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은 타고난 복'이라고 옛어른들은 말씀하셨지만 오늘날의 상식은 좀 다르다. 특별한 '통뼈'가 아니라면 건강은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결정된다, 는 게 요즘의 통념이 아닐까? 그런 통념을 실증적으로 뒷받침해주는 책들이 출간되고 있다. '사회의제화를 위한 국민보고서'를 부제로 달고 있는, '건강불평등에 관한 대국민 보고서이자 한국판 건강불평등 르포르타주' 이창곤의 <추적, 한국 건강불평등>(밈, 2007)에 대한 소개기사를 옮겨놓으면서 몇 자 보탠다.  

 

한국일보(07. 09. 29) 경제력 따라 건강이 달라진다… 그 불편한 진실

사람들은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건강 정도가 다르다. <추적, 한국 건강불평등>은 사람들이 어렴풋이 느껴왔고, 1990년대 말 IMF 경제위기 이후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체감하고 있는 이 문제를 깊이 파고든다.

건강에 해로운 흡연을 예로 들어보자. 흡연이 원인의 75%를 차지하는 폐암으로 인한 사망률은 낮은 계층이 높은 계층의 2.3~8.1배에 이른다. 학력과 소득, 직업 등에 따라 흡연의 정도나 금연에 참여하는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막노동꾼 떠돌이 등 저소득층의 삶에는 흡연이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이들에게는 몇 천원의 담배 외에는 삶의 팍팍함과 고단함을 손쉽게 풀 수 있는 수단이 없다. 보건소의 금연클리닉은 들어본 적도 없다. 반면 교사 건축설계사 사업가 등 안정적인 직업과 고소득 계층은 건강에 대한 관심도 높고 금연도 쉽게 한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아이의 건강에 결정적이다. 아이를 낳기 직전까지 어머니의 영양상태와 물질적 환경이 아이의 건강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저체중아는 건강불평등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강원대 손민아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아버지의 학력은 저체중아 출생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학력은 보통 경제력의 잣대로 간주된다. 아버지가 초등학교 졸업 이하인 경우 대졸 이상보다 저체중아를 얻을 확률이 1.69배 높다. 고졸 아버지는 1.1배, 중졸은 1.44배 높다.

서울 강북구에 사는 사람이 질병, 사고 등으로 숨질 가능성은 서울 서초ㆍ강남구에 사는 사람보다 30%가 더 높다. 성과 나이가 똑같을 경우 전국에서 사망률이 가장 낮은 곳은 서울 서초구이며 가장 높은 곳은 경남 합천군으로, 두 지역의 격차는 갑절이나 됐다. 2000년부터 2004년까지 5년간 전국 234개 시군구의 사망등록자료를 토대로 조사한 결과다. 강남에 사는 사람들은 교육수준이 높고, 좋은 직업, 높은 소득을 올리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많다. 또 다른 지역보다 인구 당 운동시설이 더 많을 수 있다.

건강이 좋지 못한 저소득층이 당연히 의료이용 수준이 높을 것 같지만 연구결과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특히 큰 돈이 들어가는 암 치료에서는 고소득층의 이용이 더 많다. 저소득층은 병에 더 잘 걸리고 치료는 덜 받으니 건강이 더 불량할 수 밖에 없다. 지난해 초 <한겨레>에 연재된 기획기사를 뼈대로 하고 있는 이 책은 우리 사회나 정부가 건강불평등 문제에 관심을 좀더 갖고 해결책을 마련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남경욱기자)

07. 09. 30.

P.S. 같이 읽어볼 만한 책으로는 리처드 월킨스의 <건강불평등, 사회는 어떻게 죽이는가?>(당대, 2004)와 마이클 마멋의 <사회적 지위가 건강과 수명을 결정한다>(에코리브르, 2006), 그리고 최근에 나온 사라 네틀턴의 <건강과 질병의 사회학>(한울, 2007) 등이 있다. 평균수명이 길어지는 만큼(그만큼 병치레 기간이 길어질 거란 얘기도 된다. 우리는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게 아니라 병원에서 오래 버티게 될 것이다) '건강불평등'과 '사회적 건강'(과연 어떤 사회가 건강한 사회인가?)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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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왜 질병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먼저 찾아오는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3-15 11:09 
    지난주에 서평도서로 내가 고려했던 책은 그 전주에 나온 <권력의 병리학>(후마니타스, 2009)과 <거꾸로 가는 나라들>(난장이, 2009)이었다. 지면 사정상 후자에 대해서 쓰게 됐고 <권력의 병리학>은 읽어보지 못했는데, 의외로 리뷰기사가 별로 올라오지 않았다. 다행히 메인으로 다룬 기사가 하나 있어서 옮겨놓는다.      서울신문(09. 03. 06) 질병은 왜 가난한
 
 
수유 2007-09-30 18:33   좋아요 0 | URL
정신건강은 꼭 그런것만은 아닌것도 같고요..

로쟈 2007-09-30 19:11   좋아요 0 | URL
정신건강은 '평등'한 건가요?^^

瑚璉 2007-09-30 20:59   좋아요 0 | URL
유감스럽지만 정신건강도 재벌 급의 재화집중이 아니라면 경제력과 정비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건강불평등 이야기가 나올 때면 항상 궁금한 건데 과연 건강평등이라는 것 자체가 이룰 수 있는 목표인 건지, 아니 그 전에 바람직한 것이기나 한 건지 모르겠네요.

로쟈 2007-09-30 23:38   좋아요 0 | URL
'건강평등'이란 말이 좀 낯설지만 건강보험 등의 사회적 안전망에 관한 것이죠. 아파서 죽는 게 아니라 돈이 없어서 죽는 사회가 바람직한가에 대한 문제제기입니다...

바라 2007-10-01 00:41   좋아요 0 | URL
그냥 제 경우에 보면 소방서에서도 이른바 잘 사는 곳과 못 사는 곳의 구급출동 건수의 단적인 격차에서 느껴지는게 많더군요. 소개해주신 책과 더불어 "보건의료 : 사회 생태적 분석을 위하여"라는 책도 읽어볼만한 것 같습니다...

로쟈 2007-10-01 00:52   좋아요 0 | URL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과천연구실에서 낸 책이군요...

비공개 2007-10-01 17:46   좋아요 0 | URL
지난해쯤 한겨레에서 건강불평등을 기획기사로 연재했던 게 기억나네요. 그 기사 읽고서 충격으로 받아들였었는데 여러권의 책이 나온 걸 보니 논의가 많이 진전된 것 같네요. 좋은 책 추천 감사드립니다.

로쟈 2007-10-02 00:30   좋아요 0 | URL
그 연재를 책으로 묶었다고 하는데, 얼만큼 더 진전된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국문과 소멸론'이라는 '선정적인' 제목이 눈에 들어와 칼럼을 하나 읽었다. '인문학 위기론'이 어디까지 진행되고 있는지 짐작하게 해주는 시사적인 칼럼이다. 내용중에 "'국문과 소멸론'에 생각나는 것이 지난해 꼭 이맘때, 전국 80개 대학의 인문대학장들이 모여 '인문학 위기 선언'이란 것을 해서 이슈가 됐던 일이다."란 구절이 있어서 찾아보니 정말로 딱 1년이 되었고 이 주제와 관련하여 이 서재에 옮겨놓은 글들도 상당수였다(http://blog.aladin.co.kr/mramor/954391, http://blog.aladin.co.kr/mramor/1045570 등등). 이 위기론의 '후일담'에 해당하는 기사들이 몇 눈에 띄어 옮겨놓는다. '인문학 위기선언, 그후 1년' 정도가 이 페이퍼의 주제이겠다. 

한국일보(07. 09. 28) [편집국에서] 국문과 소멸론

올해 대학에서 정년퇴임한 김광규 시인, 정혜영 교수 부부는 독문학 전공의 대학생일 때 만났다. 한 사람은 현역의 우뚝한 시인으로, 한 사람은 한ㆍ독작가회의를 만드는 등 독일어권에 한국 현대문학을 알리는 전도사로 활동해온 이들에게 몇 년 전부터 큰 걱정이 생겼다고 했다. 한국의 대학에서 독문과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문과, 중문과 아니면 학생들이 오지를 않으니 과가 버틸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독문과의 존폐 여부도 여부지만, 그들의 진짜 걱정은 한국의 인문학이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독문과 만이 아니다. 이제는 한국의 대학에서 국어국문학과가 소멸할지도 모른다는 보도가 얼마 전에 있었다. 신설 대학이 국문과를 만들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몇몇 대학을 제외하고는 기존에 있던 국문과가 폐지되거나 디지털 스토리텔링 혹은 디지털 문예창작이라는 이름으로 문화콘텐츠에 관한 실무를 주된 교과과정으로 하는 '아류' 국문과로 바뀌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기자야 독문과도, 국문과 출신도 아니지만 놀라운 소식이었다.

원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시장 논리다. 전통적 국문과를 졸업해서는 취업이 안 되니 학생들이 지원하지를 않고,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던 교수들도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박함에 영화 게임 애니메이션 등 영상ㆍ뉴미디어 쪽으로 연구와 교육의 방향을 바꾼다. 과의 위상이 하락하고 존폐 위기에 몰리고 있는데 학문의 순혈주의만 고집할 수는 없다는 논리다.

'국문과 소멸론'에 생각나는 것이 지난해 꼭 이맘때, 전국 80개 대학의 인문대학장들이 모여 '인문학 위기 선언'이란 것을 해서 이슈가 됐던 일이다. 그걸 두고 인문학 교수들의 밥그릇 싸움이다, 언제 인문학이 위기 아닌 적 있었느냐, 인문학 전공자들부터 제대로 공부하고 자기성찰하라는 등 말도 많았지만 인문학 위기론의 본질은 그런 차가운 비판으로 그냥 비켜갈 문제는 아니다.

근대 이후 일본에서 일본어 폐지론이란 것이 두 차례 제기됐다. 메이지유신 직후에는 영어의 국어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프랑스어의 국어화를 외쳤던 움직임이 그것이다. "지배적인 것에 대한 동경은 때때로 억압된 반발과 나란히 가고, 그것은 증오로 돌변하기도 한다. 일본의 근대만 해도 그렇다… 근대의 여명기에 일본이 중국에서 서양으로 지향점을 바꾸었을 때 싹튼 것은 그때까지 스승으로 모셨던 중국에 대한 적대감과 경멸감이 아니었던가."(쓰지 유미 <번역사 산책>에서).
국문과 소멸론이 일본어 폐지론과 같은 수준의 논의는 물론 아니다. 특히 2차대전 후 일본인들의 일본어에 대한 절망감은 과거 자국 역사에 대한 전면적 부정의 의식과 겹쳐 있었다. 하지만 지금 한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국문과 소멸론, 넓게는 그것을 포함한 인문학 위기 논쟁을 보면 우리사회의 학문 혹은 대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속 빈 강정인가 절감하게 된다.

