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야 청산 가자 - 청소년과 어른이 함께 읽는 동화
최영철 지음 / 문경(문학과경계) / 2005년 11월
평점 :
품절


  원래 이 글은 3월 19일 이후에 공개해야 할 것이었다. '전국토론논술대회'의 필독 도서이기 때문이고, 내가 때아닌 '동화'를 읽은 것도 '일' 때문이다. 하지만, 베끼지만 않는다면, 여기까지 와서 이 글을 읽게 될 '참가자'의 노력은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올린다.

그리고 처음으로 '논술버전'으로 리뷰를 썼다. 제시문과 그에 대한 간단한 메모인데, '리뷰'와 너무 동떨어지지 않도록, 특히 '정떨어지지 않도록' 쓰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썼다. 스포일러도 신경을 쓴다고 썼는데, 스토리가 드러나지 않도록 한 데서 그 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는 '일반 버전'과 '논술 버전' 두 가지로 쓸 작정이었으나, 이 책이 무슨 '상전'이나 된다고 서평을 두 번이나 쓸까. 그 만한 정도의 책은 아니다. 장 그르니에의 '섬'에서 고양이의 특징과 비유를 많이 땄으며, '어린왕자'의 이야기도 제대로 녹아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이야기의 전개가 유기적이지 않다. 왜 그렇게 '조력자'는 많이 나오는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인가, 일부러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해 무리하게 조력자들 등장시키는 것을 '무엇'이라고 했는데, 그 '무엇'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문학 이론'에 빈번이 등장하는 말인데. 특히 마지막 장면은 좀 실망이다. 에잇! 또 서두가 너무 길었다. 이거 병 아닌가. 아무쪼록 '참가자'들이 혹시라도 이 글을 읽게 된다면, 길게 쓴 서두는 그냥 넘어가고 '좋은 의미', '좋은 글'로 된 본문을 많이 봐주기를 바란다. 그래도 처음으로 해보는 거라 재밌었다^^

우리도 한번 고양이가 되어 보자


논술의 시선으로 문학 바라보기


우리는 문학작품을 논술화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그것은 우리가 논리적 전개에 의한 비문학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문학이 비논리적 전개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고도의 기법을 통해서 가려져 있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압축’돼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소한 방식으로 된 문학(소설)을 논술과 연결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첫째, 등장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어야 한다. 문학이든 비문학이든 모든 문제는 나를 향하며, 나로부터 시작한다. 소설은 등장인물이 이야기 안에 깊숙이 참여해서 갈등과 메시지를 양산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등장인물에 대한 분석과 접근이 필요하다.

둘째, ‘극적 갈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비문학이 논거를 가지고 주장을 펼치듯, 문학 특히 소설은 이야기 안에 전개되는 ‘갈등’을 가지고 글쓴이의 주장을 전개한다. 따라서 소설의 핵심이 되는 주요 갈등을 분석하여 글쓴이가 보내는 메시지를 잘 해석해야 한다.

셋째, 이야기 안에서 사용되는 ‘상징’을 잘 해석해야 한다. 『나비야 청산가자』에서는 비교적 상징이 뚜렷이 명시돼 있다. 예컨대 ‘배불뚝이’는 거스를 수 없는 현실을 상징한다. 배불뚝이는 좋은 대학을 나오고 유수의 기업에 입사하여 젊은 나이에 ‘대리’라는 위치에 올랐지만, 이야기 안에서는 ‘세속적이고 교양 없는 무식꾼’으로 묘사된다. 이 밖의 여러 가지 ‘상징’들을 찾아다니며 글쓴이가 감춰둔 메시지를 하나씩 들춰내는 것이 필요하다. 마치 보물찾기와 같이 알쏭달쏭하고 어렵지만 재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넷째, 이야기를 이야기에만 한정시키지 말고, 현실에 자꾸 적용시켜 보는 것이다.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하지만 이야기에서 보았던 의미와 메시지는 현실 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나의 현실과 작중 인물의 현실을 대조해보기도 하고, 나를 그 이야기 속에 넣어 보는 등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현실의 목적과 길을 찾을 수 있는 힌트를 끊임없이 찾아내야 한다.

우리는 이름 없는 한 마리 고양이가 된다.(고양이는 ‘제석’이라는 의미 없고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달고 다닌다) 고양이가 되어서 본래의 야성(정체성)을 찾는 긴 여정을 함께 떠나 본다.


이상과 현실, 통념과 자각


#제시문 1

배불뚝이는 채리 아가씨네 식구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거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도대체 부끄러움이라고는 모르는 철면피처럼 배불뚝이는 그런 환영이 당연하다는 듯이 거드름을 피우고 있었다.

채리 아가씨는 잔뜩 얌전을 떨면서 배불뚝이의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이윽고 채리 아가씨가 헛기침을 한 다음 배불뚝이에게 물었다.

“직장이 어디라고 했지?”

그러자 배불뚝이가 미처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채리 아가씨가 재빨리 대답했다.

“아이, 아빠두.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기업 대리예요, 대리.”

“으흠, 그렇다고 했던가?”

“네 그렇습니다, 장인어른. 저는 채리 씨를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있습니다.”

배불뚝이는 자신감에 차서 거들먹거렸다. 장인어른이라니. 나는 기가 막혔지만 채리 아가씨는 당연하다는 듯이 배불뚝이를 내버려두었다. 배불뚝이의 태도는 자신감이 아니라 자만심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아빠. ○○기업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대기업이고, 이 나이에 대리면 앞으로의 출세는 따 놓은 당상이예요.”

채리 아가씨가 한술 더 뜨자 배불뚝이는 불룩한 배를 한껏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채리 아가씨의 엄마가 무슨 신기한 보석이라도 보는 듯이 배불뚝이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대학도 그럼 거기를 나왔겠네? 거기, 거기 대학 말이야.”

이번에도 채리 아가씨가 낼름 대답했다.

“엄만. 그렇대두. 그 대학 안 나오고는 ○○기업에 들어갈 수가 없죠. 곧 일본이나 미국 지사로 나갈지도 모른대요.”

그래 놓고 채리 아가씨는 배불뚝이를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프랑스에도 지사가 있다고 그랬죠?”

배불뚝이는 유치한 개그를 늘어놓던 그 교양 없는 말씨를 숨기려는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채리 아가씨는 황홀한 표정이 되어 있었고, 나는 비로소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실망과 절망 속에 빠져버렸다. 배불뚝이가 일류 대학을 나오고 일류 회사의 대리라는 자리에 있다는 것이 바로 채리 아가씨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본문 중에서>


요즘 우리들이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은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 즉 “돈 있고 권력 있는 자는 죄를 지어도 벌을 안 받고, 돈 없고 빽 없는 사람은 죄가 없어도 죄인처럼 산다”는 말이다. 이야기 안에서 배불뚝이가 채리 아가씨의 가족들에게 실질적으로 해준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가족들은 마치 커다란 은혜를 베푼 사람을 대하듯 고분고분하다. 배불뚝이 또한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고양이는 배불뚝이와 종족이 달라 아무런 관습도 공유하지 않는다. 단지 배불뚝이가 하는 말과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게 된다. 일류 대학과 대기업이란 것이 고양이에게는 우습기만 하다.

