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탕이 싫어 한무릎읽기
수지 모건스턴.마야 고티에 지음, 윤경 옮김, 배현정 그림 / 크레용하우스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어제 지인과 프란세진야를 먹으러 갔다. 지인은 처음 먹어보는 거였는데 연신 맛있다며 잘 먹더라. 그러면서 대화하던 중 건강하자는 말을 했다. 우리가 계속 건강해야 이렇게 맛있는 것 먹으러 돌아다닐 수도 있고 또 맛있는 걸 맛있게 즐길 수도 있다고. 나는 술도 좋아하고 고기도 좋아하는데, 건강을 잃는다면 대체적으로 백이면 백, 술을 끊으라고 할테니까. 그러니 더없이 건강이 중요하다. 건강을 유지해서 십년 뒤에도 오십년 뒤에도 맛있는 것 먹고 술도 마시고 그렇게 살고 싶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나를 그저 찾아올지도 모르겠다. 내가 건강을 유지하고자 한다해도, 그것이 내 뜻과는 다르게 흘러갈 수도 있다. '조셉 고든 래빗'이 주연한 영화 [50/50]에서 남자는 건강하게 오래 살기 위해 술담배를 하지 않고 충동적인 섹스를 하지 않는다. 규칙적인 식사와 운동을 하며 신호등이 항상 초록색 불로 바뀌어야만 길을 건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암에 걸렸다. 내가 얼마나 조심하며 잘 살았는가는 단순히 확률을 낮추는 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더 많은 부분은 운에 달려있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단순히 몸이 약할 수 있고 누군가는 수술이 필요한 큰 병에 걸릴 수도 있다. 또 누군가는 수술조차 할 수 없는 희귀한 병에 걸릴 수도 있고. 만약 인간에게 아파야하는 절대적인 수가 있다면, 그래야 세상이 굴러가는 거라면, 그렇다면, 그것이 아이들에게는 찾아오지 말았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그렇게 바란다. 꼭 누군가가 아파야만 한다면, 그것이 아이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나는 나의 조카가 감기에 걸려 콜록거리기만 해도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은데, 이 책의 주인공인 '미리암'은 당뇨병을 진단 받는다. 밤에 잠자다가도 여러차례 깨서 소변을 보고, 맛있는 걸 먹는데도 살이 빠지고, 결국 토하는 일까지 벌어져서 병원을 찾았더니 당뇨병이란다. 여기서 잠깐, 이 책에 실린 '소아당뇨'에 대해 언급하고 가야겠다.




소아 당뇨란?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위장에서 소화되어 포도당이란 성분으로 바뀝니다. 포도당은 인슐린이라는 호르몬의 도움을 받아 세포로 전달되어 우리가 활동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원이 됩니다. 즉 인슐린이 있어야 혈액 속의 포도ㅗ당이 세포로 들어가서 우리가 이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아 당뇨는 인슐린을 분비하는 췌장에 문제가 생겨 인슐린이 거의 분비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포도당이 세포로 전달되지 못하고 혈액 소겡 남아 혈당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소아 당뇨는 발병하면 낫지 않는 병이며 평생 동안 인슐린으로 혈당 수치를 조절해야 합니다. 당뇨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① 적절한 식이요법 ② 규칙적인 운동 ③ 약물요법 ④ 주기적인 혈당검사와 검진 ⑤ 당뇨병 교육 등이 필요합니다. (p.6)



아직 초등학생인 미리암이 당뇨에 걸려 평생을 관리하며 살아야 한다. 밥 먹기 전에 인슐린 계산을 해야하고 또 자기 몸에 적당한 양의 인슐린을 직접 주사해야 한다. 미리암의 친구들은 미리암의 앞에서 맛있는 것을 먹는 게 어쩐지 미안해 불편해야하고. 어린 미리암은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할까 우울해한다. 어릴때부터 참아야하고 들여다봐야하고 관리해야 한다는 게 너무 마음이 아팠다. 한 번은 진짜 그러기 싫어서 인슐린 체크도 안하고 혈당체크도 안한 채 먹고 싶은 거 먹고 보냈더니 결국 쓰러진 거다. 그렇게 좋아하는 수영장에 갔다가도 저혈당이 올까봐 빨리 집에 가야한다고 말하는 어린 아이라니. 아니, 아이에게 당뇨라니, 너무나 가혹하지 않은가. 그런데 미리암이 입원한 병원에는 미리암보다 더 어린, 다섯살 아이인데 당뇨에 걸린 아이도 있었다. 아..세상은 왜 이따위야....너무 싫어.....


이제 당뇨에 좀 익숙해지고 받아들인 미리암은 다섯살 당뇨환자 아이와 대화한다.



"나도 당뇨 환자야. 우리에게 닥친 일이 그다지 신 나는 일은 아니지만 많이 아프거나 죽게 만들지는 않아. 단지 좀 불편하게 살아야 할 뿐이지. 굳이 친구들에게 숨길 필요도 없어. 당뇨병이 어떤 건지는 차차 알게 될 거야. 내가 널 도와줄게. 엄마가 계속 네 옆에서 널 간호할 수 없는 거지?"

"응. 엄마는 밤늦게까지 일해. 그래서 언니하고 지내라고 의사 선생님이 말했어. 근데 언니 이름은 뭐야?"

"미리암이야. 넌?"

"내 이름은 멜로디야. 다섯 살이고 이젠 깜깜한 밤도 무서워하지 않아."

"멜로디, 언니가 돌봐 줄게. 걱정하지 마." (p.120-121)



그래, 불편하다. 불편한 일이다. 어차피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라면 그걸 절망하고 좌절하느니 조금 불편할 뿐이지, 하고 살아가는 게 나을 것이다. 그건 나도 안다. 그렇지만...그래도 아이들에게 이건 너무 가혹한 게 아닌가. 이 책이 존재하고 그래서 소아당뇨 아이와 또 그 가족들에게 읽히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이 필요도 없는 세상이 더 좋았을 것 같다. 아이들은 아프지 말고 자랐으면 좋겠다. 그 작은 몸들이 고통과 불편함을 견뎌낼 생각을 하면 세상이 너무 엿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이 책은 미리암의 당뇨 얘기만 하고 있지는 않다. 자살한 외삼촌이 앓고 있던 조울증과, 엄마의 우울증, 학급 아이의 좋지 못한 가정환경 등, 여러 이야기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담고 흘러간다. 




"제롬 삼촌은 심각한 조울증 환자였어. 쉽게 말하면 굉장히 즐겁고 유쾌하다가도, 갑자기 자신이 아주 불행하다고 느끼고는 했지. 그런데 엄마, 아빠는 그 병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단다. 왜냐하면 우리를 만나러 올 때마다 멀쩡해 보였고, 또 괜찮다고 말했거든."

아빠는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살했을 때 그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의식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단다."

"왜 우리에게 그 일을 말해 주지 않았어요?"

미리암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아빠도 삼촌의 병을 이해하지 못했단다. 그래서 삼촌의 갑작스런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어. 너희들에게도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지. 견디기 힘든 현실이었거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자살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그건 그렇지. 하지만 병이 든 거였잖니. 우리가 삼촌을 사랑하듯 삼촌도 우리를 사랑했지만 마음과 뇌가 고장 나서 그 사랑이 보이지 않은 거야. 절망만 보인 거지." (p.135-136)




어린 조카가 '왜?'냐고 물을 때마다 혹은 다른 질문들을 할 때마다,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어버버 거리곤 한다. 어떤 대답을 해야할지, 어떻게 해야 잘 설명할 수 있을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나조차도 왜 그러는지 몰라서이기도 하고. 미리암의 아버지가 어린 딸들에게 저렇게 말할 수 있는 게 그래서 대단해 보였다. 삼촌의 자살이란 것에 대해 어린 딸들에 대해 얘기하긴 쉽지 않았을테니까. 삼촌의 죽음 그리고 자살. 그것에 대해 말한다는 게 말이다.



