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출간된 발리바르의 <대중들의 공포>(도서출판b, 2007)에 대한 한 서평을 옮겨놓는다. 책은 만만찮은 두께 때문에 얼른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지만 부분적으로 몇 개 장 정도를 읽어보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도 싶다. 그런 로드맵을 짜는 데 미리 참고해둘 만한 서평이다.

경향신문(07. 09. 22) 폭력을 넘어서는 법 ‘시민인륜’

아포리아(aporia)는 논리적 궁지를 뜻한다. ‘대중들의 공포’를 읽을 때 가장 많이 눈에 띄는 용어들 가운데 하나가 아포리아이다. 발리바르의 친구이자 스피노자 전문가인 마트롱은 언젠가 발리바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은 매년 새로운 아포리아를 발견하려 한다. 스피노자의 대중들 개념에는 아포리아가 있다, 민주주의에는 아포리아가 있다, 이런 식으로. 그건 미친 짓이다.”

이 에피소드는 역설적으로 발리바르의 철학하는 핵심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체계적인 통일성과 정합성을 전제하거나 새롭게 구축하려 하지 않고, 통일적인 체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 아포리아를 찾아낸다.

아포리아를 찾는 과정은 사유가 어디까지 근본적일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도정이다. 먼저 어떤 사유가 닦아놓은 논리의 길을 끝까지 따라가야 하고, 그 논리의 끝에서 마주하게 되는 막다른 골목의 정체를 확인해야 하며, 또한 이 막다른 골목에 도달하게 된 근본 전제와 가설을 복기해야 한다. 여기에 이를 때 비로소 아포리아 너머에 있는 새로운 사유의 길이 열릴 수 있다. ‘대중들의 공포’는 이 고통스럽고 지난한 근본적인 사유의 도정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탁월한 성과물이다.

이 책의 문제 틀은 ‘대중들의 공포’라는 말 속에 녹아 있다. 발리바르가 고민하는 철학의 대상은 계급이 아니라 대중들이다. 이는 경제주의적 계급론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대중들이 역사를 만든다’는 마르크스의 언급을 구체적으로 해명하려는 시도이다.

또한 대중들은 과학적인 적합한 인식이 아니라 진리와 허구가 혼재되어 있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현실의 갈등을 인식하고 실천한다는 점에서, 이런 문제 틀은 필연적으로 이데올로기에 대한 탐구를 함축한다. 여기서 ‘대중(mass)’이 아니라 ‘대중들(masses)’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하는데, 이는 대중들이 단일한 주체(단수)가 아니라 복합적인 양면성(복수)을 담지하기 때문이다.

이런 대중들의 양면성을 표현하는 말이 ‘대중들의 공포’이다. 스피노자에서 유래하는 이 용어는 대중들이 느끼는, 그리고 불러일으키는 공포를 가리킨다. 이는 1차적으로는 민중의 능동성과 진보성을 신화화했던 과거 민중론이 지닌 한계와 유사하게 대중들의 일면적인 봉기성만을 특권화하는 논의에 대한 비판이다. 대중들은 능동적인 만큼 수동적이고, 진보적인 만큼 보수적인 양면성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함의는 대중들의 역량이 갖는 잠재적 폭력성에 관한 것이다. 대중들의 힘은 때로 폭력과 구별하기 어려운 형태로 나타난다. 사회의 구조적 폭력에 공포에 느끼고 이를 제거하려는 대중들은 오히려 대항폭력을 통해 대중들에 대한 가공할 공포를 초래하여 사회의 변화가 아니라 붕괴로 나아갈 수도 있다.

발리바르가 이런 양면적인 긴장을 전환하기 위해 고민하는 것이 반폭력 정치이다. 반폭력 정치에 대한 사고는 이 책의 가장 독창적인 대목이라고 할 수도 있는 시민인륜(civilite) 개념으로 정교해진다. 시민인륜은 ‘시민권’과 ‘사적이고 공적인 윤리’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결합한 신조어이다. 이 개념은 대중들의 폭력이 동일성(identity)과 결부되어 있으며, 따라서 공동체(국가) 내부에서 증오와 잔혹으로 나아가는 동일성들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한에서 해방의 정치나 변혁의 정치가 가능해질 수 있다는 문제 의식을 담고 있다.

물론 이상의 간략한 정리는 전체적인 문제 틀에 불과하며, 이 책에는 훨씬 풍부한 논의들이 담겨 있다. 그것은 근본적인 사유가 갖는 전복적인 힘을 예증한다. ‘대중들의 공포’는 구태의연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도전이고, 최근 주목 받고 있는 네그리, 푸코, 들뢰즈 등의 철학과 쟁점을 형성하면서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려는 시도이며, 무엇보다 빈곤과 잔혹이 공존하는 오늘날의 정세를 돌파하려는 이론적 실천이다. 이 두툼한 책이 옮긴 이들(최원·서관모)의 오랜 정성과 노력으로 우리 앞에 당도했다.(김정한|서강정치철학연구회 회원)

07. 09. 22.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eEe 2007-09-22 22:58   좋아요 0 | URL
그 밥에 그 나물인 (것 같은) 김정한 씨가 서평을 써서인지 좋은 말만 해났네요.

로쟈 2007-09-23 00:06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책을 미리 읽어본 독자가 많지는 않을 테니까요...
 

시간만 된다면 매일같이 한 명의 새로운 저자와 그의 책들에 대해서 메모해놓을 수 있지만 (김갑수의 <나의 레종 데트르>의 표현을 빌면) 그런 일이 "밥 먹여주는 세상"이 아니어서 대개의 아이템들을 나는 참아두거나 무시해둔다. 다행히 추석 연휴를 맞아 잔뜩 '밀린 빨래들'처럼 해야 할 일들을 쌓아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투리 시간도 '풍족'한지라 건수를 몇 개 올릴 수는 있겠다.

 

 

 

 

아무 책이나 펼쳐도 책으로 가는 길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서 이어져 있지만 오늘 고른 건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길, 2007)의 한 대목이다(이 책 또한 제대로 읽자면 부록까지 포함해 12번의 강의는 필요하다). 1장 '동이 서를 만날 때'에서 지젝은 '사랑의 역설'을 말하면서 기독교와 불교 사이의 흥미로운 대비를 제시하고 있는데, 주로 선불교에 초점이 맞춰진 그의 불교론은 이전에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인간사랑, 2004)에서도 읽어볼 수 있었다. 그걸 자세하게 '브리핑'하는 일도 의미있어 보이지만 역시나 "원고료로 살 수 없는 세상"이니만큼 당장은 참아두기로 한다. 대신에 읽을 건 말미에 등장하는 '사랑의 폭력' 혹은 '폭력적 사랑'에 관한 한 문단이다. 시작은 이렇다.

