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의 '오늘의 책(7월 21일)'이 마샬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를 다루고 있다. 그가 태어난 날이 1911년 오늘이어서이다. 한데, 두 종의 국역본 가운데, 커뮤니케이션북스판의 이미지를 올려놓고 있어서 예전 교수신문의 고전번역비평을 떠올리게 됐다. 내 기억에는 민음사판이 더 추천할 만한 번역이라고 제시됐었기 때문이다. 다시 찾아보니 그렇다. 참고삼아 챙겨놓는다(<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2>(생각의나무, 2007)에 수록돼 있다).

한국일보(08. 07. 21) 미디어의 이해

1911년 7월 21일 캐나다의 미디어 이론가이자 문명비평가인 마샬 맥루한이 태어났다. 1980년 69세로 몰. 맥루한은 마니토바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다가 영문학으로 전공을 바꿨고, 캠브리지대에서 엘리자베스 시대의 시인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그는 영문학 교수로 미국과 캐나다의 대학에서 20여년간 대중문화를 강의했다. 지금은 일상 용어가 된 ‘지구촌’이나 ‘정보시대’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미디어의 이해>는 맥루한의 이런 공부의 배경-테크놀로지와 문학과 문화비평-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던 책이다.

<미디어의 이해>가 출간된 것은 1964년이다. 반향은 대단했고 맥루한은 스타 대접을 받았다. 이듬해 뉴욕헤럴드트리뷴은 맥루한을 “뉴턴, 다윈,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파블로프 이후 가장 중요한 사상가”로 꼽았다. 1967년 뉴스위크는 학자로는 드물게 그를 표지인물로 선정하기도 했다.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맥루한의 유명한 명제는 이 책의 서론 제1장이다. 그는 이어 나르시스 신화를 빌어 미디어 시대 인간의 운명을 말한다. “나르시스는 혼수상태나 감각 마비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narcosis’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 신화가 말하려는 핵심은 인간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확장한 것(나르시스에게는 거울 같은 물)에 갑자기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미디어의 이해>의 부제가 바로 ‘인간의 확장’이다. 맥루한은 음성언어부터 돈, 시계, 사진, 신문, 자동차, 광고, 게임, 텔레비전, 무기 등 26가지 미디어를 인간의 확장물로 보고 독특한 예언적 표현과 비유, 고전 문학과 현대 대중문화를 종횡하는 현란한 인용과 분석으로 해석한다. 그것은 미디어로 본 문명사이기도 하다. 이 책이 미디어 전공학과의 필독서를 넘어 현대의 고전으로 읽혀야 하는 이유다. 영화 ‘매트릭스’의 광고카피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였던가.맥루한은 40년 전에 이미 그것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대로 된다.”(하종오기자)

교수신문(06. 11. 24) 고전번역비평(53) 마셜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 국역본은 두 종류가 있다. 박정규 역(커뮤니케이션북스. 1997)과 김성기·이한우 공역(민음사, 2002)이 그것이다. 그 외 완역이 아닌 초역이 있었으나 지금은 절판돼 찾을 수 없다. 이글을 위해 사용한 영어 원본은 『Understanding Media』(MIT Press, 1994. 초판 1964년)이다. 박정규 역과 김성기·이한우 역 사이에는 상당한 시차가 있고 그래서 우리는 후자가 전자에 비해 보다 발전된 번역본일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논리적인 추론일 뿐 반드시 그런 건 아니다. 



먼저 이 책의 번역과 관련해 특별한 성격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겠다. 그것은 ‘미디어의 이해’의 원저자의 글이 난삽하고 의미가 애매모호한 부분이 많다는 사실이다. 이런 글을 번역하는 경우 원천적으로 옮긴 글 또한 난삽하고 그 의미가 애매해질 수밖에 없다.

맥루한의 글은 구술적이다. 즉 명석하고 분명함과는 거리가 먼 反개념적, 反분석적, 反기계론적인 것이 그의 글이다. 맥루한이 말한 것처럼 번역을 기계론적 작업이라고 한다면 그의 이야기는 번역에 적합한 대상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번역문은 그의 원문을 읽는데 도움을 주는 참고서로서의 역할이 더 어울릴 수 있다. 번역본만으로는 원본의 의미전달이 제대로 안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맥루한의 저서의 경우는 역자의 적절한 해석과 의역이 불가피한 부분이 꽤나 많다. ‘미디어의 이해’는 꽤 두꺼운 책이다. 이를 모두 언급하기는 힘들다. 몇 가지 주된  주제를 중심으로 비교 평가하고자 한다.



꽤나 난삽하고 애매한 책
‘미디어는 메시지다’(The medium is the message)는 맥루한의 가장 유명한 메타포 중의 하나다. 이 말은 책 ‘미디어의 이해’ 첫 장에 등장한다. 그 첫 구절을 박정규는 이렇게 옮겼다. “우리의 문화는 모든 사물을 관리하기 위해 이들을 분할하고 구분하는데 숙달되어 있으므로 이제 실제로 ‘미디어가 메시지다’라는 것을 납득하게 되면 다소 충격이 될 것이다.”(23쪽) 김성기 등의 번역은 이렇다. “모든 사물들을 통제의 수단으로 분리해서 보는데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는 서구와 같은 문화 내에서는 작용면에서나 실제적인 면에서 미디어가 곧 메시지라는 주장이 종종 충격으로 여겨진다.”(35쪽) 

이 문장의 원문은 “In a culture like ours, long accustomed to splitting and dividing all things as a means of control, it is sometimes a bit of a shock to be reminded that in operational and practical fact, the medium is the message.”(7쪽)이다. 이 문장(원문)의 전언(傳言)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 시대의 사물이해 방식은 이분법 혹은 분절적인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사물을 지배 통제하기 위한 것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말은 이분 혹은 분절이 아니라 통합적인 인식으로 이것은 우리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충격적인 주장이다”하는 것이다.

원문의 내용을 이렇게 정리하고 보면 박정규와 김성기·이한우 번역에 빠진 부분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원문의 의미를 보다 쉽게 전달하는 데는 후자가 더 나은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두 번역문 모두 원문 없이 번역문만을 읽을 때 원문의 전언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데는 상당한 의문이 제기된다.

개념 번역, 암묵적 의미 살려야
다른 예를 보자. 여기서도 유사한 문제가 발견된다. 다시 말해 번역문만을 갖고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 말이다. “That technologies are ways of translating one kind of knowledge into another mode has been expressed by Lyman Bryson in the phrase ‘technology is explicitness.’ Translation is thus a ‘spelling-out’ of forms of knowing. What we call ‘mechanization’ is a translation of nature, and of our own natures, into amplified and specialized forms.”(56쪽)

박정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옮겼다. “테크놀로지라는 것은 한 종류의 지식을 또 다른 양식으로 번역하는 방법이라고 라이먼 브라이슨(Lyman Bryson)은 말하면서 ‘테크놀로지는 명료함이다’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따라서 번역(translation)은 앎의 형태를 ‘분명하게 하는’것이다. 한편 우리가 ‘기계화’라는 부르는 것은 자연을, 또한 우리 자신의 속성을 증폭되고 전문 분화된 형태로 바꾸는 것이다.(93쪽)

한편 김성기·이한우 역은 이렇다. “기술이 한 종류의 지식을 다른 양식으로 번역하는 방식이라는 점을 라이먼 브라이슨 Lyman Bryson은 ‘기술은 명료화이다’라고 표현한바 있다. 따라서 번역이란 인식의 형식들을 ‘하나하나 판독하는 것’이다. 우리가 ‘기계화’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과 우리인간들의 본성을 증폭되고 특수화된 형태들로 번역하는 것이다.”(102쪽)

이들 사이에 다른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박정규가 “앎의 형태를 분명하게 하는” 것으로 옮긴 ‘a spelling-out of forms of knowing’을 김성기 본은 ‘인식의 형식들을 하나하나 판독하는 것’으로 옮기고 있다. 다른 하나는 ‘specialized form’을 ‘전문 분화’와 ‘특수화’로 옮긴 부분이다. 이들 두 가지 번역의 경우는 박정규 역이 김성기 역보다는 쉽게 그리고 보다 원문의 뜻을 충실히 옮기고 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양자 모두에게서 흠이 발견된다. 위 문장의 경우 ‘…nature, and of our own natures’의 경우 이를 단순히 ‘자연을, 또한 우리 자신의 속성을’으로 옮기는 경우 원문과 대조 없이는 거의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보다는 ‘사물의 원래 자연적인 상태의 것을, 그리고 우리 자신의 본래적인 속성들’ 정도의 의역이 옳다고 생각된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번역은 오역이나 불충분한 번역이 될 위험이 있다.

한 가지 더 작지만 큰 문제이기도 한 것이 있다. 그것은 “technology is explicitness.” 문장의 ‘explicitness’ 이다. 이를 두 번역본은 모두 ‘명료함’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여기서의 ‘explict’는 ‘tacit’의 반대되는 그래서 ‘암묵적’과 대칭적인 ‘명시적’-보이게 밖으로 드러낸다는 의미의-이라는 용어가 더 적합할 것이다. 맥루한이 부단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 근대적 시각 문화라고 이해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암묵적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번역에 좀 더 세심해야할 이런 종류의 단어들이 있다. 예를 들면 ‘Synesthesia or unified sense.’(315쪽)를 두 번역은 모두 ‘통일된 감각’(451쪽, 437쪽)으로 옮기고 있는데 이는 ‘통 감각 또는 통합감각’이 보다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특별히 오역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의미전달이 왜곡되거나 전달이 잘 안되는 용어들은 많이 발견된다.

원서 대신하기 위한 노력
두 번역본을 비교하면서 얻게 된 결론은 원문의 번역내용에 있어서는 양자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큰 차이가 없게 된 이유는 아마도 김성기·이한우의 번역이 앞서 나온 박정규의 번역을 참조했고 그 보다는 두 번역 모두가 일본어 번역본-박정규는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김성기·이한우는 참조했음을 언급하고 있다-에 의존한 부분이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결과적으로 두 번역에는 모두 직·간접으로 일본어 번역이 많이 참조됐기 때문에 유사할 수밖에 없다고 추측된다.

