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시사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56). 가라타니 고진의 <역사와 반복>에 대한 것이며, 소개기사는 미리 옮겨놓은 적이 있다(http://blog.aladin.co.kr/mramor/2138329). 가라타니가 한국어판에 붙인 서문 등도 읽어볼 만한데, 분량상 리뷰에서는 '서설'만을 정리했다.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 브뤼메르 18일>에 대한 가라타니식의 '비평'이다.

시사인(08. 07. 05) 역사는 왜 반복되는가

비평이란 무엇일까? “내가 이 책 읽은 거 맞아?”라는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으로 정의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두 번 읽도록 자극하고 권유하는 것이 ‘비평’이라면, 가라타니 고진이야말로 일급의 비평가다. 물론 일본을 대표하는 비평가이자 사상가라는 평판을 이미 얻고 있는 처지이므로 ‘일급의 비평가’란 평은 중언부언이다. 하지만, 말 그대로 ‘이렇게도 읽을 수 있구나!’란 경탄을 매번 불러일으키는 비평가는 그리 많지 않다. 이번에 출간된 <역사와 반복>(도서출판b 펴냄) 또한 예외가 아니다.

책은 ‘역사와 반복’ ‘근대 일본에서의 역사와 반복’ ‘불교와 파시즘’, 3부로 구성돼 있는데, 표제가 된 첫 번째 에세이에서 그가 시범적으로 다시 읽는 것은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다. “헤겔은 어디에선가 모든 세계사적 사건과 인물은 두 번 나타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처음엔 비극으로, 두 번째는 소극으로”라는 도입부로 유명한 글이다. ‘프랑스 혁명사 3부작’ 중 한 꼭지를 이루는 이 정치 팸플릿에서 마르크스는 1789년과 1848년의 프랑스혁명을 다룬다. 그가 보기에 1848년부터 3년간은 1789년 혁명에서 나폴레옹의 쿠데타까지를 반복하고 있다. 즉,  보통선거를 통해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가 스스로 쿠데타를 일으켜서 다시 황제가 되는 루이 보나파르트(나폴레옹 3세)는 나폴레옹 1세의 행적에 대한 ‘소극’적 반복이다.  

가라타니가 <브뤼메르 18일>을 다시 문제삼는 것은 그러한 역사적 반복에서 어떤 패턴을 읽기 때문이다. 역사의 반복에서 중요한 것은 되풀이되는 사건(내용)이 아니라 그러한 반복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어떤 형식(구조)이다. 그리고 그러한 형식에 주목하게 한다는 점에서 <브뤼메르 18일>은 특권적이다. 가라타니는 아예 <자본론>과 동급의 의의를 갖는다고 말해놓을 정도다. “<자본론>이 경제를 표상의 문제로서 파악하고자 한다면, <브뤼메르 18일>은 정치를 그와 같이 파악하고 있다. <자본론>이 근대경제학 ‘비판’이라면, 마찬가지로 <브뤼메르 18일>은 근대정치학 ‘비판’이다.”

가라타니가 다시 읽는 <브뤼메르 18일>은 1870년대 이후의 제국주의, 1930년대 파시즘뿐만 아니라 1990년대 이후의 새로운 정세에 관해서도 본질적인 통찰을 가능하게 해준다. 흥미로운 것은 이 통찰이 정치적 대의(代議)의 문제와 연관된다는 점이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대표제라는 상징적 형식은 이중적이며 입법권력으로서의 의회와 행정권력으로서의 대통령은 크게 다르다. 의회제는 토론을 통한 지배라는 의미에서 자유주의적이고, 대통령은 일반의지(루소)를 대표한다는 의미에서 민주주의적이다. 때문에, 독재형태는 자유주의를 배반하지만 민주주의를 배반하지는 않는다.

가라타니에 따르면, 이러한 차이는 근대 인식론의 각기 다른 사고방식에도 대응한다. 즉, 한편에는 진리를 선험적인 명증성에서 연역할 수 있다는 데카르트적 사고방식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진리란 타자와의 합의에 의한 잠정적인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앵글로색슨적인 사고방식이 있다. 전자의 경우 ‘일반의지’는 서로 대립하는 사람들이나 여러 계급을 넘어선 존재에 의해 대표되며, 후자의 경우는 토론을 통한 합의에 의해 결정된다. 역사의 반복에서 확인하게 되는 것은 의회(대표제)를 부정할 경우 도달하게 되는 정치적 위기가 흔히 그것의 상상적 지양으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1848년 혁명 이후 루이 보나파르트가, 그리고 1930년대에는 히틀러가 ‘결단하는 주권자’로 출현하게 되는 것과 같이 말이다. 혹은 가까이에서 예를 찾자면 4.19 혁명이 5.16 쿠데타와 10월 유신으로 귀결된 것과 같은 과정을 우리는 떠올려볼 수 있겠다.

민주주의의 대표제는 절대주의 왕을 죽임으로써 출현하지만, 거기에는 메울 수 없는 구멍이 있으며 ‘황제’ 혹은 ‘결단하는 주권자’는 그러한 구멍을 메워야 한다는 ‘반복 강박’의 산물이다. 이것이 ‘우스꽝스런 보통 사람’으로 하여금 ‘영웅’으로 행세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준다. 그러한 소극은 지금 우리에게도 반복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08. 0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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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당연필 2008-06-30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는 이유가 뭐죠? --;;

로쟈 2008-06-30 15:27   좋아요 0 | URL
좋은가 봅니다.--;

사량 2008-06-30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분의 썩소를 여기서도 보고 말았군요.ㅠ

로쟈 2008-06-30 15:28   좋아요 0 | URL
'소극'이죠. 이 경우엔, 썩소극!

종이 2008-06-30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사진 절묘합니다.

로쟈 2008-06-30 15:29   좋아요 0 | URL
이 정도면 '작품'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7-01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르크스가 이번 강경진압을 보면 나폴레옹1세를 흉내내려는 나폴레옹 3세의 소극을 박정희 전두환을 흉내내려는 이명박의 소극과 비교하는 소품을 쓸 것 같아요.제목은 <명박의 5,16>?

로쟈 2008-07-01 00:12   좋아요 0 | URL
네, 제 생각이 그렇습니다...

2008-07-01 0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7-01 12:21   좋아요 0 | URL
문제는 그 주변들까지 그 모양이라는 것이죠...
 

