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초에 읽은 시사인의 출판리뷰를 옮겨놓는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37#). 평론가 정홍수의 <소설의 고독>(창비, 2008)을 다루고 있는데, 이 평론집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리뷰도 술술 읽힌다. '문학이 된 평론'의 사례들이어서일 게다.

시사인(08. 07. 15) 어? 평론집이 술술 읽히네

영화평론은 영화가 될 수 없고 음악평론은 음악이 될 수 없지만 문학평론은 문학이 될 수 있다. 문학평론이 가장 위대하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문학평론은 그만큼 특수하다는 얘기다. ‘뭔가’에 들러붙어서 바로 그 ‘뭔가’가 되는 유일한 글쓰기다. 이것은 축복받은 특수성 아닌가. 그렇다면 문학평론이 문학이 되기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어떻게 하면 문학이 되는가. 정답은 내면과 문장이다. 진리를 대변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내면의 격랑을 드러내는 목소리, 무색무취의 보편 문장이 아니라 스타일에 대한 고집으로 충전된 문장을 갖추면 된다. 

이 간단한 정답을 어떤 이는 모르고 또 어떤 이는 모른 척한다. ‘모르는’ 분이야 그렇다 쳐도 ‘모른 척하는’ 분이 많다는 것은 좀 문제다. 나는 문학평론만큼 보수적인 ‘글쓰기 제도’를 알지 못한다. 후자인 분들은 평론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내면이나 문장 따위가 아니라 통찰과 논리라고 점잖게 말씀하신다. 맞다. 좋은 글을 만드는 힘의  90%는 통찰과 논리가 감당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좋은 ‘글’일 뿐이다. 좋은 칼럼·보고서·논문과 다르지 않다. 나머지 10%에 해당하는 것이 내면과 문장이다. 바로 그 10%가 평론을 ‘글’이 아닌 ‘문학’으로 만든다.

오랜만에 ‘문학이 된 평론’의 사례가 있어 소개하려 한다. 문학평론가 정홍수의 첫 번째 평론집 <소설의 고독>(창비)이다. 문학평론집을 소개해도 될까 주저했다. 거의 아무도 읽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본래 작품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평론을 읽어내기는 쉽지 않다. 동시대 한국 문학의 세부 주제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는 독자가 그 주제에 대한 추상적 논의를 따라가는 일 역시 어렵다. 이를 다 무릅쓰고라도 읽어보시라고 말하는 것은 확실히 억지다. 그러나 이 책은 읽어도 된다. 내면과 문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평론이기 이전에 고급 에세이이기 때문이다.

1부와 3부의 계간평과 월평 특히 좋아
먼저 문장. “이제 조금 이혜경 소설에 눈이 익어가는지, 어지간히 고단하고 아픈 이야기가 나와도 타박타박 따라가며 기다려보고 싶다. 어스름녘의 착잡함을 견뎌보자 싶다. 그냥 안타까움 속에 지칫거리며 고갯마루에 서 있어보자 싶은 것이다. 뭐, 크게 환해질 일이 있겠는가. 숨을 고르며. 욕하지 않으며. 말하지 않으며.” 예컨대 평론가 정홍수는 이렇게 글을 시작한다. 돌을 씹어 먹는 듯한 맛의 도입부 때문에 지레 읽기를 포기하게 되는 수많은 평론과는 뭔가 다른 출발 아닌가. 어떤 작가 혹은 어떤 주제를 다루건, 글의 도입부가 이러하다면 한번 따라가볼 만한 것이다.

다음으로 내면. 이인화가 독자를 계몽하려 하는 비장한 이야기꾼이 된 게 못내 불편했던 이 평론가는 본래 소설은 계몽하지 않음으로써 계몽한다고, 소설은 본래 그런 비장이나 독선과 싸우는 것이라고 반박하면서 이런 문장을 적는다. “나는 아직도 이야기꾼으로 스스로를 격하시키지 못한 소설가들, 그들의 기억의 ‘외딴방’ 그 ‘외진 골목’에서 힘겹게 끄집어내 들려주는 그 내면의 고백들, 거기에서 출발한 ‘한국의 순수문학’을 사랑하니까.” 평론가의 이런 소박하지만 결연한 ‘내면의 고백’을 다른 평론집에서 만나기 쉽지 않고, 그 내면이 책 전체에 은은하면서도 완강하게 배어 있는 평론집을 만나기 또한 쉽지 않다. 

이런 문장과 내면이 떠받치고 있어서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수 있는 아주 드문 평론집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1부와 3부에 수록돼 있는 계간평과 월평이 좋다. 2004년과 2006년에 발표된 소설 중에서 뛰어난 것을 선별해 어떤 내용인지를 소개하고 왜 좋았는지를 다감하게 털어놓는다. 특히 3부의 앞부분에 수록돼 있는 서간체 평론 예닐곱 편은 이 책의 백미다. 절친했던 문우 고 김소진에게 바쳐진 글 두 편에서는 이 평론집의 심장이 뛰고 있으니 그것들은 각별히 아껴 읽어야 한다.



