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문학동네 시인선 54
이규리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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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사정을 알고 있는 ㅈ 와 나는 어제, 실컷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ㅈ 는 내게 몇 개의 시를 알려주고, 나는 줄리언 반스의 문장을 다시 한번 인용했다. 모든 사랑은 잠재적으로 비탄의 이야기다, 하는 것을.


모든 사랑 이야기는 잠재적으로 비탄의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아니었대도, 결국 그렇게 된다. 누군가는 예외였다해도, 다른 사람에겐 어김없다. 때로는 둘 모두에게 해당되기도 한다. -줄리언 반스,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中에서


결국 나는 ㅈ 의 추천을 받아 시집 한 권을 사기로 했고, 장바구니에 넣고 결제하기 직전, 아니다, 지금 당장 읽자, 싶어 퇴근길에 서점엘 들렀다. 서점의 시집 코너 앞에서는 한 여자사람이 책을 읽고 있었고, 나는 내가 원하는 시집에 그곳에 있으니 잠시만 자리를 비켜달라 말했다. 보라색 책등을 찾으니 딱 한 권, 나는 꺼내들고 계산대 앞으로 간다. 아, 그러나 이것은 누가 읽은 흔적이 있다. 조금 낡았어...나는 얼른 책 검색하는 컴퓨터 앞으로 가 재고를 확인한다. 만약 두 권이라면 다른 한 권으로 가져오고 싶어져서. 그러나 이거 한 권 뿐. 히잉. 어쩔 수 없지. 책 표지가 조금 낡았어도 안의 내용은 변함없을테니. 그렇게 계산을 마친다.






나무가 나무를 모르고



공원 안에 있는 살구나무는 밤마다 흠씬 두들겨맞는다

이튿날 가보면 어린 가지들이 이리저리 부러져 있고

아직 익지도 않은 열매가 깨진 채 떨어져 있다

새파란 살구는 매실과 매우 흡사해

으슥한 밤에 나무를 때리는 사람이 많다



모르고 때리는 일이 맞는 이를 더 오래 아프게도 할 것이다

키 큰 내가 붙어다닐 때 죽자고 싫다던 언니는

그때 이미 두들겨맞은 게 아닐까

키가 그를 말해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평생

언니를 때린 건 아닐까



살구나무가 언니처럼 무슨 말을 하진 않았지만

매실나무도 제 딴에 이유를 남기지 않았지만

그냥 존재하는 것으로 한쪽은 아프고 다른 쪽은 미안했던 것

나중 먼 곳에서 어느 먼 곳에서 만나면

우리 인생처럼



그 나무가 나무를 서로 모르고




내년도 다이어리를 사고 싶은 마음에 다이어리 코너로 가며 읽다가 그 자리에 멈추어섰다. 모르고 때리는 일이 맞는 이를 더 오래 아프게 한다는 것이, 휭-하니 가슴을 스치고 지나간다. 어쩌면 나도, 그렇게 많이 때렸을 지도 모르겠다. 나는 너를 때린 적이 없잖아, 수없이 항변해본들, 그가 맞았다는 데야 별 수있나. 나는 그렇게 누군가를 어디에서든 때렸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나를 때린 적이 있는 것도 당신이 모를거라는 생각도 그제야 들었다. 당신은 나를 때리려고 했던 게 아닌데, 그냥 그 자리에서 그렇게 웃으면서 모르는 채, 나를 때리고 있었던 것을. 그렇다면 나는 당신을 원망해야 할까. 아니, 당신의 존재는 아픔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존재는 다행이었다. 다음 생에서 만나면, 아니 나중 먼 곳에서 만나면, 우리 모르는 채라도 서로를 때리지 않는 사이가 되었으면 해.


그런데 혹여, 나한테 두들겨맞은 사람이 있나요? 으슥한 밤, 내가 당신을 매실나무인 줄 알고 발로 차진 않았나요?

미안합니다.

나는 이제 그것이 매실나무이든 은행나무이든 발로 차지 않는 사람이 될거에요.




벚꽃이 달아난다



그는 나를 앞에 두고 옆사람과 너무 화사하다

이편 그늘까지 화사하구나

죽방렴 사이를 빠져나가는 한 마리 멸치처럼

빠른 내 그늘을 눈치채지 못한다

나무둥치라 여긴 내 중심은 자주 거무스름하다

임산부가 행복하다면 가뜩 낀 기미는 말할 수 없었던

속내일까



덜컹거리며 꽃길 백 리,

어쩌자고 화염길 천 리,



나는 역방향에 앉아서

그가 다 보고 난 풍경을 

뒤늦게 훑는다



그 자리 그대로인데

풍경은 왜 놀란 듯 달아나고 있는지



벚꽃은 제가 절정인 줄 모르고

절정은 또한 제 시절을 모르고




빛이 있는 곳에 그늘도 있으니, 그의 화사함이 내게 전해질 때 그 화사함은 내게 그늘을 드리운다. 그러나 왜 그늘은 빛을 보고 빛은 그늘을 눈치채지 못할까. 빛은 제 빛에 빠져 화려하게 피어난 꽃을 보고 바싹 마른 빨래를 본다. 그러나 너는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 당신은 화사함으로 존재하고, 그 화사함에 그늘을 드리운 나는 두들겨맞고. 그저 존재하는 것으로 마냥 나를 아프게 할 때가 있었지. 나는 당신의 화사함이 아팠어. 이 편까지 건너온 당신의 화사함이. 왜 그 화사함은 이편까지 건너온걸까. 대체 어쩌자고 그렇게나 넓게 퍼졌던걸까. 아프게. 


