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달 예술의전당에서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가 개관20주년 기념 공연의 하나로 무대에 오른다. 자주 공연되는 작품이긴 하나 이번 공연이 주목되는 것은 러시아 연출가 유리 부투소프 때문이다. 얼핏 생소한 이름이지만 지난 2003년 그가 연출한 <보이체크>를 본 관객이라면 '아, 그 사람!'이라고 기대를 가질 법하다. 러시아 최고의 연극상인 황금마스크상 연출가상 수상자이니 허명은 아니다. 곧 거장급 연출가로 성장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내달의 가장 기대되는 공연이다.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한겨레의 관련기사는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317233.html 참조).

매일경제(08. 10. 20) 안톤 체호프의 연극 `갈매기` 연출가 유리 부투소프

"옷을 다 벗어보세요."

안톤 체호프의 연극 `갈매기` 연출을 맡은 러시아 대가인 유리 부투소프(43)의 갑작스러운 주문에 배우 김태우 씨(트레플레프 역할)는 적잖이 당황했다. 어머니의 애인에게 사랑하는 여자를 뺏기고 작가의 꿈마저 좌절된 트레플레프가 자살을 결심하는 순간 무대에서 옷을 갈아입으라는 지시였다. 얼굴 표정만으로 심리 상태의 변화를 보여주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과장되고 극단적인 설정을 도입하려는 의도다. 물론 대본에는 없는 장면이다.



이렇듯 부투소프의 연극은 연습 과정에서 끊임없이 진화하고 변하는 `생명체` 같다. 배우의 모습과 움직임, 무대 세트를 보면서 떠오르는 영감에 따라 대사와 장면을 바꾼다. 어떤 작품이 생산되는지는 오직 공연날에만 확인할 수 있다. 11월 7~23일 예술의전당 공연을 앞둔 그는 "국가와 민족에 따라 사람이 다르듯 배우에 따라 연극도 달라진다"며 "순간순간 나의 느낌을 무대에 올린다는 생각으로 연출한다"고 말했다.

원작의 향기를 살리기 싫어하는 `나쁜 연출가`인 그의 무대는 삐딱하고 파격적이다. 112년 전 작품을 올리면서 의상과 무대 세트, 언어를 현대적으로 바꿔버렸다. 보통 `갈매기` 무대 세트는 호수와 정원이 등장하지만 그는 7m 높이의 계단 두 개와 거대한 창문으로 꿈을 이루고 싶은 인물들의 욕망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원작에서 검은 옷만 입는 마샤 역할의 내면 속에 들끓는 감정을 포착해 하얀 원피스와 노란 구두, 빨간 모자, 분홍색 선글라스를 착용하도록 했다.

도대체 부투소프는 `갈매기`가 어떤 작품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러한 과감한 변형을 시도하는 것일까. 그는 "죽음과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다. 최근 나의 가장 큰 관심사이기도 하다"며 "연극을 보면 알 것"이라고 불친절한 답변을 내놓았다. 이에 메드베젠코 역할을 맡은 김경익 씨가 부연설명을 했다. 어머니는 탄생을 의미하며 죽음과 더불어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는 것.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태어나고 죽게 되는 부조리한 삶이 복잡하게 얽혀 사는 세상을 체호프 특유의 언어로 들려준 작품이 바로 `갈매기`다.



체호프의 작품 세계와 연결 지점을 찾는 데 애를 먹었다는 부투소프는 "체호프는 첫 번째 부조리극 작가이자 의사의 눈으로 세상을 본 냉혹한 작가"며 "체호프보다 더 어려운 작가를 만나는 것도 어려우며 그가 말하는 우리 인생에 대한 진실은 불편하고 단순명료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2003년 예술의전당에서 밀도 높고 강렬한 연극 `보이체크`를 선보인 후 서울에서 두 번째 작품을 올리게 됐다. 한국 배우들과의 작업에 대해 "느낌과 예감이 좋은 배우들이다. 배우려는 학생의 태도가 있고 발전 가능성도 높다"고 평가했다.



부투소프는 러시아를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가장 바쁜 연출가. 군더더기 없이 한 가지 주제에 집중하는 연출 스타일로 연극의 고전인 `고도를 기다리며`를 새롭게 각색해 러시아 최고의 연극상인 `황금마스크상 최고 연출가상`을 수상했다. `황금 소피트상`과 `스타니 슬라브스키상` 등 권위 있는 상을 휩쓸며 관객을 사로잡는 그에게 자신의 연극 속 매력을 이야기해 달라고 하자 "그건 관객에게 물어봐야 할 질문"이라며 "나는 상을 달라고 한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전지현기자)

08. 10. 20.

P.S. 아래는 부투소프가 모스크바예술극장에서 올린 <햄릿>의 한 장면. 그의 독특한 연출 스타일과 '색깔'을 엿보게 한다. 렌소비에트극장에서 공연한 <보이체크>의 한 장면은 http://kr.youtube.com/watch?v=ZSv8orC-2QI 참조. 한국에서의 공연을 떠올리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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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8-10-21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젤 앞자리로 예매했습니다. 이제 갈매기를 읽어야겠지요. 학교다닐 때 봤던가 안 봤던가 기억도 안 납니다. ^^;

로쟈 2008-10-21 20:48   좋아요 0 | URL
너무 앞은 불편하실 듯한데요...^^;

심술 2008-10-21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투소프 씨, 되게 고집스럽게 생겼네요.

