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061008105103&S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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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10-08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미디가 따로 없다.ㅡ.ㅡ;;;;

마법천자문 2006-10-08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나라당은 내정간섭 중단하라! 중단하라!

마노아 2006-10-08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나라당에, 내정간섭... 옳소...ㅠ.ㅠ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09&aid=0000051500

 

 

...... 

 

이제는 10만장 넘어서도 베스트셀러 앨범으로 각광받는다. 이런 추세대로라면 1,2년은 장담할 수 없지만 앞으로 몇 년 후엔 CD가 지금의 LP레코드처럼 수집용으로나 가치를 발하게 될지도 모른다. 2년 전 국내 마지막 LP공장인 서라벌 레코드가 자진 폐업함으로써 LP시대는 막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LP레코드처럼 CD가 끝을 보게 된다면 마지막 CD의 주인공은 누가될까.

 

orialdo@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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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10-07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승환은 이번 9집을 '정규앨범'으로는 마지막 씨디라고 공언했다. 비정규 앨범이라면 씨디로 나올 수 있지만 정규 앨범은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과거 타이틀곡 외에는 도저히 건질 곡이 없는 앨범을 팔던 상업주의적 작태를 많이 보긴 했지만, 정말 음악에 헌신하며 열정으로 똘똘 뭉쳐 앨범을 만들던 음악인들까지 도매급으로 피해를 보고 욕을 먹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영화 산업이나 드라마 기타 등등, 모든 문화 컨텐츠가 발전하는 것 같은데, 유독 음악만 도태하고 있다. 디지털 음원이 씨디의 음질을 능가하진 못한다. 씨디는 이제 추억의 산물이 되는가... 씨이.ㅡ.ㅜ

키노 2006-10-08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기술의 발전이 싫어라 ㅎㅎㅎㅎ 레코드판이 나의 손을 떠난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이젠 시디마저..무언가를 사서 포장을 뜯어보는 재미도 이젠 사라지고 모든게 즉문즉답이 되어야 하는 디지털 세대가 되었으니..한장의 앨범을 통해 느끼는 뮤지션들의 고뇌도 느낄 수 없고. 그저 귀에 쏙쏙 들어오는 노래와 계속 우리를 컴 앞에 앉아만 있게 하는 시대가 무서워지네요..나의 구매이력도 모두 기록이 되고 ..으허허허허...모든게 통제되는 느낌이어서 솔직히 오싹합니다^^ 이 글에 대해서는 할말이 많은데 그냥 이렇게 접을렵니다.^^;; 연휴 푸욱 쉬셨나요^^

마노아 2006-10-08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술의 발전이 우리를 편리하게 해준 점이 많긴 한데 구속하는 것도 참 많죠. 게다가 어느 순간 우리가 거기에 종속되는 것 같아 참 씁쓸하고 또 불안하기도 해요. 영화는 극장가서 보는 게 맛이라는 정서가 이제 자리잡았는데(아직도 음지는 활성화되어 있지만..) 음악만은 그게 안되고 있어요. 너무도 당연히 다운 받아 듣기. 아마, 나 역시 좋아하는 뮤지션들이 없었다면 그 심각함을 잘 몰랐을 것 같아요.(솔직히 많이 뜨끔합니다..;;;) 연휴 동안에 더 정신이 없었어요. 지금도 가게에 노가다 뛰러 왔답니다. 키노님은 즐거운 연휴시간 되셨나요?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64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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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10-07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머 코너로 보낼 걸 그랬나? ㅡ.ㅡ;;;;;

라주미힌 2006-10-08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한 놈.

마노아 2006-10-08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옳소!..;;;;;

라주미힌 2006-10-08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식, 손자, 친척, 동네 방네 알고 있고, 한반도 4천만이 욕하는데도
버틸 수 있다는 것... 하늘이 주신 능력인듯. 흐흐...

마노아 2006-10-08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고나지 않고는 이렇게 뻔뻔하기 힘들죠. 기네스북 감이에요...;;;
 

[아고라 네티즌청원] 아프리카의 한국식 정자 살립시다 

 

 주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한민국 대사관 전자 민원 쓰기 (달리 어디다 알려야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성북정에 대해 부디 한 분이라도 더 많이 알게 될 수 있도록, 그래서 작은 힘을 조금씩 모아서라도 남아공 유일의 한국식 정자를 보수,관리를 할 수 있게 되길 한가위 보름달에도 간절히 빌어 봅니다.

 

댓글로 응원해 주신 많은 분께 감사드립니다.

 

 

 

 

의연하게 운명을 기다리고 있는 성북정

 

 

 

아직 이렇게 아름다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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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10-07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러지지 않고 끝까지 제대로 보존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ㅠ.ㅠ
 

조금 지난 영화지만, 다시 곱씹어 보아도 소름이 끼칩니다.  길지만 읽어보셔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살인의 추억’ 리뷰를 함께 읽어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 이 리뷰를 쓰기 전까지 저는 ‘괴물’에 관한 어떤 리뷰도 읽지 않았습니다. 다른 글과 겹치는 내용이 많다면, 그건 제 부족함 때문이겠죠.


 

“니 (현서) 덕에 다 모였다.”


 ‘괴물’은 현서(고아성)의 가족이 모여 괴물에게 납치된 현서를 찾는 이야기다. 이는 ‘괴물’이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과 차별화되는 부분이다. ‘플란더스의 개’부터 ‘괴물’까지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늘 쫓는자와 쫓기는 자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플란더스의 개’에서 강아지 살해범을 쫓는 아파트 관리소 직원 현남(배두나)이나 ‘살인의 추억’에서 연쇄 살인범을 쫓는 두 형사는 범죄의 피해자가 아니다. 그들은 그들 세계를 관리하는 시스템이 범인을 검거할 권한을 준 대리인들이다. 반면 ‘괴물’은 피해자인 현서의 가족들이 직접 괴물을 쫓는다. 그들은 시스템으로부터 어떤 편의도 제공받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괴물을 잡기 위해 ‘다 모여’ 힘을 더한다. 아버지가 카드빚까지 내며 수색에 필요한 장비를 사면, 세 남매는 핸드폰으로 연락을 주고 받으며 한강 다리를 뒤져 현서를 찾는다. 그들의 목표는 가해자의 검거가 아니라 희봉의 말대로 ‘원수’를 잡아 ‘찢어죽이’는 것이다. 그들은 시스템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시스템을 거부하고 다 모여 복수를 시도하는 것이다.

