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여름방학을 맞아 볼 만한 영화들이 늘어나고 있다. 프랑스의 문제적 여성감독 카트린 브레야의 이번주 개봉작 <미스트리스>(2007)도 그 볼 만한 영화에 포함시키고 싶다(미성년자 관람불가이므로 '방학'과는 무관하군!). 원제는 '늙은 정부'. 개괄적인 소개는 이렇다.

세계일보(08. 07. 25) 치명적인 사랑의 쾌감…팜프파탈, 21세기 페미니스트로 격상

전쟁터에서 화살에 맞은 말은 의외로 더 빨리 달린다고 한다. 고통이 쾌감으로 변해 아드레날린을 분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빨리 달릴수록 화살은 더 깊게 박히고 결국 말은 죽게 된다. 죽음에 이르는 줄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이 치명적인 유혹. 비단 말뿐인가. 멈춰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만둘 수 없는 사랑은 지금 당신 곁에도 존재한다.

‘미스트리스’는 이처럼 치명적인 사랑을 이야기한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나 스테판 프리어스 감독의 ‘위험한 관계’처럼 근대 이전 유럽을 배경으로 여성 중심의 사랑을 그렸다. ‘로망스’ ‘팻걸’ 등에서 여성의 정체성을 성적 코드로 풀어내던 여성 감독 카트린 브레야가 메가폰을 잡았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작이다.

Une vieille ma?resse

1835년 파리, 프랑스 혁명 이후 사회적 혼돈을 반영하듯 상류사회에서도 온갖 스캔들이 난무한다. 사교계를 주름잡던 꽃미남 마리니(후아드 에이트 아투)는 귀족 가문의 규수 에르망갸드(록산 메스키다)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그는 스페인 출신 무희 벨리니(아시아 아르젠토)와 깊은 사이다. 둘은 10년 동안 만남과 이별을 반복해왔다. 마리니는 이 관계를 끝내기 위해 결혼을 결심했다. 결혼식을 올린 마리니와 에르망갸드는 파리를 떠나 조용한 해변으로 이사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어느날 벨리니가 이들 앞에 나타난다.

‘미스트리스’는 벨리니와 마리니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이들은 자석의 양극처럼 서로를 밀어내면서도 붙어있는 존재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며 애정없는 욕정만을 취하지만 운명처럼 질박한 인연을 끊을 수 없다. 전쟁터에 나간 말 엉덩이에 박힌 화살처럼 서로의 삶에 파고든다. 사랑의 치명적인 쾌감을 거부하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 측은하다.



정부(情婦)라는 의미의 제목에서 보듯 벨리니는 결혼 제도를 위협하는 인물, 남성의 삶을 파멸로 모는 위험한 존재다. 이런 여성을 두려워한 남성들은 이들에게 팜므파탈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따라서 남성적 시각에서 벨리니는 요부이자 마녀다. 하지만 영화는 벨리니를 옹호한다. 그녀는 남성에게 이용당하는 봉건사회의 피해자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구현하는 현대적 인물이다. 결국 영화는 고전의 팜므파탈을 현대적 페미니스트로 격상시킨 여성주의 영화다.

‘미스트리스’는 전형적인 유럽 스타일 영화다. 서사는 절제되고 묘사는 튀지 않는다. 정적인 화면과 느린 드라마도 이야기를 곱씹게 만든다. 액션영화 ‘트리플X’로 얼굴이 알려진 아시아 아르젠토는 도발적인 시선과 청순한 눈빛을 동시에 선보이며 벨리니 역을 훌륭히 소화했다. 그는 이탈리아 웨스턴의 거장 다리오 아르젠토의 딸로도 유명하다.(이성대기자)

영화는 지난주에 국내 첫시사회가 있었던 듯한데, 씨네21에서 가져온 첫 반응은 이렇다.

이 영화

1835년 왕정복고기 파리. 잘난 신사와 귀부인들이 남몰래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를 읽고 있을 무렵이다. 바람둥이 귀족 리노 마리니(후아드 에이트 아투)는 10년 동안 관계를 이어온 애인 벨리니(아시아 아르젠토)를 인생에서 잘라내고, 어리고 부유하고 정숙한 귀족 처녀 에르망갸드(록산느 메스키다)와 결혼하려 한다. 그러나 벨리니는 중얼거린다. “날 떠날 순 없을걸.” <미스트리스>의 제2장은 아주 긴 플래시백이다. 손녀사위를 둘러싼 추문을 익히 들은 플레르 후작부인이 마리니를 불러 사랑의 역사를 낱낱이 말해달라고 청하기 때문이다. 10년 전 스페인 투우사와 이탈리아 공주의 사생아라는 소문의 여인 벨리니에게 도도한 마리니는 초면에 경멸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 밤 파티에서 악마로 분장한 벨리니에게 사로잡힌 마리니는 무모한 구애를 시작하고 급기야 벨리니의 남편과 결투해 중상을 입는다. 여자는 가련한 남편을 차버리고 귀족사회는 들끓는다. 그러나 이것은 노래의 1절일 따름이다. 둘은 한때 먼 나라로 떠났고 행복하였다. 아이를 가졌고 아이를 잃었다. 울부짖고 귀를 틀어막았다. 파리로 돌아온 그들의 일상에서 사랑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시간은 점점 줄어든다. 남은 나날을 그들은 본능적인 애무로 연명해왔다. 결국 마리니는 에르망갸드와 결혼식을 올리고 파리를 떠나 완벽해 보이는 신혼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어느날 산책을 나간 바닷가 길 위에서 마리니는 벨리니와 맞닥뜨린다.(김혜리기자)

