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북리뷰의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에서 도정일 교수의 칼럼 ''문학집배원'의 인기비결'을 옮겨온다. 문학의 사회적 가치/효용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있는지라 제목을 본문의 문구인 "문학이 사람을 바꿔놓을 수 있는가?"로 바꾸었다. 문학을 즐겨 읽는 사람은 무엇이 다른가? 짐작엔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인간은 대체로 유구하다), 칼럼은 보다 긍정적인 견해를 제출하고 있다.

한겨레(06. 07. 14) 평소에 시, 소설, 드라마 같은 문학작품을 즐겨 읽거나 일 년에 최소한 몇 편이라도 챙겨 읽는 사람들은 그러지 않는 사람들과 구별될만한 어떤 행동상의 특징을 보이는가? 문학교수들치고 진지하게 이런 질문을 자기 자신을 향해 던져보거나 그 질문에 자진해서 시달려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선은 그것이 문학 그 자체와는 별 관계없는 질문처럼 들린다는 것이 첫째 이유다. 정치학을, 혹은 경제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될만한 행동 특징을 보이는가라는 것이 정치학이나 경제학 본령의 질문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듯이 말이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어쩌면 이게 진짜일지 모른다) 그 질문에 그렇다/아니다로 대답할 실증적 증거를 들이댈 길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커피를 즐겨 마시는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 같은 거라면 몰라도 문학독자와 비독자 사이의 행동 차이라고?

-그러나 그 질문은 상당히 의미 있다. 평생 대학 강단에서 소위 ‘문학 강의’란 걸 하면서 문학이 “사람을 바꿔놓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한 번도 던져보는 일이 없다면 문학 강의가 될까? 학생들에게 시, 소설, 드라마를 읽어라 해놓고 그 읽기의 경험이 학생들에게 어떤 변화 효과를 일으키는지 아닌지 아무 관심도 없다? 내 생각에, 많은 경우 문학 강의가 망하거나 혼수상태에 빠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 질문이 강의의 밑바닥에 깔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사실 '변화'에 대한 기대는 교육 일반이 의도하는 것이지 '문학 강의'만의 특화된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그런 변화를 측정하거나 측정의 방법을 찾아내는 일은 문학 강의의 본령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질문 자체가 아예 제기되지 않는다면 문학 강의의 교육적 의미는 살아날 길이 없다(*이러한 주장엔 양가적인 감정을 갖게 된다. 얼마간 공감하면서도, 이젠 문학교육이 자기 존재를 '정당화'해야 하는 요구에 직면해 있구나, 라는 유감). 학교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대중적으로도, 문학을 읽는 행위의 ‘사회적’ 의미를 생각해보지 않는다면 문학 독서의 중요성을 어디서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한국문화예술위원회(구 문예진흥원)는 작년부터 ‘문학의 대중적 친숙화’를 위한 사업들을 펼쳐오고 있다. 작년에는 ‘문학회생’이라는 이름으로, 금년에는 ‘문학나눔’이라는 명칭으로 전개되고 있는 사업들이 그것이다. 회생이건 나눔이건 간에 사업의 목적은 문학의 대중적 향수 기회를 넓히기, 곧 사람들이 문학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크게 열고 넓혀보자는 것이다. 창작자들을 위한 생산지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향유자를 위한 지원이다. 이 점에서 문학을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고 들어가 시민들이 더 자주, 더 많이 문학을 나눌 수 있게 지원한다는 것은 독서인구 키우기는 물론이고 시민의 예술참여도를 높인다는 점에서 문화적으로 의미 있는 사업이다.

-문학의 이런 대중적 친숙화 작업의 하나로 지금 두 달째 진행되고 있는 것이 시인 도종환의 ‘시 배달’이다.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일주일에 시 한 편씩을 인터넷으로 배달해주는 것이 그 사업의 골자다. 시인이 손수 고른 시가 플래시 영상카드에 실려 텍스트와 낭송의 형태로 매주 월요일 아침 사람들에게 ‘선물’로 배달된다. 스스로 ‘문학집배원’이 되어 시 배달에 나선 시인은 우리더러 잠깐 삶의 템포를 조절하고 “당신의 한 주일을 시 한 편 읽는 것으로 시작”해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일상의 바쁜 쳇바퀴에 갇힌 사람들에게 이건 신선한 메시지다. 시인의 이런 노력에 대한 호응이 ‘폭발적’이라는 소식이고 보면 사람들이 그 메시지에 얼마나 목말라 있었던가를 알만하다. 대구 지역에서는 교육청이 나서서 대구경북 일원의 중고등학생 2만 여명에게 월요 아침의 시를 받아볼 수 있도록 주선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사람들은 왜 시를 마다하지 않는 것일까? 시가 그들의 삶에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중요성의 핵심은, 내 생각에, 시가 ‘연결의 다리’라는 데 있다. 시는 사람들의 가슴과 가슴을 연결하고 나를 나 아닌 모든 다른 것들과 연결시키고 나를 나 자신에게 연결한다. 사람과 사람들을 이어붙이고 인간과 별과 바람, 나무와 구름, 지렁이와 개구리까지도 한데 이어 붙인다는 점에서 시는 인간이 가진 최선의 선린 외교정책이다. 무엇보다도 시는 내가 나보다 더 큰 어떤 것, 내가 ‘나’의 좁은 울타리를 넘어 더 크고 중요한 어떤 것과 연결되게 한다.

-‘더 크고 중요한 어떤 것’이라는 소리가 고깝게 들리는 사람에게라면 말을 바꿔도 된다. 나보다 더 작고 약하고 미천한 것, 그래서 내가 노상 업신여기고 깔아뭉개고 구둣발로 걷어찼던 것들을 어느 순간 나에게로 이어 붙여 그 모든 작은 것들의 존재의 고귀함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시다. 사람들이 시로부터 멀리멀리 떠나 있는 삶을 강요당하면서도 시를 그리워하는 이유는 시가 가진 이 연결의 마술 때문이다. 시가, 문학이, 사람들을 바꿔놓을 수 있는 힘의 원천도 거기 있다.

 

 

 

 

-문학독자한테서는 비독자와는 다른 어떤 행동상의 특징이 발견되는가? 우리는 이런 질문의 사회적 의미를 확인하기 위한 시도를 한 번도 해본 일이 없다. 그러나 미국 예술기금위원회(NEH)가 2002년에 연방 통계청을 통해 실시한 ‘미국인의 예술참여도’ 조사를 보면 그 질문과 관련된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들이 드러나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발견은 문학독자가 비독자에 비해 자선활동이나 자원활동 같은 사회적 참여행위의 빈도가 훨씬 더 높다는 것이다(*다른 변수들과는 정말로 무관한 것일까?).

-문학독자들이 사회적 자선활동에 참여하는 비율은 43%임에 비해 비독자의 참여율은 17%에 그치는 것으로 조사돼 있다. 이 차이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참여란 연결의 다른 이름이다. 문학 외의 예술 형식, 음악회에 가고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방문하는 등 인접 예술 영역에 대한 참여율도 문학독자가 비독자에 비해 두 배 이상 높다는 것도 그 조사에서 드러난 발견의 하나다(*문학 체험이 공감의 능력을 확장시킬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긴 하다. 그런데, 거꾸로 미술관/박물관을 방문할 여력이 되고 자선활동에 참여할 준비가 돼 있는 이들이 문학도 향유하는 건 아닐까? 이 '인과성'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가능한가?).

