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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마음에 그리지 말아라.


미륵존여래불은 다음에 오실 부처님이니 어떠니 하는 분별 또한 갖지 말고 그냥 '미륵존여래불'하여라.


흔히 '아미타불'을 염송하는 사람들은 수염이 텁수룩한 영감을 마음에 그리고, '관세음보살'을 염송하는 사람들은 예쁜 여인을 마음에 그리기 때문에, 다음 생에 텁수룩한 영감 모습이나 예쁜 여자의 몸을 받은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가 있다.


부처님은 형상은 없는데 상상하는 것은 곧 제 마음이니, 주의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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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쫓기 위해서 개에게 돌을 던지면, 개는 돌을 쫓아 공격한다.

사자에게 돌을 던지면, 사자는 돌을 공격하지 않고 그 돌을 던진 사람을 공격한다.

우주 삼라만상은 다 제 마음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대 항상 제 마음을 들여다보고 무엇이든 제 마음에서 찾을 것이지, 밖에서 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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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4-11-17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이군요...^^ 퍼감다...

파란여우 2004-11-17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대와 30대에는 밖에서 모든 것을 구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안에 있는 것의 중함을 조금 알았다고나 할까요...그러나 아직 갈 길이 멀었습니다. 여전히 그림자를 쫓고 있는 제 모습을 보면서 한숨이 나옵니다. 님의 짧은 글을 보면서 마음이 싸해지는군요...

달팽이 2004-11-18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20대의 끝없는 방황을 모두 거치고 난 다음에 오는 공허함과 허탈함을 채울 수가 없었습니다...외부세계에서는 그 무엇도 나의 마음을 채워줄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어느 날 오후에 만공 선사가 제자 몇 명과 더불어 배를 타고 안면도로 가는 중에 어느 산을 가리키며 제자들에게 "저 산이 움직이나, 배가 움직이나?" 물었더니, 혜암이 나서서 "산도 배도 움직이지 아니하고 오직 마음이 움직입니다."고 말했다. 선사가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느냐?"고 하자, 혜암은 손수건을 들어 올려 흔들었다. 만공선사가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했느냐?"고 했다.

1. 산이 움직이나, 배가 움직이나?

2. 만공 선사가 "너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했느냐?"고 물었을때 여러분이 그곳에 있었더라면 뭐라고 대답했을까?

3. 배도 산도 없으면 무엇이 있을까?

산이 배고, 배가 산이다. 산도 없고, 배도 없다. 산은 산, 배는 배다. 산과 배의 올바른 관계, 올바른 수용을 어떻게 유지하나? 배는 바다를 건너 안면도로 간다. 바다는 푸르고 산도 푸르다. 그러나 바다는 바다, 산은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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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저 모든 부처님이 적멸궁을 장엄함은

까마득한 겁바다에 인욕 고행한 탓이요,

많고 많은 중생들이 불집 속에 넘나듦은

한량없는 저 세상에 탐욕 놓지 못함일세.

 

막힘없는 저 천당에 가는 사람 왜 적은가?

세 가지 독 번뇌로 집안 보물 삼음이요,

꼬임없는 저 악도에 가는 사람 많은 것은

네 가지 뱀 오욕으로 집안 보물 삼음일세.

 

그 누군들 산에 가서 도 닦고자 않으리만

다만 하지 못하는 건 애욕 속에 얽힘이요,

고요한 산 들어가서 용맹 수도 못하여도

힘과 경우 닿는 대로 모든 선행 지어보세.

 

세상 쾌락 버린다면 성인처럼 공경 받고

어려운 일 능히 하면 불타처럼 존중되며

재물만을 간탐함은 마귀 집의 권속이요,

자비한 맘 보시하면 법왕섬의 아들일세.

 

높은 산과 솟은 바위 지혜로운 이 살 곳이요,

깊은 산골 푸른 숲은 닦는 이의 처소로다.

나무 열매 풀뿌리로 주린 배를 위로하고

맑은 샘과 흐르는 물 마른 목을 적셔 주네.

 

잘 먹여서 길러 봐도 이 몸 끝내 무너지고

비단으로 보호해도 이 목숨 끝이 있네.

울려 주는 바윗굴로 염불 법당 도량 삼고

슬피 우는 새 소리로 즐거운 벗 짝을 하여

 

어는 무릎 예배할 때 불 생각이 전혀 없고

주린 배가 끊어져도 먹을 생각 말지니라.

번쩍하면 백 년인데 안 배우고 어이하며

한평생이 얼마기에 닦지 않고 방일할까.

 

모든 애착 끊는 이를 사문이라 이름하고

세속 그리움 떠난 것을 출가라고 이르나니

닦는 이의 애욕 그물 개 몸에 코끼리 가죽이고

닦는 이가 그리워함 쥐 집에 든 고슴도치일세.

 

슬기로운 이 도시 삶을 부처님들 슬퍼하고

닦지 않고 산에 사나 성현님들 기뻐하네.

배운 것이 많다해도 계와 행이 없는 이는

보배 광에 인도해도 가지 않음 그와 같고

 

부지런히 닦는 이도 슬기로움 없을 때엔

동쪽으로 가려 하나 서쪽으로 가게 되고

지혜로운 이 닦는 것은 쌀을 쪄서 밥 짓기요,

슬기없이 닦는 것은 모래를 쪄 밥 짓기일세.

 

사람마다 밥을 주어 주린 배를 위로하나

불법 배움 알지 못해 어리석음 못 고치네.

행과 지혜 다 갖춤은 두 바퀴의 수레 같고

자리 타리 함께함은 두 날개의 새와 같네.

