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북리뷰들을 보니 다행히도 관심도서가 많지 않아서 부담이 덜하다. 한꺼번에 두 권의 책이 나온 빌 헤이스 정도만 챙겨놓으려고 한다. 피와 잠에 대한 책들이다.

문화일보(08. 06. 20) 피 에 대한 인류의 오해와 진실

“두 시체의 머리를 곧바로 절단하고, 거기서 쏟아져 나오는 피를 모조리 받아냈다. 머리는 물론이고 몸에서도 피가 웬만큼 쏟아져 나왔다 싶으면 이번에는 시체를 눌러서 더 짜냈다. 더 이상 피가 나오지 않으면 이번에는 시체를 더 작은 조각으로 토막냈고 나중에는 거의 다진 고기 수준으로 만들어서 피를 걸러내고 빨아내고 짜냈다. 그 과정에서 물이 추가될 경우에는 그 양을 일일이 기록했다….”

이 끔찍한 장면은 괴기영화나 스릴러 드라마에 나오는 내용이 아니다. 실제로 19세기에 진행됐던 ‘2인 동시 해부’의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이 실험을 통해 의학계는 인간의 붉은 액체 ‘피’의 양이 약 5ℓ라는 것을 알게 된다.



책은, ‘피’에 대한 것이다. 저자는 역사와 문학, 신화와 과학을 넘나들며 피의 모든 것을 들려 준다. 거기다 동성애자(게이)인 저자 자신의 개인적 삶의 내밀한 구석까지도 곁들이고 있다. 저자의 해박한 지식은 인류 역사상 피에 관해 얼마나 많은 오해와 상상이 흘러넘쳤는지를 상세하게 보여준다. 상대방의 피를 마심으로써 그 힘과 용기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 했던 고대 로마 검투사들의 시대부터 혈액 검사를 통해 에이즈와 같은 난치병을 밝혀내고 복잡하기 그지없는 치료법을 개발해낸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의·과학사를 다채롭게 펼쳐 보인다.

피를 뽑는 게 만병통치의 치료법이라고 믿었던 로마시대 의사 갈레노스, 혈액의 순환을 발견한 윌리엄 하비, 현미경으로 미시 세계를 발견한 레벤후크, 면역학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파울 에를리히, 에이즈 바이러스를 발견한 제이 레비 등 ‘피의 역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겼던 과학자들이 등장한다. 또 오늘날의 우리가 보기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한 위인들의 면면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치밀한 신체 해부도를 남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실은 ‘사랑 정맥’이나 ‘모유 정맥’ 같은 있지도 않은 혈관을 그려 넣었다.

저자는 피와 관련된 다양한 문학작품들, 이를테면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 ‘흡혈귀와의 인터뷰’를 비롯해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레노스의 고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헌 속에 표현돼 있는 피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과 감정, 사상을 읽어낸다.

책에는 또 저자의 자전적 경험도 녹아 있다. 저자의 파트너 스티브는 에이즈로 고통받으며 자신의 피가 저자에게 닿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한다. 이를 안타깝게 바라보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는 저자의 애틋한 심정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 이와 더불어 에이즈 환자의 혈액을 부주의하게 취급하는 미국 의료계의 참혹한 상황에서부터 에이즈의 유행으로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한 미국 동성애 공동체가 참담하게 무너지는 모습, 성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글은 이 책을 과학적 논픽션물에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인문학적 저작물로 탈바꿈시킨다. 예를 들어, 책의 12장 ‘피와 정욕’에서는 남녀 성기와 피의 관계를 상세하게 살피면서도 문학적 향기까지 곁들이고 있다. 이 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피는 거의 암흑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살아간다. 피는 몸속에 있는 뼈와 살과 피부 사이로 뻗은 혈관을 따라 수천 킬로미터의 거리를 움직인다. 예외가 있다면 가끔 눈 속으로 여행을 갈 때뿐이다. 매일 아침마다 내 눈의 흰자위에 생기는 이 붉은 핏발은 사실 정맥이 아니라 동맥이다. 그러니, 생각해 보면 그 색깔이 그토록 붉은 것도 다 이유가 있다. 동맥을 흐르는 피는 한껏 산소를 머금은 상태니까.”



이 책과 함께 저자의 또다른 저작물 ‘불면증과의 동침’도 이번에 같이 출간됐다. ‘불면증과의 동침’엔 저자의 자전적 기록이 더욱 진하게 녹아 있다. 두 책을 통해 읽을 수 있는 저자의 개인사는 파란만장하기 그지없다.

저자의 아버지는 한국 전쟁 참전 상이군인 출신이자 미국 지방 코카콜라 병입공장 경영자로 예술과 문학에 재능을 가진 어머니와의 사이에 5녀1남의 자식을 두었다. 유일한 아들로 태어난 저자는 자신이 어떻게 성장해 왔는지와 성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발견해 커밍아웃을 하게 된 과정, 남다른 사랑과 작가로 입지를 다지게 되기까지의 우여곡절을 상세하게 털어놓고 있다.

5명이나 되는 누이들 사이에서 성장하면서 겪었던 독특한 경험들, 가톨릭 교리를 강요하는 아버지에게 겉으로는 복종하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종교에 대한 회의를 키워나갔던 반항적인 사춘기 시절, 동성에 대한 욕망을 처음 느꼈던 어린 시절과 그와 함께 시작됐던 수면 장애, 마리화나를 피우며 동성 상대를 찾아 샌프란시스코를 방황하던 청년기의 괴로운 추억, 에이즈에 걸린 파트너를 만나 방황을 마감하고 새로운 인생을 걸어가게 된 과정이 잔잔하면서도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두 책을 통해 우리가 충분히 알고 있다고 여겼던 ‘피’와 ‘잠’에 얼마나 무수한 진실이 숨겨져 있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의·과학사와 문화사를 넘나들며 저자의 자전적 경험까지 녹아 있는 새로운 형식의 논픽션은 읽는 이에게 ‘아, 글을 이렇게 쓸 수도 있구나’ 하는 신선한 깨달음을 선사한다.(김영번기자)

08. 0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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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솔라리스>의 원작자인 폴란드의 SF작가 스타니스와프 렘(1921-2006)의 소설들이 출간됐다. <솔라리스>는 몇 차례 번역 출간된 적이 있으나 현재는 모두 절판된 상태이다. 이번에 <사이버리아드>란 작품과 함께 SF전문출판사 오멜라스의 첫번째 책으로 나온 것. SF작가라면 아이작 아시모프 정도를 주워섬길 뿐이지만 이번에 나온 렘의 책들에는 관심이 간다.

