그건 흡사 첫사랑과 같은 것이다.

 

금각사. 이번 여행으로 세 번째가 되지만, 친구들과 함께 하는 소중한 시간이라 그냥 보았다. 자그마한 이층 건물에 금박을 입혔기로서니, 유명한 소설 <금각사>를 몇 번 읽었기로서니, 금각사가 마음에 새록새록 다가오는 것은 아니었다. 유럽 가는 도중 경유지였던 도쿄가 내게는 일본 여행의 시초였는데 그때 공항에서 구입한 금각사 모형의 열쇠고리에 오히려 더 추억이 담겨 있다.

 

드디어 새로운 곳에 왔다는 기쁨도 잠시 개화 직전의 매화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피지도 않은 매화에 생명을 불어넣듯 봄기운을 실어 꽃을 피우게 하자니, 그것도 머릿속 상상력으로 꽃을 개화시키려니 가슴이 답답해지고 힘은 준 눈에서는 눈물이 나는 듯도 했다. 개화 직전의 꽃눈이 맺힌 매화가, 그래서 잔인하게 다가왔다.

 

온통 매화나무 천지인 기타노텐만구를 기억할 것. 매화가 만발했을 때 이곳에 온 분이 계시다면 사진 한 장 잘 찍어서 내게 보내주시길.

 

 

 

니조조

새삼 우리나라 기독교의 편협함의 상징인, 친구 인자를 흉보자고 하는 말은 아닌데 이렇게 말하지 않고서는 이 친구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일본의 교토라는 곳이 역사 유적지가 넘쳐나는 곳이지만 대부분이 절 아니면 신사, 아니면 성이라서 어떻게든 불교와 연결되는데, 절이라면 질색을 하는 인자 입장에서는 이렇게 난감한 여행 장소도 없었을 것이다. 친구들과 함께 하는 여행이라 따라왔지만 하필 이런 곳이람, 하고 마음속이 매우 시끄러웠을 것이다.

 

가는 곳마다 부처님과 각종 잡신들로 넘쳐나니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인자는 아예 입장을 거부하거나 아니면 잠깐 들어가는 척하면서 이내 밖으로 나와 혼자서 주변만 맴맴 돌기가 일쑤였다. 료안지에서도 그랬다. 비싼 입장료를 냈는데 영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만 서성거리기에 “여기는 절이 아니야. 그냥 유명한 정원이야. 안보면 후회하니까 잠깐 들어와 봐.”라고 말하고 보니 료안지의 ‘지(寺)’자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종학이와 나는 음흉한 눈빛을 주고받았음을 인자는 알는지 모르겠다.

 

이 니조조에서는 그래도 인자가 입장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러면 뭐하나. 화장실에 가느냐고 잠시 떨어진 사이에 길이 엇갈려 종학이와 나는 경내를 마감 시간까지 둘러보았지만 우리 둘을 기다리다 못한 인자와 성란이는 입구에서 장승처럼 제자리에 못 박혀 있어야했다.

 

그러나 이 니조조는 구석구석 둘러보았다고 해서 이곳을 안다고 할 수 없는 곳이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이어지는 걸출한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제대로 알았다고 할 수 없는 곳이다. 이들을 둘러싼 재미있는 표현들, 이를테면 “오다가 쌀을 찧어 도요토미가 반죽한 떡을 도쿠가와가 먹었다”는 이야기나, ‘울지 않는 새’에 관한 이야기는 흥미롭기 그지없다. 오다 노부나가는 “울지 않는 새는 베어버린다.”고 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울지 않는 새는 울게 만든다.”라고 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울지 않는 새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라는 이야기 등은 얼마나 유명한가. 이 이야기에 깃들인 역사적인 사실들은 또 얼마나 다양할까.

 

이 중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건립하여 교토에서 쇼군이 머물 숙소로 이용했다는 이 니조조는 이들의 권력 관계, 역사적인 배경 등을 모르면 이곳이 제대로 다가오지 않을뿐더러 보아도 보았다고 할 수 없는 곳이다. 그렇다고 32권짜리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도전하는 것도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을 9권까지 읽었다는 종학이가 이곳을 두 번째 와보는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마음에 담았을 것이다. 명퇴한 종학이가 정말 부럽다.

 

앞에서 ‘걸출한 인물들’이라고 쓰고 보니 이 세 인물을 모두 훌륭하게 보는 것 같아 좀 조심스러워진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인 히데요시를 어떻게 훌륭하다고 말하겠는가. 교토에 가게 되어 혹 교토국립박물관에 간다면 반드시 가봐야 할 곳이 있다. 박물관 옆에 히데요시 신사가 있는데 그 신사 맞은 편 길 건너 어린이놀이터 옆에 큰 무덤이 하나 있다. 미미즈카, 즉 귀무덤이다.