Une vieille ma?resse

100자평

오호! 통재라. 왜 제목을 <미스트리스>라고 하여, 영화의 핵심적 미학을 깎아 먹는단 말인가? <미스트리스>는 19세기 탐미적인 당디(Dandy)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바르베 도르비이’의 소설 <Une Vielle Maitresse>를 원작으로 삼아, 과격하고 야하기로 소문난 여성감독 카트린느 브레야가 영화화한 19세기 시대극으로 2007년 칸 영화제에 출품된 작품이다. (이 영화는 DB등에 <늙은 정부> 혹은 <오래된 여인>등의 이름으로 중복 등재되어 있으며, 국내 개봉 제목은 <미스트리스>이다. 작품의 성격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제목은 단연 관능적이고 퇴폐적인 느낌이 살아있는 <늙은 정부>이다.) 영화는 19세기 귀족사회를 배경으로 충동적이고 격렬한 사랑과 결국 파멸을 향해 가는 순수정념을 그리고 있다. 영화는 19세기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지극히 현대적인 인물들에 의해 섹슈얼리티가 무엇인지 정면으로 발언한다. <미스트리스>는 자주 접하기 힘든 고도의 예술성을 지닌 영화이다. 장면 하나하나의 미장센이나 감정을 끌고가는 유려하고도 절제된 편집은 모두 감탄스럽다. (특히 마네의 <올랭피아>가! 연상되는 벨리니가 등장하는 첫장면이나, 거울과 창문을 이용한 미장센을 눈여겨 보라!) 또한 캐스팅이 완벽하다. 벨리니 역할을 한 '아시아 아르젠토'의 연기는 인물과 배우를 도저히 떼어서 생각할 수 없게 만들며, 마리니 역할의 ‘후아드 에이트아투’는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여자보다 더 아름다운 선을 지닌 얼굴과 몸만으로도 영화의 주제를 150% 전달한다. 또 <팻걸>등의 전작에서 함께 했던 ‘록산느 메스키다’ 역시 냉정하고 고혹스러운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미술도 훌륭하여 소품 하나에도 당시 귀족사회의 정서(혹은 원작자의 복고주의적 태도)가 담겨있는 듯 하다. 로맨틱코미디류의 말랑말랑한 사랑이야기 좋아하는 관객에겐 비추, <색, 계>가 좋았거나 혹은 불만족스러웠던 관객이라면 간만에 나온 ‘진하고 징하고 찡한 사랑영화’를 놓치지 마시라.(황진미/ 영화평론가)

08. 07. 28.

P.S. 환경을 바꾸다 보니 자고 일어나는 시간이 들쭉날쭉하게 되었다(엉뚱한 시간에 엉뚱한 페이퍼라니!). <지젝이 만난 레닌>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믿는지 모른다'는 장을 읽다가 둘러본 몇몇 사이트에서 읽은 소개기사들이(그 중 하나는 지난 금요일에 지면에서 읽기도 했다) 영화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카트린 브레야의 전작들은 예전에 다룬 바 있다('카트린느 브레이야'라고 주로 적었다). '100자평'에도 '마네의 <올랭피아>가 연상되는 벨리니가 등장하는 첫장면'에 대한 얘기가 나오지만 마네에 대한 오마주는 그녀의 영화에서 반복적인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마네와 티치아노'(http://blog.aladin.co.kr/mramor/912039)를 참조할 수 있으며, 카트린 브레야의 영화들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은 '로망스 대 포르노'(http://blog.aladin.co.kr/mramor/800293)에서 읽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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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8-07-28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씨네큐브에서 전단을 읽었더랬죠. 가봐야죠,^^

로쟈 2008-07-28 19:57   좋아요 0 | URL
저도 동네에 들어오기를 기다려봐야겠어요...

노이에자이트 2008-07-28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835년이면 7월 혁명으로 샤를르 10세가 쫓겨나고 온건한 루이 필립이 등극하면서 7월 왕정이라고 하는데...그 전인 루이 18세와 샤를르 10세가 재위한 때를 왕정복고기라고 합니다.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이 시가전하는 장면이 1830년 7월 혁명입니다.평론가가 착각했네요.

로쟈 2008-07-28 19:57   좋아요 0 | URL
ㅎㅎ 기자가 착각했거나 소개자료의 오류로 보입니다...
 

이미 '7월의 읽을 만한 책'으로 꼽아두기도 했지만, <대한민국 상식사전 아고라>(여우와두루미, 2008)의 열풍이 심상찮은 듯싶다. 아마도 2008년의 키워드를 꼽더라도 '아고라'는 가장 강력한 후보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언론에서 '아고라'가 언급되고서야 '아고라'의 존재에 대해서 알았을 정도이고 자주 들여다보지도 못했지만 책은 단박에 사들었다. 인터넷 자유토론장으로서 아고라의 역할을 지지하고 기념하기 위해서다. 대한민국의 '상식'을 더이상 정부나 의회에 기대할 수 없는 마당에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기 위해서도 필독/필람해볼 책이다. '수익금은 시위구속자 위해 쓸 것'이라고 하니 서점에서 넘겨보지 마시고 현매하시길.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00837.html).