우리는 미천한 고양이의 ‘눈’이라고 무시해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한번이라도 서 있는 현실과 거리를 두고 본 적이 있을까. 한번이라도 자기 자신을 냉정하게 평가해본 적이 있는가.

우리와 전혀 다른 고양이의 눈, 우리와 전혀 다른 외국인의 입장, 아직 때 묻지 않은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자신의 모습을 본다면 우리는 어떻게 비춰질까.

우리들이 ‘일류대’라 하며 떠받드는 대학들은 세계 대학 순위 100위권에도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야말로 우물 안의 승자인 셈이다. 지식과 역량은 개인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기 때문에 학교의 서열은 종래에는 큰 의미가 없다. 

좋은 직장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되고 싶어하는 정부 고위 공무원이 OECD에 파견갔다가 크게 망신을 당했다고 한다. 기본적인 영어 회화와 작문이 되지 않아 함께 일하기 힘들다며 한국 정부에 불만 가득한 공문을 보낸 것이다. 배우지 못하고 못사는 사람들 앞에서는 떵떵거릴 수 있지만, 세계에서는 당당히 고개조차 들 수 없는 것이다.

제시문 1에서는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일상의 한 단면을 사실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연극을 하고 있는지 깨닫게 해준다. 여기서는 이상과 현실의 이중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일류대, 일류 기업의 꿈은 나의 꿈인가 다른 사람의 꿈인가. 다른 사람의 무상한 꿈에 내가 힘겹게 매달려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진정한 나의 꿈은 무엇일까. 배불뚝이가 가족에게 공언한 ‘채리 씨의 행복’이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채리 씨는 과연 행복할까. 여러 가지 의문이 중첩되며 전달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채리 씨는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채리 씨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행복’이 아니라 ‘나의 행복, 채리 씨의 행복’에 대해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들의 행복은 저당 잡혀 있는 셈이다. 별 볼 일 없는 통념 안에.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제시문 2

내 옆에는 늘 채리 아가씨가 있었고 나는 외롭다거나 불안하다는 등의 절박한 심정을 가져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는 사이 나는 내가 지키고 있어야 할 고양이로서의 야성을 많이 잃었다.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는 손길에 내 감각은 무디어졌고, 맛있고 부드러운 먹이에 내 이빨과 발톱은 녹이 슬었다.

내 어머니 아버지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 할아버지 할머니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야성이 내게 아직 남아 있을까?

나는 명상에 잠긴 채 몸을 뒤척이며 채리 아가씨의 식구들이 모여서 터뜨리는 요란한 웃음소리를 들었다. 외로웠다. 온몸의 신경이 외로움으로 꽁꽁 얼어붙은 듯했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나 혼자 이 넓은 우주에 내동댕이쳐질 날이 오리란 것을 왜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까.

날이 밝자 식구들은 아침 일찍 찾아온 친척들과 어울려서 채리 아가씨를 데리고 모두 나가버렸다. 결혼식에 가는 모양이었다. 채리 아가씨의 결혼식에는 나도 꼭 참석해서 축하해 주고 싶었지만 아무도 신경을 써주지 않았다.

사람들이란 자기들 필요할 땐 뭐든 다 빼줄 것처럼 하지만, 일단 마음이 돌아서면 순식간에 그것을 헌신짝처럼 내던져버리기도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쓸 만한 가구나 가전제품들을 함부로 내버리는 걸 보면서,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버려지는 고양이나 개, 다른 애완동물들을 보면서도 해보지 않았던 생각들이 그제야 스멀스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운명은 흐르는 물과 같고, 그 물은 험난한 고비와 울퉁불퉁한 기복을 만나면서 흐르게 되어 있듯이, 나에게도 언젠가는 이런 일이 닥칠 수 있다는 것을 왜 진작 생각해 보지 못했을까.

사람이란 고양이보다 더 변덕이 심해서 아무리 좋아하는 것이라도 언젠가는 짜증을 내고 만다는 것을 알고 있기는 했지만, 고양이는 몇 십 년을 함께 살아도 결코 싫증나지 않을 존재라고 나는 너무 굳게 자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고양이는 개처럼 시종일관 충직하지도 않고 새나 열대어처럼 멍텅구리도 아니다. 우리는 감정의 표현에 충실할 뿐 아니라 상대방의 반응에도 민감하다. 변화무쌍하고 시시각각 다른 기분을 연출해서 사람들을 심심하지 않게 해준다. 그것이 고양이로서 내가 가진 자부심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나는 고양이인 나 자신을 믿었고, 채리 아가씨에게는 내가 꼭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런데 역시 나는 혼자 사는 아가씨의 심심한 시간을 채워 주던 존재에 불과했던 것일까.

가족들 모두 결혼식장으로 몰려간 텅 빈 집에서 그렇게 잊혀지고 버려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자 으스스 몸이 떨렸다. <본문 중에서>


제시문 2는 우리에게 ‘다른 사람과의 관계, 우정, 사랑’, 그리고 ‘나의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게 해준다. 채리 아가씨의 따스한 손길 안에서 고양이의 감각은 무뎌지고 이빨과 발톱은 녹이 슬어버렸다. 고양이는 온데간데없고 하나의 장난감만 있을 뿐이다. 우리는 집에서 어머니가 차려주는 밥상을 당연하듯 챙겨먹고 살이 뒤룩뒤룩 쪘다. 아버지가 주시는 용돈으로 비싼 게임 프로그램이나 사치스러운 장식품, 옷가지 등으로 몸을 감싼다. 운동량은 없고 공부 몇 시간 하면 나의 일과는 끝이 난다. 나도 장난감이 되어가는 것이 아닐까. 내 스스로에 의해 하는 일은 몇 가지나 될까. 나는 나의 주장을 제대로 펼칠 수 있을까. 나의 신념에 따라 행동할 수 있을까.

사랑은 그 사람을 마냥 행복하게 한다거나, 쾌락만을 주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곧게 세상에 설 수 있도록 자립심을 키워주고,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 아닐까.

언젠가는 나도 고양이처럼 현실에 내던져질 것이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따뜻하고 배불리 잘 지내오다 갑자기 현실의 벽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게 될 것이다.

“우정이란 두 육체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라고 그 옛날 아리스토텔레스 할아버지는 말하지 않았던가. 채리 아가씨는 우리의 고양이를 진정으로 사랑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적적하고 외로운 마음을 채우는 데 고양이를 이용하였을지도 모른다. 외로움을 달래줄 사람이 나타나면 더 이상 같이 있을 이유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 ‘우정’이나 ‘사랑’은 아니다.

고양이도 몹시 후회한다. 아끼고 쓰다듬어주는 사람 앞에 너무 쉽게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한 셈이다. 고양이가 고양이인 이유는 남다른 야성과 감각, 날카로운 발톱에 있다. 야성도 정체성도 매번 환기되지 않으면 낡고 녹슬게 된다. 자기 자신이 있고 나서 다른 사람과의 우정이 성립된다. 나의 영혼과 성격, 적성과 개성을 깡그리 버리고 그 사람을 좇겠다는 것은 나를 포기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사람과의 사랑까지도 포기하는 셈이다.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의 장점을 북돋아주고, 커다란 단점이나 좋지 않은 습관이 있을지라도 시간을 두고 고쳐나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스스로 설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사랑과 우정이 아니라 ‘독’을 안겨주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

이 제시문에서는 진정한 사랑과 우정, ‘관계맺기’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랑과 자유, 그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


#제시문 3

하지만 나는 채리 아가씨를 생각하면서 갈색 고양이에게 말했다.

