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기의 아나키스트 혁명가 보리스 사빈코프(싸빈코프)의 소설 두 권에 대해서 언젠가 페이퍼를 만든 적이 있는데(http://blog.aladin.co.kr/mramor/1434756), 보다 자세한 리뷰가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S1N5&rsec=&idxno=6021).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문득 생각이 나게 해주었다. 책은 조만간 구입하든가 대출하든가 해야겠다. 곧 10월이니까...

연세대 대학원신문(제155호) 일기로 기록된 혁명의 ‘현재 시제’

시나 소설을 창작할 수 없는 평범한 인간이라 해도 만약 그가 늦은 밤 홀로 있는데 마침 그 날 하루 혹은 인생이 밀도 있게 다가온다면, 일기를 쓸 것이다. 하루를 인생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며 언어를 조금이라도 부릴 줄 아는 인간에게 허용된 최소한의 미적 행위랄까. 밀도 있게 다가온 일상의 어떤 순간을 망각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조바심과,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시간이 더 두꺼워지고 진해질 수 있을 거라는 설렘이 교차하는 일기는, 기억의 형식이라기보다는 기록의 형식이다. 기억의 윤색과 문학적 형상화로 정제된 자서전 혹은 자전소설과 달리, 일기는 사실적 정황이 갖는 날 것의 느낌을 잃지 않는다.



사랑의 이름으로 살인하는 테러리스트의 일기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기에 러시아 아나키스트 정당인 사회혁명당의 암살단원으로, 께렌스끼 임시 정부의 국방차관으로, 백군 사령관으로 활동했으며, 롭신이란 필명으로 테러와 혁명에 대한 많은 소설과 회상록을 남긴 보리스 싸빈꼬프의 소설, 『창백한 말』(1909)과 『검은 말』(1923)은 모두 1인칭 시점의 일기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전자에서 일기를 쓰는 주인공은 1905년 혁명 전후의 테러리스트이고, 후자의 주인공은 1917년 혁명 이후 반(反)볼셰비끼 투쟁을 벌이는 백군 사령관이다.

저자 싸빈꼬프의 전기적인 실제 이력이 투영된 이 두 주인공은 활동하는 시기와 명분은 다르지만, 혁명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번민, 그리고 정의의 이름으로 행하는 살육의 정당성에 대한 회의를 공유한다. 두 작품 공히 가장 많이 언급되는 문구는 ‘살인하지 말라’는 성경의 계명이다. ‘사랑의 이름으로 살 수 있는 힘을 알지 못했고, 사랑의 이름으로 죽을 수 있다는 것만을 이해하는’ 이 뜨거운 혁명가들에게 살인의 계명은, 지젝이 말하는 자기 지양의 법, 즉 모든 것을 금지하는 동시에 허용하는 법으로 작용한다.

‘살인하지 말라…….’ 이 말이 또다시 나의 뇌리를 스친다. 누가 그런 말을 한 걸까? 왜……? 왜 연약한 영혼에게 그처럼 힘겨운, 실천하기 어려운 계명을 남긴 걸까?(『검은 말』 중에서)

“바냐, 그럼 ‘살인하지 말라’는?”
“없어, 조지. 살인하게.”
“자네가 그런 말을 하나?”
“그래, 내가 그렇게 말하네. 살인하게, 다른 사람들이 살인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살인하게,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대로 살고, 사랑이 세상을 밝히도록.”
“그건 신성모독이네, 바냐.”
“나도 알아. 그럼 ‘살인하지 말라’는 신성모독이 아닌가?”(『창백한 말』 중에서)



‘열린 국면’, ‘날 것’으로서의 혁명

혁명을 ‘생성 중인’ 역사적 상황, 그 어떤 헤게모니도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한 ‘중간적 국면’이 열린 단락으로 이해한다면, 혁명의 시제는 ‘현재’일 것이다, ‘일기’는 바로 그런 ‘시간이 움직이지 않고 정지해 버린 순간’을 포착하는 현재 시제의 장르이다. 일기는 과거의 시간을 전유하여 현재의 현존으로 과거를 채움으로써 현재와 과거를 직접적으로 결부시킨다. 이는 혁명가들이 역사를 파악하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마르크스주의, 인민주의, 애국주의, 반볼셰비즘을 넘나들며 당의 강령에 쉽게 매몰되지 않아 동지들에게조차 늘 경계의 대상이 됐던 싸빈꼬프의 궁극적인 투쟁 목표는, 구세력뿐만 아니라 볼셰비끼의 독재에서도 해방된 ‘제 3의 러시아’를 구축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어떤 헤게모니에 의해서도 전유되지 않은 혁명의 ‘열린 국면’, 즉 혁명의 ‘현재 시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그의 이상주의적 열망은, 이 두 소설의 주인공들이 일기로 기록하는 혼돈으로서의 혁명(상징적 기표로 다 설명될 수 없는 ‘날 것’으로서의 혁명)에도 투영돼 있다.

