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 신드롬의 허와 실'을 다룬 한겨레의 '우리시대 지식논쟁'에서 마지막 꼭지를 옮겨놓는다. '지젝 전문' 번역자이기도 한 이성민씨의 글이다(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91981.html).

우리시대 지식논쟁/ 지젝 신드롬의 허와 실 ③ 지젝을 제대로 읽는 법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에 대한 마지막 글이다. 3주 전, 논쟁의 운을 뗀 이현우씨는 우리 시대의 이념적 지형을 이해하고 돌파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다며 지젝의 급진성에 주목했다. 박정수씨는 이러 주장을 반박하며 지젝의 사유에 새로운 세계를 창안하는 실천적 돌파구가 결여돼 있다고 했다. 이 논쟁의 마지막 글을 맡은 이성민씨는 박정수씨를 다시 반박한다. 지젝이 말하려는 것은 혁명 그 자체가 아니라 ‘혁명의 조건’이라고 지적한다. 그 조건의 핵심은 욕망하고 향유하는 각 개인, 곧 주체다. (제도로서의) 대안을 말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바로 욕망을 향유하는 개인의 변화다. 그런 변화는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지젝이 던지는 급진적 사유의 중핵이라는 게 이성민씨의 생각이다.(안수찬 기자)

한겨레(08. 06. 07) 혁명의 주체가 혁명의 대상이다

오늘날, 미국식 세계 자본주의가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지구상에서 혁명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물론 오늘날 미국적 문명 자체의 궁극적인 위태로움이 조금씩 감지되고 있지만 말이다. 아마도 빙하가 녹아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정도로 사람들은 또한 저 위태로움을 감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마치 혁명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기라도 하는 듯 끊임없이 ‘혁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한 명 있는데, 그가 슬라보예 지젝이다. 그런데 그의 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는 누구보다도 혁명이 오늘날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유럽문명의 미래와 관련하여, 혁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젝의 정치적 저술들을 읽을 때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혁명에 대한 직접적인 요청으로 읽을 때 반드시 그를 잘못 읽게 된다. 박정수씨는 지젝의 정치적 기획이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결합한 글로벌한 국가체제(제국)를 수립하는 것에 있다고 하면서, 이현우씨의 글을 오독했을 뿐 아니라, 지젝 자신을 오독했다. 지젝은 그런 말을 한 적이 단적으로 없다. 게다가 이러한 오독을 염려하여, 지젝은 레닌의 반복이 레닌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님을 명시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오히려 그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비롯한 레닌의 방식들을 따져보면서, 오늘날 혁명의 조건 그 자체를 탐색하고 있다.

이렇게 말해본다면, 지젝은 혁명 가능성의 조건을 탐구하는 사람이다. 그는 오늘날 혁명이 가능하다고 말하기에 앞서서 반드시 묻지 않으면 안 될 물음을 묻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생략될 수 있는 물음이 아니다. 그것은 혁명에서 혁명적 주체를 생략할 수 없는 만큼 생략할 수 없는 물음이다. 그런데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으면서 지젝은 전통적으로 정치적 혁명에 대해 가장 회의적이었던 사상을 끌어들인다. 그것은 바로 프로이트에 의해 개시된 정신분석이다. 프로이트는 볼셰비키 혁명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회의적이었다. 라캉이 서유럽의 68혁명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회의적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지젝의 혁명에 대한 단적인 규정은 이렇다. “근본적 혁명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오래된 해방적인 꿈을 실현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의 꿈꾸는 양태 그 자체를 재발명해야만 한다.” 정신분석적 통찰을 담고 있는 이 말은 무의식을 건드리지 않는 혁명은 혁명이 아니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혁명은 단지 국가를 전복하는 행위에 불과하지 않다. 그런 일이라면 사실, 서유럽인들은 몰라도 한국인들은 이미 여러 번 해본 경험이 있다. 정신분석이 혁명에 대해 회의적인 이유는 주체 편에서의 변화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술에 의지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저 유명한 남자들이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지젝이 이와 같은 정신분석적 통찰을 자신의 정치적 사유에 끌어들이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혁명을 하지 말자고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혁명에 대한 더욱 근본적인 규정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다.

그런데 혁명에 대한 이와 같은 규정은 생각해보면 결코 새로운 규정이 아니다. 그것은 예컨대 새로운 학문적 발견이 아니다. 그것은 실상 우리가 심중에서 잘 알고 있는 진리이다. 하지만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어떤 것이다. 오늘날 진보적인 정치학자들이나 활동가들은 지금도 새로운 변혁의 전략을 짜느라고 분주할지 모른다. 혹시 그들이 진보를 믿고 있다면 말이다. 오늘날의 상황이 좌파에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이명박씨의 눈물 나는 참회가 잘 알려주듯이, 우파에게도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우리의 자부심인 민주주의는 바로 이만큼 정치가들에게 공평한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해서 조금 더 말해보자. 한때 지젝은 민주주의를 최선책은 아니지만 차선이라고 하면서 옹호했다. 서유럽 학자들이 근본적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을 때, 그도 이러한 희망에 동참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얼마 후 이러한 자신의 입장을 취소했으며, 민주주의는 궁극적 대안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궁극적 대안이 무엇인지 자기 나름의 의견은 전혀 밝히지 않으면서 말이다. 언뜻 위선적으로 보이는 그의 제스처에서 진리를, 이 시대의 증상을 읽어보자.

이 시대는, 이렇게 말해본다면, 문명사적 문제를 우리에게 서서히 내밀고 있다. 이는 단지 국가와 국가의 관계가 문제라거나 어떤 전지구적 문제가 있다는 모호하거나 동원력이 없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류가 스스로의 소비와 향유방식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재고해야 하는 때가 도래하고 있다는 말이다. 예컨대 오늘날 인류가 처한 환경적 재앙의 문제가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본연의 환경 운동은 오늘날, 정치적 장을 벗어나 광범위한 소비 운동과 병행되고 있다.

이러한 문명사적인 문제는 단지 정치적 제도나 경제적 제도 내에서만 제기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이나 예술이나 교육이나 연애 등을 비롯해서 인간의 문명적 활동 전 영역에서 제기되는 것이다. 지젝은 향유를 정치적 요소로서 보아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 향유와 향유의 방식 그 자체가 문제라는 핵심적 요점을 담고 있기에 올바른 방향에 서있는 말이다.

