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날짜 한국일보에서 미국 작가 레이몬드 챈들러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장르소설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혹은 그럴 만한 여유를 못내는) 처지이지만 '챈들러 컬렉션'에 대한 욕심을 부추기는 기사였다. 여기에 옮겨놓는 걸로 당분간은 그 욕심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필자는 최윤필 기자이며, 타이틀은 "추리소설 대표주자 레이먼드 챈들러: "썩은 도시 LA, 검은 속 보여주지""이다.

-“‘필립 말로’ 시리즈는 정직한 한 인간이 부패한 사회에서 고귀하게 살아가려는 분투를 담고 있습니다. 그 분투에서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는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그는 빈털터리가 되거나 시니컬해지거나 삶에 관한 경구를 내뱉거나 간혹 정사를 즐기게 될 지도 모릅니다. 혹은 그는 할리우드의 영화제작자처럼 사악해지고 남의 비위나 맞추며 무례해질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말로 또래의 젊은 남자가 고상하게 부를 누릴 수 있을까요. 부정하지 않고서야 성공할 수 없는 냉혹하고도 분명한 현실을 받아들여 스스로를 타락시키지 않고 말입니다.”- 챈들러가 존 하우스만(영화제작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추리문학계의 거물 스티븐 킹은 ‘창작론’이라는 부제를 단 저서 <유혹하는 글쓰기>(김영사)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직유는 1940년대와 1950년대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나 한심한 싸구려 소설에서 찾아낸 것들이다”고 썼다. 그는 ‘하드보일드 추리소설’과 ‘한심한 싸구려 소설’을 구분했지만, 40~50년대 당시의 미국 문단에서 그 둘의 구분은 무의미했다. 그 ‘한심한 싸구려’ 하드보일드 작가들은 하지만, 당대의 근엄한 주류들을 비웃듯 40년대 할리우드의 ‘필름 느와르’라는 흐름을 선도했고, 사후 하드보일드 리얼리즘의 고전으로 영미권 문학의 진지한 논문 주제 가운데 하나가 됐다.

-이들이 바로, 대시엘 해멧, 로스 맥도널드, 그리고 여기 소개하는 레이먼드 챈들러(1888~1959)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기나긴 이별>은 12번을 읽었다. 그는 나의 영웅이었다”고 말했고, 폴 오스터가 “그는 미국을 이야기하는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냈고, 이후 미국을 예전과 같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던 바로 ‘그’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기자생활을 하며 시와 수필을 썼고, 여러 직업을 전전한 끝에 석유회사 부사장으로 출세하지만, 음주와 장기 결근으로 쫓겨난 이력의 작가다. 펄프 매거진에 범죄단편을 기고하며 문학 인생을 시작한 그는 첫 장편 <빅 슬립>(39년)부터 후기 걸작 <기나긴 이별>(54년)까지 6권의 장편 추리소설(박현주 옮김, 북하우스)을 썼다.

 

 

 

 

-오스터의 말처럼, 그의 문학은 현대 미국을 읽는 효율적인 코드 가운데 하나다. 인종의 용광로라는 미국에서도 가장 비등점이 높은 도시 LA를, 군수산업을 필두로 한 산업문명의 어지러운 성장과 사회ㆍ사상ㆍ가치의 부패와 혼란으로 뒤숭숭했던 30년대 말~ 50년대를 그의 소설은 말 그대로 하드보일드하게 관류한다. 그의 ‘페르소나’라 해도 좋을, 사립 탐정 ‘필립 말로’ 와 함께(*아래는 말로 역의 험프리 보가트).

-183㎝의 키에 85㎏의 당당한 체구, 경찰직에서 해고당한 33살 독신의 낭만적 냉소주의자 ‘말로’. 그는 고전적 의미에서의 정의의 투사도, 영웅도 아니다. 자신의 일에 때로는 목숨도 걸지만 사명감 따위는 없다. 한 마디로 그는 세상과 삶 자체를 냉소하는 ‘삐딱한 프로’다. 경찰 일에 협조하지 않았다고 경찰은 그를 욱대기고 그는 경찰을 이죽거리는 장면이다. “베이시티에서는 그 이유만으로 당신을 죽여버릴 수 있었어.”(경찰) “베이시티에서는 파란 넥타이를 매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날 죽일 수 있었겠지.”(말로) “그 이유만으로 당신을 영업정지시킬 수 있었어.”(경찰) “고려해보시지. 난 이 직업을 좋아한 적이 없었거든.”(말로) -<리틀 시스터>에서

-챈들러 문장의 매력은, 인물의 내면까지 공간에 투영시키며 치밀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끌고 가는 묘사의 힘, 그리고 ‘~듯이’ ‘~처럼’으로 이어지는 그 특유의 비유에서 찾을 수 있다. 가령 이런 문장. “장군은 다시 천천히, 일자리를 얻지 못한 쇼걸이 마지막 남은 고급스타킹을 사용하듯 조심스럽게 힘을 사용해서 말했다.” -‘빅슬립’에서

-챈들러는, 그리고 ‘말로’는 당대의 타락과 위선을 혐오하고 배척하는 대신, 냉소와 조롱, 연민과 익살로 포용한다. 고독한 감성과 치밀한 추리의 세계로 품는다. <빅슬립>의 33살 청년 탐정 말로는 <하이 윈도> <안녕 내사랑> <호수의 여인> <리틀 시스터> <기나긴 이별>까지 편을 이어가며 자신만의 아름다운 염세주의 미학을 구축해간다.

-냉혹하고 현실적인 팜므 파탈형 여성들을 주로 그렸던 소설에서와 달리, 18살 연상의 아내를 생애를 두고 열렬히 사랑했다는 챈들러는 <기나긴 이별> 발표 직후 아내가 숨지자 실의에 빠져 알코올 중독자로 살다 세상을 떠난다.

-그의 첫 장편 <빅 슬립>은 지난 해 말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의 100대 영어소설에 들었고, 그의 팬 대다수가 최고로 꼽는 <기나긴 이별>은 ‘히치콕 매거진’선정 세계 10대 추리소설에 꼽혔다. 올 여름, 그와의 연애에 빠져보자(*내가 올여름에 챈들러에 빠질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지만, 그렇다고 이 페이퍼가 'long goodbye'가  되기를 바라진 않는다. 암만!).

