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네그리와 조르지오 아감벤, 두 이탈리아 철학자의 책들을 읽어보는 것도 올해 내가 갖고 있는 계획 중의 하나이다(그들의 모든 책들 갖고 있는 건 아니지만 주요 저작들은 구해놓은 지 오래다). 언제나처럼 이 계획도 '계획서'라는 평면을 넘어서는 게 쉽지 않겠지만, 여하튼 나는 내 여력이란 그물망 너머로 일단은 집어던져 보고자 한다(걸리면 하는 수 없는 것이고).
일단 네그리와 관련하여 내가 책상에 올려놓은 책은 아래의 다섯 권이다. 윤수종 교수의 소개서 <안토니오 네그리>(살림, 2005)를 제외하면 모두 번역서이고 이 책들의 영역본들도 최근에 모두 구했다(<제국>은 원저가 영어본이며 이 원서는 번역본이 나오기 전에 마스터본이 돌아다녔고 나도 그때 구했다. 참고로, <제국>의 러시아어본은 재작년에 출간됐다).
'네그리가 말하는 네그리', <귀환>과 <안토니오 네그리>를 읽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고, <혁명의 시간>(갈무리, 2004)부터는 좀 공을 들여야 할 듯하다. 여기서는 워밍업 차원에서 출간 당시의 서평만을 일단 먼저 읽어보기로 한다. 홍철기씨의 "'가난한 사람'들의 혁명적인 유물론을 위하여"가 그것인데, 월간 <말>(2004년 7월호)에 실려 있으며 나는 자율평론 홈피에서 옮겨온다('자율평론'은 국내 네그리언들의 '아지트'이며 네그리 관련자료들을 다수 참조할 수 있다).
자율평론 제9호(2004. 07. 07) 어떻게 가난한 사람들이 전쟁과 평화라는 이분법을 넘어서 전지구적 자본주의에서 인류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가? 이것이 <제국>(마이클 하트/안토니오 네그리, 윤수종 옮김, 서울: 이학사, 2001)의 공저자 중 한 사람인 이탈리아의 유물론 정치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가 그의 새로운 책, <혁명의 시간>을 통해 대답하고자 시도하는 질문이다. 저자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유물론 자체가 관념론에 의해 오염된 상황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출해야 한다고 말한다. 유물론 속으로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있는 관념론의 언어들로부터 분리되어 유물론이 자신만의 언어로 이루어진 논리학과 인식론, 그리고 존재론을 획득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네그리의 주장은 관념론과 뒤섞여있는 정통 맑스주의의 유물론으로부터 맑스의 유물론를 구하고자 하였던 알튀세르의 작업의 연장선상 속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알튀세르는 그의 이론적인 작업을 통해 진정한 유물론은 기계론적인 경험주의와 목적론적 관념론과의 연속성 속에서, 즉 동일한 척도와 언어, 방법론을 가지고 보다 우월한 형태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들과는 필연적으로 불연속적이며 단절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또한 그의 후기 사상에서 알튀세르가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에 대한 독해를 통해 발전시킨 “우발성의 유물론”은 네그리가 말하려는 “유물론적 목적론”과 여러 모로 닮아 보인다.
-유물론적 목적론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유물론적 목적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는 형용모순이거나, 이율배반이 아닐까? 세계가 물질로만 이루어져있다는 유물론과 세계가 미리 정해진 방향과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는 목적론이 어떻게 화해되고 종합될 수 있을까? 네그리에 따르면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유물론과 목적론에 대한 기계론적이고 초월적인 정의에만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는 유물론은 사실 진정으로 유물론적인 것이 아니라 다만 기계론적 유물론의 후예이며, 또한 목적론이라는 것도 다름아니라 초월적이고 관념론적인 목적론이라는 것이 네그리의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기계론적 유물론과 초월적 목적론은 명시적으로는 상호배타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결국 서로를 필요로 한다.
