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개선론

                   스피노자, 대양서적, 1981년.

 

 

 

 

 

그의 철학의 서론격인 이 책에서 그는 그의 탐구의 배경과 방향을 밝힌다. 인생이 허망함을 알았기에 궁극적 행복을 지속적으로 줄 무언가를 찾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 그는 1. 사물의 제1원인 찾기, 2. 수동감정의 극복과 조절, 3. 신체적 단련을 목표로 한다.(신학정치학) 이 일에 가장 선행하는 것은 그에게 지성의 개선이다. 1.허위를 감별하고 2. 탐구의 법칙을 정하고 3. 질서를 유지해가며 4. 완전관념으로 정진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1과 2에서 이 글을 멈추고 말았다. 3이야 그의 [생활수칙]대로 1. 속인에게 맞추어 이야기하기 2. 건강유지할 정도의 쾌락즐기기 3. 관습존중할 정도의 돈과 기타물건 추구로 이해하면 되지만 4에 대한 언급없이 이 글은 남았다. 혹자는 공통통념의 발견이 더 이상 스피노자로 하여금 [지성개선론]의 기하학적 존재의 관념에 머무를 필요가 없게 되어 [지성개선론]을 새로 써야했기 때문이라하고,  다른 사람들은 서론의 역할인 이 글이 [에티카]로 발전되어 갔으므로 구체적 언급은 필요없었다고 하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그의 철학의 목표와 방법론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에티카]의 이해에 꼭 필요한 책이다.

에티카든 지성개선론이든 그는 그의 이성으로 신을 이해하리라 믿었다. 데카르트보다 한걸음 더 나아갔고, 철학의 위안이 궁극적 위안이 될 수 있으리라는 점에서는 보에티우스보다 또 한걸음 더 나아갔다. 그에 대한 혹독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신흥계급은 그의 이런 추구를 지지했고 한편으론 이용했다. 유태인으로 그를 이해하는 것도 17세기 사상흐름의 한 지식인으로 이해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는 위로를 자기 안에서 찾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인정받고자 했던 처절한 투쟁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찾을 수 없었던 것 같아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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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bertas 2004-11-25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피노자는 결코 자신안에서 위로를 찾는 자기 위안자는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카를님은 자기의식에 대한 집착이 강한것 처럼 보이는군요. 스피노자에게서 자기의식에 대한 관념은 상당히 미미하게 보이거든요. 제 생각에는 그는 자의식을 하나의 상상으로 생각했든 것 같습니다.


자기의식은 데카르트의 징표이지요.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의 영향하에 있었다는 건 부정하기 힘들지만 놀랍게도 그는 자기의식의 함정에 빠지지는 않았든것 같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그는 反데카르트적인 사유를 할수 있었을겁니다. 그게 그의 장점이기도 하구요. 한편으로는 헤겔이 스피노자에 대해 가진 양가적 평가의 원인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전 스피노자의 삶에서 별로 슬퍼보이는 점이 없거든요. 상식과는 달리 스피노자은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별로 주저함이 없었고 고립되어 있지도 않았거든요. 세계와의 고립, 이건 솔직히 스피노자와는 별로 연결이 안되는 신화이지요. 스피노자는 세상과 교통하기를 멈추지 않았고 그가 거주하든 모든 곳에서 결코 소외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가 다락방에 쳐박혀 있었다면 그건 자의에 의한 것으로 스스로 고독을 원했기 때문일겁니다. 그건 카를님도 종종 원하고 바랬든 그런 상황이겠지요. 스피노자의 삶을 보면 전 별로 측은하지 않습니다. 그는 항상 행복했을거 같으며 누군가 그에게 붙여준 '聖 스피노자'란 칭호에 걸맞는 삶을 누렸다고 생각합니다.


지성개선론에 관해서 말하자면 전 그의 청년기의 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글의 첫 부분은 상당히 인상적인 자서전적 서술로 시작합니다. 그것에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마세요. 그건 데카르트의 글도 대개는 그렇듯 자서전적인 서술로 시작합니다. 즉 새로운 철학을 하고자 했든 그 시대 문체의 한 특성이라고 생각하세요. 물론 보여지는 금욕적 문맥이 감동적이기는 하지만, 스피노자는 결코 금욕주의자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보기엔 상당한 금욕주의자로 보이지만, 스피노자 자신은 자신을 결코 금욕주의자로 생각하지는 않았을걸로 생각됩니다.


지성개선론이 개진하는 철학적 의미는 결국 에티카와 연결되고 복잡한 논의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이런 글에서 더 이야기 하는건 별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에티카에 대한 카를님의 서평에 댓글을 달았다가 이렇게 여기까지 오게 되어 간단한 글을 남기고 갑니다. 그럼...^^



건데 절 아시나요? 제 변변찮은 댓글에 지성개선론에 대한 평까지 부탁하셔서 조금은 당황스러워서요...^^

카를 2004-11-25 0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긴 덧글 감사합니다
 

스피노자의 진화 (≪지성개선론≫의 미완성에 관하여)

  

 아베나리우스는 세가지 국면들을 구별하면서 스피노자의 진화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소론≫의 자연주의, ≪형이상학적 사유들≫의 데카르트적 이신론, 그리고 ≪에티카≫의 기하학적 범신론(주1). 데카르트적 시기와 이신론적 시기가 존재했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맨 처음의 자연주의와 최후의 범신론 사이에는 주목할만한 강조점의 차이가 있다. 이 문제로 돌아가면서 마르샬 게루(Martial Gueroult)는 ≪소론≫이 신=자연이라는 등식에 기반하고 있는 반면에 ≪에티카≫는 신=실체라는 등식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론≫의 일차적 테마는 모든 실체들이 하나의 똑같은 자연에 속한다는 것인데 반해, ≪에티카≫의 일차적 테마는 모든 자연들이 하나의 똑같은 실체에 속한다는 것이다. ≪소론≫에서, 사실 신=자연이라는 등식은 신이 그 자체로 실체인 것이 아니라 모든 실체들을 표현하고 통일시키는 "존재"라는 것을 함축한다. 대조적으로, ≪에티카≫에서 신과 실체의 동일성은 속성들이나 성질이 부여된 실체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것, 그리고 항상 자기-원인화의 특성(property)을 즐긴다는 것을 수반한다. 자연주의는 의심할 여지 없이 강력하긴 하지만, 그러나 ≪소론≫에서 그것은 속성들에 기반한 자연과 신간의 '상응(coincidence)'인 반면, ≪에티카≫는 실체들의 일자성(oneness) (범신론)에 기반하여 실체적 동일성을 증명한다(주2). ≪에티카≫에서는 자연의 대치가 있다. 즉 자연과 신의 동일성은 능산적인 것(the naturata)의 내재성과 소산적인 것(the maturans)의 내재성을 더욱 잘 표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정교화되어야만 한다.


이처럼 범신론의 절정 단계에서 우리는 철학이 스스로 신 안에 즉각적으로 거주하고 있으며 신과 더불어 시작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해서, 이것은 합당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소론≫의 진실이다 : ≪소론≫은 신과 더불어, 신의 존재와 더불어 시작한다 ― 단지 그 결과, 즉 첫째 장과 두번째 장 사이의 진보에 있는 단절을 겪기 위해서. 그러나 ≪에티카≫에서, 혹은 이미 ≪지성개선론≫에서, 즉 스피노자가 자신의 배열에 따라 연속적인 발전의 방법을 취했을 때, 그는 신과 더불어 시작하는 것을 사려깊게 피하고 있다. ≪에티카≫에서 그는 모든 속성들에 의해서 구성된 실체로서의 신에 도달하기 위해서 주어진 실체적 속성들로부터 출발한다. 따라서 그는 여전히 아홉가지 정리들을 요구하는 이런 지름길을 스스로 발명하면서 가능한 한 빨리 신에 도달한다. 그리고 ≪지성개선론≫에서 그는 "가능한 한 빨리" 신의 관념에 도달하기 위해서 주어진 참된 관념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스피노자가 신과 더불어 시작했어야 했다고 믿곤 하기 때문에 최고의 주석가들도 ≪지성개선론≫이라는 텍스트의 차이들과 스피노자의 사유에 있어서의 비정구성들을 추측한다(주3). 사실, 가능한 한 재빠르게 신에 도달하는 것, 그러나 즉각적으로 신에 도달하지는 않는 것은 ≪지성개선론≫과 ≪에티카≫ 모두에 있어서 스피노자의 정의적 방법의 부분이다.


우리는 ≪에티카≫의 발전에 있어서 빠름, 느림, 머뭇거림의 이러한 물음들의 일반적인 중요성을 기억하고 있다. 커다란 상대적 빠름은 처음에는 실체로서의 신의 관념에 도달하기 위해서 필요하게 된다. 그리고 나서 모든 것은, 항상 필수적인 계기들에서 새로운 가속이 생산될 때까지 확장되고 느려진다(주4). ≪에티카≫는 때로는 빠르게 흐르고 때로는 느리게 흐르는 하나의 강이다.


스피노자의 방법이 종합적이고 구성적이며 진보적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원인들에서 효과들로 나아간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마치 마술에 의한 것처럼 스스로를 원인에 정립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고유한 질서'는 원인에서 효과들로 나아가지만 그러나 우리는 고유한 질서를 즉각 따라갈 수는 없다(주5). 종합적으로는 물론이고 분석적으로도, 우리는 명백하게 효과 혹은 적어도 '주어진' 효과의 지식과 더불어 출발한다. 그러나 분석적 방법이 단순히 사물의 조건으로서의 원인을 추구한다면, 종합적 방법은 조건화(conditioning)가 아니라 오히려 발생을, 즉 우리에게 다른 사물을 알게끔 해주는 충족이성을 추구한다. 이런 의미에서, 원인의 지식은 완전하다고 말해질 수 있으며, 그것은 가능한 한 빠르게 원인에서 효과들로 나아간다. 처음에는 종합은 가속화된 분석적 과정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 분석적 과정은 종합적 질서의 원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만 사용된다. 플라톤이 말했듯이, 우리는 '가설'로부터 출발해서 결과들이나 조건들을 향해서가 아니라, 이로부터 모든 결과들과 조건들이 뒤따라 나오는 '비가설적(anhypothetical)' 원리를 향해 나아간다(주6).


그러므로 ≪지성개선론≫에서 우리는 이로부터 모든 관념들이 뒤따라 나오는 신의 관념에 도달하기 위해서 '주어진' 참된 관념, 즉 모든 참된 관념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에티카≫에서 우리는 실체에 도달하기 위해서 모든 속성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로부터 모든 사물들이 뒤따라 나오는 실체적 속성으로부터 출발한다. 문제는 이러한 두가지 출발점들을 면밀히 주시하고 ≪에티카≫와 ≪지성개선론≫의 차이의 정확한 본성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제 ≪지성개선론≫는 이러한 관점에서 꽤 분명해진다. 우리가 가정을 경유해서 이로부터 출발하게 되는 주어진 참된 관념은 기하학적 존재자의 관념인데, 정확하게 말해서 그러한 존재자들은 단지 우리의 사유에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 거기로부터 출발하면서 우리는 발생적 요소에 도달하는데, 이 발생적 요소로부터 출발하는 특성만이 아니라 모든 다른 특성들도 뒤따라 나온다 : 즉, 우리는 원의 종합적 정의에 도달한다("한 점은 고정되어 있고 나머지 부분들은 움직일 수 있는 것의 선이라고 기술된 모습"; 선과 운동의 결합속에 존재하는 종합은 우리 자신의 사유역량보다 더 우월한 사고역량으로서의 신을 지시한다)(주7). ≪에티카≫가 어떻게 나아가는지를 보도록 하자. 우리가 가정을 경유해서 이로부터 출발하는 속성, 혹은 성질이 부여된(qualified) 주어진 실체는 공통 통념에서 파악되며, 거기로부터 우리는 충분한 종합적 설명, 즉 하나의(single) 실체 혹은 신의 관념이 모든 속성들을 파악하며 이로부터 모든 사물들이 뒤따라 나온다는 설명에 도달한다(주8). 그러므로 문제는 이러한 두가지 출발점들, 즉 기하학적 존재의 관념과 속성의 공통 통념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아는 것이다.


사실 공통 통념은 ≪에티카≫의 특별한 기여인 것처럼 보인다. 이것들은 이전 저작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문제는 이러한 새로움이 단지 말만의 새로움인지, 혹은 결과를 수반하는 개념의 새로움인지를 아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모든 존재하는 사물은 본질을 가지지만, 그러나 그것은 또한 특징적 관계들도 가지고 있는 바, 이러한 관계들을 통해서 그것은 존재에 있어서 다른 사물들과의 구성에 들어가거나 다른 사물들 속에서 분해된다. 공통 통념은 정확하게 여러가지 사물들 사이의 관계들의 구성의 관념이다. '연장'의 속성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그 자체의 본질을 가졌지만 그러나 그것이 공통 통념의 대상이라는 의미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연장 속의 신체들은 또한 그 자신들이 본질들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공통 통념의 대상이라는 의미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연장의 속성은 또한 이것이 그 본질을 구성하는 실체에 공통된 형태이며, 또한 이것이 그 본질들을 포함하는 모든 가능한 신체들이다. 공통 통념으로서의 연장의 속성은 어떤 본질과도 혼동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신체들의 구성의 통일을 고안한다; 모든 신체들은 연장 속에 있다. ... 똑같은 추론이 보다 제한된 조건들을 유지한다: 어떤 주어진 신체는 어떤 다른 신체와의 구성으로 들어가며, 구성적 관계 혹은 두 신체들의 구성의 통일은 부분들의 본질로도 전체의 본질로도 환원될 수 없는 공통 통념을 정의한다 ; 예를 들어, 나의 신체와 특별한 음식 사이에는 무언가 공통이 있다. 그래서 공통 통념은 두가지 문턱들, 즉 모든 신체들에 공통되는 최대치의 문턱 그리고 적어도 두가지 신체들, 즉 나의 신체와 또 다른 신체에 공통된 최소치의 문턱 사이에서 진동한다. 바로 이 때문에 스피노자는 가장 보편적인 공통 통념과 가장 덜 보편적인 공통 통념을 구별한다(주9). 그리고 ≪에티카≫에서 자연이 획득하고 있는 특권적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 관계들의 이러한 구성 혹은 구성의 이러한 통일은 모든 신체들 사이에, 어떤 특정한 수의 혹은 어떤 특정한 유형의 신체들 사이에, 특별한 신체와 어떤 다른 신체 사이에 공통된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줄 것이다. ... 공통 통념은 항상 그것의 관념인데, 이 속에서 신체들은 다른 신체들에 동의한다; 신체들은 이런 혹은 저런 관계들 하에서 동의하는데, 이러 저러한 관계들은 신체들의 변양하는 수들 사이에서 정립된다. 이런 의미에서 정말로 자연의 질서가 있는 것인데, 이는 단지 모든 관계들이 다른 관계와의 구성에 들어가기 때문만은 아니다 : 즉 가장 보편적인 통념들에서 가장 덜 보편적인 통념들로 나아가며 또 그 역도 성립하는 관계들의 구성의 질서가 있다.


≪에티카≫의 공통 통념의 이러한 이런은 적어도 네가지 관점에서 볼 때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그 대상이 존재하는 신체들 간의 관계의 구성인 공통 통념은 기하학적 개념들을 여전히 방해하는 모호성들을 제거한다. 사실, 공통 통념은 기하학적인 이데아라기 보다는 물리-화학적 혹은 생물학적인 이데아이다 : 공통 통념은 그 다양한 측면들에서 자연의 구성의 통일을 표현한다. 만일 공통 통념이 기하학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실재적, 물리적, 존재하는 존재들 사이의 실재적 관계이다. 이와는 달리 기하학적인 존재에 관계하는 이전의 저작들에서는 많은 모호성이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후자는 추상적, 혹은 허구적인 것으로 남았다...(주10). 그러나 일단 스피노자가 공통 통념의 지위를 정의하자마자 이러한 모호성들이 설명된다. 기하학적 개념은 추상적 관념이거나 이성의 존재자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한 공통 통념의 추상적 관념이기에, 따라서 이러한 공통 통념을 묘사함으로써 우리는 또한 그것[기하학적 개념]을 추상화를 통해 작동하도록 만듬으로써 기하학적 개념에 영향을 주는 제한으로부터 기하학적 방법을 자유롭게 한다(주11). 공통 통념 덕분에 기하학적 방법은 무한한 것에 적합하게 되며, 실재적이거나 물리적인 존재자들에 적합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성개선론≫과 ≪에티카≫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자는 남아 있는 모호성들과 더불어서 기학학적 개념들에 의존하는 반면, 후자는 새롭게 고립된 공통 통념에 의존한다.