아이가 당뇨에 걸렸다고 해서 우울하게 흘러가는 책은 아니다. 이 책 읽고 그냥 내가 찌질한거지. 책은 오히려 십대 소녀-미리암의 언니인 넬리-의 풋풋한 사랑의 이야기, 자신이 가진 재능을 발전시키는 이야기, 우정과 농담까지 밝게 흘러간다. 어차피 바꿀 수 없다면 그 불편함을 인정하고 앞으로 닥쳐올 일들을 즐길 수 있을만큼 즐기는 게 건강한 생활태도임은 사실이다. 그리고 나 역시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아이가 아픈 게 나는 너무 아프다.






"날마다 삼촌이 보고 싶어요."
"아빠도 그렇지만 엄마는 더 심하단다. 엄마랑 제롬 삼촌은 쌍둥이였잖니. 엄마와 삼촌이 너무 가까운 사이라서 아빠도 가끔 끼어들 수 없었단다. 엄마는 삼촌 없이 사는 법을 배우고, 삼촌이 없어도 잘 살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해."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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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5-11-13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아이가 아픈 건 못 보겠어요. 미리암의 엄마아빠마음은 어떨까요ㅜㅜ; 가끔 조카들과 얘기해보면 아이들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걸 느끼고 이해하고 있구나 싶어요. 당뇨가 그다지 신나는 일은 아니지만 아주 나쁜 일도 아니라고 얘기하는 다섯살아이라니ㅠㅠ;

다락방 2015-11-13 14:33   좋아요 0 | URL
미리암의 엄마도 (마음이)많이 아파서 ㅠㅠ
네, 이 책을 읽어봐도 아이들이 많은 걸 생각하고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 당뇨가 아주 나쁜 일도 아니라고 얘기하는 미리암은 10대 소녀에요. 언니가 열네살인데 미리암은 몇 살인진 모르겠네요. 미리암이 다섯살 당뇨병 소녀에게 얘기하는 거에요. 그게 아주 나쁜 일은 아니라고..

책이 전체적으로 슬픈 게 전혀 아닌데 저는 혼자 막 슬펐어요, 문나잇님 ㅠㅠ

moonnight 2015-11-13 14:45   좋아요 0 | URL
앗 다시 읽어보니 그렇네요. 저는 멜로디의 얘기인 줄@_@;;; 하여간에 건강이 최고입니다. 우리함께 건강히 맛있는 음식도 먹고 술도 마시고 그렇게 살아요.ㅠㅠ;

다락방 2015-11-16 09:53   좋아요 0 | URL
네, 문나잇님. 우리 건강하게 지낼 수 있도록 건강유지 잘 합시다! 오래오래 맛있는 것 먹고 마시며 살고 싶어요. 불끈!

꼼쥐 2015-11-13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등 6학년인 제 아들도 어렸을 때 딱 한 번 밤에 열이 올라 까무러치는 바람에 얼마나 놀랐던지요.밤에 병원 응급실까지 갔는데 가는 도중에 의식이 돌아오는 바람에 그냥 의사만 만나고 돌아왔지만 아이가 아픈 걸 지켜보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인 듯.

마크 트웨인이 그러더군요. 배가 조난을 당했을 때 버릴 짐이라도 잇어야 그 짐을 버리고 살아날 희망을 갖는 것처럼 건강이 안 좋아졌을 때 버릴 나쁜 습관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그때를 위해서 본인은 담배를 피운다고.

다락방 2015-11-16 09:56   좋아요 0 | URL
조카가 네 살 때였나, 가와사키를 앓았어요. 열이 내리질 않고 병원에 입원해 링겔 꽂고 있는데 아, 정말 미치겠더라고요. 그 작은 몸으로 아프고 주사를 맞고 침대에 누워있고 ... 정말 진심으로 대신 아파주고 싶더라고요. 저 작은 몸이 왜 저 고통을 견뎌야하나.. 하면서요. 내가 아픈 것보다 아이가 아픈 걸 보는 게 훨씬 더 고통스러운 것 같아요, 꼼쥐님. 아이들만이라도 아프지 말고 지냈으면 좋겠어요.


제 고등학교때 문학선생님인가, 마크 트웨인과 담배에 대한 얘기를 해주셨는데, 그 당시에 해주신 말씀은 `나는 담배 끊기가 제일 쉬웠다 스무번도 넘게 끊었다` 였어요. 하하하. 마크 트웨인과 담배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었나 보네요. ㅎㅎ

감은빛 2015-11-13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가 아프면 진짜 견디기 힘들 것 같아요.
저는 가끔 아이들이 감기나 장염 같은 것 때문에 열이 나면 막 아이가 불쌍해서 어쩔줄을 모르겠어요.
이 조그만 것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렇게 아파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어요.

다락방 2015-11-16 09:57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그 작은 몸이 고통을 견딜 생각에 진짜 마음 아프죠. 어떻게해야하나, 대신 아파주고 싶다, 그런 생각만 한가득 들어요. ㅠㅠ 제 몸 아픈 것보다 더 고통스러워요. ㅠㅠㅠ

레와 2015-11-13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휴.. ㅜ_ㅜ


다락방 2015-11-16 09:57   좋아요 0 | URL
소아당뇨라니, 너무해요 ㅠㅠ

2015-11-16 0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5-11-16 09:57   좋아요 0 | URL
잘 도착했군요, 다행입니다. 헤헷 :)
 
마이 시크릿 닥터 - 내 친구가 산부인과 의사라면 꼭 묻고 싶은 여자 몸 이야기
리사 랭킨 지음, 전미영 옮김 / 릿지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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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쓴 저자의 가장 큰 미덕은 어느 하나의 가치가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각자가 모두 다른 생각과 이상을 가지고 있다는 걸 기꺼이 인정하고, 그러므로 선택은 각자의 몫이라는 걸 계속해서 말해준다. 출산에 대해서도 그렇다. 본인이 아이를 낳았고 거기에서 기쁨을 크게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는 것과 낳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선택에 달린 일이라고 말한다. 만약 당신이 아이를 낳는 걸로 선택했다면, 거기에서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지 않는 길을 가기로 했다면, 그 길에는 또 그 길 나름의 재미와 의미가 있다, 고 말해주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현실에서 결혼을 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설사 본인이 행복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에게 '너도 결혼해야지'를 얘기하고, 아이를 낳은 사람들의 대부분은 '아이를 낳아봐야 어른이 되지' 같은 말을 지껄여대는데, 이 닥터는 전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항문 섹스를 너가 하고 싶어? 그러면 해. 넌 뭘 원해? 그렇다면, 니가 원하는 대로 해. '내가 해보니까 진짜 좋더라' 하면서 좋은 사람인 척 강압하는 일도 저자는 하지 않는다. 매번 선택의 기로에서 니가 니 자신을 잘 들여다보고 선택하라고 말해주는 것이 내게는 참 좋더라.



부모가 되기를 선택한다는 것은 (경우에 따라 상황이 당신을 선택할 수도 있다) 도로 교차로에 서는 것과 같다. 한쪽 길은 그 나름의 기쁨과 슬픔이 있는 아이 없는 생활로 통한다. 당신이 그 길을 택했다면 더 자주 여행을 하고, 더 많은 시도를 하고, 소녀 같은 외모를 간직하고, 더 많은 자유를 누릴 것이다. 한편 어머니의 길을 선택하면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한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되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었을 기쁨의 순간을 자주 만날 것이다.