 

 

임진왜란 때 우리 선조들의 귀와 코를 베어 와서 자신들의 전승을 증명했다고 하는데 바로 그 귀와 코를 묻어놓은 곳이다. 지난 번 식구끼리 왔을 때는 근처 꽃집에서 꽃 다발을 사서 무덤 앞에 놓고 나란히 서서 큰 절을 했었다. 물론 굳게 잠긴 출입문 때문에 월담을 해야 했다. 그때는 한여름이라 무덤위의 잡초가 무성하여 마음을 아프게 했는데 이제는 깔끔하게 관리가 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 무덤을 보는 마음은 역시 편하지 않다. 상상력이 발동된 인자가 드디어 훌쩍거리며 눈물을 닦아낸다. 함께 울어주지 못해 미안해 인자야, 대신 사진 한 장 남겨주마. 귀무덤 앞에서 인자는 이렇게 울었노라고.

 

어떤 역사학자가 나이가 들어 교토에 와보고는 진작 교토에 와보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고 한다. 일본의 역사, 하면 그게 교토의 역사고, 교토의 역사가 바로 일본의 역사이기 때문이란다. 역사학자의 한탄에야 미치지 못하겠지만 이곳 교토에서는 내 지식의 보잘 것 없음을 재확인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그 틈을 살짝 상상력으로 메워 보려고 하지만 시도부터가 어불성설이다.

 

보면 볼수록, 알려고 하면 할수록, 수많은 인물과 수많은 명소가 마구 뒤엉키는 곳, 그곳이 교토다.

 

 

 

키노사키

드디어 교토를 벗어난다. 역사학자도 아닌 내가 교토에 세 번씩이나 가게 되니 사실 식상한 면이 없다고 말할 수 없었다. 교토에 관한 혹은 일본에 관한 책은 읽을수록 가슴이 답답해졌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여행이라는 게 공부하러 가는 것이 아니잖은가.

 

그러던 중 <일본의 작은 마을>(서순정 지음)이란 책을 도서관에서 보게 되었다. 그 책에 교토나 오사카에서 직행열차로 3시간 거리에 떨어져있다는 키노사키온천이 소개되어 있었다. 외국인보다 일본인이 많이 찾는다는 곳이었다. 일단 이번 여행에 새로운 곳을 추가할 수 있다니 내심 반가웠다. 먼 곳이 아름답다, 고 얼마 전에 동유럽 일대를 한 달 넘게 다녀온 종학이와 성란이지만 일본은 처음이라서 무조건 내가 가자는 대로 따라들 온다고 하니 그래 키노사키를 살짝 집어넣기로 한다. 주최 측의 농간을 부릴 만하다.

 

때마침 간사이 지방 일대를 4일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다는 JR열차 패스(간사이와이드패스)가 있다는 정보를 종학이가 알아냈다. 여행사<여행박사>에 알아보니 할인 판매하고 있었다. 여행 임박해서 구입하기로 하고 우선 숙소가 다급했다.

 

키노사키 얘기에, 만났다 하면 어디 온천이 어떻고 어디가 좋으니 함께 가자는 둥 온천매니아인 인자가 누구보다도 좋아한다. 그래서 내친 김에 나의 오랜 로망인 일본의 전통숙박인 료칸을 시도해보기로 한다. 일본 사람들은 료칸숙박에 대한 어떤 열망 내지는 애정 같은 게 있다고 하고, 오래된 료칸은 손님을 함부로 받지도 않고, 료칸에서의 저녁 만찬에 대한 이야기는 왜 그렇게 또 구미를 당기게 하는 지, 게다가 료칸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온천은 이야기 자체가 낭만이었으니, 필생에 꼭 한 번은 맛을 봐야만 하는 것이 료칸이었다.

 

교토에서 민박을 직접 인터넷으로 예약했듯 료칸도 직접 인터넷으로 예약하기 위해 두어 곳에 이메일을 보냈지만 돌아오는 답신이 없었다. 전통료칸이라더니 인터넷예약은 전통이 아닌가? 일본어만을 고수하는 게 전통인가? 혼자 퉁퉁거리다 결국 료칸전문사이트를 발견해서 예약을 마친다.

 

교토에서 4일 째 되는 날, 밤새 비가 오더니 아침에도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그칠 기미가 없다. 전철정거장까지는 도보로 3분 정도, 이 정도 비라면 예전 우리가족끼리 여행이라면 생각해볼 여지없이 걸어가련만, 이 우아한 아줌마들은 걸을 생각들이 없는 데 특히 인자는 앞장서서 대로변에 나가 택시를 불러온다. 그래 여행지에서 택시도 한 번 타봐야지.