또한 지식의 종류들의 분류화와 관련되는 커다란 차이가 결과한다. ≪에티카≫에서 공통 통념은 이차적 종류의 지식을 정의하는 적합한 관념이다. 대조적으로 ≪소론≫에서 혹은 여진히 ≪지성개선론≫에서도 지식에 있어서의 이러한 두번째 종류의 것에 상응하는 것은 올바른 믿음으로서 혹은 명료하지만 적합한 지식은 아닌 것으로서 정의되며, 그것은 추상화를 경유해서 나아가는 추론이나 연역으로 이루어진다. 결과적으로, 최고의 혹은 세번째 종류의 지식의 갑작스런 출현은 ≪소론≫과 심지어 ≪지성개선론≫에서도 신비에 가리워져 있다. 이와 반대로 ≪에티카≫에서 공통 통념의 엄격한 적구성은 두번째 종류의 정구성만이 아니라 세번째로의 이동의 필연성을 보증한다. 두번째 종류의 지식의 이러한 새로운 지위는 ≪에티카≫ 전체를 통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것은 이전의 저작과 비교해 볼 때 가장 실체적인 변양화이다. ≪에티카≫에서 말해진 두번째 종류는 매우 다양하고 심지어 예측불가능한 절차들을 합병하는 것(incorporate)을 멈추지 않는다. 관계들의 구성의 영역에서, 이성은 단순히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화학적이고 생물학적인 실험(experiments)의 프로그래밍의 모든 자원이다. (예를 들어, 동물들 사이에서 동물들의 구성의 통일에 관계하는 탐구)(주12) 이제 이것이 일어났을 때, 즉 ≪에티카≫가 공통 통념이론을 해명할 때, 공통통념 이론은 절차들의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는 두번째 종류의 지식의 정구성과 적구성을 보증한다. 왜냐햐면 어떤 경우에서도 우리는 "실재적 존재자에서 또 다른 실재적 존재자"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번째 종류에서 세번째 종류로 나아가는 방식을 고려해 보자. ≪에티카≫에서 이 점과 관해서는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두번째 종류의 지식과 세번째 종류의 지식은 적합한 관념의 체계이지만 그러나 이것들은 서로와 매우 다르다. 세번째 종류의 관념은 본질의 관념, 속성들에 의해서 구성된 실체의 내적 본질의 관념이며, 속성들에 개입된 양태들의 특이한(singular) 본질이다; 그리고 세번째 종류의 관념은 본질에서 본질로 나아간다. 그러나 두번째 종류의 관념이 관계들의 관념, 즉 존재하는 속성과 그 무한한 양태에 의해 형성된 가장 보편적인 관계이자 속성에서 존재하는 이러저러한 양태에 의해서 형성된 가장 덜 보편적인 관계들이다. 그러므로, 속성이 공통통념으로서 봉사할 때, 공통 통념으로서 이해된 것은 그 본질에 있어서는 물론이고 그것이 적용된 양태의 본질들에 있어서도 이해되지 않으며, 단지 그것이 그 본질을 구성하는 존재하는 실체들에 공통된 형태로서만, 그리고 그것이 그 본질들을 포함하는 존재하는 양태들에 공통된 형태로서 이해된다. 그러므로 본질들의 어떤 것도 알지 못함에도 공통 통념으로부터 출발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공통 통념으로서의 속성으로부터 출발하며, 우리는 필연적으로 본질들의 지식으로 나아간다. 그 방식은 다음과 같다. 적합한 존재자(비록 이것은 그 자체로 어떤 본질도 구성하지 않지만), 공통 통념은 필연적으로 우리를 신의 관념으로 끌고 간다. 이제 신의 관념은 공통 통념 자체가 아니다. 비록 그것이 필연적으로 공통 통념에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관계들의 구성이 아니라 구성으로 들어간 모든 관계들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신의 관념은 우리로 하여금 두번째 종류에서 세번째 종류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일면적으로 대면한 공통 통념과 일면적으로 대면한 본질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주13).


그러므로 우리가 공통 통념을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즉각적인 경험이 우리에게 이런 신체나 저런 신체의 효과를 부여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신체들을 구성하는 관계들을 부여하기 때문에, 어떻게 우리는 공통 통념 그 자체를 형성할 수 있는가? 설명은 ≪에티카≫에서 늦어진다. 우리가 경험 속에서 우리의 것에 동의하지 않는 신체와 마주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슬픔(우리의 행위의 역량의 감소)을 촉발시키는 효과를 가진다. 이 경우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공통 통념을 형성하도록 하지는 못하는데, 이것은 두 신체들이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지 그것들이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우리가 우리의 신체에 동의하는 신체와 마주친다면, 그리고 우리에게 즐거움을 촉발시키는 효과를 가진 신체와 마주친다면, 이러한 즐거움(우리의 행위 역량의 증대)는 이러한 두가지 신체들의 공통 통념을 형성하게끔, 즉 그것들의 관계들을 이루며 그것들의 구성의 통일을 인식하라고 설득할 것이다(주14). 이제 우리가 충분한 즐거움을 가지고 선택했다고 생각해 보자. 공통 통념의 우리의 기술(art)은 그러한 것, 즉 심지어 불일치의 경우에도, 우리는 신체들 사이에 공통된 것이 무엇인가를, 구성의 충분히 넓은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예를 들어 모든 가능한 신체들의 공통 통념으로서의 연장의 속성)(주15). 이런 방식으로, 공통 통념의 실천적 형성체의 질서는 가장 덜 보편적인 것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반면에, 그것들의 이론적 설명의 질서는 오히려 가장 보편적인 것에서 가장 덜 보편적인 것으로 나아간다. 이제, 왜 ≪에티카≫에서는 이러한 설명이 그렇게 늦게 나타났는가를 우리가 묻는다면, 그 이유는 제 2부의 설명(exposition)이 여전히 공통 통념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데 있어서 이론적인 것이기 떄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실천적 상황에서, 그리고 그 기능에 있어서 공통 통념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가에 관해서 우리는 제 4부의 후반부에까지도, 그리고 그 축약된 형태에 도달하기 까지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공통 통념이 우리의 역량과 관련한 실천적 이데아라는 것은 분명해진다. 단지 관념과만 관계하는 그것의 설명(exposition)의 질서와는 달리 그것들의 형성의 질서는 어떻게 정신이 '그 정서들을 질서화할 수 있고 그것들을 함께 연결시킬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정서와 관계한다. 공통 통념은 예술(Art)이며, ≪에티카≫ 자체의 예술이다. 선과의 만남을 조직하고, 현실적 관계들을 구성하며, 역량을 형성하고 실험한다.


그러므로 공통 통념은 철학의 시작과 관련해서, 기하학적 방법의 범위에 관련해서, ≪에티카≫의 실천적 기능 등등과 관련해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그리고 공통 통념은 ≪에티카≫ 이전에는 결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스피노자의 최종적 진화를 기록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며, 동시에 왜 ≪지성개선론≫이 미완성된 채로 남아있는가를 결정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렇게 멀리까지 요청된 이유는 자의적인 것 (시간의 부족?)인가 아니면 모순적인 것(그 실행이나 적용으로부터 분리된 방법의 유용성? 그러나 ≪지성개선론≫ 자체는 그렇게 추상적인 어떤 것도 시도하지 않았다)인가? 현실적으로,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지성개선론≫의 비완성에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공통 통념을 발견하고 발명했을 때 스피노자는 ≪지성개선론≫의 입장이 여러가지 측면에서 부적절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전체 저작이 수정되거나 개작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지성개선론≫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 점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다른, 미래의 논고를 선언하고 있다(주16).


그리고 이러한 가설을 그럴듯하게 만드는 것은, ≪지성개선론≫ 자체에서, 스피노자가 존재하는 텍스트의 말미를 향해가면서 공통 통념의 명확한 암시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스피노자가 본질들과 혼동되는 것이 아니라 법칙들을 포함하고 있는 "고정되고 영원한 사물들의 계열들"에 대해서 말하는 유명하고도 난해한 구절은 존재하는 존재자들에게 적용되며, 후자의 지식을 구성한다. 이제 공통 통념만이 영원한 존재의, 그리고 '계열들'을 형성하는 이러한 이중적 성격을 가지는데, 왜냐하면 여기에는 관계들의 구성의 질서가 있기 때문이다(주17). 우리는 그러므로 공통 통념의 발견이 ≪지성개선론≫의 편집판의 말미에 출현하며, ≪에티카≫의 시작 부분에서 나타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약 1661-1662년 경에. 그러나 왜 이러한 발견이 스피노자로 하여금 ≪지성개선론≫의 이미 존재하는 견해를 포기하도록 만들었던 것일까? 이에 대한 설명은 공통 통념이 그 기능들을 충족시킬 수 없거나 그 결과들을 발전시킬 수 없을 때에 출현한다는 것이다. 공통 통념은 ≪지성개선론≫의 텍스트에는 상대적으로 너무 늦게 발견된다. 공통 통념은 철학을 위한 새로운 출발점을 정립한다. 그러나 출발점은 이미 기하학적 관념에 장착되었다. 공통 통념은 존재하는 것의 지식의 적합한 양식을 결정하며, 어떻게 우리가 이러한 지식의 양태에서 궁극적인 양태, 즉 본질들의 지식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지식의 양식들은 이미 ≪지성개선론≫에서 규정되었기에 공통 통념이나 고정되고 영원한 사물들의 계열들이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며, 따라서 이러한 것들은 본질들의 지식과 더불어 지식의 궁극적 양식으로 넘겨지게 된다(주18). 간단히 말해서, 공통 관념들에게 그들의 자리와 기능을 부여하기 위해서, 스피노자는 ≪지성개선론≫ 전체를 필연적으로 다시 써야만 했다. 그것은 단지 완성된 부분을 무효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변양시키는 것이었다. 스피노자는 공통 통념의 관점에서 ≪에티카≫를 다시 쓰고 싶어했다. 비록 그것이 ≪에티카≫에서는 상응하는 실험과 더불어 기원, 형성체, 이런 공통 통념의 계열들에 관계하여 윤곽만 묘사된 실천적 문제들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논고를 연기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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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Avenarius, Uber die beiden ersten Phasen des Spinozische Pantheismus..., Leipzig, 1868.

≪소론≫ 2장의 전체 운동은 자연과 신간의 상응의 발견을 내포한다. (그리고 부록은 또 다시 이러한 '상응'에 호소한다. 정리 4, 보충을 참조). ≪에티카≫에서는 이러한 관계들은 하나의(single) 실체로부터 파생된 증면된 동일성이다: Ⅰ, 14("이로부터 뒤따라 나오는 것은 ... 자연 안에는 오직 하나의 실체만이 있다는 것이며, 그것은 절대적으로 무한하다는 것이다"). ≪소론≫과 ≪에티카≫간의 이러한 차이에 관해서는 Gueroult, Spinoza, Aubier, Ⅰ, 특히 부록 6을 참조하라. 게루가 지적하듯이, 스피노자의 자연주의를 표현하는 구절은 ≪에티카≫라는 텍스트의 Ⅳ부, 머리말에 실린 '신 즉 자연(Deus sive Nature)'에서 나타날 뿐이다.

≪지성개선론≫의 다음 부분을 참조하라. "그러므로 처음에 우리는 가능한 한 빨리 가장 완전한 존재의 지식에 도달할 때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49). "그러나 만일 우리가 가능한 한 곧 제일 원리로부터, 즉 자연의 원천과 기원으로부터 시작한다면, 우리는 모든 기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된다"(75). "가능한 한, 어떤 특정한 존재가 존재하는지를 우리는 물으며, 존재하는 어떤 종류의 존재가 모든 사물들의 원인이 되는가를 요구하며 또한 이성은 이것을 묻는다"(99). 이 마지막 문장은 일반적으로 번역자들에 의해 왜곡되어 왔다. 그리고 빈틈이 46에서 상상되었다. Vrin edition, pp. 104-105에서 Koyr 가 시작한 주장을 참조하라. 그러나 ≪지성개선론≫은 물론이고 ≪에티카≫는 절대적인 것에 도달하기 이전에 최소한의 시간의 필연성을 강조한다. 확실히 우리는 ≪에티카≫의 출발점 역할을 하는 실체들 혹은 실체적 속성들이 이미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것에 대해서 반대할 수 있다. 그러나, 첫번째로 우리는 아직 이것을 알지 못하며 단지 정리 10에서만 그것을 배울 뿐이다. 두번째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에티카≫의 시작부분은 속성들의 그것들의 본질(세번째 종류의 지식)에서 파악하지 못하며 이것들을 단지 '공통통념들'(두번째 종류의 지식)으로서만 고려한다. Ⅴ, 36, 주석에서 스피노자의 주장을 참조하라.... 우리는 ≪신학정치학논고≫에서 다음의 주장을 볼 수 있다: '신의 존재가 자명하지 않다면, 그것은 그렇게 확고하고 반박불가능하게 참인 관념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추론되어야만 한다. ...'. 이것은 엄격하게 말해서 ≪에티카≫와 일치하고 있다.

예를 들어 4부는 증명의 가속화된 혹은 재촉된 운동으로서 나타난다. 우리는 4부가 단지 개요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상은 그 증명들이 이전의 부(part)와 동일한 리듬을 갖지 않고 있으며, 이것들은 응축과 분출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사실, 4부는 지식의 세번째 종류, 일종의 폭발(fulguration)을 끌어들인다. 여기에서 그것은 마치 ≪에티카≫의 시작부분에서 그러하듯이 가장 커다란 상대적 빠름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세번째 종류의 지식에 상응하는 절대적인 속도의 문제이다.

이것은 스피노자가 ≪지성개선론≫, 46에서 말한 것으로, 여기에서 빈틈이 있다고 추정할 근거는 하나도 없다.

플라톤, ≪국가≫, Ⅵ. 510과 이후를 참조하라. 피히테에 관한 책에서 게루는 종합적 방법이 그 자체로 하나하나의 요점에 대해 분석적 방법에 반대하기 위해 제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석적 방법을 그 자신의 목적에 종속시키면서 분석적 방법을 통합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지적한다(L'Evolution et la structure de la doctrine de la science chez Fichte, Les Belles Lettres, vol. Ⅰ, p. 174). 우리는 피히테의 심오한 스피노자주의를 상기시킬 것이다.

≪지성개선론≫, 72-73, 95-96.

≪에티카≫, Ⅴ, 36, 주석을 참조.

≪신학정치학 논고≫, 7장. ≪에티카≫에서는 Ⅱ, 37-38 (가장 보편적인 것)과 39 (가장 덜 보편적인 것)에서 공통 통념에 관한 설명을 발견할 수 있다.

기하학적 존재자들(entities)의 모호한 본성에 관해서는 게루, Spinoza, vol Ⅰ, 부록 11을 참조하라.

Tschirnhaus에게 보내는 편지 83은 기하학적 방법의 한계가 방법 자체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고려하는 사물의 추상적 성격 때문에 생긴다고 긍정한다. 그리고 ≪지성개선론≫은 이미 시정의 진실한 진보를 방해하는 기하학적이고 논리적인 개념의 자리에 '물리적 사물들 혹은 실재적 존재들'을 집어넣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표현하고 있다(99).

