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테르부르크 텍스트

이덕형 교수의 <도스토예프스키 판타스마고리아 상트페테르부르크>(산책자, 2009)에 대한 리뷰기사가 있기에 스크랩해둔다. 두 주 전 기사인데, 미처 알지 못하고 지나칠 뻔했다. 내친 김에 오래전에 쓴 글도 찾아서 먼댓글로 링크해놓는다.  

한겨레21(09. 12. 04) 환각의 도시를 떠돈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혼 

‘성 베드로의 도시.’ 1703년 표트르대제가 세운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정신적 삶의 위업’이라 한다. 아무것도 없는 발트해 어귀의 황량한 늪지에 건설된 이곳은 ‘정교적 러시아의 영혼과 유럽의 모더니티가 착종된 이종접합’의 인공도시다. ‘나의 것’과 ‘남의 것’이 뒤섞이면서 만들어낸 ‘이종교배’의 문화가 그 도시의 고갱이다. 이덕형 성균관대 교수(러시아문학)가 <도스토예프스키, 판타스마고리아, 상트페테르부르크>(산책자 펴냄)에서 그 ‘환영의 도시’에서 살다 간 위대한 작가의 삶과 문학을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몽환의 공간 ‘판타스마고리아’   
“도스토예프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가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던 모순과 역설, 이율배반과 정신착란, 환각과 환영의 판타스마고리아를 누구보다도 먼저 민감하게 느꼈던 사람이었다.”

유럽 열강으로 도약하려던 표트르 대제의 욕망은, 종교개혁 이후 나락으로 떨어진 가톨릭 교회의 위상을 곧추세우기 위해 시작된 서구의 웅장한 바로크 문화로 이어졌다. 이를 단기간에 모방·이식하려는 시도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낳았다. 지은이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러시아와 유럽, 가톨릭의 바로크와 정교의 슬라브주의 사이에서 태어난 몽환의 공간, 곧 판타스마고리아”라고 지적한다. ‘환영’(幻影)이란 뜻의 ‘판타스마’에서 유래한 ‘판타스마고리아’는 18세기 말 프랑스에서 발명된 환등기의 투사 이미지를 일컫는다.  



“이 도시에 기하학이 등장했다!” 도시 건설 초기 러시아 정부의 회계 감사관이 도로를 측량하면서 이렇게 말했단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합리적 이성의 은유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등장한 것은 결국 서구 라틴 가톨릭 문화권의 핵심 코드인 ‘합리성’과 ‘이성’이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과 알렉산드리아로 대표되는 비잔티움 정교 문화권에선 합리성과 이성보다 이를 초월하는 ‘침묵’과 ‘관조’를 인식의 기초로 삼아왔다. 이런 이질적인 두 문화의 충돌이야말로 도시를 휘감은 모순과 부조리의 뿌리였다. 지은이는 이렇게 썼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합리적 이성이 도입되자 러시아 사람들의 눈에는 이 도시가 기이하게 보였을 것이고, 타락한 로마 가톨릭 문화에서 건너온 유클리드 기하학은 적그리스도의 학문으로 비쳤을 것이다. 특히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유클리드 기하학에 대해 거의 적대적이라고 할 만큼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삶은, 세계는, 신은, 인간은 ‘2X2=4’라는 합리성의 도식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2X2=4’라는 상징은 합리적 이성이자 자유가 박탈된 서구 가톨릭 세계의 그리스도교였다.”

그 판타스마고리아의 도시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스무 번 이상 이사를 다녔다. 도박과 현시적 소비의 굴레를 벗어내지 못했던 그는 평생 한 번도 그 도시에서 정주처를 갖지 못했다. 지은이는 “마치 환영이나 그림자처럼 그는 ‘집’의 실체를 모르는 부초였고 그 자신이 이 도시의 판타스마고리아 자체였다”며 “도박에 몰입하다가 간질 발작을 일으키고 섬망 상태에서 소설을 쓰다가 어슴 새벽의 여명에 겨우 잠드는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모더니티의 한 현상이었다”고 표현했다.

스무 번 넘게 이사하며 정주 못 해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에 대한 평론이자 전기이기도 한 이 책은 또한 현란한 지적 기행문이기도 하다. “산책자의 눈으로 도스토예프스키가 살던 구석방과 모퉁이 집들을 바라보고, 냄새 맡고, 만져보고 싶었다”는 지은이는 실제 상트페테르부르크란 ‘판타스마고리아’를 일평생 배회한 거장의 흔적을 발품 팔아 더듬었다. 1837년 5월 공병학교 입학을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도스토예프스키가 첫 밤을 보낸 ‘모스코프스키 대로 22번지 네아폴 호텔’에서 출발해, 최후의 걸작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집필을 마친 뒤 탈진해 1881년 2월 숨을 거둔 ‘쿠즈네치니 골목 5번지’까지 땀으로 그 도시를 주유했다. 이만한 헌사도 드물 게다.(정인환 기자) 

09. 12. 20. 

P.S. 아래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숨은 거둔 '쿠즈네치니 골목 5번지'이다(클릭하면 사진을 더 크게 보실 수 있다). 현재는 도스토예프스키 박물관이다. 5년 전 가을에 가본 기억이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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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9-12-20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카자흐스탄에서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읽은게 자랑이에요. ^^ 이 책 보관함에 담아 두었어요. 표지도, 저자도, 컨텐츠도 맘에 쏙 드네요.

