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사회주의 운동사'란 마이리스트를 만들었는데, 그 계기가 되었던 기사를 옮겨놓는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75). 임경석 교수의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역사비평사, 2008)에 관한 것이다. 러시아 자료에 대한 언급이 눈길을 끈다.

시사인(08. 07. 29) 한 역사학자의 혁명가 ‘발굴기’

대략 7년 전 일이다. 2001년 10월21일. 역사학자 성대경 교수(전 성균관대·사학)와 그 제자인 교수·연구원 7명이 땅을 파기 시작했다. 경남 창녕에 있는 고택의 한 귀퉁이였다. 당시 빨치산 생존자 성일기씨가, 자기와 함께했던 빨치산 부대 사령관이 어떤 문서를 작은 항아리에 담아 파묻었다고 증언한 곳이다. 한나절을 팠다. 구덩이가 넓고 깊어졌다. 그리고 유리병이 나왔다. 그 안에는 빨치산 부대 ‘제3지대장’ 남도부의 ‘비장문건(秘藏文件)’이 들어 있었다. ‘비밀스럽게 숨겨두는 문서’였다. 소설가 이병주가 쓴 대하소설 <지리산>의 모티브가 된 인물로 알려진 빨치산 남도부. 그가 작은 공책에 당시 상황을 소상히 연필로 적어둔 것이었다. 유품이 발굴되자 예순아홉 살의 빨치산 생존자는 울었다. 그곳에 무언가 파묻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안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몰라서, 그리고 그 안에서 발견된 무엇이 또다시 자신의 삶을 옭아맬까 공포스러워 50년 동안 비밀로 간직했던 노인은 오랫동안 꺼억꺼억 울었다. 회한의 눈물이었다.



당시 ‘문서 발굴’에 참가했던 임경석 교수(성균관대·사학)가 최근에 펴낸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책은 일제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했던 혁명가 9인의 초상을 그렸다. 윤자영,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강달영, 김철수, 고광수, 남도부, 안병렬. 분단과 반공 이데올로기 때문에 남한에서 잊힌 사람이다. 임경석 교수는 “사료를 통해 논리적 인과관계를 찾는데, 간혹 감정이 움직이는 경우가 있다. 사료를 읽는 도중에 만났던, 눈길을 거두기 어려웠던 사람들에 대한 자료와 정보를 모아두었다”라고 말했다. 2000년부터 계간 <역사비평> 등에 연재했고, 2006년까지 쓴 글 여덟 편을 모았다.

임경석 교수는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사를 연구해온 역사학자이다. 그가 대학원에 진학했던 1982년에만 해도 한국사 연구 대상은 주로 1919년 3·1운동까지였다. “3·1운동 이후로 가면 사회주의적 운동이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사회 일반 풍조에서도 중요한 현상이 되기 때문에 연구 자체가 불온시되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자의식을 가진 젊은 연구자들은 3·1운동 이후를 연구하는 것을 일종의 사명으로 받아들였다.

4800여 명의 ‘이명 사전’ 만들기도

당시만 해도 접근할 수 있는 자료가 일본 관헌 문서 정도였다. 그것도 접근이 어려웠다. 강덕상, 박병식 등 재일 한국인 연구자가 평생을 바쳐 일본에 있는 ‘식민지 조선’ 관련 자료를 모았는데, 그 자료집이 주된 연구 자료가 되었다. 군사독재 시절에는 학계 내에서 ‘몰래 복사본’이 유통되었다. 자료난이 어느 정도 해소된 것은 1991년 소련이 붕괴한 이후였다. 소련 밖의 나라에서 벌어진 사회주의 운동과 관련한 내밀한 자료가 모스크바에 있는 공산당 중앙위원회 문서보관소에 소장되어 있었는데, 1993년부터 이 자료가 서방 학자에게 개방된 것이다. 임경석 교수도 그 공개된 자료를 참고해 박사 논문 <고려공산당 연구>를 마무리했다.

“러시아에서 공식 출간된 조선 관계 자료만도 대단한 연구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1990년 봄부터 러시아어를 공부했다. 1994년, 1995년 러시아에서 1년6개월 동안 머물며 문서보관소로 출근했다.” 러시아에서도 난관이 많았다. 문서 한 장을 복사하는 데 1달러20센트였고, 연구자 1인당 복사할 수 있는 양이 1년에 최대 1000장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당시 러시아에 유학 중이던 전현수 교수(경북대·사학)의 도움을 받아 문서보관소 직원과 친분을 쌓아 비용과 복사 분량 제한 문제를 그럭저럭 풀었다.

임경석 교수의 연구실 한 면에는 러시아에서 복사해온 자료가 빼곡히 차 있었다. 연구실 중앙에 책장을 마련해 한두 사람이 앉으면 꽉 찰 정도였다. 임경석 교수가 자료와 싸우는 ‘현장’이다. 사료를 읽다 보면 또 한 가지 난점이 있었다. 사회주의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가명을 사용하는 경우가 흔해 동일 인물의 이명을 찾는 일이었다. 임 교수는 사료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가명을 인물별로 출처를 표기해 정리했다. ‘이명찾기 사전’이다. 근 20년 동안 갱신한 인물들이 4800명가량 된다. 

임경석 교수가 이번에 쓴 책은 잘 읽힌다. 시대와 정면으로 맞선 인물들의 고뇌가 느껴진다. 그래서 임 교수에게 ‘문학적’이라고 물었다. 임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학은 행위의 사슬로 인과관계를 구축한다. 때로는 인간의 행위만 건조하게 남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한 줄밖에 안 되는 인간의 행위라도 그 현장에서 겪은 내면은 우주적 고민을 담을 수도 있다. 어떤 행위와 결합한 그 사람의 내면을 드러내는 것이 내 공부의 목표이기도 하고, 역사가가 추구해야 할 목표라고 생각한다.”



임경석 교수는 책에 나온 인물을 ‘중음신’이라고 했다. 사람이 죽어 다음 생을 받기 전까지 49일 동안 떠도는 것을 이르는 불교 용어다. 반공 이데올로기로 남한에서 잊힌 인물들. 그리고 북한에서는 종파로 몰려 역사에서 지워진 인물. 그는 그 인물에 대한 기록을 남기려고 한다. 그래서 아직 스스로 지켜야 할 ‘공부 약속’이 많이 남아 있다.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 후속편을 써야 한다. 1920년대 조선공산당을 내재적 방법으로 해명하는 것이 시급하다. 또 임시정부 시절  자금을 횡령했다고 알려져 암살당한 초기 사회주의자 ‘김립’이라는 인물을 다룬 <암살>이라는 단행본도 준비 중이다. 횡령 여부에 대해서는 당시 코민테른이 임시정부에 지원한 독립자금의 성격과 관련해 달리 볼 부분이 있다.” 임경석 교수의 책상에는 러시아어로 쓰인 복사본 문서가 놓여 있었다. <암살>을 쓰는 데 주요하게 참고할, 코민테른의 결산 보고서였다. 그는 오래된 사료에서 한 인물을 ‘발굴’하고 있었다.

08. 08.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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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2008-08-05 21:58   좋아요 0 | URL
철학을 전공한 저는 사학과 수업에서 글을 쓰기위해 읽어야 했던 그 엄청난 사료앞에서 항상 좌절하곤 했습니다. 임선생님의 수업을 안 들었던 것은 약간 후회되긴 하지만, 다른 수업에서 <한국사회주의의 기원>을 읽으며 '아, 이런 책을 쓰려면 도대체 얼마만한 시간과 공력이 들어야 하는가' 암담했던 좌절의 기억만 떠오릅니다.

