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0일은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푸슈킨(1799-1837)의 기일이(었)다. 구력으로는 1월 29일이지만 신력으로 환산하면 2월 10일이고 공식적인 기념행사는 이날 행해진다. 푸슈킨에 대해서는 예전에 몇 차례 다룬 바 있고 새로 무얼 쓸 형편은 아니어서 관련자료나 검색해보다가 옥사나 체르카소바의 애니메이션 <당신의 푸슈킨>(1999)을 발견했다(http://www.youtube.com/watch?v=WZB6oQVZMrM).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된 듯한 9분짜리 애니메이션이다. 간단한 설명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시인과 관련한 자신에 이야기를 늘어놓는데 시인의 전기적 에피소드들이 거기에 결합되어 그려진다고. 더불어 나탈리야 본다르추크(<전쟁과 평화>를 찍은 세르게이 본다르추크의 딸이다)의 영화 <푸슈킨. 마지막 결투>(2006)도 눈에 띈다(예고편은 http://www.youtube.com/watch?v=0VysCTzuBJA). 영화의 스틸사진 몇 장을 옮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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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사진은 단테스와의 결투에서 복부에 총상을 입고 쓰러지는 푸슈킨의 모습이다. 그리고 아래는 아내 나탈리야 곤차로바와 함께 한 푸슈킨. 두 사람은 1831년 2월 18일에 결혼했으며 둘 사이엔 2남 2녀가 있었다.

바실리 곤차로프 감독의 <푸슈킨의 삶과 죽음>(1910)은 이번에 발견한 '희귀자료'다(http://www.youtube.com/watch?v=8gbVw1yk3gA). 시인의 전기를 주요 에피소드를 따라가면서 요약하고 있다...

08. 02. 11. 

 

 

 

 

국내에는 두 종의 작품 선집이 출간돼 있지만 소개된 푸슈킨의 전기로는 구드룬 치글러의 <푸슈킨>(한길사, 1999)이 거의 유일하다. 쯔베또바의 <푸슈킨>(건국대출판부, 1997)은 그의 삶과 문학세계에 대한 간결한 소개이다. 알라딘에서 구할 수 있는 영어본 전기로는 비뇬(Binyon)과 드루주니코프(Druzhnikov)의 것이 있다. 러시아문학 연구자들이나 애호가들에게 추천할 만한 필독서에는 "The Pushkin Handbook'(2006)이 있다. '푸슈킨학'의 현재를 가늠해볼 수 있는 책이다...

Анри Труайя Александр Пушкин PouchkineЛеонид Гроссман 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Пушкин. Биография

참고로, 내가 갖고 있는 전기 가운데 가장 두툼한 책은 저명한 망명 저술가 앙리 트루아야(Henri Troyat)의 <푸슈킨>이다(국내에는 그의 <고리키>가 번역돼 있다). 원래 불어본 저작을 러시아어로 옮긴 것인데 무려 1056쪽 분량이다(영역본은 발췌본이다). 레오니드 그로스만(1888-1965)의 <푸슈킨>은 가장 대표적인 전기 중 하나인데 소비에트 시절 시인의 서거 100주기를 기념하여 쓰여졌다. 분량은 480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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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1 17: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2-11 19:59   좋아요 0 | URL
애니매이션이라고도 적었는데요.^^ 새해 복많이 받으시길...
 

이번주 시사인에 실린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941). 그러고 보면 지면에 쓰는 서평/리뷰도 꽤 분량이 된다(알라딘의 '마이리뷰' 편수로 잡히지 않을 따름이다). 지난주 마감일에 분치기로 쓴 글이라 지면기사에는 탈자까지 있어서 온라인기사에서 바로잡았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론 레핀과 페로프의 그림 두 점이 나란히 실린 것이 만족스럽다. 이 그림들을 소개하는 것이 리뷰의 원래 목적이었으니까.

시사인(08. 01. 07) 격렬한 삶과 희망을 담은 그림에 취하다

“러시아에도 미술이 있어?” <러시아 미술사> 저자 이진숙씨가 러시아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보인 일치된 반응이었다고 한다. 러시아에 발레와 음악은 있지만(곧 볼쇼이 발레와 차이코프스키는 있지만), 어인 미술인가라는 반응이었겠다. 이번에 나온 <러시아 미술사>는 저자가 러시아에서 러시아 그림들을 보고 받은 ‘충격’을 적어놓은 보고서이자, 러시아 미술에 흠뻑 취해 늘어놓은 취중록(醉中錄)이다.

흔히 러시아라는 나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하는 시구는 도스토예프스키와 동시대 시인 츄체프의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인데, 저자가 러시아 미술 세계에 대한 길잡이로 인용하고 있는 것은 민속학자 르보프의 말이다. “우리 러시아인들 사이에는 격렬한 삶이 있다.” 어째서 격렬한가? 러시아 역사 자체가 격렬했기 때문이다. 이 ‘격렬한 삶’과 무관한 미술, 오직 미술만을 위한 미술은 러시아 미술이 아니었다.