로쟈 2008-10-21 23:20   좋아요 0 | URL
실력 있는 고집은 괜찮습니다.^^
 

러시아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는 기사가 눈에 띄기에 스크랩해놓는다. 근래에 읽은 관련기사들 가운데 가장 흥미롭다. 인구학이 얼마나 많은 걸 이해할 수 있게, 또 예측할 수 있게 해주는지 다시금 확인시켜주는 기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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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08. 10. 18) [해외논단]줄어드는 인구… 러시아의 위기

서방이 러시아의 국력 부활과 영향력 행사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지금 서방이 직면한 중대한 여러 가지 도전과 더불어 러시아에 관해 중기 및 장기 전망을 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러시아가 석유 판매로 부를 축적한 것은 사실이며 블라디미르 푸틴이 권력 장악을 위한 새로운 방식을 개발한 매우 창의적이고 야심적이며 무자비한 지도자로 등장한 것도 사실이다. 그루지아 침공 작전으로 판단하건대 러시아 군부는 1990년대의 최저점에서 다시 올라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구학적으로 말할 때 러시아는 아직 결정적 약점을 지닌 거인이다. 러시아는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어 2050년이면 9900만명이 될 것으로 인구학자들은 내다본다. 일부 전문가들은 7700만명까지 내려갈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예상한다. 선진국들 가운데서 인구가 가장 많이 증가하고 있는 미국은 그 무렵 4억 1900만명이 될 전망이다. 21세기의 형태를 결정하는 데 어느 나라가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것인지는 불문가지다.

미국의 관점에서 이처럼 희망적인 사태 전망을 할 수 있는 까닭을 최근 발표된 연구 보고서가 밝히고 있다. 리처드 잭슨과 닐 하우는 국제전략연구소가 펴낸 공저 "대국들의 노화: 21세기 인구학과 지정학"에서 그 이유를 설명했다. 러시아의 인구 감소는 그동안 인구학자들의 연구대상이었으나 이런 종류의 예측이 정치 토론의 주제로 널리 부각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신 맬더스파 학자들은 인간 자체가 문제라고 서방의 정치가들과 학자들을 설득했다. 그들은 인구 증가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처럼 파괴적인 사고방식은, 서구 특히 러시아의 인구가 앞으로 수십 년 동안 급격히 줄어들 가능성에 의해 뒤집히고 있다. 잭슨과 하우는 "광범한 전염병이 발생하지 않은 상황에서 진행 중인,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인구의 급격한 감소를 극복하는 것이 러시아의 과제"라고 쓴다.

러시아는 현재 매년 대략 70만명꼴로 인구가 줄고 있다. 이런 인구 감소는 선진세계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었다. 출산율의 급격한 하락과 더불어 평균수명이 증가하여 노령인구가 늘어나는 서유럽과 달리 러시아는 평균수명과 출산율이 동반하락하고 있다. 출산율은 현재 대략 1.2% 내지 1.3%이며 러시아 남성의 평균수명은 1950년대 수준인 59세로 내려가고 있다. 이는 일본보다 20년 적고 방글라데시보다 3년 낮은 것이다. 그 원인은 간단하다. 즉 의료보장제도가 극도로 빈약하고 알코올 남용이 광범하기 때문이다.



석유 수입으로 축적된 부 덕분에 러시아가 당장은 강력해보일지 모르나 인적 자산이 급격히 잠식된 결과 경제성장의 부진은 물론 사회 및 가족의 유대마저 약화되고 있다. 푸틴은 인구 감소가 "오늘날 우리나라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잭슨과 하우는, 러시아의 인구 감소가 오늘날 정치현안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러시아의 무슬림 인구가 슬라브 인구에 비해 불균형적으로 증가하여 인구구성에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무슬림 인구는 2050년에 러시아의 최대 인구집단이 될 전망이다.

위협을 받는 인종집단은 비진보적인 각종 정치적 해결책을 선호할 가능성이 있다. 푸틴의 영구 독재권력 구축 시도가 그런 정책의 예다. 비 진보적 정책은, 국내 문제에 대한 관심을 돌리기 위해 외국을 공격하는 결과를 빚을 수 있다. 그루지아의 경우가 그런 사례가 될 수 있다.

러시아와 서유럽의 인구가 감소하는 가운데 미국은 견실한 출산율과 이민유입으로 인구가 적절하게 늘어나고 따라서 선진세계에서 영향력이 커질 전망이다. 미국이 1820년에 선진세계에서 차지한 인구비율은 6%였다. 지금은 34%이며 2050년에 43%가 될 전망이다. 미국의 인구와 영향력 증대 전망이 실현되느냐 여부는, 자유와 기회가 보장되고 시민 사회가 번영하는 미국 사회를 보호하고 보존하는 데 달려 있다.(헬리 데일 美 칼럼니스트)

정리=오성환 외신전문위원
Russian decline
Helle Dale

As the West looks with great concern at a resurgent Russia and seeks ways of coping with its power projection, it is worth looking at the medium- and long-term perspective as well as the immediate and definitely sizable challenges we are facing.

It is true Russia is indeed flush with oil wealth, and in Vladimir Putin it found an ambitious and ruthless leader who is highly creative in finding new ways to hold on to power. Russia's military seems to be on the way back from its nadir of the 1990s, judging by its performance in Georgia (though the sheer size of the Russian military vs. that of Georgia must be factored in).

Still, Russia is a giant on feet of clay, demographically speaking. Russia is a country in such steep decline that it is estimated by demographers to decline to 99 million by 2050. Some even predict the figure as low as 77 million. By then the United States, whose population growth continues unparalleled among developed nations, will have an estimated 419 million people. Which nation do you think will be more powerful in shaping the 21st century?

The reasons for this rather hopeful state of affairs - looked at from an American point of view, of course are explored in a new study, recently published by the Center for Strategic and International Studies and authored by Richard Jackson and Neil Howe, "The Graying of the Great Powers: Demography and Geopolitics in the 21st Century." Russia's demographic decline has been the subject of demographers like Nicholas Eberstadt at American Enterprise Institute for some time, but predictions of this kind have only far more recently been a subject more broadly of interest in the political debate. Neo-Malthuseans of the 1970s and 1980s used to persuade politicians and scholars in the West that human beings themselves were the problem. Adding more therefore was far from desirable.