지금도 역사관련 서적을 보면 책 속 한줄을 쓰기 위해 얼마만큼의 사료를 읽어야하는가라는 생각을 하면 항상 두려움과 함께 경외감이 먼저 듭니다. 제도권 공부의 엄정함만은 짧은 기간에도 톡톡히 맛봤던 셈이지요.

그러한 고생을 톡톡히 하고 나면 서평에서 한줄로 씹어제끼는 재기발랄한 글들이 그저 왕재수발랄한 지저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지금도 비평 한줄보단 원사료 한줄에 대한 해석의 노고가 더욱 소중하다 생각하고요.

간만에 임경석선생의 글을 꺼내 쓰다듬으며 써야할 논문을 생각하며 만감이 교차합니다^^;

로쟈 2008-08-05 21:59   좋아요 0 | URL
그게 분야마다 적성이 따로 있나 봅니다. 그런 작업에도 '흥미'와 '재미'를 느껴야 계속할 수 있는 것이죠.^^;

열매 2008-08-05 22:02   좋아요 0 | URL
그렇죠. 엉덩이가 무거워야 할 뿐만 아니라 나름의 사명감이 있어야만, 또 그 사명감을 뒷받침해줄만한 경제력이 있어야만 그 사료들을 읽어낼 수 있을겝니다^^

로쟈 2008-08-05 22:09   좋아요 0 | URL
네, 엉덩이와 돈!..

노이에자이트 2008-08-05 22:17   좋아요 0 | URL
전에 소개해드린 노가원<남도부>말고 반공물 중에 남도부 체포하는 내용이 김중희<한국전쟁>제 10권에 있습니다.전형적인 반공물이지만 시나리오 작가 특유의 스피디한 문체에다가 상당한 자료를 섭렵한 방대한 기록물입니다.이 책을 통해서 빨치산들이 휴전 이후에도 남한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남도부도 1954년 정월에야 대구시에서 생포됩니다.혹시 나시찬이란 배우 기억하세요? 40이 못 되어 요절한 배우인데 KBS<전우>에서 김소위 역을했죠.그때 전우의 시나리오 작가가 김중희 씨입니다.제가 꼬마였을 적의 일이죠.

로쟈 2008-08-05 22:34   좋아요 0 | URL
네, 나시찬 기억하죠. 저도 꼬마였을 때.^^

노이에자이트 2008-08-05 22:20   좋아요 0 | URL
기사내용 중 재일 한국인 연구자 강덕상,박병식이라고 나오는데 박병식이 아니라 박경식입니다.일제시대사 전공자로 강덕상,강동진과 함께 늘 손꼽히는 대가입니다.우리나라엔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지배>가 번역되어 있는데 책 뒤에 소개된 일제관련 자료와 일제시대 연표가 정말 유용합니다.

로쟈 2008-08-05 22:33   좋아요 0 | URL
이 주제에 관해서는 따로 비블리오그라피를 쓰셔도 되겠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05 22:45   좋아요 0 | URL
연구자를 위한 독서안내 식의 글을 써볼까요? 일제시대사와 해방 이후 현대사에 관심이 많은 편입니다.

로쟈 2008-08-07 12:18   좋아요 0 | URL
네, 기대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05 22:46   좋아요 0 | URL
로쟈 님은 꼬마였을 때보단 좀 나이가 드셨을텐데...

로쟈 2008-08-07 12:18   좋아요 0 | URL
저는 그렇게 연로하지 않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07 12:35   좋아요 0 | URL
그래서 좀 나이가...했지 많이 나이가...이렇게 한 건 아니잖아요.다 아시면서!
 

무더위 때문에 밤낮이 바뀌었다. 그래서 좀 어둑해져야지 무얼 해볼 생각이 든다. 이럴 때는 영화도 심야영화가 제격이다. 이번주에 개봉하는 영화 <다크 나이트>가 딱 심야관람용인데, 이미 '걸작'이라는 입소문이 파다하다. 팀 버튼의 <배트맨>을 능가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사실 팀 버튼과는 코드가 잘 맞지 않아서 재미있게 봤을 테지만 별로 인상에 남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다크 나이트>는 흥미를 끈다. 매일같이 한심한 뉴스들만 쏟아지는 것도 이 '비극적인 영웅'에 대한 판타지를 부추긴다. 지난주 심야에 본 <놈놈놈>이 다 해갈시켜주지 못한 갈증을 <다크 나이트>는 해소시켜줄지 모른다(<놈놈놈>은 뮤직비디오로 훌륭하다).  

한겨레(08. 08. 04) '다크 나이트’ 악의 화신 vs 고뇌하는 영웅

6일 국내에서 개봉하는 <다크 나이트>가 북미에서 개봉 10일 만에 3억달러가 넘는 흥행 신기록을 세우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이미 개봉 전부터 ‘걸작’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던 <다크 나이트>는 슈퍼히어로에 열광하는 미국만이 아니라 기자시사회를 연 국내에서도 호평 일색이다. 과연 팀 버튼의 <배트맨>을 능가하는 걸작이 나올 수 있을까 의심했지만,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는 팀 버튼과는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신화를 만들었다.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팀 버튼의 <배트맨>과 어깨를 견줄 수 있는, 그러면서도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새로운 걸작을 만들어낸 것이다.


<다크 나이트>는 야심만만하게도, 낮 장면으로 시작한다. 게다가 첫 장면의 주인공은 배트맨이 아니라 조커다. 팀 버튼이 <배트맨2>에서 펭귄맨을 중심에 세운 적이 있긴 하지만, <다크 나이트>의 전략은 그것과 다르다. 슈퍼히어로의 신화를 뒤틀린 엽기 동화로 대체하는 전략을 썼던 <배트맨2>와 달리, <다크 나이트>는 코믹북의 이미지에 머물렀던 슈퍼히어로를 완벽하게 현실로 이끌어낸다. <다크 나이트>를 보고 있으면 조커이건, 배트맨이건 그들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느껴진다. 그럴 듯하다, 라는 느낌을 넘어서 거의 완벽한 리얼리티를 구현한다. 현실의 어디에선가 그들을 보았던 것 같은 기시감을 느끼게 한다.

사실 ‘배트맨’이란 캐릭터는 슈퍼히어로 중에서 가장 현실적인 캐릭터였다. 배트맨이 처음 등장했던 1930년대 말은 미국의 갱단이 사회 곳곳으로 한창 세력을 넓혀가던 시점이었다. 일상에서 갱단의 폭력을 목도했던 시민들에게는 정말로 배트맨과 같은 ‘자경단’이 필요했다. 또한 배트맨은 외계에서 오거나 기이한 사고로 초인이 된 것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슈퍼히어로를 택한 존재다. 악당에게 부모를 잃고, 복수의 일념으로 자신을 단련하여 ‘초인’이 된 사나이. 공포의 존재인 ‘박쥐’를 자신의 상징으로 사용한, 선과 악의 경계에서 흔들리며 고뇌하는 슈퍼히어로. ‘보이 스카우트’의 정의를 구현하는 슈퍼맨과는 대조적으로, 배트맨은 악의 근원을 쫓아가며 때로 악에 물들기도 하는 ‘탐정’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초월적인 영웅이 아니라, 우리도 능히 그렇게 될 수 있을 것 같은 슈퍼히어로가 바로 배트맨이었다.