06. 07.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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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7-09 15:43   좋아요 0 | URL
저는 그 탐정의 표준전 모델이 된 필립 말로가 싫어요 ㅠ.ㅠ 그래도 퍼갑니다^^

로쟈 2006-07-09 15:49   좋아요 0 | URL
추리소설 애호가께서 안티-말로시라니까 다소 의외이긴 합니다.^^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피터 크레이머의 <우울증에 반대한다>(플래닛, 2006)는 개인적으로 관심이 가는 책이었다. '우울증 컬렉션'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울증과 관련한 몇몇 책들에 흥미를 갖고 있던 차에 항우울증 치료제인 프로작에 관한 베스트셀러를 쓴 저자의 명성에 눈길이 갔던 것이다. 한데, 주문해서 손에 들기까지도 아무런 리뷰나 서평을 읽어볼 수가 없었다. 언론의 지나친 주목을 받는 책들이 있는가 하면, 이렇듯 이유없이 홀대받는 책들도 있는 것(신생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라 '로비'가 부족했던 것일까?). 

해서 언제든지 '프리뷰'의 자리에서 다룰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비오는 날 공치는 '노가다' 인부처럼 일주일을 그냥 흘려보냈다. 이번주는 사정이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출판사 리뷰라도 올려놓는다. 그리고, 학위논문의 일부를 떼다가 붙여놓는다. 우울증에 대한 나의 '문학적' 관심이 어디에 걸쳐 있는지 보여주는 글이기도 하다(비오는 날 우리 아저씨들이 따로 무얼 하겠는가? 연장이나 다듬고 있는 수밖에).    

 -정신의학자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프로작에게 듣는다(Listening to Prozac)>의 지은이인 피터 D. 크레이머가 '질병'으로서의 우울증의 담론을 자세히 살핀다. 수잔 손택의 책 제목을 연상시키는 <우울증에 반대한다(Against Depression)>라는 제목에서 눈치챌 수 있듯이, 지은이가 반대하고 있는 대상은 우울증을 우리 몸의 질병으로만 보지 않는 세간의 인식, 더 나아가 '우울증을 낭만화하는 사회'이다.

Peter D. Kramer

-20여년전 항우울제인 '프로작'이 등장했을 때만 하더라도 "우울증이 과연 (약으로 치료해야 할) 질병인가?" 하는 논쟁이 들끓었다고 한다. 책은 지금에도 역시 우리 사회에는 우울증을 단순한 '마음의 감기' 정도로 치부하거나, 창조성과 감수성, 천재성의 원천인 것처럼 바라보는 시선이 만연해 있음을 지적한다. 지은이는 우울증이 심각한 생리학적 질병이라는 사실을 최신 뇌 연구 결과를 비롯한 의학/생물학적 근거와 여러 통계를 바탕으로 입증한다.

-또한 지은이 자신의 개인적인 진료 경험, 그리고 문학과 예술에서 끌어온 사례 제시로 우울증에 대한 왜곡된 시각이 실제 우울증 환자들을 더욱 고통받게 만들고 있으며, 더 나아가 우리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각을 왜곡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울증을 직시함으로써 자아와 예술, 사랑과 훌륭한 삶 등 인간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다고 말한다(*이러한 인간 이해에 있어서 '정신의학'과 '정신분석'은 적대적 동반자이다. 요즘의 심리철학과 인지과학이 그렇듯이).

이제 이어지는 건 '프로이트에게 듣는다'쯤 되겠다(다소간 '학술적'이므로 딱딱한 글에 경기를 일으키는 분들은 여기까지만 읽으시면 되겠다). 크레이머 교수라면 별로 달갑잖게 생각할 듯하지만, 프로이트 또한 "자아와 예술, 사랑과 파탄난 삶 등 인간에 대한 이해"를 높여준다고 나는 믿는다. 

 

 

 

 

예술에 대한 프로이트적 가정에 따르면, 예술창조의 전제조건은 삶의 파탄이다. 즉 뭔가 억울하게 당했다는 느낌 없이, 모든 것을 빼앗겼다는 감정 없이 예술을 창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술은 삶에서 잃어버린 시간과 행복에 대한 하나의 보상으로서 주어지며, 자신만의 상상의 세계에서 그러한 보상을 찾는 예술가는 현실과 화해하지 못하는 망상적 돈키호테이다. 그래서 예술사가인 하우저의 말을 빌자면, 모든 예술은 정확하게 말해서 일종의 ‘돈키호테주의’이다(아래 사진은 아르놀트 하우저).

 

그러한 돈키호테주의가 예술사에서 전면화 되는 것은 낭만주의 시대 이후이다. 프로이트가 진술한 의미에서 예술가의 개인적인 요구와 사회의 집단적인 요망 간의 불일치는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두드러지기 때문이며, 사실 만족의 대용물이나 보상/위안으로서의 예술 개념 따위는 모두 낭만주의 내지 후기 낭만주의 예술에 대한 경험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하우저, <예술사의 철학>) 요컨대 낭만주의 이후의 예술은 삶의 상실을 전제로 하며, 그것에 대한 대가로 지불된다.

 

 

 

 

 

 

 

 

 

상실에 대한 두 가지 반응 태도를 다룬 프로이트의 <애도와 우울증>(1917)은 이런 맥락에서 다시 읽을 수 있다. 애도와 우울증은 모두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자리에 들어선 어떤 추상적인 것, 즉 조국, 자유, 어떤 이상 등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중요한 차이점은 우울증의 경우에 자기 존중감, 즉 자기애가 급격하게 추락한다는 것이다.

 

애도의 경우에는 일단, 현실성 검사를 통해서 드러난 사실, 즉 사랑하는 대상이 이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대상에 부과되었던 모든 리비도를 철회시켜야 한다는 요구를 점차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상실의 충격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지만, 우울증은 상실한 대상과 자신을 무의식적/나르시시즘적으로 동일시함으로써 대상 상실이 자아 상실로 전환된다. 그리고 대상과 자아 사이의 갈등은 동일시에 의해 변형된 자아와 자아-이상으로서의 초자아 사이의 갈등으로 변모되고, 이것은 대상화된 자아에 대한 애증의 감정을 낳으면서 급격한 자기애의 상실, 곧 자기 비하로 이어진다.

 

이러한 애도와 우울증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을 세 가지로 정리하면, (ⅰ) 애도는 의식적인 대상과 관련되지만 우울증은 무의식적인 대상과 관련된다. (ⅱ) 애도는 대상과 관련되지만 우울증은 나르시시즘, 즉 자아 형성과 관련된다. (ⅲ) 애도와 달리 우울증에서는 애증의 양가감정이 자아 내부로 투사되면서 사랑의 대상을 자아로 바꾸고, 자신의 자아는 초자아의 역할을 하면서 사디즘을 발현시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두 반응 태도가 정념의 특정한 상태를 지시한다기보다는 일련의 과정을 가리킨다는 점이다.