"사랑이 폭력이라는 말이 발칸의 저속한 속담 - "나를 때리지 않는 남자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다" -과 관련되는 것(만)은 아니다. 폭력은 이미 자체로 사랑의 선택인데, 그것은 폭력이 사랑의 대상을 맥락에서 떼어내어 대상(Thing)의 자리에 올려놓기 때문이다."(57쪽)

Antonio Banderas and Victoria Abril in Tie Me Up! Tie Me Down!

인용된 발칸의 속담은 영어로 "If he doesn't beat me, he doesn't love me!"이다(요즘 공개적으로 이런 말을 했다가는 공인의 지위를 유지하기 어렵다!). 이와 관련하여 얼른 떠오르는 영화는 발칸의 영화가 아니라 스페인 영화이다. 페도로 알모도바르의 도발적인 영화 <욕망의 낮과 밤>(1990)이 그것(원제목은 'Átame!'이고 영어제목은 'Tie Me Up! Tie Me Down!'). 그리고 물론 한국영화로는 장선우의 <거짓말>(1999)을 떠올려볼 수도 있겠다(한국영화로서는 '사랑의 폭력'을 다룬 드문 영화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폭력은 이미 자체로 사랑의 선택"이란 말은 무슨 뜻인가? 원문은 이렇다: "Love is violence not (only) in the vulger sense of... violence is already the love choice as such, which tears its object out of its context, elevating it to the Thing"(33쪽) 

내용은 "사랑은 이러이러한 의미에서가 아니라 저러저러한 의미에서 폭력이다"는 것이다. 국역본은 이 대목을 "폭력은 이미 자체로 사랑의 선택인데, 그것은 폭력이 사랑의 대상을 맥락에서 떼어내어 대상(Thing)의 자리에 올려놓기 때문이다"라고 잘못 옮겼는데, 관계사 which의 선행사는 '폭력'이 아니라 '사랑'이다. 그리고 나는 이 문장을 도치구문으로 본다. 즉 "폭력은 이미 자체로 사랑의 선택"이 아니라 "사랑의 선택 자체가 이미 폭력이다"로 보는 것이다. 결국에 '사랑=폭력'이라는 것이니까 대차는 아니지만 두 경우에 초점은 달라진다. 지젝의 말은 '폭력이 곧 사랑'이라는 게 아니라 '사랑이 곧 폭력'이라는 것이니까.

전체를 다시 옮기면 "사랑의 선택은 그 자체로 이미 폭력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 대상을 원래의 맥락에서 떼어내어 '숭고한 대상'으로까지 고양시키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랑의 폭력'이란 말이 뜻하는 바이다. 가령, 추석맞이로 이번주에 개봉한 곽경택 감독의 영화 <사랑>에서 주진모(채인호)의 경우를 보자. 신윤동욱 기자의 리뷰(http://h21.hani.co.kr/section-021015000/2007/09/021015000200709200678012.html)를 잠시 따라가보면 영화는 이런 구도이다.

태초에 한 남자가 있었다. 소년 채인호(주진모)는 첫눈에 소녀 정미주(박시연)에게 반한다. 그리고 끝까지 이야기는 통속성의 공식을 벗어나지 않는다. 소녀는 예쁘고 소녀의 집은 부자다. 산동네 소년은 괜스레 소녀를 괴롭히는 또 다른 소년과 싸운다. 소녀는 소년을 생일에 초대하지만, 하필이면 소녀의 집은 그날 망한다. 그리고 첫 번째 이별. 고등학생 인호는 또 싸운다. 하필이면 싸우다가 인호를 병으로 찌르는 본드쟁이 복학생은 미주의 오빠다. 그렇게 남자는 인호와 미주의 끊어진 인연을 이어주는 다리가 된다. 우연의 우연, ‘지나친’ 정공법이요 통속성의 기본이다. 미주의 본드쟁이 오빠는 노름쟁이 엄마를 껴안고 불살라버린다. 그리고 남겨진 자들의 사랑의 맹세. “니가 내 지키도. 나도 니 지키주께.” 인호와 미주는 서로에게 사랑을 맹세한다.

여기서 순수한 사랑, 곧 순수한 폭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맥락(학교와 가족사)에서 박시연(정미주)을 떼어내어 대문자 사물(Thing), 곧 '숭고한 대상'(이건 '괴물'이기도 하다)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아래 스틸사진들에서 시연을 바라보는 진모의 시선(위)이 건달을 향하는 진모의 주먹(아래)에 앞서는 보다 근원적인 '폭력'이다. 영화 <사랑>은 그 맹목적인 사랑의 끝을 향해서 단순무식하게 돌진해나가는 '순정'영화이다(예고편과 리뷰들을 보아하니 그러하다).

다시 지젝으로 돌아와, 이어지는 내용: "몬테네그로의 민담에서 악의 근원은 아름다운 여성이다. 아름다운 여성은 주위의 남자들이 균형을 잃게 만들고, 우주에 그야말로 불안정을 초래하며, 모든 것에 편파성의 색조를 입힌다."(57쪽) 원문은 "In Motenegrin folklore, the origin of Evil is a beautiful woman: she makes the men around her lose their balance, she literally destabilizes the universe, colors all things with a tone of partiality."이다.

여기서도 떠오르는 영화는 몬테네그로 영화가 아니라 이탈리아 영화 <말레나>(2000)이다(http://www.youtube.com/watch?v=IPwX6PPSfPM). '세기의 미녀'라는 모니카 벨루치 주연의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 말레나는 마을에서 모든 남성의 시선 끌어모으는, 그럼으로써 "주위의 남자들이 균형을 잃게 만들고, 우주에 그야말로 불안정을 초래하"는 여인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2차 대전이 한창인, 햇빛 찬란한 지중해의 작은 마을. 매혹적인 말레나. 걸어갈 때면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그녀를 훑어내린다. 여자들은 시기하여 쑥덕거리기 시작하고 곁에는 그녀를 연모하는 열세살 순수한 소년- 레나토가 있다. 남편의 전사소식과 함께 욕망과 질투, 분노의 대상이 된 말레나. 남자들은 아내를 두려워해 일자리를 주지 않고, 여자들은 질투에 눈이 멀어 그녀를 모함하기 시작한다. 결국 사람들은 독일군에게까지 웃음을 팔아야 했던 말레나를 단죄하고 급기야 그녀는 늦은 밤 쫓기듯 어딘가로 떠나게된다. 소년- 레나토만이 진실을 간직한 채 마지막 모습을 애처롭게 지켜볼 뿐이다. 그리고 1년 후... 전쟁의 상처가 아물어 갈때쯤 말레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난다. 그녀의 곁엔 죽은줄 알았던 남편이 불구가 되어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도 근원적인 폭력은 말레나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폭력 이전에 말레나를 무자비하게 탈맥락화함으로써 '숭고한 대상'의 지위로까지 고양시키는, 소년-레나토의 순수한 연모의 시선에 자리한다. "이러한 테마는 1920년대 이래로 소비에트 교수법의 변치 않는 요소 중 하나였다.""섹슈얼티니는 본래부터 병리적인(patho-logical) 것으로서, 냉정하고 균형 잡힌 논리를 특수한 파토스로 오염시킨다, 성적 자극은 부르주아의 부패와 연결된 귀찮은 방해꾼이다, 라고 소비에트는 인민들을 교육했다."(57쪽) 