저자는 러시아 중세의 이콘화(종교·신화 및 그 밖의 관념 체계상 어떤 특정한 의의를 지니고 제작된 미술 양식)에서부터, 소비에트 시기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사회주의 이후의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미술사 전체를 여섯 장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이 중 러시아 미술만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역시 이콘화와 19세기 이동파, 그리고 20세기 초반의 아방가르드 등이 아닌가 싶은데, 개인적으로는 특히 19세기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건 이 그림들의 일부가 최근 몇몇 아방가르드 작품과 더불어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에서 전시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동파’란 민중에게 예술작품을 직접 감상할 기회를 주기 위해 여러 도시를 옮겨다니며 전시회를 열고자 했던 유파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동파 화가들은 러시아 미술의 인텔리겐치아였다고 할 수 있다. 이동파의 가장 대표 화가는 요즘 국내에서도 어느 정도 지명도를 얻고 있는 일리야 레핀이다. ‘볼가 강의 배를 끄는 인부들’(1873)은 그의 대표작으로, 배를 끄는 인물들의 절망과 다양한 표정을 포착한 이 그림은 러시아 미술사의 기념비적 작품이다(<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에는 이 그림의 에스키스(초벌 그림) 하나가 전시되어 있다).



이 그림과 함께 개인적으로 떠오르는 그림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초상’(1872)으로도 유명한 화가 바실리 페로프의 ‘트로이카’(1866)이다. 몇 년 전 모스크바의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서 오랫동안 걸음을 멈추게 한 그림인데, 추운 겨울날 물동이를 나르는 세 아이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들의 팍팍한 삶이 한눈에 들어오지만 표정은 의외로 어둡지 않다. 저자는 이 그림에 대해서 “지금 그들은 행복하지는 않지만 완전히 절망에 빠진 것은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절망 속에서도 어린 소년 같은 순수한 마음과 러시아적인 어떤 것에서 끊임없이 희망을 부여했듯이 말이다”라고 적었다. 

그러한 희망은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직접 영감을 받아 그렸다는 니콜라이 야로센코의 ‘삶은 어디에나’(1888)에서도 읽을 수 있다. 죄수 호송 열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잠시 정차한 사이에 창살 너머로 비둘기들이 모이를 먹는 걸 보고 있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비록 러시아 미술이 이 몇몇 그림만으로 포괄될 수는 없지만 러시아 미술의 메시지만은 확인 가능하다. 그것은 삶의 고통과 분노, 비애와 절망에 대한 연민이면서 그럼에도 끝까지 버릴 수 없는 희망에 대한 송가이다. 
 
참고로, 국내에는 러시아 미술사를 통시적으로 다룬 조토프의 <러시아 미술사>(1996, 동문선), 아방가르드 미술사를 담은 캐밀러 그레이의 <위대한 실험>(2001, 시공사), 그리고 최초로 국내 필자가 쓴 현장감 있는 러시아 미술관 안내서인 이주헌의 <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 미술>(2006, 학고재)이 출간돼 있다. 이진숙의 책은 이 모두를 종합한 가장 이상적인, 러시아 미술사 입문서이면서 동시에 러시아 미술로의 뿌리치기 어려운 초대장이다.

08. 01. 11.

P.S. 양질의 화보들만으로도 책은 값어치를 하는데, 거기에 덧붙여 저자의 그림 설명들이 깊이가 있으면서도 평이하다(그림은 기사에서 언급된 페로프의 유명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초상'). 내가 '가장 이상적인' 입문서라고 적은 이유이다. 이젠 보다 전문적인, 그리고 방대한 러시아 미술사들이 소개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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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8-01-11 0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러시아 미술이 다른 서구미술보다는 우리와 감성적으로 오히려 통하는 면이 많다는 느낌을 받았어요.(20세기 이전 미술에서요.) 뭐 그렇다고 제대로 알고하는 소리는 아니지만.... 전에 이주헌씨 책 읽으면서 꽤 강렬한 느낌들을 많이 받았는데 이 책 빨리 읽어야겠다는 느낌이 팍팍 드네요. ^^

로쟈 2008-01-11 00:36   좋아요 1 | URL
네, 러시아 문학도 미술도 딱 우리 타입입니다. 좀 고생한 나라들이죠...

뭉실이 2008-01-11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동파'는 우리나라에 꼭 필요한것 같네요.
대도시가 아니면 러시아 미술뿐아니라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도 보기 힘드니까요

로쟈 2008-01-11 00:51   좋아요 0 | URL
더불어, 민중미술도 진일보했으면 좋겠습니다...

털세곰 2008-01-11 0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 박물관(루스끼 무제이)에서 발행한 책자에 보니, 례삔의 <볼가강의 배끄는 인부>에 대한 설명에, "배끄는 저 사람들의 가슴에 턱 얹힌 저 줄이 바로 그들을 묶어놓고 있는 사회적 제약에 대한 메타퍼이다" 라고 적혀있더군요. 무릎을 탁 치며, 그래 바로 이런게 그림에 대한 해설이지 싶었습니다... 그래도 이번 전시회에 이미테이션도 아니고 그 수천장의 스케치 중의 하나만 달랑 온것은 좀 심했다 싶었습니다.

로쟈 2008-01-11 07:59   좋아요 0 | URL
곁다리로 온 거죠 뭐. 대신에 고골의 '분신'이라고 돼 있는 그림이 반가웠고, 몇몇 그림들이 기억을 되새기게 해주더군요...

