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는 여자가 이긴다 - 우리 시대 여성을 만든 에멀린 팽크허스트 자서전
에멀린 팽크허스트 지음, 김진아.권승혁 옮김 / 현실문화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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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전에 나는 서프러제트가 단순히 자신이 가져야할 '투표권'을 주장한다고만 생각했다. '남자나 여자나 똑같은 인간이니, 우리에게도 투표권을 줘야한다!'라고만 생각한 거다. 그러나 아, 진짜, 이 여자들이란 얼마나 멋지고 근사한가. 그들은 '참정권'을 주장한다. 참정권을 주장한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자신들의 권리이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빈곤한 사람들을 비롯한 어린아이들, 가족을 부양하는 여자들까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시스템이 너무나 엉망진창이라, 그동안 남자들이 보지 못했던 곳까지 곳곳에 배려어린 시선으로 다른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정치에 개입을 해야만 그동안 남자 정치인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 불평등하며 부조리한 것들을 고쳐나갈 수 있으니까. 책을 얼마 읽지도 않아 이런 게 드러나는데, 그러자 진짜 울컥 감정이 벅차올랐다. 이 여자들은 어떤 선택을 해도 그것이 순전히 '자신만을' 위한 게 아니다, 약자를 위한 선택이다. 게다가 그 참정권을 갖기 위해 싸우는 과정에서 육체적 학대를 감수한다. 콧구멍에 호수를 꽂아서 음식을 강제투입하는 고통까지 견뎌내며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꺾지 않는다. 


올해 읽은 소설들 중에 되게 인상깊었던 게, '로런 뷰커스'의 [샤이닝 걸스]와, '스티븐 킹'의 [별도 없는 한밤에] 였다. 두 소설에서 모두, 자신이 당할(한) 고통 앞에 여자들이 '다른 존재-다른 여자, 자식, 혹은 개-'의 안전을 걱정하는 부분들이 언급된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명이 위험한데, 자신들이 당한 고통도 극심한데, 어떻게 이렇게 다른 존재의 안전을 먼저 걱정하는가. 그 부분이 정말 어마어마하게 놀랍고 대단한거다. 읽으면서도 알 수 있지만, 이는 단순히 소설속의 캐릭터여서만이 아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여자들이 이럴 것이다. [서프러제트]의 여자들이 투표권을 주장하는 이유에서 알 수 있다. 그들은 더 약한 곳에 위치한 사람들을 좀 더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러나 정치권에 있는 남자들-을 포함해 정치권에 있지 않은 남자들조차-은 끊임없이 그들을 방해한다. 방해하고 고문하고 학대한다. 어찌나 잔인하고 치사한지 읽다가 화딱지가 난다. 자기들이 당연히 누리고 있던 것들을 달라고 하는 여자들에게 왜그렇게 모질게 대하는가. 왜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주기를 그렇게나 반대한단 말인가.. 휴....... 서프러제트들의 그 기나긴 싸움이 있어서 종국에는 여성에게 참정권이 생긴다. 마땅히 진작에 이뤄졌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담보로 한 뒤에 실행되었다.



어휴, 이 여자들은 진짜. 너무 좋다.

여자들이 너무 좋아서 너무 좋다 ㅠㅠ

여자들 너무 멋지다 ㅠㅠㅠ

좋아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어젯밤에 트윗에서 영화 [서프러제트]를 보던 중에 한 남성이 옆자리 여성을 폭행했다는 소식을 보게됐다. 그 남자가 애초에 여성에게 폭력을 가할 목적으로 극장에 간건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구멍 두 개인 것들'이라고 욕을 하며 그녀를 때렸다고 했다. 그것은 여성혐오가 맞다. 내가 책 [서프러제트]를 다 읽고난 뒤에 접한 소식이었다. 서프러제트들이 참정권을 주장할 때 남자 정치인들이 그들을 반대했고 그들에게 음식물 강제투입을 허했다. 경찰들은 폭력으로 그들의 시위를 막으려 했고. 그렇게 힘들게 참정권을 얻었지만, 지금 여기에서도 남자가 여자를 때리는 일이 일어난다. 참정권을 주장했던 여자들이 경찰에 잡혀가 감옥에 갇히면 다른 많은 여성들이 항의를 하고 시위를 했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트윗에서는 극장에서의 폭력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항의하고 요구하고 따지고 있다. 여자들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할까. 언제까지 자신이 당연히 누려야 할 것들에 대해 요구하고 항의하고 따지고 그 과정에서 폭력을 당해야 하는걸까...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걸까.





빈민구제원이 되고 나서 깨달은 것은 현행 빈민법은 그 법의 원래 목적을 실행할 수 없게 만드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어린이를 위한 조항에서도 이 법은 문제가 많았다. 그 법의 목적을 제대로 이행하려면 새로운 법률을 만들어야만 한다. 그러나 여성이 투표권을 가질 때까지는 새로운 법률을 만들기가 가능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내가 위원회에서 일할 당시에도 그랬고,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전국의 여성 후원자들이 여러 상황을 개선할 수 있도록 법률을 개정하려고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p.51)

아이들이 자라면서 우리는 참정권에 관해 얘기를 나누었고, 이 운동이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청년들의 자신감에 나는 다소 겁이 나기도 했다. 어느 날 크리스타벨은 "엄마 같은 여성들이 얼마나 오래 투표권을 얻으려고 애써온 건가요?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투표권을 얻을 작정이에요"라고 말해서 나를 놀라게 했다. (p.62)

그때부터 자유당 정부의 유력한 의원이 연설을 하려고 일어설 때마다 `여성에게 투표권을`이라는 깃발을 흔들기로 했고, 그들이 여성들의 질문에 대답할 때까지 한순간도 평화롭게 두지 않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새 정부가 자신들을 자유당이라고 부르지만 여성 문제에 관해서는 보수반동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들이 여성 참정권에 대해서 적대적이므로 그들이 항복하거나 혹은 정권에서 물러날 때까지 싸워야 할 것이라는 점을 인식했다. (p.80)

우리는 참정권에 관한 팸플릿을 많이 준비했고, 회원들은 매일 거리 집회를 열었다. 마음에 드는 장소를 찾으면 한 사람은 종을 울려대고, 다른 사람은 의자를 연단 삼아 연설을 했다. 그러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무슨 일인지 궁금해 발걸음을 멈추곤 했다. 캠페인을 시작하고 나서 얼마 후부터는 종소리가 울리면 사람들이 마법처럼 모여들었다. 사방에서 "서프러제트가 왔다! 어서 나와봐!"라는 외침이 들렸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런던을 누볐다. 청중은 늘 있었다. 무엇보다 여성 참정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청중도 많이 모여들어서, 우리는 대중들의 우호적인 여론을 만들어가며 그들을 일깨우기 시작했다. 거리 집회뿐 아니라 공화당이나 응접실에서도 모임을 자주 가지며 언론에도 많이 노출되었는데, 이는 여태까지의 참정권 운동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다. (p.95)

연설이 끝날 무렵 나는 일어나서 의장에게 말했다. "애스퀴스 씨에게 교육에 대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의장은 애스퀴스 씨를 보았고,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애스퀴스 씨는 부모가 아이들 교육 문제에 의견을 낼 권리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아이들이 받아야 하는 종교 교육 같은 문제에 관해서요. 애스퀴스 씨는 여성이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투표를 통해서 아이들의 교육에 영향력을 행사할 권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이렇게 말하자 관리인이 내 팔과 어깨를 잡고 나가라고 재촉했다. 내가 곧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자 그드은 나를 문간으로 질질 끌고 가 건물 밖으로 던져버렸다. (p.102-103)

런던에서의 첫 번째 해에는 멋진 성과를 거두었다. 우리가 처음 시작했을 때는 회원이 많지 않았지만-신문은 우리를 `가족당`이라며 조롱했다- 이제는 전국에 지부를 결성하고, 스트랜드 가의 클레멘츠 인에 본부를 둔 강한 조직으로 변했다. 우리는 넉넉한 재정 지원도 받게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하원에 참정권위원회를 발족시키는 수확을 거뒀다. (p.114)

나는 남성들이 여성의 도움 없이 여성과 어린이의 보호를 위해 제정한 법률에 대해 특히 반감을 갖고 있다. 빈민구호법 후원자로서, 그리고 출생과 사망 등기사무소의 사무관으로서 경험을 거쳐보니, 이런 법률들이 얼마나 심하게 우스울 정도로, 아니 비극적일 정도로 여성과 어린이를 보호하지 못하는지 알 수 있었다. (p.247-248)

신사 숙녀 여러분, 우리 서프러제트가 유일하게 함부로 다루는 목숨은 자시늬 목숨 뿐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하건대, 우리의 정책은 결코 사람의 목숨을 함부로 위태롭게 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사람의 목숨을 함부로 다루는 것은 우리의 적이 하는 일입니다. 그런 일은 전쟁을 벌이는 남성들에게 맡기겠습니다. 그런 일은 여성들이 취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대중과의 관계를 보더라도,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는 투쟁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정부가 사람의 삶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재산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재산을 통해서 적을 공격할 것입니다. (p.342-343)

우리는 옳건 그르건 현재의 투쟁 방식이야말로 견딜 수 없는 끔찍한 상황을 바꿀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합니다. 며칠 전 런던의 어떤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에 따르면 그의 교구에 사는 결혼한 여성의 60퍼센트가 아이뿐 아니라 남편도 먹여 살려야 하는 부양자랍니다. 여성들이 도대체 얼마를 버는지, 그리고 이런 일이 우리나라 아동의 미래에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주 심각하게 고려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오늘 아침에서야 제게 도착한 공증된 진술서에는 우리나라에서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런던에서 성인 여성뿐 아니라 어린 아동도 빈번히 인신매매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들은 매매되고, 함정에 빠져서는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사회적 지위로 보아 남보다 더 모범을 보여야 하는 사람들-의 부도덕한 쾌락에 봉사하도록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 때문에 우리 여성들이 나서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맞저 싸워 이런 일을 끝장내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p.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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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16-06-27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이야기를 보고 듣고 경험하더라도, 그걸 공감하는 능력(이라고 칭하고 싶습니다)은 여자가 월등한것 같아요.
그리고 공감하는걸로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는 여자들, 깊이 존경합니다.

