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한 제목이 없어서 그냥 '헌팅턴과 미국의 정체성 위기'라고 붙였다(이때의 정체성은 당연히 '국가 정체성'을 말한다). 실상은 <새뮤얼 헌팅턴의 미국>(김영사, 2004)의 한 문단 읽기이고, 재미있는 한 오역에 대한 지적이다. 마침 9.11과 관련된 내용이라 '시의성'은 있는 듯해서 적어둔다.

 

헌팅턴의 책은 '우리는 누구인가(Who Are We?)'란 원제와 (직역하면) '미국의 국가정체성에 대한 도전들(The Challenges to America's National Identity)'이란 부제(국역본에는 '미국의 정체성 위기'라고 돼 있다)에 충실한 내용으로 짜여져 있다. 그의 지적대로, 이 정체성 위기가 세계적인 차원의 것이라면 비단 미국의 국가정체성에 별로 관심이 없는 독자라 하더라도 참조할 만하다. 내가 읽을 대목은 '국가정체성의 위기'란 1장의 한 문단인데, 이렇게 시작한다.

"세상에 영원한 사회는 없다. 루소는 이렇게 얘기했다. "스파르타와 로마가 명망했는데, 어떤 나라가 영원히 계속될 수 있겠는가?" 가장 성공한 사회들조차도 언젠가는 내부 분열과 해체의 위협에, 그리고 더 격렬하고 무자비한 외부의 야만적 힘에 노출된다. 결국에는 미국도 스파르타와 로마, 그밖의 인간 공동체들과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다."(28쪽)

여기까지는 흔히 말하는 '제국의 종말'론을 따른다(더 나가면 '문명의 붕괴'가 되겠다). 헌팅턴의 입장은 그래도 그러한 '자연적인' 종말을 좀 지연시켜보자는 것일까?

역사적으로 미국의 정체성 실체는 인종, 민족, 언어와 종교로 대변되는 문화, 그리고 이념이 규정했다. 그중에서 인종과 민족에 의한 미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문화에 의한 미국은 위협을 받고 있다. 소련의 경험이 잘 보여주듯이, 이념은 공동체의 인종, 민족, 문화의 원천이 부족한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힘이 부족하다. 그래서, 로버트 캐플런이 주장했듯이, 일부에서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 미국은 처음부터 죽기 위해 태어났는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헌틴턴이 국가정체성의 구성소로 카운트하고 있는 것은 (1)인종(race), (2)민족(ethnicity), (3)문화(culture), (4)이념(ideology), 네 가지이다(문화의 가장 중요한 구성소는 언어와 종교이다). 이 중 미국의 경우에 인종, 민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다인종, 다민족 국가인 만큼 인종과 민족은 더이상 미국의 국가정체성의 변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이겠다), '미국식' 문화라는 것도 쇠잔해간다는 것. 그렇다면 남는 건 이념, 곧 이데올로기뿐인데. 이건 소련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확실한' 구성소가 못된다. 결론적으로 미국의 국가정체성이라는 게 아주 취약하다는 얘기이다. 인용문의 '로버트 캐플런'은 최근에도 <제국의 최전선>(갈라파고스, 2007)이 우리에게 소개된 '로버트 카플란'을 가리킨다.   

"그러나 일부 사회는 자신들의 존재를 위협하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할 때 국가정체성, 국가의 목표, 그리고 공동의 문화 가치를 갱신해 붕괴와 해체를 연기시키고 중단시킬 수 있다. 미국인들은 9.11사태 후에 그렇게 했다. 그리고 다가올 3001년에도 그들이 마찬가지로 직면한 도전은 공격을 받지 않아도 국가와 공동의 정체성을 계속 갱신할 수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28쪽)

이 대목은 오역이 포함돼 있으므로 원문을 같이 인용한다(예전과 달리 영문 인용이 깨져보이는 건 유감스럽다). "Yet some societies, confronted with serious challenges to their existence, are also able to postpone their demise and halt disintegration, by renewing their sense of national identity, their national purpose, and the cultural values they have in common. Americans did this after September 11. The challenge they face in the first years of the third millennium is whether they can continue to do this if they are not under attack."(12쪽)

'재미있는 오역'이라고 한 건 맨마지막 문장을 가리킨다. "그리고 다가올 3001년에도 그들이 마찬가지로 직면한 도전은 공격을 받지 않아도 국가와 공동의 정체성을 계속 갱신할 수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라고 옮겼는데, 뜸금없이 '3001년'이 왜 나오는가?(현실정치를 다루는 정치학자가 천년 후의 일을 왜 걱정하겠는가?) 역자가 좀 무신경하게 옮긴 경우인데, 'third millennium', 곧 '세번째 밀레니엄'은 3000년대가 아니라 2000년대이다. 그리고 'the first years'를 '3001년'이라고 해놓았는데 전문번역가의 솜씨라고는 믿기지 않는다(하청을 주었다면 몰라도).