다락방 2008-01-11 0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시사인에서 읽었어요. :)

로쟈 2008-01-11 17:08   좋아요 0 | URL
^^

urblue 2008-01-11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일 전시회 보러 갈 계획입니다. 오늘 이 책 주문해야겠네요. ^^

로쟈 2008-01-11 17:08   좋아요 0 | URL
제가 광고는 잘하고 있군요.^^

마노아 2008-01-11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에 전시회 다녀왔는데 볼가 강의 배를 끄는 인부들’이 책에서 본 것과 아주 약간 차이가 있길래 왜 그런가 했더니 초벌 스케치였군요. 근데 전시회에서는 '증기선'을 끈다고 설명되어 있었어요. 이주헌씨 책에는 '바지선'이라고 나와 있었는데... ;;; 아무튼, 저도 레핀의 그림들이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오히려 고흐전보다 재밌게 보고 온 듯 해요^^

로쟈 2008-01-11 17:09   좋아요 0 | URL
네, 이 그림에 대해서는 그냥 맛보기였죠.^^; 다른 그림들이 그래도 좀 만회를 해주었지만...

소경 2008-01-11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에 갈려고 안내서로 이번에 딱 이진숙씨의 <러시아 미술사> 구입했는데 전시회도 그렇고 부담감에 마음 잡기가 어렵더군요. 벌써 부터 마음만 앞서서...
 

연세대 대학원신문에서 '러시아 혁명기 문학읽기'를 테마로 한 기획서평을 옮겨온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S1N5&rsec=&idxno=8069). 서평의 대상이 된 책들은 이 시기 드라마 세 편을 묶은 <광장의 왕>(글누림, 2007)과 플라토노프의 <구덩이>(민음사, 2007)이다. 당초 작년 가을 러시아 혁명 90주년과 맞물려 기획된 것으로 아는데, 온라인 기사는 해가 넘어서야 올라왔다(나는 기사의 필자를 주선한 인연을 갖고 있다). 자료로 스크랩해놓는다(아래는 고리키 작 <태양의 아이들>의 한 장면).

 

연세대 대학원신문(157호) '사랑하는 자만이 불가능을 알며…’

20세기 초 러시아 문화 공간은 인류 예술사의 어느 지점보다 흥미롭고 역동적이다. 예술은 작품의 내적 공간을 넘어서 현실과 혁명의 과정에 역할하고, 정치적 현실은 때로는 예술을 위기로 내몰고, 때로는 화려한 부활의 기반이 되기도 했다. 이 시기, 혁명 이념은 예술의 모더니즘과 격렬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만나고 있었다. 1905년의 러시아 혁명(기든스나 아렌트의 시각에서 보자면 엄밀한 의미에서의 혁명이라 불릴 수는 없지만)을 이야기하는 세 편의 드라마가 수록된 『광장의 왕』과, 1917년 혁명 성공 이후 지상에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하는 공산주의 ‘프로젝트’에 대한 보고서 『구덩이』는 당시 혁명과 문학적 삶의 관계를 보여주는 치열한 증거라 할 수 있다. 

실패한 혁명에 대한 세 편의 드라마 - 『광장의 왕』
『광장의 왕』에는 상징주의의 대표적 시인 블로크의 『광장의 왕』,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대가 고리키의 『태양의 아이들』, 은세기 극작가인 안드레예프의 『별들에게』가 수록되어 있다. 역자가 언급하듯, 이 드라마들에는 ‘1905년 러시아 혁명을 바라보는 세 가지의 서로 다른 시선’이 교차하고 있다.

블로크의 드라마 『광장의 왕』에는 실패한 혁명에 대한 비극적 인상이 지배적이다. 늙어버린 광장의 왕은 더 이상 이 세계를 구원할 수 없고, 등장인물들은 구원을 가져다 줄 배를 기다리고 있다. 아름다움과 조화가 발현되는 고대 사회를 희망하는 조드치와 고대 그리스적 미의 현현인 그의 딸(블로크의 시 ‘낯선 여인’의 형상과 유사하다), 그리고 광장의 왕은 유토피아적 이상을 상징하며, 배를 기다리는 광대와 ‘소문들’은 그와 괴리된 현실을 보여준다. 시인은 이들 사이에서 부단히 동요하고 있다. 결국 기다림에 지친 군중에 의하여 왕과 시인, 그리고 조드치의 딸은 파멸하게 된다.

『태양의 아이들』에는 소설가 못지않은 극작가로서의 고리키의 대가적 면모가 드러나 있다. 작가는 인텔리겐차와 프롤레타리아의 극복될 수 없는 거리와 서로에 대한 몰이해에서 1905년 혁명 실패의 근본적 원인을 찾고 있다. 콜레라가 창궐하고 혁명이 발발한 외부 세계, ‘야수들로 가득한 삶’과 철저히 차단되어 과학과 이성의 성벽 안에 갇혀 지내는 인텔리겐차들은 민중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 화학자 프로타소프는 자신을 해하려한 ‘민중’ 예고르를 혐오하면서, “사람들은 반드시 밝고 선명해야 해... 태양처럼......”(277쪽)이라고 말을 맺는다. 그렇지만 ‘인간’이라는 글자를 늘 대문자로 쓰곤 했던 고리키적 시각에서 이들 두 진영 어느 쪽도 아직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 즉 ‘태양의 아이들’은 아니었다.