But this deeply destructive trend in thinking has now been reversed as populations in the West, particularly Russia, are very likely to plummet irreversibly in the coming decades. "Russia must cope with a rate of population decline that has no historical precedent in the absence of pandemic," the authors write.

Russia is currently losing population at a spectacular rate of 700,000 people per year, which will amount to 31 percent between 2005 and 2050. It is a decline that has started earlier than elsewhere in the developed world. Unlike Western Europe, where you can truly talk about graying populations as life-expectancy has grown in tandem with collapsing birthrates, Russians are experiencing declining birthrates as well as falling life expectancy. Birth rates are now around 1.2 to 1.3, while life expectancy for Russian men is now back to what it used to be in the 1950s - 59 years of age, a full 20 years less than Japanese men and three years less than Bangladeshi men. The causes are not far to seek - a dismal health-care system and vast alcohol consumption.

Oil wealth might make Russia look strong today, but its human capital is being inexorably eroded with consequences for economic growth as well as social and family cohesion. Mr. Putin has called population decline "the most acute problem facing our country today." Attending population decline, write the authors of the study, are political trends that we already see playing themselves out. Ethnic composition will change, for instance, as Russia's Muslim population will grow proportionately to its Slav population. Muslims may be in the majority by 2050. Tendencies towards illiberal political solutions may well be the choice of the threatened ethnic group, as we are indeed seeing in Russia today with Mr. Putin's authoritarian grab for perpetual power. And it may lash out against other nations in a diversion from internal problems - just ask the Georgians.

Meanwhile, the rather distinct silver lining in all of this for the United States is that while Russia collapses and Western Europe declines, the United States will experience healthy population growth due to sound fertility rates and immigration - and with it growing international influence among developed nations. In 1820, the United States held 6 percent of the population of the developed world; today it is 34 percent, and in 2050 it will be 43 percent. "In tandem," write the authors, "the influence of the United States within the developed world will likely rise."

All of this, of course, depends on preserving and protecting an American society where freedom, prosperity, opportunity and civil society flourish. If other countries have forgotten this, let us not do the same.

sisable:상당한 nadir:최저점 feet of clay:결정적 약점 attend:주목하다 lash out:비난하다

08. 10. 19.

P.S. 기사의 필자는 미국의 인구 증가에 대해서 긍정적인 전망을 피력하고 있는데, 그런 전망에 모두가 동의하는 건 아니다. 문제는 인구가 아닌 인구 구성이기 때문이다. 히스패닉 인구가 곧 백인 인구를 추월할 것이라는 사실에서 미국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헌팅턴도 그런 경우이다. 그의 <우리는 누구인가?>도 참고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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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08-10-20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해서 찾아보니 러시아 2008년 현재 인구는 1억 4000만 쯤이더군요.

로쟈 2008-10-20 18:58   좋아요 0 | URL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오늘자 한국일보에 실린 글을 옮겨놓는다(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809/h2008092702460884210.htm). '책과 인생' 코너에 5매짜리 원고를 청탁받고 쓴 것이다. '거창한' 주제를 짧게 쓰려고 하니 특별히 떠오르는 기억도 드물어서 어제 새벽에 책장 가까이에 있는 니진스키의 책을 펴놓고 예전에 쓴 글도 참고하여 몇 자 적었다. '눈물의 바다 러시아 문학'이란 '과장된' 제목은 물론 나의 작품이 아니다...

 

 

 

 

 

 

  

한국일보(08. 09. 27) [책과 인생] 눈물의 바다 러시아 문학

능글맞기도 하지만 괜히 잘 우는 사람들이란 고정관념을 나는 러시아인들에 대해 갖고 있다. 물증을 대라고 하면 내가 만났던 러시아인들이 아니라 내가 읽은 러시아인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실제로 그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직접 보지는 못했으니까. 하지만, 가령 전설적인 무용가 니진스키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울고 싶은데 신은 내게 쓰라고 명령한다. 그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바라지 않는다. 아내는 울고 또 운다. 나 역시 운다."

<니진스키 영혼의 절규>란 책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제목은 조금 과장된 것이다. 정신질환을 앓으며 요양원에 입원해 있던 니진스키가 아예 정신을 놓기 전에 쓴 일기이기 때문이다. 오래전에 나온 같은 역자의 첫 우리말 번역본에는 그냥 <니진스키의 고백>이란 제목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몇년 전 모스크바에서 구한 러시아어본의 제목은 <감정>이다. 물론 이 제목들이야 편집자의 작품일 것이다.

20대 초반의 어느날 나는 지방의 한 시립도서관에서 <니진스키의 고백>을 빌려 읽은 적이 있다. 이렇게 시작했다. "나는 울고 싶은데 신은 내게 계속 쓰라고 명령한다. 그는 내가 빈들거리는 걸 원하지 않는다. 내 처는 줄곧 울고 있다. 나 역시 운다." 이건 뭐 달리 대책이 없다. 읽으면서 같이 우는 수밖에.

니진스키는 고기를 먹으면서 울고, 사랑의 시를 적으면서 울고, 아내의 울음 때문에 또 운다. 그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위대한 예술가' 이전에 '너무나 많은 고통을 받은 단순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 고통은 모든 인간을 사랑하고자 하기에 신조차도 가여워한 한 영혼의 고통이다. 어느 시인을 위해 울어주던 버드나무처럼 그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운다. 그 생각만 하면 나도 눈물이 난다.

아직 능글맞은 중년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빈들거리는 일이 잦은 나는 그런 때마다 반쯤 정신 나간 무용가의 눈물을 떠올리곤 한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러시아문학은 그런 눈물의 바다이기도 하다. 그들은 삶을 너무 사랑한 것이 아닐까?

08. 09. 27.