아마도 미국인들이 북한에서 발견하고 싶은 첫 번째는 코카콜라나 맥도널드 광고판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의 향유 방식이 이슬람권이든 북한이든 가리지 않고 전세계에 유통되기를 원할 것이다. 아시아인들이나 유럽인들은 그 방식이 얼마나 저급한 것인지를 알 정도의 문명적 존엄감을 아직은 잃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라캉의 가르침에 따라서, 향유를 정치의 핵심적 요인으로 제출하는 지젝의 제스처를 우리가 함께 떠맡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동시에 우리는 민주주의나 여타의 대안적 정치 체계에 대한 논의보다 훨씬 중차대한 과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감각을 획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안적인 구체적 정치 체계에 대한 지젝의 집요한 침묵에서 내가 읽고 싶은 진리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문명을 구성하는 일체의 것을 재발명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다면, 오늘날 각자가 스스로 선택한 영역에서 해야 할 일은 실로 너무나도 많은 것이다. 이것이 내가 지젝의 통찰을 빌려, 욕망을 상실한 오늘날의 우울한 주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이성민/도서출판 b 기획위원)

08. 06.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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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2008-06-07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을 접하게 된 것이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였는데, 당시 지젝이라는 이름조차 생소했던 상태에서 무엇인가 '발견했다'는 기쁨을 느끼게 해준 책이었습니다. 물론 '이해한다는 것'은-그것이 창조적인 오독이라 할지라도- 무척 어려웠지만.....때로는 이해에 앞서서 무엇인가 전율과 진실을 느끼게 하는 글들이 있는데 지젝의 경우가 그런 경우가 아닌가 싶습니다. 선생님(?)의 번역 덕분에 느낄 수 있는 행복이었습니다.
이제는 이 서재에 매번 들르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건강하시길 빕니다. 앞으로도 멋진 번역 부탁드립니다.....

참, 우문 한 가지~ 지젝이 꼽은 네번째 주저 "The Parallax View"는 현재 번역 중에 있는건가요?^^+

로쟈 2008-06-08 22:13   좋아요 0 | URL
제가 번역한 게 아닌데요.^^; <시차적 관점>은 짐작에 하반기나 내년에 나올 거 같습니다. 저도 번역을 맡을 뻔하긴 했지요. 저는 좀 짧은 논문 한편을 번역하게 될 거 같습니다...

김상호 2008-06-10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근데요. The Parallax View를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건가요? 똑같은 이름의 영화는 '암살단'으로 번역되거든요. 궁금궁금

p.s. 그 책 뒷 날개 사진이 참 재미있던데요.

로쟈 2008-06-10 13:12   좋아요 0 | URL
'시차적 관점' 정도로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요. 시간차가 아니라 시선(시각)의 차란 뜻의 '시차'로...
 

한국식으로 하면 '재야 철학자' 이정우씨의 새로운 책이 출간됐다. 좀 뜸하다 싶었는데, 작년에 나온 <세계의 모든 얼굴>(한길사, 2007)에 이어지는 것이니 격조했다고 할 수는 없겠다. 어째 표지는 그럴 듯해 보이지 않지만 흥미로운 철학사 이야기가 될 듯싶다. 관련리뷰를 챙겨놓는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91979.html).

한겨레(08. 06. 07) 서양철학사는 플라톤과 니체의 전쟁사

대학 제도 바깥에서 사유의 길을 닦고 있는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원장이 새 저서 <신족과 거인족의 투쟁>을 펴냈다. 제목만 보면 <반지의 제왕> 부류의 판타지 소설을 연상하기 쉽지만, 이 책은 서양철학사 전체를 철학의 근본문제인 존재론 차원에서 조망한 책이다. ‘이데아와 시뮬라크르’라는 부제가 이 책이 겨냥하는 바를 제대로 보여준다. 여기서 신족과 거인족의 투쟁은 존재와 비존재, 실재와 가상, 진짜와 가짜, 이데아와 시뮐라크르라는 이원적 대립항들의 철학적 투쟁에 대한 은유다.

이 은유는 플라톤의 후기 저작 <소피스테스>에 등장한다. “실재를 둘러싼 논쟁이 너무나도 격렬해서 사실 우리는 그들 사이에 마치 (신족과) 거인족의 전투라도 벌어지는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되는구려.” 이 싸움을 플라톤은 자기 앞세대 그리스 철학사를 명료하게 정리하는 차원에서 불러들이는데, 지은이는 이 플라톤의 싸움을 서양 철학사 전체의 근본적인 싸움으로 확장한다. 플라톤을 필두로 한 신족에 대항해 거인족들이 벌인 싸움으로 철학사를 보는 것이다. 그 거인족의 선두에 프리드리히 니체가 서 있고, 앙리 베르그송이 니체의 계보를 잇는다.

이 책의 출발점은 ‘신족과 거인족’ 비유가 등장하는 플라톤의 <소피스테스>다. 이 책은 “존재 물음을 체계적으로 다룬 최초의 텍스트다.” 지은이는 이 텍스트를 꼼꼼히 분석해 존재의 문제가 어떻게 철학의 근본문제로 탄생하고 확정되는지를 보여준다. <소피스테스>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이 텍스트는 흔히 궤변론자로 번역되는 소피스트(그리스어로 소피스테스)가 누구인가라는 현실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텍스트다.

이 텍스트는 플라톤의 모든 저작이 그렇듯이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지은이는 이 ‘대화’라는 텍스트 성격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철학은 대화에서 태어났다는 것인데, 좀더 강하게 표현하면, 대화 형식의 투쟁에서 철학이 생겨났다는 것이 지은이의 설명이다. 무기를 들고 벌이는 전쟁이 아니라 말로, 로고스(말·논리·이성)로 하는 전쟁, 아고라(광장)에서 입으로 벌이는 정치적 전쟁이야말로 철학의 발생지점이었다. 그러니까 철학은 단순한 관조나 사유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싸움, 정치적 공방에서 시작됐다는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정치적 주도권을 둘러싼 ‘담론투쟁’이 철학의 자궁이었던 셈이다. 그 자궁의 풍경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텍스트 가운데 하나가 이 <소피스테스>다.

그런데 왜 소피스트라는 문제에서 존재론적 문제인 ‘이데아’가 도출되는 것일까. 플라톤에게 소피스트는 ‘가짜 지식인’ ‘가짜 철학자’였다. 문제는 그들이 대단한 지식과 논변으로 진짜처럼 보이는 외관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스 후기의 혼탁한 시대에 가짜들이 진짜 행세를 하고 다녔던 것이다. 어떻게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있을 것인가. 거기서 플라톤은 가짜와 구별되는 ‘영원한 진짜’를 상정하게 된다. 이 ‘영원한 진짜’, 참된 실재가 이데아다.

