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사흘만 더 지나면 19개월이 되는 아기. 아직 말도 제대로 못해 옹알거리기만 한다. 그래도 이제는 제법 말귀는 알아들어 엄마, 아빠를 구별하고 제 눈, 코, 입도 분명하게 가리는 녀석이다. 늘 제 욕구만 중요하고, 다른 건 안중에도 없는 욕심쟁이지만, 아직 어린 녀석이 지금껏 버티며 살아온 과정을 생각해 보면, 부모로서 아직은 그 욕구를 다 채워주고 싶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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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여름이 끝나갈 무렵. 원래 다니던 종합병원에서 태아가 잘 자라지 않는다며 입원과 수술을 권유했을 때, 혹시나 싶어 다른 병원에서 한 번 더 검진을 받기 위해 들렀다가 의사의 강력한 권유로 그 날 저녁에 바로 수술을 받았고, 난 이 녀석을 처음으로 봤다. 힘차게 울어대기는커녕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인큐베이터 속에서 호흡기를 매단 채 이 녀석이 내게로 왔다. 태어나던 당시 919g. 덩치라고 할 것도 없이 딱 내 손바닥만 한 크기였다. 그래도 숨을 쉬며 세상에 나오게 해 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앞으로 씩씩하게 잘 키우겠노라는 다짐을 했다. 잠든 녀석을 보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차문을 열고 마구 외치고 싶었다. -오늘 내 아들이 태어났다고 말이다.
녀석이 나고부터는 오직 건강하게 키워 인큐베이터를 벗어나도록 하겠다는 집념만으로 거의 매일 병원을 다녔다. 우리 아기가 있었던 신생아집중치료실은 점심과 저녁 시간에만 각각 30분씩 면회가 허락되었기에 출근을 했던 나는, 저녁 면회 시간에 맞춰서 부민동까지 버스를 타고 다녔다.(아내는 매일 점심과 저녁 면회를 다녔다.) 엄마의 품에서 여러 사람의 축복 속에 탄생의 기쁨을 누려야 할 녀석이 인큐베이터에서 매일 사투를 벌이고 있으니 이를 지켜보는 가족들도 애가 타고 걱정이 늘었지만, 잘 크는 아이를 보면서 앞으로는 괜찮아질 것이라는 믿음과 확신도 점차 커졌다.
처음에 달았던 호흡기는 폐가 성숙해지면서 뗐고, 수분이 빠져서 820g까지 빠졌던 몸무게도 하루에 20g씩 꾸준히 늘었다. 인큐베이터에 있을 때 중간에 감염 증세로 몇 번 고생하기도 했지만 거뜬하게 잘 이겨내고 씩씩하게 잘 자라는 것 같아 한시름 놓으려 할 때, 담당 의사로부터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진단을 받았다.
백질연화증. 미숙아 정기 뇌 검사를 했는데 우리 아이의 뇌에서 백질연화증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날은 담당 의사를 만나지 못해서, 아내에게 대충 설명을 들어도 그게 뭐지? 너무나 황당한 병명에 멍한 상태로 있다가 집에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 본 결과, 백질연화증은 주로 미숙아들이 태어날 때 뇌에 산소가 부족해서 생기는 병으로, 앞으로 뇌 기능에 이상을 보이며 심각한 운동 장애, 즉, 뇌성 마비 증세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정신없이 백질연화증에 대해 검색해 보다가, 실감이 나지 않는 병명에 아닐 거라고, 한창 씩씩하게 잘 자라는 녀석이 그렇게 무서운 병에 걸렸을 리 없다고 강하게 부정도 해 보다가, 마음이 가라앉을 때쯤에는 ‘너에게 어떤 절망적인 결과가 나오더라도 아빠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너를 어떤 시련에도 굴복하지 않는 ‘백절불굴의 사자’로 키우겠다고 다짐도 해 보다가, 운동 장애가 있을 때는 재활치료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검색해 보다가… 아무튼 2차 뇌검사 결과가 나온다는 삼 주 동안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불안과 공포와 절망이 지배하는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2차 검사 결과는 다행스럽게도 정상. 인큐베이터 위에 달린 우리 아기의 인적사항과 병명 칸에서 PVL(PVL : periventricular leukomalacia 심실 주위의 백반 흑색종)이라는 글자가 드디어 지워졌다. 이제 또 다시 넘어선 한 고비. 다시 보름 후에 이어진 3차 검사에서도 정상 판정을 받아 뇌 검사는 이제 필요 없다는 결정을 받았다.
