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책을 읽는 이유 - 기시미 이치로의 행복해지는 책 읽기
기시미 이치로 지음, 전경아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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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에 읽으면서, 어휴, 고리타분하기가 참.. 책 읽는 무슨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유일하게 있다면, 많이 읽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남이 책 이렇게 읽어라, 저렇게 읽어라 하는건 참 듣기 싫고. 투덜투덜하며, 읽기 시작했지만, 코어, 책의 힘과 유용성과 기쁨을 믿는 코어가 같으니, 투덜거리다 어느새, 맞어맞어, 하다가, 아, 그리스 철학 전공. 그리스어를 공부하고, 이 책 쓸 때는 한국어 공부하고, 김연수의 놀라움을 얘기하고, 좋아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스어 전공이라는 점에서 한동일 교수도 생각나고, 공부하고 읽는 저자의 삶에서 지금 읽고 있는 스토너의 스토너도 생각났다. 이 책이 나쁘지 않았던 것 치고, 생각나는 두 사람이 다 내가 엄청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는게 좀.. 하지만, 이런게 초베스트셀러 만든 이 작가의 힘인 것 같기도 하다. 


첫 장에 저자는 묻는다. '어떤' 책을 읽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책을 읽느냐로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을 알 수 있다고. '무엇을 읽느냐'는 그 사람의 삶과 거의 관계가 없는 것이, 정말로 책 읽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책이든 닥치는 대로 읽을테고, 그 중에는 '좋은 책'도 있고, 그렇지 않은 책도 있을 수 있다고. 


맞는 말이네.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좀 고민해봐야겠다고 메모해둔다. 


하지만, 역시 어떤 책을 읽느냐도 중요한 것이 작가가 언급하는 레저넌스. 


"모리는 릴케가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이 바로 공명(레저넌스, 내 내부의 공명) 이라고 말했다. '릴케'라는 이름만 들어도 자기 안에 숨은 부분에 레저넌스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작용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무런 작용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타인을 지배하려고도 타인으로부터 지배받으려고 하지도 않으며 자신에게 그대로 영향을 미친다. 바로 이것이 '레저넌스'다. (..)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어떤 책을 읽는지 관심을 갖는다면 그 사람이 읽는 책을 읽고 공명할 수 있을 것이다.

아들러는 '상대방의 관심사에 관심을 갖는다' 라고 표현했다. " 


내게 레저넌스를 일으키는 이름은.. 


'지금 여기에 있어 다행인 책' 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사는 속도가 읽는 속도를 앞지르는 사람들을 위한 챕터인가. 


" 읽는 사람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평가가 좋은 책이라도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또 책을 샀는데 당장은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서 펼치지도 않고 그대로 책장에 꽂아두기도 한다. 그러다 몇십 년 후에 필요해서 다시 꺼내서 읽는다. 내게는 비교적 자주 있는 일이다. 그럴 때는 이 책이 '지금 여기'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늘 생각한다." 


아, 저 책 너무 읽고 싶은데! 배송 일주일! 물론, 이 간극을 전자책이 많이 메워주고 있긴 하지만. 내 책장에 이미 있는 책이면, 그보다 더 다행인 일이 없지. 


책이라는 것이, 읽는 사람의 준비가 필요한 것이 당연한데, 그 준비라는 것이 뭘까? 그 책을 읽어낼 소양과 교양이 쌓여야 한다는 것이겠지만 가끔은 저스트 타이밍이기도 하고. 경험치이기도 할 것이다. 당장 재미가 없다고 해서 그 책이 좋지 않은 책은 아니니, 좀 묵혀도도 괜찮아~ 라고 까지 하면, 어쩐지 좀 너무 나한테 유리하게 책을 읽어내는 것 같지만. 


이런 부분들에서, 그럼그럼.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데, 


"어쨌거나 마음에 든 작가의 작품을 전부 읽어보자고 마음먹고 읽기 시작하면 수작인지 아닌지, 유명한지 아닌지는 별로 상관하지 않게 된다." 


내 경우에는 작가는 물론이고, 한 장르에 꽂히면, 아무것도 상관 없어져 버리고, 읽은 것에 큰 의의를 두게 된다. 다 읽어버려야 좋은 것도 더 잘 알게 되는 법이라서. 


