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8.16. 03:30

8월 16일까지 보내야 하는 과제를 드디어 끝냈다.

내일 학교에 잠시 가서 출력한 후 붙여서 보내기만 하면 된다.

우편으로 보내는데는 시간이 걸리니까 직접 가져다 주고 와야 한다.

겸사 겸사 바람도 쐬고... 잘 됐네, 뭐! 같다 오자.(좋게 생각하자구...)

아무튼, 우와~! 과제 끝이다^^

마음의 짐을 덜었다.

* 7월에 받아 둔 과제인데, 미리 쫌 하지! 늘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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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올림픽에 취해 있는 사이에

이명박 정부는 당신의 몸을 올가미로 한 줄 한 줄 묶고 있다.

아마 잔치(?)가 끝나고 당신이 일상으로 돌아와 있을 때 당신은, 밧줄에 묶여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할 지도 모른다.

지난 선거에서 정신을 차리리 못했던 결과가 이미 참혹하게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쉬지 않고 우리의 몸과 정신을 묶고, 가두고, 농락하려고 애쓴다.

그래서 나는 이 잔치가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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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6 0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8-16 0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의 첫 공부방 캠프는 1993년 여름이었다. 그 땐 충청북도 진천이라는 곳에 농활을 겸해서 떠난 캠프였는데, 지금도 그 때 했던 여러가지 활동들이 기억난다. 모기와 사투를 벌이느라 더 힘들었던 담력 훈련이며, 한여름 땡볕에 밭에서 콩을 심었던 일이며. 돌아오는 길에 가까운 개울에서 물놀이를 했던 기억까지. 새록새록 솟아난다.

   2000년부터. 다시 이어진 공부방 캠프. 2000년 여름엔 언양의 살티공소에 갔었나, 그랬다. 그리고 해마다 여름이면 열 일을 다 제치고 참가했던 공부방 여름 캠프. 그러는 사이 초등학생이던 어린이가 대학에 들어가 공부방 선생님으로 돌아왔고, 우리와 함께 하던 많은 선생님들이 공부방을 떠나 각자의 삶터로 돌아갔다. 그랬다, 이번 공부방 캠프가 나에겐 열 번째 캠프였다.

   강원도 삼척의 맹방해수욕장 입구에 故 지학순 주교님의 별장이었던 곳이라는데 지금은 천주교 휴양소로 운영되고 있는 작은 집이 올 여름 우리들의 캠프지였다. 건물은 아주 낡았으나 본채와 별채가 각각 독립되어 있는 구조(그러니까 각 건물마다 화장실이 있어서 좋았다.)와 비교적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넓은 마당이 마음에 들었다.

   8월 1일, 오후 학생들이 짐을 풀자마자 교사들은 텐트를 펼쳤다. 마당 한 곳에다가 1인용 텐트 2개를 비롯해서 5개를 쳐도 마당엔 40명의 대식구가 넉넉하게 밥을 차려먹고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충분했다. 아이들은 바로 해수욕장으로 달려가서 물놀이! 몇몇 선생님들은 아이들 따라 가고, 나는 마당에 앉아 가지고 갔던 윤성희의 거기, 당신,을 펼쳤으나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곧 그만두고 말았다.

   이번 캠프에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이들 밥만 열심히 챙겨주리라, 또 말없이 설거지를 해 주리라하고 마음 먹었는데, 결론적으로 마음처럼 쉽지는 않았다. 저녁에 삼척시내에 잠시 다녀왔다.밤에 마당에서 영화를 보기로 했는데, 정작 영화를 빌려오지 않아 삼척 시내를 뒤져서 영화 CD 두 장을 빌렸다. - 1번가의 기적,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우여곡절 끝에 영화를 봤는데, 다행스럽게도 반응이 괜찮았다.