그 사이에 아내와 함께 동사무소에 들러 출생신고를 하고 아기 이름을 지었다. 드디어 이 녀석은 법적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실체가 되었고, 우리에겐 가족이 한 명 더 늘었다. 아내와 꽤 오래 의논한 끝에, 태명이었던 '만복'이에서 세상에 보배로운 존재로, 하늘이 복을 내려주는 존재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보배 진(珍)에, 복 복(福), 진복으로 이름을 지었다. 남들이 뭐라고 말하든 지금도 아내와 나는 우리 아기에게 꼭 어울리는 이름을 지었다고 믿는다. 진복이-약간은 촌스러우면서도 정감 있고, 이름에 익숙해지면 은근히 세련된 멋까지 풍기는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을 자주 한다. (우리는 이 녀석이 결국 제 이름 때문에 살았다고 믿게 되었다.)
그렇게 병원을 다닌 지 거의 두 달 만에 2kg의 몸무게를 넘기자 신생아 집중치료실에서 일반 신생아실로 옮겼다. 녀석은 이제 인큐베이터를 벗어나 처음으로 세상의 공기를 맡아보는 것이다. 이것은 이제 퇴원이 임박했다는 좋은 조짐이었다. 처음엔 한 번에 모유 3cc도 제대로 못 먹던 녀석이 어느덧 제 뱃고래를 키워 이제 40cc도 거뜬히 먹는 게 여간 신기하지가 않았다.
신생아실에서 다시 일주일 후. 이제 집으로 가도 될 시기가 왔다. 진복이가 태어나서 62일 만에 병원 문을 나서는 것이다. 출산 후 산후 조리를 잘 하기 위해서 아내는 친정에 머물고, 진복이도 며칠 동안은 외가에서 머물며 진복이의 외할머니와 엄마, 이모가 번갈아가며 돌보기로 했다. 다행스럽게도 진복이가 퇴원해서는 크게 아프지 않고, 무럭무럭 잘 자라며 빠르게 제법 사람꼴을 갖춰갔다. 우리 가족에게 힘들지만 사랑스럽고 행복한 시간들이 흘렀다.
우리 집에 온 이후로 손가락을 빨고, 뒤집기를 하고, 엎드려서 기고, 제 힘으로 일어서고, 걸음을 떼서 걷고, 옹알이를 시작하고…… 진복이가 보여주는 작은 변화 하나하나가 나에게 는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녀석이 조금씩 자라남에 따라 내 생각도 녀석의 조금 더 먼 미래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까 내 생각의 끝은 세상살이의 근본적인 질문에 가 닿는다.-진복이에게 어떤 세상을 보여주고 싶은가? 녀석이 자라게 될 세상은 어때야 하는가?
진복이는 지난 1월말엔 ‘요도하열’을 교정하는 수술을 했다. 아내와 나는 서울에 있는 종합병원에서 한 열흘 정도 지낼 각오를 하고 올라갔지만, 우리가 걱정했던 것보다는 상태가 좋아서 나흘 만에 퇴원을 하며 다시 한 고비를 넘겼다. 경미하다고 하더라도 전신마취가 필요한 수술이라 큰 병원의 중앙 수술실에 들어설 때는, 엄마가 안고 있었지만 저도 어떤 느낌이 왔는지 수술실로 안 들어가려고 발버둥을 칠 때나 마취가 깨면서 열이 잔뜩 올라 볼이 벌겋고, 입술이 바싹 마른 모습으로 축 늘어진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마음이 불에 데인 것처럼 쓰리고 아팠다.
이후로 지금껏 진복이는 별달리 아픈 곳 없이 자란다. 감기에 걸린 적은 몇 번 있었지만, 그 정도야 다른 아이들도 흔한 일이니까. 이제 이 녀석이 곧 말을 시작하려고 그러는지 옹알이가 잦고, 주변 사물에 대한 호기심이 굉장히 많아졌다. 내가 좀 일찍 퇴근을 하면 녀석을 데리고 아파트 주변을 산책하는데, 저 혼자서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느라 정신이 없다. 또 제가 신기하다고 여기는 것에는 어김없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무엇이냐고 묻는다. 온 방안을 운동장처럼 뛰어다니며, 집안의 물건이 제 자리에 있는 걸 두고 보지 못하는 녀석에게서, 그러다가도 제 맘대로 안 되면 온몸으로 소리를 지르는 녀석에게서, 나는 지금껏 이 녀석을 이렇게 만들어 준 세상 모든 존재들에게 머리 숙여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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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 사랑스러운 녀석의 제법 길었던 생존 투쟁은 끝나 가는 것일까? 유감스럽게도 아직은 아니다. 이 녀석이 태어난 지 2년째가 될 즈음인 이번 여름부터는 성장호르몬 치료를 받아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일단 정밀한 검사와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다는 담당 의사의 권유로 병원 예약은 해 둔 상태다. 그렇지만, 지금까지의 시련을 잘 이겨낸 것처럼 우리는 앞으로도 씩씩하게 잘 견디며 두려움 없이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이런 고통을 겪으면서 진복이가 어떠한 고통에도 굴복하지 않는 ‘백절불굴의 사자’로 거듭나리라 믿는다. 시련은 극복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시련은 결국, 사람을 키우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