심지어 단순한 내적 본질들과는 달리 이것은 세번재 종류의 직관을 지칭하며, 구성할 수 있거나 분해할 수 있는 관계들은 모든 유형의 과정들(두번째 종류의 지식)을 지칭한다. 우리는 구성의 관계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아프리오리한 지식도 갖고 있지 않다. 이 관계들은 실험을 요구한다. 만일 우리가 스피노자의 계승자를 찾아헤맨다고 한다면 우리는 Geoffroy-Saint-Hilaire, 혹은 더 완화된 기반 위에서는 괴테를 포함시켜야만 할 것이다. 이들은 '연결관계의 원리'에 의해 알려진 구성에 관한 자연의 통일(Nature's unity of composition)과 관계하는 탐구에 착수했다. 이제 이러한 탐구는 상상적인 것들을 포함하여 모든 종류의 실험과 변이들을 내포한다. 예를 들어 '주름'이라는 것에 의해 우리는 하나의 동물에서 다른 동물(aminal)로 넘어가며 동물적 존재의 각 유형들은 동물(Aminal) 그 자체의 실현이거나 혹은 이러저러한 관계 하에서 동물의 실현이다. 오늘날 분자생물학은 해부학적인 수준에서는 물론이고 이미 미립자(particles)적 수준에서 Geoffroy에 의해 제기된 (그리고 '가장 단순한 신체들'의 수준에서 스피노자에 의해 제기된) 구성의 통일성이라는 이러한 실험적 문제를 떠맡았다. 스피노자에게 실험은 ≪에티카≫에서는 물론이고 ≪지성개선론≫의 마지막 부분에서 출현하고 있는 예감(presentiment)의 형태에서도 매우 특수한 역할을 맡는다. 즉 간단하지만 강렬하게 실험을 요구한다(103). Jules Lagneau는 스피노자가 ≪지성개선론≫을 끝맺지 못한 이유는 '그가 실험적 방법을 응용하고 시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C l bres le ons et fragments, P.U.F., 2nd edition, p. 52). ≪에티카≫에서 나타나는 실험이라는 프로그램은 또한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이 공통통념들의 발견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공통통념들은 우리에게 신의 관념을 부여한다: Ⅱ, 45-46. 그러나 신의 관념은 그 자체로 공통통념들과 구별된다: Ⅱ, 47. 그러므로 신의 관념은 두가지 측면들을 가질 것인데, 이것은 5부에 표현되어 있다(두번째 종류의 냉정한impassive 신, 세번째 종류의 사랑하는 신).

≪에티카≫의 대부분은 공통통념들과 두번째 종류의 지식의 관점에서 쓰여졌다. 스피노자는 이를 Ⅴ, 36, 주석과 41, 증명에서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세번째 종류의 지식은 단지 5부에서만 나타나는데, 이것은 세번째 종류의 지식의 상이한 리듬과 운동을 설명하고 있다. 게다가 그것은 단지 Ⅴ, 21과 더불어서만 표현되고 있다. 이제 신의 관념이 우리에게 세번째 종류의 지식으로 넘어가게끔 하는 것이며, 혹은 그 '기초'로서 작동하는 것이다(Ⅴ, 20, 주석).

≪에티카≫, Ⅴ, 10, 증명.

≪에티카≫, Ⅴ, 10, 주석(과 6, 주석).

≪에티카≫, Ⅱ, 40, 주석 1을 참조. 스피노자는 공통통념들에 관해 일군의 논리적이고 방법론적인 문제들을 요약하면서 그가 이전에 했던 것을 분명하게 배제한다. 그러나 그는 또한 미래의 논고를 언급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Tschirnhaus에게 보낸 편지 60에서 스피노자는 ≪지성개선론≫의 몇몇 주제들을 상기시키면서 시작하는데, 이것에 다음을 덧붙인다: "운동과 방법에 관련되는 당신의 다른 질문들에 관해서는, 이것들에 관한 나의 고찰은 아직 마땅한 질서로 쓰여지지 못했으며, 그래서 저는 다른 때로 그것을 유보하고 싶습니다."

≪지성개선론≫, 99-101을 참고. 이러한 "고정되고 영원한 사물들"은 스피노자가 공통 통념이라고 부른 것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속성들 그리고 무한양태들과 동일시되어서는 안된다. 그러한 해석은 동시에 너무 광범위한 것이자 너무 협소한 것이기도 하다. 속성들과 무한양태들이 여기서 단지 정확한 의미에서 (가변적인 특이한singular 사물들에의 적용, 즉 공통 통념으로서의 그것의 사용) 개입하기 때문에 너무도 넓다. 그것의 "계열"에 있어 공통 통념은 또한 단지 두 가지 신체들에게만 공통되는 것의 관념을 포함하기 때문에 너무도 협소하다.

현실적으로, 스피노자는 고정되고 영원한 사물들이 우리에게 사물들의 내적인 본질들의 지식을 부여한다고 말하는 동시에 또한 그것들은 가변적으로 존재하는 존재들과의 관계에서만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한다(≪지성개선론≫, 101). 이런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여기에서는 ≪에티카≫에서 두번째 종류의 지식과 세번째 종류의 지식으로 구별하고 있는 것을 혼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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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생애

  

니체는 자신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어떤 것이 철학자의 삶의 신비를 구성하는 것인지를 이해했다. 그 철학자는 금욕주의적인 미덕 ― 겸손, 청빈, 정숙 ― 을 전유하고 이것들을 완전히 자기 자신만의 목적에, 사실은 전혀 금욕주의적이지 않은 비범한 목적에 귀속시킨다.(주1) 그는 이것들을 자신의 독특함의 표현으로 만든다. 이것들은 그의 경우에 있어서 도덕적 목적도, 또 다른 삶을 이루기 위한 종교적인 수단도 아니며 오히려 철학 자체의 '효과'이다. 이 철학자에게는 절대적으로 다른 삶이란 없기 때문이다. 겸손, 청빈, 정숙은 특히나 부유하고 매우 윤택한 삶의 효과가 되며, 사유를 정복할 정도로 충분히 강력한 삶의 효과, 그리고 모든 다른 본능을 스스로에 종속시킬 만큼 충분히 강력한 삶의 효과가 된다. 스피노자가 자연이라고 불렀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삶은 더 이상 수단과 목적을 통해 필요에 기초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에 의해 생산, 생산성, 역량(potency)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겸손, 청빈, 정숙은 그의 위대한 삶의 방식이며, 그 자신의 신체의 사원(寺院)을 만든다. 왜냐하면 원인은 너무도 자랑스럽고, 너무 부유하며, 너무 감각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 철학자에 주목함으로써 겸허하고 가난하며, 자애로운 외양을 공격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 이 외양은 사람들의 무능력의 범위를 증가시킨다. 그리고 이 철학자는 어떤 빌미도 주지 않지만 온갖 공격을 받는다.


여기에서 이 철학자의 고독의 충분한 의미가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는가를 결코 따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이 환경들 중의 그 어떤 것에도 적합하지 않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가 가장 나은 생활조건, 혹은 생존 조건을 발견하는 곳은 바로 민주적이고 자유주의적 환경 속에서이다. 그러나 그에게 이러한 환경들은 사악한 의지가 삶에 독을 풀어놓거나 황폐화시킬 수 없게 하는 유일한 보증인이자, 또 이 환경들은 국가의 목적, 사회의 목적을, 환경일반을 약간이라도 넘어서게 하는 사유의 역량으로부터 삶을 분리시킬 수 없게 하는 유일한 보증인이다. 스피노자는 모든 사회에서 그것은 복종의 문제이며, 그 밖의 어떤 것도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바로 이 때문에 과오, 장단점, 선악이라는 통념은 복종 및 불복종과 관련을 맺고 있는 매우 사회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나은 사회는 사유의 역량을 예속의 책무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사회이며, 그 자신의 이해관계에 있어서, 사유를 국가의 규칙에 종속시키지 않게 돌보는 사회이며, 이는 행동에만 적용된다. 사유가 자유롭고 따라서 생동적인 것인 한, 어떤 것도 타협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기를 멈출 때, 모든 다른 억압 또한 가능해지고 이미 현실화되었기에 모든 행동은 비난받게 되며, 모든 삶은 위협에 처하게 된다. 확실히 그 철학자는 가장 좋아할 만한 조건을 바로 민주적 국가와 자유주의적 서클에서 찾는다. 그러나 그는 결단코 자기의 목적을 국가의 목적이나 환경의 목표와 혼동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복종은 물론 비난도 피해 나가는 사유 속의 힘들을 애타게 간청하며, 선악을 넘어선 삶, 장점이나 책잡힐 것이 없는 엄격한 순진무구함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이 철학자는 다양한 국가에서 거주할 수 있으며, 자주 다양한 환경 속에서 거주할 수 있으되 그러나 그는 은둔자, 그림자, 여행자 혹은 떠돌이 하숙생의 태도로 그렇게 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스피노자가 보다 개방적일 것이라고 추정되는 환경에 들어가기 위해 보다 폐쇄적일 것이라고 추정되는 유태인 환경과 단절했다고 상상해서는 안된다. 자유기독교, 데카르트주의, 데 비트(de Witt) 일파들에 찬성한 부르주아지 등등... 왜냐하면 그는 어디로 가든지 간에 성공의 기회가 많든 적든 간에, 그 자신과 그의 보기 드문 목표가 관용될 수 있는지를 묻고 요구하며, 이 관용으로부터 그는 한 사회가 가질 수 있는 민주주의의 수위, 진리의 수위를 판단하거나 혹은 이와 정반대로 모든 인간들을 위협하는 위험과 관련되는 것을 판단한다.


바루흐 스피노자(*역주1)는 1692년,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에서 추방당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암스테르담의 유태인 지구에 있는 부유한 상인가정에서 태어났다. 유태인 학교에서 그는 신학과 상업을 공부한다, 13세부터 그는 아버지의 회사에서 일하지만 여전히 공부를 좋아했다(1654년에 아버지가 죽고 나서 1656년까지 그는 형과 함께 회사를 경영한다). 그를 유태인 공동체 및 사업과 단절하게 만들고 1656년의 파문으로 이끌었던 철학적 개종은 얼마나 느리게 일어났던가? 우리는 이 시기 동안 암스테르담 공동체가 동질적이었다고 상상해서는 안된다. 이 공동체는 매우 다질적이었으며, 기독교 환경처럼 이해관계와 이데올로기들도 매우 다양했다. 대부분 그것은 이전의 '마라노'들로, 즉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는 외향적으로는 카톨릭주의를 실천했으며 16세기 말에 이주당해야만 했던 유태인들로 구성되었다. 심지어 성실하게 유태인 신앙을 고수한 사람들도 전통적인 랍비적 유대교와 결코 화해할 수 없었던 철학적, 과학적, 의학적 문화에 깊이 물들어 있었다. 스피노자의 아버지는 분명히 회의주의자였으나 그럼에도 시냐고그(*역주2)와 유태인 공동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암스테르담에서는 랍비와 전통의 역할은 물론이고 성서 자체의 의미를 문제삼는 것에까지 이르게 된다. 우리엘 다 코스타(Uriel da Costa)는 1647년에 영혼과 계율의 불멸성을 부인하고 자연법을 인정했다는 이유로 비난받는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후안 데 프라도(Juan de Prado)는 영혼은 신체와 더불어 사멸하며 신만이 철학적 말씀으로 존재하며 신앙은 헛된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1656년에 회개해야 했으며, 이후 파문당하고 비난받게 된다.(주2) 최근 간행된 문서들을 스피노자가 프라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우리는 위의 두 경우가 함께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스피노자가 보다 냉엄하게 심판을 받고 1656년보다 더 일찍 파문을 당했다면 이것은 그가 회개를 거부하고 스스로 단절을 추구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많은 경우에서처럼 랍비는 순응을 바랬을 것이다. 그러나 회개하는 대신에 그는 "시냐고그를 떠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변명"를 쓰거나 미래의 ≪신학정치학논고≫의 초고를 썼다. 틀림없이 스피노자가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공동체의 아이였다는 사실은 그의 사례를 더욱 나쁘게 만들었다.


암스테르담에서는 더 이상 살 수가 없었다. 광신자에 의한 암살 기도가 뒤따랐기에 그는 철학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서 레이든으로 갔고 린스뷔르흐의 교외에 정착했다. 흔히 스피노자는 사유가 항상 인간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아님을 보여주는 징표로 칼로 찢겨져 구멍이 뚫린 코트를 착용했었다고 말해지곤 한다. 때로 철학자가 소송을 끝내는 경우도 있었으나 파문과 더불어서 그의 삶을 새롭게 하고자 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유주의적 기독교의 영향력이 스피노자의 단절을 설명하는데 요청되어야 한다고 믿을 때, 또 마치 이 단절이 외적인 원인에 기인하는 것인 양 믿을 때 이것은 유태인 공동체의 다질성과 철학자의 운명을 고려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미 암스테르담에서 확실히, 그의 아버지가 생존해 있었을 때에도 그는 판 덴 엔데(Van den Ende)의 학교에서 교육과정을 이수했는데, 이곳에서는 라틴어와 더불어 데카르트 철학, 수학, 물리학의 기초를 배웠던 수많은 청년 유태인들이 참석했었다. 이전에는 제수이스트였던 프란시스 판 덴 엔데는 데카르트주의자라는 평판을 일찍이 얻었으며 또한 자유사상가이자 무신론자이며 심지어 정치 선동가라는 평판도 얻었다(그는 1674년에 프랑스에서 하층귀족인 드 로앙의 반역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했다.)(주3) 분명히 스피노자는 또한 자유주의적이고 반-성직자적인 기독교도들, 어떤 범신론과 평화적 코뮤니즘(pacifist communism)에 고무된 콜레지안트파(Collegiants)(*역주3)와 메노니파(Mennonites)(*역주4)와도 교제했다. 그는 이들의 주요 거점 중의 하나인 린스부르그에서 이들을 다시 만났다 : 그는 야리크 엘레스(Jarig Jelles), 피에터 발링(Pieter Balling), 시몬 데 브리스(Simon de Vries), '진보적' 서적 판매상이자 출판가인 얀 리에우베르트(Jan Rieuwerts)와 친구가 되었다. (1655년에 스피노자가 올덴버그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평온주의pacifism를 주창하며, 1671년에 엘레스(Jelles)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공동체주의적 테마가 나타난다). 어쨌든 판 덴 엔데는 카톨릭주의의 한 형태를 여전히 고수했던 것 같다. 네덜란드에서 이 종교의 난점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콜레지안트파와 메노니파의 철학에 관해서 볼 때, 이것은 종교 비판을 물론이고 윤리적 개념과 정치적 관심에 있어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완전히 압도한다. 메노니파나 심지어 데카르트주의에 의한 영향을 생각하는 대신에 우리는 스피노자가 가장 관용적인 서클에, 그가 태어났고 혼자서 그 단절을 책임져야만 했고 유대교만큼이나 기독교 또한 거부했던 파문당한 유태인을 환영하기에 가장 적합한 서클에 자연스레 가담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유태인 파문이 의미하는 것 중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오히려 빈번히 적용되었고 종종 돌이킬 수 없는 수단이었다. 국가권력을 갖지 못한 공동체의 수장들은 재정적 기여나 심지어 정치적 정통성을 거부한 사람들을 처벌한 어떤 제재 수단도 갖고 있지 못했다. 칼뱅주의 당파의 저명인사들처럼,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엄청날 정도로 증오하고 있던 유태인 수장들은 정치적으로는 오렌지 왕가와 결탁했으며 인도 회사들에 대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다. (스피노자의 스승 중 하나인 랍비 메나사헤 반 이스라엘(Menasseh ben Israel)은 동인도 회사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1640년에 파문당했다. 그리고 스피노자를 심판한 평의회 의원들은 왕당파, 친-칼뱅주의자이자 반-스페인적이었고 대부분이 동인도 회사의 주주들이었다.) 스피노자의 자유주의자와의 결탁, 거대 독점체들의 와해를 요구한 요한 데 비트의 공화당에 대한 동조 ― 이 모든 것이 스피노자를 반역자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스피노자는 종교적 환경은 물론이고 동시에 경제적 환경과도 단절한다. 가족의 사업을 포기하면서 그는 렌즈를 가는 일을 배웠으며 수공 소매업을 구비하고 광학법칙을 파악해 작업할 수도 있는 장인, 즉 철학자 장인이 되었다. 그는 또한 다음의 것을 이끌어내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초창기 전기작가 코렐루스(Colerus)는 마사니에로(Masaniello)의 나폴리 혁명가의 태도와 의복을 하고 있었다는 것에서 그가 끌어낸 것과 연결시킨다.(주4)