로쟈 2009-12-20 21:28   좋아요 0 | URL
테헤란에서 롤리타 읽기만큼 특이한 경우시네요.^^

펠릭스 2009-12-20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의적인 아쉬움이라 할까요 '판타스마고리아'적 도시공간이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형성되기 위해서는 많은 세월이 필요하지만 우리에게도 5천년의 역사라고 자랑하는데,,있을 법합니다. 미래의 과학 또는 행정 계획도시 조성에 열띤 공방(?)이 진행되고 있는 지금 앞으로 위대한 과학소설가 나타나 이 계획도시을 '판타스마고리 세종시'로 만들면 좋겠는데요.(꿈?)

로쟈 2009-12-20 21:30   좋아요 0 | URL
판타스마고리아적 공간은 역사적인 공간이라기보다는 인위적인 공간입니다. 요즘의 광화문 광장처럼 갑자기 돌변한 공간이라면 현실인지 환상인지 감이 잘 안 오게 되지요...

비연 2009-12-20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읽어보고 싶어지는 책이네요. 언제 한번 꼭 저 곳에 가봐야 할텐데..

로쟈 2009-12-20 22:31   좋아요 0 | URL
비성수기에 패키지로 끊으시면 저렴하게 다녀오실 수 있을 거예요.^^

sophie 2009-12-21 06:42   좋아요 0 | URL
혹시 비성수기란 겨울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콜록!

로쟈 2009-12-21 08:36   좋아요 0 | URL
겨울엔 페테르부르크에 직항이 안 다닌 텐데요. 방학을 뺀 하절기가 비수기로 압니다...

sophie 2009-12-23 08:00   좋아요 0 | URL
아 그럼 6월이 되겠군요.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

2009-12-21 1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1 1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1 1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헛헛헛헛 2009-12-21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학을 뺀 하절기라... ^^
좋은 정보네요. ㅎ

저도 도스토예프스키 책 한권 껴들고
저 앞을 왔다갔다 해봐야겠어요. '-'

로쟈 2009-12-21 19:59   좋아요 0 | URL
몇년전엔 50만원대 상품도 있었습니다.^^

필로우북 2009-12-21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도 맨 아래 사진을 올려 주신 걸 보고 참 인상적이다 생각했는데, 로쟈 님께도 각별한 사진인가 봅니다.지하로 난 저 문으로 꼭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진입니다.

로쟈 2009-12-21 19:59   좋아요 0 | URL
그게 구글에 뜨는 사진이 저거밖에 없어서요.^^;
 
고골의 웃음과 공포

이번주 주간한국의 '지식인의 서고' 꼭지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짧은 분량의 글이어서 고골의 대표작 <외투>에 대해 간단히 적었다(고교 독서평설에서 한번 다룬 적이 있다는 걸 지금 깨달았다!).   

주간한국(09. 12. 17) 우리가 욕망 없이 살 수 없다면… 

대학에서 러시아문학을 강의하기 때문에 매학기 고정적으로 읽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이른바 ‘러시아 명작’들입니다. 보통은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푸슈킨부터 시작하여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를 거쳐서 불가코프나 솔제니친까지 ‘투어’를 합니다. 이 거장들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작가가 고골(1809-1852)입니다. 올해가 그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이니 더더구나 그렇지요.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단편으로만 치자면 고골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외투>입니다. 페테르부르크의 한 하급관리가 어렵게 마련한 외투를 강탈당하고 죽은 후에 유령이 되어 다시 나타난다는 줄거리를 갖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매년 다시 읽으면서 매번 경탄하게 되는 걸작입니다. 흔히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고 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인용하기도 하지요. 그만큼 러시아문학사에서는 압도적인 의의를 갖는 작품입니다.   

한데, <외투>는 한편으로 자주 오해받는 작품이 아닌가도 싶습니다. 인도적 박애주의와 관련지어 이해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그런 시각에서는 이 작품의 주제가 주인공 아카키 아카키예비치 같은 ‘작은 인간’에 대한 동정과 연민이라고 말합니다. “나도 당신들의 형제요.”라는 아카키의 말을 인용하면서요. 하지만 그렇게 이해하는 쪽에선 주인공이 자신의 일에서 발견하고 있는 지극한 즐거움을 간과하는 듯합니다.  

하급관리로서 아카키의 일이란 문서를 깨끗하게 정리해서 쓰는 정서(淨書)입니다. 그런데 이 정서가 단순한 직무가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자 자족적인 즐거움의 세계였습니다. 그는 정서 외에는 아무것도 거들떠보지 않아서, 길거리를 걸으면서도 글씨들만을 떠올리고, 근무가 끝나 집에 돌아와서도 음식에 파리가 붙었거나 말거나 요기만 하고는 다시 정서에 매달렸습니다. 정서하다가 자신이 좋아하는 글자들이 나오면 너무 기뻐하는 모습은 마치 딴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불행이 닥치게 됩니다. 겨울이 되어 페테르부르크에 사나운 북풍이 휘몰아치자 그의 낡은 옷은 더 이상 바람막이가 돼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는 수없이 새 외투를 장만하게 됩니다. 이게 문제였습니다. 새 외투에 대한 욕망을 갖게 되면서 아카키는 ‘욕망의 주체’로 변신하게 된 것입니다. 가령, 아카키는 외투 값을 마련하기 위해 그가 향유하던 모든 즐거움을 유보하고 포기합니다. 그렇게 하여 그는 충만한 만족의 세계에서 영속적인 결여의 세계로 옮겨가게 됩니다. 욕망은 언제나 채울 수 없는 결여를 전제로 하는 것이니까요.  

아카키가 새 외투를 마련하고 얼마 안 있어 강도들에게 강탈당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필연적으로 보입니다. <외투>는 저에게 욕망이 몰고가는 파국을 보여주는 섬뜩한 이야기로 읽힙니다. 고골은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우리가 욕망 없이 살 수 없다면, 우리의 파멸 또한 필연적이라구요. 무섭지요?  