 

Born with insight and a raised fist


 그것은 예상치 못한 대사건이 터졌을 때 시스템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다. ‘괴물’에서 현서의 가족들을 방해하는 국가 공권력의 문제는 단지 무능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현서 가족의 이야기를 아예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찰은 강두가(송강호) 현서의 연락을 받았다는 말 자체를 믿지 않고 그가 ’정신병‘에 걸렸다고 생각한다. 경찰은 현서를 찾는 과정에서 무능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아예 현서를 찾을 의지조차 없었다. 이는 강두가 말을 조리 있게 못해서가 아니다. 남일(박해일)과 남주(배두나) 모두 경찰에게 항의하지만, 경찰은 남일의 말대로 그 간단한 위치추적조차 하지 않는다. 이건 계급의 문제다. 똑같은 조건이라도 국회의원의 딸이 괴물에게 납치됐을 때 경찰이 수사에 나설 확률은 강두의 경우보다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다. 이건 너무나 공공연해서 말하기조차 민망한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그리고, 괴물 사건의 피해자들은 대부분 희봉처럼 생판 남이나 다름없는 ’몇다리 건너 아는 경찰‘이나 겨우 아는 돈 없고 빽 없는 서민들이다. 쉬는 날 한강 유원지에서 돗자리를 깔거나, 오리배를 타고 노는 사람들 중 서민이 부유층보다 많을 것은 당연하다. 또 괴물이 나타나기 전 강두가 맥주캔을 던질 때 그 옆에는 동남아인들이 있고, 합동 분향소 안에도 현서의 가족들 뒤로 동남아인들이 앉아 있다. 동남아 사람들이 한국에서 보통 어떤 사회적 위치에 있는가하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또 합동 분향소에 들어온 공무원이 누구에게 윽박지르듯 주차를 빼라는 차의 기종은 ‘아반떼’다. 합동분향소에서 공무원들이 뉴스조차 보여주지 않은 채 피해자 가족들을 격리수용하려 하고, 그저 손만 들게 해서 분류하는 건 그들 생각에 피해자들이 ‘그래도 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도널드 하사관처럼 그들이 지켜줘야 할 사람은 같이 싸운 강두와 달리 영웅으로 취급된다. 국가 공권력, 혹은 그들의 입장을 반영하는 매스미디어가 괴물의 피해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괴물’에서 오열하는 현서의 가족들을 바라보는 시선과 똑같다. 현서의 가족들이 오열할 때, 카메라는 그들의 슬픈 얼굴을 보여주는 대신 점점 뒤로 빠져 위에서 그들의 ‘발버둥치는’ 모습을 내려다본다. 그게 국가 시스템 속의 사람들이 서민 피해자를 다루는 방식이다.


 그래서 ‘괴물’에서 괴물의 존재는 가해자라기보다는 우발적으로 생긴 하나의 현상이다. 그것은 쌓이고 쌓인 사회 문제가 어떤 계기를 통해 드러난 것일 뿐, 문제의 원인은 아니다. 괴물을 죽여도 미군이 한강에 포름알데히드를 무단 방류하는 한 괴물이 나올 가능성은 언제든 있다. 그래서 괴물은 ‘Monster'가 아니라 'Host', 즉 ’숙주‘다. 괴물의 등장을 통해 시스템에 전혀 보호받지 못하는 서민들의 현실이 그대로 드러나고, 한국과 미국의 역학관계가 폭로된다. 괴물의 자리에 IMF나 성수대교 붕괴를 갖다 놓아도 피해자들이 문제 해결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방법들은 똑같다. 시스템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서민과 그 아래 계층들은 어떻게든 연대해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괴물이 사는 곳이 높은 건물 위가 아니라 하수가 흐르는 다리 밑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한강의 기적 밑에 묻어두었던 추악한 비밀들이 괴물을 통해 밝혀지고,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아닌 서민들부터 공격한다.


We don't need the key We'll break in


 이는 괴물이 풍자적인 우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현서의 가족들이 괴물과 맞서 싸우는 과정은 어떤 현상에 대한 국가의 통제방식과 피해자간의 대립 과정과 동일하다. 괴물 사건에 대해 국가는 서민들이 자신들에게 항의하거나 협상을 요구하는 대신 ‘복종’하길 원한다. 병원에 끌려온 뒤 불만을 털어놓는 자식들에게 ‘의사 선생님이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지’라고 말하는 희봉 같은 인물이야말로 국가 권력이 원하는 서민의 모습이다. 그러나, 국가는 괴물 문제를 피해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해결할 의지도 없다. 이는 필연적으로 피해 당사자의 직접적인 행동을 유발시킨다. 희봉마저도 현서를 찾을 방법이 막막해지자 공권력이 그를 가둬놓은  ‘병원’에서 탈출해 옷을 ‘갈아입고’ 현서를 찾기 시작한다.