 

 

 

 

 

 

 

 

 

프로이트는 이에 대한 생각을 더 진전시키지 않았지만, 정념의 진행과정으로서의 애도와 우울증은 분명 내러티브를 함축한다. 그레마스(A. J. Greimas)에 따르면, 일반적인 서사체(혹은 서술체)의 경우 서술 프로그램은, 가장 간단하게는, 이접(disjunction)과 연접(conjunction)의 서사로 표시될 수 있다. 이접의 서사는 주체(S)와 대상(O)이 분리되는 서사, 즉 주체가 대상을 상실하거나(상태) 박탈당하는(행위) 서사이고, 연접의 서사는 주체와 대상이 결합되는 서사, 즉 주체가 대상을 회복하거나(상태) 획득하는(행위) 서사이다. 이것을 함수(Function) 형식으로 표시하면,


F1(S)=(S∩O)→(S∪O): 상실/박탈

F2(S)=(S∪O)→(S∩O): 회복/획득


이 된다(∩와 ∪는 각각 연접과 이접을 표시한다). 프로프(V. Propp)와 그레마스의 서사학에서 주로 분석 대상이 되었던 모험 서사의 경우는 주체가 박탈된 대상을 다시 획득하는 일련의 과정이 기능단위들의 통사적 배치를 통해서 제시된다. 즉 그것의 일반적인 유형은 F1 F2가 결합된 형식을 취한다.


F(S)=(S∩O)→(S∪O)→(S∩O)


이러한 통사론적 배치의 모델과 유형에 대한 탐구는 주로 주체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기존의 서사학 혹은 서술기호학은 엄격히 말하면, 행동기호학 혹은 행위기호학이었다. 이 행동기호학에서의 주체는 행위의 한 기능으로서, 즉 행위자로서만 기술된다.

 

하지만, 낭만주의 이후의 서사에서 주체의 행위자로서의 역할은 모험서사에서의 그것만큼 중심적이지 않다. 낭만주의의 주체는 자아와 세계를 맞대응시킬 만큼 확장된 자아를 자신의 것으로 하고 있기에 오히려 중심적인 것은 이 주체의 주관적 정념이다. 따라서 대상의 상실에 대한 반응 역시 모험서사에서처럼 즉각적이거나 반사적이지 않으며, 복잡한 내면적 과정을 통해서 표출된다. 그러한 과정을 유형화한 것이 프로이트의 애도와 우울증이라면, 이 두 범주는 낭만적 서사를 기술하는 유력한 모델이 될 수 있다. 앞에서의 함수 형식을 응용해서, 애도와 우울증의 서사 모델을 제시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FT(S)=(S∩O1)→(S∪O1)→(S∩O2): 애도

FM(S)=(S∩O)→(S∪O)→(S↔$): 우울증


여기서 FT에서의 T는 Trauer(애도)의 이니셜이고, FM에서의 M은 Melancholia(우울증)의 이니셜이다. 애도의 함수에서 첫 번째 화살표가 지시하는 것은 ‘상실’이고, 두 번째 화살표가 지시하는 것은 대상리비도의 전이(O1에서 O2로)인데, 이 전이의 과정을 ‘애도’라고 부른다. 이때, 중요한 것은 O1≠O2이어야 한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O1이 O2에 의해서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O1>O2이기 때문에 그 대체는 완벽한 대체는 될 수 없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O1-O2의 차이가 애도의 크기와 정도를 결정한다.

 

우울증의 경우에는 조금 복잡한데, 먼저 첫 번째 화살표가 가리키는 것은 애도 함수에서와 마찬가지로 대상과의 이접, 즉 ‘상실’이다. 그리고 두 번째 화살표가 가리키는 것이 ‘우울증’이다. 이 우울증의 진행과정에서 주체는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대상화된 자아(S=O로서의 $)와 원래의 자아가 차지하던 자리에 들어선 자아-이상으로서의 초자아(Superego) 사이에 자아 분열이 이루어지며(여기서 주의할 것은 우울증 함수의 1, 2항과 3항에서의 동일한 기표 S는 ‘자아’의 자리만을 표시할 뿐이며, 실제적인 내용, 즉 기의는 다르다는 점이다. 1, 2항에서 S의 기의가 ‘자아’라면 3항에서는 ‘초자아’이다), 이 양자 간에는 애증관계, 대립관계가 형성된다. ↔가 표시하고자 하는 것이 그러한 애증/대립관계이다. 이렇듯 애도와 우울증은 그것이 함축하는 내러티브 진행과정에 있어서 차이를 보인다.

 

그렇다면, 그러한 애도와 우울증의 서사는 언제 처음 나타나는가? 그것은 애도와 우울증이 상실에 대한 반응태도라고 할 때, 인간에게서 최초의 근원적/원초적인 상실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인간에게서 애도와 우울증을 수반하는 근원적/원초적 상실은 오이디푸스 단계에서 엄마로부터의 분리이다(물론 분만 시 모체로부터의 분리를 가장 원초적인 분리체험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의식적인 분리과정이 아니라 생물학적 분리(과정)이며, 인간만의 고유한 체험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반면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비록 인간이 장기간의 의존기간을 거치면서 느리게 성숙해간다는 생물학적 사실의 결과이긴 하지만, 인간만의 고유한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프로이트에 따르면, 대략 만 세살 반에서 여섯 살까지의 아이가 자신과 다른 성을 지닌 부모와 신체적, 정서적, 지적으로 독점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지만, 자신과 동성인 부모가 가진 우선권을 인정하게 되면서 발생한다. 이때 아이는 자신보다 우월한 동성의 부모에게 보복을 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며 자신의 근친상간 욕구와 살인충동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유산이라고 묘사한 초자아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이 죄책감이다(물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프로이트의 이러한 설명에 모든 정신분석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정신분석학의 기본개념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이 개념에 대한 자신의 최종적인 생각을 공식화하지 않았다. 때문에 프로이트의 리비도론 대신에 대상관계론을 주장하는 멜라니 클라인은 프로이트와는 조금 다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오이디푸스 상황을 이론화하기도 한다).

 

이러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진행과정 또한 일련의 서사적 과정을 함축하며, 그것은 애도와 우울증의 서사로 표시될 수 있다. 이때 애도의 서사는 오이디푸스적 상황을 성공적으로 해소해 나가는 과정의 서사이며, 우울증의 서사는 그렇지 못한 과정의 서사이다. 즉 애도의 서사함수 FT(S)=(S∩O1)→(S∪O1)→(S∩O2)는 FT(자아)=(자아∩엄마)→(자아∪엄마)→(자아∩초자아)로 재기술 될 수 있고, 우울증의 서사함수 FM(S)=(S∩O)→(S∪O)→(S↔$)는 FM(자아)=(자아∩엄마)→(자아∪엄마)→(초자아↔자아)로 재기술 될 수 있다.

