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클래식의 체호프 단편집이 출간됐다. <사랑에 관하여>(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아홉 편의 단편을 수록하고 있는데, 초기작으론 <굴>, <진창>, <구세프>, 그리고 중/후기작으론 작가 스스로 '소삼부작'이라고 부른 <상자 속의 사나이>, <산딸기>, <사랑에 관하여>와 러시아의 연출가 카마 긴카스가 '체호프 삼부작'으로 각색/연출하기도 한 <검은 수사>, <로실드의 바이올린>,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등이 포함됐다.  

  

체호프가 남긴 단편들만 하더라도 수백 편에 이르고 짐작에 국내에 소개된 건 수십 편 수준이다. 아직도 읽지 못한, 경험하지 못한 체호프의 세계가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이 이럴 땐 즐거움이다. 펭귄판만 하더라도 단편집이 여러 권인데, 한국어 펭귄판은 일단 한권으로 묶었다. 책이 나온 김에 체호프의 영어본들을 둘러봤는데, 퓅귄판이나 옥스포드판과 다른, 특히 표지가 사뭇 매혹적인 판들이 눈에 띄어서 잠시 눈요기를 했다. 여유만 된다면 순전히 표지만으로라도 소장해두고 싶은 책들이다. 일단 새 옥스포드판.  

  

   

러시아 미술작품들을 표지로 썼다. 새로운 컨셉은 아니지만, 일단 그림들은 좋다. 하지만 내가 더 경탄한 건 원월드 클래식(Oneworld Classics)이란 세계문학전집 시리즈이다. 러시아문학 쪽으론 현재 15권이 나와 있는데, 표지로만 치면 가장 탐나는 시리즈이다. 그 중 체호프의 작품으론 단편집 <상자 속의 여인>과 <사할린 섬>이 출간돼 있다. <사할린 섬>은 나도 갖고 있는데, 한권만으로는 표지의 전체적인 컨셉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상자 속의 여인>은 가장 맘에 드는 체호프 작품의 표지이다.     

 

 

내친 김에 맘에 드는 표지 몇 개를 더 나열해본다. 

-톨스토이, <세 편의 노벨라> 

   

-도스토예프스키, <여름 인상에 대한 겨울 메모>

-부닌, <어두운 가로수길> 

 

-불가코프, <거장과 마르가리타> 

 

10. 02. 11.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이드 2010-02-11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가코프 표지 멋져요. 다른 표지들도 멋지네요.

로쟈 2010-02-11 22:07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표지 얘길 하려니까 하이드님 생각이 났어요.^^

Kitty 2010-02-12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즐찾 브리핑에서 무심코 클릭하면서 하이드님 페이퍼인줄 알았는데 로쟈님 서재로 넘어와서 깜짝 ^^;; 표지들 다 정말 멋지네요~

로쟈 2010-02-12 09:22   좋아요 0 | URL
평범한 표지들만 보다 보니 눈이 번쩍 뜨이더군요...

펠릭스 2010-02-13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지 시대에 책의 겉표지 또한 독자와 중요한 소통의 한 방법같습니다. 아마 출판 기획자가 가장 신경쓰는 부분같기도 하구요.
 

수학책 하나를 찾다가 러시아의 여성수학자 코발레프스카야(코발렙스카야)에 관해 조사하게 됐다. 소피아 코발레프스카야(소냐는 소피아의 애칭이다). 관련자료가 몇 건 검색되지 않는데, 러시아 수학자 하면 로바체프스키나 페렐만을 떠올리게 되는 우리의 상식에 코발레프스카야란 이름도 포함시키면 좋겠다. 알고 보니 그녀의 남편 코발레프스키 또한 저명한 고생물학자였다. 고종석 편집위원은 '사랑없는 결혼'이라고 했지만 짐작엔 '위장결혼'이었다(여성을 불평등한 처지에서 구제하기 위한 위장결혼은 당시 러시아사회의 유행이기도 했다. 체르니셰프스키의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에도 나온다). 아무려나 부부의 지명도로 치자면, 퀴리 부부 다음은 되겠다. 여성저널 일다의 리뷰기사는 페미니즘적 시각의 과학사 <피타고라스의 바지>도 함께 다루고 있다.    

  

한국일보(01. 11. 07) [오늘 속으로] 코발레프스키 

1840년 11월7일 러시아의 동물학자 알렉산드르 코발레프스키가 태어났다. 1901년 몰(歿). 코발레프스키는척추동물과 원색동물(原索動物)의 비교 연구에서 업적을 남겼다. 원색동물이란 원시적 등뼈인 척색(脊索)이 소화기의 등쪽에 있는 바닷동물들을 말한다.멍게가 그 예다. 원색동물과 척추동물을 합해서 척색동물이라고 부른다. 코발레프스키는 동포 생물학자 일리아 메치니코프와 공동으로 발생학과 비교해부학을연구해다윈의 진화론을 보강했다.

학문의 역사에서 코발레프스키가문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동물학자 코발레프스키라기보다는 그의 동생 블라디미르 코발레프스키 부부다. 블라디미르 코발레프스키(1842~1883)는고생물학자로서 모스크바 대학 교수로 일하며 포유류 특히 유제류(有蹄類)의 화석 연구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유제류란 소나 말, 코끼리, 사슴,노루처럼 발끝에 각질의 발굽이 있는 포유류 동물들을 가리킨다. 블라디미르 코발레프스키 역시 형과 마찬가지로다윈의 진화론을 각론적으로 크게 보강한공적이 있다.