다시 말해서 소비에트 사회는 섹슈얼리티에 가장 적대적인, 그래서 가장 금욕적이며 무성적인 사회였다(라이히나 마르쿠제의 기대와는 달리 사회주의 유토피아가 성애적/향락적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관대한 성관념은 과연 진보적인가?). "실제로 1920년대에 소련에서는 성적 자극이 병리적 상태임을 심리-생리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한 수많은 '유물론적' 연구가 진행되었다. 사실 섹슈얼리티에 대한 위생지상주의적 관용에 비하면, 반페미니즘 성향의 소비에트의 연구 성과가 진리에 훨씬 가까운 것이다."

인용문에서 '성적 자극'은 'sexual arousal'의 번역인데, '성적 흥분'이 보다 적합하다고 생각된다. '병리적 상태'에 해당하는 것은 '성적 자극'이라기보다는 '성적 흥분'이어야 하겠기에(이른바 성적 '각성 상태'를 말하는 것이겠다). 그리고 그걸 입증하기 위해 많은 소비에트 연구자들이 유물론적 연구를 시도했다는 것인데, 그 성과와 관련하여 지젝이 참고하고 있는 책이 각주32)에 소개되고 있는 에릭 나이만(1958- )의 <공적인 성(Sex in Public: The Incarnation of Early Soviet Ideology)>(1997)이다(전공과도 무관하지 않은 책이어서 책의 소재는 바로 탐지해두었다).  

이상이 '오늘의 책'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이었다. 이 주제와 관련한 여타 참고문헌은 '비밀'로 해둔다(성은 비밀스러워야 한다). 다만 러시아에서 이 분야의 대표적인 연구자가 '이고리 콘'이라는 것 정도만 밝혀둔다...

07. 09. 21.

P.S. 페이퍼를 적으며 드는 생각은 사랑=폭력=악의 기원으로서의 '아름다운 여성' 문제에 대해서 좌파정치학이 너무 무관심한 건 아닌가 하는 점. 가령 "정치적 관습으로 어떤 세력가가 국가의 안정을 위협할 때 그를 고발하지 않고도 추방할 수 있게 만든 제도"로서 그리스의 도편추방법을 상기해본다면, 공동체의 질서유지에 위협적인 요소가 되는 '과도한 아름다움'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어림짐작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니 잠자는 미녀들을 공연히 깨우지 말지어다. 물론 우파정치학에서라면 남성들의 경쟁 유발요인으로서 아름다움은 적극 장려해야 마땅한 것이겠지만...

P.S.2. 단수 높은 독자라면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었겠지만, 이 페이퍼는 추석 연휴를 맞아 서재 방문객들에게 드리는 나대로의 인사이고 선물이다. 개인적으론 다음주 금요일에야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에 나로서도 일주일간 휴가이다(별로 즐거운 일이 없을 뿐더러 할일도 많다는 건 내일부터 생각하기로 하자). 편안하고 즐거운 휴식과 감사의 시간들이 되시길 바란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털세곰 2008-05-29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작성시점으로부터도 반년을 훌쩍 넘긴 이 시점에. 곧 크로이체르 소나타의 강의가 있는데 접점을 찾을 여지가 꽤 보이네요. 다운만 받아놓은 말레나를 봐야겠다는 압박도 느끼구요. 좋은 "추석"선물, 감사합니다^^
 

어제 한 지인으로부터 다른 몇 권의 책과 함께 선물받은 책은 이번에 1차분이 나온 '고정관념 Q시리즈'의 3권이다. 덕분에 생각난 것이 지난 7월말에 2차분이 나온 '아주 특별한 상식 NN 시리즈'('The NO-NONSENSE guide')이다. 모두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고 상식을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시리즈들이다(고등학생 정도면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두 시리즈의 관련기사를 모아놓는다.  

문화일보(07. 09. 21) 고정관념에 질문을 던져라

Q.세계화는 현대사회의 고유현상이다.
A.아니다. 20세기초 영국의 해외투자, 1971년 금본위제의 종식 등 세계화의 기원으로 볼 만한 것이 많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세계화가 대두된 것은 그것이 동·서, 남·북 등 냉전과 냉전이 유포시킨 이분법적 세계관의 폐기로 인해 생겨난 공백을 메워주고 있기 때문이다. 양 진영의 대립이 와해된 이후 세계화는 이분법적 사고를 대체, 하나의 단순화된 비전을 제공한다. 세계화는 변화에 가치를 부여하는 현대사회의 이념과 일맥상통한다.

Q.세계화는 부유한 나라에만 유리하다.
A.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등 ‘아시아의 4마리 용’에 이어 중국을 비롯한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새로운 호랑이들’이 영광의 30년동안 프랑스가 거둔 성장률을 상회하고 있다. 이 국가들은 땀 흘린 결과 산업화를 이뤄냈고 국민들을 교육시키고 수출을 증대시키기 위해 세계경제에 편입됨으로써 이득을 끌어낼 줄 알았다. 덩샤오핑(鄧小平)에게서 보듯 이런 성공에는 정치적 의지가 매우 중요하다. 이에 따라 이제 ‘제3세계’라는 말은 거의 의미를 잃었다. 하지만 다양한 투자는 아시아의 위기에서 보듯 올 때만큼 빨리 빠져나가 위기를 초래하기도 한다.

Q.세계화는 금융시장의 독재다?
A.금융시장은 분명 힘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독재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소주주들이 목소리를 많이 내고 있다.