 

이러한 서사방식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보편적 방식이지만, 이미 지적한 바 있듯이, 애도의 서사와 우울증의 서사에 보다 잘 부합하는 것은 자아의 주관성이 극대화되고, 개인으로서의 자의식이 성장하게 되는 낭만주의 서사이다. 이때 낭만주의 서사라는 말은 이중적인데, 그것은 낭만적 주인공의 서사이면서 동시에 낭만주의 시인 자신의 전기적 서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낭만주의 시인에게 있어서 창작은 자신의 또 다른 전기, 혹은 진정한 ‘자서전’이다.

 

고전주의 시인의 과제가 선험적으로 주어진 문학적 관습과 규범을 얼마나 잘 준수하느냐에 놓여 있었다면, 낭만주의 시인의 과제는 자기 자신의 문학적 생애를 창작을 통해서 기술해 나가는 것이었다. 그의 삶은 창작에 바쳐진 질료이면서 동시에 그의 창작이 궁극적으로 그려내야 할 형상이기도 하다. 이때 그가 지향하는 삶은 물론 더 이상 모방적인 삶이 아니라 자기만의 삶, 창조적인 삶이다. 그리고 시인 자신이 그러한 삶의 주체로서 새롭게 규정된다. 만약에 그러한 주체가 없다면, 새로운 삶, 새로운 사회적 관계, 새로운 세계에 대한 창조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새로운 자기창조, 혹은 자기 정립을 통해서 세계창조의 입법권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낭만주의는 혁명적이다. 물론 이 혁명은 정치적 혁명이 아니라, 아니 정치적 혁명 이전에, 혁명적인 텍스트로서의 낭만주의 텍스트의 현상성이 낳는 혁명이다(K. H. 보러에 의하면, 그와 같은 현상성에 대한 의미론적 표현형식이 내용을 갖게 되는 시기는 1820년대이며, 대표적인 예가 하이네와 들라크루아의 작품이다). 즉 낭만주의 시인은 그의 텍스트적 자아와 분리되지 않는다.

 

이 혁명적인 텍스트 혹은 텍스트적 혁명의 주체로서의 낭만주의 시인은 흔히 ‘낭만적 천재’라고 불리는바, 낭만주의 시인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러한 천재로서의, 창조의 주체로서의 자기규정, 곧 자기선언이다. 낭만주의 시인에게서 유독 ‘시인’이란 자기 정체성이 자주 주제화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그러한 관심이 어떤 분리와 상실의 체험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낭만주의 문학은 주관적 자아의 절대성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자아를 한정하는 주변의 모든 사회적 관습과 규범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한 의문제기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주관적 자아와 객관적 세계 간의 분리가 당연히 선행되어야 한다. 그 분리는 낭만적 시인의 자기정립을 위해선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지만, 한편으론 자기정립에의 무한책임을 떠안도록 내맡겨지는 소외의 체험이기도 하다. 상실은 그것의 다른 이름이다(아래는 뒤러의 판화 '멜랑콜리아'[1514]).

 

 

시인은 바로 그러한 상실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아이면서, 그것을 창작을 통해서 보상받고자 하는 자아, 승화시키고자 하는 자아이다. 거꾸로 말하면, 상실의 체험은 시인의 일상적 자아에 균열을 일으키면서 시인으로서의 자기정립에 대한 결단을 촉구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한 자기결단을 통해서, 주관적 의식의 과잉으로 말미암아 자기 존재의 거처/장소를 찾아서 배회하는/표류하는 낭만주의 시인은 자기정립에의 여정의 이정표들을 세우게 된다. 그 이정표들은 시인의 앓고 있는 상실의 징후이면서 동시에 그가 그 상실을 치유하는 방식이고 그 흔적이다. 시인이 시인으로서 자신을 정립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상실의 반복적인 치유과정을 통해서이다.

 

때문에 역설적으로, 상실의 체험은 시인으로서의 자기정립에 있어서 근원적인 조건이며, 시인의 자기창조에 있어서의 가능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상실이 시인으로서의 자기정립 조건이라고 해서, 그 자기정립의 방식이 일률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시인의 개성과 그가 처한 조건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마치 상실에 대한 각기 다른 반응 태도로서 애도와 우울증이 나타나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상실에 대응하는 시인의 자기정립의 두 유형을 ‘애도적 유형’과 ‘우울증적 유형’으로 이름붙일 수 있을 것이다(이러한 유형화는 사실 생소한 것은 아니다. 이미 F. 쉴러는 <소박문학과 감상문학>(1795)이라는 고전적인 논문에서 모든 시인을 소박시인과 감상시인으로 대별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소박시인은 자연스럽고 소박하며 자기 분열과 자기비판을 필요로 하지 않고, 소박한 감성에 따라 현실에 모방에만 자신을 국한하는 시인이다. 반면에, 감상시인은 회의적이고 자기 분열적이며, 정신과 감정의 갈등에 고민하는 시인이다. 전자는 자연 자체이며, 후자는 자연을 찾는 자이다)...

 

06. 07.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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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별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법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3-21 23:50 
    고교 독서평설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이별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법'은 부제이고, 제목은 '푸시킨 VS. 레르몬토프'이다. 러시아 두 낭만주의 시인의 사랑시(실연시)를 애도적 유형과 우울증적 유형으로 비교한 글이다. 개인적으론 '푸슈킨'이란 표기를 선호하지만 지면에는 외국어 표기안에 따라 '푸시킨'으로 표기됐다.     고교 독서평설(09년 3월호) 푸시킨 VS.
 
 
pax 2006-09-12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사실 저도 우울증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는데(저 자신이 우울한 인간이기도 하고 그래서), 뭔가 우울증에 대한 필이 딱 꽂히는 기분이군요~ 그렇지만 역시 우울한게 사라지지는 않습니다.ㅠㅠ

로쟈 2006-09-12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아니라 프로작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네요...
 

지난달에 작고한 극작가 차범석(1924-2006) 선생의 이름이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는데, 나름대로 사연이 있다. 남미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이 대표작 <산불>을 뮤지컬 버전으로 만들어서 무대에 올리게 됐다는 것. 뮤지컬 버전 <댄싱 섀도우>는 물론 배경이나 분위기가 많이 다르지만, 원작자 '차범석'의 이름을 언제나 그림자처럼 달고 다니게 될 것이니 사후의 불멸 또한 여러 가지 버전이 있다는 걸 입증해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이번에 내한한(그는 자주 오는 듯하다) 도르프만의 인터뷰 기사와 <댄싱 섀도우>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교과서에 일부 실렸던 <산불> 외에는 별로 읽은 작품이 없지만, 이 참에 자신에게 '깐깐했던' 한 원로 극작가의 명복을 빈다.

한국일보(06. 07. 05) 세계적 극작가 도르프만, 차범석 작품 뮤지컬로

-“한국전쟁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지만 세계 어디서나 많은 공감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합니다. 뉴욕 브로드웨이나 런던 웨스트엔드에서도 큰 성공을 거뒀으면 좋겠어요.”