정치가를 들어 설명하면 더 이해하기 쉽다. 수없이 많은 가짜 정치가들 사이에서 진짜 정치가를 어떻게 식별할 수 있을 것인가. 플라톤은 정치가의 이데아, 곧 참된 정치가의 형상이 따로 있으며, 현실의 정치가는 그 이데아를 나누어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데아를 적게 나눠 가질수록 저급한 정치가이며, 많이 가질수록 훌륭한 정치가가 된다.

그 이데아의 관점에서 보면 현실은 이데아의 모방·모사인데, 그것이 바로 시뮐라크르다. 시뮐라크르는 실재인 듯 보이지만 진정한 실재가 아닌 일종의 환영, 외관, 거짓 이미지일 뿐이다. 소피스트들은 철학자의 외관만 갖춘 가짜가 된다. 플라톤은 여기서 시뮐라크르를 기각하고 이데아를 참된 존재, 곧 실재로 삼는다. 그 플라톤주의 이분법이 2천년 서양 철학사를 규정했다.

이 장대한 역사에 반기를 들고 단기필마로 전쟁을 벌인 사람이 바로 니체였다. 거인족의 반격이 시작된 셈이다. “니체 이후 철학은 하나의 모토를 반복해 왔다. ‘플라톤주의를 전복하라!’” 플라톤주의의 전복이란, 이데아를 내치고 시뮐라크르를 복권시키는 일이다. 플라톤에게 시뮐라크르는 이데아의 모사일 뿐만 아니라 변화무쌍한 것, 끝없이 바뀌고 운동하고 흩어지고 사라지는 어떤 것이었다. 니체의 전복은 바로 이 변화와 생성과 운동이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 실재인 존재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을 뜻한다. 지은이는 니체의 ‘영원회귀’가 말하는 생성, 그리고 베르그송의 ‘생명과 지속’이 가리키는 생성이 그 새로운 존재론, 다시 말해 ‘생성존재론’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러나 니체도 베르그송도 그 생성존재론을 구체적으로 파고들지 못했다. 따라서 지금 중요한 것은 생성존재론의 구체적 양상을 해명하고, 거기에 입각해 윤리학과 실천철학을 구성해 내는 일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고명섭 기자)

08. 06. 06.

P.S. 사실 <신족과 거인족의 투쟁>은 저자의 근간으로 이미 작년부터 예고된 책이다(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96726.html). 아니 작년에 나온다고 했던 책이니까 다소 늦어진 책이다. '예고'는 이랬으니까.

“지금까지 쓴 책들은 대체로 대중 교육용 책이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철학서를 쓰겠다.” 그가 계획한 책 가운데 일부는 올해부터 출간될 예정이다. 그 중 가장 먼저 나올 책이 <신족과 거인족의 투쟁-이데아와 시뮐라크르>다. 이 책은 서양 철학을 신족과 거인족의 싸움으로 규정한다. 플라톤이라는 신족이 펼친 ‘존재의 철학’에 대항한 것이 니체·베르그송·들뢰즈라는 거인족의 ‘생성의 철학’이라고 그는 말한다.

올해 나올 또하나의 책은 <천하나의 고원-소수자 윤리학을 위하여>이다. 들뢰즈가 <천 개의 고원>에서 보여준 사유를 비판적으로 검토해 새로운 윤리학을 정립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다. 서구에서 68혁명이 새로운 실천철학을 낳은 계기였다면 우리의 경우엔 1987년 6월항쟁이 그런 계기를 마련해주었다고 그는 평가한다. 그의 관심은 지배적 다수의 윤리학이 아닌 소수자의 윤리학, 소수자들의 연대를 통한 보편적 윤리의 정립에 있다. 세 권짜리 <세계철학사> 시리즈도 올해부터 나올 예정이다. 첫쨋권 <지중해 세계의 철학>은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서양 철학의 흐름을 살피는 책이며, 둘쨋권 <아시아 세계의 철학>은 동북아를 중심으로 하여 아시아 지역 철학사의 맥을 짚는다. 셋쨋권 <근현대 세계의 철학>은 앞의 두 권으로 철학사의 흐름을 잡은 뒤 그 위에서 오늘날에 직접 영향을 주고 있는 철학 사조들을 검토하는 책이 될 예정이다.

그의 철학사가 순조롭게 완결되기를 기대한다. '재야'에서의 이러한 노력에 견줄 만한 강단철학의 성과들도 덩달아 나온다면 더욱 좋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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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young 2008-06-07 21:29   좋아요 0 | URL
김상환씨도 책 한 권 낼 때가 된 것 같은데 아직 감감 무소식이군요...

로쟈 2008-06-08 22:17   좋아요 0 | URL
강단쪽에서도 사실 몇 분 안되죠. 책을 내시는 분들이...
 

오늘은 스페인의 시인 가르시아 로르카가 태어난 날이라고 한다. 언젠가 <사랑의 시체>(솔, 1995), <강의 백일몽>(민음사, 1994/2003) 등의 시집을 뒤적거려본 게, 그리고 책을 만들면서 몇 마디 인용한 게 개인적인 '인연'의 전부이지만 왠지 친숙하게 느껴지는 이름이다(그의 생애를 다룬 영화 <데스 인 그라나다>는 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최근 선보인 펭귄 클래식의 1차분 11권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띈 건 그의 산문집 <인상과 풍경>(펭귄클래식코리아, 2008)이었다. 로르카가 스무 살 때 쓴 것이라 하니 그의 '스무살, 내 청춘'이라 할 만하다. 장마가 끝나면 햇볕 아래서 읽어볼 만하겠다.

한국일보(08. 06. 05) [오늘의 책<6월 5일>] 인상과 풍경

1898년 6월 5일 스페인의 시인ㆍ극작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태어났다. 로르카에 관한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그의 시 한 편을 발견했다. 작가 고 이병주가 대하소설 <지리산>에 인용한 로르카의 시다. ‘어디에서 죽고 싶으냐고 물으면 카탈루냐에서 죽고 싶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어느 때 죽고 싶으냐고 물으면 별들만 노래하고 지상에선 모든 음향이 일제히 정지했을 때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유언이 없느냐고 물으면 나의 무덤에 꽃을 심지 말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다.’ 로르카 시의 울림에 놀라고, 그를 인용한 이병주의 박학에 놀란다. <지리산>을 다시 읽고 싶어진다.