-일찍이 파스칼은 데카르트의 완벽한 기계론적 세계는 “항상 신이 ‘살짝 등을 떠밀어주는 것’이 필요”(p.216)하다고 비꼬았는데, 이는 초월적인 목적론과 기계론적 유물론의 암묵적이지만 또한 필연적인 ‘담합’의 관계를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담합’관계는 근대의 시작과 함께 자본주의와 주권을 신비화하고 찬양하는 논리로, 그리고 나아가 권력작용의 일정한 부분을 담당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근대 혁명사상과 유물론 자체까지도 오염되는 데까지 이르는데, 네그리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바로 이러한 관념론에 의한 유물론의 오염의 증거라고 본다. 이는 유물론자에게는 ‘실어증적 상황’인 것이다(p.14).
-사실 기계론과 목적론간의 담합, 혹은 조화로운 관계를 지적한 것은 네그리나 알튀세르가 처음은 아니다. 이미 맑스 또한 고전 경제학파의 경험주의와 헤겔의 관념론을 동시에 비판했으며, 철학과 사회과학의 외부에서는 생물학자들이 이 문제에 몰두하였다. 왜냐하면 진화와 같은 생명계의 특유한 현상은 기계론과 목적론 모두에 의해 그에 대한 합리적 설명이 봉쇄되기 때문이다.
-특히 고전적 물리학의 모델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기계론적 세계관은 여러 가지 변형을 낳으면서 20세기에 들어서도 자연과학의 정체성을 규정해왔으며, 과학철학의 모든 논의를 진행하는데 있어서 모범적인 모델로 받아들여져 왔다는 것에 생물학자들은 비판의 초점을 맞추었다. 그들은 물질세계가 기계론적이며 무력하다는 생각과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물질세계에 창조성을 부여하는 목적론적 힘이 ‘요청’되어야 한다는 생각 모두를 거부하면서 물질세계 자체에 존재하는 가변성과 창조성을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물질개념을 혁신함으로써, 물질세계를 초월한 창조성의 근원을 찾을 이유가 결코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생물학자들은 생물학의 경험과학으로서의 지위의 문제에 자신들의 발견의 성과를 제한함으로써 다른 가능성들을 봉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생물학자들의 에피소드는 최소한 두 가지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첫째 기계론(실증주의)과 목적론(보편적 진리의 철학)에 대한 비판은 탈근대주의적 ‘담론 이론’이라는 유행의 산물이라고 간단히 기각될 수 없다. 이는 물질세계 자체의 문제이며, 그렇기 때문에 유물론적으로 정식화되어야한다. 둘째, 물질개념의 혁신, 즉 유물론의 재정식화는 바로 정치적이고 철학적으로 제기되어야 한다. 유물론은 단지 우주론적인 문제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카이로스, 시간의 측정불가능성
-이러한 유물론의 재정식화를 위해 네그리가 중요시하는 것은 바로 시간의 개념이다. 시간 개념의 정의는 물질 개념의 혁신에 선행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기계론적 유물론이 그랬듯이 물질에 대한 ‘연장’적 사고가 바로 시간에 대한 외연적이고 공간적인 표상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간을 ‘길이’로 표상하는데 익숙하다. 하지만 시간에 대한 외연적 사고는 우연히도 자본주의의 작동방식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유명한 말처럼 자본주의에서 “시간은 돈이다”. 그러나 사실 문제는 “시간이 어떻게 자본주의하에서 돈인가?”이다.
-맑스는 자신의 잉여가치 이론을 통해 이 질문에 정교한 답변을 내놓으려 하였다. 그리고 이 문제가 바로 네그리를 맑스주의의 논쟁 한가운데 위치시켰다. 네그리에 따르면 정통 맑스주의는 프랭클린의 정식을 단지 “시간은 가치이다”, 혹은 “가치는 측정되는 시간이다”로 바꿔 놓았을 뿐이다. 이는 맑스 자신의 설명 방식으로부터 유래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맑스는 가치를 외연적 시간인 ‘척도로서의 시간’에 의해 측정되는 것으로 설명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니어에 대한 비판을 포함한 <자본론>의 여러 구절들에서 시간이라는 ‘양’으로 표현되는 가치에 대한 외연적 접근은 잉여가치의 본질과 그 기원을 보지 못하도록 만든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있다.