경향신문(08. 06. 12) 국내 최초 과학소설 전문 출판 ‘오멜라스’ 박상준 대표

국내 최초로 과학소설(SF)만 내는 출판사가 문을 열었다. 웅진단행본그룹의 임프린트로 출범한 오멜라스는 최근 폴란드 출신의 전설적인 SF 작가인 스타니스와프 렘의 소설 ‘사이버리아드’와 ‘솔라리스’를 출간하면서 신고식을 했다. 오멜라스는 어슐러 K. 르 귄의 단편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에서 따온 이름이다. 소설에서 그렸듯이 과학적 유토피아도, 우주의 이상향도 아닌 밝음과 어둠이 공존하는 인간사회를 가리킨다. 소설만 내는 것도 아니고, 장르 소설만 내는 것도 아니고, 장르 소설의 하위 장르인 SF만을 내서 출판사가 유지될 수 있을까.

박상준 대표(41)는 “SF의 역사가 100년이 넘었는데 한국에서는 SF 자체가 공백”이라면서 “외국의 SF를 소개하는 것으로도 할 일이 많지만 국내 작가를 발굴, 육성하는 일에도 주력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는 1990년대 초반부터 장르 문학계에서 알아주는 기획자, 평론가, 번역가로 일해왔다. 지난해 창간한 장르 문학 전문 월간지 ‘판타스틱’의 초대 편집장을 맡기도 했다.

“같은 장르 문학 중에서도 미스터리나 판타지는 나름의 독자층과 작가를 확보하고 있지요. 판타지를 예로 들면 ‘해리 포터’나 ‘반지의 제왕’ 같은 외국작품뿐 아니라 이우혁의 ‘퇴마록’이나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 같은 국내 작품이 나왔지요. 그러나 SF는 베르나르 베르베르, 마이클 크라이튼 등이 소개되기는 했지만 한 번도 전성기를 누린 적이 없습니다.”

그는 그러나 SF의 미래는 밝다고 단언한다. ‘태평양 횡단특급’을 낸 듀나(이영수), 단편 ‘깊’(계간 ‘문학동네’ 2006년 겨울호) 등을 통해 SF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박민규를 비롯, 김중혁·윤이형·김언수·박형서 등 젊은 작가들이 SF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있다고 전한다. “SF는 오락이기도 한 동시에 과학의 철학과 윤리를 보여줍니다. 전자로서 SF를 즐기는 사람은 다른 장르도 함께 읽지만 후자에 중점을 두는 사람은 SF 마니아가 되는 경우가 많지요.”



박 대표는 중학교 때 읽은 아서 클라크의 ‘지구 유년기 끝날 때’가 보여주는 심오한 세계에 매료돼 SF에 빠져들었다. 한양대 지구해양과학과를 거쳐 서울대 대학원 비교문학과에서 공부한 그는 지금까지 100여종의 SF를 내는 데 기획, 해설, 번역 등의 형태로 관여했다. 시공사, 풀빛, 현대정보문화사(백산서당) 등에서 SF가 조금씩 나온 것은 그런 덕분이다.

“1900년에 태어나 1970년에 죽은 사람을 상상해보세요. 그가 태어날 때는 비행기가 없었지만 죽을 때는 아폴로 우주선이 달에 다녀온 뒤입니다. SF는 과학기술이 급격히 발전하는 데 따른 윤리를 꾸준히 모색해온 장르입니다. 21세기에는 더욱 필요하지요.”



오멜라스는 앞으로 스타니스와프 렘의 소설 6권을 비롯해 아이작 아시모프, 로버트 하인라인, 로버트 소여 등의 시리즈를 준비하고 있다. 렘은 과학소설과 비주류 문화권 출신이라는 한계를 넘어 세계적인 대가의 반열에 오른 작가로, 영미 과학소설이 통속적인 오락에 치우쳤다는 문제 의식을 갖고 평생 치열한 글쓰기를 했다.

렘의 책 2권에 이어 나오는 책은 올라프 스테풀든의 작품인데 그는 SF의 기본철학과 원형을 제시한 작가로 평가 받는다. 그가 상상해낸 다이슨스피어는 행성을 통째로 둘러싸는 구조물로, 지구에 닥쳐온 에너지 위기를 경고한다.

박 대표는 이 같은 SF의 고전 이외에 여행할 때 지참하는 포켓북 형태의 재미있는 중·단편, 출판시장에서 새로 부상하는 영어덜트 시장을 겨냥한 SF 등도 선보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미야자키 하야오, 오시이 마모루 같은 일본의 걸출한 애니메이션은 SF적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우리 교과서에도 SF가 실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한윤정기자)

08. 06. 19.

Станислав Лем Станислав Лем. Собрание сочинений в двух томах. Том 1Станислав Лем Станислав Лем. Собрание сочинений в двух томах. Том 2

P.S. 스타니스와프 렘과 <솔라리스>에 대해서는 재작년 그의 서거를 계기로 쓴 페이퍼(http://blog.aladin.co.kr/mramor/858000)를 참조. 이미지는 러시아에서 나온 두 권짜리 선집의 표지다(러시아어로는 '스타니슬라프 렘'이라고 읽는다). 렘은 SF소설뿐만 아니라 철학적인 저술들도 남기고 있으며 러시아에서는 '철학자'로도 대우 받는다(그의 책들이 철학총서에도 들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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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솔라리스
    from 한사의 서재 2008-06-20 09:06 
         그녀는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그때는 열아홉 살의 소녀였다. 살아있다면 지금은 스물아홉 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죽은 자는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졸린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엾은 레야, 나를 찾아 온 거야?”     
 
