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월요일 교보에 잠시 들렀다가 발견한 의외의 책은 <테오리아 - 20세기를 대표하는 21권의 책>(개마고원, 2006)이었다. '이론(theory)'이란 말의 그리스 어원인 '테오리아'를 국역본의 제목으로 삼았는데, 독어본의 원제는 '세기의 책'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세기가 지난 세기이므로 '20세기의 책'이라 해야겠고, 그 책들이 모두 분류상 '이론서'들이다. 그러니까 테오리아의 어원적 의미대로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들을 대표하는 책 21권에 대한 평설집이라고 해야겠다. '20세기의 이론서 21권'이라고 제목을 붙인 이유이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독일에서 개최된 ‘세기의 책-20세기의 이론들’이라는 기획 강의를 바탕으로 했다. 크게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의 사유전통과 학문분야가 20세기에 거두었거나 적어도 거두려고 애쓴 성과는 무엇인가?”와, “그 학문들은 어떻게 그것들의 시대에 관여했고, 구체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위대한 이론은 무엇인가?”의 두 가지 문제 제기를 통해 산출된 결과물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이론에 그치는 것만이 아니라 21세기에도 지속적인 시사성을 지니게 될 것이라고 판단되어 선정한 프로이트에서 하버마스에 이르기까지 모두 21명의 사상가들과 그들의 책, 이론들을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각각의 독특한 접근방법과 깊이를 가지고 밀도 있게 소개했다."

국내에서도 쏟아지고 있는 고전해제서들 범주에 들어갈 수 있을 텐데, 문제는 그 해제/평설의 수준이겠다. "난해한 이론서들에 좀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해당 이론서들을 직접 읽어보고자 하는 동기를 부여해줄" 수 있는 수준 말이다. 그리고 물론 그것이 적절하고 정확하게 우리말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조건하에서.

21권의 이론서를 다루고 있는 만큼 600쪽 이상의 분량을 자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겠다. 일단은 관심이 가는 책을 다루는 장들만 골라서 읽으면 되는 것이니까. 그런 시간조차 낼 수 없다면, 20세기를 '이론적으로' 관조하는 일에는 마음을 접고 눈길을 떼는 게 옳다. 그리고는 21세기만을 한눈팔지 않고 질주하는 게. 굿바이!

남은 자들끼리 누리는 호사가적 관심거리는 과연 21권을 고른 주최측의 안목(편견 혹은 혜안)을 음미해보는 것이겠다. 대략 '상식적인' 리스트인지라 모험적이라고 할 만한 책을 그닥 눈에 띄지 않지만 몇 권 정도는 '독일'쪽의 관심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한데, 이 21권 가운데 우리말로 읽을 수 있는 책은 몇 권이나 될까? '아르바이트' 중에 잠시 머리도 식힐 겸 세어보도록 한다.

1.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 레나테 슐레지어 

 

프로이트의 대표적인 저작 <꿈의 해석>은 주지하다시피 여러 종의 국역본이 나와 있다. 비록 번역서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하기에는 좀 찜찜하다는 의견이 <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생각의나무, 2006)에서 제기된 바 있지만.

2. 후설의 <논리 연구> - 미하엘 아스트로

현상학의 창시자 후설의 저작들이 제법 소개되었고 연구서/논문들도 적지 않게 나와 있지만, 특이하게도 그의 초기 대표작인 <논리연구>는 번역돼 있지 않다. 분량의 방대함이 이유인지 내용의 난해함이 문제인지 잘 모르겠다. 여하튼 '고전'의 네임밸류에 걸맞는 번역본이 조만간 나오기를 기대해본다(여담으로 덧붙이자면, 후설의 책은 왜 <논리적 탐구>가 아니라 <논리연구>인가, 혹은 비트겐슈타인의 책은 왜 <철학연구>가 아니라 <철학적 탐구>일까?).

3.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 - 헤르베르트 야우만 

지난 1995년에 범우사판으로 나와 있는 <서구의 몰락>이 유일한 완역본이 아닌가 한다. 대학원 시절에 필요 때문에 1권만 사서 부분적으로 읽은 기억이 있다. 나름대로 '세기의 책'에 꼽힐 만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책이지만, 프랑스에서 21권을 꼽았다면 들어갈 수 있었을까? 

4.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 - 한스 위르겐 헤링어 

 

올해 책세상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새로운 전집이 나오고 있고, <논리철학논고>는 그 전집의 첫권이었다. 두툼한 <철학적 탐구>보다 얇은 <논고>가 선정된 건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 아닐까? <탐구>를 읽어야 한다는 부담을 약간은 덜어주니까 말이다. <논고>만을 집중적으로 다룬 해설서로는 박영식 교수의 <비트겐슈타인 연구>(현암사, 1998)가 있다.

5. 베버의 <경제와 사회> - 볼프강 슐룩흐터

국역본은 <경제와 사회 1>(문학과지성사, 2003)로 출간되었다(*이후에 나남에서도 나왔다). 소장도서가 아니어서 당장에 확인할 수는 없지만 완역본은 아니고 더 출간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한다. 국역본의 이미지가 뜨지 않아 대신에 영역본의 것을 옮겨놓는다.

6.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 위르겐 미텔슈트라스 

두말할 것도 없는 책. 5권의 파이날(결선)을 꼽더라도 당연히 들어가야 할 책이다. 국역본으로는 이기상(까치글방, 1998), 소광희(경문사, 1995) 두 분의 번역본과 해설서를 각각 참조할 수 있다.  

7.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 - 헬무트 레텐

독일의 정치학자 칼 슈미트의 저작들은 비교적 많이 소개돼 있는 편이고 거기엔 물론 <정치적인 것의 개념>(법문사, 1992)도 포함된다. 하지만 당장 서점에서 구해볼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이다. 짐작에 21권의 책들 가운데 가장 얇은 책이지 않을까 싶다. <논리철학논고>보다는 얇은 듯하니까. 이미지는 역시나 영역본의 것을 옮겨놓는다. 슈미트에 대한 현대적 해석은 샹탈 무페의 책들을 참조할 수 있다.

8. 겔렌의 <인간> - 카를-지크베르트 레베르크

  

아르놀트 겔렌은 '철학적 인간학'의 대표적인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보다 잘 알려진 철학적 인간학자로는 막스 셸러가 있지만(국내에도 더 많이 소개돼 있다), 독일에서는 겔렌의 <인간>이 대표적인 저작으로 꼽히는 모양이다. 겔렌이 책으론 <인간학적 탐구>(이문출판사, 1998)이 유일하게 번역돼 있는 책이지만, <인간>은 그보다 좀더 두툼한 책이다.  

9.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 페터 뷔르거 

사르트르에 대해서는 굳이 군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고(<존재와 무>도 새 번역본이 나올 수 있을까?), 다만 해설을 쓴 '페터 뷔르거'란 이름이 반갑다. <해설자들 가운데 내가 아는 두엇 중의 한명이기 때문이다. 아방가르드론으로 유명한 문예이론가 뷔르거의 책은 <전위예술의 새로운 이해>(심설당, 1986)를 필두로 하여 현재 네 권 가량이 번역/소개돼 있다.

10.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 - 게르하르트 쉬베펜호이저 

이 또한 두말하면 잔소리인 책이겠다. 또한 <계몽의 변증법>이 확실한 고전인 것은 완독한 사람이 거의 없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어쨌든 국역본의 역자가 전면 개정판을 내야했을 만큼 '난해한' 책이기도 해서 적절한 안내서의 도움을 받는 게 좋겠다(영역본의 경우도 몇년 전 전면개역판이 나왔다). 아도르노를 술술 읽는 사람들이 나는 부럽고 미심쩍다.

11. 보부아르의 <제2의 성> - 크리스타 뷔르거 

사르트르 커플의 책들이 나란히 선정된 것도 눈길을 끈다. 이젠 여성학의 '고전'이라고 해야할 책(크리스타 뷔르거는 혹 페터 뷔르거의 부인일까?). 보부아르와 관한 특이사항이 그녀가 국내에서는 철학자로서는 거의 진지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점. 주로 출간되는 건 '사랑밖엔 난 몰라' 수준의 보부아르이다(그런 그녀가 여성학의 대모이다!).

12. 바흐친의 '변증법적 사유와 수사학' - 레나테 라흐만 

 

특이한 일이지만 21권의 책이라고 해놓고 유일하게 구체적인 대표작이 명시돼 있지 않은 사상가가 바흐친이다. 일단은 국역본 <말의 미학>(길, 2006)을 대표작으로 꼽아둔다. 그리고 걸출한 연구서 <바흐친의 산문학>(책세상, 2006)은 나의 추천서이다. 해설자인 레나테 라흐만은 독일에서 활동하는 저명한 러시아문학 연구자이자 바흐친 학자이다. 역시나 아는 이름이어서 반갑다.

13. 레비스트로스의 <친족의 기본 구조> - 발터 에어하르트 

 

물론 <친족의 기본구조>는 국역본이 나와 있지 않다. 레비스트로스의 박사학위논문인데, <구조주의 인류학>이나 <신화학>보다 중요한 업적으로 간주하는 데에는 이 책이 구조주의 인류학뿐만 아니라 구조주의의 프로그램 자체를 가장 잘 보여준다는 판단이 전제돼 있지 않나 싶다. 회고 대담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에서 뒷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고, 책의 보다 구체적인 내용 해설은 김형효 교수의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을 참조할 수 있다.

14. 루카치의 <이성의 파괴> - 라이너 로젠베르크 

흔히 루카치의 범작으로 평가되는 줄 알고 있었는데, '세기의 책'으로 꼽혀 있어서 놀랐다. 미완의 번역본까지 치면 세 종류의 국역본이 나와 있기도 한 책. 데카당스(반합리주의) 철학 비판서 정도로 나는 알고 있다. 보통 루카치의 주저로는 <역사와 계급의식>을 꼽는 게 일반적인데, 해설을 읽어보고 소장여부를 판단해봐야겠다.

15.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 - 기젤라 페벨

두말하면 잔소리인 책. 하지만, 국역본은 분량상 아직 1/3밖에 나오지 않은 책. 그 사이에 영역본은 개정본이 나왔다. <논리연구>가 한국현상학회의 아킬레스건이라면 <진리와 방법>은 한국해석학회의 '굴욕'이라 할 만하다. 고전 번역에 단합해야 하실 분들이 담합하고 계신 건 아니신지?

16.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 프란츠 폰 쿠체라 

 

<과학혁명의 구조>는 국내에 2종의 번역이 있다. 까치글방본(동아출판사본)과 이화여대출판부본이 그것인데, 교수신문의 번역비평에 따르면 일장일단이 있지만 원저 자체의 난해함을 해소시켜주지는 못한다고. 학부 2학년 때 읽으면서 고전했던 기억이 새롭다(반면에 해설서들은 얼마나 단순명쾌한 것인지!).  

17. 푸코의 <말과 사물> - 우르줄라 링크-헤르

바케트빵처럼 팔려나갔다는 푸코의 이 주저 <말과 사물>(민음사, 1986)이 국내에선 절판중이다. 새 번역본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지만 '언제'라는 건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우리의 빵집들이 고급 바케트를 내놓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리기도 하고(제빵공은 있나?). 이미지로 대신 올려놓은 것은 개리 거팅의 <미셸 푸꼬의 과학적 이성의 고고학>(백의, 1999)이다. <광기의 역사>부터 <지식의 고고학>까지의 자세한 해설을 담고 있는 책이다.

18.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 - 베르너 슈테크마이어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도 절판된 민음사판까지 포함하면 2종의 번역이 나와 있다. 초기 데리다의 간판격이 책이지만 역시나 읽은 사람 몇 되지 않는다(나도 완독하지는 못했다). 개인적으로 국역본들 외에 영어, 불어, 러시아어본까지 갖고 있어서 언젠가는 마스터해줄 책으로 꼽고는 있다. 조만간 해설서들도 나올 듯하고. 현재까지는 마이클 페인의 <읽기 이론/ 이론 읽기>(한신문화사, 1999)의 해설이 요긴하다.

19. 부르디외의 <실천이론 연구> - 에곤 프레이크  

부르디외의 가장 유명한 저작은 물론 <구별짓기>이지만, '이론서'로 꼽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었나 보다. 한데, <실천이론 연구>가 정확히 어느 책을 가리키는지 모르겠다. <실천이성>도 국역본이 나와 있지만 짐작엔 가리키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영역본의 제목이 그렇고, 불어본의 제목은 <실천의 의미> 정도이다. 러시아어본도 출간돼 있는 책.