물론 그가 지켜내려던 혁명의 ‘열린 국면’은 실정적인 이데올로기적 기획, 즉 볼셰비끼의 독재에 의해 곧 닫히게 되었고, 싸빈꼬프는 러시아 혁명 역사의 승자가 아닌 패자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새롭게 도래한 이 ‘현재’를 경험한 이들의 숭고한 열망은 그것이 결국 실패한 몸짓으로 끝났다 해도, 혁명 이후의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유효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원래부터 주어져 있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현재의 토대가, 사실은 인공적이고 우연적인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전유의 결과는 아닌가 라고. 우리가 현실적인 것으로서 조우하는 현재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를 묻는 이 질문은 그저 우연히 한번 만나 단순한 가치판단으로 봉합해버릴 수 있는 게 아니라, 삶의 여러 맥락과 감정의 여러 파고에서 반복적으로 대면해야 하는 근본적 차원의 질문이다.

혁명은 단순히 불합리한 현실의 전복이 아니라, 현실의 토대 자체가 우연적이고 인위적인 봉합에 지나지 않음을 폭로하는 폭력적인 하나의 행위/사건이다. 『창백한 말』과 『검은 말』의 일기 형식을 통해 싸빈꼬프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바로, 모든 이데올로기적인 봉합에 저항하는 날 것으로서의 혁명, 즉 해석이나 통합이 아닌 변혁을 가져오는 행위/사건으로서의 혁명이 아닐까.(김윤하 / 비교문학 박사과정)

07. 09. 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컬처뉴스에서 작가 편혜영의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 인터뷰는 '젊은 창작자를 찾아서'란 기획시리즈의 하나인데 오래전에 시인 김경주 편을 한번 옮겨놓았었다. 공통점은 내가 뭔가를 기대하는 젊은 시인/작가들이라는 것이겠다, 지난번에 나온 소설집 <사육장쪽으로>(문학동네, 2007)은 작가가 (아마도 사소한 인연을 빌미로) 사인본까지 보내주어서 두 권을 갖고 있지만, 아직 절반밖에 읽지 못했다(관련 페이퍼는 http://blog.aladin.co.kr/mramor/1449456). 나는 '편혜영쪽으로' 계속 가고 있는 중이다...

컬처뉴스(07. 09. 19) 나의 일상이 나의 적이 된다면

도시생활의 고단함을 일거에 보상받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연인들(「소풍」)의 모습이나 힘들게 마련한 전원주택단지에서 꿈을 키워가는 소시민(「사육장 쪽으로」)의 삶, 직장상사의 눈에 들어 승진의 기회를 얻고자 하는 회사원(「분실물」)의 고뇌는 우리 삶의 일부처럼 가까운 일상이다. 그런데 그들의 일상이 한순간에 ‘섬뜩’한 악몽으로 변한다면?

전작 『아오이가든』에서 역병이 퍼진 도시에서 개구리비가 떨어지고, 엄마에게 버려진 아이가 쥐의 배를 가르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하드고어(Hard Gore) 원더랜드’라는 평가를 받았던 편혜영이 두 번째 소설집 『사육장 쪽으로』(문학동네)를 펴냈다. 이번 작품집에 실린 작품들도 ‘섬뜩’하기는 마찬가지지만 전작에 비하면 극단적인 이미지가 줄었고, 아비규환의 ‘아오이가든’ 대신 ‘일상’이라는 공간이 들어섰다.

그런데 이 ‘일상’은 앞서 서술한 것처럼 우리에게 너무나 낯익고 익숙한 것이어서 더 섬뜩하다. 작가는 이번 작품집의 ‘섬뜩’한 일상들을 통해 마치 평화로운 현대 문명사회를 살아가는 소시민들에게 “당신의 일상은 평화로운가요?”라고 묻고 있는 것 같다. 지난달 인터뷰차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만난 작가에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당신의 일상은 어떤가요?”라고 말이다. 

작가도 누구나 그렇듯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었다. 일반 직장인처럼 “8시에 일어나서 9시에 출근하고 6시에 퇴근”한다는 작가는 “독특할 것이 하나도 없는 평범한 직장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작가’라는 타이틀만으로는 살아가기 힘든 세상에서 작가에게 다른 직업이 있다고 해서 놀랄 일은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사육장 쪽으로』에서 ‘일상의 악몽’을 쫓고 있는 작가가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를 배신감이 밀려왔다.