-지난달 타계한 극작가 차범석 선생의 <산불>을 뮤지컬로 각색한 세계적인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64)이 한국을 방문했다. 내년 7월 무대에 오르는 창작 뮤지컬 ‘댄싱 섀도우’제작발표회에 참석하기 위해 10년 만에 방한한 그는 “한국은 라틴 아메리카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민주화 과정을 겪어 언제나 깊은 형제애를 느낀다”며 “‘미스터 차’가 없는 것만 빼면 모든 것이 훌륭하고 감동적”이라고 방한 소감을 밝혔다.

 

 



 

-카를로 푸엔테스, 이사벨 아옌데 등과 함께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세계 문학의 중심부에 정립시킨 그는 1942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두 살 때 미국 뉴욕으로 이주했다. 10년 후 가족과 함께 칠레로 돌아갔지만 아옌데의 민주혁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피노체트 군부 독재정권의 탄압을 받았고, 10년 넘는 망명생활 끝에 1985년 미국 듀크대 교수로 자리를 잡았다.

-소설 <산티아고에서의 마지막 왈츠>와 <죽음과 소녀> 등의 희곡으로 이미 현대문학사에 깊은 날인을 새긴 그이지만(*<죽음과 소녀>는 국내에서도 공연된 것으로 안다), 뮤지컬 각본을 쓰는 건 이번이 처음. “한 번도 안 해본 일이라 큰 도전이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흥미로웠습니다. 저는 집에서 어딜 나갈 때도 늘 다른 길로만 다니거든요.” 뉴욕에서 자란 꼬마시절부터 <마이 페어 레이디> 같은 뮤지컬을 보며 자랐고, 항상 뮤지컬을 사랑했다는 그는 “뮤지컬은 음악과 가사, 춤, 배우들이 다 같이 어우러져야 하기 때문에 나 혼자 잘한다고 해서 성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희곡이 두 시간짜리 대화라면 뮤지컬은 1시간 40분간 노래하고 춤추고, 나머지 20분이라는 제한된 시간동안 짧은 대사 안에 모든 걸 표현해야 합니다. 나는 원래 에둘러 말하는 화법의 소유자지만, 이젠 뮤지컬 스타일에 맞춰 직설적으로 말하는 버릇을 들여야 해요. 그 점이 가장 어렵고,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뮤지컬이 좋습니다.”

 

 

 

 

-도르프만과 <산불>의 만남은 그가 아르헨티나에 머물던 2003년에 이뤄졌다. “한국에서 보내온 ‘산불’의 희곡을 읽었는데 너무 좋았어요. 더구나 한국 작품이라니…, 꼭 해보고 싶었죠. ‘몇 가지만 바꾸면 딱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원작자가 마음에 걸렸어요. 그런데 뜻밖에도 차 선생님이 ‘노 프로블럼’(No Problem)이라며 흔쾌히 승낙해줬어요. <산불>이 뮤지컬로 만들어지는 걸 보는 게 그분 소원이었는데, 여기 안 계셔서 너무 안타깝습니다.”(*아래 사진은 공연 워크샵에 함께 한 차범석, 도르프만, 그리고 울프슨.)



-그렇게 해서 차범석의 <산불>은 마술적 요소가 강한 러브스토리 <댄싱 섀도우>로 재탄생하게 됐다. 음악을 맡은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의 에릭 울프슨과도 두 시간 만에 작품 이야기를 마칠 정도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도르프만은 소백산맥의 과부촌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삼각 사랑과 이념 대립을 동화(fairy tale) 스타일로 바꾸기 위해 중세 아랍과 발칸 반도에서 지명과 인명 등을 차용했다.

-“원작은 철저한 리얼리즘에 입각해 있는 작품이죠. 하지만 리얼리즘 뮤지컬이란 건 없어요. 뮤지컬의 특성상 리얼리즘을 탈색시킬 필요가 있었죠. 동화로 바꾼 건 세계 시장에 내놓았을 때 전세계 어디서나 공감을 얻기 위해서예요. 그런 점에서 <댄싱 섀도우>는 한국적인 작품일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사실 <댄싱 섀도우>를 원작과 똑같이 만들려고 하면 내가 왜 필요하겠습니까.”(웃음)

한겨레(06. 07. 05) ‘한국산 다국적표 창작뮤지컬’ 나온다: ‘댄싱 새도우’ 제작 발표

-“칠레에서 태어나 아르헨티나 국적을 갖고 미국에서 살고 있는 제가 각색을 하고, 스코틀랜드의 작곡가와 영국의 연출가가 한국의 원작으로 공연을 만드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입니다.”

-3일 오후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열린, 신시뮤지컬컴퍼니와 예술의전당 공동제작 대형 창작뮤지컬 <댄싱 섀도우>의 제작 발표회에서 세계적인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64)은 이 작품 탄생 과정 자체가 ‘글로벌’하다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보면 고국 아르헨티나의 상황이 거울처럼 비쳐진다”며 “전쟁과 독재의 압박을 겪은 한국에서 전쟁의 아픔과 상처를 주제로 한 작품을 만들어 전 세계에 전달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예술이 존재하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앨런 파슨스 프로젝트 출신으로 뮤지컬 <갬블러>를 작곡한 에릭 울프슨(61)과 박명성(43) 신시뮤지컬컴퍼니 사장이 만난 것은 지난 1999년 5월. 세계 일류 스태프를 동원해 세계 시장을 공략하겠다는 신시의 장기 계획이 시작된 것이다. 이어 아리엘 도르프만이 차범석의 희곡 <산불>을 대본으로 만드는 작업에 참여했고, 뮤지컬 <맘마미아!>의 연출가 폴 게링턴(37)과 안무가 니콜라 트리헨느(50) 등이 합류했다. 주요 스태프들 모두 영국 웨스트엔드와 미국 브로드웨이 전문가들로 구성된 다국적군이다. ‘뮤지컬 본고장의 인력을 고용해 뮤지컬 본고장에 진출하겠다’는 역발상의 산물이었다.

-현재 우리나라 뮤지컬 시장의 매출액은 한해 1000억원을 웃돈다.(인터파크, 티켓링크 2005년 집계). 외국에 로열티를 지급하고 의상부터 무대세트까지 고스란히 수입하는 ‘라이선스 공연’이 그 중 90%를 차지한다. 신시는 바로 이 수입공연으로 한국 뮤지컬 시장을 키워온 장본인이다. 국내 최장기 공연이었던 <아이다>, 40~50대를 극장으로 불러들이는 데 성공한 <맘마미아> 등이 모두 라이선스 공연이다.