20. 하버마스의 <소통행위이론> - 콘라트 오트 

 

올해 가장 번듯한 번역본이 나온 책. 역시나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21. 루만의 <사회의 사회> - 위르겐 포르만 

 

하버마스와 함께 독일 사회학을 양분하고 있는 니클라스 루만의 책들은 국내에 좀 얄팍한 책들만 세권쯤 출간돼 있다. 거기에 입문서 한두 권. 그의 방대한 저작 <사회체계>가 구내에 번역/소개되기를 기대한다, 고 적었는데 번역돼 나왔다. <사회의 사회>가 그 사회체계론의 일부인지 독립된 저작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해서 결론적으로 21권의 책들 가운데 5-6권 정도가 아직 번역되지 않은 듯하다. 양호한 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저작들의 지명도를 생각하면 3-4권은 더 번역돼 있어야 했다. 21권의 책들 가운데 독어권의 책이 13권이니까 과반수가 넘는다. 불어 6권, 영어 1권, 러시아어 1권 순이다. 한편, 우리가 자랑할 만한 '세기의 책'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06. 1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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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10-20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 역시 독일스러운 면이 있네요 ㅎㅎ 독일철학전공자들의 당당함도 못 본지 꽤 됬네요. :)

로쟈 2006-10-21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스트만 보면 독일철학이 압도한 것처럼 보이는데, 이 역시 시차겠지요...

닉네임을뭐라하지 2006-10-21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갈게용-

파뉘르주 2009-03-07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락해주실 줄 믿고 퍼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웹저널 'Bad Subjects'에 실린 지젝과의 인터뷰 기사를 자료로 옮겨놓는다. 지난 2002년에 이루어진 인터뷰인데, <반자본주의 독본(The Anti-Capitalism Reader)>이란 책에 포함돼 있다고 한다. 책의 제목과 성격상 국내에 곧 소개가 될 법도 한데, 그때에라도 영문 인터뷰는 요긴한 참조/대조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I am a Fighting Atheist: Interview with Slavoj Zizek

Issue #59, February 2002 (Interview by Doug Henwood, Intro by Charlie Bertsch)

It's hard to become a superstar in the world of scholarly publishing. Most of the people who read its products can also write them. To stand out in a crowd this smart requires both luck and perseverance. Slavoj Zizek has demonstrated plenty of both. When Yugoslavia started to break up in the aftermath of the Cold War in 1990, pristine Slovenia was the first of its republics to declare independence. We were thrilled to be witnessing the rebirth of "nations" that had disappeared into Germany, the Soviet Union, or, in the case of Slovenia, first the Austro-Hungarian Empire, and then Yugoslavia. .As this little-known land's leading thinker, Zizek basked in an aura of novelty. His work, simultaneously light-hearted and deep, invoked the dream of a post-Cold War world in which free thinking would transcend all borders.

A decade later, we know how quickly that hope turned to despair. But Zizek's star hasn't dimmed. If anything, it has grown brighter. People who started reading Zizek because they couldn't believe that Communist Europe could produce such a supple thinker read him now for the simple reason that he is Zizek. For anyone who has tired of the dumbing down of mainstream political discourse in the West, who finds it hard to believe that the bone-dry American leftism of a Noam Chomsky represents the only possibility for resistance, who wants to critique global capitalism without falling back on faded Marxist slogans, Zizek's work flashes the promise of something better. From his ground-breaking 1989 boo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to his trenchant 1999 critique of Western governments' intervention in the former Yugoslavia, titled NATO as the Left Hand of God?, Zizek has never failed to stimulate thinking. And what more can we ask of an intellectual? As Zizek himself suggests in the interview here, philosophy helps us, not by "purifying" our thought, but by making it more complex.

What really sets Zizek apart from other major scholars is his willingness to take risks. If you were to read all of his books in rapid succession, you would see that they sometimes contradict one another. But you would also see how the tension between them reflects Zizek's real purpose: to make us see the world with fresh eyes. Unlike the vast majority of academic thinkers, Zizek is not worried about being "careless." He roots around in the realm of ideas looking for whatever will prove useful. It doesn't matter if his findings come from different intellectual traditions, if they are, in some sense, philosophically incompatible. Zizek's writing forces them to collaborate. Marx, Freud, Hegel, Kant, Lacan...and Alfred Hitchcock, David Lynch, and the Slovenian electronic agit-prop band Laibach all come together in a delightful mix. This delight, finally, is what seals the deal for Zizek's readers. It's one thing to illuminate contemporary political concerns with the help of dense philosophical points; it's another entirely to make that insight fun. Zizek does.

Left Business Observer editor and Wall Street author Doug Henwood talked with Zizek prior to the September 11th terrorist attack on the Pentagon and World Trade Center, then asked a few follow-up questions in its aftermath. In the days following the attack, Zizek's take on its significance — an incredibly moving essay titled "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 circulated on e-mail lists worldwide. Unlike the vast majority of commentators, Zizek was not content to express disbelief and outrage. His words offered an antidote to the mindless drivel on the major networks, CNN, and Fox News. Reflecting on the many "previews" of the tragedy in American movies, Zizek refused to blunt his critical edge: "In a way, America got what it fantasized about."

This interview is excerpted from BS editor Joel Schalit's anthology The Anti-Capitalism Reader, forthcoming from Akashic Books in the summer of 2002.(*그러니까 이미 출간된 책이다.)

BS: In general, anarchism plays a big role in American radical politics and countercultures. Do you have any thoughts on this influence?

Zizek: I certainly can understand where the appeal of anarchism lies. Even though I am quite aware of the contradictory and ambiguous nature of Marx's relationship with anarchism, Marx was right when he drew attention to how anarchists who preach "no state no power" in order to realize their goals usually form their own society which obeys the most authoritarian rules. My first problem with anarchism is always, "Yeah, I agree with your goals, but tell me how you are organized." For me, the tragedy of anarchism is that you end up having an authoritarian secret society trying to achieve anarchist goals. The second point is that I have problems with how anarchism is appropriate to today's problems. I think if anything, we need more global organization. I think that the left should disrupt this equation that more global organization means more totalitarian control.

BS: When you speak of a global organization, are you thinking of some kind of global state, or do you have non-state organizations in mind?

Zizek: I don't have any prejudices here whatever. For example, a lot of left-wingers dismissed talk of universal human rights as just another tool of American imperialism, to exert pressure on Third World countries or other countries America doesn't like, so it can bomb them. But it's not that simple. As we all know, following the same logic, Pinochet was arrested. Even if he was set free, this provoked a tremendous psychological change in Chile. When he left Chile, he was a universally feared, grey eminence. He returned as an old man whom nobody was afraid of. So, instead of dismissing the rules, it's well worth it to play the game. One should at least strategically support the idea of some kind of international court and then try to put it to a more progressive use.

America is already concerned about this. A few months ago, when the Senate was still under Republican control, it adopted a measure prohibiting any international court to have any jurisdiction over American citizens. You know they weren't talking about some Third World anti-imperialist court. They were talking about the Hague court, which is dominated by Western Europeans. The same goes for many of these international agencies. I think we should take it all. If it's outside the domain of state power, OK. But sometimes, even if it's part of state power. I think the left should overcome this primordial fear of state power, that because it's some form of control, it's bad.

BS: You describe the internal structure of anarchist groups as being authoritarian. Yet, the model popular with younger activists today is explicitly anti-hierarchical and consensus-oriented. Do you think there's something furtively authoritarian about such apparently freewheeling structures?

cruising picture!

Zizek: Absolutely. And I'm not bluffing here; I'm talking from personal experience. Maybe my experience is too narrow, but it's not limited to some mysterious Balkan region. I have contacts in England, France, Germany, and more — and all the time, beneath the mask of this consensus, there was one person accepted by some unwritten rules as the secret master. The totalitarianism was absolute in the sense that people pretended that they were equal, but they all obeyed him. The catch was that it was prohibited to state clearly that he was the boss. You had to fake some kind of equality. The real state of affairs couldn't be articulated. Which is why I'm deeply distrustful of this "let's just coordinate this in an egalitarian fashion." I'm more of a pessimist. In order to safeguard this equality, you have a more sinister figure of the master, who puts pressure on the others to safeguard the purity of the non-hierarchic principle. This is not just theory. I would be happy to hear of groups that are not caught in this strange dialectic.

BS: We've seen over the last few years the growth of a broad anti-capitalist — or as we say in the U.S., anti-corporate or anti-globalization — movement, a lot of it organized according to anarchist principles. Do you think these demonstrations are a sign of any left revival, a new movement?

Zizek: Mixed. Not in the sense of being partly good and partly bad but because the situation is undecided — maybe even undecidable. What will come out of the Seattle movement is the terrain of the struggle. I think it is PRECISELY NOW — after the attack on the World Trade Center — that the "Seattle" task will regain its full urgency! After a period of enthusiasm for retaliation, there will be a new (ideological) depression, and THAT point will be our chance!!!

BS: Much of this will depend on progressives' ability to get the word out.

Zizek: I'm well aware of the big media's censorship here. For example, even in the European big media, which are supposed to be more open, you will never see a detailed examination of the movement's agenda. You get some ominous things. There is something dark about it. According to the normal rules of the liberal game, you would expect some of these people to be invited on some TV talk shows, confronted with their adversaries, placed in a vigorous polemic, but no. Their agenda is ignored. Usually they're mocked as advocating some old-fashioned left-wing politics or some particularism, like saving local conditions against globalism. My conclusion is that the big powers must be at least in some kind of a panic. This is a good sign.

BS: But lots of the movement has no explicit agenda to offer. Why is the elite in such a panic?

Zizek: It's not like these are some kind of old-fashioned left-wing idiots, or some kind of local traditionalists. I am well aware that Seattle etc. is still a movement finding its shape, but I think it has potential. (Even though) there is no explicit agenda, there is nonetheless an outlook reproaching this globalization for being too exclusionary, not a true globalization but only a capitalist globalization.

BS: At the same time this movement was growing, there was a string of electoral victories for the right — Silvio Berlusconi's Forza Italia in Italy, Jorg Haider's Freedom Party in Austria, our own Bush. What do you make of these?

Zizek: They're not to be underestimated. I'll put it in my old-fashioned Stalinist terms: there are two deviations to be avoided here, left and right. The right-wing deviation is to fully endorse their liberal opponents, to say, "OK, we have our problems with Gore or Blair but they're basically our guys, and we should support them against the true right." We should also avoid the opposite mistake, which is that they're all the same. It doesn't really matter if it's Gore or Bush. From this position it's only one step to the position that says, "so it's even better we have Bush, because then we see the true enemy."

We should steer the right middle course: while maintaining our critical distance towards the moderate left, one shouldn't be afraid when certain issues are at stake, to support them. What is at stake is the following: it looked in the 1990s that after the disintegration of socialism, the Third Way left represents the universal interests of capital as such, to put it in the old Marxist way, and the right-wing parties represent only particular interests. In the U.S., the Republicans target certain types of rich people, and even certain parts of the lower classes — flirting with the Moral Majority, for example. The problem is that right-wing politicians such as Haider are playing the global game. Not only do we have a Third Way left; we now have a Third Way right too, which tries to combine unrestrained global capitalism with a more conservative cultural politics.

Here is where I see the long-term danger of these right wingers. I think that sooner or later the existing power structure will be forced more and more to directly violate its own formal democratic rules. For example, in Europe, the tendency behind all these movements like Holocaust revisionism and so on, is an attempt to dismantle the post-World War II ideological consensus around anti-fascism, with a social solidarity built around the welfare state. It's an open question as to what will replace it.

[*Ed Note: Such as the new emergency powers granted the U.S. government for domestic surveillance purposes following the WTC/Pentagon attacks, which suspend habeas corpus rights for immigrants, allow security services to monitor your telecommunications activities, and review your student and bank records without permission from a judge]

BS: What about the transition from Clinton to Bush? What's significant about this from your point of view?

Zizek: The sad thing is that Clinton left behind him a devastated, disoriented Democratic Party. There are people who say that his departure leaves some room for a resurgence of the party's left wing, but that will be difficult. The true problem of Clinton is his legacy; there is none. He didn't survive as a movement, in the sense that he left a long-term imprint. He was just an opportunist and now he's simply out. He didn't emerge as a figure like Thatcher or Reagan who left a certain legacy. OK, you can say that he left a legacy of compromise or triangulation, but the big failure is at this ideological level. He didn't leave behind a platform with which the moderate liberals could identify.

BS: A lot of readers of American underground publications read Noam Chomsky and Howard Zinn, and the stuff coming out of small anarchist presses. What would they get from reading your work that they might be missing?

Zizek: Martin Heidegger said that philosophy doesn't make things easier, it makes them harder and more complicated. What they can learn is the ambiguity of so many situations, in the sense that whenever we are presented by the big media with a simple opposition, like multicultural tolerance vs. ethnic fundamentalism, the opposition is never so clear-cut. The idea is that things are always more complex. For example, multiculturalist tolerance, or at least a certain type of it, generates or involves a much deeper racism. As a rule, this type of tolerance relies on the distinction between us multiculturalists, and intolerant ethnic others, with the paradoxical result that anti-racism itself is used to dismiss IN A RACIST WAY the other as a racist. Not to mention the fact that this kind of "tolerance" is as a rule patronizing. Its respect for the other cannot but remind us of the respect for naive children's beliefs: we leave them in their blessed ignorance so as not to hurt them...

Or take Chomsky. There are two problematic features in his work — though it goes without saying that I admire him very much. One is his anti-theorism. A friend who had lunch with him recently told me that Chomsky announced that he'd concluded that social theory and economic theory are of no use — that things are simply evident, like American state terror, and that all we need to know are the facts. I disagree with this. And the second point is that with all his criticism of the U.S., Chomsky retains a certain commitment to what is the most elemental ingredient of American ideology, individualism, a fundamental belief that America is the land of free individuals, and so on. So in that way he is deeply and problematically American.

