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크로의 <대중문화 속의 현대미술(아트북스, 2005)>을 읽어보게 됐다. 번역의 신뢰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지난 한 세기간 씌어진 철학과 미술사 관련 책 중 가장 면밀하고 중요한 책"이라는 아서 단토의 서평에 일단 끌렸다. 거기에 로잘린 크라우스가 찬사는 또 어떤가: "크로의 분석과 미술작품에서 시각적 요소들을 발견하는 방법에 대한 눈부신 예시들, 그리고 보는 행위를 능숙한 해설로 옮겨가는 방법 등의 서술은 어떤 미술 독자에게라도 도움이 될 만한 무엇을 갖고 있다."

하니, 내가 '어떤 미술 독자'로서 이 책으로부터 도움을 기대하는 것은 전혀 억지스럽지 않다. 다만, 번역만 제몫을 해준다면 말이다('어떤 번역'인가에 따라 책읽기는 조력자를 얻을 수도 있고 방해자를 얻을 수도 있다). 그런 생각으로 읽은 본문의 첫장 첫 페이지 한 문장을 따라가보도록 한다.

"중산층 대중에게는 당황스럽게도, 마네의 <올랭피아>는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에 대해 저속한 기호와 야만적 배경, 포르그래피에 등장하는 모델의 자세, 그리고 알레고리로서의 평면화된 회화 논리를 제공하였다."(11쪽)

원저 'Modern art in the common culture'(1996)에서 해당 대목을 옮겨오면: "Manet's Olympia offered a bewildered middle-class public the flattened pictorial economy of the cheap sign or carnival backdrop, the pose and allegories of contemporary pornography superimposed over those of Titian's Venus of Urbino."(3쪽)

번역문의 대강은 마네의 <올랭피아>(1863)가 이러저러한 것을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1538)에게 제공했다는 것인데, 정신분석의 사후성(사후효과)를 설명하는 사례가 아니라면 후대의 작품이 수백 년 전의 작품에 대해 무얼 제공했다는 게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그리고 '포르노그래피'하면 으레 '현대의 것'을 떠올리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contemporary pornography'에서 'contemporary'를 빼놓은 것도 이해에 혼선을 가져오는 듯하다(마네의 '동시대'일 수도 있다). 'carnival backdrop'을 '야만적 배경'이라고 옮긴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문제점들을 얼마간 카바해주고 있는 것이 <현대미술과 모더니즘론>(시각과언어, 1995)에 번역돼 있는 이 책의 첫장 '시각예술에서의 모더니즘과 대중문화'이다. 거기에서의 번역은 이렇다: "마네의 작품 <올랭피아>는 경박한 자세와 축제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배경, 즉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자세와 알레고리, 현대판 춘화의 자세, 평면화된 회화의 경제학 등을 당혹해하는 중산계급 대중에게 제공하였다."(345쪽)

시각과언어판의 번역이 아트북스판보다 이해하기 수월하다는 것은 쉽게 동의할 수 있는 일이다. 게다가 이 번역문에는 원저에도 제공돼 있지 않은 두 그림을 나란히 싣고 있어서 따로 설명이 없이도 내용의 8할은 짐작하게 한다(흠이라면 <올랭피아>의 창작년도가 1963년으로 오기돼 있는 것). 하지만 이 역시 부분적으로는 꼬여 있다. 그걸 풀어보기 위해서 먼저 두 그림, 곧 마네의 <올랭피아>와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차례로 보도록 한다.  

첫눈에도 두 그림 사이에 '썸씽'이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다. 더불어 '경박한 자세와 축제적인 분위기(cheap sign or carnival backdrop)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야만적 배경'이라고 하기엔 어색하지 않은가?). 머리에 꽃을 꽂고 있는 이 잘나가는 매춘부에게 흑인 하녀가 (아마도 부르주아 신사일) 남정네의 꽃다발 선물을 갖다 건네는 장면, 이게 'cheap'하고 'carnival'적인 장면 아닌가? 그리고 그 'the cheap sign or carnival backdrop'을 다시 받고 있는 게  "the pose and allegories of contemporary pornography superimposed over those of Titian's Venus of Urbino"  아닌가? 

적어도, 시각과언어판에서 'sign'과 'pose'를 '자세'라고 옮길 때는 이러한 문장 이해가 전제된 것 아닌가? 그런데, 시각과언어판에서는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자세와 알레고리, 현대판 춘화의 자세"라고 하여 원문의 'superimposed over'를 누락시켰고('덧씌우다'란 뜻이지만 여기서는 '베끼다' 정도로 이해하는 게 편하겠다) 그런 만큼 불필요한 혼선을 가져왔다(아트북스판에서 '알레고리로서의 평면화된 회화논리'는 고차원적인 논리의 번역이지만 어디에 발을 딛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내 생각에 이 대목은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베낀 현대판 춘화(포르노그라피)의 자세와 알레고리" 정도의 뜻이겠다. '현대판 춘화'라고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어서(물론 자료야 널려 있지만!) 좀 고상한 축의 이미지를 하나 가져오자면 카트린 브레야의 영화 <지옥의 해부>에 나오는 아래의 장면 같은 게 거기에 부합하지 않나 한다(눈을 감고 있다는 게 흠이긴 하다). 매춘부를 당당한 여신적 형상으로 제시하는 것, 그게 이러한 나부(裸婦)상들이 갖고 있는 알레고리가 아닌가 싶고(사실 브레야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이중적 편견, 곧 '성녀 아니면 창녀'로 간주하는 태도를 비판하기도 한다). 해서, '이 자세', '이 알레고리'이다.  

Anatomy of Hell

대략 이러한 맥락으로 이해하고서 다시 저자 크로의 문장 "Manet's Olympia offered a bewildered middle-class public the flattened pictorial economy of the cheap sign or carnival backdrop, the pose and allegories of contemporary pornography superimposed over those of Titian's Venus of Urbino."을 우리말로 옮기자면, "마네의 <올랭피아>는 싸구려스런 배경, 혹은 카니발적 배경과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베낀 현대판 포르노그라피에서의 포즈와 알레고리들을 평면화된 회화적 경제안에 제시함으로써 중산 계급(부르주아 계급) 대중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참고로, 마네의 <올랭피아>와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교과서적인 비교대상이며, 티치아노를 베끼거나 패러디하는 사례들은 자주 만나볼 수 있다. 가령 아래와 같은 그림들.

 

잘 안 읽히는 번역 덕분에 '미술 공부'를 몇 시간 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06. 07. 10-12. 