드라마 『별들에게』에서 안드레예프는 혁명에 대한 아버지와 아들 세대의 대립적 관계를 보여준다. 인간 이성과 영원성에 대한 천문학자 테르노프스키의 확신은 혁명에 의한 현실 전복을 꿈꾸는 아들 니콜라이와 그의 약혼녀 마루샤의 실천적 유토피아 이념과 대립된다. 극의 종결부에서 죽은 니콜라이를 따라 혁명으로, 즉 ‘삶으로 가겠노라’는 마루샤의 말에 테르노프스키는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은 야수들만 죽는다. 죽이는 자들만 죽는다. 하지만 죽임을 당한 자, 찢긴 자, 불태워진 자들은 영원히 산다. 인간에게 죽음은 없다, 영원의 아들에게 죽음은 없다(148쪽)”며 죽음을 통한 불멸의 테마를 역설한다. 

세 작품을 지배하고 있는 비극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작가들이 실패한 혁명에서 절망만을 보고 있지 않았음은 명백하다. 고리키는 “인텔리겐차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심연이 아무리 깊다고 해도, 이 심연을 넘는 다리를 놓는 것이 아무리 어렵다 해도”, 민중출신이면서 “점차로 고양되어 지식의 정상에 도달한” 인텔리겐차의 등장으로 이 간극이 극복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고리키의 인터뷰, 287쪽). 작가의 이러한 믿음은 이후 장편 『어머니』(1906)에서 파벨의 형상을 통해 체현되며, 1917년 혁명 이후에는 수많은 프롤레타리아 출신의 인텔리겐차가 나타남으로써 현실이 된다. 그 가장 적합한 예가 바로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이다.

‘잉여의 사랑’, 또는 ‘성취의 멜랑콜리’-『구덩이』
플라토노프(1899-1951)는 그야말로 ‘혁명이 길을 열어준’ 프롤레타리아 작가였다. 뼛속까지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고 여겼던 플라토노프는 역설적이게도 대표적 ‘반소비에트 작가’로 취급되며, 발표하는 작품마다 냉소적이고 풍자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1930년대 대숙청의 시기에 스탈린은 작가의 열다섯 살 된 아들을 반체제 음모죄로 유형을 보내고, 아들 플라톤은 유형지에서 얻은 폐결핵으로 사망한다.

그럼에도 부단히 스탈린의 유토피아와 화해하려했던 작가는 그와 같은 의도를 담은 단편 「귀향」(1946)마저 ‘저주받을 작품’이라는 비난에 처하자, 더 이상 회복되지 못할 정도의 타격을 입고 아들에게 감염된 폐결핵으로 죽게 된다. 『체벤구르』, 『구덩이』, 『행복한 모스크바』를 비롯한 주요작품들은 작가 생존시에 출판되지 못했지만, 사후 영미문학권을 중심으로 번역, 출판되기 시작했고,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에는 러시아에서도 각광받기 시작했다.



프레데릭 제임슨의 『시간의 씨앗』에도 언급되듯이, 『구덩이』는 비슷한 시기의 장편 『체벤구르』와 더불어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디스토피아 소설 중 하나로 읽힌다. 가상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자먀틴이나 오웰, 헉슬리 등의 소설과 달리 『구덩이』는 1920년대 말 스탈린의 ‘대변혁기’ 당대의 현실을 그린다. ‘전체인민의 집’을 짓기 위해 모인 노동자들은 건물의 토대가 될 구덩이를 파고 있다(소설제목은 건물을 짓기 위한 기초 공사용 구덩이를 뜻한다. 러시아는 동토라 건물을 지을 때, 토대를 깊고 넓게 판다). 소설 후반부는 부농 척결과 집단화가 진행되는 농촌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설의 언어와 사건들은 너무나 현실적이기에 오히려 그로테스크하며 낯설다. 잘 읽히지 않는 소설 언어는 브로드스키가 일찍이 번역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시대의 언어’, ‘유토피아의 언어’였다. 이 서걱거리는 말들은 스탈린적 유토피아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 개인의 사유를 방해하는 국가의 말은 주인공들의 의식에 침투하고, 작가는 이들의 말을 자기 서술에까지 확대함으로써 유토피아가 강제하는 이념적 속성을 노출한다.

그렇지만 소설은 현실에 대한 풍자로만, 또는 블로흐식의 이미 이루어진 것들에 대한 회의, ‘성취의 멜랑콜리’로만 읽히지 않는다. ‘진실 없이 살아가는 삶에 대한 부끄러움’이라는 보쉐프의 말에서 볼 수 있듯 작가는 유토피아 건설의 이념을 인간 존재 방식 전체에 대한 의문으로 확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 말미에 사회주의 건설의 상징이자 노동자들의 희망이던 소녀 나스탸는 갑자기 죽게 되고, 미래의 집을 위해 파내려간 구덩이는 소녀의 무덤이 된다(아이의 희생이라는 테마는 다분히 도스토예프스키적이다). 작가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는 일견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러한 결말이 대상에 대한 부정적 관계(풍자)에서가 아니라, 반대로 ‘잉여의 사랑’에서 나온 것임을 강조한다. “소녀의 죽음으로 사회주의 세대의 파멸을 묘사한 것은, 작가의 실수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실수는 단지 그의 상실이 모든 과거와 미래의 파멸과도 같은, 사랑하는 존재에 대한 잉여의 불안감 때문이다.”(『구덩이』의 에필로그)