You can see some of these problems in the famous Faurisson scandal in France. As many readers may know, Chomsky wrote the preface for a book by Robert Faurisson, which was threatened with being banned because it denied the reality of the Holocaust. Chomsky claimed that though he opposes the book's content, the book should still be published for free speech reasons. I can see the argument, but I can't support him here. The argument is that freedom of the press is freedom for all, even for those whom we find disgusting and totally unacceptable; otherwise, today it is them, tomorrow it is us. It sounds logical, but I think that it avoids the true paradox of freedom: that some limitations have to guarantee it.

So to understand what goes on today — to understand how we experience ourselves, to understand the structures of social authority, to understand whether we really live in a "permissive" society, and how prohibitions function today — for these we need social theory. That's the difference between me and the names you mentioned.

BS: Chomsky and people like him seem to think that if we just got the facts out there, things would almost take care of themselves. Why is this wrong? Why aren't "the facts" enough?

Zizek: Let me give you a very naive answer. I think that basically the facts are already known. Let's take Chomsky's analyses of how the CIA intervened in Nicaragua. OK, (he provides) a lot of details, yes, but did I learn anything fundamentally new? It's exactly what I'd expected: the CIA was playing a very dirty game. Of course it's more convincing if you learn the dirty details. But I don't think that we really learned anything dramatically new there. I don't think that merely "knowing the facts" can really change people's perceptions.

To put it another way: Chomsky's own position on Kosovo, on the Yugoslav war, shows some of his limitations, because of a lack of a proper historical context. With all his facts, he got the picture wrong. As far as I can judge, Chomsky bought a certain narrative — that we shouldn't put all the blame on Milosevic, that all parties were more or less to blame, and the West supported or incited this explosion because of its own geopolitical goals. All are not the same. I'm not saying that the Serbs are guilty. I just repeat my old point that Yugoslavia was not over with the secession of Slovenia. It was over the moment Milosevic took over Serbia. This triggered a totally different dynamic. It is also not true that the disintegration of Yugoslavia was supported by the West. On the contrary, the West exerted enormous pressure, at least until 1991, for ethnic groups to remain in Yugoslavia. I saw [former Secretary of State] James Baker on Yugoslav TV supporting the Yugoslav army's attempts to prevent Slovenia's secession.

The ultimate paradox for me is that because he lacks a theoretical framework, Chomsky even gets the facts wrong sometimes.

BS: Years ago, you were involved with the band Laibach and its proto-state, NSK (Neue Slovenische Kunst). Why did you get involved with them?

Zizek: The reason I liked them at a certain moment (which was during the last years of "really existing socialism") was that they were a third voice, a disturbing voice, not fitting into the opposition between the old Communists and the new liberal democrats. For me, their message was that there were fundamental mechanisms of power which we couldn't get rid of with the simple passage to democracy. This was a disturbing message, which was why they got on everyone's nerves. This was no abstract theoretical construct. In the late 1980s, people got this message instinctively — which is why Laibach were more strongly repressed by the new democratic, nationalist powers in Slovenia than previously by the Communists. In the early 1980s, they had some trouble with the Communists, but from the mid-1980s onward, they didn't have any trouble. But they did again with the transition of power. With their mocking rituals of totalitarian power, they transmitted a certain message about the functioning of power that didn't fit the naive belief in liberal democracy. The miracle was that they did it through certain stage rituals. Later, they tried to change their image (to put it in marketing terms) and they failed.

BS: You talk and write a lot about popular culture, particularly movies. How does your thinking about pop culture relate to your thinking about politics?

Zizek: We can no longer, as we did in the good old times, (if they were really good) oppose the economy and culture. They are so intertwined not only through the commercialization of culture but also the culturalization of the economy. Political analysis today cannot bypass mass culture. For me, the basic ideological attitudes are not found in big picture philosophical statements, but instead in lifeworld practices — how do you behave, how do you react — which aren't only reflected in mass culture, but which are, up to a point, even generated in mass culture. Mass culture is the central ideological battlefield today.

BS: You have recently been speaking about reviving Lenin. To a lot of politically active young people, Lenin is a devil figure. What do you find valuable in Lenin, or the Leninist tradition?

Zizek: I am careful to speak about not repeating Lenin. I am not an idiot. It wouldn't mean anything to return to the Leninist working class party today. What interests me about Lenin is precisely that after World War I broke out in 1914, he found himself in a total deadlock. Everything went wrong. All of the social democratic parties outside Russia supported the war, and there was a mass outbreak of patriotism. After this, Lenin had to think about how to reinvent a radical, revolutionary politics in this situation of total breakdown. This is the Lenin I like. Lenin is usually presented as a great follower of Marx, but it is impressive how often you read in Lenin the ironic line that "about this there isn't anything in Marx." It's this purely negative parallel. Just as Lenin was forced to reformulate the entire socialist project, we are in a similar situation. What Lenin did, we should do today, at an even more radical level.

For example, at the most elementary level, Marx's concept of exploitation presupposes a certain labor theory of value. If you take this away from Marx, the whole edifice of his model disintegrates. What do we do with this today, given the importance of intellectual labor? Both standard solutions are too easy — to claim that there is still real physical production going on in the Third World, or that today's programmers are a new proletariat? Like Lenin, we're deadlocked. What I like in Lenin is precisely what scares people about him — the ruthless will to discard all prejudices. Why not violence? Horrible as it may sound, I think it's a useful antidote to all the aseptic, frustrating, politically correct pacifism.

Let's take the campaign against smoking in the U.S. I think this is a much more suspicious phenomenon than it appears to be. First, deeply inscribed into it is an idea of absolute narcissism, that whenever you are in contact with another person, somehow he or she can infect you. Second, there is an envy of the intense enjoyment of smoking. There is a certain vision of subjectivity, a certain falseness in liberalism, that comes down to "I want to be left alone by others; I don't want to get too close to the others." Also, in this fight against the tobacco companies, you have a certain kind of politically correct yuppie who is doing very well financially, but who wants to retain a certain anti-capitalist aura. What better way to focus on the obvious bad guy, Big Tobacco? It functions as an ersatz enemy. You can still claim your stock market gains, but you can say, "I'm against tobacco companies." Now I should make it clear that I don't smoke. And I don't like tobacco companies. But this obsession with the danger of smoking isn't as simple as it might appear.

BS: You've also left some of your readers scratching their heads over the positive things you've been writing about Christianity lately. What is it in Christianity you find worthy?

Zizek: I'm tempted to say, "The Leninist part." I am a fighting atheist. My leanings are almost Maoist ones. Churches should be turned into grain silos or palaces of culture. What Christianity did, in a religiously mystified version, is give us the idea of rebirth. Against the pagan notion of destiny, Christianity offered the possibility of a radical opening, that we can find a zero point and clear the table. It introduced a new kind of ethics: not that each of us should do our duty according to our place in society — a good King should be a good King, a good servant a good servant — but instead that irrespective of who I am, I have direct access to universality. This is explosive. What interests me is only this dimension. Of course it was later taken over by secular philosophers and progressive thinkers. I am not in any way defending the Church as an institution, not even in a minimal way.

For an example, let's take Judith Butler, and her thesis that our sexual identity isn't part of our nature but is socially constructed. Such a statement, such a feminist position, could only occur against a background of a Christian space.

BS: Several times you've used the word "universalism." For trafficking in such concepts, people you'd identify as forces of political correctness have indicted you for Eurocentrism. You've even written a radical leftist plea for Eurocentrism. How do you respond to the PC camp's charges against you?

Zizek: I think that we should accept that universalism is a Eurocentrist notion. This may sound racist, but I don't think it is. Even when Third World countries appeal to freedom and democracy, when they formulate their struggle against European imperialism, they are at a more radical level endorsing the European premise of universalism. You may remember that in the struggle against apartheid in South Africa, the ANC always appealed to universal Enlightenment values, and it was Buthelezi, the regime's black supporter in the pay of the CIA, who appealed to special African values.

My opponent here is the widely accepted position that we should leave behind the quest for universal truth — that what we have instead are just different narratives about who we are, the stories we tell about ourselves. So, in that view, the highest ethical injunction is to respect the other story. All the stories should be told, each ethnic, political, or sexual group should be given the right to tell its story, as if this kind of tolerance towards the plurality of stories with no universal truth value is the ultimate ethical horizon.

I oppose this radically. This ethics of storytelling is usually accompanied by a right to narrate, as if the highest act you can do today is to narrate your own story, as if only a black lesbian mother can know what it's like to be a black lesbian mother, and so on. Now this may sound very emancipatory. But the moment we accept this logic, we enter a kind of apartheid. In a situation of social domination, all narratives are not the same.

For example, in Germany in the 1930s, the narrative of the Jews wasn't just one among many. This was the narrative that explained the truth about the entire situation. Or today, take the gay struggle. It's not enough for gays to say, "we want our story to be heard." No, the gay narrative must contain a universal dimension, in the sense that their implicit claim must be that what happens to us is not something that concerns only us. What is happening to us is a symptom or signal that tells us something about what's wrong with the entirety of society today. We have to insist on this universal dimension.

06.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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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주저 중 한 권인 <조건들>(새물결, 2006)이 번역돼 나왔다. 또다른 주저인 <존재와 사건>과 함께 번역돼 나올 거라는 얘기는 몇 년전부터 있었지만 잊고 있던 차에 뜻밖의(?) 책이 나온 것이다. 그간에 출간되었던 몇 권의 책이 (反들뢰즈주의자로서) '들뢰즈 이후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바디우의 전모를 드러내기엔 좀 부족하다는 느낌을 가졌더랬는데, 이번엔 불식시켜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영미권에서 활발하게 번역/연구되고 있는 철학자이지만 바디우의 <존재와 사건>의 영역본이 작년에서야 나왔고 <조건들>의 영역본은 아직 출간되지 않았다(스페인어본 정도가 눈에 띈다). 그러니 <조건들>의 국역본 출간은 얼마간 '사건적' 의미를 가질 수 있겠다. 역자는 <윤리학>을 우리말로 옮긴 이종영씨이다(역시나 <윤리학> 번역에서의 불만을 말끔히 씻어주기를 기대한다).   

지젝의 적극적인 지지와 찬양에 고무되어 개인적으로 바디우의 책들은 (<존재와 사건>를 비롯하여) 저서와 연구서들을 다수 갖고 있지만 그의 철학을 일람할 기회도 없었도 따라서 몇 마디 덧붙일 만한 능력도 현재로선 갖고 있지 않다. 다만 길잡이가 될 만한 글 하나를 옮겨놓는 걸로 일단은 소개를 대신해두고자 한다. 바디우 전공자인 서용순 박사의 '알랭 바디우 - 진리와 주체의 철학'이란 글인데, 지난 2003년 '동국대 대학원신문'(5월호)에 게재됐던 것이다. 당시 필자는 파리 8대학 철학과 박사과정에 재학중이었고 바디우의 주저들을 번역중이라고 했다. 이후 바디우의 지도하에 학위논문을 마치고 돌아와 현재는 강의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알랭 바디우 - 진리와 주체의 철학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철학자(?)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모든 철학은 시대의 징후이다. 플라톤의 철학이 그리스 공화정 말기의 혼란과 더불어 민주정에 대한 근원적인 불신을 드러내고,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20세기라는 역사적 시점의 지배적인 동력이었던 기술과 그 기술의 파괴적인 힘에 대한 불신을 드러낸 것은 모두 시대의 징후로 읽어 내려가야 마땅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시대는 어떠한가? 우리 시대는 하이데거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요컨대 수십년 이래로 우리는 사회주의를 포함한, 인간 이성으로 수립된 모든 프로젝트를 의심하고 부정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등을 돌린 것으로 간주된 과학에 대한 불신이라고 볼 수 있다. 서구를, 나아가서는 세계를 지배했던 큰 흐름인 합리주의는 인간을 행복으로 인도하지 못한 채, 스스로의 수명을 다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양 철학에서 이러한 경향은 1980년대 이래로 지배적인 담론으로 자리 잡았다. 일찍이 리요따르는 건축술로서의 철학, 즉 시스템으로서의 철학의 종말을 선고하였고, 많은 철학자들이 플라톤 이래 철학에서 배제된 시학(詩學, poetique)의 문제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이른바 거대 담론은 해체되었고, 전통적인 철학의 영역이었던 진리의 문제는 더 이상 제기되지 않는다. 철학은 이제 시학을 비롯한 예술에 자신의 지위를 양도한 채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 근거를 발견하려 한다. 철학사는 부정되었고 이제는 플라톤에 의해 추방되었던 시인들이 그 자리를 점하고 있다. 이것이 현재 철학이 위치하고 있는 지점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며, 철학의 시학으로의 투항에 저항하는 한 철학자가 있다. 바로 프랑스의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1937-)이다. 그의 철학적 여정은 아주 거센 굴곡을 보여준다. 싸르트르에게 감화를 받고 있던 그의 청년 시절, 알튀세와의 만남은 그를 과학적 이론의 추종자로 만들었지만 68년 혁명이 발발하자 그는 프랑스 공산당과 68혁명의 대립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알튀세를 강하게 비판하며 그와 결별한다. 그리고는 실뱅 라자뤼스, 나타샤 미셸, 프랑수와 발메 등과 마오주의 그룹인 예난(Yenan)그룹을 결성해 프랑스 공산당에 맞서 투쟁한다.

