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표적인 여성이론가 주디스 버틀러와 가야트리 스피박의 대담집이 출간됐다.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산책자, 2008). 중량급 학자들의 대담이어서 눈길을 끈다. 주제도 페미니즘이나 탈식민주의가 아니라 '민족-국가(네이션-스테이트)'다. 내주에 개최되는 세계철학대회에 버틀러가 못 오게 된 걸로 아는데, 이 대담집이라도 출간되어 다행스럽다.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8. 07. 26) 국가, 극복할 것인가 지켜낼 것인가

주디스 버틀러(사진 위)와 가야트리 스피박(아래)은 페미니즘 이론 영역에서 가장 왕성한 지적 생산력을 보여주는 여성 학자들이다. 버틀러가 동성애자로서 퀴어이론의 창시자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면, 스피박은 인도 출신으로서 탈식민주의 이론의 대모로 통한다. 두 사람의 학문활동을 관찰하면, 페미니즘 이론의 최전선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론적 지반에 다소 차이가 있는 이 두 사람은 페미니즘 담론 내부의 경합적 관계를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는 이 출중한 학자들의 대담을 엮은 책이다. 열다섯 살 아래인 후배 버틀러가 먼저 발제 성격의 문제제기를 한 뒤 두 사람이 토론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 사람의 대담은 2006년 5월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어바인 캠퍼스의 비교문학과에서 ‘전지구적 국가, 전지구적 상태’를 주제로 삼아 연 학회에서 이루어졌다. 제목에서 가늠할 수 있듯이, 이 대담의 내용은 페미니즘 이론 자체를 다룬 것이 아니라, ‘지구화 시대의 국가’라는 인류적 차원의 문제를 페미니스트적 감성으로 포착하고 있다. 특히 이 대담에서 논의의 초점이 되는 것은 흔히 국민국가 또는 민족국가로 번역되는 네이션 스테이트(nation-state) 문제다. 여기서 네이션(국민·민족)이 문제인 것은 어떤 기준에 따라 특정 집단을 네이션으로 포섭하고 그 기준 밖의 사람들을 배제하는 메커니즘이 이 네이션 체제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대담의 주제가 된 것은 그 시점에서 벌어진 사태와 관련이 있다. 2006년 4월 미국 전역에서 ‘미등록 이민자’ 문제가 정치적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른바 ‘불법 체류자’들뿐만 아니라 이들을 돕거나 고용하는 사람들까지 처벌하는 법안이 발의된 것이다. 이 법안을 규탄하는 시위가 곳곳에서 벌어졌고, 캘리포니아에서는 수십만명의 라틴계 이민자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존재 자체가 불법인 이민자들이 ‘자유롭게’ 모여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는 사실, 더 중요하게는 이들이 미국 국가를 스페인어로 번역해 불렀다는 사실에 버틀러는 주목한다. 그는 이런 상황을 ‘수행적 모순’이라는 개념으로 해석한다. 자신들에게 추방·배제·박탈을 안겨준 나라의 국가를 자신들의 언어로 노래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통상적인 좌파적 관념이라면, 이런 상황을 국가라는 포획장치에 자발적으로 말려들어간 것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버틀러는 그런 통념과는 다른 적극적 이해를 모색한다. 네이션 스테이트의 틀에 균열을 냄으로써 그 틀을 극복할 전망을 언뜻 보여준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수행적 모순이야말로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창조의 공간을 열어젖힙니다.” 버틀러는 한나 아렌트의 주장을 빌려, 자유는 자유의 요구, 자유의 수행 자체에서 이미 시작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래를 부름으로써 거리가 자유로운 집회 현장으로 재구성된다는 점입니다. 노래를 부르는 행동은 자유의 표현이자 권리를 향한 호소입니다.” 자신들을 추방하는 나라의 국가를 자신들의 말로 부름으로써 그 국가의 의미를 바꿔버리는 이 모순적 사태야말로 어떤 전망을 보여준다는 것이 버틀러의 주장이다. “그 노래는 언어적 다수집단에 대한 비판이고, 언어적 다수집단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비판이며, 민족을 단일한 개념으로 보는 것과는 다른 다문화주의의 한 방식입니다.”

이때 버틀러가 국가 그 자체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대담 내내 버틀러는 국가를 곧 ‘네이션 스테이트’로 인식한다. 국가란 근본적으로 국민/비국민을 나누는 배제와 분리를 존재 방식으로 삼고 있다는 발상이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그 국가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가 버틀러의 고민이자 질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피박은 조금 다른 목소리를 낸다. 스피박이 보기에 국가 그 자체를 부정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고삐 풀린 발호로부터 구성원을 보호하는 장치로 국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세계시민주의는 어찌 보면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어울리는 이념일 수 있다. “국가는 우리를 위해 유용하게 쓰일 수 있기에 우리가 지켜내야 하는 최소한의 추상적 구조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는 재분배의 도구가 돼야 합니다.” 자본주의적 착취·수탈·불평등을 막아내고 교정하는 기능을 국가가 수행할 수 있으며, 그런 기능을 수행하도록 국가를 재발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버틀러가 국가의 박탈·추방 성격에 초점을 맞춘다면, 스피박은 국가의 저항 거점 성격을 강조하는 셈이다. 대담 말미에 버틀러는 “역사를 만들어가는 동력으로서 자기창조”에 관해, 다시 말해 혁명에 관해 이야기한다. “만약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혁명을 일으키려 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고통받았기 때문이고, 비판의 언어를 만들어내고 서로 뭉쳤기 때문이며, 역사와 분석에 기반해 연대를 구축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스피박도 이 설명에 동의할 것이다.(고명섭기자)

08. 07. 26.

P.S. '민족국가', 혹은 '국민국가'란 주제와 관련하여 같이 읽어볼 만한 책은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공화국으로>(도서출판b, 2007)와 니시카와 나가오의 <국경을 넘는 방법>(일조각, 2006)이다. 두 사람 모두 '네이션' 문제에 골몰해온 일본의 비평가이고 학자이다. 안 그래도 <세계공화국으로>는 다시 손에 들었는데, 니시카와의 책도 조만간 대출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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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7-26 23:14   좋아요 0 | URL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을 무시하면 바보취급하지말라! 우리도 천황폐하의 신민이다. 이렇게 무시해도 되느냐!하고 한마디 하면 상대가 조용해졌다는데,스페인어로 미국국가를 부르는 것도 그와 비슷한 것 같네요.억압하는 사람들의 논리로 오히려 공격하는 지혜...다소 서글프기는 하지요.

