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북리뷰들을 둘러보다가 최근 관심사와 무관하지 않은 책 한권에 눈길이 갔다. 프란시스 무어 라페의 <살아있는 민주주의>(이후, 2008). 원제는 'Getting a Grip: Clarity, Creativity, and Courage in a world gone mad'이니까 '꽉 틀어쥐기'쯤 될까? 직역하면 '미쳐가는 세상에서의 투명성, 창조성, 그리고 용기'가 부제다. '틀어쥐다'의 목적어들인지? 여하튼 원제에 '민주주의'는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리뷰를 읽어보니 그와 무관하지도 않은 책이다. '민주주의의 기술'을 설파하는 책이라니까. 대충 그런가 보다 했을 텐데, 하워드 진의 추천사가 발목을 잡는다(그의 추천사는 드물지 않게 만날 수 있긴 하지만). "모든 세대에는 사상, 행동, 정신의 측면에서 선구자가 되는, 몇 안 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탐욕과 권력의 낡은 장벽들을 깨고 사람들을 위해 횃불을 높게 비춘다. 프란시스 무어 라페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러니 한번쯤 손에 쥐어볼 생각이다(게다가 저자가 공저자로 참여한 <굶주리는 세계>(창비, 2003)나 <희망의 경계>(이후, 2005)가 저자에 대한 신뢰를 높여주기도 하고).

한국일보(08. 08. 16) 민주주의도 '기술'이다

한국은 늘어가는 올림픽 메달 수처럼 풍성한 민주주의를 길러 왔다고 믿어도 좋을 만큼 발전을 거듭해 왔을까?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를 원점에서부터 다시 생각해 봐야 할 시점에 와 있는 것은 아닐까? 미국산 쇠고기 파문은 우리가 과연 일상적 수준에서 민주주의를 누릴 자격이 있는지, 자괴감마저 불러 일으킨다. '촛불들'이 민주주의와 동의어가 아님을 알게 되기까지, 우리는 너무나 비싼 수업료를 지불했다. 21세기의 민주주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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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봐서, 저 같은 고민은 글로벌하다. 삶의 공공성이 망실돼 가는 지금, 두 괴물 사이에 끼어 빈사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 세계의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그 주범은 선거(민영화)와 시장(상품화)이다. 민간 자본이 선거 시스템에 개입하고 시장과 적극 연루돼 민주주의를 강탈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범지구적으로 위기를 몰고 오는 주체는 정치적으로 오사마 빈 라덴, 조지 W 부시, 딕 체니 등이거나, 글로벌을 외치는 시장경제주의자들에게 있다. 9ㆍ11 이후 6년 동안 미국의 화학산업계는 안전 척도를 거부했고, 부시의 백악관과 유착해 있던 전 석유 로비스트는 기후 변화를 얕보도록 공식 보고서를 편집하기까지 한 사실이 드러났다. 무엇을 할 것인가?



이제 민주주의가 현실 속에서 스스로를 '최적화'해낼 수 있는 방법을 다각도로 검토할 때다. 민주주의도 기술(art)이다. 에리히 프롬의 명저 <사랑의 기술>을 떠올리게 하는 책은 민주주의론의 최신 버전이다. <굶주리는 세계> 등의 책으로 국내에서도 낯익은 생태정치학자인 저자는 "어떤 기술도 학습될 수 있듯 민주주의 역시 배움을 통해 끝없이 향상돼 가는 것"이라 말한다. 결국 민주주의란 '고비용 저효율'의 사회 작동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주장을 효과적으로 펴 나가기 위해 동원하는 개념적 장치가 '앙상한 민주주의(thin democracy)'다. 합리적 합의와 상호 소통을 불능케 하는 종류의 민주주의로, 미국 사회를 비롯한 대다수 국가의 현실적 정치 체제를 겨냥한 말이기도 하다. 그 반대로 책은 '살아 있는 민주주의'를 제시한다.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행동의 통로를 구체적으로 보장하는 정치 체제, 그것들이 시민의 힘에 의해 자율적으로 형성돼 가는 창조의 과정 등을 요체로 하는 민주주의다. 그것은 적극적으로 타인의 발언에 귀 기울이는 기술, 협상과 조정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는 기술, 경험을 성찰하고 학습하는 기술들을 전제하는 민주주의다.

1999년 미국 캔사스의 한 고교에서 학생들의 성적이 곤두박질치고 절반이 중퇴하는 상황이 벌어진 사례는 민주주의를 몸으로 느낀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었다. 시민들은 교육 붕괴의 원인이, 지역 주민들이 서로 고립되어 있고 스스로를 무력한 존재로 여기는 삶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들은 신뢰 회복을 위한 모임에서 서로 만나기 시작했고 학교 개혁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등 '민주주의의 생태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결과 8년 만에 고교의 졸업생 비율은 80%까지 상승했다.

책은 인간들이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보편적 속성을 두고 '마음속의 리얼리즘'이라 표현한다. 부시 행정부가 2002년 이라크 침공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내놓았던 가짜 증거에 대해 집단적으로 저항해 일어설 수 있는 자신감과도 같은 것이다. 또 야만적 행위가 유발하는 공포감은 오히려 바람직한 세계를 창조하는 데 사용할 자원으로 쓰여질 수도 있다.

책은 희망적이다. 관계망을 추구하는 인간 고유의 속성, 개인적 삶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공공성 등 의미 있는 행위와 삶을 향한 근원적인 욕구 때문에 인간은 속성상 공적인 존재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책을 옮긴 뉴사우스웨일즈대 사회학과 국제연구스쿨 대학원생 우석영씨는 "한국도 국민들의 정치 혐오증을 딛고 시민을 중심으로 '살아 있는 민주주의'를 구축해 갈 때"라고 밝혔다. '살아 있는 민주주의 체크 리스트' 등 작은 읽을거리가 자칫 이론적일 수도 있는 논의에 흥미를 보탠다.(장병욱기자)

08. 08. 16.

P.S. 기자는 "'촛불들'이 민주주의와 동의어가 아님을 알게 되기까지, 우리는 너무나 비싼 수업료를 지불했다."고 적었는데, 반대로 '촛불 민주주의'에 관한 책들이 봇물이다(곧 나올 계간지들의 화두도 아마 '촛불'일 성싶다). 몇 권의 이미지를 뽑아본다.

낮에 동네 시립도서관에서 잠시 들춰본 <인물과 사상> 7,8월호도 '촛불' 관련 글들을 싣고 있다. 강준만 교수의 ''스펙터클'로서의 촛불시위'(8월호)를 흥미롭게 읽었다. 그가 보기에 촛불시위는 스펙터클주의자(청계천) 이명박이 예기치 못했던 '스펙터클에 대항하는 스펙터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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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7 0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8-17 1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일본문학 번역 60년>(소명출판, 2008)이란 책이 지난달에 나온 걸로 아는데, 한국일보의 리뷰기사는 오늘 떴다. 광복절이란 시의성을 고려한 게 아닌가 싶다. 비교적 자세한 소개를 담고 있어서 스크랩해놓는다.

한국일보(08. 08. 15) 하루키·바나나는 한국문학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윤상인(53) 한양대 일본언어문화학과 교수가 최근 출간한 <일본문학 번역 60년 : 현황과 분석>(김근성 강우원용 이한정 공저ㆍ소명출판 발행)은 1945~2005년 국내 출판된 일본문학 번역서 전체의 서지목록을 작성하고 그에 대한 분석을 담은 국내 첫 연구서다. 학술적 활용도가 높을 것으로 예상되는 목록 자료만큼 이 책에서 흥미로운 것은 자료 분석을 통해 드러나는 한국에서의 일본문학 수용 양상. 윤 교수를 만나 '일본문학 번역 60년사' 이야기를 들었다.