'국민주권과 국가폭력'(http://blog.aladin.co.kr/mramor/2160267)이란 페이퍼에서 언급된 '마르크스주의적 국가이론'이 내게 떠올려주는 이름은 니코스 풀란차스(1936-1979)이다(알튀세르, 그람시와 함께 한동안 자주 언급되다가 국내에서는 '잊혀진' 이론가이다). 얼마전 한 대학원신문에 관련기사가 게재된 것이 그를 상기하는 데 도움을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래전 일이지만 '국가이론'에 관한 책들이 앞다투어 나왔던 적이 있다. 사회과학 서적들이 여전히 대학가에서 읽히던 때의 일이다. 나는 풀란차스를 직접 읽은 적은 없고, 2차 문헌에서만 주로 보았지만 아래 기사를 읽으면서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된다. 물론 최근의 시국과 무관하지 않다. 기사는 학술저널 담비에서 옮겨놓는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rsec=&idxno=10089).

고려대 대학원신문(146호) 인용만 될 뿐 읽혀지지는 않는 이론가 풀란차스

이른바 ‘혁명의 시대’였던 1980년대를 지나면서 한국에서 ‘자본주의 국가이론’에 대한 논의는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물론 간간히 정치경제학이나 발전사회학에서 ‘개발국가론’을 필두로 국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기는 했었다. 하지만 이는 상당부분 네오 베버리안들의 이론적 공헌에 힘입은 것으로, 이전 시대와는 질적으로 구분되는 ‘자본주의’의 뚜렷한 속성 및 그것의 속살을 형성하는 계급관계에 주목하는 ‘자본주의 국가이론’이라 지칭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없지 않았다.

문제는 이처럼 ‘자본주의 국가이론’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소멸되었을지언정, 한국의 자본주의 국가는 여전히 왕성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민주화 이후 ‘국가’의 역할, 운영, 그 외형에 투사된 다채로운 계급관계의 중요성은 더욱 더 커졌다. 과거 권위주의 시절에는 민주주의가 정착한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 관한 이론들을 외우다시피 학습하다가, 정작 우리가 민주화되고 민주주의가 나름대로 작동하게 된 현 시점에 와서는 ‘국가이론’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서구에서 더 이상 많이 논의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덩달아 관심 없어하는 한국 학문의 고질적인 문제점은 여기서도 예외없이 나타난다.



민주화이후, 외환위기 이후 10년에 걸쳐 민주세력들의 정부가 실패하는 것을 경험한 지금, 그리고 ‘노동’의 무기력함과 ‘삼성’으로 대변되는 자본의 전방위적 위력을 모두가 실감하고 있는 지금, 그리스 태생의 맑스주의 이론가 니코스 풀란차스의 저작『국가, 권력, 사회주의』는 우리에게 ‘자본주의 국가’에 대해서 많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인문,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이들은 이른바 ‘상대적 자율성’의 이론가로서 혹은 알튀세르와 함께 ‘구조주의 맑스주의자’로서 풀란차스의 이름에 매우 친숙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해설서내지 논문에 언급된 ‘밀리반드와 풀란차스 논쟁’,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의 개념을 습득하는 데에 주력할 뿐, 그의 저작을 직접 읽는 이들을 주변에서 보기는 쉽지 않다. 기자역시 글을 쓸 때, ‘자본주의 국가’나 ‘상대적 자율성’을 언급하면서, 몇 해 전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떠듬떠듬 읽은 그의 초기저작 『정치권력과 사회계급』의 영문판을 기계적으로 '(Poulantzas, 1973)'으로 인용했던 기억이 있다.



영역이론에서 관계이론으로
하지만 누구나 알고 있듯이, 한 이론가의 이론내지 사상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주저들을 꼼꼼히 읽어내야 한다. 풀란차스 역시 예외가 아니다. 지금 소개하는 그의 저작『국가, 권력, 사회주의』에서 전개되고 있는 풀란차스의 이론은 우리가 흔히 그의 이론이라고 알 던 것과 사뭇 다르다. 뛰어난 국가이론가이자 풀란차스에 대한 권위있는 해설서를 집필한 밥 제숍의 개념화처럼 풀란차스는 기존 자신의 ‘영역이론’이 ‘관계이론’으로 진화했음을 이 책에서 확연히 보여주고 있다.

과거 그의 출세작인 『정치권력과 사회계급』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국가라는 정치적 상부구조를 분석하기 위한 개념들의 복잡한 위계체계를 만들어 내려는 시도, 즉 특수한 생산양식에서의 국가의 영역이론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제숍의 지적처럼 국가는 자신을 위해 다양한 계급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아 권력을 획득하는 주체가 아니며, 국가를 초월해 자리잡고 있는 지배적 계급주체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 도구적인 권력의 저장소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국가는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조직하는 전략적 장이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풀란차스는 권력은 관계적이라는 푸코의 지적을 상이한 인식론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수용한다. 계급갈등과 모순에 많은 방점을 둔 그는 책의 상당부분을 할애하여 국가는 헤게모니 분파의 정치적 책략에 유리하도록 구성되어 있는 권력네트워크의 교차를 통해 형성되는 전략적 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계급관계의 물질적 응축인 국가
예의 자본주의의 고유한 특징인 ‘국가’와 ‘경제’의 공간사이의 상대적 분리로(즉 정치와 경제의 형태분리) 논의를 시작하는(21p) 풀란차스는 먼저 자본주의 국가의 제도에 있어서 물질적 틀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인 정신노동과 육체노동간의 분업, 개체화, 법, 민족에 대해서 논술한다(61~162p). 맑스 특유의 ‘물신주의 비판’과 유사한 방식으로 사회적 분업에 따라 사람들을 계급이 아닌 법적-정치적 ‘민주시민들’로 개체화하면서도 민족의 이름으로 이들의 통일성을 구현하는 메커니즘을 분석한 후 그는 앞서의 물질적 틀을 만들어내면서도, 그에 영향받기도 하는 계급들과 계급분파들 사이의 세력관계를 고찰한다(162~204p). 자본주의 국가는 독자적인 정치현상으로 고찰되어야 하며, 상이한 국면에서 정치적 계급투쟁의 특유성과 관련지워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계급투쟁은 역동적 과정을 거치면서 국가장치내에서 재생산되고 변화되기 때문이다.