-‘척도로서의 시간’은 이른바 과학적인 지위를 얻음으로써 자본의 착취에 대한 권리의 객관성을 보장해준다. 즉 1시간의 길이동안 타인의 노동력을 사용할 권리를 얻는 것의 객관성이 보장된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잉여가치는 그렇게 설명될 수 없다. 자본주의하에서는 원리상으로는 단 1초의 노동에 의해 생산된 가치도 잉여가치율에 의해 분할된다. 시간의 길이에 의해 이 분할을 설명하는 것은 단지 편의를 위한 것일 뿐이며, 이것을 본질적인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맑스 자신이 비판한 시니어의 사고방식으로 되돌아감을 의미한다. 오히려 잉여가치는 매순간 추출된다. 그리고 ‘척도’, 혹은 ‘연장’으로서의 시간 개념은 시간을 균일하게 분할함으로써 그것을 넘어서는 창조성을 잉여가치의 신비한 몫으로만 돌린다. 이는 ‘시간에 의한 공간의 절멸’이라고 이해되는 탈근대적 자본주의에서는 훨씬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연장으로 이루어진 시간에서는 창조적 사건이 발견”될 수 없다(p.62).
-이런 관점에서 시간은 단순한 길이와 지속으로서만 정의되기 때문에 그 내적인 논리라는 것은 제거되어 버리고, 시간을 지배하는 논리는 언제나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결국 외연적으로 정의된 시간 개념은 자본주의판 ‘제논의 역설’을 만들어 낸다.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 잡을 수 없는 것처럼 물질적 생산의 창조성은 척도로서의 시간을 넘어설 수 없다. 하지만 이 ‘역설’은 외연적인 시간관을 가능한 한 가장 비현실적인 형태로 그 극단까지 밀고 나간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어떤 진실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준다. 즉 “순간만이 존재론적으로 현실적”이고 또한 생산적이라는 것이다(p.58).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필연적으로 “시간의 유물론”, 혹은 “물질의 시간성”이라는 개념에 도달하도록 만든다. 이때 시간은 ‘길이’가 아니며 물질은 시간성에 의해 ‘운동’으로만 이해되어야 한다.
-네그리가 자신의 고유한 ‘시간의 유물론’을 구성하기 위해 발견한 것은 서양 철학 전통에서의 ‘카이로스’라는 시간 개념이다. ‘카이로스’의 관점에서 시간은 화살을 쏘는 것이며 순간으로서의 현재는 바로 이러한 비가역적인 궤적을 그리는 화살촉의 끝이다. 이 화살촉의 끝은 과거와 미래 사이의 불연속적인 순간을 지칭한다. 즉 이러한 시간관에서 미래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것으로, 과거는 이미 실현된 것과 같이 봄으로써 과거와 미래를 동질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 없다. 만일 과거와 미래가 하나의 연속된 흐름이고 현재(순간)는 이 둘 사이의 단순한 가교라면, 이 흐름은 이미 목적이 그 기원에서 정해진 것이거나, 기원에 대한 동어반복, 둘 중에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와 달리 카이로스는 “순간의 목적론”이며 “사건의 텔로스”이다(p.53).
-이렇게 이해될 때, 시간은 곧 ‘이전’과 ‘이후’ 사이의 “생산의 측정불가능성”이다(p.74). 이 ‘측정불가능성’은 ‘측정가능성’의 부정으로서의 ‘막연하거나 불확정적인 것’이 아니며, 그런 점에서는 진정으로 측정자체가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의 잉여가치의 존재는 이 순간의 ‘측정불가능성’과 ‘측정가능성’ 모두를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잉여가치는 생산이 반드시 ‘측정가능성’에 종속되었을 때에만 추출될 수 있는 것이지만, 또한 척도로서의 시간을 넘어서는 ‘측정불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생산 자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 혹은 다중
-이 단계에서 네그리의 유물론적 목적론은 아직은 충분히 정치적인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바로 그것을 실천하고 구성하는 주체성으로서의 ‘가난한 사람들’이 이야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그리에 따르면 자본주의, 특히 그것의 탈근대적 단계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바로 유물론적 목적론을 실천하는 ‘전위’이다(*개인적으론 이 대목이 눈길을 끌어서 <혁명의 시간>을 읽어볼 생각을 갖게 되었다. 지난 2004년 모스크바에서부터). ‘가난한 사람들’은 대중의 자생성을 상징하는 것도 아니며, 그들을 ‘전위’라고 부를 때에도 그들이 레닌주의적 당에 부여되는 ‘의식성’을 표상하기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이 전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한나 아렌트가 1943년에 망명자들이야말로 자신들의 인민의 ‘전위’라고 말했던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일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자본주의적 폭력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이러한 폭력에 노출된 ‘벌거벗은 삶’이기 때문에 그들이 전위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들은 전위이기 때문에 이러한 폭력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아렌트가 말했듯이 국가로부터 탈출하는 망명자들이 국민으로서 주권에 종속된 인민들의 전위인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은 노동자로서 자본주의의 부에 종속된 대중의 전위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위란 공간적인 의미에서의 ‘외부’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국가의 내부적인 망명자들(국민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했으나 여전히 공간적으로는 그 국가 내부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존재가 증명하는 것처럼, 그리고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망명한 사람이 ‘국가’ 자체의 외부에 도달한 것은 아닌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은 자본주의 내부의 ‘망명자’들이다. 탈근대적 자본주의하에서 빈자는 배제되기는 하지만 “이 배제는 세계의 생산 ‘내부에서’ 일어난다”(p.138).