이 시리즈 ‘세계화’책은 이밖에 ‘세계화는 환경을 파괴한다’ ‘세계화는 빈곤을 심화시킨다’ ‘세계화로 문화다양성이 위협받고 있다’ 등 세계화와 관련해 정치, 경제, 사회적인 문제로 지적되는 ‘고정관념’에 대해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분석하고 있다.



이 시리즈는 프랑스 ‘르 카발리에 블뢰(Le Cavalier Bleu·푸른기병)’출판사에서 130여권째 나오고 있는 스테디셀러 시리즈다. 항상 미국 중심의 세계화의 맞은편에 서있는 프랑스의 경향으로서는 이례적인 내용이다. 그 만큼 이 시리즈는 프랑스 특유의 ‘톨레랑스(Tolerance·관용)’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알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흔히 가장 나쁜 상황을 상상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을 철학자 한스 요나스는 ‘두려움의 발견법’이라고 했다. ‘고정관념’은 그런 맥락에서 많이 생긴다. 특히 ‘세계화’와 관련해 그렇다. 무지와 공포로 인해 만들어진 고정관념은 오늘날 인터넷 세계에서 맹목적으로 무한 증식, 집단적 ‘선입견’을 만들어버린다.

이 책은 고정관념의 출발부터 존재 이유와 도그마같이 보이는 그 겉모습 뒤에 숨은 일단의 진실을 정면에서 묻고 간결 명확하게 구체적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너무 간단해서 몇 번이고 다시 돌아가 확인할 정도다. 그러나 친절한 각주를 꼼꼼하게 달아놔 웬만한 논문 못지않게 충분한 설득력을 준다. ‘명확하지 않은 것은 프랑스적인 것이 아니다(N’est pas claire, n’est pas francais)’는 프랑스 격언이 실감난다.



일단 첫 시리즈 5권이 번역돼 나왔는데 주제 모두가 지금 한국을 포함한 세계의 현실 이해에 필요한 항목들이다. ‘종교’는 무신론과 사이비종교와 종교통합주의 등 현대사회의 생생한 움직임을 전한다. ‘이집트문명’은 역사상 최초의 유일신교가 나일강에서 싹텄으며, ‘이슬람’에선 무하마드(마호메트)가 꾸란(코란)에서 예수와 아브라함을 신의 예언자로 인정했음을 알게 된다. ‘예수’에서는 그가 신이 된 인간인지, 인간이 된 신인지, 다양한 측면에서 분석해 들어간다.(김승현기자)

한국일보(07. 07. 28) "No Nonsense" 낡은 담론은 던져버려라

여기서 낡은 상식 체계는 도전 받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전복의 논리는 명쾌하다. 깔끔한 도표, 용어 해설, 관련 매체 소개 등을 정리한 말미의 부록은 관습적 색인의 수준을 능가한다. 18세기 프랑스 혁명의 기운을 인식론적으로 길러 낸 백과전서파의 정신이 오롯이 살아 있다.

30년 역사의 영국 진보 담론지 <뉴 인터내셔널리스트>가 ‘The NO-NONSENSE guide’란 제목으로 2001년부터 짚어 오고 있는 지구촌의 현상과 쟁점들이다. 미국 중심의 논리를 타파, 인식의 새 지평을 펼쳐 보이고 있다. 현지에서는 단행본 작업이 26권을 기록하고 있으나, 번역 작업은 <아주 특별한 상식 NN(No-Nonsense)>이란 이름의 10권짜리 시리즈로 완결됐다. 지난 3월 1차분 5권이 출판된 데 이어, 이번에 다섯 권이 더해진 것.

지금 나라를 들썩이는 이슬람 문제를 예견이라도 한 듯 이번 발행분에서는 제8권을 통틀어, <이슬람,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나?>라는 제목을 달아 두고 있다.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율로 보자면 기독교(33%)를 바로 뒤에서 쫓고 있지만(22%), 한국에서 그에 대한 인식의 수준은 걸음마 단계. 지금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종교에 대한 저간의 오해가 바로 잡힌다.

이슬람을 비롯해 2차분의 주제는 민주주의, 성적 다양성, 테러리즘, 세계사의 재발견 등 5개항이다. 1차분으로 나온 세계화, 세계의 빈곤, 과학, 기후 변화, 공정 무역 등의 주제를 합치면 현대를 이해하는 인식적 지도가 완성되는 셈이다. 강대국의 그늘에 가려져 온 세계의 오지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은 세계화 논리를 뒤집는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와 억압의 여성사를 종합적으로 기술, 교과서가 은폐해 온 진실을 도드라지게 한다.(6권 <세계사, 누구를 위한 기록인가?>)

2001년 9ㆍ11 이후 시대의 키워드가 돼 버린 테러리즘의 진실은 9권 <테러리즘, 폭력인가 저항인가?>의 전편을 장식한다. 21세기의 풍경을 근본 기저에서 규정하는 또 다른 진실, 성적 다양성이라는 테마는 이번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한다. 그에 대한 거부감이 아시아에서 더 강한 까닭을 비롯, 동성애자ㆍ트랜스젠더ㆍ게이ㆍ양성애자 등의 문제가 논의된다.

말미에는 한국의 동성애 인권 운동에 대한 고찰을 통해 자기 스스로를 긍정하는 힘이 가장 필요하다며 격려의 메시지를 보낸다. 동성애에 대한 각국의 제도적 대응을 상세히 나열, 우리 사회를 객관적으로 보게 만든다.(10권 <성적 다양성, 두렵거나 혹은 모르거나>)

이 시리즈 특유의 전복적ㆍ비판적 입장은 1차분 다섯 권에서 보다 선명히 드러난다. IMF와 WTO 등 세계 경제를 이끌어 가는 주체들이 내거는 세계화의 약속은 유혹적이고 강력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공허하다는 주장이 그렇다.(<자본의 세계화,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

금전적 이익이나 권력의 수단으로 전락한 현대 과학을 폭로하고(<과학, 멋진 신세계로 가는 지름길인가?>, 온난화라는 대재앙에 직면해 놓고도 선진국들은 교토 의정서를 어떻게 비껴 나갈지를 두고 머리를 싸매고 있다고 비판한다.(<기후 변화, 지구의 미래에 희망은 있는가?>)

책마다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이 번역을 맡은 덕에, 역문이 매끄러운 점도 큰 미덕이다. 예를 들어 <성적 다양성…>의 역자 김고연주씨는 여성학 전공자, <민주주의…>를 옮긴 서복경씨는 국회 도서관 입법 정보 연구관, <테러리즘…>을 번역한 이광수씨는 부산에 있는 아시아평화인권연대 공동 대표다. ‘깊이 읽기’, ‘용어 설명’, ‘함께 보면 좋을 책과 영화’ 등 부록으로 나오는 과외의 읽을 거리도 이들의 작업으로 추가된 것들이다. 번역은 끝을 봤지만, 영국에서는 이 책이 계속 발행되고 있다. 책의 문제 의식과 접근법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뉴 인터내셔널>의 웹 사이트(www.newint.com)를 참고할 일이다.(장병욱 기자)

07. 09. 21.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07-09-21 16:30   좋아요 0 | URL
로쟈님 다른 건 각설하고 ^^
추석 잘 보내시고 송편 마니드시라 글 남깁니다 :)늘 건강하셔요-

로쟈 2007-09-21 18:49   좋아요 0 | URL
네, 체셔님도 추석 잘 쇠시고, '소원' 이루시길 바랍니다...