P.S. 니진스키의 일기 얘기를 꺼낸 김에 관련서들의 이미지도 옮겨놓는다. 먼저 내가 제일 처음 읽은 <니진스키의 고백>(문예출판사, 1975).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발췌본의 번역이어서 <니진스키 영혼의 절규>와는 번역대본이 다르다. 제대로 된 완역본이 1995년 파리에서 처음 출간되었고 1999년에 영역본이 나왔다. <절규>는 그것을 옮긴 것이어서 <고백>과는 차례도 다르다. 내가 아는 러시아어본이 나온 것은 2000년이 돼서다.

이 <고백>은 나중에 구하려고 하니 눈에 띄지 않아서(지금이라면 구할 수 있을 듯싶지만) 한 시립도서관의 책을 복사해서 갖고 있다. 그의 여동생이자 안무가 브로니슬라바 니진스카의 책 <나의 오빠 니진스키>(문예출판사, 1988)와 아내 로몰라 니진스키가 쓴 회고록 <천재는 어디로: 무용의 신 니진스키>(까치, 1981)도 이덕희씨의 번역으로 출간됐다. '니진스키 3종 세트'라 할 만하지만, 나는 따로 갖고 있지 않다.

  

러시아에서 출간된 니진스키 관련서를 오래만에 검색해보았다. 먼저 그의 일기의 러시아어본인 <감정>(2000).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지만 표지는 두 종이 있다. 왼쪽이 더 마음에 들지만 내가 갖고 있는 건 오른쪽.

Вацлав Нижинский ЧувствоВацлав Нижинский Чувство

그의 아내 로몰라의 회고록도 두 종이 눈에 띈다. 그밖에 전기 작가 리처드 버클의 전기 번역서 등이 더 있다. 관련서가 많지는 않은 것이다.

Ромола Нижинская Вацлав Нижинский. Воспоминания NijinskyРомола Нижинская Вацлав Нижински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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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27 14: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27 2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람혼 2008-09-27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의 저공비행'에서 러시아어 책 표지들을 보니까 더욱 반가운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요? 이야말로 '러시아 문학도의 뜨거운 고백'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글 잘 읽었습니다(글을 읽고나니 제목을 붙인 편집자의 선택이 결코 '과장된'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고 있습니다...^^).

로쟈 2008-09-27 23:24   좋아요 0 | URL
원인 제공은 했지만 포커스가 거기에 맞춰질 줄은...^^;

Ritournelle 2008-09-28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서재는 러시아적 세계의 전도사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가끔 러시아어를 배우고 싶은 욕망이 불끈불끈 쏫기도 한답니다.

로쟈 2008-09-28 20:36   좋아요 0 | URL
1년만 배워도 니진스키는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이미 예고된 대로(http://blog.aladin.co.kr/mramor/2234968) '체호프의 가을'이 시작되었다. 이번 가을에 찾아온 모든 공연을 보지는 못하지만 한두 편 정도는 관람할 수 있을 듯하다. 참고가 될 만한 소개 기사들을 한번 더 스크랩해놓는다.

뉴시스(08. 09. 15) 가을 한국연극을 감싸는 체호프 향기

러시아의 소설가 겸 극작가 안톤 체호프(1860~1904)가 가을의 한국에서 부활하고 있다. 일상의 소소한 해프닝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나약하고 추악한 본성을 가차없이 까발리는 것으로 유명한 체호프다. 인간의 보편적 감정인 희로애락을 담은 작품들로 시대와 배경을 초월,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문호다. 러시아 공연팀의 ‘바냐 아저씨’와 ‘세 자매’, ‘바냐 아저씨’를 아르헨티나 식으로 해석한 ‘비련의 여인을 바라보는 스파이’, 체호프의 작품은 아니지만 부인인 배우 올가 크니페르의 이야기를 담은 칠레 연극 ‘체호프의 네바’, 그리고 한국의 ‘벚꽃 동산’ 등이 일제히 무대에 오른다.

‘바냐 아저씨’의 바냐는 러시아 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 중 하나다. 주인공 바냐는 죽은 여동생을 위해 그녀의 남편과 딸을 돌보다 매부가 속물임을 알고는 실망과 허탈에 빠진다. 이 고뇌는 매부의 후처인 엘레나를 향한 사모의 정이 싹트면서 한층 심각해진다. 저택을 배경으로 우둔한 인간을 풍자한다. 10월 3~5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된다. 02-760-4877



‘비련의 여인을 바라보는 스파이’ 는 꿈과 희망을 잃어버린 채 무기력한 일상을 살아가는 ‘바냐 아저씨’의 인물들을 아르헨티나의 조상으로 해석했다. 유럽을 견디지 못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왔다는 것이다. 이들의 의문, 즉 ‘과연 아무런 희망도 없는 오늘을 견뎌내면 내일 우리의 후손들은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는 ‘바냐 아저씨’의 고민과 일맥상통한다. 26~28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무대에 오른다. 02-760-4877



‘체호프의 네바’는 러시아 배우 겸 체호프의 부인인 올가 크니페르의 이야기다. 러시아 최고의 여배우로 인기를 누렸지만 남편의 죽음을 옆에서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안고 있는 올가다. 그녀의 친구 마샤, 알레코 등이 러시아 네바강이 흐르는 도시를 바라보며 연극의 아름다움을 논한다. 18~20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볼 수 있다. 02-760-4877

◇거창한 배경이 아닌 일상에서의 인간 본질을 논한다. 그러면서도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놓지 않는 연극이 ‘벚꽃동산’ 이다. 희극적인 캐릭터들을 통해 부조리한 삶의 비극성을 보여준다. 남편과 자식을 잃고 프랑스 파리로 돌아온 라네프스카야 부인에게 남은 것은 곧 경매에 넘어갈 벚꽃동산 뿐이다. 주위에서는 동산의 벚나무들을 잘라 별장지로 조성하라고 설득하지만 여인은 부유한 시절의 습관에 젖어 살 궁리 따위는 하지 않는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돈을 흥청망청 쓴다. 결국 삶은 비극으로 치닫는다. 18일부터 10월12일까지 서울남산 드라마센터 무대에 오른다. 02-889-3561