평론가 정홍수는 1963년에 태어나 1996년에 등단했다. 정확한 안목을 갖고 있어 평가에 헛다리를 짚는 일이 없고 냉철한 평형감각을 갖고 있어 제 흥에 취한 경박한 호들갑도 없다. 글쎄, 평론가라면 가끔은 무모한 베팅도 하고 세상의 취향과 독야청청 싸우기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대신 그는 다른 일을 해왔다. 발터 벤야민은 장터에서 ‘구라’를 푸는 과거의 이야기꾼과 골방에서 내면을 파먹는 근대의 소설가를 대조하면서, 소설은 고독한 개인의 작업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이야기꾼과 소설가’). 이 평론집의 제목 ‘소설의 고독’이 거기에서 왔다. 그 고독과 소통하는 일이 지난 12년 동안 그의 일이었다. 사려 깊고 겸허하고 다정다감한 이 ‘한국의 순수문학’ 애호가 덕분에 많은 소설가가 잠시나마 고독을 잊었을 것이다.(신형철_문학평론가)

08. 0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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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8-07-18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술 읽히는'-이거 굉장히 중요하죠. 제겐.- 평론집이라...관심 증폭합니다.
일단 오프라인에서 실물을 확인해보고 싶어지네요.
평형감각은 좋은데 평론가는 무엇보다
'자기색'으로 말하는 작업이 필요한 위치 아닙니까.
김현 이전 김현 없고 김현 이후 김현없다는 말처럼요.

로쟈 2008-07-18 13:51   좋아요 0 | URL
김현식 문체는 아니지만 잘 읽히는 건 맞습니다(현학적이거나 딱딱하지도 않고요). 게다가 소설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평론가의 한 사람이라는군요. 출판기념회도 열어줄 만큼...

수유 2008-07-18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간만에 행복한 평론읽기에 동참할까요..주말엔 서점을 함 나가봐야겠습니다.
근데 요즘 생활의 변화가 있으신가요?
방학이 되면 함 얼굴 봅시당

로쟈 2008-07-19 10:56   좋아요 0 | URL
네, 8월쯤에.^^;

xnekans 2009-08-11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을 씹어 먹는 듯한 맛의 도입부" 하하,
한참을 웃었습니다, 하하!!
그런 비평이 아니라니, 정말로 궁금해 지네요
안 그런 비평집은 읽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서;;
요즘, 갑자기 한국문학 소식도 궁금한데,(외국에 사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지요, 하하)
서점에 가서 선이라도 봐야 할 거 같네요..하하!!

 

흥미롭게도 한국일보의 '오늘의 책(7월 16일)'에서 <지젝이 만난 레닌>이 다루어졌기에 옮겨놓는다. 이유인즉 1918년 오늘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니콜라이와 알렉산드라'(http://blog.aladin.co.kr/mramor/2187941)를 올려놓으면서도 날짜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었는데, 레닌이 1900년 스위스로 망명한 날과 겹친다고 하니까 이 또한 역사의 우연이라 할 만하다.    

한국일보(08. 07. 16) 지젝이 만난 레닌

7월 16일은 러시아혁명사에서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날이다. 1918년 오늘 러시아의 마지막 차르였던 니콜라이 2세가 살해됐다. 그리고 1900년 오늘, 3년 동안 시베리아에 유형됐던 레닌이 스위스로 망명했다. 18년 사이 세계는 바뀌어버렸던 것이다.

1917년 2월혁명으로 퇴위한 니콜라이 2세는 당시 우랄산맥의 광산도시 에카테린부르크에 감금돼 있었다. 김학준의 <러시아혁명사>에 차르와 아내 알렉산드라, 아들 1명과 막내딸 아나스타샤 등 딸 4명의 살해 장면이 나온다.

“유로프스키는 10명의 무장한 사람들과 함께 나타났다. 그는… 이제 우리는 당신들을 사살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선언했다. 니콜라이 2세가 본능적으로 벌떡 일어나 ‘뭐라고’ 하면서 아내와 아들을 막아보려 했다. 그 순간 체카 대원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총을 쏘았다. 그는 즉시 죽었다… 그냥 기절해 쓰러졌던 아나스타샤가 의식을 회복하곤 소리를 질렀다. 다시 모든 체카 대원들의 난사가 뒤따랐다.” 광산 등에 흩어져 암매장됐던 차르 일가의 유골들이 확인된 건 80여년이 지난 1996년이 되어서다.

한 세기나 전, 러시아 마지막 황제의 죽음과 실패한 레닌의 혁명 이야기를 지금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현재 최고의 스타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인 슬라보예 지젝(59)이 <지젝이 만난 레닌>(2002)에서 던지는 질문도 바로 그것이다. 그는 레닌이 1917년에 쓴 핵심적 문건들을 이 책의 전반부에 모아놓은 후, 책의 후반부에서 21세기의 현실을 레닌의 텍스트들에 대입해 해석한다. “레닌을 재현실화한다는 생각에 대한 공중의 첫번째 반응은 물론 빈정거리는 폭소다”라고 지젝은 책의 첫머리에 쓴다.

