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의 고독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민음사 / 200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의 종말에 대해 말하는 것은 서구 작가들, 특히 프랑스인들의 기우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동유럽이나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에게는 어불성설이나 다름없다. 책꽂이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꽂아놓고 어떻게 소설의 죽음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밀란 쿤데라-

굳이 밀란쿤데라의 말이 아닐지라도, 이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백년동안의 부엔디아 집안의 이야기는 너무나 대단해서, 최고 작가인 마르케스가 23년동안 고민하고  이 소설을 세상에 내보였다고 하는데 23년까지는 아니라도 오래 고민하고 흡수하고 리뷰를 쓰는 것이 허접한 리뷰를 피하는 길이긴 하겠지만, 두번째 읽고, 두번째 리뷰, 세번 읽고 세번째 리뷰를 쓸것을 자신과 약속하고, '백년의 고독'과의 첫만남에 대해 주절거려 본다.

이 책을 읽기는 쉽지가 않다고 생각했다. 모르는 장면이나 헷갈리는 장면이 나와도 안 찾아보고 일단 그냥 읽어내려가는 나에게는 마지막까지도 이 사람은 누구더라? 하는 인물이 몇 있었다.

그러나 읽고 나면, 특히나 강렬한 마지막 열장정도를 읽고 나면, 그 사람이 누군지 몰랐던건 그리 중요하지 않아진다.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로 시작하는 부엔디아 집안의 흥망은 결국 한가지 이야기다. 중간정도 읽을때까지만해도, 되풀이 되는 이름과 되풀이 되는 이야기에 여기서 끝나도 하나도 안 이상하겠다며 페이지를 끈기있게 넘기기도 했지만, 마지막 장을 읽으면서 그 모든 이야기가 이 결론을 향하여 치달았구나. 처음부터 예견되어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머리를 쾅 친다.

옮긴이의 말처럼 '백년의 고독' 을 '백년의 근친상간의 이야기' 로 바꾸어 놔도 될 정도로 이 이야기는 근친상간으로 시작해서 근친상간을 끝난다. 등장인물들의 고독도 근친상간이라는 비도덕에서 오는 고뇌에서 온다.  정녕 그렇다. 이 '근친상간'모티브에는 외부세계(서양세계)와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비확실한 근본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굴절된 역사와 현재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이 책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라틴 아메리카의, 그 중에서도 콜롬비아의 역사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책에 나온 굵직굵직한 사건들( 19세기 말에 일어났던 천일전쟁과 바나나 농장 파업사건)과 인물들은 실존인물들과도 실제 사건들과도 겹친다.

이 책은 역시 호세 아르까디오의 성격을 지닌 아들들과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의 성격을 지닌 아들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가문의 긴 역사를 통해 똑같은 이름들을 집요하게 되풀이해 씀으로써 확실해 보이는 결론들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아우렐리아노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들은 내성적이었지만 머리가 뛰어난 반면에, 호세 아르까디오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들은 충동적이며 담이 컸으나 어떤 비극적인 운세를 지니고 있었다. '

1982년 노벨 문학상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거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어 수없이 많은 독자들을 사로잡은 이 소설을 한 번 읽고 어떻다 말하기는 무리일 것이다. 위에 썼듯이 라틴아메리카 역사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이 책을 보는 것은 많은 것을 놓치고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그랬듯이) 하지만, 이런저런 숨은뜻과 배경지식에 대한 무지에도 불구하고, 그 텍스트만으로도 다시 접하기 힘든 충분히 처절하게 아름다운 소설이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erky 2005-05-02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정말 마지막이 압권이었어요. 맨 마지막 장을 읽고났을때야 비로소 '백년동안의 고독'이라는 책 제목이 확실히 이해됐었죠. 솔직히 저는 이 책을 상당히 어렵게 읽었었는데요. 워낙 어렸을 때 읽었고, 특히 마술적 사술주의 기법이란 것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했다보니 이해하기 무척 어려웠던 것 같아요. (2번 읽다 포기했고, 3번째 시도만에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책이었습니다.) 다 읽고나서 뿌듯함과 허무함, 황홀감이 마구 교차했던 책이었어요.

하이드 2005-05-02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어요. 맞어요. 마지막장! 저도 어렸을 때 접하고 지금 또 나이 들어서 접하고, 나중에 또 접하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말이지요. 정말 대단하단 말 밖에 안 나와요.

해적오리 2005-05-05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요. 저도 읽어보고 싶은데 번역본 어디게 좋은가요?

하이드 2005-05-06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민음사꺼밖에 안 읽어봐서요. 근데, 대체로 민음사께 믿음직 한것 같아요. ^^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남편
에프라임 키숀 지음, 변상출 옮김, 송은경 그림 / 좋은생각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개를 위한 스테이크 ' 이후 오랜만에 읽는 키숀의 책이다. 그의 입담은 대단하다. 이스라엘에서의 유머는 정말 멀고도 멀어보이지만, 아니, 그걸 떠나서 이스라엘과 유머는 당췌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고 생각되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숀의 책은 시종일관 가볍고, 참을성있는 ( 이 참을성이란건 우울하기보다는 희망이 있기에 가질 수 있는 긍정적인 참을성이다.) 등장인물들과 짜증나는 상황을, 돌아버릴것 같은 상황을 유머로 바꾸어 버리는 대단한 책이다.