다시한번 내자리에서 내가 낼 수 있는 목소리를 내고 높여야겠단 다짐을 해보아요.

우리 모두 견딥시다. 아자!!!!!


다락방 2016-06-27 10:42   좋아요 0 | URL
공감하는 능력, 공감하고자 하는 의지 모두 애써서 생긴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해야겠다고, 그렇게 해보자고 스스로 생각하고 결심했고 훈련했기 때문에 가능한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애초에 공감능력 없어` 라고 포기해버리면 정말 그냥 공감능력 없는 사람밖에 안되는 것 같아요. 지식이란 게, 공감이나 배려없이 얼마나 무용한가를 요즘에 많이 생각합니다.

우리 계속 으르렁 거리면서 살아요!

에이바 2016-06-27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프러제트 영화가 반영한 당시 상황에 비하면 과격하다는 페맨도 넘나 온건한 것... 저도 그 트위터 봤는데 굳이 개봉관도 적은 영화, 여성 참정권이라는 주제를 다룬 영화 `관`에 들어와 그런 행동을... 이젠 영화 보는 것도 힘들어요...

다락방 2016-06-27 11:45   좋아요 0 | URL
저도 책 읽으면서 놀란게, 이 여성들이 전혀 과격하지 않았더라고요. 오히려 경찰들과 정치인들에게 당한 폭력이 너무나 끔직했고요. 서프러제트는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요,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몸은 망가질대로 망가지죠. 어휴..

굳이 거길 들어와서 왜 굳이 여자를 때려야만 했을까요? 너무 짜증나서 머리가 다 아파요, 에이바님 ㅠㅠ

rosa 2016-06-27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행히 영화관 목격자들이 많았고 피해자는 절대로 합의하지 않겠다고 하네요. 이번에는 제발 한국 경찰들이 합의 종용하며 가해자 가족에게 피해자 주소 알려주는 일 없었으면 합니다.

다락방 2016-06-27 14:42   좋아요 0 | URL
네 저도 피해자 트윗 보고 있는데요, 진단서 떼서 광진경찰서 제출할 예정이라고요. 아니, 명백히 목격자들이 존재하는데 폭행 `의혹`이라는 기사는 또 뭡니까. 너무 병신같은 기사 제목들 때문에 여러차례 화가 나네요. 휴..

건조기후 2016-06-27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멍이 두 개인 것을 욕설이라고 생각하는 게 좀 짠하더라고요... 배워처먹지못함의 수준이 놀라울 정도예요. 세상에 어쩜 이렇게 그지깽깽이들이 많은지 행태도 날로 진화해서 눈이 다 부시네요 ㅡㅡ

다락방 2016-06-27 16:37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구멍이 두 개라는 욕을 하다니, 그걸 욕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여성의 성 자체를 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대체 저런 생각은 어디에서 온걸까 싶더라고요.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건지...

건조기후 2016-06-27 16:49   좋아요 0 | URL
어쩌다 여자인 것 자체를 욕으로 생각하는 지경이 됐는지, 나이가 40대라던데 그러면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아야 하는 거 아닌가 싶고 이러다 더 큰 일 나는 거 아닌가 싶고... 그래요.

다락방 2016-06-27 16:56   좋아요 0 | URL
뭐랄까, 저 사람을 바꿀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안된다고 재교육을 한다해도 전혀 귀에 닿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그냥 지금도 `여자들은 역시 재수없어` 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 같아요. 앞으로 주먹질보다 더한 폭력을 하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하고요. 건조기후님과 제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네요 ㅠㅠ

블랙겟타 2016-06-28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서프러제트` 영화 볼려고 하는데 개봉하는데가 많이 없더라구요. 그래도 시간내서 한번 볼 생각이에요 ㅎㅎㅎ 그리고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도 읽어봐야겠어요. 그런데 이 영화 보면서 그런사건이 일어나다니..그리고 원래 알고 있었긴 하지만 이 사건을 보도하는 언론의 행태도 참.. 00녀라던가 논란이라 하질 않나.. 영화속 영국이 아닌 오늘날 한국에서도 갈길이 머네요, ㅜㅜ

다락방 2016-06-28 12:14   좋아요 0 | URL
서프러제트는 아마도 씨지븨 단독상영일 거에요. 그래서 다른 극장에서는 상영을 안할거라능 ㅠㅠ

폭력을 휘두른 남성관객도 그렇고 언론도 그렇고, 아직 뭐가 잘못됐는지, 왜 잘못됐는지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갈 길이 아주 멀다고 느껴져요. 멀긴 멀되, 도달하긴 할까요...저는 조금이라도 이전보다 나아지긴 한건지..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ㅜㅜ

Mina77 2016-07-08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여성들이 있었기에 정말 지금의 여성이 있지않았나 생각이드네요. 육체적 힘이 약하다는 이유로 억압과 차별, 각종 폭력, 많은 권리를 박탈당했지만 저런 여성들로 인해 조금씩 여성들이 권리를 찾고있는거같아요. 그리고 정말 불리한 상황에서 이제는 여성지도자가 주목을 받고, 각종 시험에서 여성이 두각을 보이고, 전세계적으로 여성학력이 갈수록 높아지는걸보면 저희 여자들 정말 대단한거같어요. 앞으로는 능력에서 여성우위현상이 더 심화될텐데 그러면 여혐현상이 더 심해지겠지만 여성분들이 이제는 참지말고 맞서 목소리를 내야한다 생각합니다. 여자들 파이팅!

다락방 2016-07-11 10:51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여자들이 이제 참는 걸 멈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애시당초 왜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열등한 존재로 취급받게 된건지 모르겠지만, 너무 오래 그렇게 지내와서 이걸 바꾸려면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릴 거에요. 그래도 지치지 말고 계속 시끄럽게 소리질러야죠. 그래야 제 조카가 사는 세상은 조금 나아지겠죠.. 여자들이 진짜 멋져요! >.<
 
나쁜 페미니스트 - 불편하고 두려워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 사이행성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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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때 내 머릿속에는 페미니스트는 특정한 부류의 여성들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페미니스트라는 사람들에 대한 부정확한 신화를 가슴 깊이 새기고 있었다. 전투적이고 정치적이며 인간으로서 완벽하고 남자를 증오하고 유머가 없는 사람들. 이러한 신화에 속았다. 나는 이런 신화에 속지 않을 만큼 똑똑한 사람이기에 이런 과거가 자랑스럽지 않고 더 이상은 속지 않으려 한다. 나는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정중하게 거절하는 여자가 되고 싶지 않다. (p.375)