“제 작품에 나오는 일상이 워낙 무섭고 사람들이 조롱받는 느낌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뻔히 불행한 결말이 보이는데도 아둥방둥 살아가고. 근데 작품에서는 그렇지만 사실 사람들의 살아가는 하루하루는 하나의 긴 흐름에서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시간의 일부잖아요. 현실에서는 그렇게 불안을 느끼지 않고. 사실 저도 마찬가지인데, 어느 날 이런 나의 평범한 일상이 적(敵)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가는 그렇게 평화롭게만 보이는 일상의 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작가는 자신의 출근길에 대해 “이제 곧 날씨가 추워지면 광화문의 출근길은 마치 장례식장처럼 변해요. 모두가 검은 양복을 입고”라고 묘사했는데, 일상의 한 순간에 포착된 이미지에서 현실의 ‘불안’과 ‘공포’를 보고 있는 작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악몽의 일상’에서 ‘일상의 악몽’으로

“톨게이트를 지나자 안개가 한층 두껍게 내려앉았다. 차들은 빙판길을 지날 때처럼 서행하고 있었다. 얼마 전 한 대교 위에서 십사중 충돌사고가 일어났다. 사망자 열두 명. 부상자가 서른아홉명이나 발생한 대형 사고였다. 안개 때문이었다.” - 「소풍」

“김이 카드를 돌렸다. 박은 슬쩍 카드를 확인하고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조는 확인한 카드를 손에 감추고 칩을 만지작거렸다. 세 사람은 신호라도 되는 듯이 서로 눈을 맞췄다. 게임이 시작되었다.”- 「금요일의 안부인사」

“박은 가방 손잡이를 꼭 쥐었다. 오늘따라 전철 안이 더욱 붐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서두르는 건데 그랬다. 길이 막히더라도 택시를 타는 게 좋았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가방 때문이었다. 가방 안에는 서류가 들어 있었다.” - 「분실물」

인용한 글들은 모두 세 작품의 도입부이다. 도로에서 ‘안개’를 만나거나, 누군가의 집에서 셋이서 ‘카드게임’을 하거나, ‘붐비는’ 지하철을 타는 일은 모두 일상적인 것들이다. 하지만 도입부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안개’와 ‘카드’ 그리고 ‘붐비는 지하철’은 어딘가 모르게 불안한 상황이 닥쳐올 것만 같다.

신형철 평론가는 작가의 이번 작품들을 두고 “편혜영 소설은 이제 ‘악몽의 일상화’가 아니라 ‘일상의 악몽화’를 겨냥한다”고 말한다. 말 그대로 일상의 불안함에서 시작되는 ‘일상의 악몽화’는 이번 작품집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변화를 두고 신형철 평론가는 물론 많은 평자들이 그녀의 소설세계가 “진화했다”고 평가했다. 

“기괴함(grotesquerie)이 낯선 것들과의 조우에서 발생하는 미학적 효과라면 섬뜩함(uncanniness)은 낯익은 것이 돌연 낯선 것으로 전화될 때 발생하는 정치적 효과다. (줄임) 편혜영의 최근작들이 특히 매혹적인 까닭은 편혜영 특유의 실재의 미학(기괴함)이 마침내 실재의 정치학(섬뜩함)으로 진화해가는 국면을 인상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해설 「섬뜩하게 보기」(신형철 문학평론가)

이러한 진화, 혹은 변화에 대해 작가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기계문명도 아니고 ‘진화’라는 표현은 좀 그렇네요.(웃음) 첫 책을 묶고 두 번째 책에 대한 방향성을 따로 세운 것은 아니지만 현실에서 느낄 수 있는 것에 대한 얘기를 해보자하는 생각은 있었어요. 첫 책은 공간자체도 현실에 없을 것 같은 환상의 공간이나 사건이 많았잖아요.(웃음) 하지만 너무 구체성을 띠는 것은 좋아하지 않아서 현실적이기는 하지만 약간 모호한 시공간의 이미지가 그대로 첫 번째 책하고 연결되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작가가 말대로 구체성에 대한 배제는 W시나 D시와 같은 알파벳 지명이나 김, 박, 조 등으로 표현된 사람의 이름들로 나타났다. 이러한 작가의 글쓰기 방식은 구체적인 이름이나 지명이 주는 선입견을 제외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특정한 공간이나 특정한 인물이 아닌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는 공포감을 배가한다.

이미지로 글쓰기

편혜영 작가의 글쓰기는 서사보다는 ‘이미지’가 이야기를 끌어간다는 측면에서 전통적인 소설쓰기와 구별된다. 하지만 작가에게도 전형적인 소설쓰기의 시절이 있었다. 작가의 등단작이었던 「이슬털기」는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굿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방식이나 내용면에서 기존의 전통적인 방식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랬던 그가 기괴하고, 잔혹한 이미지로 가득한 글쓰기를 시작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그렇게(전통적인 글쓰기로) 소설을 쓰는 것이 재미가 없었어요. 처음에 쓸 때는 개요를 잡아놓고 구성을 생각하면서 썼는데, 그런 작업이 저한테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하루는 이미지 중심으로 막 써내려가는 데 서사는 미약했지만 저한테는 굉장히 즐거운 경험이었어요. 그게 계기가 돼서 이미지로 글쓰기를 시작했어요.”