 

간사이와이드패스만 있다고 해서 기차 타는 게 바로 해결되지 않았다. 전날 알아본 시간표상 10분 정도 남았으니 걸음을 빨리하면 탈 수 있지 않겠냐고 종학이가 재촉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바우처로 된 패스를 진짜 열차패스로 바꾸는 일이 남았기 때문이다. 몇 번을 물었을까? 교토 역사는 생각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복잡하지만 생각보다 훨씬 절차가 간단하고 열차에 오르기도 생각보다 훨씬 쉬웠다. 다만 진짜 열차패스만 있다면.

 

여기저기 헤맨 끝에 2층 중앙 정면에 있는 티켓사무실로 가서 드디어 열차패스로 바꿨다. 알고 보면 별 것 아니고 쉬운 일이지만 제대로 된 정보를 모르고 달려들면 몇 배의 노력과 인내가 필요한 일이다. 새삼스러운 얘기도 아니건만 때때로 새삼스럽고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인도여행에서 기차표만 제대로 끊을 줄 알게 되면 인도여행은 마스터했다고 할 수 있으며 어떤 여행도 어렵지 않으리라는 말이 있어서, 내심 이 정도쯤이야 하고 자신하고 있었건만 여기는 또 다른 세계였다. 인도가 아니란 말이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우왕좌왕하고 10시 20분에 드디어 키노사키행 열차에 올랐다.

기차에 오르니 조금 전의 의기소침도 눈 녹듯 녹아버려 어느 새 새로운 ‘소풍’을 즐기기 시작했다. 중학생 시절로 되돌아가 재잘재잘, 조용한 일본 사람들처럼 조용히 재잘 거리며 간식을 먹는 둥 즐거웠는데...

 

좀 전에 검표를 하여 우리 일행이 키노사키에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차장아저씨가 얼마 후 갑자기 우리에게 오더니 계산기를 보여주면서 4천 엔이 넘는 추가요금을 내라고 한다. 웬 추가요금? 그러면 벌금? 우리가 뭔 잘못을 저질렀나? 일인당 7천 엔짜리 열차패스도 있는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바로 전 역인 후쿠치야마에 정차하면서 열차내 방송으로 무엇인가 열심히 반복하던 말이 떠올랐다.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 중에 키노사키가 여러 번 들어있었다. 뭐였지?

 

영어 한 마디 못하는 이 30대 중반쯤 된 차장아저씨나 일본어 한두 마디 겨우 하는 우리나 답답하기는 매한가지. 겨우 파악한 내용은 우리가 타고 있는 열차는 키노사키에 가지 않는다는 것과 JR선이 KR선으로 바뀌어서 우리가 갖고 있는 패스는 사용할 수 없으니 추가요금을 내라는 이야기였다. 돈은 그렇다 치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키노사키에 가란 말인가? "What should we do?" 외쳐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이때, ‘짠’하고 귀인이 나타났다. 출입구 가까이에 앉아가던 젊은 애기엄마가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파란 눈에 머리가 검고 눈빛이 선하다. 다급하게 묻는다.

“Do you speak English?"

”한국인이시죠?“

”.....?“

“남편이 한국인이구 아버지가 일본인인데, 지금 친정에 가는 길이에요. 신제주에 살고 있어요.”

 

다음 정차역이 고향이라는 이 귀인을 따라 우리도 내렸고 역무원의 친절한-말 그대로 친절한-호위를 받으며 다시 한 량짜리 완행셔틀열차를 타고 후쿠치야마로 돌아갔다. 후쿠치야마에서는 키노사키행을 기다렸다가 무사히 키노사키로 향했다. 물론 추가요금은 지불하지 않아도 되었다. 모두가 이 귀인 덕택이었다.

 

키노사키에 대한 정보는, 흠..... 준비한 게 없었다. 가이드북도 몇 년 전 교토에 올 때 들고 왔던 책이었고 그 책마저 키노사키를 소개하는 책이 아니었다. 이럴 때 론리플래닛을 참고하면 단박에 해결되었을 텐데. 뭘 믿고 그냥 왔나.

 

결과적으로 지나치게 친절한 가이드북을 들고 오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이란 게 잘 맞춘 퍼즐조각처럼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아서야 그게 어디 여행인가.

 

미흡한 정보 덕에 간이역마다 정차-정차 역을 세어보니 13개 역이었다-하는 한 량짜리 시골 완행열차도 탈 수 있었고(흡사 70년대 우리나라 완행열차 같아서 무척이나 정겨웠다), 뜻하지 않은 사람을 귀인이 되게 만들었고, 무엇보다도 사람이 하는 일인데 뭐 어려울 게 있겠냐 하는 믿음 같은 것이 생겼으니, 역시 길을 잃어야 여행이지 싶다.