어머니가 되기를 '권장'하느냐고 환자들이 물어 오면, 나는 아이를 갖는 것을 조금도 낭만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나는 두 길 중 어느 쪽으로도 갈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아이 없는 길을 선택했다면, 혹은 이 우주가 내게 아이를 낳을 기회를 주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지금과는 아주 달랐겠지만 그래도 분명 행복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이미 나는 한 쪽을 선택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딸이 없는 삶은 상상도 할 수 없다. 하지만 그건 흑백, 선악의 문제가 아니다. 단지 다른 것일 뿐이다. (p.295)



내일모레 마흔이 되지만, 이런 내게도 여전히 산부인과는 가기 꺼려지는 곳이다. 산부인과적 질병이 의심된다해도 자꾸만 망설이게 된다. 가야겠다고 다짐을 하고 들어서서 의사 앞에 다리를 벌리는 순간은, 몇 번의 진찰 경험이 있다해도 여전히 낯설고 부끄럽다. 어서 빨리 이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리게 된다. 남자 의사여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혹시나 싶어 여자 의사를 찾아가보기도 했지만, 여자 의사 앞에서도 다리를 벌리고 내 안을 보여준다는 건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두 눈을 질끈 감게 되는 일이다. 그러니 사소한 내 안의 증상들에 대해 물어본다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병원에 간 김에 닥터에게 질문한다해도, 내가 궁금한 모든 것을 질문할 수 있을까? 게다가 그런 질문들은 아무리 오랜 세월 친하게 지낸 친구라 해도 공유하기 어렵다. 내 밑에서 나는 냄새, 내 밑에서 나오는 분비물. 이게 과연 정상적인건지, 다른 사람들은 어느정도인건지, 대체 이걸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이거 괜찮은건가? 다른 사람들도 이러나? 라는 생각만 한 채 매일매일 씻고 속옷을 갈아입는 게 전부. 


그런데 이 책에서는 그런 질문들에 대해 답을 해준다. 냄새가 나는 것도, 분비물이 나오는 것도 지극히 다 정상이라고 말해준다. 그곳에서는 냄새가 나는 게 당연하다고 이 책의 저자 '리사 랭킨'은 말해준다.



하지만 여성들이여, 질에서는 냄새가 나게 되어 있다! 존경하는 이브 엔슬러가 쓴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보라. 엔슬러가 여성의 질에 대해 한 역할은 마틴 루터 킹이 시민의 권리에 대해 한 역할과 맞먹는다.


내 질은 씻을 필요가 없어. 씻지 않아도 좋은 향기가 나니까. 꾸밀 것 없다고. 보지 냄새가 나는 그곳에서 장미 꽃잎 향기가 난다는 남자의 말을 믿지 마. 남들은 깨끗이 씻고, 질에서 욕실 스프레이나 꽃밭 냄새가 나게 하려고 애쓰지. 꽃, 딸기, 비 냄새를 풍기는 그 모든 질 세척 스프레이들로 말이야. 하지만 나는 내 보지에서 비 냄새가 나길 바라지 않아. 기껏 생선을 조리한 뒤 비린내를 없애겠다고 박박 씻어버리다니. 나는 생선 맛을 느끼고 싶어. 그래서 생선 요리를 주문하는 거야.


오, 자매들이여! 거기선 음부 냄새가 나게끔 되어 있었던 것이다! (p.85)




음부의 냄새와 분비물, 임신과 출산, 생리, 섹스, 오르가슴, 유방, 폐경에 이르기까지, 산부인과에 대해 다룰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리사 랭킨은 다 대답해준다. 심지어 항문섹스까지. 자위행위에 대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자위행위란 숨어서 해야 하는, 누가 보면 안되는, 어쩐지 부끄럽고 나쁜 짓, 같은 인식을 어릴때부터 받아왔는데, 리사 랭킨은 자위행위를 즐기라고 말한다. 심지어 어떻게 즐기면 되는지까지 인용해주더라. 그간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쁘다고, 숨겨야 한다고, 이런 나를 아무도 모르게 해야한다고 생각해왔던 모든 것들을, 리사 랭킨은 드러내놓고 당당히 말한다. 너가 그걸 원한다고? 그러면 해! 너는 네 몸을 사랑해야해!! 이 책을 읽고나니 나도 이제 바이브레이터 하나쯤은 구매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나 자신을 위해서 구비해놔야 하는 게 아닐까. 내가 즐기고 싶을 때 즐길 수 있도록. 하아- 그렇지만 나는 지금 아빠,엄마,남동생과 같이 살고 있고, 그렇다면 바이브레이터가 식구들 누구에게 들킬 위험이 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식구들이라면, 보수적인 우리 부모님들이라면, 발견하는 순간 멘탈에 붕괴가 찾아오실 듯....게다가 그걸 눈으로 발견하지 못한다해도, 내가 집 안에서 그걸 쓰다보면 알게 되지 않을까. 내가 잘은 모르지만, 그거...소리도 나지 않나? 그렇다면 바깥으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을까? 역시, 독립이 먼저인 걸로.....




일전에 포르노에 대한 글을 쓰면서, 그것이 그릇된 성인식을 심어주는 것이 걱정된다고 했던 적이 있는데, 이 책에서도 역시 비슷한 언급이 나온다. 모든 여성들은, 심지어 다른 사람이 보기에 완벽한 몸을 갖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몸에 대해 숨기고 싶은 부분이 있다. 가슴이 너무 처진 게 아닌가, 허벅지 셀룰라이트는 어쩌지, 내 그곳은 너무 흉측하게 생긴 게 아닌가 등등. 때때로 어떤 여자들은 사귀는 남자들로부터 몸에 대한 '지적'을 받기도 하더라. 개놈들.. 누군 할 말이 없어서 안하고 있는 줄 아나..

어쨌든, 리사 랭킨은, 우리의 몸은 하나하나 다 아름답다고 말해준다. 자신이 산부인과 닥터로서 만나는 몸은 바로 여러분들의 몸이라며. 다들 그렇게 생겼다고.



'에어 브러싱' '포토샵' '수술'이라는 단어들을 당신이 왜 떠올리지 않는지 궁금하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포르노에 나오는 여성들과는 음부의 생김새가 다르다. 포르노 스타들은 너나없이 음순이 깔끔하고 작다. 처지지 않고 착 달라붙어 있는 음순 위로 음모가 단정하게 한 줄로 나있다. 그녀들의 분홍빛 음순은 내가 현실에서 보는 것처럼 거무튀튀하지도, 길지도 않다. 자세히 뜯어보면 알겠지만 그들에게는 셀룰라이트, 사마귀, 출렁이는 뱃살, 두꺼운 허벅지, 수술 흉터도 없다.

음… 이제야 뭔가 수상하다고? 그렇다. 포르노에는 내가 진료실에서 만나는 여성들의 진짜 모습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현실 속의 그곳은 생김새, 크기, 색깔이 모두 다르며 눈송이처럼 각자 고유한 모습이다. (p.63) 




내가 내 자신에 대해 몰랐던 걸 알게 되는 부분도 있지만 리사 랭킨은 끊임없이 '너는 소중한 사람이다' 라고 말해준다. 네가 가장 원하는 걸 신중하게 생각해서 선택하라고 말한다. 리사 랭킨은, 모성이란 것이 아이를 낳는 순간 똭-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말해준다. 아이가 예쁜 것과 별개로 우리들은 모든 걸 버리고 도망가고 싶어지고 우울해진다는 것까지도. 오르가슴을 느끼는 여자들이 세상에 얼마 있지 않다는 것도 말해준다. 굳이 내가 어디쯤에 서있는건지 확인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다른 여자들이 어떤 걸 느끼고 생각하고 경험하고 있는지 아는 건 무척 의미 있는 일이다. 리사 랭킨은 본인과 본인의 친구들, 친척들, 그리고 자신이 만난 환자들의 경험사례를 계속해서 들려준다. 그리고 끊임없이 책을 읽는 독자들, 특히나 음부에 대해 수치스러워하고 숨기고싶어하고 민망해하는 여자들을 격려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여자들이 읽어야 할 책이다. 여자가 여자에게 선물하기에도 맞춤한 책이다. 유용한 정보 또 안도감을 포함해서 재미까지 있으니까. 그러나 잘못된 지식을 바로잡기 위해, 그리고 쌍놈이 되지 않기 위해 남자들도 읽어야할 책이다.