“나는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과 같이 살고 있어. 그것도 나쁘지 않아. 넌 누가 사랑해주니?”

“사랑? 난 혼자야.”

“혼자라고?”

“그럼.”

“누구를 사랑하지도 않고?”

“사랑하게 되면 자유를 잃어버려. 고양이는 자유야.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모두를 사랑하는 것이지. 그게 자유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뭐가?”

“사랑하지 않는 게 사랑하는 일이 된다니 말야.”

“그건 네가 사랑이란 걸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야. 사랑은 혼자 가지거나 누구로부터 얻어서 가지는 게 아니야.”

“가질 수 없다면 사랑이 무슨 소용이 있어?”

“지금은 내가 뭐라고 해도 이해가 잘 안 갈 거야. 네가 홀로 설 수 있을 때, 그때 자연스럽게 알 수 있을 거야.”

“난 그러고 싶지 않아. 홀로 서고 싶지 않아.”

나는 갈색 고양이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홀로 선다니. 채리 아가씨가 결혼식을 치르고 신혼여행을 떠나고 하던 때를 생각하면 두 번 다시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잠이 잘 안 온다며?”

“그렇긴 하지. 그래도 그건…….”

“그래. 그건 밤이 되면 고양이의 야성이 발동하기 때문이야.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말야, 네가 지금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야.”

“난 만족하고 있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말 하지 마.”

“어쨌든 지금부터 가끔 홀로서기 연습을 해 보는 것도 생각해 봐. 방랑자로 사는 재미가 어떤 건지 알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갈색 고양이는 말을 마치더니 휑하니 사라져버렸다.

……

어떻게 숲으로 간단 말인가. 그렇지만 나는 다시 돌아갈 곳이 없었다.

‘이제는 혼자야.’

‘아무도 없어.’

머릿속에 떠오르는 혼란한 생각들을 잠재우려고 되도록 한곳으로 생각을 집중시켰다. 방음벽 꼭대기로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혼자라는 것은 무얼 의미하는 걸까?’

‘아무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는 것.’

‘사랑할 사람이 없다는 것.’

‘홀로 서야 한다는 것.’

위험한 고속도로를 자유롭게 건너다니는 갈색 고양이 방랑자의 말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고양이는 자유야.’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자유를 잃게 돼.’

그랬다. 나는 혼자가 되었고, 자유였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잃어버렸던 자유, 채리 아가씨를 사랑하면서 잃었던 자유를 마침내 되돌려 받게 되었던 것이다.

채리 아가씨와의 이별로 얻게 된 외로움과 안타까움 사이로 자유라는 새로운 공기가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보니 외로움과 자유는 둘이 아니라 하나였던가 보다.

새로운 공기, 새로운 삶.

나는 방랑자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갑자기 혼자가 되고, 갑자기 자유를 얻어낸 내게는 조언자가 필요했다. 방랑자를 만나면 물어봐야 할 게 많은 것 같았다. <본문 중에서>


우리는 진정 자유를 원하지만, 사실 자유를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발톱을 다듬고 야성을 기르고, 정체성을 지켜나간다는 것은 괴롭고 힘든 과정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안락함’에 빠져들곤 한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사랑을 잃는다”는 건 무슨 말일까. 그리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모두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은 또 뭘까. 자꾸 문제가 복잡해지고 어려워진다. 그것은 ‘자유’의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일까 그 사람의 ‘무엇’을 사랑하는 것일까. 진정으로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감싸는 모든 환경들보다 그 사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나를 둘러싼 주위의 모든 조건들에서 자유로울 때 진정한 사랑은 가능하다.

“자유는 비용을 치러야 한다”는 말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수월할 것이다. 고양이는 자유를 저당 잡힌  채 사랑 아닌 사랑을 하다가 쓸쓸히 버려졌다. 하지만 버려짐으로써 자유를 되찾게 되었다. 말하자면 너무 많은 비용을 지불했다. 고양이가 ‘사랑’으로 착각한 것은 사실 사랑이 아니었다. 때문에 앞의 말을 풀어서 쓰면 “사랑 아닌 사랑을 하게 되면 진정한 사랑을 잃는다”고 표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유’란 무엇일까. 무엇이길래 이토록 많은 것을 지불해야 하는 것일까. 사실 고양이가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나가면서 사랑을 했더라면 사랑도 자유도 지킬 수 있었고, 쓸쓸히 버려질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사람은 ‘의미 없는 것’을 사랑하기 쉽고, ‘무상한 것’에 마음이 쏠리기 쉽다.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사람은 “그 동안 쓸데없는 곳에 공력을 들여 왔다”고 한탄하는 것을 우리는 자주 보게 된다. 어떤 것이 의미 있고, 어떤 것이 무상한 것인지를 알아내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의미 있는 것’을 찾기 어려운 이유는 ‘자신의 눈’으로 보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눈이나 통념을 통해 그것을 판단하려 하기 때문이다.

고양이처럼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깨닫는다면 오히려 다행이다. 한평생 살면서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우리는 ‘자유와 방종’, ‘자유와 책임’을 이야기하지만, ‘자유와 비용’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인생은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기회를 잃어버리고, 자유를 버리는 것은 순전히 자신의 책임이다. 누군가를 위해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는 것이기 때문에 ‘책임’이라는 말은 온당하지 않다.

이렇게 ‘자유’라는 의미를 알고 있다면 고양이처럼 크게 혼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사랑은 ‘노예상태’나 다름없다. 그것은 자신의 권리와 존재가 없는 사랑이므로, ‘장난감 사랑’이다. 나는 나인가 장난감인가. 나는 자유롭고 개성 넘치고 정체성을 확립한 자아인가, 타성에 젖어있고 끌려다기만 하는 ‘장난감’인가.

고양이가 방랑자를 찾는 이유는 명백하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알려줄 수 있는 친구가 ‘방랑자’이기 때문이다. 고양이는 방랑자에게 사랑과 자유에 대해서 다시 물어볼 것이다.


사랑은 함께 하는 것


#제시문 4

나비가 아직 그 사람들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 것 같아 나는 걱정이 되었다.

“아마 그럴 거야. 요즘은 비행기를 타고 멀리 이민을 가기도 하니까. 이젠 안 기다릴 거야?”

“그럴 작정이야. 좀 더 기다릴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이 이사를 왔거든.”

“그 사람들이 널 내쫓았니?”

“쫓겨난 건 아니야. 내가 그냥 나왔어.”

나비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안 봐도 눈에 선했다. 전에 함께 살았던 파마 아줌마처럼 몽둥이를 들고 나비를 밖으로 내쫓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이제 자유를 찾은 거네.”

“그런 셈이지. 하지만 좀 혼란스러워.”

“첨엔 나도 그랬어. 곧 익숙해질 거야. 전에 살던 집 얘기나 좀 해봐.”

나비는 조금 슬픈 표정을 짓더니 그 사람들이 아직 그립다는 듯이 말했다.