이런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두 번역본 가운데 어느 것 하나를 추천한다면 그것은 김성기·이한우의 번역이다. 그 이유는 번역 책으로서의 격식을 보다 충실하게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지만 박정규 역에는 없는 원본의 이름이나 참조서적, 번역과정 등에 관한 내용을 김성기·이한우의 역은 밝히고 있고 또 욕심에 차진 않지만 역자 주 그리고 L. H. Lapham의 해제용 서론 등이 첨가돼 독자에게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추천을 하면서도 맥루한 사상을 이해하는데 번역본이 원서를 대신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되기 위해서는 아직 상당한 보완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번역자가 전공이 다르기 때문인지 주석이 필요한 사항의 선택이나 용어 해석 등에 있어서 단절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다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점들이 훗날 보완되기를 기대해 본다.(임상원/ 고려대 명예교수·언론사상) 

08. 07. 21.

P.S. 요는 두 종의 번역본 모두 원서를 대신할 수 있는 수준은 아직 못된다는 것이겠다(유감스럽지만, 현재로선 다수 고전 번역서들의 현실이 그러하다). 내가 알기에 맥루한의 책은 <미디어의 이해> 외에 <미디어는 맛사지다>(열화당, 1988; 커뮤니케이션북스, 2001), <구텐베르크의 은하계>(커뮤니케이션북스, 2005), <지구촌>(커뮤니케이션북스, 2005) 등이 더 소개돼 있다. 그리고 해설서로는 조너선 밀러의 <맥루안>(시공사, 2001), 필립 마샨드의 <마셜 맥루언>(소피아, 2006), 그리고 데이비드 스테인즈 등이 엮은 <매클루언의 이해>(커뮤니케이션북스, 2007)가 눈에 띈다. 언젠가 적은 적이 있지만 맥루한의 책을 연달아 낸 출판사에서 그 강연과 대담을 묶은 책은 '매클루언의 이해'라고 내는 건 매우 엉뚱하면서도 기이한 일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8-07-22 09: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7-22 10:32   좋아요 0 | URL
사실 대단히 미디어 친화적 한국사회에서 새로운 미디어론이 나와야 하는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정보화사회론 같은 것도 그렇구요...

노이에자이트 2008-07-23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 어렵네요...

로쟈 2008-07-24 22:06   좋아요 0 | URL
사실 어렵기로는 우리말이 더 어렵습니다.^^;
 

7월도 2/3가 지나갔지만 뒤늦게 '이달의 읽을 만한 책'을 꼽아본다. 개인사정으로 바쁘기도 했고, 또 굳이 독서 목록을 작성해봐야 읽을 만한 여유도 없기 때문에 미뤄졌다. 그냥 넘어가지 않은 건 해오던 관성이 있어서이고, 한편으론 생산적인 일을 할 형편이 아닐 때 '단순작업'으로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먼훗날 '기억'을 대신해줄 수도 있는 것이고).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의 웹진(http://www.kpec.or.kr/index.asp)을 참조하여 '2008년 7월의 읽을 만한 책'을 따라가보고 생각나는 책 몇 권을 덧붙인다.

 

 

 

 

1. 문학

작가 신경숙씨가 꼽은 이달의 책은 공선옥의 <행복한 만찬>(달, 2008)이다. '공선옥의 음식산문집'이란 부제를 살펴보지 않으면 소설집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요리책도 아니다. "행복한 만찬이라는 제목을 보고 책을 읽지 않은 이들은 요리책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르겠다. 딱히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책은 단순한 요리책이 아니다. 그리고 이 책에 소개된 스물여섯가지의 먹거리들을 두고 요리라고 말하기는 좀 뭐하고 그야말로 생존의 냄새가 훨씬 더 가미된 음식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이 책에서 공선옥이 소개하는 음식 만드는 법을 그대로 따라하기란 매우 쉬운 것 같은데도 사실은 “정서” 라는 노하우가 거의 80% 들어가 있기 때문에 누구도 따라할 수 없다. 대신 공선옥이라는 작가가 성장한 시기의 우리나라 농촌 먹거리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우리는 마치 인문학 공부하듯 따라가 볼 수 있다."라는 게 추천의 변이다.

순전히 '만찬'이란 제목 때문에 떠올리게 되는 책은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원작자 이자크 디네센의 <바베트의 만찬>(문학동네, 2003)이다. 이 역시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나는 예고편밖에 보지 못해서 자세히 말하진 못하겠다. "프랑스 혁명의 물결에 떠밀려 노자매의 집에 몸을 의탁하게 된 프랑스 제일의 요리사 바베트가 차려내는 특별한 만찬이 가슴 가득 따뜻한 감정을 자아낸다"고 하므로 그런 만찬 그리울 때 잠시 침을 흘리며 한번 손에 들어봄 직하다.

그리고는 좀 포만감이 느껴질 때 대린 맥마흔의 <행복의 역사>(살림, 2008)를 읽어보는 건 어떨까? 700쪽이 넘는 분량이니 이 또한 아주 '포만한' 책이다. 다소 무모해 보이는 주제의 책이지만 저자는 멀쩡한 역사학 교수이다. "철학, 역사, 심리학, 유전학, 스마일리 페이스를 망라하며, 행복 추구가 어떻게 새로운 형태의 쾌락을 야기하고, 또한 새로운 형태의 고통을 초래하는지를 보여준다. 예술과 건축, 시와 경전, 음악과 테크놀로지, 문학과 신화를 포함한 많은 출처에 기반을 두고, 인간의 행복에 대한 지적 역사를 제시한다."고 돼 있다.

 

 

 

  

2. 역사

역사분야의 책으로 이덕일씨가 꼽은 건 미국의 두 역사학자가 쓴 <히드라>(갈무리, 2008)이다. 이미 '헤라클레스의 칼과 히드라의 머리'(http://blog.aladin.co.kr/mramor/2072932)란 페이퍼에서 소개한 바 있다. 630쪽이 넘는 분량이라 이 역시 쉽게 엄두를 낼 만한 책은 아니지만 이열치열로 읽어볼 만하겠다. "<히드라>는 자본주의 발달사를 민족사로 바라봤던 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밑의 관점, 즉 다중의 관점으로 바라봄으로서 ‘잊혀진 역사의 일부를 복원하면서’ 보편성을 획득한다. <히드라>의 저자인 피터 라인보우와 마커스 레디커는 자본주의 발달사를 ‘헤라클레스적인 세계화 과정에 여러 머리를 가진 히드라가 저항하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소개글에서도 시사되지만, 네그리/하트의 <다중>(세종서적, 2008)과 세트로 읽을 필요가 있다. 마커스 레디커의 또다른 책 <악마와 검푸른 바다 사이에서>(까치글방, 2001)와 하워드 진의 <살아있는 미국역사>(추수밭, 2008)도 곁들일 수 있겠고.



 

 

  

3. 철학

김상환교수가 추천한 철학분야의 책은 뜻밖에도 불교 관련서이다. 김달진 선생의 <쉽고 뜻깊은 불교 이야기>(문학동네, 2008). 김달진 전집의 한권으로 나온 책으로 사위인 최동호 교수가 엮었다. 추천의 변은 이렇다. "여래장(如來藏), 유심조(唯心造), 제행무상(諸行無常) 같은 불교의 가르침은 심오한 철학적 진리를 담고 있다. 이런 진리에 대해 수많은 학문적 논구가 있어 왔고 앞으로도 많은 저서가 쏟아질 것이다. 최근에는 데리다, 들뢰즈, 라캉 등과 같은 첨단의 서양 철학도 결국 이런 불교의 진리로 회귀하는 듯하여 학자들의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이런 학술적 논구나 이론들은 높은 수준의 교양과 전문적 지식을 쌓은 사람들의 전유물이지만, 부처는 결코 어렵게 말하지 않았다. 도둑, 창녀, 거지, 과부 등과 같이 무지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도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쉽게 가르쳤다. 김달진 전집의 일부로 재출간된 <쉽고 뜻 깊은 불교 이야기>를 읽으면 알 수 있다." 제목 그대로라는 것.

불교에 관한 더 쉬운 책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오강남의 <불교, 이웃종교로 읽다>(현암사, 2006), 나카자와 신이치 등의 <불교가 좋다>(동아시아, 2007/2008), 그리고 우더신의 <한권으로 읽는 불교>(산책자, 2008) 등이 참고할 만하지 않을까 싶다. 데리다와 불교에 대한 학술논문들도 여럿 있지만 도둑, 창녀, 거지, 과부까지 읽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4. 정치

손호철교수가 꼽은 정치분야의 책은 손석춘의 <주권혁명>(시대의창, 2008)이다. 물론 이 책의 최대 강점은 시의성이다. 해서, 추천자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의 헌법 1조로서 최근 광우병 관련 시위에 많은 시민들이 들고 나오는 표어이다. 국민들이 이 같은 표어를 들고 거리로 나선 것은 국민이 뽑은 대통령과 국회를 중심으로 한 대의제 민주주의, 간접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현상과 관련해 <주권혁명>은 시의적절한, 주목할 만한 저서이다."라고 적는다.  

그런 시의성을 고려해서 같이 읽어볼 만한 책으로 박세길의 <혁명의 추억 미래의 혁명>(시대의창, 2008), 그리고 당대비평기획위원회가 엮은 <광장의 문화에서 현실의 정치로>(산책자, 2008), 아고라 폐인들이 엮은 <대한민국 상식사전 아고라>(여우와두루미, 2008) 등을 꼽아볼 수 있겠다. 2008년 여름과 함께 기억될 책들이다.

 

 

 

 

5. 경제/경영

정운찬교수가 추천한 경제/경영서는 정석주의 <30년 흑자경영>(티비, 2008)이다(간행물윤리위원회 웹진에는 저자가 '장석주'로 오기돼 있다). "<30년 흑자경영>은 일차적으로 경영사례집으로서 저자가 지난 30년간의 기업경영을 돌아보는 책이지만, 저자의 경영철학과 더불어 기업과 사회 전반에 대한 따뜻한 시각이 녹아있다."고 한다. 하지만 나로선 읽어볼 일이 없을 듯하다. 그나마 손길이 갈 법한 경제경영서는 <문학에서 배우는 리더의 통찰력>(이다미디어, 2008)이나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1, 2>(21세기북스, 2007/2008) 같은 종류의 책이다. 하기야 내 주제로 말할 것 같으면 경영을 만나기는커녕 '인문의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일이 더 잦다. 단테 알리기에리처럼...