09. 12. 19.  

P.S. 찾아보니 러시아에서 만들어진 무성영화 <외투>(1926)가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http://www.youtube.com/watch?v=ki-zGGXIbH4&feature=PlayList&p=EC0B7D5C62078945&index=0). 나도 못 봤던 것인데, 감독은 그리고리 코진체프와 레오니드 트라우베르크이며, 시나리오는 러시아 형식주의의 저명한 문학이론가 유리 트이냐노프가 맡았다(원작과는 좀 다르다). 오늘의 서프라이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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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12-19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투>의 마지막 장면은 "마술적 사실주의"<빌러비드/토니모리슨/들녁>라 할 수 있겠는데요.사람마다 하급관리(아카키)의 정서(淨書)가 있습니다. 개인의 삶이 관료적 권력앞에 왜곡되고 맙니다. 권력은 개인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보다는 감시하고 의심합니다. 개인 또한 입장이 바뀌면 굴림하기도 합니다. 종국에 개인은 조직(관료)에 대항 뿐입니다.고골의 사랑(정서)을 지켜주던 '외투'를 잃어버리고 자존 능력을 상실하고 맙니다. 저마다 하나의 끈을 붙잡고 사는 것처럼요.

로쟈 2009-12-19 23:01   좋아요 0 | URL
저는 아카키에게서 정서와 외투는 다른 성격의 대상으로 봤어요. 먼댓글로 링크해놓은 글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펠릭스 2009-12-20 07:38   좋아요 0 | URL
재봉사 '페트로비치'에 의해 새 '외투'를 갖게된 '아카키'는 박봉을 절약하며 본연의 업무인 '정서(淨書)'에 충실히 근무합니다. 문제는 '페테르부르크 광장'에서 새 외투를 강탈당하면서 외투를 찾기 위해 경찰서장 등을 찾아 다니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지만 못된 관리의 권위(권력)에 의해 묵살당하고 맙니다. 결국 그는 스트레스로 죽어서까지 유령으로 나타나 외투를 뺐습니다. 우리의 '전설의 고향'의 귀신처럼요.

과연, 외투를 찾으려고 했던 '아카키'가 '욕망의 화신' 일까요? 여리고 단순한 영혼의 당연한 권한이 아니였을까요? 저자 '고골'이 '인간 욕망의 허구성' 목적으로 이 단편을 썼다면 그런 왜곡된 의도성이 독자에게 외면당하여 그의 마지막 작품이 실퍠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자신의 것을 찾으려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사회구조권력이 개인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데서 오는 당연한 결과라 생각합니다. 개인의 존재가 무참히 사라지는 형국에서 '아카키'의 행위는 욕망보다는 정당한 것이었으며 약자의 최후 저항이라 생각했습니다. 즉 '아카키'의 새 외투에 대한 욕망은 과(소비)욕이 아니라 헤저 더 이상 수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당연한 소비(구입)의식과 평범한 구매였으며 강탈당한 약자의 억울함이라 생각했습니다.

Sati 2009-12-20 20:20   좋아요 0 | URL
요즘같은 날씨에 겉옷이 없었다고 생각하면... 아카키의 외투가 욕망의 대상은 아닌 것 같아요. 뭔가 측은지심을 유발하는 대목이 있지 않나요, <외투>에는? 자발적 88만원 세대의 한 인물이 있다고 할 때, 그가 어머니의 수술비 500만 원을 마련하기 위해 끼니를 굶어가며 돈을 마련했는데 그 돈을 어이없이 강도에게 빼앗겨서, 어머니는 치료도 못받고 돌아가시고 본인도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서 귀신이 된다면 그건 펠렉스님 말대로 억울함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요? 만약 내 가족 건사를 위해 88만원 자족생활을 버리고 돈을 버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가, 부도라도 나서 홧병으로 죽는다면 그건 욕망의 희생양이라고 해야할지도 모르지만.

로쟈 2009-12-21 22:04   좋아요 0 | URL
그게 작품에선 아카키가 전혀 다른 인물로 변화한 것으로 나옵니다. 예전처럼 정서에만 빠져 지내는 게 아니라 길거리를 거닐며 여자의 다리가 그려진 간판에 눈길을 주고, 지나가던 여자를 괜히 쫓아가보기도 하는 식으로요. 외투도 분에 넘치게 고급스러운 것으로 맞추게 되죠. '바람막이' 수준을 넘는 것으로요. 그러니까 저는 외투를 마련하기 이전과 이후의 아카키가 전혀 다른 존재 양식을 갖는 것으로 보는 것이죠. 욕망을 가진(갖게 된) 주인공의 파멸은 고골의 작품에서 자주 나옵니다. <광인일기>의 포프리쉰이나 <넵스키거리>의 피스카료프도 모두 자기 욕망(판타지)의 희생자가 됩니다...

Sati 2009-12-20 21:29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서재에서 강의를 듣는 기분인걸요^^

펠릭스 2009-12-21 21:3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아인스 2009-12-19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줌파 라이히의 장편소설 <이름 뒤에 숨은 사랑>(원제 The Namesake)의 주인공이 '고골리'라는 이상한(?) 이름을 갖게 된 경위가 주인공의 아버지가 좋아하는 바로 이 작가의 이 작품 때문이었습니다. 고골의 <외투> 속에서 잉태된 아이라는 뜻을 갖고 있지요. 마침 궁금했었는데 이 글을 보니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로쟈 2009-12-19 23:02   좋아요 0 | URL
네, 그래서 <이름 뒤에 숨은 사랑>도 구해놓았는데,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안 보이네요.^^;

Sati 2009-12-19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따가 <뉴문> 보러갈까 했는데, <외투>라니, 정말 서프라이즈네요. 오늘은 기쁜 일이 연발로... /^0^/

로쟈 2009-12-19 23:02   좋아요 0 | URL
보고 싶었던 영화인데, 너무도 가까이에 있더군요.^^;

sophie 2009-12-19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 재밌어요. 로쟈님한테 듣는 러시아문학 이야기 또 기다려지네요. 그나저나 모자달린 외투를 사야하나 말아야하나... 에궁..