좀 크게 웃었던 부분 


"인터넷 서점에는 책을 읽은 사람의 리뷰가 실려 있는데, 정곡을 찌르는 리뷰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했으니 별 두 개" 라는 리뷰를 본 적이 있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서 책을 낮게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 부분, 되게 작가 성격 드러내주는 말 같아서 좋았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전자책과 종이책의 차이에도 깊이 공감. 


"전자책의 결점이라면 일람성의 결여, 즉 훑어보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전자책으로도 못할 건 없지만, 책을 휘리릭 넘기면서 읽고 싶은 부분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두꺼운 책을 읽을 때는 남은 쪽수가 점점 줄어드는 기쁨을 느낄 수가 있다. 다 읽어가는 것이 아쉽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책을 받치고 있는 오른손과 왼손에 가해지는 무게감이 달라진다. 전자책에서는 그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제 조금만 더 읽으면 된다는 쾌감을 느낄 수 없을뿐더러 쪽수 대신 몇 퍼센트 남았다는 표시가 되어 있긴 하나 단숨에 책을 읽어나간다는 느낌을 받을 수가 없다. 덧붙여 쪽 번호에 대해 말하자면, (..) 전자책의 경우는 쪽 번호가 나와 있는 책이 거의 없어서 인용할 때 난감하다. 그럴 때를 대비해 전자책을 사놓고 별도로 종이책을 사는 사람도 있다. 한 권이면 될 것을 두 권이나 사야 되니 경제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렇게 쪽 번호가 달리지 않은 전자책은 어디쯤 읽었는지 알기 힘든 것이 꼭 우리네 인생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바로 자서전을 쓰기 시작한다. 이 자서전은 죽었을 때 끝이 난다. 대개는 미완으로 끝이 난다. 원래 인생에는 정해진 스토리가 없으니 미완이라는 말 자체가 이상하지만, 이 자서전은 전자책처럼 쪽 번호가 달려 있지도 않고, 읽다 보면 새로운 페이지가 툭 튀어나오니 지금 얼마나 읽었는지도 알 수 없다. 전자책은 지금 보이는 부분만 읽게 되니 과거도 미래도 없이 지금 여기만 있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다." 


전자책은 인생 같다는 이야기, 정말 좋지. 


여러 권을 읽는 핑계 이유도 좋았다. 


" 나는 끊임없이 동시에 여러 책을 읽는다. 많을 때는 열 권의 책을 읽는다. 동시에 많은 책을 읽는다고 해서 혼란스럽거나 하지는 않다. 오히려 한 권만 읽으면 진이 빠질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읽던 책을 덮고 다른 책을 읽으면 기분이 전환되어 계속 읽을 수가 있다. " 


요즘 읽는 원서 읽기에 대한 생각들도 나눈다. 영어 원서 읽기 습관 들이느라 하루 한 두시간씩 매일 전자책, 오디오북, 종이책 듣고, 읽고 있고, 독어와 일어책도 읽었음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 원서를 읽는 건 다채로운 세계를 엿보는 것과 같다. 그에 비해 번역서는 흑백 사진처럼 느껴진다. 사진의 경우 일부러 흑백으로 찍을 때도 있으니 어느 쪽이 더 나은지 우열을 가릴 수는 없겠지만, 찍은 사진이 컬러라면 흑백일 때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책의 경우도 원어로 읽었을 대 보이는 것이 분명 읽다. 그런 의미에서 번역서를 읽고 원어로 읽고 싶은 책이 생기면 해당 언어를 배워도 좋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마지막으로 맘에 깊이 남은 글


"독서는 내게 역경을 헤쳐 나가는 힘이 되었다. 간혹 마음이 약해질 때면 앞으로 대체 얼마나 살 수 있을지, 죽는 날까지 몇 권의 책을 읽을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도, 읽을 수 있는 책의 권수에 한계가 있는 것도 내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기에 사실 그런 생각을 해봤자 다 부질없는 짓이다. 오래 산다고 한들 아버지처럼 책을 읽지 못하게 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고. 


이러한 삶의 유한함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지금은 이렇게 생각한다. 읽을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고 해서 짧은 시간에 가급적 많은 책을 읽으려고 하지 않는다. 내게는 독서 또한 삶의 일부라서 책을 어떻게 읽느냐는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와도 무관하지 않다." 