로쟈 2008-07-27 16:30   좋아요 0 | URL
다소 서글프면서도 흥미로운 문제입니다.^^;
 

당장은 '놈놈놈'도 볼 형편이 안되지만 여건만 된다면 챙겨보고 싶은 영화 두 편은 두 대중가수에 관한 것이다. 존 레넌과 밥 딜런. 더 잊어먹기 전에 일단 기사라도 챙겨놓는다. 시사인에서 읽은 리뷰기사들이다(한겨레의 기사는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00962.html 참조).    

시사인(08. 07. 22) 누구나 아는, 아무도 몰랐던 존 레넌

누군가를 아주 잘 안다고 착각할 때가 있다. 그 ‘누군가’는 절친한 지인일 수도, 유명한 공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막상 ‘그는 어떤 사람인가’, 대답이라도 내놓을라치면 그만 말문이 막히고 더러는 숨까지 턱, 막혀버리기 일쑤다. 잘.안.다. 고작 세 음절로 확언하기에는 인간이라는 회로가 그리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흔해빠진 질문 앞에서 머뭇거리며 일평생 제 존재의 이유 하나 제대로 간파해내기도 버거운 인간이다. 그러니 하물며 남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으려면 몇 곱절은 더 치밀하고 광범위한 근거 자료가 필요할 터이다. 가령 존 레넌 같은 인간에 대해 아는 척할 때는 말이다.



<존 레논 컨피덴셜>은 우리가 아주 잘 안다고 착각해온 어느 팝 스타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그런데 영화가 담아낸 존 레넌은 누구나 잘 아는 존 레넌이 아니다. 아무도 모르는 존 레넌이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언젠가 어렴풋이 듣긴 했는데 그 누구도 제대로 알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그의 인생 후반전을 다룬다. 특히 비틀스 이후 존 레넌, 오노 요코를 만난 이후 존 레넌의 삶에 집중한다. 당대 최고 팝스타 존 레넌이 왜 별안간 혁명을 노래하게 되었는지, 달콤한 사랑 노래를 부르다 말고 왜 갑자기 민중에게 권력을 돌려주라며 시비걸게 되었는지 밝혀내는 것이다.

제작진은 “존 레넌 일생의 진심이 담긴 사회활동이 사람들에게 잊혀가는 게 안타까워서”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되었노라고 말한다.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던 이가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평화를 알리려 했던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들려주려고 감독 두 명이 달라붙어 찾아낸 당시 자료 중에는, 들끓는 베트남 전쟁 반대여론에 맞서 누구처럼 공안정국을 조성하려 애쓴 닉슨 대통령의 ‘특별 담화’도 있다. “정치 활동에 참여하는 연예인은 감당하기 힘든 희생을 치르게 될 것이다”라고 엄포를 놓는 그의 모습은 뇌 용량 2MB짜리 대통령을 우리만 가진 게 아니었구나, 안도(?)하게 만드는 뜻밖의 효과도 있다. 그때 존 레넌은 물러서지 않았다. 사회 불안을 선동하는 ‘배후 세력’으로, 워싱턴에 모인 순수한 촛불 시민(세상에! 그들도 촛불을 들었더라)을 반미·반정부 투쟁으로 이끈 ‘전문 시위꾼’으로 남아 끝까지 저항하는 모습이 이 97분짜리 다큐멘터리에 소상히 담겨 있다.



존 레넌과 닉슨 정부의 ‘역사적 대결’
<존 레논 컨피덴셜>의 원제는 <The U.S vs. John Lennon>, 즉 ‘미국 대 존 레넌’이다. 미국에 맞서, 부당한 권력에 맞서, 노래와 행동으로 저항한 아티스트와 그를 두려워하고 미행하며 도청하는 걸로 성이 안 차 결국 제거할 계획까지 세운 닉슨 정부. 이 역사적인 대결의 거대한 실체를 가볍게 종주해내는 이 늠름한 다큐멘터리는, 존 레넌이 대체 어떤 인간인지 자신 있게 말하기 위해 남보다 몇 곱절은 더 치밀하고 광범위한 근거 자료를 확보했다. 존 레넌의 연인 오노 요코의 회상에서 미국의 대표 진보 지식인 노엄 촘스키의 증언, 존 레넌을 미행한 당시 FBI 요원의 자백까지. 물경 수십명에 달하는 관련자 육성 인터뷰와 흥미진진한 미공개 동영상 자료가 뒷받침된 덕에, 단순한 인물 다큐의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어 그가 살다 간 한 시대를 통째로 증언하는 생생한 목격담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

세상에는 세 가지 영화가 있다. ‘감탄’하는 영화, ‘감동’받는 영화, 그리고 ‘감사’하게 만드는 영화. <존 레논 컨피덴셜>은 존 레넌의 멋진 인생에 ‘감탄’하고 그의 용감한 노래에 ‘감동’받다가 결국 이 소중한 다큐멘터리를 완성한 감독에게 ‘감사’까지 하게 만드는 영화다. 충격과 감격을 동시에 선사하는 근사한 다큐멘터리다. 물론, 존 레넌이 워낙 근사한 삶을 살다 간 덕분이다.(김세윤_영화 에세이스트)

시사인(08. 06. 03) 밥 딜런 그 인간, 참 복잡한 인물이네

he는 her가 되고 her는 here가 되었다가 다시 there로 변한다. <아임 낫 데어>의 제목 ‘I’m not there’가 스크린에 등장하는 방식이다. 알파벳을 하나씩 늘려가면서 there라는 단어에 도달하는 첫 시작은 앞으로 영화가 어떻게 전개될지 미리 짐작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그’의 인생을 그려내기 위해 ‘그녀’의 연기에 기대는 영화이면서, 지금 ‘이곳’에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영화인 동시에 그때 ‘그곳’의 혼돈을 증언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알파벳을 하나씩 늘려가면서 there에 도달하는 시작처럼, 캐릭터를 하나씩 늘려가면서 결국 밥 딜런이라는 인간의 핵심에 이르는 마지막. 엔드 크레딧이 다 올라간 뒤에도 텅 빈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쉽게 자리를 뜰 수 없게 만든다.

미국 포크 가수 밥 딜런의 인생을 재구성한 영화 <아임 낫 데어>는 배우 6명이 캐릭터 7개를 연기한다. 각각 다른 인물로 설정된 그들이 사실 모두 같은 인물 밥 딜런의 어느 한 시기를 대변하는데,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배우 케이트 블란쳇은 1965년 뉴 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어쿠스틱 기타 대신 일렉트릭 기타를 들고 무대에 올라 논란을 일으킨 밥 딜런을 ‘주드’라는 이름으로 연기하는 식이다. 크리스천 베일은 그때 일렉트릭 기타를 들고 무대에 오르기 전, 시대의 대변자로 사랑받던 전성기의 밥 딜런을 ‘잭’이라는 인물로 연기하다가 훗날 종교에 귀의해 가스펠 음악을 부르던 밥 딜런을 ‘존’이라는 이름으로 재현한다. 여기에 벤 위쇼·리처드 기어·히스 레저 같은 유명 배우가 합세해 저마다 자기 몫으로 주어진 밥 딜런의 인생, 밥 딜런의 사상, 밥 딜런의 방황과 밥 딜런의 욕망을 감당한다.