   다음날 동해의 일출을 꼭 보리라 마음 먹었는데 새벽의 기상청 3시간 예보는 비 올 확률이 40%로 나왔다. 이후로 점점 강수 확률이 높아지는 것으로 봐서 낼 아침은 날이 흐릴 것이다는 생각을 하고 텐트에서 잤는데, 새벽에 빗방울이 후두둑 하는 소리에 놀라 잠을 깼다. 그 때가 새벽 4시 50분이었다. 내가 잔 텐트는 방수덥개가 없어 비가 오면 물이 샐까봐, 나도 모르게 자면서 긴장하고 있었던 가 보았다. (그러나 이내 비는 그치고 다시 잠이 들었다.)

   둘째날은 아이들이랑 모두 동해시에 있는 무릉계곡으로 물놀이를 갔다. 두타산과 청옥산이 만나 깊은 계곡을 이루었는데 피서온 사람들로 계곡이 넘쳐났다. 계곡 들어가는 입구에서 다시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으나 이왕 여기까지 온 거 끝까지 놀다가 가자는 심정으로 계곡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또 물이 들어가기가 싫었다. 여벌 옷도 일부러 준비하지 않아서 애들이 물을 뿌리려고 하면, '디카'가 주머니에 있다고 사정해서 빠져나왔다.(사실, 디카는 이미 맡겨두었다.)

   오후에 다시 숙소로 돌아와서 서둘러 점심을 먹었다. 다시 아이들은 물놀이를 하고 다른 사람들도 마지막 물놀이라고 생각하는지라 모두 해수욕장으로 나갔다. 나는 물에 들어가는 것이 귀찮고 찝찝해서 눈에 안 들어오는 책을 집어들었으나, 이내 곧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잠을 깨니 슬슬 저녁 준비를 해야할 시간이었다. 이날 저녁은 맛있는 삼겹살! 나와 다른 선생님 세 분이 함께 엄청난 양의 고기를 구웠고(공부방에서 자주 하다 보니 숯불에 고기 굽는 실력이 날로 늘고 있다.) 모두들 맛있게 먹었다.

   뒷정리를 하는 동안 아이들은 동네 산책을 다녀왔고, 이어서 영화 상영. 어제보다는 환경이 훨씬 나았다. 마당에 편한 자세로 1번가의 기적을 봤다. 음... 다시 보니, 제목이 잘 못 됐단 생각이 들었다. 1번가의 기적은 없다,가 제대로 된 제목이 아닐까 싶었다. 아, 이 영화는 우리 공부방과 자주 함께 활동하는 연산동의 물만골 공부방 부근에 세트장을 짓고 촬영을 해서 영화를 보는 내내 낯익은 풍경이 많이 나왔다.

   밤이 훌쩍 깊었다. 아이들은 하나 둘 자러 들어갔고, 바닷가로 낚시하거 가셨던 마태오 아저씨께서 붕장어 네 마리를 낚아서 오셨다. 나도 텐트 속에 누웠다가 나와 소주 한 잔과 붕장어회를 한 젓가락 먹었다. 요즘은 어딜 가도 이런 회식 자리가 싫어서 남들이 하는 이야기를 말없이 듣고만 있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내일 일정도 빠듯하여 금새 자리가 정리되었다.

   텐트에 누우니까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울퉁불퉁한 바닥에 몸을 대고 빗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있었다. 이렇게 있는 거 참 오랜만이었다. 어쩌면 내 생애 처음일지도 모르지. 불편하지만 불편한대로 매력이 있는 텐트 생활이다. 새벽엔 비가 그쳤지만 날이 꽤 추웠다. 가지고 간 이불도 없었기 때문에 새벽부터는 잠이 깼다 들었다를 반복했다.

   아이들이 아침을 준비하는 걸 잠깐 보고 수녀님들과 가톨릭 신자인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 삼척 시내에 있는 성내동성당의 미사에 참여했다. 나로서는 진짜 오랜만에 가보는 미사였다. 집중은 당연히 안 되고, 그냥 미사 중에 나오는 말들이 계속 귀를 맴돌아 머릿속에서 윙윙거렸다. 하지만 마음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비가 쏟아졌다. 마음이 급해서 서둘러 돌아왔다.