“동물을 아주 사랑하는 좋은 사람들이었어. 재롱둥이 푸들, 아침마다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는 하얀 문조, 열심히 헤엄치며 돌아다니는 열대어와 함께 살았지.”

“그 많은 동물들과 한 집에 살았다니, 야, 대단했겠구나.”

나는 나비의 기분을 돋우어 주려고 소리까지 질렀다. 그 많은 동물들이 한 집에서 산 건 분명 신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물들을 사랑해서 그랬을 거란 나비의 말에는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자기보다 남을 더 사랑하지 않는다. 남을 사랑하거나 남을 위해 봉사한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도 실은 자기 감정에 충실히 따르고 있을 뿐이야. 채리 아가씨가 그랬고 배불뚝이가 그랬고 영은이가 그랬고 파마 아줌마가 그랬다.

……

“걱정하지 마. 우리끼리 잘 살 수 있어. 사람들 때문에 그걸 아직 잘 모르고 살았던 거야. 우리에게는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능력들이 많이 있거든. 뭐가 걱정이야. 그리고 …… 내가 있잖아.”

내 가슴은 알 수 없는 무엇으로 차오르고 있었다. 나도 이제 누군가의 울타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벅차게 했다. 사랑이란 누군가의 햇볕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의 그늘이 되기도 하는 것인가 보다.

나는 앞으로 닥칠 시간들에 대해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는 나비에게 햇볕이 되고 그늘이 되어줄 자신이 있었다. 사람이나 고양이나 암컷은 자신 외에도 다른 생명을 키우는 본능이 있으니까. <본문 중에서>


하나의 촛불이 만 개의 촛불을 다 밝혀도 맨 처음의 촛불은 꺼지거나 어두워지지 않는다. 그것이 사랑이다. 베풀면 베풀수록 커져만 가는 것이 사랑의 모습이다.

나비는 고양이의 남자친구이다. 고양이처럼 사랑 아닌 사랑을 하다가 방금 쫓겨났는데, 안타깝게도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부질없는 기다림과 배신감에 치를 떨고 나서는 차차 차가운 현실을 자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 시점에서 조언자를 만난 것이다. 고양이는 조언자를 찾았지만, 운명은 아리송하게도 고양이를 조언자로 만들어 버렸다.

고양이에게는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해줄 친구가 생긴 것이다.

이제는 앞에서 해결하지 못했던 물음에 대답할 시간이다.

“사랑 아닌 사랑을 하게 되면 진정한 사랑을 잃는다”

우리는 사랑 아닌 사랑은 알았지만, 진정한 사랑을 알지는 못한다. 어떤 것이 진정한 사랑일까. 자유와 정체성을 잃지 않는 것은 사랑을 받기 위해서도, 사랑을 하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두 번째 물음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모두를 사랑하는 것”이 그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다. 앞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은 아닐 것이다.

‘사랑 아닌 사랑’은 누군가의 개성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말한다.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진정으로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감정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소중한 것을 배려하는 것을 ‘할애(割愛)’라고 한다. 자유에도 비용을 치르듯이, 사랑도 비용이 든다. 사랑하는 사람이 들어올 만큼의 자리를 비워줘야 한다. 남을 위해 자기 것을 비우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현실에서 ‘진정한 사랑’이 어려운 것이다.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박애(博愛)’의 정신이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자기 주위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 배려하고 아끼는 것이다. 나의 사랑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전달되고, 그것이 모든 사람을 연결할 때 비로소 ‘박애’가 실천되는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고양이의 몸을 빌려 ‘진정한 사랑’과 ‘진정한 자유’에 대해서 생각해 왔다. 많은 사람들은 고양이처럼 자아를 상실하고 관습에 젖어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양이가 자아를 찾고 자유를 찾기 위해 치러야 하는 것은 비용만이 아니다. 다른 집에서 충분히 안락하게 살 수 있었던 기회를 박차고 차가운 야생의 숲으로 돌아간 것은 커다란 ‘용기’였다. 나의 안락한 생활을 뒤로 하고, 진정한 자유와 사랑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가 어머니의 탯줄을 끊고 세상으로 뛰쳐나온 것조차도 대단히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현실의 벽은 나를 감싸고, 안락함은 우리를 유혹한다. 나는 나의 이름으로 세상을 살아갈 권리가 있으며, 온갖 옳지 않은 것들을 배척할 의무가 있다. 용기 있는 사람만이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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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롱이 2007-02-04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식의 글쓰기 - 독서논술문 - 괜찮겠는데요. 특히, 제시문을 통한 독서논술문이 신선하네요. 담아갑니다. 감사~.

승주나무 2007-02-04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롱이 님//안녕하세요. 예전에 썼던 원고입니다. 논술은 어디까지나 독서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이상하게 독서와 연계하려는 시도는 너무 더디네요. 한번 고민해 볼려구요^^
 
김유정 전집 2 - 소설, 문학
김유정 지음 / 가람기획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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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선 '유정'이라고 부르는 나의 오만불손함에 대해 항변코자 한다. 내게 있어서 유정은 '점순이'나 '이쁜이'처럼, '암팡스럽'거나 '숭글숭글한' 인물이다. 그것은 이야기 속에서 언뜻언뜻 비추는 그를 자주 접하게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유정을 접하게 된 계기는 어느 계간지에서 이문구(李文求)의 고백을 접하고 나서이다.

'언어는 유정에게 배우고, 정신은 동리에게 배웠지.'

이 말이 내게는 새삼 큼직하게 다가왔다. 일전에 유정의 소설 몇 편을 선배의 권유로 읽어본 일이 있어서 사뭇 공감이 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결심이 유정의 전작품을 읽고 입말공부도 하고, 작품세계도 탐구해 보는 것이었다. 그것은 물론 소설을 쓰고 싶은 문학도로서 임하는 탐구였다. 때문에 이 글은, 유정의 특정한 작품을 읽고 나서 쓰는 감상문이라기보다는, 유정의 작품들과 알려진 유정에 대한 사실을 토대로 쓰는 '김유정 감상'의 특징을 가짐을 미리 부언하는 바이다. 아직은 그의 전작품 중에 반 정도밖에 소화해내지 못했지만, 그의 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국어사전은 물론, 대사전에다 별도로 김유정어휘사전도 참고를 해야만 했다. 그렇게 생소한 토속어 한자 한자를 찾아 읽으면서 얻은 것은 어휘뿐만이 아니었다. 4년 동안에 발표한 소설 치고 그의 소설에는 8천여 개의 어휘와 그 중에서도 83%이 토박이 말임을 알 수 있다.그것은 유정이 의도적으로 자신의 이야기에 토박이말을 담아냈다는 점을 말해준다. 여기서 유정이 소설을 쓰는 이유를 엿볼 수 있다.