시장이라는 당장의 지배적인 가치에 그렇게 흔들릴 정도라면 사실 그것들은 인문학이고 대학이라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인문학은 대학에서 그 교육을 받은 학생의 평생 직업을 보장해주기 위한 훈련과정이 아니며, 넓은 의미의 인문교육은 기본적으로 한 사회를 시장유일ㆍ경제제일주의의 밀림화로부터 지켜야 하는 보루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이나 대학에 너무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인가.(하종오 문화부 부장대우)

조선일보(07. 09. 18) '인문학 위기선언’ 그후 1년, 그러나…

“진정한 가치와 삶의 궁극적 의미를 탐구하는 인문학은… 무차별적 시장논리와 효율성에 대한 맹신이 팽배한 우리 사회에서 존립 근거와 토대마저 위협받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지난해 9월 15일, 고려대 문과대 교수 117명은 비장한 어조로 ‘인문학(人文學)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들의 목소리는 9월 26일 전국 93개 대학 인문대학장들의 선언으로 이어져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로부터 1년, 과연 무엇이 달라졌는가?

◆1년 200억원… 치열한 경쟁
‘선언’의 가장 구체적인 반응은 지난 5월 교육부로부터 나왔다. 2016년까지 10년 동안 4000억 원의 예산을 인문학에 지원하고, 당장 올해부터 ‘인문한국(Humanities Korea) 사업을 벌이겠다는 것이다. 한 해 200억여 원의 돈으로 거점 연구소를 집중 지원해서 인문학의 수준을 끌어올리겠다는 이 사업이 사실상 작년 ‘선언’의 유일한 성과라는 시각이 많다. 한국학술진흥재단이 이 사업을 공고한 것은 지난 6월 29일이었고, 신청 마감은 8월 30일이었다. 전국 69개 대학 153개 연구소가 불과 두 달 만에 제안서를 제출했다. 11월 발표되는 최종 지원 대상 연구소는 10~20곳뿐이다. 실로 각 대학 인문대의 사활이 걸린 로스쿨 못지않은 경쟁이었다. 인문학 전공의 한 교수는 “방학 중에도 며칠 동안 합숙하고 밤을 새워 가며 제안서를 만들었다”고 털어놨다. “선택과 집중의 경제논리를 인문학에 적용하는 탓에 대학 사이의 양극화가 더 커진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여전히 ‘위기’에 선 인문학
한국 최고 ‘지성의 전당’으로 일컬어지는 대한민국학술원은 지난 14일 올해 ‘대한민국학술원상’을 자연과학자 세 명에게만 시상했다. 학술원 관계자는 “인문학은 수상 대상자가 마땅치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작년 상반기 교보문고 인문과학 베스트셀러 20권 중에 저서가 포함된 현직 인문학 정교수는 두 명이었지만 올해 9월 현재는 단 한 명(정민 한양대 교수)뿐이다. 학문적으로나 대중적으로나 작년 이후 인문학이 ‘회복’되고 있다는 징후를 찾기는 쉽지 않다.

지난해 ‘선언’ 때만 해도 ‘지방대학의 경우 폐과 사태까지 일어나고 있다’는 우려가 일어났지만 올해는 서울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 4월 동국대는 독문과와 북한학과를 폐과하고 인문학 정원을 축소하는 학제개편안을 내놓아 마찰을 빚었다. 가장 최근의 통계인 2006년 인문대 졸업생의 정규직 취업률은 40.1%로 의대(82.9%), 공대(59.8%), 사회대(47.3%)보다 크게 낮은 수준이며, 전공을 살려 취업하는 경우도 48.8%(전체평균 68.9%)에 그쳤다. 작년 고려대 선언을 주도했던 조광 전 문과대학장은 본지와의 통화에서 “인문학 위기란 짧은 시간 안에 개선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라
그런 가운데서도 인문학의 ‘기초’를 튼튼히 다지고 대중과 소통하려는 ‘각개 약진’의 노력들이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정암학당의 플라톤 원전 번역 사업,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원장의 인터넷을 통한 철학강좌,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의 학문 통섭 노력, CEO를 대상으로 한 서울대의 ‘인문학 최고지도자 과정’ 등의 예는 그 일부일 뿐이다.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철학과는 ‘논술 인증제’, 국문학과는 ‘문화콘텐츠’와 같은 새로운 분야로의 개척을 시도하고 있다. 한국사능력 검정시험으로 다시 일어나는 ‘역사 알기’ 붐은 사학과를 고무시키고 있다. 전봉관 KAIST 교수(국문학)는 “정부 지원을 바라기 전에 인문학자 자신들의 진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유석재 기자)

경향신문(07. 09. 03) 한국 인문학 ‘길은 여전히 멀다’

십수 년 뒤에는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 위기’라는 말이 사라질 지도 모른다. 지난해처럼 교수들이 모여 성명을 발표하는 일도 없고, ‘인문주간’ 행사도 더 이상 열리지 않을 것이다. 비정규직 강사·연구원도 크게 줄 것이고, 일자리가 없어 좌절하거나 실의에 빠진 박사 학위자들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정부의 바람대로 한국인문학지원사업(이하 ‘인문한국’)이 계획대로 튼실하게 뿌리를 내린다면 말이다.

지난주 학술진흥재단이 낸 보도자료에 따르면, 올해 처음 시작된 ‘인문한국’ 프로젝트에 모두 69개 대학의 153개 연구소에서 계획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웬만한 대학의 연구소는 모두 신청했다는 얘기다. 어느 대학에서는 11개 연구소가 응모했다니 ‘인문한국’의 인기를 짐작할 만하다.

이번 ‘인문한국’ 사업은 경쟁률이 8대 1에 달해 2~3대1의 경쟁률에 그친 ‘두뇌한국’(BK) 사업을 크게 상회하고 있다. 그도 그럴듯이 ‘인문한국’은 인문학 연구에 대한 최초의 정부 지원 사업이다. 지원규모, 기간 등에서 ‘두뇌한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한 연구소에 10년동안 매년 5억~15억이라는 거금을 지원하니, 과제가 채택되기만 하면 연구교수와 연구원들이 시쳇말로 ‘먹고살 걱정’을 안해도 된다. 게다가 연구교수급은 ‘인문한국’사업이 끝나도 연구소 교수로 남아 학교로부터 정년을 보장받을 수 있다니 ‘꿩먹고 알먹기’다. 그러니 대학교수들이 여름방학도 반납한 채 합숙하고 밤을 새워가며 연구프로젝트 보고서를 작성했다는 점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지원 규모 이외에 ‘인문한국’은 연구 과제 공모에서도 BK와 다른 실험을 하고 있다. BK가 박사급 등 학문후속세대 육성을 위한 지원사업인데 반해 ‘인문한국’은 연구소 등 인문학 연구의 인프라 구축을 위한 지원 성격이 강하다. 당연히 공모하는 연구과제도 학제간연구, 인간과 현실을 종합적으로 탐구하는 주제 등으로 포괄적이다.

지난해 인문학 위기의 파장이 컸던 만큼 그 대가로 얻어낸 ‘인문 한국’ 프로젝트는 야심치고 희망적이다. 학술진흥재단 관계자의 말대로, 인문학의 물줄기를 바꿔놓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예기치 않은 성과를 낼 수도 있다. 그러나 학문연구가 외부의 지원으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안다. 높은 보수에 편안한 연구실에서 수십년간 ‘연구’하고서도 변변한 학술서 한권 내지 못한 ‘학자’들을 우리는 숱하게 보아오지 않았던가.

한국인문학지원사업이 학문의 토대를 놓는 일이라면, 연구는 학자 개개인의 몫이다. ‘인문한국’의 지원이 연구소, 연구단 차원으로 이뤄진다 할지라도 연구는 궁극적으로 개인의 지적 활동이다. 학문은 ‘혼자 하는 놀이의 진수’이고 그 방법론은 ‘지적 도발’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최근 인문학자의 노력과 성취는 인문학 탐구가 어때야 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부산대 강명관 교수. 한문학자인 그는 지난달 4권이나 되는 학술서를 한꺼번에 내놓았다. 예전에도 여러권의 저서를 출간했기에 그가 많은 책을 냈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은 못된다. 눈여겨 봐야 할 점은 그의 학문 방법론이다.

대학원 시절, 강교수는 조선 후기 중인문학을 박사학위 논문 주제로 잡았다.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해 양반사대부 문학과 다른 중인문학의 특징을 찾아보자는게 그의 문제의식이었다. 그러나 막상 연구를 해 보니 중인문학과 양반문학은 다르지 않았다. 이후 그는 자신 뿐 아니라 한국 인문학 연구가 ‘민족’과 ‘근대’라는 틀 안에서 이뤄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근대적인 것, 우리 고유의 것을 찾는 데 한국 인문학이 매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교수는 이후 우리의 눈으로 우리 것을 연구하는 대신, 타자의 시선으로 우리를 살폈고 우리의 눈으로 타자를 봤다. 안쪽과 바깥쪽을 함께 보고, 둘의 관계를 살폈다. 그로부터 얻어낸 결론이 ‘민족 국문학은 없다’는 점이다. 가장 민족적이라는 국문학·한문학에서조차 ‘민족’이라는 알맹이는 없었다는 그의 연구결과는 자못 논쟁적이다. 그러나 십수년간 중국과 한국의 문헌과 자료를 섭렵하며 얻어낸 결과이기에 설득력이 있다.

강교수가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았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그는 매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연구실에 혼자 있었다. 그곳에서 한적을 뒤적이면서도 ‘지금 이곳’의 현실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를 비롯한 4권의 저서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강교수는 책 머리말에서 “이제 다시 시작이다. 남은 길은 여전히 멀다”고 적었다. 개인의 다짐이지만, 모든 인문학자들이 새겨야 할 금언이기도 하다.(조윤찬/ 문화1부장)

07. 09. 30.

P.S. 강명관 교수의 연구서들에 대한 소개기사는 http://blog.aladin.co.kr/mramor/152393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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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고 잠깐 자투리 시간에 예전에 모스크바 통신에 올려놓았던 글을 이미지 버전으로 업그레이드해놓는다. 2005년 1월 중순에 씌어진 것이다. 대부분의 '통신문'들을 정리해놓은 줄 알았는데 특이하게도 이 글은 예외적으로 빠져 있었다. 눈내리던 모스크바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므로 계절이 약간 안 맞긴 하지만 '창고'에 넣어두면서 굳이 많은 걸 따질 필요는 없겠지. 요즘은 이런 분량을 밤새 쓰는 일이 가능하지 않기에(원고지 100매를 훌쩍 넘어간다) 문득 '젊은 날'이었다는 생각도 스쳐지나간다...

러시아의 구력에 따르면 어제/오늘이 묵은 해의 마지막 날이자 새해의 첫날이다. 우리가 음력 설에 새해맞이 인사를 다시 하는 것처럼 여기서도 TV프로그램 등에서 새해맞이 쇼프로를 한번 더 한다(물론 지난 1월 1일에서만큼 모든 채널들이 나서고 있는 건 아니지만). 2005년의 달력을 사지는 않았지만, 지나다니면서 보는 수첩용 달력들에는 여기서도 ‘닭의 해’라고 닭 그림이 넣어져 있는 게 많다. 재미있는 일이지만, 러시아에서는 서양식 별점도 많이 보고 동양식 띠점도 많이 본다(띠점 또한 일본식 스시와 같은 일종의 ‘유행’이다). 자신들의 말대로, 러시아는 아시아의 ‘서쪽’(=유럽)이지만, 유럽의 ‘동쪽’(=아시아)이다. 러시아 황실의 문장(紋章)이 ‘쌍두독수리’였던 것은 그런 의미/맥락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동과 서를 동시에 바라보는 러시아…



어제는 오후에 후배의 학위논문 발표회가 있었고, 이후에 열린 저녁 만찬(러시아어로는 ‘반케트’)에서 샴페인 몇 잔을 마신 탓에 돌아오자 마자 한숨 자고 일어났다. 그게 새벽 1시가 좀 넘어서인데, 아마 잠이 깬 건 피로가 풀려서가 아니라 허기 때문인 거 같다. 하지만, 막상 무얼 먹으려고 하니까 딱히 내키는 게 없어서 일단은 며칠 전부터 머리속을 휘젓고 다니는 말들을 붙들어 토해내기로 했다. 구토. 예상대로라면, 나는 이번 걸 포함해서 세 편의 통신문을 더 토해내고 모스크바를 떠나게 될 것이다. 음력으로 2005년이 오기 전에. Before the dawn? Before the New Year!

