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매거진 <텍스트>에 기고한 글을 옮겨놓는다. 늑장을 부린 탓에 급조한 것이지만 몇 가지 추억거리를 담고 있어서 버리기엔 아깝다. 창고에 넣어둔다.

르네 지라르(1923- )의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문학과지성사, 2004)에 대해서 몇 자 적어내는 것이 내게 떨어진 몫이었다(이하에서는 <사탄이 번개처럼>으로 줄임). 하지만 일은 콩구워 먹듯이 되진 않았고, 이래저래 미뤄지는 사이에 아마도 가장 요긴한 지라르 입문서가 될 <문화의 기원>(기파랑, 2006)이 장마가 시작될 무렵에 ‘번개처럼’ 출간됐다(한국어판은 전세계에서 네 번째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재작년에 불어본이 나온 이 대담집은 문학과 종교학, 문화인류학 등을 거침없이 넘나드는 이 예외적인 사상가의 ‘지적 자서전’으로 적어도 당분간은 모자람이 없는 책인데, 나는 반가운 마음에 얼른 사들면서도 부담감을 다 떨쳐낼 수 없었다. ‘이거, 생각보다 견적이 너무 나오는 거 아니야?’라고 속으로 툴툴댔던 것이다.


사실 지라르에 대해서 말한다는 건 아주 단순하면서도 단순하지 않다. <문화의 기원>의 서문에서 대담자들은 “여우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단 하나의 대단한 것을 알고 있다”는 이사야 벌린의 인용구를 재인용하면서(벌린은 자신의 에세이에서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각각 이 ‘여우’와 ‘고슴도치’에 비유했다) 이 고슴도치-지라르의 그 대단한 것이 ‘모방적 욕망’과 ‘희생양’이라는 걸 미리 일러주고 있다. “이 두 가지 가설에서 출발한 지라르는 40년 이상을, 찰스 다윈의 말대로 ‘하나의 주제에 대한 기나긴 논증’을 해오고 있다.”(10쪽)


지라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단순한 것은 그 두 가지 가설만을 따라가면 되기 때문이고, 동시에 단순하지 않은 것은 그 ‘기나긴 논증’에 대해서 되짚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지적대로 단순성과 명료성은 지라르의 특장이면서 비판의 빌미이다. 나는 이 익숙한 양면성에 대해서 몇 자 거들기보다는 지라르에 대한 사적인 기억 몇 가지를 나열함으로써 내게 떨어진 발등의 불을 끄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지라르 자신보다 지라르에 대해서 더 잘 말할 자신이 없는 나로선 ‘지라르와 나’ 정도가 감당할 수 있는 주제이긴 하다.

 


 

 

 

 

 

 

 

 

지라르의 출세작은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1961)이다. 파리 고문서학교 출신인 그가 미국의 대학에서 소설을 강의하기 시작한 건 그 자신에 따르면 ‘첫 지적 모험’이었는데, 30대 중반에 스탕달과 플로베르의 소설들을 읽어나가면서 그는 대단한 걸 발견한다: “그 무렵 저는 <적과 흑> <마담 보바리>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를 연달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영원한 남편>을 읽던 때가 정말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35쪽)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세르반테스와 완전히 동일한 것을 발견하며 이로써 ‘모방의 리얼리스트’로의 길로 접어든다.

 

지라르의 이 출세작은 비교적 일찍 우리말로 번역됐는데, 전체 12장 중에서 8장이 문학평론가 김윤식에 의해 영역본에서 중역돼 나온 <소설의 이론>(삼영사, 1977)이 그것이다(<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의 완역본이 나온 것은 2001년의 일이다). ‘소설의 이론’이란 표제는 막바로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을 떠올리게 하는데(물론 역자의 의도였을 것이다), 역자는 소설이론가 루시앵 골드만이 이 저작들을 ‘소설의 이론’이라 할 만한 단 두 권의 책으로 꼽고 있음을 소개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맞은 첫 여름방학에 내가 이 두 권의 책을 손에 든 것은 지극한 당연한 일. 루카치의 책은 난해했지만 지라르의 책은 읽을 만했고 특히 도스토예프스키론은 흥미로웠다(<영원한 남편>에 대한 그의 분석은 소설보다도 재미있었다!).  

 

 

 

 

 

 

 

 


다행히도 지라르와의 인연은 계속 이어질 수가 있었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문학평론가 김현의 노고 덕분이었다. 지라르 이론의 전모를 다루고 있는 최초이자 유일한 연구서 <르네 지라르 혹은 폭력의 구조>(나남, 1987)가 바로 출간되었던 것이다. 240여 쪽의 비교적 얇은 분량이지만 실제 지라르론은 절반 정도이고 나머지 절반은 지라르의 도스토예프스키론과 카뮈론으로 채워져 있는 이 책은 그럼에도 그로부터 거의 20년이 지나 출간된 <문화의 기원> 이전에 르네 지라르의 전체적인 모습을 조감할 수 있도록 해준 유일한 책이었다.


제목에서도 암시되듯이 김현이 파악한 지라르 이론의 핵심은 ‘폭력’이고 ‘폭력의 구조’였다. ‘모방욕망’과 ‘희생양’이라는 두 키워드를 그는 ‘폭력의 구조’로 묶었던 것(김현은 지라르의 <희생양>을 그의 가장 좋은 책으로 꼽는다). 폭력에 대한 관심은 사실 80년대 중반 김현 비평의 화두이기도 했다. “억압적 세계의 기본적 욕망에 대한 분석․해석”을 시도한 비평집 <분석과 해석>(문학과지성사, 1988)은 그렇게 해서 나온 책이며 거기엔 ‘증오와 폭력’ ‘폭력과 왜곡’이라는 두 중요한 평론이 실려 있다.