작가마다 소설을 쓰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무지한 대중을 계도하기 위해서 쓰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최고 지성의 가능성을 시험해보고 고매한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글쓰기, 시대를 증언하기 위한 글쓰기도 있을 것이다. 유정의 경우는―썩 적합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세 번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서 있는 시대와 공간을 되도록 진솔하게 담아내고 싶어했던 것 같다. 거기에 들어가는 요소로서 토박이말이 있다. 그렇다고 유정이 우리말만을 숭상한 것은 아니다. 지역사회에서 쓰는 말이라면 일본어, 다른 외래어라도 가리지 않고 써넣었다. 그러나 유정에게서 언어만을 배워간다면 그것은 반도 못 배운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그가 쓰는 언어는 그가 만들어낸―정확히 표현하자면 묘사해낸―인물들에 의해서―개성과 운명 등에 의해서―생명을 가지게 된 것이다. 때문에 김유정의 농촌은 그것이 가진 사회역사적 본질에 의해 매개되지 못한 채 묘사됨으로써 일정한 한계를 가진다등 여타의 비판은 설자리를 잃게 된다. 지역사회의 이해라는 것은 그 안의 구성원이 관찰하고 세심하게 기록해 놓은 자료를 토대로, 그 안에서 특징들을 추려내어 이론화시킬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 사회역사적 본질이라는 말뜻도 이해키 어려운 척도로 가늠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렇게 이해된 지역사회의 본질이라면 그만큼 협소해질 수밖에 없다. 유정은 인물들의 행위와 성격을 직접 평하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행위를 관찰하고 꼼꼼하게 묘사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직접 그들을 평가한 어떠한 말보다 더욱 가깝게 그들의 사회역사적 현실을 보며, 더불어 함께 웃을 수도, 가슴아파할 수도 있게 되었다.

우리는 유정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의 입심에 넘어가기는 하지만, 그의 세계에 함몰되는 것은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유정은 우리를 함몰할 세계를 가질 만큼 독단가는 아니다. 오히려 인물들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한 걸음 물러난 숙연한 기록자로서 유정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춘호'나 그 밖의 여러 이름들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인물들의 안정감에 있다. 그들은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이웃이며, 그 시대에 엄밀히 존재했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유정의 소설에서는 창조적 인물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인물들을 누르는 운명의 무게가 너무 크기 때문에 인물들의 발버둥질이 더욱 애절하게 와 닿을 뿐이다.

우리는 유정이 대학을 다니다가 고향으로 내려왔을 적에 자신이 시대와 사람들에게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무척 고민을 했던 사실을 접할 수 있는데, 그 후에 야학을 시작했다고 한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그림을 연상할 수 있었다. 야학을 하며 문맹인 이웃들을 가르치는 유정의 가슴속에는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그도 글자를 가르치며 아름다운 우리말에 충분히 세례를 받았을 줄로 안다. 여기서 그가 선택할 수 있었던 길이나 시대적 조건, 주위 환경 등을 그려보는 것은 예비작가로서 나에게 하나의 큰 가르침이 된다. 즉, 자신의 힘과 시대를 두고 진지한 대화를 했던 순간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하면서도 유정다운 가르침은 바로 그의 이야기와 인물들을 통해 볼 수 있는 유정의 '사람됨'이다. 유정이 단순히 지식인이었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이쁜이가 그에게 속맘을 비춰줄 수 있었을까? 그야말로 촌스럽게 '점순이'가 '봄감자'로 사랑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 유정의 사람됨과 닮게 유정의 인물들 중에 악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다 못해 '뚝건달 뭉태'도 악인은 아니다. 유일한 악인이라면 인물들을 기형적으로 변질시키고, 위에서 내리누르는 사회이며, 시대이며, 지겨운 운명이다. 때문에 유정의 모든 인물들은 운명의 피해자들이다. 그리고 개중에 몇몇 불쌍한 사람들은 피해자들의 피해자들이기도 하다. 유정은 악인을 따로 상정하지 않고서도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얼마 안 되는 소설가이다. 이 점은 내게 있어서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갈등과 긴장은 언제나 선악의 대립에 의해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주인공들이 대립해야 할 필요도 없다. 유정의 인물들은 모두 같은 방향에 서서 '드러나지 않은 악'을 쳐다보고 있다.

이쯤 되면 내가 이 글의 서두에 왜 이문구의 고백을 집어놨는지 눈치를 챘을 줄 안다. 요컨대 내가 유정에게 배운 것은 아름다운 우리말이지만, 그 한 단어 한 단어에 풍성한 생명과 가치를 부여하는 유정의 정신을 배웠다. 그것은 작가 개인의 불순물을 남겨놓지 않고 제 몸을 녹여서 만들어낸 순수 결정체의 정신이며, 그 이면에, 숙연하지만 자신이 할 말을 놓치지 않고, 그것을 소설의 그릇에 온전히 담아내는 작가로서의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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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예술가의 초상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9
제임스 조이스 지음, 여석기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그러고 보니 문학책을 안 읽은지 너무나 오래된 것 같다. 나의 관심은 오로지 역사 아니면 철학, 과학에 머물러 있었다. 언어를 빌려 생각 위에 껴입는 것 말고, 언어 자체에 경의를 표하는 것은 문학이다. 문학은 언어의 심장이다.

나의 언어가 무미건조해졌다면 순전히 그것은 문학을 멀리한 까닭이다. 다행히 교양 과학과 교양 철학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문학적 수준이 빼어나므로, 최악의 '결핍'은 피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문학 리뷰'를 하나 써보려고, 예전에 읽었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하루 종일 뒤적였다.

의식의 흐름, 늘어지는 장문의 문장, 비타협적인 인생, 과작, 마음에 안 맞으면 원고를 통째로 태워버리는 화끈함 같은 키워드로 유명한 제임스 조이스의 태생은 우리와 흡사한 점이 있다. 영국이라는 나라 주위에는 스코틀랜드도 있고 아일랜드도 있는데, 그것은 일본이라는 나라 주위에 조선이 있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대단한 문제 의식을 담은 그의 문장은 역설적이게도 정치적인 것을 배척한다. 자신의 문학이 독립운동의 일환인 문화운동의 수호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 역시 자신의 완성된 문학을 위해 절대 고독의 오지 속으로 들어갈 각오가 되어 있었다.

 크랜리는 다시 정색으로 돌아와 걸음걸이를 늦추면서 말했다.

“고독, 진정한 고독, 자네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게 정말 무슨 의민지 아나? 다른 모든 사람에게서 멀어질 뿐만 아니라 친구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이야.”

“그래도 난 해."

스티븐은 말했다.

“그리고 단 한 사람도 친구 이상이 될, 아니 일찍이 어느 누구도 가져보지 못한 가장 고귀하고 진실한 친구 이상이 될 그런 사람마저 갖지 않겠다는 말인가.”

크랜리는 말했다.

이 말은 그의 본성 깊이 숨어 있던 어떤 마음의 금선(琴線)을 건드린 듯이 느껴졌다. 이 친구는 자기 자신에 대해, 현재의 자기나 장차 되었으면 하는 자기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닐까? 스티븐은 잠자코 얼마 동안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싸늘한 슬픔이 거기 고여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못내 두려워하는 자신의 고독을 말한 것이었다.

“자넨 누구 얘기를 하고 있나?”

스티븐은 이윽고 물었다.

크랜리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 본문 중에서. 여기서 크랜리는 극중 주인공인 스티븐 디달로스의 동료이자 젊은 시인이다.