하긴 이런 새벽 시간이 분류가 애매한 시간이긴 하다(‘개와 늑대의 시간’처럼). 어제로 넣어야 할지, 오늘로 넣어야 할지(이 시간의 TV 프로그램은 어제 날짜 신문에 나오지 않는가?). 나는 자정을 기준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시각이 ‘어제’일 경우에는 통신문에 어제 날짜를 기록했고, ‘오늘’일 경우에는 오늘 날짜를 기록했다. 그게 대개의 경우에 적용된 룰이었다. 그러니 이번 통신문은 1월 14일로 기록될 것이다.

그런데, 주제는 뭔가? 초월적 비평과 치과적 진료? ‘어젯밤’에 샴페인 기운을 빌려 머리속에 떠올려본 제목인데, 들뢰즈와 멜빌과 도스토예프스키와 나보코프에 대한 얘기, 그리고 사르트르의 <구토>에 대한 얘기 등이 들어갈 만한 ‘포괄적인’ 제목으로는 그럴 듯하다. 아마도 그럴 듯한 글이 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제목이 없으면 글을 쓰지 못한다). 나는 내 안에서 어마어마한 정도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힘을 느낀다(그러니 기적은 아니더라도 경적을 울릴 만한 건 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걸 어제 이미 다 생각해 놓았다. 하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다. 눈은 피로하고 머리는 아직 무거운 데다가 배도 고프다. 그러니, 먼저 무얼 먹어야겠다…

마지막 남은 ‘수타면’을 먹었다. ‘도시락’(라면)을 먹으려고 하다가 그래도 ‘새해’인 만큼 ‘고급’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모스크바의 한국식당에서 이 정도 라면이면 10달러이다). 김치를 얹어서 밥까지 말아먹고 나니까 허기는 가신다. 지금은 새벽 3시 45분인데, 이 시간에 무얼 해먹을 수 있는 건 룸메이트가 없기 때문이다(룸메이트와의 암묵적인 규약은 새벽 1시 이후에는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현재 페테르부르크에 가 있다. 공연을 보기 위해서. 3일간 연극과 발레를 본 후 일요일에 돌아올 것이다. 나의 ‘꿈’은 이달말에 한번 더 페테르에 가보는 것이지만, ‘불행하게도’ 현재로선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 않는다. 어쨌거나 라면이라도 먹으니까 머리가 좀 무거웠던 것도 가셨다(니체의 말대로, 우리의 대뇌는 위장을 닮은 기관이다).

더 기분을 내기 위해서 ‘젬피라’의 라이브 공연도 본다. 젬피라는 이곳의 인기 그룹 사운드인데, 그룹의 이름은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여성 리드보컬의 이름 ‘젬피라 라마자노바’에서 따온 듯하다(젬피라는 어깨쯤 내려오는 금발에 남색의 무테 선글라스를 꼈고 검정색 바지에 헐렁한 흰색 남방을 걸쳐 입고 있다). 원래 ‘젬피라’는 푸슈킨의 서사시 <집시>에 나오는 집시 여인의 이름으로 유명하다. 그제인가 나는 여기 문구점에서 <젬피라 라이브>를 음반인 줄 알고 그냥 샀는데, 노트북에 넣어보니까 라이브공연의 비디오클립이었다(http://www.youtube.com/watch?v=vOTA1r9oUTM).

공연은 2000년 12월 24일에 있었고(이 실황 비디오는 올해 나온 것이다), 수록된 노래는 16곡, 67분 분량이다. 마지막 노래는 “내가 사랑하는 도시여, 안녕”이란 가사가 들어가 있는 “안녕”(다 스비다냐)이다(http://www.youtube.com/watch?v=ba14p-hic3I&mode=related&search=). 나름대로 보컬을 맡고 있는 젬피라의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그룹인데, 우리의 ‘자우림’이 이에 견줄 만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자우림’의 리드싱어는 자우림이 아니고, 젬피라는 이미지상으론 김윤아보다 머리 기른 이상은을 떠올리게 하지만(키는 김윤아와 이상은 중간 정도). 한데, 나는 자우림의 라이브를 본 적도 없고 음반도 산 적이 없지 않은가? 아마 ‘수요예술무대’ 같은 프로에서 본 게 전부인 듯하다.



젬피라를 내게 추천해 준 사람이 어제 논문발표를 한 후배이다. 요즘 러시아 TV에 나오는 가수나 노래가 취향에 맞지 않고, 그렇다고 ‘류베’나 ‘키노’ 외에는 딱히 이름을 아는 가수/그룹도 없어서 괜찮은 가수를 추천해달라고 했더니 젬피라를 꼽아준 것. 공연을 보면서는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자우림!). 먹을 거 먹고, 괜찮은 음악을 듣는 걸로 나는 생활이 풍족하다고 일단 생각한다. 생활에서 나는 그 이상의 욕심을 갖고 있지 않다. 해서 나는 ‘맨손’이지만 ‘맨션’을 부러워한 적은 없다. 다만, 사정이 좀 달라지는 것은 그 맨션이 ‘정신의 맨션’일 경우이다. 더불어, 나는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지만 그 끼니가 ‘영혼의 끼니’(시에 대한 르네 샤르의 정의이다)일 경우에는 사정이 달라진다. 그런 맨션과 끼니에 대해서만큼은 나는 ‘최대한의 욕심’을 갖고 있다. 이 욕심이 나의 존재근거이자 아도르노의 말을 빌자면 ‘최소한의 도덕’이다.

대개 그 욕심은 책에 의해서 매개된다. 내겐 정신의 맨션도 책이며, 영혼의 끼니도 책이다. 물론 그런 맨션/끼니는 박물관에도 있고 공연장에도 있으며 (드물지만) 영화관에도 있다. 하지만, 비유컨대 그런 맨션/끼니의 대명사는 책이다. 책은 인류가 산출해낸 가장 위대한 정신들의 거처이자 가장 아름다운 양식들의 창고이다. 물론 내가 얘기하는 책은 거지 같은 책들이 아니라 거장들의 책을 말한다. 사유하고 상상하고 꿈꾸는 일들의 거장들 말이다. ‘모피를 뒤집어 쓴 잉크’ 사르트르(1905-1980)도 그런 거장의 한 사람이다.

작년이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거부 40주년이 되는 해라고 다른 통신문에서 한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올해는 그의 탄생(1905년 6월 21일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작년 연말에 그의 <존재와 무> 러시아어본이 재출간됐다). 아마 조국인 프랑스에서도 이를 기념하는 출판/행사들이 이어질 듯하다(그런 걸 가장 잘 챙기는 나라는 러시아이다. 지난달에는 한 여배우의 60회인가 생일이라고 푸틴 대통령이 직접 찾아가 포도주를 따라주었고, TV에서는 특집프로그램까지 방영했다).



 

 

 

사르트르의 데뷔작이자 (아마도 가장 유명한) 대표작은 <구토>이다(장편소설로서 <구토>는 단편집 <벽>, 대작 <자유의 길>과 함께 트로이카를 구성한다). 그가 작품을 쓴 건 최소한 31세(1936년) 이전이지만 처음엔 갈리마르출판사로부터 출판을 거부당하는 바람에 1938년에서야 출간된다(그래도 33세 때의 일이다). 나는 어린시절의 ‘영웅’인 그에 대해서 ‘나름대로’ 많이 읽고 많이 떠들어대기도 했지만, 이 <구토>만큼은 읽지 않았었다(하긴 <존재와 무>도 다 읽지 않았다). 헤세의 <데미안>처럼 몇 번 읽다가 그만 두는 식이었다. 그건 소설에서 주인공 로캉탱이 롤르봉에 대한 연구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구토>는 굳이 다 읽지 않아도 (이해)되는 소설인 것이다(혹은 아무때 아무 페이지나 읽어도 되는 소설).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사르트르 자신이 주장하는 바이지만, 산문은 앙가주망의 장르이며 분명한 ‘메시지’를 갖고 있다. 그러니까 그의 소설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야콥슨의 6가지 언어 기능 중에서) ‘시적 기능’이 아니라 ‘지시적 기능’이다(물론 그가 이 작품을 헌정한 보부아르와의 관계에서는 ‘친교적 기능’이 지배적이겠지만). 메시지의 (언어적)구성 자체에 주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시/참조하는 상황(context)에 주목하도록 하는 것이, 그가 주장하는바, 산문이고 산문의 임무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달’만 보면 되는 것이지 그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언어)은 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아마도 그 점이 그가 에피그라프를 가져온 셀린느와의 차이점일 것이다. 셀린느에게서 중요한 것은 언어 그 자체이고 ‘손가락’이니까).

그러니 굳이 읽을 필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사르트르의 <구토>(하서, 2002)를 몇 페이지 다시 읽어보았다. 아는 집에 갔다가 우연히 책이 눈에 띄길래 그냥 빌려왔기 때문이다. 이 번역서는 갈리마르와 정식으로 판권계약을 맺고 1999년에 초판이 나온 것인데, 다른 출판사들에서 나온 <구토>의 판권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일단 궁금했다(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하지만, (해적출판이 아니라) 판권계약을 맺은 출판이라고 해서 번역서를 신뢰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처구니없게도 이 번역서에는 (셀린느로부터 따온) 에피그라프와 (보부아르에게 바친다는) 헌사부터가 빠져 있다. 초장부터 역자나 출판사나 몰상식하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이후엔 사시(斜視)로 책을 읽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곧 사단(事端)이 벌어지고 만다. 드 롤르봉 후작의 행적과 관련한 대목들에서 번역서는 줄곧 ‘표트르 1세’(=표트르 대제)를 들먹이고 있는데(가령, 24쪽에서 “그는 러시아에 모습을 나타내고 표트르 1세의 암살 사건에 약간 가담했다” 등), 1750년생인 롤르봉이 1725년에 죽은 표트르 대제(1672-1725)의 암살 사건에 어떻게 가담할 수 있는가?(물론 표트르 대제는 암살된 게 아니고 나름대로 장수하다가 죽었다.) 러시아어본을 확인해보니, ‘파벨 1세’를 ‘표트르 1세’로 오역한 것이다.

파벨 1세는 예카테리나 2세의 아들로 1796년 제위에 오르지만 1801년에 암살당하며 그의 뒤를 잇는 것은 아들 ‘알렉산드르 1세’(1801-1825)이다(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알렉산드르 1세(이미지)는 별명이 ‘스핑크스’였다. 내심을 알 수 없다고 해서. 그는 국민시인 푸슈킨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황제였다). 내가 이런 대략적인 정보를 참조한 책은 룸메이트가 갖고 있는 <이야기 러시아사>(청아출판사, 1990)인데, 러시아 인명들이 영어식으로 표기된 데다가 ‘파벨1세’를 ‘바벨1세’로 오기(誤記)하고 있다. 책들이 하나같이 그 모양이다.