화사함이 아플 수 있다니!




웃지 마세요 당신,



오랜만에 산책이나 하자고 어머니를 이끌었어요

언젠가 써야 할 사진을 찍어두기 위해서였죠

팔짱을 끼며 과장되게 떠들기도 했지만

이 길을 또 얼마나 걷게 될지



사진관에 들어섰을 때

어르신 한 분이 사진을 찍고 계셨어요

어머니가 급격히 어두워졌어요



나도 저렇게 하는 거냐



이게 요즘 유행이라며

평소에 미리 찍어두는 게 좋다며

나도 젊을 때 찍워둬야겠다며

쫑알대는 내 소리에는 눈도 맞추지 않으시더니



사진사가 검은 보자기를 뒤집어쓰자

우물우물 급히 말씀하셨어요



나 웃으까?



그 표정 쓸쓸하고 복잡해서 아무 말 못했어요



돌아오는 길은 멀고 울퉁불퉁했고



웃지 마세요

그래요 웃지 마세요 당신,



나는 웃으라고 말해야 할까, 웃지 마세요, 라고 말해야 할까. 

나는 손을 잡고 사진을 찍으러 가야 할까, 찍으러 가지 말아야 할까.





들어내다



인테리어 기본 요건은

자리를 바꾸고 요소를 덧대는 게 아니라

들어내는 것이라고,

더 좋은 관계를 바란다면 관계에서 나와야 할까

그렇다고 고라니처럼 고속도로로 뛰어들어선 안 된다



분갈이 하는 아저씨는 흙을 더 채우는 게 아니라

뿌리에 있던 흙을 털어내고 있었다 숨쉬게 한다고 했다



언니가 없으면 독방을 차지할 거라 기대했지만

나 먼저 들어낼 줄은 나도 몰랐듯이



들어내도 나가지 않는 게 있고

다 알면서 들어낼 수 없는 것도 있다



고라니가 잘못 뛰어든 곳은 고라니가 들어낸 길이었을까

들어내지 못한 길이었을까




들어내야 하는거라고, 그게 맞는거라고, 그게 숨쉬게 하는 거라고 그토록 생각하면서도 들어내지 못하는 것들이 생겨난다. 들어내지 못하는 게 아니라 들어내기 싫은 걸지도 모르겠다고. 그래도 이를 악물고 들어내려고 했더니 이토록이나 힘이 들어, 주저 앉아 울고 싶어지려는데 당신이 말했다. 들어내지 말라고. 내가 들어내야 당신이 더 편하지 않을까, 아니, 들어내지 말라고. 나에게 드리운 그늘이 사라질 수 있을까. 나는 당신의 화사함 속의 일부가 될런지도 모르겠다. 당신의 화사함이 꽃을 피울 때, 빨래를 말릴 때, 반짝거릴 때, 흐느적거리는 먼지 조차 선명하게 비출 때, 내가 그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 혹여 그렇게 된다면, 나는 그늘을 보는 사람이 될거야. 쪼그려 앉아 그늘을 볼거야. 우리는 그늘이 있음을 잊지 않는 사람이 되자. 당신도 나도 언젠가는 짙게 드리운 그늘이었을 테고, 어쩌면 앞으로도 화사함 대신 어둠이 채울런지도 모르니. 언젠가 당신에게서 나를 들어내고 나에게서 당신을 들어내야 할 때도 물론 오겠지만, 시간이 오래 지나도 당신을 내게서 들어내는 일은 아마도, 쉽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인테리어를 예쁘게 할 수는 없는 사람일까? 나는 당신의 뿌리에 지나치게 들러붙은 흙이 되고 싶진 않아요.