이후 80년대에 들어 유럽에 지적 반동의 시기가 도래하자 마르크스주의를 벗어나 다른 혁명적 대안을 마련하는 시도를 행하게 되고, 그 결실은 1988년『존재와 사건』의 출간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는 수학적 존재론의 구축을 통해 철학을 복권시키고, 새로운 해방적 프로젝트를 그 존재론에 담아낸다. 오늘날 그는 흔히 포스트모던 철학의 중심지로 여겨지는 프랑스 철학의 중심을 흔드는 철학자이다. 그는 자신의 주요한 무기인 집합 이론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존재론을 구성해내고, 이를 통해 만신창이가 된 철학에 그 자리를 되돌려준다.

종말을 부정하기

우선 그의 철학을 가로지르는 큰 흐름을 살펴보자. 바디우는 모든 현대 철학의 지배적 경향인 시스템으로서의 철학의 종말이라는 페이소스에 반대한다. 그에 따르면 이른바 종말이라는 테마는 철학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 없다. 거대 담론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것은 '거대담론' 만큼이나 거창한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철학은 존재할 수 있고 우리 시대에 그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 바디우의 주장이다.

물론 철학이 항상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철학이 근원적인 위기에 처했던 시대 역시 분명히 있었다. 철학은 항상 불연속적이었고, 철학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해왔다. 하지만 철학과 그 조건들이 가지는 관계에 놓여진 불변적인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진리'이다. 진리라는 테마만이 철학과 그 조건이 되는 여러 사유를 관계짓는 요소이다. 그런데, 이러한 철학의 조건들은 진리를 생산하는 절차(공정, procedure)로서만 철학의 조건이 된다. 말하자면 이 조건들은 각자의 개별적 특성에 기반하여 진리를 생산해내고, 진리를 생산해내는 한에서만 철학과 관계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진리 생산의 사유는 철학의 조건인 것이다. 이렇듯 철학은 스스로 진리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다만, 조건들이 생산한 진리를 개입(intervention)을 통해 명명(nomination)해낼 뿐이다. 바디우는 철학의 조건을 이루는 진리 산출의 유적1) 절차(공정, procedures generiques des verites)를 네 가지 정도로 분리해낸다. 정치, 과학(그 중에서도 수학), 사랑, 예술(시학(詩學))이 그것이다.

철학 - 봉합에서 공가능성으로

철학의 조건으로서의 네 가지 진리의 공정이 서로를 배제하거나 종속시키지 않고, 그 조건들이 모두 공존가능하다는 점을 사유하는 것이 바로 바디우가 정의하는 철학의 작업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네가지 공정이 모두 진리를 생산하다는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바디우는 이 점을 아주 중요시하여 봉합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다. 그 동안의 철학은 이러한 공가능성(compossibilite, 여러 가지 조건이 각자의 영역에서 모두 진리를 생산하는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 동안의 철학은 다른 조건들이 가지는 진리 생산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고, 그 중 하나, 혹은 일부에 대해서만 진리의 가능성을 인정한 것이다. 진리 생산의 다양한 가능 영역은 부정되고 진리는 어느 하나의 영역에 갇혀버린 것이다.

이것을 바디우는 철학의 봉합이라고 명명한다. 그는 다양한 봉합의 실례를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19세기는 철학이 과학적 실증주의에 봉합된 시기였고, 영미권의 아카데미적 철학은 아직도 이 봉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철학을 정치와 과학에 동시에 봉합시켰다. 이러한 이중의 봉합의 복잡한 구조를 스탈린은 철학, 혹은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부른다. 하이데거는 기술이 되어버린 과학에 반대하여 철학을 시학에 가두어버린 것으로 간주된다. 실증주의나 마르크스주의는 이미 많은 비판을 통하여 화석화된 봉합일 뿐이고, 이제는 제도적이거나 아카데미적인 봉합이지만, 하이데거를 그 축으로 하는 시학(예술)에의 봉합은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봉합 형태이고, 전혀 검토된 적이 없는 봉합이다.

철학이 과학과 정치에 봉합되어 있을 당시, 시학은 철학의 역할을 수행하였고 마침내 시인의 시대는 열린다. 그러나 여기서 바디우가 말하는 시학은 모든 시와 시인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 시대는 횔더린(Holderlin)에서 파울 첼란(Paul Celan)에 이르는 시기이며, 문제가 되는 것은 진정한 사유의 모습을 보여주는 시인과 시일 뿐이다. 하이데거가 우리에게 보여주듯이, 시학이 행한 것은 시에 의한 존재의 문제에의 접근이었다. 시인들의 공헌은 대상의 범주를 해체함으로써 탈객관화(주지하듯이 객관화는 과학의 미덕이다)를 실현해낸 데 있다.

여기서 하이데거의 철학은 객관성(대상성, l'objectivite)의 철학에 대한 비판과 객관적 철학의 시학적 해체를 결합시켜냄으로써 엄청난 강점을 획득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수학과 시학의 이율배반을 지식과 진리의 대립, 혹은 '주체/대상'과 '존재(Etre)'의 대립으로 엮어냄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 그러나 랭보, 혹은 로트레아몽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시학은 항상 수학과 사유를 공유하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었다. 시인들은 수학에 대상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대상의 범주를 해체하고 첼란에 이르러 시인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그리고 철학이 완전한 탈봉합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은 시인의 시대가 끝남과 더불어 열리게 된다.

진리의 사건들

우리는 이제 진리가 어떻게 생산되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앞서 말했듯 진리는 진리 생산의 네 가지 절차 속에서 생산된다. 그러나, 이 네 가지 절차가 항상 진리를 생산해내는 것은 아니다. 진리는 사건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요컨대 진리의 네 가지 공정은 진리의 생산이 가능한 영역일 뿐이다. 진리는 사건에 의존적이다.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는 사건의 진리인 것이고, 만일 이 네 가지 영역 속에 사건이 없다면 우리는 그 속에서 아무런 진리도 발견해낼 수 없다. 이 사건의 진리야말로 바디우 철학의 핵심이다. 우리는 각각의 절차에서 드러난 상이한 사건들을 볼 수 있다.

역사를 살펴볼 때 정치에서의 사건은 언제나 상이한 형태(18세기말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과 20세기 초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의 형태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로 나타났다. 우리 시대에 국한시켜 보자면 정치적 사건은 68년에서 80년에 이르는 역사적 시기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 예로는 프랑스의 68년 오월 혁명과 중국의 문화 혁명, 이란 혁명, 그리고 폴란드 연대 노조에 의해 주도된 노동운동을 들 수 있다. 이 사건들은 새로운 명명이 필요한 사건들이다. 폴란드의 노동 운동을 제외하면 그들 정치적 사건은 그 내용의 새로움과는 유리된 낡은 사상 체계에 의해 표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문화 혁명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하고 있었으며, 이란 혁명은 이슬람으로의 복귀, 즉 옛 것으로의 복귀라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 사건을 명명하는 철학적 개입(intervention)은 아직 완수되지 않았다. 이 정치적 사건은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지식 체계를 교란시키는 것이기에 사건이고, 진리를 생산할 수 있지만, 그것의 명명은 아직 철학의 과제로 남아있는 것이다.

칸토르에서 폴 코헨까지의 현대 집합 이론은 수학에서의 사건이다. 이 집합 이론은 식별 불가능한 다수성(multiplicite indiscernable)에 대한 개념을 수립해낸다. 이로써 집합 이론은 존재-로서의-존재(Etre-en-tant-qu'etre)에 대한 합리적 사유와 언어 사이의 문제를 해결한다. 식별 불가능한 다수성의 존재를 증명함으로써, 기존의 지식 체계를 규정하는 언어 체계를 벗어난, 즉 기존의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존재가 있음이 드러난 것이다. 바로 진리가 이러한 존재 형태를 갖는다고 바디우는 역설한다.

진리는 지식에 구멍을 내는 것이며, 따라서 진리에 대한 지식은 있을 수 없다. 진리는 단지 생산될 뿐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유적(類的, 산출적, generique)이며, 기존 언어를 통한 지칭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진리는 항상 기존 언어에서 벗어나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부분은 언어로 결정할 수 없는 부분으로서 기존의 언어에 비추어 초과분(exces)이 된다. 우리는 그것의 확실한 정체를 알 수 없다. 바디우는『존재와 사건』에서 집합 이론을 통해 이 사실을 잘 증명해내는데 이는 '방황하는 초과분'의 존재를 증명해내는 것이고 그 자체로 진리가 존재하는 방식이 된다.

시인의 시대를 통틀어 볼 때, 시에서의 사건은 파울 첼란의 작품이다. 데리다나 가다머 혹은 라꾸-라바르뜨(이들은 바디우의 철학적 대화 상대자이면서 동시에 그의 주요한 논적이다)와 달리 바디우는 첼란의 시에서 시는 그 자체로 충분치 않다는 고백을 읽어낸다. 그의 시는 봉합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시의 권위에서 자유로워진 철학을 원한다. 말하자면, 첼란은 그의 작품을 통하여 우리시대의 개념적 전유를 다른 영역과 공유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첼란의 공헌은 시를 철학이 그 시대에 행해온 사변적 기생으로부터 해방시키며, 시를 진리의 나머지 절차들과 공존하게 함으로써 시에게 자신의 자리를 돌려주는 데 있다. 이것이 첼란이 행한 시의 사건의 핵심적 내용이다.

사랑의 사건은 라깡의 저작이다. 사랑에 대한 라깡의 이론은 하나(l'Un, the One)의 지배를 파괴하고 둘(le Deux, the Two)의 문제를 사고했다는 점에서 사건이다. 라깡은 성에서의 둘을 논리적으로 연역해낸다. 이로써 남성(손상된 전체(Tout)의 벡터)과 여성(비-전체(pas-toute))은 서로 전혀 다른 둘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두 개의 성은 전혀 다른 입장으로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만남이라는 사랑의 사건을 통해 둘은 일자(하나, l'Un)의 법칙을 초과하는(넘어서는) 끝없고 완성될 수 없는 경험을 꾸며낸다. 이것을 바디우는 성차에 대한 진리, 사랑에 빠진 당사자들의 지식에서 벗어나 있는 진리가, 이름없는 혹은 유적인 다수성으로서 도래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사랑이란 만남이라는 사건을 통한 '둘'에 대한 진리의 생산인 것이다.

그렇게 사건을 계기로 생산되어 잠시 나타난(presenter) 진리는 지식을 통하여 사후적(事後的)으로 표상될(representer) 뿐이다. 이때 진리를 생산해 낸 각각의 절차는 스스로 그것이 진리인지 말할 수 없다. 그들은 고유한 활동에 전념할 뿐, 진리에 무관심할 수밖에 없다. 그 절차들은 진리를 모른다. 그 진리의 명명작업을 해내는 것, 그렇게 다른 곳에서 생산된 진리를 사유하는 것, 바로 그것이 철학의 작업이다. 예컨대, 철학은 이미 다른 지점에서 생산된 진리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 철학의 임무인 것이다. 이제 철학은 본연의 위치로 돌아갈 수 있다. 네가지 유적 절차들에서 생산된 진리를 사유하고 명명함으로써 바디우가 원하는 철학적 행동(acte philosophique)은 이제 가능해진 것이다.

주체의 이론

위의 예에서 보았듯 사건은 진리를 생산해냄으로써 지식(savoir)의 망을 교란시키고(구멍을 내는 것이다), 곧 지식 속으로 사라진다. 진리의 흔적은 그 진리에 충실한 주체(sujets fideles)를 통해서 밖에는 파악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주체는 진리의 담지자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존재가 주체인 것은 아니듯, 주체는 그 충실성을 잃고 배반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68년 오월 혁명의 많은 주체들은 그 사건이 생산해낸 진리에의 충실성을 잃고 그 진리를 배반하였고, 중국의 문화 혁명도 같은 길을 걸었다. 때로는 환영(simulacre)을 사건으로 착각하여 그 환영에 충실하기도 하는데, 파시즘의 예가 그 좋은 예이다.) 진리에 의해 호출된 그들은 진리에 충실한 주체들이다. 그 진리에 충실함으로써만 그들은 주체일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주체들은 진리의 담지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바디우의 윤리학이 드러난다.

바디우는 구조주의에 의해 부정된 주체를 다시 철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객관주의를 벗어나 비로소 주체적 정치(politique subjective)를 가능하게 한다. 구조주의에 의해 단지 구조의 담지자로만 파악되었던 인간은 바디우의 손에서 다시 주체가 된다. 물론 이 주체는 마르크스주의의 프롤레타리아와 같은 선험적인 주체는 아니다. 자신의 이해(intert)에 의해 움직이는 인간 동물(l'animal humain, 영장류 동물로서의 인간)은 진리의 사건을 만났을 때 비로소 자신의 이해에서 벗어난 이해(intert-desinteresse)를 추구하는 주체가 되어 자신의 진리에 충실하게 된다. 이렇게 사건을 통하여 동물이었던 인간은 존재의 새로운 방식을 스스로 결정함으로써 마침내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 새로운 존재방식을 바디우는 충실성(fidelite)이라고 부른다.