밑줄 그은 부분이 아주 많은데, 그건 밑에 밑줄긋기로 옮기겠다.

마지막으로, 내가 이 책을 읽기로 결심했던 부분을 인용하고자 한다. 트윗에서 누가 이 부분을 인용한 걸 보고 읽기로 결심했더랬다. 가슴이 많이 아플테지만, 다같이 이 부분을 읽어봤으면 좋겠다.




나는 환자 대부분이 소말리아 난민 여성인 보건소에서 일한 적이 있다. 환자 중 대다수가 어린 시절에 통과의례의 일종으로 성기를 훼손당한 상태였다. 소말리아 등 일부 아프리카 문화권의 여성들으느 사춘기 이전에 음순과 음핵을 절단하는 의식인 '할례'를 치른다. 소변 배출을 위해 성냥개비 두께의 구멍만 남겨 놓고 나머지는 모두 꿰매어 버린다. 이 과정에서 살아남아야 성인 여성으로 인정받고, 다른 소녀들의 성기 절단 의식에 참여할 수 있다.

내가 만난 환자 대부분은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적 의례를 옹호했다. 나도 자문화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섣부른 판단을 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나 의료 종사자로서 또 페미니스트로서 그 의식이 야만적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다행히 미국에서는 여성 성기 절단이 불법이지만 음성적으로 여전히 행해지고 있다.) 의사로서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이주 여성들을 교육하고 딸들에게 상처를 대물림하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성기 절단을 당한 여성도 성관계와 출산이 가능할까? 그렇다. 하지만 아름답다고 할 만한 장면은 아니다.

성기 절단을 경험한 소마야는 남달리 의식이 깨어 있는 소말리아 여성이었다. 결혼을 앞둔 그녀는 첫날밤을 치르기 전에 수술로 막힌 부분을 열어 달라며 나를 찾아왔다.

"머리에 멍이 들긴 싫거든요."

무슨 소린지 어리둥절했다. "멍이라고요?" 음부에 멍이 든다면 그래도 이해가 되지만 왜 머리에?

"네, 맞아요. 첫날밤에 남자들이 그런 식으로 하거든요. 여자를 벽에 기대 세워 놓고 거기가 찢어져 열릴 때까지 음경으로 밀어붙여요. 난 찢어져서 열리는 것도 싫고 머리에 타박상을 입는 것도 싫어요." 그녀는 감정을 전혀 내비치지 않고 건조하게 말했다. 반면에 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성기 절단 여성은 겨우 소변을 볼 수 있을 만큼 작은 구멍만 남겨진 상태로 질이 닫혀 있다는 것을 통해 남편과 시집에 성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이는 중매결혼에서 신부에게 요구하는 필수 조건이다. 남자는 첫 성관계를 할 때 흉터 조직을 힘으로 찢어서 막힌 부분을 연다.

일단 질이 열린 뒤 찢어진 상처가 아무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성관계를 하면 질은 항상 열린 상태가 된다. (그때 여성들이 견뎌야 하는 극심한 고통을 떠올리면 오금이 저린다.) 질이 열린 여성은 임신이 가능하며, 출산한 뒤에는 조직 파열로 인해 대개 질이 더 넓어진다.

당연히 성기 절단의 후유증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불결한 절단 기구 사용 등으로 인한 합병증 탓에 죽는 걸 용케 모면한다 해도, 많은 여성들이 만성적인 요로감염증, 성교통, 불감증, 누공(질과 방광 사이, 요도와 질 사이, 직장과 질 사이에 뚫린 구멍. 그중에서도 가장 비참한 것은 직장과 질 사이의 구멍이다. 거기 구멍이 뚫리면 질을 통해 대소변을 흘리게 된다)에 시달린다. 성기 절단 합병증은 아기한테도 영향을 미친다. 폐쇄분만으로 인해 태아가 해를 입거나 사산될 수 있다. (p.70-71)

면도칼은 털을 절단하는 데 그치지 않고 표피층을 깎아 버리기 때문에 피부에 상처를 낸다. 그러면 우리 몸은 상처 입은 조직을 치료하기 위해 그 부위로 향하는 혈액량을 늘리고, 이 때문에 피부가 마치 화상을 입은 털 뽑힌 거위처럼 된다. 또 주름진 모낭들이 깎이고 손상돼 피부가 울퉁불퉁해진다. (p.53)

이제 사십 대에 접어든 나는 내게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느낀다. 그 느낌이 즐겁다. 우리 사회는 성생활을 젊음이나 아름다움과 결부시키지만, 오히려 나이가 들면서 성으 ㅣ완전한 풍부함을 진정으로 구현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우리는 남들이 기대하는 얼굴을 떨쳐 버림으로써 참된 자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진정한 성적 황홀감을 느낄 수 있는 잠재력이 그제야 눈을 뜬다. 내가 그 길로 막 접어들었다고 생각한다. 두 사람이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지, 단순히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어떻게 합치할 수 있는지 탐색하는 길로. (p.103-104)

섹스와 오르가슴은 건강에 좋다는 게 사실인가?

그렇다. (만세!) 분명히 그렇다. 아찔한 쾌감을 주는 것 외에도 섹스, 오르가슴은 물론 자위행위도 건강에 유익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저명한 성 연구자이며 뉴저지 주립 대학교 명예교수인 비벌리 휘플(Beverly Whipple)박사는 섹스의 검증된 이점을 다음과 같이 나열했다.

-장수에 도움이 된다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섹스를 하면 심장병과 뇌졸중 위험이 낮아진다
-유방암 위험이 낮아진다
-면역 체계가 강화된다
-숙면에 도움이 된다
-나이보다 어려 보인다
-체력이 좋아진다
-자궁내막증 발병 위험이 줄어든다
-생식 능력이 확장된다
-생리 주기가 규칙적으로 유지된다
-생리통이 완화된다
-조산 위험이 낮아진다
-만성 통증이 누그러진다
-편두통이 완화되는 경우도 있다
-삶의 질이 높아진다
-우울증 위험이 감소한다
-스트레스가 줄어든다
-자존감이 높아진다
-파트너와의 친밀성이 강화된다
-정신적 성장에 도움이 된다


이런 증거가 산처럼 쌓여 있다. 오르가슴은 그저 좋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유익하다. (p.140-141)

(침대에서 여자들은 어떤 걸 원할까? 에 대한 대답들 중)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대부분의 여성에게 섹스와 사랑은 하나로 얽혀 있다. 섹스 자체를 위해 섹스를 즐기는 여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여성에게 섹스는 사랑의 표현이다. 소중히 여겨진다고 느끼지 못하면 당신이 아무리 원해도 여성의 몸이 반응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를 다정하게 대하라. 그러면 쾌락은 자연히 따라 올 것이다. (p.143)

우리가 오르가슴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모욕감을 느끼지 마라. 일부 축복받은 여성들은 야한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절정에 달하지만 대부분의 여성은 삽입성교만으로 오르가슴을 느끼지 못한다. 만약 당신이 우리의 오르가슴에만 에너지를 쏟는다면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만족을 안겨 줄 많은 기회를 놓치는 셈이다. 우리를 기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되 우리를 압박하지 마라. 많은 여성들은 테크닉이 뛰어난 파트너와 섹스를 하면서도 오르가슴을 느끼지 못한다. (p.145)