  그래서 괴물에 대한 현서 가족과 국가 권력의 해결방식은 대립한다. 보호받지 못하는 시민들은 스스로 연대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만, 국가 권력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도, 그들의 존재를 용인할 생각도 없다. 그러므로, 국가는 현상에 대해 책임도 안지고, 피해자의 요구도 들어주지 않으며, 국가 권력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괴물’은 그 과정을 거의 교과서적으로 보여준다. 국가는 우선 통제와 격리를 시도한다. 한강은 민간인 출입 금지 구역이 되고, 피해자들은 격리 수용된다. 물론 이는 시민의 안전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괴물에 대한 정보를 통제할 수 있게 만든다. 격리 수용된 곳의 진실은 바깥으로 알려지지 않는다. 그 뒤에는 바이러스가 등장한다. 바이러스는 실제로 있을 수도 ,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공권력과 매스미디어는 바이러스의 공포를 적극적으로 퍼뜨린다. 괴물이 한강에 등장하자마자 곧바로 전염병에 대한 위험성이 경고되고, 바이러스에 대처한다는 명목으로 국가는 더욱 강한 국가 통제권을 가진다. 괴물을 만들어낸 미군이 오히려 괴물과 싸운 영웅이 되고, ‘에이전트 옐로우’를 통해 한국의 내정에 간섭한다.


 그 뒤에는 피해자와 일반 시민이 분리된다. 강두는 명백한 피해자다. 하지만 현서의 가족들이 탈출한 순간부터 그들은 마치 테러리스트같은 취급을 받는다. 원래는 시민들이나 피해자나 같은 계급의 시민이지만, 국가는 매스미디어를 통해 그들이 시민의 안전을 해치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들을 시민들과 다른 존재로 규정한다. 거리에서 바이러스의 위험을 보여주는 대형 스크린을 똑같이 바라보던 시민들은 바이러스 감염자와 유사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의 곁을 피한다. 거기에 국가는 ‘비과세 소득’인 현상금을 통해 적극적으로 현서의 가족들을 잡을 것을 권유하기도 한다. 어느덧 시민들은 바이러스 보균자가 그들의 평온한 삶을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들과 자신을 다른 존재라고 생각한다. 실질적으로는 피해자 - 국가권력의 대립구도는 어느새 피해자 - 나머지 시민의 구도로 바뀐다. 


 이 모든 과정을 평택 대추리 사건이나 농산물 시장 개방에 대한 농민들의 시위에 대입해보라. 문제는 국가권력의 결정으로부터 시작됐고, 아무리 항의해도 국가가 그것을 들어주지 않아 시위가 시작된다. 그러나 어느새 시위 현장은 공권력에 의해 부분 통제되고, 그래서 시위가 더 격렬해지면 국가와 매스미디어는 그들의 폭력성을 강조하며 그들을 가해자로 만든다. 이를 통해 그들은 평온한 삶을 사는 ‘시민’들과 다른 존재가 되며, 더불어 그들이 반대하는 현안은 사실 나머지 시민들에게 이익이 된다는 논조가 형성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 뒤에는 '바이러스‘처럼 ‘불온한 목적을 가진’ 운동권 세력이나 기타  음모론처럼 ‘무언가 위험한’ 것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괴물’은 이 상황을 연대를 통하여 해결하자고 한다. 현서의 가족들을 돕거나 현서의 가족들이 구하는 사람들은 모두 도시 빈민들이다.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연대해서 싸워야 한다.


Fight the war, fuck the norm


 이런 주장 자체는 전혀 새롭지 않다. 그러나, ‘괴물’은 거기에 지금 한국의 상황에 대한 진단을 함께 함으로써 현서의 가족들뿐만 아니라 모든 시민들이 연대해야할 이유를 제시한다. 보호받지 못하는 것이 다리밑의 하층 빈민들 뿐이라면 일반 시민이 그들을 위해 싸워 얻을 것은 없다. 그러나, 현서의 가족은 도시빈민이 아니라 매우 평균적인 한국가족의 형태를 띄고 있다. 현서의 가족 구성은 안정된 경제생활을 꿈꾸는 서민 가족의 형태를 그대로 보여준다. 희봉은 배운 것 없지만 산전수전 겪으면서 자식들을 키웠고, 조금 덜 떨어진 강두는 아버지의 일을 배우며 조금씩이나마 돈을 모은다. 하지만 집안을 일으켜 세워야 하는 것은 ‘4년제 대학’을 나온 남일(박해일)과 양궁선수인 남주(배두나)다. 아버지는 무식했고, 형은 공부를 못해 돈을 버는 사이 싹수있는 동생들이 집안을 일으킨다. 이는 한국 서민 가정이 기대할 수 있는 가장 정성적인 성공 방정식이다. 남주와 남일 중 누구라도 성공하면 그들 모두가 사랑하는 현서는 보다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강두가 아무리 백원짜리를 모아도 현서에게 좋은 핸드폰을 사주기 힘들듯, 그들의 꿈은 실패했다. 남일은 데모하다가 실업자 신세가 됐고, 남주는 금메달의 문턱에서 좌절한다. 결국 그들은 그들의 미래인 현서가 납치됐음에도 국가가 어떤 도움도 주지 않는 현실앞에 놓인다. 이것은 진실이다. '괴물‘에서 묘사하는 그대로, 잘 나가는 이동통신 회사에 다니는 회사원도 ’빚이 6,7천‘인 것이 과장처럼 들리지 않는 세상이다. 지금의 한국은 상위 몇 %를 제외하곤 언제 어떻게 도시 빈민이 될 지 알 수 없다. ’플란더스의 개‘에서 봉준호 감독은 이미 사회가 양극화 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현남이 타는 지하철 역에서 구걸을 하는 아주머니는 IMF 때문에 생활이 어려워졌다는 호소문을 돌리고, 윤주(이성재)는 박사학위까지 따고 집에서 놀고 있다. 여기서 윤주는 대학교수가 되기 위해 총장에게 뇌물을 바친다. 그 결과로 영화 처음에 남루한 빨래 건조대를 등지고 창밖을 바라보던 윤주는 그가 교수를 맡고 있는 대학 강의실에서 창밖을 바라본다. 반면 현남은 아파트 관리소에서 쫓겨나 윤주가 바라보는 산으로 들어가 담배를 핀다. 서민형 아파트에서 공존하던 사람들 중 하나는 사회 지도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기회를 잡고, 다른 하나는 아파트에서 밀려났다. 윤주가 계급 상승을 하는 사이, 현남 같은 서민들은 점점 사회 안전망에서 밀려난다. 그리고, 괴물이 등장하는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범위가 더욱 확대돼 일반 직장인들도 어떤 미래를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당신이 당신의 딸이 괴물에게 붙잡혀갔을 때 전화 한통으로 경찰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당신이 연대해야할 것은 에이전트 옐로우가 아니라 현서의 가족들이다. 그것이 강두의 말대로 “아무도 내 말을 안들어”주는 상황에서 시민들이 선택해야할 길이다. 돈 몇 푼 더 있다고 서민이 빈민층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예전에는 돈 몇천만원이 더 있느냐 없느냐로 서민과 빈민이 갈렸지만, 이제 그 단위는 ’돈‘이 아닌 ’자본‘으로 높아지고 있다. 말그대로 자본이 없다면, 서민들은 늘 위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남일이 한 도시 빈민에게 화염병에 쓸 병을 달라고 하면서 돈을 주자 도시 빈민은 화를 내며 “돈이면 다 되는지 아나”라고 말한다. 그렇다. 오히려 지금의 문제는 바로 그 돈 때문에 일어난 것이고, 시민들이 바래야 하는 것은 자신이 좀 더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이라도 안되는 건 안되고, 돈이 없어도 될 건 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연대해야 한다.