<벨벳 골드마인>(1997년)이라는 음악 영화로 여러 사람을 흥분시킨 감독 토드 헤인스는 왜 이리도 복잡한 방식으로 밥 딜런을 그려냈을까. 매우 싱거운 대답이 되겠지만, 밥 딜런이 그만큼 복잡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밥 딜런이 직접 쓴 자서전을 포함해 4년 동안 그에 관한 거의 모든 책을 읽었다고 말한다. 지루한 독서 끝에 얻은 결론. “‘실제 딜런’ 혹은 ‘진짜 딜런’을 찾으려던 전기 작가들이 모두 실패했으며 픽션의 형식을 통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진실을 전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라는 거다.



‘시대의 이면’까지 들추어낸 역작

결국 직접 밥 딜런 한번도 만나보지 않고 만든 밥 딜런 영화가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밥 딜런 영화로 칭송받는 역설. <아임 낫 데어>는 ‘사실’에 충실한다고 해서 반드시 ‘진실’에 도달하는 건 아니라는, 이 바닥의 얄궂은 아이러니를 새삼 일깨운다. 때로 진실은 이렇게 완벽한 허구에서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좋은 전기 영화는 인간의 이면을 드러낸다. 하지만 ‘더 좋은’ 전기 영화는 그 인간이 살다간 시대의 이면까지 함께 들추어낸다. 11년 전 글램 록에 열광하던 1970년대를 느끼게(‘생각하게’가 아니라!) 만든 <벨벳 골드마인>이 그랬듯 토드 헤인스 감독은 이번에도 ‘더 좋은’ 전기 영화를 만들었다. <아임 낫 데어>를 보고 있으면 말로만 듣던 1960년대의 혼돈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글로만 읽던 ‘반문화’의 위력을 느끼게 된다. 늘 새로운 아티스트를 갈망하면서 정작 그 아티스트가 새로워지는 것에는 야박한 대중과, 가차없이 세상을 공격하면서 정작 세상이 자신을 공격하는 건 참지 못하는 아티스트 사이. 그때도 지금처럼 쉽게 좁혀지지 않는 틈이 존재함을 깨닫게 만든다.(김세윤_영화 에세이스트)

08. 0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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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7-25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임 낫 데어>는 기대가 너무 컸었는지, 보는 내내 어떤 '과도함'이 느껴져서 고개를 몇 번 갸우뚱거렸습니다. Todd Haynes의 전작들을 떠올려보면 이는 사실 그리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요.^^ 사실에 충실하다고 해서 반드시 진실에 도달하는 것은 분명 아니겠지만, 여러 면모들의 나열과 알레고리화 작업 그 자체가 어떤 '진실'을 전해주는 것이 아님 역시 분명한 것 같습니다. 존 레논에 대한 영화가 기대되네요.

로쟈 2008-07-26 00:35   좋아요 0 | URL
이런 쪽 영화들은 꼭 챙겨보시겠군요.^^

클리오 2008-07-25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 레논의 영화는 아주 많이 보고 싶은데, 다큐멘터리라 어떻게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지 모르겠네요.. 더운 여름 잘 지내시죠? ^^

로쟈 2008-07-26 00:36   좋아요 0 | URL
오늘도 비가 와서 더운 건 모르겠습니다. 별로 잘 지내지는 못하구요.^^;

2008-07-26 15: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7-26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변증론>이 재출간됐다. 주해를 크게 보강했다고 하니까 개정판이라고 해도 좋겠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정수는 논리학이고, <변증론>은 그 핵심적 저작이라고 하니 당장은 아니더라도 도전해봄 직하다. 저자의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08. 07. 24) 민주주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배워라

현대 철학까지는 아니어도 고대 그리스 철학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이름은 초등학생도 되뇔 수 있다. 그들이 남긴 경구는 시사 퀴즈에도 등장한다. 그런데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 “우리가 정말 서양 고전 철학을 제대로 알고 있는 걸까요?” 학문적 인생 전체를 그리스 철학 고전의 번역·주해에 바쳐온 김재홍 관동대 연구교수다. 그는 최근 아리스토텔레스의 <변증론>(길)을 번역·주해했다. 1998년에 번역본(까치)을 냈는데, 이번에 주해를 크게 보강하여 새로 발간했다.

지금까지 그가 펴낸 책을 일별하면 이번 작업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김 교수는 <그리스 사유의 기원>(살림), <에픽테토스 ‘담화록’>(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등을 썼다. 역서로는 <정신의 발견>(브루노 스넬·까치), <엥케이리디온>(에픽테토스·까치), <니코마코스 윤리학>(아리스토텔레스·공역·이제이북스), <소피스테스적 논박>(아리스토텔레스·한길사) 등이 있다. <변증론>의 재번역은 그리스 철학의 핵심인 논리학 연구의 큰 매듭을 짓는 일이다.

그가 펴낸 책 가운데 이른바 ‘대중서’는 하나도 없다. “고전을 번역하고 주석 다는 데 매달려 살았던” 시간의 열매다. 그가 추구하는 바는 널리 읽히는 게 아니라, 정확히 읽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의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이 어디에 나오는 걸까요. 누가 어떻게 지어냈는지 모르는 말이 아무 근거도 없이 버젓이 교과서에까지 실리는 걸 보세요. 이건 엄격성과 엄밀성을 추구하는 학자적 정신의 부족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엄밀함과 엄격함의 잣대를 굳이 서양 고전에 들이밀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신 서양 이론이라는 게 서양 학자들이 고전을 재해석한 결과거든요. 그런데 한국 학자들은 새로운 서양이론이 나오면 무조건 쫓아가잖아요. 고전에 대한 엄격한 이해를 바탕에 두고 이를 새롭게 해석하여 새로운 사상을 만들 수 있다면, 그런 일이 줄어들겠지요. 서양 고전에 대한 이해는 우리만의 사상을 만들어나가는 길입니다.”

여러 철학자 가운데 아리스토텔레스를 선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은 건조하고 간결하지요. 재미는 덜하지만 학문적 엄격함에 비중을 두는 태도에 마음이 끌렸어요.” 그가 길어낸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수는 논리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본격적인 학문을 하기 위한 하나의 토대로서 논리학의 기초를 마련했어요. 논리학은 인문학적 사유 능력을 기르는 학문이지요.”

