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주의와 미국문화
조지 마스든 저, 박용규 역, 생명의 말씀사, 1997. 

  이 책의 원제는 "FUNDAMENTALISM AND AMERICAN CULTURE; THE SHAPING OF TWENTIETH-CENTURY EVANGELICALISM: 1870-1925"이다. 원제가  의미하듯 이 책은 20세기(1870-1925) 복음주의의 형성 배경에 대한 글이다. 마스덴은 이 책을 통하여 근본주의 운동내의 긍정적 가치를  재발굴하여 근본주의 운동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재구성하였다. 본서가 출간되기까지 근본주의 운동과 근본주의자들은 현대 복음주의 기독교 운동에  백해 무익한, 소위 소수의 모반자, 반지성주의자, 분리주의자 혹은 사회적 책임에 무관심한 반사회주의자로 매도당하며 기독교 주류로부터 소외되어왔다. 이런 상황에서 저자는 미국의 근본주의 운동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미국 문화의 중심에 자리잡아 왔다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였다.
 
존 다비로부터 시작한 세대주의 운동이 미국에 이주하면서 여러 주류교단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얻어왔는데 대표적인 것이 나이애가라 대회이다. 이 대회에서 현대주의라는 공동의 적을 대적하기 위해 프린스턴 출신 목회자들과 세대주의의 전천년주의자들이 연합하게 되었으며, 그 후 근본주의  운동은 상호 영향을 받으며 미국 기독교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해석에 대하여 일부에서는 근본주의 운동의 흐름을 정확히 짚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고 다른 한 흐름은 19, 20세기 미국 기독교에서 근본주의 운동을 지나치게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에 국한시킴으로서 그 폭이 제한적이라고 비판하였다. 저자는 후자의 입장에 속하여 이 책을 저술하였는데, 문화의 관점에서 미국 근본주의를 재구성하였다. 즉 근본주의 운동은 단순히 신학적인 면 뿐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또한 스코틀랜드 상식실재론과 근본주의의 관계성에 관한 논의를 담고 있다. 1970년대에 들어서 성경의 권위와 상식 실재론과의 상관성은 미국 복음주의 학계 내에서 큰 쟁점이 되어 왔다. 미국 복음주의는 교리가 미국 프린스턴 신학자들이 상식 실재론의 영향을 받아 근래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해석과, 프린스턴 신학자들이 상식 실재론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성경의 무오성과 교리 자체가 그 철학의 영향으로 근래에 만들어진 산물이 아니라 기독교 2천년의 가르침이라는 전통적인 해석이라는 두 개의 해석이 있는데. 마스덴은 전자에 속한다. 전자는 잭 로저스, 도널드 매킴, 마크 놀, 나단 해치 등이 지지하는 입장이다. 그들은 성경의 무오성 교리가 기독교 2천년의 역사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미국학계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스코틀랜드 상식 실재론의 영향을 받아 프린스턴 신학자 하지와 벤자민 워필드에 의해 1881년 처음으로 고안되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후자를 대변하는 인물로는 제임스 아이 패커, 프란시스 쉐퍼, 케네스 갠저, 그리슨 아처 등 대부분의 미국 복음주의 학자들이 지지하는데, 1979년 시카고 선언을 통하여 이들의 성경관이 집대성되었다.
 
  미국 신학에 미친 상식 실재론을 처음 거론한 것은 예일 대학교의 종교사 교수 시드니 알스트롬이다. 그는 1955년 Church History지에 '스코틀랜드 철학과 미국신학'이라는 글을 통해 미국 신학이 스코틀랜드 상식 실재론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고 조심스럽게 제기했다. 그후 플러신학교의 잭 로저스가 그의 제자 도널드 매킴과 함께 '성경의 권위와 해석:역사적 접근'에서 그 가능성을 더 구체적으로 발전시켰고, 1970년 샌딘이 그것을 받아들여 성경의 무오성 교리가 1881년 찰스 하지의 아들 A. A. 하지와 벤자민 워필드에 의해 고안되었다고 단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관성에 대한 긍정론을 집대성하여 발전시킨 것이 본서 '근본주의와 미국문화'의 내용이다.
 
  본서는 저자가 머리말에서 말하였듯이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드와 라인홀드 니버의 영향 하에 '문화'와 연관지어 미국 근본주의를 해석한다. 본서는 근본주의의 발흥에 대한 일반적인 역사의 서술이라기보다는 대표성이 현저한 인물, 집단 혹은 사건들을 실례로 선정하여 종합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Ⅰ. 근본주의 이전 
제1부는 위에서 이미 언급한 스코틀랜드 상식철학과의 관련성을 설명하고 미국의 기독교가 처한 위기적 상황을 설명하고, 복음주의 진영 내에서의 근본주의와의 노선문제 그리고 무디의 부흥운동을 다루고 있다.
1.위기에 처한 미국의 복음주의 (1870년대)
대부흥운동과 복음주의에 의해 이끌어지던 시대. 상식철학은 실재에의 과학적 접근을 위한 확고한 기초를 제공하였기에 19세기 미국인들에게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다. 미국의 건국에 있어서 상식철학과 경험론은 국가의 도덕질서를 세우는 근간이 되었다. 상식철학에 내포되어 있는, 인간성에 대한 본질적인 낙관적 견해는 미국인들의 기질에 호소력 있게 다가왔다. 미국 개신교의 옛질서는 신앙과 과학과 도덕성과 문명의 상호관계 위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은 1869년 올리버 웬델 홈즈가 임박한 재난을 예언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성경이 과학적 표준에 살아남을 수 없다"고 하였다. 1870년대에 복음주의자들이 홈즈의 명제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위협들의 심각성에 관하여 빈번히 논평하였다. 1873년 복음주의 동맹 모임에서 로스웰 히치콕, 암허스트 대학의 학장 스턴스 등은 기독교가 직면한 위기를 언급하였다. 그러나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스턴스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이래로 그리스도의 종교가 그 가장 순수한 형태에 있어서 지금 이 시대보다 대중의 마음에 더 강한 위력을 발휘했던 적은 없었다"고 하여 복음주의의 승리를 확신하는 언급을 하였다.
 
또한 프린스턴 뉴저지 대학의 학장 제임스 맥코시가 다윈주의와 성경을 조화시켜 발언한 내용에 대하여(50-) 조지 웰던, 챨스 핫지 등은 양자의 양립이 불가능함을 역설하였다. 로체스터 대학의 앤더슨 총장은 진화론을 '입증되지 않은 작업가설'이라고  주장하여 핫지의 입장을 더욱 발전시켰다. 이러한 다양한 견해들이 19세기 미국의 기독교 내에서 표출되고 있었다.
 
** 이제 상식철학과 경험론으로 무마되어오던 과학과의 갈등은 성경비평과 진화론 앞에 새로운 설명을 요구받게 되었다.
 
 2. 노선이 갈라지다. (1880-90년대)
이런 상황에서 자신들의 종교적 유산에 대한 적어도 형식적인 존경심을, 도덕성, 훌륭한 체통, 질서 등에 대한 깊은 관심과 결합시킨 개신교 중산그룹들, 일명 '빅토리아인들'이 새로운 도시문제, 윤리 사회 노동 정치에 대해 "혁신적 보수주의"의 입장을 보인다. 이들의 목표는 옛질서의 여러측면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키되 옛질서의 본질을 보존한다는 것이다.
 
-헨리 워드 비처(1813-1887)는 그 시대 최고의 설교가로서 브루클린 교외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권장할 만한 도덕적 모범으로서 덕스러운 부(富)의 복음"을 설교하였다. 그는 온건 자유주의적 인물이었다. 그는 뉴잉글랜드 칼빈주의의 전통적 "추상적 교리"를 거부하고 상상력을 따르는 낭만주의적 초월적 시대풍조를 따랐다. 그는 과학에 있어서도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과학과 도덕성의 발전을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 보았다.
 
새롭게 부상하는 미국의 종교적 자유주의의 몇가지 경향이 여기에서 엿보이는데,
첫째, 하나님 나라의 발전이 문명의 발전, 특히 과학과 도덕성의 발전과 동일시된다.
둘째, 도덕성이 곧 종교의 본질이 되었으며, 또 사실상 종교의 본질과 동일시된다.
셋째, 초자연적인 것은 이제 더 이상 자연적인 것으로부터 분명하게 분리되지 않고, 오히려 자연적인 것 안에서만 자체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발생된 이원론은 빅토리아 시대의 종교적 성향과 잘 일치했다. 이제 종교적 목표는 저급한 동물욕망을 극복하는 도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결국 낭만주의의 영향
 
-조나단 블랜차드는 도덕적인 점에 대해 타협을 거부하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안에 하나의 법 체계, 본질적으로 도덕적인 법 체계를 세우시고 인간의 마음을 창조할 때, 이성과 도덕적 감각이 그 법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이 스코틀랜드 상식 철학에 입각한 블랜차드의 가설이었다. 바른 사고는 바른 삶의 원인이었다는 점에서 소크라테스적이기도 하다.
 
  미국의 남북전쟁 종식 이후 비처와 블랜차드는 미국의 기독교 이해에서 양대 마차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블랜차트 가(家)는 자신들과 성향이 가까운, 죄와 회심 및 거룩한 삶의 근본적 복음 메시지를 전파하는 부흥운동가들과 동맹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1870년대 말 무디의 부흥운동과 교류였다. 블랜차드는 사설에서 후천년주의자들과 전천년주의자들(무디)이 상호 일치할 수 있는 점들을 강조하였다. 비처가와의 동맹이 깨어진 후 블랜차드로 대표되는 복음주의의 한쪽은 점차 기득권을 상실한 자들의 운동이 되어갔다.
 
** 반정립 역시 다윈주의의 영향 아래있다.
 
3. 무디와 새로운 미국 복음주의
무디는 성경의 무오류성과 전천년설을 믿었다. 그는 많은 근본주의자들이 받아들인 윤리적 강조점과 여러 가지 성결의 가르침을 진작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의 가장 가까운 동료들은 사실상 후대 근본주의의 모든 특징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들 가운데 다수가 실제로 20세기에 근본주의 운동을 조직하는 데 직접 참여하였다. 하지만 무디는 논쟁하는 것은 반대하였다. 그는 실용주의적 행동가였다. 그는 추상적인 자유주의에 찬성하지 않았으나 평화가 널리 퍼져야 한다는 희망하에 영향력있는 자유주의자들과도 우정을 쌓았다. 그는 말년의 한 설교에서 "사람들은 이 지독한 논쟁에 피곤과 싫증을 느끼고 있다" "그대의 싸움을 중지하고 일하러 나가 단순한 복음을 전하라."라고 하였다.
 
-무디의 제국은 파라처치의 형태로, 교단과의 연결을 최소화한 자유사업체제의 하나의 종교였다. 젊은이의 훈련에 초점이 모아졌으며, "이 세대에 세계를 복음화"하기 위해 수만의 대학생들의 선교열정을 구현하였다.
 
-무디는 '죄인들을 회심시키기 위해' 가장 적합한 것을 찾기 위해 모든 사상을 시험하였다. 그의 메시지는 단순하고 분명하였는데 '3R'이 그의  핵심적 교리를 잘 요약해준다. "죄에 의한 파멸Ruin",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Redemption", '성령에 의한 중생Regeneration"이 그것이다. 그는 쉬운 메시지를 통해 지옥불과 하나님의 진노를 설교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당대 미국의 실용주의적 분위기에 맞춘 것이었다. 그렇지만 사회참여 등과 같은 문제는 회피하였는데 복음 전도로 향한 그의 최고 관심을 흩뜨릴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전도는 사회적 요망 사항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최선의 길이었다. 회심은 필연적으로 개인적 책임의식 앙양과 도덕적 향상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무디는 미국 개인주의의 전성기에 활동하였으며 그의 사상은 그 시대의 일반적 가설들에 의해 널리 확산되었다.
 
무디는 부흥운동진영을 두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 중 하나가 죄에 대한 승리를 강조하는 성결교리의 새로운 판이며, 또 하나는 전천년주의이다.이런 "세상이 점점 악해질 것"이라는 견해는  그 이전의 구속사역이 미국역사의 영적 도덕적 진보에서 가시화될 것이라는 지배적 전통에서 크게 멀어진 것이다. 근본주의는 항상 배타주의적 호전성과, 성결 및 영혼 구원과 결부된 평화의 정신, 이 양자 사이에서 긴장된 양면적 자세를 유지하였다. 무디의 전통에서는 이 후자의 요소가 그 운동에 지극히 큰 매력을 부여하였다.
 
** 무디는 오히려 실용주의적이고 공리적인 노선을 취함.
 
Ⅱ. 연합의 형성
  이 부분에서는 천년왕국 사상과 성결운동, 기독교 근본 진리에 대한 논쟁과 1910년대의 기독교와 문화에 대한 견해들을 다룬다.
 
