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한국의 커버스토리로 '작가들의 음식예찬'을 읽다 보니 체호프가 권장한 코스 메뉴가 나온다(http://weekly.hankooki.com/lpage/coverstory/201003/wk20100309142137105450.htm). 출처는 마크 쿨란스키의 <맛의 유혹>(산해, 2009)이란 책이고, 쿨란스키가 참조한 건 체호프가 스무 살쯤에 쓴 한 단편이다. 보드카에서 시작해서 맥주로 끝내는 메뉴 자체가 주량이 약한 나에게 끌리는 건 아니지만, 러시아식 수프와 어린 돼지고기는 흠, 약간 군침을 돌게 한다. 봄밤에 정신도 멍하던 참이어서 잠시 야참 생각을 해본다. 

체호프가 제안하는 코스 메뉴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안톤 체호프는 <갈매기>, <세 자매> 등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그가 젊은 시절 써놓은 글에 언론인을 위한 8코스 메뉴가 제안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이 코스 메뉴가 봄날 잃은 입맛을 되살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한번 시도하면 주당이 될 것 같은 '주류입문 정석'임은 확실해 보인다. 1880년경 쓴 <자명종의 달력 Alarm-clock's Calender>이란 글이다. 



(1) 보드카 한 잔
(2) 양배추 수프와 카샤(메밀 가루로 쑨 죽의 일종)
(3) 보드카 두 잔
(4) 양고추냉이를 곁들인 어린 돼지고기 요리
(5) 보드카 세 잔
(6) 양고추냉이, 고춧가루, 간장
(7) 보드카 네 잔
(8) 맥주 일곱 병 

 

10. 03. 13. 

P.S. 러시아식 수프(보르시치)와 흑빵을 곁들인 야참은 아래와 같이 구성될 수 있다(실상은 한 끼 식사다). 조촐한 러시아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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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체호프의 언론인을 위한 코스 메뉴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11-21 11:38 
    한겨레21의 '예술가가 사랑한 술' 코너에서 '체호프의 보드카'가 다뤄졌기에 스크랩해놓는다. 지난 봄에 주가한국의 기사에서 다뤄진 것과 같은 아이템이다. 다시 읽어봐도 재미있다.      한겨레21(10. 11. 19) 체호프의 언론인을 위한 코스 메뉴  춥다. 유독 추위를 많이 타기도 하지만 올가을은 남다르게 춥다. 옷장 구석에 묻혀 있던 코트는 옷장 문을 열었을 때 손이 닿기 쉬운 곳으로 자리를 옮겼
 
 
비로그인 2010-03-14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드카는 주량이 바닥인 관계로 저도 썩 내키지 않지만, 햐 저 맥주랑 식탁에 차려진 수프며 빵은 정말 군침 돌게 만드네요 ㅋㅋ 그런데 체호프가 권하는 코스대로 마시는 게 러시아에선 보통 반주 수준인가 보죠? ㅋㅋ 정신없이 바쁘실 텐데 이런 호사를 다 누리게 해주시네요. 고맙습니다^^*

로쟈 2010-03-14 00:36   좋아요 0 | URL
차게 마시는 보드카는 소주보다도 넘기기가 쉽습니다.^^ 원래 바쁠 때 딴짓도 많이 하지요.^^;

카스피 2010-03-14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인데 러시아 흑빵은 겉이 단단해서 러시아 사람도 빵 안쪽만 먹고 먹다가 남은 것은 벼계로 이용한 정도라고 하더군요^^

로쟈 2010-03-14 16:18   좋아요 0 | URL
아마 한국전때 전해져내려온 얘기일 거예요. 실제로 소련군들이 그랬다는군요...

L.SHIN 2010-03-14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보드카는, 레몬맛과 복숭아맛이 제일 좋은데..ㅎㅎ
아니면 오리지널 보드카에 오렌지 쥬스나 크랜베리 쥬스 혼합해서 먹는 것도..ㅎㅎ
아~ 술 고프다...