다시 옮기면, "2000년대 초반에 그들이 당면한 도전은 외부의 공격을 받지 않더라도 그들이 그러한 일을 계속해나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국가라는 건 쇠퇴해가기 마련이지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러한 과정을 연기하거나 중단시킬 수 있다는 게 헌팅턴의 생각이다. 그리고 9.11이라는 국가적 도전에 직면해서 미국사회는 일시적으로나마 '단합'함으로써 확고한 국가정체성("우리는 미국인이다!")을 확인시켜주었다고 평가한다. 문제는 그러한 '단합'을 어떻게 상시화하느냐이다. 즉, 외부로부터 공격받거나, 9.11과 같은 비상시국이 아니더라도 어떻게 미국의 전통적인 가치와 국가정체성을 확고하게 유지해나갈 것이냐 하는 것. 그러한 문제의식(위기진단)과 나름의 해법제시가 책의 골자이다.  

물론 그 이면은 국가적 단합을 '상시화'하기 위해서 차선의 방책으로 계속적인 외부의 공격과 위협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내부적으로 어찌해보겠다는 거야 누가 말리겠는가...

07. 09.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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瑚璉 2007-09-05 22:02   좋아요 0 | URL
"third millennium" 말씀이지요?

로쟈 2007-09-05 22:28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귀가하는 사이에 '퀴즈'가 돼 버렸나요?^^
 

퇴근길에 전철에서 읽은 기사 하나를 옮겨놓는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의 한 사람인 '이자벨 위페르 특별전'이 열린다는 소식이다(위페르에 대해서는 예전에 옐리네크와 함께 잠깐 다룬 적이 있다. http://blog.aladin.co.kr/mramor/926588 침조). 특히 초기작 <레이스 짜는 여인>(1977)의 상영 소식이 눈에 띈다. 개인적으로 위페르를 처음 '발견'한 영화이기도 한데, 아마도 1989년에 TV에서 보았던 듯하다. 어즈버 18년 전이다.

찾아보니 위페르 특별전은 프랑스문화원에서 기획해서 전세계 순회를 하는 모양이다(호주 시네마테크에서 지난달에 열린 바 있다. http://www.qag.qld.gov.au/cinematheque/past_programs/2007/isabelle_huppert 참조). 클로드 샤브롤의 <마담 보바리>는 비디오로 갖고 있지만 <레이스 짜는 여인>은 어디서 구해보나? 상영일정이 (이미 지나간) 오늘과 일요일(9일)에만 잡혀 있다. 사소한 일로 조금 불행해지는군...  

문화일보(07. 09. 04) 佛디바 위페르 ‘30년 연기’ 한눈에

프랑스의 대표적 여배우 중 한 명인 이자벨 위페르의 매혹적인 연기를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행사가 열린다. 4일부터 11월11일까지 서울 대학로 하이퍼텍나다 극장에서 진행되는 ‘순수와 관능을 넘나드는 디바 - 이자벨 위페르 특별전’이 그것. 주한 프랑스문화원과 영화사 진진이 매주 화요일마다 진행해 온 ‘시네 프랑스’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마련된 행사다.

이자벨 위페르는 1971년 데뷔한 이후 30여년 동안 60여편의 작품에 출연해 왔다. 그는 순결한 처녀와 귀족 부인, ‘팜므 파탈’과 강박증을 지닌 중년 여성, 가족을 살해하는 살인마까지 다양한 인물을 자신만의 색깔로 창조해 왔다는 평가를 받는 배우다. 차가운 듯 열정적인 이미지는 다른 여배우에게서 느끼지 못하는 독특한 매력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는 칸, 베를린, 베니스 국제영화제 등 세계 3대 영화제의 연기상을 모두 수상했고 프랑스의 권위있는 영화축제인 세자르영화제 여우주연상에 12번이나 이름이 올랐을 정도로 연기력을 인정 받았다. 칸 영화제 본선에도 그의 출연작 16편이 올라 가장 많이 출품된 배우로 기록돼 있다.



이번 특별전엔 총 10편의 작품이 소개된다. 우선 그에게 두번째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겼던 ‘피아니스트’(2001년)는 국내 팬들도 가장 많이 기억할 작품. 위페르는 젊은 남자 제자와 비극적인 사랑에 빠지는 피아니스트로 출연, 중년 여성의 위태로운 심리와 욕망을 탁월하게 연기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위페르의 초기작 중 하나인 ‘레이스 짜는 여인’(1977년)도 상영된다. 미용실 보조로 일하는 순진한 소녀 베아트리스 역을 연기하는 앳된 모습의 위페르를 감상할 수 있다. 클로드 샤브롤 감독과 호흡을 맞춘 ‘마담 보바리’(1992년)와 ‘의식’(1995년)도 매작품마다 변신을 거듭하는 위페르의 연기력을 확인할 수 있는 영화들이다.