행위가 끝나면 우리를 꼭 껴안아라. 몸을 홱 떼고 스포츠 중계를 보러 가지 마라. 우리는 섹스할 때 무방비 상태로 자신을 드러냈고 섹스 후에는 탈진한 상태가 되었다. 행위가 끝나도 당신이 여전히 곁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다. 우리를 안고 조금만 더 곁에 있어 달라. (p.147)

나는 유효성이 증명된 음핵 자극을 통해 오르가슴에 도달하는 편이고 안타깝게도 삽입성교만으로 오르가슴을 느끼는 30퍼센트에는 들지 못한다. 샐리를 비롯한 로맨틱 코미디의 여주인공이 황홀경에 빠지는 걸 보고 한때는 나도 삽입성교로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의대에서 공부하던 시절처럼 죽기 살기로 노력하면 가능할 줄 알았다.
(중략)
그 일로 나는 한 가지 교훈을 얻었다. 오르가슴은 자의로 만들 수 없다는 것. 그건 하려고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인생에서 벌어지는 다른 많은 일들처럼 그저 순응할 수밖에 없다. 손에 넣으려 애쓰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어야 한다. (p.149-151)

질 분비물이 골칫거리라는 건 잘 안다. 분비물은 팬티를 더럽히고, 끈적끈적 불쾌한 느낌을 주고, 음모에 딱딱하게 말라붙는다. 도대체 분비물은 왜 나오는 걸까? 우리는 왜 그런 모욕을 감수해야 하는 걸까?
질은 입이나 코처럼 점막으로 이루어져 있다. 점막은 세균이 득실대는 외부 세계와 우리 몸의 섬세한 내부 기관 사이에 놓인 출입문이다. 질은 해야 할 일이 있으며, 질 분비물은 그 중요한 기능의 일부를 담당한다.
분비물은 질을 깨끗하게 만든다. 분비물이 몸 밖으로 나오면서 질 속의 늙은 세포들을 제거해 새롭고 건강한 세포들이 생겨날 자리를 만든다. 또 분비물은 질의 감염을 막고 건강한 환경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바람직한 산성 pH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피부의 수분을 유지하는 기능도 있다. 분비물이 없다면 질이 말라서 가렵고 아플 것이다. 그러니 질 분비물에 대해 불평하지 말고 고맙게 여기자. 모든 존재에는 다 이유가 있다. (p.179-180)

이 문제는 그냥 내 말을 좀 들었으면 좋겠다! 마사지를 받은 뒤 유산 했더라도 마사지가 원인은 아니다. 유산은 그냥 벌어지는 일이다. 당신이 한 어떤 행동과도 무관할 가능성이 높다. 비정상적인 아기를 가진 채 계속 배가 불러 가지 않도록 자연이 당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p.243)

입덧의 원인은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HCG 라는 체내 호르몬 수치 상승과 관련이 있다는 게 주된 이론이다. 원인이 뭐든 간에 입덧은 임신 초기에 나타나는 건강한 신호다. 입덧이 없다고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입덧을 하는 것은 좋은 징조다. 입덧을 한 여성은 유산 또는 사산의 가능성이 더 낮다. 그러니 밝은 면을 보자. 입덧 때문에 못살겠다고 한탄하지 말고 생각의 틀을 바꿔 보라. 자연은 아기가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입덧으로 당신에게 알려 주는 셈이다. (p.251)

경막외마취를 통한 분만은 경솔한 선택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경막외마취 및 그때 쓰는 진통제에는 분명 나름의 위험이 있다. 하지만 자연 상태의 진통을 방치하는 데에도 역시 위험이 따른다. 진통을 통제하기 위해 의사들이 사용하는 방법은 안전하고 효율적이며, 미국의 대형 병원에서 분만하는 여성의 70퍼센트는 그 방법을 선택한다.
그런데 아기를 낳을 때는 고통을 느끼는 게 정상일뿐더러 필요한 일이고, 약을 써서 진통을 경감시키는 것은 나쁜 짓이라고 목소리 높여 설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이들에게 나는 (그들의 개인적 신념에 대해서는 최대의 사랑과 존경을 보이면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진통할 때 마취제를 쓰고 싶지 않다면 당신은 쓰지 마라. 하지만 당신의 친구, 자매, 동료, 이웃이 임신했을 때는 그런 생각을 마음에만 담아 두라. 그건 당신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당사자의 몫이다." (p.267)

부탁한다. 부디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앤젤리나, 케이티, 하이디, 니콜, 할리와 비교하지 마라. 우리 대부분은 애초에 그들처럼 예쁘게 생기지 않았다. 그런 우리가 아기를 낳은 뒤의 모습이란… 잊어버리자. 자신을 슈퍼스타와 비교하는 건 불안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다.
슈퍼마켓 계산대에 `출산 후 몸매 관리`기사가 붙어 있는 걸 볼 때마다 나는 속이 메스꺼워진다. 이제 막 엄마가 된 여성들인데, 아직도 압력이 더 필요한가? 산후6주 검사를 받을 때쯤엔 슈퍼모델처럼 보이기라도 해야 한다는 건가? 이게 뭔 개소리야! (p.278-279)

당신의 감정을 인정하지 않는 그런 말은 흘려들어라. 느껴지는 그대로 느끼고, 죄의식, 수치, 후회에 사로잡히지 마라. 꿈이 실현되지 않았을 때는 슬픔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 그런 실망감을 숨기는 것이야말로 산후우울증 같은 심각한 문제를 부른다. 감정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기쁘면 기쁜 거고, 슬프면 슬픈 것이다. 필요하다면 산후 심리문제를 다루는 데 증숙한 치료사에게 도움을 구하라. 하지만 초조해하지 말자. 그런 감정을 겪어내고 나면 행복하고 건강한 아이를 키우는 데 필요한 사랑이 당신 속에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아이의 성별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p.299)

나도 조만간 폐경을 맞을 것이다. 많은 여성들이 그렇듯, 나 역시 폐경이 두려웠다. 안면 홍조, 식은땀, 기분 변화, 머릿속 안개, 불면증, 질 건조증, 피부 변화, 체중 증가를 환영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지만 삶의 변화가 임박해 오면서 두려움을 떨쳐 내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껏 과거로 돌아가길 바란 적이 한 번도 없다. 해마다 가르침을 얻고 성장을 경험했다. 신은 불안, 허영, 자존심, 이기적 선택으로 점철된 이십 대를 다시 살 기회를 주지 않는다. 삼십 대 때는 또 어땠나? 이십 대보다야 나았지만 진정한 소명에 눈을 뜨지 못한 채 좀비처럼 사는 나날이었다. 그러나 사십 대로 접어든 지금은 전혀 다르다. 팔자주름과 희머리, 검버섯이 생겼지만 그런 건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나이가 들면 젊음의 광채는 퇴색하고 만다. 하지만 진정 되고자 했던 존재를 향해 나아감에 따라 우리는 다른 종류의 빛을 발하게 된다. (p.300-301)

대부분의 사람들은 합병증 없이 애널섹스를 즐길 수 있다. 내 환자들 중에도 수십 년 동안 정기적으로 애널섹스를 한 사람들이 많은데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다만 애널섹스를 하기 전과는 배변 느낌이 달라서 변이 그냥 엉덩이에서 쑥 빠지는 느낌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의사인 내 눈으로 보면 애널섹스를 하는 사람과 안 하는 사람의 항문은 좀 다르다. 직장 검사를 할 때 보면 뭐랄까, 좀 헐거운 느낌이다.
항문괄약근을 억지로 벌리면 손상을 입어 변을 흘리거나 방귀를 통제하지 못할 위험이 높아진다. 한 유명 포르노 배우가 최근 리얼리티 TV 프로그램에서 방귀를 끼고 말았는데(웃기려고 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 장면을 본 나는 애널섹스를 많이 한 탓이라고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p.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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뽈따구 2015-11-04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말리아 여성의 고통을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아파서 눈물이 날........ ㅠㅠ

다락방 2015-11-04 11:36   좋아요 0 | URL
너무 가슴이 아프죠. 어릴때부터 어마어마한 학대를 당하는건데 성인이 되어서도 똑같아요. 울컥 치밀더라고요. ㅠㅠ

살리미 2015-11-04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례는 정말 사라져버렸으면 좋겠어요. 문화 상대주의고 뭐고간에 인간을 기본적으로 존중하지 못하는 풍습은 악습이고 폐단이죠!
다락방님이 흥분하셨을때 진작 이렇게 좋은 책일거라 예상은 했지만 정말 좋군요!!!