 이런 사회 문제는 단지 IMF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다. ‘살인의 추억’은 현대화의 박차를 가하던 1980년대를 통해 우리가 수많은 문제들을 묻고 지나갔다는 것을 보여줬다. 살인범은 끝내 잡히지 못했고, 그것은 범인뿐만 아니라 과학수사는 커녕 고문을 당연시하고, 데모 진압하느라 살인범은 막지 못한 국가 공권력에 큰 책임이 있었다. 그런 시대를 지나 두만(송강호)은 농촌의 형사에서 그럭저럭 먹고 사는 도시의 사업가로 변신했지만, 그 사이 우리가 묻어둔 수많은 문제들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그것이 하나둘씩 쌓이다가 ‘괴물’이 돼 나타났을 때, 서민들은 생존 자체를 위협받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그것은 '바다이야기‘ 사건이 될 수도 있고 한미 FTA가 될 수도 있다. 봉준호 감독이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괴물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희봉의 말대로 “사고쳐서 낳은 애 사고쳐서 잃은” 상황이다. 무수한 사고들을 쳐가며 지금까지 왔는데, 바로 그 사고들 때문에 현재의 존립기반을 잃게 됐다. ’플란더스의 개‘가 현남과 윤주의 대립구도만 보여주면서 시스템의 문제는 그 이야기 속에 풍자적으로 묻어두는 수준이었고, ’살인의 추억‘에서는 공권력이 문제를 더욱 확대시켰다면, ’괴물‘은 공권력이 적이 된다. 우리는 ’화염병‘을 들고 싸우던 그 시절이 이미 지났다고 생각했지만, 권력만 바뀌었을 뿐 국가가 시민을 지배하는 매커니즘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 역시 그 수많은 화염병을 통해 얻어낸 것이지 그들이 그냥 준 것이 아니다.


Know your enemy


 그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의식화‘다. 괴물이나 IMF, 평택 대추리 사건은 명확한 현상이지만,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할 국가 권력은 좀처럼 그 실체가 보이지 않는다. 또한 남일을 신고하는 그의 선배나 바이러스 감염자들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기피하는 사람들이 현서의 가족들과 연대할 이유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의식화가 필요하다. 적이 지금 괴물과 대항해 싸우는 그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을 ’과격 시위자‘로 규정하는 그들이라는 것을 알고, 그들에 대한 투쟁의 필요성을 알게 되는 것이 의식화다. 여기서 ’괴물‘의 또 하나의 이야기가 드러난다. 강두는 ’괴물‘에서 가장 큰 변화를 겪는다. 경찰에게 뇌물을 주는 등 가능하면 큰 마찰없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희봉은 괴물과 싸우는 순간에도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가 인식하는 문제의 범위는 오직 가족이다. 그것은 한국 기성세대의 전형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반면 남일이나 남주는 어처구니 없는 국가 시스템에 대해 불만을 표시할 줄 안다. 반면 강두는 영화 초반에는 아무 것도 모른다. 그는 경찰에게 자기 사연을 들어달라고 하소연할 뿐이다. 그러나,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강두는 매점으로 무언가 다가오는 느낌이 들자 곧바로 총을 들고 그 쪽을 겨냥한다. 또한 그는 ’영화 초반부에 TV를 통해 남주의 양궁시합, 즉 스포츠 경기를 본다. 그러나 영화 마지막에서 그는 TV 뉴스를 보더니 “TV 재미없네”라며 꺼버린다. 3S 정책의 산물이었던 스포츠 경기는 뉴스로 바뀌고, 뉴스는 강두가 거부하는 대상이 된다. 강두가 어떤 의식적인 정치성을 띄게 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는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강두의 의식화 과정은 평범한 시민이 민주 투사가 됐던 1980~90년대의 그 현실과 거의 동일하다. 아무 것도 모른채 평범하게 살던 시민은 어떤 현상에 의해 피해를 입고, 이 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 권력에 항의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탄압이다. 그 탄압 과정을 통해 피해자는 의식화 된다. 강두도 처음에는 경찰에 현서를 찾아달라고 하소연 하던 그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자 직접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이 때문에 국가 권력은 그를 위험인물로 조작해 고문에 가까운 조직검사를 한다. 미국의 하수인이 된 국가 권력이 강두를 ‘편하게’ 만들어주겠다며 ‘마취제’를 놓지만, 강두는 마취되지 않고 오히려 고통만 더욱 커진다. 국가 권력의 시민에 대한 눈속임은 그런 것이다. 또 국가권력은 강두를 둘러싼 모든 문제를 ‘뇌’속의 ‘바이러스’ 책임으로 돌린다. 그들은 강두가 바이러스 때문에 정신병에 걸렸고, 뇌 속에 바이러스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뇌를 운동권 학생으로, 바이러스를 ‘주체사상’으로 바꿔도 이야기는 통한다. 국가 권력은 그들에게 대항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이 그들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늘 주체사상, 좌익 용공, 반 자유주의 같은 것들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바이러스는 없다. 설사 있다해도, 그 바이러스의 시작은 미군이 방류한 독극물에 원인이 있다. 독재가, IMF가, 폭력적인 노동시위 탄압이 없었다면 바이러스가 생길 일도 없다.