사정이 그러하니, “롤르봉이 표트르 1세의 암살에 참가했는가(=가담했는가) 안했는가? 그것은 오늘의 문제다. 나는 여기까지는 처리해 왔으나 그것을 결정하지 않고서는 더 계속할 수가 없다.”(29쪽)는 대목에 이르면, 나는 이걸 계속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결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나는 책을 덮었다. 그만한 사실 확인이나 상식 없이 작품을 번역한 역자라면 주인공 로캉탱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지 별로 관심이 없다는 얘기인데, 그런 그에게서 로캉탱 얘기를 들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음놓고 인용할 수 없는 책들은 우리를 짜증나게 하며, 나를 슬프게 한다(내가 한국시들을 사랑하는 건 ‘인용’할 수 있어서이다).

어쨌든 나는 <구토>를 이번에도 다 읽지 않는다/못한다. 하지만, 이 소설의 테마는 이미 읽었다. 시작부터 등장하니까(시작부터 등장하는 건 ‘잉크병’에 대한 명상인데, 생각건대 잉크-사르트르로선 당연한 일이다! 짚신도 제 짝에 대해 명상하듯이). 롤르봉에 엎어지기 전부터 말이다. “이제 생각이 난다. 지난날 내가 바닷가에서 그 조약돌을 손에 들고 있었을 때 느꼈던 것이 뚜렷하게 생각난다. 그것은 시크무레한 일종의 구토증이었다. 그 얼마나 불쾌한 것이었던가! 그런데 그것은 그 조약돌 탓이었다. 확실하다. 그것은 조약돌에서 손아귀로 옮겨졌었다. 그렇다. 그것이다. 바로 그것이다. 손아귀에 담긴 일종의 구토증.”(22쪽) 내게 그런 조약돌을 떠올리게 하는 건 ‘엉터리 책들’이다(그 얼마나 불쾌한 것들인가!). 그런 책들은 독자를 ‘정신의 맨션’으로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맨땅에 헤딩’하게 만든다.



 

 

 

이미 그런 ‘엉터리 책’으로 여러 차례 언급한 것이 들뢰즈의 <비평과 진단>(인간사랑, 2000)이다. 이 번역서 역시 판권계약을 한 책이어서 저작권법에 따라 ‘보호’를 받는 책이다. 하지만, 읽을 때마다 분통이 터지는 이 책의 무엇을 보호해야 하는지 나로선 감을 잡을 수가 없다(생각건대 독자들로부터 확실히 ‘보호’하기 위해서 판금이라도 해야 할까?).

역자는 서문에서 “가히 들뢰즈 붐이랄 정도의 어떤 풍성함이 우리의 지적 토양과 분위기를 얼마만큼이나 풍요롭게 해주고 있는지는 계속 비판적으로 주시해 보아야 할 과제이다.”라고 입바른 소리를 해놓았는데, 유감스럽게도 그 비판적 주시의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며, 가장 먼저 ‘진단’받아야 할 책이 그의 번역서이다(제목의 ‘clinique’를 ‘진단’으로 옮긴 건 불충분하다. 우리말에서도 그렇지만, ‘클리닉’은 ‘진단+치료’가 이루어지는 곳이며. 따라서 ‘진료’라고 옮기는 게 타당하다. ‘진단’만 해서는 병이 고쳐지지 않는다. ‘치료’를 해야 한다! 물론 ‘진료’라고 옮기더라도 ‘크리티크/클리니크’의 언어유희는 상실된다).



올해는 들뢰즈(1925-1995)의 탄생 80주년이자 사망 1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니 나름대로 그를 기념하는 출판/행사가 사르트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어질 듯하다. <비평과 진료>는 그런 들뢰즈의 ‘마지막 책’이다. 그리고 철학자 이전에, 혹은 이후에 ‘문학비평가’로서의 들뢰즈를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책이다(내가 보기에 비평가로서 그는 블랑쇼 계보에 속한다. 들뢰즈의 지속적인 화두는 언어, 보다 정확히는 ‘소수의 언어’ 혹은 ‘언어의 소수적 사용’이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문학비평가 들뢰즈를 우리말로는 만나볼 수 없다(기존의 판권이 언제 만료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전면 개정된 번역서가 나오기 이전에는. 생각건대, 희박한 일이다). 번역서의 들뢰즈는, 블랑쇼의 소설 제목을 비틀자면, ‘알 수 없는 사람, 들뢰즈(Deleuze l’obscur)’이다(역자는 259쪽의 역주에서 이 소설 제목조차 <수수께끼의 사나이 토마스(Thomas l’obscur)>로 옮긴다. ‘토마스’라니? 역자가 불어를 아는 건지 의심스럽다. 더구나 이 작품은 우리말 번역도 있는데 말이다. 내 기억에 <토마, 알 수 없는 사람>이었던가).



내가 번번이 분통을 터뜨리면서도 이 책을 또 집어든 건 ‘바틀비(Bartleby)’ 때문이다(지난주에 내가 혹 ‘바틀비 증후군’을 앓고 있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바틀비는 허먼 멜밀의 단편 <서기 바틀비>의 주인공이고(우리말로는 <바틀비 이야기>로도 번역된 것 같다), 들뢰즈는 1989년 플라마리옹출판사에서 나온 멜빌의 작품집 <바틀비>의 서문을 썼다. 이 서문이 <비평과 진단>의 10장 “바틀비, 혹은 상투어”이다. 제목의 ‘상투어’란 말은 ‘클리셰(cliche)’의 번역어가 아니라 ‘관용어’ 등을 뜻하는 ‘formula’의 번역어이다. 즉‘상투어’란 번역어가 나쁜 건 아니지만, 그것이 갖고 있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formula’는 상대적으로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작품에서 그 상투어는 주인공 바틀비가 습관적으로 쓰는 말, “I would prefer not to”를 가리킨다.

“바틀비라는 인물은 작가의 메타포도 그저 그런 상징도 아니다. 그건 강력한 희극 텍스트이다. 그리고 희극적인 것은 항상 글자대로의 것이다. 그것은 클라이스트, 도스토예프스키, 카프카, 베게트의 단편소설과도 같은 것이다. 클라이스트, 도스토예프스키, 카프카 등과 더불어 희극적인 것은 은밀하면서도 기품 있는 어떤 계통을 형성한다. 희극적인 것은 정말 자신이 말하는 것만을 의미할 뿐이다. 또한 그가 말하고 반복하는 것은 난 차라리 -하지 않으렵니다(I would prefer not to)이다.”(<비평과 진단>, 126쪽) ‘바틀비 증후군’이란 것은 “전 차라리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버티는 ‘자기 안의 무엇’에 대한 앎이고 앓음이다(그러니까 우리 안에는 “하고 싶다”는 리비도와 함께 “차라리 하고 싶지 않다”는 바틀비가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인용한 대목은 러시아어본과 대조해 보면 정확하지 않다(나로선 영역본과도 대조해보아야 더 정확하게 읽을 수 있을 듯한데). 내가 이해하는 바대로 다시 옮기면, “바틀비는 작가의 은유가 아니며 그 상징도 아니다. 그것은 잔혹하리만치 희극적인 텍스트이며, 희극적이란 것은 언제나 문자 그대로이다. 그것은 클라이스트, 도스토예프스키, 카프카, 베케트의 단편과 같으며 이들과 함께 은밀하면서도 권위 있는 어떤 전통을 형성한다. 바틀비는 문자 그대로 자신이 말하는바 이외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가 반복해서 말하는 것은 한 가지이다: ‘전 차라리 하고 싶지 않습니다.’”(내가 보기에 국역본의 역자는 바틀비를 가리키는 대명사를 ‘희극적인 것’을 받는 것으로 잘못 옮겼다. 국역본에서는 네번째 문장부터 다른 문단을 구성하는데, 나는 문단이 왜 나뉘는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겠다.)

들뢰즈의 바틀비론이란 것은 문자 그대로 이 한 마디에 대한 ‘주석’이다(물론 들뢰즈의 이 단편집 서문은 <바틀비> 이외의 다른 작품들에 대한 언급도 포함하고 있다. 다만 바틀비를 가장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을 따름이다). 영어의 “I would prefer not to”를 들뢰즈는 블랑쇼의 제안에 따라 “Je preferais ne pas”로 옮기는데, (들뢰즈가 보여주고 있는바) 사실 이 작품의 핵심인 이 상투어는 우리말로도 번역이 까다롭다. “난 차라리 -하지 않으렵니다”라는 국역본의 번역은 짐작에 역자가 <바틀비> 국역본을 참조하지 않았다는 걸 보여준다. 자신의 상사가 시키는 일에 대해서 바틀비가 마치 거부권을 행사하듯이 반복적으로 하는 말인데, 그런 상황에서라면 자신을 ‘나’라고 지칭하지 않는다.



<모비딕> 혹은 <백경>의 작가 멜빌의 단편들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게 <바틀비>여서 나는 이 작품을 몇 년전에 번역본(문고본)을 구해 읽었었다. 하지만, 그때 내가 읽은 것은 바틀비라는 ‘캐릭터’였지 그의 ‘상투어’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반복해서 등장하는 상투어에 정당한 주목을 하지 않은 것. 그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I would prefer not to”라는 영어 표현의 유표성(markedness)을 우리말 번역으로는 감지하지 어렵기 때문이다(들뢰즈가 제시하는 무표적인 표현은 “I had rather not”이다. 이것과 “I would prefer not to”의 차이를 우리말로는 번역하기 어려운 것). 우리말로도 정확하게 어떻게 번역이 되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지만, 짐작에는 ‘차라리’란 약간 어색한 부사를 넣어서 문법적으로나 의미론적으로 ‘약간’ 어색한 이 표현을 ‘암시’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틀비의 상투어에 주목하고 있는 들뢰즈의 비평은 ‘비평’에 값한다(내가 그를 ‘문학비평가’로도 호칭하는 이유이다).

비평이란 무엇인가? 나대로 정의하자면, (수행적 차원에서) 비평은 텍스트를 다시 읽게 만드는 것이다. 혹은 다시 읽도록 명령하는 것이다(“Criticism orders us to re-read the text.”). 비평과 리뷰의 차이는 거기에 있다. 다시-보기로서의 리뷰(review)는 다시-읽기와 상대적으로 무관하다. 리뷰는 어떤 책을 한번 읽어보게 하거나, 거꾸로 읽을 필요가 없게 만드는 것이다. 그게 리뷰의 역할이고 리뷰어의 소임이다. 리뷰가 필요한 것은 세상은 넓고 책은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해서, 우리에겐 읽을 책들의 목록뿐만 아니라 안 읽어도 되는 책들, 리뷰만 읽어도 충분한 책들의 목록이 필요하다. 리뷰는 그런 목록들을 작성해주는 일을 한다. 그것만으로도 아주 요긴하며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그런 목록작성을 비평의 일로, 비평가의 몫으로 돌려서는 곤란하다.