나는 페미니즘을 부인했다. 이 운동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페미니스트라는 소리를 들으면 이런 말로 들렸다. "너는 성깔 있고 섹스 싫어하고 남성 혐오에 찌든, 여자 같지 않은 여자 사람이야." 이러한 우스꽝스러운 캐리커처는 페미니즘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들, 페미니즘이 성공하면 잃을 것이 가장 많은 사람들에 의해 조작된 이미지에 불과하다. 과거에 사람들 앞에서 나는 페미니스트가 절대 아니라고 했을 때를 떠올리면 내가 얼마나 무지했는지 떠올라 부끄러울 뿐이다. 그때 느꼈던 두려움들이 얼마나 부질없었는지 생각하면 또다시 부끄럽다. 결국 내가 외면받을 것이란 두려움이었고, 내가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며 문제나 일으키는 사람으로 보일 것이란 두려움이었으며, 이런 나를 이 사회나 친구들이 받아주지 않을 것이란 두려움이었다. (p.15)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를 읽으며 가장 고마웠던 점은, 나(독자)에게 '잘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몇해전만 해도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 한 명이었다. 당시만해도 내게 페미니스트란 '과격하고 공격적인'여자였으니까. 그러나 페미니즘에 대해 알면알수록 '내가 잘못 알고 있었구나'라는 걸 깨달았고, 그러자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일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부끄럽다면, 내가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지만'이라고 말했던 바로 그 과거였다. 아무것도 모를때는 선입견이나 편견만으로 '난 싫어!'하고 말할 수 있지만, 신기하게도 알면 알수록 내가 얼마나 몰랐던 게 많은지, 그리고 얼마나 모르는 게 많은지를 알게 된다. 페미니스트에 대한 책을 쓴 록산 게이마저도 페미니스트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었고, 이런 과거를 자랑스럽지 않게 여겼다 고백했으니, 나도 고백한다. 나 역시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지만' 이라고 생각하고 말했던 나의 과거가 자랑스럽지 않다. 나 역시 정중하게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거절하는 여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페미니즘에 대해 알면알수록 내 자신안의 모순 때문에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특히 연애중에는 더했는데,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스스로를 칭하고, 애인에게도 그렇게 말하고, 애인 역시 나로 인해 페미니스트에 대해 더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순간순간 애인에게 수동적인 여자가 되고, '예쁨 받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해지고, '말 잘듣고 싶다'는 어찌보면 강아지같은 욕망이 생기기도 하는 거다. 이래도 되는걸까, 내가 지금 이렇게 이 남자를 떠받들어도 되는걸까, 페미니스트가 그래도 되는걸까, 하는 내적갈등 때문에, 아, 그냥 페미니즘에 아예 관심 갖지 말고 살까, 하는 생각도 수차례 했었다. 무엇보다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스스로 말하고 다니니, 그에 맞게 '제대로된', '귀감이 되는', '언행이 일치하는', 그런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었던 거다. 또한 다른 페미니스트들이 실수하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는, 아, 동성을 사귀는 것이 모순되지 않는 페미니즘을 실행하는 길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렇지만 나는 남자가 좋아 ㅠㅠ 남자의 큰 손이 좋고, 단단한 팔과 가슴이 좋고, 포옥 안기는 게 좋아 ㅠㅠㅠ 가끔 마초가 되어 나를 뒤흔들때는 가슴이 떨리기도 해. 어떡하지 ㅠㅠㅠㅠㅠㅠㅠ 아 힘들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렇지만 역시 페미니즘을 더 공부하고 알게 되면서 나야말로 페미니즘에 대해서 어느 하나만의 정답을 정해두었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누구의 책이었지? 그런 구절이 나오더라. 정확한 워딩은 아니겠지만, '철학에 대해서도 수많은 철학자들이 다른 얘기를 하는데, 왜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느냐'라는 뉘앙스의 구절이었다. 그러게. 게다가 왜 내가 다른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규정한거지? 왜 내가 나를 가둔거지? 얼마전에는 친구가 새로운 페미니즘 언어를 배웠다며 내게 이렇게 얘기해주었다.


'당신에게는 대답할 의무가 없다'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오해나 무개념인 말과 글을 접할때마다 '그게 아니다'라고 대응하는 건 몹시도 피곤한 일인데, 페미니스트라면 일일이 대꾸해야 하는 게 아닌가, 했던 내게 정말이지 신세계로 이끌어주는 언어였다. 그러게. 내가 왜 다 대답하려 했을까. 나는 이렇게 점점 더 자유로워지고 해방을 맞이하는데, 록산 게이의 이 책은 그 해방감에 쐐기를 박아주었다. 내 자신을 더 놓으라고, 더 자유로워지라고, 인간은 원래 모순적인 존재라고. 아아, 고마워요, 록산 게이! 나는 이제 해방감을 느낍니다. ㅠㅠ



페미니즘이 결함이 있는 이유는 이것이 인간이 만든 운동이고 인간이란 태생적으로 결함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도대체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페미니즘에 비이성적으로 높은 기준을 세워 놓고 페미니즘에게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있어 달라고, 혹은 언제나 최선의 선택을 내려 달라고 조르고 있는 것만 같다. 페미니즘이 우리 기대에 못 미치면 페미니즘 이라는 이름 아래 행동하는 인간들에게 결점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페미니즘 자체가 잘못되었다며 정죄한다. (p.12-13)



나를 따라다닐 나쁜 페미니스트라는 꼬리표를 환영한다. 왜냐하면 나는 인간이니까. 그래서 엉망진창이니까. 누군가의 본보기가 되려고 애써 노력하지 않는다. 완벽하려 하지 않는다. 내가 모든 해답을 갖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전부 옳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내가 믿고 있는 것을 지지하고, 이 세상에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내 글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면서도 온전히 나 자신으로 남고 싶을 뿐이다. 핑크색을 사랑하고 섹스를 좋아하고 가끔은 여성을 끔찍하게 표현한 노래에 엉덩이를 흔들기도 하고 때로는 정비공이나 수리 기사에게 마초 대접을 해주면 내게 이익이라는 것을 알기에 일부러 더 멍청한 척을 하는 이런 여자로 남고 싶을 뿐이다. (p.14)



굳이 모델을 찾지 말고 각자가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장 보고 싶은 페미니스트가 되어 보면 어떨까? (p.18)



일전에도 말했지만,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좋은건, 그동안 내가 되어보지 못했던 소수자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는 거였다. 또한 내가 무지했음을 알게 되기도 한다. 이런 작가가 있어서 고맙다, 라고 생각했던 '캐서린 스토킷'의 『헬프』에 대한 부분을 읽을 때는 진짜 얼굴이 화끈거렸다. 록산 게이는 그 책과 영화속에서 흑인 여성들은 백인들을 돕는 조력자로만 나왔음을 지적한다. 흑인 인권운동의 중심은 흑인이었는데, 이 책속에서는 백인이 그 역할을 하고 흑인이 도와주는 걸로만 나온다고. 나는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동안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보지 못했다. 영화는 재미없었지만, 그건 그냥 재미 없어서 재미 없었던 거였지, 그 이유가 '흑인이 조력자로 나와서'가 아니었던 거다, 내게는. 내가 그 영화를 보는 시선이, 록산 게이가 보는 시선과는 달랐다. 록산 게이는 영화  『헬프』를, '우주를 그리고 있는 공상 과학 영화'(p.294)라 칭한다. 그리고 '마르타 사우스게이트'라는 사람의 리뷰를 인용한다.


"사실 역사의 중심은 흑인이고 백인이 '도우미'였다. 흑인 인권 운동의 기획자, 지도자, 운동가, 가장 밑바닥에서 활동한 노동자는 백인이 아니라 아프리카 아메리칸이었다." (p.294)


간혹 페미니스트 여성들에게 페미니즘이란 무엇인지 훈계하고 조언하는 남자들을 맞닥뜨리게 된다. 한 번도 여자로 살아본 적이 없으면서, 거리를 걷거나 택시를 탈 때, 밤늦게 집에 돌아갈 때나 만원 버스와 지하철 안에서 두려움을 느껴본 적이 없으면서, 내 돈 주고 내가 사는 것들에 대해 김치녀나 된장녀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으면서, 페미니즘은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똑바로 하라고 말한다. 페미니즘을 지지한다고 하는 남자들조차도 그렇다. 열린 사고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던 남자들도 그렇다. 그럴 때 나는 그 똑똑한 남자들의 한계를 느꼈다. 록산 게이가 책과 영화로 『헬프』를 만났을 때, 그때 느꼈던 감정이 아마도 조언하는 남자-엠마 왓슨에게 편지쓰는 고종석이라든지-를 만나는 여자의 느낌과 비슷했을 것 같다. 



나는 나 자신을 진보적이고 마음이 열린 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에게도 치우친 부분이 있을 것이고 《헬프》를 읽고 영화를 보면서 내가 얼마나 편향되어 있었는지 아프게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정말 심각한 문제는 《헬프》가 백인 여성에 의해 쓰였다는 사실이었다. 시나리오는 백인 남성들이 썼고 백인 남성이 연출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난 생각한다. 그 사람들이 어떻게 감히? (p.302)


록산 게이의 내적 갈등이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작가도 감독도 연출도, 흑인과 그들의 인권에 '호.의.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호의적인' 시선은 한계가 있다. 그런 시선으로 책과 영화를 썼어도, 흑인 인권운동에 중심에 백인을 두었으니까. 


나는 어떤 남성들은 페미니스트들을 지지한다는 것을 안다. 또한 페미니스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도. 진심으로 그 입장이 되어보려고 노력하는 남자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마찬가지로 백인들 중에서도 흑인의 인권에 더 많이 귀를 기울이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많이 깨지고 부딪치면서, 넘어지면서 내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듯이, 그들도 그럴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한 존재이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제대로된 길이란 게 있다면, 그 길로 가기만 한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가 없다. 싸우기도 하고 혼나기도 하면서 나아가야 한다. 록산 게이의 이 책은 나를 다독이기도 했지만, 가끔은 혼나는 기분이 들게도 했다. 그게 나쁘지 않았다. 아, 이렇게 또 하나 배우네, 하는 기분이었다.