한겨레(08. 07. 26) 책으로 다시 지핀 ‘촛불’

책 한 권이 뜨고 있다. “17일 완성본을 받았다. 19일쯤 서점에 깔았는데, 23일인 오늘 벌써 1쇄 5천부가 다 나가 2쇄에 들어간다. 기록적이다. 책에 관한 누리꾼들 관심도 폭발적이다. 선집 등 후속작업도 준비하고 있다.” 사흘 전에 만난 그 책 기획자는 그렇게 말했다. 이쯤되면 대박이다. 여름에 올림픽이라는 ‘악재’까지 겹친 불황의 독서계를 자극할 이 책은 <대한민국 상식사전 아고라>(여우와두루미 펴냄).

촛불이 서울 중심가를 덮었던 두 달 전쯤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의 토론공간 ‘아고라’ 자유토론방 누리꾼 사이에 이런 수작들이 오갔다. “아직도 오프라인에서는 아고라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 많고 … 하루빨리 책을 냈으면 하는데 …”(한글사랑나라사랑) “기대만땅 ~~~~^^* 아고라책이라 ~~~”(촛불살앙) “**놀랠 노자군요”(쥐발에편자) “이런 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 저항의 방법은 다양하군요 …”(huraijin) “제가 생각하던 바를 현실로 옮기는 분이 계시다니”(누구세요) “여기는 지방 후진 동네라 아고라 잘 모르는 사람들 많습니다”(형형색색) “훗날 자식들에게도 산 역사의 서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책이 될 듯합니다”(비랑) “나오면 바로 털릴 준비하세요 … 몽땅 사버릴거얌 ㅎㅎㅎㅎㅎ”(스피릿) “아고라 아줌마부대도 넣어주세요 …ㅜㅜ”(약속해줘) “여기 미국인데 어떻게 받아볼 수 있을까요?”(박수진) “수고하셨습니다. 저도 아고라에 올라오는 주옥같은 글들을 모아 책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고으니)

이처럼 ‘완벽한’ 시장조사를 거친 <… 아고라>는 주문자들의 입맛에 딱 맞췄다. 경쾌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고, 비장하지만 결코 구질구질하지 않다. 구호들은 의표를 찌르고 풍자와 해학은 참신하고 쿨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대박의 이유를 파악하기 어렵다. 책의 내용과 출간이 갖는 의미까지도 아울러 제대로 짚으려면 몇 달 전부터 시작된 한국 역사상, 어쩌면 인류 역사상 초유의 ‘브로드밴드(광대역) 민주주의’를 선취한 기념비적인 사태를 되짚어봐야 한다.

5월 아고라에 이런 글이 떴다. “100년의 어둠에서 겨우 꽃피우려던 10년의 민주주의가 단 3개월 만에 짓이겨지는 모습에 눈물 흘렸소. 허허, 그러나 이젠 눈물을 거두려오. 그 짓이겨진 꽃은 아고리언 손에 하나하나 나뉘어 이젠 대한민국을 온통 꽃밭으로 만들고 있잖소. 당신들. 고맙소.”(꼬마와장군)

그 전인 4월6일. 이명박 대통령 취임 46일 만인 그날 아고라에 고등학생 누리꾼 ‘안단테’가 ‘【일천만명 서명】 국회에 이명박 대통령 탄핵을 요구합니다’를 띄웠다.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난 3개월 동안 이명박 대통령은 국정에 성의를 다하지 않았습니다. 대운하, 몰입식 교육, 보험 민영화, 고소영, 물가정책 …. 국민과 국가와 자존심을 갖다 버리신 대통령님 이런 대통령을 우리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4월15일 교육과학부가 ‘학교 자율화 조치’라는 이름의 교육시장화를 강행했다. 사흘 뒤인 18일 미국산 쇠고기를 전면 개방한 한-미 쇠고기협상이 마무리됐다. 19일 4·19 묘지 앞에서 학교 자율화 반대 촛불문화제가 벌어졌다. 26일 서울 청계천 소라기둥 앞에서 집회가 열렸고, 28일 촛불집회를 하자는 제안이 떴다. 대통령 탄핵서명 개시 26일 만인 5월2일 서명자 50만을 돌파했다. 바로 이날 마침내 청계광장 촛불집회가 중·고등학생들 선도로 시작됐다. ‘미친 소, 미친 교육 반대’ 팻말이 뜨고 ‘되고송’이 떴다. “0교시 하면 잠 못자면 되고, 쇠고기 수입하면 광우병 걸리면 되고, 죽으면 대운하에 뿌려지면 되고~”

산업사회적 상상력을 해체하는 새 세대의 역동성이 화두로 떠오르고, 세상을 편집해온 언론의 서열이 네티즌의 손으로 재편되기 시작”했음을 알린 전대미문의 대사건 촛불시위의 출현은 아고라의 등장과 표리일체를 이뤘다. 그것은 또한 “우리 사회를 이끄는 힘이 순식간에 대중에서 다중으로, 공간 공동체에서 시간 공동체로, 정치에서 문화로, 지도와 계몽에서 집단지성으로 이동”(김형수)했음을 의미했다. 열흘 뒤인 5월13일 탄핵 서명자가 130만을 넘었다.