 
비로그인 2008-06-20 01:09   좋아요 0 | URL
솔라리스 영화를 정말 재밌게 봤는데, 리메이크작은 기대에 못미치더라구요.
반가운 포스팅이었습니다.
로쟈님덕분에 장바구니가 더 무거워졌습니다.ㅜㅜ
로쟈님, 하나 부탁드리자면,
제가 지젝의 책을 읽어보고자합니다. 완전히 입문인데요.
로쟈님의 서재를 훔쳐보면서 지젝에 너무 흥미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전혀 배경지식이 없네요.
지젝에 대한 입문서로 어떤 책이 좋을까요.
어제 밤새도록 로쟈님의 서재를 훔쳐-_- 보았지만
선뜻 고르기가 힘듭니다.
이놈의 정권이 일개 소시민을 공부하게 만드는군요,
바람직하다고 해야할까요-_-

로쟈 2008-06-20 12:58   좋아요 0 | URL
종종 받는 질문인데, 제 답변도 비슷합니다. 지젝의 책은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와 <지젝이 만난 레닌>을 일단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가 쓴 <라캉>도. 그 정도를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으면 입문으로서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영화와 영화이론에도 관심이 있으시다면 지젝의 '영화책'들도 권해드릴 만합니다)...

비로그인 2008-06-20 09:11   좋아요 0 | URL
렘의 '솔라리스', 인상 깊은 책이었답니다.
로쟈님의 렘의 책과 SF전문출판사 '오멜라스' 소개 반가운데요..


로쟈 2008-06-20 12:55   좋아요 0 | URL
솔라리스 애호가시군요.^^
 

이번주 한겨레21에 실린 '로쟈의 인문학서재'를 옮겨놓는다(http://h21.hani.co.kr/section-021162000/2008/06/021162000200806190715043.html).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2008)의 한 대목에 대해 정리한 것인데, 다시 번역돼 나온 마르크스의 <자본>(길, 2008)에 대한 소회를 덧붙였다(물론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부추긴 건 최근의 촛불시위다). 내친 김에 새 번역 <자본>에 대한 소개 기사를 먼저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45#).  

시사인(08. 06. 17)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틀 여전히 유효”

지난 6월 초, 합쳐서 1100쪽이 넘는 두툼한 양장본 두 권을 받았다. <자본> 1-1과 1-2. 전체 세 권 중 제1권을 두 책으로 나누어 번역했는데, 2, 3권은 내년쯤 펴낼 예정이라는 게 도서출판 길 이승우 기획실장의 설명이다. <자본>(<자본론>)을 받아쥔 느낌은 독특했다. 21세기에 칼 마르크스의 ‘신간’이라니.

1867년 초판이 나온 이 책만큼 논란을 겪은 책도 드물다. 새 밀레니엄을 앞두고 영국 BBC는 지난 1000년간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을 발표했는데, 그 첫 번째가 <자본>이었다. 올해 초 교수신문이 국내 계간지와 학술지 편집위원에게 설문한 결과 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 또한 <자본>이었다. 물론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이 책의 수요는 급감했고, 19세기 자본주의를 분석 대상으로 삼았기에 21세기 현실에 적용하기에 맞지 않는 대목도 많다. 그럼에도 자본주의의 힘을 완벽하게 묘사한 상품의 시인 마르크스, 혹은 우리 일상 생활의 소외와 물화를 보여준 ‘문화 연구’의 마르크스가 여전히 호소력을 가지고 있는 한 <자본>의 상징성은 크다. 더구나 ‘혁명의 시대’가 끝나서 ‘위험성’마저 줄어든 마당이니! 슬라보예 지젝의 시니컬한 표현을 빌리자면 “오늘날에는, 심지어 월 스트리트에도, 여전히 마르크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새로 나온 <자본>이 실은 온전한 신간은 아니다. 1987년 출판사 이론과실천에서 국내 최초로 <자본>을 완역했던 강신준 교수(54·동아대 경제학)가 21년 만에 이 책을 새롭게 다시 번역했다. 새 번역본은, 쉽게 읽히도록 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는 강 교수의 말처럼 문장이 깔끔하고 유려한 편이다. ‘상품’을 설명하는 앞부분은 여전히 난삽하고, 독일 관념철학의 개념어를 그대로 옮긴 듯한 단어가 가끔 툭툭 튀어나오지만, 중반 이후 등장하는 역사적 사례 등은 역사소설을 읽듯 생생하고 재미있다.

“당시는 시대적인 요청 때문에 서둘러 내느라 번역 오류가 많았고, 그나마 모두 절판됐다. 지금 서점에 있는 김수행 선생 번역본(비봉출판사판)은 영어판 중역본이라서 독일 관념철학을 토대로 한 변증법적 유물론 부분을 옮기는 데 한계가 있다고 봤다. 묵은 빚을 갚는다는 심정으로 다시 번역을 마쳤다.”

강 교수가 한국 최초로 <자본> 번역자가 된 데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숨어 있다. 1987년 그는 서울 서대문에 있는 농협 조사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근처에서 출판사 이론과실천을 운영하던 친구 김태경 사장이 퇴근길에 들르라고 해서 갔더니 원고 한 꾸러미를 주는 것이었다. “‘빵잽이’(민주화운동으로 복역하고 출소한 학생들) 여섯 명한테 <자본>을 나눠서 번역하게 했는데, 원고 상태나 봐달라”는 부탁과 함께. 당시 <자본>은 금서 중의 금서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원고를 집에 가져가서 읽었다. 거칠고 오역이 많다는 말과 함께 원고를 돌려준 며칠 뒤, 김 사장에게서 “문제가 많지만 나온다는 게 중요하다, 심각한 부분만 교열을 봐달라”는 연락이 다시 왔다. 그는 두 달 정도 원고를 교열해서 넘겨줬다. 그렇게 해서 ‘역자 김영민’이라는 가명으로 한국어판 <자본> 1권이 출간됐다.