그런 점에서 포털사이트 다음의 ‘아고라’는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재현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어떤 주제를 놓고 정보를 모아 서로 토론하고 집단이성을 통해 오류를 걸러내어 올바른 방향을 찾는 일련의 과정은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이 추구했던 것이기도 합니다. 이 과정을 견뎌내는 사람, 즉 논리적으로 훈련이 잘된 사람이 정치를 하는 것이고요.”

그는 인문학 고전을 번역·주해하는 일의 고단함에 대해서도 말했다. “학술진흥재단이 그나마 인문학자들을 후원해왔는데, 이명박 정부 들어 지원 규모를 축소하려는 움직임이 있어요. 즉시 결실이 나와야 실용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인문학의 유용성은 장기적으로 나타나지요. 그래서 국가적 투자가 필요한 겁니다.”

스스로를 ‘아리스토텔리안’이라고 말하는 김 교수는 앞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석론 전서·후서>도 번역할 예정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큰 얼개를 국내에 소개하는 작업의 마무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민주주의는 말을 통해 이뤄지는 정치 과정입니다. 어떤 주장을 어떤 형식에 담아야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지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배웠으면 합니다.” 논리가 아닌 힘이 지배하는 한국의 정치 상황에서 <변증론>의 가치는 더욱 새롭다.(안수찬 기자)

08. 07. 24.

P.S.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이해하는 데 참조가 될 만한 기사도 옮겨놓는다. 경향신문에 연재됐던 '헤르메스의 빛으로'의 한 꼭지이다.

경향신문(07. 11. 17) [헤르메스의 빛으로](43)추론(쉴로기스모스,syllogismos)의 발명

인간은 특별한 동물이다, 로고스가 있으므로
“앞을 내다 볼 줄도 알고, 똑똑하며, 다채롭고, 날카로운 동물. 기억할 줄도 알고, 이성(ratio)과 계획으로 가득 차 있는 동물. 우리는 이를 인간이라 부른다. 가장 높은 신은 바로 이 동물을 돋보이는 조건 속에서 태어나게 했다. 수많은 종류의 생명체와 자연물 가운데서 이성과 생각을 나눠가진 단 하나의 존재. 다른 모든 것들에는 그런 것이 없다. 인간 안에, 아니 모든 하늘과 땅 속에 이성보다도 더 신비로운 것이 있겠는가? 이성이 활짝 피어나 완성될 때, 그것을 지혜(sapientia)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그러므로 이성보다 더 훌륭한 것은 없다. 이성이야말로 인간에게도, 그리고 신에게도 있는 것이기에, 이성은 인간을 신과 함께 묶어준다.”

이성적인 신이 이성적인 존재로 인간을 태어나게 했으며, 이성을 통해 인간은 신에게로 곧추 솟아올라간다는 이 말, 키케로의 말이다. 그 이성으로부터 법(ius)과 법률(leges)이 인간에게 생겨났다고 한다(‘법률에 관하여’ 1권 22-23). 키케로(기원전 106~43년)는 고대 그리스의 정신적인 자산, 특히 철학과 수사학을 열심히 익혀 로마에 소개한 인물이다. 그는 그리스말로 되어 있는 수많은 고전들과 그 속에 알알이 박혀 빛나는 고급 개념들을 라틴어로 옮겨놓음으로써 빈곤한 라틴어를 풍부하게 살찌운 로마의 최고 지성인으로 꼽힌다.

위의 글에서 그는 다른 동물들에게는 없고 인간에게만 있으며, 인간에게 있으되 신으로부터 받은 신비로운 것, 그래서 인간과 신을 하나의 동아리로 묶어줄 수 있는 것을 이성이라 선포한다. 키케로의 생각은 로마에선 일찍이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 특히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키케로가 말한 라티오(ratio)란 그리스말로는 로고스(logos)이기 때문이다(키케로는 로고스를 ‘생각하는 이성’을 뜻하는 ‘ratio’와 ‘생각이 이성에 맞게 표현된 말’을 뜻하는 ‘oratio’로 구분했다).

스토아학파의 사상 속에선 맑디맑은 불로 형상화된 신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로고스, 곧 이성이었다. 이성은 두 가지 일을 한다. 안에서 생각하기와 바깥으로 말하기. 신이 품은 생각은 세계로 펼쳐져 드러나며, 그래서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로고스적 존재이며, 로고스가 그어놓은 길을 따라 조화롭게 움직인다. 결국 세계란 신의 생각이 바깥으로 넘쳐 드러난 언어인 셈이다. 그 가운데 인간은 신을 쏙 빼닮았기에, 인간에겐 이성이 넘쳐난다. 넘쳐나 흘러나오는 것이 말이겠다. 말은 혼잣말(monologos)로 텅 비어 울리지 않고, 다른 사람과의 나눔말(dialogos)로 공명(共鳴)할 때, 그 뜻을 이루어낸다. “말(oratio)의 힘, 그것은 인간 사회를 묶어주고 조절하는 가장 큰 힘이다.”(‘법률에 관하여’ 1권 27). 사람들이 서로 나누는 말은 한갓 말에 그치지 않고, 행위로 이어져 뭔가를 있게끔 이루어내는 힘을 뿜어내며, 감추어진 세계의 비밀을 드러낸다.

대화가 필요하다, 진리를 찾기 위해
그리스말로 진리를 아레테이아(aletheia)라 한다. 이 낱말에는 감추어져 있던 것(lethe)이 벗겨져(a-) 환하게 드러난다는 뜻이 깃들어 있다. 이 말과 관련해 철학자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준다. 인간의 영혼이란 모든 것이 환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는 진리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진리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잊게 하는 망각의 레테(Lethe)강을 건너오며 육체를 옷 입음으로써 진리를 잊고 있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진리에 대한 간절한 사랑(philosophia)으로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영혼을 깨끗하게 해방시키려고 한다면, 잊혀진 옛 기억을 되살려(anmnesis) 진리를 밝혀낼 수 있다(플라톤 ‘파이돈’ 72e). 그런데 망각의 늪에서 벗어나 진리에 대한 기억을 어떻게 되살려낼 수 있을까? 그것은 올바른 말(logos)을 주고받는 가운데(dia-) 잘못된 생각을 버려나가는 참된 대화(dialogos)를 통해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들에겐 오로지 진리를 찾아 드러내 밝혀나가는 대화의 기술(dialektike)이 필요하다. 그것을 열심히 실행하며 철학을 하였던 사람이 바로 소크라테스였다.