14일 경찰이 대통령과 광우병에 관한 ‘인터넷 괴담’을 퍼뜨렸다는 누리꾼들 신원을 확인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날 경찰청 인터넷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이 “내가 안단테다. 잡아가라.” “저도 잡아가주세요.” 등의 1만5천여 ‘자수’ 게시물로 뒤덮였다. 그때 한 누리꾼(peladona)은 “안단테 변호사비, 우리가 대주자”며 이런 계산을 올렸다. “서명인원 130만 × 100원= 1억3천만원.” 같은 셈법으로, 순식간에 수백 수천명이 접속하고 짧은 시간에 수백만명이 찾는 토론방 누리꾼들이 주목한 책이라면 뜰 만하지 않은가. 집단토론을 통해 자발적 실천지침을 도출한 아고라는 20년 전 “6월항쟁의 국민운동본부 같은 실질적 상징적 운동의 중심”이었다. 5월24일 거리로 진출한 시위는 이후 참여자가 연일 수천~수만을 헤아리다 수십만~일백만명이 모인 6월10일, 7월5일을 정점으로 경찰의 원천봉쇄 속에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 아고라>가 겨냥하는 것은 두 가지다. 먼저 집단토론과 집단실천으로 이어지는 이 모든 과정의 진수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순식간에 페이지가 넘어가 버리는 초스피드의 사이버 공간에선 사태의 전모를 파악하기 어렵고 인터넷 접근이 원활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짐작할 수도 없다. 그런 한계를 인쇄매체를 통해 돌파하자는 것이다. 책에 집약된 아고라를 통해 브로드밴드 직접민주주의, 촛불혁명을 언제든 되살리고 추체험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 궁극의 목표는 바로 촛불혁명의 완수다. ‘촛불의 추억’은 아직 섣부르다. 촛불은 꺼지지 않고 원천봉쇄 완력 앞에 웅크리고 있을 뿐이라는 게 기획자들 생각이다. 거기엔 드물게 한국인들이 선두에 선 이 장대한 인류사적 실험이 정치적 탐욕의 희생물이 되도록 내버려두진 않겠다는 기백이 스며 있다.(한승동 선임기자)

‘아고라 폐인’ 채수범·나명수씨 “수익금은 시위구속자 위해 쓸 것”

“책 정가의 10%를 인세로 받게 돼 있는데, 사진값 원고료 등 제반 출판비용을 충당하고 남는 돈은 불법 연행, 불법 구금, 불법 구속된 사람들을 변호하고 바른 교육과 바른 언론을 지원하는 일에 쓰겠다.” 책을 만들자고 처음 제안한 사람은 ‘한글사랑나라사랑’이란 닉네임을 단 채수범(37·사진 오른쪽)씨. 부산 출신으로 외국계 건설회사에 다녔고, 한때 <딴지일보>에서 활약하기도 했던 토목기사 채씨는 “올해 안에 한방에 끝장내고 싶었다”고 했다. “추석 때 고향집에 내려갈 때 다들 사 갖고 가서 두고 왔으면 좋겠다. 나이 드신 분들은 인터넷 접속도 할 줄 모르고 해서 그분들이 처음 접하는 매체가 조·중·동이기 십상이다.”

책 출판을 위해 모인 임시 조직 아고라 폐인의 또다른 유력 멤버로, 채씨가 ‘형님’으로 모시는 닉네임 ‘권태로운창’은 원주 출신 나명수(47·왼쪽)씨. “아고라는 금방 페이지가 넘어가버리면 사람들이 제대로 접속도 해보기 전에 쌍방향 즉흥성, 창의성 뛰어난 그 좋은 내용들이 사라져버린다. 인쇄매체를 활용해 온라인의 장점을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언제든 다시 꺼내 살펴볼 수 있고 인터넷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는 사람들, 아고라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아고라의 진수를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5월12일께야 아고라에 참여했다는 속독·논술학원 원장 나씨는 “학원 선생님들한테서 아고라 얘길 들었고, 다음에 가입했다. 그 전엔 인터넷 토론을 해본 적도 없다. 아고라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다”고 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이 아고라의 대표성을 갖고 있는 건 절대 아니라면서, 다만 여론 주도층은 있기 마련이고 거기엔 지신들도 속한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책 만드는 일엔 10여명이 참여했고 그중에서도 간사 1명을 포함해 5명 정도가 주도했다. 수록 글 선정 기준은 “창의적 발상, 기성관념으론 안 되는 참신함과 생산성을 담은 것, 시대문제를 파악하고 실천으로 이어간 글”로 잡았다. 기획부터 출간까지 두 달 정도 걸렸다. 또 하나의 원칙은 “있는 그대로 쌩으로 보여준다”는 것. 간간이 나오는 해설성 안내글들은 채씨 등이 썼다. 원문을 그대로 살리느라 오타도 그냥 뒀다.

촛불 동력이 떨어졌다는 얘기들에 대해 나씨는 “동력 자체가 쇠한 것은 아니다. 잠재돼 있고 행동으로 표출될 기회를 노리고 있을 뿐이다. 연대의식과 의사표현 능력은 더 강해졌다”고 했다. 동력이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경찰의 원천봉쇄 때문이라며, “원천봉쇄하겠다고 나서는 건 그만큼 저들의 위기의식이 강하다는 걸 말해준다”고 덧붙였다. 채씨는 “동력이 떨어졌다는 식의 보도 자체에 문제가 있다”며 줄줄이 터져나올 다음 사건들이 기다리며 쉬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이들은 아고라 최대의 힘은 정치인이나 언론이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만든 것이라고 했다. 과거 비리나 약속 위반들이 모두 폭로되고 지금의 태도 변화와 비교되는 현실에서 그걸 두려워하는 자는 부패한 자라며, 심 아무개, 이 아무개 등 정권 실세들의 실명을 거론했다. “우리가 반정부 세력인 것이 아니라 저들이 반국민 집단”이라는 말도 했다.