로쟈 2009-12-19 23:03   좋아요 0 | URL
너무 큰돈은 들이지 마시길.^^

페크pek0501 2009-12-22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스토예프스키는 "우리는 모두 고골리의 <외투>속에서 나왔다"라고 <외투>를 격찬했지요. 도스토예프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이란 작품이 그 영향을 받은 작품이지요. 전 <외투>라는 작품을 이렇게 읽었어요. 민중의 힘없는 비참한 현실의 이야기이며 그런 가엾은 사람을 도와 주지 못하는 무력한 권력 이야기라고. 멋지게 장만한 외투라기보다는 억울하게 빼앗긴 외투로 봅니다. 외투를 빼앗기고 도움을 요청하지만 아무도 도와 주지 않습니다. 순경도, 경찰서장도, 유력한 인사도... 그러니까 '이것이 현실이다. 세상이 이래서야 되겠는가'라고 작가가 말하고 있다고 봅니다. 문학(또는 예술)의 매력은 해석의 다양성에 있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보는 게 옳은가, 하며 따지는 것보다 그저 많은 해석이 나오는 작품이라면 흥미로운 작품이다, 라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요. 우리의 사고영역을 확장시켜 주니까요. 다른 해석이 많이 나오길 기대하며...

로쟈 2009-12-23 23:48   좋아요 0 | URL
네, 작품의 뒷부분만 보면 그런 해석도 가능합니다. 한데, 고골 자신이 아카키에 대해 조롱하는 듯한 표현도 서슴지 않아서 해석이 복잡해집니다...

페크pek0501 2009-12-22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신 : 이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주인공 아카키는 자신의 세계 안에 갇혀 서류를 정서하는 것을 좋아하며 살 땐 행복했는데, 그가 외투를 마련하여 세상에 나오자 불행이 시작된거죠. 그러니까 인간은 개인의 영역에서의 삶에선 아무 문제 없이 살 수 있지만 한 걸음만 내딛어 밖으로 나와 세상 사람들과 부딪히게 되면 고단한 삶을 살게 된다는 거죠. 혼자 살며 행복을 누리는 것은 가능하지만 세상과 부딪히며 살기 시작하면 힘든 삶이 시작된다는 것. 저도 현재 평화롭게 살고 있지만 만약 누군가가 제게 소송을 걸어 법(세상)과 싸우게 되면 제 인생은 엉망이 되어버리는 식이죠. 힘없는 사람이 살아가기엔 이 세상이 녹록치 않다는 것. - (지금 생각난 것을 적어 봤을 뿐이며, 이런 제 생각이 옳은지에 대한 확신은 없습니다.)

로쟈 2009-12-23 23:49   좋아요 0 | URL
'개인의 영역 VS 세상'은 좀 모호하구요, 저는 '충동 VS 욕망'의 구도라고 생각해봤습니다...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출판기사를 옮겨놓는다. 나데쥬다 만델슈탐의 회고록 <회상>(한길사, 2009)을 다루고 있다. 지금까지는 이 책에 대한 유일한 언론리뷰일 듯싶다. 학술명저번역총서의 하나로 나온 것이긴 하나, 20세기의 가장 대표적인 회고록의 하나로 널리 읽히면 좋겠다.    

한겨레21(09. 10. 12) 스탈린의 '사냥개 같은 시대'에 대한 증언 

“늑대를 쫓는 사냥개 같은 시대가 내 어깨 위로 달려들지만,/ 내게는 늑대의 피가 흐르지 않는다./ 차라리 털모자처럼 나를/ 시베리아 벌판의 따뜻한 털외투 소매에 끼워넣으라.”  

20세기 러시아 시의 거장 오십 만델슈탐(1891-1938)의 시 '늑대'(1931)의 한 대목이다. 시의 원제목은 '다가오는 시대의 울려 퍼지는 위업을 위해'이지만, 그냥 '늑대'라고 불렸다. ‘다가오는 시대’를 시인이 “늑대를 쫓는 사냥개 같은 시대”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그러한 시대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힌 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1934년 5월의 어느 날 밤 시인의 집에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만델슈탐은 스탈린을 풍자한 시를 써서 사람들 앞에서 낭송한 일이 있었고, 그 한 달 전에는 공개석상에서 아내를 모욕한 한 작가의 뺨을 때린 적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자신의 운명을 어느 정도 예감하고 급하게 가장 절친한 동료 시인 아흐마토바를 모스크바로 불러들였다.(*아래는 만델슈탐 가족과 아흐마토바를 찍은 사진. 왼쪽에서 두번째가 나데쥬다이고, 맨 오른쪽이 아흐마토바, 그 옆이 오십 만델슈탐이다.)   

마침내 그날 밤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아파트를 수색하고서 시인을 체포해갔다. 시인의 아내 나데쥬다와 아흐마토바만을 덩그러니 남겨놓고서. 그렇게 체포되어 3년간의 유형생활을 한 만델슈탐은 1938년에 아무런 이유 없이 두 번째로 체포되어 시베리아의 강제수용소로 이송되던 중 사망했다. 만델슈탐의 주검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의 죽음이 1940년 5월 사망인 명부에 기록되었다. 그것이 가족들이 알 수 있는 사실의 전부였다. 악명 높은 강제수용소에서의 더딘 죽음보다는 그래도 덜 끔찍한 일이었다고 그의 아내는 자위했다.   