 

 

 

 

P.S. 새로이 알게 된 것이지만, <모더니즘 이후 미술의 화두>(눈빛, 1999)에도 크로(크로우)의 이 논문은 번역돼 있다. 번역문은 이렇다: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는 저속한 기호의 평면화된 회화적 질서 또는 티치아노의 <우리비노의 비너스>를 연상시키는 축제적 배경과 인물의 자세, 그리고 현대의 매춘에 대한 알레고리 등을 중산 계급의 대중에게 제시함으로써 그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383쪽) 눈에 띄는 건 'economy'를 '질서'로 'pornography'를 '매춘'으로 옮긴 것 등이다. 'carnival drop'이 어디에 걸리는지에 대해서는 나와 의견이 다르지만, 빼어난 솜씨이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으란 말이 있듯이, 도움을 얻으려면 제대로 된 번역서를 골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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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2011-02-07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중문화 속의 현대미술> 번역 너무 심한 것 같습니다... 번역도 번역이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책에는 11장의 각주도 없어요;;
 

<중국 고대 사상의 세계>(살림, 2004)의 저자 벤저민 슈워츠의 또 다른 책이 출간됐다. <부와 권력을 찾아서>(한길사, 2006)가 그것인데, 제목만 봐서는 이게 중국학, 내지는 중국사상사에 관한 책이란 걸 짐작하기 어렵겠다. 원제가 'In Search of Wealth and Power'(1964)이니까 역자나 출판사의 잘못은 아닌데, 그래도 좀더 풀어주었다면 낫지 않았을까 싶다. 원서의 부제는 '옌푸(엄복)와 서양'이다. 소개의 글과 리뷰 한 편을 옮겨온다.  

-19세기 들어서 서구 문명과 맞딱뜨린 중국의 모습을 엄복(嚴復, 1853~1921)이라는 당대의 학자를 통해 들여다본다. 20세기 서구에서 대표적인 중국학자로 기록된 학자 벤저민 슈워츠의 주저로, 그는 도올 김용옥의 유학 시절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다.

-엄복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존 스튜어트의 <자유론> 등 서양의 지식과 사상을 번역, 중국에 적극적으로 소개하여 중국의 유교적 전통과 서구사상의 조화를 시도한 인물이다. 노신과 모택동 역시 그의 번역을 통해 서양 문물을 접했을 정도로 근대 중국을 형성하는 데 엄복이 끼친 영향은 막대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중국의 한 선각적인 지식인 엄복의 눈에 비친 서구사상은 어떤 모습이었고 어떻게 해석되고 받아들여졌을까? 이 의문에 집중하는 책 전반에서 서구의 지식의 사상은 엄복과 슈워츠에 의해 이중으로 걸러진다. 즉 중국인 엄복이 본 서양을 서양인 슈워츠가 다시 보는 '번역의 번역서'인 셈이다.

-'국가의 부강'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했던 엄복의 서구 문물 번역은 대부분이 의역, 더 나아가 '창조적 왜곡'으로 나타난다. 권력의 외부로 밀려난 삶을 살다가 심지어 말년에는 서구 문물에 대한 신봉을 포기하고 노장사상에 천착하기도 하는데, 지은이는 여러 각도에서 엄복의 학문에 대한 태도를 살펴보며 그에 대한 이해와 변호를 시도한다. 그 가운데 근대화의 문제, 산업사회의 자유·평등·민주주의 이념 등에 대해 전반적인 비판과 통찰을 보여준다. 

경향신문(06. 07. 08) 한 중국인이 본 서구사상과 한계

하버드대 교수였던 벤저민 슈워츠(1916~99)가 쓴 <부와 권력을 찾아서>는 엄복(嚴復·1853~1921)의 눈에 비친 서구사상과 그 한계를 살핀다. 중국인이 본 서양을 서양인이 다시 본, ‘번역의 번역서’인 셈이다. 엄복은 근대서양의 사상을 중국에 첫 소개한 계몽사상가. “(국가의 부강이라는) 거대한 근대적 과업을 달성키 위하여 피눈물나는 ‘붓의 투쟁’을 벌인 인물”(김용옥)이다.

(*)도올의 추천사: 엄복이라는 인간에 대해 나는 많은 말을 할 수가 없다. 바로 이 책이 너무도 많은 말을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이며 나의 박사학위 지도교수인 하버드대 벤저민 슈워츠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용옥! 한 세기 전에 태어났더라면 너도 이와 같은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사진은 슈워츠 교수와 그의 지도로 학위를 받고 갓 귀국하여 고려대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의 김용옥.)

-지구최강 중국이 동네북이 된 당시 그는 영국 유학 이후 서양의 부와 힘의 비밀을 찾는 데 젊음을 바쳤다. 애덤 스미스, 밀, 몽테스키외 등을 중국어로 옮겼다. 루쉰과 마오쩌둥이 그의 책을 읽으며 컸다. 그는 영국의 진화론적 윤리학의 철학자 스펜서(1820∼1903)의 정신적 제자였다(*엄복의 사회진화론이 한국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박노자의 <우승과 열패의 신화>를 참조할 수 있다. 하지만, 허버트 스페서의 책은 국내에 번역된 바 없는 듯하다. 이럴 때의 당혹감이라니!).  

-하지만 ‘의역(意譯)’의 방법으로 ‘원전’을 왜곡했다. 중국의 부강을 위해. 예컨대 스펜서는 국가를 개인 자유를 억압하는 악으로 봤으나, 엄복은 국가주의를 강조했다. 스펜서가 비판한 영국의 제국주의적 팽창도 긍정적으로 여겼다. 그의 결론은 이렇다. “개인의 자유를 바탕으로 한 역동적 에너지의 분출이 생존투쟁을 거쳐 이룩한 힘이 바로 국가의 힘으로 연결된다.” 그가 보기에 서양문화는 인간 에너지를 고양시키고 있었다. 중국은 황제와 극소수 관리가 세상 전체를 결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엄복은 1차대전 등을 겪으며 서양의 진보란 이기심·살육·파렴치와 동전의 양면이라고 느꼈다. 노장을 새로 읽으며 은둔생활을 하다 죽었다. 우리는 엄복의 질문 앞에 서 있다. 부강이 최고 가치일까. 그렇다고 노장이 대안일까(*물론 부와 권력을 찾는 엄복의 제자들은 우리 주변에 널리고 널렸다.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기란 얼마나 힘든 것인지!).(김중식 기자)

06. 07.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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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옌푸와 사회진화론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6-12 22:40 
    얼마전부터 중국 근대 지식인들에 관한 책과 사회진화론에 관한 책들을 모으고 있는데, 계기가 된 건 옌푸(엄복)의 <천연론>(소명출판, 2008)과 <정치학이란 무엇인가>(성균관대출판부, 2009)를 지난달에 뒤늦게발견한 때문이다. <천연론>은 토머스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지만지, 2009)의 중국어 번역이다. 그러니까 그걸 다시 우리말로 옮기는 건 '중역'인데, 그럼에도 이 중역이 의미가 있는 건은 옌푸의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미국학과 관련하여 단연 눈에 띄는 책은 세이무어 마틴 립셋의 <미국 예외주의>(후마니타스, 2006)이다. 미국학에 대해서라면 역시나 최근에 나온 편역서 <미국학의 이론과 실제>(서울대출판부, 2006)이나 국내 저자들의 <한국에서의 미국학>(한국외대출판부, 2005), <미국학>(살림, 2003) 등이 '교과서'적인 성격을 갖고 있지만, 내가 읽고 싶은 책은 보다 '리얼한' 쪽이고 <미국 예외주의>는 거기에 부합해 보인다. 굳이 꼽자면 루이스 메넌드의 <메타피지컬 클럽>(민음사, 2006)과 함께 올 상반기에 나온 미국학 관련 '두 권의 책'이다. 하지만 아직 손에 들지 못한지라, 프리뷰 차원에서 언론의 리뷰 하나를 옮겨오고, 아울러 인용차원에서 교수신문에 게재된 '해외 동향 보고' 하나를 옮겨온다. 이 보고는 이주 문제를 통해서 '미국 예외주의'를 비판하는 세 권의 책들을 다루고 있다.