 바이러스가 없다는 것을 강두가 아는 순간부터 강두는 확실하게 자신의 적을 알게 된다. 강두가 간호사를 인질로 붙잡고 트레일러 문을 여는 순간, 강두에게는 하얀 빛이 쏟아져 내린다. 강두는 ‘No Virus'를 알면서 갇혀 있던 세상에서 넓고 빛나는 세계로 나간 것이다. 그리고, 노란색이었던 강두의 머리는 영화 마지막에 검은색으로 바뀌어 있다. 병원에서 강두의 머리색깔을 보고 “노란머리 스톱!”이라고 외친 간호사처럼, 노란머리는 국가가 보다 통제하기 쉬운 수단일 뿐이다. 강두는 의식화 과정을 통해 노란머리를 검은머리로 바꾸고, 그 스스로 싸워나갈 준비를 한다. 에이전트 옐로우가 괴물을 퇴치하기 위해 뿌린 노란 가스에 다른 사람들이 피를 토하는 것과 달리 강두의 가족들이 멀쩡한 것은 의식화 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 관한 노골적인 은유다.


So sick of complacence now

 

 ‘괴물’이 2006년의 가장 문제적 작품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여기있다. ‘씨네 21'은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괴물‘ 리뷰를 실으며 ’봉준호의 정치적 커밍아웃‘이라는 제목을 실었다. 그 글을 아직 읽지 않았기에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제목만을 놓고 본다면 ’봉준호의 정치적 커밍아웃‘이라는 말은 ’괴물‘에서 봉준호 감독이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사실 한가지를 생략했다. ’괴물‘은 봉준호 감독의 정치성을 커밍아웃하는 작품일 뿐만 아니라, 그런 정치성을 가진 감독이 영화를 의식화의 수단으로 삼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2000년대 한국 영화들은 사회적 메시지를 직설적으로 말하기 보다는 이야기속에 숨겨놓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래서 그런 감독의 영화들은 종종 웰메이드 영화가 됐다. ’복수는 나의 것‘부터 ’친절한 금자씨‘에 이르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영화에 대해 보다 깊이있게 접근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만 열려있는 작품이었다. 그 외의 사람들은 그저 즐기면 된다. 그런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영화로 '예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괴물’은 영화의 정치적 메시지를 최대한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영화로 ‘운동’을 한다. 이는 운동권출신의 감독이 상업영화안에서 반체제적인 메시지를 넣은 것이 아니라, 운동권 출신의 감독이 대중영화를 통해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운동을 하고 있는 것에 가깝다. 그가 노리는 대중은 남일이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국가 권력과 시민의 투쟁에 대해 아직 의식화 되지 못한 강두같은 일반 서민들이다. 괴물을 쓰러뜨리는 것은 늘 ‘빨리 가던’ 남일이 아니라 그가 ‘놓친’ 화염병에 불을 붙여 화살을 쏘는 ‘늦게 걷는’ 남주와, 국가가 설치해놓은 표지판을 부숴 창처럼 괴물의 입속으로 찔러넣은 강두였다.


 그러나, ‘괴물’이 문제적 영화가 될 수 있는 것은 단지 의식화의 대상이 바뀌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봉준호 감독의 문제의식이 빛을 발하는 부분은 모든 운동의 시작점으로 ‘가족’을 놓았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회 운동은 ‘앞서가는’ 사람들, 혹은 괴물의 등장같은 사회 현상의 피해자들이 하는 것으로 인식됐다. 그들은 나머지 사람들을 대신해 싸우는 것이고, 그 사회운동의 명분은 ‘언젠가 우리도 당하게 된다’라든가, 혹은 ‘사회 정의’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런 사회운동이 정말로 끌어들여야할 일반 서민들은 그런 메시지에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을 움직이는 건 예나 지금이나 바로 내자식, 내 형제다. 박정희의 개발 독재가 대다수 국민들의 암묵적인 동의를 얻었던 것은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의 초점이 결국 너희들의 가족을 먹여살릴 수 있다는 데 맞춰졌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은 국민들에게 무슨 지표를 자세히 알려주고, 국가의 경제 구조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새마을 운동’을 통해 너희 집을 고쳐주고, 자식들이 대학에 입학하면 계급 상승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그와 반대로 4.19와 5.18, 그리고 6.29의 시작에는 모두 ‘내 자식의 죽음’이 있었다. 학생들이 아무리 민주화 운동을 한다고 해도 대다수의 부모들은 그들에게 ‘위험한 짓’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그 때 내 자식중의 한 명이 죽기 시작하면, 그들의 자식에 대한 염려는 국가에 대한 분노로 바뀐다. 물론 그것이 그들이 국가 권력에 대항하는 이유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내 가족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은 적극적으로 투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단숨에 투쟁에 참여하게 만든다. 저 정권이 내 자식을 죽이는구나. 그것만큼 한국인들을 분노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그리고 그 분노는 의식화의 과정을 거쳐 더 넓은 연대로 이어진다. 괴물을 처치한 뒤 강두는 죽은 현서 대신 그가 보호하고 있던 아이를 자식처럼 기른다. 가족을 지키겠다는 의지에서 시작한 일이 어느덧 가족이 아닌 가족이 지키려고 했던 것들까지 포용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괴물’이 제시하는 희망이다. 아무도 없는 ‘겨울’이 올 때, 우리를 살리는 것은 가족의 연대에서 시작했으나 가족을 넘어서는 어떤 가치의 연대다.