 

 

 

 

-우리는 문학의 가치와 효용이 그것의 무효용성에 있다는 주장을 진리처럼 받아들이는 일에 익숙해 있다(*가장 대표적인 건 자신의 '쓸모없음'으로 유용성에 대해 반성하게 한다는 김현의 문학론이다). 그 주장의 진리 가치를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문학을 읽고 즐기는 행위의 사회적 효용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시대에 살고 있다. 읽고 쓰고 생각하고 성찰하는 행위가 사회적 삶의 기초라면, 문학 읽기는 사람이 사람으로 자라고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하는 인간적인, 그리고 시민적인 힘의 원천이다. 도종환 시인의 시 배달이 지니는 사회적 의미의 큰 줄기 하나도 거기 있을 것 같다.

(*)시배달의 사회적 의의를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치와 효용'에 대한 물음은 언제나 사회적 장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고 확장시키려는 노력과 결부돼 있으며 또 언제나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을 갖는다. 나는 문학전공자들의 인성이 (아무래도 문학작품을 덜 읽게 되는) 공학도/공학자들의 인성보다 특별히 우량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때는 게임중독자들보다는 좀 낫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었는데, 게임매니아를 자처하는 문학교수들은 또 얼마나 많은 것인지! 해서, 이 칼럼은 아무래도 아침에 배달되는 기분좋은 덕담 정도로 치고 넘어가는 게 좋을 듯하다. 문학이 사람을 바꾸어놓을 수 있는가? 당연하지! 한데, 그 바꿔놓기 능력에 있어서 문학이 돈이나 정념을 따라갈 수 있을까? 뭐라고요, 문학이 돈이나 정념에 들러붙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요?..

06. 07. 14.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쟈 2006-07-14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저로선 감수성(sensibility)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도올 김용옥이 언젠가 인(仁)이란 바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란 취지의 강연을 하는 걸 보았는데, 문학은 그러한 감수성과 직결돼 있는 것이죠. 물론 모든 문학이 그런 건 아니고 허접한 문학도 많이 있는 거지만...
 

주말인 7월 15일은 1904년 7월 15일 세상을 떠난 러시아 작가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의 서거 102주기를 맞는 날이다. 2년전, 그러니까 2004년 7월 15일 서거 100주기를 맞이하여 모스크바통신에 올렸던 글을 정리해서 옮겨놓는다(페이퍼의 원래 제목은 '안톤 체호프, 혹은 등신스러움의 예찬'이었다). 이미지도 몇 개 같이 띄우고. 주말까지는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7월 15일)이 러시아의 작가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의 서거(逝去) 100주기를 맞는 날이다. 이미 지난 통신문에서 언급한바 있지만, 그가 독일의 한 휴양도시(뉴스에서 보니까 이 휴양도시 바덴바일러에는 체홉박물관이 생겼으며, 그가 묵었던 숙소도 인테리어는 달라졌지만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한 날짜는 러시아의 구력(舊曆)으로 7월 2일이고, 신력(新曆)으로는 7월 15일이다. 물론 그가 살았던 시대와는 달리 요즘에는 신력을 쓰기 때문에 오늘이 ‘공식적인’ 사망일인 셈이다(*아래는 바덴바일러의 체호프박물관. 앞에서 적은 대로 2004년 7월 15일 개관했다).  

그는 (구력으로) 1904년 6월 3일 의사의 권유에 따라 요양차 독일의 바덴바일러로 아내 크니페르와 함께 떠났었고, 건강이 약간 호전되는 듯하자 이탈리아 여행(콘스탄티노플을 거쳐서 얄타로 돌아오려고 했다)까지 계획했었다. 하지만 7월 2일 새벽 1시에 그의 병세(‘폐결핵’으로 기억된다)가 갑자기 악화되어 호흡이 곤란해지기 시작했고, 급하게 달려온 의사는 심장 쇼크라고 진단한다. 장뇌(樟腦)까지 동원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그는 점차 혼수상태에 빠져든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린 그는 얼음주머니로 가슴을 마사지하려는 아내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텅 빈 심장에는 얼음을 놓지 않는다오.” 의사가 새로운 산소통을 가져오도록 했지만, 체홉은 만류한다. “그들이 오기 전에 나는 죽을 겁니다.” 그는 새벽 3시에 숨을 거둔바, 마지막 순간까지 의연하게 평정을 지켰다고 한다. 샴페인을 마시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고도 하고(*아래는 바덴바일러에 세워진 체호프의 동상).



해서, 예의상 다른 할 일들을 잠시 제쳐놓고 그에 대한 글을 쓰기로 한다. 물론 충분한 시간을 할애할 수는 없지만(이건 유감스러운 일이다), 최소한 ‘입막음’ 정도는 하는 것이 이 글의 목표이다. 잘 준비된 글을 쓰고 싶지만, 그건 한 ‘세월’을 필요로 할 듯하다(우리의 인생은 고작 몇 사람의 작가를 읽고 이해하기에도 너무 짧다!).

오늘 저녁 러시아의 채널 ‘쿨투라(=문화)’에서는 기념일을 맞아 <체호프를 찾아서>란 특집프로그램과 함께 그의 원작을 영화화한 <다락방이 있는 집>(1960)을 방송한다. 이미 읽은 단편인데, 내용은 영화를 좀 봐야지만 기억에 떠올릴 수 있을 듯하다(내 경우에 체홉의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런 식이다. 즉, 강하게 각인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가볍게 지나가버린다.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와는 달리, 체홉은 우리의 삶에 좀처럼 간섭하고자 하지 않는 작가이다. 그는 배우였던 아내 크니페르의 삶에도 간섭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녁 약속이 있어서 영화를 볼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쿨투라’에서는 어제 이미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1937- )의 <바냐 아저씨>(1970)를 방영했고, 내일은 세번째 시리즈로 니키타 미할코프(1945- )의 <피아노를 위한 미완성 희곡>(1977)을 방영한다. 다행스러운 건 이 두 편의 영화 모두 한국에도 출시돼 있다는 점인데(생각하면 이례적이다), 한번 비디오가게들을 뒤져 보시길. 모두 볼 만한 영화들이다. <바나 아저씨>는 한국에서 처음 봤을 때 좀 평범하다 싶었는데, 어제 다시 보니까 수작이다. 일단 캐스팅 면에서, 최근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레프 도진의 연극 <바냐 아저씨>보다 ‘사실적’이다...

저녁을 먹고 ‘꿀뚜라’에서 <피아노를 위한 미완성 희곡>을 보았다. 3일 동안 특집으로 편성된 체홉 작품 3편을 영화로 보았는데, 어제 본 <다락방이 있는 집>이 평범한 영화라면, 그제 본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의 <바냐 아저씨>는 수작이고, 오늘 본 니키타 미할코프의 <피아노를 위한 미완성 희곡>은 걸작이다. <다락방이 있는 집>은 조금 늦게 보는 바람에 감독이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전형적인 ‘소비에트 문예영화’이며 작품의 줄거리는 그대로 옮기고 있지만 평면적이고 아무런 영감도 주지 않는다. 이런 영화들을 보노라면 미할코프-콘찰로프스키 형제의 영화가 얼마나 뛰어난가를 새삼 알게 된다.

<바냐 아저씨>의 경우 캐스팅 면에서 보다 ‘사실적’이란 얘기를 서두에서 했는데, 의사인 아스트로프 역으론 수염이 덥수룩한 세르게이 본다르추크(1920-1994)가 나온다. 9시간짜리 대작 <전쟁과 평화>(1967)의 감독 말이다(국내에서도 상영되었던 극장판은 3시간짜리 축약판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일기’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혹 본다르추크란 이름을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1960-70년대 소비에트 영화의 한 ‘권력’이었던 본다르추크를 타르코프스키는 혐오스러운 인물로 몇 차례 언급한다.