정부가 추진 중인 정보보호 종합대책, 사이버 모욕죄 등에 대해선 “원천적으로 눈과 귀를 막겠다는 것”이라며, 과도한 통제로 인터넷 후진국이라 손가락질당한 중국 같은 처지로 퇴보하는 짓이라고 비난했다. 이들은 탄압이 계속되면 나라 밖에 서브를 구축하는 ‘아고라 망명정부’까지 구상하고 있다고 했다.

08. 0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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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주쯤 지내던 방에서 다른 방으로 이사를 했다. 그래봐야 5미터쯤 떨어진 옆방일 뿐이지만 창문이 있는 보다 널찍한 방이다. 그래도 비유하면 13평 아파트에서 20평 아파트로 옮겨온 듯한 기분이 든다. 무엇보다도 창문으로 빛이 드는 덕분에 '어둠의 시절'에서 벗어난 듯하다(조명을 켜지 않아도 노트북의 스크린을 볼 수 있다). 주차장쪽이어서 조용하기도 하고. 몇 가지 짐을 정리하고 나니까 얼핏 떠오르는 시가 보들레르의 'Anywhere Out of the World'이다. <파리의 우울>에 실려 있는데, 기억에는 제목 자체가 영어였던 것 같기도 하다. 보들레르의 책들을 지금 안 갖고 있어서 여기저기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이 세상밖이라면 어느 곳이라도'로 옮겨진 듯하다. 대략 이 산문시의 첫 대목은 이런 식이다.

인생은 환자들이 제가끔 침대를 바꿔눕고 싶어하는 욕망에 들린 하나의 병원이다. 어떤 환자는 난로 앞에 누워 괴로워하고 싶어하는가 하면, 어떤 환자는 창문 옆자리라면 회복이 되리라고 믿고 있다. 내게는 내가 현재 자리하고 있는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라면 항상 만사가 좋으리라고 생각된다. 이 자리를 바꾸는 문제가 바로 내가 나의 영혼과 끊임없이 논쟁하는 문제 중의 하나이다.  

나 또한 끊임없이 논쟁하는 건 아니지만 가끔 자리를 옮길 때면 이 구절을 떠올리게 된다. 찾아보니 '노마디즘에 대하여'(http://blog.aladin.co.kr/mramor/877801)란 글에서 한번 인용한 적이 있다(번역은 좀 다르군). 보들레르의 '자리를 바꾸는 문제'와 키에르케고르의 '스테이크의 품질' 문제에 대해서 예전에 코멘트를 달아놓은 바도 있는데 당장은 옮겨놓을 수 없어서 아쉽다. 대신에 보들레르 시의 영역만을 옮겨놓는다.   

 

This life is a hospital where every patient is possessed with the desire to change beds; one man would like to suffer in front of the stove, and another believes that he would recover his health beside the window.
It always seems to me that I should feel well in the place where I am not, and this question of removal is one which I discuss incessantly with my soul.

'Tell me, my soul, poor chilled soul, what do you think of going to live in Lisbon? It must be warm there, and there you would invigorate yourself like a lizard. This city is on the sea-shore; they say that it is built of marble and that the people there have such a hatred of vegetation that they uproot all the trees. There you have a landscape that corresponds to your taste! a landscape made of light and mineral, and liquid to reflect them!'
My soul does not reply.
'Since you are so fond of stillness, coupled with the show of movement, would you like to settle in Holland, that beatifying country? Perhaps you would find some diversion in that land whose image you have so often admired in the art galleries. What do you think of Rotterdam, you who love forests of masts, and ships moored at the foot of houses?'
My soul remains silent.
'Perhaps Batavia attracts you more? There we should find, amongst other things, the spirit of Europe married to tropical beauty.'
Not a word. Could my soul be dead?
'Is it then that you have reached such a degree of lethargy that you acquiesce in your sickness? If so, let us flee to lands that are analogues of death. I see how it is, poor soul! We shall pack our trunks for Tornio. Let us go farther still to the extreme end of the Baltic; or farther still from life, if that is possible; let us settle at the Pole. There the sun only grazes the earth obliquely, and the slow alternation of light and darkness suppresses variety and
increases monotony, that half-nothingness. There we shall be able to take long baths of darkness, while for our amusement the aurora borealis shall send us its rose-coloured rays that are like the reflection of Hell's own fireworks!'
At last my soul explodes, and wisely cries out to me: 'No matter where! No matter where! As long as it's out of the world!'

08. 0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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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07-28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아...인용한 시가 멋지군요. 뭔 글들을 저렇게 잘 쓰시는지...그러니까 이름을 남겼겎지만

로쟈 2008-07-28 18:50   좋아요 0 | URL
네, 좀 이상한 멘트가 됩니다. 보들레르더러 '시를 잘 쓴다'고 평하면.^^
 

미국의 대표적인 여성이론가 주디스 버틀러와 가야트리 스피박의 대담집이 출간됐다.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산책자, 2008). 중량급 학자들의 대담이어서 눈길을 끈다. 주제도 페미니즘이나 탈식민주의가 아니라 '민족-국가(네이션-스테이트)'다. 내주에 개최되는 세계철학대회에 버틀러가 못 오게 된 걸로 아는데, 이 대담집이라도 출간되어 다행스럽다.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8. 07. 26) 국가, 극복할 것인가 지켜낼 것인가