 ‘괴물’은 한국인 특유의 가족주의를 투쟁의 이유로 선포한 뒤, 그것을 영화적 재미로까지 발전시킨다. ‘괴물’의 영화적 재미는 단지 괴물이 한강을 휩쓸고 다니고, 가족들이 그에 맞서 싸우는 액션에만 있지 않다. ‘괴물’이 관객을 끌어들인 또 하나의 요인은 ‘괴물’속에 그려진 평범한 한국 서민 가족의 모습에 있다. 아는 것도, 가진 것도 없지만 어떻게든 가족을 책임지려 하고, 언젠가부터 멍청해진 아들을 안쓰러워하는 희봉의 모습은 모든 한국인이 공감할만한 우리 시대의 아버지의 모습 중 하나다. 추레한 모습으로 강두에 대한 미안함을 늘어놓고, 자신이 죽는 바로 그 상황에서 아들에게 어서 도망치라고 하는 희봉의 모습은 한국인만이 이해할 수 잇는 정서다. 그것은 우리가 잊고 있었던 서민 가정의 정서다. 경찰 앞에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아버지의 주검 위로 신문지를 덮는 강두의 행동이 만들어내는 안쓰러움. 관객들은 그런 묘사를 통해 현서의 가족들의 상황을 자신의 상황과 이입시키고, 어느덧 그들을 그렇게 만든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해 분노한다. 저 무력한 사람을 누가 저렇게 괴롭히는가. 그 정서적 동질감과 그들의 요구가 단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적인’ 상황을 통해 관객은 그들이 사회 특권층이 아니라 평범한 서민 가정이라는 것을 자각할 수 있고, 더불어 그들의 꿈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라, ‘괴물’에서 나오는 것처럼 가족들이 다 모여 우리 귀여운 자식을 배불리 먹이는 것이었다. ‘괴물’은 그 꿈을 누군가 빼앗아 간다면 싸우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영화 초반 자살을 선택하던 그 남자 말대로 우리는 “끝까지 둔한 것들”로 살게 된다. 괴물이 우리를 먹어치우는 그 때까지.


Compromise, conformity, assimilation, submission, Ignorance, hypocrisy, brutality, the elite.... All of which are korean dreams


 그러나, 가족을 통한 관객에 대한 의식화 시도는 ‘운동권 영화’로서 ‘괴물’의 가장 큰 진전인 동시에, ‘영화’로서 ‘괴물’의 한계이기도 하다. 극본가가 아닌 감독으로서 봉준호 감독의 가장 뛰어난 재능은 그가 대규모의 영화를 기막히게 컨트롤하거나, ‘봉테일’이라고 할만큼 디테일을 잘 살리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한국 감독들 중에서 가장 완벽한 서스펜스를 연출할 수 있는 사람이다. 아주 간단한 예로 ‘괴물’에서 헤드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던 여성이 괴물에게 당하는 장면이나, ‘살인의 추억’에서 밤길을 혼자 걷던 여성이 조금씩 긴장하게 되다가 어느 순간 살인범의 존재를 눈치채고 달리기 시작하는 장면들을 생각해보라. 거기서 관객들은 어떤 장면이 나올 것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지만, 그 전에 사람을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절묘한 호흡에 의해 계속 긴장감을 가지고 영화에 집중하게 된다. 그것이 서스펜스다. 모든 작품에서 원하는 시점에 숨 막히는 긴장감을 연출하는 스티븐 스필버그는 물론, 피터 잭슨이 엄청난 분량의 스토리를 가진 ‘반지의 제왕’을 흥행영화로 만들 수 있었던 것도 그 서스펜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괴물’에서는 봉준호 감독의 서스펜스를 연출하는 능력이 상당부분 사라졌다. 물론 ‘괴물’에서도 서스펜스를 살린 장면들은 많다. 현서가 괴물의 등을 밟고 뛰어 오르려는 씬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러나, ‘괴물’의 서스펜스는 오직 씬별로만 이뤄진다. 괴물이 방역요원을 공격하는 씬처럼, 갑자기 괴물이 나타나 방역요원을 공격한 뒤, 다시 병원 이야기로 이어지는 식이다. 그러다보니 ‘괴물’에는 ‘살인의 추억’처럼 코미디가 뒤섞여 있을지라도 작품 전체를 꽉 잡고 있던 팽팽한 긴장감과 일관된 작품의 톤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괴물’이 매우 현실적이면서도 미묘하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다. 서스펜스를 통해 인물의 위기와 고난, 그리고 해결을 일관된 흐름으로 보여준다면 관객은 그것의 상황과 관계없이 그것을 진짜처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괴물’에는 그 서스펜스의 흐름중 상당부분이 잘려있다. 병원에서 현서의 가족들이 탈출할 때, 그들이 병원 주차장에서 정해진 접선장소까지 가려면 그 사이 상당한 추격전이 펼쳐져야 정상이다. 또 희봉이 어떻게 돈을 받고 총과 한강 하수구 지도를 주는 조직과 접선할 수 있는지의 과정도 모두 생략돼 있다. ‘괴물’은 이런식의 서스펜스를 만드는 과정상의 디테일이 생략돼 있다. 이 때문에 감정의 흐름이 종종 끊기고, 그 사이 들어간 B급 영화식의 유머는 영화를 비현실적으로 만든다. 묘사하는 상황 자체는 정말 한국에서 괴물만 나오면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을 것 같을 정도로 현실적인데, 그 때마다 이건 현실이 아니라는 식으로 발을 빼는 것이다. 대신 갑자기 남주를 공격하는 괴물처럼 씬 별로 사람을 놀래키는 서스펜스가 그 여백 사이로 들어간다.