2007-09-21 17: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21 18: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난주에 최근 출간된 이광래 교수의 <해제주의와 그 이후>(열린책들, 2007)에 대한 촌평을 적은 바 있는데(http://blog.aladin.co.kr/mramor/1573384), 다소 부정적인 선입견에도 불구하고 한때 "프랑스 철학의 대변인 같았고 전도사와도 같았던" 저자의 근황과 식견이 궁금하여 책을 구입했다. 니체와 데리다 관련 대목만 약간 훑어보다가 한 문장이 목구멍에 걸렸다. '데리다의 해체실험들'을 다룬 장에 나오는 한 문단의 일부이다:  

"파리 고등사범학교 시절 심리학과 정신 질환 등 무의식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던 푸코와는 달리 데리다는 주로 의식철학, 그것도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가 학위논문을 후설과 현상학적 미학에 관해 쓰려고 했던 것만 보아도 그러한 그의 관심사를 쉽게 알 수 있다. 사실상 최초로 그의 이름이 실려 출간된 책도 <후설의 기하학의 기원: 전통과 도입L'Origine de la geometrie. Tradition et introduction>(1962)이라는 번역서였다. 이 책은 후설의 본문보다 데리다의 서론이 다섯 배 정도나 많았으므로 번역서라기보다는 데리다의 후설 연구서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결국 그는 이 책으로 '카바이예 철학상'까지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후설이나 현상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 이외에 그를 주목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119쪽)

'데리다의 기원'이라고도 부름직한, 후설의 <기하학의 기원>에 대한 데리다의 번역과 해제는 내가 오래전에 영역본으로 읽어보려고 시도했던 책이고 또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어본도 '비싸게' 구입한지라 나름대로 '관심도서'라고 할 수 있다. 한데, 이 책에 대한 저자의 소개는 눈을 의심하게 한다. 책 전체에 걸쳐서 저자와 도서명에 원어가 병기돼 있는 건, 다소 번거롭고 독서를 방해한다 하더라도 출처를 명확하게 밝히겠다는 학술적 고려의 소산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단, 그것이 정확한 정보일 경우이다.

저자는 엉뚱하게도 'L'Origine de la Geometrie. Traduction et introduction'이란 원서명에서('Traduction et introduction à l'origine de la géométrie d'Edmund Husserl '이라고 표기되기도 한다) 'Traduction'(번역)이란 말을 'Tradition'(전통)이란 말로 오기했다(introduction은 왜 '도입'이 된 것인지?). 그리고는 '전통'이라고 옮겼다! 저자가 책을 읽지 않고(심지어 안 갖고 있을 듯하다) 2차문헌에만 기대어 적어놓은 것밖에 되지 않는다.  

데리다가 후설 사후에 출간된 비교적 짧은 텍스트를 처음 번역 소개하면서 우리식의 '해제'를 붙였는데, 그 분량이 상식을 좀 넘어선다. 언급된 대로 '다섯 배 정도'나 많기 때문이다(러시아어본을 기준으로 하면 데리다의 서론은 거의 200쪽 가까운 분량이고 후설의 텍스트는 36쪽 가량이다). 하지만 덕분에 데리다는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고 우수한 인식론 저작에 주어지는 '장 카바이예상'까지 수상함으로써 전도유망한 철학자로서의 첫 발을 내딛게 된다. 어쨌든 이런 식의 내용이야 '전통과 도입'에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냥 접수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나의 독서경험상 이런 사소한 꼬투리들이 많은 걸 암시해주며 또 많은 의혹을 낳는다(그러니 '침식주의'라 부를 만하다). 해서 앞뒤로 몇 페이지를 둘러보는데 116쪽의 데리다 인용문에서는 음소(Phoneme)와 문자소(Grapheme)은 번역 없이, 'Phonene나 Graphene'이라고 오기했다. 오타라 하더라도 너무 눈에 띄는 오타이다. 112쪽에서는 데리다와 카트린 클레망의 인터뷰를 싣고 있는 잡지 <아르크(L'arc>)를 '아르크Arch'라고 오기했다.

Жак Деррида Диссеминация La Dissemination

조금 뒤로 가보니 168쪽의 미주에서 저자가 <파종>이라고 옮기고 있는(보통은 <산종>이라고 옮긴다) 데리다의 'La dissémination'(1972)이 'La deissémination'이라고 오기됐다(이 경우엔 탈자가 생긴 게 아니라 특이하게도 첨자가 생겼다). 지나가는 김에 말하자면, <산종>은 올해 러시아어본이 출간됐다(들뢰즈/가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도 올해 러시아어본이 나왔다). 

거기에 본문에서 저자가 "편집증세가 심한 네오-프래그머티스트'로 폄하하고 있는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는 'Richard Rotty'로 오기됐다. 찾아보기에서까지 'Richard Rotty'라고 표기된 걸로 보아 저자는 Rorty가 아니라 Rotty를 읽은 모양이다...

이런 식으로 따지자면 끝이 없겠다. 내가 다 읽어보지 않았기에 저자가 이런 실수들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책을 썼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나의 '취향'은 이미 책을 진지하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데리다에 대한 저자의 판단처럼.

"데리다는 왜 실없는 말을 하려는 것이었을까? 그의 농담은 진담에 대한 진저리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진담을 구토한다. 그는 늘 진담들을 해체하려 한다. 철학은 너무 오랫동안 '진담하기'에 주눅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그 주눅을 벗어던지려 했을까? 그는 철학의 진담들을 모두 단두대에 올려놓아야 한다고 외친다. 해체란 단두(斷頭)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그가 믿기 때문이다."(110-111쪽)

침식주의 또한 진담에 대한 진저리인 것이다...