 

우여곡절 끝에 키노사키에 도착하니 역 대합실을 벗어나기도 전에 또 한 차례의 친절세례를 받게 된다. 알록달록한 우리들 옷차림이 눈에 띄었는지 염색하지 않은 내 흰머리가 동정심을 유발했는지 친절한 미소를 머금은 한 여인네가 어느 숙소에 가느냐며 말을 걸어온다. 숙소의 위치를 친절하게 가르쳐주기에 염치 불구하고 바로 코앞 양동이 가득 담겨 있는 우산을 빌려 쓰고 나중에 돌려줄 수 있느냐고 물어보니 그냥 쓰고 가서 호텔에 주면 된다고 한다. 이 인간적인 배려라니. 역시 키노사키가 유명해질 만했다.

 

그러면 그렇게 꿈에 그리던 료칸은 어땠을까? 비교적 저렴한 편에 속하는 료칸이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물론 우리에게는 그것도 만만치 않은 금액이었지만) 료칸은 그간의 내 환상을 깨기에 충분했다. 저녁 만찬이 화려하기는 했지만 음식 하나하나에 정성이 들어갔다고 말하기 어려웠고, 이부자리를 손님 모르게 펴주고 정리해 주는 것은 들은 바와 같으나 어딘가 형식적인 관습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으며, 무엇보다도 방에서 나는 담배 냄새가 치명적이었다. 프런트에 내려가 주인 남자에게 말하니 무뚝뚝한 표정으로 전혀 못 알아듣는 척한다. 영어를 못하는 건 그렇다 치고 어떻게 타바코란 단어도 못 알아듣는 척하냐며 옆에서 거들던 인자가 흥분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이 키노사키에서 종학이와 내가 감기에 걸리기 시작했다는 점을, 그 감기가 우리 둘 다 기억으로는 최악의 감기였다는 사실을 말해야겠다. 다음 날 돌아와서 나는 약 1주일간을 앓았다. 감기 때문에 몸져누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 열악한 인도 라닥지방에서도 거뜬했었는데 에고, 4박 5일 일본여행을 만만하게 볼 게 아니다.

 

이 글을 빌어 성란에게 미안했던 일 하나. 끼니를 놓쳐서 대강 먹는 것 마저 시원찮을 때 성란이가 읊조리던 한 마디. “입에 들어가는 걸 그렇게 아까워하냐.” 내 생각은 이랬다. “허구한 날 입에 들여보내니 입에 들어가는 거 한 번 아껴보는 것도 여행이야.” 생각해보니 인자에게도 미안했다. 조선 토종의 입맛을 지니고 있어 쌀밥 없이는 여행이 안 되는 인자에게 나는 또 이렇게 잘난 척을 했다. “난 여행가면 쌀밥은 안 먹으려고 해. 매일 먹는 게 밥인데 뭐.” 잘난 척하는 나를 잘 참아준 친구들아 고맙다.

 

그런데 말이야. 첫 날 도쿄역사 지하에서 먹었던 그 우동 말이야. 돼지 누린내가 역하게 나던 그 우동을 나만은 맛있게 먹었는데, 사실 나도 내가 놀라웠다. 20여 년 전에 처음 먹었을 때는 거의 입에 대지도 못했었고, 2008년 가족이랑 와서 바로 우리가 앉았던 그 자리쯤에서 먹었던 우동 역시 반쯤정도 밖에 못 먹었는데 이제는 별 거부감 없이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거야. 우동을 받아들이게 되니 일본이라는 나라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아.

 

다음에 또 우동 먹으러 가자, 친구들아.

 

 

<정리>

1. 여행 동무들: 성란, 인자, 종학, 나

2. 여행 준비

가. 항공권: 이스타항공 (인터넷으로 예매)

                인천↔오사카(간사이공항): 225,700원(Tax포함)

나. 숙박

  a) 한인민박(<교토하우스>-인터넷으로 예약): 가족실180,000원×3일÷4명

  b) 료칸(키노사키의 <카와구치야 혼칸>-료칸전문사이트 <큐슈로>에서 예약):

      51,000엔÷4명=178,500원

다. 간사이와이드패스4일권(<여행박사>에서 구매):

      7,000엔(할인가 6,650엔)×4명=354,912원(택배비 2,500원포함)

라. 여행자보험(<탑항공>에서 신청): 131,360원÷4명

마. 합계: 1인당 약660,000원(기타 경비-쓰는 대로)

바. 환전: 살 때 100¥=1,219.23원

            팔 때 100¥=1,177.66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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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에 마카오 기행문에 썼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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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셋-길을 찾는 사나이, 프란시스 자비에르>
프란시스 자비에르. 16세기 초 스페인 태생의 Jesuit 파 수행자. 아시아 지역 포교활동을 위해 1542년 인도의 고아에 도착. 10여 년 간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 포교활동을 하다 1552년 중국의 Sancian에서 사망. 그의 유골이 고아로 옮겨질 것에 대비하여 살을 빨리 썩게 하기위해 석회를 4포대나 뿌렸는데도 살이 썩지 않았다는 것. 2개월 후에 말라카에서도 그대로였고 1554년 고아로 이전되기 위해 무덤에서 나왔을 때도 전혀 썩지 않았다는 것. 1614년 선교의 목적으로 오른팔을 잘라 일본과 로마로 분배되었고 1636년에는 내장의 기관이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나누어졌단다. 이런 연유로 생전 보다 생후에 더 주목 받게 된 자비에르. 지금은 유리관에 시신을 보관하여 고아의 한 성당에 안치되어있다. 나는 바로 그 유리관에 안치된 시신을 보았었다. 2005년 1월이었다.