 물론, 이는 어느 정도 의도됐을 것이다. ‘괴물’의 개봉 전 봉준호 감독은 “원래 괴물도 알고보면 불쌍한 놈이다”라는 말을 하며 원래는 괴물도 피해자라는 내용을 넣으려 했다는 요지의 말을 했었다. 괴물이 미군의 포름알데히드 방류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을 생각할 때 봉준호 감독의 말은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결과물로 나온 ‘괴물’에서 괴물은 시민을 공격하는 가해자의 모습일 뿐이다. 이는 문제를 보다 단순화시킨 것이다. 괴물의 문제가 보다 단순화 되면서 관객은 괴물의 입장까지 고려할 필요 없이 보다 쉽게 현서 가족의 분노에 이입한다. 만약 강두가 여러차례의 위기와 탈출, 그리고 서스펜스에 수반되는 ‘현실적인’ 고통을 통해 의식화 된다면, 그것은 보다 설득력있는 논리를 갖추긴 하지만 관객이 즐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괴물’에서 현서 가족들의 적을 미국으로 설정한 것 역시 마찬가지다. ‘괴물’에서 현서의 가족들을 그런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은 미국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사실 강두를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로 조작하고, 시민과 현서의 가족들을 마치 다른 집단인 것처럼 분리시키는 것은 한국의 국가 권력이다. 바이러스를 근거로 내정간섭을 하는 미국의 문제는 현실이라면 훨씬 더 복잡한 이해 관계속에서 이뤄진다. 그것은 한국 정부의 암묵적인 승인하에 이뤄진다. 또한 보통의 경우 어떤 현상을 빌미로 극단적인 통제를 통해 국민생활을 간섭했던 것은 우리의 정부 그 자신들이었다. 그러나, ‘괴물’에서는 미국만이 눈에 보이게 드러나면서 문제가 단순화 된다. 이것은 덜 위험하다. 한국에서 반미 정서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고, 바이러스를 이라크 핵무기와 연결시키면 ‘괴물’은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괴물’을 반미의 문제로만 바라봤을 때 현서의 가족들을 그런 상황으로 내모는 한국 국가 권력의 문제는 사라진다. ‘괴물’에서 미국은 한국 공무원들 위에 군림하면서 보다 권력적이라는 느낌을 주지만, 한국 정부의 모습은 경찰이나 구청 조과장처럼 역시 서민인 공무원들의 모습으로만 나온다. 이 때문에 ‘괴물’은 매우 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이지 않은 독특한 톤의 영화가 된다. 현서 가족들에 대한 묘사나, 그들이 괴물과 싸우기까지의 과정은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현실적이다. 하지만 그로인해 왜 강두가 의식화 되고, 왜 굳이 남일이 던진 화염병이 빗나가고, 남주가 그것을 화살로 쏴야 하는가에 대한 맥락은 삭제돼 있다. 그것은 거기에 담긴 영화 바깥의 함의를 아는 사람만이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봉준호 감독이 대중을 향해 설파하는 한국의 현실과 그에 대한 해결방식은 어느 순간부터 모호해진다. 그것이 영화적인 단지 재미를 위해서인지, 아니면 메시지를 함께하는 것인지 영화 안에서는 설명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갖다 붙이려면 괴물의 등을 밟고 하수구 바깥으로 나가려는 현서의 모습은 우리가 만들어낸 괴물을 밟고 올라서서 성장하고자 했지만, 결국 좌절하게 되는 우리의 현실에 대한 은유라고도 할 수 있다. 봉준호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던지는 여러 메시지들을 보면 그런 해석이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괴물’에서는 그런 해석이 누가 봐도 타당해 보일 정도로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깊게 파고들어가지는 않는다. 대신 관객들이 이해하기 쉬운 미국에 대한 분노만을 앞에 내세운다. 그 분노는 B급영화의 양식을 빌어 더욱 노골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민감한 정치적 사안에 대해 B급영화의 양식을 빌어 그것을 풍자하는 것은 오랜 영화적 전통이다. 그러나, ‘괴물’에서 묘사하는 가족과 괴물의 관계는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오히려 그런 B급영화의 스타일이 영화 안에서 튀어 보인다. 그래서 미국에 대한 분노는 다시 괴물과 싸우는 현서 가족의 분노에까지 이어지지 않고 그 씬 안에서만 끝나고, 갑작스레 등장하는 시민단체의 데모는 그것이 시민단체에 대한 긍정이건 냉소건 간에 뜬금없어 보일 뿐이다. ‘괴물’이 담고 있는 모든 요소들은 꽤나 현실적이지만, 그 현실은 현실적인 ‘요소’로만 그칠 뿐 현실적인 맥락을 통해 진짜 현실이 되지는 않는다. 봉준호 감독은 그가 생각하는 한국의 현실을 대중의 눈앞에 펼쳐 보이며 보다 격렬한 투쟁을 유도하는 대신, 그 현실을 인지할 수 있는 단서만을 제시하는데서 선을 그었다.


With the D the E the F the I the A the N the C the E, Mind of a revolutionary


 ‘괴물’을 단지 반미 영화로만 본다면 봉준호 감독은 꽤나 억울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괴물’에서 담고 있는 수많은 사회적 문제는 묻혀져 버린다. 그러나, 그 책임의 일부는 봉준호 감독이 져야 한다. 그는 ‘괴물’로 더 많은 대중을 포섭하는데는 성공했지만, 그들에게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말하지 못했다. 그래서 현서의 가족이 괴물을 물리치는 영화의 후반부는 그것이 가져다주는 의미에 비해 다소 힘이 빠진다. 가족이 연대해 괴물을 물리치는 ‘괴물’의 후반부는 매우 강렬한 클라이막스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괴물’은 국가 시스템의 문제가 강두를 가해자로 둔갑시키는 아이러니를 묘사할 뿐, 괴물을 추격하는 현서 가족들의 모습 외엔 그들이 한데 모여 괴물과 싸우기까지 그들 각각의 삶이 빠져 있다.