현관문 나서다가



현관문을 나서다가 나는 다시 돌아오지요 돌아와선 왜 왔

는지 잊어버려 다시 나가요 나가다가 생각하니 그게 시계

였어요 시계를 찾기 위해 내가 뒤지는 곳은 시계가 없는 곳

이죠



당신과 헤어지기 위해 만나는 것처럼 시계를 찾다가 시간

을 잃어버리는 일, 시간을 찾다가 손목을 잃어버리는 일, 새

롭지도 않아요 오늘은 약국에 들어야 하는데 증세가 생각

나지 않아요



하얀 알약을 보면 왜 죽음이 떠오르는지요 편도염을 낫게

하는 알약을 한꺼번에 털어넣은 아랫방 언니가 있었거든요

그녀는 무얼 잊고 싶었던 걸까요



시계는 찾지 못하고 시간은 멎었어요 우린 평생 없는 걸

찾아다니겠지만, 찾아야 할 건 이미 옆에 있었다고 누군가

말하지만, 그런데도 그건 영원히 없는 것이죠



깜빡깜빡 잊으므로 여기 또 깜빡깜빡 살아요 현관을 나서

다 나를 잃어버리고 빨래통에 벗어놓은 나를 뒤집어쓰고 나

아닌 내가 다시 나가요 나가다 생각하니,





당신을 만나는 순간이 당신을 만나지 않았던 순간보다 힘겨웠음은, 헤어짐에 있었다. 당신을 만나지 않은 순간에 내가 기대하는 것은 만남일 수 있었는데, 만나고 있는 순간에 내게 남은건 헤어짐 뿐이었으니. 다음 만남을 기약한다해도 지금 당장 닥친건 헤어짐이고, 나는 마치 이 잠깐의 헤어짐이 영원할 듯 불안하였다. 그랬던 때가

있. 었. 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들어내는 것은 언제나 옳다고 여겼기에 헤어지기 싫다고 발악하지 못했다. 터진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고, 손톱을 깨물고, 발끝으로 땅을 툭툭 헤치는 일들은, 모두 내 속에서만 일어났다. 나는 당신을 평생 찾아다녔지만, 당신은 나를 평생 찾아다니지 않았으므로, 당신이 이미 내 옆에 있었음에도 당신은 내게 없었다. 당신을 들어내고 돌아서는 것이 내 역할이었지만, 들어내도 들어내도 이내 쏟아지는 걸 내가 어찌해.





이규리는 아픈 사람을 본다. 이규리가 말하는 최선은, 들여다봐주는 데 있고 들어주는 데 있다. 아픈 사람을 때리지 말라고 말하는 대신 혹여라도 내가 때렸으면 어쩌지, 하고 그늘을 만들지 말라고 말하는 대신, 그늘이 생겨있음을 알려준다. 어쩌면 최선은 그런 것일게다. 하지마, 라고 말하기에 앞서 어쩌면 나 역시 그러고 있는 건 아닐까, 되새겨 보는 일. 그렇게 돌아봄으로써 우리는 간혹 우리가 때리고 있었음을, 그늘을 만들고 있었음을 눈치채게 될것이다. 꽃을 더 활짝, 오래 피우기 위해 락스를 넣는 일은, 과연 누구에게 필요한 일이었을까. 누군가 아프고 그와 동시에 누군가 즐기는 것이 세상의 이치임을 깨닫는 것, 그것이 이규리의 시가 하는 일이다. 그 잔혹한 명제앞에 잔인한 진실 앞에, 숙연히 고개 떨구며 내 자신의 폭력성을 인정하는 것, 번번이 두들겨 맞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내가 맞은 만큼 누군가를 두드려 패기도 했던 날들이, 있었다. 있었고, 있을 것이다. 그때마다 조용히, 락스를 한 방울 떨어뜨리기보다는 열었던 락스통의 뚜껑을 닫을 수 있기를,

그런 날들에 차마 들어내지 못한 당신이 화사하게 비춰주기를.


이규리는 그늘의 친구다. 




락스 한 방울


꽃꽂이하는 사람이 말해주었다 꽃을 더 오래 보려면 꽃병
에 락스 한 방울 떨어뜨리면 된다고 ‥‥‥아무리 해도 그거
너무 폭력적이지 않나 싶으면서 그 말 왜 솔깃해지는지 머
뭇거리다가 한 방울 꽃병에 떨어뜨렸다 거짓말처럼 뒷자리
가 말끔해졌다 저러자면 누군가는 또 얼마나 참아야 했을
까 너무 똑 떨어지는 이치에는 어딘지 사기치는 냄새가 난
다 후각을 마비시키며 이룬 거사들, 달콤하게 던져준 당근
들, 한 방울 떨어뜨려 애써 제자리를 확보하는 동안 꽃병 속
꽃은 어땠을까 락스 한 방울‥‥‥이 세계에서는 나를 더 연
장하지 않기로 한다





덧. 아....알라딘에서 사면 알사탕 300개를 주네......하루만 참을걸 ...... 약올라.....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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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4-10-21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에는 비가 내리고...
이곳에는 시가 있고.

다락방 님이 낭독해주면
더 좋을것 같은
나무가 나무를 모르고...