   돌아오니 우리 숙소는 햇볕이 쨍쨍! 아이들은 이미 아침을 먹고 짐정리를 하고 있었다. 남은 밥이 없어서 컵라면으로 아침을 대충 먹었다. 내 짐도 챙기고 숙소 뒷정리도 후다닥 해치우고 나서 버스에 올랐다. 우리는 추암해수욕장 근처에 있는 촛대바위에 들렀다. 해가 돋는 아침이었으면 장관이었을 거 같은데, 한낮이라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변화무쌍한 하늘만 좋았을 뿐!

   숙소 근처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우리는 부산으로 출발했다. 동해에서 포항으로 내려가는 7번 국도는 아름다운 동해의 여러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게다가 울진 근처에서는 적당히 길도 막혀서 풍경을 보기에 더욱 좋았다. 다시 책을 펼쳤으나 몇 장 읽지 못하고 또 덮었다.(여행 가서 한 40 쪽이나 읽었을까?ㅋ) 이후 쏟아지는 잠!

   부산에 도착하니 6시 40분이었다. 아직도 날이 훤했다. 공부방에 짐을 옮기느라고 한 시간 정도 들었다. 이후에 선생님들과 간단한 저녁 식사를 했고, 난 밥만 먹고 바로 일어섰다. 돌아오는 길이 참 가볍다는 생각을 했다. 이것으로 나의 열 번째 여름 캠프는 끝났다. 앞으로는 당분간 공부방도 방학이다. 이번 방학에 꼭 해야 할 일 두 개가 끝난 셈이다.

   이제 보충수업만 끝나면 나만의 방학을 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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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최초로 최고 권력에 오른, 아나키스트가 아닐까, 한다.

- 미국 쇠고기가 싫으면 안 사먹으면 된다 하고,

- 검역 주권은 내팽개치고,

- 공교육을 부정하는 학교 자율화(?)-아니, 학교 말살 정책 추진하고.

- 공공의료, 수도 시장에 다 팔아치우겠다고 하고,

- 대운하도 추진하다 비판만 거세지니 민간이 알아서 하는 거라 하고,

하여튼 자기가, 정부가, 국가가 해야할 일을 모른다고, 책임 없다고 발뺌만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국가의 존재와 역할을 부정하는 사람이 어떻게 최고권력자는 되었을까?ㅎ

우리 국민의 비극이다.

 

<오늘 한겨레신문에 난 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에 난 글의 주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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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다춥스 2008-08-16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대학교 등록금이 비싸면... 장학금 타면 되죠^^
 

   이제 사흘만 더 지나면 19개월이 되는 아기. 아직 말도 제대로 못해 옹알거리기만 한다. 그래도 이제는 제법 말귀는 알아들어 엄마, 아빠를 구별하고 제 눈, 코, 입도 분명하게 가리는 녀석이다. 늘 제 욕구만 중요하고, 다른 건 안중에도 없는 욕심쟁이지만, 아직 어린 녀석이 지금껏 버티며 살아온 과정을 생각해 보면, 부모로서 아직은 그 욕구를 다 채워주고 싶은 심정이다.

*

   2년 전 여름이 끝나갈 무렵. 원래 다니던 종합병원에서 태아가 잘 자라지 않는다며 입원과 수술을 권유했을 때, 혹시나 싶어 다른 병원에서 한 번 더 검진을 받기 위해 들렀다가 의사의 강력한 권유로 그 날 저녁에 바로 수술을 받았고, 난 이 녀석을 처음으로 봤다. 힘차게 울어대기는커녕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인큐베이터 속에서 호흡기를 매단 채 이 녀석이 내게로 왔다. 태어나던 당시 919g. 덩치라고 할 것도 없이 딱 내 손바닥만 한 크기였다. 그래도 숨을 쉬며 세상에 나오게 해 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앞으로 씩씩하게 잘 키우겠노라는 다짐을 했다. 잠든 녀석을 보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차문을 열고 마구 외치고 싶었다. -오늘 내 아들이 태어났다고 말이다.