이 시대와 천년왕국(1890년대)
1. 프롤로그: 부흥운동적 근본주의의 패러독스
- 근본주의는 때로 상호 모순성을 보이기도 한 상이한 전통들과 사상적 동향들이 모자이크처럼 뒤얽혀 있는 현상이었다. 이 운동의 한 주된 요소는 기타 온갖 관심사를 영혼구원과 실천적 기독교 신앙의 하위에 두는 현상이었다. 무디가 이 진영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와 가장 가까운 일부 동료들의 입장은 이점에서 현저히 달랐다. 무디는 화해를 깨는 신학적 입장의 표명을 원치 않았다. 무디의 자세는 부흥운동 유산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반대입장(루벤 토리)은 지성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사상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하는 근본주의 내의 주요한 조직적 세력을 표출하고 있었다.
 
이런 차이는 후대의 근본주의 운동의 성격을 보여준다. 후대 근본주의 운동에는, 경건주의 전통의 부흥운동가들과 칼빈주의 전통의 교단적 보수주의자들(특히 프린스턴 신학으로 대표되던 자들) 사이에 동맹현상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부흥운동 진영 자체 내에도 이 두 전통, 즉 경건주의와 칼빈주의의 완연한 융합 양상이 있었다. 이러한 융합은 대각성 운동에서 처음 기원된 이래 미국 부흥운동의 중요한 양상으로 존재해 왔다. 17세기 청교도 운동은 고도의 지성적 신학을 강렬한 경건과 혼합하고 있었다. 19세기 미국 복음주의는 이러한 감정 강조의 경향 이면에 신조의 수호와 대중적 형식과 조직과 전략에 비중을 두는 경향이 있었다. 토레이, 피어선, 고든, 블랜차드, 어드맨, 스코필드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에게는 경건과 신조가 융합되었다.
 
무디는 지성체계보다는 행동을, 권위주의보다 자유를 선호하는 미국인이었다. 하지만 지성적 측면의 토리에 의한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의 이해가 미국문화와 관계를 설명하는데 단서를 제공한다.
 
  2. 천년왕국론의 두 수정판
  후천년설- 18세기초 영국에서 구체화된 후천년설은, 미국에서 대각성운동 시절에, 특히 조나단 에드워드에 의해 촉진되었다. 19세기 초에 많은 미국의 후천년주의자들은 사탄 세력의 패배가 임박했다고 믿었다. 교황세력과 이슬람 세력이 명백한 사양 상태를 보이고 있었으므로 문자주의적 경향이 강한 사람들은 그리스도 통치의 1,260일(게시록 11장) 1860년대에 즈음해 종식될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그들은 문화적 진보에서 천년왕국의 도래 징후를 찾아내었는데 노예제도와 억압 및 전쟁을 종식시키려는 현행의 노력들이 성공할 것을 믿었고 과학과 기술, 학문이 큰 업적을 달성하리라고 예측했다.
 
후천년설의 세속화- 독립전쟁시에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미국 대의(大義)의 승리와 미국적 원칙의 승리가 왕국의 표식이라고 선포하고 있었다. 이처럼 미국 시민종교가 탄생하면서 영적 소망은 어느 정도 세속화되 민족화되었다. 물질주의와 자본주의적 경쟁성 및 민족주의를 안고 있는 문화는 미국적 기독교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렇지만 복음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거의 모든 종류의 진보를 하나님 나라 도래의 증거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미국인이 이런 문화적 진보를 선도할 운명을 안고있다는 신념에 쉽게 도달했다. 자신들이 지닌 기본적인 인식론의 범주를 새로운 자연주의와 역사주의에 의해 깊게 변화시켰던 보다 자유주의적인 복음주의자들은 남북전쟁이후 점차 후천년적 역사관의 극적인 초자연적 측면들을 버리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왕국은 인간의 삶과 모든 상호 관계 및 온갖 제도의 지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 표현되는 것이었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성경을 보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엇으며 진보에 관한 희망이 더 적었다. 그들은 성경이 사실의 문제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믿을 만 하고 정확하며 성경의 의미는 명백하고, 가능할 때는 언제나 그 뜻이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리스도의 나라는 결코 이 시대에 혹은 인류의 자연적 발전에서 실현되지 않고 전적으로 미래에 존재하며 기원에 있어서 완전히 초자연적이고 이 시대의 역사와는 불연속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바로 이 점이 전천년설과 다른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입장이었다.
 
이러한 천년왕국 사상의 전개는 당대의 독특한 역사관을 전개하는 지성적 성향과 19세기의 문화의 세속화 현상에 대한 재해석의 필요성 등과 맞물려있다. 이 두가지 요인의 집합은 물론 각개 요인으로부터 그 운동의 독특한 점들에 대해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결국 천년왕국은 역사철학의 여파와 자기변호적인 과학과의 일치에서 변증적으로 파생되었다.
 
3. 세대주의와 베이컨적 이상
세대주의는 17세기초 객관적인 경험론적 방법의 주창자였던 베이컨적 이상 및 그에 기반을 둔 스코틀랜드 상식실재론의 영향을 받았음을 설명한다. 세대주의자들의 문자주의와 성경에 기록된 사실들에 대한 부동의 믿음, 성서의 "정확무오"에 대한 믿음 등은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전제하에 주장된다. 이런 전제들은 보다 경험론적 성향의 성결교 전통이나 대중적이며 분파적이며 구어체 지향적인 오순절주의와 구별시켜준다. 이런 보통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성경해석체계라는 것은 신학교가 아닌 소규모 성경연구그룹의 개인적 수준에서 근본주의가 발전하도록 하였다.세대주의와 결부된 지성적 경향은 근본주의에 특유의 색채를 부여하였다.
 
** 결국 과학과의 조화 혹은 일관성을 위해 성경무오설이 등장했다는 주장.
 
4. 역사, 사회 그리고 교회 
역사
-세대주의자들이 인간을 거대한 우주적 투쟁(그리스도의 군대와 사탄의 앞잡이 간의)의 한 일원으로 보는 역사관은 19세기 중엽의 다윈과 마르크스의 사상, 지질학적 대격변주기등의 영향을 받았다. 세대주의자들은 성경의 역사를 지질학적 대격변주기와 동일한 방법으로 해석하였다. 세대주의에 의하면, "무죄"시대는 에덴에서의 타락과 함께, "양심"의 시대는 대홍수와 함께 끝났으며 "인간통치"시대는 바벨에서 와해되었으며, "약속"의 시대는 애굽에서의 노예생활로 종지부를 찍었다. "율법"시대는 그리스도에 대한 거부로 최후를 맞았다. "은혜"시대는 대환난으로 종료된다. 천년 왕국 시대조차도 사탄이 "잠깐 놓임"(계 20:3)과 더불어 끝을 맺는다.
 
사회
-세대주의 전천년주의자들의 견해에는 사회적 혹은 정치적 진보의 여지가 없는 비관주의에 머문다. 세대주의자들은 사회적 혹은 정치적 문제들 그 자체에 큰 관심이 없었다. 문명의 쇠퇴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이러한 문명에 대한 환멸을 반영하는 당시의 비관적 양상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대두에 기여했다.
 
교회
-종말의 표적들 가운데 하나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전천년주의자들은 선교 운동에 열정적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교도 민족이 곧 회심하리라는 견해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그들은 미국교회의 현상태보다 선교의 전망에 더 실망했다. 그들이 교회의 쇠퇴가 불가피하다는 부정적 입장이면서도 자교단으로부터의 분리를 자기 신조의 필연적 결과로 보지 않은 한가지 중요한 이유는, 종교를 일차적으로 제도적 차원보다는 개인의 차원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중요한 영적 단위는 개인이었다. 교회는 먼저,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에 의해 연합된, 성화된 개인들의 집합체로 존재하였으며 부차적으로는 특정목적을 가진 영적 존재들의 네트워크로만 존재하였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자들은 세상과 문화와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관계에는 크게 관심이 없고 다만 "개인이 어떻게 영적으로 분리된 승리의 삶을 사느냐"에 대하여 가르쳤다.
 
** 미국교회는 교회에 대한 이해에 있어 개인중심의 신앙의 파생물로서 교제권으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성결운동
1. 승리하는 삶
-'성결운동', '오순절운동', '근본주의'등으로 불리게 된 종교 운동들은 1870-1890년 성령에 관한 관심의 고조가 미국 복음주의를 휩쓸던 때에 등장하였다. 성결운동은 근본적으로 감리교에 기원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성결 교리의 다수 작가들이 칼빈주의적 성향을 지닌 전도자들과 성경교사들이었다. 무디의 조력자들은 성령사역을 이끌었고 칼빈주의적 전도자들 및 성경교사들의 성결교회와 세대주의적 가르침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19세기 미국 복음주의의 성결교리는, 현 시대가 성령 부음의 시대이며, 성령부음의 시대는 사도행전의 첫 오순절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상에 기초를 둔다. 세대주의의 핵심적 가르침-즉 교회시대가 독특한 성령 시대라는 이론-도 역시 바로 그 점을 비중을 두고 있었다. 성결파 가르침은 웨슬리의 감리교는 물론 이전의 19세기 미국 부흥운동에도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런데 이 가르침은 사실상 세대주의의 수용을 위해 길을 닦는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에 거의 모든 미국 부흥운동에 영향을 주었던 웨슬리 전통 내지 감리교 전통은 말과 행위로 증명되는 개인적 체험을 강조하였다. 그러한 증거는 이성과 과학에 입각한 성경 권위의 변호와 충돌할 이유가 없었다. 감리교측 성결 운동의 주창자들과 나중의 오순절주의자들은 성경의 객관적  권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접어두고 체험을 중점적으로 역설한 반면, 세대주의적 성결파 교사들은 둘 다 강조하고자 하였다.
 
감리교측 성결파 전통과 개혁주의 성결파 교리를 접속시키고 있던 것은, 18세기 요한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이었다. 웨슬리는 성경이 인간에게 "완전하라"고 명한다는 사실에 특히 주목하였다. 성경이 명하였으니 이 상태는 반드시 도달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반면 개혁주의 및 청교도들은 금생에 완전을 이룰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충돌되던 양자의 견해는 19세기 전반 미국 복음주의 부흥운동시에 하나로 종합되었다. 챨스 피니는 양자를 종합하였으며 1840년까지도 감리교의 성결에 관한 가르침과 아주 흡사한 것을 개혁주의에 소개하였다. 피니와 그의 동료들, 특히 에이서 메이헌(Asa Mahan)은 완전주의의 수정판인 오벌린 신학을 발전시켰다. 바르게 선택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중생을 넘어 성령의 특별 사역이 의지를 완전히 압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인간의 자유로운 중개행위와 하나님의 은혜로운 권능에 대한 완전한 의존성을 둘 다 인정하는 개념의, 이러한 특별 사역이 있을 경우, "금생에서 완전한 성화가 획득될 수 있다"고 보았다.
 
  1840년부터 1870년까지 개혁주의자들에게는 피니가 감리교도들에게는 푀베 팔머(Phoebe Palmer)가 영향을 주었다. 팔머부인은 뉴욕시에서 "화요 모임"을 통해 성결의 갱신을 촉진시켰다. 성경 연구와 기도, 찬양, 개인적 간증을 위한 크고 작은 규모의 그러한 집회는 성결을 부각시키고 복음주의적 가르침을 확산시키는 토대를 제공하였다. 팔머부인의 사역은 1867년 '성결운동 촉진을 위한 전국 캠프 집회 협의회'(National Camp Meeting Association for the Promotion of Holiness)의 창설에 영향을 주었다. 팔머의 가르침의 핵심은 거룩한 헌신 행위에 의해 획득된다는 극적인 제2의 축복이었다. 이 헌신행위는 "제단 위에 모든 것"을 올려놓는 다는 식으로 묘사되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관건은 믿음의 행위였다. "당신이 성화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성화된다" 그 결과는 바로 지금 모든 죄로부터 구원을 받는 현재적 순결화(성화)였다.
 
  19세기 말 이 체험은 "성령세례"로 널리 묘사되었다. 남북전쟁 이전 웨슬리안 감리교와 자유감리교회가 창건되었고 1865년 윌리엄 부스는 동부 런던에서 "기독교 선교회"(1880년에 구세군으로 됨)를 조직하였고 1880년 하나님의 교회(인디애나 주 , 앤더슨)가 창립되어 성결파 교리를 가르쳤다. 주로 캠프 집회운동으로부터 분열해 나와 결국에 가서 나사렛파나 필그림 성결교회 등을 형성했다. 한편 개혁주의 전통 내의 복음주의자들도 성결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1858년의 부흥운동은 성결파 가르침을 특색으로 하는 소규모 기도모임을 낳았다.
 
1870년경에는 미국 개신교 부흥운동 어느 곳에서나 성결파의 사상이 퍼져잇엇다. 1873년에는 대서양을 가로질러 영국에서 초기 무디 부흥운동 시기에 등장한 피어솔, 한나 스미스, 윌리엄 보드먼의 성경 연구와 성결운동 집회가 열렸다. 이듬해에 보다 큰 대회로 발전하였고 1875년에 케직의 레이크 디스트릭트(Lake-District)에 영구적으로 정착하였다. 영국 국교회 성직자 웨브 피플로(H. W. Webb-Peploe)가 근 50년간 케직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금생에서 죄악된 본성이 근절될 수 있다고 믿은 감리교 유형의 완전주의에 반대하였다. 그런 생각은 결국 그리스도보다 자아를 신뢰하게 하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그들은 금생에서 행하는 모든 일이 본성의 원초적 부패성으로부터 발생하는 죄로 얼룩져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케직의 생각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보는 170-172쪽을 참고할 것).
 