그러나 그는 다가올 자본주의의 위기 상황이 1917년 레닌 앞에 놓였던 상황의 되풀이일지 모른다고 말한다. “우리는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기까지 함께 버린 것은 아닌가?” 레닌의 텍스트, 펜이 곧 무기였던 그의 글에 들어있는 ‘유토피아의 불꽃’은 여전히 우리 시대의 문제로 되살려내야 한다는 이야기다.(하종오기자)

08. 07. 16.

P.S. 아예 레닌을 주제로 한 학술심포도 얼마전에 개최된 바 있다. 이 관련기사도 스크랩해 놓는다(더 자세한 것은 http://www.greenbee.co.kr/blog/29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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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08. 07. 10) 왜 지금 레닌을 소환하는가?

'촛불 시대에 다시 생각하는 레닌과 러시아혁명.’ 8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그린비 출판사가 주최한 학술심포지엄의 주제다. 왜 지금 갑자기 레닌인가?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는 발제문 ‘레닌의 정치학에서 외부성의 문제’에서 “지금 레닌을 불러낸다는 것은 뼈아픈 실패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거기서 혁명 혹은 혁명적 사유에 대해 다시 사유하는 것”이고 “그 실패를 통해 새로운 출구를 찾는 것”이다. 이 교수는 모든 혁명은 자신의 시대와 대결하고, 주어진 세계를 전복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반시대적 사유’일 수밖에 없다며, 따라서 현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혁명 자체가 낡은 것으로 간주되는 지금이야말로 레닌과 혁명에 대해 사유하기에 좋은 시대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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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오슬로대 교수는 ‘민주주의자로서의 레닌’에 주목했다. 박 교수는 그 이유로 자본주의가 새로운 주기적 위기를 맞고 있는 지금의 대의 민주주의 위기상황을 들면서, ‘촛불집회 정국’이 그것을 여실히 보여줬다고 했다. 그는 촛불을 든 민초들의 ‘직접적 참여 민주주의’가 건강권과 주권 문제 등에서 국회를 대신해 정국을 일변시켰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는 촛불 민주주의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나 대운하 계획 등을 반대하고 저지할 수는 있지만 “신용을 잃어가는 대의 민주주의 기관(국회 등)들을 대신하는 ‘대안적 집권기관’”이나 “구체적인 민중적 주권행사 기관”으로 발전하진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가 내놓은 대안은 노동자 또는 주민 평의회, 곧 소비에트다. 물론 ‘대안적 권력 창출’을 이야기할 단계가 아니지만, 그는 “비정규직과 정규직, 대기업과 소기업 소속 등을 초월하는 ‘노동자 평의회’ 건설과 지역정치에의 활발한 참여는 한국 민주주의의 심화에 상당한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지금의 헌정질서 안에서 그것은 ‘시민단체’의 외형을 띠면서 권력화가 아니라 계급적 연대 수준에 머물겠지만, 그럼에도 “고용형태, 성별, 연령, 소속 기업 규모 등의 구분을 뛰어넘어 대자적인 계급으로서의 새로운 성숙을 의미할 수 있을 것”이라 전망한다. 그는 그러면서 볼셰비키당의 권력독점과 혁명의 왜곡으로 귀결된 정당 정치인 레닌이 아니라 <국가와 혁명>을 쓸 당시의 레닌을 살려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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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의 제헌권력, 그 열림과 닫힘’이란 글을 발제한 조정환 다중네트워크센터 대표도 <국가와 혁명>에 주목했다. 조 대표는 한때 한국 사회를 풍미한 사상가 레닌이 급속히 잊혀진 주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한국에 도입된 레닌이 <두 가지 전술>, <무엇을 할 것인가>의 레닌, 말하자면 1905년 부르주아혁명 단계의 레닌이었지 <국가와 혁명>, <4월 테제>의 레닌, 곧 1917년 프롤레타리아 혁명 단계의 레닌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1987년 체제’와 함께 제헌의회파의 주장은 힘을 잃었으며, 신자유주의적 자유화와 함께 확장된 형식적 민주화는 비합법 전위정당 노선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가 레닌의 용도 폐기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국가와 혁명> 단계의 레닌이 답인가? 조 대표는 권력, 무장력, 폭력, 민주집중제, 소비에트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제헌권력 등 레닌의 개념들은 근대적 부르주아 사회체제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며, 낡은 의회조직이나 국가는 “삶 속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한 다중들 자신의 직접적 토론과 행동적 표현을 통한 직접적 제헌적 결정과정”으로 대체하고, 이를 제도화할 절대 민주기관을 창출해야 한다고 제안한다.(한승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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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17 1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7-17 1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7-17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심포지움에 나온 사람들의 주장은 초대교회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기독교인들과 비슷하군요.

로쟈 2008-07-18 13:52   좋아요 0 | URL
^^
 

주말 북리뷰 기사에서 눈에 띈 것 중 하나는 미국 '뉴요커'의 필진이자 영화평론가라는 데이비드 덴비의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 완역본에 대한 평이었다(책도 저자도 꽤 유명하다고). 나는 표지가 그닥 맘에 들지 않아서(조잡하다) 서점에서 자세히 들춰보지 않았는데, 예전에 나온 <호메로스와 테레비>(한국경제신문사, 1998)와 같은 책을 옮긴 것이라고 한다(표지만 기억이 나는데, 알게 모르게 입소문을 탔던 책이고 출판평론가 최성일씨는 '올해의 책'으로 꼽기도 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10년만에 2판의 완역본이 나왔다. 리뷰기사와 함께 10년전 리뷰도 같이 옮겨놓는다.    