암울했던 혁명과 내전의 시기를 겪어낸 러시아의 1920년대는 다양한 예술적 실험들이 가능한 ‘대화와 대안의 시대’였다. 혁명이념에 고취되어 새로운 세계 건설의 기대에 들뜬 예술가들은 저마다의 유토피아를 꿈꾸면서 실험적 작품들을 선보였다. 국내에도 번역된 불가코프, 자먀틴, 필냐크, 올레샤 등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 당시의 산문들은 형식과 내용, 문체에 있어서 마치 누보로망의 그것처럼 현란하다. 이런 맥락에서 플라토노프의 소설도 아직은 대화가 가능했던 시기의 예술적 시도로 볼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러한 ‘대화와 대안’의 실험들은 1934년 사회주의 리얼리즘 강령의 발표 이후 오직 하나, ‘독백’의 길로 귀결된다.



포스트-포스트소비에트 시대의 소비에트 문학읽기
지상에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던 공산주의자들의 실험은 20세기의 종결과 더불어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듯하다. 실패한 역사의 흔적들을 재빨리 폐기하는 것, 맥도날드 표지와 레닌 초상이 함께 찍힌 티셔츠를 팔면서 과거로부터 자유로운 척하려는 제스추어에서 우리는 포스트소비에트 시대 러시아의 문화적 경향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이십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포스트-포스트소비에트 시대에는 친소비에트/반소비에트라는 말조차 더 이상 유표가 아니다. 고리키의 『어머니』도,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도 이제는 이념적 맥락에서 읽히지 않는다. 이들은 추리소설이나 연애소설, 또는 『해리포터』에 밀려 서가의 뒤편에 나란히 꽂혀 있다.

그렇지만, 그럼으로 해서 소비에트러시아문학은 오늘날 새롭게 읽힐 수도 있다. 혁명을 꿈꾸지 않는 시대, 혁명이란 말에 무감각한 독자들이 ‘문학’과 ‘유토피아’가 동의어였던 혁명기 러시아 문학을 만날 때에, 진정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운 예술적 체험이 가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자만이 불가능을 알고, 그 불가능한 것을 죽도록 원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를 가능케 할 것이다......”(플라토노프, 「태양의 후예들」)라는 젊은 공산주의자의 낭만에 가득한 선언이 혁명이 불가능해 보이는, ‘아름답지만 여전히 광포한 이 세상’에서 어떤 식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말이다.(윤영순_경북대 노문과 강사)

08. 01.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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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의 <문학은 자유다>(이후, 2007)에 실린 두번째 평론은 '1926년...'이란 제목을 달고 있다. 부제는 '파스테르나크와 츠베타예바, 그리고 릴케'.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두 러시아 시인과 한 독일 시인의 관계에 대한 평론이고, 보다 정확하게는 이 세 시인이 서로 주고받은 편지들을 묶은 책 <편지: 1926년 여름>의 리뷰에 해당하는 글이다(책은 어제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파스테르나크와 츠베타예바가 편지를 교환한 건 알고 있었지만 거기에 릴케까지 가세했었다는 건 이번에 알게 됐다. 사정을 알고 보면 또 무지가 용납될 만한 게 이 영역본(1986)의 저본은 러시아어본이 아니라 독어본(1983)이다. 내가 알고 있는 러시아어본은 츠베타예바와 파스테르나크의 편지들만을 묶은 것으로 <영혼들이 보기 시작한다: 편지들, 1922-1936>(2004)이란 제목이고 720쪽 분량이다.

Марина Цветаева, Борис Пастернак Души начинают видеть. Письма 1922-1936 годов

내가 아는 건 2004년판인데, 모스크바에 체류시에 구입하지 않은 게 후회스러운 책들 가운데 하나다(다행히 아직 절판되지는 않았다). 독어본은 1926년에 한정하여, 이 두 사람에다 릴케까지 가세하여 서로가 나눈 예술적 열정(혹은 "예술의 성스러운 섬망 상태")을 모아놓았던 듯하고, 그게 영어로도 번역된 것이다.

1926년이면 츠베타예바가 러시아를 떠나 프랑스로 건너간 지 4년째 되는 해였는데, 그럼에도 두 사람은 가장 소중하 대화 상대자였다. "파스테르나크는 츠베타예바가 자기보다 더 위대한 시인이라고 암묵적으로 인정했고 자기가 쓴 글은 츠베타예바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었다."

가족과 함께 파리로 건너간 츠베타예바는 이때 서른 네 살이었고, 파스테르나크는 서른 여섯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당대의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숭배했던 릴케는 쉰한 살이었는데, 스위스에 있는 요양소에서 백혈병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세 사람이 교환환 편지들은 러시아와 프랑스, 그리고 스위스를 세 꼭지점으로 하여 왕래된 것이었다.