  1870년대 중반 이후 케직형태로 수정된 성결파의 가르침은 미국으로 돌아가 무디의 사역과 연결되었다. 1871년 무디는 성령체험을 하였는데 그의 체험은 "바로 그 기쁨의 현장에서 자신이 죽지 않도록 하나님께 손을 멈추어 달라고 간청해야만 했다"고 말할 정도로 강렬하였다. 케직의 가르침은 무디가 영국에 있는동안 발생했고 교리적 논쟁을 피하고 실천적 경건과 봉사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무디의 사역과 흡사하였다. 무디는 케직의 견해를 모두 따른 것은 아니지만 그와 매우 유사한 견해들을 가르쳤다. 케직의 가르침에 있어서 무디의 조력자들 사이에서 가장 큰 이슈는 "봉사를 위한 권능"이라는 실천적 개념이었다. 특히 증언을 위한 권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종말론, 성령세례, 케직, 성결운동 1980년대 제자훈련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테제들이었다.
 
2. 성결운동의 사회적 차원
세대주의와 케직에서 두드러진 인물이었던 아더 피어선은 구제선교, 시 복음화, 고아사업, 대학생과 청소년 운동, 여성 사역, 성경학교, 온갖 종류의 선교, 극빈자들 사이에서의 복음전파, 교회 연합을 위한 노력, 의료선교, 신유 기도와 영적 삶의 증진 등을 비롯해 광범위하고 다양한 "인류애적, 선교적, 영적 운동들"을 논하였다. 이것은 성결운동의 사회적 차원을 강조한 것이었다. 1894년에 개최된 브루클린 대회는 "삶과 봉사에 있어서의 성령"이란 주제를 내걸어 사회적 관심을 표명하였다.
 
   남북전쟁 이후 시대의 전천년주의적 복음주의자들이 특정한 성결파 교리를 수용했든 하지 않았든, 신자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의 성화 사역에 대한 그들의 강조는 강력한 도덕적 추진력을 제공함으로써 영혼 구원의 열성을 보완하였다. "사회사업 조직을 갖춘 제도적 교회"형태(성공회 스티븐 팅 부자의 홀리 트리니티 성공회 교회: 빈민구제에 힘을 기울였고 뉴욕의 빈민들을 위해 교회의 일년 수입을 제공)는 개신교도들이 복음 전파와 사회사업 및 공동체 봉사를 한데 묶을 수 있는 주요한 방법이었다. 심프슨(A. B. Simpson)은 1880년대에 도시빈민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기독교 및 선교 동맹을 창립하였다. 동 시기에 들어온 구세군도 도시의 소외 계층을 위해 유사한 사역을 실시하였다. 1880년대에 이들 조직체들은 다수의 구조 선교회, 타락한 여성들을 위한 보호소, 구제 프로그램들을 세우고, 이민자들 중에서 일하며, 빈민들에게 직업을 구해 주었다. 복음 전파가 언제나 그들의 중심 목표였으나 사회 사업과 복음전도 사업이 병행하였다.
 
** 빈민과 연관된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반작용과 당시 산업혁명의 부작용이 사회에 보편화되는 것에 대한 실천적 성찰이 일어났다.
 
3. 대반전
  1900년경부터 1930년 사이에 대반전이 일어났다. 이 시기 모든 진보적인 사회 사업은 정치적인 것이든 개인적인 것이든, 부흥운동적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의심의 대상이 되었으며 매우 작은 역할로 좌천되었다. 1865년부터 1900년까지, 칼빈주의적 전통으로부터 경건주의적 견해로 변천한 과정이 변화의 요인을 제공하였다. 즉 칼빈주의 전통은 정치가 하나님의 나라를 진보시키기 위한 의의 깊은 수단이라고 보았던 반면 경건주의적 견해는 정치적 행동을, 악을 억제하는 수단 이상의 것으로 보지 않았다. 또한 성결파 운동의 발흥은 율법의 시대의 종말과 성령시대의 도래를 통해 세대주의적으로 복음을 사적 차원에서 보도록 규정하였다.
 
대반전의 제2차 단계는 1900년경부터 1930년 사이이다. 이 시기에 세대주의 혹은 성결파적 교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 공공복지를 위한 사업에 너무 깊게 개입하는 것을 꺼렸지만 모든 사회적 활동과 관심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종교적 요인과 함께 대 반전의 이면에는 사회적 요인도 작용하였다. 무디 시대로부터 1920년대 근본주의 논쟁을 통과하기까지 이 부흥운동적 복음주의 운동의 지지권은 주로 개신교 백인 중류 계급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 요인은 불충분한 설명이다. 결정적인 요인은 1900년 이후 일어난 자유주의적 사회복음에 대한 근본주의의 반응이다. 1차 대전 당시에는 '사회적 기독교'가 자유주의와 철저히 동일시되어 가고 있었으며 많은 보수주의적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었다. 근본주의자들은 무엇이든 사회복음같이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강력히 반발하였다. 이전의 복음주의자들은 공적인 혹은 사적인 사회적 프로그램들을, 그리스도의 중생 사역의 보완적 부산물로 이해하였다. 죄에 대한 회개 이후 그에 합당한 삶이 따라야 했다.
 
그러나 사회복음은 정치적 문제에만 비중을 두었다. 월터 라우센부시는 '하나님이 관심을 보이는 유일한 것"은 "종교적 윤리"라고 말했다. 이 말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공로에 대한 신앙의 선언 및 신학적 교리는 도덕적 행위 특히 사회적 행위의 자극요인이 되지 않는다면 무의미하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실용주의적 태도와는 반대로 보수 복음주의자들은 진리가 실용주의적 테스트에 의해서 뿐 아니라 직접적으로도 확인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하나님은 행위에 대해서만큼 신조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이신다는 것이 그들의 견해였다.
 
사회 복음이 사회적 관심사를 배타주의적인 방식으로 강조한 것은 보수적인 이들에게는 위험 요소로 보였다. 그들은 사회복음이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믿음으로써 획득되는 영원한 구원의 메시지의 의의를 잠식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자유주의에 대한 공격이 가열되면서 부흥운동과 사회복음을 둘 다 견지 할 수 있다는 입장은 점차 방어하기가 곤란해졌다. 1차 대전 이후 미국의 중산층의 자신들의 현상 유지에 대한 갈망이 일단의 견해에 고착된 상태로 머물러, 반자유적이며 동시에 비사회참여적인 형태로 동결되었다.
 
4. 성결운동과 근본주의(1900-1910년대)
- 1899년 무디 사후에 복음주의 운동 내에서는 심각한 분열이 일어났다. 세대주의 운동은 휴거가 '대환란'이전에 일어나느냐 이후에 일어나느냐를 놓고 양분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찰스 파햄과 시모어의 오순절 운동의 등장이었다. 이들은 감리교의 성결파적 견해, 즉 죄악된 본성이 근절되는 완전 성화의 '제2축복' 후에는 제3의 축복, 즉 방언을 수반하는 '성령세례'가 온다고 주장했다.
 
무디성경학교와 성결파 교리의 저술가 힐스와의 논쟁은 곧 감리교측 성결파와 케직교사간의 반목으로 이어졌다.케직은 완전한 성결을 부정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장로교 정통주의에서는 케직이 서로 모순되는 캘빈과 알미니우스를 동시에 붙잡으려한다고 비난하였다. 사실 인간의 자유의지와 개인의 체험, "간증"을 중요시하는 것이 미국의 부흥신학이다.
 
케직의 가르침은 성경학교 운동에서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를 보완해 주는, 최소한 두가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첫째로, 케직의 가르침은 신앙에 대한 중요한 주관적 확증을 제공해줌으로써, 이것을 성경과 상식으로부터 나온 객관적인 논증과 병행될 수 있게 하였다. 둘째로, 전천년주의는 사회 전반에 대한 성령의 정복적 권능을 낙관적으로 평가하기보다는 이런 평가를 포기하는 입장이었으나, 케직은 개인적 "승리"를 약속해 주었다. 1차 세계대전 이전 미국 개신교의 지배요소는 그래서 개인적 경건, 낙관주의, 행동주의이고 이것은 논쟁을 유발시키는 특징을 수반하고 있었다.
 
** 케직은 근본주의적 비관주의와 계몽적 미국 낙관주의, 성결파적 체험 중심주의와 장로교적 이성중심주의의 변증적 도출이었다.

신앙의 변호(1870-1910년대)
  1. 논쟁의 소용돌이
-세대주의와 성결교리가 발생한 사회적 원인들에 대해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국부적 원인을 따져볼 때, 양자가 문화적 상태에 대한 반응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 두 운동은 어느 것도 근본주의와 동일한 시공간을 점유하지 않았다. 하지만 각각, 당시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던 근본주의 사상에 중요한 요소를 보태주었다. 이들을 그 자체로서 근본주의의 일부가 되도록 만든 것은, 명백했던 세속화의 한 측면, 즉 자유주의 신학의 등장에 대한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반발이었다.
 
  1870년대 후기부터 주요 교단 내에서는 보수주의자들과 현대주의자들 사이의 대립이 있어왔다. 현대주의에 대처하기 위해 보수주의자들, 세대주의자들, 성결운동가들이 근본주의와 손을 잡았다. 여러 교단에서 아주 강렬하게 토론된 것들은 성경의 권위, 성경의 과학적 정확성, 혹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초자연적 요소 등에 집중되어 있었다. 또한 교단들의 독특한 교리들이나 전통들을 놓고 그와 유사한, 그리고 그와 밀접하게 관련된 논쟁이 벌어졌다. 예컨대 장로교인들 사이에서는 엄격한 칼빈주의, 침례교와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침례가 그런 논점이었다. 거의 모든 교단이 그러한 모종의 이슈로 싸움을 겪었다.
 
  남북전쟁기 남부의 신학은 강한 보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신학적 보수주의는 후대의 근본주의를 닮은 많은 특징들을 창출해 놓았다. 여러 중요한 근본주의 지도자들이 남부출신이었다. 청교도와 스코틀랜드 철학 및 베이컨의 영향을 받은 남부의 사고는, 성경은 다윈의 가설같은 사변적 가설들과 반립하는 엄연한 진실의 근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극히 존중하도록 자극하였다. 남부에서 현대주의는 발을 붙힐 수가 없었다.
 
  남부가 보수적 견해로 정리되어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북부에서는 새로운 종교적 이상들을 부추긴 문화적 변화의 세력이 너무나 강하였으므로 논쟁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북감리교와 미국 성공회는 최초 이런 현대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교수를 퇴임시켰으나 1908년 송사 이후 이런 공판은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었다. 지역적 자율성이 한층 더 많이 보장되었던 침례교는 다양성도 한층 더 크게 발전하는 가운데 주요 파당들, 즉 교단적 전통주의자들,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자들, 공공연한 자유주의자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고백주의적 칼빈주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뉴잉글랜드 침례교회) 교리적 자유를 강력히 역설하였다. 비교적 개방적인 이런 분위기에서 성경 비평과 자유주의적 신학 경향이 북미주 연합의 침례교 가운데에서 일찍 출현하였다(그 실례는 235-237을 참조할 것). 침례교 내에서는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견해들은 서로에 대한 관용과 공개토론의 여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당시 보수주의의 조화와 협력과 행동주의 정신 그리고 대다수 평신도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2. 장로교와 진리
  북장로교인들 사이의 논쟁은 치열하였다. 장로교인들은 개교회주의적인 침례교와는 달리 교권적 치리회를 두고 있었기에 신학적 차이점의 공존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장로교 보수파는 상당한 세력을 지니고 있었던 스코틀랜드와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 유산을 이어받았다. 이들은 고도로 명료하고 극도로 신학적인 종교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신앙고백과 대소요리 문답은 가장 중요한 잣대가 되었다. 1729년 이 신조가 채택된 이후 이들은 이것들에 대한 강력한 지지세력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미국을 형성하는데 역시 일익을 담당하였던 뉴잉글랜드와 영국 청교도 전통 출신 장로교인들은 신조에 대한 보다 폭넓은 해석을 주장했다. 이들은 부흥운동과 관련을 맺었다. 부흥운동은 19세기 초엽과 중엽 신 학파(New School)운동에서, 보다 융통성 있는 칼빈주의의 변형판을 가져왔다. 펜실베니아, 프린스턴 신학교, 남부에서는 그 세가 강했던 스코틀랜드-아일랜드계 구학파(Old School)는 뜨거운 경건주의적 혈통을 내포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교리에 치중하고 있었다. 그들은 웨스트민스터 표준이 성경이 내포한 교리체계를, 인간적으로 가능한 한도 내에서 사실과 가장 가깝게 묘사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프린스턴을 중심으로 한 장로교의 논쟁과정은 247-264을 참고할 것).
 