‘구조편향적이다’, ‘정치편향적이다’, ‘기능주의적이다’라는 풀란차스에 대한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작은 현대의 우리에게도 많은 함의를 제공한다. 또한 그의 후기저작까지 고려했을 때, 비판의 일정부분은 수긍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공부를 하는 학생의 입장에서 그의 저작이 갖는 난점은 무엇보다도 ‘지독한 난해함’이라고 할 수 있겠다. 뭐 고전이 쉽게 읽힌다면 그것도 좀 이상하다 할 수 있겠지만, 풀란차스 저작의 난해함은 도가 지나치다는게 기자의 판단이다. 일단 독해가 가능해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 텐데 그게 쉽지가 않다. 하지만 설령 기자처럼 글의 절반 정도만 이해하더라도 지금 ‘한국의 국가’를 분석하는데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번역본의 절판’이라는 극한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원우들에게 소개한다.(김경필 기자)

08. 0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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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7-01 00:24   좋아요 0 | URL
풀란차스가 왜 자살했는지 아시면 알려주세요.위키피디아에는 그건 안 나와 있네요.

로쟈 2008-07-01 13:17   좋아요 0 | URL
저도 모르는 일입니다. 찾아보시면 알려주시길.^^;

소경 2008-07-01 08:55   좋아요 0 | URL
"오히려 국가는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조직하는 전략적 장이라는 것이다."는 오늘 사회를 꼭 찝어주는 군요. 응당 받아야할 민주주의에 대한 교육 내용을 불식되고, 납득이 되지 않을 사항들을 정당화되게 하는 구도는 역시 국가의 전략적인 장에서 발효가 되는게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네요......

로쟈 2008-07-01 13:18   좋아요 0 | URL
'민주주의론'만 가지고 현정부를 이해하려고 하면 애로가 많다는 뜻도 되겠죠...

han86866 2008-07-01 14:14   좋아요 0 | URL
카더라통신수준의 얘기라 올리기 민망하지만 풀란차스가 자살을 한것은 68이후 70년대를 거치면서 전통적인 맑시즘적 계급분석의 한계(사회계급스펙트럼의 다양화)와 계급혁명에대한 좌절과 회의때문이라 들었습니다

로쟈 2008-07-01 17:07   좋아요 0 | URL
이론가답게 자살 이유 치곤 좀 추상적이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07-01 23:57   좋아요 0 | URL
그것 참...알 듯 모를 듯 하네요.70년대 들어서 스페인의 프랑코.폴투갈의 살라자르 등 파시스트 지도자들이 다 죽어서 기쁠 듯한데...그리스 군사정권 때문인지...음...
 

주말 북리뷰를 훑어보다가 놓친 '대작'이 있다. 토니 주트의 <포스트워 1945-2005>(플래닛, 2008)이 그 '대작'인데, 1,2권을 합한 분량이 1500쪽에 이른다. 해마다 이맘때 등장하던 한국전쟁 관련서가 뜸하다 싶었는데, 이 전쟁 '이후사'는 그런 기대를 단숨에 뛰어넘는다. 서점에서도 보고 무심코 지나쳤던 책이지만 리뷰를 읽어보니 '문제작'이다. 장서용으로라도 꽂아둘 만하다.  

경향신문(08. 06. 28) 그들의 60년속에 ‘미래의 대안’이 숨어있다

최근 유럽에는 좋은 소식과 나쁜 뉴스가 겹쳤다. 좋은 뉴스는 유럽 경제가 20년 만에 미국과의 격차를 최소화하고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들어냈다는 발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유럽의 만성적 저성장·고실업이 민주제도를 위협할 수 있다는 자신들의 경고를 받아들여 구조개혁을 한 덕분에 되살아난 것이라고 생색을 내고 있지만 말이다. 나쁜 소식은 유럽연합(EU)의 마지막 통합 작업인 리스본 조약을 아일랜드가 국민투표로 거부한 일이다.

통합 유럽은 이처럼 곡절을 헤쳐가며 자신들의 역사는 물론 세계사를 바꿔 나간다. ‘유럽 통합의 아버지’ 장 모네가 없었다면 전쟁 이후 유럽 이념은 정말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고 했던 장-바티스트 뒤로젤의 지적처럼 고비마다 좌절을 뛰어넘는 지혜가 등장하는 게 유럽의 힘인 듯하다. 논쟁적인 저작 ‘문명의 충돌’의 지은이 새뮤얼 헌팅턴 하버드대 교수가 갈파했듯이 하나로 통합된 유럽연합의 등장은 미국 패권에 반대하는 전 세계적 반작용 가운데 단일 움직임으로서는 가장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며 진정한 의미의 다극화한 21세기를 만들어낼 중요변수임에 틀림없다.



유럽 역사의 최고 권위자 가운데 한 사람인 토니 주트는 온갖 광석을 용광로에 녹여 새로운 조형물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전후 유럽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거대한 조감도를 탄생시켰다. 수많은 세계적 언론이 주트의 대작 ‘포스트워 1945-2005’(원제 POSTWAR: A History of Europe Since 1945)를 2005년 ‘올해의 책’으로 선정하기에 이른 것은 망원경으로 보는 거시적 통찰과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듯한 미세 분석이 동시에 담긴 유럽현대사 오디세이로 평가하기 때문인 것 같다.

지은이는 전후 60년의 유럽 역사가 위대한 점을 ‘미국식 생활양식’에 맞서 ‘유럽식 사회모델’을 창조한 것에서 찾는다. 그는 연이은 세계대전의 폐허 속에서 주저앉고 말 것 같던 유럽이 특유의 사회모델로 우뚝 선 과정을 정밀하게 추적해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복지국가 모델이 거저 생겨난 게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씩 거증해 나간다.



핍진한 전후의 일상생활 속에서 복지제도는 최소한의 정의나 공정함에 대한 보증서였다는 게 첫 번째 원인이다. 복지제도가 전시의 레지스탕스가 꿈꾸던 정신적·사회적 혁명에는 못 미치지만 전쟁 이전 시기의 절망과 냉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첫걸음이었다는 데 밑줄을 먼저 긋게 한다. 서유럽의 복지국가가 정치적인 분열을 초래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두 번째 이유로 꼽힌다. 복지국가의 전반적인 취지가 사회적 재분배였지만 전혀 혁명적이지 않아 사회갈등 요소가 끼어들 여지가 거의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당장 가장 큰 혜택이 돌아갔지만 장기적으로는 전문직과 사무직, 상인을 비롯한 중간계급의 복지가 몰라보게 향상된 덕분이다.