-네그리가 ‘가난한 사람들’을 혁명적인 주체성으로 제시하는 것은 그들이 ‘곤궁, 무지, 질병’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가난하기 때문에 “완전한 의미에서의 삶정치적 주체”(p.130)이며, 그렇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 이미 죽음을 극복한 사람”(p.135)들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네그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집합적 실천과 구성의 테크놀로지를 통해 ‘공통적인 것’의 생산에 참여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삶의 가치와 공통적인 것의 부정은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이며 자본주의적 폭력이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들이야말로 자본주의와 실질적인 적대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거꾸로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러한 '적대관계'를 얘기하는 건 겉멋이거나 자기모순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전위로서 선언하는 것은 정치철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들은 주권 이론의 역사에서는 바로 ‘다중’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가난한 사람들’이 자본주의적 부의 외부와 너머의 주체성을 지칭하는 것처럼, ‘다중’은 근대적 주권의 초월성과 마찬가지의 관계를 가지는 주체성을 지칭한다. 그런데 이러한 주권과 그 이론의 역사에서 네그리가 비판의 초점을 맞추는 것은 홉스나 루소, 혹은 헤겔이 아니라 베버와 슈미트이다. 홉스, 루소, 헤겔은 이미 지나가 버린 주권 역사의 이론가들이다.
-이들과 달리 20세기초의 베버와 슈미트는 모두 국가가 경제적이고 법적인 합리성에 종속됨으로써, 19세기의 자유주의적 사회에 상응하는 헤겔적인 국가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으며, 그런 이유에서 국가 자체가 이제 진정으로 ‘주권의 초월성’의 장소가 될 수 없다는데 생각을 같이 하였다. 이러한 주권의 위기에서 이들이 탈출구로 생각한 것은 바로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이다. ‘정치적인 것’은 경제적인 것, 혹은 법적인 것과 구분되는 고유성을 갖는다. 그리고 이러한 고유성에 근거해서만 순수하게 자율적인 정치적 결정이 가능하다. 즉 정치적 결정의 초월적 근거가 보장되는 것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경제주의, 즉 자본주의적 합리성에의 종속으로부터의 탈출구를 찾던 동시대의 혁명이론과 실천은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이라는 것을 매우 결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른바 외부의 의식성, 혹은 자율적인 상부구조는 바로 이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의 다른 이름이다. 레닌주의는 경제의 외부만을 생각하고 주권의 외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으며 결국 경제적인 종속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과제를 주권에의 참여로 돌려놓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전위로서의 ‘가난한 사람들’이 자본주의적 부로부터의 탈출의 방향을 지시하며 또한 그것을 구성하듯이, 다중은 주권에의 참여와 “복종으로부터의 탈출, 즉 척도에의 참여로부터의 탈출”(p.195)이라는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
-네그리의 <혁명의 시간>은 생소한 철학적 개념들과 언어로만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현재의 자본주의에 대한 현상적인 기술에 치중했던 <제국>과는 달리 독해와 이해가 쉽지 않은 책이다. 게다가 저자의 말처럼 우리가 유물론자의 ‘실어증적 상황’에 빠져 있다는 것이 현실이라면 문제의 해결은 훨씬 더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의 타개가 절실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분명 읽어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06. 06.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