'주문한 식탁을 기다리며' 라는 에피소드가 있다. 4월 7일 식탁이 부서지고, 세상에서 가장 멋진 아내와 함께 자파의 생산자에게 가서 식탁을 주문하기로 한다. 훨씬 저렴하고 빠르기까지 하다고 한다. 요제프 네벤짤이라는 사람에게 식탁을 주문하고 월요일 정오무렵까지 배달해준다고 한다. 아내는 울상을 지으며 더 빨리는 안되겠냐고 하자 그럼 일요일 정오까지 배달해준다고 한다. 4월 8일의 일이다. 일요일 정오가 되고 식탁은 배달되지 않는다. 이런저런 핑계의 나날들이 계속되고 식탁배달은 그 달을 넘기고, 또 몇달을 넘긴다. 그러는 와중에 만나게 된 작년 크리스마스때 주문한 의자를 기다리는 부인, 올초에 주문한 옷장을 기다리는 교수 등 네벤짤에게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네벤짤 클럽' 을 만들어 장부를 만들고 돌아가면서 네벤짤을 독촉하는 등의 활동을 시작한다.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지고,회보를 발행하며,  '이번엔 어떤 핑계로 네벤짤이 배달을 미룰까' 혹은 ' 피셔씨의 침대는 언제 배달이 될까' 등으로 내기를 하며 친목을 다지기도 한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편인 저자는 모임의 첫번째 총무가 되어 열심히 활동한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아내는 식탁의 배달을 3년뒤 8월17일로 300파운드를 걸었다.  뜻밖의 일이 일어난다. 1월 10일 요제프 네벤짤씨가 식탁같은 것을 들고 집 앞에 나타난다. 이미 식탁의 사용법을 잃어버린 가족들은 당황해 하고 결국 세상에서 가장 멋진 아내는 아래서 밥 먹고 식탁밑에서 휴식하자는 아이디어를 낸다.

세상에서 가장 짜증나는 이런 지연된 배달에서 이렇게 재미있는 공상을 하고 있는 키숀이란 작가가 정말 궁금하다. 짜증내고 화내고 고소하기 보다 클럽을 만들어 친목을 다지는 등의 긍정적인 행동을 한다는 아이디어가 정말 기똥차지 않은가.

완전 깔깔 웃으며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꿀꿀한 기분을 확 전환해주기도 한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inbahnstrasse 2005-05-01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대인(물론 이스라엘과 동일 개념은 아니겠습니다만)의 유머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합니다. 디아스포라의 오랜 세월 동안 온갖 핍박 속에서 다져진지라, 골계가 장난 아닌 것 같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http://en.wikipedia.org/wiki/Jewish_humor 를.

하이드 2005-05-01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그렇군요. 처음 알았습니다. 아니 ,근데, 이런 싸이트는 도대체 어떻게 아시는거야요. 그네들의 일화성 유머들이라거나 하는 얘기 들이 이 책하고 잘 맞네요.

einbahnstrasse 2005-05-01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을 공부하다보니(쿨럭-ㅂ-;) 그렇게 되었습니다. 싱어나 맬러머드 등의 유대계 미국 작가들 작품들 역시 그런 유대성을 어느 정도 보여주는 듯 하네요.

하이드 2005-05-01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나도 옛날엔;;; 문학도였는데;; 그 애착만 남아있고, 기억나는건 거의 없네요. 한심하지만, 이제부터라도. 공부까진 못해도 많이 읽고, 많이 알고 싶어요. ^^

2005-05-02 0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이드 2005-05-02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풉. 속삭이신님. 그런거 신경 안써도 된답니다.
 
모데라토 칸타빌레 (구) 문지 스펙트럼 19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정희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에는 책 표지에 반했어. 그 다음엔 제목이 눈에 들어왔고. '모데라토 칸타빌레' . 뭐였더라, 책에 나오겠지 뭐. 그리고 나서는 마르그리트 뒤라스. 소녀랑 어른 남자랑 사랑하는 그런 영화였지 아마? 그래. 그 양갈래로 머리한 배우. 생각난다. 하얀 원피스에 하얀 모자에. 약간 못난 이에 활짝 웃는 모습. 활짝 웃는데 디게 쓸쓸하고 씁쓸하기까지 해보이던 그 모습.

그리고 오늘 점심시간 이 작은 책을 꺼내들고 표지를 다시 봤다. 이런 짧은 앞머리에 굽슬한 파마의 숏커트머리는 절대로 프랑스 여자에게만 어울리는 머리야. 단정하고 부드러운 눈썹에 눈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짙고 긴 속눈썹. 오만해 보이는 코에 도톰한 입술은 자존심이 강해보여. 동그란 얼굴에 감춰져 있는 귀는 아주 귀여울 것 같아. 브이자로 파인 검은 옷을 입고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여자.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어. '악보 위쪽에 뭐라고 씌어 있는지 읽어볼래? ' 피아노 선생이 물었다. '모데라토 칸타빌레' 하고 아이가 대답했다.