상식철학의 난제는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신학적 도덕적 일탈의 현실이었다. 워필드는 이를 화란의 바빙크와 카이퍼의 견해를 참조하여 제1원리에 대한 편향적 시각으로 인해 이런 오류들에 매몰된 것으로 해석하였다. 1890년대 장로교의 방어전략-교권적 조처와 소수근본교리의 방어에 전념-은 근본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근본주의 5개 조항"은 1910년 장로교 5개항을 따른다: 성경의 무오성,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대속, 육체적 부활, 기적의 진정성. 장로교와 근본주의의 연합은  1903년 결성된 Bible league of north america를 중심으로한 잡지 Bible champion을 통해서였다.
 
3. 근본 진리들
"The Fundermentals"(1910-1915)紙는 현대주의에 반대하는 다양하고 광범위한 연합전선을 상징한다.고등비평의 문제점 지적과 이단 주의의 논박, 복음설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전천년설이나진화론에 대해서는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기독교와 문화에 대한 1910년경의 네가지 견해
1. 이 시대를 정죄함 ; 극단적 전천년주의의 입장
- 전천년주의의 문화적 비관론은 Our Hope의 편집자인 아르노 게벨라인, 1910년 '시대의 표적'을 저술한 뉴욕시 제일침례교회의 목사 아작 핼디먼 등이 중심을 이루었다. 핼디먼은 기근, 지진, 역병, 전쟁 혹은 군사력 증강 등은 때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겼다. 한편 기업가의 새로운 부(富)는 시대적 종말을 보여주는 특징들이고 유럽도시들의 상업적 유대관계와 교류는 바벨론의 문자적 재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그는 대부분의 개혁을 점증하는 사회주의의 위협과 연결지었다. 그는 이 사회주의를 무정부주의와 동일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개혁이 연상시켜준 것은 "무법"의 확산에 대한 예언이었다. 민주주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핼디먼이 근본적으로 반세상적으로 극단적으로 나아간 것은 아니었으며 북침례교 안에 머물러 있었다. 반면 게벨라인은 세상으로부터의 분리가 세상교회로부터의 분리를 요구한다고 하였다. 그는 1899년 감리교로부터 분리해 나왔고, 1914년의 예언 사경회에서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부르심은 분리이다"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분리는 반세대 후 근본주의 싸움의 패배시 근본주의의 표상이 되었다.
 
  2. 중도적 입장의 긴장상태
- 1914년에 미니애폴리스 중심가의 한 교회 목사였던 라일리는 "의미심장한 시대의 표적들"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그는 핼디먼과 게벨라인과는 달리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다수의 지도적인 전천년주의자들처럼 라일리의 배경에는 부흥운동과 경건주의식 사회개혁이 결합되어 있었다. 제도적 측면에서 이러한 결합의 강점 가운데 하나는 활기찬 도시 목회의 건설이었다. 그는 강력하게 사회 개혁을 주창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 의해 도시로 부름을 받았다고 그는 말했다. 또 그리스도인들은 도시에서 도시의 죄뿐만 아니라 도시의 고통도 보아야 하며 이들을 몰아내기 위해 힘써야 한다고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자에 맞서 가난한 자의 편에 서야 하며 자본가에 맞서 정직한 노동자 편에 서야 한다고 단언하였다. 또 그리스도인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일해야 하며 시의 공직에 개혁자들을 선출하고 도시의 모든 악덕을 없애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교회는 특별히 도시 개혁의 임무를 위탁받았다"고 역설하였다.

1910년 이후 이런 견해는 약화되고 복음전도가 최우선으로 주창되었지만 여전히 낙관주의적이고 사회 개혁주의적이었다. 성경학교 특히 무디성경학교는 이런 생각을 대표하며 사회적 신조에 대한 포용적 태도를 유지했다.
 
 3.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기독교 문명의 보존
- 브라이언은 문명에 있어서의 성경과 종교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특히 금주와 평화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세기 전반기에 기독교적 경건의 이상들은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미국의 국가적 이상들과 병행하였다. 이러한 이상들은 성경 안에 계시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상식적인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는 신적인 법 안에 계시되어 있었다. 평화와 세계적 조화의 희망에 대한 그의 관심은 남북 전쟁이후 다소 손상을 입었던, 복음주의 유산 안의 낙관주의적 기질에 속한 것이었다. 그의 사고 안에는 신적인 법에 대한 믿음과 미국이 도덕적으로 세계를 선도할 운명에 있다는 믿음이 내포되어 있었으며, 나아가 "인간이 일단 진리를 보고 이해하기만 하면 즉각 전심으로 그 진리를 수용케 된다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끈질긴 믿음"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의 기독교 정신은 1911년 위노나대회(297-298)의 정신과 유사하였다. 양자는 각각 전통적 기독교를 보존하려는 열망과, 견해가 다른 이들과 기꺼이 협력하려는 자세 및 실제적, 사회적 문제에 대한 강조를 동시에 표출하였다. 이런 요소들은 그 시대 보수 복음주의 대부분에 전형적인 것들이었다.기독교는 문명을 진보시킨다는 믿음이다.
 
 4. 말씀으로 문화를 변화시킴
- 구학파 전통의 후예들은 문명의 복지에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이 세대에 하나님 나라의 표적들이 나타나기를 기대하였다. 그 관심의 가장 강한 표출 가운데 하나가 워필드의 후천년주의에서 출현하였다. 그는 이 시대에 "그리스도 예수가 단순히 전쟁하러 나오는 것이 아니라 승리하러 나오신다"고 생각했다. 악이 완전히 제거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으나 그리스도의 재림 전 온 세계가 그리스도께로 돌아올 교회의 영적 '황금시대'가 앞에 놓여있다고 생각했다.
 
  이 시대의 하나님 나라 발전에 관해 워필드보다 제한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메이첸은 1912년 프린스턴 신학교의 개강식 강론에서 "문화와 기독교"의 문제를 다루었다. "교회의 거대한 위기가 주로 지성적 영역에 놓여있다. 복음에 대한 무관심과 냉대는 지성적 풍토에 기인한다. 싸움의 열쇠는 대학에 있다. 문화적 위기는 지성적 위기에 근거하므로, 문화를 회피하는 것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메이첸의 관심은 문화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예술과 과학을 파괴하고 거기에 무관심하기보다 오히려 우리는 지극히 진실한 인도주의자의 열성을 다해 그것들을 장려하도록 하자. 그러나 동시에 우리 하나님 섬김에 그것들을 거룩히 바치도록 하자"고 하였으며, 기독교는 "단지 모든 족속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사상 속에도 깊이 침투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간의 차이를 지우거나 혹은 반면에 세상에서 물러나 일종의 현대화된 지성적 수도 생활 속으로 은둔하는 대신, 세상을 하나님께 복종시키기 위해 즐거이,열정적으로 나아가도록 하자"고 하였다.
 
  이것은 개혁주의 전통이었다. 개혁주의 전통은 메이첸이 표현한대로 모든 문화를 하나님 섬김에 거룩히 바치는 것이 종교적 의무이자 장기적인 실제적 요망 사항이라고 보았다. 그는 계속 넓은 마음과 인도주의적인 자세를 유지하고자 했으며 무디성경학교, 브라이언, 선데이와도 함께 했다.
 
Ⅲ. 위기시대:1917-1925
1. 제1차대전,전천년설,미국근본주의: 1917-1918
   제1차대전 초기 평화주의와 국가에 대한 충성을 부인하던 전천년주의는, 전쟁을 통해 미국에 대한 충성은 야만에 대항하는 문명을 옹호하는 의무라는 견해로 급변한다. 공격하는 편에 섰을 때, 혹은 평화기에는 평화주의자이던 그들이 수비하는 전쟁에서는 전쟁을 옹호하게 된 것이다. 반정치적이던 근본주의는 1918년 전쟁이 끝날 무렵은 미국의 기독교 문명 옹호를 주요목표 가운데 하나로 삼을 만큼 애국적 성향으로 바뀌었다.
 
** 지성적 기반은 메마르기 쉬우나(유연성 없이) 감성적 기반은 어떤 경험에 의해 너무 다른 입장으로 급변할 수 있다.
 
2. 근본주의와 문화적 위기:1919-1920
     전쟁직후 위기의식은 도덕적 토대의 붕괴와 볼셰비키 사상에 대한 것이었다. 전천년주의자들은 급속히 복음전도와 기도, 대망사상보다 퇴보적 경향의 저지에 관심을 쏟았다.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교리적인 것이었다. 즉 반민주주의적 진화론 철학에 대한 공격이었다. 전쟁의 영향이 근본주의 운동에 새 문화적 차원을 부여한 것이다. 사회위기의식은 새로운 유형의 근본주의 지도자, 도덕적 개혁가를 전면에 부상시켰다. (윌리암 라일리) 이러한 애국과 복음전도와 성경주의의 상호결합 위에 복음주의 진영의 재결속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전천년주의의 악덕에 대한 공격은 청굗 전통이 도덕적으로 억압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대중의 관념과 근본주의를 하나로 얽어매는데 일조하였다.
** 전쟁의 승리는 미국이라는 국가의 역할에 기독교적 소명감을 부여케 하였다.
 
3. 근본주의의 양면공세:1920-1921
   교회에서의 전통신앙교리를 부인하는 자들과의 투쟁, 미국문화에서 반진화론 투쟁을 개시하였다. 자유주의적 초교파 세계운동의 저지와 침례교내 신조의 채택, 선교사업을 통한 연대의 강화가 나타났고, 반진화론 이슈는 전천년주의와 교단적 근본주의의 중심인 북부에서 남부까지 급속히 확산되어 전국적 관심사로 대두되었다.
 
** 승리에서 온 현대주의를 미국에서 몰아내야한다는 투지와 문제의 핵심을 현대신학과 진화론으로 파악하는 판단이 어울어진 행동이 나타난다. 승리는 때로 자기자리를 떠나게 한다.
 
4. 자유주의자들은 각 교단에서 밀려날 것인가:1922-1923
   해리 에머슨 파스딕의 1922년 설교를 통해 침례교는 근본주의자의 분리로, 장로교는 자유주의의 패퇴로 막을 내렸다. 메이쳔의 "기독교와 자유주의"는 자유주의를 기독교가 아닌 새로운 종교로 인식하도록 했다.
 
5. 공세의 차단과 분열:1924-1925
 매슈스는 이에 대해 "현대주의의 신앙"에서 복음주의적 기독교를 이해하고 이를 살아있는 사람들의 필요에 적용하는데 있어 과학적, 역사적, 사회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현대주의라고 정의한다. 이의 기본전제는 개념이나 믿음이라는 것이 외적 실체의 거울이 아닌 진화론적 문화적 발달로 형성된 마음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기독교의 구원은 그래서 하나님이 된 인간 안에 계시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안에 계시되었으므로, 완벽한 도덕적 삶을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도와 같이 실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진보의 법칙이며 인간사회가 안전하게 세워질수있는 토대라는 것이다. 이 무렵 승리는 근본주의로 기우는 듯 보였다. 그러나 교단의 분열로 몰아가는 근본주의 급진파에 온건한 보수파가 제동을 걸면서 급격한 분리주의자들의 쇠퇴와 입지의 약화를 가져왔다. 교리적 순결의 보존과 복음전파의 진척에는 뜻을 같이한 양세력이 분리문제에서 갈라짐으로써 이 운동의 사멸을 자초한다.
 
6. 에필로그:전위,재배치,재기: 1925-1940
  1925년 진화론 교사에 대한 테네시 데이턴 재판에서 제닝스 브라이언이 클래런스 대로에게 당한 반대심문과 조롱은 여론을 급속히 근본주의에 적대적으로 돌변시켰다. 이때부터 대중에게 근본주의는 농촌적, 전근대적, 몽매주의의 동일어로 비취게 된다.
 
이 후 근본주의자들의 스캔들은 이런 여론의 악화를 더욱 가중시키고, 편집증적 문체는 대중과의 격리를 심화시켰다.모든 교파에서 스스로 혹은 결의에 의해 밀려난 근본주의자들은 따로 신학교와 교단을 만들게 된다. 1930년대 이후 이제 근본주의는 이들 스스로 근본주의자라고 불리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세대주의자들과, 교단내 잔류한 세력, 이런 흐름에 이끌려 새롭게 들어오는 독립적인 성결교, 오순절파 그리고 이민교단에 의해 다시 재성장을 이루었다.
 
이제 이런 새로운 포스트근본주의 연합체는 복음주의로 다시 불리우며 비록 복음주의적 하위문화가 "근본주의"를 의미상 지나치게 배격하지만 이 말은 근본주의의 가장 큰 투쟁(교리의 수호와 현대사상의 비판)의 특성을 묘사하는 유용한 단어로 남아있다.
 
 IV.  해석
 
  1. 사회현상으로서의 근본주의(문화위기에 대한 배타성과 신조의 강조)
 근본주의는 종교적 운동임에도 불구하고 1차 대전에 뒤이은 문화적 위기의식이 이 운동을 중요한 여러 방향으로 모양짓고 수정하였다. 급진적인 성결운동 및 오순절 집단과는 달리 근본주의는 사회의 변두리에만 존재하기 힘들었다. 근본주의는 일부 부유 계급과  일부 빈곤 계급에 호소력이 있었으며 또한 특별히, 그 포부와 이상이 본질적으로 중산층 빅토리아풍이었던, "존경할 만한" 개신교 및 북유럽 노동자 계급에 호소력이 있었다. 모든 종교 집단은 특정 사회 기반에 따라 그 특성이 달라진다. 사회적 요인들은 종교 생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며, 또 이것들은 명백하게 확립된 투철한 신앙 이외의 일반적 종교 행동을 예측하게 해주는 최선의 수단이 될 수 있다.
 