하지만, 어쨌든 그는 망명감독 타르코프스키와는 달리(타르코프스키는 ‘소비에트 감독’이 아니라 ‘러시아 감독’이다) 소비에트의 대표적인 영화감독의 한 명이자 배우였다. <전쟁과 평화>에서도 중요한 배역으로 나오며(*사진의 피에르 베주호프 역이다) 역시 자신이 감독한 푸슈킨 원작의 영화 <보리스 고두노프>에서는 주역인 ‘고두노프’로 출연한다. 더불어 나는 보지 못했지만, 체홉의 중편 <스텝>을 영화로 찍었다고 한다.

이 본다르추크의 ‘아스트로프’는 도진의 <바냐 아저씨>에 나오는 샤프하고 빈틈없어 보이는 ‘아스트로프’와는 달리 ‘바냐 아저씨’와 함께 피로한 나날의 일과에 찌든 중년의 사내로 등장하며 내가 보기엔 그것이 체홉의 원작에 더 충실하다(원작에서 바냐 아저씨는 47세이며 친구인 아스트로프도 비슷한 나이이다). 머리가 벗겨진 ‘세레브랴코프’도 도진 연극에서의 ‘김무생 같은’ ‘세레브랴코프’보다는 내가 상상하는 ‘세레브랴코프’와 더 잘 맞는다. 유모나 바냐의 모친도 연극에서보다는 더 적절한 배우들이 연기하고 있다(내가 연극보다는 영화를 더 선호하는 탓일 수도 있다). 콘찰로프스키는 원작을 충실히 따라가면서도 특별히 인물에 대한 클로즈업과 배경공간에 대한 딥-포커스를 적절하게 사용함으로써 자칫 단조로워질 수 있는 화면에 깊이와 긴장을 부여하고 있다. 이 정도 수준으로 영화를 뽑아내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동생 미할코프는 한술 더 뜬다. 내 기억에 그의 세 번째 작품쯤 되는데, 30대의 감독 미할코프는 이미 거장다운 솜씨로 체홉의 미완성 희곡을 완벽하게 영화의 언어로 옮겨놓고 있다(이미 이전에 언급한바 있지만, 레프 도진이 연출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는 것은 역시 이 미완성 희곡을 무대에 올린 <제목 없는 희곡> 덕분이었다. 이 작품의 연출기가 그의 환갑을 기념해서 책으로 나왔다는 얘기도 이미 했는데, 곧 서점에서 구해볼 생각이다). 더불어 본다르추크와 함께 아마도 러시아에서 가장 대표적인 배우 겸 감독일 미할코프는 이 영화에서도 조연이긴 하지만 제 몫의 연기를 선보이고 있기도 하다(그가 맡은 역도 의사이다. 사진의 가운데 남자. 왼쪽의 여인은 소피야, 오른쪽은 플라토노프의 아내 사샤).

국내에 출시돼 있는 그의 영화는 이 영화를 포함해서 <오블로모프의 생애>(1979)(<오브로모프의 생애>로 돼 있다), <위선의 태양>, <러브 오브 시베리아>(원제는 <시베리아의 이발사>) 등인데, 그의 가장 뛰어난 연기는 주연으로 출연한 <위선의 태양>에서 볼 수 있다(이 영화에는 그의 딸 나디야가 함께 출연하며, 그가 황제 알렉산드르 3세로 등장하는 영화 <러브 오브 시베리아>에는 큰딸 안나도 나디야와 함께 출연한다). 소비에트의 영화 권력이었던 본다르추크와 마찬가지로 미할코프 또한 포스트-소비에트의 한 영화권력으로서 모스크바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본다르추크와는 다르게 내가 일부에서는 국수수의자라고 비난하기도 하는 미할코프를 신뢰하는 이유는 순전히 그가 영화를 잘 만들기 때문인데, 더구나 그게 ‘체호프적인’ 영화일 경우에는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어주는 수밖에 없다. 액션이나 스릴러 같은, 혹은 멜로드라마나 코미디라도, 장르영화의 경우에는 인간성이 모자라거나 더러운 감독도 잘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 없이 체홉의 작품을 영화로 잘 만든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그것이 나의 편견이라면 편견이다). 왜 그런가? 체홉 작품의 중심은 ‘잘난 놈들’의 이념이나 행동이 아니라 ‘못난 놈들’의 무능력과 불가피한 회한이기 때문이다. 단편소설과 중편소설까지는 썼지만 그가 장편소설은 쓰지 못한/않은 이유가 나는 거기에 있다고 본다. 그는 장편을 지탱할 만한 이념이나 행동을 인물에게 부여할 수 없었다. 그가 쓴 것은 고작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드라마들이었다.

한 연구자의 표현을 빌면, 그의 희곡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하나같이 ‘등신들’인바, 등신들을 데리고는 장편소설을 꾸려나갈 수가 없다. 그들은 모험에 나설 만한 용기도, 여자들을 꼬실 만한 재간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렇다고 사색가나 사상가들도 아니다. 그러니 무슨 ‘소설’이 되겠는가? 참고로, 그의 작품들에 자기 이름을 가지고 등장하는 인물들의 총 2,355명이다. 이건 내가 조사한 게 아니라 어제 나온 <니자비씨마야>의 신간 서평에서 읽은 것이다. 체호프에 관한 최신간의 제목은 <안톤 체호프의 모든 주인공 – 모든 러시아>(2004, 256쪽)인데, 저자는 마리나 트카첸코이고 책은 일종의 등장인물사전이다(요컨대 A에서 Z까지). 그리고 이 인물들의 숫자가 말해주는바, 책의 부제대로 ‘모든 러시아’ 혹은 ‘러시아 전체’를 카바하고 있다.

더불어 체홉의 작품을 영화/연극에서 연기한 유명한 배우들의 이름들까지도 망라하고 있다니까 러시아 ‘백과사전’으로도 손색이 없겠다(물론 서평자는 몇 사람이 빠졌다는 지적을 하고 있지만). 저자인 트카첸코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서도 완전한 등장인물 목록(=사전)을 만들 계획이라고 하는데, 그녀도 좀 오래 살아야겠다(책 구경을 하려면 나도 오래 살아야겠고). 하여간에 2,355명이 등장하는바, 그 대부분이 ‘등신들’이며 그러한 인간들의 무능력(나약함)과 회한을 이해할 만한 사람이라면, 인간에 대한 연민을 평균치 이상 갖고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는바, 우리가 그런 사람을 믿어서 손해 볼 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미학교수인 처남(세레브랴코프)을 숭배하면서 25년간을 그 뒷바라지 하느라 ‘도스토예프스키’(=잘난 소설가)도 ‘쇼펜하우어’(=잘난 철학자)도 되지 못한 우리의 ‘바냐 아저씨’의 경우가 웅변적을 말해주듯이, 체홉의 인물들은 “될 수도 있었던” 혹은 “할 수도 있었던” 삶의 중요한, 결정적인 모멘트들을 두 눈 다 뜨고 놓쳐버린 가련한 ‘등신들’이다(3막에서 분노가 폭발한 바냐는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있는 세레브랴코프에게 총을 쏘지만 그마저도 빗나간다). 그걸 확인한 이상, 차라리 ‘자살’이라도 하면 본때라도 날 테지만(<갈매기>에서 권총 자살하는 트레플료프처럼), 이 ‘등신들’은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아무런 희망 없이 담담한 회한만을 가슴에 안은 채 예전의 삶으로, 일로 되돌아간다. 정말 등신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말이다. 누가 그들의 ‘등신스러움’을 비웃을 수 있을까? ‘도스토예프스키’와 ‘쇼펜하우어’가 아니라면, ‘영악한 놈들’뿐이다. 내 생각에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제법 잘난 소설가와 철학자들은 그다지 많을 거 같지 않으므로 대부분은 ‘영악한 놈들’일 확률이 높다. 다시 말해서, 만약에 당신이 체홉의 문학이 다소 싱거우며 별거 아니라고 생각한다면(혹은 아직도 별로 읽은 게 없다면), 당신은 자기 생각에 아주 ‘똑똑한 사람’이며(적어도 ‘똑똑한 체하는 사람’이며), 나의 분류에 따르면 아주 ‘영악한 놈’이다.