린스부르그에서 스피노자는 그의 친구들에게 후일 ≪소론≫라 불리우게 되는 라틴어로 된 글을 설명한다. 그들은 각주를 달았고, 옐레스는 독일어로 이를 번역했으며, 아마 스피노자는 그가 이전에 썼던 어떤 텍스트를 구술했을 것이다. 1661년 경에 그는 일종의 정신적 여정에 따라서 넓어져간 ≪지성개선론≫을 구상했는데, 이것은 메노니파적인 태도로 부를 비난하는데 집중했다. 이 논고, 즉 스피노자의 방법에 관한 장엄한 설명은 미완성된 채로 남겨지게 된다. 1663년 경, 그와 함께 살았고 그에게 많은 희망을 주면서도 동시에 그를 괴롭혔던 청년에게 스피노자는 ≪데카르트 철학의 윤리적 원리≫를 선물했다. 이 책은 스콜라적 통념들(형이상학적 사유들)의 비판적 검토로 보충된다. 리에우베르츠(Rieuwertz)가 이 책을 출판했고 엘레스(Jelles)는 출판을 위한 재정을 감당했으며, 발링(Balling)은 이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물리학자이자 시인이면서 암스테르담의 새 극장의 조직자인 레비스 마이어(Lewis Meyer)가 서문을 썼다. ≪원리들≫과 더불어 스피노자의 '교수적(professorial)' 저작은 끝나게 된다. 매우 극소수의 사상가들만이 자기의 발견물의 교수가 되려는 강력한 열정을 피할 수 있으며, 사적인 정신 교육의 세미나 열정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1661년 초에 스피노자가 세운 계획과 집필 시작은 그를 또 다른 차원으로, 상이한 요소로 나아가게 했는데, 우리가 앞으로 보게되듯이 이것은 더 이상 '설명'의 요소도 방법론적인 차원도 아니게 된다. 아마도 이런 연유 때문에 스피노자는 ≪지성개선론≫을 미완성된 채로 남겨두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후기 의도는 그것을 기꺼이 다시 쓰려고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주5) 우리는 준-교수적 시기 동안에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주의자였다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소론≫은 모든 스콜라주의, 유태인 사상, 르네상스 철학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로부터 단지 스피노자에게만 귀속되는 심오하게 새로운 어떤 것을 추출해 내기 위하여 정화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데카르트주의를 사용하고 있는 사유의 방식을 이미 보여준다. ≪원리들≫의 설명과 ≪형이상학적 사유≫의 설명 간의 복합한 관계는 이중 게임의 증거를 제시하는데, 이 게임에서 데카르트주의는 마치 하나의 여과기처럼 다루어지지만, 바로 이러한 방식에서 더 이상 낡은 철학과도, 또 데카르트주의와도 관계를 맺지 않는 새롭고 심오한 스콜라주의가 출현한다. 데카르트주의는 결코 스피노자의 사유가 아니다. 이것은 그의 수사학이나 진배 없다. 그는 데카르트주의를 그가 필요로 했던 수사학처럼 사용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단지 ≪에티카≫에서만 그 명확한 형태가 부여된다.


1663년에 스피노자는 헤이그의 교외인 포르뷔르그(Vorrsburg)로 이주한다. 그는 나중에 헤이그에 정착한다. 스피노자를 여행가로 정의하는 것은 그가 걸어간 거리가 아니라 하숙집에 머무르려고 하는 경향, 부계 상속에 대한 비난 이후의 그의 집착, 소유, 부의 결여이다. 그는 ≪에티카≫에 대한 작업을 계속한다. 1661년 초에 스피노자와 그의 친구들 사이의 편지는 그의 친구들이 스피노자 책의 테마를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1663년에 시몬 데 브리에스(Simon de Vries)는 스피노자가 보낸 텍스트를 읽고 토론한 연구 그룹에 대해서 언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일군의 친구들에게 1675년에 라이프니쯔와 관련해서도 그 자신이 그렇게 할 것이듯이 낯선 사람을 경계하라고 털어놓으며 그의 관념을 비밀에 부쳐줄 것을 요구한다. 그가 헤이그 근방에 살았던 이유는 아마도 정치적인 이유 때문일 것이다. 수도 가까이에 사는 것은 행동적인 자유상사가적(libertins)(*역주5) 서클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콜레지안트파 그룹의 정치적 무관심으로부터 벗어나는데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두 주요 정당인 칼뱅주의 당과 공화당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전자는 독립을 위한 투쟁이라는 주제, 전쟁의 정치학, 오렌지 왕가의 야심, 중앙집중적 국가 형성에 여전히 헌신적이었다. 후자는 평화의 정치학, 지방분권적 조직화, 자유경제의 발전에 헌신적이었다. 군주제의 열정적이고 호전적인 행위에 대해 요한 데 비트는 자연적이고 기하학적인 방법에 의해 인도되는 공화국의 합리적 행위를 대립시켰다. 이제 다음의 것은 신비가 된다. 사람들은 칼뱅주의와 오렌지 왕가에, 불관용과 전쟁도발행위에 여전히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1653년 이래로 데 비트는 네덜란드의 총리였다. 그러나 여전히 공화국은 선호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놀랍고도 우연적으로 왕이 없는 공화국으로 남아 있었으며, 이것은 인민들에게는 불충분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스피노자가 혁명의 해로움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혁명이 크롬웰 혁명이 고무한 실망에 의거해서, 혹은 오렌지 왕가의 가능한 쿠데타에 의해 야기된 불안들에 의거해서 생각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이 시기 동안 '혁명적' 이데올로기는 신학은 물론이고 칼뱅주의 정당에도 스며들었고, 종종 반동의 정치학에 봉사했다.


그러므로 1665년에 스피노자가 ≪에티카≫ 작업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고 ≪신학정치학논고≫를 쓰기 시작했다는 것은 놀랄만한 것이 아니며, 이것은 다음의 질문과도 연결된다. 왜 인민들은 그렇게도 비합리적인 것일까? 왜 그들은 그들 자신의 노예화(enslavement)를 자랑스러워할까? 왜 그들은 그들의 속박이 마치 그들의 자유라도 되는 양 속박을 '위해서' 싸우는 것일까? 어째서 자유를 획득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유를 간직(유지)하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운 것일까? 왜 사랑과 기쁨을 요청하는 종교는 전쟁, 불관용, 증오, 적의, 양심의 가책을 자극하는 것일까? 1670년에 ≪신학정치학논고≫는 익명으로 가공의 독일 출판사에서 출간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저자는 곧 밝혀진다. 그렇게도 많은 면박, 저주, 모욕, 중상모략을 일으킬 책은 아마도 극히 드물 것이다. 유태인, 카톨릭인, 칼뱅주의자, 루터파 ― 데카르트주의자를 포함한 모든 우익적 사고를 한 서클들 ― 는 서로 경쟁적으로 그를 비난할 정도였다. 이후 '스피노자주의'와 '스피노자주의자'라는 단어는 모욕이자 위협이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모진 의심을 받았던 스피노자의 비평가들도 심지어 매우 비난받았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들 비평가들 중에는 몇몇 매료된 자유주의자와 데카르트주의자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이 공격에 가담함으로써 그들의 정통성을 증명했다. 폭탄같은 책은 항상 폭탄적인 비난을 받는다.(주6) 우리는 ≪논고≫에서 탈 신비화의 급진적 모험으로서의, 혹은 '효과'의 과학으로서의 철학의 기능을 발견하지 않고서는 이 책을 읽을 수 없다. 최근의 주석가들은 ≪논고≫의 진정한 독창성은 그것이 종교를 효과로서 여기고 있다는 점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인과적 의미에서는 물론이고 광학적 의미에서도 필연적인 합리적 원인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듯이 생산과정을 이 원인과 연결시킴으로써 추구될 수 있는 생산과정의 효과가 있다(예를 들어, 이 방식으로 자연적 법칙은 강력한 상상력을 가졌으나 약한 지성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필연적으로 '기호'로 지각된다). 심지어 종교를 다룰 때에도 스피노자는 생산된 효과와 그 생산의 법칙을 드러내는 유리들을 반짝반짝하게 닦는다.


공화당과의 유대, 그리고 아마도 데 비트의 보호가 스피노자를 더욱 특정한 종류의 근심으로부터 구출했다(1669년 초에 스피노자적 가르침 때문에 비난받은 철학 사전의 저자인 Koerbagh가 체포되어 감옥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그의 삶이 곤란에 처해졌던 교외를 떠나야만 했고, 헤이그에 거주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것은 침묵을 대가로 했다. 네덜란드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데 비트 일파들이 1672년에 암살당하고 왕당파가 권력에 복귀하자 이제 더 이상 스피노자가 ≪에티카≫를 출간한 것은 문제시되지 않았다. 1675년에 암스테르담에서의 간단한 노력은 그로 하여금 그 관념을 포기할 수 없도록 확신을 주었다. "어떤 신학자들은 왕과 행정장관들 앞에서 나를 불평할 근거를 찾는다. 게다가 나를 좋아하는 어리석은 데카르트주의자들은 도처에서 나의 의견과 글을 남용함으로써 비난을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여전히 이런 과정을 추구한다."(주7) 스피노자에게는 그 나라를 떠나는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더욱 더 혼자였으며 병이 들었다. 그가 평화롭게 살 수 있었던 유일한 환경도 그의 기대를 져버렸다. 그러나 그는 ≪에티카≫를 알고자 하는 계화된 사람들의 방문은 받아들였다. 비록 이것이 이후의 그 비판가들과의 동조를 의미하거나 심지어 그에게 요청된 방문이 부인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1676년의 라이프니쯔의 경우). 팔라틴(Palatine) 선거의 당선자가 1673년에 그에게 제공한 하이델베르크의 철학 교수직도 그를 유혹하지 못했다. 스피노자는 가치들을 전복하고 망치로 때리듯이 철학을 구성한 '사적 사상가(private thinkers)'의 계열에 속한다. 그는 '공식 교수'의 일원이 아니다(라이프니츠의 격찬하는 말에 따르면, 이들 공식 교수들은 기성의 감성, 도덕성의 질서, 폴리스를 결코 어지럽히지 않는다). "공공[영역]에서 가르치는 것은 결코 소망이 아니기 때문에, 저는 이렇게 훌륭한 기회를 받아들이도록 제 자신을 꼬드길 수 없습니다. 비록 제가 그것에 대해 오랫동안 심사숙고하긴 했지만."(주8) 스피노자의 사유는 이제 가장 최근의 문제를 제기한다. 상업적 귀족제를 위한 기회는 무엇인가? 왜 자유주의적 공화국이 설립되었던가? 대중(multitude)을 노예들의 무리 대신에 자유로운 인간의 집단성으로 바꾸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이러한 모든 질문들이 미완성된 채 남겨진 ≪정치학논고≫의, 상징적으로 볼때 민주주의에 관한 장의 초반부에서 멈추어버린 ≪정치학논고≫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1677년 2월에 스피노자는 아마도 폐병으로 사망했으며, 이 때에 수고를 가지고 있던 친구 마이어(Meyer)가 배석했다. 그 해 말에 ≪사후 저작≫이 익명의 기증자의 희생을 치루면서 출판되었다.


병으로 서서히 침식당한, 이렇게 검소하고 청빈한 삶, 이렇게 가늘고 연약한 신체,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의, 이러한 갈색의 타원형의 얼굴 ― 우리는 어떻게 삶 그 자체로 가득찬, 삶과 동일한 역능을 가진 인상을 설명할 수 있을까? 살고 사유하는 전체적인 방식에서 스피노자는 사람들이 외관상 만족하는 것과는 대립된 입장에 서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삶의 이미지를 투사한다. 사람들은 외관상 만족하기에 삶을 증오하고 부끄러워한다. 인간성은 죽음의 숭배를 복수화하며 전제자와 노예, 성직자, 판사, 군인의 단결을 야기하며 항상 바쁘게도 삶을 그 근거로 달려가게 하고 삶을 진동시키고 분노로 혹은 단계적으로 삶을 죽이고 법률, 특성들, 임무들, 제국들로 삶을 압도하거나 삶을 질식시키는 자기파괴에 복종한다. 이것은 스피노자가 세계에 내렸던 진단, 즉 우주와 인류의 파괴이다. 전기작가 코렐루스는 스피노자가 거미 싸움을 좋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몇마리의 거미들을 지켜 보았고, 그들끼리 싸우게 만들거나 혹은 몇 마리의 파리를 거미집에 던져 넣었으며 그 싸움을 매우 즐겁게 지켜보았으며 때로는 너털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주9) 동물들은 적어도 우리에게 죽음이 가진 환원불가능할 정도의 외재적 성격을 가르쳐준다. 동물들은 각기 죽음을 필연적으로 초래하지만 그들은 내부로부터 죽음을 실행하지는 못한다: 자연적 실존들의 질서에 있어서 불가피한 나쁜 조우자. 그러나 동물들은 아직 내재적 죽음을, 전제자-노예의 보편적 사드마조히즘을 발명하지 못했다. 헤겔이 스피노자는 부정적인 것과 그 역량을 무시했다고 비난하는 바로 그 지점에 스피노자의 영광과 순수함이, 스피노자의 발견물이 놓여 있다. 부정적인 것에 의해 소비되는 세계에서 스피노자는 죽음에 도전할 수 있는 삶을, 삶의 역량을, 인간의 살인 욕동들(appetites)을, 선과 악의 규칙들(rules)을, 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의 규칙들을 충분히 신뢰했다: 부정적인 것의 모든 환상(phantoms)을 폐기하는 삶을 충분히 신뢰하기. 파문, 전쟁, 전제, 반동, 마치 그것이 자신들의 자유라도 되는 양 자신들의 노예화를 위해 싸우는 인간들 ― 이것이 스피노자가 살았던 세계를 형성한다. 드 비트 일파들은 그에게 모범적인 사례이다. 궁극적 야만(Ultimi barbarorum). 그가 보기에 굴욕적이고 파탄적인 삶의 모든 방식, 부정적인 것의 모든 형태들은 두 가지 원천을 갖는다. 원한과 나쁜 양심, 증오와 죄에 대해서 하나는 외부를 향하고 다른 하나는 내부를 향한다. "인류의 두 가지 최대의 적들(archenemies), 즉 증오와 연민."(주10) 그는 이러한 원천들이 인간의 의식과 연결된 것이라고 거듭 비난하며, 새로운 의식, 새로운 견해, 삶을 위한 새로운 욕동이 있기 전까지는 결코 소진될 수 없다고 비난한다. 스피노자는 그가 영원하다는 것을 느끼며 경험한다.