또한 근본주의 체험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혈통을 가진 미국 개신교도들에게, 다른 인종 집단의 이민 체험과 유사한 무엇인가를 제공했다. 근본주의의 지도층은 주로 앵글로 색슨 집단에서 나왔다. 이들은 바다를 건너와 터전을 잡는 이민의 직접체험은 없었지만 그들도 유사한 체험을 하였다. "국내 이주자들"인 이들은 무수한 경쟁적 이상들을 가진 문화에 직면하여 나름대로의 세력권을 형성하였고 도시에서 응집력을 가지고 개인적인 투철한 신앙과 신조에 큰 강조점을 둔 현상이다.
 
  2. 정치적 현상으로서의 근본주의 (미국적 정치화)
 정치가 아닌 신앙과 신학이 근본주의자들의 전반적 시각형성에 있어서 수위를 차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문화적 체험은 이차적 문제 특히 정치관의 형성과 많은 관계가 있었다. 진보적인 정서의 소멸은 자유주의의 사회 복음 지지에 대한 근본주의자들의 반발과 관련된 복합적  현상이었다. 그들은 현대주의와 진화론 뿐 아니라 공산주의의 확산에 대해서도 불안감을 가졌고 때로는 반유대적 정서조차도 여기에 흡수되었다. 동시에 근본주의자들에게는 무조건적인 애국심이 자라고 있었다.
 
근본주의자들은 미국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진 국가여야 한다는 후천년적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조직적인 정치사상은 드러나지 않지만 근본주의자들은 보수적이고 공화적인 색채를 가졌다. 1차대전 이후 정치화는 우연이었다. 그들은 자유주의에 대한 반발로 표류하여 보수로 밀려갔다. 위로부터 물려받은 선입관과 상투적 신조에 입각하여 이슈들에 우발적으로 대응한 것이다.
 
이것은 선과 악의 투쟁이라는 역사관의 구도 자체에도 원인이 있다. 연계된 사회주의, 진화론, 유대주의는 투쟁의 대상이라 생각하고, 이 투쟁은 신학과 교회를 넘어 학교로까지 확대되었다.
 
  3. 지성적 현상으로서의 근본주의(상식철학적 과학이해)
 근본주의는 진정한 과학은 사실에 입각하지만 진화론은 단순한 가설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일단의 박약하고 사변적인 가설들을 선호한 나머지 가장 중요한 사실들을 배제하는 세계관은 아주 불합리하고 그 결과가 참담한 것이었다. 이것은 베이컨적 과학적 사고의 모델과 인식을 해석과정으로 보고자하던 칸트 이후 철학적 전통과의 패러다임의 충돌이 빚은 현상이다.양측은 서로 다른 관점으로 의사소통도 불가능했다. 근본주의의 연합 또한 이런 자유주의에 대한 공동전제가 잇어 가능했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지식이 최우선적인 영원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진리는 불변하고 진정한 과학과 양식에 의해 진리를 알 수 있다는 견해이다. 그들은 성서의 사건을 사실로 인정하여 과학적 증명과 과학에 연관지어 설명하였다. 양식을 사용하는 사람은 누구나 신앙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라는 이런 견해는 상식철학에 근거한 것이다. 근본주의는 자체의 기독교 신앙을, 진리와 도덕에 대한 19세기의 특정 미국적 사상과 결합시키고 있는 것이다.
 
  4. 미국적 현상으로서의 근본주의
 근본주의적 신앙은 미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미국에서만큼 뚜렷하고 침투적인 역할을 한 곳은 거의 어디에도 없었다.
 
-사회적 요인들
미국의 인종적, 교단적 다양성은, 새로운 지역적 다양성까지 가세해, 새로운 사상에 대한 수용 혹은 불용과 관련하여 독특한 경향을 창출하였다.영국은 안정적 사회에 오래된 의사전달의 통로가 잇엇고 지방교구까지 대학의 이슈가 잘 전달되었으나 미국은 이런 차이가 투쟁을 야기했다. 또한, 가치기준 형성에 주도적이었던 미국 복음주의의 TRANSPOSITION은 더욱 큰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종교문화적 전통
저항없는 부흥운동을 가졌던 전통은 부흥운동에 의해 촉진된 성경주의와 초대교회주의를 형성했다. 성경주의는 종교적 개인주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며 부흥운동으로 고무되었다. 근본주의는 초자연과 자연의 엄정한 차별을 두었다. 이는 부흥운동의 일반적 추진력이 구원받은 자와 잃어버린자 간의 반정립에 대한 인식에 기초를 두고 있음과 관계있다.  따라서 자연과 초자연의 반정립이 아닌 종합에 기초한 19세기 자유주의 신학과 과학적 자연주의의 특징을 이루는 주제들이 들어갈 여지가 전혀 없었다. 다윈설과 고등 비평은 둘 다 자연적 발전 과정을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상은 부흥운동의 인식적 기초에는 용납될 수 없는것이었다.
 
  또한 오랜 칼빈주의의 종교적, 문화적 전통은 엄밀히 공식화된 종교적 진리의 진술에 대한 지성적 동의를 요구하였다. 근본주의에는 미국의 이러한 문화적, 종교적 전통에 이미 강력히 자리잡고 있던 교리적 경향을 강조하는 특징이 자리잡고 있었다.
 
-지성적 경향
영국이 전통의 점진적 발전에 뿌리깊은 인식이 존재한 반면 미국은 합리적 규정,새출발,과거와의 단절을 요구했다.이는 역사의 진화적 발전과 현재의 과거의 산물로 이해하는 가설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직접적이고 초자연적인, 혹은 적어도 섭리적인 개입을 당연시하는 성경 역사로부터 자신들의 역사를 해석해 온 미국의 체험은 역사를 성경의 렌즈를 통해 관찰함으로써 성경을 역사의 렌즈를 통해 보아야 한다는 고등 비평 사상과 양립할 수 없었다. 짧은 역사에 기인하여, 과거와의 연속성보다는 새로움과 미래를 향한 전진을 강조한 경향은 세대주의의 등장을 가능케 하였다.
 
18세기중엽의 사고를 넘지 못하던 미국은 낭만주의의 도입도, 이에 따른 과학의 제2혁명(?) 즉 고정법칙이 아닌 변화과정의 분석의 이해로의 이행도 늦었다. 다양한 인종성은 새로운 견해를 받아들이기보다 퇴행적으로 고착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최근에 이런 경향은 다시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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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3년(30세)
 
I.  서언-사람들은 너무 쉽게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간다.이제 철학은 신앙에 대한 진지한 성찰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II. 조율-아브라함 이야기의 이런저런 버전
 
III. 아브라함에게 드리는 찬사-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부조리를 넘어서 하나님을 믿었다.
 
IV. 문제제기
  1. 토로하고 싶은 심정
     무한한 체념의 완성-부조리의 힘- 유한성으로의 복귀의 운동
     무한한 체념 가운데 안식과 평화가 있다.
     이 운동에는 필연성이 아닌 영이 필요하다.
     무한한 체념(절망)은 신앙에 선행하는 최후의 단계이다.
     오성을 포기하게 되는 그의 단계에서,믿음을 통해 부조리를 얻으며 부조리 안에서 모든 것을 얻음.
     체념하는데는 신앙이 필요없다. 오성이면 충분하다.
    문제는 시간성과 유한성이다. 인간은 체념으로 아무런 유한성도 얻지 못한다.
     체념의 고통에서 평안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부조리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것이 기적이다.
    낭만주의적 이상주의 안에 있는 빈정거림과 익살도 사실 무한한 체념이다.
    마지막 운동, 신앙으로의 운동 그것은 인간이 실행할 수 없다.
    우리가 묘사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싸구려 시험의 통과가 아닌,시험의 고통이어야 한다.
   신앙의 역설, 하나의 살인과 하나님의 뜻,이삭을 아브라함에게 돌려준다는 역설이 이 책의 목적
    
* 체념의 고통으로 몰고간 사람들: 파스칼, 피히테, 쇼펜하우어, 키에르케고르, 엘룰
 
 2. 문제1: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유보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
  보편적이 되기 위해선 단독성을 지양해야 한다. 윤리의 보편성은 개별자가 자신을 보편성 안에 해소함으로써 완성되는 목적이다.
 신앙은 단독자가 보편적인 것보다 고차원적이라는 역설이다. 이런 신앙의 입장은 매개될 수 없다.
그래서 이것은 신앙이 아닌 다른 것으로 교환하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윤리적인 보편성에 대한 목적론적 유보를 포함한다. 윤리적 표현이라면 그것은 자식에 대한 고차적 사랑이어야 했다(이피게네이아,입다의 딸, 브루터스의 아들처럼) 이것은 윤리의 범위내에 있다. 하지만, 아브라함에게 윤리는 그의 의무 곧 하나님의 의지를 표현하고자하는 그를 막는 유혹일 뿐이었다.
 아브라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매개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이것은 동정도 공감도 시로 표현도 되지 않는 것이다.
 윤리적인 것이 보류될 때 개별자는 어떠한 방식으로 실존하는가? 보편자에 대한 모순은 곧 죄이다. 그는 믿었다. 그는 단독자로 절대자에 대한 절대관계 안으로 들어갔다. 단독자로 이런 권리를 얻었다. 이것은 결과에 따라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아브라함과 마리아는 불안과 고난을 지났다. 비난과 조롱, 몰이해와 이해시킬 수 없슴, 이런 고통과 역설 속에서 비극의 영웅이나 여장부 이상의 것이 되었다.그들은 단독자로 보편성을 넘어 지나갔다.
 아브라함은 비극적 영웅이 아니다. 그는 보편자로 볼 때 살인자일 뿐이다. 이것은 말하여질 수 없다. 그를 이해하는 사람도 충고하고 설득할 사람도 없다. 그는 역설의 길을 가기 때문이다. 이런 역설의 신앙에서 제외될 사람은 없다. 모든 인생의 유대는 정열이며, 신앙도 하나의 정열이기 때문이다. 즉 신앙을 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3. 문제2: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의무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
모든 윤리적 의무마다 하나님에 대한 의무이다. 하지만 이것은 보편성으로 이끌며 이 안에서 하나님은 극히 희미한 점이 되고 무력한 사상이 되고 만다.
윤리에서 단독자의 과제는 내면성의 규정을 소외하여 외적으로 표현(헤겔)하는 것이다. 신앙은 외적인 것으로 헤아려질 수 없는 내면성이 있다는 것이다.
신앙은 단독자가 보편자보다 고차적이며 그와 절대적인 것과의 관계에 따라 보편적인 것과의 관게를 규정하지, 그와 보편적인 것과의 관계를 통해 그와 절대적인 것과의 관계를 규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앙은 보편자를 상실한다. 즉 하나님을 위해 그 두려운 일을 하는 것이다.(절대적 의무)
보편자로 설명되는 기독교를 만들려는 것, 주해나 히브리어 원문, 비평이나 신학,싸구려 신앙을 만들어 기독교를 가장 가련한 것으로 만들고 말 것이다.
단독자로 실존하고 교회이념의 보편성 안에 매몰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두려운 또한 위대한 일이다. 보편자 안에 사는 일은 훌륭하고 존경 받을만하고 모범이 될만하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그것은 시험이요 유혹이다. 그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을 하려한다. 그는 머뭇거리며 가고 있다. 이 무서운 일의 끝은 하나님과 친밀한 자가 되며, 주님의 친구로 그분을 당신이라 부르는 것이다.
 
보편자 안에 행하는 영웅은 윤리적인 것을 목적론적으로 넘어설 때 보편자에 의지하며, 그것을 행하고 난 뒤 보편자 속에서 안식을 발견한다. 신앙의 기사는 오직 홀로 이 경계를 넘어가며 행하고 난 후 부단한 긴장 가운데 살게 된다.그리고 다시 하나의 운동을 행하여 기적을 향한다. 홀로인 기사는 독립되어있고 서로를 지지하는 종파적 동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타인을 위한 인도자가 된다는 헛된 욕망을 품지도 않으며, 증인이지 선생이 되려하지 않는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절대의무가 존재하든지, 인간끼리 서로 만족하며 사는 것(보편성)이 끝이든지 어느 하나이다.
 
** 그는 교회를 부인하거나 교제의 필요성, 공동체로서의 부름을 부정하고 교회를 파괴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교회 회원이 됨과 성도가 됨을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오류인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교회에 속하는 것이 아닌 교회로 모이되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실존으로 하나님 앞에 서기를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를 윤리됨에서 벗어나게 해야만 가능하다. 기독교가 윤리라면 그것은 철학이지 신앙이 되지 못한다는 각성 때문이다. 신앙을 헤겔의 철학과 같은 싸구려 보편성으로 만드는데 이 사람은 분노한다.
 