작가는 “내적인 구조”만 생각하고 글을 쓴다고 했다. 전작 「아오이가든」에서 개구리가 비처럼 내리다가 나중에 누이가 개구리를 닮은 아이를 낳는 것처럼 “이미지의 흐름만 생각하며 글을 써내려 간다”는 것. 물론 그것이 읽는 사람에게는 다소 낯설고 불편할지라도 작가는 스스로에게 “재미있는 글쓰기”를 하고 싶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미지들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작가는 “실제 일어난 사건들에서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변두리 도시의 동물원에서 일어난 코끼리 탈출사건을 그리고 있는 「퍼레이드」의 경우 실제로 2005년 발생했던 코끼리 탈출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같은 작품에 나타나는 대도시 한복판의 벙커 역시 그해 떠들썩했던 ‘여의도 벙커’를 생각하면 만든 이미지라는 것. 그리고 그 이미지를 표현하는 방식은 ‘기괴함’과 ‘그로테스크’인데, 이것과 관련해서는 “80년대나 90년대 어법과는 다른 2000년대 새로운 어법의 한 방식”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80년대는 지나치게 사회적인 억압이 있었고, 90년대는 개인적인 것에 대한 억압이 있었던 시기 같아요. 그런데 2000년대는 그런 방식의 억압이 없어요. 억압이라고 한다면 새로워야 한다는 억압만 있는 것이죠. 그 새로움의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저는 기괴함이나 그로테스크인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은 오히려 아날로그적인 것을 가져오기도 하고, 유머를 가져오기도 하죠.”

더불어 작가는 작품에서 비전이나 전망에 대한 감각은 일부러 떨치려고 한단다. 그는 “처음에 글을 쓰며 힘들었던 것이 작품에 비전이 없다는 것이었어요. 작품에 비전이 있어야 한다는 강박, 그리고 그것에 대한 불만이 너무 싫었죠. 그래서 아예 출구 자체가 막혀있는 것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보니 그게 현실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한 박자 쉬어가기

이번 두 번째 단편집은 첫 소설집 『아오이 가든』 이후 2년 만에 묶은 것이다. 전작이 등단 이후 5년 만에 나왔던 것에 비하면 굉장히 빠른 속도인데다, 총 8편이 실렸으니 1년에 꼬박 네 편씩을 쓴 셈이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이제 좀 “쉬어가고 싶다”고 했다.

“내적으로 고갈된 상태가 된 것 같아요.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한 작품 쓰고 생각을 전환하거나 이전 작품에 대한 생각들을 떨쳐버리고 갈 수 있는데 물리적 시간 때문에 그런 작업들을 하지 못했어요. 그런 리듬을 스스로 조절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니 내가 마치 생산자가 돼서 뭔가를 계속 만들어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이제 한 두 계절 쉬면서 멀찍이 떨어져 보고 싶어요.”

젊은 작가 중에서도 편혜영 작가는 소위 ‘잘’나가는 작가에 속한다. 그가 2년 만에 발표한 원고들을 모아 단편집을 묶을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인데, 그의 ‘쉬고 싶다’는 고민이 행복한 비명처럼 들리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기계처럼 쏟아냈다’는 스스로의 진단이 어떤 쉼으로 이어져 어떤 변화를 만들어낼 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위지혜)

07. 09. 20.

P.S. 나도 궁금해진다! 참고로, <문학동네>(가을호)의 '젊은 작가특집'이 편혜영을 다루고 있으므로 그의 독자들이라면 필히 챙겨두어야겠다. '작가초상'은 동료이자 후배작가 김애란이 맡았다. 작가의 '스타일'을 고려하자면 <사육장쪽으로>의 뛰어난 점을 열 가지 이상 주워섬겨야겠으나, 나는 당장에 볼일은 없을 거라는 예단으로 흠을 잡겠다. 가령 <소풍>과 <분실물>을 지난달에 읽었는데, 나는 '이미지'로 끌고가는 이야기의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눈에 띈다고 생각했다(<사육장쪽으로>의 기억이 워낙에 강렬했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중간쯤 읽으면 이미 결말이 예상되는 소설들이었다. "작품에 비전이 있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탈피한 결과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출구 자체가 막혀있는 것"만이 우리의 현실일까?(그건 또 다른 강박 아닐까?) 작가의 하드고어 원더랜드에 '놀라움'이 더 충전되기를 기대한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07-09-20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불향히도 제 취향은 아니었다는... ㅠㅠ

로쟈 2007-09-21 09:47   좋아요 0 | URL
모든 작가들을 좋아할 수는 없는 일이죠...

자꾸때리다 2007-09-21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 분이 참하게 생기셨네요. 므흣...

마늘빵 2007-09-21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첨 뵙는 분이지만, 므라빈스키님과 같은 말을 하고팠어요. '착하게' 생기셨다고. ('참하게'를 '착하게'로 읽어버렸습니다. -_- )

로쟈 2007-09-21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소설들과의 묘한 '대조'를 이룹니다. '참하게'와 '착하게'는 동의어군요...

2007-09-21 1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겨레21에 잠시 들렀다가 '노 땡큐' 연재를 몇 개 읽어봤다. 그러고 보니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연재가 없어지고 들어선 게 이 연재인 모양이다(그냥 내 추측이 그렇다). 김규항의 글이 격주로 연재되고 있기에 그런 인상을 갖게 하는지도 모르겠다(*하지만, 착각이다.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는 씨네21의 꼭지이니). 몇 달 전 칼럼이긴 한데, '공부의 내력'(http://h21.hani.co.kr/section-021031000/2007/06/021031000200706070663010.html)을 옮겨놓는다(장정일의 <공부>도 떠올리게 해주는군).