‘사냥개 같은 시대’에 대한 증언으로서 <회상>(한길사 펴냄)은 시인의 미망인 나데쥬다 만델슈탐의 회고록이다. “무슨 이유로 그를 잡아갔지?”란 질문은 금기시되었지만, 누군가 그런 질문을 던지면 아흐마토바는 격분하여 소리쳤다고 한다. “무슨 이유가 있겠어? 아무 이유없이 사람들을 잡아들인다는 걸 아직도 모르겠어?” 바로 그 시대의 목격담이자 증언이다. 한 시대의 증인으로서 나데쥬다는 자신이 겪은 삶과 고통을 면밀하게 기록한다. 그녀의 생존 목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남편의 출판되지 않은 시들을 보존하는 것, 그리고 그녀가 겪은 부조리한 시대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후세를 위해 증언하는 일이 다른 하나였다. 오직 이 두 가지 목표를 위해서 그녀는, 다시 모스크바에 정착해도 된다는 허가를 받을 때까지 소련 전역을 떠돌아다니며 공장 노동자와 학교 교사, 번역가로서의 삶을 전전해야 했다.(*아래는 나데쥬다의 회고록 세 권과 아흐마토바에 대한 회상록.)   

  



만델슈탐은 자신의 원고에 대해 평소 무관심한 태도를 취해서 아무것도 보존하지 않았다. 아내 나데쥬다는 그런 남편의 원고를 보존하여 나중에 미국에서 전집이 출간될 수 있도록 했으니 첫 번째 목표는 이룬 셈이고, <회상> 이후에도 두 권의 회고록을 더 집필함으로써 20세기를 통틀어서도 기념비적인 기록을 남겨놓았으니 두 번째 목표도 달성했다. 문제는 그녀가 겪은 시대가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후세가 애쓰는 일이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동구권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지적이 떠오른다. 그에 따르면, 주민 1천만 명이 사는 구동독에 사람들을 통제할 상근 비밀경찰요원이 10만 명이나 있었지만, 나치의 게슈타포는 독일 전체를 1만 명의 상근요원들로 관리했다. 그래서 공산주의 사회가 더 억압적이었느냐 하면 정반대다. 시민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고발 네트워크에 의지할 수 있었기에 게슈타포는 굳이 많은 수의 요원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 따름이다. 반대로 공산주의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동료를 고발하는 데 저항했다. 따라서 훨씬 더 많은 요원들이 필요했다. 이러한 도덕적 감각은 정확히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자체에 의해 유지된 것이라고 지젝은 말한다. 나데쥬다 만델슈탐의 <회상>에는 음모를 꾸미는 자들 못지않게 그러한 도덕으로 무장한 이들도 자주 등장한다. ‘나데쥬다’는 러시아어로 ‘희망’을 뜻한다. 그것은 고통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은 삶의 기록이 전해주는 역설적인 ‘희망’이기도 하다. 

09. 09. 28.  

P.S. 아래 그림은 책의 표지로 쓰인 바실리 수리코프의 <친위대 처형의 아침>(1881). 아흐마토바는 트레티야코프(트레챠코프)미술관에 걸린 이 그림을 보고 "짐 썰매에 실려 간 뒤, 땅거미가 질 무렵 거름더미 같은 눈 속에 파묻히고, 어떤 정신 나간 수리코프가 내 마지막 길을 그리게 될까?"란 시를 썼다(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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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9-28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찾아보니, '수리코프'도 '레핀'과 함께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미술 구룹인 '이동파'의 수장인 '이반 크람스코이'의 제자군요. 우리나라의 '역사회화(이순신, 강감찬 등)'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만델슈탐'에 대한 '회고'들을 독일의 '표현주의'로 담아냈더라면 더 리얼했을 것이라는 억지 생각에 서경석 선생의 '고뇌의원근법(돌배개,2009)'의 리뷰를 읽었습니다. 이데올로기 문제를 상품화(미술품)하는 것에 못마땅한 사람도 있지만요.

로쟈 2009-09-29 19:28   좋아요 0 | URL
나데쥬다의 회고록은 담담하면서 기품이 있습니다. 표현주의는 '인위적'이란 인상을 줄 수 있지 않을까요...

펠릭스 2009-09-29 19:59   좋아요 0 | URL
그렇겠네요. 아내가 남편을 회고하는데 부드러움과 내재된 힘과 의지 등을 표현하려 할 것 같아요. 추한 모습보다,,,
 

프랜신 프로즈의 <소설, 어떻게 쓸 것인가>(민음사, 2009)의 말미에는 추천도서 목록이 실려 있는데, 이름하여 '소설 쓰기 두려운 날 읽으면 좋은 책'이다.    

이런 류의 리스트를 좋아하는지라 꼼꼼히 읽어봤는데, 그 자신이 작가인 프로즈의 책은 포함돼 있지 않다. 여섯 쪽 정도니까 적당한 분량이다. 우리에게 생소한 작품들도 적지는 않아서 리스트를 만들까도 했지만 또 '마이리스트'로 만들어놓기에는 너무 많다. 그래서 러시아문학 작품만 골라놓기로 했다(팔은 안으로 굽는다). 영어권 작가의 리스트답게 단연 톨스토이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영어권 작가들이 꼽은 최고의 소설가가 톨스토이였다), 그래도 두어 권의 이채로운 책이 포함돼 있어서 눈길을 끈다. 모두 16종이며 배열은 가나다순이다.   