   녀석이 나고부터는 오직 건강하게 키워 인큐베이터를 벗어나도록 하겠다는 집념만으로 거의 매일 병원을 다녔다. 우리 아기가 있었던 신생아집중치료실은 점심과 저녁 시간에만 각각 30분씩 면회가 허락되었기에 출근을 했던 나는, 저녁 면회 시간에 맞춰서 부민동까지 버스를 타고 다녔다.(아내는 매일 점심과 저녁 면회를 다녔다.) 엄마의 품에서 여러 사람의 축복 속에 탄생의 기쁨을 누려야 할 녀석이 인큐베이터에서 매일 사투를 벌이고 있으니 이를 지켜보는 가족들도 애가 타고 걱정이 늘었지만, 잘 크는 아이를 보면서 앞으로는 괜찮아질 것이라는 믿음과 확신도 점차 커졌다.

   처음에 달았던 호흡기는 폐가 성숙해지면서 뗐고, 수분이 빠져서 820g까지 빠졌던 몸무게도 하루에 20g씩 꾸준히 늘었다. 인큐베이터에 있을 때 중간에 감염 증세로 몇 번 고생하기도 했지만 거뜬하게 잘 이겨내고 씩씩하게 잘 자라는 것 같아 한시름 놓으려 할 때, 담당 의사로부터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진단을 받았다.

   백질연화증. 미숙아 정기 뇌 검사를 했는데 우리 아이의 뇌에서 백질연화증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날은 담당 의사를 만나지 못해서, 아내에게 대충 설명을 들어도 그게 뭐지? 너무나 황당한 병명에 멍한 상태로 있다가 집에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 본 결과, 백질연화증은 주로 미숙아들이 태어날 때 뇌에 산소가 부족해서 생기는 병으로, 앞으로 뇌 기능에 이상을 보이며 심각한 운동 장애, 즉, 뇌성 마비 증세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정신없이 백질연화증에 대해 검색해 보다가, 실감이 나지 않는 병명에 아닐 거라고, 한창 씩씩하게 잘 자라는 녀석이 그렇게 무서운 병에 걸렸을 리 없다고 강하게 부정도 해 보다가, 마음이 가라앉을 때쯤에는 ‘너에게 어떤 절망적인 결과가 나오더라도 아빠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너를 어떤 시련에도 굴복하지 않는 ‘백절불굴의 사자’로 키우겠다고 다짐도 해 보다가, 운동 장애가 있을 때는 재활치료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검색해 보다가… 아무튼 2차 뇌검사 결과가 나온다는 삼 주 동안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불안과 공포와 절망이 지배하는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2차 검사 결과는 다행스럽게도 정상. 인큐베이터 위에 달린 우리 아기의 인적사항과 병명 칸에서 PVL(PVL : periventricular leukomalacia 심실 주위의 백반 흑색종)이라는 글자가 드디어 지워졌다. 이제 또 다시 넘어선 한 고비. 다시 보름 후에 이어진 3차 검사에서도 정상 판정을 받아 뇌 검사는 이제 필요 없다는 결정을 받았다.

    그 사이에 아내와 함께 동사무소에 들러 출생신고를 하고 아기 이름을 지었다. 드디어 이 녀석은 법적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실체가 되었고, 우리에겐 가족이 한 명 더 늘었다. 아내와 꽤 오래 의논한 끝에, 태명이었던 '만복'이에서 세상에 보배로운 존재로, 하늘이 복을 내려주는 존재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보배 진(珍)에, 복 복(福), 진복으로 이름을 지었다. 남들이 뭐라고 말하든 지금도 아내와 나는 우리 아기에게 꼭 어울리는 이름을 지었다고 믿는다. 진복이-약간은 촌스러우면서도 정감 있고, 이름에 익숙해지면 은근히 세련된 멋까지 풍기는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을 자주 한다. (우리는 이 녀석이 결국 제 이름 때문에 살았다고 믿게 되었다.)