주인공 스티븐 디달로스는 장인 다이달로스의 정신적 아들이자, 아일랜드의 민족적 아들이며, 가톨릭의 종교적 아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괴로움을 껴안는다. 그의 아버지들은 각각이 너무나 성격을 달리하고 있으며, 자신의 정의에 맞게 아들을 몹시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스티븐이 아일랜드의 독립투사였더라면, 오직 가톨릭을 숭앙하는 독실한 크리스챤이었다면 이 이야기의 갈등은 1/10로 확 줄었을 것이다.

크랜리는 별안간 솔직하고 분별 있는 어조로 물었다.
“솔직히 얘기해줘. 내가 말한 것에 조금이라도 놀랐나 말이야.”
“약간은.”
스티븐은 말했다.
“그럼 왜 놀랐나? 우리네 종교가 가짜고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확신한다면 말이야.”
크랜리는 같은 어조로 따지고 들었다.
“그런 확신은 전혀 없어. 예수는 마리아의 아들이라기보담이야 하느님의 아들 같지.”
스티븐은 말했다.
“그게 성찬을 받지 않는 이유란 말이지. 즉 거기 대해서도 확신을 못 가지니까, 면병은 단순한 빵 조각이 아니라 성자의 살이며 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혹 그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으니까, 그렇단 말이지.”
크랜리는 물었다.
“그래. 그런 느낌도 들고 또 거기 대한 두려움도 있어.”
스티븐은 찬찬히 말했다.
“알겠네.”
스티븐은 크랜리가 그만 따지려 하는 기색을 느끼고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면서 말했다.
“난 두려운 게 많아. 개, 말, 총포, 바다, 뇌우, 기계, 밤의 시골길.”
“그렇다면 빵 한 조각이 뭐가 무서워?”
“그건 아마 내가 무서워한다는 그런 것 뒤에 무슨 악의에 찬 진실이 숨어 있는 것 같아서 그럴 거야.”
스티븐은 말했다.
“그럼 공경하지 않는 영성체를 받으면 로마 가톨릭의 신이 자네에게 벼락을 내리고 지옥에 떨어뜨리지나 않을까 걱정이란 말이지?”
크랜리는 물었다.
“로마 가톨릭의 신은 지금이라도 그쯤은 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오히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배후에 2천 년의 권위와 숭배를 쌓아올린 상징에 대한 거짓 예배를 함으로써 내 영혼 가운데 일어날 화학 반응이야.”
스티븐은 말했다.
……
“나는 신앙을 잃어버렸다고 말했지만 자존심까지 버렸다는 말은 안 했어. 논리적이고 전후 일관한 부조리를 버리고 비논리적이고 전후가 일관하지 않은 부조리를 받아들인다면 그게 해방이 될 수 있어?”
- 본문 중에서

어린 시절, 학창 시절, 대학 시절로 거슬러 오면서 문체는 그에 걸맞게 변모한다. 환상과 호기심, 경건함으로 이루어진 유년 시절에 보았던 그림들과 들었던 이야기는 미래를 향한 지표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스티븐은 그 지표와 다시 맞닥뜨린다.

욕정과 종교적 금기 사이에 짓눌려 압사의 위기에 처했던 학생 시절의 처참한 몸부림은 아직도 독자인 나를 피로하게 한다. 젊은 시절의 우정과 사랑, 자유와 예술, 사상과 자조의 단계들은 누가 설정하는 것인가. 스티븐은 자신에 맞게 하는데 얼마나 커다란 희생을 치렀던가.

이 책은 여러 개의 문장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가지런히 놓여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치한 압축을 시도하였다. 때문에 이 작품의 '주석서'가 또 이 분량으로 있을 정도이다.

나는 이 책으로 인해 문학적 에너지를 다시 충전하는 기회로 삼고, 얼른 '율리시스'로 치닫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문학은 아름답고 신비로운 성과 같으며, 거기에 사는 언어들은 뭐가 생김새나 행동거지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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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 상 -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월
평점 :
절판


신을 향한 가능성을 추구했던 이 시대의 아들, 불신과 회의의 아들



  젊은 때는 여러 가지 관념이 믿을 수 없으리만큼 몰려들어서 시끄럽게 머리 속을 울리고 있지만, 그 하나하나를 모조리 포착하여 성급하게 발표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더욱 종합되기를 기다리고 더욱 충분히 사색함으로써, 즉 하나의 관념을 형성하고 있는 수많은 개개의 세부가 자연히 하나의 핵으로까지 응집하여, 한 폭의 당당한 큰 화면을 이루게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붓을 들고 써 내려가야 하는 것이며, 그 이전에는 붓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거장이 창조하였던 위대한 인물들은, 이따금 긴 긴 집요한 노력에서 탄생된 것입니다.
-도스또옙스끼, J.R. 마리의 '도스또옙스끼의 문학과 사상'-

―서론―
  비가 가늘게 내리는 날이다. 라스콜리니코프와 그 주변엔 항상 이런 기운이 감돌았다. 내 옆에는 그의 소설집과 비평서, 그리고 여러 잡다한 인용문이 쌓여져 있다. 하루에도 수십 번이나 쓰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음에도 억제하려고 애쓴 이유는 위의 인용문이 말해주고 있을 것이다. 처음에 작가탐구를 쓰려고 계획했을 때, 나는 《악령》을 읽고 있었다. 그 숨가쁘게 진행되는 스토리와 치밀한 짜임, 그리고 독자들의 내적 억압을 보기 좋게 허물어 버리는 그의 적극성에 반해 도스또옙스끼로 작가를 정했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그 크기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장엄한 작품 앞에 나의 존재가 무색하기까지 했다. 글을 써낸다는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그때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그에 관한 방대한 자료들 중 내 수중에 있는 것만이라도 소화를 해내려 생각했고, 그것을 이루는 데도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우선 작가탐구라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자신의 기호에 맞는 작가를 선정하여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자신의 세계 안에서 표현해 내는, 즉 작가를 통하여 자신의 내적인 성숙을 이끄는 계기가 되는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작가에 관한 글은 여러 가지 비평서나 다른 소설에까지 충분하게 실려 있다. 그것을 얘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필요한 것은 작품의 바다에서 자신이 지니고 있는 '표현'이라는 두 팔을 이용해서 마음껏 헤엄치는 것이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언어의 돌부리를 짚고 헤엄치는 것은 헤엄이라는 자체로서도 의미 없는 일이다. 그런 관점에서 나의 작가탐구는 이루어졌다.
  본격적인 글을 써나가게 되면 도스또옙스끼 자신의 이야기보다 그가 만들어 낸 인물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게 될 것이다. 그는 그만큼 자기 주인공들에게 견고한 생명력을 부여했기 때문에 그의 소유물이나 개체가 아닌 한 주체의 입장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인명을 표기할 때는 다소 통일성을 갖추지 못할 경우도 있다. 가령 스따브로긴이라 표현하기도 하고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카라마조프라고 표현하기도 할 것인데, 이는 필자가 경험했던 원서에 근거를 둔 것이다.
  그는 수많은 작품을 썼지만 여기서 이야기될 것은 《악령》, 《카라마조프가 형제들》, 《죄와 벌》 이 세 소설이라는 점을 참고하기 바란다.
―본론―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옙스끼1)는 엄격한 아버지의 그늘과 명랑하고 예술에 조예가 깊은 어머니의 사이에서 자라왔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성서를 읽으며 글을 깨우쳤다. 작고 어린아이가 성당의 천장에서 새어나오는 빛을 보며, 손에는 자기 무게보다 무거움 직한 성서를 메고 낑낑거리며 탁자 위에 커다란 책을 깔고 읽어 내려가는 묘사는 《카라마조프가 형제》에서 조시마 장로의 유년 시절에 대한 기록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런 유년시절이 이미 도스또옙스끼의 작품의 주된 테마인 신앙과 무신론과의 정면승부와 그 내면에 깔린 더욱 무서운 무관심과의 치열한 투쟁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그 따위 신앙 쪽이, 뭐라 해도 완전한 무신앙보다는 존경할만한 것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뿐만 아니라, 완전한 무신앙 쪽이 속세의 무관심한 태도보다 훨씬 존경할 만합니다."
 - 악령 -