안 그래도 초등학교 1학년인 아이에게 논술을 가르쳐야 하느냐로 잠시 옥신각신 하던 차였다. 아이까지도 '논술 강사'도 했다는 아빠가 봐주지 않는다고 서운해하는 눈치였다. 이럴 땐 머리가 더 커야 논술도 하는 거야, 란 내 원칙이 '고집'으로 전락하고 만다(나는 그저 아이가 더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면 하지만, 같이 놀아주지도 못하면서 그러란 소리를 입밖에 꺼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무래도 '어린이 교육'은 내 적성이 아닌 듯하다.

김규항의 칼럼에는 예의 김건/김단과의 에피소드가 등장하는데, 말미에는 (그가 늘 자부심을 토로해온) 80년 세대의 자성을 적고 있어서 이채롭다. "지금 아이들의 부모, 즉 우리는 청년 시절에 공부란 ‘무작정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던 사람들이다. 우리는 아무도 허락하지 않는 ‘진짜 공부’를 하기 위해 몰래 동아리를 지어 인문과학과 사회과학 책들을 파고들었다. 우리는 그 공부를 통해 처음으로 벅찬 지적 희열을 느꼈다. 그 공부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이란 나르시시즘은 여전하지만...  

한겨레21(07. 06. 07) 공부의 내력

밥상에서 김건이 말했다. “빨리 5학년이 되면 좋겠어.” “왜?” “역사 공부 하니까.” “재미있을 것 같아?” “응. 왕건이나 대조영 같은 거 너무 재미있어.” “그래, 역사는 재미있는 거야. 그런데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는 생각보다 재미없을 거야.” “왜?” “그건 말이야..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는 역사가 아니거든.” “역사가 아니라니?” 김건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본다. “역사가 뭐지?” “응, 옛날에 있었던 사건이나 전쟁 같은 거 아냐?” “큰 사건이나 전쟁만 역사는 아니야. 우리 집에도 역사가 있고 건이에게도 역사가 있지. 여기 부러졌던 일 기억하지?” “당연하지.”

무조건 열심히…

녀석은 세 살 때 어느 날 미끄럼틀에서 놀다 다리가 부러졌다. 아이가 자라면서 어디 한 번 부러지는 거야 그리 큰일은 아니지만 그게 사건이 된 건 그러고 울지도 않고 잠이 들었다는 것이다. 잠이 깨서 나오는 아이가 한쪽 다리를 짚지 못해 병원에 가보니 골절이라고 했다. 깁스를 하는 의사가 웃을 만큼 어이없는 사건이었다. 그 사건은 김건의 어린 시절을 상징하는 작은 역사가 되었다.

“그게 몇 년 몇 월 며칠이었지?” “몰라.” “그럼 깁스한 병원은?” “몰라.” “의사 이름은?” “몰라, 아빤 기억해?” “아빠도 기억이 안 나.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날짜, 병원 이름, 의사 이름만 알아내선 그 사건에 대해 건이보다 더 잘 안다고 말한다면 어때?” “바보 같지.” “학교에선 그런 걸 역사라고 배워.” “정말?” “누나한테 물어봐.” “누나!” 김건은 제 누나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나는 그의 누나가 5학년 첫 시험을 준비하면서 역사 때문에 힘들어하던 걸 떠올렸다. 부여의 첫 도읍지는 어디였는지, 두 번째 도읍지는 어디였는지 따위를 외우면서 말이다.(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동양의 전통적인 공부법은 ‘무작정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었다. 동양의 공부란 사람이 되기 위해 꼭 알아야 할 지식과 깨우침이 담겼다고 사회적으로 합의된 몇 권의 고전을 거듭 공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서양의 공부가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라면 동양의 공부는 지적 통찰을 체득하는 정신 수련이었다. 사방이 책으로 빼곡한 서양 학자의 서재와는 달리 동양의 학자 공부방에는 몇 권의 책만 있었다.

서양식 공부가 도입되고 아이들이 배우는 건 ‘사회적으로 합의된 몇 권의 고전’이 아니게 되고도 한참 동안 부모들은 동양식 공부법에 젖어 있었다. 부모들은 아이가 ‘무작정 열심히’ 공부하길 기대했고 요구했다. 대략 지금 아이들의 할아버지 세대까지 그랬다. 그러나 지금 아이들의 부모, 즉 우리는 청년 시절에 공부란 ‘무작정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던 사람들이다. 우리는 아무도 허락하지 않는 ‘진짜 공부’를 하기 위해 몰래 동아리를 지어 인문과학과 사회과학 책들을 파고들었다. 우리는 그 공부를 통해 처음으로 벅찬 지적 희열을 느꼈다. 그 공부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우리는 어떤 공부를 강요하는가