   

중앙일보(06. 07. 08) 자유국가 미국에선 왜 사회주의 힘 못 쓰나

-미국은 독특한 나라다. 이 나라 국민은 낙태의 합법화이나 동성애자 권리 같은 종교나 윤리 문제를 놓고 편을 갈라 국가가 '쩍' 갈라질 정도로 떠들썩하게 싸운다. 하지만 미 정치학회와 사회학회 회장을 모두 지낸 지은이에 따르면 이는 미국 밖에선 쟁점이 되지 않는다. 프랑스나 이탈리아 같은 가톨릭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다. 개인 문제에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며 왈가왈부하는 건 미국뿐이다.

-게다가 미국은 선진국에선 유일하게 전국민 건강보험이 없다. 산업화한 나라 가운데 소득분배는 가장 불평등하며, 사회보장 지출 비율은 최하위권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대통령의 성추문을 탄핵의 이유로 삼을 만큼 도덕주의가 넘친다. 유럽이라면 웃고 말았을 건데, 원.

-하지만 이런 부정적인 면과 동시에 미국은 감탄할 만큼 개방적인 민주주의 국가라는 긍정적 면이 있다. 1994년의 설문 결과를 보면 미국과 미국인의 특성이 잘 드러난다. 응답자의 74%가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고 답했다. 88%는 열심히 일해서 부자가 된 사람을 존경하며, 78%는 미국의 힘이 대부분 기업가의 성공에서 비롯된다고 여긴다. 기회 평등 아래 개인 능력을 존중하는 특성이 잘 드러난다.

-응답자들은 또 '성공 기회를 얻는 것과 실패로부터 보호받는 것' 사이에서 76%가 기회를 선호했으며 20%만이 안전보장을 택했다. 사회보장보다 기회 평등을 선호한 것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볼 때 미국에서 평등주의는 건국의 이유이며, 능력주의는 사회의 근간이다. 이 둘은 미국을 진취적이고 힘있는 나라로 만든 원동력이다.

-하지만 지은이는 이런 미국의 특징이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쏟아내는 '양날의 칼'이라고 강조한다. 예로 능력주의는 개인의 책임감과 진취성을 기르지만 동시에 이기적 행동과 소수자에 대한 포용력 부족으로 이어질 수 있다. 패배자의 범죄.부정.소송남발을 부르기도 한다. 유럽과는 현저히 다른 이런 특징은 미국을 자유국가에선 드물게 사회주가 힘을 쓰지 못하는 국가로 이끌었다. 유럽에선 중세부터의 전통에 따라 계급이 고정된 신분을 뜻했다. 이 때문에 노동계급은 자신을 계급적 관점에서 바라보며 이는 사회주의 정당활동으로 이어졌다.

-반면 평등에서 출발해 개인의 진취성을 강조하는 미국에선 계급을 경제적인 성취의 결과로만 봤다. 기회의 평등을 보장받으니 계급의식이 싹틀 여지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 정당이 뿌리내릴 틈새가 없었다는 논리다. 흥미로운 설명이다. 다만 흑인들은 결과의 평등을 주장하며 개인 진취성보다 국가 개입과 지원을 요구한다. 아무튼 미국은 특이한 나라다.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미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읽은 책이다. 미국과 갈수록 닮아가는 우리 사회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채인택 기자) 

교수신문(06. 07. 08) 과장된 ‘미국 例外主義’에 대한 역사적 객관화

-미국이 다른 국가나 지역과는 다르다는 관념, 즉 미국 예외주의는 멀게는 토크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토크빌은 1835년 출간된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미국이 그 기원과 민족적 성격, 그리고 역사적인 진화과정과 정치적, 종교적 제도 등에서 유럽의 국가들과는 근본적으로 상이하다고 결론 내린다.

 

 

 

 

미국 예외주의, 토크빌과 엥겔스의 관찰에 기원
-이러한 미국 예외주의의 결론을 도출하는 데 있어 이주문제는 핵심적인 고려사항 중 하나였다. 특히 그는 미국의 예기치 못한 급격한 성장을 미국의 무제한적이고 관대한 이주 정책과 그러한 이주를 수용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광대한 토지자원 및 토지사용에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정책에서 발견했다.

-즉, 로크적 소유관념에 기반한 이주자들의 토지소유와 그것에 기반한 자유로운 시민들의 자발적 결사 속에서 미국 민주주의의 예외성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필라델피아와 뉴욕에서 그가 발견한 가난한 흑인들과 유럽 이주자들로 인해 미국 사회가 ‘이주의 위기’에 봉착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물론 이주와 관련해 미국 예외주의를 주장한 이는 토크빌만은 아니었다. 1893년에 엥겔스는 미국에서 사회주의정당이 존재하기 힘든 이유를 이주에 따른 노동자 계급 내부의 인종적, 문화혈통적 분화에서 찾았다. 이주는 노동자 계급을 토박이와 외국인으로 나뉠 뿐만 아니라, 후자는 다시 아일랜드인, 독일인, 체코인, 폴란드인, 스칸디나비아인, 그리고 흑인 등으로 나뉜다는 것이다.

-이주에 의해 형성된 이러한 인종적·문화혈통적 분화 속에서, 진정으로 강력한 비정상적인 동기부여 없이는 노동자 계급이 하나의 단일한 정당을 형성하는 것은 힘들다고 엥겔스는 결론 내린다. 이러한 엥겔스의 주장은 이후 좀바르트에 의해 미국에서 노동운동이 발전하지 못하는 핵심 요인으로서 간주되면서 미국 예외주의 담론의 한 축을 형성했다.