고집스런 아이는 백번도 더 말해준 그 뜻을 끝끝내 말하지 않는다. '보통 빠르기로 노래하듯이' . '보통빠르기로 노래하듯이' 가만히 따라해본다. 소리지르는 피아노 선생 앞의 얼굴 굳어진 아이 대신 가만히 되뇌어 본다. '보통 빠르기로 노래하듯이'

그날 그 시간. 피아노 레슨 중. 아이가 '모데라토 칸타빌레'의 뜻을 이야기 하지 않아 혼나고 있는 그 시간 밖에는 여느때처럼 사이렌 소리가 들렸는데, 평소와 달랐던 것은 여자의 비명소리였다. 길게 이어지는 비명소리. 그리고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났음에 분명한 사람들의 웅성이는 소리. '내일이면 무슨 일인지 알겠죠' 아이의 엄마와 피아노 선생은 이야기 하고, 레슨은 계속되고, 피아노 선생은 계속 화내고, 아이는 고집 부리다가 피아노 치다가 다시 멈췄다가 다시 치기를 반복한다. 아이의 엄마는 어쩔줄 몰라하면서도 아이를 끊임없이 독려하고 피아노 선생님에겐 변명을 늘어 놓는다.

레슨이 끝났다. 피아노 선생님집에서 내려와서 거리로 나선 엄마와 아이.

'여자의 비명' 이 끝난 그 까페 앞을 지난다. 광기에 휩싸인 한 남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여자를 애무한다. 남자는 피범벅이다. 여자에게 키스하고 여자 옆에 눕는다. 경찰이 오고 그를 데려간다.

그 강렬한 사건후의 소진. 재로 남은 남자. 를 본 여자는 몹시 흔들린다. 그녀를 십여년동안 지탱하고 있던 받침 하나가 빠지면서 이제 그녀가 기울어 쓰러지는건 시간문제로 보인다. 그러나 아직 그녀의 티내지 않으려는 노력이 먹히는 시간이다.

소도시 공자주의 아내 '안'  그녀는 엄마로서, 아내로서 움쭉달쑥 못했던 십여년동안에서 벗어나려 한다. 저택 밖의 창문으로 공장노동자들이 일을 마치고 나오는 모습을 보고, 그 중에 한 둘은 목련꽃 향기가 짙은 밤이면 떠올려 보곤 한다. 그녀의 일탈의 징조이다.

부둣가로 산책을 나가 노동자들의 까페로 들어가 쇼벵을 만난다. 그 둘은 어쩌면 예전부터 알았고, 어쩌면 알았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고 본인만이 알 수 있는 말을 한다. 그러면서 그 날 사랑해서 여자의 부탁에 의해서 사랑해서 총을 쏜 사랑해서 파멸한 연인에 대해 이야기 하고 본인들을 거기에 대입시켜 사건을 되풀이 한다. 사랑을 되풀이 한다.

그녀의 의심. ' 아이가 정말 존재하는지 '에 대한 의심은 나로 하여금 '쇼벵'의 존재에 대한 의심. 나아가서 '그녀는 살아 있는 것인가' 에 대한 의심까지 들게 한다.

책의 마지막은 그들이 예정했던 수순으로 끝난다.

소소한 내용이 머리에 박히기보다는 그 여운만이 길게 남는 책이다. 후르륵 마셔야 했지만, 맛이나 향따위 음미하며 마실 수 없었지만, 카페인과 같은 각성제가 나도 모르는새 더 빨리 흡수되어, 그 여운이 더 긴 책이다. 그렇게 또 빨리 잊혀질 책이려나.

보통 빠르기로 노래하듯이.


댓글(5)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연 2005-04-28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읽었을 때 뭔지 모르게 프랑스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었어요.
책을 덮으면서 심호흡을 했던 기억도 나구요. 뒤라스의 글은 늘 그런 것 같네요^^

Phantomlady 2005-04-29 0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뒤라스 이 아줌마가 좋아요 부영사나 에밀리 엘의 사랑도 넘 좋아요..

하이드 2005-04-29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런 책은 도대체 어디서 구한단 말이냣!

비연 2005-04-29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영사는 절판되었더군요..흠. 이것도 재미난 건 사실입니다.

moonnight 2005-04-29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 마르그리트 뒤라스 글 좋아하는데.. 리뷰 감사합니다!
 
브라운 신부의 지혜 동서 미스터리 북스 111
G. K. 체스터튼 지음, 박용숙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도 압니다. 이 드라마틱한 배경에 지루하고 짧으며 무매력이 매력인 브라운 신부.

그렇지만, 제가 웃느라 숨막혀 하며, 눈물 글썽이는.

이 소설을 저는 차마 권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키가 작고 볼품 없는 사나이. 손에 든 모자와 우산조차 큰 짐처럼 다루기 힘들어보이는. 그나마 검정 우산은 흔한 것으로 벌써 수리했어야 할 상태. 넓은 차양이 위로 말려간 검정 모자. 아무튼. 소박하고 무능한 사람의 표본같은' 주인공.  주인공을 사랑해야 할 작가마저도 맨날 소개할때 '키가 작고 볼품 없는... ' 으로 브라운 신부를 묘사하고 있으니, 저와 같은 심정인걸까요?

사랑을 선택할 수 있던가요. 사랑은 빠지는 거죠. 사랑이란 나락으로 떨어지는(Fall in love) 거죠. 어쩔 수 없죠 뭐. 저는 이미 발 헛디뎌 빠져버린걸요.