로쟈 2010-03-14 16:19   좋아요 0 | URL
폭탄주로도 많이 쓰이죠.^^

comorin 2010-03-19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이런 소설가분 덕분에 인류가 술을 끊을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코스를 언젠가 따라하곤 싶지만, 그대로 따라했다간 바로 집에서 쫒겨날 것 같네요..마지막에 맥주 일곱병이 인상깊습니다. 독한 증류주를 마시고 나면, 그 갈증을 풀고 입가심을 하기엔 맥주가 최고라는 제 생각이 체호프와 같다니..^^

로쟈 2010-03-19 10:46   좋아요 0 | URL
그 비율이 4:7인가 봅니다.^^
 

이번달 예술의전당 소식지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안톤 체홉의 삶과 문학에 대한 짧은 소개글이다(예술의 전당은 '체호프' 대신에 '체홉'이란 표기를 쓴다). 예술의전당에서는 오는 5월 러시아의 연출가 그리고리 지차트콥스키를 초청하여 국내 배우/스태프와 함께 <벚꽃동산>을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체홉에 관한 기사는 그런 계기로 마련된 것이고, 이후에 작품 <벚꽃동산>과 연출가에 대한 글이 이어질 예정이다. 내가 맡은 건 아니고 이 작가 소개도 필자의 사정으로 '대타'로 쓴 것이다.  

  

예술의전당(10년 3월호) 체홉의 삶과 문학 - 소외된 삶들의 진실을 담아내다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은 1860년 러시아의 조그만 항구도시 타간로그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농노 출신이었지만 장사를 통해 부를 축적했고, 아버지도 잡화상을 운영했다. 하지만 가게가 파산하자 가족은 모스크바로 이주하게 되고 막내인 체홉은 고학으로 중학교를 마친 후 모스크바대학 의학부에 입학한다. 이후 체홉은 의대에 다니면서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유머 잡지들에 글을 기고하기 시작한다. 이때 쓴 콩트와 단편들로 그는 인기를 끌었고, 안토샤 체혼테 등의 필명으로 400여 편 이상의 작품을 쓴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그는 개업을 하는 대신에 문학에 전력을 기울였다.    

단편작가로 확고한 명성을 얻던 1890년 체호프는 사할린 섬으로 긴 여행을 떠난다. 시베리아철도가 개설되기 이전이라 마차로 시베리아를 횡단해야 하는 힘든 여정이었다. 그는 4월에 길을 떠나 7월에 사할린 섬에 도착하고 3개월간 체류하면서 당시 유형지였던 사할린 섬의 실태를 조사하고 주민들과 일일이 만나 면접카드를 만드는 작업을 한다. 이때 작성한 카드만 8,000장 이상이었다. 바닷길을 통해 다시 모스크바에 돌아온 것이 그해 12월이었고, 이후 그는 <시베리아 여행>이란 기행문과 <사할린 섬>이라는 객관적인 인류학적 보고서를 발표한다. 이 보고서는 하루키의 소설 <1Q84>에서도 언급된다.  

문학사가들은 이 여행을 통해서 사회적 현실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더욱 넓어지고 깊어진 것으로 평가한다. 그의 작품에서 ‘코믹’과 ‘우수’는 여전했지만, 그것은 저울에 추를 단 것처럼 다소 무거워진 형태였다. 한 시골 자선병원 의사가 자신의 생활에 환멸을 느끼던 차에 정신병동에서 유일하게 총명한 청년을 만나 자주 대화를 나누다가 미친 걸로 간주돼 감금되고 결국은 맞아 죽은 이야기를 그린 <6호실>. 자신을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보호방어하기 위해 애쓰다가 결국은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허무한 죽음을 맞은 시골학교 교사를 그린 <상자 속의 사나이> 등이 그 예다.   