이런 일에는 굳이 발뺌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세상의 한편엔 등신들이 있고, 다른 한편엔 그들을 등쳐먹고 사는 영악한 놈들이 있는 것이니까(가령, 자치단체 의원이라고 뽑아놓으면 해마다 남들 휴가철에 ‘의원외교’ 하러 ‘해외연수’ 가는 놈들 말이다. 혹은 외제차 타고 다니는 ‘일부’ 주지/목사님들 말이다. 또 짜집기한 리포트로 학점 잘 받았다고 좋아하는 ‘일부’ 대학생들이나, 표절한 논문으로 연구비 타먹는 ‘일부’ 교수님들 말이다). 이런 ‘영악한 놈들’이 권력의 맛을 좀 알면 ‘사악한 놈들’이 되는 건 시간 문제이다.

해서 나는 교육적인 목적에서뿐만 아니라 ‘세계평화’를 위해서라도 젊은 세대들에게 체호프를 보다 많이 읽히고 이해시킬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리하여 자신의 ‘등신스러움’에 대해서 부끄러워하거나 한탄할 게 아니라 ‘등신스러움’의 그 유구한 보편성(!)에 대해서 제대로 인식하고, 등신들끼리의 ‘연대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를 합창하는 정신으로). 물론 세상은 등신들이 바꿔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건 아마도 ‘도스토예프스키’(혹은 ‘체르니셰프스키’)나 ‘쇼펜하우어’(혹은 ‘헤겔’)의 몫일 것이다(그런 결정적인 순간에 ‘도스토예프스키’와 ‘쇼펜하우어’를 주워섬기는 우리의 ‘바냐’는 얼마나 눈물겹도록 등신스러운 것인지!). 하지만 적어도 ‘영악한 놈들’한테 당하고만 살지 않기 위해서는 등신들의 확실한 주제파악이 필요하다. 자신이 등신인 줄 모르거나 8등신만 좋아하는 등신이 상(上)등신이므로.



<피아노를 위한 미완성 희곡>에 등장하는 ‘등신’의 이름은 ‘플라토노프’이다(사진). 그래서 체호프가 쓴 최초의 희곡이자 미완성 희곡(전집에는 ‘아비 없는 자식’으로 들어가 있다)인 이 작품은 <플라토노프>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35세이지만 이미 머리가 반 이상 벗겨진, 시골학교의 교사이다. 한편 소피야는 오래 전, 정확히는 7년 전에 헤어진 옛 애인 플라토노프와 우연한 자리에서 재회하는데, ‘젊은 이상가’였던 그가 고작 ‘교사’라는 사실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게다가 그에게는 소박하지만 촌스러운 아내 사샤가 붙어 있다. 반면에 플라토노프는 지적이면서도 강인한 여인 소피야가 어째서 한심하면서 유치한 ‘마마보이’ 귀족과 결혼했는지 의아해하며 그녀를 비난한다. 그리고 그들 사이엔 7년간 잊혀졌던 사랑이 다시 불붙는다. 이제 어찌해보기에는 너무 뒤늦은 사랑이…

미할코프는 러시아식 별장(=다차)의 파티에 모인 많은 사람들의 이런저런 얘기와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미묘하게 변화해가는 두 사람의 심리를 섬세하게 주시하면서, 때론 한 템포 늦춰 관조하면서 따라간다. 아마도 이 영화를 처음 보는 관객이라면, 너무 많은 인물들이 등장해서 떠들어대는 초반부가 얼른 눈에 익지 않을 것이다(나도 그랬으니까). 해서, 이 영화의 진면목, 곧 체호프의 진면목은 두 번, 세 번 보아야 알 수 있다(나는 대여섯 번 본 것 같다). 체호프의 단조로운 듯한 단편들도 두 번, 세 번 곱씹어 읽어야만 제맛을 느낄 수 있듯이 말이다. 해서, 그 ‘제맛’을 좀 느끼게 되면, 이 한심한 인물들의 ‘회한의 드라마’에 웃음이 터지고 눈물이 나오게 된다. “우리가 원했던 삶은 이게 아니었어!”(“하지만, 난 벌써 서른 다섯 살이야!”)



영화의 절정에서 회한과 절망이 폭발한 플라토노프는 울부짖으면서 주연장을 뛰쳐나가고 곧장 바닷가의 절벽으로 내달려간다. 그리고 그 뒤를 아내인 사샤가 “미셴까! 미셴카!”(플라토노프의 이름인 ‘미하일’의 애칭)를 울부짖듯이 다급하게 부르며 쫓아간다. 그 다음 장면은 혹 이 영화를 직접 구해볼 사람들을 위해서 말하지 않겠다. 다만, ‘아, 미할코프!’(혹은 ‘아, 체호프!’)에 값한다는 것만은 장담할 수 있다. 얼마나 눈물겨우면서 웃기는 장면인 것인지!..  

04. 07. 15./ 06. 07. 14.

 

 

 



P.S. <피아노를 위한 미완성 희곡>이란 제목에서 ‘피아노’는 영어로 ‘mechanical piano’이다. 이걸 ‘기계피아노’라고 하는지 ‘자동피아노’라고 하는지는 모르겠다. 영화 초반에 이 피아노가 등장하는데, 하인이 연주하는 척하지만 연주곡이 입력돼 있는 자동 피아노이어서 사람이 건반을 치지 않아도 저절로 연주곡이 흘러나온다(이걸 보고 사샤가 놀라서 현기증을 일으키며 쓰러진다). 이 자동피아노가 상징하는 바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건 ‘손 한번 못 대본 삶’이다. 즉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흘러가버린 삶, 등신 같은 삶이다. 내가 결석한 삶이며, 나 없이도 잘만 굴러가는 세상이다. 혹 이런 자동피아노가 매혹적이라고 당신은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등신이 아니라 ‘영악한 놈’일 확률이 높다. 더불어 ‘인간-등신들’보다는 ‘기계-인간들’의 미래를 더 선호할 가능성도.

‘기계-인간들’의 구호가 체르니셰프스키와 레닌의 구호, “무엇을 할 것인가?”(=슈또 젤라찌?)라면, ‘인간-등신들’의 구호는 “어떻게 할 것인가?”(=까끄 젤라찌?)이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떻게, 어떻게 할 것인가?”(=까끄, 까끄 젤라찌?)이다. 여기서 ‘어떻게’의 반복은 중요하면서도 필수적인데, 그것은 ‘어떻게’의 수단성과 방법론을 무력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해서 ‘젤라찌’라는 ‘하다(do)’ 동사는 별 의미가 없게 되며, 남는 건 “어떻게, 어떻게”(까끄, 까끄)이다. 이건 데리다가 조이스론에서 분석하고 있는 “예스, 예스(yes, yes)”의 체홉 버전이라고까지 말하고 싶을 지경인데, 어쨌든 이 “까끄, 까끄(kak, kak)”의 우리말 번역이 “어떻게, 어떻게”이며, 이걸 한 단어로 바꾸면 ‘어쩌자고’이다.