비평은 많고 많은 책들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 정예들(이른바 고전들)을 상대로 하며, 이들을 한번쯤 읽어본 독자로 하여금 마치 한번도 읽어보지 않은 것처럼 느끼게 함으로써 다시 읽어야겠다고 결심하도록 부추기는 역할을 한다. “너, 그거 읽었니? 그게 아냐. 다시 읽어봐!” 그게 비평이다. 해서 비평을 이루는/둘러싼 풍경은 ‘읽고 또 읽기(re-reading)’, ‘읽고 읽고 또 읽기(re-re-reading)’이다. 그러한 능동적/사동적 다시-읽기를 통해서 비평은 작품의 가치를 재평가(reevaluate)하며 때로는 뒤집는다(‘재평가’는 ‘가치의 전도’란 뜻도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비평은 가치-정초적이다). “양말을 머리에 뒤집어 쓰기”, 그게 비평가들이 주로 하는 일이다(사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비평과 리뷰의 구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다. 어떤 독자에게 ‘비평’인 것이, 다른 독자에게는 ‘리뷰’로 분류될 수도 있는 것이기에. 해서, 우리는 저마다 비평과 리뷰 분류함을 갖고 있는 셈이다).

들뢰즈가 바틀비론에서 하고 있는 일도 그런 것이다(나로 하여금 “내가 <바틀비> 읽은 거 맞아?”라고 자탄하면서, “이거 다시 읽어야겠군!”이라고 마음먹는 걸 부추기는 일). 그의 결론은 무엇인가? “긴장병 및 식욕부진증 환자 바틀비는 정신분열증적 자질을 지니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서 병자는 아니다. 하지만 그는 병든 미국의 의사이며 내과의사, 새로운 그리스도, 우리 모두의 형제인 것이다.”(163쪽)

“문학은 일종의 건강”(14쪽)이라고 규정하는 들뢰즈에게 바틀비의 형상이 환자가 아닌 의사에 값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자신의 문학비평에 ‘비평과 진료(Critique et Clinique)’라는 타이틀을 붙인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이다. 그런데, 인용한 대목에서 강조까지 돼 있는 ‘내과의사’는 뭔가? “의사이며 내과의사”? 뭔가 이상하면 오역 아닌가? 러시아어본에는 영어 단어가 쓰이고 있는데(아마 들뢰즈가 영어 단어를 쓴 모양이다), ‘내과의사’는 ‘Medicine-man’을 번역한 것이다. 이건 상식 밖의 오역인데, ‘Medicine-man’은 ‘내과의사’가 아니라 (인디언)‘주술사’를 가리킨다(주술사들이 병을 고치기도 했으니까). 해서 마지막 문장은 “바틀비는 환자가 아니라 병든 미국의 의사이며 주술사이고, 새로운 그리스도, 혹은 우리 모두의 형제이다.”란 뜻이다.



그런 식으로 시작과 끝이 오역으로 장식돼 있는 만큼 본론의 내용 역시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들뢰즈는 “I would prefer not to”의 미묘한 (비)문법성과 견주기 위해서 E. E. 커밍즈(Cummings, 1894-1962)의 시구를 하나 가져오는데, 국역본에서는 그 구절이 두 번이나 “He had his did”라고 돼 있다. 이게 어떻게 “<그는 춤추기 시작했다>가 아니라 <그는 자기가 했던 것을 춤추었다>처럼” 들리는가? “he had his did는 he did his dandce, he danced his dance, he danced what he did… 등과 같은 정상적 표현의 한계인지도 모른다.”(127쪽)?

다른 글에서 한번 더 (이번엔 제대로) 나오지만(200쪽), ‘he had his did’는 ‘he danced his did’의 오기(誤記)이다. 그냥 지나가는 문장이면 모를까 저자가 그 표현 자체를 분석하고 있는 문장을 그런 식으로 엉뚱하게 표기해놓는 것은 어떤 심리에서, 혹은 메커니즘에서 가능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13,000원이나 주고 산 책을 성질대로 찢어버릴 수도 없고(성질보다 무서운 게 돈이므로). 역자나 교정자는 도대체 번역문을 한번이라도 ‘리뷰’한 건가? 아니면 역자/출판사의 근본적인 한계인가?(인용한 구절에서 ‘한계’라는 말도 오역이다. ‘경계’란 뜻이어야 한다. ‘he danced his did’는 문법성과 비문법성의 경계에 놓여 있는 표현이다.) 당사자들이 한번이라도 번역문을 검토해보았다면, (감히) 이런 무책임한 책을 내놓지는 못했을 것이다(아까운 시간에 이런 얘기나 늘어놓고 있는 나도 한심하긴 마찬가지이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한심스럽지만, 이런 ‘대담한’ 번역을 한 대목 더 들어본다. “바틀비는 광인, 정신착란자, 정신질환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끊임없이 이상하게 처신하는 소송대리인의 비정상적 행동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어찌 그를 제대로 알 수 있을까? 소송대리인은 중요한 직업상의 승진을 한다. 사장 슈레버(Schreber) 또한 승진하고 나서야만 정신착란을 면할 수 있었음을 상기해 볼 수 있다. 마치 승진이 위험을 시도할 수 있는 대담성을 그에게 부여해 주기나 하는 것처럼.”(137쪽) ‘소송대리인’이 ‘변호사’와 어떻게 다른 건지는 모르겠다(원래의 영어 표현이 뭔지?).



이 대목은 ‘사장 슈레버’가 ‘법원장 슈레버’의 오역이라는 걸 아는 독자에게는 폭소를 터뜨릴 만한, 문자 그대로 (거의 잔혹하리만치) ‘희극적인’ 오역이다(슈레버 사례 분석에 대해서는 프로이트의 글 참조). 그리고 그 슈레버는 “승진하고 나서야만 정신착란을 면할 수 있었”던 게 아니라, (법원장으로) 승진하고 나서 정신착란을 일으킨다. 마치 승진이 그에게 정신착란에 빠질 용기를 준 것처럼. 그러니까 국역본은 앞뒤 문장의 논리도 맞지 않는다. 이걸 ‘착란적’ 번역이라고 하지 않을 도리가 있는가? 하여간에 대부분의 문장들이 그런 식의 오역으로 범벅이 돼 있기에 더 이상의 예는 들지 않겠다.



덕분에 들뢰즈의 바틀비론을 읽고 ‘바틀비 증후군’을 치료해보고자 한 나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나는 여전히 환자이다). 대신에 그나마 얻은 소득은 멜빌과 도스토예프스키를 비교해줄 수 있는 꼬투리를 하나 잡았다는 것. 사실, 내가 미국문학을 전공했더라면 1순위로 연구서를 써보고 싶은 작가가 멜빌이다. 그의 <모비딕>은 언제나 나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나는 그걸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같은 장편들과 비교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품어오고 있는데, 그러한 비교는 러시아문학과 미국문학이라는 두 국민문학의 발생과 전개를 비교해보는 보다 큰 프로젝트의 한 대목을 구성한다. 가령, 19세기의 경우, 푸슈킨과 워싱턴 어빙, 고골과 E. A. 포우, 톨스토이와 N. 호손(호돈) 등이 비교의 다른 대목들이다(마크 트웨인의 짝은 잠정적으로 투르게네프로 정해놓았는데, 다른 커플들만큼 ‘확신’하는 건 아니다). 두 국민문학의 이러한 비교는 많은 유익한 통찰들을 던져줄 수 있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당장 실현될 수 있는 프로젝트는 아니다(“돈이 없으면 연구도 없다.”)

미국문학과 러시아문학에 대해서 들뢰즈가 한 마디 하고 있는 대목: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정신분석은 이성의 의도를 재활성화한다. 정신분석이 위대한 소설작품들에 별다른 피해를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의 어떤 위대한 소설가도 정신분석에서 많은 흥미를 찾는 데는 실패했다. 미국 소설의 기본 강령은 러시아 소설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성의 길에서 소설을 멀어지게 하는 것이었다. 또한 무(無) 속에서 행동하며 텅 빔 속에서만 갑자기 나타나고 끝까지 자신의 신비를 간직하며 어떤 논리나 심리학도 넘어서는 인물들을 탄생케 하는 것이었다.”(148-9쪽)

바로 전대목에서 들뢰즈는 심리학이 합리주의의 최후 형식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며(심리학은 비논리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을 논리적인 것으로 환원한다. 그게 심리학적 ‘설명’이다), 그런 점에서 (심리학의 연장으로서의) 정신분석은 ‘이성의 요구’를 활성화한다. 그런데, 그런 이성의 요구에 따를 때 이 번역문 역시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정신분석이 위대한 소설작품들에 별다른 피해를 주지 않았”다고? 정신분석이 위대한 소설작품들을 많이 건드렸지만, 위대한 소설가들은 정신분석에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는 게 원문의 내용이다(그게 논리적인 거 아닌가?).

이어지는 문장은 러시아어본에서 다시 옮긴다: “미국 소설의 기본 강령(=정초적 행위)은 러시아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소설을 이성의 길로부터 점점 이탈시키는 것이었으며, 아무것도 아닌 것에 집착하고 공허 속에서만 생존하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비밀을 간직하고 논리의 요구나 심리학은 집어던져버리는 인물들을 창조하는 데 있었다.” <모비딕>의 에이허브가 그런 인물의 사례이며, 지하생활자 또한 마찬가지이다. 지하생활자의 바틀비 버전: “저는 차라리 2+2는 4가 아니었으면 합니다.”(한편, 같은 필경사로서 바틀비는 고골의 <외투>의 주인공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모두 <외투>에서 나왔다”란 말을 미국문학의 버전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바틀비>에서 나왔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카키와 바틀비는 모두 의미가 배제된, 혹은 의미를 넘어선 ‘에크리튀르(영어로는 <writing>이라 옮기고 러시아어로는 <pis’mo>로 옮긴다. <pis’mo>는 <letter>란 뜻이다)’ 자체를 자신의 ‘직업’으로 갖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0도’라 할 만하다. 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 이전에 뭔가를 끄적거리는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글쓰기의 0도는 끄적거리기이다(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일종의 끄적거리기이다).



들뢰즈는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멜빌, 도스토예프스키, 카프카, 무질 등 위대한 소설가에게 중요한 것은 사물들은 여전히 수수께끼 같지만 그래도 비(非)자의적이라는 점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는 정말 새로운 논리이다. 우리를 이성으로 다시 인도하지 않으며 삶과 죽음의 내밀성을 파악하는 전혀 새로운 논리이다. 소설가는 심리학자의 시선보다는 선지자의 눈을 가지고 있다.”(149쪽)

그래도 이런 대목은 읽을 수 있는 번역인데, 러시아어본을 다시 옮기면 이렇다: “멜빌, 도스토예프스키, 카프카, 무질 같은 위대한 소설가에게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이 수수께끼로 남으면서도 결코 (그러한 결말이) 자의적/임의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것은 새로운 논리이며, 우리를 이성으로 되돌려보내지 않으면서도 삶과 죽음의 깊이를 포착하게 하는 진정한 논리이다. 소설가는 심리학자의 시선이 아닌 예언자의 눈을 갖고 있다.”

이 대목을 조금 분석해보자. 첫문장에서의 ‘수수께끼’를 과학적/합리적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미스터리’(=신비)로 규정하고 이걸 ‘무질서(=혼돈)’와 등가적인 것으로 이해함과 동시에(러시아에서 들뢰즈는 프리고진과 함께 거론되곤 한다), ‘자의적/임의적이지 않다’는 말을 ‘논리적’(=필연적)이란 뜻으로 새긴다면, 세 가지 분류항이 가능해진다. (1)비논리적인 무질서의 세계(=카오스의 세계=차이의 세계=무산적/산일적 세계), (2)논리적인 무질서의 세계(=카오스모스의 세계=차이적 반복, 혹은 반복적 차이의 세계=단독성/보편성의 세계), (3)논리적인 질서의 세계(=코스모스의 세계=반복의 세계=개별성/일반성의 세계). 거기서 소설의 세계에 대응하는 것은 논리적인 무질서, 곧 카오스모스의 세계이다. 이 카오스모스의 세계를 구축/이해하는 논리는 코스모스의 세계의 (환원주의적) 논리와는 다른 논리이며 새로운 논리이다.