단편소설을 꾸준히 발표했지만, 정작 체홉이 좋아하고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쪽은 희곡이었다. 이미 1886년에 첫 완성희곡인 <이바노프>를 썼지만,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와 낙담의 시기를 거치게 되었고, 그가 극작가로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갈매기>(1895)부터이다. 초연에는 실패했지만 <갈매기>는 스타니슬라프스키와 네미로비치 단첸코가 세운 모스크바예술극장에서 재공연되어 대성공을 거둔다. 새롭게 힘을 얻는 체홉은 이후에 <바냐아저씨>, <세 자매>, <벚꽃동산> 등의 걸작을 연이어 발표하고 모스크바예술극장의 무대에 올리게 된다. 이 작품들에 대해선 특히 영국의 비평가들이 열광적인 반응을 보여 체홉은는 ‘셰익스피어 이후 최고의 극작가’란 찬사를 얻는다.   

흔히 체홉의 드라마에는 주제도 플롯도 사건도 없다고 한다. 그것은 주로 작품의 중심에 놓인 주제가 ‘잘난 사람들’의 이념이나 행동이 아니라 ‘못난 사람들’의 무능력과 불가피한 회한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콩트에서 시작하여 단편과 중편을 썼지만 체홉이 장편소설로까지 자신의 집필을 발전시키지 않은 것은 장편을 지탱할 만한 이념이나 행동을 인물들에게 부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설교적인’ 작가가 아니었다. 단지 세상을 관찰하고 그가 보고 느낀 것을 정확하게 기록하고자 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체홉이 쓴 드라마들이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드라마’라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의 주인공들은 모험에 나설 만한 용기도, 여자를 꼬여낼 만한 재간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렇다고 사색가나 사상가도 아니다. 대학교수인 처남을 숭배하면서 25년간 뒷바라지를 하느라 ‘도스토예프스키’(잘난 소설가)도 ‘쇼펜하우어’(잘난 철학자)도 되지 못한 ‘바냐 아저씨’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체홉의 인물들은 주로 삶의 결정적인 기회들을 두 눈 다 뜨고 놓쳐버린 가련한 ‘등신들’이다. 그걸 확인한 이상 차라리 ‘자살’이라도 하면 ‘비극적’일 테지만, 이들은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아무런 희망 없이 담담한 회한만을 가슴에 안은 채 예전의 일상적 삶으로 되돌아간다. 그러한 인물들이 체홉이 남긴 전 작품 속에 무려 2,355명이나 등장한다. ‘러시아 전체’나 다름없는 인물 군상이다. 그러므로 작품이나 무대를 통해서 체홉을 읽고 감상하는 것은 주인공들의 나약함과 회한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결핵을 지병으로 앓던 체홉은 1904년 6월에 의사의 권유에 따라 독일의 바덴바일러로 연극배우인 아내 올가 크니페르와 함께 요양을 떠났다. 건강이 약간 호전되는 듯했지만, 7월 2일 새벽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다. 샴페인을 마시고 싶다는 것이 그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10. 03. 10. 

P.S. 한편, 본문에는 편집자의 자잘한 손길이 묻어있는데, '잘난 놈들' '못난 놈들'이 '잘난 사람들' '못난 사람들'로 교정된 식이다. 서두의 한 문단은 아마도 분량상 편집됐는데, 하루키와 레이몬드 카버, 그리고 체홉의 커넥션을 다룬 대목이었다.  