이 ‘어쩌자고’는 “이런 세상에, 어쩌자고, 세상에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다”고 시인 이성복이 노래/탄식할 때의 그 ‘어쩌자고’이다. 그의 시구에서 ‘어쩌자고’ 대신에 반복되는 것은 ‘세상에’인데, 뒤집어서 말하면, “까끄, 까끄”의 또 다른 우리말 번역은 “세상에나, 세상에나”이며, 그것은 흔히 등신들을 일컫는바 “인간아, 인간아”로 번역되어도 무방하겠다. 이 ‘어쩌자고’의 문학, ‘세상에나, 세상에나’의 문학, ‘인간아, 인간아’의 문학으로서의 ‘까끄, 까끄’ 혹은 러시아문학의 한 갈래로서의 ‘까끄, 까끄’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더 자세히 말하도록 하겠다(나는 이런 ‘등신짓’을 할 게 아니라 당분간 번역을 해야 한다).

한편, 미할코프의 <피아노를 위한 미완성 희곡>이 국내에 처음 출시된 것은 1991년도이다. 내가 특별히 비상한 기억력을 갖고 있는 건 아니고, 정성일의 영화평에 그렇게 나와 있다. 그는 1992년 1월에 <91년 비디오 베스트 10>을 꼽으면서 그 중의 한편으로 이 영화를 지목했다. 그대로 옮기면 “소련의 해체 뉴스가 91년도 뉴스 베스트 10에 낀다면 다음의 소련영화는 비디오 10편에 선정되어야 할 것이다. 니키타 미하르코프의 <피아노를 위한 미완성 희곡>(우진시네마)은 소련영화가 모두 프로파간다라는 이쪽의 선전이 거짓말임을 보여준다. 안톤 체호프의 원작을 화면으로 옮긴 이 영화는 섬세하며 서정적이고 부드럽다. 이러한 문화유산이 있는 한 소련은 해체될지언정 쉽사리 잊혀지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미하르코프’보다는 ‘미할코프’가 좀더 정확한 표기이며, “섬세하며 서정적이고 부드럽다”란 평에는 나도 동의한다(하지만, 후반부는 격정적이다). 

P.S.2. <시베리아의 이발사>(1998) 이후 한동안의 침묵을 깨고 니키타 미할코프가 두 편의 신작을 준비중이라는 소식이 들린다. 그 중 한편은 <위선의 태양>의 속편으로 전편의 배우들이 대부분 다시 캐스팅되었다. 미남 배우 올렉 멘쉬코프(아래 사진)와 미할코프의 딸 나제즈다(나디야; 나쟈, 위의 사진)도 다시 선보인다는 얘기. 내년쯤 개봉할 예정인 듯한데 제법 기다려진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마천 2006-07-17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이 아니라 <중간이층이 있는 집> 아닌가요? 주인공이 언니와 동생 두 여인과 회으주의적 남자주인공 나오는 그런 스토리 아닙니까? 이문열의 젊은날의 초상에도 이 책 이야기가 나오는데...

로쟈 2006-07-17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자매와 풍경화가가 나오는 이야기 맞습니다. <다락방이 있는 집>이란 번역만 봤는데, <중간이층이 있는 집>이라고도 번역돼 있군요. 중간이층이라기보다는 우리식 개념으론 '옥탑방'에 가깝습니다. 2층 위에 방 하나 더 얹어놓은 것입니다...

사마천 2006-07-18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문열 소설을 보면 주인공이 번안해가지고 문학회에서 자기가 지은 것처럼 발표했다가 망신을 당합니다. 당신만 외국어 아느냐고... ^^
당시는 불온서적이라 국내에 번역이 안되었다고 하더군요.
내용은 꽤 서정적인데 체홉까지 불온화하던 박정희 시대란 놀랍죠...

로쟈 2006-07-19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핏 기억이 나는데, 이 작품이었나요?^^
 

제목에서 영화 <수퍼맨 리턴즈>를 떠올리시지 못한 분들이라면 낭패감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나로선 비디오로나 보게 될 듯하지만, 최근에 개봉된 이 영화에 대한 사전인지 차원에서 리뷰 하나를 옮겨놓는다. '오동진의 동시상영관'에서 가져온 것인데, 예전엔 YTN의 '씨네24'에서도 곧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영화평론가 그 사람이다(강우석 감독에 대한 책도 냈다). 가장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균형잡힌 시각으로 바라본 영화의 핵심을 잘 짚어준다. <수퍼맨 리턴즈>의 경우도 예외는 아닌 듯싶다.

문화일보(06. 07. 04) 돌아온 수퍼맨을 다룬 영화 <수퍼맨 리턴즈>는 양가적이고 중의적인 영화다. 양가적이고 중의적이라면 어디 <수퍼맨 리턴즈>뿐이겠는가. 할리우드 영화들, 특히 여름철에 집중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은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으면 죄다 중의적으로 읽을 수 있는 텍스트들이다.

-<수퍼맨 리턴즈>야말로 그런 면에서 전형적인 작품이다.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여전히 세계의 각종 현안을 미국인(물론 크립톤 행성 출신이긴 하지만, 미국인 농부에 의해 길러진) 영웅이 혼자서 해결해나가야 한다는 식의 강박증을 갖고 있는 모습에 혀를 끌끌 차게 된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수퍼맨이란 초현실적 캐릭터가 처한 여러 상황을 통해 미국의 현재를 성찰해내려는 태도가 읽히기도 한다. <수퍼맨 리턴즈>는 그렇게, 후자의 의미로 더 읽힐 수 있는 작품이다. 단순히 ‘팍스 아메리카나’의 이데올로기를 그린 작품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 의미를 담고 있는 작품이라는 얘기다.

-이번 영화를 만든 브라이언 싱어는 거기서 몇걸음 더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지금의 미국사람들이 혹은 세계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진정한 수퍼맨을 갈망하고 있는지를 그린다. 예컨대 이런 얘기를 통해서다. 극중에서 수퍼맨의 연인인 로이스(케이트 보스워스)는 5년간 말없이 자신 곁을 떠나 있었던 수퍼맨 때문에 잔뜩 화가 나 있는 상태다. 그녀는 ‘왜 우리는 더 이상 수퍼맨을 필요로 하지 않는가’란 기사로 퓰리처상까지 받게 된데다 수퍼맨 따위는 싹 잊은 척하고 편집국장의 조카인 리처드(제임스 마스덴)와 오랜 동거 끝에 아이까지 낳아 기르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다시 펜을 들어 새로운 기사를 써야 할 처지에 놓인다. 그녀의 새 기사는‘우리에게 수퍼맨이 필요한 이유’다.

-애인 로이스가 왔다갔다 한 것처럼 우리들 역시 수퍼맨에 대한 애증이 왔다갔다 했다. ‘수퍼맨 시리즈’가 처음 시작됐던 1978년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수퍼맨을 원했다. 영웅을 원했다. 자신들을 이끌 진정한 지도자를 원했다. 베트남전의 후유증과 만성적인 경기불황으로 극도의 사회적 정치적 혼란이 너무나 지긋지긋했으니까.

 

 



 

-그러나 막상 레이건 시대가 개막되고, 이른바 레이거노믹스라는 대증요법에 따라 일시적인 대 호황국면이 도래하면서 사람들은 그토록 갈망했던 영웅을 저버렸다. 영화속 로이스가 ‘더 이상 수퍼맨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사람들 역시 수퍼맨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착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은 또 달라졌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은 극도로 혼미한 상태에 빠져 있으며 경제적으로도 극단적 양극화로 고통받고 있다. 로이스가 그랬듯이 사람들 역시 ‘수퍼맨이 다시 필요해진 것’이다. ‘수퍼맨 리턴즈’에서 수퍼맨이 맨 처음 해결하는 사건은 여주인공 로이스 등 기자단을 태운 비행기가 양 날개를 잃은 채 경기가 열리는 야구장 한가운데로 추락하는 것이다.