07. 09. 21.


댓글(3)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열매 2007-09-21 17:41   좋아요 0 | URL
서양철학을 열심히 공부한 이들 중 일부는 서양의 전통에 대한 외상으로 인한 반작용으로 동양의--그리고 한민족 고유의--전통에 대한 집착으로 빠지곤 하는 모습을 봅니다. 영국으로 유학갔던, 서양의 전통과 학문에 대한 위압감으로 정신병까지 얻었던 것과 같은, 소세키의 고민이 그대로 백년후의 한국에서 반복되는 것같은 기시감이 듭니다. 일본어로 일본의 근대를 그대로 받아들였던 시대가 지나--중역의 시대였던-- 한국어로 학문을 해야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나서야 시작되는 근자의 '번역론'에 대한 무성한--하지만 별무실한-- 논의처럼 말이죠.

이광래씨도 그런 고민을 꽤 했던 듯합니다.
그가 습합習合 운운하며 한국의 서양철학 수용사나 일본 학문에 대해 연구한 것 역시 잃어버린 전통에 대한 집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서양 철학에 대한 공부를 이렇게 강박적으로 부인하는 것을 보니 더더욱.
이교수의 공부가 잃어버린(만들어진) 전통에 대한 집착이나 도취가 아니라, 동서양의 이분법을 떠나 보다 급진적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동서양의 이분법에 잘못 빠지면, 김두규씨처럼 전통풍수 운운하는 삼천포로 빠지지요.

강원대와 약간 관련된 지인의 말에 의하면, 이광래교수는 불어보다는 일어에 능하다고 하더군요.초창기 저작들도 일본어 저작들에 많이 의존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마 일본의 근대학문과 그 수용으로서의 한국의 근대 학문에 대한 연구가 나온다면 한국 학계의 많은 미스테리들이 풀리지않을까하는 의문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로쟈 2007-09-21 17:47   좋아요 0 | URL
저로선 그런 집착이나 유혹에 별로 기대하지 않는 편이지만(가령 박동환 교수의 '3표 철학'을 '숭배'하는 후학들의 모습이 저로선 퇴행 이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걸 다 떠나서라도 학문적인 정확성/엄격성은 지켜져야 한다고 봅니다. 대충대충이 '동양적'이라고 강변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책의 266쪽에서는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를 '찰스 앤더슨 퍼스'라고 표기하고 'Charles Sander Peirce'라고 병기해놓았네요(탈자가 있습니다). 이런 책을 진지하게 읽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자꾸때리다 2007-09-21 21:38   좋아요 0 | URL
저도 공부는 많이 해보지 않았지만 열매님의 의견에 많이 동감이 되네요. 동양/한국 철학에 대한 너무 과한 강박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상당수 되는 듯해요. 서양 철학에 대한 무분별한 추종이나 또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긴 동양철학에 대한 강박증에서 모두 자유로워질 수 있는 때가 왔으면 좋겠네요.
 

어제 '들뢰즈 철학사'란 리스트를 만들게 된 빌미가 되기도 했지만 최근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이학사, 2007)란 책이 출간됐다. 철학사에 대한 들뢰즈의 생각들을 알려주는 글들의 선집인데, 책 자체는 들뢰즈가 만든 것이 아니라 역자와 출판사가 기획하여 만든 것이다(이 책의 편제에 대해서는 '이 책에 대하여'란 서문에 나와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코멘트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알라딘에 소개된 내용상으로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실제로 서점에서 책을 들여다보니 많은 글들이 내가 영역본 등의 버전으로 갖고 있는 것이어서 손에 들게 되었다. 특히 내가 관심을 갖는 글 꼭지는 '구조주의를 어떻게 식별할 것인가', '내재성: 생명...' 등인데, 국내에 이미 다른 버전의 번역이 나와 있기 때문에 비교해서 꼼꼼히 읽어봄 직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두 텍스트 중 '내재성: 생명...'은 작년초에 온라인 자율평론에 '내재성: 하나의 삶'으로 번역되어 주석과 함께 게재된 바 있다(http://jayul.net/view_article.php?a_no=874&p_no=1&key=%B5%E9%B7%DA%C1%EE). '들뢰즈와 '하나의 삶''이라는 기획특집의 일환이었다. 이 참에 번역텍스트를 옮겨놓는다(문단은 내가 원문보다 더 잘게 잘랐다). 이번에 새로 나온 번역까지 포함한 두 텍스트에 대한 나의 생각은 나중에 시간이 날 때 적어두겠다(개략적인 것은 이전에 쓴 같은 제목의 페이퍼 http://blog.aladin.co.kr/mramor/735467 참조).

자율평론 제15호(06. 01. 13) 내재성: 하나의 삶

■초역을 올린 후,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있는 양창렬 님이 불어본을 대조하여 나의 번역에서 누락된 부분과 잘못 번역된 부분을 수정한 메일을 보내왔다. 영어본과 차이가 나는 한 대목은 두 개의 번역을 병기했다. 더 나은 번역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준 양창렬 님께 감사드린다.-조정환



내재성: 삶1)

초험적(transcendental) 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대상에 관계하거나 주체(경험적 표상)에 속하지 않는 다는 점에서 경험과 구별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비-주체적 의식의 순수한 흐름, 선-반성적인 비인격적 의식, 자기 없는 의식의 질적인 지속으로서 나타난다. 초험적인 것이 즉각적으로 주어진 그러한 것에 의해 정의된다는 것은 흥미롭게 보일 것이다. 우리는 주체와 대상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모든 것에 반대되는 초험적 경험주의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이 초험적 경험주의에는 거칠고 강력한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당연히 감각이라는 요소(단순한 경험주의)가 아니다. 감각은 단지 절대적인 의식의 흐름 안에서의 한 균열일 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생성으로서, 힘(가상실효적 양)의 증가 혹은 감소로서, 하나의 감각에서 다른 감각으로의 이행이다. 그 두 감각이 아무리 가깝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초험적인 장을, 대상도 자기도 갖지 않은, 시작도 끝도 없는 운동으로서의 순수하게 직접적인 의식으로 정의해야 하는가? (이러한 이행이나 힘의 양에 관한 스피노자의 생각조차도 여전히 의식에 호소한다.)

