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경전
패트리샤 콘웰 / 시공사 / 1997년 11월
평점 :
품절


'악의 경전'  cause of death 는 시공사에서 번역되었던 스카페타시리즈의 마지막편이다. 물론 올해까지도 쭈욱 나오고 있는 시리즈이긴 하지만, 번역서의 마지막이라는 점에서 왠지 대단히 마지막같은 느낌이다. 점심시간에 닭고기덮밥을 먹으면서 이 책을 보고 숟가락 놓은 후에도 마지막의 클라이막스부분에서 차마 멈추지 못해 그릇 다 치운 후에도 앉아서 다 읽고 일어났는데, 코끝이 찡하고 가슴이 벅찼다.

이제 큰 심호흡 한 번 하고 이 시간을 대비해 사 놓은 unnatural exposurepoint of origin 을 읽어야한다.

이 책은 지금까지의 스카페타 시리즈 중에서 가장 스케일이 크다. 사이비종교집단의 핵테러에 대항하는 스카페타의 이야기이다.

패트리샤 콘웰의 스카페타 시리즈의 스카페타만큼 감정이입이 깊이 되는 주인공은 없었다. 그녀는 냉정하고 공평하고자 노력한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굳은 신념을 밀고나가는 지극히 이성적인 인물이다. 적어도 일적으로는. 죽음과 부자연스러운 죽음에 따라오는 '악' 과 '슬픔' 따위를 언제나 주변 공기에 담고 있는 그녀는 범죄자들을 증오하고 분노하며 희생자들을 동정하고 자신의 환자로 여겨 가슴아파하며 예의를 지키고, 피해자의 가족들에게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스카페타 시리즈가 좋은 이유는 사건의 발생과 해결보다 주인공인 '스카페타'의 흡입력이다. 결혼에 실패한 그녀. 사랑하는 사람을 어이없는 테러로 잃고 그 사람의 동료였고 유부남인 벤튼 웨슬리와 사랑에 빠지고 항상 투닥투닥하는 그녀를 사랑하는 마리노경감에게서는 가장 친한 친구, 사랑하는 애인 이상의 감정을 느끼고, 못말리는 동생 도로시의 딸이고 천재이고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루시 앞에서는 항상 이성적인 그녀의 모습이 무너지며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녀와 그녀의 주변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는 7편에 거쳐 1편에서 고작 열살이었던 루시가 점점 자라서 FBI가 되고 동료적 입장이었던 벤튼과 마초 마리노의 이야기들이 천천히 그러나 절대 지루하지 않게, 과장되거나 통속적이지 않게, 그렇게 딱 이해할만큼으로 진행된다. 실감나는 등장인물들 덕분에 이 시리즈에 그토록 목을 메고 있나보다.

조금 길게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이 책에서 스카페타와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특히나 이책에서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마지막은 정말 벅찼다. 나는 어느새 루시가 되어 그녀를 구하기 위해 로봇을 조작하고 있었고, 그녀를 죽을정도로 걱정하는 마리노가 되었다가 벤튼이 되었고, 그런 그들을 걱정하고 목숨걸고 일을 하는 스카페타가 되었다.

이 시리즈가 다른 재미있는 시리즈들에 비해 나의 마음을 잡는 이유는 매시리즈마다 꾸준히 나오는 강한 직업여성, 그것도 어느 정도 위치를 가지고 있는 강한 직업여성상들이다.  스카페타 본인도 물론 포함된다. 스카페타가 겪는 남성우월주의사회에서의 불편함들과 그에 대응하는 스카페타의 세련된 태도와 마음가짐들은 찔러서 피 한 방울 안 나올것 같은 그녀의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여리고 분노하는 그녀의 모습을 알기에 더욱 와닿는다.

일곱권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처음의 '법의관' 이겠지만 그 뒤로는 주욱 한권의 긴 책을 통해 스카페타를 엿본것만 같다.

내가 아는 시리즈중에서 '손을 놓을 수 없는' 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시리즈다. 패트리샤 콘웰의 스카페타 시리즈는.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날개 2005-05-11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이 아까 말씀하시던 스카페타 시리즈 마지막권이군요..^^ 결국 다 구해서 읽으신 걸 축하드립니다..^^*
이 리뷰를 읽으니 스카페타 시리즈가 정리가 되는 느낌입니다,,

panda78 2005-05-12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8권이 번역되어 나오는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poptrash 2005-05-12 0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그게, 리뷰를 읽다가 책도 물론 읽고 싶어졌지만 닭고기 덮밥이 마구마구 땡기네요; 배가 고파서 그런가. 우리 회사 근처에는 왜 그런걸 안파는걸까요;

oldhand 2005-05-12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카페타 시리즈를 섭렵하고 계시는 군요! 저는 아직 시작도 안하고 있습니다. '손을 놓을 수 없는'이라니 귀가 솔깃해 집니다.