<폭력의 구조>에도 ‘지라르의 눈으로 한국의 신화 읽기’가 몇 대목 포함돼 있지만 그러한 평론들이 지라르에 대한 관심과 읽기에 힘입은 것이라는 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실 <폭력의 구조>의 글 머리에서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적어놓았었다. “욕망은 폭력을 낳고, 폭력은 종교를 낳는다! 그 수태․분만의 과정이 지라르에겐 너무나 자명하고 투명하다. 그 투명성과 자명성이 지라르 이론의 검증 결과를 불안 속에 기다리게 만들지만, 거기에 매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그래서 지라르의 이론을 처음부터 자세히 검토해 보기로 작정하였다. 거기에는 더구나, 1980년 초의 폭력의 의미를 물어야 한다는 당위성이 밑에 자리잡고 있었다.”(17쪽, 강조는 나의 것) 그는 그 폭력의 의미를 철저하게 질문한 아주 드문 비평가였다.

 


한 비평가에게는 ‘소설의 이론’을, 또 다른 비평가에게는 ‘폭력의 구조’를 의미했던 지라르가 내게 의미했던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였다. 그의 <도스토예프스키: 이중성에서 단일성으로>(1963)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묵시록’을 마지막 장으로 갖고 있는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의 보유편이라고 할 만하다. 이것은 ‘새로운 전망으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이란 절로 <소설의 이론>을 마무리한 젊은 루카치가 이후에 쓴 도스토예프스키론에 비교될 만한 것이었다. 두 걸출한 이론가에게서 소설론의 끝은 도스토예프스키였던 것이다.

 

 

 

 

 

 

 

 


‘소설의 이론’ 이후에 루카치는 <역사와 계급의식>(1923)으로 나아가며 ‘소설의 진실’을 발견한 지라르는 <폭력과 성스러움>(1972)으로 넘어간다(나는 두 사람의 도스토예프스키론을 참조한 졸업논문을 쓰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모방이론의 관점에서 지라르는 문학비평에서 문화인류학으로 넘어간 자신의 작업이 연속적인 것으로 간주했지만 주변에서는 “여러 가지 분야에 손을 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라는 우려를 낳았다고 한다. 하지만 되짚어보면, 그의 본류는 ‘모방욕망의 인류학’ ‘종교적인 것의 인류학’이었고, 그러한 작업의 영감을 문학비평에서 가져왔다는 점이 특이할 따름이다.


우리에게도 소개돼 있는 <폭력과 성스러움>(민음사, 1997)은 아직 소개되지 않은 <세상 설립 이래 감추어져온 것들>(1978)과 짝패를 이루는 책이다. “제가 <폭력과 성스러움>을 쓸 때 처음에는 2부의 책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1부는 고대문화, 2부는 기독교에 관한 내용으로 말입니다. 그렇지만 결국 자료는 다 모아놓고도 기독교 부분은 제쳐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문화의 기원>, 52쪽)


이 2부는 두 사람의 동료/친구의 도움을 받아서 대담의 형식으로 출간된다. 말 그대로 기독교에 관한 부분인데, <희생양>(1982, 국역본1998)이 1부의 보유라면, <사탄이 번개처럼(1999)은 2부의 보유쯤 된다. 후자의 경우엔 <세상 설립 이래 감추어져온 것들>의 두어 가지 실수를 바로잡은 것이라고 지라르는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실수란 건 기독교와 연관된 것에 대하여 ‘희생’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라고 자백하는데, 실상 <사탄이 번개처럼>에는 ‘희생’이란 말이 낙석처럼 널려 있다.


여느 저작에서처럼 이 책에서도 지라르가 입증하고자 하는 것은 아주 단순하다. 그는 신화와 기독교를 구별하면서 그 둘 간의 가장 큰 차이는 신화가 가해자의 편인 데 반해 기독교는 희생양의 편이라는 점이라고 주장한다. “신화의 해석은 집단 폭력의 희생물을 죄인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해석은 완전히 잘못이고 환상이며 그러므로 거짓이다. 반면에 성경의 해석은 이 희생물을 무고한 존재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해석은 본질적으로 정확하고 믿을 만하며 그러므로 참이다.”(14쪽)


이러한 단언은 어떤 기시감으로 우리를 안내하지 않는지? 이를테면, ‘신화의 거짓과 성경의 진실’이 책의 알파요 오메가인 것이다. 이 ‘하나의 주제에 대한 기나긴 논증’이 <사탄이 번개처럼>을 구성한다. 모방적 경쟁관계로 빨려 들어감으로써, 즉 스캔들에 불가피하게 말려들어감으로써 ‘모방의 회오리’, 혹은 무차별적 폭력에 도달하게 되는 메커니즘 자체가 바로 사탄이다(예수 가라사대,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의 스캔들이다.”). 반면에 기독교는 예수를 통하여, 폭력에 휩싸인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무고한 희생양을 살해하는 이 메커니즘의 정체를 폭로한다.

 


그러한 폭로를 주제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은 전범적이다. 그의 소설들은 나폴레옹 모방에서 그리스도 모방으로의 이행, 곧 신화(변증법)에서 복음서로의 이행을 표시하고 있는 이정표들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면, 르네 지라르와 도스토예프스키, 이 두 ‘두더지’는 서로 닮은 점이 많다. 결점도 비슷하고. 지라르에게서 맹목적인 서구 및 기독교 우월주의의 냄새가 난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는데, 사실 도스토예프스키 또한 맹목적인 러시아 및 정교 우월주의의 냄새를 다 가리지는 못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도 이 '인문학의 다윈'은 '인류학의 도스토예프스키'라 할 만하다(나의 졸업논문은 ‘인류학자 도스토예프스키’에 관한 것이었다)!    

 

06. 07. 24.