블라디미르 코발레프스키의 아내 소냐 코발레프스카야(1850~1891)는 수학자다. 그녀 자신 편미분방정식론과 함수론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고 프랑스에서 과학 분야 최고상인 보르댕상을 받기도 했지만, 코발레프스카야는 근대해석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독일 수학자 테오도르 바이어슈트라스와 절친한 사제지간이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1870년대 러시아에서는 여성이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고, 외국 유학도 미혼 여성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했다. 소냐는 18세에 고생물학자 블라디미르코발레프스키와 사랑없는 결혼을 한뒤 곧바로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그녀는 일생을 독신으로 산 스승 바이어슈트라스의 지적 동지이자 정신적 연인이 되었다.(고종석편집위원)   

일다(05. 02. 14) 남성적 학문의 세계에 뛰어든 여성들

핵 물리학자 페이 에이젠버그-셀러브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짓궂게 말한 바 있다. “하버드에건 다른 어느 대학에건, 이류밖에 안 되는 많은 남자교수들이 있다. 나는 이류밖에 안 되는 여성들이 정년직을 받는 것을 보게 되면 비로소 여성에 대한 차별이 없어졌다고 믿겠다.”

그녀의 약력은 왜 그녀가 이런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1950년대에 그녀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하버드 물리학과 과장에게 강사직을 얻을 수 없다는 거절의 말을 들어야 했다. 그녀는 사이클로트론(원자핵 파괴 장치)을 사용하는 실험에 참가하고 있었는데, ‘건물 내 여성출입금지’라는 규칙 때문에 밤에 몰래 실험실에 들어가기도 했다. 물론 에이젠버그-셀러브와 같은 선구적인 연구자 덕택에, 전통적으로 남성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수학, 과학의 영역에서도 성차별이 점차 줄어드는 추세다. 



물리학의 종교적 속성이 여성배제 부추겨
마거릿 버트하임의 <피타고라스의 바지: 여성의 시각에서 본 과학의 사회사>는 수학, 과학이 어떻게 해서 여성배제적인 성격을 확립하게 되었는가를 살펴본다. 또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소수의 여성물리학자나 천문학자들이 어떻게 차별의 벽을 뛰어넘어 학문적 성과를 남기게 되었는가를 추적한다.

지은이는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수학 및 통계학, 생물학, 화학의 영역에는 여성 연구인력이 절반을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유독 물리학에서는 여성의 비율이 지독하게 낮은 사실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 이유로 물리학의 종교적이고 초월적인 성격을 지목한다.

지은이에 따르면, 물리학은 그 뿌리가 가장 종교와 긴밀하게 얽혀있는 과학이다. 기원전 6세기 이오니아의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수를 연구하여 신의 원리를 깨닫고자 하는, 다분히 신비주의적 세계관을 설파했다. 중세 후기 이후 기독교 성직자들은 성서의 신을 수학적 창조주라고 생각했다. 또한 뉴턴을 비롯한 근대 과학자들은 마치 종교를 통해 세상의 진리를 파악하듯, 과학을 통해 세계를 완벽하게 해석하는 ‘사제적인 과학자’ 상을 확립했다.

일반적인 상식과는 달리, 당대 교회는 18세기에 계몽주의가 성행하기 전까지 수리 과학과 상보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것이다. 현대의 경우, 아이슈타인에서 스티븐 호킹에 이르기까지 정상급의 현대 물리학자들은 우주를 수학적으로 설명해내려는, 현실 초월적인 시도에 매달리고 있다.

물리학의 현실 초월적 성격은, 신학과 마찬가지로 여성들을 배제시켰다. 중세대학들은 수리 과학을 공부할 수 있는 유일한 교육기관이었으나 기본적으로 성직자들을 양성하는 곳이었으므로 여성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여성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남성을 방해하는 ‘하이에나’ 혹은 ‘선동자’들이었다. 1603년에 설립된 초기 과학협회인 린체이 학회에서는 여성과의 관계가 과학적 활동을 저해하는 구속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자진해서 정절을 지킨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할 정도였다.

물론 18세기의 여성 물리학자 라우라 바시와 같은 소수 여성들은 헌신적이고 계몽적인 부모나 남편을 통해 과학적 성과를 남길 수 있었다. 그러나 ‘비공식적인’ 방식을 통해 탄생한 여성 과학자들은 남성 과학자들의 비판을 피할 수 없었는데, 심지어 19세기의 위대한 여성 과학자 마리 퀴리마저 그녀의 업적을 모조리 남편의 덕으로 돌리려는 세간의 비난에 맞서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지은이는 물리학의 유사-종교적 속성과 여성배제적인 특성을 동시에 비판한다. 물리학의 현실 초월성은 수학적 법칙에 신비성을 부여하는 유사-종교에 지나지 않으며, 보다 현실에 밀착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종교적 성격의 물리학 실험이 필요로 하는 공적인 지원이 실로 엄청나기 때문이다.

“무한한 지식욕도 무한한 탐욕만큼이나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 현대 물리학계가 여성 물리학 연구자들에게 보다 개방된 자세를 취하는 것과 종교적인 속성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은 보다 개방적이고 평등한 태도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목표인 셈이다. 이런 비판은 서구 학계뿐만이 아니라 한국의 학계에도 해당될 수 있다. 