다락방 2014-10-21 09:50   좋아요 0 | URL
크- 아무개님.
제가 기회가 되는대로 저 시를 낭독해서 올려드리겠습니다.
불끈!!

heima 2014-10-21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시집 읽으면서 여름동안 따뜻하고 찡했었는데, 이 글을 보니 다시 한번 꺼내어 읽고 싶어지네요 ^^
날이 꽤 쌀쌀한데 따뜻한 커피 한잔 하시면서 좋은 하루 보내세요 다락방님~ ^^

다락방 2014-10-21 10:49   좋아요 0 | URL
시를 잘 모르는 제가 좋은 시집을 만난 건 무척 오랜만이라 좋습니다. 바느질이고 뭐고 다 필요없다는 생각이 들지 뭡니까. 가만히 앉아 시를 읽는 일이면 충분하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좋은 하루의 시작입니다, 헤이마님. 잘 보내요! :)

blanca 2014-10-21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네요....

다락방 2014-10-22 10:31   좋아요 0 | URL
좋지요, 블랑카님? :)

그렇게혜윰 2014-10-21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집 좋죠? 옮겨적어야지 했다가 아직 이러네요....^^;;

다락방 2014-10-22 10:32   좋아요 0 | URL
네, 좋아요, 그렇게혜윰님. 좋으네요. 좋은 시집을 만나서 참 좋아요. 회사 동료에게 빌려줬어요. 시집 한번 읽어볼래, 하고. 흣

mira 2014-10-21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오는날 커피한잔 놓고 읽어내려가니 웬지 서러운데요 ㅜㅜ

다락방 2014-10-22 10:32   좋아요 0 | URL
비 안오는날 커피없이 읽어도 기쁜 시는 아니지요. ㅠㅠ

단발머리 2014-10-23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이 추천해주셨던 김이듬의 시집에서 <겨울휴관> 때문에 그 시집을 꼭 갖고 싶었어요.
이규리의 시집은

그는 나를 앞에 두고 옆사람과 너무 화사하다

이 한 문장 때문에 너무 갖고 싶네요.
옆에 두고 여러번 읽고 싶어요. ^**^

다락방 2014-10-23 09:59   좋아요 0 | URL
저도 그 한문장이 그렇게나 꽂히더라고요, 단발머리님.
게다가 심지어 `이편까지` 화사하다잖아요? 슬퍼..

오늘인 이 시집에서 이런 구절이 꽂혔습니다.


차 안에 앉아서 비가 따닥따닥 떨어질 때마다
젖고, 아프고,
결국 젖게 하는 사람은
한때 비를 가려주었던 사람이다


크- 취하는 아침입니다.

단발머리 2014-10-23 11:09   좋아요 0 | URL
정말, 시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같은 한국어를 구사하는데.
나도 한국어에는 정통한테...... T.T

어떻게 이런 표현들이...
키햐~~~~~~~~~~~~~~~~~~

다락방 2014-10-23 11:17   좋아요 0 | URL
저는 시를 잘 모르고 시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없지만,
시인이 존재하는 게 무척 감사해요. 시인과, 시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가슴 벅찰 정도로 좋습니다, 단발머리님.
 
노아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 제니퍼 코넬리 외 출연 / 파라마운트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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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선한 사람을 가려낼 수 있기에 신이 당신을 택했다, 는 말이 가장 인상 깊은걸 보면, 나는 인간에 대한 희망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는 사람인 것 같다. 사실 이 영화를 보고나니 정말 신이 존재하긴 하는걸까 하는 의문이 생기지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부터 왔는가..하는 찜찜함이 남는다. 노아 가족으로 부터? 우리 모두가???


그게 신이든 무엇이든,

나는 이 세상을 새로 시작하기 위하여 인간을 모두 심판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그 처절한 비명들 속에 선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 분명 존재했으며, '함'의 말대로 '순수한' 사람도 있었을텐데, 꼭 그랬어야 했을까. 신은 자신의 힘을 너무 막 쓰는 거 아닌가. 또한 무고한 존재는 비단 동물들 뿐인걸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무고한 존재를 살상하는 것도 물론 인간이지만, 그들을 어떻게든 살리고자, 지키고자, 보호하고자 하는 존재 역시 인간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어쨌든 이 영화를 보는 시간은 좋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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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리풀말미잘 2014-10-08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이게 뭐야 ㅋㅋ

다락방 2014-10-08 09:21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뭐 어떻게 더 쓸 수가 없네요? 나 밑천 다 드러났나? ㅎㅎㅎㅎㅎ 역시 백자평으로 썼어야 했는데 줄이지를 못해가지고 아 놔..Orz

버벌 2014-10-08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괜찮았어요? 엄마만 보여주고 전 보질 못햇어요

다락방 2014-10-08 15:50   좋아요 0 | URL
네 괜찮았습니다, 버벌님. 전 dvd 사서 봤어요. 굳 다운로더에 없길래 ㅠㅠ
 
아침의 첫 햇살
파비오 볼로 지음, 윤병언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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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여자는 알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자의 남편은 그런 그녀의 말을 들은척도 하지 않으며, 우리 사이에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그는 여자가 달라지고 있는 걸 눈치채고 있었지만 애써 못본척 한다. 그에게 가정생활을 끝내는 것, 여자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으므로. 그러나 여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남편을 보는 것이 힘들어지고 새로이 만난 남자에게 속절없이 끌려간다. 새로운 남자와 비로소 자신이 생각만 했던,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성적 환상들을 풀어나가며 서서히 또다른 자신을 발견해간다. 내 안의 숨겨진 나를, 내가 그간 보지 못했던 나를.