‘세자매’는 ‘갈매기’, ‘바냐 아저씨’, ‘벚꽃 동산’과 함께 체호프의 4대 희곡 가운데 하나다. 작은 마을의 세 자매와 남자 형제들은 늘 대도시인 모스크바를 동경한다. 그러나 꿈은 실현되지 않는다. 언제나 바람으로만 그칠 뿐이다. 현실을 벗어나고 싶지만 선뜻 행동으로 옮기는 못하는 지극히 나약한 지식인의 모습이다. 꿈과 현실의 충돌을 담담한 필체, 서정적인 러시아 언어와 노래, 속담 등으로 그려냈다. 25~27일 국립극장 해오름 극장에서 공연된다. 02-2280-4297 (이민정기자)

뉴스컬쳐(08. 09. 12) 올 가을, 체호프 제대로 알고보자

‘미묘하다’ , ‘모호하다’, ‘비밀스럽다’, ‘수수께끼 같다’

이들의 공통점은? 다름아닌 러시아의 대문호 체호프의 희곡 앞에 따라오는 수식어들이다. 미묘하고 모호한, 그래서 비밀스런 수수께끼 같은 체호프의 작품들이 올 가을, 극장마다 풍년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극작가이자 후대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작인 만큼, 체호프의 희곡은 늘 공연되어 왔다. 그러나 올 가을 확실히 남다르다. 체홉의 4대 장막전이라 일컫는 ‘바냐아저씨’, ‘벚꽃동산’, ‘갈매기’, ‘세자매’가 모두 공연된다. 그런가 하면 좀처럼 만나보기 힘든 국외 유명 단체의 공연, 원작의 완벽 재현 또는 전혀 다른 해석으로 만나보는 다채로운 체호프의 공연들이 줄줄이 준비되어 있다. 체호프, 우린 왜 그의 작품에 매료 될 수 밖에 없는가. 올 가을, 체호프를 제대로 알고 만나자.

체호프 없이 현대 희곡을 논하지 말라

올 가을, 체호프의 작품을 앞다투어 선보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희비극이 공존하는 쓸쓸한 러시아의 정서가 가을과 잘 어울려서도 그러하지만, 올해는 체호프의 탄생 150주년을 2년 앞두고 있는 해이기도 하다. 1860년 1월 17일 러시아 남부 작은 도시 따간로그에서 오늘의 대문호 체호프가 탄생했다. 그는 이후 45년의 짧은 생애 동안 10편의 단막극과 7편의 장막극 등 모두 17편의 희곡을 남긴, 20세기를 대표하는 극작가가 되었다.

이 뛰어난 극작가는 본래 모스크바 의과 대학을 졸업한 의사였다. 대학 진학 후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단편 소설을 오락 잡지에 기고하면서 문학과 연을 맺은 그의 전기에는 풍자와 애수가 가득한 단편들이 가득하다. 작가로서의 자각을 새로이 하며 탄생된 첫 희곡은 ‘이바노프’로 그 이후 1895년을 기점으로 그를 대표하는 장막극 갈매기, 바냐아저씨 등이 집필되었다. 객관적인 문학론을 중심으로 한 그의 작품은 입센과 더불어 사실주의 연극의 문을 열었다.



뿐만 아니라 모스끄바 예술극장을 대표하는 간판 작품으로 선구적인 근대 연극의 무대화에 성공하였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연출가이자 배우인 스타니슬랍스키는 그의 저서 ‘예술에서 나의 삶’을 통해 체호프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갈매기]와 [바냐아저씨]의 성공 이후에 극단(모스끄바 예술극장)은 이제 체호프의 새 희곡 없이는 불가능하였다. 이렇게 우리 운명은 그때부터 안톤 빠블로비치 체호프의 손에 놓여 있었다. 희곡이 있으면 공연 시즌이 있고, 희곡이 없으면 극단은 고유의 향기를 잃게 되었다.”라고.

자연스런 일상, 그 속의 숨은 그림 찾기

체호프의 희곡에는 희망과 고통으로 얼룩진 일상이 다양하게 변주되어 있다. 등장인물들은 행복을 열망하며 보람 있고 충만한 삶을 원하지만 현실에 부딪히며 좌절하고 타협하는 것이 체홉 등장 인물의 운명이다. 10대부터 60대까지 각 세대를 대표하는 등장인물들이 그 세대만의 희망과 고통을 토로한다. 저 마다의 이유로 하나같이 가슴 시리게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이 사람들은 내면적이다. 보통의 연극에서처럼 등장인물들이 드러내놓고 다투거나 충돌하는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각자의 ‘눈’으로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부대끼며, 그를 극복하려는 심리적인 내면의 갈등이 작품을 꽉 채운다.

그러다 보니 극은 눈에 보이는 갈등이나 클라이맥스 없이 잔잔히 흘러간다. 체호프의 작품을 보다 보면 일상에서 숨은 그림을 찾고 있다라는 느낌을 받는다. 마음을 열지 않으면 한 귀로 흘리기 쉽상이다. 상세한 일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체호프의 희곡에는 명쾌한 주제도, 플롯도, 행동도 없다. 그렇지만 체호프의 희곡에는 우리 일상의 숨은 면면이 디테일하면서도 복합적으로 제시된다.