1. 고골, <죽은 농노>  

 

고골의 대표적인 장편소설이자 작가의 분류로는 '서사시'. <죽은 혼>이라고도 번역된다. 러시아어에서 'dusha'란 말이 '영혼'과 '농노'를 둘다 의미하는 중의적인 단어이기 때문이다. 한국어본이 없는 건 아니지만 시중에서 거의 구할 수 없으며 아직 한국어 결정판도 없다. 고골 탄생 200주년을 맞아 한창 번역중인 걸로 아는데, 올해안으로 출간되는 건지는 모르겠다.  

2. 나보코프, <러시아문학 강좌> 

 

나보코프의 문학강의 시리즈는 세 가지가 있다. 모두 코넬대학 등의 문학교수 시절 강의한 것을 모은 것인데, <러시아문학 강의>, <문학 강의>(내용은 <서구문학 강의>), <돈키호테 강의>가 그것이다. 이 세 권 모두 러시아어로도 출간돼 있고, 나는 영어본과 러시아어본을 모두 갖고 있다. 몇년 전 한 출판사에 번역 출간을 제안하기도 했는데, '시기상조'였다. 지금이라면 사정이 좀 다를지 모르겠다. <러시아문학 강의>의 경우는 전공 대학원생이나 강사들에게 아주 유익한 책. <문학 강의>는 상당한 분량이고, <돈키호테 강의>는 얇다.  

3. 나보코프, <롤리타> 

이건 따로 소개가 필요없겠다.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번역본은 두 종. 나보코프의 언어유희를 만끽하기 위해서는 영어본도 같이 읽어봐야 할지 모른다.  

4.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톨스토이에 비하면 상당히 인색하게도 프로즈는 <죄와 벌> 한권만을 골랐다(하긴 저자는 셰익스피어도 <리어왕> 한편만을 목록에 올렸다). <죄와 벌>은 앞으로도 서너 종의 국역본이 더 나올 듯하므로 한국어로도 풍족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5. 만델스탐, <희망에 반대되는 희망> 

러시아 시인 오십 만델슈탐의 아내 나데쥬다 만델슈탐의 회고록이다. 얼마전 <회상>(한길사, 2009)이라고 번역돼 나왔는데, 지난 세기말에 여러 지식인인들이 꼽은 '20세기의 책'에 포함되기도 했다. 남편 오십은 스탈린 시기에 체포되어 수감되고 사망한다. 개인적인 고통과 불우한 시대를 회상하고 있지만 치열한 성찰과 높은 격조를 보여주는 회고록의 걸작. 1970년에 영어판과 러시아어판이 뉴욕에서 동시에 출간됐고, 영어판의 제목이 <희망에 반대되는 희망>이다. 러시아어판은 <회상>으로 돼 있으며 나데쥬다는 이어서, 2권과 3권도 차례대로 썼다. 2권은 <버려진 희망>이란 제목으로 영역되었고, 3권은 아직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안다. 러시아아어로 '나데쥬다'는 '희망'이란 뜻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론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책.  

6. 바벨, <단편전집> 

이삭 바벨(이사크 바벨)은 20세기 초반 러시아의 대표적인 단편문학의 거장이다. 연작소설 <기병대>가 국내에 소개돼 있다. 덧붙여 바벨의 삶을 소재로 한 소설 트래비스 홀랜드의 소설 <사라진 원고>(난장이, 2009)도 번역돼 있고, 바벨의 책들에 대한 유익한 서평은 마샬 버먼의 <맑스주의의 향연>(이후, 2001)에서 읽어볼 수 있다.   

  

'The Collected Stories'를 '단편전집'이라고 했는데, 영어판으론 선집과 전집이 모두 출간돼 있다. 전집은 1000쪽이 넘는 분량.  

7. 체호프, <서간문 모음집> 

 

체호프의 적잖은 작품이 국내에 소개돼 있지만 그의 편지들은 아쉽게도 번역돼 있지 않다. 그의 전집의 상당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체호프는 많은 편지를 썼고, 영어본으로는 꽤 번역돼 있는 편이다. 옥스포드대학출판부에서 올해 낸 단편집의 표지들이 인상적이군. 

8. 체호프, <안톤 체호프 전집>  

어떤 판본인지는 모르겠으나 '영어판 전집 1-13권'이라고 돼 있어서 놀랐다. 국내에 출간된 두어 권짜리 선집으로는 아직 역부족이다.  

9. 톨스타야, <안개 속의 몽유병자> 

 

유일한 생존작가이자 현역 여성작가 타치아나 톨스타야의 작품집. 국내에도 두 권이 소개돼 있다. 톨스타야는 저명한 소비에트 작가 알렉세이 톨스토이의 손녀인데, 만델슈탐의 <회상>에 보면 알렉세이는 만델슈탐 부부와 악연을 갖고 있다. 톨스타야는 한 TV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유명 방송인이기도 하다.  



10. 톨스토이, <부활> 

 

이제부터는 톨스토이 퍼레이드다. <부활>도 따로 설명이 필요없겠다.  

11.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최근에 <안나 카레니나>도 새 번역본이 나왔다. 로마서 12장 19절에서 가져온 에피그라프는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라고 옮겨졌고, 유명한 첫문장은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가 되었다. 다른 주요 대목들도 기존 번역과 비교해가며 읽어보면 좋겠다. 애독자라면. 

12.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외> 

 

<이반 일리치의 죽음>도 네댓 종 이상의 번역이 시중에 나와 있다. 후기 톨스토이의 가장 대표적인 중편소설.  

13.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전쟁과 평화>는 아직도 새로운 세대의 번역본이 나오지 않았다. 범우사판 외에 몇 개 판본이 있는 정도. 영어판으론 옥스포드대학출판부본이 저렴하다.  