로르카의 생은 38년으로 짧았다. 프랑코가 스페인 내전을 일으킨 1936년, 그 해 8월에 로르카는 그의 고향인 그라나다를 점령한 파시스트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는 화가 살바도르 달리, 영화감독 루이 브뉘엘 등과 교유하며 20대 때부터 천재시인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스페인의 전통과 정서가 담긴 희곡을 잇따라 발표해 스페인 민중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면서 국제적으로도 명성을 떨치고 있던 로르카는 이미 좌파 인민전선을 지지하는 지식인 서명운동에 동참한 터였다. 그를 눈엣가시로 보았던 프랑코 정권은 로르카의 사후에도 20여년 동안 그에 대한 논의를 금지시켰다.

하지만 로르카의 3대 비극으로 불리는 <피의 결혼> <예르마>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은 한국에서도 연극과 무용으로 지금도 공연되고 있다. 그의 시집 <강의 백일몽>을 번역한 정현종 시인은 세계 3대 시인으로 괴테와 네루다, 그리고 로르카를 꼽을 정도다.

최근 펭귄클래식 번역판으로 나온 <인상과 풍경>은 로르카가 카스티야, 안달루시아 등지를 여행하면서 보고 느낀, 조국 스페인의 지역과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인상을 담은 산문집이다. 로르카가 스무살 때 출간한 첫 책인데, 아직 덜 여문 청년의 우수와 정열이 짙게 느껴지면서도 그 나이에 쓴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섬세한 시선과 내면, 그것을 표현하는 문장이 놀랍다.(하종오기자)

08. 06. 05.

P.S. 앤디 가르시아가 로르카 역으로 연기한 영화 <데스 인 그라나다>(원제는 '가르시아 로르카의 실종')의 한 장면은 http://kr.youtube.com/watch?v=O8-eQLb8p3A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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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6-05 17:20   좋아요 0 | URL
천재시인에 잘생기기까지 했지만 세상은 공평한지 그에게 단명이란 핸디캡을 줘버렸군요.^^

로쟈 2008-06-06 12:04   좋아요 0 | URL
'장수한' 시인이란 말은 왠지 어색하지요.^^;

노이에자이트 2008-06-05 23:40   좋아요 0 | URL
전두환의 심정을 대변하겠다며 자진해서 나선 이병주 씨...해박한 지식의 소유자임은 분명하지만 로르카의 치열한 삶과는 전혀 대조적인 기회주의자! 그가 스페인인이었다면 프랑코를 미화한 전기를 썼을 겁니다.

로쟈 2008-06-06 12:13   좋아요 0 | URL
공지영씨의 회고는 좀 다르던데요. "이병주…. 나는 그를 생각하면 하는 수 없이 나의 이십대를 함께 생각하고야 만다. 1980년대 초,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 아래서, 젊은 날이 하염없이 한심해지고 있을 때 도서관 안에 도피하듯 틀어박혀 읽은 것이 그의 소설들이었다. 이 세상에서 되고 싶은 것도 하나 없고 되어야 할 것 하나 없던 것 같은 시절, 과연 생을 걸고 우리가 도전할 만한 것이 하나라도 있을까 하는 고민이 아마도 세상은 어차피 불의하고 불우하다는 확신으로 나른하게 굳어져 가고 있을 무렵이었을 것이다."

라로 2008-06-06 01:45   좋아요 0 | URL
제목을 보니까 갑자기 카잘스가 생각이 나네요~.^^;;
잘 지내시죠???(뜬금없는 인사에도 끄떡 없으실 로쟈님,,,)

로쟈 2008-06-06 12:14   좋아요 0 | URL
네, 그냥저냥 지내고 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6-07 00:24   좋아요 0 | URL
공지영 씨가 이병주 소설을 탐독하고 있었을 무렵.이병주 씨는 이미 전두환 씨를 비롯한 5공의 실력자들과 가깝게 지내고 있었습니다.그래서 5공 비리 청문회로 사면초가일 때 전두환은 가장 친한 문인이었던 이병주를 불러 자기의 심경을 구술하게 했습니다.그 무렵 검은 세단에서 두 사람이 같이 내리던 광경이 눈에 선합니다.
그가 타계 1년 전인 1991년에 <대통령들의 초상 우리 역사를 위한 변명> 서당 을 냅니다.박정희 시절 투옥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인지 박정희 욕은 많이 하지만 이승만과 전두환에 대한 평가는 후합니다.이승만에 대한 이병주의 평가는 관두고...
전두환에 대한 평가는 이렇습니다-한 마디로 전 대통령은 꾀를 부릴 줄 몰랐다.약은 데라곤 조금도 없었다.이를테면 직정경행이다.옳다고 믿는다면 추진하는 성미이다.술책을 꾸민다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었다.내가 그의 실수로 치는 언론통폐합이 바로 그 증거이다.언론통폐합을 위한 이유와 근거가 없진 않았겠지만 언론을 건드린다는 것은 벌집을 쑤셔놓는 거나 다를 바가 없다...중략..아무튼 전 정권의 언론통폐합이 실수였다는 것은 6공이 들어서자마자 폐합된 신문사들이 부활운동을 시작한 것을 봐서도 알 수 있는데 이것이 또한 전두환에게 꾀가 없었다는 것,약은 구석이 없었다는 것의 증거가 된다. 위의 책276-277쪽에서
5공 비리에 대해선 특히 친인척 비리에 대해선...
효도와 우애가 넘쳐 나라의 체통을 크게 상했다거나 국고를 비웠다거나 했을 지경이면 문제는 달라지겠지만 다소의 무리가 있었다고 해서 그것을 꼬투리로 잡아 나라의 수장이었다는 사람을 비리로 몰아부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위의 책 282쪽에서
한길사에서 이병주 전집을 낼 때 임헌영 씨같은 인사가 그의 작품에 대해 찬사 일변도의 추천사를 냈는데 저는 좀 거시기했습니다.

로쟈 2008-06-07 00:31   좋아요 0 | URL
부분적인 인용은 장정일의 책에서 읽어본 거 같네요. 문단은 원래 '좌우 합작'도 잘하는 곳이죠...

노이에자이트 2008-06-07 01:08   좋아요 0 | URL
이 책이 꽤 희귀본인데 장정일 씨는 독서일기에서 저보다 훨씬 더 살벌하게 이병주를 욕했죠.이 책도 이병주 특유의 그 현란한 박학다식을 늘어놓았기 때문에 문헌 해독력이 부족한 이들 넘어가기 딱 좋게 되어있습니다.불어를 잘하기 때문에 사르트르,레이몽 아롱,루이 아라공 등을 들먹이고...