별을 하나 뺀건, 비만한 사람에 대해 차별적인 시선을 갖는 게 나쁘다는 얘기를 하면서, 뭐랄까, 비만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것처럼 말한 게 좀 걸려서다. 물론 어떤 내면적인 상처로 식욕을 멈출 수 없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냥 먹는 게 좋아서 먹는다. 맛있어서 먹는다. 매 끼니가 매우 소중하다. 먹으면 행복해서 먹는다. 뭐, 그렇다는 거다.




좋은 독서였다. 이 책을 끝내고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를 시작했는데, 이건 얼마 읽지도 않고 또 울컥울컥 했다. 좋은 독서가 될 것 같다. 아 진짜 책 읽는 거 너무나 좋다! 내가 몰랐다는 걸, 모르고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게 너무 좋다!!



얼마전에 트윗에서 누군가 '아니, 박유천인데 그게 무슨 강간이냐' 라는 뉘앙스의 글을 봤더랬다. 잘생긴 유명 연예인인데 땡큐지, 뭐 이런 뜻이 읽혔는데, 휴, 마지막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이 구절을 들려주고 싶다. 



우리 문화가 너무나 오랫동안 여성을 함부로 다루어 온 나머지 유명 연예인의 관심을 얻기만 한다면 학대를 당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된 이 현실에 눈물이 난다. 우리 사회가 당신을 망쳐놓은 것이다. 전적으로 그렇다.

우리가 당신을 망쳐 놓았다. 크리스 브라운이 여자 친구를 죽기전까지 때리고도 고작 집행유예를 받고 2012년 그래미 무대에 한 번도 아닌 두 번이나 올라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가 그 시상식에서 올해의 베스트 R&B 앨범 상을 받게 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에게 재기할 권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나쁜 남자 페르소나를 자랑스럽게 게시했고 대중들을 비웃었다. 그는 언제든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팝 음악계 악동이다. 그에게는 그것이 변명이 아니라 설명이다.

우리가 당신을 망쳐 놓았다. 찰리 쉰이 켈리 프레스톤에게 '실수로' 총을 쏘고, 섹스를 거부한 UCLA 학생의 머리를 때리고, 전 아내 데니스 리처드를 죽이겠다고 협박하고, 전 아내 브룩 뮐러에게 칼을 휘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계속 영화에 출연시키고 텔레비전 쇼에 출연시켜 돈을 찍어 내게 만들어서 그렇게 되었다. 우리가 당신을 망쳐 놓았다. 범죄를 저질러 30년 이상 미국 입국이 금지된 로만 폴란스키에게 아카데미 상을 두 번이나 주었기 때문이다(13세 소녀에게 술과 약물을 먹여 성관계를 함). 우리가 당신을 망쳐 놓았다. 마돈나를 폭행하고도 계속해서 비평가들의 극찬 속에 영화를 찍고 두 번이나 아카데미 상을 받은 숀 펜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유명한) 남자가 여자를 함부로 대하고도 법적, 직업적, 개인적으로 아무 문제없이 살도록 내버려 두면서 당신의 판단력을 흐리게 해버렸다. 

남자들이 그럴 수도 있다고 한 번도 아니라 여러 번 우리는 당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유명한 남자건, 악명 높은 남자건, 전혀 유명하지 않은 남자건 남성이 여성을 학대할 수 있다고 믿게 내버려 두었다.(p.45-46)








이 책의 제목 `나쁜 페미니스트Bad Feminist`의 `bad`는 나쁘지 않다. 여기서 `나쁜`은 도덕적 의미가 아니라 `부족한`, `못 미치는`, `완벽하게 훌륭하지는 못한`이라는 뜻으로 읽힌다. 다시 말해 "나는 부족한 페미니스트입니다"라는, 자신을 상대화하는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 《나쁜 페미니스트》는 가부장제 사회가 강요하는 착한 여자 콤플렉스에 대한 저항이자, `우리`가 서로에게 요구하는 `정치적으로 올바른`페미니즘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고, 동시에 규범화된 페미니즘은 불현하지만 자기만의 신념은 숨기지 않겠다는 `나의 페미니즘 My feminism`이다. (추천사, 정희진, p.6)

나는 언제나 모범생이었다. 성적표에는 항상 A가 직혀 있었고 반에서 늘 1등이었다. 숭종적인 아이였다. 어른들에게 공손했고 동생들에게도 착한 누나였고 주일 학교에도 다녔다. 이런 내가 뒤에서 부끄러운 짓을 하면서도 우리 가족을 속이고 모든 사람을 속이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착한 사람이 되는 건 나쁜 짓을 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다. (p.62)

어떤 일에서 살아남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강하다는 뜻은 아니다. (p.64)

2011년 아이오와 의회에서 레즈비언 커플의 아들 자크 왈스는 두 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이야기했다. 이 19세의 똑똑한 남학생은 아이오와 동성 결혼 합법화를 지지하기 위해 연설했다. 그의 태도는 열정적이었고 연설에는 호소력이 있었으며 이 두 어머니에게 얼마나 자랑스러운 아들이었을지 눈에 선했다. 이 동영상이 전국적으로 퍼졌고 화제가 되었다. 그 영상을 볼 때마다 감동하지만 화도 난다. 왜 퀴어들은 남들은 당연하게 갖는 권리를 위해 항상 이렇게 온몸을 내던져 싸워야 하나? 이성애자 부모의 자녀 중 어느 누구도 법원에 가서 자기의 부모들이 훌륭한 시민이었다고 설득할 필요는 없다. (p.161)

Qui tacet consentire videtur. 라틴어로 "침묵은 동의를 의미한다." 라는 뜻이다. 우리가 아무 말을 하지 않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나를 향한 이런 범죄를 용인하는 것이 된다.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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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vis 2016-06-23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한혜정교수님의 ˝자기발화는 자기해방이다˝말이 생각납니다.그래서 락방님 글 늘 기다려요^^고맙습니다.

다락방 2016-06-23 11:28   좋아요 1 | URL
우앙. 제 글을 늘 기다리신다니, 고맙습니다! 열심히 읽고 열심히 쓸게요. 열심히 생각하고 고민할게요. 우리 계속계속 오래오래 만나요! :)

루쉰P 2016-06-23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여자를 정말 사랑해요 보면 아름답고 지켜주고 싶어요 아껴주고 싶고요 전 사랑하는 여자의 하인으로 평생 봉사하며 살고 싶어요 여성에 대한 폭력적인 사건이 나오면 정말 울컥해요 여자는 정말 사랑스러워요

다락방 2016-06-23 11:31   좋아요 0 | URL
루쉰님, 궁극적으로는 루쉰님이 지켜주려고 하지 않아도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에 루쉰님 글 읽으면서 루쉰님은 자신의 어떤 과거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또 앞으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려하지 않는 사람이란 생각을 했어요. 우리는 더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함께 노력하도록 해요.

2016-06-23 15: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6-06-23 15:22   좋아요 0 | URL
뭐가 그리 좋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좋다니깐 좋네요. 좋다고 해서 다시 읽어봤는데 그냥 뭐 평소와 다름없는 글이구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hellas 2016-06-23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을 꺼내자면 끝도 없고 골치아픈데다 괜히 나만 전투적인 여자가 되는 것 같아 참고 참고 또 참고 무시하고 무시하던 지난 일들이 떠오르네요. 예쁨받고 모나게 보이지 않을려던 어린 나를 돌이켜 생각할때마다 더 화가 나기도 합니다. 언젠가부터 골치가 아프더라도 남들이 날 쌈닭으로 몰아부치더라도 할말하고 들이받고 그렇게 살았더니 피곤은 해도 비참하거나 불행하진 않습니다. 더 이야기하고 더 행동해야지 후진적 남성중심문화가 개선되겠죠. 이 책도 읽어봐야겠네요. 요즘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책이 많아져서 너무 좋아요:)

다락방 2016-06-23 17:56   좋아요 1 | URL
아, 헬라스님. 제가 리뷰 내내 `과격한`으로 사용했지만 `이게 아닌데, 이거 말고 다른 표현 있을텐데` 싶었는데, `전투적`이란 단어가 그거네요. 네, 저는 전투이기만 한걸로 페미니즘을 오해해서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야`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이제는 제가 무지했던 시절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ㅠㅠ

저는 원래 좀 잘 으르렁 대는 스타일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일일이 지적하고 따지고 하는 건 정말 피곤하더라고요. 그렇지만 헬라스님 말처럼, 더 이야기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더 이야기하고 행동하기 위해서 더 공부도 해야겠고요. 페미니즘 책을 읽는 일은 그래서 정말 즐거워요. 아, 이렇게 또 하나 배운다, 싶어서 너무 좋아요. 자꾸자꾸 페미니즘 책 나오는 것도 너무나 좋고요. 계속 계속 읽고 쓸거에요. 우리 함께합시다!

hanalei 2016-06-24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안 보셨다면 제인 프리드먼의 ˝페미니즘˝을 추천하고 싶군요.
비투비21 에서 번역판 나와 있습니다.
이 계통에서는 basic으로 통하는가 봅니다.