다락방 2015-11-04 15:56   좋아요 0 | URL
네 문화라고 해도 용인되지 못할 것이 아닌가 싶어요. 맙소사, 여성의 성기를 꼬매버리다니요! 이게 말이 됩니까! 일전에 [데저트 플라워] 보니, 소독도 제대로 안하고 그저 아무데서나 자르고 꼬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이걸 푸는 과정도 저토록 다쳐야 하다니...너무 속이 상했어요, 오로라님.


2015-11-04 1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04 15: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hellas 2015-11-04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화라고 옹호되면서 자행되는 폭력은 언제쯤 사라질까요 ㅡㅡ

다락방 2015-11-04 15:57   좋아요 0 | URL
폭력이죠, hellas 님. 이건 문화라고 보고 넘겨야하는 게 아니죠. 이건 폭력이에요. 말씀대로 언제쯤 사라질까요..

hellas 2015-11-04 16:10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요. 문화랍시고 포장해서 그딴 야만을 행하는거 진짜 역겨워요 ㅡㅡ

에이바 2015-11-04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막의 꽃, 책으로도 읽고 영화로도 봤어요.. 여성할례 정말 끔찍하고 야만스러운 행위죠. 문화라 포장되는, 기저의 사고방식...

다락방 2015-11-04 17:08   좋아요 0 | URL
저는 영화만 봤는데요, 여자가 병원가서 치료를 받으려고 하자, 같은 나라 출신의 남자 간호사가 절대 그러지말라고 자신의 언어로 협박하는 거 보고 진짜 기가 막혔던 기억이 나요. 하아-

단발머리 2015-11-05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방송에서 한비야씨가 여성할례에 대해 말하고 나서, 전 그 때쯤 알게 됐어요.
그 많은 여성들이 그 극심한 고통가운데 있는데, 사람들은 말하지 않고, 우리는 모르고...

내가 이 나라에 태어나 다행이라는 안도가 오늘 이 시간 괜찮은건지 잘 모르겠지만,
아직도 이런 악습이 문화의 이름아래 자행되는 나라가 많다는게 너무 슬프고,
그 희생자인 어린 여자아이들 때문에, 정말 마음 아픈 아침입니다.

다락방 2015-11-05 09:29   좋아요 0 | URL
태어나길 그런 환경속에서 태어나고 또 그런 환경속에서 자란다면, 그냥 다 그런줄로만 알지 잘못됐다는 생각을 하긴 어려울 것 같아요. 영화 [데저트 플라워]에서도, 할례를 받고 잘못된 여성이 자신의 발로 병원을 찾고 그것이 나쁜것이다,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환경을 접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교육이 중요한 것 같아요. 책을 읽고 배우고 이야기 나누고 또 다른 많은 문화예술을 접한다는 것은, 여기에서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알 수 있는 수단이 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할례는 정말 끔찍하죠. 정말 끔찍합니다. 저는 할례를 하는 것 자체가 끔찍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푸는 것도 저렇게 고통스러울 지는 몰랐어요...

1004ajo 2015-11-08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엔 참 어마어마한 일들이 있네요.

다락방 2015-11-10 15:21   좋아요 0 | URL
네, 정말 그렇습니다. 말도 안되게 나쁜 일들이 곳곳에서 일어나요..
 
보그 Vogue Korea 2015.11
보그 편집부 엮음 / 두산매거진 / 2015년 10월
평점 :
품절


차례차례 처음부터 끝까지 페이지를 넘겼지만, 이 잡지 한 권 안에 내가 읽고 싶은 글은 1도 없었다. 오, 이럴 수가! 내가 얻고 싶은 정보도 여기 안에 없었고, 내가 원하는 재미라는 것도 이 안에 없었다. 한 시인의 인터뷰가 실려 있긴 했는데, 한 페이지. 개미 머리보다 작은 글씨로 쓰여져 있어서 읽고 싶지 않아 몇 줄 안읽고 관뒀다. 대신 이 책안에는 내가 입을 수 없는, 그보다는 '살 수 없는' 옷들과 내가 구매하지 못할 가방들만이 가득했다. 하다못해 아이패드 케이스도 스마이슨 제품이라고 한 귀퉁이에 나와있는 페이지. 스마이슨의 다이어리를 사고 싶었지만, 정말이지 '더럽게' 비싸서 사지 못했던 나로서는 아이패드 케이스는 헐 스럽기만 하다. 물론 누군가에게 이 많은 페이지들-옷과 옷과 옷과 가방과 가방과 보석과 보석이 가득한-은 분명 유용한 정보일 수도 있을 것이며, 최신 흐름을 파악하는 수단이 되어주기도 할 것이지만, 나는 아닌 걸로..



오로지 로지 헌팅턴 휘틀리를 읽기 위해 샀는데, 역시나 '읽을' 수는 없었고, '볼' 수는 있었다. 히피룩이라고 옷 입은 화보만 잔뜩. 그런 것은 내게 아무런 필요도, 소용도 없다. 나는 로지처럼 히피 룩을 입을 수가 없잖아? 로지가 아니라서 못입겠다는 게 아니라, 애초에 그런 옷을 입고 일상을 살 수가 없다고. 나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회사를 다녀... 토요일엔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일요일엔 널브러져... 여튼, 그 와중에 깨알같은 로지에 관한 '글'은 이만큼.




인스타에 꾸준히 올라오는 그녀의 란제리 사진은 그녀 자신이 디자인한 거였구나! 그래서 그렇게나 올리는 거였어. 이 페이지의 한 귀퉁이에 실린 로지의 사진들중 아래 오른쪽 스타일이 참 좋더라.



헤어스타일의 완성은 얼굴이라고들 하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지만, 어쨌든 나도 저렇게 앞머리 없는 긴머리가 이제 되어보는 걸로..아, 앞머리 길리느라 성가시다. 지금 막 길기 시작해서 이걸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똑딱삔으로 양쪽으로 꽂아버릴까... 



이 잡지엔 실리지 않았고 이 글들과도 아무런 연관이 없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은 아래이다. 이 사진은 지금 내 핸펀 배경화면. 이들의 커플 사진을 보면 손을 잡고 다니기도 하고 떨어져 다니기도 하고 로지가 팔짱을 끼고 다니기도 하는데, 뭐든 다 좋다, 그냥. 난 이 커플이 왜이렇게 좋을까?