주디스 버틀러(사진 위)와 가야트리 스피박(아래)은 페미니즘 이론 영역에서 가장 왕성한 지적 생산력을 보여주는 여성 학자들이다. 버틀러가 동성애자로서 퀴어이론의 창시자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면, 스피박은 인도 출신으로서 탈식민주의 이론의 대모로 통한다. 두 사람의 학문활동을 관찰하면, 페미니즘 이론의 최전선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론적 지반에 다소 차이가 있는 이 두 사람은 페미니즘 담론 내부의 경합적 관계를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는 이 출중한 학자들의 대담을 엮은 책이다. 열다섯 살 아래인 후배 버틀러가 먼저 발제 성격의 문제제기를 한 뒤 두 사람이 토론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 사람의 대담은 2006년 5월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어바인 캠퍼스의 비교문학과에서 ‘전지구적 국가, 전지구적 상태’를 주제로 삼아 연 학회에서 이루어졌다. 제목에서 가늠할 수 있듯이, 이 대담의 내용은 페미니즘 이론 자체를 다룬 것이 아니라, ‘지구화 시대의 국가’라는 인류적 차원의 문제를 페미니스트적 감성으로 포착하고 있다. 특히 이 대담에서 논의의 초점이 되는 것은 흔히 국민국가 또는 민족국가로 번역되는 네이션 스테이트(nation-state) 문제다. 여기서 네이션(국민·민족)이 문제인 것은 어떤 기준에 따라 특정 집단을 네이션으로 포섭하고 그 기준 밖의 사람들을 배제하는 메커니즘이 이 네이션 체제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대담의 주제가 된 것은 그 시점에서 벌어진 사태와 관련이 있다. 2006년 4월 미국 전역에서 ‘미등록 이민자’ 문제가 정치적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른바 ‘불법 체류자’들뿐만 아니라 이들을 돕거나 고용하는 사람들까지 처벌하는 법안이 발의된 것이다. 이 법안을 규탄하는 시위가 곳곳에서 벌어졌고, 캘리포니아에서는 수십만명의 라틴계 이민자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존재 자체가 불법인 이민자들이 ‘자유롭게’ 모여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는 사실, 더 중요하게는 이들이 미국 국가를 스페인어로 번역해 불렀다는 사실에 버틀러는 주목한다. 그는 이런 상황을 ‘수행적 모순’이라는 개념으로 해석한다. 자신들에게 추방·배제·박탈을 안겨준 나라의 국가를 자신들의 언어로 노래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통상적인 좌파적 관념이라면, 이런 상황을 국가라는 포획장치에 자발적으로 말려들어간 것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버틀러는 그런 통념과는 다른 적극적 이해를 모색한다. 네이션 스테이트의 틀에 균열을 냄으로써 그 틀을 극복할 전망을 언뜻 보여준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수행적 모순이야말로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창조의 공간을 열어젖힙니다.” 버틀러는 한나 아렌트의 주장을 빌려, 자유는 자유의 요구, 자유의 수행 자체에서 이미 시작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래를 부름으로써 거리가 자유로운 집회 현장으로 재구성된다는 점입니다. 노래를 부르는 행동은 자유의 표현이자 권리를 향한 호소입니다.” 자신들을 추방하는 나라의 국가를 자신들의 말로 부름으로써 그 국가의 의미를 바꿔버리는 이 모순적 사태야말로 어떤 전망을 보여준다는 것이 버틀러의 주장이다. “그 노래는 언어적 다수집단에 대한 비판이고, 언어적 다수집단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비판이며, 민족을 단일한 개념으로 보는 것과는 다른 다문화주의의 한 방식입니다.”

이때 버틀러가 국가 그 자체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대담 내내 버틀러는 국가를 곧 ‘네이션 스테이트’로 인식한다. 국가란 근본적으로 국민/비국민을 나누는 배제와 분리를 존재 방식으로 삼고 있다는 발상이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그 국가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가 버틀러의 고민이자 질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피박은 조금 다른 목소리를 낸다. 스피박이 보기에 국가 그 자체를 부정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고삐 풀린 발호로부터 구성원을 보호하는 장치로 국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세계시민주의는 어찌 보면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어울리는 이념일 수 있다. “국가는 우리를 위해 유용하게 쓰일 수 있기에 우리가 지켜내야 하는 최소한의 추상적 구조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는 재분배의 도구가 돼야 합니다.” 자본주의적 착취·수탈·불평등을 막아내고 교정하는 기능을 국가가 수행할 수 있으며, 그런 기능을 수행하도록 국가를 재발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버틀러가 국가의 박탈·추방 성격에 초점을 맞춘다면, 스피박은 국가의 저항 거점 성격을 강조하는 셈이다. 대담 말미에 버틀러는 “역사를 만들어가는 동력으로서 자기창조”에 관해, 다시 말해 혁명에 관해 이야기한다. “만약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혁명을 일으키려 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고통받았기 때문이고, 비판의 언어를 만들어내고 서로 뭉쳤기 때문이며, 역사와 분석에 기반해 연대를 구축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스피박도 이 설명에 동의할 것이다.(고명섭기자)

08. 07. 26.

P.S. '민족국가', 혹은 '국민국가'란 주제와 관련하여 같이 읽어볼 만한 책은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공화국으로>(도서출판b, 2007)와 니시카와 나가오의 <국경을 넘는 방법>(일조각, 2006)이다. 두 사람 모두 '네이션' 문제에 골몰해온 일본의 비평가이고 학자이다. 안 그래도 <세계공화국으로>는 다시 손에 들었는데, 니시카와의 책도 조만간 대출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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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7-26 23:14   좋아요 0 | URL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을 무시하면 바보취급하지말라! 우리도 천황폐하의 신민이다. 이렇게 무시해도 되느냐!하고 한마디 하면 상대가 조용해졌다는데,스페인어로 미국국가를 부르는 것도 그와 비슷한 것 같네요.억압하는 사람들의 논리로 오히려 공격하는 지혜...다소 서글프기는 하지요.