■ 현재 일본문학 붐은 60년대 붐의 재판
현재 한국 출판계의 일본문학 붐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가 부상한 1990년대 초반부터 이어지고 있는 '장기 호황'이다. 하지만 이 호황은 해방 이래 일본문학 수용 역사에서 별쭝난 현상이 아니다. 60년대에 이미 '1차 부흥기'라고 부를 만한 일본문학 붐이 일어났고, 이후 90년대 '2차 부흥기'를 맞을 때까지 일본문학 번역 건수는 꾸준히 늘었다.(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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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일본문학 붐의 기점은 4ㆍ19혁명이었다. 이승만 정부의 강력한 배일 정책으로 50년대 소설 7편 번역이 전부였던 것이 급반전했다. 그 해 청운사의 <일본문학선집>(전7권) 등 4개 출판사에서 일본 주요 작가 중단편 선집이 나오고, 고미카와 준페이, 다니자키 준이치로, 이시하라 신타로, 하라다 야스코 등의 소설 단행본 13권이 출간되는 등 60년대에 걸쳐 641편(중복 번역 포함)의 작품이 번역됐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15개 출판사에서 중복 출간됐고,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68년에는 6권짜리 전집(실제는 선집)이 신속히 간행됐다. 그 번역자에는 한무숙 전광용 정한모 천상병 이호철 최인훈 등 작가들이 다수 포함됐다. 예술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이른바 '중간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시자카 요지로의 장편은 63년 소설 부문 베스트셀러 1, 4, 6위를 차지했고, 65년 첫 출간된 미우라 아야코의 장편 <빙점>은 66~67년 내내 베스트셀러 1위를 점했다. 윤 교수는 그 요인으로 대일 문화정책 변화, 일본문학에 대한 호기심 증폭, 일본어 교육을 받지 않은 '4ㆍ19세대'의 출현 등을 꼽았다.

■ '독자 친화'적인 일본문학
윤 교수는 일본문학이 한국문학보다 앞서 변화하는 독자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켜 왔다고 분석한다. 국내 문학의 기반 자체가 빈약했던 60년대 다자이 오사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나쓰메 소세키 등의 작품은 읽을거리에 대한 갈증을 해소했다. 70, 80년대엔 추리소설 기업소설 애정소설 역사소설 등 오락성 짙은 대중소설이 쏟아져 들어왔다.


90년대에는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류, 요시모토 바나나 등 새로운 감성의 문학이 자본주의 사회의 대중적 욕구를 만족시켰다. 윤 교수는 "88올림픽 이후 국내 독서대중은 10대 후반~20대 위주로 재편됐는데 이들은 사회역사적 책임감보다는 개인주의와 소비 욕구에 충실한 세대"라며 "여전히 거대담론을 중시하는 한국문학에 거리감을 느끼던 신세대 독자들에게 하루키의 쿨한 감각, 류의 도저한 상상력, 바나나의 만화 풍 소설이 전폭적 지지를 얻었다"고 말했다. 2000년대에는 미야베 미유키, 히가시노 게이고, 오쿠다 히데오 등이 산뜻한 읽을거리를 만들어내는 중간소설 영역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일본소설일까. 윤 교수는 "영문학 불문학 독문학 러시아문학이 근래 들어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는데 비해 일본은 폭넓은 독서 욕구를 가진 독자들이 뒷받침하는 탄탄한 소설 시장이 있어서 작가들이 창작에 전념하며 더 나은 작품을 써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 있다"고 분석한다. 한국과 일본의 지리적 근접성, 사회문화적 동질성 등도 요인으로 꼽았다.



■ 상업주의에 매몰된 일본문학 시장
윤 교수는 여타 외국문학과 달리 일본문학은 시종 출판사가 주도하는 상업출판의 형태로 국내에 소개돼 왔다고 지적한다. 그러다보니 번역작품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기보다는 일본 내에서 문학상을 받거나 많이 팔린 작품을 실시간으로 들여오는 경우가 많다. 아쿠타가와 상의 경우 그 수상작은 60년대부터 거의 빠짐없이 국내 소개되고 있다.

윤 교수는 "이는 상업적으로는 안전할지 몰라도 장기적 관점에서 국내 출판계가 일본의 문화 유통구조에 포섭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며 "일본문학 전공자나 전문 번역자가 스스로 좋은 작품을 골라 독자에게 소개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번역 품질의 검증도 시급하다. 70, 80년대 횡행하던 날림번역은 90년대 들어 전문 번역가 군의 형성으로 많이 개선됐지만, 10명 남짓한 유명 번역가들에게 의뢰가 몰리다보니 질이 떨어지는 현상이 감지된다는 것. 윤 교수는 "60년대 번역 수준이 지금까지 회복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이라며 "일본 문학 및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은 이들이 번역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이훈성기자)

08. 0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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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8-16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 읽어봐야겠네요.특히 60-70년대 대하역사물 번역목록을 봐야겠어요.
마지막 구절, 일어 번역의 질에 관해선 60년대에 김소운 씨가 했던 말과 똑같네요.로쟈 님은 일본 소설 중 가장 감명 깊었던 것이 무엇이었나요?

로쟈 2008-08-17 00:37   좋아요 0 | URL
많이 읽지 않아서, 가장 인상에 남는 작가는 다자이 오사무 정도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17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자이 오사무 좋아하는 한국인이 굉장히 많군요.저는 이노우에 야스시의 역사소설 <풍도>와 <누란>입니다.둘 다 약소국의 비애를 그린 작품입니다.전자는 장편으로 고려말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시절 이야기입니다.후자는 중편인데 누란의 위기라는 표현에 나오는 그 나라 누란의 비극적인 망국사입니다.한족과 흉노 사이에 끼인 나라의 운명.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비참한 나라.우리나라는 거기에 비하면 강대국 사이에서 나름대로 운신의 폭이 넓은 나라라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로쟈 2008-08-17 17:47   좋아요 0 | URL
이노우에는 처음 듣는 작가인데요.^^; 일본과 중국 소설들을 상대적으로 읽지 않은 편이어서 따로 견적을 내보고 있습니다...

2008-08-17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8-18 00:18   좋아요 0 | URL
그런 시절이 있었지요.^^;
 

광복절이라고 해서 따로 개인적인 행사를 치를 일은 없고, 그냥 읽어놓은 관련기사나 스크랩해놓는다('건국절'은 저들이 알아서 챙기거나 말거나). 하나는 ‘광복 63주년 기념 8·15 민족통일대회’를 준비한 백낙청 ‘6·15 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 인터뷰기사이고, 다른 하나는 '해방 63년'의 삶을 살아온 한 한국인의 발자취를 따라가본 기획기사이다.   