 

 

 

 

릴케에 대해 조금의 견식이 있는 독자라면 그가 두 차례 러시아 여행을 했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는 러시아가 자신의 진정한 정신적 고향이라고 생각했다: "릴케에게 큰 영향을 준 릴케의 첫사랑이자 스승은 페테르부르크 태생 작가였는데, 그 사람과 함께 두 차례 러시아를 여행했고 그 뒤로 러시아가 자기의 진정한 정신적 고향이라고 생각했다."(42쪽) 

'페테르부르크 태생 작가'로서 릴케의 첫사랑이자 스승(멘토)였던 '그 사람'은 바로 루 살로메이다. 릴케는 1900년 살로메와 함께 두번째 러시아 여행을 떠나는데, 그때 열살이었던 소년 파스테르나크는 릴케를 처음 만나고 짐작엔 인사를 주고받는다(화가였던 파스테르나크의 아버지가 릴케와 면식이 있었다).

"파스테르나크는 릴케가 애인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와 함께 기차에 오르는 모습의 기억을 소중히 간직했고 그 장면이 파스테르나크의 가장 뛰어난 산문 <안전통행증>(1931)의 첫머리에 나온다.(존경의 뜻으로 두 사람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42-43쪽)

참고로, <안정통행증>은 <어느 시인의 죽음>(까치)으로 번역됐었다. 이에 대해서는 '마야코프스키와 파스테르나크'(http://blog.aladin.co.kr/mramor/834190), '내 울부짖은들 누가 들어주랴!'(http://blog.aladin.co.kr/mramor/1529971)를 참조. 

Рильке и Россия

러시아에서는 <릴케와 러시아>(2003)란 타이틀의 책도 출간돼 있다. 역시나 2004년에 손에만 들었다가 놓았던 책인데, 지금 생각하면 아쉬움이 없지 않다(다 돈의 장난이다!). 개인적으로 흥미를 갖고 있는 주제이긴 하지만, 내가 감당하기엔 견적이 너무 나오기 때문에 미뤄놓을 수밖에 없다(내가 바라는 건 누가 이런 책을 써주는 것이다!). 

세 사람의 편지왕래는 "파스테르나크 아버지의 주선으로 릴케와 파스테르나크 사이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다음에 파스테르나크가 츠베타예바에게 편지를 쓰라고 릴케에게 제안하여 세 사람의 편지왕래가 되었다. 츠베타예바는 뒤늦게 합류했지만, 츠베타예바의 욕구, 대담성, 감정의 솔직함이 하도 강렬하고 도발적인 탓에 곧 세 사람 사이의 대화가 불타오르게 하는 자극제가 된다."(45쪽)

결국 츠베타예바는 릴케에게 만나자고 간청할 정도에까지 이르게 되고 릴케는 침묵에 잠긴다. 츠베타예바에 대해서는 '시인이 쓴 산문'(http://blog.aladin.co.kr/mramor/867577)과 '츠베타예바의 산문'(http://blog.aladin.co.kr/mramor/1779102)을 참조.

하지만 "츠베타예바는 12월말 릴케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며칠 뒤 릴케에게 편지를 쓰고, 이듬해에는 긴 산문으로 된 송시(ode)를 바친다." 파스테르나크도 릴케가 죽고 5년이 흐른 뒤에 완성한 <안전통행증> 말미에 릴케에게 보내는 편지를 포함시킨다. <안전통행증>은 "릴케의 영향 아래에서 쓴 것이며 무의식적으로라도 릴케와 겨루며 쓴 글이다." 릴케의 <말테의 수기>(1910)를 의식하며 썼다는 얘기다.

죽음이 갈라놓은 세 사람의 인연은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릴케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두 사람은 믿지 않으려 한다. 우주적으로 보아 도무지 부당하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그리고 15년 뒤인 1941년 8월, 츠베타예바가 자살했다는 소식에 또 놀라고 회한을 느낀다. 1939년, 츠베타예바가 가족과 함께 소련으로 돌아오기를 결심했을 때, 돌아오면 파국을 피하지 못할 것임을 파스테르나크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47쪽) 파스테르나크다운 일이다.

 

손택이 보기에 세 사람의 열정은 서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충만했다. "이 편지들에 쏟아부은 광희(ecstasies)는 서로 떨어져 있었기에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며 서로의 기대에 미치지 못함에 대한 응답으로 나온 것이다." 손택의 결론은 이렇다.

 


"1926년의 몇 달 동안 세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상대에게 자기 자신을 내던지고 서로에게 아름답고 불가능한 요구를 할 때 타오른 그 불빛을 가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늘날 '모든 것이 위선적 형식주의에 빠진(파스테르나크의 표현이다)' 지금 그들의 열정과 고집은 뗏목처럼, 등대처럼 바닷가처럼 느껴진다."(47쪽)

 

'뗏목'과 '등대(횃불)'와 '바닷가'에 대한 그리움, 그게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오늘날' 파스테르나크에게서나 손택에게서나, 그리고 우리에게서나 '모든 것이 위선적 형식주의에 빠진'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위선적 형식주의'는 '바리새주의(Pharisaism)'의 번역인데, '위선적 형식주의'를 가리키는 말이긴 하지만 여기선 직역해주는 게 더 나았다. 마지막 문장의 원문은 이렇다.

"Today, when 'all is drowning in Pharisaism' - the phrase is Pasternak's - their ardors and their tenacities feel like raft, beacon, beach."             