일본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좋아하는 작가에 미국의 단편작가 레이몬드 카버가 있다. 하루키는 카버의 단편전집을 일본어로 직접 옮기고 작품해설까지 붙였다. 바로 그 카버가 “가장 위대한 단편소설 작가”라고 경탄한 이가 있으니 바로 러시아 작가 안톤 체홉이다. 그 자신이 ‘아메리칸 체홉’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카버는 체홉을 자신의 모델로 삼았고, 문학적 유언이라 할 마지막 단편소설 <심부름>에는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기까지 했다. 신병 치료차 독일의 한 휴양도시에 갔다가 숨을 거두게 되는 체홉의 임종 장면을 다룬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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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10-03-10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에 올려주신 삭제된 서두의 한 문단 중 무라카미 하루키'를'은 무라카미 하루키'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첫번째 문단 "가족은 모스크바로 이주하게 되고 막내인 체호프는"에서 '체호프'는 '체홉'으로 해야 일관성이 있지 않을까요?^^

로쟈 2010-03-10 08:28   좋아요 0 | URL
퇴고도 못하고 보낸 원고라 티가 나네요.^^;

푸른바다 2010-03-10 08:58   좋아요 0 | URL
편집자에게도 일을 주셔야죠^^ 안톤 체홉은 이름 외에는 잘 모르는 작가였는데, 그의 단편집과 희곡들을 최근 구매했고 앞으로 읽어보려고 합니다. 가능하면 연극도 관람하고 싶네요. 지난번 바냐 아저씨 공연에 가려고 계획을 세웠다가 갑자기 생긴 다른 일 때문에 결국은 못하고 말았네요^^

로쟈 2010-03-11 08:47   좋아요 0 | URL
이제부터 아셔도 충분합니다. 시간은 많으니까요.^^

2010-03-12 16: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12 2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12 16: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12 2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

몇 시간 전이지만 엊저녁에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강의가 있었다. 필요 때문에라도 읽은 책이 석영중 교수의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예담, 2009)이다. 톨스토이의 어린시절과 청년시절에 대해서는 다루고 있지 않지만, 결혼 이후의 삶, 특히 <안나 카레니나>를 쓴 이후 만년의 톨스토이의 삶과 '콩가루 집안' 얘기를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해주고 있어서 유익하다. 예전에 읽은 얀코 라브린의 <톨스토이>나 기타 전기에서 미처 읽지 못한 대목들(혹은 잊어먹은 대목들)도 있다. 내친 김에 톨스토이와 관련한 참고문헌 몇 가지를 챙겨놓으려는 생각에서 페이퍼를 적어둔다. 그 전에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에 대한 서평기사를 하나 더 읽어둔다. 그의 전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참고로, 현재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가장 자세한 평전은 쉬클롭스키의 <레프 톨스토이>(나남, 2009)이다.  

 

한겨레21(09. 11. 13) 오욕의 굴레와 싸운 톨스토이의 고행   

“그는 예술가였지만 예술을 미워했다. 귀족이었지만 귀족을 미워했다. 90권이나 책을 썼지만 말을 믿지 않았다. 결혼을 했지만 결혼 제도를 부정했다. 언제나 육체의 욕구에 시달리면서 금욕을 주장했다.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였지만 지성을 증오했다.”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는 이렇게 모순으로 점철된 삶을 살다 갔다. 위대한 작품을 남긴 소설가요, 설득력 있는 우화와 특유의 도덕론으로 ‘인류의 스승’으로 추앙받는 그도 평생 오욕의 굴레에서 고통스러워했다.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에서 ‘돈’이란 열쇳말로 거장의 철학과 예술세계를 흥미롭게 분석해낸 석영중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의 신작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예담 펴냄)는 이런 그의 삶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수많은 저작을 중구난방 훑어보는 대신, 지은이는 톨스토이가 삶의 전화점에 섰던 마흔아홉 살에 내놓은 <안나 카레니나>를 중심으로 그의 삶을 들여다본다. 그는 “쉰 살 이전의 톨스토이가 위대한 작가라면, 쉰 살 이후의 톨스토이는 위대한 교사”라고 썼다. 작품의 줄거리는 “고위층 사모님이 남편도 자식도 다 버리고 연하의 남성과 애정 행각을 벌이다가 일이 잘 풀리지 않자 자살한다”는 내용이다. 여주인공 안나는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지는 것으로 삶을 마무리한다. ‘불륜을 저질렀다고 해서 꼭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죽어야 할까?’ 지은이는 “소설을 찬찬히 읽다 보면 작가가 여주인공을 죽인 것이 꼭 불륜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지적했다.