<다크 나이트>는 현실적이면서도 만화적인 캐릭터 배트맨을 필름 누아르와 갱스터의 공간으로 과감하게 밀어 넣는다. 초현실주의적인 판타지로 <배트맨>을 재구성했던 팀 버튼과는 정반대의 지점에서, 배트맨이라는 존재를 재해석한 것이다. 다만 <배트맨>과 <다크 나이트>의 원점에는 1986년에 발표된 프랭크 밀러의 <다크 나이트 리턴스>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다크 나이트 리턴스>에서 배트맨은 권력의 일부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시민들을 위한 자경단이 된다. 배트맨은 진짜 정의를 지키기 위한 ‘범죄자’, 즉 진정한 다크 나이트가 되는 것이다. <다크 나이트 리턴스>와 <왓치맨> 등 미국 만화가 성인들의 오락이자 예술인 그래픽 노블로 성장하면서 성취했던 모든 것들은 이제 영화로 녹아들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악을 멸하고자 폭력이라는 위법을 택한 배트맨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일까? 정의를 위해 싸우면서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모순은, 지금 한국 사회에 현존하는 상황이다. 슈퍼히어로는 단지 가상의 존재가 아니다. 현대의 슈퍼히어로는 21세기 대중의 이상이며, 그들이 갈구하는 새로운 영웅 신화다. <다크 나이트>야말로 가장 완벽한 비극적인 영웅이고.(김봉석/영화평론가)

08. 08. 04.

P.S. 영화평론가 김봉석씨가 시사인에 쓴 기사도 참조할 만하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50). <다크 나이트>란 걸작의 배경에 '그래픽 노블'의 힘이 놓여 있다는 걸 지적하고 있다.

시사인(08. 07. 29) '배트맨’의 힘은 ‘그래픽 노블’의 힘

지난 7월18일 북미에서 개봉한 <다크 나이트>는 사흘 동안 무려 1억8000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신기록을 세우며 승승장구한다. 단지 흥행기록만이 아니다. 각종 매체의 비평에서도 찬사 일색이고, 세계 최대 영화 정보 사이트인 IMDB에서도 역대 1위였던 <대부>를 누르고 최고 평점을 기록했다. <배트맨>의 팀 버턴을 시작으로 <엑스맨>의 브라이언 싱어와 <스파이더맨>의 샘 레이미가 슈퍼히어로 영화, 코믹스 영화의 수준을 한 계단 높여놓기는 했지만 <다크 나이트>의 엄청난 성공은 어리둥절한 기분마저 들게 한다. 코믹스 영화라는 장르가 갱스터, 필름 누아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왜 슈퍼히어로, 그 중에서도 배트맨은 팀 버턴과 크리스토퍼 놀란 같은 명감독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일까? 왜 사람들은 ‘배트맨’에 열광하는 것일까? 1930년대에 시작된 <배트맨>은 가장 현실적인 슈퍼히어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슈퍼맨이나 엑스맨 등은 초월적 능력을 지닌 존재다. 하지만 배트맨은 다르다. 그는 악당에게 부모를 잃었고,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서 세상의 악을 없애는 슈퍼히어로가 되었다. 수많은 무술을 익히고 강력한 무기를 장착한 배트맨은, 국가권력이 더 이상 제어할 수 없는 악을 스스로 처단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자경단’이다. 경찰이 세상의 모든 악을 없애지는 않는다. 권력이 정해놓은 법질서의 바깥에서 암약하거나 슬쩍 빠져나가 버리는 악이 너무나도 많다. 경찰이나 검찰이 부패한 경우도 있고, 법의 한계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그런 경우를 볼 때마다, 우리는 배트맨을 원하게 된다. 나에게 힘만 있다면, 당장 거리에 나서 악당을 처단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영화 제목에서 ‘배트맨’을 뺀 까닭
하지만 그것이 과연 정의를 위한 것인지, 그런 행동으로 과연 완전한 정의가 도래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박쥐 가면을 뒤집어쓰고 거리에 나선 순간부터, 배트맨은 고뇌할 수밖에 없다. 왜 경찰이나 검찰에게 맡기지 않고, 배트맨은 스스로 정의의 수호자가 된 것일까? 만약 그가 정당하다면, 왜 그는 가면을 쓰는 것일까? 어쩌면 배트맨은 단지 사적인 복수를 위해, 아니 부모를 죽인 악당에게 복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해소하기 위해 악당을 물리치며 스트레스를 푸는 것은 아닐까?

<다크 나이트>의 배경인 고담 시에서도 유사한 의문이 제기된다. 배트맨이 악당을 잡기는 하지만, 똑같이 법을 어기고 폭력을 행사하는 점은 어떻게 볼 것인가? 단지 정의를 위한다는 이유만으로, 위법을 용납할 것인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크 나이트’라는 제목이다. <배트맨> <배트맨 포에버> <배트맨과 로빈> <배트맨 비긴즈>로 대중에게 이미 익숙해진 ‘배트맨’을 버리고 왜 <다크 나이트>라고 했을까? 그 이유는 1986년에 발간된 프랭크 밀러의 <다크 나이트 리턴즈>에 있다. <다크 나이트 리턴즈>에서 배트맨은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싸우는 어둠의 전사가 된다. <다크 나이트 리턴즈>는 배트맨이라는 슈퍼히어로에게 새로운 캐릭터를 부여하며, 철학과 정치 논쟁을 일으킨 기념비적 작품이다. 최근 국내에도 출간된 앨런 무어의 <왓치맨>과 함께, 코믹스라고 불리던 미국 만화를 성인의 ‘그래픽 노블’로 끌어올린 걸작이다.

‘다크 나이트’는 어둠의 기사, 밤의 기사라는 뜻이다.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은 정의로운 검사 하비 덴트를 ‘화이트 나이트’라고 부른다. 하비 덴트는 고담 시의 악당 절반을 감옥에 집어넣고, 조커를 잡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도 내건다. 배트맨은, 자기가 아니라 하비 덴트가 시민의 영웅, 고담 시의 영웅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하비를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서 배트맨은 무엇이든 한다. 하지만 ‘화이트 나이트’는 성공하지 못한다. 오히려 혼돈과 악의 화신인 조커에 의해, 그의 내면에 있던 광기가 분출하며 새로운 악당 ‘투 페이스’가 되어버린다.



투 페이스는 어쩌면, 배트맨과 조커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조커는 완벽한 광기와 혼돈의 상징이다. 그가 어디서 왔는지, 어떤 일을 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는 돈에도 욕심이 없고, 권력에도 욕심이 없다. 단지 그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죽여버리는 데만 열중한다. 그런 조커가 배트맨에게 말한다. 절대로 너를 죽이지 않을 거라고. 너와 노는 것이 가장 신나기 때문에. 네가 있어야만 내가 완성된다고. 그 말의 의미는, 조커의 극단에 배트맨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린 조커와 달리, 배트맨은 모든 것을 짊어지고 있다. 복수를 위해 시작한 ‘자경단’이지만, 배트맨은 결코 선을 넘지 못한다. 누구도 죽이지 않고, 무엇도 파괴할 수 없다. 배트맨은 모든 것을 지켜야만 한다. 다만 법 테두리 안에서만 활동하면 제대로 악을 처단할 수 없기에, 스스로 세간의 비난을 받으며 묵묵하게 정의를 수호하는 ‘다크 나이트’를 자임하는 것이다.