여자는 남자에게로 향한 욕망이 어느새 사랑으로 바뀌었음을 깨닫게 되고 남자도 자신을 사랑하는지 확인하고 싶어한다. 혹여라도 그를 잃진 않을까 걱정되는 마음이 지나쳐, 그와 떨어져 지내야 하는 2주간, 그녀는 집착의 끝을 달리게 된다. 집요한 여자가 되고 과잉 행동을 보이는 여자가 된다. 남자가 있는 곳으로 가려던 여자에게 여자의 친구는 그건 경계를 넘어서는 일이니 가지 말라 조언하지만, 여자는 오지 않는게 좋다던 남자의 말을 자기 좋을대로 해석한 뒤 연락도 없이 그를 방문하고, 그건 여자와 남자를 갈라놓는 계기가 된다.


아, 이 여자야. 지나치고 있어, 그렇게 집요하면 상대는 당신을 떠나게 된다고. 그녀가 집요함의 꼭대기에 올라 있을 때 나는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걸 여자의 친구가 해줬고, 내가 예상한대로 여자에게 조언은 먹혀 들지 않았다. 사랑과 욕망에 정신이 나가 있는 여자에게 대체 무슨 말이 들릴 것인가. 이 책을 통틀어 가장 잔인하게 혹은 아프게 읽힌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집착에 쩔어 허우적대는 장면. 내적 갈등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집착을 감추지 못해 입 밖으로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내뱉는 장면장면들. 그 후에 찾아오는 쓰라린 후회. 이렇게까지 가진 않아야 했어, 그 말은 하지 않았어야 했어... 아, 그들은 좀전까지 얼마나 뜨거운 연인들이었던가! 


01:48

-나 아직 깨어 있어. 자긴?

02:03

-자긴 나랑 놀고 싶지 않은 모양?

02:20

-아무 때라도 좋으니 대답해줘. 걱정돼서 그래.

02:51

-별일 없는지만 알려줘. 아니면 나 잠 못 자.

03:03

-혹시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왜 대답 안 해? (p.274-275)




"화가 나서가 아니야. 그냥 수천 개씩 쏟아지는 문자 폭격 같은건 받고 싶지 않을 뿐이야. 내가 답이 없으면 그건 그 순간에 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야.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중에 문자나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면 그때 연락하면 되는 거지, 그렇게 한꺼번에 수백 개씩 보낼 필요는 없는 거 아니겠어?"

"미안해, 걱정이 돼서 그랬어. 갑자기 그렇게 사라져버리니까.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하고..."

"아니, 도대체 뭘 걱정한 건데?내가 자기한테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고 얘기해줬고 파티에 간다고까지 얘기했었는데."

"그냥 오케이라고만 보내줬으면 됐을 거 아냐. 나중에 통화하자고 한마디만 해주면 되는 걸 가지고...그게 그렇게 힘든 일이야? 그렇게 사라지는 대신 그냥 버튼 한 번만 누르면 되는 거였잖아."

"난 사라진 적 없어. 그냥 누가 나를 그렇게 몰아세우는 게 익숙하지 않을 뿐이야." (p.278)



-나 여기 왔어.

5분도 안 돼서 전화가 걸려 왔다.

"여기라니, 어디?"

"여기. 바 이름이....'로마'네. 커피 한잔 하고 있어."

침묵이 흘렀다.

"예상 못 했던 모양이지?"

"그래, 데리러 갈게. 5분만 기다려." 

(중략)

조금도 변하지 않는 무뚝뚝한 표정 그대로 그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내게 말했다.

"왜 온 거야?"

가슴팍에 비수처럼 날아와 꽂히는 질문이었다. 나는 솔직하기로 마음먹었다.

"보고 싶었어."

"출발하기 전에 왜 말 안 했어?"

"놀라게 해주고 싶어서." (p.300-301)



집요한 문자폭탄 후 여자가 남자에게 가고 싶다고 했을 때, 남자는 동생네 집이라 동생과 함께 있고 해야 할 일들도 많으니 자신이 돌아오는 대로 목요일에 보자고 하고 여자도 알겠다며 전화를 끊은 후였다. 그런데 여자는 말없이 남자에게로 갔다. 그로 인해 여자와 남자가 헤어졌다한들, 그건 오로지 그녀가 감당할 몫이다. 이런 일들이 여자에겐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고통스럽고 아팠지만, 여자는 그 일이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과 만나며 그리고 자신을 성장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후에 알게 된다.