그런 우리는 지금 아이들이 어떻게 공부하게 하는가? 우리는 오히려 공부에 대한 깨우침이 없었던 우리 부모들보다 더 한심하고 무지스럽게 아이들에게 역사 아닌 역사, 국어 아닌 국어, 수학 아닌 수학을 강요한다. 우리는 한술 더 떠 우리에게 난생처음으로 벅찬 지적 희열을 주었던 인문 사회과학 책들을 모조리 다이제스트판으로 달달 외우게 한다. ‘논술 필수 고전’이라 불리는 그 명단엔 심지어 <공산당선언>까지 들어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아이들이 진짜 공부를 하지 못하도록 20여 년을 달달 볶는 동시에 그들이 입시에서 빠져나와 처음으로 지적 희열을 느끼기 위해 보존되어야 할 지적 감수성의 부위들마저 하나하나 불로 지져 영원한 지적 불감아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게 이른바 부모가 된 우리가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매일같이 반복하는 교육적 실천이다. 그렇게 하루의 실천을 마친 우리는 인사동이나 신촌의 지적인 카페에 둘러앉아 지적인 얼굴로 “요즘 애들은 책을 안 읽어” “인문학의 위기는 인류의 위기야” 떠들어댄다. 아, 우리는 대체 어떻게 된 인간들인가?

07. 09. 18.

P.S. 공부가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지만 인생은 바꾼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은 아닐까?..


댓글(18)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늘빵 2007-09-18 22:42   좋아요 0 | URL
글 봐달라는 아이와 싫다는 아빠가의 모습이 떠오르는군요. 얼마전 봤던 로쟈님의 사진과 아이의 사진을 떠올리며. :)

로쟈 2007-09-18 22:48   좋아요 0 | URL
글을 안 봐주는 건 아니고요.^^; 글쓰는 걸 도와주란 요구입니다...

2007-09-18 2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9-18 22:49   좋아요 0 | URL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고 구박을 받습니다.^^;

책읽는나무 2007-09-18 23:51   좋아요 0 | URL
아이가 정말로 공부란 것에 스스로 재미를 느껴 행했음 하는 욕구는 강하지만 그게 또 마음같이 느긋해지지가 않으니 가끔은 학습지를 풀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면 정말로 정말로 미안해질때가 많습니다.더욱더 반성하게 만드는 페이퍼로군요..ㅡ.ㅡ;;

로쟈 2007-09-19 19:09   좋아요 0 | URL
원론적으론 인구 과밀 때문에 빚어지는 일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자꾸 내모는 것이...

코스모폴리스 2007-09-19 08:44   좋아요 0 | URL
김규항의 글 가운데 동양의 공부법과 서양의 공부법에 대한 설명은 동의하기 어렵군요.

로쟈 2007-09-19 19:09   좋아요 0 | URL
단순화는 '논객'의 특징이죠...

biosculp 2007-09-19 11:32   좋아요 0 | URL
짧은 글에 대해 토다는 것은 뭐하지만 공부라는것이 주되게 책과 연관되어 있군요.
냇가에 가서 물고기 잡고, 여러 벌레들 잡고 애기하고 분류한다든지, 산에가 열매나 씨가 맺는 꽃과 나무에서 씨를 모은다든지,반쪽이 빠진. 뭔가 허전한 공부에 대한 생각이아닌가 합니다.

로쟈 2007-09-19 19:11   좋아요 0 | URL
공부의 제한된 용례는 칼럼에 국한된 건 아닌데요. 학과시간에 냇가에 가서 물고기 잡는 학교에 전국에 몇 될라구요...

2007-09-19 2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20 14: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LAYLA 2007-09-19 23:36   좋아요 0 | URL
김단양 사진 첨 보는데 딱 그 캐릭터 같습니다. 이쁘네요 ^^

로쟈 2007-09-20 01:10   좋아요 0 | URL
눈매가 닮은 거 같습니다...

lyh1999 2007-09-20 04:56   좋아요 0 | URL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는 씨네21에 들어가는 칼럼 제목인데요...^^

로쟈 2007-09-20 07:53   좋아요 0 | URL
그렇네요.^^;

노자읽기 2007-09-20 12:46   좋아요 0 | URL
'지식'이란, 어쩌면 살아움직이는 사실들을 정리해 말린, 표본이나, 박제와 같다고도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을 습득하게 된다면, 결국 우리도 박제가 되겠지요.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은 박제가 되는 일일 지 모르겠습니다...

로쟈 2007-09-20 14:21   좋아요 0 | URL
그런 문제제기도 가능하겠습니다. 하지만, 제 기본적인 입장은 '박제'라도 그게 어디냐는 것이죠. '살아움직이는 사실들' 곧 '생'은 그 자체로 자재하고 자족적인 것이서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을 테니까요...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좀 특이한 영화관련서들이 눈에 뜬다. 당장 읽을 여력은 없어서 대신 적절한 리뷰들을 찾아 옮겨놓는다. 로버트 그레그의 <영화 속의 국제정치>(한울아카데미, 2007)와 리처트 포튼의 <영화, 아나키스트의 상상력>(이후, 2007)이 그 책들이다(포튼의 책은 지난주에 서점에서 봤다). 리뷰들은 소략하지만 그나마 이 책들을 다룬 지면 자체가 아주 드물다.