**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결국 파스칼의 도박의 비유와 같은 것은 아닌가?
 
 4. 문제3: 아브라함이 사라나 엘리자나 이삭 앞에서 자기의 계획을 침묵에 붙여버린 것을 그가 윤리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것일까
 윤리적인 것은 보편적이며 현시적이다. 단독자는 직접 감성적, 심령적이며 은폐자이다. 은폐성이 없이 아브라함은 변호될 수 없다. 신앙은 최초의 직접성이 아니라 최후의 직접성이다. 최초의 직접성은 심미적이다. 미학과 윤리학의 한계영역에서 흥미가 존재한다.(심미-윤리-신앙)
미학의 반전과 재발견은 해소이며 은폐는 극적 긴장을 주는 요소이다.은폐성은 자유로운 행위이며 미학의 책임이 있다.윤리학은 경험도 우연도 모른다. 미학은 은폐성을 요구하고 이에 보답하며 윤리학은 드러남을 요구하고 은폐를 처벌한다.
미학의 드러남은 우연에 맡겨진다. 윤리학은 직접 비극적 영웅이 드러냄을 통해 만족을 발견한다.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비밀과 침묵은 본래부터 있는 것. 즉 내면성의 규정들임. 델피 신랑의 침묵은 윤리적 요구에 노출되어있다. 물의 요정은 아그네테에게 후회를 은폐함으로써 단독자로서 악마적인 것과의 절대관계에 들어가지 않고 구출된다. 역설로의 도피이다. 죄 때문에 단독자가 된 요정은 더 나아가는 운동인 역설을 통해 보편자를 실현한다.이것이 미학의 영역이다.토비아서의 사라는 동정을 견딜 수 없는 존재이다. 보편자 밖에 놓이는 것은 악마적인 것의 시초일 수 있다. 천재는 이런 보편자의 테두리에서 악마적 안식을 찾든 종교적으로 귀의하든 할 수 밖에 없다. 파우스트는 회의자로 침묵은 그를 오만에 대한 회의로 몰고가며, 발설은 모든 사람을 혼란에 빠뜨린다. 절대적 관계 속의 단독자가 된다면 침묵의 이유를 소유할 수도 있다.
 
아브라함은 미학적 침묵의 범주가 아니다. 미학은 타인을 구할때 침묵을 허락한다. 아브라함의 침묵은 이삭을 죽이는 침묵이다. 윤리학은 우연적 단독성을 가진 그의 침묵을 정죄한다. 그는 비극적 영웅도 심미적 영웅도 아니다. 결국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확신하는 자는 신앙의 기사가 아니다. 그는 고난과 불안 속에 침묵하고 있다.이삭을 포기하는 무한한 체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조리한 결과를 믿었다.
 
단 한마디는 질문에 대한 응답이었다. [얘야 하나님께서 번제물을 친히 예비할 것이다] 그는 알지 못한다. 신앙의 부조리의 운동이 수행된다. 그는 이삭의 희생을 알았다. 그는 주저주저하며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한다.우리는 그를 역설을 이해한다는 뜻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렀다. 그는 자기의 고뇌를 잊었다.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헤아리신다. 개별자로서 단독자가 절대자와의 절대적 관계 가운데 선다는 역설이 있는 것이든지, 아니면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아니든지. 이것이냐 저것이냐이다.
 
** 부활의 역설도 마찬가지로 보편성이 아닌 미학도 아닌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을 포함한다. 이것 역시 이것이냐 저것이냐이다.
 
V. 끝맺는 말
어느 세대나 정열은 새로이 시작하는 과제이다. 신앙은 인간에게 있어 최고의 정열이다. 누구도 이것을 뛰어넘어보지는 못한다. 신앙에 이른 사람은 거기에 빠져있다는 말을 싫어하며 더 앞으로 나아가 보려한다.
[사람은 두번 다시 같은 냇물을 건널 수 없다]고 말한 스승 헤라클레이토스에서 더 나아간 제자는 [사람은 한번도 동일한 냇물을 건널 수 없다]고 앞으로 나아갔다. 앞으로 나아가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제자가 되고자했던 그는 스승에게 돌아오지 못했다.
 
** 실존의 존재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지 보편성 앞에 서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에게 유한성을 약속하시고 인간존재 자체의 부조리의 산실인 보편성은 지양된다.
아브라함은 단독자로서 보편성의 눈으로 보기에는 부조리에 불과한, 심미적 직접성으로 비치는 것을 절대적 의무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신앙의 비밀이다. 그는 할 말이 없다. 오직 눈물과 고통 모든걸 헤아리고 기억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안에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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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다
머리말: 절망은 구원의 시작이다.
서론: 그리스도가 같이 계심으로 죽음도 두렵지 않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는 병]의 두려움을 안다.
 
제1장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것
  A. 절망은 정신의 병이며 세가지 경우가 있다. 절망하여 자아를 가지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 절망하여 자기자신이려 않는 경우, 절망하여 자기자신이려 하는 경우
     자아는 자기자신에 관계하는 관계이다.
     절망하여 자기자신이려는 경우는 더욱 절망에 매몰된다(의지의 긍정?)
   B. 절망의 가능성과 현실성
     절망은 가능에서 현실로 나아갈때 추락한다
     절망하고 있지 않으려면 절망의 가능성이 없어야 한다
     절망한 사람은 모든 순간에 절망의 가능성을 끌어들이고 있다.
     고통은 자기자신과의 관계에서 온다(쇼펜하우어)
  C.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죽음이 희망의 대상이 될 정도로 고통이 극대화될 때, 절망은 죽을 수 있는 희망까지 빼앗는다.
    절망은 자기자신에 대한 절망이다. 그래서 자기를 벗고자 한다. 즉 자기자신이고자 하지 않는다
    자기의 참자아를 벗어나 그 자신이 발견한 힌두적 자아로 있기 원한다. 그러나 원래 자기에 억류되어 있음에 그의 고뇌가 있다.
    철저히 자아를 상실하는데 성공한다해도 그것이 환상에 지나지 않음은 드러나고만다.(!)
    자아를 갖는 것은 인간에 허용된 최대의 것인 동시에 영원히 인간에 요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2장 절망의 보편성
    서너가지 병명을 붙힐 수 없는 인간이란 없다. 절망을 겪지 않는 인간이란 없다.
    불안의 절망은 걸리지 않는 자에게 불행이고 걸린 자에게 신의 선물이다. 치유를 원치 않는다면 이는 위험한 병이다. 나아야 한다. 병 자체는 불행인 때문이다.
    절망을 통해서만 일상의 사람은 자신이 정신임을 깨닫는다.
    절망을 모른 체 살아가도 영원은 너의 자아를 통해 너를 절망에 못박아 놓은 것이다.
 
독후감) 쇼펜하우어가 느끼는 불안과 절망의 고통은 인간 안에 보편적 요소 혹은 기회로서의 축복이다. 이것은 우리 삶이 치유받아야 함을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치유자에게로 나아가게 된다.  [어둠에 거하는 백성에게 빛이 비추니라]
 
제3장 절망의 형태들
   의지를 많이 가질수록 그만큼 많은 자기의식을 갖는다. 자기의식은 절망의 의식이다.
 
 A. 절망의 의식 여부에 관계없는 절망(종합의 계기 점검)
  
  a. 유한성과 무한성의 규정 아래 볼 수 있는 절망
    - 자기가 자기되지 못하면 절망한다. 자기의 자기됨은 무한화하여 해방되고 유한화하여 자기자신에게 돌아옴이다. (유한과 무한의 변증법)
       α.  무한성의 절망은 유한성의 결핍
            상상력은 무한화의 매개이며, 자아의 가능성, 반성의 가능성이다
            감정,인식,의지가 공상적이 되면 자아는 희박해진다.
            그에게 절대이성, 내세종교, 초월적 의지란 자기 자신을 잃게 만드는 것일 뿐이다.
       β. 유한성의 절망은 무한성의 결핍
            정신에 대한 무시와 무가치한 것에 대한 이슈화
            편협성-근원성(정신)의 결핍, 다른 인간에게 맞추어가다가 자기를 잃음
            고루함-모험하지 않으면 잃는 것은 자기자신이다.
            세상은 세상에 몸을 파는 사람들로만 만들어져 있다. 그들은 모두 소유하나 그들자신은 아니다. 정신적 의미의 아무런 자아도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
   
   b. 가능성과 필연성의 규정 아래 볼 수 있는 절망 (가능과 필연의 변증법)
     α.  가능성의 절망은 필연성의 결핍
      가능성만 남으면 추상이 된다. 부족한 것은 필연에 대한 복종이다
      이로 인해 자아는 상실되며 경로는 동경(희망)의 추구와 우수(공포와 불안)의 매몰이 있다.
     β. 필연성의 절망은 가능성의 결핍
      가능성이 사라진 인간의 구원은 가능성의 존재이다.
      신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고 이것이 믿음, 곧 절망 가운데 구원이다.
      믿는 자는 인간적 계산에 의해 자신이 멸망할 것을 알면서도 그는 믿는다.그래서 파멸을 면한다.(공포와 전율)
     절망의 온전한 해독제, 신에게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 이것이 모순을 해결한다.
     결정론자,숙명론자는 필연성으로 인해 절망한다. 그들은 기도할 수 없다.
     속물성은 무정신성이고, 경험에 국한된 세계의 해석이다. 경험울 뛰어넘어 원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원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속물성은 상상력을 혐오하며 그래서 절망이며 신앙의 가능성이 없다.
      결정론,숙명론은 필연성의 긴장을 늦추는 완화작용으로서의 가능성이 결핍하며 속물성에는 무정신성에서의 각성작용의 가능성이 결핍하다.
 
B. 의식의 규정 아래 볼수 있는 절망
  의식이 증가할 수록 절망은 증가한다.악마의 절망은 절대의 반항이며 최저의 절망은 천진한 절망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이다.
 
 a. 자신이 절망상태에 있음을 모르는 절망-자신이 자아이며 영원적 자아임에 무지
    감성적인 것에 지배되는 보편적 인간은 비소크라테스적인 오류안에 살기를 즐겨한다
    절망에 대한 이런 무지는 절망을 더욱 증가시킨다.
    진리로부터 떨어진 절망보다 절망에 대한 무지는 한 단계 더 떨어져 있다(절망의 통과가 필요)
    가장 보편적인 절망임. 심미적으로 판단할 수 없고 오직 무정신성으로 절망을 판단한다
    즉 절망은 신 앞에 자기를 개인적 정신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이며, 외관이 찬란하고 행복하고 선하게 살고  타인에게 헌신적이며 보편자를 인정하고 기독교회에 몸담고 있어도 무정신성 안에서 절망이다.
 
독후감) 현대사회의 바쁨과 물질성, 기술문명과 과학주의의 자기 맹목성은 인간을 절망하지 못하게 한다. 필요한 경우에는 쾌락에 마취시켜서라도 절망에 잠들게 한다. 절망이 그를 최후에 집어삼킬 때까지
 
 b. 자신이 절망상태에 있음을 아는 절망-자신이 자아임을 아나 자신이려 하지 않거나 자신이려 함
   의식의 정도가 높고 명료한 절망의 관념에 가까울수록, 그리고 이 절망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강할수록 더욱 절망적이다. 신앙은 자아와의 관계에 자기로 남으며 자기를 정립하는 힘 가운데 자기자신을 의식적으로 기초두어 확고케 한다.
 
  α.  절망하여 자신이려 하지 않는 경우-애니마적 절망
 
  1. 지상적인 것에 관계하는 절망
      불쾌해지고 불행해지면 그는 절망한다.(직접적 인간) 외부적 도움이 오면 절망은 끝난다.
      결코 진정한 절망의 탈출인 자기자신으로 돌아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오직 웃옷을 갈아입듯 새로운 자아로 바꿔입길 원한다(헨리 애덤스)
      반성에 의해 이런 절망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으나 어느 한계가 있다.
      직접성과의 절연을 하지 못하고 만다. 추상적 자아에 대한 인식과 윤리적 반성의 부족 때문.
      젊을 때나 그러하다는 변명은 절망을 소유케 된 상태를 나이로 얻은 소득으로 생각한 때문.
      지상적인 어떤 것에 대한 절망은 지상적인 것 자체(전체규정)에 대한 절망으로 바뀐다.
 
  2. 영원적인 것에 관계하는 절망
      지상적인 것에 절망하는 자는 영원적인 것에 절망적이다.
      차이는 지상적 절망이 [약함의 절망]이라면 이 절망은 [자기의 약함에 대한 절망]
      지상적인 것에 절망하는 자신의 약함에 절망, 영원한 자아를 인식하나 헤어나오지 못함
      자신을 미워하고 자신을 벗어나고자 함.내향성으로 빠져들어가고 고독을 갈망함.
      폐쇄성이 교만 때문이나 그런 자기를 깨뜨리려 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열정으로 바뀌면 [안식을 모르는 일중독]의 정신이 되기도 하고, 절대 폐쇄로 나아가면 [아무도 이유를 모르는 자살]로 치닫는다. 
 