다락방 2016-06-24 09:37   좋아요 0 | URL
오, 추천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 절판.. 이네요. 음... 이렇다고 가만있을 제가 또 아니지요. 그래서 저는 출판사에 근무하는 친구에게 이 책을 니가 좀 어떻게 해봐라, 재출간 진행해다오, 요구해놨습니다. 으하하하핫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ㅜㅜ

2016-06-24 1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7 08: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가 원하는 시간
파비오 볼로 지음, 윤병언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4년 1월
평점 :
품절


왜 이 책을 샀는지 역시 모르겠지만, '파비오 볼로'라는 이름을 보는 순간, 이 작가의 작품을 읽어본것 같은데, 하고 저자의 약력을 보니 [아침의 첫햇살]이 이 작가의 책이더라. 그렇다면 이 책은 아주 좋지는 않겠지만 뭐 딱히 나쁘지도 않은 책이겠구먼, 하고 읽기 시작했는데...재미가 없었고......그래도 오랜시간 등돌려 지냈던 아버지와 화해하는 과정을 보고 싶었고, 헤어진지 1년쯤된 사랑했던 여자의 마음을 다시 자신에게로 돌리는 게 정말 가능한지 보고 싶었기 때문에 끝까지 읽고자 했는데...이야...세상에...병맛도 이런 병맛이 없다.


아버지가 변하고 움직이길 바랐으면서 막상 아버지가 감정을 표현하는 순간 어쩔줄을 모르는 것도 찌질해보였는데, 이새끼가, 헤어진 애인이 한달 반뒤에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1년만에 다시 전화를 걸고, 그녀를 사랑했었는데, 진짜 사랑했었는데 놓쳤다고 아쉬워하면서, 도대체 어떤 남자랑 결혼하나, 그 남자의 회사 앞에서 기다리다 그 남자를 보기도 한다. 아 진짜 짜증난다. 사랑한다고 여자가 말했을 때는 제대로 사랑도 못했으면서, 이제 자신 안에 그녀에 대한 사랑을 스스로 깨닫고서 하는 짓거리는 스토커 짓이다. 사흘 내내 여자 집앞에서 기다렸는데 여자를 만날 수 없자 '그녀는 그랑 동거를 하나보다' 이런 생각을 하는데, 와, 내가 여자였으면 무서워서 울었을 뻔. 이 작가의 전작 [아침의 첫햇살]을 읽을 때는, 어쩌면 남자 작가가 이렇게 여성의 섬세한 심리를 잘 그렸을까, 감탄했던 기억이 나는데, 남자는 병신으로 그려놨네. 게다가 마지막에 우연히 옛 연인을 마트에서 마주치고 자신의 집으로 가서 아이스크림 먹자고 조를 때부터 뭔가 짜증났는데, 그 집에 가서 함께 커피를 마시고 집에 돌아가겠다는 여자에게 나는 언제나 너만을 사랑했다가 졸 고백한다. 너무 무서웠다. 여자는 자신이 곧 결혼을 할거고, 너의 이 고백은 너무 늦었다고 하는데, 남자는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자신에게 돌아오라고 오천번 얘기하고, 그녀에게 키스를 시도한다. 여자도 키스를 거부하지 않아 그들은 섹스에 이르게 되는데, 여자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굳게 믿는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라고 계속 애원하고, 여자가 말해주지 않자 뺨을 때린다.


막판에 토나오는 이야기였어..



"날 보내줘……."

"날 사랑한다고 얘기해."

"그만해. 날 내버려둬. 난 네가 미워. 밉다고 그랬잖아."

나는 그녀의 뺨을 향해 손바닥을 날렸다.

"사랑한다고 말해."

"그만해……. 난 널 사랑하지 않아. 난 네가 미워."

나는 다시 그녀 안으로 들어가려고 시도했다. 그녀의 다리가 열리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 번 따귀를 날렸다.

"다리 벌려."

"제발 그러지 마!"

또 한 번 따귀가 날아가고 다시, 그리고 또다시……. 어느 순간엔가 그녀가 저항을 포기했다. (p.380)



결국 여자는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참..좋기도 하겠다. 뺨을 날리고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서.

여자는 남자를 사랑했었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그와 사랑하는 동안 충분히 노력했었고, 자신의 감정을 토로했었다. 그러나 남자는 그녀를 붙잡지도 않았었다. 이제 다른 사람과 살겠다고 자신의 미래를 결정한 그녀를, 한달반뒤에 결혼하겠다는 그녀를, 집에 보내는 대신 나는 너를 사랑해, 너도 나를 사랑하잖아, 윽박지르는 새끼를 보노라니.. 진짜 구역질이 난다. 참, 이걸 뭘 보자고 끝까지 읽었나 싶다. 다른 남자랑 결혼하겠다는 여자한테 계속 자기랑 살자고 말하는 남자라니...있을 때 잘할것이지....... 어휴.. 왜 남자랑 연애를 하는 것도 힘들고 헤어진 뒤에도 힘들어야 되는걸까. 헤어진 뒤에도 이렇게 다른 남자 있는 거 뻔히 알면서, 아니 아니까 더 미쳐가지고, 연락하고 찾아가고 기다리고 .. 게다가 사랑한다고 울부짖고 너도 나를 사랑하잖아, 같이 살자, 이런 얘기를 하는 남자라니. 대체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거지? 어디서부터 잘못된거야?


뺨까지 때린 남자가 또 어떤 행동을 할지 어떻게 아나, 여자가 집으로 돌아가 접근금지 명령 같은 거 신청하고 스토커라고 경찰에 신고했으면 좋겠다. 개새끼. 헤어지고 나서까지를 걱정해야 하다니. 아, 사는 거 너무 힘든 것 같다. 저런 놈을 사랑했었다니. 한숨만 난다.



기분이 너무 나빠서 오늘 먹을 스테이크랑 와인만 계속 생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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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16-06-17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친 ㅅㄲ 네요!
제가 읽고 욕했던 필용이 보다 몇배 더 썩은 놈

루쉰P 2016-06-18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짜증나 날도 더운데 짜증나 토욜인데도 알바하고 있느데 짜증나 ㅋ 정말 지저분한 새끼에요 제기랄 기분 더러워졌어 주성치를 생각해야지

singri 2016-06-18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 ㄱㅅㄲ 네요 . 수박 18통 ㅡ
 
별도 없는 한밤에 밀리언셀러 클럽 142
스티븐 킹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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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런 사람을 보고 이야기꾼이라고 하는구나, 라고 나는 스티븐 킹의 이번 소설을 보면서 생각했다. 출근하면서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내가 내릴 역을 놓칠뻔했다. 잠깐 싸한 기분에 고개를 들어보니 양재에서 문이 열려있더라. 오오, 잽싸게 책과 가방을 들고 후다다닥 지하철 출입문으로 향했고, 그 잠깐동안 '나는 문에 끼일지도 몰라'라고 생각해서 쫄았다. 그러나 문은 좀 오래 열려 있었고 나는 무사히 내렸다. 이게 다 스티븐 킹 때문이야! 라고, 스티븐 킹을 원망했다.


일전에 『돌로레스 클레이본』을 읽으면서도 '아 이래서 사람들이 스티븐 킹, 스티븐 킹 하는구나' 했더랬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왜 그의 소설이 그렇게나 많이 읽히는지,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지 알겠더라. 이야기꾼이다, 천상 이야기꾼이야.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고, 게다가 스티븐 킹은 쓸데 없는 얘기를 하지도 않는다. 이야기 구석구석 할 말을 깔아 놓았다. 이번 책, 『별도 없는 한밤에』는 총 네 편의 이야기가 실려있는데, 하나같이 다 기가 막혔다. 어떻게 그런 소설을 쓰게 됐는지, 영감이 떠올랐던 한 순간의 장면이나 기사들을 소설의 끝에 써놓았는데, 어쩌면 이야기꾼이라는 건 타고나는 게 아닌가 싶더라.