 

P.S. 물론 투명성과 자명성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미덕이 아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미덕이 아니다. '인류학의 도스토예프스키'라고 할 때 내가 염두에 둔 것은 두 사람의 '두더지적 성향'과 종교적 지향이다. 더 파고들어가면 두더지도 여러 종류가 있다(독백적 두더지, 대화적 두더지 하는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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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6-07-25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이 르네 지라르에 관심을 가지시는 이유를 알수있는 글이네요.."인류학의 도스토예프스키"라..일단 <사탄이 번개처럼..>하고 <문화의 기원>을 보관함에 넣어 봅니다. 근데 지라르에 대해서 가장 유용한 입문서로는 어떤 책이 좋은가요?..
아 그리고 한가지 질문더..본문에서 지라르의 신화와 기독교의 구분이 무슨 말인지 그리고 지라르는 왜 신화에서 기독교로 이행하는지 이해하기 힘들군요. 좀더 쉽게 설명해주실 수 있는지..^^

로쟈 2006-07-25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 적은 대로입니다.<문화의 기원>이 가장 좋은 입문서일 텐데, 사실은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같은 책을 재미있게 읽어본 경험이 있어야 흥미를 느낄 수 있을 거 같네요. 신화와 기독교의 구별은 본문에서 적은 바대로이고, <사탄>에서 지라르는 자세히 설명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모방욕망과 그 결과로서 발생하는 희생양 제의의 메카니즘을 기독교는 폭로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지라르는 호교론적인 입장까지 보이는데, 아주 단호하고 확고합니다. 아마 이들 책들에 대한 리뷰들을 참조하신다면 좀 나으실 것 같네요...

푸른괭이 2006-07-25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상 <영원한 남편>은 지라르의 '발견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토에서도 정말 연구 안 된 작품이거든요.(키르포친조차도 내용 훑기 정도 밖에 못했으니까요. 발표도 한 번 한 적 있지만, 참 뛰어난 작품인데 말이죠.) 전체적으로, 지라르는 본원적 의미에서의 도-키 연구자는 아니었을 수 있지만 여하튼 바흐친 급입니다. 개념틀을 선물해주기란 어려운 일이니까요. (개인적으로 루카치가 도-키에 대해 조금만 더 많이 써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계속 남아 있습니다.)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은 지금 읽으니 더더욱 좋더군요.

로쟈 2006-07-25 0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소설보다 지라르를 먼저 읽었는데, 아무래도 그의 시각으로 읽게 되더군요. 그러한 '발견'이 비평가의 진정한 몫이 아닐까 싶고...

로쟈 2006-07-25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얼마전에 전해듣긴 했습니다. '독자들의 힘'에 한몫하셨군요.^^
 

지난 금요일 문화일보의 북리뷰에서 주목한 책은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의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방법>(열린책들, 2006)이었다. 저자의 이름에도 (귀족 출신임을 표시하는) '폰'이 들어가 있고, 제목에도 '우아하게'가 들어 있는지라 '가난해지는' 정도는 가볍게 무시하고 일단을 눈길을 주게 되는 책. 알고 보니 2005년 독일에서 출간되어 30만부 이상 판매된 베스트셀러라고 한다. 굳이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대열에 합류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독일 사회의 한 트렌드 정도는 읽게 해줄 만한 책이므로 우아한 손길마저 가져가도 무방하겠다. 문화일보와 국민일보의 자세한 리뷰를 옮겨놓는다.    

문화일보(06. 07. 21) '돈' 없이도 가능한 풍요로운 삶

-부자가 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돈이 많다는 건 단순한 풍요를 넘어 여유와 자유와 멋과 아름다움 등을 총체적으로 의미한다. 그러나 문제는 부자 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부자가 되기는커녕, 세계 곳곳에서 중산층이 무너지고 풍요의 시대는 끝났다는 신호가 번쩍인다. 이렇게 물질적인 풍요가 사라지면, 우리는 품위를 잃고 초라해 져야 하는가.



-몰락한 명문 귀족의 후손으로, 독일 유력지의 칼럼니스트로 일하다 구조조정을 당해 현재 프리랜서로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는 저자는 그게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이 겪어본 결과, 여유와 멋과 자유와 만족과 아름다움과 우아함에서 부자보다는 가난한 것이 훨씬 나았다는 것이다(*저자에게 '가난'의 기준이 어느 정도인지 일단 모르겠다. 이 책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면 그의 '가난'은 물건너 간 건 아닐까?).

-책에 따르면 인간은 돈이 없어도, 아니면 최소한의 적은 돈으로도 얼마든지 부유한 삶을 누릴 수 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생활양식’과 ‘마음가짐’의 변화일 뿐이다. 진실로 부유해지고 싶은 사람은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기보다 황폐하게 만들 뿐인 것들에서 자신을 지켜야 한다.

-대표적인 것이 ‘일’에 대한 생각이다. 종교개혁 이후 루터와 캘빈에 의해 ‘일’은 도덕적인 지위를 부여받고, 직업과 동의어가 됐지만 실은 여기에 문제가 많다. 사람들은 열심히 일해 돈을 벌고 근사한 주택과 자동차를 마련하나 그게 어쨌다는 것인가. 돈을 위해 일에 묻혀 지내는 사이 아이는 훌쩍 커 버리고, 시간은 사라지며 스트레스와 심근경색으로 건강과 목숨을 잃기까지 하는데….

-집의 가치와 자동차, 휴가 여행 등에 대해서도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아무리 점잖은 사람도 운전대만 잡으면 욕설이 튀어 나오게 되고, 과속을 유발하는 자동차는 실용적인 이유뿐 아니라 비용을 따져도 말이 되지 않는다. 오늘날 관광이라 불리는 것도, 겉보기엔 고상해 보이지만 사실은 기괴했던 속물들의 여행이 발전한 결과일 뿐이다(*이건 마음에 드는 멘트이군).