내가 봐도 참 지루하고, 그나마 단편이라 호흡이 짧기에 근근히 읽어냅니다만, 브라운 신부의 세계에선 모든 것이 참 드라마틱 합니다. 사람도, 배경도, 악당도, 조연도. 그러니깐 그 자신만 빼고 말이죠. 

'도둑 천국'이라는 단편에 나오는 무스카리와 에차를 볼까요? 무스카리는 무스카리스럽고 에차는 에차스럽습니다.

'무스카리는 어디든 칼집과 만돌린 케이스를 들고 다녔다. 그 칼은 많은 빛나는 결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온 것이었다. ... 무스카리는 결코 허풍쟁이도 아니고 어린아이도 아니었다. 다만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면 한시도 참을 수 없어 자신이 그렇게 되지 않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 정열적인 라틴 사람일 뿐이었다. 무스카리의 시는 여느 사람의 산문처럼 이해하기 쉬웠다. 명예와 예술과 미인을 열렬하고 솔직히 숭배했다. 그것은 모호한 이상과 타협으로 만족하는 북유럽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었다. 모호함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그의 솔직함이 위험한 것으로 보였으며, 범죄의 냄새마저 풍겼다. 무스카리는 너무 단순하여 오히려 신용을 얻지 못했다..'

바로 이때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 열매가 맺혀 황금빛으로 빛나는 키 작은 오렌지 나무로 반쯤 가려진 테이블에서 한 사나이가 일어나 다가왔다. 무스카리에게 싸움을 거는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그와는 대조적인 옷차림이었다.

'사나이는 검은색과 흰색 바둑판 무늬의 트위드 양복을 입고 있었다. 칼라를 빳빳이 세우고 핑크색 넥타이를 맸으며 끝이 뾰죽한 노란색 구두를 신고 있었다. 피서지 바닷가를 찾아온 순진한 런던 사람처럼 평범하면서도 눈을 끄는 차림이었다. ... 이탈리아 사람 같은 머리, 곱슬곱슬한 머리카락, 가무잡잠한 피부에 명랑해 보이는 느낌. 그 머리가 보드지처럼 빳빳이 선 칼라와 멋부린 핑크 넥타이 위에 오똑 서 있었다.'

이 드라마틱한 두 남자와 '고대 그리스인 같은 금발, 맑고 발그레한 볼, 여신 같은 모습이 사파이어를 녹인 듯한 바다와 잘 조화된 그녀. 에셀 해로게이트'의 이야기. 정말 흥미진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적어도 눈에 콩깍지가 씌인 저는요.

'시저의 머리' 에서는 한 여자가 집안의 가보인 동전을 훔치고 괴인에게 쫓기는 이야기가 나와요. 그녀의 말을 빌면 그 괴인은 ' 코의 다른 부분은 제대로인데 끝부분이 꼬부라져 있었습니다. 아직 물렁물렁할 때 장난감 망치로 옆에서 내리친 것 같았어요. 그다지 기형이라고 할 것 까지는 없었으나 내게는 말할 수 없이 공포스러운 대상이었습니다. 사나이는 저녁 햇살에 붉게 물든 물 속에서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피바다에서 나타난괴상한 바닷짐승처럼 우뚝 서 있었는데, 어째서 그 비뚤어진 코 끝이 그토록 내 상상력을 자극했는지 지금도 알 수 없습니다. 사나이는 그 코를 마치 손가락처럼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런 생각을 하니까 정말 코가 움직이는 것만 같았습니다. ' 라는군요. 아 , 이 부분에서 옆에서 자던 개가 깜짝놀라 쳐다볼 만큼 큰소리로 웃어제쳤어요.아, 웃으면 안되는데, 하면서도 너무 웃긴걸요. 원래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람이 숟가락으로 밥을 퍼 먹어도 웃음이 마구 난다던데. 그 비슷한 증상인걸까요. 코를 손가락처럼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그 괴인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무섭고, 음침해요. 그리고 재미있어요. 그나마 현실감각을 놓지 않고 이 책을 읽어 나갈 수 있는건 브라운 신부님 덕분이에요.

그의 파트너인 대도였던 탐정 플랑보에 대해서도 빼놓을 수 없죠. 그에 대한 묘사는 '브라운 탐정의 동심' 에 좀 더 자세히 나와요. 그 이야기를 알고 보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죠. 플랑보의 활약은 '팬드라곤의 멸망'과 '징의 신'에 도 나오는데요, 특히 '징의 신'에서는 브라운 신부의 목숨을 구하기도 하죠.