<1922> 는 가장 처음에 실린 소설이다. 한 남자가 유산으로 많은 땅을 물려받은 아내와 의견의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그런 아내한테 짜증이 나서 '아내를 죽인다'. 아내는 말하는 폼이 상스럽고 그래서 열네살의 아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기도 했다. 남편과 자주 싸웠다. 그리고 이 시골이 아닌 더 넓은 곳으로 가고 싶어했고, 남편은 이 시골에 머무르고 싶어했으며, 이에 자주 말다툼을 했고, 남편은 '아내를 죽였다'. 남편과 아내가 의견이 안맞아 싸웠는데, 남편이 아내를 죽였다. 그는 아들에게 '네 엄마를 죽이는 걸 도와달라'고 말했고, 아들이 보는 앞에서 엄마의 목에 칼을 댔다. 그리고 죽은 그녀를 집의 우물 안으로 던져버린다. 아내의 시체를 커다란 쥐가 와서 뜯어먹는 것까지 목격한다. 그가 아내를 죽인 사실은 드러나지 않았고 그가 아내의 살해범으로 잡히진 않았지만, 아내를 죽인 그가 평온하게 잘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내를 죽인 후 그의 삶은 엉망진창이라고 말하는 것조차 아까울 정도로 지독해진다. 어쩌면 그의 주변에 '여자를 죽인 남자'를 반드시 잡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범죄가 감춰질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아내의 실종을 조사하러 온 마을의 보안관은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자네도 이미 알겠지만, 나는 직감만 믿고 찾아온 게 아니야. 부부 사이의 문제야 두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지. 당연한 거 아닌가? 성서에도 나와 있잖아, 남자는 여자의 머리이니 여자가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남편에게 배워야 한다고. 고린도전서 말씀이지. 성서가 내 보스라면 난 성서 말씀대로만 행할 거야. 그러면 인생도 참 단순해질 테니까." (p.85)



"자네도 알겠지만, 여자들하고는 가끔 입이 아니라 손으로 대화를 할 필요가 있어. 그래야 정신을 차리거든. 세상에는 흠씬 얻어터져야 고분고분해지는 여자들이 있어. 그러니 잘 생각해 봐." (p.95)



저런 보안관이 엄청나게 수사에 집중해 남편이 범인임을 알아냈다해도, 저런 분위기에서 남편에게 어떤 벌이 내려지게 됐을까? 그리고.. 성서에 정말 저렇게 나와있는 걸까? 남자는 여자의 머리라고? 대체 어떤 남자들이 여자의 머리일까? 왜 성서는 그렇게 말했을까? 알면알수록 성서는 신기한 것 투성이구나. 언제 한 번 정독해봐야 겠다. 어쩐지 반박할만한 많은 문장들이 그 안에 있을 것만 같다. 


소설 속에 임신한 소녀가 등장하는데, 이 소녀는 이런 말을 한다.



"보면 알겠지만, 내가 문제가 좀 있거든. 난잡한 계집애라나 뭐라나! 남자 친구는 도망쳤어. 걔도 난잡한 사내놈인데, 그 자식 욕은 아무도 안 하는 거 있지! 그래서 우리 꼰대가 날 감옥에다 쳐넣은 거야, 거긴 펭귄들이 지키는 감옥인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세상에! 꼰대가 누구겠어, 우리 아빠지! 펭귄은 수녀복 입은 할망구들이고!" (p.179)



남자와 여자가 섹스를 했는데 여자가 임신을 했고 남자가 도망쳤다. 여기서 왜 갇혀야 하고 난잡하다고 욕먹어야 할 게 그저 여자 뿐인걸까. 게다가 남자친구의 아이를 임신한 또다른 소녀 하나는 학교에서 공부도 잘하고 앞으로 공부하고 싶은 것도 있는, 밝은 미래를 꿈꿔왔는데, 임신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하고 그 상황에 주저앉게 된다. 



섀넌은 눈보라 속으로 간신히 몇 걸음을 옮기고 더는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삼각법을 할 줄 알았던, 그래서 어쩌면 오마하 사범학교 최초의 여자 졸업생이 될 수도 있었던 그 소녀는, 어린 연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말했다.

"자기야, 나 더는 못가겠어. 땅에다 눕혀 줘."

"아기는 괜찮아?"

"아기는 벌써 죽었어. 나도 죽고 싶어. 아파서 더는 못 참겠어, 너무 아파서." (p.190)



남편이 아내를 죽이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 일어나고, 그 모든 일들은 비극이다. 아내를 죽인 다음에야, 여러가지 불행들이 닥치고 또 닥친 다음에 '내가 아내를 죽이지 않았다면 이러지 않았을 텐데' 해봐야, 아내는 이미 죽었다. 남편이 죽였다. 불행한 사건들만 닥쳐오는 게 아니라 남편 스스로도 불행해진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빅 드라이버>에서는, '여자가 남자를 죽인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여자는 남자와 다투었다거나 남자가 자신을 화나게 했더나거 자신을 무시해서 충동적으로 죽인 게 아니다. 그녀는 자신을 강간한 남자를, 살해한 남자를 죽인다. 강간범은 여자를 죽였다고 생각했지만, 여자는 간신히 '살아남았다'. 강간범이 자신의 시체를 던져 버린 곳에서, 그녀는 깨어나,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들의 시체가 그 곳에 더 있음을 자신의 눈으로 보게 되고, 만약 그 강간범을 살려둔다면, 이 곳에서 다른 여자들이 또 강간당하고 살해당할 것이라는 걸 짐작하게 된다. 그녀는 자신이 강간당한 여자임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진 않았다. 


《뉴욕 포스트》같이 저속한 신문들은 테스의 10년 전 사진을, 즉 뜨개질 클럽 시리즈가 처음 출간될 무렵의 사진을 실을 것이 뻔했다. 그때 테스는 이십대 후반이었기에 짙은 금발 머리를 길게 길렀고, 미끈한 다리를 뽐내려고 짧은 치마를 즐겨 입었다. 게다가 그 시절에는 저녁에 외출할 일이 있으면 뒤꿈치 부분이 끈으로 된 하이힐을 신곤 했는데 어떤 남자들은 그 구두를 '남자 꼬시는 신발'이라고 불렀다(물론 그 거인도 예외일 리 없었다.). 테스가 이제는 나이를 열 살이나 더 먹었고 몸무게도 9킬로그램이나 늘었고, 성폭행을 당할 때 거의 촌스러울 정도로 단정한 정장 차림이었다는 사실 따위는 신문에 나올 리가 없었다. 그런 세부 사항은 삼류 신문들이 좋아하는 이야기와 어울리지 않았다. 기사의 문장 자체는 점잖을지도 모르지만(행간에는 선정적인 분위기를 살짝 흘릴 수도 있겠지만), 사람들은 함께 실린 테스의 젊은 시절 사진에서 진짜 이야기를 읽을 것이다. 아마도 인류가 바퀴를 발명하기도 전에 만들어졌을 이야기를. 여자가 야하게 하고 다녔네……당해도 싸지, 뭐. (p.271-272)




그래서 경찰에 신고를 하진 않으려고 했는데, 그냥 뒀다가는 또 다른 여자들이 강간당하고 살해당할 걸 생각하니 그대로 둘 수가 없었던 것. 그래서 '여자는 강.간.범.을 죽인다'.


몇차례나 강간당하고 두드려맞고 스스로도 죽었다고 생각한 상황에서 깨어난 여자는, 어떻게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온 몸의 힘을 끌어모은다. 



또다시 의식이 흐려지려고 하자 테스는 손으로 자기 뺨을 후려쳤다. 일단 집에만 도착하면, 프리츠에게 밥을 주고 침대에 눕기만 하면(문을 모조리 잠그고 불을 모조리 켠 후에), 기절 같은 건 원 없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장은 그럴 수 없었다. 결코, 절대로, 맹세코. 당장은 계속 걸어야 했고, 차가 다가오면 숨어야 했다. (p.268)



아.. 몇 번이나 기절하고 살아남기 위해 애를 쓰면서 그녀가 하는 생각이라는 것이, 집에 돌아가서 고양이 밥을 줘야 한다는 거였다. 아, 이 여자들은 정말 얼마나 위대한지. 자신의 고통과 아픔과 두려움앞에 다른 존재를 걱정하고 염려한다. 남자가 무참하게 여자를 짓밟을 때, 여자는 그 상황에서도 다른 존재를 신경 쓴다. 자신이 아니면 밥을 먹지 못할까봐 걱정되는 존재를. 아아 진짜.. ㅠㅠ 눈물이 난다. 


또한 이 소설에서 스티븐 킹은 강간당한 여자가 테스 하나뿐만이 아님을 말한다. 많은 여자들이, 대부분의 여자들이 강간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드러내준다. 그녀의 복수를 알고도 입을 다물어준 조력자 역시 십대시절에 성폭행을 당한 적이 있다. 의붓아버지에게 여러차례. 얻어 터지고 맞고 강간을 당한 피해자들이 그것을 바깥으로 드러낼 수 없이 살아간다.



사람들은 두들겨 맞은 여자를 우습게 봤다. 특히 금요일 밤에는 더더욱. 아가씨, 누구한테 그렇게 얻어터진 거야? 뭘 잘못했길래? 남자한테 그 정도로 얻어터졌으면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정도는 알 거 아니야?

그 생각을 하니 오래전 어디선가 들었던 농담이 떠올랐다. 미국에서 해마다 30만 명이나 되는 여자들이 얻어터지는 이유가 뭔지 알아? 왜냐면 여자들이……도대체가 …… 말을 들어 처먹질 않거든! (p.281)



그래서 여자는 자신이 스스로 알아서 강간범을 응징한다. 어두운 물속에서 썩어간 다른 여자들의 시체를 생각하며 그녀는 그 모두의 복수를 하면서 동시에 앞으로 일어날 성폭행을 막았다. 만약 내가 그녀의 복수를 알았다면, 그래서 그녀가 남자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나 역시 그녀가 사람을 죽였다고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그런 생각도 해보았다. 세상에 성폭행범만 골라서 응징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성폭행 하지마, 강간하지마, 라는 말을 들을 생각도 안하는 남자들이라니 직접적으로 두려움을 안겨주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강남역에 포스트잇 붙이는 걸로 그렇게 빼애액 해대는 남자들이라니, 남자들은 도대체가 말을 들어 처먹질 않으니, 강간하고 살해하면 얼마만큼 처절한 응징을 당하는지를 몸소 보여줘야, 그때야 비로소 말을 들어 처먹질 않을까. 