한겨레(08. 08. 15) “광복 의미 무시…분단정부 자괴감이 없다”

“근본적으로 너무나 천박한 역사인식이기 때문에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 백낙청 ‘6·15 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는 ‘광복 63주년 기념 8·15 민족통일대회’를 앞두고 <한겨레>와 만난 자리에서, 정부의 건국 60년 행사와 관련해 “1948년 정부수립을 주도한 세력조차 분단 단독정부 수립이란 자괴감과 문제의식이 있었는데, 최근 건국 60년 담론에는 이런 현실 인식이 아예 없어진 게 문제”라고 강조했다. 민족통일대회는 2000년 6월 첫 남북 정상회담 이후 6·15와 8·15를 남북이 공동 기념하자는 취지로 기획된 행사다. 8·15 민족통일대회의 경우 2001년과 2003년엔 평양, 2002년과 2005년엔 서울에서 공동행사로 치러졌다. 그러나 2004년과 2006~08년엔 정세 악화, 수해 등 여러 이유로 8·15 공동행사가 성사되지 못했다. 그는 이번 8·15 민족통일대회가 15일 서울 용산구 백범기념관에서 남쪽만의 행사로 치러지는 것에 대해 “금강산 6·15 공동행사로 (남북 공동행사의) 명맥은 이어놨고, (8·15 행사 분리 개최는) 6·15 행사 때 합의사항”이라며 “아쉽지만 좌절감을 느끼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백 상임대표는 최근 남북관계 악화와 관련해선 “6·15 및 10·4 선언 계승 입장의 공표가 남북관계를 푸는 열쇠”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명박 정부의 국정 운영에 대해 “내심 유신시대로까지 역주행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며 “경륜과 역사인식이 없으니 갈팡질팡하며 자기들도 고생하고 국민들도 고생하는 결과가 될 것 같다”고 걱정했다. 인터뷰는 13일 낮 서울의 한 호텔에서 이뤄졌다.

-8·15 기념행사를 준비하는 정부가 ‘건국 60년’에 초점을 맞춰 논란이 일고 있다.

1948년 8월15일 당시 표현은 정부수립이었다. 당시 전국 현상공모에 당선된 표어가 ‘오늘은 정부수립, 내일은 남북통일’이었다. ‘건국’ 주도세력 스스로가 ‘정부수립은 기쁜 일이지만 단독 정부수립에 불과하다’는 자괴감이 있었고, ‘남북이 통일된 온전한 건국을 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정부가 수립돼 60년이 됐으니 꺾어지는 해를 기념하는 것 자체가 나쁠 것은 없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광복의 의미가 사라지거나 폄하되고, 분단 정부 수립이란 자괴감, 문제의식이 없어지는 일이다.”

-뉴라이트가 굳이 광복 대신 건국을 고집하는 이유는 뭐라 보나.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된 것은 굉장한 역사적 사건인데 뉴라이트에게는 그런 인식이 없다. 광복을 단독 정부 수립에 필요한 수순 정도로 인식하는 것 같다. 근본적으로 너무 천박한 역사인식이다. 우파정권이 들어섰다고 해도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는 데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법석을 떨다가 정체를 드러내고 끝날 일이 아닌가 싶다.”

-남북관계가 삐걱거린다. 왜 이렇게 됐다고 보나.

한편으론 이 정부의 체질과 관련 있고 다른 한편으론 무능과 무식의 소치다. 미국에만 잘 보이면 잘 풀릴 것이란 망상이 있고, 국내외를 막론하고 못사는 사람을 깔보는 성향이 있다. 이런 자세는 안 통한다. 실용을 표방하면 대북관계가 잘 되는 게 유리할 텐데, 그것을 할 실력이 없는 것 같다. 남북관계는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분야다. ”

-이명박 정부가 6·15 및 10·4 선언에 대한 이행 의지를 밝히는 데 소극적인데.

“10·4 선언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정서는 이해간다. 노무현 정권이 임기 말기에 후임자가 해야 할 많은 일을 합의해버려 기분 나쁠 것이다. 그렇지만 10·4 선언을 존중한다는 전제 위에 이행의 완급을 협의하는 게 필요하다. 같은 정상간의 선언이지만 6·15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10·4 선언은 6·15 선언의 실천강령으로 나온 것이지 동일한 차원의 새로운 선언으로 되어있진 않다. 6·15 선언은 이 정부가 부담을 느낄 게 없다. 통일방안과 관련해 ‘낮은 단계의 연방’이란 표현이 들어있지만, 내용은 북쪽이 고려연방제를 철회한 것이다. 이제 국정을 책임졌으니 선거 때 구호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6·15와 10·4 계승 입장의 공표가 남북관계를 푸는 열쇠라고 본다. 특히 6·15 선언을 인정하면 일이 뜻밖에 잘 풀릴 것으로 본다.”

-금강산 관광객 사망 사건이 해법을 못찾고 한 달을 넘겼다.

전문성의 부족이 남북관계를 꼬이게 한 좋은 예라고 본다. 남북 양쪽에 모두 문제가 있다. 비무장 50대 주부가 사망했고 유가족과 국민이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북은 이를 위로할 수 있는 적극적 자세가 필요했다. 최근 통일부에서 진상 규명 방법에 대해 남북이 만나서 협의하자고 밝힌 것은 통일부의 전문 식견이 반영된 것으로 본다. 지금 같은 남북관계에서 대통령이 나서 ‘남쪽 당국이 참여하는 공동 현장조사가 있어야 한다’고 하면 운신의 폭이 없어진다. 어느 나라든 자기 주권 관할구역, 그것도 군사구역에서 일어난 사고에 대해 적대적 국가와 공동조사를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북쪽이 남쪽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성의있는 해명과 남녘 동포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진솔한 유감 표명을 하고, 남쪽은 좀 더 성숙한 대응을 해야 할 것이다.”

-최근 이명박 정부의 폭주, 역주행이 뚜렷한데.

정부 내 역주행을 주도하는 사람들의 내심은 5·6공 정도가 아니라 유신체제까지 역주행하고 싶은지도 모르겠지만, 여기저기서 접촉사고와 인사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경륜이나 역사인식이 없으니 갈팡질팡하면서 자기들도 고생하고 국민들도 고생하는 결과가 될 것 같다. 정부는 역주행이 안 된다는 것을 하루빨리 깨달아 자세를 바꿔야 한다.”

-앞으로 통일운동은 어떻게 해야 할까.

“똘똘 뭉쳐서 투쟁하는 양식은 6·15 이전 방식이다. 6·15 이후엔 달라졌다. 투사가 아닌 평범한 시민들이 참여할 길이 열렸고, 다양성과 시민들의 창의력을 존중하는 6·15 운동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명박 정부 들어 역주행이 보이니까, 통일운동도 과거식의 강력한 투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기류가 있다. 싸울 일은 싸워야 하나 크게 봐서 역주행은 저쪽의 일방적인 소망사항일 뿐이다. 촛불 정국이 보여주었듯이 우리 사회는 시민 역량의 엄청난 축적이 이뤄져 있다. 이런 시민들과 소통하는 시민참여형 통일운동이 돼야 한다. 6·15 남측위는 ‘연대와 합의’ 정신으로 운영한다는 규약대로 느슨한 결합체로 가야한다. 단단한 단일조직으로 비끄러매려고 하면 시민들한테서 외면당하지 않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촛불시위가 100일이 지났는데 촛불이 다 꺼졌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70년대부터 민주화 현장을 지켜온 원로로서 소회가 궁금하다.