한겨레(08. 07. 12) '완역’을 부루퉁하게 여기는 이유

십년은 강산이 변하는 세월이다. 짧지 않음을 새삼 실감한다. 9년 전, 어느 매체에다 이 책의 첫 번역인 ‘미디어시대의 고전읽기’ <호메로스와 테레비>(1998)를 거론하며 이런 말을 했다. “이 책은 500쪽이 넘는다. 그나마 번역자가 일부 편집을 한 게 그렇다.” 앗! ‘초역’에는 이것의 근거였을 ‘옮긴이의 말’ 같은 게 따로 없다. 본문에 있나, 아니면 나의 착각인가.

‘초역’을 통해 이미 이뤄졌을 수도 있지만, 이런 책도 ‘잘리지’ 않고 우리말로 옮겨졌으면 한 내 바람이 실현되었다. 이와 별개로 ‘초역’에 짐을 지우는 ‘완역’의 성립 근거는 온당치 못하다. “(이 번역의 질과 수준이 신뢰할 만한 수준에 한참 못 미친다는 판단에서 새로운 번역이 시도되었다고 하겠다).”(역자 서문) 뚜렷한 물증 없이 이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나는 ‘완역’에 의미를 부여했다.

‘완역’ 첫쨋권 초반에서 보이는 “데이비드/데이빗”과 “유대/유태”의 뒤섞인 표기는 꽤 큰 흠이다. 또한 원문을 그대로 싣는 ‘참고문헌 목록’은 전문적인 비평서 중심이라 수록하지 않았고, 학구파는 원서를 참고하라는 ‘일러두기’는 지나친 배려다. 월권으로 볼 수도 있다. ‘완역’에도 없는 게 있는 셈이다. 번역자와 편집자가 번역서의 ‘문지기’라면, 그들의 재량권은 어느 선까지 허용되는지 한번 생각해볼 문제다.


‘완역’ 읽기는 달뜨지 않았다. (달뜬 느낌을 눅인 ‘초역’ 독후감은 <인물과 사상> 1999년 3월호 ‘최성일의 출판동네 이야기’ 참조) 나는 데이비드 덴비가 지칭하는 “우리”와 “누구나”에 들지 않아서다. 그가 말하는 “우리”는 “서양”이다. ‘초역’에선 “서방”이라고 옮겼다. 우리가 동구권에 대응하는 서방세계의 잠정적인 일원이긴 했다. 그러나 우린 서양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금방 분명히 이해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게 플라톤의 <국가>는 여전히 흐릿하기만 하다. 나는 번역서를 주로 읽지만 번역시집은 거의 안 읽는다. 시구가 퍼뜩 와 닿지 않는 탓이다. 테일러 교수가 인용한 “모든 진실을 말하되 비스듬히 말하라”라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구에서 “비스듬히 말하라”의 뜻을 도통 모르겠다. 감을 못 잡겠다.

사실 나는 고전에 약간의 가중치만 부여한다. 미국 컬럼비아대 교양필수 강좌의 독서목록이 지닌 권위와 상징성에도 회의적이다. “옛 작품을 현재 상황을 그려내는 데 미흡했다는 식으로 평가한다면 고전은 살 수 없다”는 시각이 옳다면, 우리가 아무리 미국식 삶의 방식을 추종한다 해도 우리 나름으로 살아온 장구한 세월에 비하면 그것은 일천하기에, 우리는 서양 고전 없이 살 수 있다는 관점 역시 맞다.

내가 ‘완역’을 부루퉁하게 여기는 결정적 이유는 ‘완역’에 추가된 ‘제2판 머리말’(2005)에 있다. 데이비드 덴비는 9·11 이후 미국이 직면한 상황에 대해 당혹해하면서도 건전한 애국심을 견지하려 든다. 미국이 세계 평화를 크게 해치는 ‘악의 제국’이라는 세계인의 여론을 곱씹기는커녕 이에 억울한 감정이 있는 듯싶다. 그에겐 ‘신이여, 미국을 굽어 살피소서’가 더 다급해 보인다.(최성일 출판칼럼니스트)

물과사상(1999년 3월호)'올해의 책'과 에머슨의 세 가지 독서 법칙

내가 뽑은 올해의 책    
<출판저널>에서 '올해의 책' 추천을 내게 청했다면, 나는 국내 저자의 책과 외국 필자의 책을 하나씩 꼽았을 것이다. 조병준씨의 <제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와 데이비드 덴비의 <호메로스와 테레비>를 말이다. 이 책들은 앞서 살펴본 7개의 지면에서 각기 1번씩 소개된 바 있다. 조씨의 책은 언론노련의 30권 안에 들었고, 덴비의 책은 <출판저널>의 68권에   속했다. '그린비'와 '박가서장' 두 곳의 출판사를 통해 나온 조씨의 책은 '분산 출판'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깊지만, 책의 성격이 이 글의 주제와 딱 맞아떨어지는 <호메로스와 테레비>를 자세히 좀더 살펴보기로 하겠다.