유럽의 과도한 복지제도가 경제의 효율성과 성장에 심각한 결함을 낳았다는 비판이 한국 땅에서는 여전히 유효한 주장이지만 저자는 이를 일축한다. 해마다 실시되는 유로바로미터의 여론조사 결과 절대 다수의 유럽인들이 빈곤의 원인을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 탓이라는 인식을 버리지 않고 있는 점을 든다. 대부분의 유럽인들에게 직업의 안정과 누진세, 대규모 사회적 이전지출에 대한 약속이 시민 상호간의 약속인 동시에 정부와 시민 사이의 약속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미국인들보다 더 나은 교육을 받았고, 더 안전한 생활을 누렸으며,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살았다는 통계도 이를 입증한다는 것이다.

전후 과거사를 5~6년이라는 이른 시일 안에 깔끔하게 정리한 것도 유럽 각국들이 개혁과 발전의 발걸음을 가볍게 한 요인 가운데 하나라고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지은이는 유럽적 가치 창조와 더불어 유럽의 위축과 지리적 축소, 이데올로기와 지식인의 영향력 쇠퇴도 주요한 역사적 흐름의 하나로 제시한다.

책은 2차 세계대전 후 유럽의 거의 모든 것을 아우른다. 전쟁의 유산과 과거 청산, 유럽 제국주의의 종말과 식민지 해방, 냉전의 도래, 유럽경제공동체의 탄생과 확대 발전, 서유럽의 경제적 번영과 불만, 소련의 동유럽 지배와 소비에트 블록의 몰락, 발칸 반도 전쟁, 최근의 난민과 불법 이민 노동자, 유럽인들의 일상적 삶에 이르기까지.

요슈카 피셔 전 독일 외무장관이 유럽의 새로운 변신이 가능했던 두 가지 역사적 결정으로 손꼽았던 것에 대해서도 주트는 대부분 동의한다. 미국이 유럽에 잔류하기로 한 일, 프랑스와 독일이 우선 경제적 유대부터 시작하는 통합의 원칙을 충실히 따르기로 한 결정이 그것이다.



책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지은이의 주장이 강하게 배어 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최근 유럽사의 윤곽은 매우 달라 보였을 것”이라는 대목이 그중의 하나다. 역사에서 가정은 의미가 없지만 그는 이 경우를 ‘합리적인 반사실적 가정’이라고 주장한다. 북한의 남침을 지원한 스탈린의 결정이 가장 중대한 오산이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유럽의 역사가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유럽 정치 질서가 ‘배제의 정치’가 아닌 ‘포함의 정치’라는 게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시사점이기도 하다.

총 1446쪽에 이르는 방대한 이 책은 현대유럽사에서 미래의 선택지를 찾도록 세계인들에게 권한다. 초강대국 미국과 미래의 잠재적 초강대국 중국도 보편적으로 모방하고 싶은 유용한 모델을 갖지 못했으며, 유럽 모델이 가장 근접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김학순 선임기자)

08. 0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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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2008-06-29 23:02   좋아요 0 | URL
32천원짜리 책 두권이라는 가격의 압박도 장난이 아니군요.
방금 mbc2580에서 방송된 고교서열화의 문제 지적을 보니, 강북의 방과후 공부방 초등생과 강남의 영어학원수강 초등생들로 나누어 인터뷰를 하니 그 어린아이들이 꾸는 미래의 꿈에서부터 서열이 확연히 드러나네요.
책 가격을 보니 이런 책은 사서 보지 못할 사람도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값이 그나마 다른 것보다는 싼 편이겠지만 이런 식으로 정보에 대한 접근도 점점 양극화되겠구나라는 생각까지 말입니다. 저 역시 동네도서관에 주문을 넣을 수 밖에 없으니.
영어책은 페이퍼백으로 3만원도 안되는데 불과한데 말이죠.

로쟈 2008-06-29 23:21   좋아요 0 | URL
원서의 알라딘 판매가는 21,000원 정도니까 거의 3배 차이네요. 약간의 악순환인데, 인문서의 독자가 줄어들다 보니 책의 단가는 점점 더 올라가는 식입니다. 그럼, 독자는 더 줄어들고...

aisms 2008-10-29 20:23   좋아요 0 | URL
플래닛 출판사입니다.... 가격이 좀 높지요.... 고민 많이 했습니다. 로쟈님의 의견도 일부 맞는 말씀이지만, 원서 가격과 비교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그 분량을 번역하는 데 드는 비용과 편집비 등을 고려하면 그 정도 가격을 매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영어 양장본도 처음 나왔을 때는 45달러 정도였고, 이 책이 영미권 독자들을 대상으로 초판 4만부를 찍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고작 2,000부를 찍고 경향신문과 한겨레21 등에 전면 광고 등을 하고도 4개월이 지난 지금도 초판의 3분의 2 정도밖에 소화하지 못한 게 현실입니다. 제작비에 대비해서도 그렇게 비싼 가격은 아닙니다. 대충 계산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소설책을 제외하면) 그렇게 비싸게 매긴 것도 아닙니다. 아무튼 이 책은 아직 제가 낸 책 중에서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저자가 최근 포린 폴리시 선정 세계 100대 지성에 들기도 했고, 아마도 제가 내지 않았으면 오랫 동안 국내에 출간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영미권에서 올해의 책을 석권할 정도로 화제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동안 책을 계약하겠다고 나선 출판사가 전혀 없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가격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으실 거라고 믿습니다. 화제가 되는 대부분의 책들이 미국에서도 아직 책으로 나오기 전에 원고 상태에서 계약이 이루어지고 있는데도 말이지요. 쓰고 보니 쑥스럽군요. 일부 메이저 출판사들을 제외하고는 최근 대부분의 출판사들은 아주 어렵습니다. 언제 무너지질 모르겠다는 공포감에 짓눌려 있다고나 할까요? 뭐, 그렇다는 말씀이고요. 관심을 가져주신 데 열매 님과 로쟈 님께 감사드립니다.

로쟈 2008-10-29 22:32   좋아요 0 | URL
책값에 대해서는 저도 이해하는 편입니다. 물론 전체적으론 지난 몇년간 급상승한 것도 맞고요. 문제는 수요 같습니다. 아시겠지만, 같은 분량이라면 소설이 인문서보다 단가가 낮은 건 독자층이 더 넓은 탓이죠. 인문서 독자층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는 인문 출판계 전체의 숙제 같습니다...
 