-최근에 출간된 이주문제에 관한 세 권의 책은 직간접적으로 이러한 미국 예외주의의에 도전한다. 우선 졸버그(Ari Zolberg)의 ‘A Nation by Design’(하버드대출판부, 2006)은 식민지 시대부터 현재까지의 미국의 이주정책을 국제 자본주의 및 국가 체제와, 자본 대 노동 및 국가 정체성과 관련된 국내 세력들 간의 관계속에서 추적함으로써, 토크빌이 미국을 방문했던 시대가 토크빌이 언급한 것처럼 무제한적인 이주가 허용되던 시대가 아니라, 각각의 주(state)나 연방 차원에서 다양한 이주정책이 관철되고 있었던 시기였다는 점을 증명한다. 그리고 이주 문제, 특히 국가의 이주 정책을 미국 예외주의라는 틀에서 보기보다는, 다른 국가와의 비교적 관점을 통해서 바라보고 있다.

이주자들의 노동조합도 가능해
-파인(Janice Fine)의 ‘Worker Centers’(코넬대출판부, 2006)는 1970년부터 현재까지 성장한 이주자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노동센터에 대해 연구한 것이다. 이 저작의 핵심적인 주장의 하나는 이주자 공동체의 내부에서 노동조합이 형성될 수 있고 노동운동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즉, 엥겔스가 노동 운동이나 사회주의 정당 건설에 부정적으로 작동한다고 주장한 인종이나 문화혈통적 집단이 사실상 노동운동의 기반이 돼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의의는 그람시적인 의미에서 미국 노동운동의 예외주의를 주장한 카츠넬슨(Ira Katznelson)과 비교해보면 좀 더 분명해진다. 이미 20여년전에 출간된 ‘City Trenches’(시카고대출판부, 1981)에서 그는 미국의 노동운동이 유럽에 비해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를 도시에서 노동자들이 진지를 구축하는 방식에서 찾았다. 즉, 노동의 논리로서 구성되는 작업장과는 달리, 그들의 삶의 공간인 공동체라는 진지의 구성 논리는 이주자들의 인종이나 문화혈통적 집단의 논리에 따라 구축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의 공간과 삶의 공간의 철저한 분리를 그는 미국 예외주의의 핵심으로 파악했다.

-이주의 문제를 통해 미국 예외주의에 직간접적으로 도전하는 두 저작과는 달리, 헤이덕(Ron Hayduk)의 ‘Democracy for All’(Routledge, 2006)은 미국 예외주의가 간과해왔던 예외성에 착목한다. 이주자들의 투표권에 초점을 맞춘 그의 연구는 미국에서 1776년부터 1926년까지 40개 이상의 주에서 시민권과 상관없이 이주자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특히 초기 미국인들은 이방인들에 대한 투표권의 부여를 이주자들이 미국사회로 통합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파악해 장려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 이주자들에 의한 투표가 기존의 정치, 경제적 지배세력에게 위협이 되면서, 그들의 투표권은 박탈됐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미국 예외주의와 이주 문제와 관련한 저작들의 최소한의 공통점은 기존 미국 예외주의의 탈역사적으로 획일화된 관념에 대한 비판이라 볼 수 있다. 기존의 미국 예외주의는 토크빌에 기원을 두고 있든, 엥겔스에 기원을 두고 있든 미국 예외주의의 내용이 시공간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관념에 취약하다.

그러나 미국인들에게 ‘예외’는 ‘일상’이다
-이러한 기존의 미국 예외주의의 내용적 고정성은 미국을 연구하는 데 있어 방법론적 전략을 구축하는 데 동어반복의 오류나 종속변수에 초점을 맞출 때 나타나는 독립변수의 과장을 피하기 어려운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좀더 중요한 문제는 기존의 미국 예외주의의 내용적 고정성이 이주자들에게 미치는 효과일 것이다.

-물론 립셋(Seymour Martin Lipset)이 적절히 언급하고 있듯이 미국 예외주의의 내용은 양날의 칼을 가지고 있다. 즉,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미국 예외주의의 긍정적인 면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주자들이 있다면, 그들의 사유나 운동은 비미국적으로 취급되거나 부정적인 개념화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데 있다. 즉, 미국에서 미국 예외주의는 ‘예외’가 아닌 반면에, 그러한 이주자들의 사유와 운동은 일탈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최근의 세 저작이 중요해지는 맥락은 바로 이러한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이충훈 미국통신원)

06. 07. 09.

P.S. 조금 연착한 한겨레의 리뷰도 자료삼아 옮겨놓는다. 리뷰로서는 가장 자세하다.

한겨레(06. 07. 15) 마르크스를 사랑한 ‘네오콘’ 립셋 읽으면 미국이 보인다

-세이무어 마틴 립셋은 미국을 들여다보는 흥미로운 통로다. 좌파와 우파를 넘나드는 기묘하고 독특한 학문적 세계를 지녔다. 그의 사상적 편력은 미국 지성사를 대표한다. 립셋은 미국 정치학회와 사회학회 회장을 동시에 역임한 유일한 학자다. 세계 사회과학계의 ‘대부’로서 자타가 공인하는 두 자리를 번갈아 차지했으니 립셋의 학문적 성취는 불문가지다. 계층계급적 분석을 통해 정당과 민주주의 문제에 천착한 그를 빼놓고는 미국 사회과학을 말할 수 없고, 미국으로부터 결정적 영향을 받은 한국 정치학과 사회학을 논할 수 없다.

-그가 쓴 <미국 예외주의>(후마니타스 펴냄)가 국내에 번역됐다. 미국의 과거와 현재, 좌파와 우파를 동시에 살펴볼 기회다. 그의 저술 가운데 국내에 번역된 것은 이 책이 처음이다. 사상적 편력은 더욱 흥미롭다. 원래 립셋은 트로츠키주의 성향의 좌파 학자였다. 스탈린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하는 과정에서 미국 좌파 지식인 내에서 ‘반스탈린주의 분파’를 대표하게 됐다. 그러나 60년대에 등장한 미국 신좌파의 ‘반국가주의’ 성향과 거리를 두면서, 오히려 공화당의 구보수주의와 친화성을 발휘한다. 민주주의·인권 등의 가치를 미국 외부에 전파시키는 적극적 구실을 강조하는 대목에서 공화당 우파와 만난 것이다. 실제로 네오콘 1세대의 대부분은 이후 레이건·부시 정권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면서 네오콘 2세대를 창출했다.

-그러나 정작 립셋은 레이건 정부 출범을 전후해 ‘동료 네오콘’들과도 결별했다. 그는 시장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유럽 사민주의의 복지프로그램을 미국에 뿌리내리는 데 관심을 둔다. 립셋은 “레이건과 대처는 네오콘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정통 신보수주의자’와는 거리가 먼 고전적 시장자유주의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여러 정치학 이론을 내놓았다. ‘민주주의가 발전하려면 이에 걸맞은 사회경제적 기반이 필요하다’는 테제가 그의 작품이다(*이젠 상식 아닌가? 그러한 기반 없는 민주주의란 조선인민민주주의 정도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날까지도 한국의 우파들이 즐겨 사용하는 레토릭이다. 립셋 역시 근대화론자였던 셈인데, 역사의 진보를 사회경제적 토대로부터 찾았던 카를 마르크스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미국 예외주의>를 비롯한 립셋의 여러 저술에는 마르크스가 즐겨 인용된다(*우파의 레토릭이 마르크스로부터 영감을 얻은 것이다?! 그럼 좌파의 영감은 어디에서?).