그리고 하릴없이 스마이슨 아이패드 케이스 검색해보았다. 나는 아이패드도 없으니 케이스 살 일도 없겠지만, 아이패드가 없어도 살 일이 1도 없는 케이스가 아닐까.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옷과 신발들과 가방들을 어딘가에서 누구는 가지고 있고 착용하고 있고, 뭐 그렇겠지? 나랑은 관계가 1도 없는 잡지라서 내 스타일대로 별을 하나만 줄까 하다가, 어차피 그럴지도 모른다고 알면서도 산 거니까 소비자 과실로 인해 별 하나를 더 찍는다.


여튼 다 훑어봤고 원상태 그대로인 이 잡지를 나의 중고샵에서는 무료배송으로 3,200원에 팔고있다. 킁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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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부인 2015-10-22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우월한 기럭지보소.. 폴란드에서 가끔 지나다니다가 한숨 날때있어요. 어쩌면 체형이 달라도 이렇게 다를수 있을까하는.. 제국주의자라 하심 어쩔수 없지만도. 그들의 다리기럭지와 눈썹기럭지와 깊은 눈매는 늘 아시아인에게 우울함을.. 뭘 먹어야 하는건지.

다락방 2015-10-22 16:35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ㅎㅎ 저는 키는 작은데 앉은키가 큰 사람이라 ㅋㅋㅋㅋ 유전적으로 다리가 짧아요.. -0-
어째서 저들은 저렇게 길고 이쪽은 이토록 짧아야 하는걸까요? 왜그럴까요? 왜죠? 하하하하하 ㅠㅠ

레와 2015-10-22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 제이슨 스테덤 같은 애인과 손을 잡고 걸어가면 세상에 무서울게 없을거 같아요.
다 덤벼! 막 이런 기분? ㅋㅋ


패드케이스를 바꿀때가 되서 오!하고 봤는데, 가격이 .. 가격이.. 저게 뭐여?????????? +_+


다락방 2015-10-22 16:35   좋아요 0 | URL
응 뭔가 가슴 가득 꽉 차오를 것 같은 그런 기분을 줄 것 같아요, 제이슨 스태덤과 손잡고 걸어가는 건 말야. ㅎㅎ

저렇게 비싼 패드케이스지만 누군가는 사겠지...수요가 있으니까 공급도 있고 뭐 그런 거겠죠? --^

moonnight 2015-10-22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리 진짜 기네요-_-; 예전에 부록때문에 저런류의 잡지를 산 적 있었는데 참... 나와는 관계없는 잡지구나 생각했어요ㅎㅎ;

다락방 2015-10-27 12:19   좋아요 0 | URL
제가 아는 사람중에는 이 잡지를 정기구독 하는 사람도 있었거든요. 사람은 참 다르구나 싶네요. ㅎㅎ 저랑 문나잇님과는 관계없는 잡지지만 판매량은 엄청난듯해요. 전세계적으로...

transient-guest 2015-10-23 0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는 용도로 가끔 서점에서 뒤적거립니다. 야한잡지만 아니면 포장되어 있는게 없어서 잡지코너에서 원하는 걸 다 볼 수 있어요.ㅎ 보그보다는 GQ를...넘사벽이죠.. 거기에 나오는 옷도 사람길이도...ㅎㅎ

다락방 2015-10-27 12:20   좋아요 0 | URL
제 주변엔 보그나 지큐를 다 넘사벽이라고 하는데 그 잡지들은 그저 넘사벽 용도로 있는걸까요? 누군가에겐 요긴한 정보 제공이 되어 쇼핑에 도움이 되는걸까요? 사실 용도를 잘 모르겠어요. 최신트렌드 따라잡기인가...

2015-10-27 18: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만큼 가까이 - 제7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정세랑 지음 / 창비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후반까지의 시간은 내게 없었던 거나 다름없다고, 나는 늘 그렇게 생각해왔다. 내 인생에 그 시간을 송두리째 들어내도 지금의 나와는 별로 달라질 게 없었을 거라고. 그 시간들은 내게 기억나지도 않고 또 추억되지도 않는 시간들이다. 무채색 혹은 단순히 '무(無)'라고 표현되어도 딱히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 시간들이 내가 잊어야할 만큼 나쁜 기억들이 존재했던 시간들은 아니다. 그 시간들 동안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공부를 '조금' 했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고, 열심히 먹었고 또 연애를 하기도 했다. 그러니 송두리째 들어내도 아무 상관없었을 거라는 내 생각은 사실 틀렸을 것이다. 지금의 내가 되기에 그 시간들이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내게는 그 시절이,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이란 느낌을 주는 것이다. 살아있는 나, 나 같은 나, 지금의 나는, 그 이후부터 만들어진 것 같다.

 

 

'정세랑'의 소설 [이만큼 가까이]는, 그런 나와는 정 반대의 입장에 놓인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들에게는 내가 '없었다'고 생각한 그 시간이, '없을 수는 없는', '도무지 지울 수 없는', 강한 시간들이며 존재해야만 했던 시간들이었다. 같은 동네에 살고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은 학교를 다니면서 여섯명의 친구들은, 각자의 특성을 인정하고 그렇게 어울리며 친해진다. 친구들과 일상속에 작은 일들을 공유하면서 또한 첫사랑을 시작하기도 한다. 그렇게 아름답고 소중한 시간들을 쌓아나가다가, 치명적인 아픔을 겪게도 되고. 그 아픔과 상처 때문에 온전히 건강하지 못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기에 함께했던 친구들은 따로 또 같이 지금도 함께하고 있다. 물론 중간에 누군가는 사라져야 했고 또 누군가는 무너져가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 시간들이 또 그 친구들이 지금의 그들을 만들었다. 그들에게 그 시간은 분명히 존재했던 시간들이었고, 그 시간들이 존재했기에 그들도 존재했다.

 

 

사람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책을 읽으며 조용히 생각해본다. 작가가 보여주고자 한 부분도 결국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가 아니었을까. 사소한 장면에 따뜻함을 넣는 건, 사람이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일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버스에서 주완이는 겹겹이 일어난 버스 벽에 옆머리를 대고 졸았는데, 졸면서도 손을 놓지 않았으므로 섭섭하지 않았다. (p.163)

 

졸면서도 손을 놓지 않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여전히 세상은 존재하고 여전히 우리는 사람을 만나면서, 그러면서 하루하루 더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외롭다고 느끼고 공허하다고 느끼다가도, 이렇게 졸면서도 내 손을 잡아주는 사람 때문에 우리는 내일 아침 다시 눈을 뜰 용기를 낼 수 있는게 아닐까.

 

 

고등학교 시절을 함께 보낸 여섯명의 친구들은 작은 일상을 함께 보내면서 또 큰 사건을 겪으면서 각자의 방식대로 성장한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의 친구인채로 여전히 나이들고서도 만나 각자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분노로 혹은 다정함으로 공유한다.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서 또 한 조직의 조직원으로서는 누군가에게 이상한 사람일 수도 있지만, 내 친구들과의 모임, 내 자리에 앉았을 때의 나는 '그 이상한 게 매력일 수도' 있는 사람일 것이다. 어릴적부터 함께한 친구란 그런 것일 거다.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나를 그대로 봐주고 알아온 사람.

 

 

서로의 결점에 대해 너그러워졌다. 민웅이의 무기력에 대해, 찬겸이의 엘리뜨주의에 대해, 주연이의 쓰디쓴 부분에 대해, 송이의 방랑벽에 대해 …… 아마 친구들도 나의 어떤 부분을 참아주고 있었을 것이다. 일단 애도장애라 해야 할지 뭐라 해야 할지 그 시기를 참아준 것만 해도 고맙다. 변화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변화를 요구하지도 직언을 하지도 않았다. 서로의 얕은 수와 비굴한 계산까지도 웃음으로 넘겼다. 못나면 못난 대로 살아 있어달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한껏 떨어졌다가 다시 가깝게 되고 나서, 우리는 늘 서로의 안위를 걱정했다. (p.193)

 

 

 

나는 오래된 친구가 반드시 좋은 친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어릴때부터 내 모습을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나에 대해 더 잘안다고도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런 시간을 거쳐 내 결점까지 받아들이고 너그러워질 수 있는 사이라면, 그건 얘기가 다르다. 어차피 사람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유지하게 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텐데, 나의 어떤 결점을 보고, 알고, 그것을 알지만 나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거라면,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서로의 안위를 걱정하며 지내도 좋을 사이가 아닐까.