-시장을 개척한 공은 인정받았지만 ‘뮤지컬 오퍼상’이라는 비난에 시달렸다. 48억원에 이르는 거액을 투자해 세계 4대 뮤지컬 수준의 명품을 만들어보이겠다는 오기가 발동한 박명성 대표. 그는 “그동안 비싼 수업료를 내고 선진 뮤지컬의 노하우를 배웠다”며 “이번 공연을 통해 우리 스태프들의 수준도 세계적 수준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댄싱 섀도우>는 내년 7월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두달 동안 무대에 오른다. 현재 대본과 작곡은 거의 끝났으며, 세부 수정 작업만 남아있다. ‘번개 공연’이 범람하는 우리 공연계에서, 공연 1년 전에 출연진을 확정하고 제작발표 및 시연회를 하는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

-“급하게 마음먹었으면 올해라도 당장 공연을 시작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제작 관행도 선진적으로 바꾸고 싶었습니다. 극장을 대관하고, 그 날짜에 맞춰 허겁지겁 준비하느라 프리뷰만도 못한 수준의 공연을 돈 받고 팔고 있는 게 우리 현실 아닙니까?”(박명성)

06. 07.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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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 언론에 소개되었던 책 하나는 재미 사회학자 신기욱 교수의 <한국의 혈통 민족주의(Ethnic Nationalism in Korea)>이다(같은 제목이 '한국의 종족적 민족주의'로도 번역되었다). 문화일보의 인터뷰 기사와 동아일보의 소개 기사를 옮겨놓는다. 번역본이 출간될 수도 있겠다 싶어서 '프리뷰'에 집어넣는다.

cover for Ethnic Nationalism in Korea

문화일보(06. 06. 27)  ‘혈통 민족’ 강조가 사상 빈곤 불렀다

-“지난 100년 동안 한국사회를 강하게 움직인 사회구성원리는 가족주의나 유교보다는 단일민족의식, 즉 혈 통에 기반한 민족주의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한국을 비롯한, 동북아시아 3국 모두 다른 지역에 비해 민족주의가 매우 강한 게 특징이지요. 최근의 한·일, 한·중, 중·일 관계의 긴장은 뿌리가 모두 민족주의에 기반하고 있으며 각국의 정치권에서 이를 이용해온 측면 이 큽니다.”

-최근 미국 스탠퍼드대 출판부에서 <한국의 혈통 민족주의(Ethnic Nationalism in Korea·사진)>란 영문저서를 출간한 신기욱(46)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APARC) 소장 겸 사회학과 교수는 “우리 역사에서 근대에 들어와 도입된 과도한 민족주의가 오늘날 한국사회의 사상적 빈곤을 초래했다”고 비 판했다. 스탠퍼드대 APARC의 아시아지부(일본) 개설 협의와 다음달(*이달) 6~7일 고려대 국제한국학센터(소장 이종화 교수)가 개최하는 제2차 국제한국학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중인 신 교수는 지난 23일 문화일보 회의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최근의 뉴라이트와 뉴레프트를 포함한 한국의 보수와 진보는 이념적·철학적 기반이 약하다”며 이 같이 밝혔다.

-“프랑스와 영국은 자유주의를 기반으로 민족주의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파시즘으로 가지 않고 민주주의를 유지했던 반면, 자유주의 기반이 약했던 독일과 일본은 파시즘과 군국주의로 치달았습 니다. 우리도 19세기 말~20세기 초 자유주의 사상이 들어와 논의가 활발했지만, 일제의 침략을 받으면서 외부와 싸우기 위해 내 부단결을 강조하다 보니까 인권 등 자유주의가 뿌리를 내리지 못 했어요.”

-3부 13개 장으로 구성된 신 교수의 책은 단일민족의식에 기초한 한국 민족주의의 역사적 기원과 민족주의의 정치, 세계화와 통일 등 현재의 이슈까지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1945년 이후 민족주의가 이승만, 김일성, 박정희 등 남북한 정권에 의해 권력유지를 위해 활용되면서 강화된 것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시각에서 접근했다.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나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시대론 모두 그 핵심은 세계질서를 민족국가간 의 치열한 경쟁으로 보는 사회진화론적 시각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족주의가 약화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됐다고 볼 수 있지요.”

-신 교수는 21세기에도 상당기간 한국사회에서 민족주의가 강세를 발휘할 것으로 내다봤다. 분단된 현실에서 통일의 당위성을 부 여하는 게 민족주의이고 중·일간 헤게모니 다툼이 시작된 동북 아시아 정세에서 우리의 생존을 위해 내부단결을 강조하다보면 세계화·지역화라는 추세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가 강조될 수밖 에없다는 것이다.

 

 

 



-“앞으로 10~20년 사이 영향력이 줄어들 것 같지 않은 민족주의 의 부정적 측면을 최소화하기 위해 제도화가 중요한 과제입니다. 외국인노동자와 같은 민족이지만 현실세계에서 2류 시민으로 전락한 조선족, 앞으로 남한 주도로 통일될 경우 한국에서 북한주 민의 위치 등을 생각할 때, 문화적 다양성을 수용하고 이들의 인권을 보호해 줄 수 있는 법적 장치 마련이 필요해요.”

-스탠퍼드대 APARC 내 한국학 프로그램 책임자이기도 한 신 교수 는 민족주의 외에도 식민지 근대성이나 한·미관계, 과거사 문제 등 최근 국내 학계에서 첨예한 이슈가 되고 있는 사안들에 대해, 외국에서 한국을 바라보는 연구자의 시각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왔다.

 

 

 



-“근대성을 가치 개념으로 보고 ‘일제가 한국을 수탈했느냐, 아니면 근대화시켰느냐’는 이분법적인 질문이 잘못됐다”고 강조 한 신 교수는 식민지 시기 한국인들이 어떻게 근대의 모습을 만들어갔는지를 밝히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식민지 근대의 인정과 관계없이 이광수는 한국 근대문학의 효시이기 때문이다.

-현재 신 교수는 두 권의 책을 준비 중이다. 1992년부터 2004년까지 한·미 양국의 신문에 실린 언론기사를 계량적으로 분석해 최근 한·미관계 변화상을 살펴보는 연구서와 오는 10월 출간예정 인 과거사와 화해문제를 다룬 편저서다. “언론 분석 결과, 한·미관계의 터닝포인트는 김대중 정부 때입니다. 당시 북한문제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면서 한·미관계가 벌어지기 시작했어요. 최근 북한 미사일도 한국쪽에서 자꾸 다른 견해를 나타내지 않습니까. 한국에선 북한이 무슨 위협이 되느냐 하지만, 미국에선 핵물질 등이 글로벌 테러리스트에게 넘어갈 가능성 등 실질적인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또 과거사를 한국전쟁과 광주항쟁 등 내부적인 문제와 일본과의 외부적인 문제로 나눠 본 신 교수는 “한국은 남미 독재정권이나 독일·폴란드의 경우와는 달리 내·외부적인 과거사 문제가 모두 겹치는 특수한 사례”라며 “한·중·일 모두 동아시아의 화 해와 평화를 위한 비전있는 리더가 없는 탓에 내부적인 문제에 비해, 외부적인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있다”고 진단했다. 신 교수는 “주로 인문학 중심인 미국 대학의 한국학연구소와 정책 중심인 동부의 싱크탱크와 달리 사회과학 중심으로 현대문제 와 정책적 함의가 큰 문제들에 초점을 맞춰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스탠퍼드대 APARC와 한국학 프로그램의 운영방침을 밝혔다.(최영창 기자)