슈퍼히어로 영화가 뭔지 보여주다
<배트맨 비긴즈>에 이어 <다크 나이트>를 연출한 크리스토퍼 놀란은 슈퍼히어로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준다. 액션이나 스펙터클은 물론 최고다. 그리고 슈퍼히어로라는 비현실적인 존재가 사실은 대중의 이상이며 현대의 신화에 비견될 존재임을 탁월하게 증명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단지 크리스토퍼 놀란의 재능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다크 나이트 리턴즈>는 물론 최근 출간된 제프 로브와 짐 리의 <배트맨:허쉬>와 조지 프랫의 <배트맨:악마의 십자가>를 보면, ‘배트맨’이라는 캐릭터가 수십 년 세월 동안 엄청난 세공과 실험적인 변주를 거치며 다듬어져온 과정임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배트맨:허쉬>는 배트맨의 모든 조연과 악당 캐릭터는 물론 슈퍼맨까지 등장해 심오한 캐릭터로 다듬어진 배트맨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이런 ‘그래픽 노블’의 성과가 있었기에, 팀 버턴의 <배트맨>과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가 존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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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8-04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다리고 있는 영화 중에 하나랍니다.
배트맨도 배트맨이지만 배우들이 굉장히 좋기 때문에요.
한 명은 이제 더 이상 볼 순 없지만요.

로쟈 2008-08-05 09:10   좋아요 0 | URL
네, 히스 레저죠. 팬들이 많더군요...

2008-08-05 0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8-05 0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8-05 0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겨레21에서 '김창진의 제국의 그늘' 마지막회를 스크랩해놓는다(http://h21.hani.co.kr/section-021165000/2008/07/021165000200807300721026.html). 미국 경제가 '뚜렷한 쇠퇴 경향'을 보인다는 기사들이 최근 자주 눈에 띄는데, 그런 경향의 '배후'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해준다(우리가 '쇠고기 선물'도 받은 만큼 어려움에 처한 미국을 돕기 위해 '금 모으기'라도 해야 할까?). 우리는 이 '뚜렷한 쇠퇴의 경향'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한겨레21(08. 07. 30) 두 번째 위협이 내부에서 터져나온다

인간의 역사에서 ‘제국’은 정치적 꿈의 최대치를 표현한다. 그것은 계급·성별·지역·종교 간 이해관계의 차이와 갈등으로 점철된 현실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우월한 권력을 통해 지배의 욕망을 거의 완벽히 구현하려는 정치체제다. 하지만 제국이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타자에 대한 정복과 억압을 넘어 그것이 불안정한 세계에서 질서와 안정, 곧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원대한 꿈을 내세우기 때문이다. 팍스로마나, 팍스아메리카나 또는 대동아공영권 따위로 명명된, ‘제국의 힘에 의한 평화’는 그 추종자들에게 당대 문명이 이룬 최고의 업적으로 추앙된다.



제국, 한여름 밤의 꿈
그러나 제국은, 좀더 넓고 긴 역사적 안목에서 보면, 결국 한여름 밤의 꿈에 불과하다. 그들이 이뤘다고 자부하는 평화는,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보는 소극적인 관점을 인정하더라도, 제국의 총칼과 군함, 미사일 아래 모욕당한 사람들의 절망과 분노를 헤아리지 못하는 편협한 질서다. 제국은 한 번도 세계평화를 이룬 적이 없고, 심지어 제국의 경계 내부에서도 끊임없이 저항의 싹이 움트고 모반이 숲 속의 버섯처럼 소리 없이 자란다. 카를 마르크스의 비유를 모방하자면, 제국은 그 자신의 거대한 몸속에 파멸의 씨앗을 품고 있는 것이다.

2001년 9·11 동시테러는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세계평화를 이루었다고 자부하며 제국의 꿈에 취해 있던 미국인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닥쳐온 날벼락이었다. 그것은 ‘팍스아메리카나’라는 질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허구라는 사실을, 대다수 세계인들이 백악관과 할리우드가 선전하는 미국의 꿈에 취해 있지 않다는 현실을 극명히 드러내준 충격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지배 엘리트는 미국인들을 달콤한 제국의 꿈에서 깨어나게 하기를 거부했다. 대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동시에 두 개의 전쟁을 벌이고, 7개의 ‘불량국가’와 3개의 ‘악의 축’을 지목해, 그에 대한 강력한 저항을 야기함으로써 세계를 더욱더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이제 두 번째 도전이 바로 제국의 내부에서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것은 지난 세기 미국인들이 누려왔던 ‘우월한 문명과 풍요로운 일상생활’에 중대한 위협이 되고 있는, 미국 경제의 뚜렷한 쇠퇴 경향이다. 최근 상황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에 관해서는 논의가 분분하지만, 워런 버핏이나 조지 소로스 같은 투기 자본가들이 거듭해 ‘생애 최대의 위기’라며 호들갑을 떠는 것이 단지 미디어를 의식한 제스처일까? 혹자는 향후 몇 년간 미국 경제가 겪게 될 혹독한 경기 후퇴는 1930년대 대공황기 이후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될 거라고 경고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부터 곪아터지기 시작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올해 들어 경제 전반을 강타한 국제적인 고유가의 여파로 미국인들의 생활 방식은 중대한 조정 국면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최근 〈CNN방송〉의 조사에 따르면, 폭등하고 있는 휘발유값 탓에 여름휴가 계획을 축소하는 등 생활 태도를 변경하겠다는 응답자가 10명 중 9명에 달했다. 그나마 휴가를 갈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지난 몇 년간 은행들이 선심 쓰듯 마구 내준 주택담보 대출 덕분에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뤘다고 좋아하던 수천만 명이 앞으로 몇 년간 그 집을 잃고 중산층의 꿈을 접어야 할 판이다. 부동산 전문 사이트 ‘리얼티트랙’이 7월10일 내놓은 자료를 보면, 지난 6월 중 미국 전역에서 대출 할부금을 제때 내지 못해 주택을 차압당한 비율은 지난해 같은 달에 비해 53% 급증했다. 전국적으로 500가구당 1가구꼴로 차압을 당했고, 캘리포니아의 일부 지역에선 72가구당 1가구꼴로 차압을 당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지난해 미 전역에서 150만 가구에 달했던 차압 사태가 올해에는 약 250만 가구로 급증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가구당 부채, 대공황기와 비슷
미국 경제를 덮고 있는 음울한 구름은 이것만이 아니다. <뉴욕타임스>의 보도에 따르면, 현재 미국인들의 가구당 평균 부채는 11만7962달러(약 1억1800만원)에 달한다. 이는 대공황기인 1930년대 수준과 비슷한 것이라고 한다. 빚이 없는 가구는 1957년 42%에서 2004년 24%로 줄어들었다. 대신 가구당 저축액은 단 392달러(약 40만원)에 불과하다. 그리고 빈곤선 이하에서 허덕이는 미국인들이 370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전국의 교회들이 빈민구제 사업을 중요한 사업 방향으로 설정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사태가 이러함에도 조지 부시 행정부는 지난 7년간 ‘테러와의 전쟁’에 약 7천억달러(약 700조원)를 쏟아부었다. 길거리에서 밤을 새우는 가난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기보다 부자들의 세금을 깎아주는 데 취미가 있는 자본가 정부 탓에 미국이라는 국가는 지금 해외 각국에 진 빚의 이자를 갚기 위해 매월 30억달러(약 3조원)를 빌려와야 한다. 미국 정부와 일반 가계가 완전히 빚더미에 올라 있는 셈이다. 채무도 자산이라는 회계장부의 마법이 과연 언제까지 통할 것인가?