“저를 포함한 각계인사 32인이 지난달 1일 성명을 내어, 촛불축제는 위대한 국민 승리를 성취했기에 7월5일 모여 승리를 대대적으로 확인하자는 제안을 했다. 광우병국민대책회의가 이 제안을 상당부분 받아들여 국민승리선언대회가 성공적으로 열렸다. 국민승리 개념은 승리의 기준을 정부가 87년 6·29 선언 같은 것을 내놓고 쇠고기 재협상하겠다고 항복하느냐 마느냐에 둔 것이 아니다. 우리 역사상, 아니 세계 민주주의 역사상 유례가 드문 엄청난 사건을 만들어낸 것 자체가 승리라는 것이다. 이런 국민승리를 정부가 인정해 6·29처럼 항복선언을 하면 정부가 지면서도 이기는 길이고, 폭력 집회를 유도하고 탄압하면 정권의 몰락을 재촉하는 길이다. 정부가 그 시점에서 폭력 진압하며 ‘너죽고 나죽자’는 식으로 나왔는데, 이에 말려들지 말고 우리 할 일을 하자는 취지였다. 지금은 정부가 촛불이 꺼졌다고 기고만장하는 것 같은데 그런 정권의 앞날은 암담하다. 우리는 느긋한 마음으로 계속 시위할 사람은 시위하고, 미국산 쇠고기 불매운동도 하고, 언론분야에서 싸울 건 싸우면서 또 한번의 도약을 준비하면 된다.

한겨레(08. 08. 15) “나는 일본군이었고 인민군이었고 국군이었다”

경기도 시흥시 거모동의 향리에서 은퇴 생활을 하는 이재섭(83)씨는 1945년 8월1일 결혼한 지 1년도 채 안 된 새색시를 남겨두고 평양에서 입대했다. 전쟁 막바지라 아무런 훈련도 받지 않고 북만주 하이라르의 20495 무라카미 대대에 도착해 하룻밤을 자고 나니 병영 앞에 폭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소련군의 진격이 시작된 것이다.

그의 일본군 생활은 보충소까지 포함하더라도 2주 정도에 불과하다. 그것이 재앙의 씨가 돼 일제의 항복 때 해방의 기쁨을 맛보기는커녕 48년 12월 말까지 소련에서 억류 생활을 하며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는 억류 기간 중 숨진 동포 가운데 이귀남이란 이름을 잊지 못한다. 황해도 해주 사람인데 결핵에 걸려 작업도 못 나가고 결국 다리수술까지 받았다. 혈액형이 같아 수혈을 해주고 나서 자신도 많이 앓았다고 한다. 일본에서 나온 시베리아 억류자 사명자 명부에 이귀남은 도고 기난이란 일본 이름으로 올라 있다. 사망일 48년 4월12일, 매장지 제4지부 부로샤트카역 부근 등이 기재돼 있다.

동토의 땅에 묻히지 않고 돌아온 생존자들에게도 고난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의 귀국 경로와 일시는 일정하지 않다. 일본인들에 섞여서 일본 마이즈루로 간 사람도 있고 선박편으로 청진, 웅기로 오거나 육로로 두만강을 건너온 사례도 있다. 이재섭씨는 가장 많은 귀환자가 돌아온 48년 12월 소련 화물선편으로 흥남부두에 도착한 약 2천3백여명에 끼였다. 흥남인민위원회에서 환영행사를 벌이고 임시 숙박처를 마련해주었다. 적응교육을 거쳐 집이 만주인 사람 약 1천명, 북한인 사람 8백명이 먼저 가족을 찾아 떠났다.

북한 당국은 49년 2, 3월에 남쪽이 고향인 사람을 수십명씩 쪼개 내려보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원산에서 기차편으로 철원이나 연천까지 와 한탄강이나 산악지대를 넘은 것으로 보인다. 꿈에도 잊지 못했던 가족과의 재회를 그리며 38선을 넘다가 총격을 당해 숨진 사람들을 보았다거나 나중에 얘기를 들었다는 증언이 생존자들 사이에 끊임없이 돌고 있다. 접경지역에서 남북 교역을 한다며 이중스파이나 공작원으로 활동하던 사람들의 농간에 곤욕을 치렀다는 사례도 들린다. 아무리 남북에 정부가 따로 수립됐다고 해도 이들의 안전한 귀환을 위한 최소한의 접촉조차 없었다.

귀환자들은 고양이나 파주경찰서를 거쳐 인천 만석동에 있던 수용소로 옮겨졌다. 정보·사찰 기관 요원들이 합동으로 소련과 북한에서 한 행적과 언동 등을 면밀히 조사했다. 맥아더 사령부 정보요원들에게 넘겨져 신문을 받은 사람도 있다. 한 달 정도의 조사과정에서 특이한 용의점이 발견되지 않으면 가족들의 품에 인계됐다. 그래도 적성국가 소련에서 돌아왔다는 요시찰 딱지가 따라다녀 생활이 안정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생존자 가운데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을 거치고 소련과 남한에서 포로수용소 생활을 한 사람도 있다. 평남 순천 출신의 ㅂ아무개(84)씨는 여덟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남의집살이를 하느라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다. 44년 8월 징병 1기생으로 끌려가 홋카이도 북쪽 시코탄섬(현재 러시아령 쿠릴열도의 하나로 일본은 자국령이라고 주장)에서 해병대 격인 선박부대에서 근무하다가 소련군 포로가 됐다. 어렸을 때부터 워낙 고생을 많이 한 탓인지 가혹하기 그지없었던 수용소 생활이 견딜 만했다고 그는 담담히 말했다.

48년 12월 북한에 돌아와 한동안 소련에서 왔다는 이유로 대접을 받고 탄광에서 일자리를 얻었지만 평온한 삶도 잠시였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자원입대해 수색까지 기차를 타고 내려왔다. 야간에 도보로 이동해 낙동강 전선에서 격전지의 하나였던 다부동 지역에 배치됐다. 인천 상륙작전 이후 국군과 유엔군의 대공세에 밀려 인민군의 패주가 시작되자 낙오했다가 50년 9월 미군의 포로가 됐다.

53년 6월 반공포로 석방 때 거제수용소에서 풀려난 그가 오갈 데가 없어 문을 두드린 곳은 군대였다. 바로 신병훈련을 받고 화천 지역에서 2년간 사병으로 근무하다 제대를 했다. 일본군, 인민군, 국군에서 그는 줄곧 말단 사병이었다. 한국 전쟁 초기 낙동강 전선에서 병사들이 무더기로 죽어갈 때 그는 며칠간 분대장을 맡았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북한에 사는 친지들에게 누를 끼칠 수 있다는 이유로 자신의 이름이 공개되는 것을 꺼렸다.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삶에 아직도 분단과 냉전의 유령이 가시지 않고 있다.(김효순 기자)

08. 08. 15.

P.S. 한국일보는 한홍구 교수와 이영훈 교수, 두 사람의 대담을 특집으로 싣고 있다. 8.15의 의미에 대해서 이젠 '기억의 전쟁' 모드로 들어간 듯싶다.

광복절인가, 건국절인가. 대한민국 60주년이 8ㆍ15의 성격에 대한 보수, 진보세력의 기억투쟁의 장이 되고 있다. 대한민국 역사를 건국사로 해석하는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와, 분단의 역사로 보는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의 난상토론의 자리를 마련했다. 8ㆍ15와 건국주체세력의 성격, 이승만ㆍ박정희 시대, 민주화운동에 대한 평가에서 두 사람의 시각 차는 확연했다.