앞으로 얼마나 살 수 있을지. 몇 권의 책을 더 읽을 수 있을지. 정신이 번쩍 들고, 아, 나는 책에 진심이구나. 별로 그렇게 얘기하진 않았는데, 진심인거 알았으니깐, 진심을 다해 읽어야지. 더 많이, 더 오래, 더 깊이. 나만의 올림픽이다. 


핸드폰 덜 보고, 눈 아끼고, 책 읽는 속도와 양, 집중력의 그릇을 키우고, 오디오북 듣는 것에 익숙해지고, 좋은 책들 읽고 또 읽지만, 한 번 읽을 때, 가능한 많이 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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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오라 2021-02-01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 신입생 때 술자리에서 선배들에게 여러 도움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느꼈던 것을 저는 책을 읽으며 느낍니다. 아마 저에겐 그것이 책을 읽는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 물질의 사랑 - 천선란 소설집
천선란 지음 / 아작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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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선란의 단편집과 켄 리우의 단편집을 연달아 읽었더니, 머리가 좀 이상해진 기분이다.  


천선란의 책부터 이야기해보면, 읽자마자 확 와닿는 작가는 아니었다. 작가의 말을 보고 나니, 작가가 자신의 감정들을 책에 담았다는 말을 보고나니, 좀 다르게 와닿았다. 작가의 말이 좋아서, 어딘가에 적어둔 글을 예전에 본 것 같다. 


"나는 아이돌의 영향을 많이 받은 세대이고, 내 10대는 무대 위의 아이돌과 함께 버무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정 시기를 추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는 그때 유행했던 아이돌의 노래와 춤이 있다. 어느새 나는 이십 대 후반에 접어들었고, 내가 선망했던 아이돌들은 은퇴를 했거나, 연기를 하거나, 혹은 세상에 없다. 한때 나의 영웅이었고, 내 시절이었던 그드른 왜 떠나야만 했을까. 인사 한 번 나눠보지 않았던 그들의 새벽이 서러워 덩달아 뒤척였던 새벽이 많았다. 어떤 말을 하고 싶다가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해 한숨만 쉬는 날이 많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너는 그 친구들과 또래라 힘들어 하는구나." 그 이야기를 들어쓸 때 딱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누구에게는 아무 일도 아닌 일이구나. 또 하나는, 그렇다면 나는 이 감정을 잊지 말아야겠구나." 


누군가에겐 아무 일도 아닌 일들에 대한 깊은 감정을 잊지 않기 위해 작가는 감정들을 박제하고, 기록했나보다. 


'사막으로' 는 자전적인 이야기에 가깝다고 한다. 거짓된 꿈이 척박한 현실보다 강하고, <너를 위해서>는 낙태죄 폐지를 외쳤던 2019년에 썼다고 한다. 이렇게 남기는 기록들 좋다. <래시>는 환경문제를 테마로 잡았다고 한다. 사실, 나는 어떤 이야기에서도 모성이 주된 테마가 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떤 물질의 사랑>은 사랑 이야기인데, '국경도 없는 사랑'이야기인데, 다른 무엇보다도 햇빛이 드는 작고 한가한 독립서점에 작고 반짝이는 비늘이 떨어지는 장면이 맘에 오래 남을 것 같다. 

'그림자놀이' 같은 이야기가 켄 리우의 작품들하고 겹친다. 감정과 현실의 물질성을 거세당한 것 같은 그런 차갑고 매끈하고 이질적인 것들. 아무렴, 지금의 질척질척함 보다는 낫겠다만. 


'검은색의 가면을 쓴 새'와 '마지막 드라이브'도 좋았다. '검은색의 가면을 쓴 새'는 비무장지대에 등장한 싱크홀 비슷한 커다른 구멍에 대한 이야기인데, 지나고 나니, 계속 생각난다. '마지막 드라이브'는 센티멘탈한 분위기. 인간의 감정을 흉내낸 더미와 차에 흐르는 음악 같은 거.


이 작품집에서 가장 좋았더 건 '두하나'다. 

왜 아니겠어. 남자가 좀비 같은 바이러스 전파자고, 여자들이 연대해서 맞서 싸우는 이야기인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지. 