'바로 그때였다. 사나이는 눈이 아찔할 만큼 빠른 동작으로 신부에게 달려들었다. 브라운 신부는 사나이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으므로 이 위기 일발의 순간에 뒤를 얻어맞고 쓰러졌다 해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플랑보는 아무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커다란 두 갈색 손을 긴 철제 의자에 걸치고 있었으므로 사나이의 어깨 모양이 갑자기 달라진 순간 그 큰 의자를 번쩍 눈 위로 들어올려 사형수의 목을 자르는 형리가 도끼를 내리치는 자세를 취했다. ... 저물어가는 저녁 햇살에 비친 플랑보의 긴 그림자는 에펠탑을 들고 있는 거인 같았다. 이 큰 철퇴가 내리쳐졌을 때의 충격보다 그 그림자에 더 크게 압도당한 기묘한 사나이는 당황하여 몸을 돌리더니 쏜살같이 호텔 안으로 달려갔다. 그 뒤에는 사나이의 손에서 빠져나온 날이 넓은 단검이 떨어진 자리에서 빛나고 있었다. "어서 이곳을 떠납시다!" 플랑보는 큰 의자를 아무렇게나 내던지듯 땅에 도로 놓자 키 작은 신부의 팔을 잡고 살벌한 회색 뒤뜰을 달려나갔다. ... 플랑보의 두 어깨가 부풀어오르며 모양이 달라졌다. 걸쇠 세 개와 자물쇠 한 개가 한꺼번에 뜯겨지며 동시에 플랑보는 커다란 뒷문을 마치 가자 성 문을 둘러 멘 삼손처럼 가볍게 들고 밖으로 나왔다... 세번째 총알이 뒤꿈치 바로 뒤에서 눈과 먼지를 날림과 동시에 플랑보가 던진 문짝이 정원 울타리 너머로 가서 떨어졌다. 다음 순간 플랑보는 아무 말 없이 몸집 작은 신부를 번쩍 어깨에 둘러메더니 긴 다리를 바쁘게 움직이며 시우드를 향해 내달았다. '

이런 저런 여전히 지루하고 드라마틱하고 재미있고, 웃겨 죽는 에피소드들이 많네요.

반어법 아니고요, 워낙에 재미없다는 분들이 많아서, 권해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 다만 제가 브라운 신부 시리즈에 홀딱 반했다고요. 그냥 그렇다는 거죠.

 


댓글(9)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이드 2005-04-27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더라구요 ㅜ.ㅡ

panda78 2005-04-27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브라운 신부님 참 좋아해요. ^^
근데 북하우스 브라운 신부 전집은 뒤로 갈 수록, 참크래커를 물도 우유도 주스도 없이 한 통 다 먹는 기분이 들었다구요..;;;

물만두 2005-04-27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로 갈수록 딸리죠...

하이드 2005-04-27 22: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풉. 판다님의 비유란 . 정말이지. 확 와닿는군요.

하이드 2005-04-27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4914924

아, 뒤에는 읽지 말까부다요.

-_-a


panda78 2005-04-27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새로 나오면 그 때 재 도전을.. ^^;; 아무래도 번역 탓도 있을 거 같아서요.
다섯 권 전부 번역자가 다른데다, 번역자들 모두 이전에 번역한 책도 없다던데요. 그래서 그럴지도..;;

▶◀소굼 2005-04-27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라운 신부가 만만해 뵈였을까요; ;

비연 2005-04-28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없다는 분들이 있었군요..전 너무 좋았는데.
북하우스 책 다섯권 다 읽었거든요. 판다님 말씀엔 동의합니다...헤~
뒤로 갈수록 좀 그렇더군요...그래도 추천하고 싶슴다~^^

dreamer79 2005-07-27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우, 하이드님의 평을 추천합니다. 브라운 신부를 추천하지 않는 또 한 사람으로서. 말씀하신대로 온갖 드라마틱 한 사건 속에서도 눈을 껌벅대며 무슨 물건을 잊어 버리기라도 한듯 두리번거리는 무매력의 브라운 신부. (솔직한 심정은, 공유하기 아까운건지도 ^^;;)
 
감각의 박물학
다이앤 애커먼 지음, 백영미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친구에게 사주려던 이 책이 박물관학책들과 같이 있었던건 좀 유감이다. 이 책의 원제는 A Natural History of the Sense.

저자는 서문에서  '감각의 기원과 진화과정에 대해 탐구하고, 감각이 문화에 따라 얼마나 다양한지, 그 범위와 평가는 어떤지 등에 대해 알고자 한다. 또한 다른 감각적인 인간들을 기쁘게 해주고, 덜 감각적인 마음들도 잠시 쉬면서 감탄할 수 있도록 몇 가지 특별한 주제에 대해서도 이야기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하나의 작은 축제가 될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작은 축제. 그 축제는 여러분이 감각적 인간이건 덜 감각적인 인간이건 모두 , 언제라도, 즐길 수 있는 누구에게나 초대장이 뿌려져 있는 그런 축제이다. 누구에게나 있지만, 누구나 그 축제에 참가하는 것은 아니다. 축제는 바로 옆에서 항시 열리고 있지만, 생활에 찌들려서건, 책에 찌들려서건, 사람에 찌들려서건 그 작고 복받은 축제를 무시하고, 외면하고, 심지어는 모.르.고. 있는 분들을 위한 초대장과 같은 책이다.

01. 후각

 냄새보다 기억하기 쉬운 것은 없다. 냄새만큼 표현하기 어려운 것도 없다.

나는 기온의 변화보다는 냄새로 계절의 변화를 알아챈다. 겨울냄새는 구운고구마를 굽는 난로 냄새, 군밤 냄새이고, 눈 냄새, 크리스마스 냄새이다.