 

 

 

 

6. 사회 

사회분야의 책은 벨 훅스의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모티브북, 2008)다. 추천자인 김문조 교수에 따르면, "저자 벨 훅스는 미국의 저명한 페미니스트 사상가이자 미국 여성운동의 대모로서, 흑인 여성 문제에 관한 많은 저작을 남긴 영문학자이자 문화비평가이다. 이러던 그가 <계급에 대해…>에서 젠더도 아니고 인종도 아닌 계급이 모든 사회문제의 핵심이라는 새로운 주장을 펼치고 있다." 나도 책이 나왔을 때 '갓 댐 아메리카!'(http://blog.aladin.co.kr/mramor/2107023)란 페이퍼에서 다룬 적이 있다(아직 손에 들어보지 못했지만).

"부제 ‘Class Matters’의 직역은 "계급이 문제다“인데 번역서 제명을 지나치게 비틀었다고 생각하며 인용된 책자의 번역에도 드문드문 생소한 대목이 발견되나, 총체적으로 유려한 번역이 진의를 잘 살려 원전의 가치를 배가시키고 있다. 대운하, 광우병 논쟁 등으로 산만해진 우리 의식을 새로이 가다듬을 수 있는 예사롭지 않은 책자로, 크고 넓게 생각하기를 원하는 독자들께 자신 있게 권한다."는 추천의 변을 읽으니 마음이 조금 동하는군. 참고로, 벨 훅스가 엮거나 지은 책으론 <행복한 페미니즘>(큰나, 2002), <사랑의 모든 것>(동녘, 2004), <평화 이야기>(황금비늘, 2007) 등이 더 소개돼 있다.

 

 

 

 

7. 과학

장경애 편집장이 추천한 과학분야의 책은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의 복수>(세종서적, 2008). <가이아>(갈라파고스, 2004; 김영사, 1995)의 후속작일 텐데, 제목에서 눈치챌 수 있듯이 상황이 더 나빠졌다고 저자는 판단한다. "행성의사를 자처하는 저자인 제임스 러브록은 1970년대 ‘가이아: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지구’를 내놓으면서 생물들이 지구의 대기권·해양·대륙·암석 같은 무생물적 환경에 서로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지구는 자기조절 기능을 갖춘 생명체다. 하지만 이제 지구온난화로 가이아는 자기조절기능을 잃고 지구생명체를 말살시킬 수 있는 단계까지 왔다고 경고한다." 내 생각으론 가이아가 복수하기도 전에 인류가 자멸할 확률이 더 높아보이지만...

한편, 그러한 경고가 과장됐다고 주장하는 '회의적 환경주의자' 비외른 롬보르의 <쿨잇>(살림, 2008)도 이번에 출간되었기에 나란히 읽어봄 직하다. 롬보르는 문제의 진단 못지 않게 그 해결방안(=해결비용)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이도록 요구하는데, 그에 따르면, "일부 정치가와 환경 전문가들을 통해 형성된 지구 온난화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심하게 치우쳤다. 지구 온난화를 이야기할 때면 우리는 이산화탄소를 조절하는 데에만 집착한다. 이산화탄소를 줄이는 게 부분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있겠지만, 우리의 주 관심사는 분명히 인간과 환경의 안녕을 최대한 증진시키는 것이어야 하며, 그러려면 다른 많은 요소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 제목만 보자면 그의 최신작도 기대가 된다.

 

 

 

 

8. 예술

김춘미 교수가 추천한 예술분야의 책은 이주은의 <그림에, 마음을 놓다>(앨리스, 2008)이다. "‘그림’하면 주변에는 이름난 명화들에 대한 설명이 차고 넘친다. 그러나 마음을 내려놓는 그릇으로의 그림을 이야기 하고 있는 이 책에는 “언젠가 나도 이런 순간이 있었지“를 상기시키는 그림들이 담겨있다."는 것이 추천의 변이다. 말 그대로, '마음 놓고'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는 것. 미술애호가인 김지은 아나운서의 <예술가의 방>(서해문집, 2008)도 같은 종류의 책이겠다.

하지만, 내가 이번 여름에 읽겠다고 도서관에서 원서와 함께 대출한 건 아주 무거운 책들이다. 할 포스터 등의 <1900년 이후의 미술사>(세미콜론, 2007)와 사이먼 샤마의 <파워 오브 아트>(아트북스, 2008) 같은 책. 가벼운 책은 높은 곳에, 그리고 무거운 책은 낮은 곳에 두고 읽어볼 참이다. 남들 다 피서갈 때...

 

 

 

 

9. 교양

이한우기자가 꼽은 교양분야의 책은 데이비드 덴비의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1, 2>(씨앗을뿌리는사람, 2008)이다. 사실 표지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필요 때문에 나도 지난주에 구입한 책이다. 추천의 변은 이렇다. "아! 고전을 이렇게 소개하는 것이었구나! 사실 제목만 보았을 때는 따분할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미국의 영화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스스로 고전에 대한 불만과 기대를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는 정보의 홍수를 헤매던 어느 날 문득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즉 저널리즘의 무의미함에 몸서리친다. ‘내가 지금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어쩌면 40대 후반의 남자라면 피할 수 없는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과 맞닥뜨린 것인지도 모른다. 특이하게도 그는 의미회복을 위해, 30년 전 대학 1학년 때 들었던 서양고전 강좌를 다시 듣기로 결심한다. 다행히 그의 모교인 컬럼비아대학에는 그 강좌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30년 후배들과 똑같이 앉아서 학생이 되어 고전의 탐험을 시작했고 이 책은 그 탐험기다."

내 관심은 저자의 독서편력이 아니라 미국의 한 명문대학 강의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고전 읽기의 풍경이다. 어떤 커리큘럼이 제시되고 어떤 방식으로 작품을 읽으며 어떤 토론들을 벌이는가가 궁금한 것. 덴비의 책과 같이 읽어볼 만한 건 바로 그 컬럼비아대학에서 강의를 했던 에드워드 사이드의 마지막 저작이자 강연집 <저항의 인문학>(마티, 2008)이다(번역은 매끄럽지 못하다). '민주적인 인문주의'를 주창하는 사이드에 비해서 덴비는 보다 보수적인 인문주의를 지지한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덴비는 <미국 정신의 종말>의 저자, 시카고 대학의 앨런 블룸과 오히려 더 친화적이겠다. 불룸과 동창인 <희망의 인문학>의 저자 얼 쇼리스는 사이드 쪽에 가깝겠고.

한편, '위대한 책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위험한 책들'과 만나보는 것도 흥미롭겠다. 이민희의 <조선을 훔친 위험한 책들>(글항아리, 2008)은 역사분야의 책으로 분류되지만 여름나기 교양서로도 좋지 않을까 싶다.

 

 

 

 

10. 전기 

아동분야의 책은 이번에도 전기로 대체한다. 읽을 만한 평전들이 여러 권 나왔기 때문이다. 먼저, 두 아들이 쓴 아버지와 어머니의 전기. 저우하이잉의 <나의 아버지 루쉰>(강, 2008)과 데이비드 리프의 <어머니의 죽음 - 수전 손택의 마지막 순간들>(이후, 2008)이 각각 저명한 작가였던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회고하고 있는 책이다. 그리고 두 명의 영화인을 다룬 책으로 자미 버나드의 <쿠엔티 타란티노>(나무이야기, 2008)와 테리 콜먼의 <로렌스 올리비에>(을유문화사, 2008). 타란티노는 <킬빌>로 잘 알려져 있지만, 로렌스 올리비에? 젊은 세대에게는 생소할지도 모르겠지만 셰익스피어 연기의 대가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배우이다. 아래 햄릿을 연기했던 바로 그 사람. 이젠 전설이 된...

08. 07. 19.

 

 

 

 

P.S. 고작 열흘쯤 남겨놓고 고전 읽기 목록까지 챙기는 건 무모해 보이지만 어차피 '목록'일 뿐이므로 허세도 부려본다. '이달의 고전'은 루소의 <사회계약론>(서울대출판부)이다. 루틀리지에서 나온 가이드북을 참조할 수도 있겠다. 여차하면, <인간불평등 기원론>도 읽어보면 좋겠고. 이 18세기 저작은 "정치적 권력 혹은 권위의 정당성을 집요하게 문제삼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우리의 계약'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는 즈음인지라 골라봤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주니다 2008-07-20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900년 이후의 미술사>는 저도 꼼꼼히 읽어볼 계획입니다만..계획은 계획인지라^^ 사이먼 샤마의 <파워 오브 아트> 동영상은 필요하시면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나저나 책값들이 장난이 아니군요. 번역서와 원서를 같이 구입하면...띵!!

로쟈 2008-07-20 11:58   좋아요 0 | URL
그래서 번역서와 원서를 모두 대출했는데, 하드카바라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7-20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자 님은 젊은 세대이면서도 로렌스 올리비에를 아시네요.

로쟈 2008-07-20 21:2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저도 아직 '젊은 세대'하고 싶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7-20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버스로 출퇴근하는데 월요일엔 병원가는 노인들이 많이 타요.그럴 땐 60대들이 80대들에게 자리 양보하고 그래요.고령화 사회를 실감하죠.50대까지는 청춘으로 보고 30대는 청소년이라고 연령조정을 해야 할 때가 올 것 같더라구요.

로쟈 2008-07-21 10:18   좋아요 0 | URL
겉늙은 '청춘'들이 늘어나겠는데요.^^

lifeisart 2008-07-21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술쪽은 art since 1900과 power of art를 여름나기로 정해볼까 생각중인데^^ 소개해 주신 책들 중, 제 수첩에 적은 책들이 빼곡합니다....마냥 흐뭇하네요!