로쟈 2008-07-27 16:30   좋아요 0 | URL
다소 서글프면서도 흥미로운 문제입니다.^^;
 

당장은 '놈놈놈'도 볼 형편이 안되지만 여건만 된다면 챙겨보고 싶은 영화 두 편은 두 대중가수에 관한 것이다. 존 레넌과 밥 딜런. 더 잊어먹기 전에 일단 기사라도 챙겨놓는다. 시사인에서 읽은 리뷰기사들이다(한겨레의 기사는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00962.html 참조).    

시사인(08. 07. 22) 누구나 아는, 아무도 몰랐던 존 레넌

누군가를 아주 잘 안다고 착각할 때가 있다. 그 ‘누군가’는 절친한 지인일 수도, 유명한 공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막상 ‘그는 어떤 사람인가’, 대답이라도 내놓을라치면 그만 말문이 막히고 더러는 숨까지 턱, 막혀버리기 일쑤다. 잘.안.다. 고작 세 음절로 확언하기에는 인간이라는 회로가 그리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흔해빠진 질문 앞에서 머뭇거리며 일평생 제 존재의 이유 하나 제대로 간파해내기도 버거운 인간이다. 그러니 하물며 남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으려면 몇 곱절은 더 치밀하고 광범위한 근거 자료가 필요할 터이다. 가령 존 레넌 같은 인간에 대해 아는 척할 때는 말이다.



<존 레논 컨피덴셜>은 우리가 아주 잘 안다고 착각해온 어느 팝 스타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그런데 영화가 담아낸 존 레넌은 누구나 잘 아는 존 레넌이 아니다. 아무도 모르는 존 레넌이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언젠가 어렴풋이 듣긴 했는데 그 누구도 제대로 알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그의 인생 후반전을 다룬다. 특히 비틀스 이후 존 레넌, 오노 요코를 만난 이후 존 레넌의 삶에 집중한다. 당대 최고 팝스타 존 레넌이 왜 별안간 혁명을 노래하게 되었는지, 달콤한 사랑 노래를 부르다 말고 왜 갑자기 민중에게 권력을 돌려주라며 시비걸게 되었는지 밝혀내는 것이다.

제작진은 “존 레넌 일생의 진심이 담긴 사회활동이 사람들에게 잊혀가는 게 안타까워서”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되었노라고 말한다.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던 이가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평화를 알리려 했던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들려주려고 감독 두 명이 달라붙어 찾아낸 당시 자료 중에는, 들끓는 베트남 전쟁 반대여론에 맞서 누구처럼 공안정국을 조성하려 애쓴 닉슨 대통령의 ‘특별 담화’도 있다. “정치 활동에 참여하는 연예인은 감당하기 힘든 희생을 치르게 될 것이다”라고 엄포를 놓는 그의 모습은 뇌 용량 2MB짜리 대통령을 우리만 가진 게 아니었구나, 안도(?)하게 만드는 뜻밖의 효과도 있다. 그때 존 레넌은 물러서지 않았다. 사회 불안을 선동하는 ‘배후 세력’으로, 워싱턴에 모인 순수한 촛불 시민(세상에! 그들도 촛불을 들었더라)을 반미·반정부 투쟁으로 이끈 ‘전문 시위꾼’으로 남아 끝까지 저항하는 모습이 이 97분짜리 다큐멘터리에 소상히 담겨 있다.



존 레넌과 닉슨 정부의 ‘역사적 대결’
<존 레논 컨피덴셜>의 원제는 <The U.S vs. John Lennon>, 즉 ‘미국 대 존 레넌’이다. 미국에 맞서, 부당한 권력에 맞서, 노래와 행동으로 저항한 아티스트와 그를 두려워하고 미행하며 도청하는 걸로 성이 안 차 결국 제거할 계획까지 세운 닉슨 정부. 이 역사적인 대결의 거대한 실체를 가볍게 종주해내는 이 늠름한 다큐멘터리는, 존 레넌이 대체 어떤 인간인지 자신 있게 말하기 위해 남보다 몇 곱절은 더 치밀하고 광범위한 근거 자료를 확보했다. 존 레넌의 연인 오노 요코의 회상에서 미국의 대표 진보 지식인 노엄 촘스키의 증언, 존 레넌을 미행한 당시 FBI 요원의 자백까지. 물경 수십명에 달하는 관련자 육성 인터뷰와 흥미진진한 미공개 동영상 자료가 뒷받침된 덕에, 단순한 인물 다큐의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어 그가 살다 간 한 시대를 통째로 증언하는 생생한 목격담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

세상에는 세 가지 영화가 있다. ‘감탄’하는 영화, ‘감동’받는 영화, 그리고 ‘감사’하게 만드는 영화. <존 레논 컨피덴셜>은 존 레넌의 멋진 인생에 ‘감탄’하고 그의 용감한 노래에 ‘감동’받다가 결국 이 소중한 다큐멘터리를 완성한 감독에게 ‘감사’까지 하게 만드는 영화다. 충격과 감격을 동시에 선사하는 근사한 다큐멘터리다. 물론, 존 레넌이 워낙 근사한 삶을 살다 간 덕분이다.(김세윤_영화 에세이스트)