14. 톨스토이, <크로이체르 소나타 외> 

  

전기 톨스토이의 대표 작품집일 듯하다. 펭귄북에서 나온 <크로이체르 소나타>에는 <가정의 행복>, <악마>, <신부 세르게이> 등이 같이 묶였다.  

15. 투르게네프, <첫사랑>  

 

투르게네프의 자전적인 이 작품이 어느새 가장 많이 읽히는 작품이 됐다. 청소년이 읽어도 좋을 만한 책인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16. 파우스톱스키, <희망의 세월: 자서전> 

 

콘스탄틴 파우스톱스키(1892-1968)가 마지막 작가다. 작품집은 갖고 있지만, 이 서정적인 작가의 작품을 자세히 읽을 기회는 없었고, 그의 자서전도 생소하다. 영어판은 이미 1968년에 출간됐다. 당연히 좀 희소한 책이지만 다행스럽게도 온라인에서 읽어볼 수 있다(http://home.freeuk.net/russica2/books/paust/hope/hope.html). 원작은 6권의 책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분량으로 영역본은 그 중 제4권을 옮긴 것인 듯하다.   

К. Г. Паустовский Повесть о жизни. В 6 книгах. Книга 1-3. Далекие годы. Беспокойная юность. Начало неведомого векаК. Г. Паустовский Повесть о жизни. В 6 книгах. Книга 4-6. Время больших ожиданий. Бросок на юг. Книга скитаний 

러시아본을 찾아보니 두 권으로 합본돼 있는 책이 눈에 띄는데, 분량은 총 1278쪽이다. 단편작가로만 알고 있었는데, 오산이었다. 한 세월의 무게가 묵직하다!..   

09. 0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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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7 11: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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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7 11: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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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7 11: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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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7 11: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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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9-27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찾아보니 고골 <죽은 혼> 2부를 중단하고 원고를 불살랐다 합니다.
작품에 대한 회의로 그는 차차 종교적 신비적 정신에 빠진듯 합니다.

국내 소설가중에도 절필하고 종교에 몰입한 분들이 있습니다.
<무진기행> 김승옥, <들불> 유현종 등은 지병에 의한 생각의
변화로 종교에 몰입했고,

'고골'은 작가로서의 정체성 변화에 의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결국은 정신적이든 육체적인든 작가의 변신을 뜻한 것임에
분명합니다. 이름난 작가들었다는 것에 주목합니다.

두 작품(들불,외투)을 거이 외우다 시피합니다.작품속의 약자에
대한 연민이 저를 항상 감동시켰습니다.



로쟈 2009-09-27 11:35   좋아요 0 | URL
네, 일리야 레핀의 유명한 그림도 있습니다. 고골이 자기 원고를 불사르는...

펠릭스 2009-09-27 12:42   좋아요 0 | URL
화가 '일리야 레핀'의 그림은 리얼하군요.
'레핀'이 '고골'을 무척 좋아 했던 모양입니다.

고골 소설 <죽은 혼> -> 알리야 레핀 <분신>,
베르메르 유화 <진주귀고리의 소녀> -> 피터 웨버 영화 <진주귀고리의 소녀>,
곽재구 시 <사평역에서> -> 임철우 단편 <사평역에서>,
톨스토이 소설 <안나 카레니나> -> 이반 크람스코 유화 <미지의여인>.

화가 '레핀'의 스승이 '이반 크람스코'사실에 놀랍습니다.

글, 그림, 소리의 교감은 묘한 생명력을 느끼께 합니다.
일상생활에서도 한 번 본 중년 남자에 대한 캘릭터(외모)가 몇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경우가 있어요. 그 남자(캘릭터)속에 미지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 막연한 상상때문에

로쟈 2009-09-27 12:41   좋아요 0 | URL
'크람스코이'입니다. 작가들의 초상화도 많이 그렸어요...

노이에자이트 2009-09-27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24번 안동민 번역 <죽은 혼>이 완역본인데 영역본을 대본으로 했습니다.뒤에 '외투'가 함께 실려있어요.그런데 이 이후로 번역이 안 된 건가요? 은근히 재미있는데 안타깝군요.일종의 로드 무비같다고나 할까요? 요새 활자로 번역한다면 600쪽이 넘을 것 같아요.

갑자기 읽어보고 싶네요.읽은 지 몇 년 되었거든요.

로쟈 2009-09-27 17:11   좋아요 0 | URL
저는 <죽은 농노>라고 나온 정음사판으로 읽었더랬습니다. 다른 번역본도 더 있긴 합니다...

2009-09-27 21: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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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8 01: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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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10-12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3년에 삼성이 '톨스토이문학상'를 제정하였군요. 이런 경우도 있군요.

로쟈 2009-10-12 22:10   좋아요 0 | URL
러시아에선 그래도 상금이 센 문학상이라고 합니다...

털세곰 2009-12-03 0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죽은 혼은 어느 분에 의해 번역이 가열차게 준비되고 있나요? 혹 알려주시면^^
 
포스트 소비에트 시대 해체하기

그린비출판사의 블로그에서 리클린의 <해체와 파괴>(그린비, 2009) 역자 인터뷰를 옮겨놓는다(http://greenbee.co.kr/blog/739). 책을 읽는 데 참고가 될 듯싶다. 더불어 블로그의 '인문학 해외통신' 코너에는 역자의 글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와 사회적 죄의식의 기원'이 연재되고 있는데, 러시아 지성사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흥미롭게 읽어봄 직하다.  

 

『해체와 파괴』역자 인터뷰 ― 러시아의 지적 전통과 현대 유럽 철학의 결합 

자기소개를 간략하게 해 달라. 지금까지 어떤 공부를 해왔는가?
원래 한국에서 전공한 것은 ‘러시아 문학비평사’, ‘러시아 근대 지성사’였다. 그런데 박사과정 중에 연구공간 수유+너머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다음에 방향이 조금 변하였다. 대학 안의 분과제도 밖으로 나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러시아 유학을 할 때는 문화연구로 방향을 틀었다.