19세기 러시아 수학자 소피아 코발렙스카야의 생애 
<피타고라스의 바지>에 등장한 여성수학자와 과학자들은 마리 퀴리를 제외하고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노벨상과 비슷한 위상을 차지할 만한 파리 학술원의 보르당상을 수상한 19세기 러시아 여성 수학자 소피아 코발렙스카야(1850~1891) 또한 그러하다. 독일의 아동학자이자 사학자 코듈라 톨민이 쓴 <소피아 코발렙스카야: 불꽃처럼 살다간 러시아 여성 수학자>는 당대의 여성이 학문이라는 남성의 영역에 뛰어들기 위해 어떤 고난의 관문을 통과해야 했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19세기라는 격동의 혁명적 시대를 살아간 어느 열정적인 여성의 삶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책이다.

소피아와 그의 언니 아뉴따는 당대 러시아 귀족 집안의 자녀답게 외국 가정교사 아래서 유럽의 선진화된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소피아는 어렸을 때부터 수학이 매혹적인 세계라고 생각했으며 여러 친척과 가정교사들에게 자청해서 수학수업을 받았다. 한편 그녀는 사회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당대의 후진적인 러시아 정치 체제를 비판하던 개혁적인 젊은 세대들은 ‘허무주의자’라고 불렸으며, 사회의 위험세력으로 간주됐다. 소피아 역시 ‘허무주의자’로서, 혁명에 대한 애착과 수학연구에 대한 애착은 소피아의 삶에 가장 중요한 구심점 노릇을 했다.

소피아와 언니 아뉴따는 계속 공부하기를 원했지만 러시아에서는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그녀들은 진보적인 남성과의 ‘위장 결혼’이라는 위험한 선택을 통해 천신만고 끝에 외국으로 공부를 하러 가게 된다. 소피아와 동료들은 새로운 개념의 가족 공동체를 만들었다. 예컨대 소피아가 수학 연구를 해야 할 때 친구가 몇 년씩이나 기꺼이 그녀의 딸에게 엄마 노릇을 대신 해주었던 것이다.

소피아는 파리 꼬뮌에 투신한 언니와 형부를 구하기 위해 현장으로 달려가 구명운동을 펼쳤으며, 남편 블라디미르가 헛된 부자의 꿈에 빠져 사업에 실패한 후 그의 빚을 계속해서 갚기도 했다. 이처럼 소피아와 그녀 주변의 사람들 사이에는 개인의 안위를 뛰어넘어 상대를 위해 애쓰는 열정이 흘렀다.

이런 순수한 열정은 소피아의 학문적 후견인을 자청했던 괴팅겐 대학의 수학교수 바이어슈트라스와 그녀에게 스톡홀름 교수직을 마련해주었던 수학자 미탁-레플레르에게서도 발견된다. 소피아는 여성의 대학 입학이 금지된 러시아를 떠나 유럽으로 ‘유학’을 왔지만, 유럽에서도 여성이 수학수업을 듣는 것은 하늘에 별따기였다. 소피아의 지지자들이 없었다면, 출산과 가족, 남편의 빚에게 계속 신경을 써야 했던 그녀가 연구를 계속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유럽에서 ‘변두리’에 속했던 스톡홀름에 자식을 친구에게 맡겨두고 홀로 공부를 온 미망인 소피아에게 보수적인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때나 여성에게는 박사학위를 줄 수 없다고 보수적인 대학이 고집할 때 이들은 그녀가 계속 연구를 할 수 있도록 격려했으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소피아는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저는 남편과 같이 살지 않아요. 어떤 이유에서건 남편과 떨어져 사는 여자는 누구든 착하고 제대로 생각하는 귀부인들의 눈에는 의심스럽고 위험한 사람으로 보이죠. 거기에다 배운 여자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훨씬 더 안 좋게 평가되죠.”

이처럼 소피아를 외롭게 한 일상적 관습의 벽은 막강했다. 그녀가 이룬 업적은 그녀 개인의 천재성뿐만이 아니라 비공식적 차원에서 행해진 아낌없는 성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피야의 일대기는 한 개인이 시대의 장벽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진보적이고 보다 유연한 사고방식을 지닌 집단이 주변에서 버팀목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성차별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차별이 극복되는 과정에서 일상적인 지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시이기도 하다.(김윤은미 기자) 

10. 02. 10. 

Софья Ковалевская Софья Ковалевская. Воспоминания

P.S. 러시아에서 출간된 코발레프스카야의 회고록이다. 기사에서 그녀 역시 '허무주의자'였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흥미롭게도 '니힐리스트'(허무주의자)란 중편소설도 남기고 있다. 오른쪽은 <어린시절의 화상>과 <여성 니힐리스트> 두 편을 같이 묶은 책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스피 2010-02-10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의경우 성도 남성와 여성에 따라서 격변화를 일으키나요.부부인것으로 알고 있는데 남편은 코발레프스키와 코발레프스카야라고 하네요^^

han86866 2010-02-12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냐 코발레프스카야 이야기를 여기서 보는군요 사실 수학사에서 유명한 여성수학자라고 하면 누가 뭐래도 에미 뇌터가 첫손에 꼽힐겁니다 코발레프스카야가 여성수학자가 드물던 시기에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거의 최초의 여성수학자라고 한다면 뇌터는 단지 여성이기때문이 아니라 그업적 자체도 당시(20세기 초중반)활동하던 다른 일급수학자들과 비교해도 발군이었습니다 그 유명한 괴팅엔 수학학단의 일원이었고 오늘날에도 학부 대수학교재에서부터 대학원과정까지 그녀가 남긴 많은 정리들이 연구되고 강의되어지고 있습니다

로쟈 2010-02-15 12:10   좋아요 0 | URL
네, 저로선 '여성'뿐만 아니라 '러시아 수학자'라는 데 관심이 있어서요. 뇌터의 경우도 평전이 소개되면 좋겠습니다...
 