지금은 미국의 군사력과 이데올로기가 그 자체로 세계시장을 통제할 수 있는 냉전 시기도 아니고, 19세기 세계제국이던 영국이 1차 대전으로 사실상 파산 상태에 몰려 있던 20세기 초반도 아니다. 유로화에 비해 달러가 계속 힘을 잃고 미국 경제가 더 이상 세계경제의 엔진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유라시아의 경쟁국들이 더욱더 부상하게 되면, 필경 미국이라는 이름의 ‘안전 자산’ 신화도 깨어지는 날이 올 것이다.

제국의 역사에서 사태가 항상 일직선적으로 파국을 향해 가는 것만은 아니다. 일시적인 침체를 이겨내고 회복기에 들어서거나 심지어 과거보다 더 강해지는 경우도 가끔씩 관찰된다. 그러나 거기에는 전제조건이 따른다. 하강 국면에 접어든 제국의 한계를 냉정하게 인정하고 제국 체제에 내재한 구조적인 문제를 바로잡으려는 지배 엘리트의 전략적·정책적 선택이 존재하며, 그 방향으로 대중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제국의 힘과 영향력은 언제나 외부 환경과의 관계에서 상대적이기 때문에 다른 경쟁자들에 비해 선도적인 혁신 능력과 기술적·경제적·정치적 우위를 확보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제국의 이익을 누구보다 더 많이 누려온, 사회 곳곳에 포진한 기득권 집단의 완고한 저항을 꺾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상 안팎의 도전에 성공적으로 대응해 적절하게 위기를 극복한 제국들은 결코 흔하지 않다. 지금 미국은 기로에 서 있다. 설령 제도권 정치인 버락 오바마(민주당)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과연 미국의 현실을 직시하고 제국의 생활양식을 조정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운 판에, 존 매케인(공화당)이 당선된다면 그것은 미국인들 스스로 파국을 재촉하는 선택을 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자기 기만에서 벗어날 때
벌거벗은 군사력만으로 세계제국을 유지하기에는 21세기 지구는 너무 복합적이고 역동적이다. 그 군사력마저 유지할 경제력이 소진돼가는 마당에 더 말해 무엇하랴. 지금이야말로 미국인들이 ‘자유와 민주주의 이름으로 세계를 구원한다는 운명을 타고났다’는 제국적 자기 기만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08. 08. 03.

P.S. 페터 벤더의 <제국의 부활 - 비교역사학으로 보는 미국과 로마>(이끌리오, 2006)처럼 한때 미국을 로마 '제국'에 비유(하면서 비교)하는 책들이 유행한 적이 있다. 그 비유를 계속 이어받자면 이번에 새로 완역돼 나온(총 여섯 권 중 두 권이 먼저 나왔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민음사, 2008)는 단지 역사책으로만 읽히지 않을 듯하다. '미 제국주의 쇠망사'로도 읽을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제국의 그늘'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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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8-03 20:28   좋아요 0 | URL
6월엔가 미국 현지 취재에서 봤는데 미국 디트로이트는 완전히 유령의 도시더군요.자동차 산업 완전 붕괴로요.그리고 플로리다는 비우량 담보대출 때문에 어떤 동네는 전체가 차압 딱지 가 붙어 있구요.정말 무시무시하더군요.

로쟈 2008-08-03 20:32   좋아요 0 | URL
말로만 듣던 '종말'이 오려나 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03 20:42   좋아요 0 | URL
그런데 그런 낙오자를 양산해야 체제가 유지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무시무시한 생각도 해봅니다.그렇다면 이건 종말보다 더 무섭죠.

로쟈 2008-08-03 21:23   좋아요 0 | URL
그렇긴 하지만 낙오자도 '임계치'가 있지 않을까요. 양질전화가 되는, 폭발하게 되는...
 

이번주에 가장 놀란 책 중의 하나는 조너선 글로버의 <휴머니티>(문예출판사, 2008)이다(알라딘에는 '조나단 글로버'로 표기되고 있다). '20세기의 폭력과 새로운 도덕'이 우리말 부제이고, 원저의 부제는 'A Moral History of the Twentieth Century'이다. '20세기 도덕의 역사'쯤 될까. 일단 600쪽이 넘는 분량이 묵직하다. 저자는 생명윤리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저명 학자라고 소개돼 있는데, <유전자 혁명과 생명윤리>(아침이슬, 2004)의 공저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드물게 눈에 띈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 책은 다음 주중에나 읽을 수 있을 듯하다(예상할 수 있지만 '폭력의 세기'에 대한 윤리적 성찰인 만큼 편안한 책읽기는 기대할 수 없겠다).   

한국일보(08. 08. 02) 피의 축제는 지금도 춤추고 있다

국내에도 성공적으로 상륙한 캐나다의 공연단 ‘태양의 서커스‘가 지금 세계 유흥 도시의 고급 호텔에서 관객몰이를 하고 있는 공연물 중에 <주매니티>라는 성인물이 있다. 동물원(zoo)과 인간성(humanity)을 합쳐 만든 말로, 인간 속에 잠재한 갖가지 본능을 쇼의 형식을 빌어 시각화 한 무대다. 야수성, 색욕, 호전성 등을 라스베이거스 쇼처럼 풀어 보인다. 도덕과 윤리는 웃음거리가 된다.

‘20세기의 폭력과 새로운 도덕’이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지난 세기 서구 문명을 윤리의 잣대로 조명한다. 철학자 칸트가 말했던 바, “내 머리 위 별이 빛나는 하늘, 그리고 내 마음속의 도덕률”이라 했던 명제의 안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세계 대전의 살육, 아우슈비츠, 히로시마, 문화혁명,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유고슬라비아의 붕괴, 걸프전 등 대살육의 현장속으로 걸어가는 일이다. 보다 평화롭고 인도적인 세계에 대한 계몽주의적 희망을 찾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책은 하드 고어 영화의 상상력이 어디서 유래했는지를 보여주는 장문의 기록이다. “담벼락에 귀가 못질 당한 채 밤을 지샌 뒤 교수형을 당하고, 단검으로 자궁이 찢겨 태아가 끄집어내어지는 일이 일어나는 세상을 만든 신에게 물어볼 질문들”(57쪽)을 던진다.

프랑스 혁명은 루이 14세를 단두대의 제물로 바쳤다. 일단 잔인성의 충동질을 받은 사람들은 “그 피에 손가락을 찍어 보기도, 맛을 보기도”(61쪽)했다는 것이다. 그마저도 현대의 잔인성에 비하면 약소하다. “잔인성의 축제는 오늘날 최고조에 달했다”고 책은 단언한다. 최근 중동의 예를 보자. 두바이의 정치범 감옥에 고문실을 만든 영국 회사는 그 방을 ‘즐거움의 집’이라 했고, 고문자들은 아무런 가책을 받지 않았다. 고문 받고 죽은 이들을 던져 넣는 황산 탱크는 ‘수영장’이다. 그들은 “라디오나 TV에 의해 생각이 끊임없이 분산돼 있었다”며 “섹스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유머가 없었다”는 것이다.