김수행 번역본은 영어판을 옮긴 것

당시 <자본> 출간의 여파는 컸다. 책은 당연히 금서가 됐고, 수배령이 떨어진 김태경 사장은 한동안 도망다니다가 자수했다. 김 사장의 약혼자였던 강금실 판사(전 법무부 장관)가 법복을 벗고 변호를 맡을 채비까지 갖추었다. 하지만 검사가 이적성을 입증하지 못해 공소를 포기하는 바람에 재판은 열리지 않았다. <자본>은 그렇게 한국에서 해금됐다. 강 교수는 이듬해 박사논문을 끝낼 목적으로 휴직서를 낸 뒤 2, 3권까지 번역해서 이번에는 본명으로 출간했다. 17년째 동아대에서 마르크스 자본론을 강의하고 있는 그에게 마르크스 이론이 아직까지 현실에서 효용 가치가 있는지를 물었다.

“수강생이 계속 줄다가 최근 조금씩 느는 추세다. 신자유주의가 심화하면서 학생들의 위기감이 그렇게 반영되는 것 같다. 자본주의 체제가 계속되는 한 마르크스가 제시한 분석틀은 여전히 생명력이 있다고 본다.”

강 교수는 옛 동독의 디츠 출판사에서 1956년에 발간한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집(일명 ‘메프(MEW)’)에 들어 있는 <자본>을 번역했다. 메프는 옛 사회주의권에서 이론 수뇌부 구실을 했던 동독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가 편집을 맡아서 이른바 사회주의권의 ‘정본’ 취급을 받았던 저작집인데, <자본> 1권은 1890년 엥겔스가 편집한 4판이 실렸다.

<자본> 1권은 다양한 판형이 존재한다. 1867년 나온 초판과 현재의 책은 많이 다르다. 마르크스는 너무 난삽하고 어렵다는 조언을 듣고 1873년에 <자본> 1권의 2판을 거의 새롭게 고쳐 썼다. 3, 4판은 1883년 마르크스가 죽은 후, 마르크스의 친구이자 평생 동지였던 엥겔스가 주석을 덧붙여서 펴낸 책이다. <자본> 2, 3권은 마르크스가 초고만 써놓은 뒤 죽었기 때문에 엥겔스의 손을 거쳐 1885년과 1894년에 각각 출판됐다.

<자본>의 번역본은 1872년 러시아에서 처음 나왔다. 러시아판은 독어본 원본보다 훨씬 많이 팔렸는데, 사회주의를 겨냥해 복지 정책을 폈던 독일 비스마르크 치하에 비해 차르 체제의 러시아에서 사회 모순이 더 심했던 탓이 컸다. 프랑스어판도 1872년에 나왔다. 마르크스가 살면서 <자본>을 집필했던 영국에서는 마르크스 사후인 1886년에야 영어판이 출간됐다. 김수행 교수가 번역한 <자본론>(비봉출판사)은 1976년 펭귄출판사에서 출간한 책을 번역한 것이다. 이 책에는 제4인터내셔널 서기를 지낸 트로츠키주의 이론가 에르네스트 만델이 쓴 75쪽 분량의 서문이 붙어 있어서 흔히 ‘만델판’이라고도 불린다.(안철흥기자)

한겨레21(08. 06. 19) 2008년 6월, 레닌

지난봄 <교수신문>에서 학회지와 계간지 편집위원들을 상대로 ‘광복 이후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이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지니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이 설문 결과는 개인적으로 좀 의아했다. <자본론>이 ‘한국 지식인 사회’에 끼친 영향이라면 몰라도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 얼른 생각해보아도 <자본론>의 번역본이 나온 것은, 완역본을 기준으로 채 20년도 되지 않는다. 때문에 내게 떠오른 두 가지 의문점. 그 이전 40년 동안에는 한국 사회에 그만한 영향을 끼친 책이 전혀 없었다는 것일까?(가령, <전태일 평전> 같은 경우는?) 더불어 <자본론>을 제대로 읽어본 사람은 드물다는 속설에 기대면, <자본론>의 영향력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나로선 뾰족한 대답을 갖고 있지 않은데, 다만 <자본론>의 출간 타이밍만큼은 절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국역본 <자본론>의 초판이 ‘운동권 빵잽이’들의 번역을 통해 나온 게 6월항쟁이 있던 1987년이고, 이번에 그 교정을 맡았던 강신준 교수가 독어판을 새로 번역한 <자본> 1권을 출간한 시점은 우연찮게도 촛불시위로 한국 민주주의의 새 역사를 쓰고 있는 2008년의 6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마르크스의 <자본론>보다도 지금, 우리에게 더 긴요한 책은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펴냄)이 아닌가 싶다. 책의 1부 ‘문앞에 다가온 혁명’은 1917년 3월부터 10월까지 러시아혁명 전야에 레닌이 쓴 글들을 모은 것이고, 2부 ‘레닌의 선택’은 그에 대한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주석’이다. 주석의 초점은 여느 책들과 달리 ‘레닌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가 아니라 ‘레닌을 어떻게 반복할 것인가’에 맞춰져 있다.

레닌을 반복한다고? 지젝의 이러한 기획에 대한 반응은 그가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다시피 ‘빈정거리는 폭소’다. ‘자본주의의 힘을 완벽하게 묘사한 상품의 시인’ 마르크스는 오늘날 월스트리트에서도 좋아한다. 하지만 레닌은 뭔가? 마르크스주의를 실천에 옮기려는 노력의 ‘실패’이자 ‘현실사회주의’ 실험이라는 커다란 ‘재앙’의 상징적 인물 아닌가? 하지만 지젝이 다시 건져내고자 하는 레닌은 그러한 ‘낡은 교조적 확실성’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라 재앙에 가까운 상황에 내던져지는 근본적인 경험을 한 레닌이며 그런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마르크스주의를 다시 만들어야 했던 레닌이다.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과학적 무기’로서 <자본론>을 치켜세우곤 하지만, 레닌은 자신이 직면한 새로운 문제들에 대해 이렇게 토로한 바 있다. “이 문제에 관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레닌이 처했던 재앙적 상황이란 1914년의 상황이다. 전 유럽이 군사적 갈등 상황 속에서 둘로 쪼개져 대립하고 있었고, 유럽의 모든 사회민주주의 정당들마저도 ‘애국주의 노선’을 채택해 레닌에게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렇지만 레닌은 그렇게 사회주의 운동 자체가 소멸한 것 같은 절망적인 시점에서 ‘혁명의 독특한 기회’를 포착한다. 알려진 대로 역사학자 홉스봄은 20세기를 자본주의의 평화적 팽창이 끝난 1914년에서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한 1990년까지로 규정했다. 지젝의 제안은 우리가 레닌이 1914년에 대응해 한 일을 1990년에 대응해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가능성은 없어. 민주적 합의에 충실해야 돼”라는 일종의 ‘사고 금지’에 대응해 다시금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 그것이 ‘레닌’이란 이름이 우리에게 상기시켜주는 것이다.