-“한국의 정당구조는 사회적 갈등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최장집 고려대 교수의 주장도 립셋의 방법론에서 일부 영향을 받았다. 립셋은 “사회는 갈등으로 이뤄졌는데 이를 억압하면 더 급진화된다. 현대 민주주의는 이런 갈등을 정당을 통해 드러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갈등을 정당체제 안으로 포섭해야 한다는 립셋의 방법론을 최 교수는 한국적 현실에서 더 ‘급진화’시킨 셈이다.

-지난 2000년 립셋은 그의 마지막 저술인 <민주주의 세기>(Democratic Century)를 집필하다 쓰러졌다. 그의 제자들이 모여 책을 완성하긴 했지만, 1922년 태어나 여든을 넘긴 그가 또다른 글을 남기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1995년에 출간한 <미국 예외주의>는 립셋이 손수 완성한 사실상의 최후 저술이 된 셈이다. 이 책을 보면 ‘정치적 올바름’을 위해 ‘악마’와 싸우는 데 모든 것을 바치는 미국인들의 종교적 열정을 적나라하게 이해할 수 있다. 실은 립셋 스스로가 그렇게 살았다. 그를 사랑할지 미워할지는 나중의 문제다.(안수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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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날짜 한국일보에서 미국 작가 레이몬드 챈들러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장르소설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혹은 그럴 만한 여유를 못내는) 처지이지만 '챈들러 컬렉션'에 대한 욕심을 부추기는 기사였다. 여기에 옮겨놓는 걸로 당분간은 그 욕심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필자는 최윤필 기자이며, 타이틀은 "추리소설 대표주자 레이먼드 챈들러: "썩은 도시 LA, 검은 속 보여주지""이다.

-“‘필립 말로’ 시리즈는 정직한 한 인간이 부패한 사회에서 고귀하게 살아가려는 분투를 담고 있습니다. 그 분투에서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는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그는 빈털터리가 되거나 시니컬해지거나 삶에 관한 경구를 내뱉거나 간혹 정사를 즐기게 될 지도 모릅니다. 혹은 그는 할리우드의 영화제작자처럼 사악해지고 남의 비위나 맞추며 무례해질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말로 또래의 젊은 남자가 고상하게 부를 누릴 수 있을까요. 부정하지 않고서야 성공할 수 없는 냉혹하고도 분명한 현실을 받아들여 스스로를 타락시키지 않고 말입니다.”- 챈들러가 존 하우스만(영화제작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추리문학계의 거물 스티븐 킹은 ‘창작론’이라는 부제를 단 저서 <유혹하는 글쓰기>(김영사)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직유는 1940년대와 1950년대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나 한심한 싸구려 소설에서 찾아낸 것들이다”고 썼다. 그는 ‘하드보일드 추리소설’과 ‘한심한 싸구려 소설’을 구분했지만, 40~50년대 당시의 미국 문단에서 그 둘의 구분은 무의미했다. 그 ‘한심한 싸구려’ 하드보일드 작가들은 하지만, 당대의 근엄한 주류들을 비웃듯 40년대 할리우드의 ‘필름 느와르’라는 흐름을 선도했고, 사후 하드보일드 리얼리즘의 고전으로 영미권 문학의 진지한 논문 주제 가운데 하나가 됐다.

-이들이 바로, 대시엘 해멧, 로스 맥도널드, 그리고 여기 소개하는 레이먼드 챈들러(1888~1959)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기나긴 이별>은 12번을 읽었다. 그는 나의 영웅이었다”고 말했고, 폴 오스터가 “그는 미국을 이야기하는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냈고, 이후 미국을 예전과 같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던 바로 ‘그’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기자생활을 하며 시와 수필을 썼고, 여러 직업을 전전한 끝에 석유회사 부사장으로 출세하지만, 음주와 장기 결근으로 쫓겨난 이력의 작가다. 펄프 매거진에 범죄단편을 기고하며 문학 인생을 시작한 그는 첫 장편 <빅 슬립>(39년)부터 후기 걸작 <기나긴 이별>(54년)까지 6권의 장편 추리소설(박현주 옮김, 북하우스)을 썼다.

 

 

 

 

-오스터의 말처럼, 그의 문학은 현대 미국을 읽는 효율적인 코드 가운데 하나다. 인종의 용광로라는 미국에서도 가장 비등점이 높은 도시 LA를, 군수산업을 필두로 한 산업문명의 어지러운 성장과 사회ㆍ사상ㆍ가치의 부패와 혼란으로 뒤숭숭했던 30년대 말~ 50년대를 그의 소설은 말 그대로 하드보일드하게 관류한다. 그의 ‘페르소나’라 해도 좋을, 사립 탐정 ‘필립 말로’ 와 함께(*아래는 말로 역의 험프리 보가트).

-183㎝의 키에 85㎏의 당당한 체구, 경찰직에서 해고당한 33살 독신의 낭만적 냉소주의자 ‘말로’. 그는 고전적 의미에서의 정의의 투사도, 영웅도 아니다. 자신의 일에 때로는 목숨도 걸지만 사명감 따위는 없다. 한 마디로 그는 세상과 삶 자체를 냉소하는 ‘삐딱한 프로’다. 경찰 일에 협조하지 않았다고 경찰은 그를 욱대기고 그는 경찰을 이죽거리는 장면이다. “베이시티에서는 그 이유만으로 당신을 죽여버릴 수 있었어.”(경찰) “베이시티에서는 파란 넥타이를 매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날 죽일 수 있었겠지.”(말로) “그 이유만으로 당신을 영업정지시킬 수 있었어.”(경찰) “고려해보시지. 난 이 직업을 좋아한 적이 없었거든.”(말로) -<리틀 시스터>에서

-챈들러 문장의 매력은, 인물의 내면까지 공간에 투영시키며 치밀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끌고 가는 묘사의 힘, 그리고 ‘~듯이’ ‘~처럼’으로 이어지는 그 특유의 비유에서 찾을 수 있다. 가령 이런 문장. “장군은 다시 천천히, 일자리를 얻지 못한 쇼걸이 마지막 남은 고급스타킹을 사용하듯 조심스럽게 힘을 사용해서 말했다.” -‘빅슬립’에서

-챈들러는, 그리고 ‘말로’는 당대의 타락과 위선을 혐오하고 배척하는 대신, 냉소와 조롱, 연민과 익살로 포용한다. 고독한 감성과 치밀한 추리의 세계로 품는다. <빅슬립>의 33살 청년 탐정 말로는 <하이 윈도> <안녕 내사랑> <호수의 여인> <리틀 시스터> <기나긴 이별>까지 편을 이어가며 자신만의 아름다운 염세주의 미학을 구축해간다.