장 뤼크 고다르 감독의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인생’, 모리스 피알라 감독의 ‘룰루’ 등도 관객들을 만난다. ‘첫 눈에 반하다’ ‘이별’ ‘왕의 딸’ ‘약속된 인생’ 등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품들이어서 더욱 관심이 모아진다. 영화는 매주 화요일 오후 7시와 일요일 오후 4시에 상영된다. 특별전 기간 중엔 이자벨 위페르의 미니 사진전이 열린다. www.dsartcenter.co.kr, www.france.or.kr (강연곤기자)

07. 09. 04.

P.S. <레이스 짜는 여자>의 원작소설은 파스칼 레네(1942- )의 <레이스 뜨는 여자>(예하, 1989)이다('레이스 짜는'보다는 '레이스 뜨는'이 더 우아하지 않나?). 150쪽이 안되는 분량이지만 1974년 공쿠르상 수상작이다. 현재는 절판중인데 이 참에 다시 나와도 좋을 듯싶다.

제목은 '진주 귀고리 소녀'처럼 베르메르의 그림 '레이스 뜨는 여인'에서 따온 것이다(어째 우리말 제목이 다 다를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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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09-05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시간이 참 만만치 않군녀...

로쟈 2007-09-05 16:12   좋아요 0 | URL
핑계일 수도 있지만, 사실 목숨 걸로 영화를 볼 나이는 지났죠.^^;

nada 2007-09-05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위뻬르 언니가 레이스를 뜨다니.
그 손은 왠지 남정네 뺨 때리는 데나 적격인 거 같아서. -.-
젊은 시절의 위뻬르 언니가 궁금하네요.
EBS 9월 프로그램에 이자벨 위뻬르 영화가 한 편 있던걸요?
16일에 <사기>란 영화요. 로쟈 님께서 위뻬르 언니 팬이시라고 하니 살짝 귀띔해 드려요.

로쟈 2007-09-05 16:12   좋아요 0 | URL
그래도 결혼해서 잘 살고 있는 걸로 아는데요.^^ 귀뜀은 감사합니다...

anyone 2007-09-05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릴 적 명화극장에선가 본 <레이스 짜는 여인>은 이상하게 생생합니다. 거기에 나온 여자가 이자벨 위페르였군요. 이번 주말에 꼭 챙겨보아야겠습니다.

로쟈 2007-09-05 16:10   좋아요 0 | URL
저도 다시 봤으면 싶지만 가능하지 않은 시간대라.--;
 

미래파 관련 기사를 옮겨놓은 김에 미래파의 '산파' 중 한 사람으로 불리는 이장욱 시인에 대한 기사도 옮겨놓는다. 소설가와 비평가도 겸하고 있는 그이지만 이번에 미당 문학상 후보작을 소개하는 기사에 오른 이름이기에 '시인'으로 호명한다. 오후에 후배와 잡담을 나누다가 우연히 그의 시가 최종후보작에 포함됐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는데, 찾아 읽어보니 '미래파'와는 무관한, '소박한' 시여서 마음에 든다. '소규모 인생 계획'에서 열외가 아니기에 공감하는 바도 있고(그가 이런 시를 더 써주었으면 좋겠다). '비둘기' '펭귄' '북극곰' 등이 클리셰로 등장하지만 소시민적 상상력이란 게 본래 클리셰들로 채워지는 법이다...  

중앙일보(07. 08. 22) 미당·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⑨

“만만치 않은 문장력과 사회에 대한 통찰… 최근에 나온 소설 중 가장 돋보인다.”(소설가 공지영)

“한국 시의 모더니티의 한 극한에서 서정성 자체를 낯설게 하는 첨예한 시적 감각을 만나려 한다면, 그를 읽는 것은 강렬한 경험이 될 수 있다.”(평론가 이광호)

“김행숙·황병승·김민정 등의 첫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 해설은 모두 한 사람이 썼다. 그는 소위 ‘미래파’의 산파 중 하나다.”(평론가 신형철)

찬사에 또 찬사가 이어진다. 맨 앞의 것은 소설가를, 다음 것은 시인을, 맨 나중의 것은 비평가를 향한 상찬의 변(辯)이다. 그러나 이 모든 찬사는 오로지 한 사람만을 가리킨다. 이장욱. 그는, 문학 장르가 갈수록 쪼개지는 오늘, 시·소설·비평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그리고 장르마다 자신만의 입지를 구축한 전방위 문인이다.