러시아의 여성 작가 빅토리야 토카레바(1937- )의 중편소설 <눈사태>(지만지, 2010)가 번역돼 나왔다. 내가 알기에 토카레바의 작품으론 <러시아 여성의 눈>(경희대출판부, 2005)에 실린 단편 <늙은 개>가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전부다(이 단편집에는 바실렌코와 울리츠카야, 페트루셉스카야 등의 작품이 더 실려 있다).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해설을 보니 현대 러시아인들의 일상생활을 담은 '세태묘사'의 대표적인 작가로 소개된다. 역자는 토카레바의 중단편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는데, 국내에서는 유일한 전공자이지 않을까 싶다.   

토카레바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현역 여성작가로 톨스타야, 페트루셉스카야, 울리츠카야 등과 함께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정도다. 이 중 톨스타야의 경우는 작품집이 두 권 번역돼 있고, 가장 기대를 걸고 있는 울리츠카야의 경우도 조만간 한두 작품이 소개될 예정인 것으로 안다.    

 

다시 토카레바로 돌아오면, '일상적 휴머니즘' 작가로 분류된다고 하는데, "고단한 일상에 지친 영혼들을 '살아있는 사랑의 작용 영역'으로 끌어들인다는 의미의 '일상적 휴머니즘'이란다. <눈사태>는 1995년에 발표된 작품인데, 흥미로운 건 2001년에 영화화되기도 했다는 점. "불륜, 욕망, 이혼, 가족의 해체, 마약, 알코올중독 등과 인간존재의 근원적 질문인 인간의 운명, 삶, 사랑, 행복" 등을 다룬다고 한다. 간단한 줄거리는 이렇다고.  

주인공 메샤체프는 알코올중독자 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멸시와 천대를 받았던 유년의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지만, 중년이 된 지금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이며, 안정된 가정의 성실한 가장으로 나름대로 성공한 인물이다. 그러나 음악과 가족밖에 모르던 그에게 젊고 아름다운 률랴가 나타나면서 그의 인생은 한순간에 파멸을 향해 치닫는다. 결국 그는 느닷없이 밀어닥친 '눈사태'와 같은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의 욕망에 휩쓸려 여태까지 쌓아올린 삶의 모든 것을 상실해버리고(가족과 재산은 물론, 심지어 그의 음악적 재능까지도),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죄책감만을 안고 홀로 남게 된다.

한국형 드라마로도 잘 어울릴 만한 스토리다. 영화로는 어떻게 옮겼을까? 한번 찾아봐야겠다... 

10. 01. 31.  

P.S. 참고로, 내가 기대하는 류드밀라 울리츠카야(1943- )의 책들은 독어와 영어로 다수 번역돼 있다. 영역된 작품으론 <소네치카>, <메데이아와 그녀의 자식들>, <장례식 파티> 등이 알라딘에서도 검색된다. 외모에서부터 지성파 작가란 인상을 팍팍 심어준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펠릭스 2010-01-31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변동과 이변 그리고 갈등 등이 호기심을 갖게 합니다. 영미문화권 외로 동아남나 일본문학,스페인 문학, 프랑스와 독일 문학 등을 비롯하여 제3세계 문학들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러시의 현대문학은 어떤 흐름인지를 여류작가의 작품으로 알 수 있겠군요.

로쟈 2010-02-01 14:56   좋아요 0 | URL
상대적 덜, 미흡하게 소개되고 있어서 아쉽습니다...
 
레르몬토프의 고독

아트앤스터디의 러시아문학 강의에서 어제(라고는 하지만 몇 시간 전이다) 레르몬토프의 <우리시대의 영웅>(민음사, 2009)을 다루었다. 책이 절판되어서 한동안 다루지 못하다가 작년 가을에 새 번역판이 나온 덕분에 강의 커리에 포함시키고 있고, 어제는 두 번째 강의였다(아무래도 푸슈킨보다는 입에 덜 익었다). 내가 강조한 건 소설의 주인공 페초린이 자의식을 가진 근대적 개인의 원형이라는 점이다(레르몬토프가 없었다면 도스토예프스키 문학도 가능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사실 레르몬토프(1814-1841)는 내가 20대 시절에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가장 좋아한 작가였다. 나이를 먹으면서, 곧 늙어가면서 그의 고독과 낭만적 환멸에 얼마간 거리를 두게 됐지만, 엊그제 안나 게르만의 목소리로 레르몬토프의 시 '나 홀로 길을 나선다'에 곡을 붙인 노래를 들으려니까 다시금 뭔가 아련한 감상 같은 것에 젖게 되었다(http://www.youtube.com/watch?v=Bl9VDbRwOxo). 그녀의 노래는 국내에서 언젠가 TV드라마의 주제가로도 쓰인 적이 있다. 오랜만에 찾아보니 <우리시대의 영웅>의 새 영화 버전도 유튜브에는 올라와 있다(영화는 1966년판, 1975년판, 2006년판 등이 있다). 겸사겸사 어제 강의 자료의 일부와 함께 이미지들을 올려놓는다. 아래 자료는 박사학위논문의 일부이기도 한데(학위논문인지라 말은 좀 어렵게 써놓았다), 논문은 올 하반기에 단행본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푸슈킨이 결정적인 장면에서 오네긴과 작별을 고하는 데 반해서, 레르몬토프는 그의 분신적 형상인 페초린과 보다 긴밀한 유대를 보여준다. 이것은 그가 1인칭 시점하에 페초린의 내밀한 언어로 보다 밀착된 페초린의 형상을 묘사하고 있는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가령, 레르몬토프는 <우리시대의 영웅>(1840)에서 (남편에 대한 지조를 맹세한 타치야나와는 달리) 남편에게 페초린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고 떠나가 버린  베라를 (벼락을 맞은 듯이 서 있던 오네긴과는 달리) 있는 힘을 다해 뒤쫓아 가는 페초린을 그대로 보여준다.  