그러한 논리를 ‘소설적 로고스’라고 이름붙인다면(알다시피,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란 구절에 새겨져 있듯이, ‘로고스(Logos)’란 말은 논리와 말씀/언어를 포괄한다. 그것을 ‘논리’로만 이해하는 것은 로고스에 대한 제한적/수축적 이해이다. 덧붙이자면,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라는 변형 또한 로고스에 대한 제한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로고스는 행동의 반의어가 아니다), 이 소설적 로고스는 분명 反로고스는 아니지만, 과학적 로고스와 다르며 철학적 로고스와도 다르다. 철학의 로고스를 (고대)그리스적 로고스나 (근대)독일적 로고스에 한정한다면 말이다.

이러한 ‘다른 로고스’를 긍정하기 때문에, 들뢰즈는 형이상학의 종언, 철학의 종언, 로고스중심주의의 종언 등과 같은 모든 ‘종언론’에 동의하지 않는다(그런 점에서 들뢰즈는 니체-하이데거-데리다 계보에 맞선다). 그가 보기엔 뭔가가 끝장나는 것이 아니라 카오스모스, 즉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뭔가가 끊임없이 창조/생성된다. 종언론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내러티브적 로고스’의 철학자 리쾨르도 마찬가지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주절거리는 이야기는 끝이 없으니! 그러한 소설적 로고스의 들뢰즈적 변주? 노마드적 로고스, 분열증적 로고스, 소수집단적 로고스 등등…

바틀비론에서 들뢰즈가 주목하는 것은 문법성과 비문법성의 경계이며, 그것은 달리 논리와 비논리의 경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경계에 놓여 있는 것이 ‘다른 논리’, ‘다른 로고스’이다(도스토예프스키와 관련하여 말하자면, 나는 그걸 ‘비유클리드적 기하학의 논리’로 번안해서 이해한다). 내가 이해하는 들뢰즈는 이 ‘다른 로고스’의 철학자이며(그는 이 ‘다른 로고스’를 문학뿐만 아니라 베이컨의 회화와 영화 등에서도 탐색/구축한다), 소설적 로고스가 그 ‘다른 로고스’의 유력한 후보라면 문학비평가 들뢰즈는 철학자 들뢰즈와 이질동형적이다(그들은 둘이지만 하나이다). 그리고 그 소설적 로고스의 대표적인 사례로 들뢰즈는 미국소설과 러시아소설을 들고 있는 것이다(이 소설적 로고스와 더불어 당연히 고려해볼 수 있는 것은 ‘시적 로고스’이다. 하지만, 들뢰즈는 이 시적 로고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비평과 진료>에서 그가 거의 유일하게 다루고 있는 시인은 휘트먼 정도이다).

한편, 소설적 로고스/시적 로고스에 대한 참조 없이 철학적 로고스만으로도 철학은 구성될 수 있다(주로 수학/논리학에서 바탕을 마련하고 있는 후설의 현상학이나 초기 분석철학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하지만, 소설적 로고스/시적 로고스를 끊임없이 참조함으로써 자극과 영감을 얻는 철학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들뢰즈, 데리다, 후기 하이데거 등을 단번에 꼽을 수 있으며, 사르트르도 물론 여기에 포함된다. 더불어 도스토예프스키와 탈무드로부터 근원적인 영감을 얻고 있는 레비나스의 윤리학까지).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서구의 ‘주류’철학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온 러시아철학(러시아철학사는 서구 근대철학의 ‘코기토’와 현대철학의 ‘언어’라는 두 가지 문턱이 모두 부재하다는 점에서 서구철학사와는 많이 다르다), 혹은 보다 넓은 의미에서 ‘러시아적 로고스’의 역사를 우리는 재검토하고 재평가해볼 수 있을 것이다(물론 이 자리에서 그런 작업을 펼쳐보일 수는 없으며, 그것은 현재의 내 능력이 닿는 일도 아니다. 나는 다만 그런 작업의 가능성과 의의를 시사해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자리에서라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언어(=로고스)를 자세하게 분석하는 일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필수적인 것이다(그가 러시아철학사의 한 장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이미 바흐친이 시범을 보인바 있는 일이지만(그는 도스토예프스키적 로고스의 핵심을 ‘다성악(=폴리포니)’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런 방향으로의 얘기는 또 한동안 끝나지 않을 만한 것이기에 여기서는 그저 암시 정도만 하기로 한다.



앞에서 나는 미국작가 멜빌과 러시아작가 도스토예프스키를 비교해보고 싶다는 욕심을 피력했지만, 미국문학과 러시아문학과의 관계를 놓고 말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사람이 “한때 러시아작가였던 미국작가” 블라지미르 나보코프(1899-1977)이다. 그리고 어제(이젠 그제이다) 학위논문을 ‘방어’한 후배의 논문주제가 “나보코프 문체의 서정시적 요소들”이었다. 나는 경험삼아서, 그리고 물론 ‘도우미’로 그 논문발표장에 가봤는데, 가파른 계단식 강의실에 열댓명의 교수들이 앉아 있었고, 예정된 세 사람의 발표자들이 차례대로 논문의 요지를 발표하였다.

각 발표자마다 발표에 이어서 공식 심사위원들(‘opponent’라고 부른다) 두 명이 미리 준비한 심사의견서를 읽어나가고 발표자가 거기에 답하는 식으로 진행되었고, 생각보다는 ‘싱겁게’ 모든 게 종료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찬반투표에서는 모두 15:0의 만장일치로 세 편의 학위논문들이 모두 통과되었다(표결 정족수가 15명이었으며, 참석한 교수들이 표결에 참여한다). 그리고 이어진 게 ‘만찬’이었다. 나는 거기서 샴페인을 몇 잔 마셨던 것이고, 오늘(날짜로는 엊저녁)은 논문 방어/통과를 축하하는 저녁식사 자리에서 보드카를 마셨다(그러니까 이하의 내용은 보드카 기운으로 몇 자 더 적은 것이다).

나보코프의 초기 단편집을 주로 분석하고 있는 후배의 논문 요약본을 나는 지난 연말에 받아서 읽어보았는데, 내게 재미있었던 것은 나보코프의 ‘말장난’이었다. 나보코프 자신이 젊어서 시인이고자 했고, 두꺼운 책 한 권 분량의 시를 쓰기도 했다. 그가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 번역에 나선 것은 의아한 일이 전혀 아닌 것. 그는 그 번역과 주석을 자신의 가장 자랑스러운 ‘업적’으로 간주했다. 물론 시인으로서 나보코프는 소설가만큼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산문은 대단히 ‘시적’이다. ‘Lo-li-ta’라는 소리/발음을 음미하면서 시작하고 있는 <롤리타>를 떠올려보라(어제 식사 자리에서도 ‘롤리타’는 한참 동안 화제가 되었다. <롤리타>는 나보코프에게 부귀영화를 가져다준 ‘영광’이자 동시에 그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상처’이다).



러시아어로는 ‘칼람부르’라고 하고(불어의 ‘calembour’에서 온 단어이다) 우리말로는 주로 ‘신소리’라고 하는 듯한 이 말장난은 내가 앞에서 이미 여러 번 써먹은 것이다(‘맨손과 맨션’ 같은 것이다). 나보코프는 한 단편에서의 ‘베트취나’와 ‘베츄노스찌’(‘햄과 영원’이란 뜻)란 말장난을 자신이 (주로 아들과) 직접 번역한 영어본에서는 ‘dental and transcendental’(‘치과적과 초월적’)이라고 옮겼다. 이런 게 말하자면, ‘칼람부르적 로고스’이고 ‘시적 로고스’이다. 혹은 모든 초월적 로고스를 초과/잠식하는(overpass/undermine) ‘치과적 로고스’!

가령,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근대적/합리적 주체(=코기토)를 초과/잠식하는 지하생활자적 주체는 ‘치통적 주체’였다는 걸 떠올려보라(치통 대신에 치질을 집어넣어도 무방하다. ‘치질적 주체’). 그 지하생활자야말로 비록 간장이 안 좋기는 하지만, 바틀비와 마찬가지로 환자가 아니라 병든 러시아의 의사이자 주술사이고, 새로운 그리스도이며 우리의 친구가 아니었던가?!

이 통신문의 제목 ‘초월적 비평과 치과적 진료(Transcendental Critique and Dental Clinic)’는 애당초 그런 생각에서 지어진 것이다. 흔히 철학자들이 ‘초월’을 말할 때, 그들은 너무 자주 ‘치통’을 간과하거나 잊고 있는 건 아닐까? (일반적인)문학비평가들이 ‘초월적 비평’을 말할 때, 그들을 너무 자주 ‘치통적 비명’을 잊고 있는 건 아닐까? 때문에 범상한 철학적 로고스와 비평적 로고스는 언제나 소설적 로고스에 추월당하는 것이 아닐까?(“문학은 언제나 철학보다 더 멀리 간다”는 건 미셸 세르의 말이다.) 하니 그대, 초월을 말하려는가, 먼저 치과에 다녀오는 걸 잊지 말기를!..

P.S. 지난 화요일(1월 11일)은 라스콜리니코프, 즉 로쟈의 생일이었다. <죄와 벌>에 그의 생일이 명시돼 있는 게 아니므로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러시아영화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를 연기했던, 그래서 러시아 사람들이 ‘라스콜리니코프’ 하면 떠올리게 되는 배우 게오르기 타라토르킨의 60번째 생일(우리식으론 ‘환갑’)이 그날이었던 것이다. 그걸 기념해서 화요일자 <이즈베스찌야>는 그와의 거의 전면 인터뷰를 실었고 <채널 꿀뚜라(=문화채널)>에서는 쿨리자노프 감독의 1968년작 <죄와 벌>을 화요일과 수요일 이틀에 나누어서 방영했다(이 영화가 1968년작이라는 건 타라토르킨이 23세때 라스콜리니코프를 연기했다고 해서 역으로 추산한 것이다).



영화는 1, 2부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최소한 180분이 넘는 분량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설 <죄와 벌>의 줄거리 정도만을 따라가는 정도였다. 나는 러시아인들이 생각하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이미지가 어떤 것인가 정도를 머리속에 새겨두는 데 만족했다. 좀 특이했던 건 소냐 역이었는데, 말 그대로 ‘앳된 소녀’ 이미지의 배우가 연기했다. 나름대로 참신하긴 했지만, 그 ‘앳된 소녀’의 이미지에서 소냐의 창백함과 고통, 광신(狂信)을 모두 떠올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적어도 나로선. 앳된 소녀인 만큼 소냐는 키도 작았는데, 소냐보다 더 작은 이는 전당포 노파 알료나 이바노브나였다. 라스콜리니코프의 가슴 정도에도 못 미친 걸로 봐서 150이 안돼 보였다. 그런 알료나의 두개골을 내리치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도끼는 내 생각보다 훨씬 컸고. 그는 그 도끼로 가련한 리자베타의 정수리도 두 동강을 내놓는다.