뭔가를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찾아가 대화를 통해 논파(elenchos)하던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은 기존의 주장과 논의를 해체하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방법을 이어받은 플라톤은 이 논파의 기술을 좀 더 발전시켜 진리의 세계를 찾아가며 새롭게 구축하는 생산력을 가진 대화의 방법, 곧 디아렉티케로 체계화시켜 나갔다. 그는 참되고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와 잠시도 쉬지 않고 숨가쁘게 변화하는 현상의 세계를 나누었다. 그리고 현상세계에 대한 감각을 통해 얻은 어렴풋한 한갓 의견(doxa)에서 벗어나 로고스를 통해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참된 지식(episteme)을 얻기 위한 철학적 방법을 다듬어내었다. 그것이 바로 말(logos)을 서로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 진리를 드러내는 대화의 기술, 곧 변증술(辨證術, dialektike)이었다.

그런데 플라톤의 학원에서 20년간 철학을 공부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이 갈고 닦은 길에 이어져 나가는 새로운 길(methodos)을 마련한다. “이 작품의 목적은 어떤 문제가 우리들에게 던져지든지 그것에 관하여 상식(endoxa)으로부터 추론할(syllogizesthai) 수 있으며, 또 우리 자신이 하나의 주장(logos)을 밀고나려고 할 때, 어떤 모순도 일으키지 않고 말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 ‘변증론’ 100a18-21). 이때 상식으로부터 출발하는 추론이 바로 대화의 기술과 관련된 추론(dialektikos syllogismos)이다.

추론하라, 세계를 건져 올리기 위해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낱말이 있다. 바로 쉴로기스모스(syllogismos)다. 추론(推論)이라 번역되는 이 낱말은 원래 로고스(logos)들을 함께(syn-) 엮어낸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매우 자부심을 갖고 아끼는 발명품이다. 말과 말을 엮어 말끔한 말의 묶음(syllogismos)을 만들어내는 독특한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추론(syllogismos)도 하나의 말(logos)인데, 그 속에서는 어떤 주장들이 이미 전제로 놓여 있고, 그 주어진 주장들과는 다른 어떤 주장이 바로 그 주어진 주장들에 의해 반드시 결론으로 따라 나온다.”(‘분석론 전서’ 24b19-21). 주어진 전제로부터 반드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새로운 결론을 끌어내는 방법, 그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들어낸 추론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국민의 참된 신임을 얻는 사람(B)이 한 국가의 지도자(A)가 되어야 한다’라는 주장과 ‘법을 존중하고 준수하는 사람(C)만이 국민의 참된 신임을 얻을 수 있다(B)’라는 주장이 주어졌을 때, 이로부터 반드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법을 존중하고 준수하는 사람(C)만이 한 국가의 지도자(A)가 되어야 한다.’ 이 결론은 앞에 전제로 주어진 두 개의 주장이 참이라고 합의되는 순간, 언제나 참일 수밖에 없다. 이 추론은 ‘B이면 A이다. C이면 B이다. 따라서 C이면 A이다’라는 틀을 가지고 있는데, 이 틀은 논리적으로 언제나 타당하다. 말과 말을 엮어 반드시 타당한 추론의 망을 촘촘히 짜낸다면, 그것으로 세계를 차곡차곡 기술해나간다면, 세계의 모습을 오롯이 건져 올릴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품고 있던 철학적 야망이었다.

위에서 보았듯, 가장 기본적인 추론은 대체로 2개 전제와 결론으로 이루어진다. 전제와 결론은 하나의 문장으로 이루어지는데, 문장은 주어와 술어로 나뉜다. 주어와 술어를 이루는 낱말들은 그 낱말들이 가리키는 대상이나 의미하는 특징에 따라 실체(ousia)로 구분되거나, 몇 개의 술어의 모둠, 이른바 범주(範疇, kategoria) 안으로 나뉘어 모여든다. 거꾸로 말하자면 하나의 주어에 모둠 속의 낱말이 술어로 나와 붙어 문장을 만들고, 문장들이 전제와 결론의 형태로 묶여서 추론을 만든다. 이 순서에 따라 아리스토텔레스는 추론의 방법을 짜임새 있게 정리하였다.

그는 우선 낱말들의 모둠을 가다듬는다(‘범주론’). 그리고 낱말들이 엮여 이루어지는 문장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고(‘명제론’), 두 개의 문장을 각각 대전제와 소전제로 두고, 두 개의 전제를 이어주는 매개항을 통해 두 전제를 묶어 하나의 결론을 이끌어내는 추론, 이른바 삼단논법의 타당한 틀을 16개로 압축해서 보여준다(‘분석론 전서’). 그리고 타당한 추론의 틀을 세 가지 분야에 적용한다. 가장 먼저, 참된 것으로 인정되는 전제를 내세워 그로부터 필연적인 결론을 끌어내어 진리를 드러내(apo-) 보이는(deixis) 학문적인 논증(apodeixsis)에 새로운 추론의 틀이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분석론 후서’). 그 다음에는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지며 상식으로부터 출발하여 진리에 이르는 대화의 기술(dialektike)에도 이 추론의 방법을 적용한다(‘변증론’). 거기에 덧붙여 사람들을 교묘하게 속이는 거짓 추론을 낱낱이 분석하여 그 본색을 드러낸다(‘소피스트적 논박에 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여섯 권의 책들은 세계를 파악하는 철학적 수단이요 도구라는 뜻에서 ‘오르가논(Organon)’이라는 이름으로 나중에 다른 사람(아마도 안드로니코스)에 의해 시리즈로 묶인다. 이는 아프로디시아스 출신의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로기케(logike)라고 불리게 되는데 논리학(logic), 곧 말(logos)의 타당성이 성립하는 원리를 다루는 기술(-ike)이라는 뜻이겠다. 서구 합리주의 전통의 핵심을 이루는 논리학은 이렇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추운 날씨 속에서 대학입학 수학능력시험을 치른 수많은 학생들이 이제 다시 열심히 논술을 준비해야 하는 오늘 우리들의 풍경 속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손길이 닿아있는 셈이다.(김헌|서울대 협동과정 서양고전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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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7-25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고전을 묵묵히 공부하고 번역하는 사람들이 정말 고마운 사람들이죠.당장은 눈에 뜨이지 않지만 이런 사람들 덕분에 학문이 발전한다고 봅니다.

로쟈 2008-07-26 00:42   좋아요 0 | URL
요즘은 그래도 관심과 처우가 예전보다는 나아진 편이죠. 대신에 다른 인문학 '놀박'들은 학문에 기여한다는 소리도 못 듣고...^^;

노이에자이트 2008-07-26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 몇년전에 강정인<소크라테스,악법도 법인가?>(문학과 지성사)를 읽고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란 말을 안했다는 사실을 안 뒤에 아연실색.교실에서 가르치는 거짓말이 얼마나 해독이 큰가를 깨닫게 되었죠.그런데 요즘은 교과서에서 그런 거 뺐나봐요.다행이죠.

로쟈 2008-07-27 16:31   좋아요 0 | URL
박홍규 교수의 책에서도 나왔던 듯해요...

