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구내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발견하고서 반갑고 놀라웠던 책은 데이비드 로웬덜의 <과거는 낯선 나라다>(개마고원, 2006)이다. 기분상으론 '횡재'한 느낌이었지만, 거저 책을 얻은 것도 아니고 다음을 기약하면서 얌전하게 두고온 책이니 야단스레 떠들 일은 아니겠다. 그럼에도 반가운 마음이 다 가시지 않는 것은 재작년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어본이 나온 걸 눈여겨보았고, 연말에는 즐겨읽던 일간지의 '엑스 리브리스'에서 역사부문 '올해의 책'으로 꼽기도 했었기 때문에(<치즈와 구더기>의 저자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책과 함께) '눈도장'을 확실하게 찍어둔 까닭이다. 아래가 러시아어본이다.

Cover. Прошлое - чужая страна. Пер. с англ. Лоуэнталь Д.

 

 

 

 

 

 

 

해서 저자나 책의 지명도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하면서도 내겐 읽어볼 만한 '대단한 책'으로 각인됐고, 귀국한 이후에 원서를 구해볼 생각을 했었다. 그게 어쩐 일로 흐지부지 됐는지는 모르겠지만(아마도 책의 두께와 만만찮은 가격이 걸림돌이었을까? 하드카바의 러시아어본도 상당한 고가의 책이다). 그러던 차였으니까 아무런 예고없이 출간된 국역본이 조금 과장하자면 잃었던 혈육을 되찾은 것 같은 '감동'을 전해준 것도 무리는 아니겠다. 어정쩡하게 시중에 깔린 탓에 지난주 리뷰들에는 다 빠졌지만, 아마도 이번 주말 북리뷰란들에는 큼지막한 서평들이 실린 것이다.  

하지만, 책에 관해서라면 그다지 여유로운 성격이 못되는 나는 이곳저곳에서 책에 관한 정보들을 수집하려고 했고, 아직 알라딘에 충분한 책소개가 제시되어 있지 않으므로 다른 곳에 있는 책소개라도 여기에 옮겨놓는다(출판사측 리뷰인 듯한데, 알라딘에는 왜 빠져 있는지 모르겠다). 나로선 코젤렉의 <지나간 미래>(문학동네, 1998)와 함께 올여름의 끝무렵에 읽어볼 책으로 꼽아두고 있는 책이다(좀 여유가 있다면, 홉스봄의 <만들어진 전통>을 대출해서 읽어보아도 좋겠다).

 

 

 

 

-과거는 왜 낯선 나라인가? 19세기까지만 해도 서구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거를 현재와 유사하다는 가정 아래 규정하고 판단했다. 즉 인간의 본성은 항상 불변하는 것으로 가정되었고, 중요한 사건들도 항상 유사한 동기나 열정에 의해 촉발되는 것으로 가정되었다. 하지만 저자는 사실 과거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낯선’ 영역이라고 주장한다. 과거의 삶은 지금의 삶과는 아주 다른 존재방식과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가 낯선 나라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과거에 대한 인식이 확대됨에 따라 사실상 과거가 계속해서 변화하기 때문이다. 즉 각 시대의 요구에 따라 과거가 변화하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과거는 사실상 있는 그대로의 과거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과거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낯선 나라이기 때문에 인지될 수도 판단될 수도 없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불변하고 고정된 과거가 아니라 우리와 상호작용하며, 과거와 현재가 융합하는 유산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자가 ‘과거는 실재하지만 실제로는 있는 그대로 알려질 수 없으며’ ‘현재에 의해 끊임없이 재해석된다’고 말한 관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더 나아가 그는 재해석된 과거가 과거의 진실을 전복시키기보다는 과거의 의미를 이해하고 과거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과거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재로 부활한다. 이 책의 1부에서 논의되었듯이 과거는 우선 선택적으로 이용된다. 과거는 현재를 비옥하게 하는 유산으로서 혜택을 주기도 하지만 현재를 억압하거나 과거의 악행이라는 족쇄를 현재에 채우기도 한다. 따라서 현재의 우리는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과거는 과장하고 확대하기도 하며 우리에게 위협을 가하고 해를 주는 과거는 축소하거나 삭제하기도 한다.

-이렇듯 과거 인식과 이용의 기본 태도에서부터 우리는 과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과거의 개조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2부에서 논의된 것처럼 기억에만 의존하던 시대와 달리 역사가 씌어진 이후부터는 과거가 훨씬 믿을 만하고 확실해진 것처럼 보였지만, 역사 역시 해석자의 주관과 실제 일어난 일 사이의 간극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여기에는 현재의 필요라는 요구의 개입뿐만 아니라 과거의 사건 이후 연달아 일어난 이후의 새로운 사건을 모두 인지하고 있는 현재 서술자의 지적 혜택이라는 문제도 개입되어 있다. 또한 기억과 역사는 모두 과거로부터 살아남은 물질적 흔적들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는데, 유물 역시 그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과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과거를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끊임없이 개조하고 변형시키는 것일까? 이는 기본적으로 3부에서 논의된 것처럼 과거가 현재에 가져다주는 분명한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는 과거가 ‘합의된다’고 느껴진다고 말한다. 과거는 아주 일차원적으로는 개인의 향수를 달래주고 안정감을 제공하기 위해, 더 나아가서는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이나 우월성을 담보하기 위해, 그 목적에 맞게 합의되고 개조되는 것이다. 게다가 훼손된 과거를 원형 그대로 복원하고 보존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주장할 때조차도 사실상 현재의 방법론으로 과거를 조작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렇듯 재해석된 과거는 조금의 진실도 담고 있지 않은 것으로 폄하되어야 하는 것일까. 저자의 결론부터 언급하자면 ‘아니다’이다. 저자는 역사가 다시 기록되듯이 과거가 현재의 지식과 가치가 변함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피한 일이라고 결론짓는다. 왜냐하면 그에게 과거는 불변하는 전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속되는 기억, 역사, 유물의 누적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누적물이라는 개념은 그것들이 시간을 관통해오면서 사람들에 의해 변화되고 개조된 부분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저자는 과거가 그것을 만들어낸 자들뿐 아니라 이를 물려받은 사람들의 증거이며, 과거의 정신뿐 아니라 현재의 전망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과거는 낯선 나라다. 현재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낯선 나라이기도 하며, 또한 현재에 의해 끊임없이 재해석되어 부활하기 때문에 낯선 나라이기도 하다. 과거가 변화한다는 사실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역으로 그러한 과거는 또한 우리를 구속하는 과거의 신화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도 있다.

-이는 단지 과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주장처럼 현재와 미래의 전망을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이렇듯 끊임없이 변화하며 현재로 부활하는 과거는 과거에 대한 일방적인 의존을 떨쳐내는 데 이바지하며 자유롭게 선택된 미래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결론 부분을 저자는 이렇게 끝맺는다. “우리가 물려받은 것도 결국 변형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만 비로소 과거를 풍성하게 사용할 수 있다. 선조들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존중할 만한 가치가 있지만, 단순히 보존되기만 하는 세습된 유산은 견딜 수 없는 부담이 된다. 과거는 길들여짐으로써―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을 용인하고 기뻐함으로써―가장 잘 이용된다.”

06. 06. 28.

P.S. 주말 북리뷰들을 훑어봤는데, 국민일보와 한국일보 등만이 <과거는 낯선 나라다>에 대한 서평을 싣고 있다. 이 중 한국일보 안준현 기자의 리뷰를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6. 07. 01) 과거는 낯선 나라다 '변화하는 과거 자유로운 미래'

-이승만, 박정희 시대는 우리에게 어떤 과거인가. 공산 독재를 막은 ‘자유민주’ 국가의 수립기이자 숙명 같은 가난을 떨쳐낸 경제 건설의 눈물 나는 여정이었을까. 아니면 친일파와 손잡고 분단을 이끈 원통한 세월이자 장기 집권을 위해 인권과 노동을 짓밟은 암흑 같은 독재의 시기였을까.