문단에서 그는 소위 ‘미래파’라 불리는, 난해한 요즘의 젊은 시를 옹호하는 비평가로 더 알려져 있었다. 등단은 시가 가장 이르지만, 신형철의 말마따나 이장욱은 권혁웅과 함께 ‘미래파의 산파’로 통하던 참이었다. 그러던 그가 2005년, 소설가로 전격 데뷔한다. 처음 써봤다는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이 덜컥 ‘문학수첩 작가상’을 받은 것이다. 앞서 약력에선 시인의 이력인 시집 두 권만 적었지만, 그의 저작은 소설·비평집을 합쳐 다섯 권에 이른다. 그리고 올해, 그는 미당문학상 최종 후보로 선정됐다. 가장 궁금한 건 역시, 이장욱의 정체였다.

-정체를 밝혀라.

“끌리는 데로 가겠지. 시에 가장 오래 몸을 담고 있던 건 확실하다.”

-장르마다 당신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느낌은 물론 다르다. 밤과 낮의 느낌 같다고 할까. 내 경우는 시는 밤, 소설은 낮의 느낌에 가까웠던 것 같다. 어떤 시나 소설은 밤과 낮이 뒤섞이는 황혼의 느낌이었을 수도 있겠고.”

이장욱은 또 열심히 공부하는 문인으로 유명하다. 한때는 동네 독서실에서 온갖 부류의 고시생과 나란히 앉아 시를 읽고 시를 썼다(지금은 안 다닌단다). 하여 ‘공부해서 쓰는 시’란 쓴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공부해서 쓴 시라면 이처럼 처량하진 않을 터이다. 여기서 인용한 ‘소규모 인생 계획’은 거대 도시를 사는 소규모 인생의 옹색한 삶을 서글프게 드러낸다. ‘식빵 가루를/비둘기처럼 찍어먹고’나 ‘친구들은 하나 둘/의리가 없어지고/밤에 전화하지 않았다’란 대목에선 무언가가 얹힌 듯, 가슴 언저리가 먹먹했다.

비평가 이장욱은 환상에 기댄 시 세계를 지지하지만, 시인 이장욱은 자잘한 일상의 복판에 쪼그리고 앉아 있길 좋아한다. 동사무소나 오후의 공터, 횡단 보도, 엘리베이터 등 일상 속 공간이 두루 보이는 건 시인에게 “소시민의 자의식”(이광호 예심위원)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요일’이란 시어가 반복되는 것도 흥미롭다. 요일은, 기필코 되돌아오는, 하나 결코 이탈할 수 없는 일상의 족쇄와 같은 이미지를 자아낸다.

아마도 이장욱은 다음 세 가지 중 하나일 터이다. ‘우울한 모던 보이’(평론집 제목)이거나 ‘악무한의 쳇바퀴를 벗어나기 위한 다람쥐’(두 번째 시집 자서)이거나. 아니면 ‘유연하고 무표정한 고양이’(소설 작가의 말)거나. 아니다, 셋 모두일 수 있겠다.(손민호 기자)

07. 09.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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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07-09-04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시 신문에서 스크랩 해놓고는 처음 듣는 이 시인에 대해 궁금했었는데, 으흠...이런 사람이었군요.

수유 2007-09-04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연하진 않지만 무표정한 고양이 아닐까요? 해지는 현대백화점 옥상을 기웃거리는..
저는 <중독>을 좋아합니다. 수상했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이광호의 '서정성 자체를 낯설게 하는 첨예한 시적 감각' 에 동감합니다.

그리고 가져갈께요. 요즘 제 블록 너무 가난해서리..

로쟈 2007-09-04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어제의 거리를 다시 걷는 오후. 현대백화점 너머로 일몰. 이건 거의 중독이야. 하지만 어제는 또 머나먼 일몰의 해변을 거닐었지.

이제 삼차원은 지겨워. 그러니까 깊이가 있다는 거 말야. 나를 잘 펴서 어딘가 책갈피에 꽂아줘. 조용한 평면, 훗날 너는 나를 기준으로 오래된 책의 페이지를 펴고. 또 아무런 깊이가 없는 해변을 거니는 거야.

완전한 평면의 바다. 그때 바다를 바라보는 너로부터 검은 연필로 긴 선을 그으면, 어디선가 점에 닿는 것. 그 점을 섬이라고 하자. 그리고 그 섬에서 꿈 없는 잠을. 너는 나를 접어 종이비행기를, 나를 접어 종이배를, 나를 접어 쉽게 구겨지는 학을.