▲ 이영훈=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는 사건은 '건국'이라는 범주에 속한다. 새로운 이념에 의해 인간들을 정치적으로 통합하는 하나의 질서이자 하나의 문명으로서 새로운 국가가 태어났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 건국(1392년) 이후 556년 만의 사건이다. 불교사회에서 유교사회로 문명 전환을 꾀한 조선 건국처럼 대한민국의 건국도 자유, 인권, 재산권, 개인주의 등 새로운 이념들이 들어와 새로운 문명을 건설했다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 한홍구= 왜 광복과 건국이 대립해야 하는가, 가슴 아픈 생각이 든다. 독립운동세력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과제와 새로운 국가, 정치체제를 만든다는 과제를 함께 추구했다. 의아한 것은 친일행위를 문명의 기원으로 보는 뉴라이트 지식인들이 건국절을 기념하자고 나선 점이다. 광복이나 해방의 의미가 지워진다는 느낌 때문에 사람들이 당혹해하는 것이다. 건국이라는 개념이 약했던 이유는 우리 헌법에 이미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계승하고 있다는 대목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도 처음에는 임정 연호를 썼고 제헌의회에서도 임정을 계승했다는 의식이 있었다.

▲이= 대한민국이 임정의 도덕적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다는 사실과, 하나의 국민국가라는 실체가 1948년 8월 15일에 들어섰다는 사실은 모순되지 않는다. 한 국가가 생겨나는 데 있어 필요한 여건을 법적으로나 실체적으로 갖춘 것은 이 날이다. 역사적인 사건으로서 건국을 이야기할 때 1948년 8월 15일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사적 의미에서 대한민국이 건국된 날이라는 것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는 있을 수 없다.

▲한= 1948년 8월 15일에 만들어진 대한민국의 건국주체와 국가 정체성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국가 정체성의 근거가 되는 것은 제헌헌법과 실체적 독립운동집단인 임정의 구상이다. 임정에 참가했던 세력이 세우려고 했던 나라는 정체로는 민주공화국이고 경제 정책에 토지 국유화, 중요사업 국유화, 무상교육과 무상치료가 포함돼 상당히 진보적이었다. 그리고 이는 대부분 제헌헌법에 계승됐다. 또한 대한민국은 건국주체로 우파들만 들어간 반쪽 정부임에도 불구하고 친일 반민족행위자를 처단한다는 약속을 했다.

▲이= 대한민국 건국세력이 잘못했다는 뜻인가.

▲한= 국민적 기억을 만드는데 핵심 되는 내용인 제헌헌법과 임시정부에 대해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는 말이다. 대한민국은 친일 반민족행위자를 청산하겠다고 했지만 건국 후 1년도 지나지 않아 남로당 프락치사건, 반민특위 습격해산, 백범 암살 등의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은 대한민국 헌법에 의해 반드시 숙청됐어야 할 반민족행위자들의 쿠데타였다고 생각한다. 왜 제대로 국가를 세우지 못했는가, 왜 방향이 틀어졌느냐라는 점에서 1949년 5, 6월에 있어던 친일파 쿠데타에 의한 대한민국 정통성의 훼손 부분을 지적해야 한다.

▲이= 대한민국이 친일파 세력에 의해 세워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해방 직후 농촌사회에서는 면장이나 면서기 중심으로 친일세력에 대한 광범위한 숙청이 있었다. 그리고 일제 때 드러내놓고 친일했던 사람들, 즉 영혼까지 팔아 친일했던 이들이 대한민국의 건국과정에 참여하거나 주요 요직에 참여한 사례는 없다. 설령 한 두 사람이 있다고 해도 대한민국 건국세력을 친일세력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다.

▲한= 친일 문제는 입장이 좁혀지지 않는다. 자유 인권의 가치가 건국을 통해 국가의 기본 원리가 됐다고 하는데, 그것이 살아있는 가치가 된 것은 뉴라이트가 건국주체로 부르는 당시 국가를 장악하고 있었던 세력에 대한 민중들이나 시민들의 끊임없는 민주화운동 덕택이다. 소위 건국세력들은 헌법에 좋은 내용을 담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을 실현할 의지와 능력이 있었는가. 이승만 시대 제도로서의 민주주의가 어떠했느냐를 보면 쉽게 평가할 수 있다.

▲이= 건국이 요구하는 다양한 과제들 가운데 적어도 정치, 안보, 군사 등 기본적인 틀은 이승만 시대에 이뤄졌다고 생각한다. 그가 있어서 오늘날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적 기틀이 만들어졌다. 공산진영의 공세를 방어했고 세계의 헤게모니 국가인 미국과 동맹을 이끌어냄으로써 건국과정의 큰 기틀을 잡았다. 지금 단계에서 그런 정도의 공로는 인정할 필요가 있다.

▲한= 이승만이 그 이후 어느 대통령도 보여주지 못한 안목과 결단력이 있었다는 점은 인정한다. 미국이 어떻게 나올까에 대해 그 이후 어떤 대통령보다 정확하게 판단했다. 하지만 그 결과를 꼭 긍정적으로 볼 수만은 없다. 그는 정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았는데 장기적으로 이른바 '통미봉남'이 나오게 된 구조적인 원인이 됐다. 이승만이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확실했다고 했는데 그 표현을 받아들인다면, 이승만은 자기 신념을 배반한 사람이다. 국회에서 부결된 개헌안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 뒤집는다든지, 국회의원들이 탄 버스를 크레인으로 끌고간다든지, 정치적인 라이벌을 국가보안법으로 사형시킨 일 등을 볼 때 그 민주주의라는게 도대체 어떤 민주주의였는지 묻고 싶다.

▲이= 야당 자체가 개헌을 하고 미국을 통해 이승만을 축출하려는 음모를 했다는 연구도 있다. 이승만은 가만히 있으면 쫓겨나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이승만은 전쟁 중에도 헌법에서 규정한 선거를 다 치렀다. 또 무엇보다 교육을 통해 자유민주주의를 국민적 가치로 정착시키는 데 역할을 했다. 민주주의라는, 이승만이 포기할 수 없는 제도적 가치와 자신이 수행하는 역할의 모순 때문에 발생한 것이 독재다.

▲한= 실제 민주주의를 지키고 실현한 공을 이승만에게 돌릴 것인가, 아니면 한국전쟁 후 새로운 교육을 받으면서 태어난 세대들에게 돌릴 것인가를 묻고 싶다. 새로운 세대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했다. 이승만의 선택과 결단을 강조하는 것은 영웅사관이다.

▲이= 박정희 시대는 권위주의적 정치에 따른 희생이 컸다. 그러나 나는 역사의 양쪽을 다 봐야 한다고 본다. 이승만과 박정희를 독재자, 권위주의자라고 비판하기 전에 그들은 하나의 역사적 산물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에 대해 자발적인 동의가 안 나올 때, 그 상황에서 박정희라는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알고 강인하게 실행했다. 민주주의를 지체시켜 놓은 것은 사실이지만 산업화의 결과로 민주주의의 실질적인 토대인 중산층을 만들어놨다.

▲한= 대한민국이 도저히 다시는 용납할 수 없는, 가져서는 안 된다고 보는 지도자가 이승만이고 박정희라고 생각한다. 역사적 산물이라면서 모든 사람이 책임져야 한다고 보는 주장은 박정희가 명확히 책임져야 할 역사적 책임 문제에 대한 물타기다.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산업화와 민주화는 동시에 진행될 수 있었다. 그런데 박정희는 그것을 대립되는 가치로 주장하며 자신의 장기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억눌렀다. 역사적인 책임은 엄정하게 내려져야 하는 것 아닌가.

