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낮잠 자다 일어나 아침인 줄 알고 학교까지 갔다가 돌아올 때와
똑같은, 별나도 노란빛을 발하는 하오 5시의 여름 햇살이
아파트 단지 측면 벽을 조명할 때 단지 전체가 피안 같다
내가 언젠가 한번은 살았던 것 같은 생이 바로 앞에 있다
어디선가 웬 수탉이 울고, 여름 햇살에 떠밀리며 하교한 초등학생들이
문방구점 앞에서 방망이로 두더지들을 마구 패대고 있다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러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채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신상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짧은 시절, 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
그것도 파워랄까, 그것마저 없는 자들에겐
희생은 또 얼마나 화려한 것이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의 말을 넣어주는 바람이
떠돌다 지나갈 뿐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펑! 튀밥 튀기듯 벚나무들,
공중 가득 흰 꽃팝 튀겨놓은 날
잠시 세상 그만두고
그 아래로 휴가갈 일이다
눈감으면;
꽃잎 대신
잉잉대는 벌들이 달린,
금방 날아갈 것 같은 소리 -- 나무 한 그루
이 지상에 유감없이 출현한다
눈뜨면, 만발한 벚꽃 아래로
유모차를 몰고 들어오는 젊은 일가족;
흰 블라우스에 그 꽃그늘 받으며 지나갈 때
팝콘 같은, 이 세상 한때의 웃음
그들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내세사가는 벚꽃길; 어쩌다 한순간
나타나는, 딴 세상 보이는 날은
우리, 여기서 쬐금만 더 머물다 가자
해 속의 검은 장수하늘소여
눈먼 것은 성스러운 병이다
활어판 밑바닥에 엎드려 있는 넙치,
짐자전거 지나가는 바깥을 본다, 보일까
어찌하겠는가, 깨달았을 때는
모든 것이 이미 늦었을 때
알지만 나갈 수 없는, 무궁의 바깥;
저무는 하루, 문 안에서 검은 소가 운다
언제나 먼저 지는 몇 개의 꽃들이 있습니다.
아주 작은 이슬과 바람에도 서슴없이 잎을 던지는 뒤를 따라 지는 꽃들은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꽃씨를 거두며
사랑한다는 일은 책임지는 일임을 생각합니다
사랑한다는 일은
기쁨과 고통, 아름다움과 시듦, 화해로움과 쓸쓸함
그리고 삶과 죽음까지를 책임지는 일이어야 함을 압니다
시드는 꽃밭 그늘에서
아이들과 함께 꽃씨를 거두어 주먹에 쥐며
이제 기나긴 싸움은 다시 시작되었다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고
삶에서 죽음까지를 책임지는 것이
남아 있는 우리들의 사랑임을 압니다
꽃에 대한 씨앗의 사랑임을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