각종 냄새에 관한 흥미로운 고찰이 계속된다. 그 중 사람마다 다른 냄새에 관한 챕터에는 항상 축제중인 저자의 축제중이기 위한 팁이 하나 주어진다.

나쁜 냄새란 무엇일까?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지독한 냄새는 무엇일까? 그 답은 문화와 연령, 개인적 취향에 따라 다르다. 언젠가 박물학자이자 사육사인 제럴드 더럴이 과일먹이박쥐를 포획하기 위해 ' 잭프루트'라고 이름붙인 커다란 과일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 새하얀 과육에서는 '파헤친 무덤과 하수구 냄새가 섞인, 시체 안치소에서 나는 것 같은' 악취가 풍겼다고 한다. 너무도 지독한 이 말이 정말인지 알고 싶은 마음에 작가는 언젠가 가보고 싶은 감각의 행선지를 적은 긴 목록에 '잭프루트 철의 로드리게스' 를 올린다.

언젠가 가보고 싶은 나라. '죽기전에 가봐야 할 곳 50 장소' 같은 리스트만 보며 침흘리는 나와는 차원이 틀리다.  '언젠가 가보고 싶은 감각의 행선지' 목록이라니.

후각에 대한 정말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얘기가 나오고, 조향사를 만나 인터뷰 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면서 후각에 대한 버라이어티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후의 다른 감각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역사, 문학,과학, 인류학, 사회학, 종교학, 인문학, 심리학,언어학 의학 등등의 측면에서 본 '후각'은 그야말로 오감중에 최고가 아닐까. (라고 후각만 본 나는 생각해본다.)

 

Shrine -JohnWilliam Waterhouse

02 촉각







 

 

 

 

 

 

 

 

                          The Spinner- Thomas Wilmer Dewing

피부는 우리와 세계 사이에 있다. 피부는 우리를 가로막고 있지만 또한 우리에게 개인적인 형태를 부여해주고, 외부에서 침입하지 못하도록 보호해주며, 필요에 따라 우리를 시원하게도 따뜻하게도 해준다... 가장 경이로운 것은 피부가 스스로를 복구하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갱신한다는 점이다. 무게가 3-45킬로그램에 이르는 피부는 인체에서 가장 큰 기관이자 성적 매력을 부여하는 핵심기관이다. 피부는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형태를 취한다. 발톱, 가시, 발굽, 깃털, 각질, 머리카락등. 피부는 방수가 되고, 물에 씻을 수 있으며, 신축성이 있다.

이런 식으로 피부를 보아 본 적 있는가? 이 길고도 짧은 문장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나의 피부를 다시 본다. 음. 방수도 되는구나. 등등등 등등등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들. 발톱끝에서 머리카락 끝까지 쭈뼛 한번 세워보고 나의 피부와 촉각을 만끽해본다.

촉각 부분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접촉'에 대한 실험이다. 쓰다듬어준 조산아들은 그렇지 않은 아기들에 비해 체중 증가 속도가 50퍼센트 더 빠르다. 안마를 받은 아기들은 더 활발하고, 또렷하고, 반응을 잘하고, 주변 환경을 더 잘 알고, 소음을 더 잘 참을 수 있다.또한 적응이 빠르고 정서적으로도 훨씬 안정되어 있다. 몇장에 걸쳐서 여러가지 실험결과들이 나오는데, 마지막에는 '신체접촉을 주고받지 못한다면, 나이와 상관없이 모두가 다 병이 들거나 접촉 결핍증에 걸릴 것이다' 라는 다소 격한 결론이다. 그와 같은 접촉의 중요성은 물론 어린 아이일수록 더 영향이 크다. 그리고 털에 대해 나온 부분. ' 대머리들은 섹시하다. 탈모가 되는 것은 혈액 속의 테스토스테론 농도가 높기 때문이고, 카스트라토나 환관 중에 대머리를 볼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다시 보며 머리에 쏙 넣고, 웃을 수 있는 그런 글들이 많다. 물론 몰랐던 사실들이 훨씬 많긴 하지만서도.

여기서도 역시 위에 얘기했던 사회학, 인문학, 인류학, 등등등 플러스, 음악, 미술까지 끌어와서 '우리에게는 '촉각' 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생각하게 한다.  아, 촉각에서는 '키스에 관한 고찰'이라는 재미있는 글도 있다.

03 미각



 

 

 

 

 

 

 

 

 

 

 

 

 

 

 

 

 

무리요 - 과일 먹는 소년들

미각에 대한 첫마디는 '미각은 사회적 감각'이다. 라는 것이다. 혼자 식사하는 것을 꺼리는 인간에게 음식은 대단히 사회적인 구성 요소다. 결혼식은 피로연으로 끝나고 친구들은 기념 만찬 자리에서 재회한다. 아이들의 생일을 알려주는 것은 아이스크림과 케이크다. 브리야 샤바랭이 말한 대로 ' 사랑, 우정, 투기, 권력, 끈질긴 요구, 후원, 야심, 음모 등 모든 사회적 교류가 식탁 주위에서 이루어진다'  미각에선 브리야 샤바랭의 글이 자주 인용된다. 이 사람의 '미식예찬'이 번역 되어 있는데, 꽤나 마음에 드는 책이다.