하이드 2005-05-12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ldhand님/ 시리즈의 재미를 알게 해준 책이에요. 그리고 여자주인공, 법의관이란 직업도 독특하고요. 전문적인 얘기들이 안 지루하게 나오고 등장인물들이 생생한거 그리고 다들 누구나 그렇듯이 아픔과 열등감등이 있다는 점에서 좋았는데, 무엇보다도 대나무같은 주인공의 꼿꼿함이 인상깊었어요. 손을 놓을 수 없는!은 분명히 맞는데, 사건이 싱겁게 해결되서 별로라는 분도 계시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정말 애착을 가지고 있는 시리즈에요.
poptrash님 흐흐 그 닭고기 덮밥이요. 명동의 가쓰라라는 곳에서 파는 정말정말 제가 사랑하는 닭고기 덮밥인데요. 일주일에 다섯번 먹은적도 있어요. 밥풀하나 남은 것까지 싹싹 긁어먹고 나오곤 하지요.
판다님, 그러게요,저도 8권 번역본 나오면 분권이라도 살것만 같은 예감이 드네요.
날개님, 헤헤 덕분에요!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 유쾌한 미학자 진중권의 7가지 상상력 프로젝트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진중권의 책을 읽기 시작한건 불과 작년이었다. 그의 '미학 오딧세이' 가 새로운 출판사에서 예쁘게 포장이 되어 나오면서야 나는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대학때부터 알고 있던 그 책을 알게 된지 십여년만에 구입하게 된다. 저자도 자신있게 말하듯이 그 많은 이야기들이 굉장히 훌륭하게 구성되어 있는 책이다. 저자가 그렇게 얘기하면 불신감이 들고 좋아보이려다가도 미워보이는데,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만큼 잘만들어진 책이었다.

진중권이 '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이라는 제목의 책을 내고 각종 '놀이' 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책소개를 보자마자 흥미가 동하여 샀던 책이다.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빨주노초파남보의 일곱빛깔 무지개 챕터를 가진 이 책에서는 주사위, 체스, 카드( 조커) 에서 종이접기, 정리정돈까지 온갖종류의 놀이거리에 대해 그야말로 신기하고 화려한 자료들을 동원해서 그야말로 입담 좋은 저자가 청산유수로 얘기하고 있다.

책에 나온 놀이들을 하던 시절을 그려보며, 놀이의 역사와 기원을 구경하며( 지루한 학술서 느낌 아닌 놀이의 비하인드 스토리 토크쇼같은 느낌이다.) 한바탕 잘 놀고 난 느낌이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클리오 2005-05-11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에 이 책이 오래 있었는데, 님의 이 리뷰 덕택으로 나올 날이 멀지 않을 듯 합니다. ㅎㅎ

하이드 2005-05-11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런 재미없는 리뷰에! 그래도 Thanks to는 눌러주셔도 되요 . 헤헤
역시 리뷰는 읽고 그때그때 써야해요. -_-a 생각이 안나는건 아니지만, 여러권 몰아서 쓰니 글발이 안받는다고나할까뭐랄까 -_-+

클리오 2005-05-11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스투는 꼬옥~ ^^

하루(春) 2005-05-11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리오님, 이것도 10% 할인쿠폰 주는데요? 정말, 하이드님 때문에 진중권 책이 더 읽고 싶어졌어요.

해적오리 2005-05-12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님의 글을 읽고나니 전혀 관심없던 책인데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제가 사게 되면 꼭 님에게 thanks to를 눌러 드릴께요.^^
 
하루키 일상의 여백 - 마라톤, 고양이 그리고 여행과 책 읽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199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아주 오래간만에 하루키의 책을 샀다.그의 소설은 엉뚱하고, 진지하고, 허무하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의 잡담들이다. 내가 읽고 싶어 하는 것은 '그' 다. 하루키라는 사람을 읽는 것이 내게는 가장 재미있는 일이다. 일상의 여백의 부제는 -마라톤, 고양이 그리고 여행과 책읽기이다. 작가가 좋아하는 네가지. 여기에 몇가지 더 포함시킨다면 맥주와 재즈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하루키의 잡담은 관찰에서 나온다. 자신을 관찰하기, 주변을 관찰하기, 사람을 관찰하기, 고양이를 관찰하기. 등등등.