  β. 절망하여 자신이려 하는 경우-애니무스적 절망
    자아의 의식적인 상승으로 자기에 머무르려한다. 이런 자아는 가장 추상적 가능성일 뿐이다.
    부정적 자아를 무한형태로 상승시켜 자신이 원하는 자아를 만들고 그 자아에 남음
    행동적일때는 자신의 일을 신이 아닌 자기가 주시하고 있는 실험적인 것으로 만든다. 모든일은 평정과 부동 가운데 만족을 향해 치닫다 갑자기 無가 된다.(쇼펜하우어)
    수동적일때는 지상적 고뇌 앞에 이것을 제거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여버린다.
    구걸하여 이 고뇌를 제거하느니 차라리 이것을 지닌 채로 자기자신으로 남겠다는 반항이다.
    고뇌는 받아들여도 구원은 받아들일 수 없는 굴욕이다.
    이 demon적 사고는 이것을 빼앗을 영원자 앞에 불안으로 떤다. 절망은 폐쇄성안에 감추이고 차라리 자기 고통으로 말미암아 영원자에 대해 비난하길 원한다.
    
[제2편] 절망은 죄다
제1장 절망은 죄다
  죄는 인간이 신 앞에 절망하여 자신이려 하지 않거나 자기로 남아있으려 하는 것(가중된 절망)   
 
 A. 자아의식의 여러단계(코람데오)
    척도는 質이며 윤리적 목표이며 사물의 본성이다. 인간은 신을 척도로 한다.
    신을 척도로 하면서 신의 의지를 따르지 않는 것이 죄이다.
    인간적 자아만을 척도로 하면 죄는 별로 없다. 하지만 이 사고방식 자체가 죄이다.
    눈에 보이는 죄의 모습은 결국 이 정신적인 죄(죄는 정신이다)가 동의한 행위이다.
    그 반대인 신앙은 자아가 자기자신되며, 자기자신되고자 하여 신의 기초 위에 두게 하는 것.
 
    附論) 죄의 정의가 좌절을 포함함
        기독교의 척도가 신이라는 사실이 인간을 좌절케 한다.
       보잘 것 없는 인간이 신앞에 설수 있고 대화할 수 있으며 그 신이 그에게 구원을 받아들이기를 요청하는 현실이 그를 당황하고 좌절케 한다.
        좌절 이 불행한 경탄은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미움이다.
       그는 인간이 인간에 대해 경탄하여 헌신할 수 없다면 질투하듯, 신에 대하여 예배할 수 없다면 좌절케 된다. 
       그래서 이 역설과 비논리의 기독교는 변호될 수 없다. 신앙의 감격은 변호가 아니라 공격이며 승리일 뿐이다.
 
  B. 죄의 소크라테스적 정의-죄는 무지이다
    무지가 죄라면 죄는 없다. 죄는 의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의지와 반항이 빠져있다.
    하지만, [안다면 그의 생활이 그렇지는 않을 것, 그는 모른다]라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해한 것에서 행위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죄가 의지안에 존재함이 그리고 원죄가 있다.
    개인에게 이해에서 행위로의 이행에는 지연이 끼어든다. 인식의 쇠퇴와 악한 의지의 승리!
    인간의 생각의 범주는 소크라테스까지이다. 그 이상은 신의 계시에 따른다. 죄는 의지에 있다
    죄는 [신의 계시에 의해 어디에 죄가 존재하는지 인간에게 밝혀진 후] 신 앞에 절망하여 자신이려 하지 않거나 자기로 남아있으려 하는 것
   
   C. 죄는 소극성이 아니고 적극성이다
      개념적으로 죄를 파악할 수 있다는 사변적 교의학은 결국 죄는 부정이라는 소극성으로 만든다.
      신앙은 신과 인간의 질적 차이의 무지를 인정한다. 그래서 오직 죄는 절망의 도가 심해짐으로 인해 점차 강해진 자아와, 행위로서의 죄에 관한 최대한의 의식으로 구성됨으로 인해 적극성임을 안다.
 
제1장의 부론) 죄는 어떤 의미에서 드문 것은 아닐까?
강한 도의 절망은 드물다. 죄란 것은 절망의 도가 높아진 것이니 결국 드문 것이 아닌가?
절망해 있지 않다고 절망해 있지 않은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절망해 있다.
그렇다고 높은 정도의 절망이 공적도 아니다. 이것은 일종의 심미적 우월이다. 윤리적으로 보다 더 절망하는 것은 낮은 절망보다 구원에서 더 멀다.(기독교-유대교-이교)
인간의 생활은 하도 신앙과 떨어져 무정신이어서 죄라고 아니 절망이라 부를 수도 없다. (철저한 절망)
기독교를 변호한다는 것은 기독교가 변호되어야 한다는 무정신적인 것이다.
 
제2장 죄의 계속
   죄에 머무는 상태는 새로운 죄이다.
 
    A. 자기의 죄에 대하여 절망하는 죄
       죄는 선에 대한 단절이다. 죄에 대한 절망은 선으로부터의 더욱 심한 제2의 단절(회개와의 단절)이다
       그는 선한자로 가장하거나 격정적으로 자기 죄를 용서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위장된 자기애와 교만)
        자기의 죄에 대해 고뇌한 후 필요한 것은 머무는 것이 아닌 올바른 방향전환이다
 
    B. 죄의 용서에 대하여 절망하는 죄
      그리스도 앞의 자아, 죄인인 자기자신이려 하지 않는 반항이나, 죄용서는 없으므로 죄인인 자기자신으로 남겠다는 약함이 있다.
      죄의 용서에 절망하는 것은 사실 가장 가까이 신에게 접근했을때나 가능하다(기독교안에서)
      이제 기독교 사회 안에선 이런 걸 멋있다고 한다
      인간의 군집으로서 교회는 신을 위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용서의 필요를 희석
      죄의 범주는 개체성의 범주이지 집단의 범주가 아니다.죄는 사유의 일반화 범주가 아닌 현실성이다.
      개체가 신에게 친근감을 느낀다면 공포와 전율 속에 느끼지 않으면 안 되며 또 그 중압 가운데 좌절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추상물 즉 개념을 통한 신의 이해는 이런 중압감이 없는 천박하고 공허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에 대하여 죄만이 신에 대하여 부정으로나 긍정으로나 말하여질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각 사람을 개체로, 개체적인 죄인으로 하는데서 좌절은 시작되고 기독교는 시작된다.
    심판은 오직 개체를 상대로 한다.각 사람은 자신의 죄의 보고서를 개체로 지닌다
    좌절은 이 죄의 용서에 절망하는 강화된 죄이다.
 
   C. 기독교를 폐기하며 거짓이라고 말하는 죄
     자아의 절망적 강화
     어쩌면 이토록 가까이 우리를 부르는 신의 근접감에 좌절하지 않을 수는 없다.
     나로 인하여 넘어지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
     좌절하지 않은 자만이 믿음으로 예배한다.
     좌절의 이유는[너는 믿어야 한다]에 있다.
     이에 대한 무관심한 태도를 택하는 것도 좌절이다.
     관심은 가지나 이제나저제나 세월을 흘려보내는 것도 또 다른 좌절이다
     적극적으로는 이 모든 그리스도의 사실이 假現說이거나 합리주의로 부정하는 것이 있다.
     현재 이 사실이 중요치 않게 취급되는 이유는 죄와 신앙을 대립된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신앙은 자아가 자기자신에 관계하여 자기자신이길 원할때 , 자기를 정립한 힘안에서 자각적으로 자신의 기초를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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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4 08: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도움이 되었습니다.

ellul@naver.com 2017-02-04 10:14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Ewedu14 2017-12-31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정리를 잘 하셨네요!! 많은 도움 얻고 갑니다 :D
 

그리스 항아리에 부치는 노래   키이츠





너는 더럽혀지지 않은 그대로인 정적의 신부

너는 침묵과 기나긴 세월 속에 자라난 양자

너는 숲속의 역사가.

 

우리 시인의 노래보다 더 멋있게 꽃처럼 아름다운 노래를

이렇듯 전해 줄 수 있다니-.

네 둘레에 감도는 것은 어떤 전설인가?

죽음에 관해선가, 영원한 것인가? 그 모두에 관해선가?

템페 골짜기인가, 아카디아 언덕의 일인가?

사람들의 일인가, 신들의 일인가, 신과 인간 모두의 일인가?

어떤 사람들일까, 어떤 신들일까? 도망치려는 것은 어떤 소녀일까?

이 얼마나 미친 듯한 구애인가, 도망치려는 몸부림인가?

어떤 피리이며 어떤 북인가?  얼마나 미친 듯한 환희인가?

 

귀에 들리는 선율 아름다우나 귀에 울리지 않는 선율은 더욱 아름답다.

, 네 부드러운 피리를 계속 불어라.

육신의 귀에다 불지 말고 더욱 친밀히

영혼을 향해 소리 없는 노래를 불러라.

나무 그늘에 있는 젊은이여, 네 노래는 멈추는 일이 없고

이 나무들의 잎도 떨어지지 않는다.

사랑에 빠진 사람아, 너는 결코 입맞출 수 없으리라.

목표 가까이에 닿긴 해도-.

그러나 슬퍼 말아라. 너 비록 크나큰 기쁨을 얻지 못할지라도

그녀는 빛바래는 일 없으매

영원히 사랑하라, 그녀는 영원히 아름다우리라. 

아아 너무나도 행복 겨운 나뭇가지들이여!

잎은 지는 일 없고, 봄에 작별을 고하는 일도 없다.

 

또한 행복 겨운 연주자여, 피곤할 줄 모르고

영원히 새로운 노래를 영원히 연주할지니

더욱 행복스런 사랑이여! 너무나 행복 겨운 사랑이여!

언제나 따스하고 영원히 즐거워라.

언제까지나 불타듯 추구하고 언제까지나 젊도다.

살아있는 인간의 정열이란

끊임없이 추구하여 가슴은 슬픔이 넘치고

이마는 불타며 혀는 타올라 네 사랑에 미치는 것이 아니다.

이 희생 의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오오! 신비로운 사제여, 명주와 같은 몸에다 화환을 장식하고

하늘을 우러러 우는 송아지를 어떤 초록빛 제단으로 데려가는가?

 

이 거룩한 아침, 여기 모인 사람들이 남겨두고 온 것은

강변의 작은 마을이던가, 바닷가의 마을이던가?

아니면 평화로운 성채로 둘러싸인 산 위의 마을이던가?

조그만 마을이여, 네 거리는 영원히 조용해질 것이리라.

그리고 황폐해질 거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오오 아티카의 형체여! 아름다운 모습이여!

대리석 남자와 여자가 조각되어 있고

숲의 나뭇가지들과 밟혀진 갈대도 있구나.

 

너는 침묵의 모습, 차가운 전원이여!

우리를 생각하지 못하게 하고 영원하구나.

사람이 나이 들어 한 세대를 마감할 때도 너는 남아서 이렇게 말하리라.

'아름다움은 진리요, 진리는 아름다움이다.' - 이것이 너희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아는 것 전부이고, 알아야 할 것은 이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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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삶

이 세계의 고통의 근원에 대한 물음
1804년16세 [여행기]
  자신의 삶과 특히 다른이의 불행에 대해 강렬한 느낌
  삶의 비통함
  이 세상은 선한 존재의 작품이 될 수 없다
1845년 [부록과 첨가]
   그리하여 인간은 체념의 상태에서만 대화에 임해야 한다
   개별화와 자신의 고유인격에로의 집중
   고독을 사랑하지 못하면 자유를 사랑하지 못한다
   사고의 진실과 중요성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인내심과 강력한 표현을 생각해내는 감동이 일어난다
   대화로 표현될 때 사고는 희생된다
   자기사상을 지닌 사람은 사물에 대한 직접적인 고유한 견해로부터 이야기한다
   세계라는 미지의 공연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이 천문학이면 그 의미를 파악하려는 것이 철학이다
   삶의 지혜에 가장 중요한 지점은 올바른 관계, 부분적으로 현재를 부분적으로 미래를 위해 이바지
   고통이 가득한 삶은 곧 밝아질 희망 가운데 있다. (무신론적 팡세)  
  
제2부 이념

원인과 작용에 대한 연구의 이유-고통의 원인을 찾기위함
고통을 느끼게 되는 조건이 인간의 사고의 특성 속에 놓여있다
1813년 25세 [충족근거율의 4가지 뿌리에 대해서]
     객체는 주체 없이 절대 표상될 수 없다
     만약 객체가 있다면 주체도 있다
     왜라는 이유가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인식의 근거에는 근원적 명제가 존재한다
     인식하는 의식, 즉 감성, 오성, 이성은 주체와 객체로 분리되며 그 이외 어떤 것도 포함치 않음.
     감응은 오성에 감각자료 제공하여 직관적 세계 산출
     보편화 시키는 이성에 의하여 인식을 산출
    의식의 대상은 표상이라 칭함. 표상은 서로 선천적으로 규정이 가능한 결합(주객체 관계)에 따라 합법칙적인 형식에 놓임


제3부 작품
1818년 30세
1. 제1권
-표상으로서의 세계(1장~16장)
세계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인간을 위한 삶과 연관되는 세계에 대한 질문
세계는 오로지 개별자의 삶의 공간에서만 의미가 있다.
세계관의 변화가 인간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인간고통의 원인에 대한 소식
인간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없다.
표상의 내용으로서의 세계에 대해서만 말할뿐 (물자체-칸트)
그러나 오직 인간만이 모든 인식은 항상 표상임을 의식한다(반성과 추상)
세계에 대한 인식조건
객체와 주체의 분리야 말로 모든 부분의 공통형식(선험적 진리,경험의 조건)
시간,공간,인과성은 그 자체로 지각이 불가능하지만, 의식의 확실성에서 나온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경험의 형식
주체는 세계의 전달자이며,모든 존재하는 것은 주체에 의해서만 존재
시간 공간은 이 근거율의 [형태]이며, 물질(인과성)은 시간 공간에 대한 [지각가능성]
인식하는 오성
오성-감성적 직관의 대상을 사고하는 능력
이성-선천적으로 인식의 원리를 제공하는 능력
순수한 감성-시간과 공간에 대한 주관적 상관성
오성-인과성의 주관적 상관성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오로지 오성에 의하여 존재하며,오성을 위하여 존재
이성-지각되어진 것을 재생한 상을 반성하여 추상적으로 반사
개념을 통해서만 세계사의 배후를 이해-고통의 근원
지식-판단을 자기의 정신에 의해 의도적으로 재현할 수 있다는 것. 이성에 의해 고정시켜 놓은 추상의식
개념들은 판단들로 결합되고 확정된다. 판단은 표상이라고 명시되는 개념들로 형성된다.
지식은 추상의식이므로 광범위한 적용이 가능해짐
지식의 가치에 대해서
행위는 감정에 의하지 개념에 따라 일어나지 않는다
추상적 인식의 가치는 항상 직관적인 인식과의 관계에 있다. 즉 표상 형성에 관여
반성적 인간만이 미래를 걱정하는 현존방식을 갖는다.
이성은 결국 인간에게 고통을 가져온다.
 