-이 사건은 사실 수퍼맨의 영원한 경쟁자인 렉스 루터가 조장한 것이다. 누군가에 의해 저질러진 비행기 사고로 대규모 사상자가 날 뻔했던 그 같은 상황은 단박에 어떤 사건을 떠올리게 하며 따라서 이 영화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고, 또 어디로 갈 것인지를 곧바로 상징해낸다. 미국은 9·11 테러의 트라우마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수퍼맨 리턴즈’같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많이 보면 미국문화병이 걸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지나치게 단선적인 생각이다. 편협한 생각이다. 영화는 어떠한 관점으로 보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수퍼맨 리턴즈’같은 영화야말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할리우드로 대변되는 미국 대중문화뿐 아니라 지금의 미국사회가 어떤 고민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다. 수퍼맨에게 자꾸 마음이 끌리는 건 그 때문이다.(*그렇다고 해서 영화관으로 발길을 옮기도록 할 만큼 끌리는 건 아니다. 근데, 크립톤성에도 성형외과가 있나?)

06. 07. 12.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woshot 2006-07-13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동진의 '우왕좌왕'을 이해 못할 건 아니지만 [슈퍼맨 리턴즈]에 대한 묘사로는 한참 부족합니다. 이 영화는 엑스맨의 마그니토(2차 세계대전의 폴란드수용소에서 살아남은)가 슈퍼맨(메시아)으로 변신한 얘기에 가깝습니다. 너무 우아하게 나오니까 그걸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는 거죠. 크립톤행성의 출신자/유태인/게이가 우아하게 하늘을 날아다니면 그저 입을 벌리고 감탄하며 바라보면 좋을 것을...

로쟈 2006-07-13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arcus님의 우아한 리뷰를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아님,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경제학 책을 내가 사서 읽는 일은 드물지만 그렇다고 없지는 않다(지금은 모두 박스에 들어가 있지만 이 분야의 책도 30여권은 될 듯하다). 다만 최근 몇 년간 경제/경영 관련서를 구입한 기억이 없다(하긴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으니!). 물론 바타이유식의 '일반경제'라면 사정은 달라지고 나는 그쪽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관심이 제한되어 있는 쪽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경제, 곧 '제한경제'일 따름이다. 그걸 나는 다리 '속좁은 경제'라고 부르고도 싶다. 북리뷰들을 훑어보다가 '가장 쉬운 경제학 입문서'라 이름붙일 만한 책의 리뷰가 눈에 띄길래 옮겨온다. 얼마전 출간된 <일상의 경제학>(더난출판사, 2006)에 대한 리뷰인데 문화일보 김종락 기자의 것이다.

문화일보(06. 07. 07) 인생이 무엇이냐고? 경제학을 읽어라!

-일부다처제는 남성에게 천국인가, 지옥인가. 혼잡한 고속도로에서 잘 빠지는 옆 차선으로 옮길 때마다 왜 머피의 법칙이 작용하는가. 스커트 길이가 짧아지는 것은 경기가 나아지고 있다는 신호인가, 그 반대인가. 스커트 길이와 경기의 상관관계야 경제를 이야기할 때 흔히 회자되지만, 여타의 질문들은 경제학과 관계가 없어 보인다. 특히 일부다처제 같은 주제는 효율을 제1원리로 하는 경제학의 원리와는 정반대의 이야기로 여겨질 만하다. 그럼에도 <일상의 경제학>은 경제학이야말로, 이런 문제에 가장 훌륭한 답을 내놓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거의 모든 일상의 순간들이 경제학적 상황에 놓여 있고, 경제학적 설명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 (FAZ)’의 경제전문 에디터인 저자 하노 벡 박사는 경제학이 각종 도표와 수식으로 가득한 골치 아픈 학문이며, 일부 학자들의 전유물이라는 오해를 바로잡는 데서 책을 시작한다. 경제학이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 것만 기계적으로 따지는 학문이 아니라, 보다 근저에서는 인간의 욕망을 다루는 심리학이라는 것이다(*이건 경제학의 확장인가, 자포자기인가?). 현대인의 매 순간이 경제학적 활동의 연속으로, 남녀 간의 연애에서 밀고 당기기를 할 때조차 경제학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쯤에서 책에 기대 앞의 문제를 풀어보자. 일부 남성들이 꿈처럼 이야기하는 일부다처제. 여기서 가장 큰 걸림돌은 남성과 여성의 비율이 1대1로 비슷하다는 것이다. 능력있고 잘 생긴 일부 남성들이 여러 여성들을 차지할 경우 나타나는 것은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이다. 평범한 남성들은 일부 빼어난 남성들로 인해 확 줄어든 여성 가운데 한 사람이나마 차지하기 위해 쟁투를 벌일 수밖에 없다(*예전에 일본인 저자가 쓴 <결혼경제학>이란 책도 출간됐었다. 그걸 읽었다고 해서 내가 도움을 받은 바는 하나도 없지만).

-여성을 두고 쟁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 뼈 빠지게 돈은 벌어주되 요구는 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가능하고, 설거지며 빨래, 청소, 육아를 도맡아 하겠다는 전략도 가능하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여성을 얻는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혼 시장에 남성은 여전히 넘치기 때문이다. 여성의 요구가 보다 다양해지고 높아질 수밖에 없다. 예상과는 다른 남성의 지옥이다.

-혼잡한 도로나 할인마트의 줄에서 머피의 작용이 작용하는 것도, 경제학에서 다루는 인간의 욕구와 관련돼 있다. 도로에서 한쪽 차선이 잘 빠지면, 필연적으로 차선을 옮겨 타는 차량이 생긴다. 문제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뿐만 아니라는 것이다. 우르르 차선을 바꾸다 보니 잘 빠지던 차선이 정체되는 반면, 좀 전의 차선은 멀쩡하게 빠진다.

-그래서 옮겨 타면 또다시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도로의 차선이나 할인마트의 줄 같은 것이야 조정이 빨리 이뤄지지만, 조정 사이클이 긴 농산물이나 직업 시장은 상황이 다르다. 고추 파동이며 돼지 파동이 일어나고, 한때 대접깨나 받던 직업이 천덕꾸러기로 전락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책은 미니스커트의 길이와 경제의 상관관계도 심리학으로 설명한다.

“여성들이 짧은 스커트를 입을 때는 언제일까. 아마도 낙관적인 분위기 속에서 뭔가를 감행하고 싶을 때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기분은 바로 경기가 호황을 이룰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의 기분과 같다.”



-이야기는 얼마든지 확장이 가능하다. 이를테면 여성들의 패션이 화려하고 실험적이라면 경제상황 또한 낙관적이라고 볼 수 있다. 책이 경제학으로 설명하는 일상은 이뿐 아니다. 왜 청바지는 직장의 유니폼이 될 수 없는가, 영화에서 여자 친구를 인질로 잡은 갱의 위협에 굴복해 총을 내려놓는 것은 왜 현실적이지 못한가, 농업보조금이 반경제적인 이유는, 내기는 도박인가 게임인가….