-외식, 매스미디어, 아이 키우기, 쇼핑 등등에서 가난뱅이가 부자보다 유리할 수 있는 이유를 설득력 있으면서도 재미있게 풀어가던 저자는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이 경험한 부자의 사례를 중심으로 돈이 왜 행복의 걸림돌이 되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우리를 진정 풍요롭게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책을 끝맺는다.

-“삶을 보람있게 해주는 것들은 수중의 돈이 감소한다고 줄어들지 않는다. 우리의 내적인 자주성은 결코 수입의 문제가 아니다. 박식함이나 예의범절도 마찬가지다. …정중함, 친절함, 다정함, 도와주려는 마음, 삶을 쾌적하게 해주는 모든 것은 무한할 수 있으며, 물질적인 여건과는 완전히 무관하다(*요컨대, 그가 말하는 바는 '가난하지만 우아한 귀족이 되는 방법'인 듯싶다). (김종락 기자)


국민일보(06. 07. 22) 가난,두려워 말고 즐겨라...

-열심히 일하고 성실하게 사는데 생활은 좀처럼 안정되지 않는다. 돈이 있으면 좀 자유로워질 줄 알았는데 벌어도 벌어도 돈은 늘 부족하다. 시간도 마찬가지. 더 일찍 일어나고 더 늦게 잠드는데도 도무지 여유가 없다. 그뿐인가. 언제 해고될지 언제 파산할지 모른다. 실수를 하면,혹은 재수가 없으면 바로 추락이다. 풍요의 뒤에 가려진 위태로운 삶. 대량실업과 중산층 붕괴의 긴 그림자. 식은땀이 난다.

-우리는 지금 빈민화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경쟁은 갈수록 치열한데 복지는 거꾸로 후퇴한다. 조만간 20%의 상류층에 들지 못하면 80%의 하류층이 되고 말 거라고 한다. 그래서 성공에 대한 책,부자에 대한 책이 넘쳐난다. 가난은 수치이고 하류층이 되는 건 재앙이다.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방법>은 가난을 견딜만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그리고 가난해진 삶에 깃든 행복을 발견하게 한다(*슈마허의 <자발적 가난>과 같이 묶일 만하다). 책은 200쪽 정도로 얇지만 신선하고 전복적인 관점,소비와 취향에 대한 근본주의적 태도,그리고 우아한 문체가 빛나고 있어 페이지마다 밑줄을 쳐야 하는 책이다.

-“현실을 직시하자. 풍요로운 시대는 이제 완전히 지나갔다… 오늘날 가난해지는 사람은 자신만이 실패자라고 느낄 필요가 없다. 훨씬 더 포괄적인 과정의 일부로 가난해지는 것이며,따라서 그의 운명은 역사적인 차원을 가진다.”

-가난은 수치가 아니며 자신의 잘못도 아니다. 그것은 저자 쇤부르크의 경우만 봐도 명확하다. 쇤부르크는 독일의 권위있는 신문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기자로 일하다가 2002년 정리해고를 당했다. 경제 불황 때문에 베를린에서만 1만명의 언론인이 일자리를 잃은 시절이었다. 중산층이었던 그의 삶은 하루아침에 하류층으로 떨어졌다. 집에 들어앉아 소위 ‘자유 저널리스트’가 된 그는 경제적 고통 앞에서 무너지지 않기 위해,그리고 인간의 품위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이 책은 그가 가난에 대해 생각하고 실천한 기록이다.

-그의 결론은 이렇다. “존재의 불안에 억눌리지 않고 굶주림에 시달리지 않고 집세를 지불하고 진정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일들을 할 수 있는 한, 얼마든지 행복하고 우아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삶의 목표가 돈이 아니라 행복이나 아름다움, 품위 같은 것이라면 가난은 그 목표를 이루는 데 걸림돌이 아니라 사다리가 된다. 가난이 우리 삶에서 비본질적인 것, 의미없는 것, 저속하고 해로운 것 등을 제거하기 때문이다(*비루하고 저속한 부자들이 많은 동네에선 더욱 그렇겠다).

-예컨대 집 문제를 보자. 크고 좋은 집들은 손님을 불편하게 한다. 작고 소박한 집에서 손님들을 불러놓고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집은 얼마나 멋진가. 엘리베이터 없는 5층 건물의 꼭대기 층에 산다고 기 죽을 것 없다. 계단 오르기는 심장 질환을 예방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자동차는 어떤가. 대도시에서 자동차를 이용하는 것은 경제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는데 사람들은 자동차를 버리지 못한다. 그들은 기차와 지하철, 버스 등을 이용하면 더 많은 세상을 만날 수 있다는 걸 모른다.

-직업을 잃었다고 친구들과 저녁식사를 피할 이유는 없다. 외식 대신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면 된다. 식사는 대화를 나누기 위한 사건이며, 그 사건의 중심은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아닌가. 가난하다고 운동을 즐기지 못하란 법도 없다.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스포츠는 자연 속에서 빠르게 걷는 것이다. 러닝머신에서 두 발을 놀리며 멍청하게 화면을 응시하는 것보단 백 배 낫다.

-이런 질문도 해보자. 왜 휴가때는 반드시 해외여행을 떠나야 하는가? 소문난 영화라고 나도 봐야 하는가? 쇼핑한 물건 중 꼭 필요한 것은 얼마나 되나? 혹시 남들이 하니까 따라하고 있는 건 아닌가? 가난은 이런 습관들과 결별하는 계기가 된다. 이 결별을 두려워하거나 슬퍼할 이유는 없다. 찬찬히 짚어보면 별 의미가 없는 것들이다. 그것들을 치우고 난 빈 자리에서 자기 취향이 살아나고 자기 주도적 생활이 시작된다. 우아하게 가난한 삶은 그렇게 시작된다.