'대중유토피아의 꿈'(http://blog.aladin.co.kr/mramor/2160004)에 이어지는 페이퍼로서 수잔 벅 모스의 <꿈의 세계와 파국>(경성대학교출판부, 2008)의 한 문단을 읽는 것이 목적이다. 따로 자리를 마련한 것은 국역본의 번역이 어이없어서이다(안심하고 읽을 수 있는 인문 번역서는 그토록 드문 것인지?). 최근의 '촛불문화제'와도 관련되는 내용이어서 교정해놓는다. 번역본의 22쪽, 원서로는 6-7쪽이다.

"국가의 계급적 특징은 폭력성을 설명할 수 있지만, 정당성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의 민주주의적 특징은 폭력성이 아니라 정당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만약 누군가 맑스주의적인 비판과 민중 주권의 합법성에 대해 호소하는 자유-민주주의적인 이론을 통해 폭력적인 국가를 회복하기 위한 시도를 거부한다면, 대중 민주주의인 민중의 의지에 저항한 민중 주권에 의해 폭력을 사용하는 경우에, 주권이 지지하는 법이 그 자체로 정당한지를 의심하게 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민주적인 주권은 인민에 대해 정당한 구체화로 독점하는 모든 폭력을 가진 인민과 직면할 때, 그것은 인민의 비정체성을 사실상 증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법의 개념에 대한 의지로 민중 주권과 국가 폭력 사이의 모순을 풀기 위한 시도는 불합리한 순환논법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순환의 효과는 전적으로 합법적/비합법적 구별의 가능성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알아먹기 힘들다(특히 강조 표시한 대목). 자신이 이해한 것을 번역하는 게 아니라 억지로 단어들만을 (그것도 문법에 맞지 않게 엉터리로) 직역해놓을 경우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 잘게 쪼개서 원문과 대조해가며 읽어보기로 한다.  

"국가의 계급적 특징은 폭력성을 설명할 수 있지만, 정당성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의 민주주의적 특징은 폭력성이 아니라 정당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The class nature of the state may explain its violence, but not its legitimacy; the democratic nature of the state may explain its legitimacy but not its violence.)

오역할 만한 대목이 없는 문장인데, 대구법으로 이루어진 원문을 번역본은 굳이 비틀었다. 다시 옮기면, "국가의 계급적 특징은 국가의 폭력성을 설명해주지만 그 정통성은 설명해주지 못한다. 반면에 국가의 민주주의적 특징은 국가의 정통성은 설명해주지만 그 폭력성은 설명해주지 못한다."('정통성'이라고 옮긴 'legitimacy'는 보통 '정통성' '합법성' '정당성' 등의 뜻을 갖는다.) 

이어서 두번째 문장: "만약 누군가 맑스주의적인 비판과 민중 주권의 합법성에 대해 호소하는 자유-민주주의적인 이론을 통해 폭력적인 국가를 회복하기 위한 시도를 거부한다면, 대중 민주주의인 민중의 의지에 저항한 민중 주권에 의해 폭력을 사용하는 경우에, 주권이 지지하는 법이 그 자체로 정당한지를 의심하게 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If one rejects the Marxist critique and attempts to redeem the viloent state through liberal-democratic theory, appealing to the legality of popular sovereignty, one faces the problem that, in the case of the use of violence by popular sovereignty against a mass demonstration of popular will, it becomes questionable whether the law that the sovereign is upholding is itself legitimate.)

일단 "만약 누군가 맑스주의적인 비판과 민중 주권의 합법성에 대해 호소하는 자유-민주주의적인 이론을 통해 폭력적인 국가를 회복하기 위한 시도거부한다면"에서 '시도'는 "If one rejects the Marxist critique and attempts to redeem the viloent state..."에서의 동사 'attempts'를 명사로 잘못 읽은 것이고, '거부한다면'이란 동사가 받는 건 '맑스주의적 비판'(the Marxist critique)까지만이다. 다시 옮기면, "만약에 국가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을 거부하고 국민지배의 합법성에 호소하는 자유-민주주의 이론을 통해서 국가 폭력을 구제(해명)하고자 시도한다면"쯤이 된다.

국가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이란 국가를 계급론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이 경우 '국민의 지배'는 '부르주아의 지배'에 대한 허울이 된다). 그럴 경우 지배계급의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국가의 폭력은 자연스레 이해된다. 이미 "국가의 계급적 특징은 국가의 폭력성을 설명해주지만 그 정통성은 설명해주지 못한다."고 해놓지 않았나. 문제는 그 국가의 폭력성을 '자유-민주주의 이론'을 통해서 해명하고자 하는 경우이다. 자유-민주주의 이론이란 국가를 국민지배의 구현체로 보는 관점이다('국민지배'란 '국민의, 국민에 의한 지배'를 가리킨다).   

그럴 경우 어떤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가? "대중 민주주의인 민중의 의지에 저항한 민중주권에 의해 폭력을 사용하는 경우에, 주권이 지지하는 법이 그 자체로 정당한지를 의심하게 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people'은 '민중' '인민' 등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지만, 여기서는 '국민'이라고 옮기겠다(국역본에서는 '민중'과 '인민'이 두서없이 혼용되고 있다). '국민'이 갖는 부정적인 뉘앙스 때문에 보통은 기피되지만, 일상적인 용어로 가장 친숙하기 때문이다.  

역자는 "one faces the problem that, in the case of the use of violence by popular sovereignty against a mass demonstration of popular will"에서 'mass demonstration of popular will'을 '대중 민주주의인 민중의 의지'라고 옮겼는데, 'demonstration'을 '민주주의'로 옮기는 것은 '시위성' 번역이다. 이 대목만 다시 옮기면, "국민주권에 의한 국가폭력을 국민의지의 대중적 표현(시위)에 대항하여 사용할 경우에" 정도가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it becomes questionable whether the law that the sovereign is upholding is itself legitimate", 곧 "그 주권이 지탱하고 있는 법 자체의 정당성 여부가 문제시된다."

전체를 다시 옮기면, "만약에 국가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을 거부하고 국민 지배의 합법성에 호소하는 자유-민주주의 이론을 통해서 국가 폭력을 구제(해명)하고자 시도한다면,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문제는 국민주권에 의한 국가 폭력을 국민의지의 대중적 표현(시위)에 대항하여 사용할 경우에 그 주권이 지탱하고 있는 법의 정당성 자체가 의문시된다는 점이다." 요컨대, '국민주권'(국가폭력)을 '국민의 의지'에 대항하여 사용해도 되는가 하는 것이다. 헌법에 명기된 대로, 국민주권이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뜻하는 것인데 말이다.