만일 내 말이 10분만 더 달릴 힘이 있었다면, 모든 것이 구원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그마한 계곡에서 올라와 산에서 벗어나 가파른 모퉁이에 이르자, 말은 쓰러지고 말았다. 나는 곧바로 뛰어내려, 말을 일으키려고 고삐를 잡아당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겨우 들릴 듯한 신음소리가 꽉 다문 이빨 사이로 새어나왔다. 몇 분 후에 말은 숨을 거두었다. 나는 마지막 희망을 잃어버린 채 홀로 초원에 남았다. 걸어서 가보려고 했지만,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낮의 불안감과 간밤의 불면 때문에 기진맥진한 나는 축축한 풀밭에 쓰러졌다. 그리고는 어린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민음사판으론 217쪽) 

그렇게 울기 시작한 페초린은 한참동안 통곡을 하며, 그의 성격을 특징짓는 ‘의연함’과 ‘냉정함’은 ‘연기처럼’ 사라져버리고 만다. 즉 인용한 대목에서는 페초린의 가장 약한 모습이, 그의 ‘성격갑옷’이 일시적으로 제거된 채 드러나 있다. 그리고 그 본모습이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어린아이’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 요구는 현실에서 좌절되기 마련이며, 이에 대한 정서적인 상관물이 어린아이 같은 울음이다. 그것은 페초린 자신이 곧 자인하듯이, 대타자의 시선으로 볼 때에는 경멸적으로 외면할 만한 모습이다. 때문에 평소의 페초린이라면, 철저하게 가장했을 터인데, 이 문제의 장면에서는 그것이 적나라하게 노출되고 있다. 

여기서 페초린 자신의 분신이자 그의 신체의 연장(extension)으로서의 말은 가파른 모퉁이에서 쓰러지는데(이 말이 쓰러지자 페초린은 더 걷지 못한다), 모퉁이란 두 공간이 서로 이접되는 지점을 말한다. 그것은 시간의 모퉁이, 즉 전환점에서 시간이 이접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시간축 상의 전환점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상상계와 상징계의 이접이다. 그것은 어린아이와 (예비)어른의 경계이다. 하지만, 페초린의 ‘어린아이’는 이러한 상징계적 차이의 질서를 수용하지 못하며/않으며 상상계적 자아상에만 집착한다. 성숙한 어른이 되는 것은 자신의 왜소함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인 연후에만, 전능함에 대한 자신의 꿈을 단념한 연후에만 가능하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요구에는 이러한 인정/단념이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그는 전부에 대한 요구를 계속적으로 고집하며 불가능성에 도전하는 것이다. 



<우리시대의 영웅>에서 페초린은 바로 그러한 ‘어린아이’이며, 그런 점에서 작가 레르몬토프의 형상을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페초린에게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억압돼 있으며, 카프카즈에서 ‘아버지’를 대신하는 인물인 막심 막시므이치는 너무 나약한 권위의 ‘아버지’인데(페초린에게 권위적인 아버지상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타만>에서의 얀코가 유일한다), 이것은 레르몬토프적 상황과 대동소이할 따름이다. 레르몬토프적 상황이란 것은 2자적 관계에서 동일시의 대상이었던 ‘어머니’를 상실하고 3자적 관계에서 그가 이상적-자아로서 지향해야 할 ‘아버지’는 약화/결여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그것을 낳은 원인은 어머니의 이른 죽음이기도 했고, 너무 이른 결혼과 출산으로 인한 부부간의 불화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러한 결과로 그는 상상계와의 이접 이후에 상징계에서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할당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에게선 ‘상징적 아버지’를 ‘상상적 아버지’와 궁극적으로 구별되지 않는 ‘팔루스적인 어머니’ 혹은 ‘남근을-가진-어머니’가 대신한다.  