-경제학자인 저자가 이런 문제에 적절한 해답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은 경제학이 인간의 욕망해소, 선택과 집중, 계산과 저울질을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책이 주제별로 배치해 솜씨좋게 풀어놓은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수요와 공급, 기회비용, 가격의 탄력성, 게임이론, 죄수의 딜레마 등 경제학의 주요 개념이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이런 점에서 책은 현실과 동떨어진 채 난해한 개념이나 복잡한 수식을 늘어놓는 경제학 전문 서적이나, 전체 경제에 대한 조망없이 말초적으로 돈버는 기술만 전수하는 재테크서와 구별된다. 더불어 일상에 녹아든 경제학의 논리가 얼마나 흥미로운 것인지도 자연스럽고 우아하게 전한다. 맛깔스러운 번역으로 글만 읽어도 이해하기에 전혀 어려움이 없는 책, 편집자들은 여기에 그림과 만화까지 덧붙여 더러 미소까지 머금으며 읽을 수 있게 만들었다.


 

 

 


(*)언젠가 전공서로서 가령 <맨큐의 경제학> 같은 책을 그 '명성' 때문에 한번 읽어볼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984쪽짜리 경제학서를 읽는 게 과연 내게 '경제적인' 일인지 끝내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남들 경제학개론 들을 때 나는 문학개론이나 듣지 않았던가?). 259쪽짜리 <일상의 경제학>이라면 사정은 좀 다를 수도 있겠다(<괴짜경제학>이나 <경제학 콘서트> 같은 책들도 취지는 유사하다). 하지만, 가장 '경제적인' 일은 이런 잡스러운 관심들을 잡아매고 팔릴 만한(?) 책을 한권 쓰는 게 아닌가란 생각이 문득 스치고 지나간다...

06. 07. 12.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oonta 2006-07-12 23:18   좋아요 0 | URL
경제학원론정도의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일상의 경제학>이라던가 <쾌도난마 한국경제>등과 같은 책을 읽는다는건 영문법을 공부하지 않고 영문독해를 하려는 시도와 비슷하다고 봅니다. <맨큐의 경제학>이나 <경제학원론>같은 책을 한번 통독해보는 것은 그다지 품을 많이 팔지 않는 일입니다. 제가보기에는 그런 초급 경제학전공서을 읽는 것이 본격적인 철학책 한권 읽는 것보다는 훨씬 쉽습니다.

로쟈 2006-07-13 00:11   좋아요 0 | URL
일반경제 얘기도 꺼냈지만, 제가 '공학적' 경제학(센이 그렇게 부르더군요)에 대해 갖는 불만은 경제에 작용하는 경제 '외적' 변수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알고 있는지 의문스럽다는 것입니다(이진경식 표현을 쓰자면, '경제학의 외부'를 경제학은 다룰 수 있느냐는 것. 더불어, 그것이 경제에 영향을 미친다면, 그게 왜 '외부'냐는 것). 넓게 보아 '계량적/계산적 합리성' 이상을 보여줄 수 있는 건지(경제학 개론을 듣던 친구는 시험공부한다고 얼심히 계산문제 풀더군요). 더불어, 기본은 고등학교때 다 배웠다는 '자만'도 있는 거죠(부동산과 주식 투자만 빼고)...

yoonta 2006-07-13 00:39   좋아요 0 | URL
님이 말씀하시는 "일반경제" 혹은 이진경의 "경제학의 외부"와 <경제학원론>은 조금 아니 많이 다르죠. 원론에서는 그런 경제 외적 변수는 고려치 않고 즉 다른 변수들은 일정하다고 가정하고 자신의 논리를 전개해 나가죠. 그건 어떻게 보면 다른 여타 과학과목과 비슷한 연구방식이죠. 그런 극히 제한되고 공학적이고 조작적인 논리전개로부터 우리는 많은 것을 얻을수도 있고 (특히 물리학이나 화학같은 순수과학분야에서는) 경제학과 같은 "일반경제" 혹은 "경제학의 외부"와 같은 외생적 변수들이 내생적 변수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는 분야에서는 그러한 인위적 제한은 그 경제학이라고 하는 학문자체의 본질에 대한 중요한 회의로서 제기될만큼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기도 합니다. 똑같은 경제학이라고하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양자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맑스주의 경제학과 주류경제학의 모습이 그런 문제점들을 보여주는 한 예이기도 하죠. 어쨋든 맑스의 자본론과 같은 "(주류)경제학의 외부 "와 경제학의 내부를 구분하려면 적어도 그 내부가 무엇인지 정도는 대충 알아볼 필요는 있단 거죠..^^ 공무원시험이나 고시공부할것 아니면 한 두번정도 읽고 이해하는 수준정도만 봐주면 일반경제와 주류경제학전반을 어느정도 조망하는데 분명 도움이 될겁니다..^^

로쟈 2006-07-13 00:42   좋아요 0 | URL
이 페이퍼의 주제이기도 한데, 경제면의 기사를 읽는 데 장애가 없다면 그럴 만한 '투자'의 필요성을 제가 갖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라는 얘기지요.^^

yoonta 2006-07-13 00:45   좋아요 0 | URL
근데 경제면의 기사를 읽는데 장애가 옵니다..솔직히..경제학원론을 잘 모르면..-_-
가령 왜 최근들어 GNP를 사용하지 않고 GDP를 사용하느냐하는 것등의 이유는 원론을 모르면 이해하기 힘들죠..

로쟈 2006-07-13 00:52   좋아요 0 | URL
저는 솔직히 컴퓨터에 대해서도, 자동차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데, 오히려 실생활에서는 그런 '무지' 때문에 불편하거나 타박을 받곤 합니다. 혹은 부동산 시세에 대한 무지. 요컨대, 모든 공부는 유용하지만 인생은 짧고 벌이는 항상 모자라는지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瑚璉 2006-07-13 11:54   좋아요 0 | URL
경제 원론을 읽는 것은 1) 이른바 '경제학적 마인드'를 접할 수 있고, 2) 경제학의 큰 틀을 조감할 수 있다라는 점에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경제쪽이 전공은 아니지만 '맨큐의 경제학'은 한 번 읽어보았는데 확실히 그 정도 노력을 할만한 가치는 있다는 생각입니다.

로쟈 2006-07-14 14:45   좋아요 0 | URL
'원론'적인 문제로 되돌아왔네요.^^
 

 

 

 

 

엊그제 <문학동네>(2006년 여름호)에서 <강산무진>의 작가 김훈과의 대담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나서 오랜만에 '김훈'을 검색하다가 찾은 기사를 옮겨온다. 지난달말 한겨레에 실렸던 모양이다. '전직 한겨레 기자 김훈'과의 인터뷰?

한겨레(06. 06. 30) "<한겨레> 지면에서 의견과 사실을 구별해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요. 의견을 사실처럼 말하고, 사실을 의견처럼 말하지 말라는 거예요.” 목소리를 높이고선 겸연쩍은 듯 씨익 웃습니다. 2년만 있으면 환갑인데 웃는 그의 모습은 유년시절 장난꾸러기 같습니다.

-김훈. 2002년 한겨레 사회부 기동팀 기자. ‘하니바람’에 김훈을 쓰면 어떨지를 한겨레 사람들에 물어봤습니다. 고개를 가로젓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김훈의 보수성이 한겨레와 맞지 않는다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휴머니즘에 가득 찬 김훈 같은 보수주의자를 품을 수 없다면 어찌 한겨레일까요. 고개를 끄떡인 사람이 더 많아, 만나보기로 했습니다.

-지난달 26일 부슬부슬 비 오던 날. 김훈은 훌쩍 떠난 지 4년 만에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를 찾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한겨레가 많이 변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좋은 말을 기대하지 않았지만 되돌아 온 건, “의견과 사실을 구별하라”였습니다.

-2002년 2월 그는 바바리코트 깃을 올리고 종로경찰서 기자실에 들어섰습니다. <시사저널> 편집장에서 경찰기자로 ‘백의종군’한 것이지요. 팀장의 지시를 하늘처럼 받들었던 그는, 반백의 머리카락 휘날리며 ‘현장’을 뛰어다니며 기사를 썼습니다(*나도 그 기사를 즐겨 읽었다).