혁명에는 두 가지 모델, 두 가지 양립 불가능한 논리가 있다. 하나는 역사적 진화의 필연성에 따라 ‘적절한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적절한 때’라는 것은 따로 없으며 혁명적 기회가 나타나면 ‘정상적인’ 발전 과정을 우회해서라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레닌은 1917년 10월에 이렇게 주장했다. “2천만 명은 안 되더라도 1천만 명으로 이루어진 국가기구는 즉시 가동할 수 있다.” 지젝의 말을 빌리면, 이것이 ‘진정한 유토피아’다. 그리고 그가 보기에 우리가 고수해야 하는 것은 레닌주의의 이러한 유토피아적 광기다. 그것은 과연 지금 우리에게도 가능할까?

08. 06. 19.

P.S. “이 문제에 관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때문에 레닌이 새롭게 고안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 흔히 '마르크스-레닌주의'라고 불리는 그만의 마르크스주의이다. 사정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 아닐까?(이번엔 레닌도 말해주지 않은 문제들과 우리는 직면하고 있다!) 나는 당장에 <자본> 번역을 무료로(혹은 아주 저렴하게) 인터넷에 공개하는 것이 레닌주의식의 '유토피아적 광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사실 영역본 <자본>은 마르크스/엥겔스의 다른 저작들과 함께 모두 인터넷에 공개돼 있다(http://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67-c1/). 가장 먼저 번역되고 독어본보다도 많이 팔렸다는 러시아어본도 마찬가지다(http://www.marxists.org/russkij/marx/1867/kapital.htm). 고가의 '양장본 고전'으로서의 <자본>과 촛불시위에도 들고 다닐 수 있는 저렴한 문고본 <자본>의 차이는 결코 작지 않다. 그러한 '출판혁명'이 도래하지 않는다면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이란 수식어는 한갓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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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6-20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본주의 붕괴가 필연적이라면 굳이 혁명가들이 나설 필요가 있느냐 하는 질문은 정말 어렵죠.그래서 맑시즘 정통의 대부였던 플레하노프나 카우츠키도 먹칠을 하고 맙니다만...요즘 관심을 갖고 있는 비코의 다음과 같은 촌철살인은 레닌이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할겁니다.
...상품과 달리 사상은 각 민족이 자기들 발전의 주어진 단계에서 필요한 것을 독립적으로 발견함으로써 퍼진다...물론 이 주장이 극단적으로 가면 일종의 특수주의가 되고 맙니다만.

로쟈 2008-06-20 12:53   좋아요 0 | URL
레닌에게서는 '민족' 대신에 '상황'이라고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상황'의 경우엔 보편적 특수성이죠. 반복되니까요...

paul 2008-06-20 0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개인적으로 <자본>의 초판본을 볼 수는 없는 것인지...궁금하군요. 가라타니 고진의 경우도 자본의 초판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목을 읽은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군요. 지나치게 난삽해서 수정을 거쳤다고 하는데, 오히려 수정이 가해지기 전의 거칠지만 원석의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사유의 흔적을 보고 싶은 것은 지나친 욕망일까요^^+

로쟈 2008-06-20 12:53   좋아요 0 | URL
가라타니 같은 비평가가 국내에선 나올 수 없는 이유도 그런 데 있지 않을까 싶네요...

solico 2008-06-20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나가다 무뢰하게 말씀드립니다만, 강신준 교수가 90년대에 개역한 이론과실천판 자본 1권 3개 분책도 있습니다. 저는 흰색의 초판본이 아닌 개역판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과 '20년'만의 개역판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서점에 갈 시간이 없어서 비교는 못해봤습니다만, 강교수 자신도 언급하지 않고 아직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아서 궁굼해집니다. 90년도 이후에는 이걸로 나왔던 것 같은데요.
개역판이라지만 별로 개역한게 없고 표지만 이쁜색으로(2~3권과 같습니다) 맞추기 위해 그런건지(여기 서문에도 많은 부분을 개역했다고 나오기는 합니다), 아니면 새 번역에 포커스를 주기 위해서 그런건지 궁굼해지네요.

로쟈 2008-06-20 12:55   좋아요 0 | URL
저도 강신준 교수의 번역은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김수행본도 1권만 조금 뒤적거린 정도라서요. 짐작엔 90년대본은 오탈자나 손보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소경 2008-06-20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강신준 교수 판 <자본> 구입해서 선배랑 같이 읽어 볼 기회가 생겼는데, 선배가 헌책방에서 구입한 것은 김수행교수 판이더군요. ^^:;

로쟈 2008-06-20 12:55   좋아요 0 | URL
덕분에 비교독해가 가능하겠네요.^^

비로그인 2008-06-20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로쟈님의 P.S.에 담긴 의견에 동의합니다. 마샬 버먼이 자신의 글 모음집 <맑스주의의 향연>에서 언급한 <경제학-철학 수고>와의 만남의 희열 그리고 싸고 알차게 나온 보급판 <경*철 수고> 10권? 20권?을 주머니를 털어 구입하고는 주위 사람들에게 보급하며 전한 흥분이 생각나네요.
이번 <자본>은 정말 가격이 두껍군요.
그래도 강유원씨 번역으로 나온 <경*철 수고>는 판형이 좋고, 가격도 <자본>만큼의 두께는 안하지만.. 버먼의 경험이, 아직 이 곳 사회에서는 요원해 보입니다.