로쟈 2008-06-07 12:01   좋아요 0 | URL
언제 한번 찾아보고 싶군요.^^

연두부 2008-06-07 13:20   좋아요 0 | URL
우연히 들렀다 두분의 댓글에 댓글..감동받고 갑니다...쩝

로쟈 2008-06-07 19:54   좋아요 0 | URL
의도적으로도 들러주시길.^^

노이에자이트 2008-06-07 23:43   좋아요 0 | URL
이인모 씨가 출옥한 뒤 이병주의 <지리산>을 읽고 엄청나게 분노했어요.역사허무주의라고...장기수들이 그때 출옥해서 제일 많이 읽은 책이 이태<남부군>과 이 책이었는데 역시 하나같이 분노하더라는 겁니다. <이인모 전 인민군 종군기자 수기> 이인모 기록 신준영 정리 (주)월간 말1992 153-154쪽에서

로쟈 2008-06-08 22:18   좋아요 0 | URL
<지리산>, <남부군> 모두 20년쯤 전에 회자되던 책들이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06-10 00:17   좋아요 0 | URL
네...그렇습니다.
그리고 로르카 전기도 나왔으면 좋겠습니다.그의 친구인 네루다 전기는 나왔는데...스페인 내전에 대해서 의외로 스펜인인에 대한 책이 별로 없어서요.두루티 전기는 나왔는데...프랑코 전기가 있어서 그럭저럭 도움이 되긴 한데(대현출판사 간)...너무 얇아서...
 

오늘, 아니 정확하게는 어젯밤에 읽은 칼럼 중의 하나는 '한겨레 프리즘'에 실린 고명섭 기자의 '죽은 권력의 사회'이다. 현 정세를 적확하게 표현해주는 듯싶다. 내친 김에 지나간 칼럼들도 몇 편 읽어보고 옮겨놓는다. 지난 두어 달의 추이가 그려진다.

 

한겨레(08. 06. 03) 죽은 권력의 사회

청와대를 저만치 두고 광화문 앞에서 수만명의 시민과 중무장한 공권력이 대치했다. 세종로 그 큰길을 좌우로 틀어막은 전경버스는 불통과 폐색과 단절의 상징물이다.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아무리 애타게 호소해도 버스로 둘러친 장벽은 요지부동이었다. 참다 못한 시민들은 장벽을 밀어붙이고 기어오른다. 불통이 된 권력은 그 안간힘을 향해 할론 소화기를 분사하고 물대포를 쏜다. 방패로 내리찍고 군홧발로 짓이긴다. 그러나 폭력이 커질수록 권력은 약해진다.

살아 있는 권력은 영향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니, 영향받을 줄 아는 권력만이 살아 있다. 들뢰즈도 말하지 않았던가. “더 많은 힘을 가지고 있을수록 그는 더 많은 방식으로 영향받을 수 있다.” 영향을 줄 생각만 하고 영향을 받을 생각은 하지 못하는 권력은 그러므로 무능한 권력이다. 입력된 프로그램의 명령을 끝없이 반복하는 기계와도 같아서 망가지고 난 다음에야 멈춘다.

한의학에서 쓰는 ‘불인’(不仁)이라는 말은 인체의 마비를 가리킨다. 인(仁)이 없는 상태, 느낄 줄 모르고 아파할 줄 모르는 상태, 요컨대, 감수성이 말라붙어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가 불인이다. 어질지 못하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아프고 슬프고 괴로운 마음을 읽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음을 느끼지 못하는 불도저에게 앞에 놓인 모든 것은 장애물일 뿐이다. 건물을 부수고 땅을 파헤치는 데 익숙한 불도저는 밀고 나가면 되는 줄 안다. 그것은 추진력이 아니라 무사유다. 현명한 스피노자는 말한다. “가장 큰 오만은 가장 큰 무지이며 가장 큰 무능이다.”

권력은 태풍과 같아서 민심의 바다 위에 떠 있을 때만 권력이다. 후끈거리는 대양의 열기와 습기를 빨아들이며 태풍은 힘을 키운다. 그러나 바다를 잃어버린 순간 태풍은 열대성저기압으로 변해 흩어지고 만다. 지금 민심의 대양은 인터넷에 떠 있다. 그런데도 낡은 관념에 붙들린 이 정부는 권부의 요직에 자기 식구를 앉히면 되는 줄 안다. 방송을 장악하고 신문을 들러리 세우고 사정기관을 틀어쥐면 일사천리일 줄 안다. 국민의 마음을 내다버린 권력기관은 아무리 단단해 보여도 껍데기일 뿐이다.

스피노자는 또 이런 말을 한다. “대중이 두려워하지 않을 경우, 대중은 두려운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이 소수의 이익이 아니라 공동체의 이익을 고려하면서 겸손과 후회와 외경을 그토록 장려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스피노자는 그 대중을 위해 <에티카> 뒤편에 이런 말을 써 놓았다. “오직 자유로운 사람들만이 가장 유익하고 가장 끈끈한 우애로 결합한다. 그들은 똑같은 사랑의 노력으로 서로 친절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오직 자유로운 사람들만이 서로에 대하여 가장 감사한다.”

촛불을 나눠 켜고 우비를 나눠 쓰고 김밥을 나눠 먹으며 불인의 권력과 맞서는 대중이야말로 우애의 공동체다. 얼굴을 본 적도 없고 이름을 불러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인사도 하기 전에 벌써 오랜 친구가 되는 만남, 그 자유인들의 공동체야말로 현실로 나타난 이상이다. 반면에 낡은 권력의 장벽 뒤에서, 이 시련이 어서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이들이야말로 허망한 권력에 사로잡힌 예속인이다. 광화문의 대치는 자유인 대 예속인의 대치다. 정부가 마지못해 ‘쇠고기 고시 연기’를 발표한 것은 말하자면, 시민들의 힘으로 전경 버스 몇 대가 끌려 나온 것과 같다. 그 버스들이, 장벽들이 모두 사라지지 않는 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명섭 책·지성팀장)

한겨레(08. 05. 13) 대중지성과 촛불 민주주의

대중은 20세기 현상이다. 정치의 지각을 뚫고 일어선 대중의 출현에 사람들은 놀라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귀스타브 르 봉은 <군중심리>에서 대중의 맹목성과 수동성을 분석했다. 대중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경멸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대중의 반역>에서 한 발 더 나아갔다. 그는 대중이 정치의 주체이자 주인이 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때의 대중은 익명성과 평균성을 본질로 하는 대중이다. 대중은 모든 것을 뒤엎을 수 있는 괴력의 존재이지만 그 존재 안에는 지성이 결여돼 있었다. 뇌는 없고 힘만 있는 괴물이 그가 발견한 대중이었다.