이 주체의 충실성이야말로 진리의 과정이 지속될 수 있게 하는 단 하나의 원칙이다. 진리는 사건과 동시에 나타나 지식 체계에 파열구를 만든 후 즉시 지식 속으로 사라진다. 결국 진리가 존재했고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은 지식의 객관성이 아닌 진리가 만들어내는 주체성, 바디우에 의해 충실성으로 표현된 그 주체성의 발현을 통해서일 뿐이다. 주체의 충실성은 진리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오늘날 미디어와 정치 이데올로그들에 의해 유포된 '인권'과 같은 세론(世論)은 결코 윤리학의 지표가 될 수 없다(우리는 이 '인권'이 미국의 주요한 공갈 협박 수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오로지 진리의 변전만이 윤리학의 재구성을 위한 기준일 것이다. 그 윤리학의 금언은 "계속하자!(continuer!)"라고 말한다. 즉 진리에 계속 충실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이른바 진리의 윤리학의 함의가 있다. 다시 말해 바디우의 윤리학은 진리가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인 '주체의 충실성'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주지하듯 바디우의 이론에서 주체는 지식의 영역인 객관성의 범주에 포섭될 수 없다. 이러한 관점은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가 견지해왔던 주체에 대한 과학적-객관적 문제틀에 정면으로 대립한다. 마르크스주의는 계급이라는 객관적인 개념을 통해, 혁명적 주체성을 지녔다고 전제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보편성을 지닌 역사의 주체로 설정한다. 계급은 이로써 주체성과 객관성을 아우르는 순환적인 개념이 된다.

하지만 바디우에게 주체는 객관적인 수준으로 포섭될 수 없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파악된 인간, 대상성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은 그저 인간 동물일 뿐이고, 주체는 이 인간 동물에 '무엇'인가가 추가된(supplemente) 것이다. 그 '무엇'은 진리에 다름 아니고, 이 진리를 통하여 인간 동물은 주체가 된다. 주체는 결코 선험적으로 설정될 수 없고, 인간이 사건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 사건을 통해 드러난 진리를 만나지 못한다면, 주체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바디우의 철학에서 직접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이다.

우리는 앞서 바디우에게 진리는 기존의 지식망을 교란시키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기존의 지식 체계는 객관성의 표현에 다름 아니라고 할 때, 진리는 객관성의 범주에 포함될 수 없다. 객관적인 것은 지식 체계일 뿐이다. 물론 진리는 오직 한 순간 빛을 발하고 지식 속으로 사라지지만, 그 진리에 충실한 주체들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진리의 사건은 주체화 과정(le processus de subjectivation)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새롭게 열리는 진리의 지평

지금까지 살펴본 바디우의 철학을 통해 우리는 그가 진리의 문제에 천착해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진리는 우리가 알고있던 진리와는 사뭇 그 모습이 다르다. 그것은 다수의 진리로서 전혀 다른 진리의 지평을 인정하는, 결코 폭압적이지 않은 열려있는 진리이다. 진리의 공가능성(compossibilite)은 전제적인 일자(一者, l'Un)의 모습을 부정하고 진리의 다수성을 인정한다.

이러한 바디우의 철학은 우리로 하여금 복수의 진리를 서로 다른 영역에서 사고하게 하며, 잃어버렸던 주체를 새로운 방식으로 전유할 수 있게 한다. 바디우와 더불어 합리적 사유는 마침내 가능해지고, 그것이 포함하는 혁명적 사유는 마침내 펼쳐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국 그는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철학자가 아닌, 새로운 사고의 지평을 열어 젖히는, 진리의 옹호자인 셈이다. 바디우와 더불어 서로를 인정하는 다수의 진리라는 관념이 수립되고, 진리라는 관념이 편협한 사고로 우리를 인도할 가능성은 제거된다. 마침내 열려진 지평 위에서 진리를 사고하는 일만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다.(서용순/ 파리 8대학 철학과 박사과정)

주1) 유적(類的)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generique라는 말은 논리학적으로 비결정성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하나의 개별 원소가 '유적'일 때 우리는 그 원소가 어떠한 구분에 속하는 것인가만을 알 뿐 동일한 구분에 속해있는 다른 개별 원소와 어떻게 구분되는지는 알 수 없다. 그 개별 원소는 항상 개별적이면서 일반적인 가치를 갖는다. 진리의 서로 다른 절차들은 진리를 생산하는 동일한 구분에 속해 있지만 서로의 관계는 규정지어지지 않는다. 그 절차들은 각각의 진리를 생산하지만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유적이다.

06.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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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3-08 0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디우 책 검색하다가, 지금에서야 이 글을 봤네요. 퍼갑니다. ^^
 

필요 때문에 타르코프스키에 관한 자료들을 좀 읽게 되었다고 했는데, 인터넷상에 떠있는 '삶에 대한 책임과 예술'이란 글도 마찬가지이다(바람구두님의 서재에도 옮겨져 있다). 출처는 <녹색평론>(1995년 5-6월호)라고 하니까 10년도 더 전의 글이다. 역자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여기 소개하는 것은 '영화에 관한 성찰'이라는 부제가 달린 그의 영화론의 영어판 <시간속의 조각(Sculpting in Time)>(1989년 개정판)의 결론부분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같은책의 독어판(1985년)으로부터 김창우교수가 우리말로 옮긴 번역본 <봉인된 시간>이 분도출판사에서 출판된 바 있다"란 설명이 붙어 있다. 그러니까 <봉인된 시간>(1991)의 맺음말(273-284쪽)이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한데, 굳이 옮겨놓는 것은 각각 독역본과 영역본에서 중역한 것이라는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문체상의 차이 이상의 여러 불일치점들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역본에서 옮긴 글조차도 일부 오역을 포함하고 있어서 타르코프스키의 진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분적으로 교정될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이래저래 밀린 일들이 많아서 교정은 다소 시일이 걸릴 예정이다). 내가 갖고 있는 영역본은 텍사스대학출판부에서 나온 2003년판이다. 참고로 영역본은 독어본에서 옮겨진 것인데, 1986년에 처음 출간됐고 교정본이 이듬해 출간됐다(1987년판과 2003년판 사이에는 차이가 없는 걸로 안다).

덧붙여서 내가 참고하는 책은 올가 수르코바의 <타르코프스키와 나>(엑스모, 2002) 등이다. 수르코바는 <봉인된 시간>의 탄생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영화평론가인데, 타르코프스키 자신이 서문의 말미에서 이렇게 언급해놓고 있다: "보충해서 언급할 것은 이 책이 나 자신의 일기책과 같은 양식, 강연, 영화평론가 올가 수르코바와의 대담을 기초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수르코바는 이미 <안드레이 루블료프> 촬영 당시에 학생 신분으로 참관했으며, 그녀가 추후 영화평론가로 활동하면서도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바 있다. 이 책을 집필하는 동안 내게 많은 도움을 준 그녀에게 감사드린다."(16쪽) 타르코프스키와 가장 가깝게 교우했던 바로 그 수르코바이며, 그녀는 <타르코프스키와 함께, 타르코프스키에 대하여>(라두가출판사, 2005)란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Тарковский и я. Дневник пионеркиС Тарковским и о Тарковском

삶에 대한 책임과 예술

오늘날 예술일반이나 또는 특별히 영화의 기능에 관해 얘기하는 것보다는 삶 자체에 관해 얘기하는 것이 내게는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삶의 의미에 대하여 의식이 없는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언어속에서 아무런 조리있는 발언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부딪치는 우리 시대의 문제들에 대한 간단한 성찰로써 이 책을 마무리지으려고 결정하였다. 그 문제들은 현재의 순간을 넘어서 우리의 생존에 근원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나에게는 보인다(*강조된 구절들이 국역본에 빠져 있다).

비단 예술가로서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한 인간으로서 나 자신의 과제를 규정하기 위하여, 나는 우리 문명이 처한 일반적인 상태와 역사속에 참여하는 모든 개인의 개인적인 책임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즉, 결론에서 타르코프스키가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현 문명의 상태'와 이에 대한 '각 개인의 책임'이다).

우리 시대는 한 전체적인 역사적 순환의 마지막 정점인 듯이 보인다. 사회를 좀더 '정의롭고' 합리적으로 조직하겠다는 의도를 가진 '대심문관', 지도자, '뛰어난 인물' 들이 그동안 막강한 권력을 휘둘러왔다. 그들은 대중의 의식을 사로잡아, 새로운 이념적 사회적 사상을 주입하고, 대다수의 행복을 위해서 삶의 구조를 개편할 것을 요구하였다(*'대심문관'은 국역본에서 '대종교 재판관'이라고 옮겨져 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을 가리킨다).

 

도스토에프스키는 타인들의 행복을 위해 책임을 떠맡고자 하는 '대심문관들'에 관하여 우리들에게 이미 경고를 한 바 있다. 인류의 이익과 보편적 복지를 들먹이며 계급이나 집단의 이익을 내세우는 결과가 어떻게 개인의 권리를 무참하게 침해하는지, 그리고 '역사적 필연'에 뿌리를 둔 그 '객관적' '과학적' 힘으로써 이러한 과정이 어떻게 민중의 삶의 기본현실을 왜곡하는지, 우리 자신이 보아왔던 것이다(*강조한 대목이 역시나 국역본에 빠져 있다).

문명의 역사 전체를 통하여 역사적 과정은 본질적으로, 세계의 구원과 인간의 개선을 위하여 이데올로그와 정치가들의 마음속에서 구상되어, 민중에게 제시된 '올바른' 길 ― 매번 좀더 나은 ― 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재편과정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하여 그때마다 '소수'는 자기들 자신의 사고방식을 취소하고, 제안된 행동지침에 자신들의 행동을 맞추지 않으면 안되었다. 미래와 인류를 구원할 '진보'를 위한 역동적인 활동에 그렇게 참여하면서, 개인은 자신의 본질과 개성과 독특성을 망각해버렸다. 일반적인 것 속에 갇혀버린 채 그는 자기자신의 정신적 본질이 갖는 의미를 과소평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개인과 사회간의 갈등이 갈수록 화해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었다.

다수의 이익에 골몰하여, 그 어느 누구도 '네가 네 자신을 사랑하듯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참뜻을 생각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여, 우선 자기자신을 사랑하여 자기자신속에 있는 초개인적이며 신적(神的)인 원리를 존경해야 한다. 그리고 이 원리를 따를진대 나는 탐욕과 이기적인 이익을 추구할 수 없고 오히려 아무런 계산이나 군말없이 나 자신을 바치고, 남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나 자신의 존엄성에 대한 진정한 감각이 있어야 된다. 지구위에서의 내 삶의 중심에 있는〈나〉 ― 자기본위의 욕망이 있을 수 없는 완성의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면서 영적으로 성장을 하는 ― 의 객관적 가치와 의의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을 위한 투쟁에 있어서 자기자신에 대한 충실성은 끊임없는 일편단심의 노력을 요구한다. 자기 자신의 좁고 기회주의적인 동기에서 조금이라도 초월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진실하게 정신적으로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비상히 힘들다. 그러나〈인간 영혼의 낚시꾼〉들에게 속아넘어가는 것은 대단히 쉽다. 이른바 좀 더 높고 일반적인 목표를 추구한답시고 자기자신의 유일무이한 소명을 포기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 자기자신과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사회적 관계는 사람들이 자기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아무런 도덕적 의무도 느끼지 않으면서 타인과 인류 전체의 책임을 묻기만 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형성되어왔다. 사람들은 타인들의 겸손과 자기희생과 사회건설에 있어서의 역할 수용을 기대하면서도 그들 자신은 그 과정에 전혀 참여하지 않으며 세상사에 대한 아무런 개인적 책임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러한 비참여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그리고 좀더 고결한 목표때문에 자신들의 편협하게 이기적인 이해관계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수많은 구실이 발견될 수 있다. 냉정하게 자기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삶과 영혼에 대한 책임은 바로 자기에게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어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모두〈함께〉라는 전제위에서, 다른 말로 하면 인류는 어떤 종류의 문명을 건설하는 과정에 있다는 전제위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개인적인 부담을 회피하고 우리 자신도 모르는 새 모든 책임을 타인들에게 전가한다. 그 결과 개인과 사회간의 갈등은 갈수록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되고, 개인과 인류간의 소외의 벽은 갈수록 높아진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특정인의 노력이 아니라 우리의〈합치된〉 노력으로 이루어진 사회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개인은 이념과 야심의 도구로 되든지 아니면 그 자신이 타인의 보스가 되어 개개인들의 권리에 대하여는 아무런 고려도 없이 타인들의 에너지를 이용한다. 누구나 자기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생각은 사라져버리고, 잘못 정의(定義)된〈공공선〉― 그 때문이라면 아무도 책임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 을 위해 희생되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우리 자신의 문제의 해결을 우리가 타인들에게 맡겨버린 순간부터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사이의 균열은 확대되어왔다. 우리는 타인들이 발전시켜온 사상의 지배를 받는 세계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상의 잣대에 순응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거기로부터 소외되어 대립되든지 해야 한다 ― 갈수록 가망없는 처지인 것이다. 기괴하고 음울한 상황이다.