동아일보(07. 09. 15) 숨겨진 ‘국제질서’ 읽기…‘영화 속의 국제정치’

아프리카 어느 마을. 하늘을 날던 비행기 조종사가 뭔가를 ‘툭’ 버렸다. 마침 지나가던 원주민이 주워 든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빈 콜라병을 들고 난감해하던 표정. 1980년대 인기를 끌었던 영화 ‘부시맨’의 시작이다. 가볍게 즐겼던 코미디 영화였으나 저자는 고개를 젓는다. ‘한없이 무거운’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의 책 ‘문명의 충돌’을 거론한다. “헌팅턴은 국제정치의 근본적인 분쟁이 국가와 집단의 여러 다른 문명으로 인해 벌어짐을 지적했다. 서구 문명과 전통적인 토착문화의 조우. 영화 부시맨은 이런 국제관계를 살피는 좋은 텍스트가 된다.”

이 책의 목적은 자명하다. 제목(원제 역시 ‘International Relations on Film’)에 그대로 드러난다. 영화를 통해 국제정치를 배우자. 미국에서 정치외교를 가르치는 교수답게 청강생들의 이해를 도우려 영화를 교재로 사용하는 셈이다.

논의점은 다양하다. 해리슨 포드가 출연했던 ‘레이더스’를 통해 제3세계를 바라보는 제국주의 시선을 다룬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는 국제정치의 의사결정 과정이란 논의를 끌어내는 훌륭한 마중물이다. 윤리와 국제법을 다룰 땐 영화 ‘7월 4일생’과 ‘살바도르’를 언급한다.

묵직한 두께에 빡빡한 활자. 주제마저 무겁다. 그런데 책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오히려 술술 읽힌다. 저자의 의도대로 교재가 ‘영화’인 덕분이다. 어려운 국제정치용어들이 익숙한 영화 화면을 타고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온다.

아쉬운 점도 있다. 영화가 대부분 할리우드산(産)이다. 익숙하지 않은 영화를 거론할 땐 이해도도 떨어진다. 왜곡이 가능한 영화 자체만으론 국제정치를 설명할 수 없음은 저자 역시 동의하는 부분. 배운 건 많은데 뒤끝이 가려운 수업을 들은 기분. 강의평가서에 ‘A+’라고 쓰기가 살짝 망설여지는 이유다.(정양환 기자)

디지털타임즈(07. 09. 06) 영화속 아나키스트에 대한 오해와 편견

아나키스트'(Anarchist)라는 단어에는 왠지 부정적인 이미지가 짙다. 아나키스트하면 시위와 테러 같은 불법 행위가 연상된다. 왜 그럴까. 아나키스트는 사전에 `국가와 사회의 권력을 부정하고 개인의 완전한 자유가 보장될 수 있는 사회 실현을 주장하는 사람'으로 정의된다. 기존의 질서를 거부하는 이유가 아나키스트의 부정적 이미지를 키운 것일까.

한국영화 시장이 르네상스를 맞으면서 셀 수 없는 영화관련 책이 쏟아져 나왔지만, 아나키스트의 눈으로 영화를 바라본 책은 없었다. 아나키스트들에 대해 소개하는 몇몇의 책들은 있었지만, 이 책들 역시 아나키스트들이 문화 속에서 어떻게 소비되는 지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영화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나키스트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가지게 된 원인을 영화 속에서 찾고 있다. 주류 영화들이 다루는 아나키스트는 폭력과 테러, 범법자들의 전형이었다. 심지어 옷 입는 모양새와 콧수염 기른 모습까지 정형화시키기도 했다.

저자는 영화 속에서 아나키스트들이 그렇게 묘사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정치 철학적으로 추적해 밝혀낸다. 또 아나키즘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아나코 페미니즘' `아나코 생디칼리즘' `아나키스트 교육학' 등에 대한 이론까지 명쾌하게 밝혀놓고 있다.

특히 국내 출판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아나키스트 인물 설명을 부록으로 붙여 둔 것은 국내 독자들에게 좋은 참고 자료가 된다. 또 아나키스트와 관련된 시시콜콜한 자료까지 잘 갈무리해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예를 들어 19세말과 20세기 초 미국에서 무정부주의자로 활동한 엠마 골드만(Emma Goldman)의 자료관을 통해 공개되지 않은 서신을 소개하고, 영화감독들에게 전화나 e메일로 확인한 내용들까지 소개하고 있다. 아나키스트 단체들의 유인물 내용과 아나키스트들이 등장하는 유럽과 미국의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도 총망라하고 있다.(김응열기자)

07. 09. 17.