로쟈 2008-07-21 21:59   좋아요 0 | URL
가족들에겐 따돌림 받을 수 있는 여름나기입니다.^^;
 

읽어야 할 책은 많고 써야 할 글도 많은데 아직도 컨디션은 찌푸린 날씨를 닮았다. 게다가 책들은 또 왜 이리 더디 읽히는지. 투정삼아 어젯밤에 잠시 읽다 만 한 대목을 다시 들춰본다. 리처드 파이프스의 <소유와 자유>(나남, 2008)를 원서와 함께 읽는데, 서문의 끄트머리에서 파이프스는 야콥(야코프) 부르크하르트의 <세계 역사의 관찰>에서 한 대목을 인용한다. 자신이 러시아사 전공자이고 근대유럽사에 관한 교재도 집필한 적이 있지만 이 책은 훨씬 넓은 범위를 다루고 있기에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이런저런 사실이나 해석에 대해 비난할 게 분명하다"고 생각해서다(물론 홉스봄처럼 '세계사'를 다루는 역사가들도 있긴 하다!). 그런 비난에 대한 자기변호로 파이프스는 역시나 '아마추어 역사가'란 혹평을 듣기도 했던 부르크하르트의 말을 인용하는 것인데, '딜레탕티슴'에 대해서 '자콥 부르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취미로 하는 그림은 예술계에서 크게 무시당하고 있다. 예술은 완벽함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에 평생을 바치는 대가가 아니라면 그 무엇도 아니다. 그러나 학문의 경우 한정된 분야만을 숙달하더라도 이른바 전문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 개요를 정리하고 이를 존중할 수 있는 능력을 없애고 싶지 않다면 가능한 한 많은 분야를 어쨌든 개인적으로 조금이라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전문지식을 강화하고 다양한 역사적 관점을 익힐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전공 이외의 분야에 대해선 문외한이 될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는 대체적으로 야만인에 불과하다.(<소유와 자유>, 14쪽)

 

 

 

 

'딜레탕티슴'이란 "예술이나 학문 따위를 직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취미 삼아 하는 태도나 경향"을 가리킨다. 그런 딜레탕티슴이 예술분야에서는 보통 무시당하는 편이지만 적어도 역사학에서만큼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야지만, "자신의 전문지식을 강화하고 다양한 역사적 관점을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파이프스는 이 대목을 부르크하르트의 독일어 원서에서 직접 번역하여 옮겨놓고 있는데, 그의 번역은 이렇다.

[Dilettantism] owes its bad reputation to the arts, where, of course, one is either nothing or a master who devotes his entire life to them, because the arts demand perfection. In learning, by contrast, one can attain mastery only of a limited field, namely as a specialist, and this mastery one should attain. But if one does not wish to forfeit the ability to form a general overview - indeed, to have respect for such an overview - then one should be a dilettante in as many fields as possible - at any rate, privately - in order to enhance one's own knowledge and enrichment of diverse historical viewpoints. Otherwise one remains an ignoramus in all that lies beyond one's specialty, and, under the circumstances, on the whole, a barbarous fellow.

<소유와 자유>에서는 'Dilettantism'을 역자가 '취미로 하는 그림'이라고 제한적 의미만 번역하는 바람에, 그리고 내가 강조한 대목에서는 '딜레탕트'란 말을 따로 옮기지 않는 바람에 '전문가'와 '딜레탕트'간의 대조가 희석됐다. 그래서 더 낫게 번역돼 있지 않을까 싶어서 부르크하르트의 책을 찾았다. 내가 갖고 있는 건 지난달에 나온 <세계 역사의 관찰>(휴머니스트, 2008)과 예전에 나온 <세계사적 성찰>(신서원, 2001), 그리고 같은 책의 영역본 <역사에 관한 성찰(Reflections on history)>(1943/1979)이다. 인용문과 같은 대목을 두 국역본과 영역본은 각각 이렇게 옮겨놓았다.

딜레탕티슴이란 말은 예술 분야에서 평판이 나빠진 말이다. 예술분야에서는 대가(大家)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고, 당연히 한 분야에 목숨을 바쳐야 한다. 예술이란 본질적으로 완전함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학문에서는 제한된 분야의 대가가 될 수도 있다. 곧 전문가가 되는 것인데, 그것도 어느 영역이든 상관이 없다. 그러나 전체적인 조망의 능력과 그것을 존중하는 법을 모른다면, 수많은 다른 자리에서는 딜레탕트가 되고 만다. 자신의 인식을 늘리고 관점들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어쨌든 그 자신이 해야 할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전문영역을 넘어서 있는 다른 모든 것에는 무지한 사람이 되고, 어떤 상황에서는 조잡한 견습공 신세가 되고 만다."(<세계 역사의 관찰>, 51쪽)

'아마추어'란 말은 사람들이 대가(大家)나 또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되어야만 하는, 또는 자신의 생을 온통 바쳐야만 하는 예술 때문에 평판이 나빠졌다. 왜냐하면 예술이란 본질적으로 완전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학문에 있어서는 그와 반대로 한 개인은 어떤 한 제한된 영역에서만 대가가 될 수 있다. 말하자면 한 전문가로서 말이다. 그는 어디에서인가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만일 그가 일반적인 개관을 할 능력을, 혹은 이러한 개관에 대한 존경을 상실한다면, 그는 가능한 많은 다른 점에서 적어도 개인적으로 자신의 인식과 관심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 아마추어가 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자신의 전문분야 이외에 있는 모든 것에 있어서는 하나의 무식꾼으로 남게 될 것이며 아마도 야민인과 같은 사람으로 남게 될 것이다.(<세계사적 성찰>, 35-36쪽)

The word "amateur" owes its evil reputation to the arts. An artist must be a master ot nothing, and must dedicate his life to his art, for the arts, of their very naturem demand perfection. In learnng, on the other hand, a man can only be a master in one particular field, namely, as a specialist, and in some field he should be a specialist. But if he is not to foefeit his capacity for taking a genaral view, or even his respect for general views, he should be an amateur at as many points as possible, privately at any rate, for the increase of his owm knowledge and the enrichment of his possible standpoints. Ohterwise he will reman ignorant in any field lying outside his owm specialty and perhaps, as a man, a barbarian.(53-54쪽)

부르크하르트의 요지는 딜레탕트가 별로 좋은 평을 얻지 못하는 예술분야와는 달리 학문, 특히 역사학에서는 딜레탕티슴이 불가피하며 오히려 장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학문에서는 먼저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요즘 '박사'는 말로만 '박사'다). 또 그렇다고 해서 전공이 아닌 다른 분야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이 용인되어서도 곤란하다. 적어도 일반적인 관점, 전체적인 조망능력을 상실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다양한 분야에서 딜레탕트가 되어야 한다.   

다른 대목들은 차치하고, 이 점에만 초점을 맞추어도 두 국역본의 번역은 과녁에서 동떨어져 있다. 먼저, <세계 역사의 관찰>에서 "전체적인 조망의 능력과 그것을 존중하는 법을 모른다면, 수많은 다른 자리에서는 딜레탕트가 되고 만다"는 딜레탕트에 부정적인 뉘앙스를 부여함으로써 부르크하르트의 취지에서 멀찍이 벗어난다(아예 정반대로 옮긴 것이 된다). 우리가 딜레탕트가 되어야 하는 것은 '전체적인 조망의 능력과 그것을 존중하는 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다.

"적어도 개인적으로 자신의 인식과 관심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 아마추어가 되어야만 한다"고 해서 절반은 맞게 옮겼지만 <세계사적 성찰>의 경우도 "만일 그가 일반적인 개관을 할 능력을, 혹은 이러한 개관에 대한 존경을 상실한다면"이라고 전제하여 나머지 절반은 잘못 옮겼다(앞부분에서 예술에서의 딜레탕티슴이 갖는 평판에 관한 부분도 상당히 어색한 번역이다). 독일어 구문이 얼마나 복잡한지는 모르겠지만 전문번역자와 역사철학 전공자가 똑같이 실수를 범한 것은 의외다.

<소유와 자유>의 역자는 '경제/금융 전문기자'로 소개돼 있다. 다시 말해 역사쪽으로는 '딜레탕트'다. 그리고 그가 옮긴 것도 영역된 부르크하르트의 문장이므로 '중역'이다. 그런데, 적어도 이 인용문단의 경우에는 독어 원전을 번역한 두 '전문가'의 번역보다 원뜻에 그나마 가장 가깝다. 이건 좀 아이러니한 일 아닐까? 딜레탕트(아마추어)가 아닌 '전문가'라 하더라도 주의하지 않는다면 '조잡한 견습공'과 '야만인'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수 없는 모양이다...

08. 07. 19.


댓글(10) 먼댓글(4)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YG의 생각
    from vizualizer's me2DAY 2008-07-19 12:42 
    도스토예프스키 비판에 관하여 - 로쟈의 저공비행
  2. 딜레탕티즘
    from Surplus Text : Front Edge 2008-07-20 00:32 
    딜레탕티즘 : 예술이나 학문 따위를 직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취미 삼아 하는 태도나 경향 - 집에 있는 책들을 얼마 전에 죄다 정리했다. 정리하는 데 꽤 힘이 들었는데, 가지고 있는 책들을 주제별로 분류하기에는 책꽂이의 칸 구분이 모자란 반면 책꽂이의 칸 넓이는 항상 남아돌았기 때문이다. 이것 저것 잡스럽게 책을 읽지만, 막상 그 잡스러운 것을 탄탄하게 읽지는 않았다. 나름 대학에 들어와서 전공을 정한 지도 벌써 두 해가 다 되어 가는데, 전공에..
  3. 인문교양과 딜레탕트적 독서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3-16 00:20 
    주간한국의 '당신은 딜레탕트입니까'란 커버기사에서 독서문학 꼭지를 옮겨놓는다. 인문교양서 독자층의 관심을 엿보게 한다('로쟈'와 '비평고원' 같은 이름도 거명되고 있다). 리처드 세넷이 말하는 '새로운 자본주의 문화'의 양상을 딜레탕트적 독서와 연관하여 다뤄보려고 했으나 그럴 만한 여유가 없어서 일단은 기사만 스크랩해놓는다. 참고할 만한 내용은 먼댓글로 걸어둔다.     주간한국(09. 03. 11) [딜레탕트] 독서·문
  4. 역사는 국가, 종교, 문화의 상호작용이다.
    from 창조를 위한 검은 잉크의 망치 2010-11-30 21:10 
    헤겔은 역사 자체를 사유하면서 인류역사를 관통하고 있는 보편의 법칙과 원리를 내세웠다. 즉 인간의 이성이 자기실현을 통해 세계를 지배하며 이 법칙이 지향하는 바는 절대정신이 현실적으로 외화된 ‘자유(국가)’였다. 이러한 헤겔의 이론에 따르면 세계역사도 당연히 이성적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헤겔의 논리는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서술하면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보며 과거를 줄 세워 현재를 정당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부르크하르트는 역사를 관통하는
 
 
노이에자이트 2008-07-19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사철하는 이들도 경제학을 알아야 하고 경제학하는 이들도 문사철을 알아야 하는데 칸막이 현상이 이 두 분야는 심각하죠?