나는 이 갈등은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사이의 참된 균형을 통해서만 해소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일반적인 이익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개인적인 것과 일반적인 것 사이의 비극적 충돌을 표시하는가? 사회의 장래를 위한 한 인간의 책임감이 자신의 역할에 대한 내적 확신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가 사회발전에 있어서 각자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주입시키면서 남들의 삶을 지도하고, 이용할 자격이 자신에게 있다고 느낀다면, 그때 개인과 사회 사이의 불화는 더욱 쓰디쓴 것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자유의지란 우리가 남들과 맺는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 현상을 평가할 능력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는 것, 선악 사이의 자유로운 선택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그러나 자유는 양심과 분리될 수 없다. 사회의식을 통해 발전되어온 개념들이 모두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양심은 역사적 발전과정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나의 능력이자 개념으로서 양심은 선험적으로 인간에게 내재하는 것이며, 우리의 잘못 구상된 문명에서 나온 사회의 토대 자체를 흔든다. 양심은 이 사회의 안정을 위협한다. 양심의 표현은 종종 인류라는 종(種)의 이익 ― 또는 심지어 종의 생존 ― 과 어긋난다. 생물학적 진화의 관점에서 볼 때 양심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어떤 까닭에서인지 양심은 엄연히 존재하며, 인간의 생존과 발전 전체를 통하여 인간을 따라다녔다.

인간의 물질적 확장과 정신적 진보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하다. 이제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우리의 물질적 성과를 적절하게 이용하는 데 우리가 치명적으로 무능하다는 것이 분명한 시점에 이르렀다. 우리는 인류절멸의 위협을 가하는 문명을 만들어내었다.

전지구적 규모의 재난에 직면하여 한가지 제기되어야 할 문제는 인간이 개인적인 책임을 느끼느냐, 그리고 기꺼이 희생을 할 용의가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러한 책임과 희생에 대한 용의가 없다면 인간은 참다운 의미에서 정신적, 영적 존재라고 할 수 없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희생의 정신은 외부적으로 강요된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잠재적으로 있는 본질적이고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 인간생존의 유일하게 적법(適法)한 형태로서 자연스럽게 갖추어진 ― 남들에 대한 자발적인 봉사속에 표현되어 있는 희생정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개인간의 관계는 너무나 흔히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익을 탐욕스럽게 지키려는 만큼 옆 사람으로부터 가능한 한 많이 빼앗아 오려는 충동에 지배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의 역설은 우리가 동료 인간들에게 모욕을 주면 줄수록 우리의 만족감은 약화되고 우리의 고립감은 심화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자진해서 인간적 성취의 길을 버리고, 다른 길을 온마음과 의지로써 받아들인 우리의 죄값이다.

지금 우리는 정신적인 것은 쇠퇴하고 있는 반면에 물질적인 것이 이미 오래전에 그 나름의 혈관을 가진 유기체로 발전하여, 동맥경화로 마비된 우리의 삶의 기초가 되었음을 보고 있다. 물질적 진보 그 자체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미치광이처럼 물질적〈성과〉를 올리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안내인〉이 말하는 것처럼 현재가 미래와 뒤섞여버린 지경에까지 우리는 도달하였다. 즉, 임박한 재난의 모든 전제조건들이 지금 모두 갖추어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다.

인간의 행동과 운명 사이의 연관은 파괴되어버렸다. 이러한 비극적인 균열로 말미암아 인간은 현대세계속에서 안정감을 상실하였다. 말할 것도 없이, 한 인간이 무엇을 하는가 하는 것은 핵심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그러나 아무것도 자신에게 달려있지 않고, 자신의 개인적 체험은 미래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생각에 오래 젖어온 탓에 그는 자기자신의 운명을 형성하는 데 스스로 아무런 역할도 할 것이 없다는 그릇된, 치명적인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개인과 사회를 맺어주는 모든 것이 해체되어버린 오늘의 세계에서 인간이 자신의 미래에 대한 책임감을 회복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 되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인간은 무엇보다 다시 자신의 영혼을 믿고, 영혼이 겪는 고통을 느껴야 하며, 자신의 행동을 양심에 결합시켜야 한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자신의 믿음과 일치하지 않는 한 양심이 편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는 영혼의 고통을 통해서 자신의 책임과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세상일에 대한 결정적 책임은 ― 우리 자신이 아니라 ― 다른 사람들에게 있다라고 하는 안이한 공식을 통한 자기정당화는 사전에 배제될 것이다. 나는 세계에 조화를 회복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오직 개인적 책임감의 재생에 달려있다고 확신한다.

맑스와 엥겔스는 역사란 자신의 발전을 위하여 현존하는 여러 대안 중에서 가장 나쁜 대안을 선택한다고 어디에선가 말하고 있다. 우리의 물질적 생존의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너무나 맞는 진실이다. 그들이 그러한 결론에 도달한 것은 역사가 이상주의의 마지막 남은 몇방울마저 다 짜버리고,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역사적 과정에서 더이상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게 된 때였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관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원인을 분석하지는 않았다. 다시 말하여, 인간은 자신의 영성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버린 것이다. 역사가 하나의 영혼없는 소외된 기계로 전환되자마자, 인간 생활은 역사의 수레바퀴에 봉사하는 나사가 되기를 강요받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로 인간은 무엇보다도 사회적으로 쓸모있는 동물로서 간주되어왔다. (문제는 사회적 쓸모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활동의 사회적 쓸모를 강조하는 나머지 그 개인의 권리를 무시하는 데까지 갈 때, 우리는 용서받지 못할 잘못을 저지르고, 비극의 전제조건을 만들어낸다.

자유의 문제는 체험과 교육의 문제를 제기한다. 자유를 위한 투쟁에 있어서 현대인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권리가 개인에게 허용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러한 뜻의 개인적 해방은 망상이다. 만일 인간이 그러한 자유를 추구한다면 그 결과는 오직 환멸뿐일 것이다. 자신의 정신적 에너지를 해방시키는 데는 무척이나 길고 힘든 노력이 개개인에게 필요하다. 교육은 자기기율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자신의 새롭게 획득된 자유를 오직 속된 소비주의의 관점에서만 이해하는 능력밖에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서구의 상황은 우리에게 풍성한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오늘날 서구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민주적 자유가 만끽되고 있는 한편에 그〈자유로운〉 시민들은 기괴스럽고 명백한 정신적 위기에 시달리고 있다. 개인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여기서 개인과 사회간의 갈등이 이처럼 심각하게 존재하는가?

내 생각에 서구의 경험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자유란 결코 ― 단 한푼도 비용이 들지 않는 샘물처럼, 아무런 도덕적 노력도 요구하지 않는 것으로서 ―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만일 그런 식으로 받아들인다면 인간은 자유를 자신의 삶의 향상을 위해 쓸 수 없다. 자유는 인간의 삶속에 단 한번으로 통합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도덕적 노력을 통하여 끊임없이 성취되어야 하는 것이다. 외부 세계와의 관련에서, 인간은 혼자가 아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인간은 처음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만일 그가 자유의 행사에 필요한 용기와 결심을 가질 수 있고, 자신의〈내면적〉 경험이〈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말이다.

진실로 자유로운 인간의 자유는 이기적인 의미에서의 자유일 수 없다. 개인적 자유도 단순한 집단적 노력의 결과일 수 없다. 우리의 미래는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의 비용을 ―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 남들의 노역과 남들의 고통으로써 지불하는 데 익숙해졌다. 우리는〈이 세계의 모든 것은 연관되어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고려하기를 거부한다. 우리에게는 선과 악을 선택하는 자유의지와 권리가 주어져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우연적인 것은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무시하는 것이다.

물론 나의 자유의지를 천명할 기회는 남들의 의지 때문에 제약받는다. 그러나 자유로운 존재가 되지 못하는 원인은 언제나 내적인 비겁성과 수동성이라는 것, 그리하여 양심의 소리에 따라 자신의 의지를 단호하게 천명하지 못하는 데 있다는 것을 우리는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러시아에서 사람들은〈인간이 행복을 위해 태어난 것은 새가 비상(飛翔)을 위해 태어난 것과 같다〉라는 코롤렌코(Vladmir Korolenko, 1853 - 1921, 시베리아를 배경으로 한 중단편 소설들을 쓴 작가 ― 역자)의 말을 즐겨 인용한다. 내게는 이 말처럼 인간생존의 기초로부터 동떨어진 것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나로서는〈행복〉이라는 개념 그 자체가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것은 만족을 의미하는가? 조화를? 그러나 사람에게는 만족이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시선은 궁극적으로 어떤 구체적인 특정한 목표물이 아니라 무한 그 자체에 닿아있기 때문이다.〈교회〉도〈절대〉를 향한 인간의 갈증을 해소할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교회는 우리의 일상생활을 조직하는 사회기구들을 모방하거나 심지어 희화화하는 일종의 부속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물질적인 것과 기술적인 것쪽으로 너무나 무겁게 기울어져 있는 오늘의 세계에서 지금까지〈교회〉가 정신적 깨달음에 대한 호소를 통하여 균형을 바로잡을 수 있는 능력을 전혀 표시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술은 인간의 정신적 가능성의 절대적 자유를 표현하도록 요청받는 것으로 내게는 보인다. 내 생각에 예술은 언제나 인간정신을 삼켜버리려고 위협하는 물질적인 것들에 맞서는 인간의 무기였다. 거의 2천년간의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예술이 오랫동안 종교적 이념과 목표라는 맥락속에서 발전하였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예술의 존재 자체로 말미암아 불협화(不協和)의 인간속에 조화의 이념이 살아남아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술은 하나의 이상을 육화(肉化)한다. 그것은 도덕적 원리와 물질적 요소 사이에 완전한 균형이 이루어진 예를 보여준다. 그러한 균형이 이념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실제 현실의 차원에서 실현될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예술은 조화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표현하고, 인간이 자신이 갈망하는 균형을 성취하기 위하여 자신의 내부에서 자기자신과 기꺼이 투쟁할 용의가 되어있는 자세를 표현하였다.

예술이 이상적인 것을 표현하고, 인간의 무한성에 대한 갈망을 표현한다고 할 때, 소비주의적 목적을 위하여 예술을 이용한다면 그것은 예술의 본성을 크게 침해하는 것이다. 이상(理想)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의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관계하지만, 우리의 정신의 세계에 무엇이 존재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예술작품은 이러한 이상에 주어진 형식이다. 그 이상은 미래에는 마땅히 인류전체에 속해야 하는 것이지만 지금으로서는 소수 ― 무엇보다도 자신의 예술에 육화된 이상의 인간적 의미를 모든 제약에도 불구하고 간파할 수 있었던 천재를 위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술은 본래 귀족적이다. 예술은 잠재능력의 수준을 구별해주며, 그렇게함으로써 정신적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개개인에게 낮은 곳으로부터 높은 곳으로의 진보를 보증해주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내가〈귀족적〉이라는 단어를 쓸 때 거기에는 아무런 계급적 함축이 들어있지 않다. 실은 그 반대이다. 영혼이 도덕적 정당화와 생존의 의미를 추구하면서 그 추구 과정에서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한, 모든 사람은 동등한 처지에 있으며 마찬가지로 모두 정신적 엘리트가 될 자격이 있는 것이다. 본질적인 차이는 이러한 가능성을 이용하려는 사람들과 이것을 무시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 그러나 예술은 언제나 다시 사람으로 하여금 예술형식속에 육화된 이상의 빛속에서 자기자신과 자신의 삶을 재평가하도록 초대한다.

행복에 대한 권리로서 인간생존의 의미를 보는 코롤렌코의 해석은 내게〈욥기〉를 상기시켜준다. 거기에서는 정반대의 견해가 표명되어 있다.〈인간이 재난속으로 태어난 것은 불꽃이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것과 같다.〉 다른 말로 하여, 고통은 우리의 생존에 고유한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공중으로 날아오를〉 수 있겠는가? 고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불만으로부터, 그때그때 우리가 처한 지점과 이상 사이의 간극으로부터?

〈행복〉에 대한 감각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 선악의 균형된 관계가 유지되고, 악의 창궐이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 ― 참된 의미에 있어서 신성한 자유를 위한 투쟁속에서 우리 자신의 영혼을 확인하는 일이다.