P.S. 두 권의 두툼한 책들 대신에 내가 어제 주문한 책은 저명한 페미니스트 영화이론가 로라 멀비의 얇은 최신작 <1초에 24번의 죽음>(현실문화연구, 2007)이다. 멀비의 책으론 <시민 케인>(동문선, 2004)이 먼저 소개된 바 있지만 왠지 이 책부터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995년 탄생 100주년을 맞은 영화의 본질적 측면을 탐구한 영화이론서이자, 대중을 위해 쉽게 쓴 영화에세이"라고 하니까 부담 없이 읽을 수 있겠다. 멀비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루기로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랜만에 개봉되는 러시아영화 소식을 빠뜨릴 수 없어서 옮겨놓는다. 지난 2005년 러시아 최고 흥행작 <제9중대>가 문제의 영화이다. 아마도 창고에서 자고 있다가 지난번 아프간 인질사태 때문에 배급업자들의 관심을 끌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블록버스터이긴 하나 기본 수준 이상의 작품성을 갖춘 영화로 평가되고 있으므로 한번쯤 관람해보시는 것도 좋겠다(사실 그래야 더 많은 러시아 영화가 소개될 수 있다는 현실적인 고려를 무시할 수 없기도 하고).

세계일보(07. 09. 15) ''명분없는 전쟁''의 허구 고발… 제9중대

13일 개봉한 ‘제9중대’는 인생의 농익은 즐거움과 성숙의 단계를 맛보지 못한 채 아프가니스탄의 바위산 중턱에서 죽어간 옛 소련의 젊은이들이 최후까지 함께했던 전장의 표정을 건조하리만치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서도 전쟁으로 말미암아 파괴되는 인간들의 모습을 사실감 넘치게 그려내고 있다. 영화는 꿈에 대한 열정과 사랑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있는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이들이 피의 전장을 뒹굴어야 하는 이유는 국가의 명분 없는 전쟁 때문이라고 고발한다.

그동안 우리의 ‘눈맛’을 길들여온 할리우드의 전쟁영화들과는 느낌이 다르다. 익숙한 미군 병사 대신 다소 낯선 생김새의 소련군인들이 주인공이다. 총과 군복이 다르고 육중한 헬기의 모습도 영화 속에서 흔히 보아오던 것과 상이하다.

할리우드 전쟁영화 공식과는 달리 하나의 영웅 또는 특정 주인공을 내세우지 않고 훈련소에서부터 전장까지 전 부대원들이 겪는 에피소드에 초점을 맞춘다. 삶과 죽음의 선을 아슬아슬하게 밟고 있는 극단의 상황, 그곳에서 꽃피운 전우애, 그리고 희생을 강요받은 작은 개인들의 비운을 영화는 씁쓸히 낭독하고 있다.

영화의 배경은 옛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9년째인 1988년. 징집에 응한 청년들이 하나둘씩 기차역에 모여든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어느 겨울밤 화가를 꿈꾸는 예술가, 선생님이 되고자 하는 교생실습생, 결혼식을 치른 지 하루 만에 소집되어 온 새신랑, 어린 딸을 둔 가장은 각각 사랑하는 가족과 이별하고 훈련소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전쟁은 이들의 꿈과 희망을 모조리 앗아간다. 지독한 훈련을 거치는 동안 순수한 교사 지망생의 몸은 어느새 살인병기로 바뀌어 간다. 예술가의 손은 이제 붓보다 총이 익숙해졌고, 현실주의자 류타예프는 생존 방법을 부지런히 체득해 나간다.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을 것 같았던 9중대 대원들은 마침내 서로를 이해하고, 모두가 한몸처럼 아끼는 게 살아남는 법이란 걸 깨닫게 된다. 그러나 9중대의 가장 큰 비극은 주둔지가 본 부대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 그래서 전쟁이 끝나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지 못하고, 고지를 사수하다 무자헤딘의 12차례에 걸친 전면 공격에 전멸해간다.

온통 붉은 빛이 감도는 아프가니스탄의 바위산이 이국적이며 바위에 뚫린 구멍 등 지형지물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무자헤딘의 전술이 인상적이다. 영화엔 잔인하고 치열한 전투 장면은 없지만, 명분 없는 전쟁의 허구와 반전의 당위성이 잘 녹아들어 있다. 감독은 후반부로 갈수록 긴장감을 한층 고조시키며 극을 끌어가는 재주를 부린다. 제작비 83억원이 들어간 러시아 블록버스터. ‘전쟁과 평화’의 감독 세르게이 본다르추크의 아들인 표도르 감독의 데뷔작이다.(김신성 기자)

07. 09. 17.

P.S. 감독 표도르 본다르추크는 말미에 언급된 대로 세르게이 본다르추크(1920-1994)의 아들인데, 1967년생이니까 러시아판 대작 <전쟁과 평화>를 한창 찍을 때 태어난 셈이다(세르게이는 주인공 피에르 베주호프 역을 맡기도 했다). 표도르는 이제 보니 러시아 TV에서 자주 보던 얼굴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로쟈 2007-09-17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에서는 사실 반전영화라기보다는 '애국주의' 영화로 수용된 감이 있는데 여하튼 편식은 좋은 게 아닌지라 러시아 영화들도 많이 보셨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