▲이= 1960~70년대에 정치적 억압이 있었지만, 그 시대는 많은 한국사람들이 대단히 활기차게 세계로 뻗어나갔고 개인적인 성취를 이룬 시대이기도 하다. 정치적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과장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건국과정이 한번에 자기완결적으로 가져진 것이 아니고 굉장히 폭력적인 선택과정이었다는 것이다. 일련의 과정 속에서 전반적으로 우리가 성취해온 역사였다는 것이다. 20~30년간 성취해온 것은 길게 보면 거의 동시성이 있다고 본다. 그렇게 보면 우리 건국사를 좀더 밝고 긍정적으로 재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한 = 친일이나 학살을 대수롭지 않게 보는 것도 충격이고, 박정희 시대의 정치적 억압을 과장이라고 하는 해석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한국 보수층에 대해 아쉬움이 많다. 박정희 시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자는 말을 하려면 그 시대에 벌어졌던 인권침해에 대해 보수층이 좀더 적극적으로 진상규명과 재발방지 노력에 나서야 할 것이다. 그래야 진보측과 합리적인 대화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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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8-15 15:33   좋아요 0 | URL
조선시대 양반 연구나 일제시대 경제사 연구를 보면 이영훈 씨가 참 열심히 연구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하지만 해방 후의 역사 평가나 특히 박정희,이승만 평가는 수긍하기 어려운 데가 많죠.안타깝습니다.이대근 씨와 함께 낙성대 연구소를 세우면서 보수화되었던 것 같아요.
한영우 씨는 태종 때의 억압적인 독재때문에 세종의 번영이 가능했다면서 박정희더러 독재라고 하는데 그가 과감한 산업화를 이루어 놓았기 때문에 민주화도 가능했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데 요즘 이런 주장이 유행이더군요.

로쟈 2008-08-15 20:57   좋아요 0 | URL
하용출 교수의 <후발 산업화와 국가의 동학>(2006)이란 책을 한번 읽어보시길. 관심사에 맞으실 거 같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16 15:43   좋아요 0 | URL
오! 고맙습니다.조선일보에 쓴 하 교수 칼럼으로 보아 대충 성격은 짐작이 갑니다만...

로쟈 2008-08-17 00:39   좋아요 0 | URL
칼럼은 경향에도 쓰는 분이죠...

노이에자이트 2008-08-17 15:28   좋아요 0 | URL
반미를 하지 말고 미국을 활용하는 용미를 하자는 주장으로 유명하죠.

로쟈 2008-08-17 17:49   좋아요 0 | URL
그런 얘기는 오프 더 레코드로 해야 할 듯싶은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8-17 18:42   좋아요 0 | URL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죠.친미주의라는 말은 아무래도 좀 그러니까 그런 단어를 쓰려고 하지요.
 

이름을 붙이자면 '(속) 알 건 알아야지'쯤 되겠다. 이번엔 '아시아를 읽는 결정적 사건9’를 다루고 있는 <더 뉴스>(아시아네트워크, 2008)란 책 이야기다(http://h21.hani.co.kr/section-021015000/2008/08/021015000200808070722038.html). '결정적 사건'이라고는 하지만 대부분은 우리가 몰랐던 사건들이다. 혹은 우리만 몰랐던 사건들이다. 기사를 읽으며 '아시아의 눈으로 아시아의 문제를 바라본다'는 말을 곱씹게 된다. 책을 읽다 보면 입술을 깨물지도 모르겠다...

한겨레21(08. 08. 07) 우리만 몰랐던 결정적 사건들

1998년 필리핀에선 영화배우 출신 조지프 에스트라다가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멋진 콧수염을 길렀고 스크린에서 악당들을 때려잡다가 이제 막 튀어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취임 첫 해가 저물 때쯤부터 에스트라다의 부패와 방탕한 생활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그가 여성 6명과 적어도 자녀 11명을 낳았고 미인대회 우승자들과 즐기며 하룻밤에도 여러 여성들의 집을 전전한다는 이야기가 퍼져나갔다. 그는 한마디로 마르지 않는 스캔들의 샘이었다.

필리핀의 ‘펜을 든 여전사들’
2000년에 접어들자 ‘펜을 든 여전사들’로 알려진 PCIJ(필리핀탐사저널리즘센터)를 이끌던 쉐일라는 에스트라다 문제를 진지하게 파고들 시점이라고 결정했다. 그는 모두 여성들인 전속기자 4명과 기고자 3명을 사무실로 불러모았다. 그들은 증권거래위원회 컴퓨터 단말기에서 대통령과 가족들이 주요 주주로 있는 회사들을 찾아내고 몇 달에 걸쳐 등기서류와 금융기록을 확보했다. 2000년 7월 대통령이 자산신고서에 누락시킨 재산들을 폭로하는 첫 보도가 나갔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에스트라다가 애인을 위해 몰래 짓고 있는 초호화 맨션을 포함해 대통령 소유의 부동산을 샅샅이 찾아내고, 주식거래와 관련된 불법 행위를 취재했다. 설계사, 변호사, 인테리어 디자이너, 건설 노동자 등 도움이 되는 사람은 모조리 만났다. 마침내 2000년 10월부터 대통령의 부패를 다룬 연속기획을 보도했다. 2001년 1월 필리핀 거리마다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피플파워’의 물결이 넘쳐났다. 1월16일 쉐일라는 차를 몰고 집에 가다가 인파에 갇혀버렸다. 한 사람이 쉐일라를 알아보고 “PCIJ다”라고 외쳤다. 그 많은 인파는 PCIJ를 외치며 쉐일라에게 길을 터주었다. 나흘 뒤 에스트라다의 영화는 끝났다.

푸른숲이 만든 아시아 전문 출판사 ‘아시아네트워크’는 아시아의 눈으로 아시아의 문제를 바라보는 책들을 펴내고 있다. 모든 기획의 책임자는 그 바닥에서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분쟁지역 전문기자 정문태씨다. 아시아 기자들의 활약을 다룬 <더 뉴스>(쉐일라 코로넬 외 지음, 오귀환 옮김, 1만6천원)는 그 세 번째 책이다.

‘아시아의 눈으로 아시아의 문제를 바라본다….’ 우리는 이 문장을 좀더 복기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엔 서구의 시선에 대한 어떤 반작용이, 혐오감이, 대립항이 숨어 있다. 정문태씨는 책의 서문에서 자신의 정체성의 핵심을 이루는 이야기를 한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는 그 서양 기자들 일터쯤으로만 등장한다. 그 투란 것도 대개 왔노라, 보았노라, 썼노라 같은 고대 점령자들의 낭만기가 물씬 풍긴다.” 지당한 말씀인데, 우리는 그 다음 대목을 더 들어봐야 한다. “우리는 서구중심주의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대신 아시아중심주의를 옮겨 심겠다는 뜻이 전혀 없음을 분명하게 밝혀둔다. …온전한 아시아의 눈으로 아시아를 보자는 결심 탓이다.” 정문태씨가 있는 자리는 바로 어떤 ‘중심주의’의 바깥이다.

<더 뉴스>의 부제는 ‘아시아를 읽는 결정적 사건9’이다. 그런데 당신이 평균 수준의 지식을 가진 시민이라면, 이 ‘결정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대부분의 사건들이 생소할 것이다. 사건이 일어난 나라들의 역사에 대해서도 들어본 바가 없을 것이다. 심지어 아시아란 이름으로 우리와 꽁꽁 묶여 있는 나라들인데도. 이것이 바로 ‘중심주의’의 술수다. <더 뉴스>는 아시아 기자들이 직접 자신의 고난과 성공을 회고하며 쓴 글들을 묶은 책이다. 필리핀의 ‘여전사’ 쉐일라 코로넬 외에도 스릴과 서스펜스가 넘치는 이야기들은 얼마든지 있다. 조금 더 감상해보자.