나와 비슷한, 내 주변의 일상적인 이야기들이 거북스럽지 않다. 편안하다. 수면 아래에서 요동치는 삶의 ‘조용한 꺼리’들을 무대 위로 직접 끌어올려 눈으로 확인하는 쾌감이 남다르다. 시∙공간을 초월해도 통용되는 삶의 본질에 대한 주제와, 작가 특유의 객관적이고 담담한 시각은 자유로운 감상을 허락한다. 이러한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올 가을 체호프에게 제대로 빠져들게 한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를 통해 만나보는 체호프스페셜

체호프의 다양한 작품들이 공연되는 올 가을, 이 축제에 가면 체호프를 제대로 만날 수 있다. 뛰어난 국내외 현대예술작품을 소개하는 제 8회 서울국제공연예술제가 바로 그다. 올해 축제에는 연극 14작품 중 4작품이 체호프의 작품으로, 체호프 스페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러시아에서 온 전통의 체호프의 작품을 만나고 싶다면 러시아 타바코프 극단의 '바냐 아저씨'(10.3-5,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를 추천한다. 이 작품은 리투아니아 출신의 젊은 연출가 민다우가스 카르바우스키스와 만든 작품으로 2005년 러시아 황금마스크 페스티벌에서 최우수 여배우상을 받았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러시아 격동기를 배경으로 도시인의 세속적인 욕망과 시골사람들의 순박함을 대비시키며 원작과 밀착된 공연을 선보인다.

러시아 연출가인 에프로스는 “저마다 자신만의 체호프가 있다”고 했다. 여기 아르헨티나의 시선이 담긴 새로운 체호프의 ‘바냐아저씨’가 온다. ‘비련의 여인을 바라보는 스파이’ (9.26~28,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가 바로 그것이다. 최소한의 무대에서 연출가 다니엘 베로네세는 꿈과 희망을 잃어버린 채 무기력한 일상을 살아가는 원작의 인물들을 유럽을 견디지 못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온 아르헨티나 조상의 이야기로 풀어나간다.

한국 연출, 한국배우의 체호프가 만나고 싶다면 극단 수의 ‘벚꽃동산’ (9.12~10.12, 남산드라마센터)을 보자. 연출가 구태환이 ‘비계덩어리’ ‘나생문’에 이어 선보이는 ‘2008 고전시리즈’로 가감 없이 원전에 충실한 있는 그대로의 체호프를 선보인다. 인상 깊은 마리아에서 귀부인 라네프스까야로 변신하는 강효성과 가수에서 연기자로 변신한 데니안의 변신도 주목할만하다.

그런가 하면 체호프가 직접 집필한 작품은 아니지만, 체호프의 부인 여배우 올가 크니페르의 삶을 다룬 작품도 무대에 오른다. 칠레 블랑꼬극단이 선보일 '체홉의 네바'(9.19-9.20,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가 그것이다. 연출가 기예르모 깔데런이 실제 인물인 올가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허구를 가미해 쓴 이 작품은, 올가와 그의 친구들이 논하는 연극과 삶에 대한 이야기가 1905년 네바 강을 피로 물들인 학살 사건 '피의 일요일'과 맞물려 전개된다.

바야흐로 가을이 오면 조금은 고독해지고, 조금은 허무해지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다. 2008년 상반기 일상의 비극과 희극 사이를 오가며 그저 바쁘게만 지냈다면, 올 가을 체홉을 만나보자. 지극히 평범한 나와 같은 인물들이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숨은 그림들을 제시한다. 조금은 느긋하게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조금은 진지하게 그들의 고민과 어깨를 나란히 해보자. 그렇게 숨은그림에 동그라미가 늘어갈 때 쯤이면, 올 가을 현대 희곡의 진수도 맛보면서 일상의 발견으로 내면이 그득해지는 풍성한 가을이 될 수 있다.(김미소기자)

08. 09. 22.

P.S. 체호프와 그의 드라마에 관한 페이퍼로는 '안톤 체호프를 찾아서'(http://blog.aladin.co.kr/mramor/914178), '레프 도진과 체호프'(http://blog.aladin.co.kr/mramor/834340) 등을 참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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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9-22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체호프의 6호실을 연극이나 영화로 만들면 어떨까 생각한 적이 있어요.희곡은 아니지만 내용이 좋더라구요.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도 이 소설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나구요.

로쟈 2008-09-23 00:10   좋아요 0 | URL
러시아에서는 TV용으로라도 만들어졌을 법한데요...

람혼 2008-09-22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굉장히 관극을 고대하고 있는 연극들인데, 과연 정말로 갈 수 있을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행운이 따른다면 극장에서 로쟈님을 우연히 만날 기회를 얻을 수도 있겠는데요? ^^

로쟈 2008-09-23 00:10   좋아요 0 | URL
네, 어쩌면...^^
 

러시아 포스트모더니즘 연구로 유명한 문학자이자 철학자 미하일 엡슈테인 교수가 지난달 세계철학대회에 참석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엡슈테인'은 가까이 있는 책장에도 그의 책들이 여러 권 꽂혀 있을 만큼 러시아문학도에게는 친숙한 이름이다(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러시아문학자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보이는 몇 사람에 속한다. 홈피는 http://www.emory.edu/INTELNET/Index.html%20). 발표까지 들을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뻔했다. 교수신문에 인터뷰기사가 올라왔기에 스크랩해놓는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6683).

교수신문(08. 08. 25) 테크네의 귀환

<교수신문>은 지난 7월 30일부터 8월 5일까지 서울대에서 개최된 제22회 세계철학대회에 참관한 모하일(*미하일) 엡슈테인 교수와 조준래 성균관대 선임연구원(러시아문학)의 대담을 마련했다. 대담은 2008년 8월 7일 서울 서울역사박물관 내에서 이뤄졌다.

조준래: 얼마 전 폐막한 세계철학자대회의 의의와 성과에 대해 평가해달라.