  우선 《죄와 벌》, 《악령》,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을 한꺼번에 개략(槪略) 해보기로 하겠다. 왜냐하면 이 세 소설에서는 특히 살인 사건이나 법정의 기록 등 인간 영혼의 암흑면이 소설의 주된 뼈대를 형성하는 공통점이 있지만, 도스또옙스끼의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어떤 도식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등장인물의 성숙, 혹은 변형을 특히 다루고자 하기 때문이다.

  라스콜리니코프라는 청년은 자신의 이성을 과신해서, 범인(凡人)과 비범인(非凡人)의 논리로 급기야 '이'같이 남의 피를 빨아먹는 노파를 살인하고 그를 의심하는 경찰과 검사와는 숨막히는 대결을 벌인다. 그가 죽인 것은 하나의 주의였지만 그걸 뛰어넘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다만 할 수 있었던 것은 살인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에 술집에서 만난 '가난은 죄가 아니지만 아주 찢어지게 가난한 것은 죄'라고 말한 마르멜라도프의 딸 소냐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빈민굴에서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더없이 치욕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순결한 마음을 간직한 채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경건한 인물이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감화를 받은 라스콜리니코프는 꺼져 가는 촛불 아래서 가련한 매춘부가 읽어 주는 성서의 한 귀절―나사로의 부활을 들으며 자기 죄를 고백한다. 그에게 그녀는 하나의 선고였다. 마침내 범행을 자백하고 수용소에서 복역하지만 그는 자신이 사회적인 의미의 죄인일 뿐, 잘못한 것은 없기 때문에 상처받는 긍지를 괴로워한다. 하지만 라스콜리니코프가 돌연히 소냐를 포옹하고 갱생을 맹세함으로써 이야기는 끝이 난다.
―요약 "죄와 벌"―
  천성적으로 예리한 지력(智力)과 인생의 근본적인 의의를 굶주린 듯 탐구하려는 마음을 타고난 스따브로긴은, 일찍부터 스쩨빤 뜨로피모비치의 자유주의적인 교육으로 말미암아 무신론적인 경향으로 흘렀고, 격한 성격이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처럼 자아의 의지 이외에 어떠한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철두철미한 개인주의자의 황량한 산정(山頂)까지 올라갔던 것이다. 속세의 습관, 도덕, 양식은 말할 것도 없고, 법률까지도 무시하여 자기의 의지를 한없이 밀고 나갔고, 왕성한 육체적 욕망을 위해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 인물인 스따브로긴은 끊임없는 두뇌조작에 의해서 진로를 개척하려는 인간으로 그는 샤또프에게 극히 종교적이며 민족적인 성격을 띤 러시아 국민의 메시아 사상을 뿌리내리고, 끼릴로프에게는 반종교적인 개인주의 사상의 극점인 '인신사상'을 심어준다. 즉, 세상에 신이 없는 이상 인간 자신이 신이 아니면 안 되겠다. 그러나 현재의 인간은 생의 공포와 죽음의 고통이라는 기만에 미혹되어 있기 때문에 불행하다. 이 공포와 고통이라는 두 개의 기만을 정복하고 생사의 경지에 달한 인간이야말로 오만하고 행복한 신인이며, 그때 비로소 인간의 자의(自意)가 최고의 권위가 되며, 그래서 사람도 신이 된다. 이것이 인신이고 낡은 신인(神人)(그리스도)과 대치해야 할 인신이다. 그 새로운 복음을 세상에 선포하는 제 1인자는 자의의 최고극치를 증명하기 위해서 자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제 3의 사상적인 분파를 형성하는 혁명운동에도 관련을 가졌다. 바로 이 결사조직의 영수인 뾰뜨르 스쩨빠노비치 베르호벤스끼를 축으로 사건이 진행되어진다. 이같이 제각기 극단적으로 서로 배치되는 도덕·종교 및 사회사상을 일시에 세 사람의 가슴속에다 불질러 놓은 스따브로긴의 치명적인 정신적 분열은 '참 생명'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저주스러운 존재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삶을 던지는 여자를 만나기 위한 그의 마지막 노력도 수포로 돌아가 그는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 되어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
―요약 "악령(惡靈)"―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는 18세기 말엽에서 19세기초에 이르는 러시아 지주 계급의 전형적인 인물로서 당시 지주 계급들은 프랑스의 계몽철학과 무신론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을 수박 겉 핥는 식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지극히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인생관을 지니게 되었고 결국 인생의 유일한 목적은 육체적 쾌락이라고 보고, 재산을 모으는 데만 눈이 멀어 있었다. 그러한 아버지를 둔 아들들의 이야기. 첫째 아들 드미트리는 아버지와 같이 열정적이고 충동적인 경향을 띠고, 또한 아버지와 연적이기도 하기 때문에 원수같이 지낸다. 둘째 이반은 알료사와 마찬가지로 둘째 부인에게서 태어나 아버지의 무관심 속에서 불우한 유년을 보내 스스로 대학을 마친 지식인이고 자기만의 독특한 무신론을 내세운다. 셋째 알료사는 순진하고 어디에서나 사랑을 받는 청년으로 공부를 중도에 마치고 스스로 수도원에 들어가서 조시마 장로 밑에서 배우다가 속세로 내려오는데 모든 인물들과의 대화와 사건의 진행은 알료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벙어리 처녀와 관계를 가져 낳은 자식으로 표도르 파블로비치가 거둬들여 하인으로 쓰는 인물로 누구보다도 표도르 파블로비치를 증오해 아버지를 죽이고 치밀한 알리바이로 첫째 형 드미트리에게 혐의가 씌어지도록 꾸민다. 카테리나 이바노브나는 매우 뛰어난 미모와 귀부인다운 품위를 지니고 있지만 지나치게 자기의 아름다움과 미덕에 심취한 나머지 진심으로 남을 사랑할 줄 모른다. 성격이 강하고 신경 또한 칼날 같은 그녀는 자기가 원해서 드미트리와 약혼을 하긴 했지만 사실은 드미트리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미덕과 관대함을 사랑한 데 지나지 않은 것이다. 약혼자의 동생 이반을 만나게 된 그녀는 이반의 뛰어난 지성과 두뇌에 매혹되어 그를 사랑하게 되지만 그녀의 자존심은 자기가 이반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끝내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표도르 파블로비치의 살인 사건으로 재판을 진행하는 법정에서 그녀는 진정으로 이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버지를 죽인 건 하인 취급받는 서자(庶子) 스메르쟈코프이지만 그는 이반에게 막대한 사상적 영향을 받아, 이반이 내세운 '모든 것은 허용된다'라는 이론을 받아들이고, 또한 강력한 사건의 조짐이 느껴지는 살인사건 전날 스메르쟈코프는 모스크바로 가려는 이반을 향해 다음 날에 대한 암시를 주지만 이반이 묵인하고 떠났다고 믿고 살인을 저지르게 되어 결국 이반은 자신이 살인을 교사했다고 믿고 법정에서 자백을 하려고 하지만 카테리나 이바노브나는 드미트리의 범죄를 결정적으로 입증시키는 '수학적인 증거'를 공개해서 결국 드미트리는 유죄가 선고된다. 그녀의 생각은 이렇다. 명백한 증거에 의한다면 범인은 드미트리이고 그렇게 되면 이반이 스메르쟈코프를 교사한 사실이 무의미해지므로 이반은 죄를 짓지 않은 것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 행동은 모두 파멸을 자초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리고 또 다른 여인 구르센카는 순진하던 17세 소녀 시절, 자기가 진정으로 사랑하던 남자에게 버림을 받아 늙은 지주 삼소노프의 첩으로 들어가지만 그것은 명목상의 첩일 뿐, 양녀와 다름없다(이렇게 자세하게 언급하는 것은 그녀의 순수성을 덧붙이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해서 뒤틀려진 그녀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돈을 모으고 카라마조프가의 아버지와 아들을 조롱할 목적으로 가까이 해서 부자 사이에 적대관계를 극점까지 팽창시키는 흥분제 역할을 하지만, 알료사를 만나 자신의 순진한 본래의 마음을 되찾은 그녀는 자신을 버린 남자를 만난 자리에서 그를 버리고 드미트리를 선택하고 그와 인생을 같이 한다. 도스또옙스끼는 이 소설을 통해 무신론과 신앙에의 정면 대결, 인류애, 가족이 걸어가야 할 방향 등 그의 모든 사색의 장을 집대성시킨다. 결론에서 아이들에게 알료사는 머리채를 잡혀 거리로 끌려간 아버지의 명예를 뼈저리게 절감한 나머지, 아버지의 치욕을 씻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일루사 이야기를 하며 유년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과 부자간의 아름다운 사랑을 이야기한다.
―요약 "카라마조프가 형제들"―