미하일 리클린은 우리에게 낯선 인물이다. 어떤 인물인가?
이 책은 우연한 계기로 접하게 되었다. 운이 좋았는지 모스크바에 있을 때, 리클린을 두 차례 만나서 인터뷰까지 했었다. 그는 우리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다. 이 사람은 유럽에서 자신의 책을 내고 있고, 조금씩 자신의 이름을 알려나가고 있다. 처음에는 제임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를 러시아어로 번역하는 등, 인류학적인 연구를 했었다. 하지만 박사학위는 ‘구조주의 연구’ 였다. 1980년대 중 후반, 당시로서는 운이 좋게도 베를린, 파리에서 현대철학의 흐름을 접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특히 데리다와 세미나를 오래했다. 이 세미나를 통해 ‘해체주의’라고 하는 자신의 공부에 밑천이 될 수 있는 중요한 흐름을 만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소비에트의 몰락, 새로운 러시아가 시작하는 시점에서) 유럽의 현대철학을 주도하던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2000년대에 들어와서야 그 내용을 잡지에 올리고, 책으로도 묶어낼 수 있었다.

『해체와 파괴』는 제목부터 뭔가 강력한 인상을 준다. 어떤 의미의 제목인가?
해체와 파괴는 데리다와 하이데거에서 논점을 끌어다 쓰는 대구적인 표현이다. '해체'는 당연히 데리다와 해체주의에서 온 것이다. 파괴라는 말은 하이데거가 근대 형이상학의 종점을 보면서 이야기 한 말인데, 이걸 끌어다 쓴 것이다. 물론 니체에게도 쓴다. 전통적인 사유의 '틀'을 조각내버리는 (요즘은 잘 사용하지 않는 말로) 포스트 모던한 사유이다. 리클린 본인의 이야기로는 들뢰즈의 사유를 '파괴'라는 말로 설명한다고 한다. 아무래도 한국과는 들뢰즈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다 보니, 나도 리클린을 만났을 때, 꼭 그 단어 밖에 없는가 물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은 받아들이는 지형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다.  

들뢰즈 사유에서 이야기 하는 '탈주선'의 사유를 리클린 자신은 파괴적인 선들로 이해한다고 이야기 했다. 국민으로서, 한민족으로서,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와 같은 '~로서'의 규정들을 비켜나가는 힘들, 이것들이 기존에 규정된 것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선들을 만들 때 그 선은 분명 파괴의 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해체'가 기존 전통철학의 고정된 틀을 깨는 동력이 된다면, '파괴'는 그런 규정들을 넘어서는 힘으로 볼 수 있겠다.

『해체와 파괴』에 대담자로 등장하는 철학자들은 어떤 기준으로 선별된 것인가?
리클린이 90년대를 전후해서 유럽에 체류할 때, 본인이 생각하기에 유럽의 현대 지성, 가장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가장 현대적인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뽑은 것이다. 다만, 지금과는 (시간적인) 격차를 가지고 있어서 지금 우리에게 얼마나 시의성이 있는가를 기준으로 놓고 보면, 조금 다른 문제가 될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말의 유럽 사유를 정리하는 의미에서라면 이들이 갖는 대표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리라 본다.

향후 개인적인 작업 계획이 있다면?
내가 러시아 전공자이기 때문에 러시아의 뭘 끌어와서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금 한국 사회에서 지적 담론이 구성되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실천되는 장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러시아로부터 받아들일 수 있다는 생각은 한다. 그것은 지금 러시아의 정치적 상황, 경제적 상황이 어떻다는 것과는 무관할 것 같다. 러시아가 거지나라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지적 자원은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이고, 러시아 정치제도가 후진적이라고 해도 역시 그로부터 반발적으로라도 우리의 지적자원으로 유용하게 쓰일 것들이 있다고 본다. 그래서 앞으로 러시아 사유의 면면한 흐름들을 한국에 소개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다. 서구와도 비슷하면서도, 서구와는 다른 것들, 현재 러시아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들을 조감해 보는 것은 러시아의 과거를 보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09. 0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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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13 00: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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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13 09: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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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13 03: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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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13 09: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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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9-13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통철학에 대한 현대적 사유의 관계 규정', '지적자원으로 유용', '사유의 도정' 이라는 말에 대해서 음미해봅니다. '도정'과 '보리개떡'에 대해서도.

로쟈 2009-09-13 19:37   좋아요 0 | URL
마지막은 유머신 거지요?^^

펠릭스 2009-09-14 08:39   좋아요 0 | URL
산행중 선배에게 '왜,,산을 다니십니까?' 물었더니,
"생각을 깨기 위해서'라고 대답했습니다.
'도정'은 곡립의 등겨층을 벗기는 조작입니다.
저는 '사유의 도정'과 '생각을 깬다"는 말을 같은 의미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모친께서 만들어 주신 "보리개떡"을 추억했습니다.
호밀가루 대신 사용한 '맥강'은 보리를 보리쌀로 몇 번
도정하면 나오는 보리가루입니다.
모친는 물먹인 '맥강'을 부풀리기 위해 '소다'를 넣고, 단맛을 내기
위해 '사카린'를 넣었습니다.
가마솥에 물을 붓고,시누대를 건 다음 모시천을 깔고, 그 천위에 어른 손바닥만한 맥강빵(보리개떡)을 찌셨지요.
저에겐 최초의 빵이었습니다. '사유의 도정'은 제 유년의
추억속에 남아 있는 '보리개떡'처럼 반가운 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