-“있는 그대로의 내 삶이 아름답고 다른 사람들의 삶은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나는 마치 해방된 것 같았다. 부는 욕구의 문제이다. 이른바 우리의 욕구라고 하는 것들은 대부분 인위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심지어는 우리 본래의 욕구를 가로막는 경우도 많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면 누구나 부를 누릴 수 있다. ”

-이 책이 가난을 무조건 옹호하거나 낭만화하는 건 아니다. 대다수가 가난해지는 빈민화가 현실이라면 가난한 삶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하고, 가난한 생활방식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저자는 가난을 공포와 수치의 상태에서 윤리적인 미학적인 상태로 재규정했다. ‘우아’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가난의 심리학을 발견한 건 도스토예프스키였다. 쇤부르크는 가난의 미학을 개척하고자 하는 것).

-“넘치는 풍요의 시대에서 조금 유행에 뒤떨어졌던 많은 미덕들이 이제 결핍의 시대에서 다시 르네상스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자원 고갈,복지의 후퇴가 꼭 분배의 싸움으로 끝나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아니 한걸음 더 나아가 그것은 오히려 전혀 예상하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사회적 존재로서 우리의 재탄생.”

-우리는 과연 가난을 긍정하게 될 수 있을까? 그리고 가난 속에서도 우아하고 품위있는 삶이 가능한 것일까? 나아가 지금의 욕구를 돌아보고 스스로 포기할 수 있을까? 이 사회에 이런 질문들을 던진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 책의 의미는 충분하다.(김남중 기자)

06. 07. 23.

P.S. '자발적 가난' 혹은 '우아한 가난'이 정치적 구매력을 가질 수 있을까? 즉, 그러한 방향으로의 사회개혁을 위한 정치적 지지를 얻을 수 있을까? 가난은 진보의 '역설적인' 화두가 될 수 있을까?(요즘 '진보의 대안'이라는 요구가 많이 제기되므로.) 개인적 차원에서 몇 사람이 우아를 떠는 일은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것이 사회적인 흐름, 혹은 운동이 될 수 있느냐이다. 즉, '가난해지기 경쟁'이 유발될 가능성이 있느냐. 우리가 탐욕이란 제 버릇을 남줄 수 있느냐 하는 것. 손쉽게 '예스'라고 말하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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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7-24 00:35   좋아요 0 | URL
저도 코멘트를 달긴 했는데, 아무래도 선진국의 '가난'이란 게 중진국, 후진국과는 차이가 좀 나겠죠... 사실은, 저도 조용조용한 성격입니다(^^;)...

가을산 2006-07-24 12:39   좋아요 0 | URL
역시 사회보장이 잘 되어야 우아하게 가난해질 수 있는것 같습니다.

로쟈 2006-07-24 12:58   좋아요 0 | URL
우리에게 가난을 보장하라!..

瑚璉 2006-07-24 14:55   좋아요 0 | URL
로쟈 님, 책은 주문했는데 그래24에서 주문하는 통에 thanks to를 못했습니다. 마음이 아픕니다요(-.-;).

로쟈 2006-07-24 14:58   좋아요 0 | URL
그런 말씀은 안 하시는 게 예의에 맞는 겁니다요(^^)...

瑚璉 2006-07-24 16:46   좋아요 0 | URL
그 대신이라기는 무엇하지만 페이퍼에 추천을 했습니다요(^.^;).

릴케 현상 2006-07-25 11:28   좋아요 0 | URL
선진국의 '가난'이란 게 중진국, 후진국과는 차이가 좀 나겠죠... <---선진국에서 나온 글을 읽으며 늘 느끼는 거예요^^
 

캐나다의 작가 얀 마텔(1963- )은 내게 생소한 작가이지만 저명한 부커상 수상작가(2002년)라고 하니까 '가락'이 없지 않겠다(우리 나이로 마흔에 부커상 작가가 된 셈인데, 앞으로 더 많은 활동이 기대되는 작가이겠다). <파이 이야기>(작가정신, 2004)에 이어서 장편 <셀프>(작가정신, 2006)가 국내에는 두번째로 소개된 모양이다('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이 최근 서구문학의 트렌드인가?). 작가의 이름을 기억해두는 의미에서 신작에 대한 리뷰를 옮겨온다.

동아일보(06. 07. 22) 내 몸이 여자로 변했다…‘셀프’

-작가 얀 마텔의 부커상 수상작 <파이 이야기>가 국내에서 조용한 인기몰이를 하면서 그의 마니아 독자층이 튼튼하게 만들어졌다. 그런 만큼 작가가 쓴 첫 장편소설 <셀프>의 출간 소식에 환호할 사람이 많을 듯싶다(*그러니까 <파이 이야기>보다 먼저 씌어진 작품이며, <파이 이야기>의 힙입어 마저 번역/소개되는 듯싶다) . <셀프>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문장이 까다로운 편이지만 지나치게 어려운 건 아니다. 오히려 한 문장 한 문장 생각하고 고민하게 만든다. 그만큼 의미 있게 짜인 작품이다.

 

 

 

 

-이야기는 한 젊은 소설가가 써 내려간 자서전 형식이다. 언뜻 보기에 소설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좀 황당하다. 외교관 부모를 따라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유년 시절을 보낸 소년 화자가 열여덟 살 때 느닷없이 여자가 된다는 것. 그러잖아도 ‘나’는 사내애인 친구 노아와 결혼할 수 없다는 사실에 일찌감치 절망했고 지렁이가 암수한몸이라는 데 감탄했던 터다.

-하루아침에 성별이 뒤바뀐 대목은 버지니아 울프의 <올랜도>를 떠올리게 한다. 1900년대 초반의 여성 작가 울프가 여성이 된 남성의 목소리를 통해 성 차별을 작품화했던 것과 달리, 21세기 남성 작가인 마텔은 같은 사건을 통해 섹슈얼리티와 사랑의 본질에 대해 탐구한다. 가슴의 털이 다 빠지고 월경을 치르게 된 ‘나’. 남성이었을 때의 습관처럼 여성과 연애했지만 주변에서 보기엔 동성애다. ‘나’는 자연스럽게 신체에 맞는 짝, ‘남성’을 찾아 나서게 된다.