-한겨레에 오자마자 24시간 맞교대하는 철도 노조원들의 열악한 노동 현장을 보여줬습니다. 3월에는 부산 중국민항기 추락 현장을 다녀왔습니다. 6월 월드컵 거리응원 현장에서도 취재하는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여름에는 허원근 일병 의문사에 매달려 강원도로 뛰어다녔고, 그해 겨울에는 노무현-이회창 후보가 맞붙은 대선현장을 취재했습니다. 기동팀에 있을 때 기억나는 것을 물어봤습니다. ‘월드컵 거리응원’이라고 말하더군요. “우리가 자랐던 시절하고는 정말로 다르더만 ….”

-그는 한겨레 있으면서 100여편이 넘은 기사를 썼는데, 압권은 ‘거리의 칼럼’이었습니다. 그의 칼럼은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원고지 3.5매의 짧은 글안에는 현장을 볼 수 있고, 팩트가 녹여져 있었습니다. 막판 반전은 치밀했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스타일리스트 김훈의 칼럼은 한겨레 기자뿐 아니라 경쟁지 기자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한 때 젊은 기자들 사이에선 김훈의 ‘간결체’와 ‘막판 뒤집기’를 따라하려는 어줍잖은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데스크들로부터 판판이 깨졌습니다. 기본이 안 돼 있으면서 기교만 부린다는 것이지요.

-한겨레 얘기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고민하던 그가 입을 열었습니다. “사실에 입각한 객관적 저널리즘으로 존재하느냐, 아니면 하나의 사회세력으로 존재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지요.” 그의 말은 이어졌습니다. “진보니 보수니 따지는 것에 앞서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을 어떻게 다룰지 고민해봐야 합니다.” 김훈에게, 한겨레의 존재이유를 물어봤습니다. “한겨레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강자와 다수가 아닌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생각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김훈의 검지와 중지 손가락에는 굳은살이 깊이 박여 있습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박지성 발처럼 못생겼습니다. 김훈의 울퉁불퉁한 손가락을 보면, 그가 한 문장을 만들기 위해 연필로 꾹꾹 눌러 썼다 다시 지우개로 지우는 고독한 모습이 떠오릅니다. 수십 번의 이런 과정을 거쳐 그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냈겠지요.

-그와 인터뷰를 하는 중간 중간 어디에서 개소리가 들렸습니다. 진원지는 그의 휴대전화였습니다. 그에게 전화가 올 때마다 휴대전화는 ‘왕~왕~왕~’ 울었습니다. “내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지냈어요. 은둔이나 자폐가 아니죠. 혼자 있을 때 가장 생산적이고 가장 바쁘고, 가장 재미있어 혼자 있을 수밖에 없어요”라고 말하는 그에게 휴대전화는 방해자일뿐이겠지요.

-뒤풀이로 간 밥집에서 그와 그를 찾아 온 한겨레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유쾌한 자리였습니다. 김지하 시인이 도마에 오르고, 북한 작가들의 혁명성과 남한 작가의 퇴폐성이 맞부딪혔습니다. 무지몽매한 젊은 놈들과 글 나부랭이들이 밥상에서 마구 마구 씹혔습니다. 인터넷 한겨레(hani.co.kr)와 7월1일 문을 여는 'e하니바람'(hanibaram.hani.co.kr)에서 뒤풀이편을 기대하십시오.

그 뒤풀이가 어떻게 이어졌는지는 모르겠다. 삶의 구체성과 관련하여 보다 흥미로운 <문학동네>의 대담을 잠시 인용한다. <칼의 노래>에서 도망가는 놈들에 대하여. 

"김학종이라는 놈인데 여자를 싣고 도망가다가 잡혀 죽는데, 나는 그 도망가는 놈이 인간으로서 존엄하다고 생각해요. 인간이면 도망갈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지. 그렇잖아요? 나는 일본으로도 안 가고 이순신에게도 안 가고 내가 좋아하는 섬으로 가겠다고 배를 가지고 실천할 줄 아는 젊은이가 그 시대에도 있었던 거야. 그런 것이 인간의 고귀함을 입증하는 것이죠. 꼭 이순신 밑에 가서 죽는 것이 고귀한 게 아니잖아... "(*'탈주'라는 게 바로 그런 거잖아? 이 정도 모르고 작가를 한다고 할 수는 없는 거잖아?)

"그런데 그때 도망간 놈들은 다 예술가에 준하는 놈들이었을 거예요... 인간이 그럴 수 있어야 맞는 것이지. 조국을 위해서 죽은 많은 선배들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개개인의 목숨을 요구하는 조국은 좋지 않은 조국이죠. 도망갈 줄 아는 것이 인간의 고귀함이죠. 그러니까 내가 파시스트가 아니잖아."

"삶의 구체성을 존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고, 인간의 탈을 쓴 예술가인 것이지. 그것이 파시스트냐 아니냐 하는 것을 얘기한다는 것은 공허한 것이지. 나는 도망가는 자들이 인간의 존엄을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럴 줄 알아야 인간이지. 그러나 그놈은 잡히면 또 죽어 마땅한 거죠. 사형당함으로써 자기의 존재를 완성하는 것이지. 이순신은 도망병을 죽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또 젊은 놈은 애인 데리고 도망갈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런 것이지."(*<청소년을 위한 칼의 노래>도 있는 모양인데, 이런 걸 청소년들에게 읽힐 수는 없지 않은가? 그들은 이순신 밑에 가서 죽는 것이 고귀하다는 대목까지만 읽을 일이다.)

 

 

 

 

그래, 그런 것이다. 도망가는 자들의 존엄성을 안다는 건 작가로서 기본이긴 하지만(그렇다고 기본을 갖춘 작가가 흔한 건 아니다), 그리고 비록 아직 '삼인칭 소설'을 못 쓰는 작가이지만, 작가 김훈을 내가 신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훈의 보수성이 한겨레에 맞지 않다면, 나는 김훈을 택하겠다...

06. 07. 12.


댓글(7)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06-07-13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을 좋아합니다. 저 칼의 노래 읽은 적이 있는데 문장이 상당히 묵직해서 눌리는 기분이었죠. 언젠가 다시 한번 읽어야지 벼르고 있습니다.
마침 요즘 불멸의 이순신 다시 재방송 해 주던데 참 좋더군요. 본방 때 못 봤거든요. 텍스트 버전이 김훈과 김탁환거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극작가들은 김탁환 것을 더 많이 참고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거 가져갈게요.^^

로쟈 2006-07-13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하도 '안티'가 많아서 누굴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도 가려서 해야 하는가 봅니다. stella09님의 당당함이 보기에 좋습니다.^^

stella.K 2006-07-13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왜 김훈을 싫어하는지 모르겠어요. 근데 그게 그냥 취향이 안 맞아서 그런 거 아닌가요? 아님 제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건지 원 알 수가 있어야 말이죠.

로쟈 2006-07-14 0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취향이라기보다는 자신과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고 보아서이고, 작가가 대놓고 '우익'을 자처해서였죠. 이전에 그의 인터뷰를 토대로 그 문제에 관한 페이퍼도 쓴 적이 있습니다.

stella.K 2006-07-14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렇군요. 답변 감사합니다.^^

로쟈 2006-07-14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어도 저는 김훈의 말과 행동이 일치한다는 점에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그게 따로 노는 진보쟁이나 보수쟁이는 아닌 거죠...

비자림 2006-07-14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잘 읽고 퍼가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