50살에 ‘위대한 작가’에서 ‘위대한 교사’로
“톨스토이는 여주인공의 죽음을 통해 상류층의 모든 것을, 예컨대 그들의 사고방식과 습관과 생활태도, 사랑과 연애와 결혼, 그리고 심지어 예술관과 먹는 음식까지 비판한다. ‘잘’ 살기 위해서는 그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소설인 셈이다.”  

실제 이 작품 집필을 마친 이후 톨스토이는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바꿨다. 소설 속에서 비판했던 모든 것을 버리고 소박한 삶을 살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기울였다. 참되게 살기로 결심한 그가 맨 먼저 한 일은 앞선 삶의 ‘죄상’을 낱낱이 고백하는 <참회록>을 써 이를 만천하에 알리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잘 사는 법’에 대해 죽는 날까지 집요하게 설파해댔다. “톨스토이는 햄릿처럼 생각하면서 돈키호테처럼 살기로 결심한 사람”이란 평가가 절묘하다.

‘성자’의 반열에 오른 이후에도 톨스토이의 ‘고행’은 그칠 줄 몰랐다. 16살 차이가 나는 톨스토이와 그의 부인 소피야 베르스는 1862년 결혼한 이래, 반세기 만에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끝없이 부부싸움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흔히 소피야를 소크라테스의 부인 크산티페에 버금가는 ‘악처’로 몰아붙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소피야는 결혼 직후부터 27년 동안 무려 16차례 임신을 했고, 13명의 아이를 낳았다. 30년 가까운 세월을 끊임없는 임신과 출산·수유로 보냈다는 얘기다. 그는 또 악필로 유명한 톨스토이의 원고를 일일이 깔끔하게 정서해준 훌륭한 조력자이기도 했다. 물론 악다구니긴 했지만, ‘콩가루 집안’의 책임을 그에게만 들씌우는 건 부당해 보인다.  

80대 대문호의 가출과 마지막 유언
1910년 10월28일 새벽 톨스토이는 ‘가출’을 감행했고, 20여 일 만에 그는 러시아 서부의 한적한 간이역 아스타포보의 역장 관사에서 생을 마쳤다. 행려 같은 쓸쓸한 죽음은 아니었다. 러시아를 비롯한 전세계가 ‘80대 대문호의 가출’이란 희대의 사건을, 당시 기준으로 보자면 거의 실시간으로 전했다. 그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순간에도 관사 밖은 인파로 북적였다. 하지만 남편이 위독하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간 소피야는 주변의 방해로 임종조차 지키지 못했단다. 기막힌 삶이다.  

“진리를… 나는… 사랑한다.” 톨스토이가 숨지기 전 남긴 마지막 말이다. 그가 실제 ‘진리’를 발견했는지는 알 수 없다. 스스로는 분명 그렇게 믿었을 터다. 어쩌면 그것이 ‘비극’의 씨앗이었는지 모른다.(정인환 기자) 

10. 02. 16.  

P.S. 내가 챙겨두려고 하는 건 참고문헌에 실린 '톨스토이 관련서적' 몇 가지다. 일단 저자가 챙겨놓은 한국어본은 라브린의 <톨스토이>(한길사, 1997)와 딸 타티야나 톨스타야의 <딸이 본 톨스토이><서당, 1988), 그리고 파이지스의 러시아 문화사 <나타샤 댄스>(이카루스미디어, 2005)다. 거기에 영역본으로 제시됐지만 메레지코프스키의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금문, 1996)도 한국어본으로 추가할 수 있다.   