 

시주 받아 축원해도 그 참뜻을 모른다면

공양하는 그 정성에 어찌 아니 부끄럽고

공양 얻어 염불하나 깊은 이치 못 깨치면

성현님네 높은 이계 또한 아니 죄스런가.

 

깨끗하고 더러움을 모르는 버러지를

사람들이 너도 나도 미워하고 싫어하듯

공부하는 사문으로 더러움과 깨끗함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 성현님네 미워하네.

 

세상 소란 저버리고 하늘 세상 가는 데는

계 지키는 사다리가 가장 좋은 방편이요,

계 지킴을 깨뜨리고 남의 복밭 되려 함은

날개 상한 병든 새가 거북 업고 날음 같네.

 

자기 죄를 못 벗으면 남의 죄도 못 풀거니

계 지키는 수행 없이 남의 공양 어이 받나.

수행없이 헛된 몸은 길러 봐야 이익 없고

덧없는 뜬 목숨은 아껴 봐도 소용없네.

 

용상의 덕 바라거든 모든 고통 길이 참고

사자의 좌 구하거든 탐욕 쾌락 저버려라.

행자 마음 깨끗하면 모든 하늘 칭찬하고

도인으로 색욕 내면 선신들이 떠나가네.

 

사대의 몸 흩어지고 오래오래 못 머물며

오늘 벌써 저녁이라 내일 아침 다가오네.

세간 욕심 뒷고생을 어찌하여 탐착하며

한번 참는 낙이 긴데 어이 아니 닦을쏜가.

 

도닦는 이 탐을 내면 닦는 이의 큰 창피요,

출가한 이 부자됨은 군자들이 보고 웃네.

 

막는 말이 많건마는 탐착함을 못 끊으며

이 다음이 한없는데 애착함을 못 버리나.

이런 일이 한없는데 세상일을 못 끊으며

저 많은 꾀 끝없거늘 끊을 마음 못 내는가?

 

오늘이란 하루하루 다할 날이 없겠거늘

악을 짓고 죄를 행해 날로날로 더해 가며

내일이란 많은 내일 다할 수가 없겠거늘

착한 일을 하는 것은 날로날로 적어 가며

 

금년이란 일 년 일 년 다할 때가 없겠거늘

번뇌라는 생사 마음 한량없이 계속하고

내년으로 미는 마음 그칠 때를 전혀 몰라,

보리심을 일으키어 정진할 줄 모르도다.

 

시간 시간 흘러가서 낮과 밤이 잠깐 가고

날과 날이 재빨라서 훌쩍 한 달 속히 되며

달과 달이 계속항 문득 일 년 닥쳐오고

해와 해가 거듭하여 언뜻 죽음 닥쳐오네.

 

부수어진 저 수레는 움직일 수 바이 없고

잠깐 사이 늙어지면 수도인들 할 수 있나.

낮과 밤에 드러누워 게으름만 피우게 되고

힘을 내어 앉아 봐도 어지럽고 정신없네.

 

몇몇 생을 닦지 않고 낮과 밤을 헛보내며

헛몸 살기 몇 해인데 이 한생을 닦지 않나.

이 몸뚱이 멀지 않아 죽을 것이 명백한데

닦지 못한 이 내 몸을 다음 생에 어이할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급하고도 급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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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4-10-22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좋은 글입니다...퍼갈께요~
 

우리들은 수행이 어떠한 생각을 떠올리거나, 어떤 바램, 심지어는 깨달음에 대한 기대도 없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런 목적없이 그저  앉아 있기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떠오르는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운 이러한 수행은 <반야심경>에 근거한다. 그러나 경 그 자체에 대해서 주의하지 않는다면, 자신에게 하나의 확립된 상을 가져다 줄것이다. 경에 이르기를 "형상있는 것(色)은 텅 비어 있는 것이며(空), 텅 비어 있는 것은 형상을 가지고 있다(色卽是空, 空卽是色)“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이야기에 얽매이게 된다면 여러분들은 쉽사리 이원론적 사고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형상있는 것이 형상있는 것이며, 텅 빈 것은 텅 비어 있는 것이다](色卽是色, 空卽是空)라고 계속 가르치고 있다. 여기에서는 이원론이 아니다.


여러분이 앉아서 좌선하는 동안에 자신의 마음을 쉬기가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거나 항상 마음을 쉬게 하고자 노력할 때, 이것은 ‘형상있는 것은 텅 빈 것이고, 텅 빈 것은 형상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는 경지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원론적인 길에서 수행을 하고 있는 동안 여러분은 점점 더 자신의 목적과 하나가 될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의 수행에 노력이 필요없게 될 때는 자신의 마음을 쉴 수가 있다. 이것이 ‘형상 있는 것은 형상 있는 것이며, 텅 비어 있는 것은 텅 비어 있는 것이다’라고 하는 경지이다.


마음이 쉰다는 것은 마음의 활동이 멈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이 온몸에 스며든다는 것을 뜻한다. 마음은 호흡을 좇는다. 오롯한 마음으로 여러분은 손의 인을 맺는다. 오롯한 마음으로 앉는데 고통스럽지만, 그것에 의해서 방해됨이 없이 앉을 수 있다. 이것이 어떤 상을 갖지 않은 채로 앉는 것이다. 처음에는 자신의 자세에서 어떤 제한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제한에 의해서 방해받지 아니했을 때, [텅 비어 있는 것은 텅 비어 있는 것이며, 형상 있는 것은 형상 있는 것이다]라는 구절의 의미를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제한 아래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방법을 발견하는 것이 수행의 방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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