로쟈 2008-07-20 12:01   좋아요 0 | URL
경제사 같은 것도 있으니까 서로 무관할 수는 없지요. 칸막이야 전공분야 안에서도 다 쳐져 있는 걸요 뭐...

노이에자이트 2008-07-20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보시고 난 다음에 서평 좀 올려주세요.

로쟈 2008-07-21 10:22   좋아요 0 | URL
현재로선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습니다.^^;

개츠비 2008-07-21 0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어설픈 딜레탕티즘에게 위로를 해주는 글이군요.

로쟈 2008-07-21 10:22   좋아요 0 | URL
딜레탕티슴은 필요하기도 하고 불가피하기도 합니다. 오히려 전문가주의가 요즘 같아선 '지배 이데올로기'죠...

jotiple 2008-08-08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의아한 일이네요. 독일어 원문이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도 아니고, 부르크하르트의 논지도 오해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한데 말입니다. 인용하신 부분을 제가 가진 독어판에서 번역해보겠습니다.

"딜레탕티즘이라는 말은 예술분야로부터 악명을 얻게 되었다. 물론 예술이란 본질적으로 완전성을 전제하기 때문에, 예술분야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거나 대가이거나 둘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뿐이고, 삶을 통째로 작품에 쏟아 부어야 한다.
이와는 달리 이제 학문분야에서 우리는 제한된 영역에서만 대가가, 다시 말해 전문가가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학자는 자신의 전문분야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전반적인 조망을 할 줄 아는 능력과 이러한 조망의 가치에 대한 인식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전문분야가 아닌 영역이라 하더라도 가능한 한 많은 영역에서 딜레탕트가 되어야 한다. 자신의 지식을 늘려가고, 풍부한 관점을 획득하기 위해 적어도 개인적인 차원에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전문분야가 아닌 모든 분야에서 무식한 자로, 때로는 아주 조야한 인간으로 남아있게 될 것이다."

물론 이 말은 딜레탕티즘 자체를 옹호하는 말은 아닙니다. 딜레탕티즘의 불가피함을 말하고 있을 뿐이지요. 위의 인용문에 이어지는 부르크하르트의 말은 이러합니다.

"그러나 딜레탕트는 대상에 대한 애정을 지니고 있으므로, 살아가면서 여러 분야에 실로 깊이 파고드는 일이 가능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부르크하르트는 딜레탕트를 단죄하는 것도, 딜레탕트와 전문가의 경계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지요. 인간의 지식과 사고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학자는 자신의 전문분야를 갖고 깊이 파고들되, 다른 분야에서도 전문가 수준은 못되더라도 폭넓은 지식과 식견을 쌓아가야 한다는, 보기에 따라서는 매우 평범한 진술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게다가 위의 인용문에서는 이런 딜레탕트 수준의 식견으로는 책을 쓴다거나 전문가행세를 한다거나 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도 일정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번역이 저렇게 되었다는 것은 참 아쉬운 일이네요.

로쟈 2008-08-08 16:41   좋아요 0 | URL
네, 덕분에 쉽게 이해됩니다. 제가 여기저기 검색하다 보니까 부르크하르트에 대해 '아마추어적'이라는 비판도 있더라구요. 전문영역을 넘어서 너무 광범위하게 다룬다는 비판 같은데, '딜레탕트'와 '전문가'의 구별기준이 무엇인지는 계속 의문으로 남습니다(최근에도 '광우병 전문가' 논란이 있었지요). 학문이란 게 점점 전문화돼 가니까요...

jotiple 2008-08-08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부르크하르트는 그런 비판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가 정확한 사료연구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강조한 랑케의 역사학을 거부하고 직관과 영감을 강조하면서, 랑케쪽의 입장에서 보면 다분히 주관적인 역사서술을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양쪽 다 문제가 있었다고 해야 하겠지요.

딜레탕트라는 주제는 18세기 이래 숱하게 거론되어 온 것으로 보이는데, 어원상 '즐거움' 때문에 어떤 활동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재미가 아니라 밥벌이를 위해서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인데,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서 딜레탕트의 반대말은 '직업인' 정도가 되겠지요. 예술이든 학문이든 그것을 밥벌이로 하는 사람은 딜레탕트가 아니라 직업인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구별하기는 쉬운데 반대말을 '전문가'로 놓고 보면 문제가 좀 복잡해지는 것 같습니다. 딜레탕트, 그러니까 '재미'로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얼마든지 전문적인 수준의 식견에 도달한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 때에는 딜레탕트의 뜻도 달라지는데, '전문적인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식견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 되면서 폄하하는 말로 쓰이기 쉽습니다. 하지만 딜레탕트들이 많은 사회는 '무식한 사람'이 많은 사회보다는 훨씬 낫다고 해야 하겠지요. 각 분야에 딜레탕트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일반적인 교양수준이 높다는 이야기일테니까요. 또 딜레탕트의 존재는 전문가의 활동의 근거와 토양이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말씀하신 대로 전문가와 딜레탕트를 대립시키는 이런 구도에서는 과연 양자의 차이가 뭐냐, 하는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데, 일반적으로는 양자의 구별이 그다지 어렵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상에 대한 세밀하고 정확한 분석과 논지를 펼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대개의 경우 어렵지 않게 분간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전문가행세를 하면서도 전문적 식견을 갖추지 못한 사람, 딜레탕트를 자처하면서도 전문적 식견을 갖춘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의견이 엇갈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을 인정해야 하겠지요.
정말 광우병과 관련하여 '전문가'니 '과학'이니 하는 말들이 심하게 오용되고 악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전문가라면 반드시 인정해야 할 논의의 전제들을 인정하지 않는 '전문가'들, '과학'의 기준이 과학자들이 아니라 특정 기관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참으로 한심스럽더군요.

그나저나 우리 번역본들이 많이 나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로자님의 지적대로 아직 문제가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원어를 제대로 읽을 줄 아는 사람은 되도록 번역본을 피하고, 번역본을 읽는 사람들은 대개 원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번역본의 문제점을 파고드는 '직업인'이란 전혀 없고, 번역의 질에 대한 일종의 '침묵의 카르텔'이 존재하고… 이런 상황이니 피해는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로자님 같은 분들이 거의 유일한 희망이네요...

반딧불이 2010-11-30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의 내용을 참고삼아 읽었습니다.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촛불집회에 대한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의 조사가 마무리된 모양이다(조사결과는 오늘 발표되었다). 이번 조사를 위해 한국에 온 노마 강 무이코 조사관과의 인터뷰기사를 자료삼아 옮겨놓는다. 개인적인 필요 때문이기도 한데, 인터뷰 동영상은 원기사에서 볼 수 있다(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99489.html).

한겨레(08. 07. 18) [단독인터뷰] 앰네스티 조사관 “촛불집회는 위대한 피플파워”

“한국의 촛불집회는 평화로웠다. 그것은 위대한 ‘민중의 힘(people power)’이다.” 노마 강 무이코(41) 국제 앰네스티 조사관은 두달 넘게 이어지고 있는 한국의 촛불집회를 지켜 본 느낌을 이렇게 평가했다. 무이코 조사관은 촛불집회 조사결과 발표에 앞서 <한겨레>와 가진 인터뷰에서 “촛불집회에 정치단체나 노조 혹은 학생단체 등 전통적인 운동조직으로부터 지도받지 않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에서 놀라웠다”며 “참가자들이 아주 다양했다는 것에 주목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무이코 조사관은 경찰이 방패와 물대포, 분말 소화기 등으로 시위대를 공격적으로 진압한 것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했다. 그는 “경찰이 사용하는 방패와 곤봉은 살상용이 아니라 방어용”이라며 “내가 조사한 많은 사람들은 머리 뒤쪽에 맞은 상처가 있었는데, 이는 시민들이 도망가다가 맞은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아주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한국 경찰은 소화기가 완전히 안전하다고 말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확신할 수 없다”며 “영국에 돌아가면 더 조사해 보겠다”고 덧붙였다. 무이코 조사관은 “시민들이 버스를 흔들고 밧줄을 매달아 끄는 행위도 명확한 불법”이라고 규정했다. 또한 그는 “시민들이 전경 버스를 흔들 때 경찰이 버스 안에 전경들을 남겨 놓는 것을 보고 매우 불편했다”며 “버스 안 전경들의 안전이 심각하게 위협을 받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무이코 조사관은 해가 진 뒤 집회를 금지한 한국의 집시법과 관련해 “경찰의 자의적인 판단에 맡기는 것이 문제”라며 “시민들이 표현의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법을 고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무이코 조사관은 “한국은 권위적인 정부에서 민주국가로 이행했지만 공권력에 대한 과거의 불신이 남아 있어 경찰과 시위대가 서로 적대하는 분위기가 있다”며 “대화를 통한 신뢰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난 4일 입국해 촛불집회 현장의 인권침해 여부를 조사했던 무이코 조사관은 18일 조사결과를 발표한 뒤 앰네스티 본부가 있는 영국으로 떠난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이다.

-국제 앰네스티가 특정 사안에 대해 조사관을 파견하는 것은 이례적이라고 언론에서 보도했다. 한국에 조사를 나온 이유는 뭔가?