-미래는 불확실한 것이지만 과거는 이미 실재했던 확실한 대상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미래는 다양한 예측의 영역인 반면, 과거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고정불변의 객관적 실체를 가진 확실한 기록으로서, 단 하나의 올바른 해석이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이승만 박정희 시대를 평가하는 우리 사회의 날선 대립도 이런‘고정불변의 과거, 올바른 진리’라는 사고의 맥락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과거는 곧잘 이용 대상이 된다. 사람들은 과거에서 현재를 비옥하게 하는 유산을 발견하기도 했지만 현재를 억압하는 족쇄를 얻기도 했으며, 이익이 되는 과거는 과장 확대하고, 해를 주는 과거는 축소 삭제해 왔다.

-하지만 과거 역시 미래처럼 변화의 가능성이 늘 열려 있는‘낯선 나라’라는 게 저명한 지리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방대한 인문학 지식과 깊은 성찰로‘그리워하고, 돌아보고, 변형시키는’, 인류와 과거의 관계 맺기를 탐구한다. “과거는 아주 다른 존재 방식과 사고와 믿음의 세계이며, 우리가 걸어온 길이되 현재와 단절된 세계이다.”

-특히 향수(노스탤지어)가 일종의 소비산업이 되고, 박물관, 역사테마공원, 유적 등이 관광지가 된 현대에서 과거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저자는 ‘과거 바라기, 과거 알기, 과거 변화시키기’의 세 주제로 과거에 접근한다. ‘과거 바라기’는 소설과 영화, 17~18세기 영국 프랑스, 빅토리아시대 영국, 남북전쟁 전후 미국 등의 구체적 예를 들어가며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심리를 파고든다. “과거는 어떻게 우리를 풍요롭게 혹은 빈곤하게 하는가.

-우리는 왜 과거를 포용하기도 하고 멀리하기도 하는가.”‘과거 알기’는 과거에 대한 지식과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기억, 역사, 유물’이라는 세 경로를 통해 고찰한다. ‘과거 변화시키기’는 과거를 인지하는 행위 그 자체가 과거를 변화시킨다는 묘한 역설을 얘기한다. 현대 미국 영국에서의 과거 유산 복원이나 개조 움직임 등을 통해 인간이 과거를 어떻게, 왜 변화시키며, 그런 변화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핀다.

-저자의 결론은 과거는 계속 변화한다는 것이다. 과거는 각 시대의 요구에 따라 변한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과거는 있었던 그대로의 과거도, 미래에 볼 과거도 아니다. 과거는 어떤 시기 특정한 사건을 넘어서는 연속적인 기억과 역사와 유물의 누적물이며, 이 점에서 우리를 ‘구속하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대한 선택 가능한 전망을 제공하는 ‘자유롭게 하는’과거가 된다. “과거라는 누적물은 그것들이 시간을 관통해 오면서 사람들에 의해 변화 개조된 부분까지 포함한다. 과거는 그것을 만든 자들뿐 아니라 물려받은 사람들이 있다는 증거이며, 과거의 정신 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전망의 증거다.”

-1985년 출간된 이 책은 국내 책에도 여러 번 인용되는 등 명저로 통했지만 방대한 분량과 쉽지 않은 내용 탓인지 지금까지 번역에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경희대 인문학연구원 전임연구원인 역자들은 후기에서 “다양한 자료와 지식에 매혹되어 논점을 잃는 경우도 허다할 것”이라며, “끝도 없이 고유명사를 제시하며 새로운 지식을 강요하는”이 책을 다 읽는 것은 ‘인내심’을 요구하는 ‘긴 여정’이 될 것이라고 했다(*아무도 나서지 않는 번역으로의 긴 여정에서 돌아온 역자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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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과거라는 이름의 외국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5-17 08:17 
    원로 문학평론가 유종호선생의 비평에세이집이 출간됐다. <과거라는 이름의 외국>(현대문학, 2011). 제목이 좀 낯익은데, 역사학자 데이비드 로웬덜의 <과거는 낯선 나라다>(개마고원, 2006)를 떠올려주기 때문이다. 둘다'The Past is a Foreign Country'를 옮긴 것으로 보인다. 기사를 보니 L. P.하틀리의 소설 <중개인>에 나오는문장이라고(로웬덜의 책은 장서용으로 구입만 해놓고 읽진 않았다). 이

최근에 나온 국내 철학서들 가운데 가장 묵직한 책은 아마도 이상인 교수의 <플라톤과 유럽의 전통>(이제이북스, 2006)일 것이다. 지난주 대부분의 언론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책인데, 여기서는 경향신문에 게재된 김재홍 연구원의 서평을 옮겨놓도록 한다. 예전 같으면 언론사 리뷰들을 알라딘에서도 읽고 참조할 수 있었는데, 새삼스럽지만 그게 법적으로 불가능하게 된 모양이고 이젠 손품을 좀 팔아야 한다. 리뷰/서평의 유익이란 그 책이 읽을 만한가, 읽을 만하다면 언제쯤 읽을 것인가 등을 가늠하도록 해준다는 데 있다. 그건 '프리뷰'의 가장 중요한 취지이기도 하다.  

 

 

 

 

경향신문(06. 06. 24) 고대철학의 오해-왜곡-재해석

-‘플라톤 이래로 서양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각주(脚註)다.’ 영국의 철학자 화이트헤드의 말이다. 에머슨이란 시인은 단적으로 ‘철학은 플라톤이고, 플라톤은 철학’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서양 사상이나 철학 관련 책을 펴놓고 읽다 보면 ‘플라톤’이란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책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어쩌면 유럽 철학 전통 자체가 ‘플라톤적’인지도 모른다. 유럽적 사유의 전통에서 플라톤이 차지하는 위치는 그만큼 중요하고, 그를 통하지 않고는 서양 사상을 논할 수조차 없다. 정작 문제는 그렇게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플라톤이라는 거대한 봉우리를 오른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서양을 바라볼 때, 유럽적 사유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는 오늘날 우리 문화 전반에 깔려 있는 유럽적 사유의 본질적 현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과연 유럽적 사유의 실체는 무엇일까?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본래의 사고 토양을 고대 그리스·로마로 놓고 그들의 사유의 뿌리를 찾으려 했다. 서양을 극복하려면 유럽적 사유체계를 이해해야만 한다. 오늘의 유럽인을 유럽인으로 만든 유럽적 사유의 전통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적으로 플라톤을 봐야 한다(*즉, 유럽적 사유 -> 그리스/로마 -> 플라톤으로 수렵된다는 것).

-지금까지 우리는 늘 유럽적 사유의 뿌리를 유럽인의 근대적 시각을 통해서 바라봐야만 했다. 우리의 ‘고유한’ 시각은 어디에 있었나? 이제는 플라톤을 해석한 근대의 철학자들의 관점을 넘어 ‘플라톤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플라톤을 ‘전근대’라는 전통 속에 가두지 않고 우리의 눈으로 플라톤 그 자체를 보기 시작하는 것이며, 우리의 시선으로 플라톤을 해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유럽인의 눈을 통해 플라톤을 해석하는 작업도 멈춰야 한다. 이제는 우리의 ‘고유한’ 시각으로 플라톤을 바라 볼 때가 됐다.

-누군가 우리와 같은 고전 학자들을 향해 “가라사대 철학”이라고 평가절하하는 발언을 했다. “누군가가 말하기를”이라고 하지 않고도 철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플라톤을 말하지 않고 어떻게 서양 철학을 논할 수 있단 말인가? 고전을 전공하는 어느 선생님은 “고전을 공부하기 위해선 10년가량 면벽(面壁)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만큼 어려움이 있다는 얘기이다.