‘남근을-가진-어머니’란, 성교 중에 아버지의 음경을 ‘잘라내어’ 자기 것으로 만든 어머니, 혹은 아버지로부터 팔루스의 상징을 ‘거세’한 어머니이다. 레르몬토프에게서 이러한 팔루스적인 어머니상과 일치하는 것은 외조모 아르세니예바 부인이다. 이러한 어머니상은 자신 속에 ‘나’를 다시 집어넣은, ‘나’를 다시 흡수한, 그래서 ‘나’를 자신의 팔루스로, 혹은 무(無)로 환원시켜버리는 ‘어머니’이며, 그것은 행복과 죽음의 현혹이다. 이에 대한 레르몬토프적인 공포는 페초린의 결혼에 대한 공포에 반영돼 있다. 그에게 결혼이란 말은 마법과도 같은 힘을 발휘하는데, 불가피한 결혼에 대한 연상은 모든 열정에 종말을 가져오며, 그의 마음을 돌처럼 굳어버리게 만든다. <공작의 딸 메리>에서의 그의 고백을 직접 들어보자.  

나는 이 결혼만 아니라면 모든 걸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 스무 번이라도 내 생명을, 심지어 명예까지도 내기에 걸겠다... 하지만 나의 자유는 팔아넘길 수 없다. 무엇 때문에 나는 그것을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가? 그 속에 있는 무엇이 내게 필요하단 말인가? 나는 무엇이 되려는가? 나는 미래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사실은 정말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어떤 타고난 공포이며 설명할 수 없는 예감이다. 거미나 바퀴벌레나 쥐들을 본능적으로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고백해야할까? 내가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 한 노파가 어머니에게 나의 대한 점을 쳐준 일이 있다. 그때 노파는 ‘악한 아내 때문에 죽게 될 것’이라고 내게 예언했다. 그 말은 나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다. 나의 마음에는 결혼에 대한 극복하기 힘든 혐오감이 생겨났다... 그러는 사이에 뭔가가 노파의 예언이 실현될 거라고 내게 말해주곤 한다. 적어도 나는 그것이 늦춰지도록 노력할 것이다.(민음사판으론 186-7쪽)

여기서 페초린은 자신의 결혼에 대한 공포에 대해서 두 가지 이유를 댄다. 하나는 사람들이 거미나 바퀴벌레, 쥐를 무서워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타고난 공포’라는 것이고, ‘악한 아내 때문에 죽게 될 것’이라는 점쟁이 노파의 예언 때문이라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하지만, 결혼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란 것은 인간의 본성에 각인될 수 없는 것이며, 이 ‘타고난 공포’는 노파의 예언 때문이라는 두 번째 이유와 양립되지 않는다. 또한 노파의 예언이 두려워서 결혼에 대한 혐오감을 갖게 됐다는 것도 사실 <운명론자>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자신의 운명을 시험해보는 페초린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순적인 것이다. 페초린적인 태도는 결혼이 두려워서 회피하기보다는 정말로 자신의 예언이 실현되는가를 확인해 보기 위해서 결혼하는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나보코프는 페초린의 죽음이 페르시아에서 돌아오는 도중의 불행한 결혼과 연관되었으리라고 추측한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보자면, 이 두 가지 이유는 페초린의 제2의 본성(second nature)으로서 결혼에 대한 공포의 직접적인 원인을 가장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그에게서 억압되어 있는 직접적인 원인이란 무엇일까? 레르몬토프의 전기와 관련하여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남근을-가진-어머니’에 대한 공포, 즉 거세 공포이다. ‘본능적으로’란 말은 현대적인 관점에선 ‘무의식적으로’란 의미인데, 거미나 바퀴벌레 등 다리가 많은 동물들의 무의식적인 상징 또한 거세공포이다(다리가 많은 것은 자신의 남근이 거세되지 않을까라는 불안 심리의 반영이다). 그리고 그것의 원인으로서 ‘남근을-가진-어머니’는 자궁회귀본능의 대상이 되는 어머니와는 다른 어머니이며, 이 ‘팔루스적인 어머니’로의 회귀가 ‘어린아이’로서는 죽음에의 현혹이면서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페초린의 경우에 노파의 예언이 실제로 있었다면, 그것은 이 거세 공포에 대한 상징적인 명명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노파의 예언은 그의 거세공포에 대한 사후적인 승인에 해당한다.   

결혼의 불가라는 예언의 지평 속에 놓여 있는 시간은 연속적이며 균질화된 시간이다. 그러한 지평에서는 시간의 질적인 비약이 가능하지 않다. 레르몬토프의 공간적 상상력이 대지와 하늘을 두 축으로 한 은유적인 상상력이었다면, 그의 시간적 상상력은 (페초린의 경우에 미루어서 말하자면) 예언에 속박된 환유적 상상력이다. 이러한 환유적 상상력 속에서 ‘나’는 세계 전체로 확장될 수 있지만, ‘너’라는 타자의 세계로의 비약은 가능하지 않다. 때문에 레르몬토프의 창작세계에서 ‘나’의 고독은 필연적이다... 

10. 01. 19. 



P.S. 2006년작 <우리시대의 영웅>의 하일라이트는 http://www.youtube.com/watch?v=UENblKYDTMY 참조. '공녀 메리'('공작의 딸 메리') 부분이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0-01-19 15: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9 2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10-01-19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馬)이라는 상징성에 남성상(男根)까지 비유하는 건 좀 무리겠죠?" -책도 안 읽어보고 페이퍼의 내용으로만 생각해보는 개인적인 의견-

로쟈 2010-01-19 23:24   좋아요 0 | URL
러시아문학에선 보통 여성을 상징합니다.^^

펠릭스 2010-01-19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간 단락은 '페티시즘(Fetishism)'과 비슷한데요.