=나는 조사관으로서 한국에 자주 온다. 적어도 1년에 한번씩 온다. 앰네스티는 한국의 인권 상황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번 방문은 미리 계획된 것이 아니라는 점과 특정 사안을 조사하러 왔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앰네스티 사무국이 지난 5월부터 촛불집회에 대해 살펴보고 있었는데,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앰네스티 사무국이 나를 직접 한국에 보냈다. 촛불집회 과정에서 경찰이 행사한 공권력을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직접 눈으로 본 한국의 촛불집회를 어떻게 평가하나?

=나는 아직도 이 촛불집회가 위대한 ‘민중의 힘’(people power)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이번 촛불집회에 정치단체나 노조 혹은 학생단체 등 전통적인 운동조직으로부터 지도받지 않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에서 놀라웠다. 참가자들이 아주 다양했다는 것에 주목한다. 나는 ‘한국 촛불집회가 평화적’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나는 70~80년대 한국에서 자랐다. 당시는 최루탄과 화염병이 오가며 경찰과 시민 사이에 더 공격적이고 위험한 갈등이 있었다. 그런데 촛불집회에서 그것을 본 적이 없다. 전반적으로 이번 시위대는 평화로웠고, 대부분의 경찰 역시 전문적으로 행동했다고 생각한다.

-한국 경찰이 조사에 협조를 잘 해줬나?

=경찰은 매우 협조적이었다. 경찰 당국은 제가 원하는 모든 곳을 갈 수 있게 해줬다. 경찰병원에 입원한 경찰들도 만났고, 경찰의 작전 중에 폴리스라인 뒤에서 내가 선택한 경찰들과 인터뷰를 허락했다. 또 경찰서에서 연행된 사람들을 인터뷰할 수 있었다. 다만 법무부가 나의 구치소 방문 및 접견을 허용하지 않았고 경찰도 전역신청한 이아무개 상경에 대한 접견을 거부했다.

-한국 경찰이 시민들을 향해 물대포와 소화기를 사용하는 것을 어떻게 보나?

=물대포는 위험하다. 마지막 수단으로 써야 한다. 내가 조사해보니 물대포는 심각한 부상을 초래할 수 있었다. 물대포를 사용하더라도 필요한 수칙을 지켜야 한다. 물대포를 맞는 사람과의 거리, 각도 등은 물론 수압 역시 규정에 맞아야 한다. 소화기는 70년대와 80년대에도 사용됐다. 그러나 그것은 불을 끄려는 용도였다. 지금은 화염병을 쓰지 않기 때문에 소화기를 쓸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경찰은 소화기를 자주 쓰고 있다. 우려스럽다. 경찰이 소화기를 시민들의 얼굴에 직접 뿌려 앞을 볼 수 없게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앞을 볼 수 없게 하는 것은 군중을 관리하는 방법으로써 적절치 않다. 한국 경찰은 소화기가 완전히 안전하다고 말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것은 확신할 수 없다. 영국에 돌아가면 더 조사해 보겠다.

-한국 경찰은 방패로 시민들을 때리기도 했다.

=(경찰에게) 방패와 곤봉은 방어용이다. 살상용이 아니다. 자기 방어용으로만 써야지 절대 무기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내가 경찰이 사용하는 방패를 들어봤는데 아주 무겁고 튼튼했다. 이것을 눕혀서 수직으로 머리 등을 때리면 극히 위험하다. 내 조사에서 얼굴에 심각한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 많은 사람들은 머리 뒤쪽을 맞은 상처가 선명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시민들이 앞으로 나오다 맞은 것이 아니고, 도망가다 맞은 것을 의미한다. 아주 잘못된 것이다.

-경찰이 버스로 거리 행진 자체를 막거나 광장 진입을 통제하는 것은 어떻게 보나?

=국가마다 장애물을 설정하는 데에는 서로 다른 방식을 활용한다. 한국에선 버스를 사용하고 있는데 공격적인 이미지를 주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일반적 장애물이 더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경찰이 결정해야 할 일이다. 시청 광장을 봉쇄하는 것 또한 경찰의 권한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시청 광장을 빼면 모일 공간이 없다는 것을 본다면 시위대와 경찰이 절충점을 찾는 게 필요하다.

-반대로 한국에선 시민들이 경찰 버스를 흔들거나 밧줄을 걸어 잡아당기는 시위를 한다.

=경찰이 보여준 동영상으로 시위대가 경찰 버스에 줄을 매달아 끄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명확하게 불법이다. 하지만 시민들이 버스를 끌 때, 경찰(전경)이 그 안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여러 번 이런 경우가 있었다. 매우 불편한 느낌을 받았다. 왜냐하면 버스 안의 경찰들의 안전이 심각하게 위협을 받기 때문이다. 시위자들이 버스를 흔드는 행위를 알고 있었다면 버스에 경찰을 놔두면 안된다.

-다른 나라의 집회와 촛불집회를 비교한다면?

=국제사면위원회는 절대로 각국의 인권 상황을 비교하지 않는다. 한국의 촛불집회를 다른 나라와 비교하고 싶지 않다. 모든 나라는 각자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 나라와 다른 나라를 비교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해가 진 후 집회를 여는 것을 경찰이 판단해 허락하지 않을 수 있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나?

=해가 진 뒤 집회를 여는 것을 경찰의 자의적인 판단에 맡기는 것이 문제다. 어떤 날은 해가 진 뒤에도 한참 동안 집회를 여는 것을 허용한다. 또 어떤 날은 원천봉쇄한다. 시민들은 자신들이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는 지 혼란스럽다. 공공질서를 유지하려면 규정과 법은 필요하다. 모든 나라가 집회를 규율하는 법을 갖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해가 진 뒤 집회를 할 수 있도록 법을 고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민들은 (해가 진 뒤에도) 표현의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경찰은 시민들이 공공질서를 유지하는 범위에서 방해받지 않고 집회를 열 수 있도록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당신이 거주하는 영국에선 경찰이 시위 관리를 어떻게 하나?

=영국 경찰은 시위자들이 시위를 할 수 있게 하고 (시위대의) 안전을 지켜주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미리 수집한 정보에 집회가 평화적으로 진행될 것이란 확신이 서면 경찰은 다른 근무복을 입는다.경찰은 평화시위가 가능하도록 시위대를 돕는 것이 주 업무다. 영국 경찰관은 시위에 나가기 전에 브리핑을 받게 된다. 브리핑의 뼈대는 ‘시민들이 정부에 반대하려고 시위를 벌이는 것이지, 경찰에 대항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찰이 불필요하게 무력을 사용하면 안된다’고 교육을 받는다. 모든 경찰 활동은 합법적이고 전문적이며, 적절하면서도 참을성있고 실질적이어야 한다고 교육한다.

-영국에서 연행에 관한 지침은 어떤가?

=영국 법은 ‘연행이 현실적이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체포도 꼭 필요할 때만 해야 한다. 경찰관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보호장구를 사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장구의 사용에 앞서 충분한 설명을 해 정당화 되어야 한다. ‘시위자와 대화를 하라’는 내용이 브리핑 내용에 포함돼 있다. 그리고 과잉 대응은 받아들일 수 없다.

-한국에선 인도에서 시위하는 시민도 연행한 사례가 있다.

=평화적으로 인도에 있던 시민들을 잡아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인터뷰한 사람들은 인도에서 평화롭게 시위를 하고 있었는데 잡혀갔거나 심지어 집회에 참여하지 않고 단순히 구경하고 있다가 연행되기도 했다. 이들의 죄목이나 기소 여부가 결정되지 않았지만, 인도에 있는 사람에 대한 자의적 체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찰이 보다 신중했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시민들과 경찰 모두에 조언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한국은 권위적인 정부에서 민주국가로 이행했지만 공권력에 대해선 과거의 불신이 남아 있다. 그래서 경찰과 시위대가 서로 적대하는 분위기가 있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신뢰가 필요하다. 대화를 통해서 믿음과 이해를 증진시킬 필요가 있다.(허재현기자)

08. 07. 1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경향신문에는 격주로 김우창칼럼이 연재된다. 오늘자 칼럼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란 제목이었는데, 아침 지하철에서 두 번 읽고 덮어두었다. 최근의 칼럼 가운데 아무래도 인상적인 건 '현시국의 위기적 성격'이란 제목의 지난회 칼럼이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아도 이에 대한 논평을 찾을 수 없다(나 혼자 의미심장하게 읽은 것인가?). '장기화된 촛불시위'로 대표되는 현시국을 이해하는 데, 그리고 칼럼에서 언급되는 레닌을 이해하는 데, 그리고 또 김우창을 이해하는 데 유익한 자료라고 생각한다. 바로 옮겨놓지 않고 묵혀두었는데, 생각난 김에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08. 07. 03) [김우창칼럼]현시국의 위기적 성격

장기화된 촛불시위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정부가 의학적·정치적 영향에 대한 신중한 검토 없이 광우병 위험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결정한 것에 의해 촉발되었다. 그러나 반대 의견에 대한 정부의 반응이 불충분하고, 지연된 까닭이라고 하겠지만, 이제는 시위의 구호와 요구가 달라졌다. 사태는 쇠고기 문제의 해결로만, 또는 그에 대한 일정한 타협안의 제시로만 풀릴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정치적 열기에 찬 시위 현장은 우리 정치와 사회에 대한 일반화된 불만의 성토장이 되었다. 요즘 쓰이는 비유로 ‘아고라’가 된 것이다. 불만과 문제의식의 표현은 민주주의 정치 과정의 일부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여 그로부터 구체적인 결과가 나오는 것일까? 이것이 문제다. 현실적 행동에는, 일반적 정치의식 이상의 실천 항목, 그리고 목표의 명확한 정의가 있어야 한다.

촛불시위가 표현한 것은 정부 정책의 시정에 대한 요구였다. 이에 대한 답변은 현실 조건하에서 무엇이 가능한가를 생각하면서 주어질 수밖에 없다. 거기에 대하여 대중이 수용할 수 있는 답변은 ‘가부’ 둘 중 하나의 절대적인 선택, 그것도 무조건적인 ‘가’이기 쉽다. 어떤 경우나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지금 나오고 있는 가장 구체적이면서 극단적인 요구는 이명박 대통령의 사임이다. 이 요구는 그 다음의 결과로서 실현될 수 있는 어떤 장기적인 목표를 가진 것일까? 그것은 민주주의 제도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인가? 새로운 정치체제의 수립이 지향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참으로 현실적인 의미를 갖는 것일까?