엡슈테인: 첫 번째 의의라면, 통산 22회째 되는 이번 대회를 통해 세계철학자대회가 100년 이상의 명맥을 무사히 이었다는 데 있겠다(웃음). 둘째로, 형이상학적 측면에서 철학은 고독한 학문인 동시에, 본원적으로 소통과 대화를 요구하는 학문인데, 이런 철학의 특성이 자원봉사자의 도움을 비롯해 본 대회의 잘 조직된 운영방식과 조화를 이뤘단 점을 들 수 있다. 단점이라고 한다면, 프로그램과 달리 베르나르 앙리 레비, 주디스 버틀러, 장 뤼크 마리옹 등 소위 거물급 철학자들이 대거 불참한 점을 들 수 있다. 다양한 사정이 있겠지만 어떤 경우든지 동료 철학자들의 큰 행사를 경시하는 것이 좋은 모습이 아님은 분명하다.
 
조준래: 이번 대회부터 유가, 도가, 불교 철학이 정식분과로 채택됐다. 한국 철학자의 발표에 대한 평을 해준다면. 또 세계철학에서 동양철학이 담당하는 역할에 대한 당신의 견해는. 

엡슈테인: 20년 전부터 노장 사상 및 도가와 관련된 서적을 접한 뒤 꾸준히 연구하면서  현대 철학에서 서구 철학이 놓친 사상적 공백을 메우는 역할을 동양 철학이 계속 감당할 것이란 생각이다. 지금까지 서구 철학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실재와 비실재의 관계, 비실재의 생성적 힘에 대해 동양 철학은 직관적인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카오스이론, 복잡성이론, 시너제틱스 등 현대 과학에 의해 그 주장의 타당성이 꾸준히 입증되고 있기 때문에 향후 세계 철학계에서 동북아철학을 위시한 동양 철학의 목소리는 계속 커질 것이란 생각이다. 

조준래: 오늘날 세계 철학계의 주요 화두라면.

엡슈테인: 첫째는 2001년 9월 11일 사태를 계기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기가 종언을 고하고 포스트모던 시대의 다음 단계인 새로운 문화적 지층이 태동했다는 점이다. 스티븐 호킹과 에드워드 윌슨처럼 오늘날을 ‘포스트(post-)’ 대신 ‘시작’을 뜻하는 ‘프로토(proto-)’의 시기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시뮬라크르의 권력에서 벗어난 미래와 현실은 예측불가능하고 비가역적이고 새롭고 진지한 모습으로 다시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지식, 문화, 사회의 영역에서 새로이 대두하고 있는, 미궁과도 같은 ‘프로토’의 현상을 진단하는 데에 철학은 경주해야 한다. 둘째는 새 시대의 도래와 관련된 과학기술문명의 역할이다. 캐서린 헤일즈가 말한 ‘포스트휴먼(Posthuman)’은 사실 ‘프로토휴먼’을 의미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몸을 변형시키고 인간으로 하여금 신체의 한계를 넘어서도록 하며, 궁극적으로는 인간성의 제거가 아니라 인간성의 확장을 가져올 것이다. 철학 역시 과학에 대한 긍정적이고 개방적인 관점을 통해 이런 미래 문화의 발전을 논해야 된다.

조준래: 그렇다면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도덕성 역시 제고한다고 볼 수 있을까.

엡슈테인: 얼핏 모순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으나, 과학과 기술, 통신수단의 발전은 인간의 도덕을 오히려 향상시킨다고 믿는다. 그것을 ‘테크노모랄’(techno-morality)이라고 부르고 싶다. 기술 문명의 발전으로 인간 간의 거리는 대폭 축소됐다. 이로 인해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와 일방적인 패배는 불가능해졌다. 핵무기만 생각해보더라도 알 수 있다. 이제 군사적인 위협은 일방적이 아니라 상호적인 성격을 띠게 됐다. 어느 일방이 상대방과 동일한 행동준칙을 지키지 않는다면 공멸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지극히 이기적인 욕심에서 생겨난 테크놀로지가 타인의 입장을 보다 더 많이 고려하도록 우리를 인도했다는 데에 현대 문명의 역설이 있다.        

조준래: 이번 세계철학자 대회에서 발표한 주제도 앞서 말한 오늘날의 철학적 화두와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엡슈테인: 윤리학 분과에서 ‘복합윤리학’을 뜻하는 ‘스테레오에틱스(stereoethics)’라는 주제를 발표했다. 인간의 행위를 이루는 선한 가치 역시 상황에 따라 서로 충돌하고 서로 모순되는 측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일하게 올바른 도덕적 선택을 단정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시공간의 변화에 따른 다양한 도덕적 관점의 공존이 불가피함을 인정해야한다는 것이었다. 마치 우리의 시력이 두 눈에 서로 다르게 비친 피사체의 결합을 통해 입체적인 형상을 얻듯이 윤리학 또한 복합적인 행동준칙에 의해 보강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했다. 즉, 나와 타자의 유사성과 공통적 인간성 뿐 아니라 서로 환원될 수 없는 나와 타자의 차이를 동시에 고려하는 것이 현대 윤리학의 과제다. 훌륭한 행위란, 나의 최상의 능력이 타인의 최고의 필요에 부응할 수 있는 경우의 행위, 나를 포함해 모두가 행하기를 원하고 또 그래야 하지만, 나 외에는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행위를 가리킨다. 

조준래: 이런 ‘복합 윤리학’은 당신의 표현대로 ‘프로토-포스트모던’의 시대적 요청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새로운 문화 현상인 ‘트랜스컬쳐(trans-culture)’와도 무관하지 않은 듯 한데.

엡슈테인: ‘트랜스-’(trans)라는 라틴어 접두사는 무엇을 넘어서거나 초월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트랜스컬쳐’란 말은 민족, 젠더, 직업 등에 의해 다양하게 구획된 문화의 경계선을 가로질러 발전하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를 말한다. 그것은 기존 문화에 대한 낯설게 하기와 외재성의 원칙, ‘자신의’ , ‘본래적인’ 문화에서 벗어나기 등을 전제로 구성된다. 트랜스컬쳐는 한 문화 내의 의미적, 기호적 틈새,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을 드러내며, 여러 문화의 교차점과 간극 속에서 새로운 상징적 환경을 창조한다. 트랜스컬쳐는 문화적 상대주의와 고립성을 전제하는 멀티컬쳐(multi-culture)와는 다른 개념이다. 자기를 초극해 자기 밖의 입장에서 자기를 바라보고 타자와 소통하는 트랜스컬쳐의 관점만이 이념, 종교, 민족 다원화의 시대에 궁극적인 평화와 안정을 가져올 수 있다.