 

 

 



이 리자베타에 대한 살인은 라스콜리니코프가 계획에서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인바, 그는 리자베타와 우발적으로 마주친 것이며, 그의 살인은 ‘우발적인 살인’이다(알료나에 대한 살인이 ‘계획적인 살인’이었다면). ‘분열적 주체’인 라스콜리니코프(러시아어에서 ‘라스콜’은 분리/분열이란 뜻이다)를 착란에 빠뜨리는 것은 그러한 (계획의) 의도성과 (결과의) 우발성 사이의 분열/간극이다. 법학도 라스콜리니코프는 합리적인/공리적인 논리에 따라 범행을 계획하고 이를 실행하지만, 그는 자신의 계획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며 오히려 거기에 끼어드는 우발성들에 (이)끌려간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계획/의도는 우발적인 결과에 의해 오염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며, 사실 이 우발성이야말로 계획의 실행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기도 하다(라스콜리니코프는 알료나가 리자베타 없이 혼자 전당포를 지키고 있을 거라는 걸 ‘우연히’ 엿들으며, 범행에 사용할 도끼도 ‘우연히’ 구하게 된다). 해서, 데리다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죄와 벌>은 의도성(=프로그램)과 우발성(=프락시스) 사이의 동일성에 대한 (순진한)사고를 해체하고 있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프로그램과 프락시스의 동일성? “훈련을 실전처럼!”이란 구호가 그런 동일성의 구호이다. 그러니까 이 동일성의 모델은 군사작전이며, 그건 ‘밀리터리 마인드’의 산물이다. “우리가 이러이러한 것들을 제거하면 더 좋은 세상이 될 거야!”라는 ‘계산’이 바로 ‘밀리터리 마인드’이며, 1860년대 러시아의 ‘진보적인’ 젊은 세대들(=전사들!)을 휘어잡았던 프로그램이었다. 그리고, ‘반동적인’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러한 프로그램이 우발성이라는 바이러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죄와 벌>에서 입증해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흔히 ‘관념론적인 작가’로 오해받기도 하는 도스토예프스키야말로 ‘우발적 유물론의 작가’로 불려 마땅하다(우발적 유물론에 대해서는 알튀세르의 <철학에 대하여> 참조. 내 기억에 알튀세르는 우발적 유물론을 서부극에서 인디언들에 쫓긴 주인공이 달리는 열차안에 뛰어든 것에 비유한다. 당연히 그는 이 열차가 어디에서 출발해서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기원/목적론적 사고의 유무가 알튀세르에 따르면 관념론과 유물론의 구별 기준이다). 이런 얘기는 내가 언젠가 쓰고자 하는 도스토예프스키 연구서에서 자세히 밝혀놓기로 하겠다(당신이 미리 써준다면 더없이 고마운 일이지만. 나는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쓰고 싶을 뿐이니까).



P.S.2. 들뢰즈도 지적한 것이지만, 위대한 소설가들은 정신분석(프로이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프로이트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위대한 작품이라고 극찬한 것과는 분위기가 좀 다른 것이다). 프로이트식 정신분석에 반대하면서도 <프로이트>라는 장편의 시나리오까지 쓴 사르트르의 경우는 좀 이중적인 듯하지만(그는 프로이트와는 다른 정신분석, 즉 실존적 정신분석을 제안한다). 나보코프 또한 마찬가지여서 프로이트를 싫어했다. 대신에 그가 예찬한 철학자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앙리 베르그송이다.

베르그송에 대한 예찬에는 프랑스 작가 프루스트와 러시아 작가 이반 부닌도 동참하는바(박홍규에 따를 때, ‘서구 형이상학의 시작과 끝’이라는 플라톤과 베르그송이 가장 ‘문학적인’ 철학자라는 건 음미해볼 만하다), ‘기억’의 테마와 관련한 이들의 대표적인 창작들은 베르그송주의를 보충하고 확장시킨다. 나는 이걸 뒤집어서 말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베르그송의 철학은 ‘철학판 프루스트주의’라고(프루스트 등을 이해하기 위해 베르그송을 읽기도 하지만, 베르그송을 이해하기 위해 프루스트 등을 읽기도 한다). 이건 문학과 철학 사이의 대화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론 하나이면서 둘인 로고스 간의 애정고백이자 둘이면서 하나인 로고스의 마임극이다. 이때의 로고스는 블루스를 추는 남녀를 혼자서 연기하는 마임극의 배우를 닮았다. 이 글은 그 배우에게 던지는 갈채이자 꽃다발이다…

05. 01. 14-15./ 07. 09. 29.

P.S. 이 글에 대한 보유는 '철학적 로고스와 문학적 로고스'(http://blog.aladin.co.kr/mramor/86549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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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7-09-30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스크바통신은 로쟈님 글들중에서도 갠적으로 좋아하는 글들인데..
바쁘시더라도 이런글 올려주시면 저는 "밤새도록"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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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7-09-30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읽어주시는 분들이 계시네요.^^;

수유 2007-09-30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길긴하지만 매력있는 인물들이 모두 사진에 떡하니 박혀있지 않겠습니까?^^

로쟈 2007-09-30 19:12   좋아요 0 | URL
사실 독자를 위한 글은 아니지요.^^

섬나무 2007-10-01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성찬은 흥미롭습니다.

로쟈 2007-10-01 13:44   좋아요 0 | URL
이런 '성찬'은 매일같이 차릴 수도 있는데, 정작 밥을 먹여주지는 않네요.^^;

섬나무 2007-10-01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로쟈님의 성찬은 이 정도가 아닐 것 같습니다만... 하여간 길지 않은 이 글만으로도 로쟈님의 체취가 듬뿍 담겨있는 게 개인적으론 가장 흡족합니다.^^

로쟈 2007-10-01 15:20   좋아요 0 | URL
그렇게 봐주시니 저도 흡족합니다.^^

반조 2007-10-01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판 프루스트주의’라는 말에 필 받아 제가 알고 있는 비슷한 사례를 소개해 드리자면, 이태수 선생은 수업시간에 늘 스승을 두고, "플라톤을 통해 베르그송을 보고 베르그송을 통해 플라톤을 보았던 박홍규 선생은 ..." 운운하시더군요. 그분의 그런 촌평이 꽤 있는데, 가령 "희랍이라면 덮어놓고 좋아했던 횔덜린은 ..."이라든가, "철학이라면 니체 철학이 정말 멋있는 철학인데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거든", "플라톤 철학의 뛰어난 주석가 아리스토텔레스는 ..." 등등

로쟈 2007-10-01 15:21   좋아요 0 | URL
재미있군요.^^
 

장정일의 <공부>(랜덤하우스, 2006)를 다른 책들과 함께 읽다가 문득 '장정일'을 검색하는 바람에 읽게 된 기사들을 옮겨놓는다. 다음주에 열리는 제3회 와우북페스티벌(http://www.wowbookfest.org/)에는 작가 장정일과의 만남('장정일의 독서일기 그리고 공부')도 프로그램에 포함돼 있으므로 애독자들은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 그리고 뉴스를 보니 오늘 행사 안내를 위한 퍼포먼스도 있었군... 

매일경제(07. 09. 29) 지금 당장 책을 펼쳐야 하는 이유

작가 장정일은 `독서일기`에서 어릴 적 꿈이 "하급 공무원이나 하면서 아침 아홉시에 출근하고 오후 다섯 시에 퇴근하여 집에 돌아와 발 씻고 침대에 드러누워 새벽 두 시까지 책을 읽는 것"이라고 밝혔다. 스트레스가 적고 정년도 보장되는 `철밥통`이기에 공무원이 되고 싶은 2000년대 젊은이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직업관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아예 책을 읽기 위해 자발적인 백수가 되는 젊은이도 있다는 사실이다. 2006년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인 박주영의 `백수생활백서`를 보면 "하루에 한 권 이상의 책을 비타민처럼 복용"하면서 살아가려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돈은 아름다운 꽃이다`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이 시대에 돈이 되지 않는 이 책이 베스트셀러였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이 책 제목만 보고 `만원으로 일주일 버티기`류의 지침을 위해 책을 구입한 `이태백`들이 많았다는 후문도 있다.

왜 여전히 이처럼 책과 사랑에 빠지는 `원시부족`들이 출몰하는 것일까. 책을 읽으면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책을 읽음으로써 직접적으로 돈을 벌 수는 없지만, 돈이 없어도 행복해지는 법이나 조그마한 돈이라도 행복하게 쓰는 법은 알 수 있다. 무엇이든지 만들 수 있는 지팡이를 든 노인이 `무엇을 만들어줄까`라고 질문하는 데 대해 `돈을 달라`가 아니라 `무엇이든지 만들 수 있는 그 지팡이를 달라`고 대답할 수 있는 지혜를 책이 선사한다는 것이다.



디트리히 슈바니츠가 쓴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교양`의 맨 앞도 "로빈슨 여행기는 유토피아의 전사(前史)다. 유토피아의 해안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난파된 선박의 잔해가 있다. 그러나 로빈슨은 육지에 올라와 목숨을 건졌으며, 학습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은 살아 남아 있다. 가라앉은 것은 지식의 화물이다. 그의 능력은 재생될 수 있다"는 구스타프 뷔르템베르거 말을 인용하며 시작된다. 컴퓨터가 사라지면 그 속의 검색엔진으로 검색했던 지식들은 사라지지만, 인간 머리 속에 있는 지혜는 사라지지 않는다.

책이 소중한 이유는 이처럼 지식 자체가 아니라 사고능력을 배양시켜 주기 때문이다. 책은 한순간에 사라지는 문명이나 문화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문명이나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인간 자체를 형성한다. 책이 곧 인간인 것이다. 책은 인간의 유전자가 되어 `know-what`이나 `know-where`와 관련되는 `정보`가 아니라 `know-how`나 `know-why`에 대한 `성찰`을 제공한다.



그래서인지 크리스티아네 취른트가 쓴 `사람이 읽어야 할 모든 것 : 책`에 대한 추천의 말에서도 디트리히 슈바니츠는 다음처럼 책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나치당이 독일인들에게 전쟁을 준비하게 만들 때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책을 대량으로 없애는 일이었던 반면 미국인들은 민주주의 체제 기틀을 잡기 위해 신병을 전쟁터로 내보낼 때 대학에 위임한 `그레이트 북 코스(Great Book Courses)`에 보냈다는 것이다.

옛 시절 먼 나라 이야기를 할 것도 없다. 요즘 TV에서 금요일을 제외한 모든 요일을 점령하고 있는 사극의 인기나 베스트셀러 문학 분야에서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 팩션(faction)류 역사소설을 보면서 E H 카가 쓴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역사의 적극적 정의를 끌어오는 것은 쉽다.

그러나 그처럼 현재성에 의해 재구성된 역사 자체가 `선택된 기억이거나 왜곡된 과거`라는 비판적 인식을 하기 위해서는 알라이다 아스만의 `기억의 공간`도 읽어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면 지금 우리 사극에 등장하는 성종이나 정조, 단군, 대조영이 `지금 이곳`의 욕망을 대변하기 위해 얼마나 진실에서부터 멀어지고 있는지를 의심해 볼 수 있다.