- ‘역사의 역전’에 갈등 불가피 -
20세기 초에 레닌이 쓴 ‘무엇을 할 것인가?’는 소련 공산 혁명의 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기초적인 문서가 된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사회 혁명은 대중의 자연 발생적 열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조직화할 수 있는 혁명적 정당, 다시 말하면, 지도부의 선도(先導)에 의해서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렇게 하여, 공산당의 전위 정당으로서의 역할을 이론적으로 정립한 것이다. 이것은 말 할 것도 없이 사회주의 혁명도 배제한다고 할 수 없는, 민주주의의 이상에 모순된다. 그리고 이것은 공산주의 체제의 여러 모순을 정당화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까지도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로 변질시키려고 한 이론이라고 비판된다.

여기에서 레닌의 이러한 생각에 언급하는 것은 그것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옳고 그름을 떠나서, 현실적으로 의미가 있는 정치 행동의 요건이 분명하게 알아 볼 수 있는 목표와 방법, 조직과 계획 그리고 이것들의 일관성(물론 전략적 유연성을 가지고 있는)이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것이 배타적인 지도부를 요구하는가 어떤가는 조금 더 복잡한 문제이다. 어떤 경우에나 정치를 생각하는 것은 목적하는 바와 그것의 성취를 위한 계획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 것과의 관계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는 것은 핵심적인 질문일 수밖에 없다.



위에서 말한 것은, 그러한 관점에서, 촛불시위의 끈질긴 지속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폭발하고 있는 대중적 정치 열기는 우리 정치 현실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촛불시위의 요구는 그간에 쇠고기 수입 반대로부터 더 일반적인 정치적 요구들로 바뀌었지만, 처음부터 쇠고기 문제 아래에는 넓은 정치적 불만이 깔려 있었다고 하는 것이 옳다. 거기에는 이명박 정부의 여러 정책(경제 일변도의 그리고 부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것으로 보이는)에 대한 깊은 불만이 있다. 또 근년에 심화된 빈부 격차에서 오는 계급적 불만이 있다. 그리고 갈등의 요인으로 여러 다른 정치 세력과 집단들의 이익이 개입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의 난국을 풀어가는 데에는 이러한 불만의 바탕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난번 선거와 관련하여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의 하나는 그 엄청난 정치사적 의미이다. 문민정부, 국민의정부, 참여정부 등 군사 정권 붕괴와 민주화 운동 후 성립한 6공화국의 여러 정부는 모두 민주혁명을 계승했다. 이 정부의 기반이 된 것은 큰 역사적 기운이 된 민주화 혁명의 흐름이었다. 이에 대하여 이번의 정부는 처음으로 그 흐름을 벗어난 비교적 무색무취한 선거에 의하여 성립한 정부이다. 이것은 민주화 혁명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이전으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복귀가 구체제에의 완전한 복귀라는 말은 아니다.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인다는 점에서는 새 정부도 민주화의 여세를 타고 태어난 정부이다. 그러나 그 민주주의는 민주화 세력의 주류가 생각한,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민주주의와는 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새 정부는 그 성장 우선 정책에 있어서, 그리고 그 지지기반과 인적 구성에 있어서 복고적 성격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이번의 정권 교체는 투표에 의한 정권 교체이면서도 민주화 이후의 역사적 추세를 크게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 20년 만의 역사의 역전에, 또는 최초의 비폭력 정권 교체에, 저항과 갈등의 풍파가 없을 수 없다.

군사정권으로부터 민주 정권으로 옮겨갈 때에, 화두의 하나는 보수 세력과 진보 세력의 ‘대타협’이었다. 공식 절차가 어떻게 되었든, 피차에 여러 측면에서 현상을 인정하고 그것에 타협하면서 민주정부가 출발한 것은 사실이다. 지금의 난국을 타개하는 데 다시 한 번 대타협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 진보·보수 다시 대타협 필요 -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지난 선거가 통상적 민주적 절차에 따른 선거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대전환을 나타낸다고 하면, 우선 이 전환이 잠재적으로 혁명적 또는 반혁명적 위기를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에 따른 대처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보면, 정부는 그 정책이나 인적 구성 그리고 전체적인 정치 노선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지난 20년간의 민주화 정부의 노선과 정책과 민주화 세력들의 이해관계를 참작하고 존중하는 쪽으로 수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번 정부의 목표가 무엇이 되었든지간에, 이념적으로나 현실로나 기존 질서가 된 민주화 과정의 과거를 흡수 동화하면서 그 목표를 실천하는 것이 현실 효율적인 일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민주화 혁명의 계승 세력은(그 세력도 세대나 정치 문화의 측면에서 그 전의 민주화 세력은 아니지만) 지지하는 정치 이념과 현실을 완전히 해체하는 것이 아닌 한, 타협을 모색하는 것이 그 업적으로서의 민주체제를 보존하기 위한 합리적이고 애국적인 결단이 될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민주적 헌정질서를 대신하는 다른 혁명적 대안은 역사적 후퇴를 의미할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현실적 대타협을 이루어낼 수 있는 곳이 국회이다. 지금의 정치적 난국을 벗어나가는 데에 있어서 국회의 정상화가 하나의 방편인 것은 틀림이 없다. 야당 책무의 하나는 국회로 돌아가는 것이다. 또 시국의 위기적 성격을 이해한다면, 여당은 이것을 위하여 적절한 양보를 준비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의미를 갖는 정치 행동은 언제나, 장기적인 목표와 현시점에서의 실천 가능성이라는 기준에 비추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을 찾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김우창 | 고려대 명예교수)

08. 07. 17.

P.S. 오늘이 마침 제헌절이기도 한 만큼 '민주적 헌정질서 vs 혁명적 대안'이란 선택지는 여러 모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하지만 시간이 없는 관계로 요점만 간추린다. 먼저, '장기화된 촛불시위'가 의미하는 바, 또 요구하는 바에 대해서는 이번주 한겨레21의 표지기사 '촛불의 지구전'(http://h21.hani.co.kr/section-021003000/2008/07/021003000200807140719005.html)을 참고하도록 하자. 그리고 레닌과 현시국에 대해서는 어제 올려둔 '레닌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http://blog.aladin.co.kr/mramor/2189868)를 참고할 수 있다. 페이퍼에서 언급된 토론회에 대한 보다 상세한 기사는 '촛불과 러시아혁명, 그리고 한국의 지식인'(http://www.prometheus.co.kr/articles/108/20080710/20080710040800.html)을 참조. 더불어, 현시국과 관련하여 김우창, 최장집 교수의 '합리주의'적 입장에 대한 비판은 '지식인은 촛불과 함께 진화하고 있는가'(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MAIN&rsec=MAIN&idxno=11123)를 일독해볼 만하다.

그리고, 이제 김우창 교수의 칼럼에서 흥미로운 대목들 혹은 지점들을 짚어보자. 일단 그는 현시국에 대한 이해 자체가 쉽지 않다고 토로한다. 촛불집회가 장기화된다면, 일단 정치적 행동으로서 그것이 어떤 목표를 갖는 것인지 드러낼 필요가 있다는 것. 가령, (1)민주주의 제도의 발전이냐 (2)새로운 정치체제의 수립이냐. 후자라면 '혁명'을 뜻하는데, '그것이 참으로 현실적인 의미를 갖는 것일까?'라는 게 김교수가 궁금해하는 점이다. 이번 사태를 이해해보기 위한 방책으로 김교수는 지난 대선이 갖는 '정치사적 의미'를 되짚어본다. 사실 이 대목이 의외로 흥미롭다. 그는 보수쪽에서 흔히 말하는 '잃어버린 10년'이 아니라 '잃어버린 20년'이라고 말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지난번 선거와 관련하여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의 하나는 그 엄청난 정치사적 의미이다. 문민정부, 국민의정부, 참여정부 등 군사 정권 붕괴와 민주화 운동 후 성립한 6공화국의 여러 정부는 모두 민주혁명을 계승했다. 이 정부의 기반이 된 것은 큰 역사적 기운이 된 민주화 혁명의 흐름이었다. 이에 대하여 이번의 정부는 처음으로 그 흐름을 벗어난 비교적 무색무취한 선거에 의하여 성립한 정부이다. 이것은 민주화 혁명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이전으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문민정부'부터 카운트하고 있지만, 87년 민주화 운동 후 성립한 6공화국은 직선제를 통해서 성립한 노태우 정부부터이다. 소위 '87년 체제'를 가리키며, 이것이 '민주혁명'의 성과이다. 한데, 이번 이명박 정부는 그 민주화 혁명의 흐름에서 벗어나 성립한 정부이며, "이것은 민주화 혁명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이전으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전? 전두환의 군사정권과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있었다. 이명박정부는 그 '전통'을 잇고 있다는 것. 과감한 지적 아닌가? 김교수는 바로 유보를 단다.   

이 복귀가 구체제에의 완전한 복귀라는 말은 아니다.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인다는 점에서는 새 정부도 민주화의 여세를 타고 태어난 정부이다. 그러나 그 민주주의는 민주화 세력의 주류가 생각한,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민주주의와는 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명박정부도 '민주화의 여세를 타고 태어난 정부'라는 점에서는 군사독재나 유신독재와는 다르다(그럼에도 이 정부의 인사에서 과거 국보위 참여 전력을 문제삼지 않는다는 점은 징후적이다). 하지만, 여전히 '민주화 세력의 주류가 생각한' 민주주의와는 다르다는 것이 요점이다('민주화 세력'에 대하여 이들은 자칭 '산업화 세력'이다). 때문에, "이번의 정권 교체는 투표에 의한 정권 교체이면서도 민주화 이후의 역사적 추세를 크게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 20년 만의 역사의 역전에, 또는 최초의 비폭력 정권 교체에, 저항과 갈등의 풍파가 없을 수 없다."