책은 그를 두고 “우리는 가볍게 즐기지만 너희는 지옥을 경험한다는 메시지의 표출”이라며 “권력의 전시”라고 규정한다. 현대의 대량 살상전을 치른 병사들은 “집단으로 하는 살상은 흥분되는 일이며 심지어 즐거운 일”이라며 “그것을 사랑했다”고 고백하기까지 한다.

Cirque du Soleil - Zumanity

책은 이 시대에 던지는 심리학적ㆍ윤리학적 질문이다. 행위의 도덕성과 참혹한 결과 사이의 문제가 히로시마 원폭 투하의 사례를 통해 탐구된다. 책이 주목하는 것은 특히 원거리 대량 살상전의 경우, 책임이 파편화되면서 결국 소멸하기까지의 메커니즘이다. 동시에 후방에서는 민족ㆍ종족적 감정이 격앙되고 부정확한 뉴스탓에 증오의 메커니즘이 확대 재생산된다. 미소간 핵전쟁 발발 바로 앞에서 멈춘 1962년 쿠바 사태, 캄보디아 사태 등 현대의 예를 통해 정책과 커뮤니케이션의 명확함, 군대의 표류를 제어할 메커니즘을 강조한다.

책은 서양 문명을 근저에서부터 뒤집은 나치즘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종족주의, 왜곡된 수치감, 니체 철학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만든 국가사회주의를 본질로 하는 나치즘은 희생자들을 철저히 능멸하는 데 탁월한 자질을 발휘했다. 유대인에 대한 비인격화, 굴욕적 농담(처형을 ‘추수 축제’로 표현하는 등) 등 다양한 차원에서 나치즘을 분석한다. 동시에 ‘위대한 독일 철학의 시대’를 구현한 것으로 당대에 칭송 받은 하이데거를 정당한 평가의 도마에 올린다. “인간 하이데거를 버리고 철학자 하이데거만을 고려하는 것이 가능할까?”(581쪽)라는 질문이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와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스피노자의 낙관주의가 과연 이 시대에도 용인될 수 있을까? 그러나 저자는 이 책을 자식들에게 바친다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인간이 저지른 끔찍한 재앙에 맞선 인간애와 용기만이 온축되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하다.(장병욱 기자)

08. 08. 02.

P.S. 리뷰를 읽다 보니까 떠오르는 책은 '계급.인종.젠더를 관통하는 증오의 문화'란 부제를 가진 데릭 젠슨의 <거짓된 진실>(아고라, 2008)이다(리뷰는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802/h2008020122142984210.htm 참조). 이 또한 대단히 '하드 고어'적인 책인데, "총21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은이는 증오집단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하여 폭넓은 시야와 다양한 사례를 바탕으로 산업 사회 전체에 만연한 잔학 행위들의 뿌리를 추적하고 있다. 소수자 린치, 고문, 강간, 포르노 사이트, 아동학대, 노예화, 대상화, 계급착취, 생태파괴, 홀로코스트 등 현대 사회의 모든 문제를 이 책은 아우른다." 젠슨의 묵시적 비전을 보여주는 <문명의 엔드게임1,2>(당대, 2008)도 여차하면 손에 들어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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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8-03 20:25   좋아요 0 | URL
지엽적인 문제로 딴지를 건다는 생각도 들지만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왕은 루이 16세인데요.

로쟈 2008-08-03 20:31   좋아요 0 | URL
ㅎㅎ 기자가 실수한 건지 저자가 실수한 건지 모르겠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08-03 20:43   좋아요 0 | URL
이런 오류가 계속 나오네요...책들은 좋은 것 같은데...
 

대학강사의 처우 문제가 어제오늘 제기된 것은 아니지만 개선될 기미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특히나 요즘처럼 강의 소득이 전혀 없는 방학 때면 우스개소리로 대리(운전) 알바를 뛰어야 한다는 얘기도 강사들끼리는 한다(그런데 우스개가 아니다!). '비정규직 800만' 시대라고 하니 '비정규적 강사'의 존재 자체가 스캔들인 것은 아니다. 어떤 사회적 지위/계층의 존재와 그에 대한 대우는 온전히 그 사회 시스템의 산물이다. 800만 비정규직과 6만 5천여 시간강사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기반으로 하여 한국이란 사회의 시스템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면, 그리고 다수가 그걸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한다면 하는 수 없는 노릇이다. 총파업이라도 하든가, 아니면 굴종하든가. 다만, 그것이 부당하며 부도덕한 시스템이라는 것만은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저임금 착취를 등에 업고 자기 배를 불리는 자들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걸 지적하는 칼럼과 기사를 옮겨놓는다. 강명관 교수의 '고금변증설' 연재(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01994.html)와 경향신문의 '비정규직 800만 시대' 기획기사 중 시간강사에 관한 꼭지이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7281757155&code=210100). 이번주 신간 중 <여러분 참 답답하시죠?>(사회평론, 2008)의 저자 모모세 타다시는 한국이 선진국이 될 수 없는 이유로 “겉모양은 선진국인데 속에는 아직도 후진적인 생각, 가치관, 질서가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일류 국가가 되기엔 품격이 모자란 사회”라는 것이다. 그것도 좀 많이 모자란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하기야 현 정부에 와서는 아예 '품격'이란 말 자체가 사치스러워졌지만).

 

한겨레(08. 08. 02) 훈장 내쫓는 학부모, 강사 내모는 대학

박사과정을 마쳤으니 서둘러 학위논문을 제출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이 있다. 또 어렵사리 학위논문을 썼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논문을 써서 학문의 길로 일로매진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전자는 학위논문을 쓰지 않는다. 후자 역시 계속 논문을 써 내어 자기 학문의 밭을 일구지 않는다.

전자는 학위논문을 쓰기에는 너무 바쁘다. 학위과정을 밟은 대학에서 시간강의를 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만으로는 생계가 해결되지 않기에 다른 대학에서도 강의를 해야 한다. 어떤 경우는 과외도 한다. 후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시간강의는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고, 거기에다 이 연구소 저 연구소, 이 프로젝트 저 프로젝트로 옮겨 다니며 연구비가 아닌 생계비를 벌어야 하기에 차분히 자기 연구를 할 시간이 나지 않는다. 곁에서 몇 해를 지켜보지만, 공부에 큰 진척이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아 내심 답답하다. 문제는 공부하는 것을 평생의 일로 삼았지만, 그 일이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백범일지>는 구한말의 사회 사정을 아는 데 아주 요긴한 책이기에 자주 들추어본다. 백범이 공부를 소원하자 아버지는 문중과 동네 사람들과 의논해 상놈 아이들을 위해 서당을 열어준다. 수강료로 쌀과 보리를 모아 주기로 하고 이생원이란 선생을 초빙한 것이다. 백범은 이생원을 따르면서 열심히 공부했지만, 그는 반년이 되지 않아 해고된다. 멍청한 손자를 둔 신존위란 사람이 백범이 공부 잘하는 것을 시기해 이생원을 쫓아낸 것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이생원이 밥을 많이 먹는다는 것이었다. 백범이 실망했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나는 <백범일지>의 이 부분에서 늘 짠하였다. 하지만 밥을 많이 먹는 것이 해고의 이유라는 것이 어딘가 우스꽝스럽기도 하였다. 한데 임형택 선생의 ‘이조말 지식인의 분화’(<전환기의 동아시아 문학>, 창작과비평사, 1985)란 논문을 읽고는 백범의 선생 이생원만 당한 일이 아니라 매우 보편적인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논문은 ‘대구훈장 원정(原情)’이란 글을 소개하고 있다. 원정이란 요즘말로 진정서다. 곧 대구의 훈장이 관에 올리는 진정서다. 무슨 진정서인가. 논문을 따라가면서 읽어 보자.