노이에자이트 2008-07-27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강정인 씨 책이 나온지 한참 뒤에 한 10년 후 쯤?소크라테스 재판에 대한 책들이 연이어 나오더군요.90년대 중반 경 이시돌 스톤의 <소크라테스의 비밀>이 나왔는데 그땐 별로 반응이 없었어요.박홍규 씨는 우상파괴 식 글쓰기의 상징이죠.카뮈 평전에서도 이화영 씨를 사정 없이 비난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알려진 마이클 왈쩌의 카뮈 옹호도 시원하게 두들기더군요.하하하...통쾌하긴 한데 너무 공격적이라 좀 염려는 되더라구요.저야 학계에 없으니까 상관없지만 같은 동업자를 너무 공격한다는 염려...저렇게까지 해도 되나...하는...

로쟈 2008-07-27 22:42   좋아요 0 | URL
'김화영' 교수를 공격했나 보군요. '동업자'는 아니죠. 불문과 교수하고 법대(교양학부로 옮기셨나) 교수니까요. 승진에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노이에자이트 2008-07-27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법과 교과과정도 엄청나게 두들기더라구요.사실 우리나라 법대 교과과정을 속칭 수험법학이라고 하잖아요.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박교수 입장에선 한심하기도 할 거에요.
그건 그렇고 인문학 놀박이 뭔가요?

로쟈 2008-07-27 23:22   좋아요 0 | URL
'노는 박사'를 놀박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7-27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서글픈 단어군요.우리나라도 중고교 때 참고서나 교과서 외의 책을 많이 읽혀서 대학에 와서는 교양과정에 세계의 명저 읽고 독후감내는 그런 과정을 필수로 해야 하는데... 사실은 부모나 교사들도 학창시절에 교과서와 참고서만 읽었으니...저도 마찬가지구요.정말 억울해요.
 

노트북을 끄려다가 얼떨결에 읽게 된 지난주 시사인의 기사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42). 스크랩해놓는다고 하면서 깜박 잊고 지나갔었다(얼마전 번역/오역과 관련한 글을 쓸 일이 있었는데, 미리 사건이 터졌다면 흥미로운 사례로 들 뻔했다). 생각난 김에 챙겨놓고 눈을 붙여야겠다.

시사인(08. 07. 15) 한국 번역사에 길이 남을 일

만세. 오역하면 처벌된다. 학식이 드높으시고 글공부의 깊이가 한량없으신 검사 다섯 분이, 무려 다섯 분이, 문장 하나하나의 오역을 이 잡듯이 뒤져주신다. 온갖 오역과 짜깁기 번역에 오랫동안 신음해온 우리 지식계에도 드디어 서광이 비치려나? 초고 제출 요구에다 압수 수색까지 해서 엉터리 번역자와 출판사를 아주 요절을 내주시려나?

번역 일을 하는 사람의 처지에서, 이번 <PD수첩>에 대한 검찰 수사는 정말이지 인상 깊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 오하라의 마지막 대사 “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를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니까”라고 번역해낸 것이 가장 유명한 명번역이었다면(참고로 일본어 번역을 그대로 따온 것이라고도 한다), <PD수첩> 오역 논란도 한국 번역사에 길이 남을 일화가 될 가능성이 높다. 설마 이걸로 처벌받는다면 말이다.

광우병에 걸린 것이 아닌지 전세계의 이목을 끌었던 아레사 빈슨의 어머니는 <PD수첩>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Actually I could not understand how my daughter could possibly have contracted…the possible…human form of mad cow disease.”

즉, “인간 광우병이라니, 그런 희귀한 병이 대체 어쩌다 우리 딸한테 생겼는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라는 뜻이다(방송 내용으로 보아 이 말 뒤에는 “농장 주변에 간 적도, 외국 여행을 간 적도 없는데”라는 구절이 덧붙었다). <PD수첩>은 “사실은 내 딸이 인간 광우병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라고 번역한 자막을 내보냈다.

그런데 검찰은 “우리 딸이 광우병에 걸렸을 리가 없다”라고 번역했어야 마땅한데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처벌해야겠다고 한다. 하늘에 떨어지는 해를 보며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라고 말하지 않았으니 처벌한다는 것과 별로 다를 바 없다.

만일 누군가가 “폐암이라니 정말 모를 일이다. 우리 남편은 평생 담배도 피워본 적 없고 운동도 열심히 했는데”라고 하면 듣는 사람은 “남편이 폐암에 걸렸을 리가 없다”라고 해석해서 알아들어야 하는가? 게다가 “폐암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라고 번역하면 처벌받아야 하는가?

삼성 특검도 검사 한 명에 검사보 세 명이었는데
물론 <PD수첩>이 미국산 쇠고기가 위험하다는 논조로 내용을 몰고 가긴 했다. 하지만 그게 문제라면 ‘한국 경제 대폭락 다가온다’ ‘중국 올림픽 분위기 썰렁’ ‘아침 걸러도 살 안 쪄’ ‘촛불시위 과격 양상’ ‘해삼 멸종 위기’ 등등의 기사 작성자도 죄다 조사하고 처벌할 일이다. 마음먹고 보면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굳이 한쪽 면만 부각시킨 ‘왜곡’을 저질렀으니 말이다.

<PD수첩> 수사는 명예훼손 건이라 한다. 정부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정부의 명예를 어마어마하고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떨어뜨린 ‘미국 동물성 사료금지 오역사건’부터 수사하라. 검사 다섯 명을 배치해서. 번역 초고 제출을 요구하고. 불응하면 농림수산식품부 청사를 압수 수색해서라도. 누군가가 그랬다. 삼성 특검도 검사 한 명에 검사보 세 명이었는데, 번역을 잘했니 못했니 하는 일에 검사를 다섯 명이나 투입한다고.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최내현_월간 판타스틱 발행인)

08. 0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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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07-23 08:48   좋아요 0 | URL
검사들이 고시공부하느라 영어를 못했나보지요...그래서 5명이 필요한가봐요..지금 사전 뒤적이고 있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러니까 맹박군이 '영어공용화'이야기를 꺼냈나봅니다.
역설적이게도 온 국민이 영어에 능통하다면 저 문장을 가지고 쪽팔리게 자동차면허를 제외하고 최고의 국가고시라고 하는 사시출신 검사5명이 머리대고 앉아서 사전 뒤적일 필요도 없을텐데...

하여간 저도 영어를 잘하고 싶어요.예전에 좀 탄력받았을 때 계속했으면 좋았을 것을.직무상관도가 영 떨어지다보니 자연스럽게 안하게 되요. 요즘은 다시 관심이 갑니다. 전 우리 아이도 영어를 잘했으면 좋겠어요.(이거 또 오해받기 좋겠지만...) 외국애들이랑 자연스럽게 의사소통하고,또 영어로된 어려운 책도 따로 번역없이 술술 읽어나가고...더 넓고 많은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예전에 영어학원 다닐때 수업시간에 무식한 영어선생이랑 무식한 영어잘하는 학생이 무식하게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는데...제 생각은 100이나 그걸 50밖에 설명하지 못하니까 돌겠더라구요.