<행복한 결혼 생활>에서 여자는 결혼 후 27년이 지난 다음에야, 남편이 범죄자 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도 여러차례 여자들을 강간하고 죽인 바로 그 연쇄살인범임을. 27년간 사이좋게 살아왔고 둘 사이엔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한 아들과 결혼을 앞둔 딸이 있다. 아내가 자신이 연쇄살인범임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이제 남편도 안다. 내 앞에 앉은 이 남자가, 이제 드러났으니 내가 어떤 짓을 했는지 알려줄게, 라고 말하는 이 남자가, 나랑 27년간 함께 살아왔던 남자라는 사실에 여자는 앞이 깜깜해진다. 이걸 어쩌나 싶다. 경찰에 신고하게 되면 남편 말대로 자식들의 미래에 큰 장애가 될 것이다. 아이들이 평생을 강간살인범의 자식으로 살아야 한다. 직업도, 결혼도 모두 물거품이 될 것이다. 그러니 경찰에 신고할 수가 없다. 일단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남편과 '그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살겠다고 남편에게 다짐하긴 했지만, 그녀로서는 무.섭.다. 남편은 여자에게 사랑한다 말하지만, 여자가 그를 사랑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여자는 무섭다. 아내는 무섭다. 이 남자가 자신의 두려움을 눈치채고 언제고 자신을 죽일까봐 무섭다. 이 상황이 너무 답답했는데, 나는 계속해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를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정체를 차마 밝힐 수는 없고, 그래서 경찰에 신고할 순 없고, 그런데 이 남자가 나를 언제 죽일지 몰라 너무나 무섭고... 이제 어떻게 해야하지? 도망쳐야 할까? 도망치면? 그 다음은? 언제까지고 도망칠 수 있을까? 아이들에겐 아빠로부터 도망친 원인을 뭐라고 말해야 하지? 아이들에게 말도 하지 않고 다른 나라로 떠나버릴까? 남편이 아내를 찾아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데이비드 버스'의 『이웃집 살인마』를 보면 멀리 도망친 아내를 기어코 찾아내서 죽이는 남편도 나오던데,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잖은가. 


그러자 어쩔 수 없는 방법이 떠올랐다. 나는, 아내가 되었고, 여기에서 기어코 벗어나서 남은 삶을 살아내야 했으니, 도망치거나 경찰에 신고하는 걸로는 답이 나오질 않으니, 어느 순간, '죽이자' 라는 생각이 든거다. 이 남자를 죽여야 한다. 이 남자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고, 다른 여자들이 죽는다. 죽이는 게 답이다. 그러자 또다시 『이웃집 살인마』에서 본 구절이 떠올랐다.



남성들이 자신을 버린 배우자를 살해한 반면, 여성들은 살인이 유일한 탈출구라고 생각될 만큼 심하게 자신을 격리하고 학대하며 위협한 배우자를 살해했다. (이웃집 살인마, p.174) 


간략히 말해,여성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살인의 주된 동기는 자기 보호와 위험한 결혼으로부터 도망치려는 필사적인 욕망이다. (이웃집 살인마, p.171)



스티븐 킹이 써놓은 이야기들을 읽노라면, 남자들은 자신의 기분을 거스른다고 여자들을 죽이고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여자들을 죽인다. 그러나 여자들은, 자신이 죽지 않기 위해, 다른 여자들이 죽는 것을 막기 위해 남자를 죽인다. 


스티븐 킹이 이런 얘기를 해주어 얼마나 다행인가 했다. 이렇게 전세계적으로 널리 읽히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 사건이 왜 일어나는가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웠다. 이렇게 지명도 있는 '남자'가 이런 얘기를 해주다니. 곳곳에서 여자들이 얼마나 차별을 받고 있는지를 드러내고 있으니까. 똑똑하고 많이 배웠다는 남자들이 종종 여자들에게 '더 넓게보라'고 훈장질 해대는 걸 우리는 얼마나 많이 봐왔는가. 고종석과 김광진을 보며 나는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저었는데, 스티븐 킹은 다르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아, 스티븐 킹은 다르다. 훈장질 하려는 남자가 아니다. 그는 알고 있다. 현실이 여자에게 어떤지를. 『돌로레스 클레이본』에서도 스티븐 킹은, 여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못된 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가끔은 살아남기 위해서 거만하고 못된 년이 되어야 해. 가끔은 여자가 자기를 지탱하기 위해 못된 년이 되는 수밖에 없어.˝ (돌로레스 클레이본, p.212)



스티븐 킹이 우리 편인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든든해졌다. 세상에 훈장질 하는 남자들과 여자를 혐오하는 남자들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되는 것은 기쁘다. 우리는 두렵고 차별을 당하고 있다고 소리치는 약자들의 편에 서는 것은 편가르기가 아니다. 공평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시도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스티븐 킹이 원하는 것도 지금보다 나은 세계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점이 고마웠고, 또 다행스러웠다. 앞으로도 계속 스티븐 킹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완벽하고 재미있는 소설에서 별 하나를 뺀 건, 이 소설을 다 읽고 자던 밤, 악몽을 꿨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위도 눌렸어. 쥐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은 제일 처음의 단편 <1922>는 건너 뛰는 게 좋을 것 같다. 스티븐 킹을 다 읽고 자니 악몽을 꾸고 가위에 눌렸다고 말하자, 나보다 먼저 이 책을 읽은 남동생은 내게 말했다.


"스티븐 킹 읽고 자면 안돼.."



스티븐 킹을 읽고 자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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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슬비 2016-05-23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었을때 왜 번역을 안해주지 했어요. 지금이라도 번역해주어 얼마나 반갑던지...^^
그나마 스티븐킹이 예전보다 한국에 인지도가 높아져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냥 재미있다라고만 표현할줄 모르는데, 역시 다락방님 글은 스티븐 킹의 글만큼이나 재미있어요~~~^^

다락방 2016-05-23 16:29   좋아요 0 | URL
이 책 너무나 재미있었어요, 보슬비님. 스티븐 킹이 괜히 킹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인지도가 높아지는 게 당연한 작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가 다른 소설들에서는 어떤 얘기를 했는지 막 궁금해지더라고요.

히힛. 재미있다고 해주시니 감사드려요. 앞으로도 열심히 읽고 열심히 써야겠다고 다집해봅니다. 불끈!!

에이바 2016-05-24 16: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정말 재밌게 읽었어요. 1922에서는 발등 위를 타고 오르는 음습한 어둠을 느꼈는데 몇 번이나 구역질이 일더라고요. 대단한 사람 무서운 사람... 다락방님 혹시 타란티노 데쓰프루프 보셨어요? 빅 드라이버 보고 나니까 그 영화 생각 나더라고요.

다락방 2016-05-25 08:50   좋아요 1 | URL
아 정말 재미있더라고요. 스티븐 킹 아저씨가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기도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이야기도 해줘서 참 좋더라고요. 데쓰프루프는 안봤어요. 빅 드라이버는 참 좋았어요. 결국 다 죽여버리는 게 좋았어요. 죽여버리는 게 더 좋다는 말은 참 이상한 말이긴 하지만, 빅 드라이버가 살아서 다른 여자들을 또 강간할 걸 생각하면 너무나 끔찍한 거에요. 어휴.. 저는 <행복한 결혼생활>도 너무 무서웠지만 그런 의미에서 좋더라고요. 내가 아내의 입장이라면..하고 해결방법을 고민하다 보니, 결국 죽이는 것 밖에 답이 나오질 않았어요. 스티븐 킹을 죄다 읽어봐야겠어요. 어떤건 특히 더 무섭겠지만요 ㅠㅠ

버벌 2016-06-07 17: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스티븐킹을 너무 좋아합니다. 개인적으로.... 다치지 않고 오래오래 계셨으면 해요. 최근에 스티븐킹의 it이 영화화 된다고 해서 기다리는 중입니다아~~ 아마도 내년이후에 개봉이겠지만요. ㅜㅠ

다락방 2016-06-10 13:40   좋아요 1 | URL
아아, it 도 읽어봐야겠는데 말입니다. 스티븐 킹의 소설을 하나씩 차례대로 다 읽어봐야겠어요. 킹 아저씨 짱이에요 ㅠㅠ
 
우리가 사랑에 대해 착각하는 것들 테드북스 TED Books 3
해나 프라이 지음, 구계원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돈 많고 잘생기고 키도 크고 다정하며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한국남자만을 내 연인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 사람은 연애하지 못할 확률이 크다. 그러나 외모엔 크게 신경쓰지 않고 예의 있는 남자를 원하며 인종과 국적 나이도 별 상관이 없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이 연애할 확률은 전자보다 크다. 이건 똑똑해야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아는 거다. 조건이 많을수록 그 조건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거니까. 그렇다고 아무나 다 괜찮다, 하는 건 아니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조건'을 가지고 접근한다면 나는 나와 사이좋게 지낼 사람을 찾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을것이다. 