 
2. 제2권
-의지로서의 세계 (17장~29장)
육체의 확실성
인간은 세계 속의 개별자로 육체로 존재한다. 육체를 매개로 전체세계와 결합하며 의지를 작용한다
의지는 생명의 원리이며 생명 에너지이다.
의지(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와 육체 활동(오성을 위한 직관 속에 주어진 것)은 결국 하나이다.
육체는 표상이며 의지, 세계 또한 표상이며 의지이다
의지의 활동은 상황에 의존하는 동기에 따르는 것
의지 자체는 어떠한 계기도 따르지 않고 촉발과 자극,육체능력에 선행한다(의지를 의지케 하는 의지는 없다?)
신체의 부분은 의지의 욕구를 반영한다(이빨,목구멍,소화기는 객관화된 배고픔)
자연에서의 의지의 작용에 대하여
자연에서 관찰되는 모든 현상이 의지의 작용
의지의 작용에 대한 반성은 현상을 너머 물자체(일자Einer)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자연속의 의지의 지속적인 작용을 확인한다면 의지는 인간정신이 그려낼 수 있는 모든 것의 내적 원리
물자체로서의 의지는 현상과 다르며 현상의 형식에서도 자유롭다
의지의 작용은 오직 표상이 가능한 형식들의 다양성(시간 공간 인과) 속에서만 경험될 수 있다
하지만 일자인 의지는 이 모든 다양성으로부터 자유롭다 (태초에 의지가 있었다)
인간의 의지는 자유로우나 의지가 표현될 때 이미 형식과 필연성에 지배된다.
인간과 동물 모두에 필연성에 영향 받지 않는 포괄적 의지가 존재한다
의지는 같은 정도로 자기를 구현한다. 다양화는 시간과 공간에서만 의미를 갖는다(인간과 동물의위치)
자유와 필연성
자연법칙은 표상의 영역인가 순수의지의 영역인가
의지-이념(자연법칙)-현상
이념인 자연력은 낮은 단계의 의지의 객관화.자연법칙은 현상 형식(시,공,인)에 대한 이념idee의 관계이다
모두 자신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서로의 물질을 박탈하려한다-불화,투쟁과 승리
의지는 목적 없이 활동하며 항상 새로운 실현을 추구한다 (의지의 변증법)
인간의 의지는 자연을 종속시키고, 세계를 표상으로 이해하여 그 의지현상의 전체성으로부터 고립한다(자연의 의지에 대한 독립적 죄의 탄생)
인간은 사고능력으로 이 세계의 의지를 벗겨내나, 그 자신도 이 세계의 일부이다(생존보존)
이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다.
 
3. 제3권(30~52장)
-표상으로서의 세계, 충족 이유율에 근거하지 않는 표상(이념)
이념들에서의 의지의 현상
이념을 이해하려면 개별성을 포기해야 한다.
물자체(의지)의 표본인 이념은 이해될 수 있다(인식의 최고단계,개별성 벗기,칸트보다 관념적...)
개별자는 오직 표상형식(시,공,인)을 통해서만 객체에 대한 관심을 가진다
이념은 어떻게 인식되는가
인식의 예외적인 경우-일반적 인식에서 이념의 인식으로의 전환
근거율을 따르지 않고 다른 사물과의 연관에서 벗어나 주어진 대상을 靜觀하는 것(꿰뚫어보기禪)
대상속에 자신을 잃어버리고 인식함(이념)
개별자가 아닌 순수하고 의지없고 고통없으며 시간으로부터 해방된 인식의 주체이다
직관으로의 몰입(사마디)은 자연의지(브라흐만)에 합일하여 스스로를 자연의 일부로 여기게 한다.
인간의 역사, 사건,국가와 시대에 따른 인간의 삶은 우연이며 무의미하다(브라흐만의 유희)
이제 본질적인 것으로서의 이념을 바라보는 자는 지상 위의 이방인이 된다.
예술의 과제
인식의 예외적 상태는 예술에서 그 표현을 발견할 수 있다.
학문은 탐구하려는 관심에서 즉시 새로운 질문으로 옮겨가고 만다
예술은 정관의 대상을 고립시키며 그것을 둘러싼 시간의 바퀴를 멈추게 한다.이념
천재의 본질은 이러한 정관능력에 있다. 천재성은 바로 가장 완전한 객관성이다(크리슈나의 사랑)
정관의 능력이 없는 모든 이들은 [평범한 인간]일뿐 아니라 [자연의 공산품]이다
예술가의 작품에 대해서
천재는 이성이 아닌 감정과 비이성적 정열에 이끌리며, 개념이 아닌 직관적 인상을 따른다.
현재의 강렬한 인상이 그를 무분별,정열,격정으로 몰고간다(니체,피카소,로댕)
이성이 아닌 감각과 오성(표상에 의한 인식이 아닌, 의지에 의한 인식)이 이끔
현재에서 과거와 미래를 보지 않고 이념을 본다
예술 작품은 이런 인식의 반복이며, 이 인식과 미적 만족감을 공유하며, 이념 인식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게] 한다
천재-이념으로서의 객체에 대한 인식과 순수한 주체의 특성(개별자의 의지적 요구가 정지)의 결합
모든 의욕은 욕구와 결핍과 고뇌에서 온다.주관 없는 사물의 관조는 평온을 가져온다.(우파니샤드)
의지가 지양되는 순간 천재는 [의지의 강제노동으로부터의 안식]을 얻는다.
아름다움의 작용
예술적 만족감은 욕구가 그치는 순간 잠시 스치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인식의 의지없는 주체로 고양을 유도한다.(이끌림)
숭고함은 강압적으로 자기확신과 같은 의지와 관계하는 인식과,의지를 넘어서는 의식적 고양을 통해 순수의식이 획득된다. (자의적 선택)
아름다움에서 숭고로의 이행은 강력한 자연 앞에 자신의 초라함과 또 그 전달자로서 자신의 의식에서 발생한다.(개별자의 소실과 전달자의 탄생)
의지의 객관화로서의 이념을 인식하게 하는 각각의 사물은 아름답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의지의 가장 완전한 객관화, 인간의 조각을 통해 자연이 애쓴 것을 예견(로댕)
시는 각각의 개념들의 보편성을 폐기하고 이념을 직관하도록 한다
시인은 특정한 측면을 표현함으로써 자기자아의 본질을 파악한다
비극은 고통의 원인인 의지의 개별화된 갈망을 보여주며, 일반적 의지가 개별화된 의지에서 제거되는 [자기 분열]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한다.
음악은 이념을 거치지 않고 의지의 현존자체를 보여준다.
예술은 의식이 명석할수록 깊어지는 고뇌와 이질적 삶에서 느끼는 고독감을 보상한다
 
4. 제4권(53~71장)
-의지로서의 세계, 자기 의식에 도달한 경우에 있어서
철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위해서
철학은 왜 존재하느냐가 아니라 세계가 무엇인가하는 질문이어야 한다
과거와 미래는 항상 현상과 관계하므로, 의지는 바로 여기의 삶인 세계에 대한 인식으로 현실화되어야한다(삶에로의 의지)
의지가 존재하는 한 삶은 계속되며 개별자만이 생성과 사멸된다.
죽음에 대한 사고가 두려움의 근원이나(까뮈), 개별자가 아닌 전체적인 것만이 지속의 의미를 가짐을 인식하면 자연의 표현인 죽음은 더 이상 고통의 원인이 아니다.
인간의 자유에 대해서
의지의 자유란 개별자 인간이 스스로를 표상의 주체로 인식하는 [자기의식화]에서 얻어지는 필연성으로부터의 탈출이다. (현상은 표상일뿐, 원효의 해골바가지)
그러나 이 탈출 자체는 여전히 이미 결정된determined 체계 안에 있는 선택일 뿐이다.(손바닥 안!)
의지는 한 개인이 성취할 수 있는 행위와 영향을 규정한다(성격)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경험을 통해서 배워야 한다(경험적 성격)
이성을 통해 성격의 규정성을 넘을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나 현상안에서 의지는 동기에 의해 필연적으로 규정되고만다.
이런 능력의 결핍 즉 자신의 인식에 의한 최고의 길과 자신과의 괴리는 인간을 고통으로 몰아넣는다.
죽기로 되어있는 인생에서 행복은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은 소망과 성취의 간격에 달려있을 뿐.
의지와의 조화 속에 있는 삶
[여기있는 존재,실존]라는 것은 산다는 과정이고 결국, 방심의 순간을 기다리는 죽음(페스트)에 대한 지속적인 반항이다. 그래서 실존은 현재 삶에 대한 고뇌이며, 그의 존재 자체가 고통의 근원이다
인간존재 자체가 고통의 원인이라면 인간 삶의 전망이란 없다.
행복은 결핍, 욕구, 고통의 [순간적 부재]일 뿐이다.
선택은 [의지의 긍정] 혹은 [의지의 부정]
의지의 긍정은 인간의 삶의 의욕자체를 방해하지 않는 것(번식),그러나 다른 개별자와 조화 필요
개별자는 세계의 주체이므로 자신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희생시키는 것을 당연히 여김
다른 개별자의 신체에 나타나는 힘을 빼앗아 자기의 의지에 봉사케 함으로써 자기의지를 확장시킴
어떻게 덕이 작용할 수 있는가
개별자에게 공통적인 이성(!)은 이런 의지의 부정행위로 인한 즐거움보다 이로 인한 만인의 괴로움을 없애는 것이 최상의 유일한 수단임을 인식한다.
이런 경험에 기반을 둔 범위에 한해서 윤리규정은 타당성을 지닌다.즉 (헤겔의) 국가가 주체가 되지 않는다.
고통과 노고는 참고 견디어야 할 어떤 불행이 아니라, 오직 의지로서의 현상의 다양한 국면일 뿐이다. 불행을 인식하지 않으려면 이 땅에 나타난 악인의 흥왕과 선인의 고통이 오직 현상(마야)일뿐 물자체(의지)는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타자도 나와 동일한 의지의 현상를 가졌다는 인식은 덕의 본질을 이루는 기초다.
덕에 대한 통찰은 인식되나 개념으로 파악되어 전달되지 않는다(이념?). 오직 직관적 인식으로부터 나와 자기자신과의 직접적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런 인식은 덕과 경건의 확신이며 구원의 도정이다.
타인의 고뇌에 자신을 일치시키어 그것을 경감코자 하는 행위는 [동정심]이 원인이다.
삶에로의 의지의 부정은 물자체에 대한 인식에 기반한 평정(무욕)의 상태이다
현상 속에 반영된 자신을 긍정하지 않고 부정해 버린다(카르마 팔라 탸가)
세계는 오직 육체의 생명을 통해 경험하는 의지일 뿐이므로 인식의 주체이길 포기하고 삶의 의지를 부정하면 세계의 표상은 소멸해 버린다(요가를 통해 고통을 벗는다)
자살은 의지의 부정이 아닌 강력한 삶의 긍정현상이다. 다만 그 삶에 만족하지 못할뿐...
인간이 자유에 도달하는 유일한 가능성은 자기거부에 있다.
의지를 거부하고자하는 충동은 이 세상의 고통을 체험하는 인간 안에 잠재하고 있다가 피할 수 없이 일어나게 된다.
무nichts에로의 이행, 의지를 거부함으로서 그 현상인 세계도, 보편적 형식인 시간,공간,인과성 그리고 근거율인 주체와 객체도 사라져버린다.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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