" 차라리 지구상의 모든 생물학적 남자가 빠짐없이 전염됐다면 더 수월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모든 남자를 구분 없이 죽이면 그만이었을 테니까. 지나는 언제나 연민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당장에 먹고살 돈이 없다며 그 무능력한 남자를 끌어안고 살았던 엄마도 연민이 문제였다. 그것을 여자의 탓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지만, 화낼 수 있는 대상은 언제나 서로가 전부였다.  (..) 어쨌든 그 연민은 추가적인 희생을 동반했다. 전염의 속도가 달랐음을 알지 못하던 때였다. 자신의 남편, 애인, 아들, 아버지는 변하지 않았다고 울며 애원하는 여자들을 내치지 못했다는 말이 더 맞았다. 그녀들이 간절하게 붙잡고 있는 손을 차마 끊어낼 수 없었다. 대피소에 들어왔던 남자들은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변했다. 그들의 첫 번째 희생자는 모두 그들을 대신해 울던 여자들이었다. 어쩌면 변하지 않은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생물학적 이유를 뛰어넘은 숭고한 정신이 육체를 지켰을지도. 하지만 그런 예외적인 경우를 다 따지기에는 위험변수가 너무 많았다. 대피소는 굳게 닫혔다. 긴 다리를 건너온 여자들에게만 열렸다. 생존자들은 그 다리를 '고독의 다리'라고 불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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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광의 모험은 끝나지 않아! 박람강기 프로젝트 9
미카미 엔.구라타 히데유키 지음, 남궁가윤 옮김 / 북스피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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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블리오 고서당 사건수첩의 미카미 엔과 R.O.D.의 구라타 히데유키의 독서대담이다. 

대담이라기보다 만담에 더 가깝다고 생각되지만. 


R.O.D.는 뭐여, 거의 다 읽었을때쯤 찾아보는데, 줄거리도 없고, 뭔 얘기여. 페이퍼랑 리뷰 보다보니, 아, 내가 DVD 샀었구나. 아, 생각난다. Read of Die. 여튼, 책책을 낼만큼의 독서광들이다. 


와닿는 이야기들도 많고, 아, 저정도는 아니지 (별로 위안되지는 않음) 만담식이라 재미있었다. 

한 때, 일본 장르소설과 추리소설 많이 읽었어서 아는 이야기 많아 그나마 반절 정도는 이해하고, 나머지 반, 전혀 모르는 책이나 만화 등 이야기도 그냥 얘기가 재미있어서 잘 읽혔다. 기본적으로 독서'광'에 방점이 찍혀있기에. 책이야기가 재미 없을리가 없지. 


이 책을 읽은건 다음의 인용 


 "책을 정리하다가 도중에 또 책을 읽고 마니까 시간이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죠."


책정리하다가 눈에 띄어서 동병상련!하려고 읽기 시작했던 것 같다. 확실히 동병상련되는 책인데, 동병이 병 맞긴한지는 모르겠지만, 서로를 불쌍히 여기는!건 맞는거 같기도 하고.


바다건너 이사오면서 책을 대부분 버려서.. 나는 이제 책 별로 없는 사람이고, 책 소장욕구도 없어서, 다시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되면 (대부분의 책) 미련없이 바로바로 팔아버리고 있다. 사는 속도가 읽는 속도보다 쪼오끔 빨라서 책이 좀 늘었나 싶긴 하지만, 올해 들어서는 책 안 사고 있으니, 거의 안 사고 있으니, 계속 줄 일만 남았다. (진심) 그런 의미에서 나는 더이상 이 책에 나오는거 같은 독서광은 아니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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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마리아나 엔리케스 지음, 엄지영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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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마술적 리얼리즘을 떠올리게 하는 호러 단편집. 아이들이 끔찍하게 죽는 이야기가 너무 많이 나오는데, 아르헨티나의 어떤 현실을 반영한걸까?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하는 이런식의 소설이 나와 디지털 성착취 이야기와 학대, 혐오 이야기가 소재로 쓰인다면, 픽션이겠거니 하겠지만, 현실은 더 끔찍한 것임을 우리는 이제 알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의 현실에 이와 비슷한 조각이 없기를 바란다. 그런 조각들을 풍자하기 위한 픽션이라면, 너무 끔찍하니깐. 


호러 이야기인줄 알면 절대 사지 않았을텐데, 읽다보니, 호러 판타지 현실 풍자 단편집이다. 

첫번째 단편 '더러운 아이'부터 너무 분명한데, 어떻게 저런 곳에서 살지. 저런 곳에 살러 들어가지. 결은 다르지만, 여기도 외부의 눈으로 보면 말도 안되겠지. 