마카오의 남단에 있는 콜로안 섬의 콜로안 마을에서 한가로이 동네를 둘러보다 마주친 예쁜 예배당이 있었다. 이 성당은 너무나 예뻐서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였고 그곳을 벗어나기도 못내 아쉬웠다. 이 마을은 드라마 <궁>의 촬영지로 알려진 곳이지만 정작 나는 이 드라마를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래서 이 예쁜 성당이 그 드라마에 나온 지도 몰랐고 알았다 해도 별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여행 3일째라 긴장이 풀렸던지 그동안 분신처럼 들고 다니던 자료들을 호텔에 두고나와 지도 한 장만 달랑 들고 나오는 바람에 그 이름을 보고도 그런가보다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성당이 바로 <프란시스 자비에르 예배당>이라는 것이다.


나의 아둔함이란. 처음엔 동명이인쯤으로 여겼다. 고아의 자비에르가 이곳에서도 이렇게 되살아나고 있음을 한참 추리 끝에 파악하였다. 1928년에 자비에르의 유골을 모시기 위해 지어진 이 예배당은 특히 일본의 순례자들에게 인기가 높다고 하는데 자비에르가 일본에 처음으로 카톨릭을 전파해서일까.

 

보물찾기 같았던 프란시스 자비에르. 400여 년 전 태어나서 새 길을 개척하고자했던 사나이. 썩지 않는 시체 덕에 지금도 기억되고 추앙 받고 있는 사나이. 포르투갈의 마카오 지배와 세월을 함께 달린 자비에르는 지금도 길을 개척하고 있는지, 죽어서도 잠들지 못한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런 엽기적이기까지 한 일들에 열광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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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해서 못배기거나 알고싶어서 안달이 났던건 아니지만 내내 프란시스 자비에르라는 신부님을 잊을 수가 없었다. 특히 위의 글에 나오는 말라카라는 지역이 몹시 궁금했다. 먹어보지 못한 음식에는 관심이 없으나 가보지 못한 곳은 가보아야만 직성이 풀리니 어떻게보면 나에게도 끈질긴 구석이 하나 있긴 하다.

 

말라카. 말라카가 그렇게 유명한 곳인 줄은 몰랐다. 혼합된 분위기의 도시는 흡사 우리나라의 경주와 인천의 소래포구를 합쳐놓은 것 같다. 수백 년 동안 아시아 일대의 무역 중심지 역할을 해왔던 만큼 유물이나 유적이 지천에 널려있으며, 이 역사 도시를 보러온 사랄들이 마치 주말의 소래포구처럼 인산인해를 이루기 때문이다. 우리가 머물렀던 3박 4일 동안은 특히나 춘절과 겹쳐 나날이 축제의 연속이었다.

 

박물관은 왜 그리 많은지, 구시가 일대는 한 집 건너 박물관으로 둥근 원을 이루며 언덕을 감싸고 있었다. 그리 학구적이지 않은 우리 가족은 겨우 두세 곳 관람하는 것으로 만족했지만, 그리고 볼 것 먹을 것이 많아 굳이 박물관에 갈 필요를 못 느꼈으나, 박물관 관람 좋아하는 사람은 필히 이 곳에 꼭 가보기를 권한다. 내가 가 본 곳 중에서 기억나는, 미술관과 박물관이 많은 스위스의 바젤 만큼이나 박물관이 많은 도시가 말라카이다. 역사의 한 시기를 주름 잡는다는 게 무엇인지 확실하게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말라카의 유명한 유적지 중에 역시 프란시스 자비에르 성당이 있었다. 가이드북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이곳은 동방의 사도 자비에르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1849년에 지은 고딕 양식의 가톨릭 성당이다.'라고. 경내에는 소박하고 겸손해 보이는 자비에르 동상이 서있고 그 옆에는 일본에서 그를 모셨던 일본 신부의 동상이 나란히 있었다. 마카오의 자비에르 성당에는 일본 순례자들이 많다고 하더니 이곳도 아마 그럴 것이라 짐작할 따름이다.