-냉혹하고 현실적인 팜므 파탈형 여성들을 주로 그렸던 소설에서와 달리, 18살 연상의 아내를 생애를 두고 열렬히 사랑했다는 챈들러는 <기나긴 이별> 발표 직후 아내가 숨지자 실의에 빠져 알코올 중독자로 살다 세상을 떠난다.

-그의 첫 장편 <빅 슬립>은 지난 해 말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의 100대 영어소설에 들었고, 그의 팬 대다수가 최고로 꼽는 <기나긴 이별>은 ‘히치콕 매거진’선정 세계 10대 추리소설에 꼽혔다. 올 여름, 그와의 연애에 빠져보자(*내가 올여름에 챈들러에 빠질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지만, 그렇다고 이 페이퍼가 'long goodbye'가  되기를 바라진 않는다. 암만!).

06. 07.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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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7-09 15:43   좋아요 0 | URL
저는 그 탐정의 표준전 모델이 된 필립 말로가 싫어요 ㅠ.ㅠ 그래도 퍼갑니다^^

로쟈 2006-07-09 15:49   좋아요 0 | URL
추리소설 애호가께서 안티-말로시라니까 다소 의외이긴 합니다.^^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피터 크레이머의 <우울증에 반대한다>(플래닛, 2006)는 개인적으로 관심이 가는 책이었다. '우울증 컬렉션'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울증과 관련한 몇몇 책들에 흥미를 갖고 있던 차에 항우울증 치료제인 프로작에 관한 베스트셀러를 쓴 저자의 명성에 눈길이 갔던 것이다. 한데, 주문해서 손에 들기까지도 아무런 리뷰나 서평을 읽어볼 수가 없었다. 언론의 지나친 주목을 받는 책들이 있는가 하면, 이렇듯 이유없이 홀대받는 책들도 있는 것(신생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라 '로비'가 부족했던 것일까?). 

해서 언제든지 '프리뷰'의 자리에서 다룰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비오는 날 공치는 '노가다' 인부처럼 일주일을 그냥 흘려보냈다. 이번주는 사정이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출판사 리뷰라도 올려놓는다. 그리고, 학위논문의 일부를 떼다가 붙여놓는다. 우울증에 대한 나의 '문학적' 관심이 어디에 걸쳐 있는지 보여주는 글이기도 하다(비오는 날 우리 아저씨들이 따로 무얼 하겠는가? 연장이나 다듬고 있는 수밖에).    

 -정신의학자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프로작에게 듣는다(Listening to Prozac)>의 지은이인 피터 D. 크레이머가 '질병'으로서의 우울증의 담론을 자세히 살핀다. 수잔 손택의 책 제목을 연상시키는 <우울증에 반대한다(Against Depression)>라는 제목에서 눈치챌 수 있듯이, 지은이가 반대하고 있는 대상은 우울증을 우리 몸의 질병으로만 보지 않는 세간의 인식, 더 나아가 '우울증을 낭만화하는 사회'이다.

Peter D. Kramer

-20여년전 항우울제인 '프로작'이 등장했을 때만 하더라도 "우울증이 과연 (약으로 치료해야 할) 질병인가?" 하는 논쟁이 들끓었다고 한다. 책은 지금에도 역시 우리 사회에는 우울증을 단순한 '마음의 감기' 정도로 치부하거나, 창조성과 감수성, 천재성의 원천인 것처럼 바라보는 시선이 만연해 있음을 지적한다. 지은이는 우울증이 심각한 생리학적 질병이라는 사실을 최신 뇌 연구 결과를 비롯한 의학/생물학적 근거와 여러 통계를 바탕으로 입증한다.

-또한 지은이 자신의 개인적인 진료 경험, 그리고 문학과 예술에서 끌어온 사례 제시로 우울증에 대한 왜곡된 시각이 실제 우울증 환자들을 더욱 고통받게 만들고 있으며, 더 나아가 우리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각을 왜곡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울증을 직시함으로써 자아와 예술, 사랑과 훌륭한 삶 등 인간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다고 말한다(*이러한 인간 이해에 있어서 '정신의학'과 '정신분석'은 적대적 동반자이다. 요즘의 심리철학과 인지과학이 그렇듯이).

이제 이어지는 건 '프로이트에게 듣는다'쯤 되겠다(다소간 '학술적'이므로 딱딱한 글에 경기를 일으키는 분들은 여기까지만 읽으시면 되겠다). 크레이머 교수라면 별로 달갑잖게 생각할 듯하지만, 프로이트 또한 "자아와 예술, 사랑과 파탄난 삶 등 인간에 대한 이해"를 높여준다고 나는 믿는다. 

 

 

 

 

예술에 대한 프로이트적 가정에 따르면, 예술창조의 전제조건은 삶의 파탄이다. 즉 뭔가 억울하게 당했다는 느낌 없이, 모든 것을 빼앗겼다는 감정 없이 예술을 창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술은 삶에서 잃어버린 시간과 행복에 대한 하나의 보상으로서 주어지며, 자신만의 상상의 세계에서 그러한 보상을 찾는 예술가는 현실과 화해하지 못하는 망상적 돈키호테이다. 그래서 예술사가인 하우저의 말을 빌자면, 모든 예술은 정확하게 말해서 일종의 ‘돈키호테주의’이다(아래 사진은 아르놀트 하우저).

 

그러한 돈키호테주의가 예술사에서 전면화 되는 것은 낭만주의 시대 이후이다. 프로이트가 진술한 의미에서 예술가의 개인적인 요구와 사회의 집단적인 요망 간의 불일치는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두드러지기 때문이며, 사실 만족의 대용물이나 보상/위안으로서의 예술 개념 따위는 모두 낭만주의 내지 후기 낭만주의 예술에 대한 경험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하우저, <예술사의 철학>) 요컨대 낭만주의 이후의 예술은 삶의 상실을 전제로 하며, 그것에 대한 대가로 지불된다.

 

 

 

 

 

 

 

 

 

상실에 대한 두 가지 반응 태도를 다룬 프로이트의 <애도와 우울증>(1917)은 이런 맥락에서 다시 읽을 수 있다. 애도와 우울증은 모두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자리에 들어선 어떤 추상적인 것, 즉 조국, 자유, 어떤 이상 등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중요한 차이점은 우울증의 경우에 자기 존중감, 즉 자기애가 급격하게 추락한다는 것이다.