충청도의 한 선비가 서울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10년 세월을 놀다 보니 주머니는 바닥이 나고, 과거에 합격할 길도 아득히 멀어진다. 어쩔 수 없이 타관 객지 시골 서당에서 훈장으로 나선다. 그야말로 쥐꼬리만 한 보수를 받고 <사략> 첫째 권을 꼬맹이들에게 가르치노라니, 정말이지 신세가 처량하다. 한데 훈장을 초빙한, 제자들의 아비들이 “타관 양반인데, 예조(禮稠) 한 섬, 의자(衣資) 반 냥을 주지 않은들 어찌하겠느냐”며 그 쥐꼬리조차 떼어먹으려 든다. 훈장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가족들이 눈에 어른거려 다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궁한 사정을 하소연하자, 그들은 냉소를 하면서 지껄인다. “이 양반이 세상 물정도 모르는군. ‘생원의 문자’는 값이 대체 얼마요? 그동안 먹은 밥값으로 치면 될 터이지. 의자고 예조고 말도 꺼내지 마시오.” 이 말에 훈장은 관청에 진정서를 올린 것이다.

<백범일지>의 이생원이 밥을 많이 먹는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한마디 말도 못하고 해고되었듯, 대구 훈장 역시 보수를 주지 않는 학부형들에게 거세게 대거리를 하지 못하고 만다. 보수를 주는 쪽이 약자의 호소할 데 없는 처지를 십이분 이용하여 횡포를 부린 것이다.

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는 분들을 훈장에 견주어 대단히 송구스럽지만, 백범의 선생을 내쫓은 자와 훈장의 보수를 떼어먹은 자들이 한 짓거리가 지금의 대학이나 정부의 강사 대우와 다른 것이 무엇인가. 시간강사의 강의료라는 것은 말로 꺼내기에도 창피할 정도라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이다. 강의료를 올리고 신분을 보장해 달라는 요청은, 나도 20년 전에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이 없다. 왜냐고? 대학과 정부가 강사들이 절대적인 약자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적극 이용하기 때문이다. 전국강사노조가 있지만, 이들이 한 목소리를 내기란 참으로 힘들다. 강사는 학기 단위로 위촉되기 때문에 그 학기에 한해서 강사 신분을 갖는다. 또 자신을 가르친 선생들이거나 아니면 이런저런 연고로 다 익히 아는 분들이 강의를 의뢰한다. 그분들의 안면 때문에 힘 있는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 그런가 하면 곧 시간강사를 그만두고 전임 자리를 얻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그러니 강사노조에 힘이 모일 리 없다. 이런 약점을 대학은 십이분 이용하는 것이다.

먹고사는 일보다 절박한 일은 없다. 젊고 에너지가 넘치는 시절을 생계비 버는 데다 보낸다면, 그 뒤 무슨 정열과 힘이 남아 연구를 한단 말인가. 대학에서 쥐꼬리 같은 강사료를 받아서는 살 방도가 없다.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의 대학은 강사에게 정당하게 지급해야 할 강의료를 착취함으로써 자기 덩치를 유지하고 있다. 대학은 다른 어느 기관보다 도덕성이 요구되는 곳이다. 그런데 자신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자들의 노동력을 이토록 착취해서야 되겠는가?

대학마다 요사이 하는 말인즉 발전기금을 모은다, 세계적 대학을 만든다고 자랑이다. 좋은 말이기는 하지만 그 말에 별로 믿음이 가지 않는다. 자기 대학에서 가르치는 강사들을 저임금으로 착취하는 대학의 행태는 훈장의 예조와 의자를 떼어먹는 아비들의 짓거리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대학이 언필칭 내세우는 발전과 개혁이란 구호가 위선이 되지 않으려면, 강사 처우 문제부터 해결하시기 바란다. 그게 학문 후속세대를 키우고, 대학을 발전시키는 지름길이다.(강명관/부산대 교수·한문학)

경향신문(08. 07. 29) [비정규직 800만 시대]“대학 교육 절반 담당… 월급 60만원대”

28일로 326일째.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는 대학 시간강사들의 천막농성이 열리고 있다. 처음 스무 명으로 시작한 농성인원은 이제 다섯 명으로 줄었다. 1주일의 절반은 대구에서 올라오는 강사 3명이, 나머지 절반은 서울지역 강사 2명이 돌아가며 천막을 지키고 있다. 먹고 자는 일을 모두 천막 안에서 해결해왔지만 최근 폭우가 쏟아지면서 천막을 지키는 일조차 힘들어졌다. 이들이 폭우와 무더위 속에서도 천막을 지키는 것은 대학 시간강사의 교원 지위 확보를 위해서다.

대학 시간강사들. 이들은 현재 대학 교육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고 있는 비정규직이다. 교육개발원에 따르면 2007년 전국 4년제 대학의 전임교원(정규직 교수)은 5만5612명으로 시간강사 6만5399명보다 적다. 하지만 교양강좌의 경우 전임교원 강의(5만636개)보다는 시간강사 강의(7만8204개)가 훨씬 많다. 계약기간이 정해진 비전임교원들의 강의(2만5381개)까지 합하면 전임 교원 강의 수의 두 배에 이른다. 그러나 노동자로서 이들의 처지는 일반기업의 비정규직 노동자와 다를 게 없다. 그보다 더 못한 경우도 흔하다. 시간강사들은 따로 고용계약서가 없고 시급을 적용받는다.

교수신문이 전국 30개 대학을 조사한 결과 2008년 평균 시급은 4만1000원. 보통 한 학기에 두 강좌씩 맡는 것을 기준으로 하면 한 달에 16시간을 강의(강좌당 1주일에 2시간 강의 기준)하고 받는 월급은 64만원 정도다. 학교에 따라 연이어 강의를 하면 한 학기를 쉬거나 학교별로 한 사람의 강의 숫자를 제한하고 있어 시간 강사들의 수입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서울과 지방을 오가는 교통비와 숙박료를 부담해가며 강의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4대 보험 가입률도 낮다. 고용보험이나 산재보험에만 가입되고 이마저 허용하지 않는 대학도 14곳이나 된다.



서울 소재 사립대학 두 곳에서 강의하고 있는 김영곤씨(61)는 “대학만큼 악랄한 사용자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A대학에서 시간당 5만300원씩 1강좌, B대학에서 3만원씩 2강좌를 하는 김씨의 한 달 급여는 88만2400원이다. 방학 때는 계절학기 강좌를 잡지 못하면 수입은 0원이 된다. 적은 월급보다 더 힘든 것은 다음 학기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다. 김씨는 “어떤 설명도 없이 다음 학기 시간표에 이름이 없으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말했다. 당장 다음 학기의 수입을 예상할 수 없으니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도 어렵다.

1995년부터 시간강사로 일해 온 한수경씨(42·가명)는 “50대가 되어서도 이렇게 살아야 하나 생각하면 불안하다”고 말했다. 한씨는 “공부가 좋아 적게 벌어도 공부하며 늙자고 생각했는데 한 달에 50만~60만원 수입으로는 하루하루 버티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한씨는 “강사 자리는 알음알이로 채용되기 때문에 그나마 있는 강의라도 잘리지 않으려면 단체행동을 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한 시간강사는 “다들 쉬쉬하지만 시간강사들의 이혼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 귀띔했다. 1999년 이후 시간강사 6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열악한 처우가 몇 차례 사회문제화됐지만 그때뿐이었다.