조용한 평면처럼 어떤 내부도 지니지 않는 것들과 함께. 그러므로 모든 것이 어긋나 버렸는지도 모르지. 서서히 늪에 잠겨가는 사람처럼, 현대백화점 너머로 일몰. 일몰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백화점 옥상에서, 지금 막 우울한 자세로 이륙하는 종이비행기.

2007-09-04 2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람혼 2007-09-05 0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기사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이른바 장르를 넘나드는 '전방위 문학인'이라 보다 더 기대하게 되고 애착이 가는 것 같습니다.

로쟈 2007-09-05 18:33   좋아요 0 | URL
'애착'까지요?!..

람혼 2007-09-06 03:07   좋아요 0 | URL
애착이 아니라면, 동병상련이랄까요? ^^; ㅎㅎ
 

오래만에 작년 문학판의 주요한 이슈였던 '미래파' 관련기사가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내친 김에 이슈 정리기사까지. 특정한 유파라기보다는 젊은 시인들의 시적 상상력의 어떤 경향을 지칭하는 말로 제시된 것이 '미래파'였는데, 문단에서는 여러 가지 파문을 불러일으켰었다(지금은 한 풀 잦아진 듯하다). 아무래도 '-파'가 함축하는 '패거리'의식이 호오를 불러일으킨 빌미였던 듯하다. 한 잡지에서 미래파라는 '비평적 호명'에 대해서 정작 시인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다소 뒤늦은 '반응'을 다루고 있다는데, 이들이 보여줄 '미래파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약간) 궁굼하다(사실 나는 젊은 시인들이 '소통가능성'에 대한 히스테리와 '시적 자유'에 대한 강박증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도 싶다). 결국엔 읽을 만한 시(인)들이 남게 될 것이다...

 

한국일보(07. 09. 03) "우리는 '미래파 논쟁' 에 갇혀있지 않겠다"

2005년 초 문학평론가 권혁웅씨가 낯선 시풍으로 무장한 일군의 젊은 시인을 ‘미래파’로 명명한 이래 한국 시사(詩史)엔 ‘미래파 논쟁’이란 굵은 획이 그어지고 있는 중이다. 명칭이 적절한지, 이들 시인을 한 무리로 묶을 수 있는지 등의 기초적 문제부터 미래파의 작풍에 대한 미학적 가치판단까지 논의는 무성하지만, 많은 논쟁이 그렇듯 ‘미래파 논쟁’에 미래파의 목소리는 없는 상황이었다.

최근 발행된 시 전문 계간지 <시로 여는 세상> 가을호가 마련한 특집 ‘미래파의 자기 진단과 미래파의 미래’는 미래파로 거명되면서도 논쟁의 객체에 머물렀던 시인들이 작심하고 자기 입장을 밝히고 있어 흥미롭다. 기고한 시인은 김언, 서영처, 유형진, 이근화, 이민하, 장석원, 장이지, 조동범, 진은영씨 등 9명.

 

 

 

 

 

 

 

 

  

 

기고자 대부분은 시인들을 범주화하는 움직임을 경계했다. 유형진씨는 “개성적 시인들을 카테고리화해서 그 담론에 묶어두는 일은 그들의 행보를 위축시키고, 나아가 문단 내부의 단절을 심화시킬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동범씨는 “미래파 논쟁이 과거 참여-순수 논쟁처럼 자기 영역을 고집하는 양상을 보인다”고 우려하며 “젊은 시인들의 작품은 기존의 시적 흐름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계승해 새롭게 만든 것”이라고 썼다.

장이지씨는 “부정과 파괴를 통해 새로운 전통을 세우려는 전위적 충동이 미래파라면 황병승, 김민정, 김경주 등 세 명의 시인만 이에 해당할 것”이라며 “결국 모두 서정시를 쓰고 있는데 미래파의 시는 서정시가 아닌 듯 말하는 것은 묘한 기만”이라고 비판했다.

미래파 담론 이면의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는 의견도 있었다. 김언씨는 “미래파 논쟁을 시단의 중심에 떠오르게 한 일등 공신은 다름아닌 그 반대파 평론가들”이라며 “이들이 스스로 일으킨 논쟁을 감당하지 못하면서 가장 싫어했던 시인들을 띄워주는 우를 범한 것”이라고 조소했다.

이근화씨는 미래파 담론을 “그 속에 무엇이든지 채워넣을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음식인 만두”에, 장석원씨는 “먼 곳에서 널 사랑한다는 주문을 외며 나를 협박하는 님의 사랑 고백”에 빗대며 논의의 ‘불순함’을 지적했다.