 



 

 

 

 

 

 

여기서 '파스테르나크의 표현(all is drowning in Pharisaism)' 은 그의 시 '햄릿'(1946)에 나오는바, 이 시의 서정적 화자는 햄림이자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햄릿'? <닥터 지바고>의 마지막에 실린 '유리 지바고의 시'에서 맨처음에 나오는 시이다(지바고의 시들은 소설의 제 17부에 해당한다. 간혹 '부록'으로 처리하거나 아예 생략한 국역본들이 있는데 무지하거나 무례한 경우들이다). 엘레노어 로우(Eleanor Rowe)의 영역은 이렇다.

 
The rumbling has grown quiet. I walk out on the stage.
Leaning against a door jamb,
I try to catch in a distant echo
What will happen in my lifetime.

At me is aimed the murkiness of night;
I'm pinned by a thousand opera glasses.
If only it is possible, Abba, Father,
May this cup be carried past me.

I cherish your stubborn design
And am agreed to play this role.
But now a different drama is underway;
This time, release me.

But the order of the acts has been determined,
And the ending of the journey cannot be averted.
I am alone; all drowns in Pharisiasm.
To live life is not to cross a field.

 

같은 대목을 <닥터 지바고>의 범우사판에서는 "세상엔 득실거리는 바리새 사람들뿐"으로 옮겼고, 열린책들판은 "다른 모든 것은 바리새주의에 쏙 빠져 있다"로 옮겼다. 범우사판으로 전문을 인용하면 이렇다. 
 

소요가 멎는다. 난 무대 위로 나선다.

문설주에 기댄 채

멀리 들리는 소리에 귀기울이다.

나의 생애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을까.

 

밤의 어둠이 나를 향해

수천의 쌍안경을 눈알처럼 응시한다.

제발, 하나님 아버지 나의 곁에서

부디 이 술잔을 가져가 주소서.

 

나는 당신의 꿋꿋한 뜻을 사랑하며

맡겨진 이 역할들을 기꺼이 수락합니다.

그러나 지금 다른 연극이 상연되고 있으니

이번만은 나를 그대로 있게 하소서.

 

하지만 연극의 순서는 이미 정해진 것

마지막 길은 피할 수 없다.

나는 외롭다, 세상엔 득실거리는 바리새 사람들뿐

산다는 것은 들판을 지나듯  되지는 않는다.

 

 

시의 제목은 '햄릿'으로 돼 있지만 막 무대로 나가야 하는 배우의 대사는 그리스도의 대사이다(그래서 '햄릿-그리스도'이다). 사실 파스테르나크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러시아어로 옮긴 번역자이기도 하다.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햄릿 배우 중의 하나는 가수이자 배우 비소츠키인데, 그의 <햄릿> 공연 서두에서는 비소츠키가 낭송하는 시가 바로 이 '햄릿'이다(http://www.youtube.com/watch?v=-r01fRADCII). 아래는 러시아어 원시인데, 비소츠키는 (3연을 제외하고) 1, 2, 4연을 절규하듯이 노래한다(그가 연기하는 햄릿의 독백 장면은 http://www.youtube.com/watch?v=QJVsuq0tt24 참조).

 

Гул затих. Я вышел на подмостки.
Прислонясь к дверному косяку,
Я ловлю в далеком отголоске,
Что случится на моем веку.

На меня наставлен сумрак ночи
Тысячью биноклей на оси.
Если только можно, Aвва Oтче,
Чашу эту мимо пронеси.

Я люблю Твой замысел упрямый
И играть согласен эту роль.
Но сейчас идет другая драма,
И на этот раз меня уволь.

Но продуман распорядок действий,
И неотвратим конец пути.
Я один, все тонет в фарисействе.
Жизнь прожить — не поле перейти.

 

러시아 속담이지만, 산다는 것은 들판을 지나는 게 아니다. 만만하지 않고 팍팍하다는 얘기다. 세 시인에 관한 얘기를 (옮겨)적은 건 하루치의 우울을 소진하기 위해서였다. 모름지기 겨울이면 뗏목이라도 타고 어디 눈덮인 통나무집에라도 가야 폼도 나는 게 아닐까 싶지만(삶의 품위를 위해서), 내겐 스티로폼도 없구나...

08. 01.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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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1-06 0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치의 우울을 소진하기에도 참으로 만만치 않은, 팍팍한 일상입니다. 그나저나 저번부터 츠베타예바의 글은 정말 관심이 많이 가는데요, 소개 감사드립니다. 기회가 될 때 영어본이라도 꼭 읽어봐야겠어요.

로쟈 2008-01-06 09:20   좋아요 0 | URL
네,영어본도 많이 나와 있습니다. 한두 권 나와 있던 국역본 시집들은 모두 절판 상태구요...

2008-01-06 14: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1-06 15:49   좋아요 0 | URL
네, 그게 정신의 '뗏목'과 '통나무집'도 우리에겐 필요한데, 다들 '팬션'만 찾는 풍토라서요(시인들의 죽음도 우울하고). '호젓한 숲길'은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필요한 것인데...

털세곰 2008-01-08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쯔베따예바의 시는 유독 외국독자, 연구가들에게 약간의 관심 밖이죠. 신난했던 삶이 오히려 포커스를 받지 그녀의 시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는 드물죠... 아, 다시 생각해보니 관심 밖이라기 보다 외국독자들에겐 러시아 독자보다 뭔가 좀 덜 전달되는 그게 있을 것 같애요. 장애물이랄까... 유독 그녀의 시는 리듬도 그렇고 읽기도 좀 뭐하고...