성장한 여자가 혼자 있는 걸 즐기는 장면, 그리고 우연을 믿는 장면, 그 믿음에 우연이 찾아오는 장면 등은 여자를 위해 기뻐할 일이지만, 여자의 성장 다시 말해 오롯이 자기 자신이 되는 일이 왜 남자에서 시작하며 남자로 끝을 맺어야 할까는 의문이다. 그러나 연애의 과정을 거쳐 이별을 맞닥뜨리는 것이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일, 여자에게 필요한 건 바로 그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현실을 현실로 보지 않고 자신이 보고 싶은대로만 보려고 했던 여자의 남편에게도 이 일은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고.



여자의 내면이 서서히 변해가는 일, 전혀 새로운 남자를 만나 점점 감정이 바뀌는 것들을 마치 여성이 쓴 것처럼 세밀하게 표현해낸 남자 작가의 능력은 놀랍지만, 그 과정이 지나치게 길어 중간부터는 늘어지는 느낌이었다. 좀 분량을 줄였으면 더 좋았을텐데, 아쉽다, 고 생각할 무렵 저렇게 집착에 폭발하는 여자의 내면이 그려진다. 읽다가 내 감정이 같이 지친다. 나도 한때, 묵묵부답인 그의 상황을 '그럴 수도 있지' 라고 생각하기 보다 몇 천 개의 상상을 만들어 내어 나 스스로를 괴롭히던 적이 있었으니까. 뭐, 앞으로도 그러지 말란 법은 없고. 반대로 문자 폭탄을 받았던 적도 있다. 나는 단지 문자를 조금 늦게 보았을 뿐인데, 나에게 문자를 보낸 이는 자신이 만든 시나리오 속에 나를 넣어두고는 한껏 걱정을 해댔던 것. 아, 그 때가 그를 발로 차버리고 싶었던 때였다. 


책 속 여자의 집착, 내것이기도 했던 그 집착을 덜어내 자유로워질 때, 혼자이면서 머릿속에 몇 천개의 그림을 그리는 대신 지금의 나를 즐길 때, 그때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또한, 내가 건강하고 행복할 때 찾아오는 관계야말로 건강한 연애로 이어질 것이고. 그러니 헤어짐이란 고통은, 감당할 가치가 있는 것일 테다.




커피 잔을 내려놓고 책꽂이에서 책을 몇 권 집어 들었다. 책을 펼쳐 들고 한때 줄을 그어놓았던 문장들을 다시 접해조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모른다. 내게 인상 깊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내가 무엇을 느꼈고 정말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확인해보는 것이다. -p.17

"어제 정말 좋았다고 얘기해주고 싶었어요. 얼마나 좋았는지, 여태 웃고 있는 거 알아요? 언제 또 올래요?"
"글쎄. 잘 모르겠어요. 정신이 조금 오락가락하네요. 사실 그런 걸 기대했던 건 아니라서..."
"괜찮아요. 그래서 더 이상 날 보러 오지 않겠다고 결심하게 되면 알려만 줘요. 그럼 내가 갈 테니까." -p.116

"남녀가 서로 잘 지내면서도 사랑에 깊이 빠져들지 않는 것만큼 멋있는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싶어. 대신에 사랑에 빠지게 되면 말이야, 그래서 사랑한다는 말이 오가기 시작하고 대화에 `영원히`란 말이 등장하기 시작하면, 바로 그때부터 왠지 이륙이 아니라 착륙이 시작되는 것 같단 말이지. 마치 사랑한다는 말이 끝내자는 말의 시작인 것처럼 보인다는 거야.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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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대체 뭔말이여..
인생의 맛 - 몽테뉴와 함께하는 마흔 번의 철학 산책
앙투안 콩파뇽 지음, 장소미 옮김 / 책세상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1. 저자 '앙투안 콩파뇽'의 이름은 어쩐지 칼로리 높은 요리의 이름 같아 정겹다.


2. 그의 모든 말들에 다 동의하진 않을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3. 짧은 분량으로 한 꼭지가 구성되어져있고 책 자체도 얇아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쉽지 않은 독서였다. 오타와 멍청한 문장들이 매끄러운 독서를 방해한 것은 물론이다.



아래 인용문의 「」부분은 수상록의 인용문을 발췌한 것.




마키아벨리즘은 국가의 안정을 최고선으로 규정하고, 이를 위해 국익의 이름으로 거짓말을 하고 약속을 어기고 살인하는 것을 허용한다. 몽테뉴는 이 논리를 절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는 어떤 경우건 기만과 위선을 거부했으며, 관례를 무시한 채 있는 그대로의 꾸밈없는 모습을 드러내고 생각한 대로 말했다.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가려진 길보다는 드러난 길을 선호하고, 솔직함과 올바름을 중시했다. 그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으며, 국익을 위해 결코 개인의 윤리를 희생하려고 하지 않았다. p.13-14

「나는 지나치게 강압적인 자와는 연을 끊는다. 실제로 나는 자신의 경고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의견을 낸 것을 후회하고 자신을 따르지 않으면 모욕으로 간주하는 어떤 자를 알고 있다.」 p.18

인디언들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구대륙의 신성 불가침한 왕권을 이해하지 못했다.