대법원은 지난해 “시간강사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판결했으나 현실은 그대로다. 학교 노동자라는 특성상 이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서는 근로기준법 외에 특별법을 따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학교법과 노동법 사이에 끼어 어느 쪽에서도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강사의 교원으로서의 법적 지위 확보가 시급하다고 주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2004년 국가인권위에서 차별개선에 대한 권고안을 교육부에 냈으나, 교육부는 뚜렷한 답을 내놓지 않았다.

지방의 한 국립대에서 10년 가까이 시간강사로 일해 온 하모씨(49)는 “대학은 해고도 편하고 임금도 적은 시간강사들을 쉽게 쓰고 버리고 있고, 정부는 모른 척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동애 교원법적지위쟁취특별위원장은 “시간강사는 일반 직장인보다 10년 늦게 사회에 진출하게 된다”며 “학문이나 직업의 특수성은 전혀 인정되지 않고 다른 길을 찾기도 힘든 나이에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반항할 겨를도 없이 착취당하고 있다”고 말했다.(장은교기자)

08. 08. 01.

P.S. 시간강사 문제에 대해서는 두 차례로 나뉘어 게재된 한겨레21의 르포기사가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대학의 작은 지옥'(http://h21.hani.co.kr/section-021046000/2008/08/021046000200808070722057.html)과 '정규직 교수가 비극을 끝내라'(http://h21.hani.co.kr/section-021046000/2008/08/021046000200808140723013.html)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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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정규 교수가 쏘아 올린 작은 공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4-25 21:21 
    이번주 신간 국내서 중에는 작년에 비정규 교수(시간강사) 문제를 다룬 프레시안의 연재 '벼랑 끝 31년, 희망 없는 강의실'을 묶은 책도 포함돼 있다. 해가 바뀌어서 제목은 <비정규 교수, 벼랑끝 32년>(이후, 2009)이 됐다. 따로 서평이 뜨지 않아서 프레시안의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      프레시안(09. 04. 25) 32년 동안 모두 알면서 말하지 않은 정답  때때로 묻
 
 
paviana 2008-08-01 23:47   좋아요 0 | URL
며칠전 시간강사인 친구를 만났는데 백수인 제가 술값을 계산했어요. 방학이잖아요.사정 뻔히 아는데 계산하게 둘 수가 없더라구요.에이참..

람혼 2008-08-02 01:23   좋아요 0 | URL
갑자기 눈물이 울컥... ㅜㅜ

로쟈 2008-08-02 17:52   좋아요 0 | URL
저도 어디 가서 계산하는 일은 드뭅니다. 강사들만 있을 때를 빼곤.^^;

porori 2008-08-02 01:24   좋아요 0 | URL
제생각엔요...강사료가 저렇게 저임금이라면 열심히 강의 준비를 하는 사람은 드물것 같습니다. 특히 교양과목이라면 학생들이랑 농담하면서 딱 60만원어치의 정보와 지식을 주지 않을 까요?? 학생들은 또 지적 소득없이 학점만 따 갈테고요... 또, 좋은 학점을 위해 학생들은 교수/강사에게 약간의 굴종을 해야 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아요. 왠지 악순환 같은데요..
학생입장에선 학점 때문에 돈을 지불 하면서 '굴종'을 겪으니, 저로선 학생이 가장 약자가 아닌가 싶습니다..^-^

털세곰 2008-08-02 16:34   좋아요 0 | URL
할 말은 아니지만 강사료 비싼 학교의 수업은 솔직히 신경 더 많이 씁니다. 강의평가도 있거든요. 강사로 싼 곳은 주는 만큼 한다는 생각으로 가끔 태업도 합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학생에 대해 약간의 "권한"을 갖고, 그것을 행사하기를 때로는 꺼리지 않는 제 자신을 발견하면서 상당히 놀라고 있습니다

로쟈 2008-08-02 17:55   좋아요 0 | URL
그게 요점입니다. 사실 학교와의 관계에서 강사들은 '약자'이기 때문에 선뜻 나서질 못하는데요. 학생들이 정당한 권리를 주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학생들은 수업료를 내므로 교육 '소비자'입니다. 약자가 아니예요. 당연히 강사들 수업은 안 듣겠다고 당연히 보이콧해야죠! 대학에선 자질이 안되서 전임으로 못 뽑는다고 하니까...

anathema 2008-08-02 08:58   좋아요 0 | URL
작년에 시간강사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왕복 차비(저희 집에서 학교까지 왕복 6시간)와 강사료가 같아서...

로쟈 2008-08-02 17:56   좋아요 0 | URL
그걸 대단찮게 생각하는 대학이 문제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02 16:06   좋아요 0 | URL
여기도 댓글들이 슬프네...제가 학교 다닐 때 29살 먹은 남자가 전임강사로 온 적이 있었는데 이젠 이런 일은 없겠죠?

로쟈 2008-08-02 17:57   좋아요 0 | URL
대학 강의의 절반 이상을 강사들이 담당하고 있는데, 대우는 반에 반 수준도 안되는 게 문제입니다. 그걸 감수하는 강사들의 '마인드'도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안되구요...

노이에자이트 2008-08-02 20:23   좋아요 0 | URL
더 슬퍼요...

로쟈 2008-08-03 00:31   좋아요 0 | URL
최석하의 '죽'이란 시가 생각나네요.ㅠㅠ

천재뮤지션 2008-08-03 11:26   좋아요 0 | URL
그 놈의 BK21. 휴...
전 그래서 이제는 민간차원의 지원이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직 구체적인 방안은 잘 모르겠지만...

(자선의 정치.)

로쟈 2008-08-03 20:29   좋아요 0 | URL
구체적인 방안이 떠오르면 알려주시길.^^

노이에자이트 2008-08-03 20:20   좋아요 0 | URL
그리고 우리나라 호칭문제인데 같은 나이라도 교수는 무슨 무슨 교수인데 시간강사는 무슨무슨 씨라고 해서 구별을 짓더라구요.우리나라 호칭에 직함이나 직업 붙이는 관행이 굉장히 잔인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사실 저는 모두 씨를 붙이는 평등호칭을 찬성합니다.시사잡지 보면 80년대까지 그랬거든요.

로쟈 2008-08-03 20:28   좋아요 0 | URL
미시정치죠.^^ 퇴직하거나 사직해도 '전(前)교수'라고 붙이죠. 장관이나 의원처럼. 예전에 교수가 드물던 시절에는 사회적 예우였겠지만(검사들이 영감님 행세하던 시절) 요즘은 그저 '관행'으로 남은 듯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03 20:50   좋아요 0 | URL
예...그 전 장관이니 교수니 그런 것 좀 없앴으면 좋겠어요.특히 라디오 시사프로에서 진행자가 그렇게 부르면 진짜 이상해요.그런 관행 때문에 직함이나 이런 걸 강조하는 풍토가 안 없어지죠.인간 자체를 존경하는 호칭이 없어요. 저는 어린이에게 존대말 쓰자는 방정환 님의 뜻을 따르고 있죠.

로쟈 2008-08-04 13:13   좋아요 0 | URL
한국어 경어체계는 미덕과 악덕을 고루 갖춘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