<호메로스와 테레비>(한국경제신문사)는 아직 책의 품질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은 출간 직후 언론의 이렇다 할 조명을 받지 못했다. 신문사 출판부에서 펴낸 책이기 때문이다. 국내 출판 저널리즘에는 묘한 관행이 하나 있는데 다른 언론사 기자가 쓴 책을 홀대하는 것이다. 홀대하는 방식은 아예 다루지 않거나 '두 줄'로 처리하는 것이다. 신문사 출판부가 만든 책에 대한 대접도 이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이러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출판저널> '올해의책'에 포함되는 영예를 누렸다. 이중한 출판평론가는 추천의 변을 이렇게 밝혔다. "마흔 여덟의 언론인이 하버드대학에 다시 복학해 들은 교양교육을 듣고 소감을 적었다. 생동감 넘치는 묘사로 인문학의 역사와 문명론을 살핀다."

잡지에 실린 그대로 옮겼는데 여기에는 큰 오자(?)가 있다. 처음에는 사소한 실수로 여겼지만 책을 확인해 보니 그렇지가 않다. 덴비의 모교는 하버드가 아니라 뉴욕에 있는 콜럼비아대학이다. 배경의 측면으로는 콜롬비아나 하버드나 그게 그거다. 하지만 이 책의 주제가 되는 교양강좌는 콜럼비아대학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콜럼비아대학에서 시작돼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가 지금은 콜럼비아와 시카고대학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어서다.

<호메로스와 테레비>는 대학 강좌 수강기이다. 덴비는 졸업 30년만에 두 개의 교양강좌를 재수강한다. 유럽의 표준적인 문학선집을 강의하는 '인문학'이 그 하나고, 철학 및 사회 이론 분야의 걸작선집을 다루는 '문명론'이 다른 하나다. 이 둘은 나뉘어 있지만 '서양문명개론'에 해당하는 하나의 강좌로 봐도 무방하다. 실제로 책에는 두 강좌가 뒤섞여 있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다. 강좌의 중심에는 서양의 고전이 자리한다. 이 책에 언급된 고전들만 읽으면 에머슨의 두 번째 독서 법칙은 쉽사리 지켜진다. "유명한 책만 읽는다."
    
백인·남성 중심의 서양사상사
호메로스와 플라톤에서 조셉 콘라드에 이르는 고전 목록은 백인·남성 편향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흑인 여학생의 비판에 직면한 대학 당국자의 해명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우리 교수들은 서방의 고전들을 가르치기에도 벅찹니다. 그 분들에게 동양 문헌에까지 정통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지나쳐요." 강좌의 교수진은 관련 학과에서 차출된 여러 명으로 구성된다.

이 중 한 명을 국내 TV뉴스를 통해 볼 기회가 있었다. 제임스 샤피로 교수는 지난해 9월 23일 문화방송의 <9시 뉴스>에 등장했다. 이우호 특파원의 방문을 받고, 클린턴의 지퍼게이트를 보는 미국민의 상반된 견해에 대해 코멘트하는 샤피로 교수는 책에 묘사된 그대로였다. "금발의 젊은 영어 교수인 그는 큰 키에 스포츠팀 코치 같은 모습이었다."

나 역시 흑인 여학생의 기세등등한 목소리에 잠시 흔들리지 않은 건 아니지만, 콘라드에 대한 덴비의 평가를 읽고 오히려 에드워드 사이드에 대한 균형된 시각을 갖게 되었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과 <문화와 제국주의>에는 제인 오스틴과 콘라드를 제국주의자로 몰아붙이는 대목이 있다. 덴비는 그것을 가혹한 처사라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치누아) 아체베와 사이드의 고뇌에 찬 거부는 콘라드의 확고한 위치, 서방 문학의 핵심 커리큘럼에 대한 가능한 결론으로서 그의 위치를 확인시켜 줄 뿐이다."라는 진술을 통해 강한 설득력을 갖는다.

이런 류의 책에서 항시 느끼는 것이지만, 서양 사상사에서 마르크스가 차지하는 지위는 대단하다. 그리고 이 책은 마르크스에 앞서 다양한 사상을 탐구하라던 1980년대 '웃어른들'의 가르침이 갖는 일면적 진실을 깨우쳐 준다. "마르크스만 읽으면 된다"는 이야기는 에른스트 블로흐 같은 대가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지, 우리 같은 중생이 마르크스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양 사상사에 대한 기초지식의 습득이 필수적이다.

이 책은 5백 쪽이 훨씬 넘는다. 그나마 번역자가 일부 편집을 한 게 그렇다. 이런 책도 '커트' 없이 우리말로 옮겨지고, 많은 사람에게 읽히는 세월이 왔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바램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다시 한 번 아주 천천히 이 책을 음미해 가며 읽고 싶다. 그것은 한편으로 에머슨의 세 번째 독서 법칙을 준수하는 일이다. "좋아하는 책만 읽는다."

08. 07. 14.