가령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킨 것은 다수 국민의 뜻이었다(실제적으로는 1/3의 대표성만을 갖는다 하더라도). 그런 의미에서 현 정부는 '국민주권'의 대행자이다. 그런데, 미국산 쇠고기 수입협상 등 현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다수 국민의 의사 역시 '국민의지'이며 촛불시위는 그 '대중적 표현'이다. 때문에 경찰(국민주권)이 시위대(국민의지)를 향해 물리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강제로 진압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이론에 따를 때 '국민주권'과 '국민의지'가 충돌하는 모순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민주적인 주권은 인민에 대해 정당한 구체화로 독점하는 모든 폭력을 가진 인민과 직면할 때, 그것은 인민의 비정체성을 사실상 증명하는 것이다."(When democratic sovereignty confronts the people with all the violence that it monopolizes as the legitimate embodiment of  the people, it is in fact attesting to its nonidentity with the people.) 

내가 제일 어이없다고 생각한 대목이다(결국 이런 페이퍼까지 쓰게 만든!). 역자는 "When democratic sovereignty confronts the people with all the violence"를 "민주적인 주권은 모든 폭력을 가진 인민과 직면할 때"라는 식으로 옮긴 것인데, 여기서 with가 이끄는 전치사구는 people을 수식하는 것이 아니라 동사인 confronts에 걸리는 것이다(confront A with B). 즉, '모든 폭력'은 인민/국민이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그들이 '폭도'란 말인가?) '민주적인 주권'을 자임하는 국가가 갖고 있는 것이다. 어떤 수단들인가? 가령 극우논객 조갑제가 '청와대에 숨어 있는' 이명박에게 충고한 바에 따르면, "법, 경찰, 검찰, 국정원, 기무사, 국군 등 대통령이 가진 법질서 수호 수단은 엄청나다." 'all the violence'란 시민들이 들고 있는 피켓과 물병이 아니라 경찰이 갖고 있는 방패와 물대포이며 주권의 대행자로서 대통령이 갖고 있는 '법질서 수호 수단'들이다.  

그리고 'of  the people'은 '인민에 대해'란 뜻이 아니라  'the legitimate embodiment of the people' 전체에 걸리는 것이다. '국민의, 국민에 위한, 국민을 위한'이라고 할 때의 그 '국민의'이다. '국민의사의 합법적 구현' 정도로 보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에 'nonidentity with the people'를 '인민의 비정체성'으로 옮긴 것도 나는 '국민과의 비동일성'이란 뜻이라고 본다. 그래서 다시 옮기면, "민주적 주권이 국민의사의 합법적 구현으로서 독점하고 있는 모든 폭력을 동원하여 국민과 맞선다면, 그것은 사실상 주권과 국민과의 '비동일성'을 증명해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제 마지막 두 문장이다. "그래서 법의 개념에 대한 의지로 민중 주권과 국가 폭력 사이의 모순을 풀기 위한 시도는 불합리한 순환논법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순환의 효과는 전적으로 합법적/비합법적 구별의 가능성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다."(Thus the attempt to resolve the contradiction of the popular sovereignty and state violence by recourse to the conception of the law becomes caught in a vicious circle. And the effect of this circularity is to undermine the very possibility of the legal/illegal distinction.)

'불합리한 순환논법'이라고 옮긴 'vicious circle'은 그냥 '악순환'이라고 옮기는 것으로 충분해보인다. 다시 옮기면, "그래서 법 개념에 의지하여 국민주권과 국가폭력 사이의 모순을 해소하려는 시도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 악순환은 결과적으로 합법과 불법 사이의 구별가능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undermine'은 '침식하다'란 뜻이지만 여기서는 그냥 '의문을 제기한다' 정도로 의역한다.) 말하자면, 공권력이라고 해도 그것이 국민의 의지를 대표하고 있지 않다면 그 정당성/합법성 자체를 의문시하게 된다는 것.

이 대목의 미주에서 수잔 벅 모스는 이렇게 적어놓았다. "여기서의 논의는 1988-1989년 파리에서 자크 데리다가 주최한 세미나에 빚을 지고 있다. 그곳에서 나는 이번 논문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비록 발터 벤야민과 칼 슈미트의 텍스트에 대한 그의 독해가 나의 견해와 달랐지만, 나는 그의 의견에 도움을 받았다."(324-5쪽) 벤야민과 슈미트에 대한 데리다의 의견은 그의 책 <법의 힘>(문학과지성사, 2004)에서 읽어볼 수 있다. 그리고 덧붙여 ''벤야민의 이름'을 읽기 위하여'(http://blog.aladin.co.kr/mramor/810363) 등의 페이퍼를 참조할 수 있다...

08. 06. 28.

P.S. 유감스럽게도 29일 새벽 촛불문화제가 열린 이후 경찰의 최대 ‘강경진압’이 펼쳐졌다 한다. 다시 확인하게 되는 것은 현 정부와 국민의지 사이의 모순과 비동일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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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2008-06-29 0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with 하나로 시민과 폭도가 한 순간 갈리는군요. 살짝 무서워지려고 합니다. ^^;

로쟈 2008-06-29 10:30   좋아요 0 | URL
네, 무섭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합니다.--;

누런마음황구 2008-06-29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글 잘 보고 갑니다.~ ^^

로쟈 2008-06-29 10:36   좋아요 0 | URL
서재에도 촛불 하나 켜놓았을 뿐입니다.^^;

김상호 2008-06-29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뵙는 로쟈님의 오역 비판이군요! 오랜 시간동안 기다려 왔읍니다!