기타 여러 권의 참고문헌이 소개돼 있지만, 나의 관심은 만년의 가족사와 관련된 것이다. 가령, 참고문헌에는 빠져 있지만, 톨스토이의 만년을 다룬 소설로 제이 파리니의 <톨스토이의 마지막 정거장>(궁리, 2004) 같은 것. 이 작품은 작년에 영화화되어 얼마전에 미국에서 개봉된 걸로 돼 있다(예고편은 http://www.youtube.com/watch?v=bTh-vQho7UU 참조). 흠, 헬렌 미렌이 아내 소피야 역을 맡고 있군.    

 

짐작에 영화에서도 핵심은 톨스토이 부부의 불화일 듯싶은데, "좀더 자세한 내용을 원하는 독자라면 이 분야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사랑과 증오, 소피야와 레오 톨스토이 부분의 파란만장한 결혼생활>을 읽으면 좋을 것이다."(96쪽)라고 추천되는 책이 있다. 윌리엄 쉬러의 <사랑과 증오>(2007)다.  

2007년에 나온 책이니'고전'이란 얘기는 가장 자세히 다룬 책이란 뜻이겠다(400쪽 분량). 거기에 보태 소피야의 일기도 영역본이 나와 있다.  

 

저자가 주로 참고하고 있는 톨스토이의 전기는 A. N.  윌슨의 <톨스토이>(노튼판 2001)이며, 소피야의 전기로는 앤 에드워즈의 <소냐: 톨스토이 백작부인의 삶>(1981)도 참고문헌 목록에 들어 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톨스토이 연구서는 랑쿠르-라페리에르의 <카우치에 누운 톨스토이(=톨스토이 정신분석)>(2007)와 (저자의 참고문헌에는 빠져 있지만) 구스타프슨의 평전 <레프 톨스토이>(1989)이다. 두 책 모두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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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벤야민의 마지막 횡단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6-12 09:04 
    일간지 리뷰기사를 보다가 모르고 지나갈 뻔한 책을 하나 발견했다. 톨스토이 생애의 마지막 날들을 소설로 옮긴 <톨스토이의 마지막 정거장>(궁리, 2004)의 저자 제이 파리니의 또 다른 전기소설이 출간된 것인데, 이번엔 독일의 비평가 발터 벤야민이다. <벤야민의 마지막 횡단>(솔출판사, 2010). 벤야민의 전기는 몇 권 출간돼 있지만 '전기소설'이라고 하니까 또 감이 다르다. 벤야민의 독자라면 놓치기 아
  2.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12-06 23:10 
    이미 예고돼 있었지만 톨스토이의 마지막 1년을 다룬 영화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이 내주 개봉된다 한다. 지난달에 서거 100주년을 맞은 이 거장의 삶을 한번쯤 음미해보는 시간이 될 수 있을 듯하다. 덤으로 아내 소피야 역을 맡은 헬렌 미렌의 연기도 기대를 모은다.    한겨레(10. 12. 07) 성자로 박제된 ‘소년’의 마지막 1년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1828~1910)는 &l
 
 
sophie 2010-02-16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를 뒤져보니 <톨스토이의 비밀일기>가 나오네요. 인디북에서 나온 건데 읽으면서 별로 재미는 못 봤지요.

로쟈 2010-02-16 10:45   좋아요 0 | URL
일기 분량도 사실 너무 방대해서 전공자도 읽을 엄두를 내기 어렵습니다. 논문을 쓴다면 모르지만요.^^;

펠릭스 2010-02-17 07:42   좋아요 0 | URL
전에 일기을 읽었어요. 기억에 남는 것은 국내 전시회였죠('04.12.10-'05.3.27). 다시 읽어 보렵니다.

L.SHIN 2010-02-16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보고 싶네요.