스피노자의 사유에서 삶은 관념의 문제도 이론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방식이자 모든 속성들에 있어서 하나의 동일하고 영원한 양태이다. 그리고 기하학적 방법은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에티카≫에서 이 방법은 스피노자가 현자라고 불렀던 것과 대립된다. 그리고 현자는 인간의 무역능성(powerlessness), 근심에서 즐거움을 취하는 모든 것이며, 중상모략(accusation), 악의(malice), 헐뜯기, 비천한 해석을 먹고 자라는 모든 것이자, 인간의 영혼을 파탄시키는 모든 것이다(전제자는 파탄난 영혼들을 필요로 한다. 마치 파탄난 영혼들이 전제자를 필요로 하듯이). 기하학적 방법은 더 이상 지적인 설명의 방법이 아니다. 기하학적 방법은 더 이상 교훈적인 표현 수단이 아니며 오히려 발명(invention)의 방법이다. 그것은 생동적이고 광학적인 교정(rectification) 방법이 된다. 인간이 다소 일그러져 있다면 이러한 긴장 효과는 인간을 보다 기하학적인 그 원인들과 연결시킴으로써 교정될 것이다. 이러한 광학적 기하학이 ≪에티카≫ 전체를 관통한다. 사람들은 ≪에티카≫가 사유를 통해서 읽힐 수 있는 것인지, 역능을 통해서 읽힐 수 있는지를 묻는다(예를 들어, 속성들은 역능들인가 개념들인가?). 현실적으로 거기에는 단지 하나의 용어만이, 즉 삶(Life)만이 존재하는데, 이것은 사유를 에워싸지만 그러나 역으로 이 용어는 단지 사유에 의해서만 에워싸여진다. 삶은 사유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그 사상가만이 죄와 증오로부터 자유로운 잠재적(potent) 삶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단지 삶만이 그 사상가를 설명한다. 기하학적 방법, 렌즈를 가는 직업, 그리고 스피노자의 삶, 이것들은 전체를 구성하는 것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살아있는 선구자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그가 증명들은 "정신의 눈"(주11)이라고 말할 때 바로 이 점을 표현한 것이다. 그는 세 번째의 눈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이 눈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허위적 외양들, 정념들, 죽음들을 넘어서 삶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덕 ― 겸손, 청빈, 정숙, 검약(frugality) ― 은 더 이상 삶을 변전시키는 덕으로서가 아니라 그것을 관통하고 그것과 하나가 되는 역능으로서 이러한 종류의 비젼에 요구된다. 스피노자는 희망이나 심지어 용기를 믿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즐거움과 비젼을 믿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를 살도록 내버려 두었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살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는 단지 고무하고 깨우고 드러내기를 원했을 뿐이다. 세 번째의 눈으로 기능하고 있는 증명의 목적은 명령하거나 심지어 확신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렇게 고무된 자유로운 견해를 위해서 안경 알을 만들거나 렌즈를 가는 것이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제게 그것은 예술가들, 과학자들, 철학자들이 렌즈를 갈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결코 일어날 수 없는 무언가를 위한 거대한 준비입니다. 어느날 렌즈는 완벽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또한 명확하게, 비틀거리고 놀랍고 아름다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Henry Mil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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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Nietzsche, ≪도덕의 계보학(On the Geneology of Morals)≫, Ⅲ.

* Baruch는 히브리어로 이를 라틴어로 표현하면 베네딕트(Benedict)라는 말이 되는데, 히브리어에서 이 말은 '축복받은'이란 뜻이다.

* 유대인들의 종교적 집회나 교회당.

I. S. R vah, Spinoza et Juan de Prado, Mouton, 1959.

Eug ne Sue의 소설, ≪로트레아몽(Lautr amont)≫에서 Van de Ende는 민주주의적 공모가로서 활동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 평등주의적이고 평화주의적인 원시기독교로의 복귀를 실천하고자 하는 파.

* 16세기에 창시된 기독교 신교의 한 파

암스테르담 레이크 박물관의 판화실에 소장되어 있는 판화는 이 초상화의 복제품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논고를 포기한 가장 정확한 이유는 ≪에티카≫에서 나타난 '공통 통념'이론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이론은 ≪논고≫의 주장들을 작동하지 않도록 하거나 불충분한 것으로 만들었다. (5장을 참조).

* 성서적 신과 철학적 신의 모순을 강조하는 자연신교적 이신론자들을 지칭.

Feuerbach의 ≪기독교의 본질(L'Essence du christianisme)≫에 실린 J. -P. Osier의 서문, "Ou Spinoza ou Feuerbach", Maspero, Paris를 참조하라.

올덴버그에게 보내는 편지 68.

Fabritius에게 보내는 편지 48 . 가르침에 관한 스피노자적 개념화에 대해서는 ≪정치학논고≫, 8장, 49 참조. "허가를 요청한 모든 사람이 공개적으로 그것도 자신의 비용과 책임하에 가르칠 수 있도록 허용된다면 ..."

이 일화는 진짜(authentic)처럼 보이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많은 스피노자적인 울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거미 싸움, 혹은 거미-파리의 싸움은 몇가지 이유로 스피노자를 매혹시켰을 것이다. 1. 필연적인 죽음의 외재성의 관점에서, 2. 자연에서의 관계들의 합성의 관점에서(어떻게 거미집이 그 자체로 파리에게는 특이한 관계를 전유하는 세계와의 거미의 관계를 표현하는가), 3. 완전함의 상대성이라는 관점에서(인간의 불완전함을, 예를 들어 전쟁을 표식하는 하나의 상태가 만일 곤충의 본질과 같은 상이한 본질과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면, 이 상태는 어떻게 그 반대로 완전함을 시험할 수 있는가: 블리옌베르크에게 보내는 편지 19를 참조).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이후의 장에서 다시 부딪치게 될 것이다.

≪짧은 논고≫, 첫 번째 대화록.

≪신학정치학논고≫, 13장; ≪에티카≫, Ⅴ, 23,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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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법원의 동료들

커다란 법원 건물 안 이반 에고로비치의 방에 판사들과 검사들이 모여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메리빈스키 사건 심리의 중간 휴식 시간이었다. 이야기는 우연히 요즘 떠들썩한 크라소프 사건으로 옮겨갔다.

 

후요돌 와시리에비치는 그것이 관할 착오라고 역설하며 흥분했다. 그러나 이반 에고로비치 역시 자기의 의견을 고집하며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표도르 이바노비치는 처음부터 이런 이야기에는 흥미 없다는 듯 막 배달된 <새소식> 신문을 보고 있었다.

 

"여러분!" 표도르 이바노비치가 말했다. "이반 일리이치가 죽었군요."

 

"아니, 정말이오?"

 

"이것 좀 읽어보세요." 그는 아직도 잉크 냄새가 물씬 풍기는, 방금 인쇄된 신문을 건네 주며 후요돌 와시리에비치에게 말했다.

 

신문 한 쪽 검정 테두리 안에는 다음과 같이 부고가 실려 있었다.

 

'미망인 프라스코비야 후요도로브나 고로비나는 비탄에 가득 찬 심정으로 친척과 지우 여러분에게 삼가 알립니다. 법원 판사 이반 일리이치 고로빈이 지난 1882년 2월 4일 작고하였습니다. 발인은 오는 금요일 오후 1시에 거행합니다.'

 

이반 일리이치는 여기 모인 사람들의 동료였다. 모두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벌써 수주일 전부터 병석에 누워 있었다. 그는 불치병으로 자리에 누워 있었다. 그의 자리는 아직 비어 있으나 그가 죽으면 아래크세프가 그 자리에 임명될 것이라는 것은 누가 봐도 분명했다. 또 아래크세프의 후임에는 브니코프나 슈타베리가 임명되리라. 이것은 확실하게 예상할 수 있었다.

 

지금 방 안에 모여있는 여러 사람들의 한결같은 생각은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으로 그들 자신이나 혹은 친지들이 어떻게 직책이 바뀌고 승진하게 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이번엔 틀림없이 슈타베리나 브니코프의 차지가 되겠군.' 후요돌 와시리에비치는 생각했다.

 

한편 표도르 이바노비치도 생각했다. '그 자리는 오래 전부터 내 몫으로 정해져 있지. 그 자리로 승진만 되면 독방에다 봉급이 8백 루블 추가되니까... 그렇게 되면 꼭 처남이 카루가에서 전임해오도록 해야지.'

 

'그렇게만 된다면 마누라가 무척 좋아하겠지. 또 나도 이젠 처갓집에 아무것도 해 준 게 없다는 잔소리는 면할 수 있겠지.'

 

"나도 그 친구가 얼마 못 가리라고 짐작은 했지." 표도르 이바노비치는 서운한 듯이 말했다.

 

"참 안 됐어."

"아니 그런데, 도대체 무슨 병이었다던가?"

 

"의사들도 확실한 진단을 못 내렸다더군. 의사마다 진단 결과가 달랐다는 거야. 난 그래도 마지막 만났을 때 이제 회복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난 지난 번 축제 때부터 한 번도 문병을 가지 못했어. 늘 한 번 가본다고 벼르기만 했지..."

 

"재산 문제는 잘 마무리된 건가?"

 

"부인에게 얼마간 남겼다고 하던데, 그것도 그리 대단치는 않은가 봐."

 

"어쨌든 조문은 다녀 와야지. 그런데 우리 집에선 너무 멀단 말이야..."

 

"자네 집에서 가려면 멀다는 얘기지. 하긴 자네 집에선 가려면 어디든지 멀게 마련이지."

 

"이봐, 이 친군 내가 물 건너 사는 게 도무지 못마땅한 모양이군."

 

슈베크는 웃으며 표도르 이바노비치에게 말했다.

 

이후 그들은 시내 각 지역의 거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법정으로 돌아갔다.

 

이반의 죽음은 그들에게 생길지도 모르는 근무상의 이동이나 변화 외에도 그의 죽음을 알게 된 사람들의 마음에 '죽은 것은 그 친구지, 내가 아니다'는 기쁨을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그래, 그 친구가 죽었단 말이지... 하지만 나는 이렇게 살아있단 말이야.'

 

모두들 이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이반과 친했던 소위 친구라는 사람들은 약간 다른 부담도 느껴야 했다. 또 그놈의 귀찮은 예의상의 의무를 위해 영결식에도 참석하고 미망인 위문도 해야한다는 생각이 아울러 머리에 떠오르는 것을 어쩔 수 없다. 특히 후요돌 와시리에비치와 표도르 이바노비치는 이반과 각별한 사이였다. 특히 표도르 이바노비치는 이반의 법률학교 동급생이었다. 게다가 이반에게 여러 가지로 신세를 졌다는 것은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었다.

 

표도르 이바노비치는 그날 저녁 식사를 하면서, 아내에게 이반 일리이치가 죽었다는 것, 처남이 이곳으로 전근될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했다. 그리고 평소 저녁 식사 후에는 한숨 자던 것도 그만두고 연미복으로 갈아입은 후 바로 이반의 집을 향해 마차를 타고 떠났다.

 

이반 일리이치 집의 현관 앞에는 한 대의 고급 마차와 두 대의 합승마차가 멈춰 있었다. 아래층 응접실에는 외투걸이 옆의 벽에 분칠해 놓은 금(金) 모르와 장식술이 달린 무늬 없는 비단 관 덮개가 걸려 있었다.

 

검은 상복을 입은 여인 두 사람이 털가죽 외투를 벗고 있었다. 한 사람은 표도르도 안면이 있는 이반의 누이동생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낯선 부인이었다. 동료인 슈발츠가 막 이층에서 내려오던 참이었다. 슈발츠는 표도르가 집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 계단 위에 서서 마치 이렇게 말하듯 눈짓을 했다.

 

'이반도 어리석었지... 그렇지만 자네나 나는 다르지...'

 

영국식 구레나룻 수염을 잘 가꾼 슈발츠의 얼굴과 연미복을 입은 호릿한 몸매는 언제나 우아하고 장중했다. 평소 그는 떠벌이였지만, 그래도 이런 장소에서는 그의 용모가 뭔가 특별한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표도르 이바노비치는 숙녀들이 먼저 지나가도록 비켜섰다가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슈발츠는 걸음을 멈춘 채 계단 위에 서 있었다. 표도르 이바노비치는 즉각 그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는 분명 오늘 저녁 어디에서 빈트(트럼프 놀이)를 할 것인지, 의논하고 싶은 것이다.

 

여인들은 계단을 지나 미망인의 방으로 들어갔다. 슈발츠는 입은 굳게 다문 채 눈과 눈썹만 장난치듯 움직여 표도르 이바노비치에게 오른쪽에 있는 빈소를 가리켰다.

 

이런 경우 누구나 그렇듯 표도르 이바노비치도 약간 당황한 기분으로 그 쪽으로 걸어갔다. 단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런 경우 성호를 긋고 절을 하면 된다. 그러나 과연 머리까지 숙여야 할 것인지는 확신이 서질 않았다. 그래서 표도르는 절충안을 택했다. 표도르 이바노비치는 빈소에 들어서면서 가슴 위에 십자를 긋고 약간 머리를 숙였다. 그는 손과 머리를 그렇게 하면서 가능한 범위 내에서 방안을 두루 살폈다.

 

고인의 조카인 듯한 두 청년이 십자를 그으면서 방을 나가던 참이었다. 곁에는 한 늙은 여인이 서 있고,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여인이 노파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소곤대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체구가 건장한 사제가 악의 세력이 와도 개의치 않는다는 단호한 표정으로 무언가 큰 소리로 읽고 있었다.

 

식당 일을 돌보는 농부인 게라심이 가벼운 걸음으로 그의 앞을 지나치면서 바닥에 무언가를 뿌리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그는 문득 썩어가는 시체의 희미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이반을 옆에서 간호해온 이 농부를 이반은 유난히 아꼈던 것 같았다.

 

2. 미망인과 유족들

표도르 이바노비치는 몇 번 십자를 그으면서 관과 사제, 한구석에 안치된 성모상의 중간쯤 되는 곳을 향해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그러나 문득 너무 많이 십자를 그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그는 동작을 멈추고 잠자코 죽은 이의 모습을 지켜 보았다.

 

시체는 으레 그렇지만 죽은 이는 굳어버린 사지를 관 바닥에 펴고, 영원히 굽어버린 목을 베개에 걸친 채 무겁게 누워 있었다. 움푹 패인 관자놀이와 벗겨진 이마가 마치 밀랍으로 빚은 것 같았다. 윗입술에 덮일 듯이 뾰죽한 코가 유난히 두드러져 보였다.

 

시체는 그가 이반이 살아있을 때 마지막 보았던 것보다 더 여위어 있었다. 그 모습은 생전과 아주 달랐다. 그러나 시체의 얼굴은 어딘지 살아있을 때보다 더 아름답고 의젓한 느낌을 주었다.. 마치 해야 할 일은 다 했다는, 아주 훌륭하게 의무를 다했다는 표정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표정에는 살아있는 자들에 대한 힐책이나 경고 같은 것이 섞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그것은 아무 상관 없다. 그러나 어쩐지 그는 기분이 불쾌해져 다시 한 번 부지런히 십자를 긋고는 좀 경망하리만큼 허둥지둥 몸을 돌려 바쁘게 문쪽으로 걸어갔다.

 

슈발츠는 통로로 이어진 방에서 두 발을 꼿꼿이 버티고 서서 손으로 뒷짐을 지고 실크햇을 만지작거리면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표도르 이바노비치는 명랑하고 말쑥한 슈발츠의 모습을 보자 금방 기분이 신선해졌다. '슈발츠란 이 친구는 이런 구질구질한 일 따위에는 개의치 않고 사는군. 남이야 언짢은 기분이건 말건 상관없다는 것이겠지...'

 

이반 일리이치의 장례식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해오던 일의 질서를 무너뜨릴 수는 없다. 다시 말해 그 어떤 것도 오늘 저녁 트럼프 놀이를 훼방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인은 이미 새 촛불을 네 개 가져다 세워 놓았고, 일행은 새 트럼프 한 벌을 열어놓은 상태였다. 이 장례식이 오늘 저녁 일행이 모여 즐기는 것을 잡칠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슈발츠는 그냥 가려는 표도르 이바노비치의 귀에 대고 오늘 후요돌 와시리에비치 집에서 열리는 노름에 끼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그는 오늘 저녁 트럼프 놀이를 할 운이 아닌 모양이다. 머리에 크레프를 쓴 여인이 아까 관 앞에 서 있던 여인처럼 유난히 눈꼬리를 치켜 뜨고 다른 여인들과 함께 방에서 나와 여인들을 빈소로 들여보내면서 말했기 때문이다.

 

"이제 장례 미사가 시작됩니다. 함께 들어가시죠."

 

이반 일리이치의 미망인인 프라스코비야 후요드로브나라는 키가 작고 뚱뚱했다. 본인은 그렇게 보이기를 원치 않겠지만, 어깨로부터 밑으로 갈수록 점점 더 벌어져 보이는 전신을 검은 상복으로 감싸고 있었다.

 

슈발츠는 이 말을 받아들이는 것도, 거절하는 것도 아닌 애매한 목례를 하면서 발을 멈췄다. 프라스코비야 후요드로브나는 표도르 이바노비치를 보자 한숨을 휴 내쉬면서 그에게 바싹 몸을 가져다 붙이고 손을 잡으면서 입을 열었다.