로쟈 2008-06-29 22:25   좋아요 0 | URL
'벌이'도 아닌데다가 별로 '좋은 일'도 아니어서 자주 다루지는 못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7-02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합법성과 정당성은 다른 개념인데요...합법성은 legality이고 정당성은 legitimacy입니다.예를 들어서 악법을 만들어 인민을 법테두리 안에서 억압하면 합법성은 있지만 정당성은 없게 되지요.이런 짓은 법을 자기 뜻대로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진 이들이 합법적인 수단을 통해서 부당한 목적을 달성할 때 쓰는 수법입니다.
identity를 동일성이라고 옮기신 것은 정확합니다.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이라는 개념이 있으니까요.합법성,정당성,동일성은 독일어로도 거의 똑같은 철자네요.
로자 님 덕분에 칼 슈미트에 대한 책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로쟈 2008-07-02 00:49   좋아요 0 | URL
그게 엄밀하게 구별해서 쓸 수는 있지만, 사전적 정의상으로는 legitimacy도 '합법성' '적법성'이란 뜻을 갖습니다. 법률용어로는 구분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노이에자이트 2008-07-02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여기선 정치학이나 법학용어로 해석해야겠습니다.칼 슈미트에겐 <합법성과 정당성>이라는 저서가 있습니다.수잔 벅모스도 슈미트를 언급했고 기타 주요용어들로 보았을 때 여기선 그 둘을 구분하는 게 좋겠습니다.

로쟈 2008-07-02 01:25   좋아요 0 | URL
본문 중에 the legitimate 같은 경우는 '합법적'이라고 옮겼는데, '정당한'으로 옮겨야 한다고 보시나요?..

노이에자이트 2008-07-02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그래야겠습니다.로자 님이 언급한 페이퍼를 보니 의회주의를 비판한 벤야민에게 슈미트가 공감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실제로 슈미트는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다원주의가 지배하는 의회의 다수결 원리에 의한 합법성은 동일성이 결여된 것이다.결코 민주주의적 정당성을 주장할 수는 없다...

물론 슈미트의 이 논리는 바이마르 의회주의로는 안되니 인민주권의 구현인 지도자(히틀러)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되지요.

로쟈 2008-07-02 23:26   좋아요 0 | URL
그런데, 해당 문장에서는 주어가 '민주적 주권'이고 이걸 합법적 선거의 의해서 획득된 주권으로 볼 경우에, '국민의사의 정당한 구현'이라고 옮기는 건 어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명박 정부가 합법적인 '민주적 주권'이지만, 최근에 사태에서 정당성을 의심받을 수 있는 것처럼요. 제가 이해하는 합법성/정당성은 법/정의와 비슷한데, 좀 다른가요?..

노이에자이트 2008-07-03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합법성,정당성의 구분에 대한 이해는 저와 로자 님이 같습니다.사실은 그 문장은 문맥으로 볼때 <합법적인>이라고 해석하는 게 더 낫습니다.물론 저자의 입장을 존중한다면 정당한...으로 해석해야겠지만 저자가 legal로 썼다면 깨끗이 해결되었을텐데...하는 생각도 듭니다.저자가 단어선택에 실수를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그 위 문장의 leitimate는 논란의 여지없이 <정당한>인데 말이죠.

로쟈 2008-07-03 23:23   좋아요 0 | URL
저는 단어 자체로 엄밀하게 구분된다기보다는 문맥에 따르는 듯싶습니다. droit가 권리와 법의 의미를 갖는 것처럼...
 

'6월의 읽을 만한 책'(http://blog.aladin.co.kr/mramor/2117762)에서 수잔 벅 모스의 <꿈의 세계와 파국>(경성대출판부, 2008)을 언급한 바 있다. 독서 계획을 계속 미뤄둘 수만은 없어서 손에 들었는데, 책은 생각만큼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물론 책에 실린 이미지들만 훑어보아도 공부가 되긴 한다). 찾아보니 부산일보에만 리뷰기사가 실린 듯하데, 참고삼아 미리 읽어보는 게 좋겠다(http://www.busanilbo.com/news2000/html/2008/0517/060020080517.1016090128.html). 지나가는 김에 지적하자면 국역본의 표지는 제목과 달리 너무 밋밋하다.

부산일보(08. 05. 17) 대중 유토피아의 꿈은 여전히 유효해야 한다

책 머리에 쥘 미슐레의 금언이 새겨져 있다. "모든 시대는 다음 시대를 꿈꾼다." 책을 다 훑고 나면 이 금언이 다시 떠오른다. 꿈은 으레 희망의 다른 표현일테다. '꿈의 세계와 파국'(수잔 벅-모스/윤일성·김주영 옮김/경성대출판부/3만원)은 냉전 이후를 어떻게 바라볼까에 대한 대중 통찰서다. 하지만 '사회주의의 패배와 자본주의의 승리'로 쉽게 단정짓고 싶어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철저히 거부한다. "20세기에 대한 평가는 승자의 손에 남겨져서는 안된다는 경고에 주목하라.(16쪽 '서문' 중에서)"

그 이유가 이렇다. "대중을 회유하는 '꿈의 세계'에 의해 초래된 위험들이 아니라, 지구적 권력의 현재 시스템에서 대중을 회유할 필요가 있다는 이념조차 유행에 뒤쳐진 것으로 던져버리는 사실에 의해 야기되는 '새로운' 위험들에 대한 성찰을 담았다.(320쪽 '삶의 시간, 역사적 시간' 중에서)"



책은 제목처럼 꿈을 다룬다. 하지만 일상의 꿈이 아니라 '대중'이라는 집단이 환각적으로 빠져든 공상에 대한 논의다. 물론 대중은 정치적 성향이 결여된 과거의 군중(mob)과 구분된다. 새로운 세상을 거침없이 지향하는 '강력한(?)' 집단이다. 그리고 그 대중의 꿈과 함께 20세기가 시작됐다고 책은 전제한다. 그 꿈의 실현이 대중 유토피아다.

하지만 정치 지형에 따라 선택된 도구는 달랐다. 대중 유토피아의 실천 도구로써 동구는 사회주의를, 서구는 자본주의를 채택했다. 100년의 실험(냉전)이 이뤄졌고, 그 실험이 끝날 무렵 사람들은 "사회주의의 실패, 자본주의의 승리"라고 성급히 결정했다.