시사인(08. 06. 03) 밥 딜런 그 인간, 참 복잡한 인물이네

he는 her가 되고 her는 here가 되었다가 다시 there로 변한다. <아임 낫 데어>의 제목 ‘I’m not there’가 스크린에 등장하는 방식이다. 알파벳을 하나씩 늘려가면서 there라는 단어에 도달하는 첫 시작은 앞으로 영화가 어떻게 전개될지 미리 짐작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그’의 인생을 그려내기 위해 ‘그녀’의 연기에 기대는 영화이면서, 지금 ‘이곳’에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영화인 동시에 그때 ‘그곳’의 혼돈을 증언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알파벳을 하나씩 늘려가면서 there에 도달하는 시작처럼, 캐릭터를 하나씩 늘려가면서 결국 밥 딜런이라는 인간의 핵심에 이르는 마지막. 엔드 크레딧이 다 올라간 뒤에도 텅 빈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쉽게 자리를 뜰 수 없게 만든다.

미국 포크 가수 밥 딜런의 인생을 재구성한 영화 <아임 낫 데어>는 배우 6명이 캐릭터 7개를 연기한다. 각각 다른 인물로 설정된 그들이 사실 모두 같은 인물 밥 딜런의 어느 한 시기를 대변하는데,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배우 케이트 블란쳇은 1965년 뉴 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어쿠스틱 기타 대신 일렉트릭 기타를 들고 무대에 올라 논란을 일으킨 밥 딜런을 ‘주드’라는 이름으로 연기하는 식이다. 크리스천 베일은 그때 일렉트릭 기타를 들고 무대에 오르기 전, 시대의 대변자로 사랑받던 전성기의 밥 딜런을 ‘잭’이라는 인물로 연기하다가 훗날 종교에 귀의해 가스펠 음악을 부르던 밥 딜런을 ‘존’이라는 이름으로 재현한다. 여기에 벤 위쇼·리처드 기어·히스 레저 같은 유명 배우가 합세해 저마다 자기 몫으로 주어진 밥 딜런의 인생, 밥 딜런의 사상, 밥 딜런의 방황과 밥 딜런의 욕망을 감당한다.



<벨벳 골드마인>(1997년)이라는 음악 영화로 여러 사람을 흥분시킨 감독 토드 헤인스는 왜 이리도 복잡한 방식으로 밥 딜런을 그려냈을까. 매우 싱거운 대답이 되겠지만, 밥 딜런이 그만큼 복잡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밥 딜런이 직접 쓴 자서전을 포함해 4년 동안 그에 관한 거의 모든 책을 읽었다고 말한다. 지루한 독서 끝에 얻은 결론. “‘실제 딜런’ 혹은 ‘진짜 딜런’을 찾으려던 전기 작가들이 모두 실패했으며 픽션의 형식을 통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진실을 전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라는 거다.



‘시대의 이면’까지 들추어낸 역작

결국 직접 밥 딜런 한번도 만나보지 않고 만든 밥 딜런 영화가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밥 딜런 영화로 칭송받는 역설. <아임 낫 데어>는 ‘사실’에 충실한다고 해서 반드시 ‘진실’에 도달하는 건 아니라는, 이 바닥의 얄궂은 아이러니를 새삼 일깨운다. 때로 진실은 이렇게 완벽한 허구에서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좋은 전기 영화는 인간의 이면을 드러낸다. 하지만 ‘더 좋은’ 전기 영화는 그 인간이 살다간 시대의 이면까지 함께 들추어낸다. 11년 전 글램 록에 열광하던 1970년대를 느끼게(‘생각하게’가 아니라!) 만든 <벨벳 골드마인>이 그랬듯 토드 헤인스 감독은 이번에도 ‘더 좋은’ 전기 영화를 만들었다. <아임 낫 데어>를 보고 있으면 말로만 듣던 1960년대의 혼돈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글로만 읽던 ‘반문화’의 위력을 느끼게 된다. 늘 새로운 아티스트를 갈망하면서 정작 그 아티스트가 새로워지는 것에는 야박한 대중과, 가차없이 세상을 공격하면서 정작 세상이 자신을 공격하는 건 참지 못하는 아티스트 사이. 그때도 지금처럼 쉽게 좁혀지지 않는 틈이 존재함을 깨닫게 만든다.(김세윤_영화 에세이스트)

08. 0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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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7-25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임 낫 데어>는 기대가 너무 컸었는지, 보는 내내 어떤 '과도함'이 느껴져서 고개를 몇 번 갸우뚱거렸습니다. Todd Haynes의 전작들을 떠올려보면 이는 사실 그리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요.^^ 사실에 충실하다고 해서 반드시 진실에 도달하는 것은 분명 아니겠지만, 여러 면모들의 나열과 알레고리화 작업 그 자체가 어떤 '진실'을 전해주는 것이 아님 역시 분명한 것 같습니다. 존 레논에 대한 영화가 기대되네요.

로쟈 2008-07-26 00:35   좋아요 0 | URL
이런 쪽 영화들은 꼭 챙겨보시겠군요.^^

클리오 2008-07-25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 레논의 영화는 아주 많이 보고 싶은데, 다큐멘터리라 어떻게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지 모르겠네요.. 더운 여름 잘 지내시죠? ^^

로쟈 2008-07-26 00:36   좋아요 0 | URL
오늘도 비가 와서 더운 건 모르겠습니다. 별로 잘 지내지는 못하구요.^^;

2008-07-26 15: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7-26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