 

"저는 선생님을 잘 알고 있어요. 선생님과 이반은 정말 친한 친구셨잖아요..." 여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자기 말에 뭔가 그럴싸한 답변이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표도르 이바노비치는 아까 빈소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여인의 손을 꼭 쥐고 한숨을 내쉬면서 "그렇구 말구요!" 하고 말해줘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그는 그대로 했다. 그러자 그 효과가 금방 나타났다.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제풀에 감동했고 그녀도 따라서 감동한 것이다.

 

"자, 시작하기 전에 들어가시죠. 사실은 선생님께 좀 드릴 말씀이 있어요." 미망인은 말했다. "팔을 좀 빌려주세요."

 

표도르 이바노비치는 자기 팔을 내밀어 그녀가 잡게 한 후, 웃음을 참으며 눈짓을 하는 슈발츠의 앞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자넨 오늘 빈트 노름엔 못 끼겠군. 미안하지만 다른 친구를 끌어와야겠어. 요행히 빠져 나올 수 있다면 다섯이 함께 놀아도 상관없으니까...' 그의 짓궂은 눈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표도르 이바노비치가 더 한층 깊은 비탄의 한숨을 짓자 미망인은 감격해서 그의 손을 부여잡았다. 장미빛 크레튼 갱사로 갓을 씌운 흐릿한 램프불이 켜 있는 응접실에 들어와 두 사람은 탁자 옆에 앉았다. 그녀는 긴 의자에, 그는 스프링이 부러져 거북한 느낌을 주는 낮은 안락의자에 각각 앉았다.

 

프라스코비야 후요드로브나는 그에게 다른 의자에 앉도록 권하려다가 그러는 것이 이 경우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그만 두었다. 낮은 안락의자에 앉으면서 표도르 이바노비치는 이반 일리이치가 이 응접실을 설계할 때 그와 의논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미망인은 긴 안락의자에 앉으려고 탁자 옆을 지나가다가(이 방에는 크기가 작은 살림살이와 가구들이 촘촘히 들어차 있었다.) 검은 만치리야 크레프가 탁자 위에 놓여있던 조각상에 걸렸다. 표도르 이바노비치가 걸린 옷자락을 떼어주려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의 엉덩이 밑에서 깔려있던 안락의자가 파도처럼 흔들리면서 그의 엉덩이를 툭툭 쳐댔다.

 

미망인이 자기 손으로 옷자락을 조각상에 벗겨내기 시작하자 표도르 이바노비치는 흔들리는 안락의자를 간신히 누르고 다시 주저앉았다. 그러나 미망인이 옷자락을 완전히 벗겨내지 못하자 그는 또다시 엉덩이를 일으켰다. 그러자 안락의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흔들리며 이번엔 아주 삐걱거리는 소리까지 내는 것이었다. 이것들이 모두 멎고 조용해지자 그녀는 깨끗한 손수건을 꺼내 들고 울기 시작했다. 표도르 이바노비치는 이 소동으로 기분을 잡치고 시무룩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반 일리이치네 식당 일꾼인 소호로프가 나타나 이 어정쩡한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프라스코비야 후요드로브나가 말했던 그 묘지는 가격이 2백 루블이나 하더라는 얘기를 했다. 그녀는 울음을 그치고 마치 불행의 상징이나 되는 것처럼 슬픈 눈매로 표도르 이바노비치를 건너다 보면서 프랑스어로 말했다. "전 도저히 참을 수 없어요."

 

표도르 이바노비치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듯 말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담배라도 피우세요."

 

그녀는 비탄에 잠긴 목소리로 너그럽게 말하고 소호로프와 묘지 가격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했다.

 

표도르 이바노비치는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그녀가 묘지 가격을 자세히 묻고 결정을 내려주는 것을 듣고 있었다. 묘소를 고른 다음 그녀는 장례식에 부를 합창단에 대해서도 일일이 지시를 내렸다. 소호로프는 이야기를 마치고 물러갔다.

 

"일일이 다 제 손으로 해야 하는군요."

 

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앨범을 한 쪽으로 밀어 놓으면서 표도르 이바노비치에게 말했다. 담배가 타들어가 재가 탁자 위로 떨어지게 된 것을 보자 그녀는 재빨리 표도르 이바노비치 앞으로 재떨이를 밀어주면서 말을 이었다.

 

"슬픔 때문에 해야 할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오히려 그 반대에요... 죽은 그이를 위해 마음을 쓰고 뭔가 일을 하는 것이 저에게는 그나마 위안이 되고, 슬픔을 잊게 해주는 거랍니다."

 

그녀는 또다시 울 것처럼 손수건을 꺼냈다가 갑자기 스스로를 억지로 참아 누르듯이 몸을 한 번 떨었다. 그리고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참, 선생님과 상의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표도르 이바노비치는 또다시 흔들거리는 의자를 간신히 누르면서 꾸벅 절을 하고 앉은 자세를 고쳤다.

 

"그이는 마지막 이삼일 동안은 정말 고통이 심했답니다."

 

"고통이 그렇게 심했나요?"

 

"정말 끔찍했어요. 마지막에 가서는 몇 분 아니 몇 시간씩이나 쉬지 않고 비명을 질러댔어요. 사흘 밤낮은 숨도 안 쉬고 그저 끔찍한 소리만 질렀어요. 참말이지 제가 그 끔찍한 소리를 어떻게 견뎌냈는지 모르겠어요. 글세 골목이 세 칸이나 떨어진 곳에서도 다 들렸어요. 그때 저의 심정이란 뭐라고 이루 말씀 드릴 수가 없어요."

 

"의식은 남아 있었나요?"

 

표도르 이바노비치가 물었다.

 

"네." 그녀는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요. 글쎄 그이는 죽기 15분 전에 우리를 모두 불러놓고 마지막 작별까지 하고 위로자를 데려가라는 말까지 했어요."

 

 

3. 나에겐 이런 일이...

처음엔 쾌활한 소년으로, 다음엔 학생으로 그리고 어른이 된 후엔 트럼프 친구로서 그렇게 친하게 사귀던 사람이 그렇게 고통스럽게 죽다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자 자기 자신과 이 여인의 위선에 대한 불쾌한 감정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표도르 이바노비치는 치를 떨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죽은 이의 그 이마와 입술을 덮듯이 뾰죽하게 튀어나온 코를 생각했다. 뭔가 무서운 것이 자기 자신에게도 덮쳐 오는 것 같았다.

 

'그 무서운 사흘 낮과 밤, 그 다음에 오는 죽음... 이런 고통은 지금 당장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한순간 소름이 끼치는 공포를 느꼈다. 그러나 이내 뚜렷한 근거는 없지만 평소의 생각 - 이건 이반 일리이치에게 일어난 일이지 나에게 생긴 일은 아니야. 나는 그런 일을 겪을 리도 없고 그런 무서운 일은 나에게 생겨날 까닭이 없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내가 지금 여기 어두운 분위기에 짓눌렸기 때문이야. 슈발츠처럼 이런 기분에 짓눌려지지 않도록 해야지... 이렇게 생각을 고쳐 먹었다.

 

마치 구원의 손길처럼 이렇게 스스로 기분을 다스리자, 표도르 이바노비치는 침착한 기분으로 일종의 흥미마저 느끼며 이반 일리이치가 운명하던 순간을 자세히 캐물었다. 죽음은 이반 일리이치에게만 있는 특유한 사건으로 자기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란 것처럼.

 

이반 일리이치가 겪은 그 무서운 육체적 고통을 상세히 설명한 후 미망인은 진짜 용건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은 모양이었다.

 

"아아, 표도르 이바노비치씨, 이토록 무서운 일이 생기다니요... 이렇게도 괴로운 일이 있을 수 있나요...?" 그녀는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표도르 이바노비치는 슬픈 듯이 연방 한숨을 내쉬면서 그녀가 코를 풀기를 기다렸다. 그녀가 울음을 그치고 코를 풀고 나자 그는 말했다.

 

"저를 믿고 말씀하세요."

 

그러자 그녀는 다시 넋두리를 늘어놓더니 이윽고 그에게 의논하고 싶었던 진짜 용건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남편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하면 나라에서 돈을 조금이라도 더 타낼 수 있느냐는 것이 골자였다. 그녀는 아마 연금에 관해서 그의 의견을 묻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실상 그가 알지 못하는 것, 즉 이 죽음을 꼬투리로 국고에서 타낼 수 있는 돈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 아주 상세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다만 자기가 아는 것 말고도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은 돈을 타낼 수 있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

 

표도르 이바노비치는 무슨 방법이 없을까 생각해보려고 하다가 이내 귀찮아졌다. 그는 그저 정부가 인색하다며 몇 마디 욕을 한 후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아무래도 가능성이 없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나서는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 이 손님으로부터 풀려날 것을 궁리하는 눈치였다.

 

표도르 이바노비치도 그녀의 생각을 눈치채고 담뱃불을 끄고 일어섰다. 그는 미망인의 손을 한 번 더 잡아 주고는 여러 사람이 모여있는 방으로 건너갔다.

 

식당에는 이반 일리이치가 언젠가 골동품 가게에서 샀노라면서 무척 기뻐하던 시계가 걸려 있었다. 표도르 이바노비치는 거기서 목사 한 사람과 역시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와 있는 아는 사람들을 몇 만났다. 그 가운데서 그는 이반 일리이치의 딸을 발견했다. 그도 본 적이 있는 그 아리따운 아가씨는 온 몸을 검은 옷으로 감고 있었다. 날씬한 허리가 상복 때문에 더욱 가늘어 보였다.

 

그녀는 어둡고 의연한, 그러면서도 어딘지 화가 난 것 같은 표정으로 표도르 이바노비치에게 인사했다. 마치 그가 무슨 죄라도 저지른 것 같은 태도다. 그녀의 등 뒤에는 한 청년이 똑같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녀의 약혼자라고 알려진, 재산이 많은 예심판사였다. 그 사나이는 침울하게 표정으로 그에게 머리를 수그리고는 시체가 누워있는 방으로 가 버렸다.

 

그러자 계단 위에서 이반 일리이치와 아주 닮은 중학생 아들이 나타났다. 그는 표도르 이바노비치가 법률학교 시절에 봤던 이반 일리이치의 모습과 흡사했다. 소년은 표도르 이바노비치를 보자 신경질적으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표도르 이바노비치는 그를 향해 가볍게 머리를 흔들어 보이고는 시체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장례 미사가 시작되었다. 촛불, 신음소리, 향 연기, 눈물, 훌쩍거리는 울음소리.

 

표도르 이바노비치는 얼굴을 찌푸린 채 앞에 서 있는 사람의 발을 내려다 보면서 서 있었다. 그는 한 번도 죽은 사람을 들여다 보지 않았다.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그 분위기에도 그는 마지막까지 영향을 받지 않고 앞장 서서 나오는 사람들 틈에 섞여 그곳을 나왔다. 응접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식당 하인 농부인 게라심이 표도르 이바노비치의 외투를 찾아왔다.

 

"요즘은 어떤가, 게라심? 이반은 참 안됐어..."

 

"모두 하나님의 뜻이죠. 누구나 결국엔 이렇게 가버리는 걸요..."

 

게라심은 농부답게 하얗고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면서 말했다. 그는 항상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답게 바람이 불 정도로 잽싸게 문을 열고 마부를 불러 표도르 이바노비치를 태워주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마치 급히 해야 할 일을 생각해내기라도 한 것처럼.

 

표도르 이바노비치는 향과 시체와 석탄산 등 퀴퀴한 냄새가 뒤섞인 불쾌한 공기를 벗어나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이 여간 유쾌하지 않았다.

 

"어디로 모실까요?" 마부가 물었다.

 

"아직 그렇게 늦지는 않았겠지... 그럼 후요돌 와시리에비치네 집에 들러야겠군."

 

이렇게 표도르 이바노비치는 다시 거리로 나왔다. 그의 짐작대로 로벨(트럼프 놀이)의 첫 판이 끝날 무렵에 그곳에 끼어들 수 있었다. 그는 마침 잘됐다 싶어서 다섯 번째 파트너로서 그 속에 끼어들었다.

 

 

4. 삶의 출발

이반 일리이치의 과거 생활을 극히 단순하고 평범했다. 그러면서도 사실 무서운 것이었다. 이반 일리이치는 법원 판사로 일하던 마흔 다섯 살에 죽었다. 그는 뻬쩨르부르그에서 출세길이 탄탄하게 열려 있었던, 어떤 관리의 아들이었다.

 

그 출세의 길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본질적으로는 그 직무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지만, 그런 사실을 다들 알면서도 긴 과거 경력과 권위의 덕택으로 사직 당하지 않고 교묘하게 버틸 수 있는 길을 말한다. 억지로 마련한 지위와 6천 내지 1만 루블의 봉급을 누리면서 아주 늙은 뒤까지 편안히 살 수 있도록 마련해주는 지위까지 갈 수 있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다.

 

별로 필요 없는 기관의, 별로 필요하지 않은 인력의 한 사람이었던 삼등관 이리야 에피모비치 고로빈도 그런 부류의 하나였다. 그에게는 아들이 세 명 있었다. 이반 일리이치는 그 가운데 둘째였다. 맏아들은 부친과 같은 출세의 길을 더듬어 올라와 이제는 타성적으로 봉급을 타먹을 수 있는 근무 경력을 쌓은 상태였다.

 

막내 아들은 실패자였다. 여러 가지 일을 해 보았으나 모두 실패하고 지금은 철도 일을 보고 있다. 그래서 부친이나 형들, 더구나 형수들은 그와 마주서기도 꺼릴 뿐 아니라 여간 특별한 일이라도 생기지 않으면 아예 그의 존재를 생각해내는 일조차도 거의 없었다.

 

누이동생은 뻬쩨르부르그의 전형적인 관리인 그레프 남작과 결혼했다.

 

이반 일리이치는 이른바 집안의 자랑거리였다. 그는 맏아들처럼 융통성 없는 고지식한 성격도 아니며 아우처럼 분별없이 덤비지도 않았다. 그는 두 형제의 가운데서 - 슬기롭고 활발하며 명랑하면서도 예의 바른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아우와 함께 법률학교에서 공부했다. 아우는 졸업을 못하고 5학년 때 퇴학을 당했으나 이반 일리이치는 훌륭하게 전체 교육 과정을 마쳤다. 법률학교 시절에 이미 그의 뛰어난 면모는 잘 드러났다. 그는 유능하고 쾌활하며 서글서글하고 사람 사귀길 좋아하지만 자기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일은 엄격하게 실천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자기의 의무로 생각하는 것은, 모두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었다.

 

소년 시절이나 또 어른이 된 후에도 그는 특별히 남에게 아첨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아주 어려서부터 마치 파리가 불빛에 끌려 가듯 사회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끌려드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연스럽게 그런 사람들의 태도와 인생관을 본받고 그들과 친교를 맺었다. 어릴 때, 그리고 청년 시절에 한 때 열중했던 일들은 모두 그에게 큰 흔적을 남기지 않고 스쳐 지나갔다. 그도 한때 정욕과 허영과 마지막엔 자유 사상에도 빠진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때도 그의 감정이 일정한 한계를 넘는 일은 없었다.

 

법률학교 시절, 어렸을 때는 무척 추잡한 짓으로 여겨서 그 행위를 할 땐 자기 자신에 대해서 혐오를 느꼈던 그러한 행위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그런 행위가 지위가 높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행해지고 있으며 별로 비난을 받지도 않는 것을 보고서는 그는 거기 대해서는 어느덧 깨끗이 잊어버렸다. 간혹 다시 생각나는 일이 있어도 그는 그것을 별로 괴롭게 여기지 않았다.

 

법률학교를 졸업하고 십등관이 되어 이반 일리이치는 부친에게서 양복을 살만한 돈을 받았다. 이반 일리이치는 샤르멜 가게에서 양복을 맞추고 공작과 교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 후, '도온' 식당에서 동급생들과 파티를 했다. 이런 일들을 마치자 그는 고급 상점에서 최신 유행 가방과 내복, 양복, 면도 기구, 화장 기구, 수건 등을 마련해서 부친이 주선해준 지방의 주 지사 촉탁 관리로서 부임했다.