-작가가 말하려는 것은 ‘무엇이 누구를 현재의 그로 만들었는가’에 대해서다. 남성이 여성이 돼 버린 판타지 같은 일로 인해 20대에 가깝도록 지켜왔던 남성이라는 성 정체성이 바뀔 정도로, 인간은 유약한 존재다. 방황 끝에 화자가 안착하게 된 것은 운명 같은 남자를 만나면서다. 사랑의 보금자리를 마련하면서 ‘나’는 행복감에 젖는다. 변한 것은 육체일 뿐이며 자신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또 상대가 어떤 성(性)이든, 중요한 것은 진정한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작가는 전달한다(*메시지 자체도 변한 건 없는 모양이군).

-성 묘사가 포르노에 가까울 정도로 적나라하다. 수음, 동성애, 강간 등 온갖 행위를 노골적으로 그려놓는데, 흥미롭거나 민망한 게 아니라 이상하게 쓸쓸하다. 가까워지기 위해 몸을 섞지만 그럴수록 고독해지는 현대인의 풍경이다. 마텔은 소설 곳곳에 영어와 프랑스어를 동시 배치해 두 언어의 유사성을 보여 주려 했는데, 한국어판에선 그런 맛을 보기 어렵다. 그러나 몇몇 쪽을 두 단으로 만들고 곳곳에 여백을 두는 등 기존 소설에선 보기 어려운 독특한 구성을 도입한 것만으로도 그의 실험정신을 짐작할 수 있다. 원제 ‘Self’(1996년).(김지영 기자)

06. 0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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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06. 07. 23)에서 학술동향 기사 하나를 옮겨온다. 타이틀은 '미국의 유교 연구현황'인데, 다소 생소한 테마인 만큼 얼마간의 호기심을 유발한다. 한 학술저널의 논문을 소개하고 있는 기사로 필자는 강성민 기자이다. '프래그머티즘과 유교의 대화'는 "프래그머티즘과 儒敎의 대화 … 토착화 멀지 않아"라는 부제에 들어 있는 것이다.

-‘동양철학연구’ 제46집에 실린 장원석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 연구원의 ‘미국학계의 유교연구 현황’은 최근 5년간 미국에서 이뤄진 유교연구를 총괄해서 검토하고 유형별로 잘 정리해서 보여줌으로써 연구자들에게 매우 유용한 정보가 될 듯하다.

-장 연구원은 최근 미국의 유교연구를 ‘고전의 번역과 재인식’, ‘세계철학으로서의 유교연구’로 특징짓고 있다. 그는 “전근대문명의 파편을 확인하는 태도로 시작된” 영미권 유학 연구가 세대교체를 이루고 나이가 젊어지면서 진지해지고 깊어졌다고 말한다. 고전 다시읽기가 일종의 붐을 이루고 있는데, ‘주역’, ‘중용’, ‘맹자’, ‘논어’에 대한 번역과 연구서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는 철저한 고고학적, 역사문헌적 지식을 근거로 기존 장들의 순서를 급진적으로 재구성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 과정에서 안이한 개념번역에 대한 비평도 이뤄진다. 로저 에임즈(Roger T. Ames)는 제수이트 선교사들로부터 시작해 제임스 레그(James Legge)에 의해 일단락된 1세대의 해석학적 선입견을 들춰낸다. 天을 단수형 Heaven으로 번역할 때 과연 얼마나 많은 서양인들이 그것이 조상과 문명의 축적을 의미하는 동양의 天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道를 습관적으로 Way로 번역하는 건 어떤가. 도라는 개념을 명사로 이해하는 이런 태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의 속성’과 ‘행위의 양식’이라는 존재구분에 근거한 것 아닌가. 사실 道는 동명사적인 ‘길 만들기’로 읽거나, 주관적 느낌의 형용사로 읽어야 할 때가 많다는 게 에임즈의 지적이다. 이런 난숙해진 연구를 바탕으로 2003년과 2005년에 1천페이지가 넘는 유교백과사전이 연달아 나오고 있다(*우리에게 이런 사전이 있는가?). 미국에서 유교의 토착화가 이제 멀지 않았다는 징후일까(*우리의 유교 연구 현황은 어떻게 되나? 재작년에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 유교문화권 교육 연구단에서 몇 권의 연구논문집을 출간한 바는 있다).

 

 

 

 

-그 다음은 세계철학으로서의 유교의 부활이다. 이는 뚜 웨이밍 하버드대 교수가 제1의 물결(유교의 태동기), 제2의 물결(송, 원, 명, 청의 부흥기)에 이어 현대에 유교의 제3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뚜웨이밍 교수는 국내에 가장 널리 알려진/소개된 철학자/연구자이다).

 

 

 

 

-이런 흐름과 관련하여 로버트 네빌(Robert C. Neville)의 ‘Boston Confucianism; portable Tradition in the Late-Modern World’(2000)는 미국에서의 유교연구가 ‘타자’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자기’에 대한 연구로 전환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는 그리스인이 아니면서 플라톤주의자가 되는 것에는 아무런 저항을 느끼지 않는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인이 아니면서 儒家가 되는 것은 어떤가”라고 그는 말한다. 네빌은 20세기 초의 유교 소외현상은 유럽대학 모델을 전세계로 이식하면서 유교를 커리큘럼에서 배제시킨 데서 비롯됐다고 주장한다. 영국의 식민지 인도에서 인도철학 전통이 삭제됐다가 나중에 일부만 복원된 것이 그 예다.

-그래서 네빌의 핵심적 주장 중의 하나는 유교 경전을 미국 대학교육에서 핵심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 미국인들이 “인간들이 서로의 차이와 다름을 존중하는 사회적 관습을 형성하고, 개인이 커다란 가족적·공적 네트워크의 일부임을 인식하고 실천하는 데 유가의 철학이 큰 역할을 하리”라고 기대한다.