조준래: 오늘날 한국에서는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일상화돼버린 지 오래다. 상투적인 질문이지만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극복방안’을 들어본다면.

엡슈테인: 인문학, 특히 순수인문학의 위기가 초래된 일차적 원인은 현실과의 끈을 잃어버렸다는 데에 있다. 자연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순수 인문학이든 모두 연구대상과 실용성의 두 측면을 갖고 있다. 여기서 실용성이란 학문이 연구대상과 접촉해 만들어내는 일종의 상부구조와 같은 것인데(예를 들면 자연과학이 자신의 연구대상인 자연과 접촉하여 빚어낸 상부구조인 테크놀로지, 사회과학이 자신의 연구대상인 사회와 접촉해빚어낸 상부구조인 정책이 그렇다), 다만 순수인문학은 이들과 달리 어떤 상부구조, 어떤 실용적 측면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핸디캡으로 안고 있다. 이제 실질적인 대안으로 첫째, 인문학은 자신의 연구대상인 언어, 문학, 예술 등 문화 전반을 변형시켜야 한다. 이로써 생겨나는 새로운 학문을 저는 또 다시 ‘트랜스인문학’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가령 ‘트랜스언어학’은 인공언어를 생산하고 새로운 관점에서 자연언어의 수준을 제고하는 학문이 될 것이며, ‘트랜스미학’은 시학과 미학을 통하여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면서 예술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학문이 될 것이다. 둘째, 자연과학에서 전용돼 왔으나 본래 인문학의 용어였던 ‘테크네(techne, 예술, 기술)’를 인문학에로 되돌려 기존 인문학의 성과를 반성, 재가공하는 단계로 옮겨 가야한다. 인문학은 그 개념 자체에 내포돼 있듯이 과학과 예술의 종합적 형태로서 발전해 나갈 것이다. 한마디로 인문학의 활로는 문화를 변형시키는 예술, 즉 ‘테크노-휴머니티’(techno-humanities)로서 인문학이 거듭날 때에 발견될 것이다.

미하일 나우모비치 엡슈테인(Mikhail Naumovich EpshteIn)

전공분야 러시아 출신의 철학자, 문예학자. 러시아 포스트모더니즘 현상을 최초로 연구. 미국과 서유럽의 슬라브학을 비롯, 러시아학계 전반에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개념을 최초 도입.

주요 저서  『잠재성의 철학』(2001), 『父性의 의미』(2003), 『여백의 기호: 인문학의 미래에 관하여』(2004), 『러시아 문학의 포스트모던』(2005), 『새로운 종파: 1970년~1980년대 러시아의 종교적, 철학적 지적 경향』(1993, 2005) 등.

주요 논문 「새로움의 역설: 19~20세기의 문학 발전에 대하여」(1988),「자연, 세계, 우주의 은신처: 러시아 운문에 나타난 풍경 이미지 체계」(1990),「전체주의 사유에서 상대주의적 모델: 소비에트 이데올로기 언어 연구」(1991), 「문화의 경계선: 러시아와 미국과 소련」(1995)외 다수.

08. 08. 27.

P.S. 엡슈테인의 책으로 알라딘에서도 검색이 되는 건 <새로운 황야에서의 외침>(2002)이 유일하다. 하지만 보다 유명한 책은 <러시아 포스트모더니즘>(1999) 같은 연구서이며, 그의 이름을 알린 '출세작'은 <미래 이후(After the future)>(1995)이다(*<미래 이후의 미래>(한울, 2009)로 출간됐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설과 현대 러시아문화'가 책의 부제. 구글에서 찾은 아래 이미지는 뜻밖에도 국내 중고서점에 나와 있는 이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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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8-27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디스 버틀러의 불참은 이미 대회 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잔뜩 기대감을 품은 채 장-뤽 마리옹의 육성을 듣고 그의 모습을 보러 갔다가 허탕만 치고 돌아온 저 같은 사람에게는, 엡슈타인이 말하는 저ㅡ슬쩍 냉소가 섞인ㅡ대회 의의에 대한 평가가 더욱 가슴에 다가옵니다. 대회에 참석한 동료 철학자들에게는 물론이고 저 같은 '일반 청중'에게도 실로 큰 결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개인적으로는 뷔넨베르제와 회슬레의 참가 정도가 그래도 철학자 대회의 '명맥'을 살려준 게 아닌가 하는 느낌입니다. 저로서는 '세계 철학'이 봉착한 어떤 '피곤함'과 '노회함'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음도 지나가는 길에 첨언하고 싶고요(그 피곤함과 노회함이 '포스트'를 '프로토'로 치환하는 개념적 작업을 통해 극복될 수 있을지도 살짝 의문입니다^^).

로쟈 2008-08-28 08:26   좋아요 0 | URL
네, 약간 김이 빠진 편이죠. 그만큼 언론의 관심도 줄어든 듯하고...

푸른괭이 2008-08-27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거덕, After the Future의 저자를 볼 기회를 놓치다니...! 지난 여름 최대의 실수..-_-;; 그 동안 로쟈님은 뭐하셨어요...? ㅠ.ㅠ

로쟈 2008-08-28 08:26   좋아요 0 | URL
알다시피 바빴습니다.^^;

2008-08-28 0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8-28 08: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털세곰 2008-08-29 0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관악구를 떠나자마자 이런 빅이벤트가 벌어지고 거물이 오고갔을 줄이야...

로쟈 2008-08-30 21:25   좋아요 0 | URL
러시아 학자들이 200여명이나 들렀었다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