인도 보팔에 살고 있는 기자 라아즈쿠말 케스와니는 1978년 11월24일 하늘에 연기가 뒤덮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도로 북쪽에서 한 소년이 자전거를 타고 오며 외쳤다. “유니온 카바이드 공장에서 불이 났어요!” 살충제 등을 생산하는 미국계 화학기업인 유니온 카바이드는 보팔의 상징이자 자부심이었다. 1981년 크리스마스 이브, 라아즈쿠말의 오래된 친구이자 유니온 카바이드 공장의 설비 기사인 모하메드 아슈라프는 야간근무를 하고 있었다. 파이프 이음새를 교체하려는 순간 무서운 포스겐 가스가 덮쳤다. 이튿날 아침 친구는 숨을 거뒀다.

라아즈쿠말은 포스겐이나 메틸이소시아네이트와 같은 무서운 화학물질에 노출돼 여러 질병으로 고통받는 노동자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유니온 카바이드의 열악한 노동 환경과 허술한 안전관리에 대한 여러 검증을 거친 뒤, 라아즈쿠말은 자신이 운영하는 발행 부수 2천 부의 주간신문 <라파트>에 기사를 실었다. 그 뒤 여러 차례 유니온 카바이드 공장의 가스 누출 위험과 그 치명적 결과를 경고하는 기사들을 실었으나 회사와 관료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1984년 12월2일 일요일 밤이었다. 막 잠자리에 들려던 라아즈쿠말은 역겨운 냄새를 맡고 숨이 막혔다. 급히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요?” “유니온 카바이드 가스탱크에서 가스가 누출됐소.” 그는 즉시 오토바이 한 대에 부모와 남동생을 태워 피신하도록 했다. 자신은 이들과 반대쪽으로 방향을 돌려 유니온 카바이드 공장으로 갔다. 그는 공식 사망자만 1만5천 명이 넘는 ‘보팔 참사’를 예언한, 탱크 폭발 현장을 취재한 유일한 기자가 됐다. <뉴욕타임스> 기자들은 그의 헌신적 도움을 받으며 3회짜리 시리즈물을 만들었으나 기사에 ‘라아즈쿠말’이라는 이름을 넣지는 않았다.

독재권력과 재벌권력의 이중주
인도네시아의 아흐마드 타우픽은 1994년 8월 수하르토 독재에 맞서는 언론단체를 결성하고 대안매체 <인디펜덴>을 발행했다. 1995년 3월16일 체포돼 ‘정부에 대한 증오 확산’ 혐의로 3년형을 받았다. 이 넉살 좋은 친구는 소매치기, 마약사범, 도박업자, 정치범, 부정부패 연루 관료 등과 친해졌다. 그리고 감옥 안에서도 일을 계속했다. 그는 살렘바 교도소에서 간수의 눈을 피해가며 옆방에 있던 동티모르 독립운동가 사나나 구스마오를 인터뷰했다. 기사는 아내가 면회 왔을 때 어린 아들의 팬티 속에 숨겨넣었다. 당연히 그는 교도소 당국의 골칫거리였으며 이곳저곳으로 계속 이감됐다. 그동안 흥미로운 죄수들 얘기가 감옥발 기사로 여러 매체에 실렸다.

1998년 수하르토가 쫓겨나고 인도네시아의 대표적 진보 시사주간지 <템포>가 복간되자, 그도 편집국에 합류했다. 2003년 3월8일 편집국 직원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빨리 와주셔야겠어요. 토미 위나타 패거리가 <템포>를 공격할 거래요.” 불법 사업 조직을 거느린 도박업자 토미 위나타의 조직원들은 그동안 테러와 범법 행위를 일삼아왔다. 그들의 불법 사업 중 하나를 비판하자 조직원들이 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군부독재가 물러나니 재벌권력이 밀려왔다. 그는 경찰이 보는 앞에서 구타를 당했다. <템포>는 300억원짜리 송사에 휘말렸고 아흐마드 타우픽은 허위 보도 혐의로 아직도 재판을 받고 있다.

<한겨레21> 편집장과 <한겨레>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오랫동안 언론인으로 일해온 번역자 오귀환씨는 책을 통해 “새로운 각도에서 뉴스와 인간의 관계를 깊이 응시할 수 있었다”고 썼다. 독자들은 아시아 언론인들이 지나온 길을 읽으며 뒤늦게 놀라게 될 것이다.(유현산기자)

08. 0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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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08-08-15 20:52   좋아요 0 | URL
흐음..세상엔 내가 모르는게 너무 많구나.
아니지, 내가 너무 무관심하구나.

지구는 파괴하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로 나뉘는 이상한 균형의 세계.
지금, 마침, 마이클 잭슨의 Heal the world 노래를 듣고 있어서인지, 슬프네요.

로쟈 2008-08-15 20:58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나쁜 세상이지만, 누구 말대로 가만 있으면 더 나빠지는 세상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16 16:25   좋아요 0 | URL
수하르토 저 영감.사람 엄청나게 죽이고 대통령 됐죠.집권 후에도 정적 죽이는 것도 모자라 동 티모르에서 대학살을! 그런데 저런 인간말종들이 천수를 다 누리고 죽다니!

로쟈 2008-08-17 00:37   좋아요 0 | URL
한둘이 아니니까 하늘도 무심하다고 할 수밖에요...

딸기 2008-08-19 16:07   좋아요 0 | URL
저 시리즈 4권 중 3권을 한겨레 기자 or 전직 한겨레 기자가 번역했는데...
저렇게 홍보해도 되는 걸까요 ^^
(물론, 홍보를 해야만 하는 책이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ㅋㅋ)

로쟈 2008-08-19 16:31   좋아요 0 | URL
세 권만 뜨는데, 한 권 더 있나요?..

딸기 2008-08-20 18:27   좋아요 0 | URL
앗 죄송... 실은 제가 저 프로젝트하고 좀 관련이 있어서요. ^^
아마도 나머지 한권은 아직 출간 안 된 듯해요.

로쟈 2008-08-20 22:04   좋아요 0 | URL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점심을 먹고 돌아와 메일함을 여니 창비주간논평이 들어와 있다(http://weekly.changbi.com/blog_post_279.aspx). 제목에 이끌려 읽게 됐는데, 최근 KBS 사태 등을 다루면서 작금의 민주주의 농단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현 정세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만 짓기엔 상황이 그렇게 여유로워 보이지 않기에 일독해보시길 권한다.

  

창비주간논평(08. 08. 13) 붉은 여왕의 민주주의

맑스는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을 이렇게 시작한다. "헤겔은 어디에선가 모든 세계사적 사건과 인물은 두번 나타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처음엔 비극(悲劇)으로, 그다음에는 소극(笑劇)으로." 나는 두 사상가의 내공은 인정하지만 이 표현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는다. '무엇을 사건으로 보고 누구를 인물로 볼 것인가' '두번의 유사성은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주장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레토릭이지 엄격한 명제는 아니다.