 

 

 



-서구적 사고의 원천인 고전 그리스 사유의 중심에 선 플라톤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의 저서를 읽는 것이다. 아직 플라톤 원전에 대한 온전한 우리말 번역이 다 나와 있지 않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몇몇 작품만이 제대로 번역돼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플라톤 원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서가 등장하기란 어렵다. 그렇다고 고전 전문가들이 원전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했다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근대의 자기이해와 고대의 해석’이라는 프로젝트의 영향 아래 구상되고 저술됐다. 이 책은 거대한 학문적 꿈을 가지고 있다. 고전을 지난 시대의 ‘전근대’라는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고, 오늘의 관점으로 동시적으로 바라보려는 태도가 그것이다. 저자의 원대한 학문적 꿈은, “고전학자는 과거의 대양에서 현재의 ‘그물’만으로 작업해서도 안 되고, 현재의 ‘그물’과 구별되는 과거의 ‘그물’을 찾아내고, 그것을 이후에 짜인 ‘그물’과 더불어 미래의 철학의 법정에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 학문적 꿈을 실현하기 위해 저자는 그리스인들이 큰 축으로 삼았던 ‘지각과 이성’ ‘인식과 방법’ ‘경험과 과학’ ‘개인과 국가’라는 네 가지 얼개를 제시한다. 이를 바탕으로 현상을 구제하고, 세계를 해석하는 방법을 플라톤 철학의 문제 제기와 해결 방식을 통해 해명하고자 한다. 이런 연구 작업을 통하여 근대의 ‘역사적’ 고대 해석 경향을 넘어 고대의 ‘철학적’ 자기 이해를 규명하려는 학적 야심을 전개해 가고 있다. 네 얼개로 구성되는 일련의 작업이 5개의 장으로 나누어져 제1장인 고대와 근대로부터 출발해서 각 장에서 별도로 논의되고 있다.

-이 책은 이러한 논의를 통해 유럽적 사유의 전통을 플라톤으로 대표되는 고대 철학에서 찾고자 시도한다. 고대의 관점에 따라 재단된 ‘고대 철학 고유의 모습’을 드러내고, 역사적 연속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려진 잘못된 규정을 통해 고대가 어떻게 오해되고 왜곡됐는지를 밝혀내고 있다. 저자는 이 연구를 통해 ‘서양 고대’를 도식적인 해석으로부터 구제하고, 고대 철학을 다시 현대의 철학으로 만날 수 있는 방식을 제기하고자 한다.

-저자의 학적 능력이 되는 독서는 플라톤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 이전부터 시작해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 신피타고라스주의, 히포크라테스, 그리고 근대 헤겔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영역에 학적 역량이 미치고 있다. 이렇다 보니 책의 부피도 만만치 않다. ‘큰 책은 큰 악(惡)’이란 말이 있지만, 저자의 작업에는 큰 책만큼 큰 악은 없고, 작은 악만이 있을 뿐이다. 독서하기가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저자의 날렵한 필치가 유럽적 사유를 좇는 그의 날카로운 시선에 머물도록 독자를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김재홍|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선임연구원)

06. 0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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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자 이메일로 배달된 '창비주간논평'에서 문학평론가 김영찬의 '괴물의 정치학이 문학에 들려주는 이야기'를 옮겨온다. 페이퍼의 제목은 '괴물의 정치학'으로 줄였다. 처음 타이틀만 보고서는 봉준호 감독의 신작 <괴물>을 떠올렸지만, 그건 아니었다. 하긴 아직 개봉하지도 않은 영화에 대한 이야기일 리는 만무하다. 아무튼 2000년대 중반 한국문학과 문화의 한 트렌드를 읽는 데 도움을 주는 유익한 논평이다.

 

 

 

 

-박찬욱의 영화 <올드보이>에서 우리의 오대수는 말한다. "나는 이미 괴물이 되었다." 비단 오대수뿐인가. 이것은 최근 파괴적인 욕망과 충동에 속수무책으로 휩쓸리거나 파국으로 치달아가는 한국영화 주인공들의 공통된 자기선언이다. 그러고 보면 일찍이 "괴물은 되지 말자"고 반복해 다짐하던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 주인공의 호소는 이들에겐 전혀 먹혀들지 않았던 듯하다. 과연 그렇다. 최근 한국영화의 일각에는 괴물들이(혹은 괴물이 되어가는 자들이) 성업 중이다.



-가령 <올드보이>를 포함한 박찬욱의 복수 3부작은 모두 복수의 괴물이 출연하는 비극이고, 김지운의 <장화, 홍련>과 <달콤한 인생>은 저도 몰래 우연히 맞닥뜨린 불가항력적인 절망의 고통에 죄의식과 분노를 토해내며 괴물이 되어가는 자들의 이야기다.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과 장준환의 <지구를 지켜라>의 인물들 또한 치유되지 않은 80년대의 상처를 짊어지고 편집증적 괴물이 되어간다. 그러니 이쯤에서 물어보자. 대체 이 난데없는 괴물들의 출현은 어찌된 일인가?

-일단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모두 상업적 대중영화의 상상력과 문법을 빌려 작가의식을 실현했다는 데 있다. 최근 한국영화 속의 괴물은 그렇게 작가주의가 호러와 범죄물 같은 대중적 장르영화의 과잉의 상상력을 끌어들여 빚어낸 형상이다. 더욱이 그 괴물의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것이 스크린 가득 흘러넘치는 피와 폭력, 화면구도를 과격하게 일그러뜨리는 불안과 공포, 격렬한 심리적 갈등과 분노의 분출이라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 당연하다. 통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일면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그런 측면에서 상업적 코드에 붙들려 있는 것이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여기에서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그 속에 은밀히 잠재한 정치적 환기력이다.

-정치적이라니. 뜬금없는 얘기 같지만 그렇지 않다. 따져보면 분노와 죄의식이 뒤범벅된 운명론적 비극의 드라마와 그것을 장식하는 과도하고 현란한 스타일을 통해 이들 영화가 은연중 헤집으며 건드리는 것은 최근 한국사회 현실의 모순 속에서 배태된 대중적 (무)의식과 공통감각의 성감대다. 저 괴물의 이야기를 통해 나름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 한국영화의 새로운 형태의 정치-윤리학 또한 저 자신의 방식으로 그에 대처하는 가운데서 나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는 이른바 비판적 작가주의 영화의 정치성이 이제 <박하사탕>이 대표하는 이창동식 리얼리즘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 영화의 정치적 함의는 역설적이게도 너무도 비현실적이고 그래서 당연히 탈정치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극단적이고 파국적인 상황(예컨대 근친상간이나 우주인의 침공)에서 분출하는 폭력과 뒤틀린 정념 속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너무도 극단적이기에 현실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들이다. 그 사건의 파국을 몸소 떠안고 파멸로 치달아가는 괴물들의 일그러진 정념과 무력한 몸부림을, 이들 영화는 극단으로 밀어붙인다.



-중요한 것은 저 사건들의 치명적인 파장과 갈등은 불가항력적이고, 해결할 수도 없으며, 화해는 더더구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러니 당연히 감정은 격해지고, 파국은 숙명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것이 이와 반대로 역사와 현실의 계기들을 이야기에 끌어들이면서도 그 속의 위기와 갈등을 결국은 낭만적인 화해를 통해 봉합해버리는 <웰컴 투 동막골>이나 <태풍>류의 영화언어와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 것인지도 여기서 함께 기억해두자. 여하튼 그럼으로써 이들 영화가 은유적으로 드러내놓는 것은, 지금 한국사회의 근원에 숨어 가로놓여 있지만 지배질서와 지배언어 속에서는 결코 포섭할 수 없고 해결할 수도 없는 적대적인 갈등과 결여, 절망적인 심리적 위기와 교착이다.

-이 근저에 있는 것이 포스트-IMF시대의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심리적 불안과 위기라는 점은 필히 덧붙일 필요가 있겠다. 그것은 이를테면 희망과 가능성이 질식된 시대의 심리적 풍경이다. 한국사회의 일상과 씨스템을 재구조화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지배와 그로 인한 양극화의 고착과 심화는 가령 독재나 IMF위기의 시기에 그러했듯 그렇게 눈에 보이는 장애를 극복하면 무언가 나아지리라는 역설적인 희망을 갖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린 듯하다. 독재는 사라졌고 경제위기는 극복했음에도 무언가 나아지기는커녕 삶의 조건은 한없이 악화되어가고 나날의 삶을 옥죄는 자본의 지배와 모순은 더욱 심화되어간다는 실감이 지금의 공통감각이다. 하물며 그것이 대중들이 막연히 민주주의세력 혹은 '진보'라고 생각했던 집단에 의해 가속화되고 있음에랴. 미래는 여기서 결코 더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숙명론과 체념적인 인식은 그런 가운데 나오는 것이다.