로쟈 2008-06-21 11:58   좋아요 0 | URL
네, 가격이 두껍습니다! 저도 손에 들었다 놓았지요.^^;

노이에자이트 2008-06-20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레닌의 혁명이 성급한 것이었다면서 엥겔스가 했다는 말-조급하게 성공한 혁명(충분히 산업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회주의자가 집권하는 것)은 비극을 부른다-을 인용하더군요.이사야 벌린은 레닌이 혁명을 앞당기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러시아의 자본주의 발달단계를 과장했다는 주장까지 합니다.
원래는 당시의 혁명가들은 혁명가능성이 높은 나라로는 독일을 꼽았다는데...

로쟈 2008-06-21 12:01   좋아요 0 | URL
그게 혁명에 대한 양립불가능한 논리겠지요.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는 워낙에 설들이 많지요. 그 중 하나는 '러시아'이니까 가능했다는 것이고, 또 '러시아'라서 마르크스가 욕봤다는 얘기도 있고요...

노이에자이트 2008-06-21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역본 자본론이 인터넷에 공개되면 달성되는 우리나라의 유토피아적 광기의 모습을 대충 알려주실 수 있는지요?

로쟈 2008-06-21 23:55   좋아요 0 | URL
제가 '유토피아적 광기'라고 한 건 그 공개 행위 자체입니다. '자본의 논리'에 역행하는...

노이에자이트 2008-06-22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역본이나 노역본은 공개되는데 왜 우리는 안 될까요? 사실은 인터넷을 통한 공개도 자본의 논리에 역행하지 않으니까 허용되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로쟈 2008-06-22 00:05   좋아요 0 | URL
'자본의 바깥은 없다'는 체념은 너무 염세적인 쪽으로 흘러갈 수 있지 않을까요? 압도적이지만 전부는 아니죠. 혹은 전부는 아닌 것으로 만들어야죠...

노이에자이트 2008-06-22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에서 공개하라는 요구는 역자나 출판사에 너무 무리한 요구일까요?

로쟈 2008-06-22 11:14   좋아요 0 | URL
불가능한 가능성이죠.^^;
 

'美 저명 미학자 아서 단토의 책 오역논쟁'이란 기사 타이틀이 있기에 뭔가 해서 클릭해봤더니 '로쟈의 저공비행'에서 벌어진 일을 정리해놓은 기사다(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806/h2008061802344784210.htm). '알라딘통신'에나 들어갈 만한 내용이 일간지에 실려 있어서 흥미롭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필경 기사거리가 부족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렇다 하더라도 관심있게 읽어주는 분들이 있다는 건 불쾌한 일이 아니다. 기사를 자료 삼아 '창고'에 넣어둔다. 

한국일보(08. 06. 18) 美 저명 미학자 아서 단토의 책 오역논쟁

미국 저명 미학자ㆍ미술평론가인 아서 단토(84)의 국내 번역 저서를 둘러싼 인터넷 상의 오역 논쟁에 저자까지 가세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최근 국내 소장학자 및 번역가들이 인터넷을 통해 펼치는 번역비평의 수준과 활력을 보여주는 사례다.

발단은 ‘로쟈’라는 필명으로 잘 알려진 러시아문학 전문가 이현우씨가 지난달 21일 자신의 알라딘 블로그(http://blog.aladin.co.kr/mramor)에 지난달 번역 출간된 아서 단토의 <일상적인 것의 변용>(김혜련 옮김)의 일부 구절에서 발견한 오역을 지적한 일이었다. 이 책은 한길사에서 1996년부터 출간 개시한 고전 시리즈 ‘그레이트북스’의 100번째 책이다.

이씨는 남성용 소변기를 ‘샘’이란 제목으로 미술전에 출품하는 등 일상적 소재를 예술 영역으로 끌어들인 작업으로 유명한 프랑스 조각가 마르셀 뒤샹의 예술 세계를 설명하고 있는 이 책 57쪽의 두 문장을 오역 사례로 제시했다. 해당 구절은 이렇다. “그(뒤샹)의 행위는 하찮은 대상들을 모종의 미적 거리 안에 배치했고, 그 결과 그것들이 미적 향수(享受)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간단하게 평가할 수도 있다. 즉 가장 가당치 않은 곳에서 모종의 아름다움이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입증하려던 시도로 볼 수 있다.”

이씨는 두 문장이 얼핏 봐도 모순적이라며 번역자가 앞 문장 ‘그 결과…’ 이하 구절에 해당하는 원문 ‘rendering them as improbable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에서 ‘improbable’(가능할 것 같지 않은)의 반어적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 결과 가능할 법하지 않은 그것들(빗자루, 병걸이, 자전거 바퀴, 소변기 등)을 미적 향수의 대상으로 연출했다’로 번역해야 옳다는 것.

글이 게재된 다음날부터 ‘노이에자이트’ ‘juin’ ‘규’ ‘qualia’ ‘carboni68’ ‘palefire’을 각각 필명으로 쓰는 알라딘 블로거가 차례로 ‘댓글 논쟁’에 가담했다. 이 중 ‘지방 중소도시에 사는 번역가’로 자신을 소개한 ‘qualia’는 이씨의 지적에 동의하면서 문제의 두 문장에서 두 개의 쟁점을 새로 제시하며 논쟁을 주도했다.