재미있었던 부분. '송로의 진실' 중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채소이지만, '신의 관능성'과 '세상에서 가장 퇴폐적인 향'을 가지고 있다는 비싼 송로버섯이다. 이 송로 버섯을 찾기 위해 동원되는 것이 암퇘지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암퇘지 입장에서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작가를 따라  암퇘지의 후각을 쫓아가보자.

' 암퇘지 한 마리를 송로가 자라는 들판에 풀어 놓으면 암퇘지는 블러드하운드처럼 코를 킁킁거리며 미친듯이 땅을 파대기 시작한다. 암퇘지는 무엇 때문에 송로에 집착할까? 독일 뮌헨 공대와 뤼백 의대의 연구자들은 송로에 수컷 돼지의 호르몬인 안드로스테놀이 돼지 한 마리 속에 들어 있는 것보다 2배 가량 더 함유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수퇘지의 페로몬은 인간의 남성 호르몬과 화학적으로 유사한데, 그래서 송로가 인간을 자극하는지도 모른다.... 송로 채집자와 암퇘지에게, 지하의 송로 농장 위를 걷는 것은 우습고도 슬픈 일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암퇘지는 여태까지 만나본 중에서 가장 섹시한 수퇘지의 냄새를 맡는다. 왠지 모르지만 수퇘지는 지하에 있는 듯하다. 암퇘지는 흥분해서 미친 듯이 땅을 파지만, 나온 것은 고작 이상하고 울퉁불퉁한 얼룩무늬 버섯일 뿐이다. 그런데 다시 바로 옆에서 더할 나위 없이 남성적인 또다른 수퇘지( 역시 지하에 묻혀 있는) 의 냄새를 맡고 미친 듯이 달려들어 땅을 판다. 암퇘지는 욕망과 좌절로 광포해질 것이다. 마침내 송로 농부는 버섯을 모아서 배낭에 넣고 암퇘지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지만, 뒤에는 잘생긴 수퇘지들의 진한 향내를 풍기며 욕정으로 떨고 있는 들판이 있다. 모든 수퇘지가 암퇘지를 원하며 숨을 헐떡이고 있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

조금 길긴 했지만 ,이런 식도 있다. 저자가 독자를 '감각'의 세계로 초대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때론 돼지를 따라, 때론 중세의 식탁에서, 때론 우주의 무중력에서 말이다. 오감을 열어 놓고 사는 작가가 부럽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초대장을 받아들였고, 잠시나마 즐겁게 나의 감각들을 즐겼다. (주위에서 희안하게 보는 부작용이 있다.)

04. 청각

아랍어로 어리석음은 ' 귀 기울이지 못함'을 뜻한다고 한다.  소리는 삶에 대한 이해를 두텁게 하고, 우리는 소리에 기대 주변의 세계를 해석하며, 세계와 소통하고, 자신을 표현한다.

시각과 청각을 모두 잃은 사람들은 듣지 그 무엇보다 듣지 못하는 것에 대한 슬픔을 표시하는데,이를 가장 호소력 있게 표현한 사람이 헬렌 켈러다.

'나는 눈이 안 보일 뿐 아니라 귀도 안 들린다. 귀가 안 들려서 생기는 문제는 눈이 안 보여서 생기는 문제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다고 해도, 훨씬 깊고 복잡하다. 귀가 들리지 않는 것은 훨씬 더 지독한 불행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장 필수적인 자극. 즉 언어를 이끌어내고 생각을 불러 일으켜 우리를 지적인 인간 집단 속에 있게 해주는 목소리의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청각'에서는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청각'을 상실한 문학가들의 이야기가 나오고 ,무엇보다도 바닷가에서 고래의 노래를 듣는 것은 정말 꿈에 나올 정도로 짜릿했다.  이 책을 통틀어, 다이앤 애커맨이 한 그 모든 경험 중 딱 하나를 경험하게 해준다면 ' 바다에서 고래의 노래를 듣는 것' 을 해보고 싶다.

 

                                                                                           ophelia- Johnwilliam Waterhouse

05. 시각



 



 

 

 

 

 

 

The False Mirror- Rene Magritte

거울을 보라. 우리에게 2개의 시선을 마련해준 얼굴은 섬뜩한 비밀을 드러내고 있다. 거울 속에 비친 눈은 포식자의 눈이다. 대부분의 포식자들은 두 눈이 머리의 정면에 똑바로 붙어 있어 양안시를 이용하여 사냥감을 발견하고 추적할 수 있다.

할얘기가 무궁무진하게 많은 챕터다. '시각'

포식자의 눈으로 시작한 시각에 대한 이야기에는 눈을 속이는 동물, 곤충, 식물의 보호색에 관한 흥미로운  소재들이 나온다.  그리고, 미인의 얼굴, 하늘, 번개와 천둥. 그리고 가을에 변하는 잎의 색깔. 빛, 색깔, 그리고 내가 이래서 이 책이 좋다. 화가들에 대한 이야기들 까지도.

그리고  06. 공감각





공감각은 가장 짧고 가장 이해하기 힘들고,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가장 재미있는 챕터였다.  음에서 색깔을 보는 스크리아빈. 알파벳에서 색을 보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여기엔 공감각에 대해 정확하고 아릅답게 묘사한 나보코프의 글이 실려 있다. 공감각의 세계를 가장 잘 넘나드는 예술가들의 기벽에 대한 이야기들도 재미있다.