며칠전부터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단테신곡 강의>를 보고 있는데 다시금 번역의 중요성에 대해 느낍니다. 여러 판본의 번역문을 짧게 비교해주고 있어서지요.그걸 읽다보면 번역의 미묘한 차이가 주는 미적 감각의 다층적인 차이에 대해 짧은 감탄을 쏟습니다. 모든 국민이 다 영어를 잘할 수 없으니 번역가를 키운다는 일본의 방향성이 우리에게도 필요한 대안이 아닐까 합니다.

로쟈 2008-07-23 21:55   좋아요 0 | URL
이마미치 교수의 책을 읽다 보면 일본 인문학이 만만찮게 느껴지지요. 우리도 분발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노이에자이트 2008-07-23 23:00   좋아요 0 | URL
음...요 문장을 제가 아는 울프 여사에게 물어봐야겠네요.러시아어도 하는 캐나다 여성이랍니다.

로쟈 2008-07-24 22:07   좋아요 0 | URL
한국어도 잘해야 하는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7-25 17:22   좋아요 0 | URL
물어본 결과 검찰의 해석은 틀렸고 피디수첩 것도 맞는 것은 아니라는데 영어가 딸려서 울프여사의 말을 잘 못알아 먹었어요.영어 그만 두고 예전처럼 한자 강의를 해야 하나 봐요.이렇게 영어가 어려워서야 원...가정법이 어렵긴 어렵네요.영어 하기 싫어...

로쟈 2008-07-25 17:34   좋아요 0 | URL
이도저도 안 맞으면 재판 오래가겠군요...
 

여전히 이명박 정부의 국정수행을 지지한다는 십 몇 퍼센트의 MB마니아들을 제외한다면 대다수 국민들에게 현시국은 한심하거나 더러운 세상이다. 개인사로도 다들 바쁜 와중에 나라 걱정까지 하려니 없던 지병까지도 생기겠다(얼마전부터 나는 음식물을 삼키는 일이 조금 불편해졌다). 그렇다고 딱히 '수'가 보이는 것도 아니어서 답답하고 갑갑한 마음에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시국의 '최전선'에 있는 시사주간지 두 편집장의 권두언을 나란히 읽게 됐다. '수'가 없으면 '법'이라도 필요한지라 챙겨놓는다.   

한겨레21(06. 07. 21) 더러운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

“나는 시를 짓겠어요.”

허난설헌이 말한다. 여인이라 천대받고 가난한 여인은 더 천대받는 세상.

“용모인들 남에게 떨어지리오/ 바느질 길쌈 솜씨 모두 좋은데/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난 탓에/ …온종일 창가에서 베만 짠다네/ …베틀에는 한 필 베가 짜였는데/ 뉘집 아씨 시집갈 때 옷감 되려나// 손으로 가위 잡고 가위질하면/ 추운 밤 열 손가락 곱아오는데/ 남 위해 시집갈 옷 짜고 있건만/ 자기는 해마다 홀로 산다네.”(‘가난한 여인을 읊음’)

기방에 빠진 남편은 가족을 돌보지 않고 모진 시집살이 속에 두 아이마저 잃은 그는 스물일곱 연꽃 같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나, 그의 문집은 명나라와 일본에서까지 이름을 얻었다.

“나는 칼을 들겠소.”

홍경래가 말한다. 출신에 따라 입신 길이 열리고 닫히는 세상.

“당일 (과거시험) 방에 이름이 오른 자들을 보니 거개가 귀족의 자질(子姪)들이었다. 경래의 노한 눈에서는 불꽃이 일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가 감히 위를 범해 세상을 바꿀 결심을 각제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홍경래전>)

난을 일으켜 여러 고을을 함락시키고 창고를 열어 백성의 배고픔을 달래며 추호도 백성을 범하지 않았으나, 정주성에서 싸우다 전사했다. 이 싸움에서 관군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2천 명을 죽였다.

“나는 책을 읽으며 농사를 짓겠네.”

성호 이익이 말한다. 이해관계에 얽매여 파당을 짓고 돈과 힘을 차지한 쪽이 상대방을 찍어내는 세상.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고, 폐단이 생기면 반드시 변혁이 따르게 마련인데, 이는 통상적인 이치이다.” “왕도정치는 전지(田地)의 분배를 근간으로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구차할 뿐이다. 분배가 균등치 못하고 권리의 강약이 같지 않은데 어찌 국가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당쟁에 휘말려 부친이 숨지고 형마저 극형을 당한 뒤 시골로 내려가 스스로 농사를 지으며 빈궁하게 살았으나, 그의 철학은 “추구하는 바가 공자·맹자에 접근했다”는 정약용의 상찬처럼 조선 후기를 빛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또 이번호 기사들을 읽으면서 혹 더러운 세상에 탄식하고 정신의 이물감에 잠 못 이룰 독자들을 위해, 바르지 못한 시대에 처해 선현들이 짚어간 길 몇 가지를 소개했다. 저마다 풍진 세상을 만났으나 마음만은 더럽히지 않고 의기를 꺾지 않았으니, 연꽃같이 피어난 시심은 거룩하고 의분 담긴 칼끝은 서늘하며 호미로 새긴 논지는 길이 빛날밖에.

물론 그때는 지금보다 더 가혹한 세상이었고, 그들은 우리보다 더 걸출한 인물이었을 게다. 참신한 21세기의 상상력으로 각자 처지에 맞는 대처법을 궁리해보시길. 이름하여, 더러운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

*최근까지 <한겨레21>에 연재된 ‘이덕일의 시대에 도전한 사람들’이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한겨레출판)라는 책으로 묶여 나왔다. 이 칼럼의 인용 부분은 모두 책에서 재인용한 것이다.(박용현 한겨레21 편집장)

시사IN(08. 06. 30) 이명박 정부에서의 절망 탈출법

참 오랜만에 ‘구악’이라는 말을 다시 여러 군데에서 듣게 된다. 구악이란 군부독재 시절부터 철저하게 권력과 사주의 편에 서서 곡필을 휘둘러온 퇴물 기자를 가리키는 말로, 일종의 언론계 전문 용어다. 촌지와 향응 문화 속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은 양지만 골라 다녔지만 민주화와 함께 서리를 맞아 역사에서 퇴장하는가 싶었다. 그러던 것이 이명박 정부 출범과 동시에 언론계 기관장 자리를 노리고 떼를 지어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경탄할 만한 탐욕을 가졌다.