 

지방에 가서도 이반 일리이치는 이내 법률학교 시절과 같은 경쾌하고 명랑한 분위기를 자기 주위에 만들어냈다. 그는 성실하게 근무해서 출세 길을 착착 마련하는 한편 오붓하고 품위 있게 놀았다. 이따금 상관의 지시를 받아 군(郡)으로 출장도 나갔으나 그곳에서도 윗사람에게나 아랫사람에게 위엄을 갖춰 응대했다. 그리고 스스로 긍지로 삼고 있는 정확성과 결백함을 유지하며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를 잘 수행했다.

 

직무 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는 그 젊음과 가벼운 즐거움을 좋아하는 성품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조심스럽고 공식적이어서 오히려 엄격하다는 느낌을 줄 정도였다. 반면 친구들 사이에서는 종종 농담을 즐기고 재치가 풍부하게 굴었다. 그는 항상 선량하고 예의 바른 태도를 유지해 그가 마치 부모처럼 여기고 드나들던 지사 부부는 그를 아주 꽤 쓸만한 사나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지방에 있는 동안 그는 자기를 좋아하는 여인 가운데 한 사람과 관계를 맺었다. 여자 디자이너와 친해졌으며 도시에서 온 시종무관과도 술자리를 같이 했다. 지사 뿐만 아니라 지사 부인에게도 적절하게 아첨했으나 아무도 그의 이러한 태도를 나쁘게 헐뜯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러한 모든 것들은 프랑스 격언이 말하듯 '젊은 한 때는 방탕해도 좋다'는 항목에 들어맞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말쑥한 손에 깨끗한 셔츠를 입고 프랑스어를 지껄이는 이런 것들이 그곳에선 가장 상류 계급에서 좋아하는 일들이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거기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렇게 이반 일리이치는 5년 동안 근무했다. 그러자 그에게 직업상의 전환기가 다가왔다. 새로운 재판 제도가 생겨 새로운 인물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반 일리이치는 그 새로운 인재가 되었다. 그는 예심 판사의 지위에 앉게 되었다. 새 근무처는 다른 지방이었으므로 그는 그 동안 사귀어오던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를 떠나 다시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야 했다. 이반 일리이치는 망설이지 않고 새로운 일자리로 떠나기로 했다. 그는 친구들과 작별 파티를 한 후 기념 사진을 찍고, 은제 담배 갑을 선물로 받은 후 새 근무지로 떠났다.

 

예심 판사 시절에도 그는 촉탁 관리 시절과 마찬가지로 착실하게 근무했다. 직무상 의무를 사생활과 구별하고, 여러 사람의 존경을 얻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예심 판사의 업무도 그에게는 이전의 일보다 훨씬 더 한 흥미롭고 매력적이었다. 전에도 물론 즐거웠다. 샤르멜에서 맞춰 입은 양복을 차려 입고 쭈뼛쭈뼛 접견을 기다리는 민원인이나, 부러운 눈으로 자기를 쳐다보는 관리들 사이를 지나 곧장 지사의 개인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거기서 입에 담배를 꼬나물고 지사와 더불어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이것도 물론 더없이 즐거운 일이었다. 그러나 직접 자기 뜻대로 취급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그는 자기 뜻대로 휘두를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무척 예의 바르게, 거의 친구처럼 대해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자신이 그들을 얼마든지 억누를 수 있다는 것, 그럼에도 자기가 너그럽게 친구처럼 거리낌없는 태도로 대해 주고 있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잘 알려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심판사가 되고부터 그는 자기가 모든 사람들 - 그가 아무리 행세하는 사람일지라도 예외 없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기가 일정한 문구를 관용 서류에 써 넣기만 하면 누구든지 어김없이 피고인이나 증인으로서 자기 앞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원하기만 하면 그들을 자기 앞에 불러 세우고 질문을 던져 거기에 대답하도록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반 일리이치는 결코 자기의 직권을 악용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오히려 자기의 태도를 부드럽게 하려고 애를 썼다. 실은 자기가 가진 이 권력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 권력을 부드럽게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야말로 그에게 있어서는 이 새로운 일자리가 주는 가장 큰 흥미와 매력이었다.

 

업무 그 자체, 즉 일반 심리 사무에 있어서도 이반 일리이치는 극히 성공적이었다. 그는 아무리 복잡한 사건일지라도 자기의 개인적인 의견을 완전히 배제하고 필요한 모든 공식적인 형식과 방법에 근거해 무척 신속하게 해결했다. 그것은 과거 관료 사회에서 보기 힘든 사례였다.

 

이렇게 그는 1864년에 공포된 법률을 현실 업무에 적용한 최초의 사람들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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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결혼

예심 판사의 직책을 수행하기 위해 새로운 고장으로 이사 온 이반 일리이치는 그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사귀고 새로운 지위를 이룩했다. 생활 태도도 약간 달라지게 되었다. 그는 지방 관청 당국과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 고장의 부유한 귀족과 법관들 가운데서 엘리트들만 골라 서클을 조직했다. 그리고 정부에 대해 적당히 불만을 나타내는 자유주의, 문화주의적인 태도를 연출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우아한 몸가짐을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다만 턱수염만은 깎지 않고 자라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이반 일리이치의 생활은 새로운 고장에서도 아주 원만했다. 주 지사에게 불만을 품은 친구들도 마음이 맞는 다정한 사람들이었으며, 봉급도 많아졌다. 특히 당시 새롭게 시작한 빈트 놀이는 그의 생활에 즐거움을 더해 주었다. 트럼프 놀이에 있어서도 그는 원래 머리를 잘 굴리고 명랑하고 재치 있게 노는 재주를 유감없이 발휘, 대체로 따는 편이었다.

 

이곳에서 2년간 근무했을 때 이반 일리이치는 장차 아내가 될 아가씨를 만났다. 프라스코비야 후요드로브나 미헤리는 그가 드나드는 써클에서 가장 매력 있고, 머리가 좋고, 화려한 아가씨였다.

 

일상적인 판사 업무를 마친 다음 필요한 오락과 휴식을 위해 그는 그녀와 농담 비슷한 가벼운 관계를 맺었다.

 

그는 촉탁 관리 시절에는 대체로 춤을 많이 추는 편이었으나 예심 판사가 되고부터는 가끔씩 예외적인 경우에만 춤을 추었다. 자신이 직분상으로는 오등관이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 남에게 뒤지지 않는 춤 솜씨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을 때 그는 춤을 추곤 했다.

 

그는 야회가 끝날 무렵에 이따금씩 프라스코비야 후요드로브나와 춤을 추었으며 주로 그 춤을 추는 시간을 이용해 그녀를 정복했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반 일리이치는 특별히 그녀와 결혼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인쪽에서 그를 그리워하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이 문제를 자신의 일신상에 관련된 진지한 문제로서 검토했다.

 

'하기는 결혼하지 말아야 할 특별한 이유도 없지.' 그는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프라스코비야 후요드로브나는 제법 지체가 있는 집안의 딸이었다. 외모도 단정하지만 그녀가 물려받을 재산도 적지 않았다. 물론 이반 일리이치는 그보다 조건이 좋은 처녀를 찾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조건도 괜찮았다. 이반 일리이치는 자신이 받는 봉급 정도의 수입은 그녀도 갖고 있으리라고 짐작했다. 사실 그녀는 학벌도 좋고 귀엽고 예쁘며 나무랄 데 없는 그런 처녀였다.

 

그러나 이반 일리이치의 결혼은, 그 때 주위 사람들이 둘이가 무척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이야기했던 것은 잘못된 판단이었다. 이반 일리이치는 서로 합의해서 결혼했다. 그는 자기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그런 방식대로 실행했다. 그러한 결혼, 그러한 아내를 맞이함으로써 자신을 위해서 보다 유쾌하고 동시에 훌륭한 결과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결혼 과정 그 자체와 부부간의 애정 표현, 새로운 가구, 새 식기, 새 내의 등으로 치장되는 결혼 생활 초기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아내가 임신할 때까지도 그랬다. 그래서 이반 일리이치는 일찌감치 결혼이란 것은 사회에서도 인정 받는 것이고, 경쾌하고 즐겁고 흐믓한 일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것은 예절 바른 생활 분위기를 파괴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그것을 강화시켜주는 것으로까지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내가 임신 2,3개월째로 접어들면서 이 결혼 생활에는 무언지 새로운, 생각하지도 못했던 불유쾌한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침울하고, 무척 볼성 사나운 모양으로 나타났다. 그는 이것들을 도저히 예상할 수 없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방법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아내는 아무 이유도 없이, 심심풀이 삼아 그의 생활의 즐거움과 예의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적어도 그의 생각으로는 그랬다. 그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 그녀는 뚜렷한 근거도 없이 그를 질투하고 자신의 비위를 맞춰달라고 요구하고 공연히 대들곤 한다 - 그에게는 그런 것들이 불쾌하고 난폭한 행동처럼 느껴졌다.

 

처음 얼마 동안 이반 일리이치는 경쾌하고 점잖은 생활 태도를 취함으로써 이런 불쾌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런 태도는 전에도 그를 곤경으로부터 구출해 주었다. 이런 기대 때문에 그는 아내의 감정에 별로 개의치 않고 종전처럼 경쾌하고 유쾌한 생활을 계속했다.

 

친구들을 초대해 집에서 노름판을 벌리기도 하고 혼자서 클럽이나 친구에게 놀러 가기도 했다. 그러나 아내는 때때로 굉장히 억척스럽게 막된 말투로 그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가 그녀의 요구를 무시하면 그때마다 더욱 집요하게 비난을 퍼부어서, 그가 마침내 굴복할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역시 그녀처럼 항상 집안에 틀어 박혀서 침울하게 시간을 보내게 될 때까지 결코 그런 행패를 그치지 않은 것이다.

 

이반 일리이치는 그제야 부부 생활이라는 것이, 적어도 아내와의 생활이 언제나 생활의 즐거움과 품위만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런 즐거움과 품위를 무너뜨리는 것이며 그는 스스로 이런 파괴 행위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반 일리이치는 대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근무는 아내를 위압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였다. 그는 그것을 방패 삼아 자기의 독립된 세계를 지키면서 아내와 대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이들의 출생과 양육 및 거기 따르는 여러 가지 실망, 장모의 병(이반 일리이치는 이 문제에 자기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요구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등 거듭되는 사건들은 그를 더욱 가정 밖으로 내몰았다. 가정 밖에서 그는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이반 일리이치는 전보다 더 근무에 열중하게 됐고, 거기에 대해 명예심을 갖게 되었다.

 

결혼 후 1년도 못 되어 그는 부부 생활이라는 것이 생활에 어느 정도 편의를 줄 수 있으나 실제로는 아주 복잡하고 무거운 짐을 져야 하는 부담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기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즉, 사회에서 인정 받는 예의 바른 생활을 꾸리기 위해서는 근무에 임할 때와 같은 일정한 태도를 꾸며서 대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이반 일리이치는 부부 생활에서 이러한 태도를 스스로 꾸며냈다. 그는 가정에서는 그저 집에서의 식사, 주부의 역할, 잠자리 등 아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편의와 외면상의 형식적인 품위만을 요구했다. 집에서 그는 명랑과 유쾌와 고상한 것만을 기대했으며 간혹 그런 것이 발견되면 무척 기뻐했다. 그러다가 저항이나 불평에 부딪치면 벽으로 둘러싸인 근무라는 별세계로 피난을 가서 그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었다.

 

이반 일리이치는 직무 수행에서 훌륭한 능력을 가진 것으로 인정 받았고, 3년 후에는 검사보로 승진했다. 새로운 직무와 그 중요성, 모든 사람들을 투옥하고 기소할 수 있는 가능성, 논고의 공개성과 여기에 대한 자신의 성공, 이런 것들 때문에 그는 한층 더 근무에 몰입했다.

 

아이들은 계속 태어났다. 아내는 점점 더 말이 많고 화를 잘 내는 여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잔소리도 이반 일리이치의 가정 생활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는 못했다.

 

이반 일리이치는 그 고장에서 7년 동안 근무한 뒤, 다른 주의 검사로 영전되어 갔다. 그는 가족을 데리고 부임했다. 그러나 돈이 딸리고 새로운 고장은 아내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봉급은 전보다 많아졌으나 생활비는 더욱 많이 들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이를 둘이나 잃게 되어 그의 가정 생활은 더욱 즐겁지 못한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새로 옮겨온 지방에서 무엇이고 좋지 않은 일만 생기면 남편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웠다. 부부가 이야기를 주고 받다 보면 아이들 양육 문제 때문에 말다툼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싸움이 폭발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부부 사이에 드물게나마 서로 사랑하는 기분이 되살아나는 경우도 있었으나 그런 것은 결코 오래 가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문제 때문에 슬퍼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런 상태가 특별히 불편하지도 않았고, 이제 그런 상태를 아주 정상적인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심지어 이것이 가정에 있어서 자기가 해야 할 역할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는 그 역할과 목표를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을 점차 줄임으로써 이루어 나갔다. 어쩔 수 없이 집에 있어야 할 경우에는 제 3자와 자리를 함께 함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무엇보다도 확실한 구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생활의 흥미를 모두 이 직업의 세계에서 찾았다. 자기의 권력의식, 미운 사람은 누구든지 혼내 줄 있는 가능성, 법정에 들어갈 때나 동료들과 만났을 때 갖추는 위엄, 상관이나 부하 등 동료들과의 원만한 관계, 특히 자신도 느끼고 있는 사무 관리상의 수완 등 이것들은 언제나 그를 즐겁게 해주었다. 그 밖에 동료들과의 대화나 식사, 트럼프 놀이 등도 그의 생활의 윤활유였다. 이처럼 이반 일리이치의 생활은 전반적으로, 그가 마땅히 그래야 할 것으로 여기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흡족하고 품위 있게...

 

그는 그 지방에서 7년 동안 더 살았다. 맏딸은 벌써 열 여섯이 되었다. 아이를 하나 더 잃어버리고 남은 사내 아이 하나는 중학생이 되었다. 그 애가 항상 가정 불화의 원인이었다. 이반 일리이치는 사내 아이를 법률학교에 보내려고 했으나 아내는 그에 대한 반발 때문인지 억지를 부려 중학교에 입학시켜 버렸다. 딸 아이는 집에서 공부를 하고 훌륭하게 성장했으며 어쨌든 아들도 착실한 편이었다.

 

 

6. 위기

결혼하고 나서 17년 동안 이반 일리이치의 생활은 이런 식으로 흘러갔다. 그는 이미 고참 검사였다. 그는 보다 좋은 자리가 나설 것을 기대하면서 두 세 군데 전임 요청을 거절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날 갑자기 그의 생활의 평화를 밑바닥부터 뒤집어 엎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반 일리이치는 전부터 대학이 있는 도시의 법원장 자리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된 노릇인지 후배인 코페가 그를 뛰어넘어 그 자리를 차지하고 말았다. 그는 공연히 화를 내며 아무 것에나 트집을 잡고 동료나 친근한 상관들과 말다툼을 했다. 자연히 사람들은 그를 피하게 됐고, 냉담해져서 그는 다음 번 인사 이동에서도 빠지고 말았다.

 

그것은 1880년의 일이었다. 그 해는 이반 일리이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운 해였다. 봉급은 생활비를 하기조차 턱없이 부족했고, 사람들은 그를 잊어버렸다. 아버지조차도 그를 도우려고 들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누구나 연봉 3천5백 루블인 그의 지위를 정상적인 것으로 여기고 부러워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아무도 그의 불행을 인정하고 도와주려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오직 자기 자신만이 - 남들이 불공평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며 아내의 끊임없는 잔소리에 진저리를 내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수입 이상으로 낭비한 탓에 빚에 쪼들리고 있다. 아무도 이걸 알아주지 않는다. 이것은 결코 정상적인 생활이 아니라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만이 느끼고 있다.

 

그 해 여름 휴가 때, 그는 휴가비를 줄이기 위해 처남이 있는 시골집으로 아내와 함께 내려갔다. 이반 일리이치는 시골에서 근무 없이 무료하게 지냈다. 이반 일리이치는 난생 처음으로 이렇게 감당할 수 없는 심심함에 질려 버렸다. 그는 견디기 힘든 우울함을 느끼고 단단히 결심했다 - 이런 상태로는 살아갈 수 없다. 뭔가 결단을 내리고,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이반 일리이치는 잠이 오지 않아 테라스를 어슬렁거리며 꼬박 밤을 샜다. 그는 뻬쩨르부르그에 올라가기로 마음 먹었다. 상관들이 그의 가치를 인정해 주지 않으면 그들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루게 될 것이다. 다른 관청으로 옮겨 버리는 거다... 그는 결심했다.