 

2005년 인도 고아에서 충격으로 다가왔던 프란시스 자비에르의 시신 관람후, 마카오의 유적지를 거쳐 말라카의 유적지까지, 나는 뜻하지 않게 프란시스 자비에르 순례를 하게된 셈이다. 마카오기행문에서 '엽기적'이라고 썼던 표현을 수정해야겠다. 나의 순례행위를 엽기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잖은가.

 

뭐 좀 더 공부해보겠다고 얼마전 돈(48,170원)과 시간(열하루)을 들여 구입한 (1918)라는 책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해져온다. 활자본이 아닌, 책을 복사해서 편집한 오래된 책을 얕은 지식과 어학 실력으로 감당하기에는 벅차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책을 구입한 자체가 엽기적인 만용이 아닐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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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를 가면서 항공권을 케세이퍼시픽항공으로 정한 건 홍콩 때문이었다. 홍콩에 다시 가고 싶은 이유가 있었다.

 

여행이란 게 그런 면이 있다. 여행을 끝내고 귀국행 비행기에 오르면 마음이 착잡해지고 울적해지면서 묘한 감상에 젖는다. 그 증상을 조금이라도 완화시키는 방법은 중간 경유지에서 잠시 머무는 것이다. 중간 경유지로는(아시아에서) 보통 싱가포르, 대만, 홍콩, 일본, 방콕 정도이다.

 

2010년 여름, 인도의 라다크일대를 여행한 후 돌아오는 길에 홍콩에 며칠 머물렀었다. 우리 가족이 홍콩을 찾은 건 그때가 두 번째였다.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이 있거나 새로운 볼거리를 기대한 건 아니었다. 여행을 간단히, 갑작스럽게 끝내고 싶지 않은 미련 때문이었다. 왜 여행 끝에는 미련이 남는지, 왜 우울해지는지, 는 나중에 궁리하기로 하고.

 

여행 다니면서 고급 식당이나 가이드북에 나와 있는 유명 식당 탐방은 우리와는 거리가 먼 곳들이다. 우리 가족은 그때그때 현지 식당에서 아무거나 먹는다. 물론 유명한 곳을 아주 외면하는 건 아니다. 이를테면 인도의 콜카타에서 여행자거리에 있는 유명 샌드위치가게나 라씨코너 같은 데는 일부러 찾아다니기도 한다.

 

소박하기 이를데 없는 우리 가족이지만 그래도 식당 하나쯤은 기억에 담아두기도 하는데, 바로 홍콩 침사추이에 있는 자그마한 태국식당이 그랬다. 홍콩을 소개하는 이런저런 가이드북에는 절대로 실리지 않을 작은 식당이지만 우리에게는 인상에 남는 곳이었다. 특히 음식이 먹을 만했다. 쇼핑몰 푸드코트 같은 데서 먹다가 어쩌다 이곳에서 먹어본 음식은 '이게 요리구나' 싶었다.

 

두 번째 홍콩 여행의 기쁨을 그 태국식당에서 맛보기로 했다. 음식에 대한 기대를 품고 테이블에 앉으니 태국출신의 주인아주머니가 반갑게 아는 체를 한다. 우리가 일 년 전에 왔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글쎄 우리를 기억하고 있었다니! 놀랍고 반가웠다. 물론 기뻤다. 고맙기도 했다. 홍콩이 마음 속의 고향으로 자리잡는 순간이었다.

 

바람처럼 여행하는 게 실은 쓸쓸한 일이기도 하다. 그건 가족끼리 다녀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오래된 여행자'가 되어가고 있나보다. 이런 '군중 속의 고독'에 절어있던 우리에게 태국 식당 아주머니의 아는 체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전율과 같은 살아있는 기쁨을 주었다. 여행이 주는 보너스 같았다.

 

그렇게해서 우리가 홍콩에 가는 이유가 생긴 것이다.

 

이번에도 재회의 기쁨을 상상하며 귀국길에 홍콩을 들렀다. 숙소를 잡자마자 멀지않은 그 태국식당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저녁을 먹기에는 좀 이른 시간이었지만 일단 태국인 아주머니에게 인사부터 하기로 했다. 출입문을 빼꼼히 열고 아주머니를 찾는데, 이상하다. 분명 얼굴은 비슷한데 입성이 낯선 모습이다. 그전에 보았던 단정한 차림의 태국 전통의상이 아니라 유니폼으로 입는 빨간 티셔츠 차림이었다. 게다가 헤어스타일도 야성적으로 달라져있었다. 긴가민가해서 남편에게도 확인을하니 그 분이 맞는 것 같단다.

 

먼저 인사를 한다. "Hello! How have you been?" 순간 아주머니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못알아듣자 옆 테이블에서 음식을 먹고 있던 서양남자가 내 말을 또박또박 다시 반복해준다. "How have you been?" 다시 당황해하는 아주머니를 보고서야 얼른 말을 고친다. "How are you?" 내 딴에는 인사랍시고 한 건데 너무나 교과서적인 표현이지 싶었다.