서영처, 이민하씨는 젊은 시인들의 시풍이 이전과는 차별된다는 점을 인정하는 입장이다. 서씨는 “이들의 다양한 불협화음과 추함은 새로운 표현양식이자 미의 추구”라고 규정했고, 이씨는 “뻔한 맛보다는 뻔뻔한 맛을 즐기는 감각의 전문가”들에 대한 동질감을 표했다. 하지만 이들 역시 다채롭고 변화무쌍한 시적 흐름을 고정된 틀에 가두려는 시도에 대해선 부정적 견해를 보였다.

다른 필자들과 달리 진은영씨는 젊은 시인들에게 낯선 이미지들의 수집에 머물지 말고 현실에 대해 집요한 탐구를 할 것을 주문해 눈길을 끌었다. 시 작업을 낚시에 비유한 진씨는 “풀의 배내옷으로 덮은 바구니에 담아온 물고기처럼 신선한 이미지들에 깔려 예감됐지만 의지박약 때문에 발견되지 못한 현실이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보라고 권했다.

이번 특집에 기고하지 않았지만 미래파의 대표 주자로 꼽히는 김경주 시인은 지난달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한국 시 역사에서 반복되고 있는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싸움에서 현재는 ‘미래파’란 이름으로 모더니즘이 앞서나가는 형국”이라며 “그런 경향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이며, 시인은 예술의 전위로서 정형화되지 않기 위한 긴장을 부단히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이훈성 기자)

중앙일보(06. 06. 05) '미래파' 논쟁 "젊은 시인들의 낯선 어법, 새 상상력"

한국 문단에 화끈한 논쟁 한 판이 벌어졌다. 이른바 '미래파' 논쟁이다. 최근 주목받는 몇몇 젊은 시인들의 새롭고 낯선 어법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놓고 편이 갈렸다. 6~7년 전 문단권력 논쟁 이후 오랜만의 본격 논쟁이란 점에서 흥미롭다.

# 미래파의 등장
'미래파'란 어휘는 지난해 '문예중앙'봄호에서 처음 선보였다. 평론가 권혁웅은 '미래파-2005년, 젊은 시인들'이란 글에서 "새로운 세대가 생산하는 시는 요령부득의 장광설이거나 경박한 유희의 산물이 아니"라며 "이들의 작품이 가까운 미래에 우리 시의 분명한 대안이라는 것을 인정할 날이 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권혁웅은 위 글에서 장석원.황병승.김민정 등 젊은 시인 셋을 인용했다. 이들은 모두 지난해 첫 시집을 발표했고, 첫 시집으론 이례적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여장남자 시코쿠'(랜덤하우스중앙)를 발표한 황병승은 중진 비평가 황현산이 "완전소중 시코쿠"('창작과비평'2006년 봄호)라고 평가했을 정도다.

흥미로운 건 1년 사이 미래파 숫자가 확 늘어났다는 사실이다. 미래파가 한 평론가의 재기 발랄한 호명을 넘어 문단 이슈로 떠오른 까닭이 여기 있다. 애초에 호명된 건 셋이었지만, 2000년 전후 등단한 비슷한 어법의 또래 시인들, 예컨대 김행숙.김언.이민하.유형진.이장욱 등도 미래파로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다. 언제부턴가 미래파는 '길고 낯설고 섬뜩한 시를 생산하는 요즘 시인들'이란 뜻의 보통명사처럼 쓰이고 있다.

# 미래파에 대한 반격
미래파에 대한 급작스런 주목은 끝내 반발을 불러왔다. 몇몇 계간 문예지들이 최근 발간된 여름호에서 미래파를 비판하고 나섰다. 가장 적극적인 건 시 전문 계간지 '시작'이다.


'시작'은 "환상.전복.엽기.난해성.무의식 등을 특징으로 한 일군의 젊은 시인과 '다른 미래'를 꿈꾸고 사유하는 시인들을 선정한다"며 김선우.김이듬.박상수.박판식.손택수 등 젊은 시인 18명을 특집으로 다뤘다. 이 특집에서 비평가 이명원은 "권씨는 문단연령론과 문학세대론을 반복함으로써 시단의 혼란을 가중시켰다"며 "선배 시인들의 후배 세대에 대한 이유 있는 경계심을 오히려 부추기는 데 앞장섰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작가세계'도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의 시 세계 비판'이란 특집을 기획했다. "새롭고 낯선 징후들에 바쳐진 요란한 찬사를 걷어내고 차분한 시선으로 2000년대 상반기의 시적 현상을 돌아볼 필요"를 제기하며, 황병승.장석원.김민정 등에게 "자기 상처를 들여다보는 데서 한걸음 물러나 관계에 대해 성찰하고 자기 언어의 전략과 한계에 대해서도 새로운 고민을 시작하기 바란다"(이경수)고 충고했다. 이외에 '창작과비평'이 '2000년대 한국문학이 읽는 시대적 징후'란 특집에서, '실천문학'이 '탈주체론을 넘어서'란 특집에서 젊은 시인들을 다뤘다.