동아일보(06. 06. 13) "美스텐퍼드대 신기욱 교수 ‘한국의 종족적 민족주의’ 발간"

-“과도한 민족주의가 한국사회의 사상적 빈곤을 낳았다.” 한국사회의 반지성적 풍토를 민족주의의 팽창과 결부해서 분석한 책이 미국 스탠퍼드대 출판사에서 출간됐다.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APARC) 소장으로 있는 신기욱(사회학) 교수가 쓴 <한국의 종족적 민족주의>(Ethnic Nationalism in Korea)이다.

-신 교수는 영문으로 발간된 이 책에서 현재 한국 반미주의의 뿌리로서 한국 민족주의가 19세기 후반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형성, 변형, 성장해 왔는지를 △역사적 기원 △민족주의의 정치 △현재의 이슈로 나눠서 심층 분석했다.

-신 교수는 한국의 민족주의가 일제의 침략에 대항담론으로 형성되는 과정에서 혈연과 단일민족의식이 강조되면서 그 기원부터 종족적 민족주의의 성격을 지니게 됐다고 지적했다. 이런 한국민족주의는 1920년대 이후 사회주의와 경쟁을 하면서 민족이 계급을 대신할 개념으로 최우선시됐고 그 과정에서 민족지상주의로 변질됐다는 것.

-신 교수는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혈연적 종족적 민족주의는 유럽과 일본에서 유행하던 파시즘의 영향을 받았으며 사회주의를 배격한다는 점에서도 양자의 친근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최남선, 이광수 등 식민지 시대 민족주의자들이 친일노선을 걷게 된 것도 일제 군국주의와 이런 속성을 공유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신 교수는 이런 혈연적 종족적 민족주의의 전통은 광복 이후 권위주의 및 공산주의와 결합하며 남북 독재정권의 중요한 이념적 기반으로 계승됐다고 주장했다. 이승만, 박정희 정권이 일본의 군국주의 체제와 유사한 면모를 보이고, 북한이 사회주의의 외피 아래 유례를 찾기 힘든 민족주의로 빠진 것은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

 

 

 



-한국의 근대화는 자유주의에 기반해 민족국가를 성립하며 민주화를 이루어 갔던 영국 프랑스 등과 달리 자유주의가 결핍된 채 집단적 혈연적 민족주의의 발전이 이뤄져 결국 나치즘과 군국주의로 귀결됐던 독일이나 일본의 모델을 닮았다는 분석이다. 이러한 자유주의의 결핍과 과도한 민족주의의 발전으로 한국 좌우 진영 모두가 독자적인 이론과 철학적 기반을 개발하는 방향으로 나가지 못하고 민족주의에 기생한 수구주의와 독재주의를 낳았다는 분석이다.

-신 교수는 특히 박정희의 조국 근대화는 물론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또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시대론 등 시대별 핵심 담론에 세계질서를 민족국가 간의 치열한 경쟁으로 보는 사회진화론적 시각에 기초한 민족주의적 사고가 뚜렷하다며 그 극복을 강조했다.

-남북통일이 이뤄질 때까지는 민족주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해 신 교수는 혈연적 민족주의가 통일의 당위성을 부여하고 남북한 주민 간의 공유의식을 제공한다는 점에선 유용할지 몰라도, 더욱 민주적이고 시민적인 민족의 정체성을 만들지 못하는 한 독일 통일보다 더 힘겨운 과정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신 교수는 “한국사회가 글로벌화돼 타민족의 수가 늘고 문화적 다양성이 절실해짐에 따라, 그리고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통일 준비를 위해서도 새로운 민족 정체성의 정립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권재현 기자)

06. 07.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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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07-06 10:15   좋아요 0 | URL
이 책 구하려고 했는데, 교보문고 광화점에 하드커버 7만원 짜리 -_-; 밖에 없어서 할 수 없이 페이퍼백 주문했습니다. 그래도 이런 책은 빨리 한국에 비치 해 놓아야 하는 건데... 주문하니 1달은 걸린다는 데요? ㅡ.ㅡ;

로쟈 2006-07-06 11:34   좋아요 0 | URL
아마존이 간혹 더 빠를 수도 있습니다.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2주도 안돼 온 걸 보면(물론 어떤 걸 몇 달이 걸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인문학은 돈 좀 드는 학문이죠...
 

신흥 경제대국 BRICs에서 꼬리에 매달려 있지만, 21세기 중반에는 세계최대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할 거라고 점쳐지기도 하는 나라가 이웃 중국이다. '눈부신' 압축 경제성장으로 국내외적으로 '중국 바람'을 일으킨 지 벌써 오래다(대학가의 경우는 전공 지원률이 이를 말해준다). "떼놈들이 오고 있다!.."

 

 

 

 

하지만, 중국에 대한 개인적 관심은 그런 경제력과는 다소 무관하게 최근 중국에서 불고 있다는 '공자 열풍'에 힘입고 있다. 공자와 모택동의 나라, 그게 나의 상식을 구성하는 중국이다. 최근 이 '중국의 힘'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폄하하는 책 <중국이라는 거짓말>(문학세계사, 2006)이 출간되었는데, 저는 프랑스의 보수주의 지식인 기 소르망이다(내가 오래전에 읽었던 책은 <20세기를 움직인 사상가들>이다). 번역본의 출간에 맞춰 내한한 모양인데, 그의 인터뷰를 옮겨온다.   

경향신문(06. 07. 04) 기 소르망 “中, 공산당 있는 한 진보·변화 없어”

-“마오쩌둥 시대에 중국 공산당은 아기를 삶아 비료로 썼다.” 지난 4월 총선에서 실각한 이탈리아의 우파 성향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중국과의 관계악화를 무릅쓰면서 새삼스레 중국의 과거사를 들춰낸 것은 자국 내 총선에서 좌파를 견제하려다 뱉은 외교적 ‘실언’이다.

 

 

 



-프랑스의 자유주의 또는 신보수주의 성향 문화평론가 기 소르망(62)은 현재의 중국 공산당에 대해 확신을 갖고 비판하는 사람이다. 그는 4일 자신이 쓴 <중국이라는 거짓말>(문학세계사) 홍보차 방한한 자리에서 기자들과 만나 “서구가 가진 중국에 대한 이상한 ‘신비화’를 교정해주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말했다(*이러한 교정의 대상이 어찌 중국뿐이랴! '미국이라는 거짓말' '일본이라는 거짓말', 그리고 '한국이라는 거짓말'...).