   그렇게 병원을 다닌 지 거의 두 달 만에 2kg의 몸무게를 넘기자 신생아 집중치료실에서  일반 신생아실로 옮겼다. 녀석은 이제 인큐베이터를 벗어나 처음으로 세상의 공기를 맡아보는 것이다. 이것은 이제 퇴원이 임박했다는 좋은 조짐이었다. 처음엔 한 번에 모유 3cc도 제대로 못 먹던 녀석이 어느덧 제 뱃고래를 키워 이제 40cc도 거뜬히 먹는 게 여간 신기하지가 않았다.

   신생아실에서 다시 일주일 후. 이제 집으로 가도 될 시기가 왔다. 진복이가 태어나서 62일 만에 병원 문을 나서는 것이다. 출산 후 산후 조리를 잘 하기 위해서 아내는 친정에 머물고, 진복이도 며칠 동안은 외가에서 머물며 진복이의 외할머니와 엄마, 이모가 번갈아가며 돌보기로 했다. 다행스럽게도 진복이가 퇴원해서는 크게 아프지 않고, 무럭무럭 잘 자라며 빠르게 제법 사람꼴을 갖춰갔다. 우리 가족에게 힘들지만 사랑스럽고 행복한 시간들이 흘렀다.

   우리 집에 온 이후로 손가락을 빨고, 뒤집기를 하고, 엎드려서 기고, 제 힘으로 일어서고, 걸음을 떼서 걷고, 옹알이를 시작하고…… 진복이가 보여주는 작은 변화 하나하나가 나에게 는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녀석이 조금씩 자라남에 따라 내 생각도 녀석의 조금 더 먼 미래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까 내 생각의 끝은 세상살이의 근본적인 질문에 가 닿는다.-진복이에게 어떤 세상을 보여주고 싶은가? 녀석이 자라게 될 세상은 어때야 하는가?

   진복이는 지난 1월말엔 ‘요도하열’을 교정하는 수술을 했다. 아내와 나는 서울에 있는 종합병원에서 한 열흘 정도 지낼 각오를 하고 올라갔지만, 우리가 걱정했던 것보다는 상태가 좋아서 나흘 만에 퇴원을 하며 다시 한 고비를 넘겼다. 경미하다고 하더라도 전신마취가 필요한 수술이라 큰 병원의 중앙 수술실에 들어설 때는, 엄마가 안고 있었지만 저도 어떤 느낌이 왔는지 수술실로 안 들어가려고 발버둥을 칠 때나 마취가 깨면서 열이 잔뜩 올라 볼이 벌겋고, 입술이 바싹 마른 모습으로 축 늘어진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마음이 불에 데인 것처럼 쓰리고 아팠다.

   이후로 지금껏 진복이는 별달리 아픈 곳 없이 자란다. 감기에 걸린 적은 몇 번 있었지만, 그 정도야 다른 아이들도 흔한 일이니까. 이제 이 녀석이 곧 말을 시작하려고 그러는지 옹알이가 잦고, 주변 사물에 대한 호기심이 굉장히 많아졌다. 내가 좀 일찍 퇴근을 하면 녀석을 데리고 아파트 주변을 산책하는데, 저 혼자서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느라 정신이 없다. 또 제가 신기하다고 여기는 것에는 어김없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무엇이냐고 묻는다. 온 방안을 운동장처럼 뛰어다니며, 집안의 물건이 제 자리에 있는 걸 두고 보지 못하는 녀석에게서, 그러다가도 제 맘대로 안 되면 온몸으로 소리를 지르는 녀석에게서, 나는 지금껏 이 녀석을 이렇게 만들어 준 세상 모든 존재들에게 머리 숙여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