 

다음날, 아내와 처남이 한사코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뻬쩨르부르그로 떠났다. 그는 단 한 가지, 연봉 5천 루블을 받는 지위를 얻기 위해 먼 길을 떠난 것이다. 이제 그는 어떤 관청이든, 또는 일의 방향이나 성격 등은 따지지 않기로 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연봉 5천 루블일 뿐이다. 행정 방면이든 은행이나 철도든 또는 마이야 황후 학원이나 세관일지라도 꺼릴 것 없었다. 그저 5천 루블만이 필요했다. 그리고 자신을 중요하게 쓸 줄 모르는 지금의 소속 관청으로부터 어떻게 해서든 떠나 버리고 싶었다.

 

이반 일리이치의 이번 여행은 뜻밖의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클스크에서 그의 친구 에프 에스 일리인이 같은 일등차에 올라탄 것이다. 일리인은 방금 클스크 주지사로부터 전달된 전보를 보여 주었다. 그것에 의하면 며칠 안으로 주 청사의 인사 이동이 있으며, 표도르 이바노비치 자리에 이반 세미요노비치가 임명되리라는 것이었다.

 

이 인사 이동은 이반 일리이치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즉 표도르 이바노비치와 그의 친구인 자할 이바노비치의 역할 변경은 이반 일리이치에게 다시 없이 유리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소식을 모스크바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뻬쩨르부르그에 도착하자 이반 일리이치는 자할 이바노비치를 찾아가서 자기가 전에 근무했던 사법성에서 확실한 지위를 약속 받았다. 일 주일 후 그는 아내에게 전보를 쳤다.

 

'자할 미르레르의 후임으로 제 1차 보고시에 임명 됐음.'

 

이반 일리이치는 에상치 못했던 이 인사 이동 덕분에 동료들보다 2계급이나 뛰어오게 됐다. 게다가 5천 루블의 봉급과 부임 수당으로 3천 5백 루블까지 덤으로 받게 되었다. 그는 이전의 경쟁자들과 관청 전체에 대해 품었던 적개심을 깨끗이 잊어버리고 아주 행복한 기분에 잠길 수 있었다.

 

이반 일리이치는 오랫동안 볼 수 없었던 만족스럽고 쾌활한 표정을 되찾고 시골로 돌아왔다.

 

그의 아내도 옛날처럼 명랑해져 두 사람 사이엔 휴전이 맺어졌다. 이반 일리이치는 뻬쩨르부르그에서 여러 사람들로부터 축하인사를 받았다. 예전엔 적이었던 사람들이 체면 따위는 던져 버리고 이제 그에게 아첨하게 된 것이다. 모두들 그의 지위를 부러워했다. 특히 뻬쩨르부르그에서는 여러 사람들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았다.

 

그의 아내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모두 의심 없이 믿는다는 표정을 하면서 단 한 마디도 반박하지 않았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그리고 새로 부임해 갈 고장에서의 생활에 대해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워 보는 것이었다.

 

아내가 말하는 계획은 이반 일리이치의 생각과 완전히 일치했다. 그는 서먹서먹하고 씁쓸했던 생활이 이제 멀리 사라지고,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즐겁고 점잖은 생활로 되돌아 가는 모습을 흐믓한 기분으로 지켜보았다.

 

이반 일리이치는 잠시 머무를 생각으로 시골에 돌아왔던 것이다. 9월 10일에는 새 임무를 맡아야 했으며 그밖에 새 부임지에서의 생활을 준비하고 시골에서 이삿짐을 전부 옮겨야 했다. 살림도구도 새로 장만할 필요가 있었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이 그의 머리 속에서 꾸몄던대로, 또 아내의 결심대로 정비되어야 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아주 순조롭게 진행됐다. 완전히 의견이 일치한 그들 부부는 사이가 무척 좋아졌다. 신혼 때에도 볼 수 없었던 현상이었다.

 

이반 일리이치는 곧 가족들과 함께 떠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처남 부부가 갑자기 그들 가족을 융숭하게 대접하고, 굳이 붙잡는 바람에 일단 혼자 떠나기로 했다.

 

이반 일리이치는 새 임지로 출발했다. 직업적인 성공 그리고 아내와 화합한 것이 그에게 흐믓하고 즐거운 기분을 안겨 주었다. 그 만족감은 점점 더 커졌다. 이사할 멋진 집도 하나 찾아냈다. 그들 부부가 전부터 가슴 속에 그리던 이상형의 그런 집이었다. 고풍스럽게 넓고 높게 설계한 응접실, 편리하고 장엄한 느낌을 주는 서재, 아내와 딸의 방, 아들이 쓸 공부방 등 모든 것이 마치 그들을 위해 일부러 주문해 만든 것 같았다.

 

이반 일리이치는 몸소 집 정리에 나섰다. 벽지를 선택하고 가구를 사들였다. 일부러 아주 고풍스러운 물건을 사들였다. 그것이 특별히 우아하게 보이도록 덮개를 장만하여 마음 속에 그렸던 이상에 가깝게 꾸며 나갔다.

 

집 정리를 절반 정도만 했는데도 그 효과는 그가 예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그는 집 정리가 완전히 끝나고 나면 속되거나 상스러운 구석이란 찾아 볼 수 없는, 우아하고 고상한 분위기가 되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밤에 잠들면서도 그는 머지 않아 완성될 넓은 응접실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손님방을 둘러보며 벌써부터 벽난로와 칸막이, 선반,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의자와 벽에 걸린 큰 접시, 오래 된 접시들과 청동 장식품들이 각기 제 자리에 놓인 모습을 여러 가지로 상상해 보았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얼마나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인지 생각하면서 혼자서 흐뭇한 기분에 잠겼다. 특히 방 전체에 아주 고상한 품위를 갖추어 줄 오래된 물건들을 찾아내서 싸게 사들인 것이 무엇보다 성공적이었다. 그는 나중에 사람들이 예상치 못한 결과를 보고 더욱 놀라도록 하기 위해 이런 일들을 실제보다 축소해서 편지로 써 보냈다. 이런 일들이 그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버려 그는 그토록 갖고 싶어했던 새로운 직무에 대해서도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할 지경이었다.

 

회의를 하는 자리에서도 그는 때때로 딴 생각에 잠기곤 했다. 커튼 윗 부분은 어떤 식으로 주름을 잡을까, 직선적인 게 나을까, 좀 여성적인 것이 좋을까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때로는 너무 생각에 열중한 나머지 몸소 가구를 고쳐보기도 하고 커튼을 갈아 보기도 했다.

 

한 번은 좀 서툰 미장이에게 직접 지시를 하려고 사다리에 올라갔다가 발을 헛디뎌 떨어졌다. 다행히 워낙 몸이 날쌔고 튼튼했으므로 옆구리를 모서리에 부딪쳤을 뿐이었다. 옆구리는 약간 아팠으나 이내 나았다.

 

이반 일리이치는 그 동안 즐겁고 건강하게 생활했다. 그는 때때로 편지에도 썼다 - 나는 나이가 열 다섯 살이나 젊어진 것 같다고. 그는 9월 중으로 모든 것이 완전히 정리되리라고 예상했지만 일은 10월 중순까지 끌었다. 그러나 결과는 아주 훌륭한 것이었다. 그만이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마다 모두 그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는 별로 부유하지 못하면서 부유한 척 보이려는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그런 것들에 지나지 않았다. 두꺼운 비단 커튼, 흑단 목재 가구, 꽃, 융단, 번쩍이는 것들이 모두 일정한 종류의 사람들이 그 일정한 종류의 사람답게 보이기 위해 장치해 놓은 것일 뿐이었다. 그의 집에 있는 것들은 모두 그런 것이어서 실상 별로 주목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런 모든 것들이 무슨 특별한 것처럼 가치 있게 느껴졌다.

 

그는 철도 정거장으로 가족을 마중 나갔다. 그리고 그들을 완전히 정리된, 눈부신 새 집으로 데려왔다. 하얀 넥타이를 맨 하인이 꽃으로 장식된 대기실의 문을 열어 젖혔을 때 모두들 응접실로 서재로 돌아다니면서 와! 하고 감탄의 함성을 터뜨렸다. 그는 너무 행복해 그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그들의 찬사를 마음껏 즐겼다.

 

그날 밤 차 마시는 자리였다. 그는 아내의 물음에 웃음을 터뜨리며 자신이 사다리에서 뛰어 내려 미장이를 놀라게 했던 모습을 몸짓까지 섞어가며 이야기해주었다.

 

"내가 체조를 배운 게 뭐 장난인 줄 아나?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정말 죽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여기를 좀 부딪쳤을 뿐이야. 아직 만지면 아프긴 해도 이젠 거의 다 나았어. 가벼운 타박상일 뿐이라니까."

 

이렇게 그들은 새로운 집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매사가 그렇듯 이 새 집에서도 얼마쯤 살다 보니 방이 하나쯤 더 있었으면... 수입도 한 5백 루블쯤 더 많았으면 하는 사소한 불만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로 모든 것이 아주 순조로웠다.

 

처음 얼마 동안은 아직 갖추어진 시설이 좀 부족했다.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부부가 이것저것 장만하고 고쳐 달라기도 하고 바꿔 놓을 때가 가장 좋았다. 부부 사이에는 무언지 아직 석연치 않은 구석도 남아 있었으나 둘 다 아주 흡족한 상태였다. 또 해야 할 일도 많았으므로 별로 크게 싸우는 일이 생기지는 않았다. 더 이상 손 댈 것이 없어졌을 무렵, 약간 지내기가 심심했지만, 그 무렵에는 새로 친구도 생기고 습관도 정해지고 생활도 충실해졌다.

 

 

7. 가볍고 유쾌하고 고상하게

이반 일리이치는 오전을 법원에서 보내고 점심은 집에 와서 먹었다. 처음 얼마 동안 그의 기분은 문자 그대로 최고였다. 집안 일 때문에 약간 골치를 썩기도 했지만, 그의 생활은 지금까지 그가 계획했던 대로 흘러갔다. 가볍고 유쾌하고 고상하게...

 

그는 아침 아홉 시에 일어나서 커피를 마시고 신문을 읽은 다음 근무복으로 갈아입고 법원으로 나간다. 법원에는 그가 달고 일해야 하는 목걸이가 마련되어 있다. 법원에 도착하자마자 그것을 목에 달아야 했다.

 

사무실에서 민원인들을 조사하고, 사무실 자체 업무나 회의, 공판과 공판 준비 회의 등 이러한 모든 것들이 그를 둘러싼다. 이것들 가운데서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만드는 회색의 생활이 끼어든다. 일을 제대로 하려면 이것을 배제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바꿔 말하면 사람을 다룰 때에 직무 이외의 어떠한 관계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일의 동기는 오로지 직무상의 것이어야 하며, 사람을 대하는 것도 직무상 허용된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가령 누가 무언가 알아보기 위해 사무실로 찾아 왔다고 하자. 이런 경우 직무를 떠난 자연인 이반 일리이치는 그 사람과 아무런 관계를 가져서는 안 된다. 만약 그 사람의 용무가 관리와 관련된 것이며 공문용지에 기재될 성질의 것이라면 이반 일리이치는 그러한 관계의 범위 안에서 규정이 허용하는 모든 일을 자세히 알아봐 준다. 덧붙여 그는 인간적으로도 깍듯이 예의를 지킨다. 그러나 직무상의 일이 끝나면 그 사람과의 관계는 완전히 정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반 일리이치는 직무상의 일을 분명히 구분, 자신의 진짜 사생활과 혼동하는 일이 없도록 해왔다. 이 방법을 이반 일리이치는 최대한 이용했다. 그것은 오랜 경험과 재능에 의해 이상할 정도로 잘 다듬어져 있었다.

 

그는 가끔 가벼운 농담이라도 하듯이 인간적인 관계와 직무상의 그것을 자신이 혼동하는 모습을 연출해 보이기도 했다. 그가 이렇게 스스로 정한 원칙의 속박을 풀어버리는 것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자신이 언제든지 필요하면 또다시 직무상의 관계를 칼처럼 구별, 인간적인 측면을 떼어버릴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주어진 업무를 손쉽고 유쾌하고 의젓하게 처리했다. 그 솜씨는 실로 달인의 경지라고 평가할 만했다. 직무를 처리하는 사이사이에 그는 담배를 피우고 차를 마시며 간단한 정치 관련 화제를 입에 올리는 일도 있었다. 또 일반적인 세상사나 트럼프 놀이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들의 화제는 대부분 인사 이동에 관련된 의견 교환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자신의 역할을 솜씨 있게 해치운 명인처럼, 예를 들어 오케스트라의 제 1 바이올리니스트의 한 사람처럼 피곤해져서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는 아내가 딸과 함께 외출했거나 손님이 와 있거나 한다.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은 가정교사와 예습을 하거나 학교에서 배운 것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말하자면 매사가 전혀 흠 잡을 데 없이 매끄럽게 진행되었던 것이다.

 

저녁 식사 후 찾아온 손님이 없으면 이반 일리이치는 이따금씩 평판이 좋은 책을 읽기도 한다. 그리고 더 늦은 밤에는 다시 일에 열중한다. 서류를 들여다보면서 관련 법규를 조사하고, 진술 내용을 법률과 대조해보고 들어 맞는 조문을 찾아내곤 했다. 이런 일은 지루하고 갑갑하기만 했다.

 

물론 빈트 노름을 할 때도 지루해지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아내하고 함께 있거나 혼자서 우두커니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이반 일리이치의 즐거움은 조그마한 만찬회를 마련하고 사회적으로 훌륭한 지위에 있는 신사 숙녀를 초대해서 그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한 번은 그의 집에서 가든파티를 열고 무도회를 가진 일도 있었다. 이반 일리이치는 흐믓한 기분이었고, 파티도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음식 문제로 아내와 대판 싸워야 했다. 아내는 그녀 나름대로 명분이 있었다. 그가 우겨서 고급 음식점에서 음식을 장만했으나 손님들이 다 먹지 못해서 음식이 많이 남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음식점에 치루어야 할 계산이 45 루블이나 되었다. 아내는 남편이 어리석게 고집을 피운다고 몰아세웠고, 남편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홧김에 이혼까지 서슴지 않는 식의 말을 중얼댔다.

 

그러나 야유회는 눈부셨다. 모두 일류급 인사들만 모여서 이반 일리이치도 포르포온노 공작부인과 춤을 추었다. 근무상의 기쁨은 자존심을 충족시키는 데서 생기는 것이며, 사교적인 기쁨은 허영심을 충족시키는 데서 생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반 일리이치가 진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빈트 놀이를 할 때였다.

 

이렇게 그들은 생활했다. 그들은 사교계에서 제 1급에 해당하는 사람들로 조직된 서클에 들어갔다. 이 서클에는 나이 든 사람도 있고, 젊은 사람들도 있었다. 이 서클에 관해서는 남편과 아내, 딸까지도 완전히 의견이 일치했다. 그들은 별다른 약속을 하지는 않았지만, 벽에 일본 도자기 접시가 걸려있는 그들의 객실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종류에 제한을 가했다. 실속도 없이 말만 앞세우는 귀찮은 친구들과 차림새가 허술한 축들은 상대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집에는 최상류층 사람들만 드나들게 되었다.

 

젊은이들은 이반 일리이치의 딸인 리잔카를 자주 화제에 올리곤 했다. 특히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페트리시체프의 아들이며 상속자인 예심판사 페트리시체프가 가장 관심이 많았다. 이반 일리이치는 진작부터 그 문제에 관해서 아내와 상의하곤 했다. 두 젊은이를 트로이카로 드라이브를 시키거나 또는 함께 소인극을 연출시켜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등 여러 가지 의견이 오고갔다. 이런 식으로 그들의 생활은 변함없이 그대로 흘러갔다. 만사는 아주 순조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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