 

 

내게는 '없었던' 시기라고 느꼈던 그때였기 때문인지, 내게는 그 시절의 친구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왕성히 현재를 살고 있는 지금은 대화를 나누고 함께 웃고 또 어떤 결점들을 참아주고 함께 지내는 친구들이 있다. 내게 어린시절부터의 친구는 없지만, 지금의 친구들이 결국은 나중에 오래 남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왕성히 나였던 그때, 너는 내게 있어주었지, 라며 함께 지금을 추억하게 될런지도 모르겠다. 이 책속의 여섯명들이 반짝이던 그때가 내게는 흐릿한 때였지만, 나는 지금이 나의 반짝이는 때라고 확신한다. 게다가 나는 앞으로도 반짝일 예정이다. 그러니  나는 졸면서도 잡은 손을 놓지 않는 사람과 함께 지금을 보내고 싶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모두 착하거나 선하거나 한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또한 폭력과 학대와 방치를 드러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따뜻하다. 가까운 사람에게 가장 피해를 입히는 사람들이, 현실에서도 그런것처럼 당연히 등장하지만, 그러나 상처받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려는, 그 상황에서 빠져나오게 해주려는, 그런 사람들 역시 단단하게 각자의 위치에 서있다.

 

정세랑의 책은 이번이 두번째인데, 이번 작품은 전에 읽었던 [지구에서 한아뿐]보다 더 좋았다. 아, 전작보다 더 좋은데? 하고 생각한 순간 너무나 당연하게도 작가에 대한 기대가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삶이란 좋은 사람들과 손을 잡으며 견딜 수 있는 것일텐데, 좋은 책이 있다면 조금 더 잘 견딜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다. 응답하라 시리즈 같은,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것 같은 소설이란 게 다소 아쉽지만, 정세랑이 더 많이 공부하고 더 열심히 관찰하고 또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일-그러니까 나쁜 일을 포함해서-에 관심을 가져서 더, 더, 좋은 소설을 써줄 수 있기를 바란다.

 

 

 

 

멋이라고는 하나 없이 빡빡 깎은 머리에, 통통한 체격이라 교복 바지가 위태로웠다. 키도 덩치도 크지 않으면서 통통하기만 해서, 게다가 유난히 피부가 분홍빛을 띠어서 아이들은 언제나 새깨되지라고 찬겸이를 놀렸다. 일부러 숨을 들이켜며 꿀꿀 소리를 냈는데, 질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놀리는 정도를 지차녀 사태가 점점 더 폭력적이고 악의적으로 변해가자 당사자가 아닌 내가 성질이 나서 결국 그애들 책상을 걷어찼다. 책상에 명치를 부딪힌 애가 신음 소리를 냈고, 나는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욕설을 퍼부었다. 중학교때까지만도 남자애들과 그렇게 완력 차이가 크지 않았겠지만 돌아보면 겁도 없었던 것 같다. 그때 이후 찬겸이는 불안해지면 내 주변에 와서 얼쩡거렸고 내 친구들하고 친해지려 애썼다. 송이와 나는 대수롭지 않게 이 똑똑하고 동그랗고 분홍색인 남자애를 끼워줬다. (p.23)

"언제 또 올 거야? 길게 있으면 안돼? 언제쯤 와서 길게 있을 수 있어?"
여기가 싫어, 하고 분명히 말하고 떠난 송이인데도 출국 게이트 앞에만 서면 나는 끈끈이 주걱처럼 굴었다.
"할머니가 되면."
그럼 꼭 돌아와서 살 거라고 했다. 나랑 주연이랑 셋이 함께 같은 요양원에 들어가자고 했다.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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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5-09-30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의 손을 결코 놓지 않을께..

다락방 2015-10-01 08:41   좋아요 0 | URL
나와같다면님, 안녕?
:)
 
선셋 리미티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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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의 소설을 읽을 때면 그야말로 소설의 정통, 클래식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어 감탄하고 감동하곤 하는데, 희곡을 읽을때면 다르다. 지난번 읽었던 시나리오 작품 《카운슬러》도 뭔가 읽고나서 '……' 하게 되었는데 이번 작품도 마찬가지. 유독 희곡에서 코맥 매카시는 지독하게 철학적이 되는 것 같다. 그게 나쁘지 않고 또 잘 씹어 읽다보면 고개도 끄덕이게 되곤 하는데, 어렵다는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다. 뭐 확실한 건 그거다. 소설이든 희곡이든, 나는 결코 코맥 매카시처럼 쓸 수는 없을 거라는 거. 



(흑) 하고 싶은 말은 변하지 않지. 하고 싶은 말은 늘 똑같아. 전에도 했던 이야기이고 앞으로도 늘 다시 말할 방법을 찾게 될 얘기지. 빛이 선생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다. 다만 선생이 어둠밖에 보지 못할 뿐이다. 그 어둠은 바로 선생이다. 선생이 그 어둠을 만드는 것이다. (p.114)





(흑) 다른 건물에 산다 해도 그게 그거겠지. 여기도 괜찮아. 혼자 처박혀 있을 수 있는 침실도 있고. 저기 사람들이 죽때릴 수 있는 소파도 하나 있고. 대개 약쟁이에 코카인에 절어 있는 놈들이지만. 물론 놈들이 가져갈 수 있는 건 죄다 들고 가버리니까 나는 아무것도 소유하진 않아. 그게 좋지. 제대로 된 사람들과 어울리기만 하면 늘 뭔가를 갖고 싶은 마음이 결국은 다 치료가 된다니까. (p.39-40)

(백) 더 어두운 그림이 늘 정확한 그림이지요. 세계의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유혈과 탐욕과 어리석음의 대하소설을 읽는 겁니다. 그 의미는 아주 분명하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미래가 어떻게든 달라질 거라고 상상합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우리가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것도 신기한 일입니다. 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해요.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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뽈따구 2015-09-21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대로 된 사람들과 어울리기만 하면 늘 뭔가를 갖고 싶은 마음이 결국은 다 치료가 된다니까˝

그래서, 이걸 알아서, 항상 사람들 속에서 흔들리는 갈대처럼 존재하나봐요.

다락방 2015-09-21 09:49   좋아요 0 | URL
저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앞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제 경우엔 특히나 더 그렇고요.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 웃음 들이 저를 지탱하게 해주고 또 에너지를 주는 것 같아요. 저는 그래서 특히나 `제대로 된 사람들과 어울리기만 하면 늘 뭔가를 갖고 싶은 마음이 결국은 다 치료가 된다`는 말을 믿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훗 :)

신지 2015-09-21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맥 맥카시 작품은 영화에 어울리는 걸까요.
노인, 로드, 카운슬러, 세 편이 다 좋았거든요.

다락방 2015-09-22 08:55   좋아요 0 | URL
저느 그 세작품 모두 책이 좋았었어요.
아, 로드는 영화로 안봤구나..
카운슬러는 특히 그런데, 영화에서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장면이 책에 있더라고요. 그렇지만 책이 더 좋았다, 는 말은 참 부질없는 말인듯 하긴 해요. 뭐랄까, 그런 얘긴 해서 뭐하나, 대체적으로 그러한데, 뭐 그런 심정이랄까요. 하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