 범인들보다 약간 더 호기심 많고 약간 더 글 잘 쓸 뿐인 하루키의 책의 열풍이 불기 시작했을때 '나도 이정도는 쓰겠다'며 팔걷어붙인 사람들이 많았고, 나도 그 중의 하나였다. 당연히 쉽지 않았고, 하루키만큼 쓰는 작가들도 안나타났으며, 하루키는 여전히 그 이름으로 부동의 베스트셀러이다. 

이제 나이 조금 더 들어서 다시 읽게되었는데, 하루키라는, 근본적으로 호기심이 많고 몸과 마음이 건강한 작가의 여백있는 일상은 많이 부럽다. 그가 직접 찍은 사진들, 그의 아내가 찍어준 사진들이 조그맣게 여백을 채우고 있는 이 책은 참 예쁘기도하다.

하루키가 일상에서 건져내는 것들이 나의 지루한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에도 활력을 가져다 준다. 하루키의 이책에서 재미를 느꼈던만큼의 여백이 내 일상에 밀려들어왔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루(春) 2005-05-11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를 몇 년 전 읽은 후 안 읽었는데, 다음에 하루키책을 또 읽게 된다면, 이걸 읽고 싶네요.

poptrash 2005-05-12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의 소소한 글들, 좋아요. 이 책은 안읽어봤는데, 읽어보고 싶네요. 새 장편 소설은 언제쯤 번역이 될런지.

하이드 2005-05-12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새 장편소설이 있나보죠? 이번에 하루키를 읽고 싶다는 맘이 오랜만에 들어서 그 많은 책들!중에서 열심히 골랐는데, 이 책 아주 맘에 듭니다. '슬픈 외국어'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 2부격인 책이에요. 하루키가 외국생활 하면서 느낀 소소한 점들. 더 정돈되고 더 부럽고 그렇더라구요.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존 버거 지음, 김우룡 옮김 / 열화당 / 200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존 버거의 포토카피.


포토카피는 '복사하다' 는 뜻이다. 존 버거는 이 책에서 사람을, 순간을, 의미를 복사하듯 글로 옮긴다. 이 책은 존 버거의 또 다른 책인 '본다는 것의 의미' 나 '말하기의 다른 방법'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에 연장되는 멋진 책이다.


존 버거 책의 매력은 항상 군더더기가 없고 가장 적절한 시간에 가장 적절한 단어로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의 첫느낌은 조금 달랐다. 비유적인 표현도 많고 최대한 자세히 상황을 묘사하려는 듯 보였다. 이질감을 느끼며 책장을 여러장 넘기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 포토카피.

존 버거는 '보는 것은 말하는 것에 선행한다' 고 말해왔다. 말하는 것의 다른 방법. 말 하는 것의 덧없음 혹은 그 뒤의 말해지지 않은 빙산의 드러나지 않은 나머지 부분과도 같은 부분들에 대해 얘기해 왔는데, 이건 또 다른 그의 '말하기(표현하기) ' 위한 시도이구나 싶었다.


이 책은 현존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영어권 미술 평론가이기도 한 예사롭지 않은 관찰력과 심미안의 소유자인 존 버거가 만나서 포토카피하는 인물들 한명 한명에 대한 묘사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책에서 일견 가장 쉬워보이는 '묘사' 에서, 3-4장을 채 넘어가지 않는 짧은 순간의 묘사에서 삶과 삶의 의미를 엿 볼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존 버거의 눈을 빌려서.


이전에 읽었던 그의 책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시작했던 이 책은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존버거의 책일 수 밖에 없는 그런 책이 되어 마음에 깊이 박힌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이드 2005-05-05 0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 ㅜㅜ 생각 안나. 그분이 가셨어요.
알라딘은 날라간 내 리뷰를 백업해내라. 해내라.

하루(春) 2005-05-05 0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퍼하지 마세요. 대신 추천해 드리죠. 좋은 책인 것 같군요.

하이드 2005-05-05 0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하루님. ㅜㅜ 네. 정말 좋은 책이에요. 존 버거 시작할때 처음 읽으면 좋을 것 같아요.

딸기 2005-05-05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스투...입니다.

하이드 2005-05-06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딸기님!!