# 미래파는 정의가 아니라 수사다
논쟁의 진원지 '문예중앙'도 여름호에서 관련 특집을 실으면서 전선을 확대했다. 권혁웅은 '행복한 서정시 불행한 서정시'란 글에서 서정시를 두 종류로 나눴다. 시적 주체와 대상이 일치되는 이른바 전통적 방식(또는 정서)의 서정시가 행복한 서정시이고, 그렇지 못한 것이 불행한 서정시라고 구분한 것이다.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는 말장난이나 실험시가 아니라 "시적 주체와 세계가 엇갈리는 비정합적인 불행한 서정시"란 주장이다.



권혁웅의 반론은 문단 일각의 오해에 대한 해명이기도 하다. 권혁웅은 미래파를 '청록파'나 '시문학파'처럼 일종의 동인(同人) 개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요즘 젊은 시인들의 어법이 기존 문법과 다르다고 해서 말장난이나 환상으로 치부하지 말기를, 또 하나의 진지한 문학으로 바라보기를 당부한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권혁웅의 미래파는 "정의(定義)가 아니라 수사(修辭)"(김수이, '세계의문학' 2006년 봄호)다.

'미래파 논쟁'은 한국문학이 새 국면에 진입했음을 암시하는 일종의 지표다. 그들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그들의 낯선 어법과 새로운 상상력은 일단 인정된 사실이기 때문이다. 특히 한 개인의 별난 실험이 아니라 집단적 움직임을 보인다는 점에서 미래파는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비평가 박수연은 '서정과현실' 2006년 상반기호에서 "한국적 아방가르드의 진폭은 그들 각각의 개별적 성취로만 여겨졌을 뿐 유사한 지향과 형식을 갖춘 집단을 형성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적 경향은 문학사적 사건임이 분명하다"고 의의를 밝혔다.(손민호 기자)

07. 09.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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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05 17: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9-05 18:31   좋아요 0 | URL
랭보도 오래 쓰진 않았죠.^^
 

대학신문에 게재한 글을 옮겨놓는다. '21세기의 사유들'이란 기획연재의 첫번째 꼭지로 나간 것인데, 주말에 '초읽기'에 몰리면서 쓴 글들 중의 하나이다. 기획의 취지는 이런 것이다. "사상과 현실이 유리되고 있는 시대에 그 관계를 다시 활발히 밀착시키고자 하는 사상가들이 있다. 그들이 이 시대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시대의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어떤 사유를 제시하고 있는지 알아본다." 하지만 취지와 무관하게 나로선 '펑크'를 내지 않는다는 데 더 주안점을 둔 것이어서 결과적으론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할 수 있겠다(어쨌든 민폐는 면했으니까). 물론 '고생한' 편집자는 생각이 다를 수 있겠다(초고에서의 '-이다'형 어미들이 '-다'로 수정되면서 글은 좀더 스피디해졌다). 미안한 마음을 적어둔다.

대학신문(07. 09. 03)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다시 정의하는 것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은 라캉주의 분석가이자 포스트모던 철학자이고 문화비평가다. 혹은 자신의 표현을 빌면, ‘정통 라캉주의적 스탈린주의자’다. 그는 히치콕, 레닌, 오페라, 9ㆍ11 테러, 인권, 근본주의, 사이버공간, 포스트모더니즘, 다문화주의, 전체주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등 광범위한 주제에 대해 많은 책들을 썼다. 그가 목표하는 바는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과, 대중적 환상 혹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신분석적 폭로다. 그 자신의 겸손한 정의에 따르면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다시 정의하는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그가 다룬 거의 모든 주제들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가장 먼저 재고의 대상이 된 건 이데올로기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해인 1989년 지젝이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으로 영어권 지식계에 ‘정식’ 데뷔한 것은 우연의 일치이지만 상징적이다.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했던 그 시기에 그는 이데올로기의 바깥은 없다고 주장하며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했다. 그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이름은 ‘냉소주의’다.

냉소주의는 더이상 “그들은 자기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는 마르크스식의 허위의식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잘 알고 있지만 여전히 그것을 한다”는 역설로 규정된다. 계몽된 허위의식의 역설이다. 가령, 우리는 지폐가 종잇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 ‘알지만’ 돈에 대한 물신주의적 태도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급진적’ 지식인들은 이민자의 온전한 권리와 국경 개방을 요구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지식인으로서의 특권적 지위가 계속 보장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무지’의 폭로는 더이상 아무런 파괴력도 갖지 못한다.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행위와 일상에 구조화돼 있다.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어느 시대보다도 더 많이 믿는다.