읽기 힘들어하는 장르와 남자가 썼다면, 갖다 버릴 소재지만, 

1973년생 여성작가가 예리하고, 환상적으로 잘 쓴 글들의 모음집이다. 


한녀문학이라며, 한국 여자들의 불행 포르노와 몽롱함, 체념의 정서 질색인데, 아르헨티나 여성 작가의 이런 장르와 소재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이 글을 읽을즈음, 아르헨티나의 낙태 합법화 뉴스를 봤다. (작년 12월 30일) 책에는 낙태 이야기도 나온다. 


그냥, 아, 나, 호러 싫은데, 못 읽겠다. 소재 너무 끔찍하고, 아이들은 왜 자꾸 이렇게 끔찍하게 죽고, 사라지는거야. 라고 하기엔 소설을 둘러싼 겹겹의 현실들이 눈 앞에 선해서 다 읽어 버렸다. 


표제작인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에는 분신하는 여자들이 나온다. 


"이제는 분신 사건이 매주 한 건씩 일어났지만 이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이를 막을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처음에는 남자가 여자에게 불을 지르고, 사고라고 했고, 여자의 실수였다고 했다. 여자는 살아남아 증언했다.  

그 일이 다른 곳에서 똑같이 반복되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불을 지르고, 사고라고 했고, 여자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또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일어나고. 여자들이 정말로 분신하기 시작했다. 분신'당한' 여자들 옆에 서기 시작했고, 대상화되는 외모를 버렸다. (극단적이지만) 


"얘야, 불을 지르는 건 남자들이란다. 그들은 예전부터 우리 여자들을 불태웠지. 이제부터는 우리 스스로 몸에 불을 지를 거란다. 그러지만 우리는 절대 죽지 않아. 이제는 우리 몸의 상처를 당당하게 보여줄 거라고." 


여자를 불태워 죽인 역사는 유구하다. 마녀로 몰고.


아시아의 한 나라에서 우리는 꽃이 아니라 불꽃이다. 라며 길바닥에 앉아 시위할 때, 

아르헨티나의 한 작가는 몸에 불을 지르는 이야기를 써낸다. 


이런 연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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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리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박설영 옮김 / 프시케의숲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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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아 버틀러의 킨과 블러드 차일드를 굉장히 앞서간 이야기로 읽었고, 지금 시대에도 전혀 낡은 느낌 없는 고전이라고 생각했는데, '쇼리'는 음.. 작가가 이런 이야기도 써보고 싶었나보군. 넘어가기로. 


불편한 설정들이 많은데, 이야기는 초반 지나면, 중반부터 페이지 터너에 법정물같은 휘몰아침과 트와일라잇같은 그런 느낌의 재미가 있다. 


쇼리는 53살 먹은 10살 정도 외모의 흑인 외모 이나 (뱀파이어) 이다. 

엄마 가족이 몰살 당하고, 기억상실증에 걸렸으며, 첫 공생자인 라이트를 만나게 되고, 자신의 과거를 찾고, 현재의 위협과 맞서는 이야기. 그 과정에서 이나라는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되고, 다른 이나들을 만나 도움을 받고, 위협을 받고, 이나 위원회 (법정 같은)에서 다투게 된다. 


이나는 한 명당 일곱명 정도의 공생자 (피 제공자)를 두게 된다. 한 번 피를 빨게 되면, 그 이나 만의 독이 주입되어 복종하게 되고, 오르가즘을 느낌. 마약보다 더함. 이나는 공생자를 보호하고, 공생자를 잃게 되면, 정신이 나갈만큼 비탄에 빠지게 된다. 

공생자는 여자거나 남자거나 상관없지만, 피를 빨고, 빨리는 과정에서 몸도 섞기에, 공생자가 동성 이나를 꺼리거나 이성을 찾는 경우도 있고, 공생자끼리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는다. 이나가 죽는다면, 공생자도 죽거나 더 강한 독을 가진 이나에게 피를 빨려야 하는데, 엄청나게 거부감 강하고 고통스러워 한다. 강간 보다 더한 느낌. 


이런 설정들이라서 ... 어떻게 포장해도 좋아보일 수가 없다. 게다가 초반에  10살 정도의 쇼리와 섹스하는 성인 남자 라이트 이야기를 어떻게 재미있게 읽겠어.  


이제 와일드시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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