로쟈 2010-01-19 23:26   좋아요 0 | URL
연물주의란 뜻으로 하신 말씀인가요?^^

펠릭스 2010-01-20 08:11   좋아요 0 | URL
예,,신체의 특정부위나 특정 물건에 대한 집착으로 대리만족하는 경향인데요. 현대인들에게 나타나는 정신적인 왜곡현상중에 하나로 일본의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들에서 뛰어나게 묘사되던데요.

카스피 2010-01-20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르몬토프의 우리시대의 영웅이 재간되었군요.오래전에 읽은 책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다시 한번 읽어봐야 겠네요^^

로쟈 2010-01-21 07:29   좋아요 0 | URL
네, 고전은 정의상 다시 읽는 책이죠.^^

노이에자이트 2010-01-21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의 남자배우가 정말 미남이군요.여배우들보다 더 눈에 띕니다.특히 눈썹과 수염이 예술이네요.

펠릭스 2010-01-22 19:43   좋아요 0 | URL
권총든 얼굴이 로쟈님과 비슷(?)하네요.

노이에자이트 2010-01-22 23:50   좋아요 0 | URL
그건 좀...
 

극단 전망의 <바냐 아저씨>를 오늘 관람할 예정이다. 어제 프레스콜이 열렸는데, 소개기사를 미리 읽어보았다. 올해는 러시아 연출가 레프 도진의 <바냐아저씨>도 5월에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된다(http://www.lgart.com/2010/micro_kor/theatre_03.html). 지난 2004년에 모스크바에서 보았던 작품이어서 감회가 없지 않다. 여러 작품이 한꺼번에 찾아와 '체호프의 가을'로 불렀던 2008년 가을에는 못 미치겠지만, 체호프 탄생 150주년을 맞는 올해는 적어도 공연에 있어서만큼 '<바냐 아저씨>의 해'로 불러도 좋겠다(개인적으론 올해 체호프에 대한 강의 레퍼토리도 <바냐 아저씨>로 바꾸었다). 두 <바냐 아저씨>에 대한 소개를 옮겨놓는다.     

아츠뉴스(10. 01. 07) 인생의 아이러니와 닮아있는, 연극 '바냐아저씨'  

2010년 1월 극단 전망이 선보일 연극 <바냐아저씨>(연출 심재찬)는 20세기 현대연극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리얼리즘 연극의 대가인 안톤 체홉의 4대 작품 <갈매기>, <세자매>, <벚꽃동산>중 하나로, 안톤 체홉의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는 첫 공연이자 아르코예술극장의 2010년 첫 번째 작품으로 선정되어 관객들에게 신뢰와 기대감을 고조시킬 것이다.

 

사실주의 연극의 대가 안톤 체홉의 4대 희극중 하나인 <바냐아저씨>의 이번 연극무대는 탁자2개와 의자3개뿐인 주 공간(사실적 연기 공간)과 8명의 각자 독립된 자아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무대 가장자리를 둘러싸고 있는 8개의 자아공간은 스스로에겐 자유롭지만 외부와 단절되어있어 마치 새장에 갇혀있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으며 이는 서로간의 대화와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작품의 주제를 공간적,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무대 위 주 공간 안의 두 개의 탁자는 각 막마다 그 위치가 변화하고 그에 따라 달라지는 배우들의 동선은 각 장면이 갖는 메시지들과 인물들 간의 관계, 인물의 감정선 등을 관객에게 뚜렷하게 전달해주고자 한다.

미니멀하고 비현실적인 이번 무대는 '인간에 대한 통찰력(심리, 이중성)'이 대단한 체홉의 작품을 제대로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무엇보다 <바냐>라는 인물에 포커스를 두고자하는 심재찬 연출과 하성옥(무대디자이너), 최형오(조명디자인), 김철환(음악), 김혜민(의상), 이동민(분장)등 최고의 스텝들이 참여해 관객에게 의미를 더 잘 전달해줄 것으로 조명된다.

또한 연기파배우 '김명수, 김수현, 이지하, 김지성, 조한희, 이종구, 전국향, 한성식, 강현우'가 선보일 사실주의적 연기가 완벽한 앙상블을 이룰 연극 <바냐아저씨>는 2010년 1월 7일부터 1월 17일까지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김수정기자)  

  

레프 도진&말리 극장: 바냐 아저씨

이 시대 연극이 존재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를 깨닫게 해 주는 연출가, 세계가 사랑하는 연극의 거장 레프 도진. 그가 이끄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말리극장이 2001년 <가우데아무스>와 2006년 <형제자매들>에 이어 안톤 체홉의 <바냐 아저씨>로 다시 돌아온다.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유산 위에 실험적이면서도 진보적인 연극언어를 펼쳐온 레프 도진은 1983년 상트 페테르부르크 말리극장의 예술감독으로 취임한 이래, <모스크바의 하늘>, <집>, <형제 자매들>, <플라토노프 제목없는 희곡>, <체벤구르>, <갈매기>, <바냐 아저씨> 등 주옥 같은 레퍼토리로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이름없는 작은 극장에 불과했던 말리 극장을 세계적인 예술극장으로 키워냈다. 레프 도진은 이미 러시아 연극계 최고 권위의 황금 마스크상을 세 번이나 수상한 것을 비롯해 피터 브룩, 하이너 뮐러, 피나 바우쉬, 아리안느 므누슈킨 등이 수상한 바 있는 유럽 연극상을 수상하였고, 영국 로렌스 올리비에상, 프랑스 비평가상, 이탈리아 UBU등 세계 유수의 연극상을 다수 수상하며, 명실공히 세계 연극계의 거장으로 존경 받고 있다