 

우리를 알아보던 총명함이 사라진 아주머니를 미처 예상하지 못한 우리는 약간 서운하고 허탈해졌다. 그렇다고 그냥 갈 수는 없었다. 우리를 기억하느냐를 추궁하듯 묻고는 두어 시간 후에 다시 오겠다고 하고 나왔다. 아, 괜히 홍콩에 왔다보다. 입 밖으로 말은 못했지만 그런 기분이 들었다.

 

약속한대로 그날 저녁밥을 태국식당에서 해결했다. 약간 서운함이 남았지만 음식은 여전히 맛이 좋았다. 그러면 되었지, 뭐.

 

다음 날 저녁. 밥을 먹으로 일단 숙소 밖으로 나왔지만 이젠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주변에 깔린 게 식당이고 게다가 한국식당도 여럿 있었다. 혹 태국식당에 그 아주머니가 있으면 들어갈까 해서 열심히 유리창 너머를 훔쳐보았지만 없/었/다. 동네를 서너 바퀴 돌았지만 역시 돌고나면 '그집앞'이었다.

 

눈 딱 감는 게 이런 것일 게다. 그냥 들어가기로 마음 먹으니 마음이 가라앉았다. 자리에 앉으니 좀 전까지도 안보이던 아주머니가 주문을 받으러왔다. 배불리 음식을 먹고 맥주까지 마시고 나니 그제야 기분이 좀 풀린다. 그 기분에 아주머니한테 이런저런 말을 한다. 어제 왔을 때 우리를 못알아봐서 매우 서운했었다고. 언제 한국으로 돌아가냔다. 오늘이 홍콩 마지막 날이라고 말한다. 계산을 마치고 일어서서 나오려고 하는데 어느새 그 아주머니와 내가 포옹을 하고 있었다. 눈물까지 흘리기에는 술기운이 좀 약했지만.

 

 

홍콩에 다시 가야 할 이유가 또 있다.

 

이번엔 우리가 묵었던 한인 민박에 대한 얘기다. 지난번에 올렸던 글을 다시 옮겨본다.

 

어쩌다 홍콩에 여러 번 가게 되었다. 딸아이의 말이, 부산보다 홍콩을 더 자주 가게 되는 것 같단다. 일부러 홍콩에 간 것은 단 한번. 인도 여행 끝이나 말레이시아 여행 끝에 잠깐 들르다보니 홍콩에 자주 가게 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홍콩은 무엇보다도 공항에서 시내까지의 접근이 무척 단순하고 옥토퍼스라는 교통카드의 사용이 편리할 뿐더러 넓지 않은 지역에 재미있는 여행 요소가 많아서 여행하기 좋은 곳이다.

 

홍콩에 가게 되면 편리함 때문에 그냥 별 생각없이 한국인이 운영하는 민박을 이용하게 된다. 빌딩의 한 부분을 임대해서 여러 개의 방으로 개조하여 여행자의 숙소로 만든 곳이다. 내가 그간 묵었던 곳은 세 곳이었는데 공통점은 아침밥이 제공된다는 것, 방이 비좁다는 것, 실내에서 빨래를 건조한다는 것, 외국인 여성을 가정부로 두고 있다는 것 등이다.

 

이번에 묵었던 민박은 유달리 정갈한 곳이었다. 다른 두 곳은 청소도 대충이었고 음식도 그저 그랬는데 이번 민박은 청소, 음식이 모두 만족스러웠다. 이틀째되는 날은 솔직히 청소는 기대도 하지 않았었다. 다른 곳처럼 대강하거나 내버려두겠지 싶어서 입던 옷도 그냥 침대에 걸쳐놓고 양말도 침대 머리맡에 널어놓고 가방도 구겨진대로 방치해 놓고 외출했다. 그런데 돌아와보니 너무나 말끔히 정돈되어 있어서 놀랍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이럴줄 알았으면 정리해놓고 나가는 거였는데, 싶었다.

 

다음 날 아침, 아침밥을 먹고나서였다. 어젯밤부터 눈물을 글썽거리던 필리핀 출신의 가정부 아주머니가 나를 보더니 울먹거리는데 눈에는 눈물이 그득 고였다. 왜 우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간밤에 한국인 주인이 와서 혼을 내고 갔다고 한단다. 누군가 홈페이지에 그녀가 손님에게 소리를 질렀다는 불평을 했다고 한다. 그녀의 서러운 호소를 들어주었다.