기자 시절 이런 구악을 상사로 모시게 되면 지옥을 맛본다. 전 직장에서도 언론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한 사람과 같이 일을 한 적이 있는데 제정신을 갖고 버티기가 힘들었다. 그는 지시만 할 줄 알지 소통이란 걸 몰랐다. 언론도 기업이기 때문에 살아남아야 하고, 살아남으려면 권력이나 대기업의 편에 설 수밖에 없다고 지치지도 않고 주절거렸다. 기자들이 항의하면 그는 마지못해 사과하는 척했다가 급한 소나기만 피하고 나면 어느새 시치미 떼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똑같은 일을 되풀이했다.



그와 일하면서 우울증에 걸리지 않으려고 나름으로 연구를 많이 했다. 도가 수행자가 한다는 유체이탈도 자주 써먹었다. 정신을 육체에서 분리해 회의실 천장을 날아다니며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회의 장면을 지켜보노라면 절로 웃음이 나와 울분이 가라앉곤 했다. 그와 지낸 몇 년 동안 유체이탈 분야에서 상당한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어떻게 하면 불행에서 벗어날까 책도 많이 뒤져봤는데 소득은 별로 없었다. 과학자들이 제시한, 절망에서 놓여나는 구체적인 방법은 창의력을 발휘하라든가,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라는 정도였다.

이명박 정부 들어와 시간이 갈수록 극도의 분노와 절망을 표출하는 이들이 자꾸 늘어만 간다. 얘기를 들어보면 구악과 생활하면서 겪게 되는 증상과 비슷하다. 이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위장 반성했다고 분노하고, 그리고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하던 일을 계속하려고 시도하는 걸 보며 절망한다. 이제 100일밖에 안 지났는데 남은 4년 몇 개월을 어떻게 견뎌내느냐고 하소연한다.

이순신 장군 동상 밑에서 유체이탈을 해 ‘명박산성’ 뒤에 웅크린 대통령의 초라한 모습을 지켜본다면 위안이 되려나. 매일 밤 창의력을 발휘해 공권력을 희롱하고 경찰버스를 끌어내느라 규칙적으로 운동하는 걸 보면 시위대는 이미 절망 탈출법을 체득한 것 같기도 하다.(문정우 편집국장)

08. 07. 22.

P.S. '명박산성'이 위키백과에도 등재돼 있다(http://ko.wikipedia.org/wiki/%EB%AA%85%EB%B0%95%EC%82%B0%EC%84%B1). '이견'이 제기되어 '삭제 토론'중이라고 하는데, 그나마 누리꾼들의 이런 수고가 요즘은 '절망' 속에서도 사는 재미를 잠시나마 느끼게 해주는군. 몇 군데 둘러보다가 찾은 오늘의 굿뉴스와 배드뉴스. 나쁜 쪽은 너무  많아서 꼽을 수도 없다. 단적으로, 외국인들이 31일째 주식을 매도하고 있다는 소식(http://news.hankooki.com/lpage/economy/200807/h2008072202484984010.htm). "지금까지는 미국경제(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 따른 신용경색)로 인해 외국인들이 주식을 팔고 있다고 믿어왔지만, 이젠 한국경제(경기침체+기업실적악화) 자체가 문제라는 시각이 점점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한다. 한국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도 별로 전망이 없다는 걸 그들은 아는 모양이다. 그런 가운데 좋은 소식이란 '정치인DB'가 구축될 예정이라는 것(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7220023375&code=940401). "의정활동 내용과 이력, 발언 등을 기록한 정치인 온라인 이력 시스템을 만드는 시도다. 촛불정국에서 드러난 정치권의 무능력에 실망한 대학생들이 네티즌 손으로 직접 정치인 자료를 축적하고 평가할 필요성을 느낀 결과물로 나온 것이다." 당장 다음 선거에서부터라도 활용된다면 좋겠다. 국민들의 '닭짓'을 중단시켜줄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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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8-07-22 09:21   좋아요 0 | URL
참 살기 힘든 세상입니다. -_-

로쟈 2008-07-22 10:36   좋아요 0 | URL
거기에 공부할 건 왜 그리 많은지요. 요즘은 독도사에다 엠네스티에 대해서까지 학습하고 있으니...

연두부 2008-07-22 11:54   좋아요 0 | URL
헉 제 말이 바로 이거 거든요...요즘은 아침에 출근해서 인터넷 클릭하기가 두렵습니다....게다가 어쩌다 어제먹은 술이 덜깬 상태이면..분노와 참담함에 눈물바람까지...쩝

로쟈 2008-07-22 22:43   좋아요 0 | URL
자초한 부분도 없지 않으니 더 참담하지요...

수유 2008-07-23 18:24   좋아요 0 | URL
나는 책을 읽으며 농사를 짓겠네..
비록 공맹에 이르지 못할지라도...
그러고 싶네요, 정말로. 농사는 못지어도 밥은 지으면서.

로쟈 2008-07-23 21:56   좋아요 0 | URL
곧 방학이시네요.^^

수유 2008-07-24 12:13   좋아요 0 | URL
이번 방학은 꽝입니다. 이미 방학은 했지만 오늘도 학교이라나요.;;

로쟈 2008-07-24 22:08   좋아요 0 | URL
에어콘은 나오지 않나요?^^

노이에자이트 2008-07-23 22:49   좋아요 0 | URL
2005년도 독도파동 때 상당한 분량을 기록해 놓은 일기를 보니 어쩌면 올해와 똑같은지...그 당시 이미 허무맹랑한 제안으로 밝혀진 것을 올해도 똑같이 읊어주시는 정치인들과 지식인들...대체 왜 이럴까요.

로쟈 2008-07-24 22:07   좋아요 0 | URL
그래서 DB가 필요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7-25 17:33   좋아요 0 | URL
제가 독도의 식생에 대해 조금 알아요.거기 식수로 쓸 수 있는 샘이 두갠가 있는데 지금 독도경비대 마시기도 빠듯하대요.그런데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자면서 무슨 호텔을 짓자, 심지어 주택단지를 짓자 하는데, 누가 거기 와서 호텔 종업원을 하며 주민이 있으면 학교도 지어야 하는데...그리고 거기는 고속버스나 비행기 타고 가는 곳도 아니고 악천후와 높은 파도때문에 일 년에 갈 수 있는 날이 얼마 안 돼요.

로쟈 2008-07-26 00:44   좋아요 0 | URL
그냥 다 '쇼'라고 해야겠지요...

노이에자이트 2008-07-26 22:57   좋아요 0 | URL
쇼가 재미가 있어야 쇼지요.이거 원 짜증나서...

로쟈 2008-07-27 16:31   좋아요 0 | URL
가증스러운 쇼들도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