하나는 번역자가 ‘하찮은 대상들’로 번역한 ‘these unedifying objects’는 ‘미적 감흥을 불러 일으키지 않는 대상들’로 표현해야 정확하다는 점, 또 하나는 ‘가장 가당치 않은 곳(the least likely places)’에서 ‘places’를 ‘전시장’으로 해석하는 다른 논쟁자들에 맞서 그 단어는 소변기, 빗자루 등 뒤샹의 ‘전시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자기가 듣고 본 것들을 몇 문장에 투사해 과시 대회 같은 분위기로 흘러간다”면서 논쟁에서 빠지겠다고 쓴 한 블로그를 “뜻하지 않게 서로 감정을 다치게 했더라도 끝까지 가는 것이 토론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득, 마음을 돌리기도 했다. 인터넷 논쟁 문화의 성숙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50개의 댓글이 달리며 열흘 넘게 진행된 논쟁을 끝맺은 사람은 저자 아서 단토였다. ‘qualia’가 지난달 25일 세 쟁점에 대한 해답을 요청하며 보낸 이메일 질문지에 이달 2일 답신을 한 것. 단토는 “관심과 열정에 감사한다. 복잡하고 평이한 문장을 함께 구사하는 내 글쓰기 스타일에서 비롯된 의문 같다”면서 질문마다 명확한 입장을 밝혔다. 모든 쟁점에서 ‘qualia’의 손을 들어주는 답장이었고, 논쟁은 유익하고 평화롭게 마무리됐다.(이훈성기자)

08. 06. 18.

P.S. 내가 쓴 페이퍼는 '앤디 워홀의 비누상자'(http://blog.aladin.co.kr/mramor/2102426) 이고, qualia님의 관련 페이퍼는 '아서 단토 교수님, 답장을 보내주시다'(http://blog.aladin.co.kr/qualia/2120870) 이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Gene님의 의견은 http://geneghong.blogspot.com/2009/01/9.html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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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로스의 <미국 사회과학의 기원1,2>(나남, 2008)에 대한 소개기사를 올려놓은 적이 있는데(http://blog.aladin.co.kr/mramor/2122007), 막상 서점에서 손에 들어보니 쉽게 읽게 될 성싶지 않았다. 당면한 일들과는 좀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냥 덮어놓긴 뭐해서 조금 더 자세한 서평기사를 하나 더 챙겨놓는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6380). 미국 학문의 '역사성'에 대한 주목은 우리에게도 통용되고 있는 학문의 '미국식 표준'에 대해서 진지하게 재고해볼 것을 요구한다.

교수신문(08. 06. 16) 자연과학·개인주의에 충실한 ‘미국 예외주의’ 비판

우리는 언제 족보(族譜)를 따지는가. 대체로 먹고살만해졌을 때, 아니면 가족사에 뭔가 문제가 발생했을 때다. 학문 활동에 몰두하는 전문가도 마찬가지다. 자기 전문분야의 기원을 돌아보는 일은 매우 드물다. 학계의 경우 십중팔구는 해당 분과가 난관에 봉착했을 때 기원을 돌아보게 된다.

도로시 로스(Dorothy Ross)의 『미국 사회과학의 기원』(The Origins of American Social Science, 1991)도 그러하다. 그는 20세기 미국문화가 점점 더 방향성을 상실하고, 사회윤리가 지속적으로 침식됨에 따라 미국 사회과학을 지배해온 자연과정에 입각한 사회모델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저자는 ‘미국 예외주의적 사고 자체를 역사화’하려는 노력의 일부분으로 ‘미국 사회과학을 역사화’하고자 이 책을 썼다고 지적한다.  

미국 예외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저자는 그것을 미국의 독특성으로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판 국가주의(nationalism)로 비판하는 입장을 취한다. 미국의 국가주의는 미국을 유럽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형성됐으며, 미국과 유럽을 상극으로 보려는 성향에 의해 고취됐다. 또한 미국 예외주의 담론의 두 번째 특징은 이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을 융합시키는 경향인 ‘이상주의의 형이상학’이다. 처음부터 미국 국가주의자들은 미국 역사에 개인의 자유와 정치적 평등, 사회적 조화, 그리고 어느 정도 사회적 평등까지 결부시켰다. 그렇지만 이런 사고는 때때로 제국주의적 충동을 일으키기도 했다고 본다.

저자는 미국 사회과학의 삼대 핵심 분야인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다. 역사학, 심리학, 인류학과 그 밖의 사회과학 분과학문들은 체계적으로 포함시키지 않고 다만 선택적으로 가끔 언급할 뿐이다. 이 책은 미국 사회과학 분과학문들의 형성기인 대략 1870년에서 1929년 사이의 기간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사실 계량모델이나 체계분석, 기능주의 그리고 행태과학 등이 크게 유행했던 1950년대에 미국 사회과학의 과학적 열망이 최고조에 달했다. 그렇지만 저자는 사회역사과정을 자연과정의 한 영역으로 보는 기본 관점과 자연과학적 방법을 추구하려는 결정은 이미 1920년대에 이뤄졌다고 본다.

이처럼 미국의 사회과학이 역사학보다 자연과학에 더 기울고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라는 고전적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연유를 추적하면서, 저자는 이것이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라는 미국식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입각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미국은 세계사상 특수한 지위를 차지한다는 예외주의 이데올로기가 청교도이념, 자유주의 그리고 공화주의에 깊이 스며들어 미국 사회과학에 경로의존성을 부과했다는 것이다. 저자가 미국 예외주의를 지목해 역사적 비판을 가하는 의도는 앞으로 그것의 영향력을 줄여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 사회과학이 선택한 특수한 과학주의적 입장은 그들의 특수한 역사의식에 의거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미국 사회과학이 실용적인 양키들에 의해 발전된 것이 아니라, 도적철학에 뿌리를 두고 미국 사회의 엘리트층 가치를 신봉하는 학자층에 의해 이뤄졌다고 본다. 그런데 미국의 학자층은 실제로는 현실권력에 관계했으면서도 스스로는 권력과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저자는 1965년 콜롬비아대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프린스턴대, 버지니아대를 거쳐 현재 존스 홉킨스대 역사학 교수로서 미국 지성사, 현대 사회사상과 정치사상, 인문과학사를 강의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 사회과학의 핵심 흐름을 이루는 담론을 재구성하는 지성사의 방법을 동원한다. 그리하여 미국의 역사와 사회과학을 연결시키는 한편, 사회과학자들이 전제하는 가치들이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방식을 탐구한다. 저자는 역사적 전환점마다 담론을 주도한 인물을 중심으로 사회과학담론을 소개하고 있다. 그의 논의는 근대 사회와 정체 그리고 경제를 둘러싸고 진행된 학계의 논의와 미국 예외주의를 둘러싼 국가 엘리트들의 논의에 국한된다.