오늘 우리는 대중과 지성의 결합, 곧 대중지성의 등장을 본다. 대중지성이라는 새로운 현상 앞에서는 르 봉의 설명도 가세트의 해석도 낡은 것이 돼 버린다. 촛불을 켜 들고 자기 얼굴을 비추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맹목의 군중, 사나운 폭도를 읽어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작은 불꽃들이 모여 어둠을 밝힌다. ‘촛불 민주주의’라고 해도 좋을 현상이다.

대중지성은 말하자면, 촛불의 네트워크다. 청계천에서 3만 개의 촛불이 타오르기 전에 인터넷에서 수십만, 수백만 개의 촛불이 타올랐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싼 한국 정부의 졸속협상·자화자찬·감언이설, 은폐와 변명을 낱낱이 적발·해부해 퍼뜨린 것은 인터넷 대중이다. 어떤 이는 광우병 위험을 알리고 어떤 이는 검역주권을 문제삼고 어떤 이는 합의문 내용을 분석하고 어떤 이는 정부의 앞뒤 안 맞는 해명을 추적한다. 그 모든 것을 정리하고 퍼 나르고 댓글을 달고 문자를 보낸다. 지도부도 없고 관제탑도 없지만, 촛불만한 관심과 열정과 분노가 모여 거역할 수 없는 집합적 지성을 이룬다. 우리 뇌가 수없이 많은 뉴런의 집단 활동으로 창조성의 불꽃을 피우듯이, 인터넷상의 수많은 뉴런들이, 수많은 촛불들이 하나로 연결돼 거대한 지성을 산출한다. 이런 현상을 두고 네그리와 하트는 말한다. “만약 천재적 행위가 있다면, 그것은 대중의 천재성이다.”

그 지성의 힘이 현실의 정치권력을 흔들어 놓는다. 이명박 대통령의 누리집이 초토화되고, 대통령 탄핵 서명자가 130만 명을 넘어섰다. 대중지성의 위력에 당황한 정부는 배후를 찾는다고 법석을 떨었다. 배후 세력도 없고, 음모의 중심도 없다. 음모자가 있다면, 인터넷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음모자다. 인터넷을 통째로 철거하지 않는 한, 분노한 시민의 마음을 모조리 적출하지 않는 한, 음모는 사라지지 않는다.

대중지성은 네트워크 지성이다. 네트워크는 체로 걸러내듯 오류를 스스로 걸러내며 진화한다. 그렇다고 해서 대중지성이 언제나 옳다고 할 수는 없다. 뉴런의 총합인 우리 뇌가 총기를 잃고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도 하듯이, 대중지성이 자기 정화의 긴장을 놓으면 엉뚱한 방향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촛불이다. 촛불은 세상을 밝히기에 앞서 자기 얼굴을 밝힌다. 자기를 먼저 투명하게 내보인다. 그 투명함에선 거짓도 기만도 자라지 않는다. 정치가 앨 스미스는 이런 말을 했다. “민주주의의 해악을 치료하는 유일한 치료제는 더 많은 민주주의다.” 이명박 정부를 낳은 것도 민주주의이고 거기에 대항해 일어선 것도 민주주의다. 제도 민주주의의 결함을 메우고 극복하는 것은 촛불 민주주의다. 국가지성이 구멍 숭숭 뚫려 멋대로 날뛰고 고꾸라지는 걸 막으려면 대중지성이 더 많은 촛불을 들어야 한다.(고명섭 책·지성팀장)

한겨레(08. 04. 22) 윤리적 정치를 위하여

정치의 영토에서 진리를 추방한 사람은 한나 아렌트다. 아렌트가 보기에 정치와 진리는 섞여 앉으면 둘 중 하나가 죽는 상극이다. 아테네 시민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해 독배를 받아 마신 소크라테스는 진리의 무력함을 보여준 단적인 사례다. 정치는 진리를 실현하는 장이 아니라 진리를 죽이는 장이다. 반대로 진리가 정치를 장악했을 때 ‘진리의 폭정’이 시작된다고 아렌트는 말한다. 불완전한 인간들이 주장하는 이런저런 의견들은 진리의 눈으로 보면 무가치하다. 이 의견들을 쳐내고 제압하면 그것이 바로 진리의 독재다. 어떤 경우든 진리는 정치와 화해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진리와 가족유사성 관계에 있는 윤리는 어떨까. 진리를 추방한 아렌트도 ‘진실성’을 추방하진 못했다. 뻔뻔스런 거짓말이 정치적 효능을 자랑하는 경우가 많지만, 길게 보면 끝내 진실성의 힘을 이기진 못한다고 아렌트는 말한다. 진실성을 포함한 윤리는 정치를 정치답게 만들어주는 필수 조건이다. 아렌트의 이런 견해를 욕망의 문제로 풀 수도 있다. 인간의 욕망은 물질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윤리적 욕망도 있다. 물질적 향유를 넘어 자신의 삶을 윤리적으로 높이고 누리려는 욕망도 있다. 정치의 장에서도 이 욕망이 작동한다.

지난 몇년의 한국 정치는 바로 이 윤리적 욕망을 한없이 부추겼다가 끝없이 좌절시킨 과정이었다. 참여정부의 탄생은 이 윤리적 욕망의 한 극점이었다. 윤리적으로 하자 많은 후보를 제치고 또 ‘후보 단일화’ 약속을 선거 직전 파기한 비윤리적 일탈을 딛고 탄생한 것이 참여정부였다. 승리의 감격에는 윤리적으로 성숙한 정치에 대한 짙은 열망이 담겨 있었다. 참여정부 5년 동안 이 열망은 쉼없이 주저앉고 찌그러졌다.

2004년 6월 이라크에서 김선일씨가 살해될 때, 대통령 핵심 측근은 “사람 한 명 잡혀갔다고 파병철회하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고 냉정하게 무시했다.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참수 장면을 보면서 국민은 깊은 정신적 외상을 입었다. 국가가, 정치가 그 외상을 돌봐주기는커녕 되레 덧냈다. 윤리적 좌절감이 번졌다. 정권 초기 거셌던 이라크 파병 반대 운동은 물거품처럼 흩어졌다. 1년 뒤 대통령은 야당에게 연정을 제안하는 폭탄 선언을 했다. 태생 자체가 반윤리적인 정당을 향해 동거하자고 내민 구애의 손은 참여정부에 기대를 걸었던 이들의 윤리 감각을 뿌리까지 흔들어 놓았다.