 

애도의 경우에는 일단, 현실성 검사를 통해서 드러난 사실, 즉 사랑하는 대상이 이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대상에 부과되었던 모든 리비도를 철회시켜야 한다는 요구를 점차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상실의 충격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지만, 우울증은 상실한 대상과 자신을 무의식적/나르시시즘적으로 동일시함으로써 대상 상실이 자아 상실로 전환된다. 그리고 대상과 자아 사이의 갈등은 동일시에 의해 변형된 자아와 자아-이상으로서의 초자아 사이의 갈등으로 변모되고, 이것은 대상화된 자아에 대한 애증의 감정을 낳으면서 급격한 자기애의 상실, 곧 자기 비하로 이어진다.

 

이러한 애도와 우울증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을 세 가지로 정리하면, (ⅰ) 애도는 의식적인 대상과 관련되지만 우울증은 무의식적인 대상과 관련된다. (ⅱ) 애도는 대상과 관련되지만 우울증은 나르시시즘, 즉 자아 형성과 관련된다. (ⅲ) 애도와 달리 우울증에서는 애증의 양가감정이 자아 내부로 투사되면서 사랑의 대상을 자아로 바꾸고, 자신의 자아는 초자아의 역할을 하면서 사디즘을 발현시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두 반응 태도가 정념의 특정한 상태를 지시한다기보다는 일련의 과정을 가리킨다는 점이다.

 

 

 

 

 

 

 

 

 

프로이트는 이에 대한 생각을 더 진전시키지 않았지만, 정념의 진행과정으로서의 애도와 우울증은 분명 내러티브를 함축한다. 그레마스(A. J. Greimas)에 따르면, 일반적인 서사체(혹은 서술체)의 경우 서술 프로그램은, 가장 간단하게는, 이접(disjunction)과 연접(conjunction)의 서사로 표시될 수 있다. 이접의 서사는 주체(S)와 대상(O)이 분리되는 서사, 즉 주체가 대상을 상실하거나(상태) 박탈당하는(행위) 서사이고, 연접의 서사는 주체와 대상이 결합되는 서사, 즉 주체가 대상을 회복하거나(상태) 획득하는(행위) 서사이다. 이것을 함수(Function) 형식으로 표시하면,


F1(S)=(S∩O)→(S∪O): 상실/박탈

F2(S)=(S∪O)→(S∩O): 회복/획득


이 된다(∩와 ∪는 각각 연접과 이접을 표시한다). 프로프(V. Propp)와 그레마스의 서사학에서 주로 분석 대상이 되었던 모험 서사의 경우는 주체가 박탈된 대상을 다시 획득하는 일련의 과정이 기능단위들의 통사적 배치를 통해서 제시된다. 즉 그것의 일반적인 유형은 F1 F2가 결합된 형식을 취한다.


F(S)=(S∩O)→(S∪O)→(S∩O)


이러한 통사론적 배치의 모델과 유형에 대한 탐구는 주로 주체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기존의 서사학 혹은 서술기호학은 엄격히 말하면, 행동기호학 혹은 행위기호학이었다. 이 행동기호학에서의 주체는 행위의 한 기능으로서, 즉 행위자로서만 기술된다.

 

하지만, 낭만주의 이후의 서사에서 주체의 행위자로서의 역할은 모험서사에서의 그것만큼 중심적이지 않다. 낭만주의의 주체는 자아와 세계를 맞대응시킬 만큼 확장된 자아를 자신의 것으로 하고 있기에 오히려 중심적인 것은 이 주체의 주관적 정념이다. 따라서 대상의 상실에 대한 반응 역시 모험서사에서처럼 즉각적이거나 반사적이지 않으며, 복잡한 내면적 과정을 통해서 표출된다. 그러한 과정을 유형화한 것이 프로이트의 애도와 우울증이라면, 이 두 범주는 낭만적 서사를 기술하는 유력한 모델이 될 수 있다. 앞에서의 함수 형식을 응용해서, 애도와 우울증의 서사 모델을 제시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FT(S)=(S∩O1)→(S∪O1)→(S∩O2): 애도

FM(S)=(S∩O)→(S∪O)→(S↔$): 우울증


여기서 FT에서의 T는 Trauer(애도)의 이니셜이고, FM에서의 M은 Melancholia(우울증)의 이니셜이다. 애도의 함수에서 첫 번째 화살표가 지시하는 것은 ‘상실’이고, 두 번째 화살표가 지시하는 것은 대상리비도의 전이(O1에서 O2로)인데, 이 전이의 과정을 ‘애도’라고 부른다. 이때, 중요한 것은 O1≠O2이어야 한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O1이 O2에 의해서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O1>O2이기 때문에 그 대체는 완벽한 대체는 될 수 없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O1-O2의 차이가 애도의 크기와 정도를 결정한다.

 

우울증의 경우에는 조금 복잡한데, 먼저 첫 번째 화살표가 가리키는 것은 애도 함수에서와 마찬가지로 대상과의 이접, 즉 ‘상실’이다. 그리고 두 번째 화살표가 가리키는 것이 ‘우울증’이다. 이 우울증의 진행과정에서 주체는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대상화된 자아(S=O로서의 $)와 원래의 자아가 차지하던 자리에 들어선 자아-이상으로서의 초자아(Superego) 사이에 자아 분열이 이루어지며(여기서 주의할 것은 우울증 함수의 1, 2항과 3항에서의 동일한 기표 S는 ‘자아’의 자리만을 표시할 뿐이며, 실제적인 내용, 즉 기의는 다르다는 점이다. 1, 2항에서 S의 기의가 ‘자아’라면 3항에서는 ‘초자아’이다), 이 양자 간에는 애증관계, 대립관계가 형성된다. ↔가 표시하고자 하는 것이 그러한 애증/대립관계이다. 이렇듯 애도와 우울증은 그것이 함축하는 내러티브 진행과정에 있어서 차이를 보인다.

 

그렇다면, 그러한 애도와 우울증의 서사는 언제 처음 나타나는가? 그것은 애도와 우울증이 상실에 대한 반응태도라고 할 때, 인간에게서 최초의 근원적/원초적인 상실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인간에게서 애도와 우울증을 수반하는 근원적/원초적 상실은 오이디푸스 단계에서 엄마로부터의 분리이다(물론 분만 시 모체로부터의 분리를 가장 원초적인 분리체험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의식적인 분리과정이 아니라 생물학적 분리(과정)이며, 인간만의 고유한 체험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반면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비록 인간이 장기간의 의존기간을 거치면서 느리게 성숙해간다는 생물학적 사실의 결과이긴 하지만, 인간만의 고유한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프로이트에 따르면, 대략 만 세살 반에서 여섯 살까지의 아이가 자신과 다른 성을 지닌 부모와 신체적, 정서적, 지적으로 독점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지만, 자신과 동성인 부모가 가진 우선권을 인정하게 되면서 발생한다. 이때 아이는 자신보다 우월한 동성의 부모에게 보복을 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며 자신의 근친상간 욕구와 살인충동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유산이라고 묘사한 초자아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이 죄책감이다(물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프로이트의 이러한 설명에 모든 정신분석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정신분석학의 기본개념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이 개념에 대한 자신의 최종적인 생각을 공식화하지 않았다. 때문에 프로이트의 리비도론 대신에 대상관계론을 주장하는 멜라니 클라인은 프로이트와는 조금 다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오이디푸스 상황을 이론화하기도 한다).