돌바람 2005-05-11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표지 사진이 주는 끌어당기는 힘에 비해 내용은 좀... 사진이 더 있있으면 좋겠다 싶었지요. 원서가 그렇다면 할 수 없지만, 존 버거의 책은 사진과 이야기를 함께 읽는 즐거움이 있으니까요. 개인적으로 '말하기의 다른 방법', '제7의 인간', '그들의 노동에 함께 하였느니라'는 제겐 잊을 수 없는 책이지요. 듀안 마이클과는 다른 사진의 정적인 세계, 이야기의 세계를 열어주고 있으니까요.

하이드 2005-05-11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니, 표지를 제대로 안 봤군요. 알라딘의 이미지로는 제대로 안 보이니 집에가서 봐야겠지만요 ^^ 저는 개인적으로 존 버거의 책들중 이런 책들이 좋아요. 장 모로(이름 맞게 썼나요? -_-a) 의 사진이 들어간 책들은 그 나름으로 좋고, 그림과 이미지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들도 좋지만, 글로써 그림을 그리고 글로써 사진을 찍는 존 버거의 책들(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과 이 책 열화당에서 나왔는데, 같은 사이즈의 굉장히 정적이면서 무한한 느낌을 주는 책들이에요.) 보면 경외감이 들정도랍니다. '결혼을 향하여'란 소설도 사 놓고 있는데, 어떨지 궁금해요. '제 7의 인간'은 얼마전에 포켓의 형태) 와 함께 샀는데, 역시 기대됩니다.

비로그인 2007-10-13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나 멋진 책이예요. 원서로 사들여 그의 말을 그대로 듣고싶어요. 님이 사신게 있음 보고싶어요

유부만두 2015-03-27 0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이 책 읽어싶어요, 했더니
북플이 하이드님 10년전 리뷰를 추천!

하이드 2015-03-27 08:32   좋아요 0 | URL
와.. 십년전의 제 리뷰군요! 으아아아..
 
안녕, 레나
한지혜 지음 / 새움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표지의 화려함은 소설 속 주인공들의 빈궁함을 더욱 강조하는건가?

서문도 작가 소개도 없이 시작된 첫 단편 '호출''결혼식을 앞두고 옛 애인들과 관계된 물건을 정리하기로 했다.'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사람을 잊기 위해, 그 사람과 보냈던 시간을 잊기 위해, 혹은 그 때 아팠던, 지난했던 과거를 지우기 위해, 사진을 태우고, 편지를 태운다. '자전거 타는 여자'에서도 식물인간인 아버지를 보낼 준비를 하면서 아버지와 관계된 물건을 정리하고, 태울 수 있는 것들을 태우는 장면이 나온다. 무언가를 태우면서 마음 한 구석의 재를 날려버린다는건 내게는 너무 드라마스럽고 닭살스럽다. '호출'은 내게 그런 느낌이었다.

두번째 단편인 '안녕 레나' 에서는 온라인으로 도피하는 인생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죽고 싶을 정도로 하루하루가 무료하고, 진학에 실패했고 ,재수를 할 형편도 아니었고, 실무 능력 따위는 배운 적 없는 인문계 고등학생이다 보니 작은 회사에 겨우 취직하지만, 내 인생이 작은 사무실에서만 정착하게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우울해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뭔가 확 저질러보고 싶은 충동이 나를 들쑤신다' 그러다가 찾은 '통신'이란 '탈출구'   익명성을 무기로 매번 새로운 자신을 꾸며대는 그 곳에서의 안락함을 흔들어대는 '레나'라는 아이디의 그녀. 그리고 '숲' 이라는 아이디의 그. 그들과의 '안녕'을 끝으로 소설은 끝나지만, 궁금하다. 그 후 '나'의 삶이. 또 어떤 다른 도피처를 찾아 해메이고 있는건지. 

그 이후의 단편들도 계속 불편하다. 목소리 큰 엄마의 모습. 식물인간의 모습이거나 부재인 아버지의 모습. 갈 곳 없는 젊은이들의 모습들.  나의 이 불편함의 정체는 책을 찜찜하게 책을 덮고 책 표지의 화려한 꽃문양을 처음 봤을 때의 느낌과는 사뭇 다르게 다가오는 뒷표지의 같은 꽃 문양에 써 있는 어느 문학평론가의 말이다.