「둘째로 그들은 우리 중에 온갖 편의를 차고 넘치게 누리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나머지 반쪽은 허기와 가난으로 비쩍 말라붙은 몸으로 다른 쪽의 문전에서 구걸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고, 이 빈궁한 반쪽이 어떻게 이 지경의 부당함을 참아내고 있는지, 어떻게 나머지 다른 쪽의 멱살을 붙잡지 않고 그들의 집에 불을 놓지 않는지 괴이하게 여겼다.」p.28

몽테뉴는 《수상록》의 도입부부터 마지막까지 강조하게 될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 즉 성실성을 곧바로 전면에 내세운다. 성실성은 그가 자신에게서 인정하는 유일한 덕목이며, 그가 보기엔 모든 인간관계를 성립시키는 핵심적이고 필요 불가결한 기본 요소다. 성실성foi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피데서fides에서 유래한 말로, 피데스에는 성실성뿐 아니라 신의, 즉 약속을 지킨다는 의미도 있다. 약속을 지키는 것은 모든 신뢰의 기초다. 믿음, 충실성, 신뢰, 그리고 비밀 고백,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상대와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지키는 것. p.57

「이 두 가지 교제(사랑과 우정)는 우발적이고 타인 의존적이다. 하나는 드물어서 곤란하고, 다른 하나는 나이와 더불어 시들어버린다. 따라서 이 두 가지는 나의 필요를 충분히 채워주지 못한다. 세 번째는 바로 책과의 친교인데, 이것이 가장 확실하고 우리와 가깝다. 앞의 두 가지가 가진 장점을 따라갈 수는 없겠지만, 책은 꾸준히 그리고 손쉽게 누릴 수 있다는 그것만의 장점이 있다.」p.116-117

「책은 나와 전 여정을 함께하며 어디서나 나를 돕는다. 나의 노화와 고독을 위로하고, 권태로운 무위의 짐을 덜어주고, 성가신 친구들을 언제라도 떼어내주고, 극단적이거나 치명적이지만 않다면 고통의 날카로움을 무디게 해준다. 괴로운 생각에서 벗어나려면 책을 집어들기만 하면 된다. 책은 이내 나의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고 고통을 덜어준다. 또한 내가 보다 실제적이고 생생하고 자연스러운 다른 편익이 없을 때에만 찾더라도 이를 전혀 문제 삼지 않고, 언제나 똑같은 얼굴로 나를 맞아준다.」p.118

「우리는 죽을 것을 걱정하느라 제대로 살지 못하고, 살 것을 걱정하느라 제대로 죽지 못한다. 하나는 우리를 권태롭게 하고, 다른 하나는 우리를 두려움에 몰아넣는다. 우리가 준비하는 것은 죽음에 맞서는 것이 앙니다. 죽음은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런 해악도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15분간의 고통에는 특별한 교육이 필요치 않다. 사실을 말하자면 우리는 죽음을 맞을 준비를 준비하는 것이다. (‥·)내 견해로는 죽음이 끝이긴 하나 그럼에도 목표는 아니다. 인생의 끝이요 극단이나, 목적은 아닌 것이다. 인생은 그 자체로 목적이고 목표여야 한다.」p.139-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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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4-09-29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역시 당연히 요리이름일줄;; ㅋㅋㅋㅋㅋㅋㅋㅋ 수상록은 저도 인용문으로만 접했는데 꼭 읽어보고 싶어요!

다락방 2014-09-29 14:33   좋아요 0 | URL
나도 조만간 질러야겠어요. 자기전에 조금씩 읽어보면 좋을듯. 근데 그렇게 읽으려고 산 책이 너무 많아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Alicia 2014-09-29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관심가는데요? 근데 다락방님은 별 세개 주셨네요^^

다락방 2014-09-29 15:36   좋아요 0 | URL
바로 밑의 페이퍼를 보면 아시겠지만 매끄럽게 읽히질 않아서요. ㅠㅠ
 
에피톤 프로젝트 - 정규 3집 각자의 밤
에피톤 프로젝트 (Epitone Project) 노래 / 파스텔뮤직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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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앨범에서 차세정이 내세운 보컬은 기존 앨범들과 마찬가지로 부담스러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차세정은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을 선택하되 그들의 목소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힘들게 느껴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를테면 '바다' 라든가 'BMK', '김현정' 등의 가수들은 노래를 잘 부르긴 하지만 나로서는 듣기에 힘들게 느껴지는데, 기존 차세정의 앨범에 참여한 한희정이나 심규선 그리고  이번 앨범의 '손주희'와 '선우정아' 모두, 부담스럽지 않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노래를 잘하고 들으면서 힘겹게 느껴지지 않으니 차세정 앨범의 색깔과 잘 맞는다 여겨진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노래부르는 목소리로는 차세정이 압권이다. 차세정은 위에 언급한 모든 보컬들처럼 노래를 '잘'하는건 아니지만 그 목소리가 무척이나 조심스러워 사랑스럽다. 조용하고 수줍은 듯한 목소리, 조심스러운 그 느낌이 목소리에 그대로 묻어나 크- 나는 이 목소리를 사랑하는구나, 싶어졌다. 