아쉽지만 끝이다. 우리 옆에서 항상 열리고 있는 작은 축제는 끝이지만, 나는 ' 감각의 박물학'이라는 초대장을 꼭 쥐고 축제에 참가했고, 즐겼고, 이제 또 조그맣지의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대로 또 축제를 즐길 것이다.

작가의 후기에 인용되어 있는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말

' 나는 목적지에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가기 위해서 여행한다. 나는 여행 그 자체를 위해 여행한다. 가장 멋진 일은 움직이는 것이다 '

가장 멋진 일, 삶과의 가장 멋진 연애는 가능한한 다양하게 사는 것. 힘이 넘치는 순종의 말처럼 호기심을 간직하고 매일 햇빛이 비치는 산등성이를 전속력으로 올라가는 것.

 

나의 세상이 좀 더 생생해졌다.


댓글(19) 먼댓글(0) 좋아요(4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울보 2005-04-26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너무 멋져요,,,

panda78 2005-04-26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과연 이 리뷰 읽고 이 책 탐내지 않을 사람 그 누굴까요.
이주의 마이리뷰, 아니 이달의 리뷰 감입니다,미스 하이드님! ^^
지금 주문하러 갑니다- 슈웅-

로드무비 2005-04-26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사합니다.
일단 땡스투 눌러요.^^

로드무비 2005-04-26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뜻 눈에 띄어서  신고!

생생해 졌다--생생해졌다

붙여주세요.^^


urblue 2005-04-26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별 관심 없는 책이었는데 하이드님 리뷰를 보니 읽어야만 할 것 같군요. 우웅...저도 일단 보관함에...

깍두기 2005-04-26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엉엉...당장 사서 봐야겠어ㅠ.ㅠ
왜 우냐구? 돈이 없단 마리야~~~~ 플래티넘 회원이 되려고 가산을 탕진했어ㅜ.ㅜ
공감각....하이드님, 타이거타이거 읽어 보셨어요? 공감각이 나와 있는 무지 재밌는 소설^^

하이드 2005-08-06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 고쳤어요. 왜그랬을까요? -_-a
깍두기님, 아, 타이거타이거가 그렇군요. 언제 샀는지만 기억나는 (작년 여름;;) 책이네요. 아,, 찾아서 읽어봐야겠어요. ^^ 깍두기님, 플래티넘 회원 된 기념으로 질러요!
판다님 ///ㅂ/// 어머, 감사합니다.
울보님두요!!!

하루(春) 2005-04-26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쓰셨군요. 저두 일단 보관함에...

바람돌이 2005-04-26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 싶은 욕구를 무지막지하게 일으키는리뷰네요. 오늘 내일 책을 사야 하는데 이 책도 갑자기 넣고 싶은 욕구가..... 항상 충동구매가 문제라니까....

야클 2005-04-26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이 즐거운 리뷰네요. 물론 내용도 알차고. 추천한방! 땡스투 한방! ^^

Phantomlady 2005-04-26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글 참 멋지구려 가장 멋진 일은 움직이는 것이다.. 라니 게으른 나를 움찔하게 만드는군.. 나도 사고싶어졌소 책임지시오! 특히 '미각'이 궁금하오!

하이드 2005-04-26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그 뒤의 작가의 말도 멋지지 않어? 힘이 넘치는 순종 말처럼! 나도 힘넘치는 호기심 많은 순종 말처럼 살테다! 리뷰만 뒤로 갈수록 짧아지는게 아니라, 내용이 마지막 두 감각은 좀 짧은편이야. 나 역시 후각하고 촉각하고 , 미각하고, 에 또 시각이랑 공감각도;;; 다 재미었네. ^^a

클리오 2005-04-26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멋지군요... 저도 언젠가는 꼬옥...!!

panda78 2005-04-26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왜 저는 몰랐을까요. [나는 작은 우주를 가꾼다]를 쓴 사람과 동일인이란 것을! 아구아구.. 그 책부텀 먼저 읽어야겠네요 ^^;;

하이드 2005-04-26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 저는 이 작가 책 이게 처음인데, 나머지 두권은 그래 스무넷에서 열심히 결제완료 중이에요. 근 삼일째 -_-+ 정말 최강이에요. 그래 스무넷.

balmas 2005-04-27 0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오 하이드님,
놀라운 리뷰네요. 4월 마지막 주 이주의 리뷰의 강력한 후보자가 되실 듯 ...
아아, 난 언제 이런 리뷰 써보지 ...
ㅠ.ㅠ 하이드님 땜에 우울 모드~~~

하이드 2005-04-27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 더 잘쓰고 싶은 욕심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눈이 즐거워서 다들 후하게 점수를 주시는듯하네요. ^__________^( 입 찢어지고 있는 중입니다.헤헤) 문자의 달인이자 철학사의 미달인님, 과찬이시지만 감사합니다!!

2005-04-27 09: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이드 2005-04-27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보주신님 감사합니다. ^^;; 그대로 퍼와서 아무 생각없이 올렸는데, 갑자기 몇년간 거꾸로 걸려 있었다던 피카소의 그림이 생각났어요. 에셔 그림은 약과겠죠?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