' 하루에도 몇 번씩 뭔가 확 저지르고 싶은 청춘들의 우울을 경쾌하게 포착한 소설들. 대체적으로 '청년' 세대라고 할 수 있을 이 소설집 속의 젊은이들은, 우리 소설에 자주 등장했던 삐딱한 난동자, 엽기적인 호색한, 과격한 몽상가, 항우울성 페시키스트, 차가운 냉소주의자, '쿨 보이들'과 '럭셔리 걸' 등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어떤 인물인가, 요컨대 이 시대의 '이태백' 계열에 속하는 인물들. 그러니까 '확 저지르고 싶은' 젊음의 열망은 충만하지만, 대체적으로 경제난이 초래한 일상의 하중에 압도되어 푸릇한 미래의 희망과 출구가 봉쇄되어버린, 이 시대의 전형적인 젊음의 초상들인 것이다. '

평론가는 이와 같은 것들을 작가의 장점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나는 똑같은 얘기를 하지만 그 반대에 서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이 책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의, 살고 있는 시대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바로전에 읽은 중남미의 마꼰도라는 마을 이야기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와닿는다. 이런 이야기들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뉴스가 아니라 소설에서 읽어야 했는데, 우울이 경쾌하게 포착되지도, 소름끼치게 사실적이지도, 와닿는 말로 포장되지도 않아서 맘에 안 드는 것이다.  한국작가들의 궁상스런 소설들을 멀리하는 것은 현실에서의 내 주위의 궁상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일까?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5-05-03 0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이드 2005-05-03 0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작가의 소설일수록, 동시대가 배경인 소설일수록 취향이 분명하게 들어나고 거기에 상황과 사적인 감정까지 개입되어 책에 푹 빠지기가 힘들어요. 조금만 좋다고 하면 귀 파닥파닥 하며 사는데, 그 재미있다던 성석제나 천운영이나 등등등 전혀 안 사고 있는거 보면 말이지요. 최근에 읽었던 한국작가 책중 정말정말정말 재미있었던건 김승옥의 '무진기행' 이었네요. 정말 멋졌는데!

하이드 2005-05-03 0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권해주신 책 땡기는군요. 역시 저랑 취향이 정말 통하십니다.

하이드 2005-05-03 0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밑에 보니 황진이도 재미있게 봤었네요.

panda78 2005-05-03 0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승옥 전집 말씀하시던 생각 납니다. ^^
저도 그래서 우리나라 소설은 적게 봐요. 성석제도 두 권 빌려 읽고 말았구.. 천운영도 안 봤구나..
요 며칠 사이 재미있게 본 거로는 이윤기 [하늘의 문1-3]이랑 - 특히 2권은요, 제가 전쟁소설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베트남전을 소재로 한 책 좀 더 볼까.. 싶게 만들 정도로 재미나더랍니다.
[고래]요! 음. 재미있더라구요. 흠흠.. 그 변사체 말투도 그렇고
이거랑 이거랑 이거랑 이거랑 이거랑. 이런 식으로 뭔가 주욱 나열하는 것도 그렇고
문체가 참 재밌었어요.

panda78 2005-05-03 0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오.. 황진이 관심없었는데, 재미있게 보셨다니 궁금해지네요. 새벽별 언니한테 담번에 빌려달라 그래야지. ^^
근데 정이현은 소설집 한 권 뿐인가봐요. 그거 말고는 무슨 수상작품집 같은 데 한편씩 실려있는 듯. 신작이 기다려집니다. ^^

하이드 2005-05-03 0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사실 읽지도 않고 별로다 하는건 반칙이긴 해요. ^^a 이윤기는 다아 좋아요. 근데 이양반것도 소설 읽은지는 디게 오래되긴 했네요.

panda78 2005-05-03 0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진홍글씨]이후 백만년 만에.. ;;;
근데 지금 불붙어서 쫘악- 살까 생각중입니다.
새로 에세이집도 나왔던데 그거랑 해서요. ^^

panda78 2005-05-03 0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분들 다들 칭찬하시던 권지예의 폭소가 별로였던 탓에, 이젠 뭐가 재밌더라 해도 한국소설은 잘 안사게 되더라구요.;;;

2005-05-03 1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이드 2005-05-03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인님 당연하죠. 그러니깐, 같은장소 같은시대 소설에 대해서는 제 성격과 상황이 이입되어 버린다니깐요. 그래도 못 읽을뻔 하다가 읽어서 좋아요.^^ 독서는 나의 힘!

돌바람 2005-05-11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저곳 둘러보면 '레나'라는 닉네임의 익명성과 자주 마주치게 됩니다. 레나와 같은 익명의 레나들이 양상되는 걸 보면 작가가 포착하고 있는 현실 공간에 줌을 맞춰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진짜 뭔가 저지르고 싶어하는, 허나 저지르지 못하는 인간군이 어디든 숨어 있는 건 아닐까 쭈뼛거리게 되던데,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