P.S. 최성일씨의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08)도 사실 지난주에 선을 보인 책이다. 같은 타이틀의 첫권이 2002년에 나온 이후 네번째 책이다. 분량이 넉넉하지는 않지만 주로 국내에 소개된 '사상가들'의 저작과 사상을 간명하게 정리해주는 장점이 있다. 출판칼럼니스트답게 서지사항을 꼼꼼하게 챙겨주고 있어서 관심있는 독자들에겐 유익하다. 참고문헌에 대한 평도 포함됐다면 더 좋았을 듯하다(나는 1, 2권만 오래전에 훑어본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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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08-07-15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좋은 책들을 알려 주시네요^^ 전 백수로 또 돌아왔습니다. 비평고원은 이제 잘 안 오시나봐요. 저도 알라딘에 와서 로쟈님의 추천 책들을 보고 갑니다.



로쟈 2008-07-15 11:12   좋아요 0 | URL
비평고원도 가끔 들르는데 예전만큼의 활력은 없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07-15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룬 책들이 지나치게 고대 전근대 쪽에 치우쳐 있더군요.저 같으면 19세기 이후 것을 더 많이 취급했을 거예요.

로쟈 2008-07-15 23:33   좋아요 0 | URL
강의 자체가 '고전 읽기'여서 그런 듯합니다. 말 그대로 '클래식'...
 

방에 창문이 없다보니 시계를 보지 않으면 시간을 알 수 없다. 꼭두새벽부터 햇빛이 들어 더 잘 수도 없었던 모스크바의 여름 기숙사와는 사정이 정반대다. 일어나서 선풍기를 틀고 아침 끼니를 때우고 정신도 차릴 겸 일간지들을 잠시 훑어보다가 그나마 '나쁘지 않은' 소식으로 출판동향 기사를 옮겨놓는다. 하반기에 한국문학이 쏟아져나올 거라는. 일본소설 바람이 의외로 일찍 수그러들면서 한국소설의 판매량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영화가 죽쓰고 있는 것과든 달리 한국소설은 시장 점유율 1위다. 중진 작가들의 기대작들이 대기중이라고 하니 기대해봄 직하다.

한국일보(08. 07. 14) 황석영·김훈·신경숙 기대작 밀려온다

이달초 교보문고 통계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소설 시장에서 한국소설이 판매량 상위 100위권에 34종을 올리고 판매권수 점유율 34.5%를 기록하면서 영미소설(23종ㆍ24.3%)과 일본소설(27종ㆍ17.1%)의 아성을 무너뜨렸다. 한국문학의 선전은 하반기에도 이어질까. 한국문학 주요 출판사 중 8곳(문학과지성사, 문학동네, 민음사, 실천문학사, 열림원, 이룸, 창비, 현대문학)의 작품 출간 계획을 토대로 하반기 한국문학 동향을 정리한다.

■ 소설
인기 중진 작가들의 장편 출간이 이어진다. 작년 <바리데기> <남한산성> <리진>으로 각각 장편 붐을 선도했던 황석영(65) 김훈(60) 신경숙(45)씨가 나란히 차기 장편을 낸다. 황씨는 이달말까지를 예정으로 네이버 블로그에 연재 중인 자전소설 <개밥바라기별>을 내달 문학동네에서 묶어 낸다. 김씨 역시 문학동네를 통해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전작 장편을 발표할 계획이다. “기자를 비롯한 주인공급 인물이 여럿 등장하는 3인칭 소설”이란 것이 그의 귀띔이다. 신씨는 계간 <창작과비평>에 연재 중인 <엄마를 부탁해>를 연말쯤 창비에서 출간한다.

젊은 작가 장편 중에선 먼저 김선우(38) 시인의 첫 소설이 눈에 띈다. 이달말 실천문학사에서 나올 김씨의 장편은 월북 무용가 최승희를 모델로 한 역사소설이다. 한국 팩션의 기수인 김탁환(40)씨는 이달 20일께 통일신라 고승 혜초의 천축국(인도) 기행을 모티프 삼은 <혜초>를 민음사에서 출간한다.

지난해 장편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으로 좋은 반응을 얻은 김연수(38)씨는 만주 독립군을 소재로 2004년 잡지 연재했던 장편 <밤은 노래한다>를 문학과지성사를 통해 내놓는다. <미실> <논개>의 작가 김별아(39)씨는 내달초 백범 김구의 생애를 그린 장편을 이룸에서 발표한다. 이평재(49) 한동림(40)씨의 첫 장편, 방현희(44) 김숨(34) 이홍(30)씨의 두 번째 장편도 주목된다. 하반기엔 현길언(68) 복거일(62)씨 등 60대부터 김유진(27) 염승숙(26)씨 등 2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에서 20종의 소설집이 쏟아진다.

중견작가 중에선 정도상(48)씨가 이달 탈북ㆍ이주노동 소재의 연작소설집을 내는 것을 시작으로, 박상우(50) 이현수(49) 성석제(48) 서하진(48) 한창훈(45) 함정임(44)씨 등이 작품집을 낸다. 강영숙(42) 민경현(42) 박현욱(41) 최대환(38) 김경욱(37) 김윤영(37) 오현종(35) 조헌용(35)씨 등 젊은 작가들도 그간 써온 중단편을 묶는다.