책의 메시지는 무척 명료하다. 미국 사회과학의 역사는 한마디로 각 시기별로 가장 중요한 사회문제들과 지적, 정치적으로 대결해온 역사라는 것이다. 미국 예외주의와 자유주의가 결합해 미국 사회과학계에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합의가 형성됐다. 따라서 사회과학자들은 자유주의 사회를 어떻게 통치해나갈 것인가에 집중했다. 저자는 자신의 의도가 “미국 사회과학을 역사화하는 것”이며, “역사세계를 자연화하려는 미국 사회과학의 노력 자체가 바로 역사적 기획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정리한다. 사회과학자들이 과학주의적 선택을 한 데는 ‘충분한 이유들’이 있었겠지만, 그 이유들은 역사적 의도들에 의해 항상 제약된 이유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객관적 과학’이라는 미국 사회과학의 실증주의적 자기묘사를 부정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공부한 사회과학자들은 거의 대부분 미국 사회과학의 가치중립성, 객관성, 전문성을 옹호한다. 문제의식은 ‘가치부하적’, ‘주관적’이고 따라서 ‘과학적’이거나 ‘전문적’이기 어렵다고 기각한다.

그런데 미국 사회과학의 과학주의 자체가 ‘역사적’인 것이라면, 우리가 미국 사회과학을 바라보는 시각은 뿌리부터 바뀌어야 할 것이다. 미국 사회과학자들에게 학문의 과학성은 국가에 대한 헌신이나 국익 또는 기업이익에 대한 봉사와 전적으로 양립가능한 것이다. 아니, 과학적이어야 더욱 더 권력효과를 창출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역사사회학 전공자로서 한미관계를 주로 연구한다. 최근에 기밀해제된 미국 정부문서를 읽으면서 가끔씩 미국 사회과학자들이 정부의 프로젝트를 수행한 보고서들을 접하곤 한다. 로스토우 교수와 헌팅턴 교수의 보고서가 기억에 남는다. 둘 다 월남전 관련 보고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한 바 있다. 로스토우 교수는, 우리에게는 ‘개발경제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미국의 월남전 개입에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헌팅턴 교수는, 우리에게는 ‘민주주의의 제3의 물결’이나 ‘문명충돌’로 유명하지만, 월남전 당시 ‘베트콩’의 게릴라전술에 맞서 물고기를 없애기 위해서는 물을 말려버려야 한다는 전술 즉, 강제 도시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제안을 한 장본인이었다. 미국 사회과학계가 미국정부나 기업계와 맺는 관계는 한국의 그것보다 훨씬 전면적이고 제도적이다. 우리가 미국 사회과학계는 가치중립적이며 엄격한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해 연구와 강의를 진행해나갈 것이라고 믿는 동안 그들은 국익과 사익을 위해 열심히 복무했다.

공역자인 백창재 교수와 정병기 교수는 한국학술진흥재단 학술명저 번역총서의 일환으로 이 책을 옮겼다. 옮긴이는 1권 끝에 보론으로 「한국 사회과학 정체성 논의」를 싣고 있다. 또 2권 끝에는 이 책의 해제를 싣고 있다. 아마도 이 책을 번역해냄으로써 문제의식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과학주의를 넘어서려는 작업에 동참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미국 사회과학의 기원을 파헤치는 작업소개는 한국 사회과학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노력과 맞닿아 있는 것 같으면서도 기실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과학의 정체성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문제를 우리의 머리로 고민하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지난 100여 년 간 한국의 근대화는 ‘타율적 근대화’라 부를 만큼 바깥으로부터의 도전에 대한 때늦은 응전, 그것도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한, 대응이었다. 지금부터라도 날개(wings)와 뿌리(roots)를 함께 보듬고 나가는 한국 사회과학을 실천해야한다. 미국의 사회과학이 우리에게 덧입힌 ‘과학주의’의 속박에서 벗어나 주체적 문제의식과 독특한 문제틀을 제시할 때다. 그러기 위해 한국 사회과학에 뿌리내린 미국 사회과학에 대한 성찰은 필수적이다. 한국 사회과학의 정체성이란 우리와 마주한 상대방과의 관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정일준/ 고려대·사회학과)

08. 0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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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6-18 23:39   좋아요 0 | URL
로스토우나 헌팅턴이 베트남전 당시에 했던 구린 짓은 촘스키와 허만이 근거 자료까지 인용해서 시원하게 두들겨 줬죠(워싱턴 커넥션과 제3세계 파시즘).거기에 베트남사 전공교수인 더글라스 파이크도 별책부록으로 가볍게 한 방...파이크는 로스토우나 헌팅턴 정도의 파렴치한은 아니라고 여겼던 모양입니다.

로쟈 2008-06-19 00:07   좋아요 0 | URL
그런데, 그 '구린 짓'이 저로선 사례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가 아닌가 싶어요. 사이드도 지적하고 있는데, 그보다 더 주의할 문제는 오히려 '전문분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비판받지 않으면서 통용되는...

노이에자이트 2008-06-19 00:53   좋아요 0 | URL
그래요.촘스키와 허만도 그 책에서 그 문제를 지적합니다.미국 국방성과 CIA가 종속국들의 군인들을 데려다 친미사상을 주입하고 개인적 친분관계를 이용해서 제3세계 군부를 친미일색으로 만드는 과정을 파헤쳤죠.이번에 광우병이 안전하다고 군대에서 정신교육 시간에 사병들에게 홍보하는 우리나라 군대를 보면...군인들만 그렇겠어요.제3세계 유학생들을 뭣 때문에 유치하겠습니까?이윤기의 <하늘의 문>을 보면 미국과 자국의 이익이 부딪히는데 충성스럽게도 미국 편이 되는 후진국 지식인 이야기가 나옵니다.자기를 미국인과 동일시하는 거죠.당연히 미국 유학생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