이 세상에 나쁜 책은 없다. 아직 읽히지 않은 책이 있을 뿐이다. 더구나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 중 한 명인 빌 게이츠조차 잠들기 전 잠깐만이라도 매일 책을 읽으려고 노력한다지 않는가. 책 읽기를 호환이나 마마보다 더 무서워하는 우리 중에서 빌 게이츠보다 더 바쁜 사람은 거의 없을 듯하다. 이것이 바로 어떤 책이든지 당장 집어 들고 읽기 시작해야 할 이유다.(김미현 이화여대 교수)

세계일보(07. 09. 28) '와우북페스티벌' 내달 5일 개막

작가·편집자와 독자가 만나는 국내 최대 도서문화축제 ‘서울와우북페스티벌’이 3회째를 맞아 10월 5일부터 7일까지 홍대 앞 ‘걷고 싶은 거리’ 주차장과 갤러리, 북카페, 클럽 등지에서 펼쳐진다. ‘난 지적으로 논다! ― 쉽지! 즐겁지! 유쾌하지!’를 주제로 열리는 올해의 ‘와우북페스티벌’은 신간을 할인해 파는 ‘거리도서전’, 중고책 벼룩시장 이외에도 ‘저자가 들려주는 유쾌한 책 이야기’(와우북판타스틱서재), ‘책, 예술로 즐기다’(와우북-상상만찬), ‘책, 거리에서 놀다’(거리로 나온 책) 등 3가지 섹션에 47개의 프로그램을 마련, 예년보다 더욱 다채롭게 꾸며진다.

홍익대 인근은 파주출판도시와 더불어 한국 출판문화의 양대 메카로 불리는 곳으로 1600여 개의 출판사와 출력소, 디자인 사무실 등 출판 관련 산업이 왕성한 공간이다. 5일 오후 7시30분 야외중앙무대에서 열리는 개막식에는 마포소년소녀합창단을 비롯해 마임이스트 고재경, 샌드애니메이션 작가 장 폴로, 비보이 크루 라스트포원 등이 출연해 축제 분위기를 고조시킬 예정이다. 6일부터 본격화하는 ‘책, 거리에서 놀다’ 섹션에는 출판사 직영 ‘거리도서전’과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린다.

‘책, 예술로 즐기다’ 섹션의 ‘와우북-상상만찬’에서는 소설가 은희경의 ‘빈처’ 일부분을 발췌해 각색 없이 연기하는 연극 ‘문학을 들려주다’(프로젝트 이리)와 마임과 퍼포먼스로 재구성된 시인 김경주의 산문집 ‘PaSspOrT’(극단 숨은그림) 공연이 펼쳐진다. 또 ‘저자가 들려주는 유쾌한 책 이야기’ 섹션에서는 지난해까지 진행된 저자와의 만남, 낭독의 밤, 강연회 등이 이어진다.

특히 6일 오후 4시30분부터는 지역라디오방송인 마포FM(100.7 Mhz) 생중계로 지난 5월 타계한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의 동화를 함께 읽고 생애를 돌아보는 ‘권정생 선생님 그림책 낭독릴레이’ 프로그램이 마련되며, ‘만나고 싶은 작가’로는 일본어 전문 번역가 김난주씨와 소설가 김애란, 시인 황병승 신현림, 여행작가 조은정씨, 재테크작가 이지연씨, 역사작가 이수광씨 등이 초청돼 독자와 만난다.(조정진 기자)

뉴시스(07. 09. 29) 독서하세요

독서의 계절 가을을 맞아 29일 오후 서울 지하철2호선 전동차내에서 '책 읽는 조각상'퍼포먼스가 열려 많은 시민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이번 퍼포먼스는 서울 홍익대 부근에서 다음달 5일부터 7일까지 열리는 제3회 서울와우북페스티벌의 일환으로 독서문화 활성화를 위해 열렸다.(이광호기자)

07. 0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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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07-09-30 07:02   좋아요 0 | URL
와우북페스티벌..정말 멋지겠어요.가보고 싶긴한데...거리가...쩝~
애 낳고..키우면서 바쁘단 핑계로 요즘 책 읽기를 등한시하는데...애 키우는게 빌게이츠보다 바쁜 일일까? 잠깐 생각해봅니다.
이젠 정말 책을 읽어야겠어요.^^

로쟈 2007-09-30 12:27   좋아요 0 | URL
'책읽는 나무'님이 책 읽기를 '등한시'하신다니까 아이러니컬한데요.^^ 사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강요는 하면서도 정작 독서할 시간/여건은 마련해주지 않는 게 요즘 부모님들 같습니다. 저부터도 특별한 예외는 아니고...
 

9월 한달 동안 별로 '눈에 띄는' 책이 없어서 애서가로서는 나름대로 우울했었는데 마지막주에 사정이 좀 나아지고 있다. 미국 작가 찰스 부코우스키의 <팩토텀>(문학동네, 2007)도 조금은 기운나게 하는 소설이다. 부코우스키란 이름은 아마도 김성곤 교수의 미국문학 관련서에서 봤음 직한데, 그의 책들이 번역돼 있는 줄은 몰랐다(그러니 자만하면 안된다!). 이번에 나온 <팩토텀> 이전에 <일상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바다출판사, 2000)와 <시인의 여자들>(문학사상사, 1993)이 이미 소개됐었다. 그의 '3부작'이 마저 소개되면 좋겠다(<우체국>만 나오면 되는 것인가?).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참고로 <팩토텀>은 2005년에 영화화됐으며(주연은 맷 딜런) 아래 이미지들은 거기에서 따왔다.

한국일보(07. 09. 29) 미국인 조르바 "영혼은 위장에 뿌리 내리고 있다"

미국 현대문학에서 가장 독창적인 작가로 꼽히는 찰스 부코우스키(1920~1994ㆍ사진). 그가 미국사회의 갖가지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며 방랑한 20, 30대를 거쳐 전업 작가가 된 것은 49세 때인 1969년이다. 예전엔 시를 주로 썼던 그는 자신의 페르소나인 떠돌이 잡역부 ‘헨리 치나스키’를 주인공으로 첫 장편소설 <우체국>(1971)에 이어 <팩토텀>(1975) <여자들>(1978) 등 자전적 소설을 잇달아 발표한다.

‘부코우스키 3부작’이라 불리는 이 작품들을 통해 부코우스키와 그가 창조한 치나스키는 반항기 가득했던 1970년대 세대의 문학적 아이콘이 됐다. 팩토텀(factotum)은 잡역부를 뜻하는 단어다. 치나스키는 행동거지가 ‘개차반’인 팩토텀이다. 2차대전 막바지였던 1940년대 중반, 대학을 중퇴하고 무위도식하던 그는 자신을 꾸짖는 아버지를 구타한 뒤 미국 중서부를 떠돈다. 소설 <팩토텀>은 치나스키의 그 유랑기다. 하지만 그 유랑길은 소설의 일반적인 양식, 즉 성숙으로 향하는 도정과는 영 거리가 멀다.

치나스키는 일용직을 얻어 머물 때마다 술과 여자에 탐닉한다. 근무시간에 아랑곳없이 술독에 빠져 여자에게 집적대는 그가 해고 통지를 받는 것은 그저 시간문제다. 번역자의 표현을 빌면 이 소설의 외양은 “술, 여자, 잡일의 끝없는 변주와 반복”이다. 윤리 따위는 괘념치 않겠다는 자세, 상스럽고 더러 외설적인 표현에 곤혹스러운 독자도 적지 않을 듯싶다.

하지만 이 극단적 ‘안티 히어로’ 치나스키는 시대를 초월하는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이는 온갖 모순적 면모가 혼재된 그의 캐릭터와 관계 깊다. 그는 섹스에 탐닉하면서도 “내게 고독이 없다면, 그건 다른 사람에게 음식이나 물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55쪽)라며 글을 끄적인다. 돈으로 겉멋을 부리는 예술가를 경멸하면서도 “불행하게도 굶주림은 예술을 돕지 않았다. 인간의 영혼은 위장에 뿌리 내리고 있다”(91쪽)고 단언한다.

치나스키는 그런 와중에도 편한 직업만 찾는 속물이지만 “전쟁은 계속되고 있지만, 숙녀들은 우라질 옷들을 계속 사들이고 있”(88쪽)다며 분노하는 사회의식도 갖췄다. 인간이 애써 다스리고 있는 본능을 거리낌없이 발현하는 이 ‘미국인 조르바’에게 박수갈채하고픈 마음은 억눌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이훈성기자)

07. 09. 29.

P.S. 자료를 찾아보니 '나를 움직인 이 책' 코너에서도 부코우스키가 다루어진 적이 있다. 영화감독 이무영씨가 추천했다.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와 <휴머니스트> 같은 영화들을 찍은 다재다능한 시나리오작가이자 방송인 감독이다(이럴 때는 재능이 좋은 영화를 찍는 데 장애물이 된다). 부코우스키 '스탈'의 영화들은 아직 못 찍은 건가?..

한국일보(03. 01. 04) 찰스 부코우스키 단편집 ‘일상의 광기에 관한 이야기’

찰스부코우스키의 이름이 국내에 처음 알려진 것은 그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1987년 영화 ‘바플라이’(Barfly)를 통해서였다. 미국 밑바닥 인생들의 암울한 삶과 절망을 건조하게 그린 이 영화는 우리에게 익숙한 미국 주류사회와는 너무도 다른 면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부코우스키의 작품세계와 정확히 일치한다(*<바플라이>(1987)는 나도 TV에서 본 적이 있는데, 기억에 <미키 루크의 술고래>란 제목으로 소개됐었다).

그는 독일서 태어났지만 대부분을 미국서 살았고 ‘우체국’ ‘시인의 여자들’ ‘지상에서 쓰는 마지막 시들의 밤’등 문학 작품을 남겼다. 1990년 국내에 처음 소개된 단편 모음집 ‘일상의 광기에 관한 이야기’는 평생을 미국 주류 문학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던 천재 작가 부코우스키의 야수적 본능, 그리고 엄숙주의와 가진 이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일관한다.

Picture of Charles Bukowski, poet; twentieth century American Literature and poetry

이런 성향으로 인해 그의 시집과 소설 대부분은 미국 내에서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미국 내 보수적 평단은 그의 작품들 속에 흐르는 섹스와 약물, 알코올에 대한 탐닉을 단순히 ‘저속함’으로 평가절하했다. 오히려 그의 작품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유럽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프랑스 작가 장 주네는 그를 미국 최고의 시인이라고 추켜세웠다.

부코우스키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것은 그의 작품들이 읽는 이들의 눈치를 전혀 살피지 않는다는 점이다. 독자와 관객, 음악 애호가들의 눈치를 보는 문학과 영화, 음악들이 판을치는 요즘 세상에서 마치 철없는 어린 아이의 순수함처럼 다가오는 ‘일상의 광기에 관한 이야기’는 이런 이유로 인해 너무나 신선한 느낌을 준다. 이는 마치 아나키적 공동체 생활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히피시대의 정신을다시 접하는 것 같은 흥분과 흡사하다.

공산주의를 물리친 후 돈과 건강을 최대의 미덕으로 내세우며 마치 전세계를 지배하는 듯 우쭐해하는 자본주의의 추함을 보며 우울한 요즘 세상에서, 처절하게 망가지면서도 끝까지 냉소를 잃지 않는 부코우스키의 작품세계는 아직도 주류의 횡포에 휩쓸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있는 불순한(?) 영혼들에게 위로의 손길을 내민다.

이 세상 모든 질서를 무너뜨리고 싶은, 마음 속 혁명을 꿈꾸는 이들에게 ‘일상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는 훌륭한 선물임에 틀림없다. 반대로 이런세상 질서의 수혜자들이라면 절대로 이 책에 손을 대지 마라. 재앙 중의 재앙이 될 것이다.(이무영_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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