-한국 작가주의 영화의 비판적 정치의식이 그렇게 극단적인 과잉의 상상력을 통해 표출되는 것은 정확히 이런 현실에 조응한다. 불가항력적이고 해결할 수도 없는 절망적 상황에 휩쓸려 괴물이 되어가는 인물이 맞닥뜨리는 치명적인 위기와 곤경은, 해결될 가망이 보이기는커녕 근원에서 악화되어가는 한국사회의 실패와 결여, 적대의 지점을 헤집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비극적인 우연과 불확실함이 지배하는 폐쇄된 세계, 그 속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악순환, 스스로 괴물이 되어 파멸로 치달아가는 인물들의 절망적인 심리, 치명적인 죄의식과 원한 등은 그런 실패와 적대 속의 주체의 불안과 위기를 응축하고 전시하는 영화적 증상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조금 다르긴 해도 최근 한국문학에서 부각되는 탈현실적인 허구 속에 스며 있는 신경증적 불안과 폐소공포, 절망적인 파국과 죽음의 이미지, 극단적인 환상의 문법 등을 그와 방불한 맥락에서 읽고픈 유혹을 느낀다. 물론 여기에는 똑같은 시각에서 볼 수만은 없는 장르와 세대의 차이, 정치의식의 편차 등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 게다가 현재 한국문학에는 현실에 대한 민감한 감각에 뒷받침된 문학의 정치적·윤리적 책임의식과는 무관하게 자아에 고착된 자폐적인 실험에 안주하는 소설이 일부 어지럽게 뒤섞여 있다. 그렇다면 예컨대 편혜영의 죽음과 악취의 미학이나 박민규의 장편 <핑퐁>이 보여주는 놀랍도록 음울한 종말의 환상은 어떤가?

-이 물음에는 짐작하다시피 얼마간의 긍정과 부정이 섞여 있다. 하지만 친절한 대답과 해명은 이 짧은 글에서는 불가능하니 일단은 뒤로 미루고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 우리가 이들 한국영화에서 적극적으로 읽어야 하는 것은 이런 물음이다. 결코 일어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어나는 저 끔찍한 상황을, 결국은 나 자신일지도 모를 저 괴물-타자들을 대체 어찌할 것인가?

 

 

 



-이런 물음이 일깨우는 것은 다름아닌 이를 제대로 사유하고 감당할 수 있는 정치와 윤리의 언어가 우리에겐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는 사실 그 자체다. 물론 앞서 본 한국영화의 정치-윤리학은 아직은 모호하고 또 일면 타협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 영화가 그런 불안과 위기를 봉합하거나 섣불리 화해시키지 않는 한, 그것은 바로 그 속에서 새로운 정치와 윤리의 지점을 새로운 언어로 숙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다. 영화에서도 그렇지만 한국문학에서도 그것은 아직 잠재적인 가능성일 뿐이다. 하지만 기왕에 탈현실의 허구를 끝까지 밀고 나가기로 작정한 문학이라면, 그 점은 한국문학이 한켠에서 열어가야 할 또다른 방식의 새로운 정치와 윤리의 언어를 위해서도 마찬가지로 함께 기억하고 탐구해야 할 지점이다.

06. 0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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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6-06-28 08:49   좋아요 0 | URL
울며 겨자먹기이든 자발절 동의이든 우리 사회가 탈출구가 없는 강박의 벽에 휩싸여 있다는 생각에 공감이 갑니다.불안과 위기의식,분노 등이 영화에서 어떤 형태로 외연화되고 있는 지 생각해 볼 내용인 듯 합니다.영화적 상상력이 실생활에서 그대로 구현되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 속 인물들이 보여주는 강박과 불안이 이미 우리 안에도 자리잡고 있음을.....

로쟈 2006-06-28 15:19   좋아요 0 | URL
개별 텍스트를 들여다볼 때는 잘 드러나지 않는 점들이 좀 거리를 두고 모아놓으면 보일 때가 있는 듯합니다. 비평은 그렇게 좀 보여주는 역할을 해야지요...

비자림 2006-07-01 21:59   좋아요 0 | URL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더 희망적인 영화, 더 긍정적인 영화를 기다려 본답니다. 우리 사회의 최근 세태, 한국인의 심리 기저를 반영한 것이 영화로 탄생되었겠지만 영화가 다시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도 큰 것 같아요. 특히 조폭이 많이 등장하고 더 화끈한 장면을 연출하다 보니 더 잔혹한 장면들이 많이 나오는 것 같아 어떨 땐 이걸 보는 십대들의 정서가 걱정된답니다.

기사와 다른 생뚱한 이야기 늘어놓아 죄송합니다. ^^

로쟈 2006-07-01 22:13   좋아요 0 | URL
기사를 보니 <가족의 탄생>이 영화담당 기자들에게 상반기 최고작으로 꼽혔더군요. 말씀하신, '더 희망적인 영화, 더 긍정적인' 영화에 속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십대들의 정서'를 걱정하시는 모습에서 비자림님의 연배가 얼추 짐작되는데요.^^

비자림 2006-07-01 22:39   좋아요 0 | URL
앗, 저는 왜 이렇게 잘 들키는 지 모르겠어요.
제 나이는 스물아홉인데 로쟈님은 서재이미지로만 봐서는 알 수가 없군요. 끌끌
(정서연령 스물아홉, 정신연령 열아홉, 지식 연령 아홉, 호호호 이 지적이고 진지한 로쟈님 서재에서 까불어서 죄송합니다.)

로쟈 2006-07-01 23:41   좋아요 0 | URL
'호호호'라고 웃으시니까 확실히 여성이시고, '스물아홉'이라고 하시니까 최소 열살 이상 더 얹으면 되겠군요.^^
 

안토니오 네그리와 조르지오 아감벤, 두 이탈리아 철학자의 책들을 읽어보는 것도 올해 내가 갖고 있는 계획 중의 하나이다(그들의 모든 책들 갖고 있는 건 아니지만 주요 저작들은 구해놓은 지 오래다). 언제나처럼 이 계획도 '계획서'라는 평면을 넘어서는 게 쉽지 않겠지만, 여하튼 나는 내 여력이란 그물망 너머로 일단은 집어던져 보고자 한다(걸리면 하는 수 없는 것이고).

일단 네그리와 관련하여 내가 책상에 올려놓은 책은 아래의 다섯 권이다. 윤수종 교수의 소개서 <안토니오 네그리>(살림, 2005)를 제외하면 모두 번역서이고 이 책들의 영역본들도 최근에 모두 구했다(<제국>은 원저가 영어본이며 이 원서는 번역본이 나오기 전에 마스터본이 돌아다녔고 나도 그때 구했다. 참고로, <제국>의 러시아어본은 재작년에 출간됐다).

 

 

 

 

'네그리가 말하는 네그리', <귀환>과 <안토니오 네그리>를 읽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고, <혁명의 시간>(갈무리, 2004)부터는 좀 공을 들여야 할 듯하다. 여기서는 워밍업 차원에서 출간 당시의 서평만을 일단 먼저 읽어보기로 한다. 홍철기씨의 "'가난한 사람'들의 혁명적인 유물론을 위하여"가 그것인데, 월간 <말>(2004년 7월호)에 실려 있으며 나는 자율평론 홈피에서 옮겨온다('자율평론'은 국내 네그리언들의 '아지트'이며 네그리 관련자료들을 다수 참조할 수 있다).  

자율평론 제9호(2004. 07. 07) 어떻게 가난한 사람들이 전쟁과 평화라는 이분법을 넘어서 전지구적 자본주의에서 인류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가? 이것이 <제국>(마이클 하트/안토니오 네그리, 윤수종 옮김, 서울: 이학사, 2001)의 공저자 중 한 사람인 이탈리아의 유물론 정치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가 그의 새로운 책, <혁명의 시간>을 통해 대답하고자 시도하는 질문이다. 저자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유물론 자체가 관념론에 의해 오염된 상황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출해야 한다고 말한다. 유물론 속으로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있는 관념론의 언어들로부터 분리되어 유물론이 자신만의 언어로 이루어진 논리학과 인식론, 그리고 존재론을 획득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네그리의 주장은 관념론과 뒤섞여있는 정통 맑스주의의 유물론으로부터 맑스의 유물론를 구하고자 하였던 알튀세르의 작업의 연장선상 속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알튀세르는 그의 이론적인 작업을 통해 진정한 유물론은 기계론적인 경험주의와 목적론적 관념론과의 연속성 속에서, 즉 동일한 척도와 언어, 방법론을 가지고 보다 우월한 형태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들과는 필연적으로 불연속적이며 단절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또한 그의 후기 사상에서 알튀세르가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에 대한 독해를 통해 발전시킨 “우발성의 유물론”은 네그리가 말하려는 “유물론적 목적론”과 여러 모로 닮아 보인다.