-서구에 비친 중국은 환상‘반만년 역사에 빛나는 문화대국’ ‘왕조국가의 전통을 이어받은 권위주의 정부’ 등 서구에 비친 중국의 모습이 잘못된 신비화라고 굳게 믿는 그는 지난해 초 작심하고 중국의 한 농촌마을에 들어가 꼬박 1년을 보냈다(*책상머리에서 잔머리 굴리는 지식인은 아닌 것이다). 반체제 성향 중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농촌 사람들과 톈안먼 사태 희생자 유족 등의 애환을 들었다. 그리고는 ‘닭의 해:중국인들과 폭동’이라는 프랑스어판 원제목을 가진 책을 내놨다. 그 책이 프랑스에서 히트를 친 지 5개월도 안 돼 한국어판이 나온 것은 유독 한국에서 그가 ‘유럽의 지성’ ‘세계적 석학’으로 알려져 있는 풍토와 무관치 않다(*작가 베르베르처럼 소르망도 한국에서 '통하는' 지식인인 듯. 한국통?).

-“우리가 아는 중국은 공산당의 프로파간다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소르망이 기자회견 내내 강조한 말이다. 그는 현재 중국 내 인권상황이 ‘아기를 삶아 비료로 쓰는’ 마오쩌둥 시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여전히 매우 비관적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중국 공산당의 권위주의 통치 때문이다. 그는 “중국 공산당은 어떤 변화나 개혁에도 반대한다”고 말했다. “기자와 종교인, 지식인들을 광범위하게 탄압하는 중국 공산당 체제 하에서 어떠한 진보와 변화도 있을 수 없다”고도 말했다.

-그는 중국의 경제성장에 대해서도 “놀라울 것이 없다”고 평가했다. “중국의 성장은 기적도 아니고, 창의성도 없다”는 것이다. 중국 경제성장의 토대가 저가 노동력을 이용한 저가 수출품에 기반한 것일 뿐 어떤 새로운 모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중국 경제성장이 ‘열매가 비교적 고루 나눠진’ 한국 모델과도 대조적이라고 했다. 아울러 중국 경제의 미래에 대해서도 “부가가치성 산업으로 나아갈 어떠한 조짐도 안 보인다는 점에서 비관적”이라고 말했다.(*아래 사진은 상하이시 전경.)



-소르망은 중국 농촌의 빈곤문제 해결에 대해서도 비관적이다. 후진타오 주석이 농촌 발전에 힘쓰겠다고 한 최근 발표도 ‘구두선’이라고 일축했다. 그는 “사실 농민 출신이 거의 없고 도시에서 자란 기술관료가 대부분인 공산당은 농촌 발전으로 득볼 게 전혀 없다”면서 “게다가 농촌에 투자하게 되면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둔화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공산당 입장에선 농촌 발전보다 농촌의 저가 노동력을 활용하는 데에만 주력할 것”이라고 말했다(*사실 중국이란 나라가 놀라운 것은 일부 지역의 비약적인 경제성장이 아니라 13억이 넘는 인구가 그냥 먹고산다는 거 아닌가? 식량난에 허덕이는 북한과 비교해 보더라도 이건 그 자체로 그냥 놀라운 일이다).

-그는 “이 모든 절망보다 더한 것은 자신의 책이 중국어로 출간됐지만 그 책을 공산당 간부들만 볼 뿐 일반 독자들은 전혀 접할 기회가 없다는 데 있다”고 했다. 미래 경제성장도 비관적그는 이번에 한국에 오기 전에 중국에 들렀을 정도로 중국 출입에 제약을 받고 있지 않다. 그는 “아마도 베이징 당국은 서구 지성인들이 2012년 베이징 올림픽 보이콧 운동을 벌이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느라 우리의 활동은 제약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소르망은 민주국가들이 중국 내 반체제 인사들을 지원해줘야 할지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 내에 만연한 민족주의 성향 때문이다. 그는 “중국인들은 심지어 반체제 인사들도 외국 정부가 이래라 저래라 얘기하면 ‘내정간섭’으로 받아들인다”면서 “만약 베이징 올림픽 보이콧 운동을 벌이면 반체제 인사들도 공산당을 중심으로 더욱 단결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지난 5월 중국을 방문해 ‘민주주의’에 대해 강연한 것과 같이 미국 정부도, 한국 정부도 중국 공산당에 압력을 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한국 정부도?! 소르망이 한국에 대해서는 별로 공부하지 않은 모양이다).

-한국인들에겐 그리 새롭게 다가오지 않는 이 책이 미국 국무부가 매년 발표하는 ‘중국인권보고서’와 차이점이 있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그는 “미 인권보고서는 피상적이고 개별 사례에만 주목했지만 나는 인권을 탄압하는 것은 결국 시스템의 문제라고 봤다”고 대답했다. 미 정부가 중국 공산당을 대놓고 비판하지 못하지만 자신은 공산당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는 점을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 북한 인권에 대해 물었다. “북한에 몇번 가보고 느낀 점은 중국의 식민지 같았어요. 북한의 인권상황은 중국의 60년대 인권상황과 흡사해 보여요.” 그의 다음 책 제목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06. 07. 05.

 

 

 

 

P.S. 현재의 중국과 그 장래에 대해서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는 책들도 드물진 않다. <중국은 가짜다>나 <중국의 몰락> 같은 책들이 그런 종류이다(기억에 중국인 자신들의 비판서들도 출간된 적이 있다). 보다 균형잡힌 시각을 얻기 위해서는 조너선 스펜스의 <현대 중국을 찾아서1.2>(이산, 1998) 정도는 교양으로 읽어둬야겠다. 한비야의 <중국견문록>(푸른숲, 2001)나 정운영의 <중국경제산책>(생각의나무, 2001)은 가장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한국인의 시각으로 읽은 중국이다. 5년쯤 전이니 지금의 중국은 또 달라졌을지 모를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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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94 2006-07-05 15:29   좋아요 0 | URL
오타요~ 조너선 스펜스의 <현대 국을 찾아서1.2>(이산, 1998) 정도는

로쟈 2006-07-05 16:06   좋아요 0 | URL
띄어쓰기하다가 삭제됐군요.^^

2006-07-05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7-05 23:52   좋아요 0 | URL
**님/ 직접 읽어본 바는 없지만 가장 '대중적인' 책이어서 집어넣었습니다. 사실 소르망이 중국에 체류했던 기간도 1년이니까 기간이 절대적인 변수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어디서 누굴 만나고 어떻게 살아봤느냐가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 같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