그러나 의식에 대한 초험적 장의 관계는 단지 개념적인 것일 뿐이다. 의식은 주체가, 그 장의 바깥에 있고 또 “초월적인 것들transcendents”로 나타나는, 자신의 대상으로 동시에 생산되었을 때에만 사실이 된다. 반대로, 의식이 무한한 속도로 어디에나 확산된 초험적인 장을 횡단하는 동안에는, 그것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2) 사실, 의식은, 그것을 대상에 관련시키는 주체에 반사되었을 때에만 표현된다. 그것이 초험적 장이, 초험적 장과 공연장적(coextensive)인 의식에 의해 정의될 수없고, 어떠한 드러남으로부터도 제거되는 이유이다.

초월적인 것은 초험적인 것이 아니다. 의식이 없다면, 초험적 장은 순수한 내재성의 평면으로 정의될 것이다. 그것은 주체와 대상의 모든 초험성에서 빠져나오기 때문이다.3) 절대적인 내재성은 그 자신의 안에 있다. 그것은 어떤 것 안에, 어떤 것에 대해 있지 않다. 그것은 어떤 대상에 의존하지도 어떤 주체에 속하지도 않는다. 스피노자에게서, 내재성은 실체substance에 대한 내재성이 아니다. 오히려, 실체와 양태들이 내재성 안에 있다. 내재성의 평면 바깥으로 떨어진 주체와 객체가 내재성이 그것에 귀속되는 보편적 주체나 임의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지면, 초험적인 것은 완전히 변성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그것은 (칸트와 더불어) 단순히 경험적인 것을 되풀이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재성은 왜곡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그것(내재성-역자)은 그 자신이 초월적인 것에 둘러싸여 있음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내재성은 모든 사물보다 우월한 통합체로서의 어떤 것(Some Thing) 혹은 사물들의 종합을 낳는 어떤 행동으로서의 주체(Subject)에 관계하지 않는다. 내재성이 더 이상 그 자신 이외의 다른 어떤 것에 대한 내재성이 아닐 때에만, 우리는 내재성의 평면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초험적 장이 의식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 것은, 내재성의 평면이, 그것을 포함할 수 있는 주체 혹은 대상에 의해 규정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우리는 하나의 삶(A Life)인,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순수한 내재성에 대해 말할 것이다. 이것은 삶에 대한 내재성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 속에서는 삶이 아닌 내재적인 것이다. 삶은 내재성의 내재성, 절대적인 내재성이다. 그것은 완전한 힘, 완전한 지복이다. 요한 피히테(Johann Fichte)는 자신의 최후의 철학에서 주체와 대상이라는 난제들(aporias)을 넘어서는 정도만큼, 더 이상 존재(Being)에 의존하거나 행동(Act)에 종속되지 않는, 하나의 삶(a life)으로서의 초험적 장을 제시한다. 그것은, 그것의 활동성이 더 이상 존재에 관련되지 않고서, 끊임없이 삶 속에서 제기되는, 절대적으로 직접적인 의식이다.4)

그러므로 초험적 장은 진정한 철학적 진행의 핵심에 스피노자주의를 재도입하는 내재성의 진정한 평면이 된다. 맨느 드 비랑(Maine de Biran)은 그는 (그가 너무 지쳐있었기 때문에 결실을 맺을 수 없었던) 그의 “최후의 철학”에서, 노력의 초험성(transcendence of effort) 아래에서 어떤 절대적으로 내재적인 삶을 발견했다. 이때 그는 이와 유사한 어떤 것을 경험하지 못했던 것일까? 초험적 장은 내재성의 평면으로 정의되고, 다시 내재성의 평면은 삶으로 정의된다.

내재성이란 무엇인가? 삶… 만약 우리가 무한정한 분절(=부정관사)를 초험적인 것의 지표로 받아들인다면, 그 누구도 찰스 디킨즈(Charles Dickens)보다 하나의(a)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잘 기술하지 못했다["내재성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삶 … 그 누구도, 부정관사를 초험적인 것의 지표로 삼은 찰스 디킨즈보다 하나의(une)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잘 기술하지 못했다"-불어본을 참조한 양창렬 님이 보내온 번역]. 모든 사람들로부터 경멸을 당하던, 평판이 좋지 않은 한 남자 도둑이 누워서 죽어 가는 채로 발견되었다. 갑자기, 그의 삶의 기운이 너무 미약해서, 사람들이 커다란 열의, 존경, 심지어 사랑으로 그를 돌보아 준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구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이 가장 사악한 남자는 깊은 혼수상태에서 부드럽고 달콤한 무엇인가가 그에게 스며드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그가 소생하게 됨에 따라, 그의 구원자들은 점점 냉담해지고, 그는 다시 비열하고 거칠어진다. 그의 삶과 죽음 사이, 거기에 죽음과 놀이하고 있는 하나의 삶의 순간이 있을 뿐이다.5)

개체적인 것의 삶은, 내재적이고 외재적인 삶의 우연들로부터, 즉 무엇인가가 일어나는 주체성과 대상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순수한 사건을 해방하는, 비인격적인, 그리고 특이한(singular) 삶에 길을 비켜준다. 모든 사람이 그와 더불어 감정이입을 하는, 그리고 일종의 지복에 도달한 “지고한 인간(Homo tantum)”. 그것은 더 이상 개별화의 각개성(haecceity)이 아니고 특이화의 각개성이다. 순수한 내재성의, 중립적인, 선악을 넘어선 삶. 왜냐하면 그것을 선하거나 악하게 만드는 사태들 속에서 그것을 육화하는 것은 주체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개별성의 삶은, 더 이상 이름을 갖지 않는 사람에게 내재적인 특이한 삶을 위해 사라져간다. 그가, 그 누구도 아닌 것처럼 오해될 수도 있지만 말이다. 특이한 본질, 하나의 삶….

그러나 우리는 삶을, 개별적 삶이 보편적 죽음에 직면하는 그 유일한 순간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 삶은 어디에나 있다. 그것은, 어떤 주어진 살아있는 주체가 경험하는 그리고 어떤 살아진 대상들에 의해 측정되는 모든 순간들 속에 있다. 내재적인 삶은 오직 주체와 대상들에서만 현실화되는 사건들 혹은 특이성들을 실어 나른다. 이 부정관사의 삶[즉 하나의 삶 a life, une vie]은 그 자체로는 순간들을 갖지 않는다. 그 순간들이 서로 가깝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것은 단지, 사이-시간, 사이-순간들을 가질 뿐이다. 그것은 발생하거나come about 후속될come after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직접적 의식이라는 절대적인 것 속에서, 아직 오지 않은 그리고 이미 일어난 사건들을 바라보는, 텅 빈 시간의 거대함을 제공한다.