 특히 남주의 캐릭터가 실종된 것은 ‘괴물’의 가장 큰 약점 중 하나다. 남주가 어떤 캐릭터라는 것을 보여줘야 가족의 연대를 통해 괴물을 물리치는 씬의 의미가 완벽하게 살아날 수 있다. 그러나, 강두와 남일에 비해 남주의 캐릭터는 거의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남주의 캐릭터는 헐리웃 블록버스터 영화와 배두나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캐릭터가 빚어낸 새로운 여전사 캐릭터처럼 느껴진다. 일상적이면서도 일상과 조금 떨어져 있는 독특한 외모를 가진 배두나는 츄리닝같은 옷을 입었을 때 오히려 그가 얼마나 예쁜지 새삼 깨닫게 만든다. 이런 배두나의 얼굴은 ‘괴물’을 보다 편하게 장르 영화의 관습에 기대 즐길 수 있도록 만든다. 남일도 마찬가지다. 물론 남일의 캐릭터는 남주에 비해 디테일하다. 관객들은 그를 통해 실패한 운동권 출신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조국 민주화를 위해 싸웠더니 돌아오는 건 실업자 신세고, 남은 건 도망치는 능력뿐이다. 또 자신의 선배는 자신을 배신한다. 남일은 그런 세상에서 여전히 운동권으로 살아갈 수 있는 남자다.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어슬렁어슬렁 거리는 걸음을 걷는 남일은 사회적으로는 실패한 인간이면서도 기회가 주어지면 언제든 ‘한가락’할 것 같은 폭발성을 가지고 있다. 남일의 첫 등장에서 보여주는 박해일의 그 삐딱한 표정은 남일의 캐릭터를 단번에 보여준다. 남일의 캐릭터는 운동의 실패를 통해 좌절하고, 이 때문에 염세적으로 묘사되곤 했던 기존 운동권의 이미지와 달리 매우 능동적이고 폭발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한국 영화에서 그렇게 블랙 수트와 라이플이 어울리는 운동권 출신의 남자는 없었다. 만약 ‘괴물’의 관련 작품이 만들어진다면 그건 ‘괴물’의 속편이 아니라 남일을 주인공으로한 ‘괴물’의 스핀오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남일의 멋진 모습이 부각되면서 사회속에서 좌절하고 사는 운동권 출신 남자의 모습은 희석된다. 그것이 ‘플란더스의 개’의 윤주와 ‘괴물’의 남일의 차이다. ‘플란더스의 개’는 윤주가 대학총장에게 뇌물을 주기까지 답답하고 비루한 삶을 끈질기게 보여주면서 그를 현실 속의 캐릭터로 만들지만, 남일은 운동권 출신이라는 현실의 캐릭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현실 속의 사람이라기 보다는 그런 바탕을 가진 액션 히어로처럼 느껴진다.


Time has come to pay


 이것은 봉준호 감독의 능력이자 딜레마다. 그는 ‘괴물’에서 자신이 던지고 싶은 메시지를 상업영화의 테두리안에서 소화했다. 게다가 그는 지금의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매우 급진적인 틀까지 제시했다. ‘괴물’은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끝난 지금에도 투쟁은 계속되고 있고, 이제 그 투쟁은 서민이하의 계급과 국가권력, 혹은 국가 권력의 보호를 받는 그 윗 계급간의 대립이라는 것이다. 이는 사회 양극화란 단어가 낯설지 않고, 대통령이 ‘미국과 싸워 이길 경쟁력’이라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있는 이 시대를 운동권의 시각에서 정확히 진단한 것이다(아마 같은 소재를 가지고 자유주의자가 만들었다면 국가와 현서의 가족이 일치 단결해 괴물을 물리치는 영화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그가 말하는 한국의 현실이 얼마나 급박한 것인지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반면 봉준호 감독이 이정도 선에서 그치지 않고 투쟁의 문제를 한국의 현실에 직접적으로 대입시켰다면 ‘괴물’이 지금과 같은 성과를 달성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영화적 완성도와 메시지의 결합이라는 점에서는 ‘살인의 추억’이 ‘괴물’보다 더 뛰어나다. 그러나, 대중적으로 더 성공한 작품은 그 어둡고 답답했던 ‘살인의 추억’ 보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로 홍보된 ‘괴물’이다.


 그래서, 봉준호 감독의 차기작이 ‘설국열차’라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설국열차’는 지구가 실질적으로 멸망한 상태에서 유일하게 살 수 있는 열차에 관한 이야기다. 그 안에서 특권층은 온갖 향락을 누릴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열차에 타는 것부터 전쟁을 치러야 한다. 한미 FTA가 체결되고 나서 개봉할지도 모를 이 영화를 봉준호 감독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보여줄 것인가. 그건 봉준호 감독의 역량 이전에 대중이 봉준호 감독의 메시지를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느냐의 문제일런지도 모른다. 우리는 과연 우리가 더 이상 ‘그들’처럼 될 수 없다는 봉준호 감독의 주장에 동의하고 연대할 수 있을 것인가.

 글 : 강명석(lennonej@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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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추억 리뷰를 보시려면 http://bbs.freechal.com/ComService/Activity/BBS/CsBBSList.asp?GrpId=908398&ObjSeq=1&PageNo=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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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06-10-04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는 '살인의 추억'과 '괴물'은 못 봤는데,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면, 의식화될 수 있다면 언제고 기꺼이 보겠습니다. ^^

마노아 2006-10-04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에로이카님^^ 강명석씨가 리뷰를 참 기막히게 잘 씁니다. 저도 읽으면서 여러모로 생각할 기회를 가졌어요. 영화를 보시고 리뷰를 다시 읽는다면 아마 더 재밌게 읽힐 거야요. 그리고 섬뜩해지겠죠..;;; 추석 연휴 잘 지내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