-유물론적 목적론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유물론적 목적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는 형용모순이거나, 이율배반이 아닐까? 세계가 물질로만 이루어져있다는 유물론과 세계가 미리 정해진 방향과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는 목적론이 어떻게 화해되고 종합될 수 있을까? 네그리에 따르면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유물론과 목적론에 대한 기계론적이고 초월적인 정의에만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는 유물론은 사실 진정으로 유물론적인 것이 아니라 다만 기계론적 유물론의 후예이며, 또한 목적론이라는 것도 다름아니라 초월적이고 관념론적인 목적론이라는 것이 네그리의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기계론적 유물론과 초월적 목적론은 명시적으로는 상호배타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결국 서로를 필요로 한다.

-일찍이 파스칼은 데카르트의 완벽한 기계론적 세계는 “항상 신이 ‘살짝 등을 떠밀어주는 것’이 필요”(p.216)하다고 비꼬았는데, 이는 초월적인 목적론과 기계론적 유물론의 암묵적이지만 또한 필연적인 ‘담합’의 관계를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담합’관계는 근대의 시작과 함께 자본주의와 주권을 신비화하고 찬양하는 논리로, 그리고 나아가 권력작용의 일정한 부분을 담당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근대 혁명사상과 유물론 자체까지도 오염되는 데까지 이르는데, 네그리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바로 이러한 관념론에 의한 유물론의 오염의 증거라고 본다. 이는 유물론자에게는 ‘실어증적 상황’인 것이다(p.14).

-사실 기계론과 목적론간의 담합, 혹은 조화로운 관계를 지적한 것은 네그리나 알튀세르가 처음은 아니다. 이미 맑스 또한 고전 경제학파의 경험주의와 헤겔의 관념론을 동시에 비판했으며, 철학과 사회과학의 외부에서는 생물학자들이 이 문제에 몰두하였다. 왜냐하면 진화와 같은 생명계의 특유한 현상은 기계론과 목적론 모두에 의해 그에 대한 합리적 설명이 봉쇄되기 때문이다.

-특히 고전적 물리학의 모델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기계론적 세계관은 여러 가지 변형을 낳으면서 20세기에 들어서도 자연과학의 정체성을 규정해왔으며, 과학철학의 모든 논의를 진행하는데 있어서 모범적인 모델로 받아들여져 왔다는 것에 생물학자들은 비판의 초점을 맞추었다. 그들은 물질세계가 기계론적이며 무력하다는 생각과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물질세계에 창조성을 부여하는 목적론적 힘이 ‘요청’되어야 한다는 생각 모두를 거부하면서 물질세계 자체에 존재하는 가변성과 창조성을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물질개념을 혁신함으로써, 물질세계를 초월한 창조성의 근원을 찾을 이유가 결코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생물학자들은 생물학의 경험과학으로서의 지위의 문제에 자신들의 발견의 성과를 제한함으로써 다른 가능성들을 봉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생물학자들의 에피소드는 최소한 두 가지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첫째 기계론(실증주의)과 목적론(보편적 진리의 철학)에 대한 비판은 탈근대주의적 ‘담론 이론’이라는 유행의 산물이라고 간단히 기각될 수 없다. 이는 물질세계 자체의 문제이며, 그렇기 때문에 유물론적으로 정식화되어야한다. 둘째, 물질개념의 혁신, 즉 유물론의 재정식화는 바로 정치적이고 철학적으로 제기되어야 한다. 유물론은 단지 우주론적인 문제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카이로스, 시간의 측정불가능성
-이러한 유물론의 재정식화를 위해 네그리가 중요시하는 것은 바로 시간의 개념이다. 시간 개념의 정의는 물질 개념의 혁신에 선행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기계론적 유물론이 그랬듯이 물질에 대한 ‘연장’적 사고가 바로 시간에 대한 외연적이고 공간적인 표상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간을 ‘길이’로 표상하는데 익숙하다. 하지만 시간에 대한 외연적 사고는 우연히도 자본주의의 작동방식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유명한 말처럼 자본주의에서 “시간은 돈이다”. 그러나 사실 문제는 “시간이 어떻게 자본주의하에서 돈인가?”이다.

-맑스는 자신의 잉여가치 이론을 통해 이 질문에 정교한 답변을 내놓으려 하였다. 그리고 이 문제가 바로 네그리를 맑스주의의 논쟁 한가운데 위치시켰다. 네그리에 따르면 정통 맑스주의는 프랭클린의 정식을 단지 “시간은 가치이다”, 혹은 “가치는 측정되는 시간이다”로 바꿔 놓았을 뿐이다. 이는 맑스 자신의 설명 방식으로부터 유래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맑스는 가치를 외연적 시간인 ‘척도로서의 시간’에 의해 측정되는 것으로 설명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니어에 대한 비판을 포함한 <자본론>의 여러 구절들에서 시간이라는 ‘양’으로 표현되는 가치에 대한 외연적 접근은 잉여가치의 본질과 그 기원을 보지 못하도록 만든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있다.

-‘척도로서의 시간’은 이른바 과학적인 지위를 얻음으로써 자본의 착취에 대한 권리의 객관성을 보장해준다. 즉 1시간의 길이동안 타인의 노동력을 사용할 권리를 얻는 것의 객관성이 보장된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잉여가치는 그렇게 설명될 수 없다. 자본주의하에서는 원리상으로는 단 1초의 노동에 의해 생산된 가치도 잉여가치율에 의해 분할된다. 시간의 길이에 의해 이 분할을 설명하는 것은 단지 편의를 위한 것일 뿐이며, 이것을 본질적인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맑스 자신이 비판한 시니어의 사고방식으로 되돌아감을 의미한다. 오히려 잉여가치는 매순간 추출된다. 그리고 ‘척도’, 혹은 ‘연장’으로서의 시간 개념은 시간을 균일하게 분할함으로써 그것을 넘어서는 창조성을 잉여가치의 신비한 몫으로만 돌린다. 이는 ‘시간에 의한 공간의 절멸’이라고 이해되는 탈근대적 자본주의에서는 훨씬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연장으로 이루어진 시간에서는 창조적 사건이 발견”될 수 없다(p.62).

-이런 관점에서 시간은 단순한 길이와 지속으로서만 정의되기 때문에 그 내적인 논리라는 것은 제거되어 버리고, 시간을 지배하는 논리는 언제나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결국 외연적으로 정의된 시간 개념은 자본주의판 ‘제논의 역설’을 만들어 낸다.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 잡을 수 없는 것처럼 물질적 생산의 창조성은 척도로서의 시간을 넘어설 수 없다. 하지만 이 ‘역설’은 외연적인 시간관을 가능한 한 가장 비현실적인 형태로 그 극단까지 밀고 나간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어떤 진실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준다. 즉 “순간만이 존재론적으로 현실적”이고 또한 생산적이라는 것이다(p.58).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필연적으로 “시간의 유물론”, 혹은 “물질의 시간성”이라는 개념에 도달하도록 만든다. 이때 시간은 ‘길이’가 아니며 물질은 시간성에 의해 ‘운동’으로만 이해되어야 한다.