 

이러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진행과정 또한 일련의 서사적 과정을 함축하며, 그것은 애도와 우울증의 서사로 표시될 수 있다. 이때 애도의 서사는 오이디푸스적 상황을 성공적으로 해소해 나가는 과정의 서사이며, 우울증의 서사는 그렇지 못한 과정의 서사이다. 즉 애도의 서사함수 FT(S)=(S∩O1)→(S∪O1)→(S∩O2)는 FT(자아)=(자아∩엄마)→(자아∪엄마)→(자아∩초자아)로 재기술 될 수 있고, 우울증의 서사함수 FM(S)=(S∩O)→(S∪O)→(S↔$)는 FM(자아)=(자아∩엄마)→(자아∪엄마)→(초자아↔자아)로 재기술 될 수 있다.

 

이러한 서사방식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보편적 방식이지만, 이미 지적한 바 있듯이, 애도의 서사와 우울증의 서사에 보다 잘 부합하는 것은 자아의 주관성이 극대화되고, 개인으로서의 자의식이 성장하게 되는 낭만주의 서사이다. 이때 낭만주의 서사라는 말은 이중적인데, 그것은 낭만적 주인공의 서사이면서 동시에 낭만주의 시인 자신의 전기적 서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낭만주의 시인에게 있어서 창작은 자신의 또 다른 전기, 혹은 진정한 ‘자서전’이다.

 

고전주의 시인의 과제가 선험적으로 주어진 문학적 관습과 규범을 얼마나 잘 준수하느냐에 놓여 있었다면, 낭만주의 시인의 과제는 자기 자신의 문학적 생애를 창작을 통해서 기술해 나가는 것이었다. 그의 삶은 창작에 바쳐진 질료이면서 동시에 그의 창작이 궁극적으로 그려내야 할 형상이기도 하다. 이때 그가 지향하는 삶은 물론 더 이상 모방적인 삶이 아니라 자기만의 삶, 창조적인 삶이다. 그리고 시인 자신이 그러한 삶의 주체로서 새롭게 규정된다. 만약에 그러한 주체가 없다면, 새로운 삶, 새로운 사회적 관계, 새로운 세계에 대한 창조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새로운 자기창조, 혹은 자기 정립을 통해서 세계창조의 입법권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낭만주의는 혁명적이다. 물론 이 혁명은 정치적 혁명이 아니라, 아니 정치적 혁명 이전에, 혁명적인 텍스트로서의 낭만주의 텍스트의 현상성이 낳는 혁명이다(K. H. 보러에 의하면, 그와 같은 현상성에 대한 의미론적 표현형식이 내용을 갖게 되는 시기는 1820년대이며, 대표적인 예가 하이네와 들라크루아의 작품이다). 즉 낭만주의 시인은 그의 텍스트적 자아와 분리되지 않는다.

 

이 혁명적인 텍스트 혹은 텍스트적 혁명의 주체로서의 낭만주의 시인은 흔히 ‘낭만적 천재’라고 불리는바, 낭만주의 시인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러한 천재로서의, 창조의 주체로서의 자기규정, 곧 자기선언이다. 낭만주의 시인에게서 유독 ‘시인’이란 자기 정체성이 자주 주제화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그러한 관심이 어떤 분리와 상실의 체험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낭만주의 문학은 주관적 자아의 절대성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자아를 한정하는 주변의 모든 사회적 관습과 규범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한 의문제기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주관적 자아와 객관적 세계 간의 분리가 당연히 선행되어야 한다. 그 분리는 낭만적 시인의 자기정립을 위해선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지만, 한편으론 자기정립에의 무한책임을 떠안도록 내맡겨지는 소외의 체험이기도 하다. 상실은 그것의 다른 이름이다(아래는 뒤러의 판화 '멜랑콜리아'[1514]).

 

 

시인은 바로 그러한 상실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아이면서, 그것을 창작을 통해서 보상받고자 하는 자아, 승화시키고자 하는 자아이다. 거꾸로 말하면, 상실의 체험은 시인의 일상적 자아에 균열을 일으키면서 시인으로서의 자기정립에 대한 결단을 촉구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한 자기결단을 통해서, 주관적 의식의 과잉으로 말미암아 자기 존재의 거처/장소를 찾아서 배회하는/표류하는 낭만주의 시인은 자기정립에의 여정의 이정표들을 세우게 된다. 그 이정표들은 시인의 앓고 있는 상실의 징후이면서 동시에 그가 그 상실을 치유하는 방식이고 그 흔적이다. 시인이 시인으로서 자신을 정립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상실의 반복적인 치유과정을 통해서이다.

 

때문에 역설적으로, 상실의 체험은 시인으로서의 자기정립에 있어서 근원적인 조건이며, 시인의 자기창조에 있어서의 가능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상실이 시인으로서의 자기정립 조건이라고 해서, 그 자기정립의 방식이 일률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시인의 개성과 그가 처한 조건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마치 상실에 대한 각기 다른 반응 태도로서 애도와 우울증이 나타나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상실에 대응하는 시인의 자기정립의 두 유형을 ‘애도적 유형’과 ‘우울증적 유형’으로 이름붙일 수 있을 것이다(이러한 유형화는 사실 생소한 것은 아니다. 이미 F. 쉴러는 <소박문학과 감상문학>(1795)이라는 고전적인 논문에서 모든 시인을 소박시인과 감상시인으로 대별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소박시인은 자연스럽고 소박하며 자기 분열과 자기비판을 필요로 하지 않고, 소박한 감성에 따라 현실에 모방에만 자신을 국한하는 시인이다. 반면에, 감상시인은 회의적이고 자기 분열적이며, 정신과 감정의 갈등에 고민하는 시인이다. 전자는 자연 자체이며, 후자는 자연을 찾는 자이다)...

 

06. 07.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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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별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법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3-21 23:50 
    고교 독서평설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이별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법'은 부제이고, 제목은 '푸시킨 VS. 레르몬토프'이다. 러시아 두 낭만주의 시인의 사랑시(실연시)를 애도적 유형과 우울증적 유형으로 비교한 글이다. 개인적으론 '푸슈킨'이란 표기를 선호하지만 지면에는 외국어 표기안에 따라 '푸시킨'으로 표기됐다.     고교 독서평설(09년 3월호) 푸시킨 VS.
 
 
pax 2006-09-12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사실 저도 우울증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는데(저 자신이 우울한 인간이기도 하고 그래서), 뭔가 우울증에 대한 필이 딱 꽂히는 기분이군요~ 그렇지만 역시 우울한게 사라지지는 않습니다.ㅠㅠ

로쟈 2006-09-12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아니라 프로작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