피터 브룩은 말리극장을 ‘세계 최고의 앙상블’이라고 칭한 바 있다. 레프 도진의 연극이 무대 위의 삶을 실제로 믿게 하는 힘, 배우들의 삶에서 바로 나 자신의 삶을 보게 만드는 힘을 발하는 이유는 바로 완벽하게 구현된 인물들, 그리고 그 관계 속에 존재하는 뛰어난 앙상블에 있다. 레프 도진은 관객들이 지닌 평가의 잣대를 무장해제시키고 생생한 삶의 진실을 마음 가득히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만든다.

레프 도진은 ‘바냐 아저씨’를 체홉 작품 중 가장 아름다운 ‘다이아몬드’(정수)로 꼽는다. 그가 스스로 고백하기를 ‘20년 동안 계속 생각해 왔으나 감히 손을 대지 못하였다가’ 2003년 드디어 무대화했다. 그의 오랜 기다림과 숙고는 체홉 연극이 담고 있는 인간성에 대한 다각적이고 깊은 통찰을 놀랍도록 디테일하게, 그리고 더할 수 없이 명징하게 그려내고 있다.

사랑과 상실, 인생의 무상함과 그럼에도 또 다시 견뎌내야 하는 삶. 레프 도진과 상트 페테르부르크 말리 극장은 ‘바냐 아저씨’를 통해 우리 각자가 어떻게 그 순간들을 살아내는지 들여다 보게 해 줄 것이다.  

10. 01. 08.  

P.S. <바냐 아저씨>의 가장 유명한 영화판은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 작(1970)이다(콘찰로프스키에 대해서는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 실린 대담도 참고할 수 있다). 지금은 구하기 어렵지만, 국내에도 비디오로 출시된 적이 있다. 자막은 없지만, 유튜브에 전편이 올라와 있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시간을 내보셔도 좋겠다(http://www.youtube.com/watch?v=JkqQXu9T2KI). <전쟁과 평화>의 감독 세르게이 본다르추크가 바냐의 친구인 의사 아스트로프로 등장한다...  


댓글(10) 먼댓글(1)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숲귀신과 바냐 아저씨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4-22 00:20 
    안톤 체호프 원작의 <숲귀신>이 이번주 일요일까지 대학로 게릴라극장에서 공연된다. 여유가 없다 보니 관람기회는 놓쳤는데, 그래도 리뷰는 챙겨놓는다. 드디어 내달초에 찾아오는 러시아 말리극단의 <바냐 아저씨>공연 안내와 함께. 이미 여러 차례 예고한 바 있지만 도진의 공연을 다시 보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뉴스컬처(10. 04. 19) 121년 만에 빛을 본 연극 [숲귀신]&#
 
 
sophie 2010-01-08 0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리극장이 한국에서 <벚꽃동산>도 했던 것 같은데 다른 극단이었는지 확실치 않네요. Lg 아트센터는 다 좋은데 관람료가 지나치게 비싼 것 같아요. 오늘 브로츠와프에 있는 그로토프스키연구소에 들렀다가 피터 브룩의 <11,12>를 한다고 해서 살까말까 하다가 샀습니다. 티켓값이 40즈워티(16000원)이던데요? <바냐아저씨>가 무대에 오르신다는 소식은 반가운 소식이네요.

로쟈 2010-01-08 10:31   좋아요 0 | URL
말리극장이 재작년에 <세자매>를 공연했었죠. <벚꽃동산>은 제가 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어요. 러시아에서도 관람료는 저렴한 편입니다. 우리가 상대적으로 좀 비싸죠. '일상화' 돼 있지 않아서겠ㅈ죠...

sophie 2010-01-09 05:30   좋아요 0 | URL
<벚꽃동산>은 호암아트홀 개관기념 공연이었다네요. 워낙 오래전이라 커다란 벚꽃나무만 기억에 남아있어요. <바냐아저씨>도 오래전에 읽어서 무척 좋았다는 기억만 남아있어서 아마 공연을 보게 된다면 다시 읽어야할 것 같아요. 그런데 참 이상한 건 체홉의 대표작들을 읽고 나면 전체가 한 작품인 듯 이 작품이랑 저 작품 같고 저 작품이 이 작품 같아요. ^^;;

로쟈 2010-01-09 09:41   좋아요 0 | URL
체홉을 잘 아신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2010-01-08 2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9 09: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9 0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9 0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9 0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미뜨리 2010-01-13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번에는 모스크바 말리극장이 <세자매>를 선보였는데, 올해는 페테르부르크의 유럽극장이 <바냐 외삼촌>을 가지고 오네요. 한국에서는 도진 선생이 어떻게 상연하련지 매우 궁금합니다. 아무튼 모두에게 유익한 공연되리라 봅니다. 늘 좋은 소식 감사드립니다.

추신: <갈매기>와 더불어 <벚나무밭>에 이르기까지 체호프의 4대 희극이라고 하셨는데 매우 흥미로운 지적이네요^^ 저의 내공으로는 아직 이해할수 없는 점도 많지만 일면 동의하는 대목도 적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