-네그리가 자신의 고유한 ‘시간의 유물론’을 구성하기 위해 발견한 것은 서양 철학 전통에서의 ‘카이로스’라는 시간 개념이다. ‘카이로스’의 관점에서 시간은 화살을 쏘는 것이며 순간으로서의 현재는 바로 이러한 비가역적인 궤적을 그리는 화살촉의 끝이다. 이 화살촉의 끝은 과거와 미래 사이의 불연속적인 순간을 지칭한다. 즉 이러한 시간관에서 미래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것으로, 과거는 이미 실현된 것과 같이 봄으로써 과거와 미래를 동질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 없다. 만일 과거와 미래가 하나의 연속된 흐름이고 현재(순간)는 이 둘 사이의 단순한 가교라면, 이 흐름은 이미 목적이 그 기원에서 정해진 것이거나, 기원에 대한 동어반복, 둘 중에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와 달리 카이로스는 “순간의 목적론”이며 “사건의 텔로스”이다(p.53).

 

 

 

 

-이렇게 이해될 때, 시간은 곧 ‘이전’과 ‘이후’ 사이의 “생산의 측정불가능성”이다(p.74). 이 ‘측정불가능성’은 ‘측정가능성’의 부정으로서의 ‘막연하거나 불확정적인 것’이 아니며, 그런 점에서는 진정으로 측정자체가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의 잉여가치의 존재는 이 순간의 ‘측정불가능성’과 ‘측정가능성’ 모두를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잉여가치는 생산이 반드시 ‘측정가능성’에 종속되었을 때에만 추출될 수 있는 것이지만, 또한 척도로서의 시간을 넘어서는 ‘측정불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생산 자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 혹은 다중
-이 단계에서 네그리의 유물론적 목적론은 아직은 충분히 정치적인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바로 그것을 실천하고 구성하는 주체성으로서의 ‘가난한 사람들’이 이야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그리에 따르면 자본주의, 특히 그것의 탈근대적 단계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바로 유물론적 목적론을 실천하는 ‘전위’이다(*개인적으론 이 대목이 눈길을 끌어서 <혁명의 시간>을 읽어볼 생각을 갖게 되었다. 지난 2004년 모스크바에서부터). ‘가난한 사람들’은 대중의 자생성을 상징하는 것도 아니며, 그들을 ‘전위’라고 부를 때에도 그들이 레닌주의적 당에 부여되는 ‘의식성’을 표상하기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이 전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한나 아렌트가 1943년에 망명자들이야말로 자신들의 인민의 ‘전위’라고 말했던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일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자본주의적 폭력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이러한 폭력에 노출된 ‘벌거벗은 삶’이기 때문에 그들이 전위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들은 전위이기 때문에 이러한 폭력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아렌트가 말했듯이 국가로부터 탈출하는 망명자들이 국민으로서 주권에 종속된 인민들의 전위인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은 노동자로서 자본주의의 부에 종속된 대중의 전위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위란 공간적인 의미에서의 ‘외부’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국가의 내부적인 망명자들(국민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했으나 여전히 공간적으로는 그 국가 내부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존재가 증명하는 것처럼, 그리고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망명한 사람이 ‘국가’ 자체의 외부에 도달한 것은 아닌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은 자본주의 내부의 ‘망명자’들이다. 탈근대적 자본주의하에서 빈자는 배제되기는 하지만 “이 배제는 세계의 생산 ‘내부에서’ 일어난다”(p.138).

-네그리가 ‘가난한 사람들’을 혁명적인 주체성으로 제시하는 것은 그들이 ‘곤궁, 무지, 질병’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가난하기 때문에 “완전한 의미에서의 삶정치적 주체”(p.130)이며, 그렇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 이미 죽음을 극복한 사람”(p.135)들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네그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집합적 실천과 구성의 테크놀로지를 통해 ‘공통적인 것’의 생산에 참여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삶의 가치와 공통적인 것의 부정은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이며 자본주의적 폭력이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들이야말로 자본주의와 실질적인 적대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거꾸로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러한 '적대관계'를 얘기하는 건 겉멋이거나 자기모순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전위로서 선언하는 것은 정치철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들은 주권 이론의 역사에서는 바로 ‘다중’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가난한 사람들’이 자본주의적 부의 외부와 너머의 주체성을 지칭하는 것처럼, ‘다중’은 근대적 주권의 초월성과 마찬가지의 관계를 가지는 주체성을 지칭한다. 그런데 이러한 주권과 그 이론의 역사에서 네그리가 비판의 초점을 맞추는 것은 홉스나 루소, 혹은 헤겔이 아니라 베버와 슈미트이다. 홉스, 루소, 헤겔은 이미 지나가 버린 주권 역사의 이론가들이다.

-이들과 달리 20세기초의 베버와 슈미트는 모두 국가가 경제적이고 법적인 합리성에 종속됨으로써, 19세기의 자유주의적 사회에 상응하는 헤겔적인 국가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으며, 그런 이유에서 국가 자체가 이제 진정으로 ‘주권의 초월성’의 장소가 될 수 없다는데 생각을 같이 하였다. 이러한 주권의 위기에서 이들이 탈출구로 생각한 것은 바로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이다. ‘정치적인 것’은 경제적인 것, 혹은 법적인 것과 구분되는 고유성을 갖는다. 그리고 이러한 고유성에 근거해서만 순수하게 자율적인 정치적 결정이 가능하다. 즉 정치적 결정의 초월적 근거가 보장되는 것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경제주의, 즉 자본주의적 합리성에의 종속으로부터의 탈출구를 찾던 동시대의 혁명이론과 실천은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이라는 것을 매우 결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른바 외부의 의식성, 혹은 자율적인 상부구조는 바로 이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의 다른 이름이다. 레닌주의는 경제의 외부만을 생각하고 주권의 외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으며 결국 경제적인 종속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과제를 주권에의 참여로 돌려놓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전위로서의 ‘가난한 사람들’이 자본주의적 부로부터의 탈출의 방향을 지시하며 또한 그것을 구성하듯이, 다중은 주권에의 참여와 “복종으로부터의 탈출, 즉 척도에의 참여로부터의 탈출”(p.195)이라는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

-네그리의 <혁명의 시간>은 생소한 철학적 개념들과 언어로만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현재의 자본주의에 대한 현상적인 기술에 치중했던 <제국>과는 달리 독해와 이해가 쉽지 않은 책이다. 게다가 저자의 말처럼 우리가 유물론자의 ‘실어증적 상황’에 빠져 있다는 것이 현실이라면 문제의 해결은 훨씬 더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의 타개가 절실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분명 읽어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06. 0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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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6-27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사이 로쟈님 페이퍼는 일단 제목들이 죽이네요:) 즐겁게 낚이고 갑니다.

로쟈 2006-06-28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고안해낸 제목들도 아닙니다. 옮겨오는 입장에서는 필자들의 뜻을 존중해야 하는지라...

꿈꾸는돌 2006-10-27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고맙습니다 ^^ 네그리에 관심은 많은데 책 읽기가 쉽지 않네요. 내공이 워낙 부족해서...;;
 

르네 지라르에 대한 짤막한 글을 써야 할 필요 때문에 자료들을 읽고 있는데, <문학과 사회>(2004년 가을호)에 실렸던 맹정현씨의 '모방과 폭력 - 지라르 논리의 원환구조'란 글을 옮겨온다. 자세히 뜯어읽기 위해서이다. 본문 중 강조와 (*)로 덧붙인 군말만이 나의 것이다.