 

그녀가 보여준 그녀의 작은 방에는 침대가 없었다. 침대 자체가 들어갈 방이 아니었다. 아주 작은 공간에 단지 얇은 매트 한장 깔고 자는 방이었고, 그 방마저 누군가에게 주고나면 그녀의 잠자리는 빨래를 널어 말리는 구석진 곳 바닥이라고 한다. 천정에는 빨래 건조대가 걸려있고 바닥에는 냄새 제거를 위해 선풍기 따위가 널려 있는 아주 협소한 공간이다. '그게 네 방이다'라는 소리를 듣는다며 6년간 일한 곳에서 그런 대접을 받고 있다며 그녀는 다시 울먹거린다. 

 

잠깐만 보아도 민박 분위기를 알 수 있었다. 열 개 가까운 방을 운영하고 있는데 관리하는 사람은 그 필리핀 여성 혼자였다. 아침 밥 준비부터 청소, 손님 체크인, 체크아웃 등 모든 일을 혼자서 감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혼자 운영하는 곳치고는 정말 완벽하게 깨끗한 곳이었다. 왠만한 호텔 수준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빨아널은 양말은 건조대에 걸려 있었고 화장실 바닥은 물기가 닦여져 있었고 소지품 등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민박에서 이런 대접을 받기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당황스러웠고 미안했다.

 

아직 싱글인 이 필리핀 여성은, 하루 중 자기 시간이라고는 잠잘 때 뿐이라며 하루 종일 일, 일, 일, 일 뿐이며 휴일도 없다고 한다. 마치 노예의 하루 같았다. 한국인 주인이 꼬박 챙기는 것은 손님의 숙박 요금이라며 아마도 철저하게 챙기는 것 같았다. 그리고 손님 대부분이 한국인인데도 한국말을 가르쳐주지는 않고 그냥 영어만 사용하란다며 그 부분에도 불만이 쌓여 있었다. 6년간의 분노와 슬픔과 피곤으로 얼굴의 표정이 몹시 상해있었고 아마도 우울증에 걸려 있는 것 같았다. 아마 내가 그 입장이라도 그랬으리라. 더하면 더했을 터.

 

내가 보기에도 그랬다. 작은 민박이었지만 일거리는 상당했다. 살림하는 사람이라면 그 일거리의 정도가 금방 파악이 된다. 하루종일 종종거리며 일을 하지 않으면 그렇게 깨끗하게 유지될 수가 없다. 그래서 미안하고 창피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 하루종일 종종거리며 일을 한 덕분에 누군가는 하루종일 밖에서 맛있는 것 먹고 룰루랄라 놀다 들어와서는 깨끗하고 깔끔하게 치워놓은 방을 보고 콧노래를 불렀다는 사실을, 그걸 당연한 대우라고 여겼다는 사실을 곰곰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한 돈을 냈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저렇게 뒤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보고는 그게 당연하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맛있게 먹는 아침 밥과 만족스러운 방 청소 뒤에는 보이지 않는 한숨과 눈물이 숨어 있는데 그걸 몇 푼의 돈으로 맞바꾸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여행이 징그러워지기 시작했다. 저렇게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있고, 그 고통을 무시하며 자기 이익만을 노리는 한국인 주인과 내가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게 부끄러웠다.

 

여행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서 하루종일 빨래를 했다. 빨래를 건조대에 널면 몇시간 동안은 세제냄새가 온집안에 가라앉아있어 냄새를 견뎌야한다. 냄새가 싫어 헹굼을 여러번해도 냄새를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 빨래 냄새를 맡으니 다시 그 필리핀 여성의 눈물 범벅 얼굴이 떠올랐다.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것 같은 그 가녀린 몸매와 큰 눈망울이 내내 떠올랐다

 

 

이 글을 내 블로그에다 올렸다가 성에 차지 않아서 엇그제 그 문제의 숙소 홈페이지에 그대로 올려보았다. 주인에게 말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리고 싶었다. 그래야 좀 달라지지 않을까해서다. 이런 나를 보고 남편은 '오지랖도 넓다. 집요하다.'라고 했지만 '약자를 도와주고 싶을 뿐'이라고 했다. 나는 보통 남의 일에 나서는 사람이 절대 아니고 오지랖은 커녕 내 앞자락도 버거워 늘 헉헉거리는 소심한 사람이다.

 

홈페이지에 올린 다음 날, 홍콩의 그 숙소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너무나 공손하게 해명하고 내 의도를 너무나 쉽게 이해해주는 듯한 친절하고도 간절한 목소리였다. 요지는 내 글을 삭제해도 되겠느냐는 거였다. 뭐라 하겠는가. 근로여건이 개선되길 바랄 뿐이라고만 했다.

 

그런데 궁금하다. 어떻게 처우가 달라졌는지, 내 글 때문에 그 필리핀 가정부가 더 곤욕을 치르는 건 아닌지 모를 일이었다. 어떻게 알아본담? 홍콩에 가면 다시 그 숙소에 묵으리라 다짐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홍콩에 가야 할 이유가 또 하나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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