펠릭스 2010-02-17 00:24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보고 싶습니다

페크pek0501 2010-02-17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족이지만 귀족을 미워했다는 톨스토이. 자신의 삶에 사회에 순응하며 살지 않았기에 그의 삶은 모순 투성이일 수밖에 없겠죠. '삶과 사회'와의 마찰 때문에 좋은 글을 뽑아낼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야말로 작가의 저항정신입니다. 마찰과 저항이 있어야 좀더 바람직한 세상에 대한 모색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한 작가의 고뇌가 만든 그의 저작을 통해 우리를 정신세계를 풍요롭게 했다는 점에서 인류에게 훌륭한 공헌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로쟈 2010-02-17 23:23   좋아요 0 | URL
인류를 위해 공헌하자면 가족들의 희생이 따르지요.^^;
 

명절 일정을 마친 어젯밤 문득 닉 혼비의 <런던스타일 책읽기>(청어람미디어, 2009)를 빼들었다가 우연히 체호프의 편지들에 관한 수다를 읽고서 '런던스타일로 체호프 읽기'란 페이퍼를 구상했지만 실행하지는 못했다. 쾌락원칙뿐만 아니라 현실원칙도 고려해야 하는 게 '현실'이므로 몇 가지 핑계를 대 욕구의 좌절을 정당화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면서 든 생각은, 그런 발상의 '쓸모없는 책얘기'는 정말 나밖에  할 사람이 없겠다는 것과(쓸모없으니까!) 하지만 그런 얘기들을 늘어놓긴 위해선 나이도 그만 먹고 휴가를 가질 필요가 있겠다는 것이었다. 체호프에게 얄타라는 휴양지가 필요했듯이. 아래 사진은 얄타에서의 체호프.

   

울며 겨자 먹기로 내가 대신에 간단히 늘어놓기로 한 건 저명한 러시아 문학자 조셉 프랭크의 도스토예프스키 평전 소개다('조지프'라 읽는지도 모르겠지만 내게 친숙한 건 '조셉'이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다뤘으니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서도 한두 마디 하는 게 형평에 맞겠다는 논리다. 사실은 어제 체호프의 편지들을 검색해보다가 우연히 알게 된 정보인데, 프랭크의 대작 평전 <도스토예프스키>(전5건)의 압축판이 작년 가을에 나왔다. 압축판이라고는 해도 서문까지 포함하면 거의 1000쪽에 육박하는 책으로 'Dostoevsky: A Writer in His Time'이란 제목이다. <도스토예프스키와 그의 시대> 정도로 옮길 수 있겠다(김윤식 교수의 <이광수와 그의 시대> 비슷하게).  

이미 다섯 권의 평전을 모두 갖고 있지만(물론 완독하진 못했고, 가끔 개별 작품들에 대한 기술을 참고한다) 이 책을 장바구니에 넣고 주문을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아마도 번역돼 나온다면 이 압축판으로도 러시아 작가 평전으론 가장 방대한 분량이지 않을까 싶다. 다섯 권짜리 원래의 평전은 연대기 순으로 아래와 같이 출간됐다. 첫권이 1976년에 나왔고 2002년에 마지막 권이 나왔다. 분량은 권당 400-800쪽. 보통 전공자들에게 권위 있는 평전은 작가 사전과 함께 기본서이다.   

  

 

 

 

국내에 이미 소개된 평전으론 모출스키와 얀코 라브린의 평전 정도인데, 그나마 라브린의 책은 품절상태. 모출스키의 저명한 평전은 영역본도 있다.

  

내가 제일 처음 읽은 평전은 E. H. 카의 <도스토예프스키>(홍성사, 1979; 기린원, 1989). 가장 손때 묻은 책인데, 지금은 자취를 찾을 수 없다... 

10. 02. 15.  