윤리적 허무의 자리에 남는 것은 물질적 욕망이다. 이후 선거가 윤리의 제어를 받지 못하는 물질적 욕망의 적나라한 전시장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국민은 윤리적으로 가장 의심스러운 후보를 눈 딱 감고 대통령으로 뽑았다. 새 정부 인사들의 윤리적 결격조차 대부분 용인했다. 지난 4·9총선은 그 대선판도의 재연이었다. 집값 상승 기대로 서울 시민들은 ‘뉴타운 사기공약’에 몰표를 던졌다. 지난 정권 시기에 윤리적 트라우마를 깊게 입은 사람들은 투표장을 외면했다. ‘나도 속았고, 국민도 속았다’는 여당 유력 정치인의 말이 유사-윤리적 쟁점을 이루었을 뿐이다. 통합민주당을 포함한 민주·진보권은 이 쟁점 바깥에서 맴돌았다. 지난 총선은 우리 정치의 윤리적 욕망의 한 저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국민의 이번 선택이 조만간 회복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결과인지 아니면 향후 한국 정치를 규정할 구조적 조건을 보여준 것인지 예단하기는 어렵다. 사람 하기 나름이다. 국민이 각성하기를 바란다면 먼저 민주·진보파 정치가 각성해야 한다.(고명섭/책·지성팀장)

08. 06.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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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德不孤 必有隣, 1인용 게임에는 Virtual 이 없다
    from 암흑의마법에서정의의칼로 2008-06-06 07:33 
    德不孤 必有隣 제1 해석: 덕을 가진 사람은 결코 외롭지 않다. 그에겐 반드시 이웃이 있기(따르기) 때문이다. A virtuous man is never lonely, He has neighbors. => 덕은 사회에 앞서 따로 존재한다. 목적이 된 덕. 제2 해석: 덕은 고립되어선 안된다. 반드시 이웃이(과) 있어야(소통해야) 한다. Virtue should not be isolated, it must be with neighbors. => 사회적..
 
 
게슴츠레 2008-06-05 13:54   좋아요 0 | URL
"윤리적 허무의 자리에 남는 것은 물질적 욕망이다."라는 문장을 보니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말이 기억나는군요. "고집스런 희망 뒤에 찾아온 것은 맥빠진 이기심이다."-<<냉소적 이성 비판 1>>

로쟈 2008-06-06 20:24   좋아요 0 | URL
덕분에 생각났는데, <냉소적 이성비판> 2권은 언제 나오는 건지 궁금하네요. 아니면 냉소해야 하는 건지...

노이에자이트 2008-06-05 23:53   좋아요 0 | URL
인터넷 대중의 두 얼굴...황우석 사태 때의 네티즌들은 르봉이나 가세트의 대중관이 설득력이 있음을 실증했지요.당시 진중권 씨,PD수첩과 한겨레가 당했던 비난을 최근의 찬사와 비교해보면 참...진중권 씨가 당시의 황빠들을 파시즘 민족주의에 가깝다고 했죠.

로쟈 2008-06-06 20:23   좋아요 0 | URL
대중의 다면성에 대해서는 진중권씨 자신도 털어놓은 바 있습니다. 대중은 어리석다, 하지만 그들은 신이다, 라고 인용했던가요...
 

학술저널 담비에서 영화이론서 번역문제에 관한 기사를 옮겨놓는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S1N5&rsec=&idxno=10482). 동국대 대학원신문에 게재되었던 것인데, 국내 영화이론서 번역의 문제점에 대해서 꼬집고 있다. 번역 문제에 관한 참고자료로 챙겨놓는다.

동국대 대학원신문(148호) '무지’보다 ‘무시’에서 비롯된 오역

국내에서 영화가 학문적 대상이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영화이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도 1990년대에 들어 겨우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짧은 기간 동안 수많은 영화이론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현재는 체계적인 발전단계를 거치지 못한 무수한 이론들이 난립하고 있는 양상이다.
또한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대한 이론보다 정신분석학, 기호학, 서사학 등 타 학문의 방법론을 그대로 이식하며 형성된 이론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국내 영화이론 연구는 여전히 어수선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영화용어’에 대한 오역'
외국 영화이론서의 허술한 번역도 국내 영화이론 연구의 부실화에 한몫을 했다. 영어권 이론서를 제외한 여타 외국어 영화이론서들의 경우, 번역의 무책임함과 불성실함의 정도가 상상을 초월한다. 해당 외국어에 대한 독해 능력과 영화이론에 대한 일정 수준 이상의 지식을 갖춘 역자가 매우 드문 현실에서 비전문가들의 마구잡이 번역이 버젓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영화이론서의 번역은 타 분야의 이론서 번역에 비해 후진적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영화이론서 번역의 문제점은 다양한 차원에서 발견되지만, 무엇보다도 기본적인 ‘영화용어’들에 대한 오역이 가장 심각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원서의 번역과정에서 행해지는 주요 영화용어들의 오역은 저자의 이론들에 대한 이해를 어렵게 만들고, 종종 원서 전체의 독서를 불가능하게 한다.

특히, 현재 우리나라에서 미국 다음으로 많은 번역이 이루어지고 있는 프랑스 영화이론서들의 경우, 상당수의 영화용어들이 본래의 뜻과 다른 엉뚱한 단어로 번역돼 정상적인 독서가 불가능할 때가 많다. 가령, 파스칼 보니체의 저서를 번역한 『영화와 회화. 탈배치』에서는 ‘쇼트’를 뜻하는 불어 단어 ‘plan’이 ‘영상’으로 번역돼 번역서 곳곳에서 숱한 오류로 이어진다. 그리고 책의 제목이자 핵심 용어인 ‘decadrage’는 이미 국내에서 통용되고 있는 용어인 ‘탈프레이밍’이나 ‘탈프레임화’ 대신 ‘탈영상배치’라는 모호한 용어로 번역돼 저자의 논지를 완전히 흐트러뜨린다. 또 다른 예로, 자크 오몽의 『이마주』에서도 ‘illusion’이라는 단어가 ‘착시’가 아닌 ‘환영’으로 번역돼 ‘헤링의 착시’와 ‘뮐러-라이어의 착시’ 같은 초보적인 시각이론 용어들이 ‘헤링의 환영’과 ‘뮐러리어의 환영’이라는 엉뚱한 용어로 소개되고 있다.