특별한 작품집도 예정돼 있다. 민음사는 이달 소설가 이문열씨 회갑 기념으로 구효서 박상우 심상대 박석근씨 등 후배 작가들의 단편을 묶은 헌정소설집을 출간한다. 현대문학에선 이기호 해이수씨 등 월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젊은 작가 10명이 ‘피크(peak)’, 즉 ‘인생 절정의 순간’을 테마로 쓴 단편을 묶어 8월 중 책을 낸다.

■ 시
‘미래파’로 불리며 한국 모더니즘의 새 영역을 열고 있는 장석원(39) 진은영(38) 이승원(36) 김근(35) 김경주(32) 김민정(32)씨가 나란히 두 번째 시집을 낸다. 이들에 앞서 탐미주의의 낯선 미학을 선보였던 강정(37) 시인은 세 번째 시집을 선보인다. 한국 서정시의 적자(適子)라는 평을 듣는 문태준(38)씨는 <가재미>(2006) 이후 2년만에 네 번째 시집을 묶는다. 손꼽히는 중견시인 송찬호(49) 김경미(49) 박주택(49) 정끝별(44)씨가 네 번째 혹은 다섯 번째 시집을 낸다.

원로ㆍ중진들의 시집 소식도 있다. 고은(75) 시인은 9월4~12일 서울 중구 한국국제교류재단 문화센터에서 등단 50주년 기념 서화전을 여는 것과 맞춰 신작시집을 출간한다. 올해 상반기로 예정됐던 <만인보> 완간은 시인의 사정 때문에 내년으로 미뤄졌다. 정현종(69) 시인은 5년 만에 아홉 번째 시집을 내고, 정희성(63) 시인도 7년 만에 새 시집을 낸다.(이훈성기자)

08. 0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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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08-07-15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김훈의 소설이 되게 읽고 싶네요^^ 한국 문학가 중 유일하게 읽는 작가라서 이 편집증적인 골라 읽기는 언제쯤 고치게 될지...

로쟈 2008-07-15 11:09   좋아요 0 | URL
저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릴케 현상 2008-07-15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선우씨가 당분간 청탁에 의한 시를 쓰지 않을 거라고 했던 말뜻을 이제 알겠네요^^ 나 소설 쓰느라 바쁘거등요

로쟈 2008-07-15 11:10   좋아요 0 | URL
끼와도 무관하지 않겠지만, 시로는 '전업'이 안된다는 사정도 있을 듯하네요...
 

며칠간 준-이사를 하느라고 바빴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한동안 '원룸텔' 생활도 하게 됐고. 한 평 조금 넘을 듯싶은 공간은 모스크바 체류시절의 기숙사 방보다는 약간 작지만 시설은 '호텔급'이다. 다만 창문이 없어 '전망'도 없다는 게 약간 흠인데(대신에 더 조용하다고 한다. 그럴 거 같지 않지만), '고급 감옥'으로 생각하면 아쉬울 것도 없다. 사실 도서관 시설이 잘 갖춰진 감옥은 내가 꿈꾸던 공간이기도 했다(이 '감옥'은 이름도 '노블스 레지던스'다!). 엊저녁 입방해서 하루를 묵었는데 무선 인터넷의 강도가 좀 약한 탓에 바로 글을 올리거나 하진 못했다(자주 끊기기까지 한다). 오늘은 시범삼아 칼럼기사 하나를 옮겨놓는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64#). 금강산 관광객의 피살 사건도 어제 있었지만 '바깥' 세상은 여전히 어수선해 보인다. '이거 뭥미?'의 세상이다. 어제도 '촛불'은 계속되었으므로 칼럼에서 말하는 '이중 권력', 혹은 '이중 국가' 상황은 여전히 유효하겠다. 우리는 과연 어떤 국가를 원하는가? 

시사인(08. 06. 21) 우리는 어떤 국가를 원하는가

2008년 6월 중순 현재, 많은 사람이 대의민주제의 핵심인 정당정치가 실종된 상황을 걱정한다. 어떤 사람은 지금 대한민국이 ‘이중 권력(dual power)’ 상태라고 말한다. 정부 권력과 시민 권력이 날카롭게 대치한다는 거다.

내가 알기로 이중 권력이라는 말의 용례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일본 쇼군-천왕 체제의 기묘한 권력 분점을 묘사하는 경우다. 다른 하나는 약 90년 전에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 최초로 이 말을 사용했다. 우리의 맥락은 전자와 무관하므로 후자라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지금이 바로 혁명 전야? 에이, 설마! 오늘날 OECD 가입국에서 ‘혁명’이라는 단어는 광고 문구 또는 비유적 과장일 뿐이다. 체 게바라의 여전한 인기는 혁명의 절박한 요구 때문이 아니라 티셔츠로 소비될 수 있어서이다.