그의 소설에서, 레르네 올레니아(Alexander Lernet-Holenia)는 무기들 전체를 삼켜버릴 수 있는 중간(in-between) 시간에 사건을 위치시킨다. 하나의 삶(a life)을 구성하는 특이성들과 사건들은 그것에 상응하는 그 삶(the life)의 우연들과 공존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서로 같은 방식으로 묶이거나 분할되지 않는다. 그들은 개별자들이 연결되는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서로 연결된다. 특이한 삶은 어떤 개별성 없이도, 그것을 개별화하는 어떤 부수물 없이도 지낼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아주 어린 아이들은 모두가 서로 닮아 있고 거의 어떤 개별성도 갖고 있지 않지만, 그들은 특이성들을 지닌다. 미소, 제스처, 재미있는 얼굴 ― 이것들은 어떤 주체적인 질들이 아니다. 어린 아이들은, 그들의 모든 수난과 연약함을 통해, 순수한 힘이며 심지어는 축복인 내재적인 삶이 불어넣어진다. 삶의 무한정한 측면들은 내재성의 평면을 부풀리는 정도에 따라 혹은, 마찬가지로, 초험적 장의 요소들을 구성하는 정도에 따라 모든 비결정을 잃는다. (다른 한편, 개별적 삶은 경험적 결정들로부터 분리불가능하게 남아있다.)

그러한 것으로서 무한정은 경험적 비결정의 표시가 아니라 내재성 혹은 초험적 결정가능성에 의한 결정의 표시이다. 무한정한 분절[=부정관사]은, 단지 특이한 것의 결정일 뿐이기 때문에, 개인(the person)의 비결정이다. 일자(the One)는 내재성을 포함할 수 있는 초월적인 것(the transcendent)이 아니라 초험적 장 안에 포함된 내재적인 것(the immanent)이다. 하나라는 것은 언제나 다양체의 지표이다. 사건, 특이성, 삶…. 내재성의 평면의 바깥으로 떨어지는, 혹은 그 자체에 내재성을 귀속시키는 어떤 초월적인 것(a transcendent)을 불러내는(invoke) 것이 항상 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초험성은, 이 평면에 속하는 내재적 의식의 흐름 속에서만 구성된다.6) 초험성은 항상 내재성의 산물이다.

삶은 오직 가상실효적인 것들(virtuals)만을 포함한다. 그것은 가상실효성, 사건, 특이성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가상실효적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실재성을 결여한 어떤 것이 아니라, 그것에 특수한 실재성을 부여하는 평면을 따라 하나의 현실화 과정 속에 참여하고 있는 어떤 것이다. 내재적 사건은 사물의 상태 속에서, 그리고 그것을 발생시킨 살아진 것(the lived)의 상태 속에서 현실화된다. 내재성의 평면은, 그것이 그 자신에게 귀속시키는 주체와 대상 안에서 현실화된다. 그러나 대상과 주체가 아무리 분리불가능하다 할지라도, 내재성의 평면은, 거기에 사는 사건들이 가상실효성들인 한에서는, 그 자체로 가상실효적이다. 사건들과 특이성들은 그 평면에 그것들의 모든 가상실효성을 부여한다.

내재성의 평면이 가상실효적 사건들에 완전한 실재성을 부여하듯이. 현실화되지 않은 (무한정한) 것으로 고려된 사건은 그 어떤 것도 결여하지 않고 있다. 그 사건을, 그와 공존하는 것들, 즉 초험적 장, 내재성의 평면, 삶, 특이성들 등과 관련 속에 놓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상처는 사물들 혹은 삶의 어떤 상태에서 육화 혹은 현실화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삶으로 이끄는 내재성의 평면 위에 있는 순수한 가상실효성 그 자체이다. 나의 상처는 나 이전에 존재했다. 더 높은 현실성으로서의 상처의 초험성이 아니라, 항상 어떤 환경(평면 혹은 장)7) 안의 가상실효성으로서의 그것의 내재성. 초험적 장의 내재성을 정의하는 가상실효적 것들과, 그것들을 현실화하여 초월적인 어떤 것으로 변형하는 가능한 형식들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1) 2005년 3월 20일 조정환 옮김; 텍스트: G. Deleuze, 'Immanence: A Life'(in G. Deleuze, Pure Immanence: Essays on A Life, tran. by Anne Boyman, Zone Books, New York, 2001, pp. 25~33)[불어본: G. Deleuze, 'L'immanence: Une Vie', Philosophie 47, Editions de Minuit, 1995.]

2) “우리가 빛을 그것을 발산하는 표면에 다시 반사시키더라도, 저항 없이 지나친 빛은 결코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Henri Bergson, Matter and Memory, New York, Zone Books, 1988, p. 36)

3) 비인격적, 절대적 내재적인 의식에 관계하는 주체 없이 초험적 장을 정립하는 사르트르를 참조하라. 그에 비교할 때, 주체와 대상은 “초월적”인 것들이다. (La transcendance de l'Ego (Paris: Vrin, 1966), pp.74-87) 제임스에 관해서는, David Lapoujade의 분석, “Le Flux intensif de la conscience chez William James," Philosophi 46 (June 1995)"을 참조하라.

4) 이미 La Doctrine de la science 두 번째 서문에서 “고정된 어떤 것이 아니라 진행이며, 존재가 아니라 삶인 순수 한 활동성의 직관”(Oeuvres choisies de la philosophie première (Paris: Vrin, 1964), p.274)이라 말하고 있다. 피히테에 따른 삶의 개념에 대해서는 Initiation à la vie bienheureuse (Paris: Aubier, 1944), 그리고 Martial Guéroult의 주석(p. 9)을 보라.

5) Dickens, Our mutual Friend(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9), p. 443.

6) 심지어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조차도 이것을 인정한다. “세계의 존재는, 기원적인 증거 내부에서조차, 필연적으로 의식에 초월적이며, 또 필연적으로 초월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초험성이 의식의 삶 속에서, 그 삶에 분리불가능하게 연결되어있는 것으로서, 단독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바꾸지는 않는다. (Méditations cartésiennes (Paris: Vrin, 1947), p. 52) 이것이 사르트르 텍스트의 출발지점일 것이다.

7) Joë Bousquet, Les Capitales (Paris: Le Cercle du Livre, 1955) 참조.

07. 09. 21.

P.S. 이 번역의 대본은 각주1)에 밝혀져 있지만, 텍스트 자체는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의 한 가지 대본이기도 한 <광기의 두 체제: 텍스트와 인터뷰 1975-1995>(2003; 영역본2006)에도 실려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