-이런 인식 속에서 미국 학자들은 유교전통의 풍부함을 강조하는데, 주로 프래그머티즘과의 비교를 통해서 이런 작업은 이뤄지고 있다. 미국에서 프래그머티즘을 대표하는 철학자인 존 스미스(John Smith)가 왕양명과 프래그머티즘을 비교한다든지, 프래그머티즘의 관점에서 왕양명의 인식론을 재정초하는 워렌 프리시나(Warren Frisina)의 ‘The Unity of Knowledge and Action’(2002)은 대표적인 저술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서양철학사 속에서도 비교적 새로운 흐름인 프래그머티즘이나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 정도만이 유일하게 동양철학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며, 이 둘을 같이 읽을 때 서양인들의 ‘과정적 사유’가 폭넓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책으로는 조셉 그랜지(Joseph Grange)의 ‘John Dewey, Confucius, and Global Philosophy’(2004)가 있고, ‘창조성’(Creativity)을 중심으로 주희와 그 후계자들의 개념을 분석한 존 버쓰롱(John H. Berthrong)의 ‘Concerning Creativity’도 이런 맥락에 서 있다.

-그 외에 유교를 통해 인권을 탐구하는 흐름이 있다. 스테판 에인절과, 콩 로이 순 등이 이끄는 이런 흐름은 중국철학과 인권의 주제를 현대 중국정치와 연결하여 천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중국철학’이란 잡지의 편집자인 Cheng Chung-ying은 현대의 해석학적 전통, 하이데거, 화이트헤드를 원용하면서 주역을 중심으로 하는 존재-해석학을 창출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주역의 ‘觀’ 괘를 창조적으로 발전시킨 그의 저작이 곧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모종삼의 칸트연구가 일면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칸트, 볼프, 라이프니츠의 계몽주의 철학전통이 실제적으로 주자학과 대화했고 그 영향이 어떻게 칸트 철학에 나타나고 있는지를 모종삼과는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화이트헤드의 주저 몇 권과 연구서를 나열해 본다).

 

 

 


 

-장 연구원은 이런 주요한 흐름들을 요령껏 요약해 보여주면서,  아시아에서 발원한 유교가 현대에 들어 서양 국가에 퍼져 나가면서 그들 문화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으며 동시에 유교가 어떻게 다양한 형태로 토착화되어 그들의 내적 욕구를 충족시켜주었는가를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06. 0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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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황실 지리학회 탐사대원이 쓴 대한제국  견문록 <코레야 1903년 가을>(개마고원, 2006)이 번역돼 나왔다. 개인적으론 번역자들 안면도 있고, 책의 번역/출간 소식은 간간이 접하던 터였다. 관련 리뷰 두 편을 미리 읽어본다.  

 

 

 

 

서울신문(06. 07. 22) 서양인의 눈으로 본 한국의 사회상은 우리를 ‘객관화’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항상 관심을 끌어왔다.1668년에 나온 <하멜 표류기>는 조선의 존재를 처음으로 유럽에 각인시켰던 책으로 지금까지도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구한말 러시아와의 관계가 매우 활발했던 시기 많은 러시아의 탐험가와 군인들이 조선을 소개하는 책자를 선보였는데, 곤차로프의 <전함 팔라다>, 가린 미하일로프스키의 <한국과 만주, 요동반도 기행> 등을 찾아볼 수 있다(*물론 이 분야의 '고전'은 이사벨라 비숍의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겠다).

-당시 러시아의 속국이던 폴란드 출신의 작자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가 1903년 조선에 체류하면서 겪은 바를 서술한 <코레야 1903년 가을>은 제국러시아의 마지막 견문록이다. 몽골 계통의 여성과의 결혼한 저자가 조선 방문을 결행하고 이를 글로써 남기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 책은 조선의 사회, 경제, 문화, 대외관계 등 거의 모든 분야를 다루고 있으며, 특히 세로셰프스키의 지리와 풍경에 대한 묘사는 문학가의 기질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조선의 종교인 불교, 유교, 동학 그리고 확산되고 있던 가톨릭, 프로테스탄트 등의 위상과 각 종교의 현재성을 묘사한 부분은 저자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이며 사료적으로도 가장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일반 백성들에 대한 그의 시선은 따뜻함이 배어 있으며, 때로 그는 그들의 진취성에 감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조선에 대한 저자의 시선은 항상 긍정적이지만 않았다. 때문에 그는 조선의 어두운 모습들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데, 이를 테면 위계화된 신분제도에 대해 실생활과 연관지어 하층민의 비참한 생활상과 상층부의 부패를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그의 눈에 비친 ‘서로의 죄를 은폐해주는’ 관리들의 연대의식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것이었다.

-가부장제하에서 조선여성들이 겪는 숙명적인 삶은 저자에게는 커다란 안타까움으로 다가왔으며, 아마도 그 연장선에서 서술된 기생들의 일상이 그려졌을 터였다. 그가 조선의 기생제도를 자유롭게 다루고 나중에 소설 ‘기생 월선이’를 출간한 것도 저자의 자유분방한 사고방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책에서 껄끄럽게 다가설 수 있는 부분은 일본에 대한 서술이다. 세로셰프스키는 일본에 의한 철도 부설을 일본의 커다란 이익을 가져다 줄 것으로 보면서도 “일본이 진보와 휴머니즘의 정신으로 이 불쌍한 한국 또한 일으켜 세워주리라 기대해 본다.”는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훗날 그는 조선의 식민지화를 조국 폴란드의 현실과 비슷하고도 동정했지만 한일합병 이전에 쓰여진 이 책은 일본에 의한 개화를 긍적적으로 묘사하였다. 대개의 견문록들이 저자들의 조국에 대한 이해관계에 충실한 데 반해 폴란드인으로서 세로셰프스키의 관점은 여기에서 벗어나 있다.