로쟈 2008-01-08 14:42   좋아요 0 | URL
한동안 러시아에서 연구서들이 쏟아져나온 것과 비교하면 한산한 편이지만, 사실 국가적으로 지원하는 것도 아닌 이상 문학연구는 연구자 개인의 관심사와 연관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국내에서도 논문이 두엇 가량 있을까 싶은 정돈데요...
 

가끔씩 옮겨놓고 있는 한국일보의 '오늘의 책'이 내일은 러시아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을 다루고 있다. '방앗간'을 또 지나칠 수 없어서 옮겨놓고 몇 자 보탠다. 아래 열음사판 시집 표지를 보니 감회가 새로운데, 애석하게도 소장하고 있는 시집은 아니다. 대신에 창비사의 오장환 전집을 갖고 있고 거기에 뛰어난 예세닌 번역시들이 수록돼 있다. 물론 이 책 또한 절판되었지만...

한국일보(07. 12. 28) [오늘의 책<12월 28일>] 자작나무 숲에서

러시아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이 1925년 12월 28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여관에서 자살했다. 30세였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예세닌은 1916년부터 러시아 농촌의 자연과 민중, 역사에 바탕한 섬세한 서정시ㆍ서사시를 발표해 러시아혁명기를 대표했던 시인이다. 한 세기 저편 러시아의 ‘마지막 농촌 시인’이지만 그는 세 인물과 얽힌 인연으로 우리 기억에 각인돼 있다.

첫번째 인물은 현대무용의 개척자인 ‘맨발의 이사도라’ 이사도라 던컨(1877~1927). 예세닌의 자살의 직접적 원인은 음주벽과 신경증이었지만 그의 죽음이 던컨과 관련이 없을 수 없다. 던컨은 러시아 혁명 후 1921년 모스크바에 무용학교를 설립하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예세닌은 자신보다 열일곱살 연상인 그녀와 사랑에 빠졌고 두 사람은 1922년 결혼식을 올리지만 이별과 재회를 거듭하다 1924년 결별했다.

이듬해 자살한 예세닌이 여관방에 남긴 마지막 시는 ‘잘 있거라, 벗이여’였다. 던컨은 예세닌이 죽은 지 2년 후 파리에서 죽었다. 스포츠카를 시승하기 위해 뒷좌석에 앉아있던 그녀가 어깨 뒤로 둘러 내려뜨린 숄이 차 뒷바퀴에 낀 채 차가 출발하는 바람에 목이 졸려 숨진 것이다.

두번째 인물은 러시아 현대시의 개척자인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1893~1930). 예세닌의 장례식장에서 ‘예세닌에게’라는 시를 낭송했던 그는 5년 후 역시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세번째 인물은 한국의 시인 오장환(1918~1951)이다. 예세닌에 크게 영향을 받은 오장환이 1946년 번역한 <에쎄닌 시집>은 20세기 가장 뛰어난 번역시 작업의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이 시집은 오장환이 월북시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오랫동안 금기였다. 노문학자 박형규 번역으로 ‘어머니’ ‘목로술집의 모스크바’ 등 예세닌의 절창을 모아 1985년 출간된 <자작나무 숲에서>도 절판 상태다.(하종오기자)

07. 12. 27.

Виталий Безруков Есенин

P.S. 자료를 찾으니 예세닌에 대해서는 소설도 나와 있고, 영화도 제작되었다(영화의 몇몇 장면은 http://www.youtube.com/watch?v=5IrtAU36438 참조). 그리고 예세닌의 자료 사진들(http://www.youtube.com/watch?v=0fXAS7HRl5o)과 함께 '진짜' 장례식 자료화면도 떠 있다(http://www.youtube.com/watch?v=UjJepN2ZrCY). 

"Сергей Есенин". (Фото — 1tv.ru)

영화속 장례장면은 http://www.youtube.com/watch?v=XFwLTDilATk 참조. 러시아 그룹 '류베'가 부르는 노래 '자작나무'는 http://www.youtube.com/watch?v=LuxlG2Y7j0U 에서 들어보시길...

P.S.2. 예세닌 삶과 시에 대한 촌평은 천양희 시인의 <천양희의 시의 숲을 거닐다>(샘터, 2006)를 참조할 수 있다. 마야코프스키의 시 '세르게이 에세닌에게'는 물론 <마야코프스키 선집>(열린책들, 2006)에 번역돼 있다. 오장환 시에 대해서는 유종호의 <다시 읽는 한국시인>(문학동네, 2002)을 일독해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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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따삐야 2007-12-28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장환 시인의 고향에서 근무를 했던 적이 있어서 오장환문학제를 구경한 적이 있었어요.
매우 뛰어난 시인이었다는데 월북하는 바람에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하더라구요. 로쟈님 서재에 와서 사진을 다시 보니 반가운거 있죠.^^

로쟈 2007-12-28 00:51   좋아요 0 | URL
별칭이 '비극의 미남시인'이네요.^^

깐따삐야 2007-12-28 12:50   좋아요 0 | URL
하핫. 별칭 귀여운데요. 비운의 꽃미남이시구나. 오장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