지젝에 따르면, 우리는 지난 세기에 두 가지 유토피아의 종말을 경험했다. 하나는 70여년을 버티던 ‘정치적 유토피아’로서의 현실 사회주의의 종말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이후 10여년을 구가했던 ‘전지구적 자본주의’, 곧 자유민주주의 유토피아의 종말이다. 전자의 종언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 베를린 장벽 붕괴였다면, 후자의 종언을 보여준 ‘실재적’ 사건은 바로 2001년의 9ㆍ11이다. 이러한 종말 이후에, 새로운 갈등의 장벽들이 실재적 역사로 회귀했다. 따라서 유토피아의 종말 이후에 우리가 ‘역사의 종말’에 접어들었다고 하는 바로 그 관념이야말로 유토피아적 환상이다.

사실 이념이라는 대타자(the Other)의 몰락 이후에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자유롭고 관용적이며 쾌락적인 시대를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젝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의 부자유를 말할 수 있는 언어를 갖고 있지 못하기에 자유롭다고 ‘느낄’ 따름이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오늘날의 쾌락주의는 절제의 쾌락주의다. 카페인 없는 커피나 섹스 없는 섹스, 혁명(유혈) 없는 혁명에 대한 기대와 권장에서 볼 수 있듯이 법의 부재는 아예 금지를 일반화한다.

가령 지젝이 자주 예로 드는 권위적인 아버지와 관용적인 아버지의 경우를 대비해보자. 권위적인 아버지는 “너는 그것을 해라!”라고 명령한다. 반면에 관용적인 아버지는 “그것을 해라, 하지만 네가 하고 싶지 않다면 하지 않아도 좋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배려는, 하지만 “너는 자발적으로 그것을 해라!”라는 보다 더 강한 요구를 숨기고 있다. 이것이 관용의 역설이며 자유주의의 역설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다고 믿지만 아무것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오늘날 지구의 종말을 상상하는 게 손쉬워진 만큼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변화는 점점 더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것이 우리시대의 패러독스이며, 우리는 유토피아를 다시 발명해내야 한다. 유토피아는 가장 긴급한 요구의 문제다”라고 지젝은 말한다. 그가 말하는 유토피아는 무엇인가?



지젝에 따르면, 유토피아는 ‘불가능한 이상적 사회’란 관념과는 어떠한 관련도 없다.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자리가 없는’ 공간의 건설이다. 왜 자리가 없는가? 기존의 사회에서는, 즉 사회적 좌표계 내에서는 자리가 할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토피아적인 제스처의 사례로 지젝이 자주 드는 것은 1917년의 레닌이다. 레닌주의의 핵심은 자유주의적 ‘선택의 자유’ 대신에 선택 자체를 선택하는 데 있다. 즉 정치적 활동(activity)이 아닌 행위(act)란 현 상황이 제시하는 강요된 선택 대신에 그러한 ‘정치적 계산’을 돌파하는 어떤 광기다. “난 인간이 아닙니다. 난 괴물입니다.”라고도 지젝은 말했다. 스스로에 대한 새로운 정의다.

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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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타 2007-09-03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럴수가. 로쟈님의 정체를 이제야 알아버렸습니다.^^;; 왠지 신문 보고 로쟈님일것이란 생각이.(글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07-09-03 21:52   좋아요 0 | URL
좀 늦으셨군요.^^

치타 2007-09-03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말입니다; 이제 한 학기 남았는데 수업 듣고 졸업하기 힘들겠네요ㅜㅡ

로쟈 2007-09-04 08:37   좋아요 0 | URL
저야 공식적으론 러시아문학만 강의하죠.^^;

marr 2007-09-04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벌꿀인줄 알고 먹고 있었는데 다시 보니 설탕섞은 물엿이었다고 말하는 건 지나친 비유겠죠? 지젝의 글은 너무 달콤해서 분간이 어려워요.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다시 정의하는 것이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좀 고민해봐야겠네요. 문득 알튀세가 생각나는군요.

로쟈 2007-09-04 08:36   좋아요 0 | URL
물엿 맞습니다.^^ 다만 저는 벌꿀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eEe 2007-09-04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지젝이 스스로를 스탈린주의자라고 표현한 것은 어떤 맥락에서인가요?

로쟈 2007-09-04 23:42   좋아요 0 | URL
저는 그러한 '반응'까지 고려한, 그러니까 농담이기도 하고 진담이기도 한 양면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젝은 출입문 현관에 스탈린 초상화를 걸어두고 있기도 합니다.^^

eEe 2007-09-05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치있는 분이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