 

P.S. 이미 상당수의 도스토예프스키 연구서를 갖고 있지만 새로운 책이 나오면 그때마다 탐을 내게 된다. <백치> 연구서로 유명한 로빈 밀러의 <도스토예프스키의 미완의 여정>(2007)도 이번에 발견한 책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여정만 미완이겠는가. 도스토예프스키 읽기의 여정도 언제나 미완이다. 표지가 마음에 든다. 바로 손을 써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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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5 1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16 0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펠릭스 2010-02-15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스또예프스끼 전집(25권)/열린책들/2000년>중에 백치(상,하권)를 읽었죠. 귀족청년, 퇴역 장군, 장군의 아내, 장군의 세 딸, 지주, 장교(권투선수), 진보성향의 젊은 사상가 등,등장 인물중에 24%가 사상가던데요. 작가의 기준이 외형(제도)보다는 인간의 마음과 생각에 있다는 반증같았습니다.

로쟈 2010-02-16 02:27   좋아요 0 | URL
그래서 후기소설들을 '관념소설'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펭귄클래식의 체호프 단편집이 출간됐다. <사랑에 관하여>(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아홉 편의 단편을 수록하고 있는데, 초기작으론 <굴>, <진창>, <구세프>, 그리고 중/후기작으론 작가 스스로 '소삼부작'이라고 부른 <상자 속의 사나이>, <산딸기>, <사랑에 관하여>와 러시아의 연출가 카마 긴카스가 '체호프 삼부작'으로 각색/연출하기도 한 <검은 수사>, <로실드의 바이올린>,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등이 포함됐다.  

  

체호프가 남긴 단편들만 하더라도 수백 편에 이르고 짐작에 국내에 소개된 건 수십 편 수준이다. 아직도 읽지 못한, 경험하지 못한 체호프의 세계가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이 이럴 땐 즐거움이다. 펭귄판만 하더라도 단편집이 여러 권인데, 한국어 펭귄판은 일단 한권으로 묶었다. 책이 나온 김에 체호프의 영어본들을 둘러봤는데, 퓅귄판이나 옥스포드판과 다른, 특히 표지가 사뭇 매혹적인 판들이 눈에 띄어서 잠시 눈요기를 했다. 여유만 된다면 순전히 표지만으로라도 소장해두고 싶은 책들이다. 일단 새 옥스포드판.  

  

   

러시아 미술작품들을 표지로 썼다. 새로운 컨셉은 아니지만, 일단 그림들은 좋다. 하지만 내가 더 경탄한 건 원월드 클래식(Oneworld Classics)이란 세계문학전집 시리즈이다. 러시아문학 쪽으론 현재 15권이 나와 있는데, 표지로만 치면 가장 탐나는 시리즈이다. 그 중 체호프의 작품으론 단편집 <상자 속의 여인>과 <사할린 섬>이 출간돼 있다. <사할린 섬>은 나도 갖고 있는데, 한권만으로는 표지의 전체적인 컨셉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상자 속의 여인>은 가장 맘에 드는 체호프 작품의 표지이다.     

 

 

내친 김에 맘에 드는 표지 몇 개를 더 나열해본다. 

-톨스토이, <세 편의 노벨라> 

   

-도스토예프스키, <여름 인상에 대한 겨울 메모>

-부닌, <어두운 가로수길> 

 

-불가코프, <거장과 마르가리타> 

 

10. 0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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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0-02-11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가코프 표지 멋져요. 다른 표지들도 멋지네요.

로쟈 2010-02-11 22:07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표지 얘길 하려니까 하이드님 생각이 났어요.^^

Kitty 2010-02-12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즐찾 브리핑에서 무심코 클릭하면서 하이드님 페이퍼인줄 알았는데 로쟈님 서재로 넘어와서 깜짝 ^^;; 표지들 다 정말 멋지네요~

로쟈 2010-02-12 09:22   좋아요 0 | URL
평범한 표지들만 보다 보니 눈이 번쩍 뜨이더군요...

펠릭스 2010-02-13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지 시대에 책의 겉표지 또한 독자와 중요한 소통의 한 방법같습니다. 아마 출판 기획자가 가장 신경쓰는 부분같기도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