예술은 희망, 믿음, 사랑, 아름다움, 기도 등 ― 인간속에 있는 가장 좋은 것 모두를 긍정한다. 인간이 꿈꾸는 것, 인간이 품고있는 희망. 헤엄칠 줄 모르는 사람이 물에 빠지면 본능적으로 그의 몸은 살아나기 위한 동작을 시작한다. 예술가도 일종의 본능의 지배를 받는다. 예술은 정신적 의미에서 인류를 익사시키지 않으려는 본능으로서 존재한다. 예술작품은 영원하고, 초월적이며, 신성한 것을 향한 인간의 탐구를 ― 흔히 예술가 자신의 죄많음에도 불구하고 ― 가능하게 한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그것은 하느님의 것인가 악마의 것인가? 인간의 강점으로부터 오는가 약점으로부터 오는가? 그것은 사회적 조화의 이미지인가? 그러한 것이 예술의 기능인가? 우리가 서로서로 의존적인 관계에 있다는 의식의 확인으로서의 사랑의 고백. 참회. 삶의 진정한 의미를 자기도 모르게 드러내는 무의식적 행동 ― 사랑과 희생. 그러한 것이 예술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되돌아 볼 때 인간역사의 도정은 파국과 재앙으로 점철되어왔다. 어째서 이런가? 이들 문명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어째서 그들은 숨이 차고, 사랑의 의지를 상실하고, 도덕적 힘을 잃어버렸는가? 이 모든 것이 단지 물질적 결핍 때문에 일어났다고는 믿을 수 없다. 그러한 발상은 내게 기괴스러워 보인다. 게다가 이제 우리는 역사 과정의 영성적 측면을 고려하는 데 실패한 결과로 또하나의 문명을 바야흐로 파괴하려 하고 있다. 지금 우리를 짓누르는 많은 불운한 일이 우리가 용서받기 어렵게 범죄적으로, 가망없이 물질 본위로 된 결과라는 사실을 우리는 스스로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 과학의 주인공들로 행세하면서, 과학적 객관성을 좀더 설득력있는 것으로 하기 위하여 우리는 나눌 수 없는 본래 하나인 인간과정을 쪼개고, 그렇게함으로써 거기서 만물의 제1원인이라고 하는 것을 드러내어, 그것을 과거의 잘못을 설명하는 데뿐만 아니라 미래를 위한 청사진으로 이용한다. 아마도 문명들의 붕괴가 뜻하는 것은 인간이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역사〉가 참을성있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인지 모른다. 역사가 더이상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지 않고, 그래서 다음번에는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은 채 그동안 이루어져온 모든 잘못된 시도를 역사 자신의 족보에서 지우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기를 역사는 기다리는지 모르는 것이다. 인간은 역사로부터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고, 역사가 무엇을 해왔는지 주목하지 못하고 있다는 널리 퍼져있는 견해에는 일리가 있다. 연속적으로 이루어진 모든 파국적 재난은 분명히 문제의 문명이 잘못 구상되어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인간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인간이 자신의 목표를 정신적 영적 완성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예술은 완성된 과정, 완결의 이미지이다. 예술은 역사의 기나긴 ― 아마도 끝없는 ― 길을 뛰어넘어 획득된 절대적 진실(오직 이미지만이지만)의 소유를 모방하는 일이다.

우리는 쉬고 싶을 때가 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 모든 것을 자기자신과 함께 어떤 총체적인 세계관 ― 예컨대〈베다〉와 같은 ― 에 넘겨주고 싶은 순간이 있다. 동양은 서양보다 진리에 더 접근해 있었다. 그러나 물질본위의 서구문명이 동양을 삼켜버렸다.

동양음악과 서양음악을 비교해보라. 서양은 끊임없이 소리친다.〈나야! 나를 보라구! 내가 얼마나 고통받는지, 사랑하는지 들어보라구! 얼마나 난 불행한가! 얼마나 행복한가! 내것이야! 나라구!〉 동양의 전통에서는 사람은 자기자신에 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사람은 신과 자연과 시간속에 완전히 흡수되어 있다. 모든 것 속에 자신이 있으며, 자기자신 속에 모든 것이 있다. 도가(道家)의 음악을 생각해보라. 그리스도 이전 600년전의 중국. 그런데 어째서 그러한 최고의 사상이 승리하지 못했는가? 어째서 그것은 몰락해버렸는가? 어째서 그러한 토대위에서 성장한 문명이 역사 과정에서 완성된 형태로 우리에게 전달되지 못했는가? 그들은 그들을 둘러싼 물질주의 세계와 충돌했는가? 개인이 사회와 충돌하는 것처럼 그 문명도 다른 문명과 충돌하였다. 그런 이유로만 그 문명이 붕괴한 것은 아니다. 또다른 이유는 그것이 충돌한 것이〈진보〉와 기술로 이루어진 물질주의 세계였기 때문이었다. 그 문명은 진정한 지식의 마지막 정점, 이 지구의 소금중의 소금이었다. 동양사상의 논리에 따르면 어떤 종류의 것이든 갈등은 모두 본질적으로 죄악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상상하고 창조한 대로의 세계속에 산다. 그런데 우리는 그 혜택을 누리고 있는 대신에 그 결함의 희생물이 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내가 독자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 실은 간절하게 털어놓는 말이지만 ― 인간이 일찍이 자기희생의 정신으로 창조해온 유일한 것은 예술적 이미지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모든 인간적 활동의 궁극적 의미는 예술적 의식 ― 일정한 목적이 없고 사심(私心)이 없는 창조적 행동에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창조능력이야말로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증거일 것이다.

 

커버 아트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인터뷰>(미시시피대학출판부, 2006)

Андрей Тарковский. Архивы, документы, воспоминания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자료, 문헌, 회상>(엑스모프레스, 2002)

http://www.youtube.com/watch?v=V27XlEDLdtE

http://www.youtube.com/watch?v=aedXnLpKBC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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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경 2006-10-23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숨도 안쉬고 잘 읽었습니다. 부대 특박 중 빈둥거리느라, 눈이 아귀 마냥 하고싶은 거에 눈을 빼앗겨서 잠시나마 (진정)제 시간을 가진적이 없었는데 탈선이 부그러울 정도로 호된 글이군요. 잘읽고 갑니다. 이글 따로 보관해도 되죠?(진작 출력했습니다.)
앞으로의 글이 기다려 집니다.

로쟈 2006-10-23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아직 교정이 덜 끝난 글인데요... 앞으론 숨은 쉬면서 읽으시길(제가 나름대로 문단은 자주 끊어놓는데).^^
 

필요 때문에 타르코프스키에 관한 자료들을 뒤적이다가 예전에 읽어본 서평 하나가 눈에 띄길래 옮겨놓는다(밀린 페이퍼들도 많건만!).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무더운 여름에 벽돌쌓기 - 에이젠슈테인과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론'이 그것인데, 좀 놀라운 사실이지만 <문화예술>(1991년 7월호)에 게재된 것이니까 15년전 글이다(본문에도 나오지만 타르코프스키의 <희생>도 개봉되기 전이다!). 세는 나이로 33살에 쓴 것.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 '씨네필' 평론가를 능가하는 영화광(이자 영화도서광)이 등장하지 않은 것 역시 놀랄 만한 일이다(더불어 좀 놀라운 건 임권택 감독과의 대담을 제외하면 그가 아직 단 한권의 영화비평서도 간행하지 않은 사실이다. '책'에 대한 결벽일까?). 글은 각가 1990년과 1991년에 나온 에이젠슈테인의 책 4권과 타르코프스키의 책 1권에 대한 서평인데,  격세지감이 느껴지게도 에이젠슈테인의 책들은 현재 모든 절판됐다. 그의 책들이 다시 소개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보태면서 다시 읽어보도록 한다. 강조와 덧붙인 말들은 나의 것이다(이런저런 오타들도 수정했다).  

 

예술의 이론에 관한 분야 중에서도 우리에게 영화만큼 그 공허한 여백이 넓은 분야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인데 우선 첫 번째로 '영화야 그냥 보면 되지, 뭐 이론까지 알 필요가 있겠어요'라는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영화 이론에 황폐함을 더하고 있다. 그래서 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뉴 크리티시즘이나 구조주의, 벤야민이나 바슐라르의 텍스트들을 구해서 보기도 하지만 영화에 대해서는 스타 백과사전이나 영화음악에 대한 '잡동사니' 지식들이 나열된 책들이 서점의 영화난을 메우고 있는 것이 고작이다. 두 번째 이유는 영화인 자신들의 문제이다. 한국 영화의 수준이 그야말로 '이론과 아무 관계가 없으니' 구태여 참고도서(?)를 찾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영화 평론가들의 활동을 전문적이라고 부르기에는 현실적으로 일정한 한계가 있다(*요즘은 사정이 좀 나아졌으리라고 본다. 그 사이에 우리를 놀라게 하고 즐겁게 해주는 영화감독들이 여럿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 이론은 60년대에 르네상스를 맞이하여 성숙하였다. 문학과 미술비평이 이론(더 정확하게는 내러티브와 격자틀, 담론과 표상/재현의 이론)을 받아들여 영화는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의 논쟁터가 되었고(우리처럼 문학이 아니다 !) 잘 알려진 프레드릭 제임슨, 테리 이글튼, 장 보드리야드, 장 뤽 낭시, 마르슬렝 플레네, 쥴리아 크리스테바, 뤼스 이리가라이, 데이비드 로지, 질르 들뢰즈 등이 가세하였다. 그래서 영화라는 영토를 철학의 장소이자 정신분석학의 공간, 여성 해방의 억압 장치이자 권력의 이중 시선에 사로잡힌 감옥이라고 불렀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이다. 이들의 영향권에 놓인 새로운 영화인들이 차례로 우리에게 소개되었다. 빔 벤더스의 <파리 텍사스>, 스티븐 소더버그의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데이비드 린치의 <광란의 사랑>, 팀 버튼의 <가위손> 등은 관객을 당혹시켰고, 영화평 난에는 영화와 아무 관계없는, "고독한 현대인의 사랑과 절망, 그리고…"하는 상투적인 문장만이 가득 메워졌다. 영화는 우리의 논의와 아무 관계없이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영화에 관한 이론은 크게 두 개의 흐름으로 나뉜다. 하나는 몽타쥬 이론이고, 또 하나는 미장-센 이론이다. 그러나 그간 여러 사정으로 미장-센 이론만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고, 몽타쥬 이론은 거의 소개 될 기회를 놓쳤다. 그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몽타쥬 이론이 소련 영화감독들에 의해 제창되었으며 게다가 그 근간에 흐르는 역사적 배경이 20년대의 볼셰비키 혁명의 선전 사업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몽타쥬 이론의 아버지 세르게이 미카이로비치 에이젠슈테인은 명성을 얻은 만큼 실제로 그의 이론과 영화가 정확히 알려져 있지 못하다.

그러나 한·소 수교의 기점으로 해빙무드가 열렸고, 게다가 대학 내에서는 공공연히 '영문판' 텍스트들이 읽히고 수업 교재로 사용되고 기말고사 시험문제로 출제되는 상황에서 번역본 한 권 없을 수 있겠는가라는 각성이 일어 금년 상반기에만 네 권의 번역본이 출판되었다(*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에이젠슈테인이 살았던 시대는 1917년 혁명에 성공한 레닌이 영화야말로 '선동의 최선의 무기'라고 영화 사업을 부흥시키던 20년대, 그는 당시 '혁명에 흥분한' 청년이었고, 그래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변증법적 유물론에 철저한 영화론을 생각해 내기에 골몰했다.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쥬 이론은 할리우드의 초기 무성영화에서 얻어낸 결론이었다. 당시의 슬랩스틱 코미디는 일종의 눈속임인데, 그 눈속임의 비밀은 커트와 커트 사이에 숨어 있었다. 만일 그러하다면 A쇼트와 B쇼트를 연결시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놀랍게도 A+B가 아니라 C가 된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이것이야말로 변증법에서 테제와 안티 테제를 통해 진테제가 도출된다는 도식 바로 그 자체가 아니겠는가?

 

에이젠슈테인은 이 '발견'을 '조립하다'라는 불어 monter의 명사형montage(몽타쥬)라고 불렀다. 그후 편집/데꾸빠쥬의 연구를 몽타쥬 학파라고 불렀고, 더 나아가 이 방법론은 제3세계 영화인이나 진보적 시네 아티스트들의 좌우명이 되었다(*러시아어에서는 '몽타주' 대신에 따로 '편집'이란 용어를 쓰지 않는다. 이후에 나온 책이지만 러시아 몽타주이론에 대한 가장 요긴한 해설은 김용수의 <영화에서의 몽타주 이론>(열화당, 1996)을 참조할 수 있다). 

 

그렇다면 4권의 책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인가 ? 만일 에이젠슈테인의 이름을 잘 알지 못하고, 그의 영화도 본적이 없다면 <이미지의 모험, 영화론과 영화 작품>(전양준 편집, 열린책들)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우선 이 책은 친절하다. 전체 구성은 그의 이론적 논문과 작품을 연대기적으로 동시에 배열해 놓고 있다. 그래서 이론보다는 에이젠슈테인의 영화에 대해서만 알고 싶은 사람들은 논문을 생략하고 영화 소개만 쫓아가면 되도록 충실하게 구성해 놓았다. 또한 이론적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핵심적 논문인 '영화의 원리와 표의 문자', '영화 형식의 변증법적 접근', '영화에 있어서의 4차원'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에이젠슈테인을 읽는다면 우리는 거기서 무슨 교훈을 얻을 것인가라는 안내로 영국의 영화학자(이자 감독인) 피터 워렌의 야심적인 저서 <영화에서의 의미와 기호> 제1장 '에이젠슈테인의 미학'을 번역해서 첨가하였다. 이쯤 되면 에이젠슈테인에 대한 입문으로서는 가슴 든든한 소개서를 갖게 된 셈이다(*피터 웰렌의 책은 이후에 <영화에서의 기호와 의미>(영화진흥공사, 1994)란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원저는 1969년에 초판이 나온, 영화학에 기호학적 방법을 도입한 것으로 유명한 책이다. 영어권에서는 처음이지 않았을까 싶다. 1998년에 개정증보판이 나왔다).