물론 이밖에도 무수히 많은 오역의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겠지만, 일단 위의 예들만으로도 국내 영화이론서 번역의 현황을 충분히 가늠해볼 수 있다. 이중, ‘탈프레이밍’과 ‘착시’에 관한 오역은 그나마 역자의 불성실함 탓으로 돌릴 수 있지만, ‘쇼트’라는 용어에 대한 오역은 그 정도가 민망할 정도로 지나치다. 쇼트는 영화라는 매체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영화용어로서, 소설과 비교할 경우 ‘주어’나 ‘문장’ 등에 해당하고 음악의 경우 ‘음표’ 정도에 해당할 것이다. 그런데 역자는 역서 내내 쇼트의 의미를 모른 채 어려운 영화이론들을 우리말로 옮기고 있다. 도대체 주어나 문장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고 문학이론서를 번역하는 이가 있겠는가? 또 음표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고 음악이론서를 번역하는 이가 있겠는가?

번역의 문제는 어디서 오는가
번역은 한 사람의 학식(Scholarship)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학문의 한 분야와 관련될 경우, 이론서 번역은 그 분야의 학문적 성숙도를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잣대가 될 수 있다. 국내 영화학의 경우, 영화이론에 대한 학습이 전무하고 영화사에 대한 지식과 영화감상의 경험도 턱없이 부족한 비전문가들이 외국어 독해능력 하나만을 믿고 쉽게 영화이론서 번역에 뛰어들고 있어, 학문적 성숙도를 끌어올리는 일이 여전히 먼 미래의 일처럼 요원해 보인다.

영화이론 번역의 이 같은 문제들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우선, 번역의 질적 수준과 충실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국내 출판현실이 그 근본 원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자의 작업에 대한 대우가 최저 수준에도 못 미치는 현실에서, 가뜩이나 어렵고 인기도 없는 이론서 번역은 기피 대상일 수밖에 없다. 다음, 국내 영화학계의 안일한 태도와 정확한 영화용어집의 부재도 간과할 수 없는 요인이다. 아직도 국내에는 모두가 공신할만한 영화용어사전이 존재하지 않으며, 다수의 영화학자들이 각자 편할 대로 영화용어를 사용하면서 혼란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하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영화에 대한 국내 인문학자들과 출판계 종사자들의 인식 자체에 있다. 사실, 국내 영화이론서 번역의 문제들은 영화에 대한 ‘무지’보다는 ‘무시’에서 비롯된다. 여전히 국내 학계나 출판계에는 일정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고 외국어에 능한 연구자라면 외국의 전문적인 영화이론서도 손쉽게 번역해낼 수 있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는 것이다. 국내 영화 연구자들이 제대로 번역서를 고를 기회조차 갖기 힘들 정도로, 외국의 유명 영화이론서들은 국내에 알려지기 무섭게 인문학 전공 번역자들에 의해 접수된다. 요컨대, 국내 인문학자들의 독특한(?) 선민의식과 영화학에 대한 그들의 보이지 않는 멸시가 사라지지 않는 한 국내 영화이론 번역의 정상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김호영/ 한양대 프랑스언어문화학과 교수)

08. 06. 04.

Pascal Bonitzer

P.S.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파스칼 보니체의 책은 오역으로 악명이 높지만 아직 절판되지 않았다(130쪽도 안되는 책이 18,000원이다. 견적이 안 나오는, 숭고하기 짝이 없는 책이다). <비가시영역: 리얼리즘에 관하여>(정주, 2001)는 또 어찌된 영문인지 너무 일찍 절판되었고(대학 도서관들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책이다). 그런데, 필자가 영화이론서 번역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했다면 그나마 잘된 번역서, 잘 읽히는 번역서의 경우에도 혹 문제는 없는 것인지 살펴보았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최악의 번역서를 사례로 삼아서 '일반화'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질 테니까 말이다(대다수 번역서들이 '쇼트'도 제대로 옮기지 못하는 수준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 아닌가?).

개인적으로 영화이론서들을 읽다가 골탕을 먹은 적이 여러 번 되기에 '번역의 질적 수준과 충실성'에 대한 문제제기와 불비한 여건에 대한 필자의 지적에 공감한다. "국내 영화학계의 안일한 태도와 정확한 영화용어집의 부재도 간과할 수 없는 요인이다. 아직도 국내에는 모두가 공신할만한 영화용어사전이 존재하지 않으며, 다수의 영화학자들이 각자 편할 대로 영화용어를 사용하면서 혼란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는 주장은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지적이다. 하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주장한 대목에서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데, "국내 인문학자들의 독특한(?) 선민의식과 영화학에 대한 그들의 보이지 않는 멸시가 사라지지 않는 한 국내 영화이론 번역의 정상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단 영화학이 인문학의 바깥인지, 더 좁혀서 '영화이론'이 '이론'의 바깥인지 의문이 들 뿐더러 현대 영화이론이 흡수하고 있는 다양한 이론적 담론들의 경우 과연 '쇼트'가 무엇인지, '탈프레이밍'이 무엇인지 아는 영화학도만이 번역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영화이론과 접속하고 있는 기호학(언어학), 철학, 정신분석학 등의 다양한 담론들을 소화할 수 있는 자격이 과연 영화학도에게만 주어지는 것일까? "국내 영화 연구자들이 제대로 번역서를 고를 기회조차 갖기 힘들 정도로, 외국의 유명 영화이론서들은 국내에 알려지기 무섭게 인문학 전공 번역자들에 의해 접수된다"는 판단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최근의 이론가들은 제쳐놓더라도 영화이론의 고전인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의 <영화의 이론>도 번역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현대 영화이론의 기본서라 할 만한 크리스티앙 메츠의 책들도 국내에는 전혀 소개되지 않았다. 때문에 영화학 전공자들이 '번역서를 고를 기회조차 갖기 힘들'다는 것은 아무래도 엄살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려워 보인다. '영화이론서 번역, 이렇게 한다'라고 본때를 보여줄 만한 책들을 냄으로써 '국내 인문학자들의 독특한 선민의식'에 한방 먹이는 것이 '무지'를 극복하고 '무시'를 불식시키는 데 가장 효과적일 듯싶다... 

P.S. 메츠의 주저 가운데 하나인 <상상적 기표>(문학과지성사, 2009)가 드디어 출간됐다. 모처럼 도전해볼만한 영화이론서를 한국어로 읽을 수 있게 되어 반갑다... 

09. 0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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