이 또한 대단히 흥미로운 견해 아닌가? 최초의 비폭력 정권 교체! 그러니까 김우창교수에 따르면, '문민정부'(김영삼)에서 '국민의 정부'(김대중)로의 정권교체는 유사 정권교체이다. 그건 민주화 운동 세력의 '나눠먹기'에 불과한 것이기에. '참여정부'는 '국민의 정부'를 계승했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군사독재 이후 진짜 정권교체는 이명박정부에 와서야 이루어졌다(비록 복고적/퇴행적이라 하더라도). 20년만이다! 물론 이러한 '복귀'에 따르는 "저항과 갈등의 풍파가 없을 수 없다".

여기서 김우창 교수의 '현자적' 예지는 '대타협의 정신'을 주문한다. 그런데 그 모델이 재미있다. "군사정권으로부터 민주 정권으로 옮겨갈 때에, 화두의 하나는 보수 세력과 진보 세력의 ‘대타협’이었다"는 것. 구체적으로 그 '대타협'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제시돼 있지 않지만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건 6.29 선언 같은 것이다. 어쨌거나 국민적 요구사항이었던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함으로써 전면적인 파국은 면하게 했던 것이니까 '대타협'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한 대타협의 자세를 이제 현정치권에도 다시금 요청하는 것이다. 즉, 이 정부는 민주화 과정의 과거를 흡수 동화하고 (자칭)민주화 혁명의 계승 세력은 자신의 정치 이념을 해체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타협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며, 그래야지만 현상황에서 '민주체제'가 보존될 수 있다는 것. 이런 것이 현시국에 직면하여 김우창교수가 '무엇을 할 것인가'란 물음에 대해 찾은 답변이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역마살꾼 2008-07-19 00:25   좋아요 0 | URL
그렇잖아도 최근에 레닌, 트로츠키, 마오를 다시 읽고 있었는데 반가운 글이네요. 왠지 혁명을 준비해야 할 분위기가 느껴져서 그렇습니다 ^^;
예전에 박노자 선생 얘기로는 레닌에 비해 트로츠키가 훨씬 뛰어난 문장가라고 하시던데 제 경우에는 레닌에게 좀 더 점수를 주고 싶네요 예상치 못한 유머와 비꼼등이 있어 읽으면서 몇번 웃었습니다
박종철 출판사 판 '무엇을 할 것인가?'의 꿈과 현실의 관계(222쪽)는 지젝이 인용하기 좋을만한 문구 같습니다

로쟈 2008-07-19 10:55   좋아요 0 | URL
트로츠키도 방대한 저작을 남겼지만 레닌도 엄청납니다. 소련시절에 나온 '전집'에 55권짜리가 있었으니까요. 그 정도면 웬만한 전업작가보다도 많은 분량인데요. <무엇을 할 것인가>와 <국가와 혁명> 등은 제대로 된 장정으로 다시 나왔으면 싶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07-19 22:23   좋아요 0 | URL
김우창 교수.이번 <시대정신> 여름호 건국60주년 기념 좌담회에 참석했더군요.경향신문에 정기기고하는 사람이 뉴라이트 계간지에...조금 이상했어요.

로쟈 2008-07-20 12:03   좋아요 0 | URL
기본적인 입장은 '자유주의'라고 생각합니다. '뉴라이트'와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먼 거리는 아니죠. 최장집 교수도 그렇지만 '중도'라고 해야겠습니다(현자들은 보통 중용의 길을 선호하지요)...

노이에자이트 2008-07-20 21:30   좋아요 0 | URL
<한국 민주주의의 이론>에선가 최장집 교수는 시민단체에 대해서 그다지 신뢰를 보이지 않더라구요.진보 이론가를 연구하고 소개하긴 했지만 진보주의자는 아닌 것 같아요.조선일보가 사상검증인가 뭔가 해가지고 좌익으로 알려졌지만.

로쟈 2008-07-21 10:21   좋아요 0 | URL
시민단체를 신뢰한다고 좌파나 진보가 되는 건 아닌 듯한데요(한국적 특성상). 그리고 미국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엘리트 학자가 '좌파' 행세를 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게 아닌가 싶어요...

글샘 2008-07-21 11:08   좋아요 0 | URL
소통의 문제라고 그렇게 강조를 해 왔잖아요. 진즉에 대타협이 이뤄졌더라면 촛불은 벌써 꺼졌겠죠. 지금 전대협을 중심으로 새로운 국면의 촛불이 타오르는 데 기름을 부은 이들은 정부입니다. 쇠고기에다가 독도에다가 끝없는 말바꾸기뿐인 반성... 강행에다가 폭행... 이런데도 연구실에 앉아서 음, 이건 혁명의 조건에서 뭐가 부족한 걸가...를 생각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거나 비양심적인 일이거나 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로쟈 2008-07-21 21:57   좋아요 0 | URL
문제는 '어리석거나 비양심적인' 사람들까지도 끌어모을 수 있어야 한다는 점 아닐까요? 진보가 정말로 헤게모니를 쟁취하려 한다면...

드팀전 2008-07-22 11:59   좋아요 0 | URL
로쟈님이 얌전하게 댓글을 달고 마셨군요.남의 집 페이퍼라 그렇긴 하지만.

아무래도 담론 영역에 계신 분들이니까 정당한 댓글조차 비겁한 변명처럼 보일 것을 우려해서가 아닐까 착각에 가까운 추측을 합니다.

그래서 연구실에 있지 않은 제가 반대의견을 좀 올릴까 합니다. 좀 넓게 생각하면 글샘님의 의견은 '이론/실천'의 대한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작금의 상황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근저에는 '반이론적 정서'가 있지 않나싶습니다. 여기에는 이론이 고담준론화되면서 현실과 거리를 두게 된데 -역사적- 원인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특히 지식인들이 상아탑에 틀어박혀서 먹을거리를 위해 '이론'을 반찬삼았던 경향에 대한 반감같은 것들이 있을 겁니다. 이러한 반감은 반면에 '지식인'에 대한 기대감이-전통적으로 존재해 왔던- 실망으로 바뀌면서 고착된 것으로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특히 몇 십년전부터 강준만을 필두로 시작된 '지식인 실명비판'은 진보적인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쳐왔습니다. 강준만은 실명비판을 통해 '강단좌파'들을 보수세력에 맞먹는 적으로 공격해왔습니다.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고 맞는 말들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한가지 유념해야될 것은 이것이 '이론'과 '실천'을 적대적 관계로 설정하고 있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강준만이 주로 비판한 사람들은 -좀 거칠기는 한데- 급진좌파적 이론과 이율배반적인 우파적인 실천같은 것들이었습니다. 특히 일상적 파시즘론이 나왓을 때 학계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역사관에 대한 수렴과 또 비판이 있었던데 반해 강준만은 예를 들어 임지현교수가 조선일보에 어떤 식으로 대응하는지를 비판했습니다.

다시 핵심으로 돌아가면 중요한 것은 '이론'과 '실천'을 상호관계적으로 보는 시각이 아닐까 합니다.거리의 경험은 가끔 '실천'의 흥분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이 꼭 나쁜 것 만은 아니지만 상호침투적 과정 조차 망각하게 되는 경우 '과유불급'의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모든 혁명적인 사건에는 이론적 전위가 있어왔습니다. 또한 가장 훌륭한 혁명가들은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레닌이 대표적인 경우겠지요.

저는 상아탑이 '대중의 언어'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늘 불만입니다.빌헬름 라이히가 좌파가 형이상학과 개념화에 열중하느라고 대중의 언어를,대중의 심리를 놓치는 우를 범했다고 이의 복구를 주창한 말에 동의합니다. 또한 호치민이 '민중이 이해할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라는 말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론의 대중화실패'를 지적해야하는 바이지 '담론공간' 자체에 대해 비판할 것은 아닙니다. 즉 글샘님의 진보를 향한 의지와 행동은 존중하지만 '진보'와 '참여'의 범위에 조금 더 다양성의 측면이 보강되어야 할 듯 보입니다.

아시겟지만...전 연구실에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로쟈 2008-07-22 10:29   좋아요 0 | URL
드팀전님의 댓글도 잘 읽었습니다.^^ 이론/실천의 이분법은 사실 제가 염두에 둔 초점은 아니구요(그 정도는 우리도 벗어나 있다는 판단도 듭니다), 제 고민은 '다수성'의 문제입니다. 민주정에서 왜 '다수'의 지배가 관철되지 않는가(책도 나와 있죠, 왜 80이 20에게 지는가, 요즘 같아선 20도 안되는데). 한데, 이 '다수'가 보면 TV 드라마 보고, 아이들 학원 보내고, 게임하고, 주식하고, MB 욕하고,집값 걱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전대협의 '강철대오'가 변화를 가져올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보수적인(혹은 중도적인) 다수가 움직여야 하고, 다수를 움직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건 지구전입니다. 앞으로 남은 4년 몇 개월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한. 제 관심은 그 지구전에 있습니다...

드팀전 2008-07-22 16:35   좋아요 0 | URL
네...저는 마지막 문장에 촛점을 맞추었습니다.
저 역시 그런 고민을 합니다. 제가 댓글을 단 것은 '진보'적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존재하는-로쟈님은 이미 넘어섰다고 말씀하시지만-여전히 존재하는 '이론/실천'의 이분법과 '반이론적 분위기'에 대한 '비이론가'의 '이론에 대한 옹호' 같은 것입니다.

제 회사에도 진보적인 축에 속하는 사람들이 몇 있는데..의외로 상황별 대응에는 목소리를 높이지만 그것을 보편화하고 정식화하여 나아갈수 있는 과정 자체는 별로 비중을 두지 않습니다. 마치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운동처럼 말입니다. 로쟈님이 지구전을 말하셨고..제가 그람시의 진지전을 이야기한 것도 하루벌어 하루 사는 운동말고 지속적이고 실제적 변화를 이루는 과제를 고민해보자는 차원이 아닐까 합니다.

전 요즘 행여 짤릴 경우 부업으로(아니 그때가 되면 생업이 될까요? ^^) 뭘해야하나..심각하게 고민중입니다. 그런데 제길..할 수 있는게 별로 없습니다.절망적인데요.

ㅜㅜ 아이는 땡글 땡글 영글어가는데..푸우..이제 점심먹으러 갈까요? 식사 잘 하세요.

로쟈 2008-07-22 22:48   좋아요 0 | URL
조만간 <파이트클럽>에서처럼'자기구타'의 단계로 진입해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아이들도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