-이 책은 단순한 한 외국인의 조선 견문록을 넘어 다양한 실증자료와 통계수치를 활용한 ‘사회과학적인’ 치밀성이 담겨 있는 것은 저자가 그만큼 조선의 삶에 고민한 흔적으로 볼 수 있다. 훗날 폴란드 저자동맹 의장까지 역임한 저자의 필치는 화려함을 넘어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저자의 의도를 잘 살린 번역이 깔끔해 보인다. 역사는 반복된다 했던가. 외세와 얽힌 당시의 한반도 모습과 오늘날의 현실을 비교해보는데도 충분히 도움을 주고 있다.(기광서/ 조선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한국일보(06. 07. 22) 우리를 훑는 외부의 시선을 의식할 때, 기분이 참으로 미묘해진다. 우리를 과하게 긍정하는 것도, 반대로 지나치게 깍아내리는 것도 부담스럽고 불편하다. 그런데도 외부의 시선은 더 궁금해진다. 그들은 우리를 어떻게 볼까.

-<코레야 1903년 가을>이 보여주는 것은 100년 전 한국 사회다. 폴란드인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가 러일전쟁 발발 직전인 1903년, 러시아 황실지리학회 탐사대의 일원으로 부산에 도착한 뒤 뱃길을 이용해 원산으로 갔다가 다시 금강산, 평강, 양담, 안양, 양주, 서울로 이어온 여행의 기록이다. 그러나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다. 여로에서 만난고 본 많은 사람의 증언과 사회 현상, 그리고 자연 모습을 통해 당시 한국을 종합적으로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 눈에 띄는 대목은 남루한 현실, 관료에 대한 원성, 사회 곳곳에 밴 일본의 영향이다. 그가 본 한국 사회는 “모든 것이 억눌려 있어 옆 나라 일본에서 느껴지는 생동감이나 진취성을 찾아볼 수가 없”고, 그가 가본 곳은 “어디나 예의 그 황량한 폐허와 먼지, 혐오스러운 불결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물에 씻겨 내려 진흙에 반쯤 파묻힌 작물과, 폭우가 휩쓸고 가 흙빛으로 변한 논도 자주 보았다. 백성의 삶이 얼마나 피폐했을 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생활이 어려울수록 관료에 대한 원성은 컸다. 사또나 관리, 정부의 파발꾼이 지나갈 때 사람들은 “강도 납신다”고 할 정도였다. 그래서 저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양반과 관리들은 민중을 끝없이 핍박하고 강탈하면서 마치 온 나라가 자기들만을 위한 것 인양 행세하고 있다”고 꼬집는다. 한달 남짓 짧은 여행기간 동안, 관료의 부패와 무능을 목격ㆍ체험하는 데 한계가 있었을 텐데도 이 같은 표현이 책에 가득한 것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런 원성을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의 영향력은 이미 사회 깊은 곳까지 스며 있었다. 금강산 석왕사의 승려들은 검은 빛의 일본식 기모노를 입고 검은 빛의 일본식 두건을 쓰고 있었다. 일본인은 서울, 부산에 자기들만의 깔끔하고 편리한 주거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들은 산 채로 우리 목에 올가미를 걸고 있어요…우리 모두 곧 그들의 노예가 될 겁니다. 서울 땅의 삼분의 일이 벌써 그들 소유라는 것을 아십니까?” 젊은 관료 신문균은, 현실화하는 일본의 침략상에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한국의 종교, 산, 사찰, 농업, 음식, 기후, 학교, 가축, 공동묘지와 장례의식, 여성의 지위, 상공업과 해외교역, 신분, 심지어 기생사회에 이르는 방대한 내용을 읽을 수 있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 역할을 나누고 깊게 쌓인 눈 더미로 녀석을 유인한 뒤 공격과 도망치기를 반복하면서 힘을 뺀 다음 제대로 걸려들면 창으로 마구 찔러내는 식의 사냥법 등 재미있는 내용이 많다.

-거슬리는 대목도 있다. 우리를 낮춰 보고 일본을 문명국으로 인정한 부분이 특히 그렇다. “일본인들이 유능한 민족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동양 여기저기에 자기 식의 생활방식을 주입하고 중국인과 한국인은 일본인을 형제로 보기 때문에 그들에게 기꺼이 복종한다.” “일본이 진보와 휴머니즘의 정신으로 이 불쌍한 한국 또한 일으켜 세워주리라 기대해본다.”

-민족운동,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한 그의 이력을 볼 때, 이 같은 표현이 등장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러시아 식민지인 조국 폴란드의 독립을 누구보다 갈구했을 그가, 일본의 침략 야욕을 읽지 못한 채 겉모습만 보고 한국과 일본을 대비시킨 것이 아쉽다.(박광희 기자)

06. 07. 22. 

P.S. 저자 바츨라프 레오폴도비치 세로셰프스키(1858-1945)의 모습이다. 아래는 그가 쓴 편지(1922년에 씌어질 걸로 보인다). 러시아어 글씨가 가지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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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프랑스인 눈에 비친 제국의 흔적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5-02 11:55 
    이번주에 내가 관심도서 분류한 인문서는 대담집 두 권이나 아직 언론리뷰가 뜨지 않는다. 내주로 넘어간 모양이다. 덕분이 일이 헐거워졌는데, 가뜩이나 일이 많은 터라 다행이긴 하다. 대담집 대신에 잠시 눈길이 간 책은 프랑스인 고고학자가 쓴 <대한제국 최후의 숨결>(글항아리, 2009). 기사에서 언급된 대로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한국 관련서가 유럽에서 다수 쏟아져나왔는데, 이 책은 내용이 충실해서 당시 베스트셀러
 
 
2010-06-25 2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