   이제 이 사랑스러운 녀석의 제법 길었던 생존 투쟁은 끝나 가는 것일까? 유감스럽게도 아직은 아니다. 이 녀석이 태어난 지 2년째가 될 즈음인 이번 여름부터는 성장호르몬 치료를 받아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일단 정밀한 검사와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다는 담당 의사의 권유로 병원 예약은 해 둔 상태다. 그렇지만, 지금까지의 시련을 잘 이겨낸 것처럼 우리는 앞으로도 씩씩하게 잘 견디며 두려움 없이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이런 고통을 겪으면서 진복이가 어떠한 고통에도 굴복하지 않는 ‘백절불굴의 사자’로 거듭나리라 믿는다. 시련은 극복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시련은 결국, 사람을 키우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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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8-05-27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복이가 힘든 시간을 잘 견뎌주었군요. 대견하고 고맙습니다. 이름만큼만 해준다면 더도 덜도 바랄 게 없겠어요. 가족 모두에게 화이팅을 외쳐봅니다!

느티나무 2008-05-27 22:27   좋아요 0 | URL
음 이 글은 진복이가 크면 꼭 읽게 해 줄 겁니다. 그 때를 위해 미리 써 둔 겁니다. 말로 하려면 너무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고, 그러면 기억이 가물가물해 질까봐... 네가 태어나고 힘든 과정을 거쳐올 때 내 마음이 이랬다는 걸 전해주고 싶었거든요.

마노아 2008-05-28 02:02   좋아요 0 | URL
아름다운 선물이, 소중한 유산이 될 겁니다. 백업도 꼭 해놓으시고 출력도 해놓으셔요. (알라딘을 못 믿는 거???)

드팀전 2008-05-28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절불굴...GG 힘이드껴지누만요..^^

느티나무 2008-05-28 10:45   좋아요 0 | URL
아프리카 카메룬 축구 대표팀의 닉네임이죠^^ 백절불굴의 사자... 진복이가 동화 속의 주인공이 아닌 이상 힘들고 어려운 현실을 살아가게 될텐데, 잘 견디고 씩씩하게 자랐으면 해서요.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다짐했어요.ㅋ

hook-choi 2008-06-30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련은 사람을 키우기 마련이다."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진복이가 씩씩하게 잘 크고 있는 걸 보니 제가 다 뿌듯하네요.ㅋ
우리 수민이도 6개월 동안 별탈 없이 잘 크고 있어요.
휴직을 더해야 하나 복직을 해야 하는 고민하다 샘들은 어찌 지내시나 궁금하여 들렀어요.
아기와만 지내는 시간이 매일매일 즐겁지만은 않지만, 힘들다고 느껴질때마다 감사하다는 생각을 해요.
저도 딸을 위해 성장일기를 써야지 맘만 먹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미루기만 했는데,
샘 글을 보니 지금이라도 꼭 시작해야 겠어요.
모두들 잘 지내시겠죠?
내년이든 언제든 학교로 돌아가면 샘들과 자주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진복이도 송희샘도 느티나무님도 화이팅!!!

느티나무 2008-07-01 15:41   좋아요 0 | URL
정말 오랜만이에요. 애기 잘 큰다니 우리 애기가 잘 크는 것처럼 기쁜 소식이네요.ㅋ 애기 키우기가 힘들지만, -저야 거의 옆에서 거드는 수준이지만- 보람도 있어요.ㅋ 저는 육아일기 같은 거 못 썼어요. 복직하시면 가끔씩이라도 뵈요. 의주샘은 12일에 한 달간 미국으로 연수간대요. 그 집이랑은 가끔씩이라도 봐요. 샘도 건강하게 잘 지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