또한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내가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걸고 다정하게 대한다면, 그 사람의 마음을 얻을 확률도 크다. 가만히 앉아서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어주기를'바라는 것보다 말이다. 나는 십오년간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 하지만, 그 안에서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내가 근무하는 빌딩에는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지만, 우연히 마주치는 누군가로부터 '이 빌딩에서 당신이 제일 예뻐요' 같은 말을 들어본 적도 없다. 뉴욕의 센트럴파크 벤치에 앉아있어보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도 가보았지만, 여행지에서의 로맨스 같은 것도 생기질 않았다. 아무도,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아무도... 

그러나 나는, 내가 좋아해서 계속 좋아한다고 말한 상대와는 불타는 연애를 한 적이 있다. 내가 너무 좋아해서 팔짝팔짝 뛰고 좋다좋다 이천오백번쯤 말했더니 어느 순간 그도 나를 좋아하고 있더라.


좋아하는 사람과 연애를 시작하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나는 좀더 다정해져야 했고, 상대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혹여라도 상대에게 상처주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될까봐 신경을 썼고, 상대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말과 행동을 했다면 바로 사과했다. 나는 상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기분에 내내 신경썼던 거다. 그래서 나는 그 연애를 그전의 연애보다 더 오래 끌고갈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런 거다. 상대가 너무 많은 것을 갖고 있기를 바라지 않고, 너무 좋다면 먼저 다가가서 관계를 시작하려하고,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내내 신경을 쓴다면, 연애는 시작되고 유지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내가 그간 연애와 이별을 반복하면서, 그리고 그간의 시간들을 지내오면서 저절로 터득한 것들이다. 내가 깨달은 연애와 이별에 대한 것들이 유별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똑똑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연애에 대해서 이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아주 많을 것이고, 그런 사람들은 역시 연애를 시작하고 끝내고 또다른 연애를 시작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들중 일부는 원하는 상대와 함께 살고 있기도 할 것이고.



이 책, 『우리가 사랑에 대해 착각하는 것들』은, 내가 위에 했던 얘기를 똑같이 한다. 이 너무나 당연한 얘기를. 그러나 수학적으로. 책장을 넘기다보면 이 당연한 얘기들을 하는데 확률이 나오고 그래프가 나오고 방정식이 나온다. 당연하게도 이 모든 것들은, 수학적 공식 앞에 더 설득력을 갖는다. 연애와 결혼에 대한 방정식에는 당연히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대입되는 모든 것들에 '행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저자는 알고 있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 숫자 대신 사람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나는 굳이 수학적인 증명을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이 책에 쓰여진 것들에 대해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책이 나에게 딱히 쓸모는 없었다. 게다가 책 뒷부분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하객들을 어떻게 앉혀야 하는지를 얘기하는 부분은 특히나 더 필요없었고, 그러나, 분명, 이 책은 어떤 사람들에게 반드시 읽어야할 책일 것이다. '왜 나는 연애하고 싶어 미치겠는데 애인이 안생길까' 같은 생각으로 괴로운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으라고 말하고 싶다. 연애를 하기 위한 어떤 액션도 취하지 않으면서 '아 너무나 외로워 연애하고 싶다'만 하루종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야만 한다. 남자든 여자든, 방 안에 가만히 혼자 앉아서 '연애하고 싶다'는 생각만 강하게 한다고 해서 연애가 되는 게 아니다.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도와주는 게 아니라, 내가 움직여야 되는 거다. 내가 움직여야 우주도 나에게 반응한다. 일단 이성을 만날 수 있는 곳에 가서 나를 드러내는 게 우선이다. 그건 지하철이나 버스를 하루종일 타고 있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다. 비행기 안에서 재벌2세인 남자나 여자를 만날 확률은 실상 제로에 가깝다. 


매일 출퇴근하거나 등하교하는 곳에 이성이 별로 없다면, 동아리에 들거나 동호회에 나가든가 소개팅이나 미팅을 해야 한다. 직접적인 액션이 싫다면 자기계발을 위해 어학 공부나 댄스 공부등등의 학원을 다니는 것도 괜찮겠다. 그러니까 일단 누군가를 만나야 뭔가 될 게 아닌가. 로또를 사지도 않고 당첨을 바랄 수는 없는 노릇.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상대가 눈앞에 있다 싶으면, 혼자서 좋다좋다 초능력으로 세뇌할 생각하지 말고, 가서 말을 걸어야 한다. 이런 건 그냥 너무나 당연한 거다. 



이 책의 저자 '해나 프라이'는 수학을 사랑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수학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해 가끔은 흥분한다. 그러니까 그녀가 이런 책을 굳이 쓴 까닭은, 사람들이 까다롭거나 어렵다고 생각하는 수학을 조금 더 쉽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수학 너무 좋아, 수학 진짜 황홀한 거야, 얼마나 황홀한지 내가 알려줄게, 하는 뉘앙스가 계속 풍긴다. 그래서 너무나 기분이 좋다. 이 당연한 것들을 얘기하는 이유가, 그녀가 사랑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함이라서. 자신이 느끼는 사랑과 흥분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그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져서. 물론, 그렇게 쓰여진 이 책이 '연애를 하고 싶지만 도무지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 저자가 귀엽다는 생각을 마흔번쯤 한 것 같다. 나는 소설을, 책을 사랑해서, 그걸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 재미를 알려주고 싶다. 아우, 이 좋은 거, 왜 몰라, 이거 정말 좋단 말이야, 하는 기분. 해나 프라이에겐 그것이 수학이었다. 수학 진짜 좋단 말이야, 수학 진짜 짱이야, 이거봐, 이렇게 사랑에 대한 것도 다 증명할 수 있잖아, 하면서. 음.. 그렇다면 나도 귀여운걸까?


무언가 강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랑하는 것에 대한 열정을 가진 사람들을 보는 것은 너무나 흥미롭고 즐거운 일이다. 내가 사랑하므로 너도 사랑해야해! 라는 강압적인 뉘앙스가 아니라, 아, 이거 정말 좋단 말이야, 하면서 안타까워하는 게 진짜 좋다. 내내 웃음이 난다. 


뭐가됐든, 역시 사랑이 답인가....

그러나 이 수많은 확장 형태나 사례에서도 근본적인 메시지는 변하지 않는다. 가끔씩 맞닥뜨리게 되는 민망한 거절을 감수할 수만 있다면,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는 편이 궁극적으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앉아서 다른 사람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먼저 다가가는 편이 낫다. 그러니 용기를 내어 마음에 드는 이에게 다가가길. 그리고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길. 수학이 증명하고 있으니까. (p.66-67)

기간이 짧든 길든 싱글로 지내본 사람들이라면 특별한 인연을 찾는 일이 가끔은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난제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몇 년 동안 연속해서 따분한 남자들이나 정신 나간 여자들과 연애를 하다보면 좌절하고 실망하며 성공할 가망이 없다는 기분이 들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기분이 반드시 근거 없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오랫동안 싱글로 지내온 피터 배커스라는 수학자는 2010년에 자신과 데이트를 할 잠재적인 여자친구의 수보다 은하계에 존재하는 지적인 외계 문명의 수가 더 많다는 계산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p.15-16)

"사랑은 한 여성과 다른 여성의 차이를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조지 버나드 쇼 (p.28)

개인적인 취향과 선호도 목록은 자신만의 기준에 따라 검색 결과를 걸러내기에 이상적인 요소다. 그러나 약 80년에 걸쳐 인간관계를 연구해온 과학을 통해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되었다. 개인의 데이터를 사용해서는 커플이 얼마나 잘 어울릴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다. (p.8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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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6-05-13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제목처럼 우리가 사랑에 대해 착각하는 것들을 잘 알려줄 것 같네요ㅎ

다락방 2016-05-13 08:49   좋아요 0 | URL
재미있었어요. 방정식하고 그래프 나올 때는 역시나 멘붕이 올 것 같아 건너뛰었지만.. -_-

웽스북스 2016-05-13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연애할 일 없(어야하)는 유부녀는 읽을까요 말까요?

다락방 2016-05-13 09:00   좋아요 0 | URL
귀여운 소품같은 책이라서 읽는 재미가 있어요. 뭣보다 작가가 수학에 대해 흥분하는 게 초귀여움 ㅋㅋ 그렇지만 이 책의 내용상으로 보면 웽님은 이미 다 터득한 것들입니다. 성숙한 여자니까요.. ㅎㅎㅎㅎㅎ

수퍼남매맘 2016-05-13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 딸에게 읽히고 싶어지는 책이네요. 중3이 읽어도 될 만한 책일까요? (수위가 걱정되어서)

다락방 2016-05-13 23:13   좋아요 0 | URL
수위 걱정은 전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읽게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