 

 

 

 

욕망에서 성서로?
욕망에 관한 (탈)현대적 담론들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해보자. 아마도 그것은 욕망으로부터 인간을 지우고 욕망의 실체성을 부정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헤겔에서 라캉에 이르는 욕망론은, 욕망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타자나 구조의 효과임을 주창함으로써 욕망에 대한 반인간주의적인 해석의 길을 열어주었다.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은 정확히 이러한 계보 속에서 씌어진 르네 지라르의 대표작이자 처녀작이다. 욕망은 삼각형의 도식에 의해 구성되며, 욕망과 대상 사이에는 항상 제삼자가, 금지의 매개자가 개입되어 있다는 지라르의 주장들은 그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더라도 우리에겐 이미 익숙한 것이 되었다. 삼각관계가 없이는 욕망도 존속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가 말하는 욕망은 요컨대 실체가 없는 욕망이며, 이 점에 있어선 그가 욕망에 대한 현대적 해석들의 반경 안에 머물고 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국내에서 번역되어 출간된 지라르의 후기 저작들(<희생양>,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을 살펴보면 그가 (탈)현대 사상가들에 비해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그는 동시대의 사상가들처럼 반인간주의적 욕망 이론을 개진하면서 특이하게도 현대의 반종교주의와 이교도적 ‘니체주의’의 경도를 비판하며 ‘기독교주의로의 회귀’를 강력하게 주장한다. 심지어 유일신적 종교야말로 인간이 폭력의 악순환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는 지라르의 결론은 낯설다 못해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내 기억에는 이미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도 이러한 메시지를 읽을 수가 있었던 듯한데, '이질감'까지 느낀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지라르의 여정에 있어서 욕망의 반인간주의적 해석에서 <폭력과 성스러움>으로 이행하는 과정은 비교적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었다. 하지만 상기 두 저작에서 보여주는 기독교적 엄숙주의로의 회귀는 논리적 비약이나 이론적 퇴행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후기의 작업 속에서 보여주는 반인간주의와 기독교주의라는 지라르의 독특한 이론적 배합은 정확히 그의 출발점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며, 그가 설정했던 최초의 전제를 끝까지 밀고 나간 결과라 할 수 있다(*내 말이 그 말이다. 필자가 약간의 트릭을 쓴 것이군!). 이 점을 확인하기 위해선 익히 잘 알려진 지라르의 전제에서 다시 출발할 필요가 있다.



미메시스와 폭력
잘 알려져 있다시피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보여준 지라르의 출발점, 최초의 전제란, 욕망을 미메시스와 접속시켜 읽는 것이다. 지라르에게 있어 욕망은 곧 모방 욕망이다. ‘나’는 ‘그’가 가진 것을 원하고 ‘그’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생물학적 욕구가 아니라 제삼자를 경유한 욕망, 타자의 음영이 드리워진 매개된 욕망이다. “매개자 그 자신도 대상을 욕망하거나 욕망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매개자의 욕망이 주체의 눈에 이 대상이 끊임없이 욕망할 만한 것으로 보이도록 만든다.”(*영역본의 제목은 <속임수, 욕망 그리고 소설>이다.)

결국 욕망이란 거울의 운동 속에서 서로를 반사해가며 모방해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지라르는 욕망으로부터 성욕이라든가 생물학적인 욕구의 흔적을 제거한 후 모방의 흔적만을 도출해내는데, 이는 지라르에겐 모방만이 인간의 고유성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특질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모방 욕망이 긍정적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나보다 우월한 자, 초월자에 대한 모방 욕망을 통해서(“매개자가 외재적인 경우”) “자아 이상”을 획득하고 사회의 문화유산들을 나의 것으로 섭취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수평적’으로 이루어질 경우, 즉 나와 초월자가 아닌 나와 동류(“짝패”) 사이에서 이루어질 경우(“매개자가 내재적인 경우”), 그것은 곧 관계를 갈등과 사투(死鬪)로 이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폭력의 기원이 있다. 모방은 “응집의 힘이면서 동시에 해리의 힘”인 것이다.

따라서 지라르가 모방 욕망에서 폭력의 논리로 이행하는 것은 그 출발점에 상정된 전제에 비추어볼 때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지라르는 1972년에 출간된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모방 욕망의 갈등의 측면을 최대한 부각시킨다. 인간이 모방하는 존재인 한 ‘나’와 ‘너’는 대립한다. 그런데 이러한 대립이 첨예해질수록 모방은 더욱더 가속도를 얻고 개체들은 원환을 그리면서 ‘무차별성’의 지점으로 수렴한다. 그것은 “적들 사이의 거울 효과를 증대시킨다.” 그리고 ‘무차별성’의 지점으로 수렴할수록 폭력의 강도는 점점 더 증폭되며, 그것이 일정 정도 한계에 다다르면 결국 사회는 위기에 빠진다.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지라르적 논리의 흥미로운 점은 위험 수위를 넘은 사회는 이러한 위기의 해소를 위해 그 사회 자체 내에 자생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지라르가 말하는 ‘문명’과 ‘언어’의 원리이다. 문명과 언어의 원리란 곧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논리이다. 그리고 이러한 희생양의 논리를 가능케 하는 것은 다시금 ‘모방’이다. 욕망의 모방은 폭력을 만들어냄으로써 나와 너 사이에 갈등의 골을 판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갈등의 골을 봉합할 수 있는 가능성도 바로 그 모방에 있다. 증오를 모방함으로써, 서로 반목하던 ‘나’와 ‘너’는 ‘그’를 증오하는 ‘우리’가 된다.

 

 

 

 

‘공동체’의 동일성이 구성되는 것은 무언가를 이질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배척함으로써다. 공동의 적을 만들어냄으로써 우리는 ‘하나’가 된다. “바로 좀 전에 무수한 갈등, 적대 관계 속의 무수한 형제들이 있었던 곳에서 그 구성원 중 하나에 의해 고취된 증오 속에서 단결된 새로운 공동체가 나타난다.” 갈등을 양산하던 모방이 이제는 갈등을 치유하는 ‘치료책’으로 굴절된다. ‘수평적’ 폭력이 ‘수직적’ 폭력에 의해 방출의 기회를 얻고, ‘모방의 폭력’이 ‘폭력의 모방’으로 해소되는 것이다.

따라서 “폭력이 폭력을 추방한다.” 이에 대한 묵시론적 판본은 바로 “사탄이 사탄을 몰아낸다”이다. 결국 되돌아오는 것은 처음보다 더 강력한 폭력이며 더 교활한 사탄이다. 폭력의 ‘간계’이자 사탄의 ‘간계’이다. 지라르가 볼 때 전통적으로 문명은 희생양에 ‘성스러움’의 베일을 씌움으로써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논리를 은폐해왔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지라르는 폭력과 성스러움을 접속시킨다. 적어도 희생 제의라는 문제와 관련시켜볼 때 성스러움이란 폭력의 논리에 대한 ‘몰인식’을 강화하기 위해 만든 매혹의 베일에 다름 아니다. 집단적인 폭력은 그 원인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인식론적 전환
여기서 다시 한 번 지라르의 논점 뒤에서 작동하는 이분법은 몰인식과 진리의 분할이다.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논리, 희생 제의가 효과를 거두기 위해선 그것의 논리에 대해 당사자들이 몰인식해야 한다. 그는 이미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거짓’과 ‘진리,’ ‘기만’과 ‘진실’이라는 인식론적인 이분법을 동원한 바 있다. 기만과 진실의 이분법은 이제 상상적 거울의 운동 속에서 몰인식과 진리의 이분법으로 표현된다. ‘희생 제의 속의 맹목적인 폭력’이라는 주제는 <폭력과 성스러움> 이후 지라르의 모든 저작들을 관통하는 기본적인 주제다. 하지만 이 주제가 정당한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선 지라르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것이 바로 그가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귀착하는 본격적인 계기가 된다.

(1) 우선 ‘인식론적’ 문제. 즉 만약 이 사회가 폭력의 맹목적인 순환에 기초한 사회라면, 지라르는 어떻게 폭력의 악순환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는가? 근본적으로 문명과 언어가 희생양을 만드는 “초석적인 살해”와 그 살해의 재생산에 근거한 것이라면, 그리고 그 재생산이 몰인식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 맹목적인 사회 속에 몸담고 있는 지라르는 어떻게 그러한 진리를 깨달았는가?

(2) 이러한 ‘인식론적’ 문제는 보다 근본적으로 ‘윤리적인’ 문제를 전제한다. 즉 어떻게 폭력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릴 것인가? 어떻게 폭력에 기대지 않고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폭력의 치료제로서의 폭력이 아니라면 보다 적극적인 해결책은 무엇인가?

바로 이 두 가지 문제가 저자가 폭력의 구조를 파헤치는 비평가적 입장(<폭력과 성스러움>)에서 유대 기독교적 실천가(<희생양>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로 넘어가는 단초이다. 인식론적인 견지에서 볼 때, 지라르는 신화가 아닌 성서의 절대 우위를 주장한다. 폭력의 구조를 해명하는 데에는 신화 분석이 유용하게 쓰이지만, 자신에게 그러한 분석을 가능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것은 신화가 아니라 유대 기독교적 성서와 복음서라는 것이다. “복음서가 희생양 과정을 엉클어뜨리거나 신화화하는 것이 아니라 신화적인 해석이었다면 신적으로 취급하였을 것들의 순전히 모방적인 성격을 드러냄으로써 희생양 과정의 신비를 벗겨내고 있다.”