그런데 KBS 정연주 사장의 해임을 둘러싼 사태를 보면서 전에 본 듯한 기시감(deja-vu)을 피하기 어려웠다. 이유는 곧 밝혀졌다. 노태우정권 때인 1990년에 이미 같은 일이 있었던 것이다. 감사원의 해임요구, 이사회의 해임제청, 고위인사의 압박, 대통령의 해임 그리고 새로운 사장. 그 수순은 18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았다. 차이라면 예전의 사건은 언론말살의 비극이었지만 지금의 사건은 정신나간 소극이라는 것이다. 사건이 반복될 때 뒤의 사건이 소극이 되는 이치는 단순하다. 세월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 채 되풀이되면 시대착오가 되기 때문이다. 예전에 국민의 반응이 '분노'에 가까웠다면 지금의 반응은 '실소'에 가깝다. 어차피 유유상종이기 때문에 내 주위의 반응들이 나처럼 하나같이 비판적인 것은 당연하지만, 그 반응들이 '어처구니없다' '황당하다' '어이없다'인 것은 사건의 본질이 시대와 동떨어진 소극임을 보여준다.   



민주주의가 심각하게 후퇴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과연 그저 웃기고 자빠진 일인가? 주로 성희롱적이거나 성차별적인 유머만을 전문적으로 구사하던 분들이 갑자기 이렇게 수준높은 개그를 할 리가 없다. 이것은 우리의 반응과 달리 대단히 진지한 사건인 것이다.

대부분의 국민은 성인이 된 후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군사독재,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로 변해가는 흐름 속에서 권력이 '소수에서 다수로' '밀실에서 광장으로' '폭력에서 논리로' 옮겨가는 과정을 보아왔고, 그것이 사회의 법칙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지난 대선에서 군사독재에 뿌리를 둔 정치세력이 승리하더라도 사회경제적인 문제야 할 수 없다 치고 민주주의를 걱정하지는 않았다.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었을 때의 느낌은 20년 전 노태우 후보가 승리했을 때의 비참한 심정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심지어 이렇게 정권이 교체되는 것도 길게 보아서 나라에 도움이 될 거라는 낙관적 견해도 드물지 않았다. 그런데 반년도 되지 않아 국민들은 분노해야 할지 실소해야 할지 모를 사태들에 끊임없이 직면하고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속편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는 붉은 여왕과 함께 미칠 듯이 달리지만 이상하게도 제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때 붉은 여왕은 깜짝 놀란 앨리스에게 말한다. "여기서는 같은 자리에 계속 있고 싶으면 힘껏 달려야 해. 다른 곳에 가고 싶다면, 적어도 그 두배는 빨리 달려야 하지." 그렇다.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해, 적어도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다. 민주주의의 제자리라도 지키려면 죽을힘을 다해 달려야 한다는 것, 그 노력을 게을리할 때 민주주의는 순식간에 뒤로 처지고 만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민주주의의 문제는 너무 시급해져서, 시한폭탄을 장착한 것 같은 양극화와 비정규직 문제조차 사치스러울 지경이다.

민주주의는 죽을힘을 다할 때 지켜지는 것
이제 이명박정부는 무고한 사람을 고문하고 정치사찰만 하면 군사독재정부와 똑같은 정부가 된다. 앞의 것은 쉽지 않다고 생각되지만, 뒤의 것은 장담할 수 없다. 어느 현명한 판사에게 재판과 관련한 전화를 걸었다가 망신당한 국정원 직원의 사례는 어떤 징조를 보여주고 있다. 도대체 이 정부의 정체는 무엇일까?

보수인사들이 입만 열면 지키겠다는 자유민주주의를 제대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몇가지 원리는 잘 알고 있다. 주권자는 국민이고, 스스로 권력을 행사하기 곤란한 부분을 대리인들에게 위임했다는 것. 맡겨진 권력은 주권자를 위하여 행사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만들어진 법은 게임의 규칙으로서 누구나 존중해야 한다는 것. 나는 보수적인 견해보다는 진보적인 견해에 귀를 기울이게 되지만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라는 '게임의 규칙'만 준수한다면 어떤 보수적인 견해에 대해서도 함께 토론하고 선의의 경쟁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들이 약자라서 불리할 것 같은 때에만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고 권력을 쟁취한 후에는 그것을 사유화하는 자들, 국민들에게만 법의 지배를 받으라 하고 막상 자신들은 힘의 지배가 사회의 냉혹한 규칙이라고 믿고 실천하는 자들과는 한 세상에서 살 수 없다. 그들은 국민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제 배를 불리고 공공의 이익을 말하는 척 패거리의 이익을 추구하는 공공의 적이며, 민주주의의 파괴자다.



그대들에게 '게임의 규칙'을 묻는다
혹시 그대들이 민주주의와 법을 지키고 있다고 믿는가? 한번 따져보자. 뜻을 모아 공개적으로 논의하고 판사의 조정 아래 분쟁을 합의하여 처리한 것이 왜 사장의 배임인가? 이득은 도대체 누가 보았는가? 그렇다면 판사와 국세청장도 공범이란 뜻인가? 어느 법률가가 그따위 법률해석을 하는가? 도주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람을 출국정지하여 괴롭히는 것이 공권력의 집행인가? 공권력은 필요한 경우에 최소한으로 행사하게 되어 있는 것을 그대들이 정녕 모르는가? 해임할 빌미를 찾기 위하여 정해놓고 하는 감사가 '바른 감사'인가? 그대들이야말로 감사대상이다.

나는 KBS가 경영을 어떻게 했는지는 복잡해서 잘 모르겠다. 그러나 경영상의 잘못이 있다 쳐도 그것이 사전적 의미에서 '비위(非違)'라는 표현에 들어맞는가? 그대들은 일상생활에서 '비위'라는 말을 그런 경우에 쓰는가? 그렇다면 쇠고기협상이야말로 엄청난 '비위' 아닌가? 이전의 법에서 '임면권(任免權, 임명하고 해임할 수 있는 권한)'이라고 규정한 것을 '임명권'이라고 고친 것이 해임할 권리를 제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국회가 심심해서 문장을 다듬었다는 뜻인가? 진실을 구부려 권세에 아부하는 그대들의 논리는 '비위'가 상해서 더이상 못 들어주겠다.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은 아무리 적이라도 온당한 법에 따른 절차를 거쳐 배제하라고 말한다. 그게 불가능하면 법을 고치든가, 법을 고칠 수 없으면 참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대들은 법과 '게임의 규칙'과 '인간에 대한 예의'와 심지어 '국어의 원칙'을 무시한다. 이기는 것밖에 관심이 없는 무리에게는 더이상 관용이 적용될 수 없다. 그대들은 우리의 신성한 민주주의의 경기장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그대들은 승자인 자신들이 올림픽 메달리스트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프로레슬링 시합에서 상대의 눈을 찔러 비만한 배에 챔피언벨트를 찬 반칙왕에 지나지 않는다.

붉은 여왕은 우리가 저들로부터 소중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죽을힘을 다해 뛰어야 하고, 그래야지 제자리나마 지킬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저들은 힘과 반칙과 불법과 기만으로 국민을 능멸하지만 국민은 오로지 비폭력, 민주주의, 법치주의, 선거 그리고 단결로써 저들을 심판하자. 저들을 신성한 민주주의의 경기장에서 기필코 퇴장시키자.(조광희/ 영화제작자)

08. 0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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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한알 2008-08-13 18:01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블로그에서 제 글을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로쟈 2008-08-13 22:02   좋아요 0 | URL
앗, 그러셨군요! '저들'이란 표현이 맘에 듭니다. 더 자주 쓰시면 더 자주 옮겨놓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