 

 

그러나 편저자의 소개처럼 몽타쥬의 이론이 에이젠슈테인에서 시작해서 고다르로 완성되었다면, 고다르의 그 유명한 논문 '몽타쥬', '나의 멋진 근심'은 왜 빠졌는가라고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모든 독자들의 기대를 만족시킬 수는 없는 법(*아직도 고다르에 관한 '멋진' 책을 시중에서 단 한권도 구해볼 수 없는 것은 매우 근심스러운 일이다. 고작해야 오래전에 절판된 리처드 라우드의 <장 뤽 고다르>(예니, 1991)가 전부인가?).

 

그래서 좀 더 깊이 있는 연구를 위해서는 본격적인 논문집 <몽타쥬 이론>(이정하 역, 예건사)을 추천하고 싶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는 실제 작업에서 부딪치는 논쟁적 이슈들, 2부에는 이론적 논문들, 3부에는 몽타쥬론 확립 이후의 작업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의 특징은 꼼꼼하다는 것이다. 번역자는 혹시나 독자들이 에이젠슈테인의 논쟁적 이슈를 쫓아오다가 놓칠까 끈기 있게 주석을 달고 있다. 만일 몽타쥬론을 공부하기 위해서라면 국내 번역본으로서 아직 이 이상은 없다(*아래의 책은 현재 러시아에서 새롭게 출간중인 에이젠슈테인 전집 중 <몽타주>(무제이 키노, 2000). 그의 몽타주론을 집성하고 있는 책으로 만일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론을 공부하기 위해서라면 필독서가 되겠다).  

 

Монтаж

 

몽타쥬론을 처음 발견한 것은 에이젠슈테인이 아니다. 에이젠슈테인의 영화 학교 선생님이었던 클레쇼프는 학생들과 함께 그 유명한 '쿨레쇼프 실험'을 했다. 그는 한 여인의 얼굴을 찍어서 똑같은 필름을 3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필름에 각기 잠자는 아기의 얼굴, 먹음직스런 빵, 그리고 날카로운 칼을 연결시켰다. 그 결과 아무 영문을 모르는 관객들은 여인의 연기에 감탄을 하는 것이었다. 아기의 얼굴에 이어 놓은 여인의 얼굴에서는 자비를, 빵에 이어 놓은 여인에게서는 배고픔을, 그리고 칼에 이어 놓은 여인에게서는 공포를 보았다. 쿨레쇼프의 제자였던 에이젠슈테인과 푸세볼로드 푸도프킨은 거기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지만,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갔다.

 

푸도프킨은 몽타쥬를 벽돌쌓기라고 불렀다. 그는 영화가 모여서 하나의 의미를 이룬다고 보았다. 반면 에이젠슈테인은 충돌이라고 받아들였다. 전혀 다른 의미의 쇼트를 굳이 '함께 놓아' 관객으로 하여금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게 한다는 것이다. 에이젠슈테인은 그의 생각을 좀 더 발전시켰다. 몽타쥬로 충돌뿐만 아니라 견인(끌어당기기, attraction)의 효과까지도 끌어냈다. 이 복합적 개념은 단순히 작가의 의지만이 아니라 관객의 마음까지도 고려하는 것으로, 그는 견인의 구성을 통해 관객의 정신적 과정을 형상화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즉 관객은 수동적인 감상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공동 창조자가 되는 셈이다.

 

에이젠슈테인은 영화와 관객 사이의 관계에 늘 불만을 갖고 있었다. 관객은 영화를 실제 사건처럼 바라보고, 작가는 사실을 전달하는 역할만 하게 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에이젠슈테인에게 새로운 이론을 근거를 제공해 준 것은 일본의 가부키 연극이었다. 가부키 연극에서는 사실이나 사건의 실제성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 사건에 대한 관점이나 해석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즉, 가부키 연극은 플롯이나 동작의 열거로는 이해될 수 없다. 여러 요소들 간에 이루어지는 전체적 조화의 형식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참고로, 불어권에서 가장 유명한 관련서는 자크 오몽의 <몽타주 에에젠슈테인>이다. 이 책은 영역돼 있다).

 

여기에서 에이젠슈테인의 중립화 개념이 발전하였다. 리얼리티는 더 이상 영화를 통제할 수 없게 되고, 화면의 수많은 요소들로부터 생겨나는 충격, 그 연쇄 작용이 영화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영화의 질료인 쇼트 내의 견인들을 편집하는 문제가 남는다. 질료에 대한 통찰력을 가부키 연극에서 얻었듯이 편집 개념은 일본의 상형문자에서 명확해졌다. '새(鳥)'와 '입(口)'이 합쳐져서 '노래한다(鳴)'는 뜻이 되는 것에서 에이젠슈테인은 역동성의 근거를 발견하였다. 상형문자의 한 글자 한 글자가 견인일 때, 견인의 충돌이 가져오는 변화는 도일한 개념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질료가 영화 자체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의 '세포'이고, 이 세포들은 편집을 통해 살아 있는 영화 자체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만일 모든 옳은 이야기라면 현장에서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 거기에 답을 주는 것이 <영화 연출 강의>(V. 니즈니 기록, 이경윤 번역, 예건사)이다. 이 책은 에이젠슈테인이 쓴 책은 아니다. 소련의 국립영화학교인 VGIK에서 그가 강의할 때 학생이었던 V. 니즈니가 노트를 다시 복원시켜 강의록으로 펴낸 것이다. 그래서 얼핏보기에는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처럼 보인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읽는다면 이 책의 핵심적인 고리는 모두 놓치는 셈이다. 오히려 쉬운 문장 속에 '숨어 있는' 몽타쥬 이론의 핵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간에 나온 몽타쥬 이론을 철저하게 학습한 뒤에 행간 사이의 의미를 추적하는 것이 올바른 독서 방법일 것이다. 더구나 이 책이 '감동'적인 것은 다른 책과 달리 여기서는 선생님으로서 따뜻한 체온이 느껴진다. 그래서 모든 학문에서와 마찬가지로 영화에서도 중요한 것은 그 결론이 아니라 결론까지 도달하게 만드는 그 과정을 연구하고 토론하여 익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몸소 보여준다. 

 

이제 마지막 한 권이 남았다. <영화의 형식과 몽타쥬>(정일몽 번역, 영화진흥공사)는 영미권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에이젠슈테인의 'Film form', 'Film Sense'(Jay Leyda 옮김, 1975) 두 권을 번역한 것이다. 이미 이 두 권은 부분적으로 발췌되어 나오기는 했으나 한 권으로 완역되기는 처음이다(*역자인 레이다는 초기 소련영화 전문가인데, 그의 <소련영화사1>(공동체, 1988)이 번역된 바 있다. 왜 요즘은 이런 책들도 읽어볼 수 없는가?).

 

이 책에는 장점과 단점이 있다. 그 하나는 위의 책들에 빠져 있는 논문 중에서 중요한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래서 에이젠슈테인의 번역 논문 목록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주고 있다. 그러나 영어판의 단점이 그대로 번역되어 있다. 영어판의 번역자인 제이 레이디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번역 과정에서 상당 부분을 생략하거나 요약하였다. 그래서 최근에는 영국의 영화전문연구소(BFI, British Film Institute)에서 재번역을 하고 있는 실정인데(*책은 1991년에 출간됐다), 불행히도 이 번역은 제이 레이다 판을 따르고 있어서 충분한 이해 없이 생략된 의미까지 잡아내기 힘들다.

 

 

만일 이 책들을 읽고 결론지어 소련 영화를 모두 몽타쥬 영화라고 부른다면 그건 좀 이르다. 만일 <봉인된 시간>(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저, 김창우 번역, 분도출판사)을 읽는다면 그 반대의 진영도 만만치 않다는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수입되지는 않았지만 대학 영화 서클이나 비디오 감상회를 통해서 '전 작품'이 소개된 희귀한 경우이다(*타르코프스키는 80년대 대학가의 '전설'이었다. 그의 유작 <희생>이 국내 개봉관에서 처음 상영된 것이 1994년의 일이니까 이 글이 씌어진 시점에서 타르코프스키는 여전히 '전설'인 셈이었고).

 

 

 

 

 

 

 

 

 

그는 1962년에 <이반의 소년시절>로 데뷔하여 1986년에 유작이 된 <희생>까지 단 7편을 연출한 극단적인 과작의 시네 아티스트이다(*그의 책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과작'은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타의에 강요된 것이다). 특히 그의 영화는 이미지의 세계이다. 카톨릭의 삼위일체를 영화 속에서 실현시키려는 예술적 소망은 고통스러우리만큼 끈질기고 황홀하리만큼 기적적인 화면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흔히 그를 영상 시인이라 부르는데, 그 자신은 영화가 시적이라고 불리는 것을 극도로 경멸하고 비판해 왔다. 더구나 근거 없는 상징적 해석에 대해서도 단연코 반대했으며, "제발 부탁인데 화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달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기존의 영화적인 상식으로 보면 그의 영화는 이해하기 어렵다. 우선 철저하리 만큼 러시아 문화의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특히 반에이젠슈테인 전통에 서서 편집된 영화보다는 장시간 촬영을 선호하기에, 빠른 영화에 익숙해 있는 관객에게는 견디기 힘들다. 그래서 서구의 영화 평론가들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관객 자신의 아집과 편견을 버리고 그 속에 들어가 앉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만일 <봉인된 시간>을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 대한 해설이나 자서전이라고 생각한다면 크게 실망하게 될 것이다. 오히려 이 책은 그의 영화에 관한 이론적 서술이며, 에이젠슈테인의 거대한 흐름 아래 자기 선언을 할 수 없었던 그 반대 진영의 변명이기도 하다.

 

타르코프스키의 이론의 핵심은 시간과 공간이다. 그의 지금까지의 영화 이론이 시간을 근거로 한 공간이었지만, 그 자신은 시간을 '조각하는' 공간을 제시한다. 그래서 시간을 정지시켜 세워진 공간에서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물을 물질적 관념으로 다룬다. 이제 그의 영화에서 몽타쥬는 부차적인 것이 되고 이미지는 자기의 시간과 공간을 획득한다.

 

 

이 책은 독일어판을 원본으로 했는데 영어판에 비해서 차이점이 많다.(더 중요한 것은 독일어 판을 구하지 못한 필자로서는 번역의 정확성을 따져 볼 수 가 없다). 이를테면 <희생>의 마지막 장면에 6분(정확하게는 6분40초)의 장시간 롱 테이크가 나온다. 번역본에는 "나의 전 작품 중에서 가장 긴 장면, 아마도 영화사를 통틀어 가장 긴 장면일 듯한 6분 짜리"(304쪽)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의심스럽다. 영역본에는 "이것이 6분 동안 불이 나는 장면을 지속하여 찍은 이유이며, 달리 방법이 없었다"(227쪽)라고만 되어 있다.

 

(*)영역본에서 이 대목은 "That may be why the fire scene lasts a full six minutes; it could not have been done any other way."로 옮겨져 있다. 국역본은 독어본을 대본으로 한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러시아어본이 원본이라는 점이다. 확인결과 <봉인된 시간>의 러시아어본은 2002년에 출간되었다. '희귀본'인지 잘 눈에 띄지 않는 책이며 나도 아직 구하지 못했다.

 

 

혹시 번역자가 인위적으로 해설(?)을 곁들인 게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되는데(*영역본에 근거해보자면 그런 의심을 가질 만하다), 더구나 이 영화의 첫 장면은 그 보다 더 긴 14분 15초 동안 지속되며 <향수>에서도 온천장을 횡단하는 9분 20초 짜리 장면이 나온다. 게다가 영화사에서 6분 롱 테이크는 길다고 말할 수 없다. 10분을 넘는 지속 장면 영화는 수도 없이 발견되기 때문이다(고다르, 얀초, 오시마, 마이클 스노우, 등등)

 

이러한 몇 군데를 제외하면 타르코프스키 자신의 개인적인 기억과 영화 이론의 보편성을 추구한 이 난잡한 서적을 그렇게 깔끔하게 번역한 것은 높이 평가해야 될 것이다(*영역본과의 대조에만 의지해서 말하더라도 국역본은 생각보다 많은 오류들을 포함하고 있다. 보다 정확한 교정본이 출간되었으면 싶다). 에이젠슈테인의 책과 함께 읽으며, 우리에게 아직도 미지의 세계로 알려진 소련 영화의 깊이와 너비를 음미하는 것도 이 무더운 여름에 안목 있는 독자들에게는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여름에 읽지 못한 독자라면 가을에라도).

 

 

06.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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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사스 2006-10-19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읽고 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