물론 현상적으로 볼 때는 반대의 주장을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신화에서보다 성서에서 더 많은 폭력을 접할 수 있으며, 심지어 성서의 ‘피학적 성격’을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라르는 신화에 폭력이 나타나지 않음은 폭력이 부재해서가 아니라, 폭력이 지워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있음’과 ‘없음,’ ‘많거나’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은폐’와 ‘드러냄,’ ‘억압’과 ‘계시’의 문제라는 것이다.

지라르에게 모든 텍스트에 등장하는 폭력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다. 폭력은 하나의 현실인 것이다. 하지만 신화는 폭력을 가하는 자에 기초한 텍스트이기에 폭력을 왜곡시키거나 드러내지 않는다. 반면 성서는 폭력을 당한 자의 언어이기에 그 폭력을 ‘폭력’으로 규정하며 그 폭력성의 구조를 ‘계시’한다. 신화는 폭력을 ‘은폐’하거나 ‘신화화’하고, 성서는 폭력을 ‘계시’하고 ‘탈신화화’한다(*이것이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에서 지라르가 반복적으로 대비시키면서 강조하는 바이다). 심층적인 구조 분석을 통해서만 폭력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신화와 달리 성서에선 심층적인 분석이 없이도 폭력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 단순해 보이는 ‘은폐’와 ‘계시’의 놀이 속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지라르의 비평가적 감식안이다. 비평가들은 지라르가 문학 비평을 버리고 인류학으로 전향했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인류학을 문학 비평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즉 인류학에서 텍스트는 어디에 위치하는가, 폭력과 텍스트는 어떤 관계인가? 또 텍스트에서 폭력이 위치하는 곳은 어디인가?

폭력을 자리 매김하기 위해 지라르가 원용하는 것은 현대 언어학적 수행론의 성과라 할 수 있는 언표 행위와 언표, 말하는 것과 말해진 것의 이분법이다. 지라르는 신화와 복음서에서 폭력의 위치를 혼동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신화와 복음서의 차이, 신화의 은폐와 기독교의 폭로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표현과 표현되는 것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신화에서 폭력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는 폭력이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폭력은 언표 행위의 수준에 있다. 반면 성서에서 폭력은 언표의 내용, 즉 대상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표면에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언표 행위의 주체는 곧 그 폭력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비판하는 자의 위치에 있다.

성서는 신화 속의 폭력을 대상으로 삼아 폭력의 구조를 ‘계시’한다. 따라서 성서는 신화에 대한 ‘메타언어’라 할 수 있다. 성서는 신화 속에 감추어져 있는 폭력의 암호를 해독하고 그것을 지식의 형태로 전환시킨다. 지라르에게 종교적인 ‘계시’란 바로 이러한 ‘인식론적 전환’을 말한다.

폭력에 대한 이러한 상이한 자리 매김은 폭력을 당한 자에 대한 상이한 가치 평가를 수반한다. 신화에선 희생양이 죄인으로 그려지는 반면(이 점에서 지라르가 가장 오이디푸스(적)이다), 성서에선 희생양이말 그대로 희생양으로 그려진다. 가령 “예수는 희생양이다”라는 문장을 생각해보자. 이는 예수를 희생양으로서 규정함으로써 그의 무죄성을 전제하는 문장이다. 언표 행위의 주체가 예수의 무죄성을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지라르는 신화적 세계관, 다신교, 이교도에서 유대 기독교적, 유일신교적 세계관으로의 이행을 ‘혁명’이라고 표현한다. “박해자의 환상을 처음으로 기록하면서 <구약 성서>는 혁명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는 정확히 인식론적 혁명이다. 희생양의 메커니즘에 대해 몰인식하도록 만드는 신화의 왜곡(“환상”)을 계시(“기록”)한다는 점에서 인식론적인 혁명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혁명은 단순히 인식론적 혁명에 그치지 않는다. 유대 기독교적 세계관이 가져온 혁명은 또한 폭력의 ‘악무한’을 깨뜨리는 적극적인 전략을 겸비하고 있다. 즉 ‘윤리적’ 혁명인 것이다.

미메시스의 윤리
그렇다면 성서-복음이 가져온 윤리적 혁명이란 무엇인가? 지라르에게 인간은 언제나 모방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모방으로부터 갈등이 시작하고 폭력이 출발한다. 모방이 폭력의 악순환을 초래한다면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선 모방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 앞에서 지라르는 자신의 전제를 폐기하지 않는다. 즉 인간은 모방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지라르에게 남은 길은 모방의 가치론이다. 다시 말해 ‘좋은 모방’과 ‘나쁜 모방’을 구별하는 것이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에서 지라르는 두 가지 모델을 구분한다. “하나의 모델은 탐욕이 적어서 어떤 것도 경쟁적으로 욕망하지 않기 때문에 절대로 그 추종자들이 장애물이나 경쟁자가 되지 않고, 또 다른 모델은 탐욕이 아주 많아서 그 추종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좋은 모델이란 모방 관계를 갈등의 경쟁 관계로 만들지 않을 경우를 말하는데, 그것은 곧 신이다. 그리고 두번째 모델, 그 추종자들을 탐욕스럽게 만드는 탐욕스런 모델은 바로 사탄이다.

결국 좋은 모방이란 신을 모방하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신의 좋은 욕망을 모방하는 것이다. 모방 욕망이 아닌 욕망,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욕망이 아닌 금욕적인 욕망, 상대를 죽이는 경쟁적 욕망이 아니라 비경쟁적 욕망을 모방하는 것이다.

물론 경쟁적 모방과 달리 이러한 좋은 모방이 가능하기 위해선 또다시 ‘매개자’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이 맹목적인 모방의 원환 속에 갇혀 있는 한 신이라는 좋은 모델, 좋은 욕망을 알아볼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신을 직접적으로 모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신에 대한 모방을 매개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와 ‘예수의 말씀,’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예수의 욕망’이다.(*아래 그림은 러시아 화가 이반 크람스코이의 '황야의 예수'[1872])

예수는 신을 모방하고자 한 최초의 인간이다. 따라서 신을 모방하기 위해선 예수에 대한 모방을 경유해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를 모방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모방을 모방하는 것이다. 즉 “신을 모방하는 것을 모방하는 것이다.” 예수의 말씀은 신화의 암호를 해독하는 인식론적인 혁명이면서, 동시에 신이라는 모델을 비경쟁적 관계에서 추구했던 최초의 모델이라는 점에서 윤리적인 혁명이다.

결국 지라르의 원환은 완벽하다. 나쁜 모방의 악순환을 깰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좋은 모방이지만, 이러한 모방은 ‘신적인’ 것이기에, 매개적인 모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폭력 구조의 해명에 있어서도, 그러한 폭력의 악순환을 벗어나는 해결책 모색에 있어서도 자신이 최초에 상정했던 모방 가설을 폐기하지 않는다.

인간은 모방하는 존재라는 전제에서 출발한 지라르는 결국 모방의 가치론과 윤리적인 실천의 문제로 귀착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다시 그러한 윤리적 실천의 핵심은 ‘모방론’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바로 지라르 논리의 원환 구조이다. 자신이 최초에 설정한 한계를 깨뜨리기 위해서 그 한계 속에서 스스로 해답을 찾아낸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지라르에게서 반인간주의적 욕망론과 기독교주의로의 회귀가 봉합되는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06. 0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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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6-26 23:46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 맹정현 씨는 라깡에 대해서 해박하시다는 그 분 맞죠?

로쟈 2006-06-26 23:52   좋아요 0 | URL
아직 정리도 안됐는데요(--;). 맞습니다. <라캉의 재탄생>에 그의 논문들이 실려 있습니다. 흔히 FM이라고 그러죠. 학위를 마치고 귀국했을 법한데, 좀 오래 걸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