며칠전에 정식이랑 '목소리'에 대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정식이는 누구의 목소리가 좋고 누구의 목소리는 그렇게 좋진 않고...하며 말을 하는데, 그러고보니 나는 한 번도 다른 사람의 말하는 목소리에 대해 '좋다' 혹은 '싫다'에 대한 감정을 가졌었다는 생각이 들질 않는거다.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사소한 몸짓이라든가 태도, 웃는 모습 혹은 그들에게서 맡아지는 향기등에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생각했지만 목소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것. 목소리에는 내가 예민하지 않은가보다, 생각하다가 정식이와 내가 동시에 아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떠올려 보았는데, 그 중 누구도 특별히 목소리가 좋다라든가 싫다 라는 느낌으로 떠오르질 않는거다. 그렇지만,


노래 부르는 차세정의 목소리는 좋았다. 이렇게 조심스러운 사람이라면 어떤 관계를 맺어도 힘들지 않게 할 거라는 생각과 동시에 이런 목소리를 가진 남자가 상대에게 집착을 하지도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의 노래들 면면을 살펴보면 그는 사실 상당히 집요할지도 모르겠다.



이번 앨범은 이제 아플만큼 다 아팠다는 생각이 든다. 《긴 여행의 시작》과 《유실물 보관소》에서 한없이 아파하다 《낯선 도시에서의 하루》에서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애를 쓰고 《각자의 밤》에서 비로소 털어낸 느낌. 그는 이제 '생각하려고 해야만 생각이 나는' 단계에 이르른 것 같다. 노래들의 안정된 느낌 덕인지, 이 앨범은 바로 전의 앨범 《낯선 도시에서의 하루》보다 훨씬 좋다. 사실 낯선 도시에서의 하루는 별로였어.....마음에 쏙- 드는 노래가 한 곡도 없었어.....



에피톤프로젝트를 좋아해서, 차세정을 좋아해서, 이 앨범을 특별히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싶은 마음에 좋아하는 친구에게 선물해달라고 할까, 하다가 어쩐지 '나 시디 하나만 사 줘' 라는 말을 하기가 도무지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아 그냥 내가 샀다. 그리고 실린 곡들을 차례대로 들으면서 내가 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서 들어도 충분히 소중하고 아름다운 앨범이니까. 앨범에 집중하기 위해선 그 편이 더 나았던 것 같다. 한 곡 한 곡 음미하면서 이 앨범을 내 스스로 선택했다는 데 대해 강한 자부심이 밀려들었다. <낮잠>도 좋고 <미움>도 좋다. 요즘 이 앨범을 듣고 있는 친구중 한 명은 <시월의 주말>이 참 좋다고 하는데, 나는 현재 <회전목마>가 가장 좋다. 



다시 바람은 불고/ 우린 함께 있으니



라는 가사에서 나는 그냥 무너져버리는 것이다. 이 세계로부터 동떨어지게 되고 땅바닥에서 십일센티쯤 공중부양을 하게 되는 것이다. 차세정이 만든 음악, 그렇게 내가 선택한 음악이 내 속에 아주 흠뻑 스며드는 것이다. 평범한 일상속에서 특별한 감정으로 나를 감싸주고, 현재를 살면서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떠올리게 하는 매력적인 곡이다. 



그는 이제 혼자 지내는 밤을 안다. 언젠가 이별을 한 후, 이제 앞으로 펼쳐질 모든 주말들이 내 것이란 생각에 짜릿했던 기억들이, 이 앨범을 들으며 떠올랐다. 혼자이기 때문에 앞으로 더 많은 안락한 밤들과 더 많은 사랑에 대한 가능성이 열려 있다. 흡족하다.



고마운 앨범이며 지독히 사랑스러운 앨범이다. 나는 그의 팬으로서 그는 나의 가수로서 이 사랑을 지속시켜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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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2014-09-24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함께 있을때면 무너지는 락방씨
으흠..

다락방 2014-09-24 12:03   좋아요 0 | URL
함께 있어서 무너지는 게 아니라 그렇게 노래 부르는 에피톤프로젝트 때문에 무너지는 겁니다...( ˝)

Mephistopheles 2014-09-24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리 음악 리뷰라지만.......˝고기˝라는 단어가 눈에 안띄는군요...(그동안 식생활에 변화가 온 건 아닌가요.)

다락방 2014-09-24 14:57   좋아요 0 | URL
엊그제도 삼겹살을 먹었습니다만. ㅎㅎㅎㅎㅎ
그나저나 오랜만입니다, 메피스토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