그렇다면 '승자'로 분류된 자본주의 사회는 대중 유토피아를 실현시켰을까. 책은 이에대해 자본주의 사회에 유령처럼 떠도는 몇 개의 단어를 불쑥 들이댄다. '세계 전쟁… 대량 테러… 노동 착취…등…'. 누가 이런 단어에서 유토피아를 떠올릴 수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도 결국 예정된 목표 지점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반증일테다. "대중 유토피아의 꿈은 제2세계(사회주의)에서 실패한 것으로 선언됐고, 제1세계(자본주의)에서도 의도적으로 포기됐다.(321쪽)"

책은 이 같은 주장을 반증하기 위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상징처럼 굳어진 모스크바와 뉴욕을 부지런히 오가며 교차 분석한다. 그런 분석 틀의 상당수가 이미지다. 저자는 "그림과 사진, 영화 포스트 등이 20세기를 통찰하는 도구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사물이 실제로 어떠했는가보다 그 사물들이 과거와 현재 시점에서 어떻게 보이는지를 분석하는 것이 더 유효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또 이 같은 이미지 분석을 통해 소비에트 모더니즘이 서구 모더니즘과 꾸준히 연결돼 있었다는 '예견된' 사실을 증명한다. 소련 중앙노동연구소의 핵심 연구 주제가 자본주의 상징이자 노동을 철저히 기계화한 미국 테일러 작업방식이었다(138쪽)는 것. 할리우드의 상징인 '영화 킹콩' 포스트와 거대한 레닌 동상이 올려진 모스크바 소비에트 궁전 설계안이 경악스러울만큼 닮았다(213쪽)는 것.

이쯤되면 그의 주장을 거부할 명분 찾기가 꽤 힘들어 진다. 저자는 결국 "20세기 사회주의의 붕괴는 자본주의를 너무 충실히 모방했기 때문(16쪽 '서문' 중에서)"이라고 결론내린다. 사회주의를 망친 것은 사회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운용한 주체들의 자본주의화된 계산법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책은 사회주의에 대한 '최소한의' 애정을, 자본주의에 대한 '최대한의' 경계를 전제로 했다.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 하나! 우리의 미래는? 20세기 내내 견지해온 대중 유토피아의 꿈은 이제 포기해야 하나? "우리는 기존의 집단 정체성 대신 새로운 정체성을 창조할 필요가 있다.(322쪽)" 꿈은 여전히 유효해야 한다.

저자는 20세기 유럽 지성을 대표하는 발터 벤야민(마르크스 문학평론가 겸 철학자) 연구자로 최근 명성을 얻고 있는 미국의 프랑크푸르트학파 여성학자다. 지난 2004년에는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2004년/문학동네)가 국내 소개된 바 있다.(백현충 기자)

08. 06. 28.

P.S. 책이 더디게 읽히는 건 부자연스러운데다가 약간씩 핀트가 안 맞는 번역 때문이다. 가령 1장의 첫문장은 이렇다. "20세기 말이라는 전망에서 제기되는 하나의 역설은 명백한 것처럼 보인다. 대중의 이름으로 통치하기를 요구하는 - 즉, 급진적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 정치체제는 대중의 통치를 넘어서는 권력의 행사가 이루어지는 지대를 합법적으로 구성하는데, 그곳에서 공중의 응시와 독단적이고 절대적인 것은 베일에 가려지게 되었다."(20쪽)

이것은 다음 문장을 옮긴 것이다. "From the perspective of the end of the twentieth century, the paradox seems irrefutable that political regimes claiming to rule in the name of the masses - claiming, that is, to be radically democratic - construct, legimately, a terrain in which the exercise of power is out of control of the masses, veiled from public scrutiny, arbitrary and absolute."(2쪽)

요점을 간추리면, 대중에 의한 지배를 명분으로 내건 급진 민주주의적 정치제체가 정작 대중에 의해 제어되지 않는 독단적이고 절대적인 권력을 낳았다는 것이고, 돌이켜보건대 이 점이 20세기의 역설이라는 것이다. 한데, "a terrain in which the exercise of power is out of control of the masses, veiled from public scrutiny, arbitrary and absolute."라는 문장 뒷부분에서 국역본은 'arbitrary and absolute'라는 보어가 모두 'veiled from'에 걸리는 것으로 잘못 보았다. 그래서 "그곳에서 공중의 응시와 독단적이고 절대적인 것은 베일에 가려지게 되었다"는 어색한 번역이 나오게 된 것('독단적이고 절대적인 것'은 원문에서 찾을 수 없다). 'veiled from public scrutiny'는 삽입구이므로 "a terrain in which the exercise of power is out of control of the masses, arbitrary and absolute." 라고 보는 게 편하겠다. 무소불위의 권력지대에서의 권력 행사는 대중의 통제를 벗어나서 자의적이고 절대적이었다는 것. 이 '권럭지대'를 저자는 'wild zone of power'라고 부른다(국역본은 '권력의 야만지역'이라고 옮겼다). 

저자는 그러한 경향이 자유민주주의에서건 사회주의에서건 별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결국 최고 주권의 권력 체제로서 그것들은 반드시 민주주의보다 벌써 훨씬 더 - 그리고 결과적으로 상당히 나쁘게 된다." 이 또한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다. 원문은 "Either way, as regimes of supreme, sovereign power, they are always, already more than a democracy - and consequently a good deal less."(3쪽)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어느 쪽이건 간에, 최고 주권의 권력체제로서 두 체제는 모두 이미, 언제나 민주주의를 뛰어넘었고, 결과적으론 민주주의에 훨씬 못 미쳤다." 정도로 옮겨질 수 있다. 둘다 민주주의 그 이상이었고 동시에 그 이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미국과 소련의 '대중유토피아'를 비교해서 다루고 있는 만큼 러시아의 철학자들의 이름도 책에도 곧잘 등장하여 반갑다. '마마르다쉬빌리'(국역본은 '마마다쉬빌리'라고 표기했다)나 '발레리 포도로가' 같은 이름들이 그렇다. 그리스계 프랑스철학자 '카스토리아디스'의 이름도 오랜만에 볼 수 있는데, 책에는 '카스토리아스(Castoriades)'라고 오기돼 있다(23쪽). 찾아보니 벅 모스의 원서 자체에 그렇게 잘못 표기돼 있다. 카스토리아디스의 주저인 <사회의 상상적 제도1>(문예출판사, 1994)는 국내에 일부만 번역된 적이 있는데, 마저 다 번역될 수는 없는 것일까, 문득 유감스럽다. 아래는 러시아어본이다.

Корнелиус Касториадис Воображаемое установление общества L'institution imaginaire de la socie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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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7-02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rbitrary snd absolute가 문법책에 나오는 유사보어(다른 용어도 있는 것 같은데)여서 권력행사에 연결되고 veiled from public scrutiny는 분사구문 삽입으로 보면 되겠죠?

로쟈 2008-07-02 00:11   좋아요 0 | URL
제가 보기엔 그렇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7-02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영어공부를 옹골차게 하게 됩니다.

로쟈 2008-07-02 23:27   좋아요 0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