‘민족’‘통일’은 강한 국가의 수단으로서만 존재 의미 가져
한편 뉴욕 타임스는 이번 사태를 두고 “한국 민족주의 정서의 표출이다”라고 주장한다. 일부 운동권 역시 그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물론 대한민국은 동북아시아의 마지막 분단국이고, 오랜 세월 외세에 시달려온 나라다. 그러나 북조선의 쇠락과 더불어 단일민족국가에 대한 한국인의 판타지는 상당 부분 사라졌다. 월드컵, 한류, 황우석 사태, <디워> 논란 따위에서 공통으로 드러난 것은 ‘강한 국가’에 대한 열망이지 과거와 같은 민족주의가 아니었다. 한국인에게 민족 혹은 통일은 여전히 중요한 가치이지만 더 이상 그 자체가 목적이 되기 어려워졌다. 이제 그것은 어디까지나 강한 국가를 위한 수단으로서만 존재 가치를 지닌다.

그러므로 민족주의니 민족 정서를 언급하는 것은 최근 10년간 대한민국에 일어난 급격한 변화를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그 변화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이중 국가(dual state)’다. 이것은 위기에 처한 중산층과 ‘막장’에 몰린 빈곤층이 90%를 이루고, 금융위기 이후 압도적 부를 축적한 10%로 구성된 사회다. 그리고 매일 1000원짜리 김밥을 먹는 사람과 1만5000원 하는 브런치를 먹는 사람이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그런 사회다. 이중 권력이 아니라 실은, 이중 국가가 문제다.

단순히 ‘10대90의 사회’를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다. 세계화라는 미명 아래 벌어진 급격한 사회·경제적 충격이, 국가의 역할에 대한 한국 사회의 합의를 걷잡을 수 없이 붕괴시켰다는 점이 중요하다. 사적 욕망만이 소용돌이치던 혼란의 와중에서 사회가 지켜내야 할 공공성은 무참히 찢겨 나갔다. 그 빈자리에 자리 잡은 게 바로 강한 국가, 일류 국가에 대한 달뜬 기대였다. ‘국가의 후퇴’가 ‘강한 국가의 열망’으로 나타나는 것은 초국적 자본이 판치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동북아 중심국가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정부는 이런 국민의 열망을 잘 감지했지만, 시장주의와 국가주의 사이에서 분열병적으로 오락가락하다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해괴한 농담을 만들어냈고, 급기야 한·미 FTA까지 밀어붙였다. 5년 내내 혼란스러워하던 중산층은 정권이 바뀌고서야 자기가 사는 나라의 실체를 깨달은 듯 이렇게 외친다. “이게 뭥미?(‘이게 뭐야’라는 뜻의 인터넷 은어)”

거리집회에서 사람들이 외치는 구호는 쇠고기 재협상에 국한되지 않는다. 수도 민영화, 의료보험 민영화 반대 등 수십 가지에 이른다. 거칠게 묶으면 모두 국가가 해야 할 일을 포기하지 말고 제대로 하라는 얘기다. 가히 ‘국가의 귀환’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여기엔 중요한 질문이 빠졌다. 대체 우리는 어떤 국가를 원하는가?(박권일/ <88만원 세대> 저자) 

08. 07. 13.

P.S. '국가의 후퇴'와 관련하여 참조할 만한 책은 수잔 스트레인지의 <국가의 퇴각>(푸른길, 2001)이다. 저자의 <매드 머니>(푸른길, 2000), <국가와 시장>(푸른길, 2005) 등이 모두 국가권력과 시장권력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교재형 책들이라 재미있지는 않다). 최근에 나온 책으로는 '세계 경제발전의 정치적인 논리'를 다룬 <자본과 공모>(휴먼&북스, 2008)가 눈길을 끈다. "개발도상국이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한 지름길을 제시하는 책. 저자는 성장을 강화하거나 혹은 반대로 국가의 성장 전망을 송두리째 날려버리는 정치적 동기들을 탐구한다. 리스크와 불확실성 사이의 경계선을 살피고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가르는 경제 성장 추진 동력을 분석한다."고 소개돼 있는데, 이 경우 성장을 위해서 국가와 자본의 긴밀한 연루와 공모는 권장되기까지 한다.

국가의 귀환에 대한 논리는 곧 '정치적인 것의 귀환'과 맞닿은 것이 아닐까 싶다. 샹탈 무페의 <정치적인 것의 귀환>(후마니타스, 2007) 등이 떠오르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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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13 17: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7-13 1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주니다 2008-07-13 20:02   좋아요 0 | URL
책들을 이사보내시더니 그들과 고통을 함께 하시는건가요?^^

로쟈 2008-07-13 20:39   좋아요 0 | URL
아니요, 책들도 호강하고 있고 저도 나름 호사를 누리고 있습니다. '호텔급'이라니까요!^^

노이에자이트 2008-07-14 00:15   좋아요 0 | URL
무슨 일이든지 시작하긴 쉽지만 마무리가 어려워요.촛불집회도 마찬가지죠.촛불 이후에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는 촛불 시위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 사이에도 견해가 엇갈리는데 그 원인은 이 나라가 어떤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지 합의가 안 되었거나 생각을 안 했거나 했기 때문입니다.정말 어려운 문제죠.
그리고 저도 서재에 글을 쓰기 시작했답니다.

로쟈 2008-07-14 00:17   좋아요 0 | URL
바로 즐찾을 해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