  우리는 소설 속에서 주인공을 만나고 작가를 만난다. 작품 속의 주인공이 헤매고 있을 때 작가가 보기 좋게 그 다음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로 주인공을 통해서 작가를 보게되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런데 도스또옙스끼의 소설은 다르다.

 주인공은 사상적으로 권위와 자주성을 지니고 있다. 주인공은 완성되어 가는 도스또옙스끼의 예술적 시각의 대상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권위 있는 사상적 개념의 소유자로서 이해되어지고 있다. 비평가들의 의식에 있어서 주인공이 하는 말이 직접적으로 가지는 완전한 의미는 소설의 독백적(monologic) 측면을 분쇄시키고 직접적인 응답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주인공이 작가가 하는 말의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완벽한 가치와 권리를 지니고 있는 주관적 사상의 보유자가 됨과 같다.
―바흐찐, 《도스또옙스끼 시학(詩學)》―

  도스또옙스끼가 정성을 다 해서 빚어낸 인물들은 인간의 꺼림칙한 비밀들을 파헤쳐 놓는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을 맹렬히 공격한다. 그는 또한 심리를 집요하게 파헤치기는 하나, 하나의 심리주의자라기 보다는 보다 높은 차원의 '사실주의자'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억압과 기만을 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어두운 곳을 꺼리고, 밝은 색채를 좋아한다. 우리가 걸어가는 길은 역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대부분 한정되어 있고 그것을 조금이나마 말해 주는 것이 소설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작가의 계산에 의한 정확한 기법과 감동과 갈등 사이에서 일어나는 인간애 외에 아주 커다란 것은 내적 억압을 쓰다듬음으로써 어떤 '속시원함'을 또한 맛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도 '속시원함'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려 하지는 않는다. 도스또옙스끼는 과감히 자기의 투사들을 사회 곳곳에 내보낸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에게 무릎을 꿇은 게 아니라 전 인류의 고통에 대해 무릎을 꿇었듯이 한 마리의 '이'만도 못한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죽인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을 착취하면서까지 돈을 모으는 눈 먼 개인주의를 죽인 것이다. '주의'  죽였지만 그는 견디지 못해서 실패하고 말았다. 아버지 크로노스를 죽이고 올림포스 신전과 지상의 지배권을 가지고 신들의 아버지로 군림한 제우스와 같이, 아버지 혹은 개척자라는 이름 대신에 라스콜리니코프는 살인자에 머물렀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우리는 법적 도덕적 혹은 형식적 '죄인' 이외에 어떤 비판을 할 수 있겠는가. 법과 자유 경쟁이라는 지표 아래 한  소수집단이 다른 집단의 피를 서서히 말리며 마르멜라도프의 가족처럼 죽음에 치닫게 하는 것은 일종의 '살인'이  아닐까? 그리고 그처럼 죽임을 당하는 집단이 아무런 반항도 없이 법의 그늘 아래 농락을 당하는 무지(無智) 혹은 무관심(無關心)은 언제까지나 침묵해야 하는가? 이러한 사람들이 이런 현실에 극단적 혹은 개인적으로 반항하기 위해 죽은 노파처럼 돈의 노예가 되거나, 강한 계급상승을 맹목적으로 꿈꾸게 되어 사회는 시간이 충분히 흐르더라도 결국 반복되는 것은 아닌가? 그러고 보면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스또옙스끼는 문제를 제기할 뿐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는 어떤 '주의자'나 철학자가 아니라 소설을 쓰는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주인공들을 추상적으로 철학화 시키는 일과 주인공들을 객관적으로 냉철한 심리학적 분석, 혹은 정신병리학적 분석으로 해부하려는 일은 본래가 예술적인 도스또옙스끼 작품들의 구조체계 속으로 파고드는 데 도움을 주지 않는다. 한쪽에만 열중한다면 타인의 의식세계를 객관적이고 순수히 사실주의적 측면에서 보질 못하게 되어 다른 쪽의 사실주의는 미약하게 된다. 이 두 경우에 있어서 순수히 예술적인 문제들이 완전히 간과되거나, 아니면 오로지 우연히 그리고 피상적으로 해석되어 왔던 사실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 철학적 독백화의 길을 걸어온 자들은 예술가에 의해 제시된 다수의 의식들을 단일 세계관의 조직적·독백적 틀 속에 끼워 넣으려 하면서 이율배반이나 변증법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바흐찐, 《도스또옙스끼 시학(詩學)》―

  우리가 소설을 읽으면서 흔히 범하는 과오는 인물들을 선과 악의 지표로 나누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연히 소설 속의 인물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행동하도록 강요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지표 속에 인물들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물들 속에 선과 악이 존재하는 것이다. 더 자세히 말해 인물들의 행동 속에 있는 것이다. 도스또옙스끼는 특히 그 부분을 맹렬히 지적한다. 물론 소냐나 알료사처럼 지극히 선한 인물을 그리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인물들은 자기 속에서 선과 악이 처절한 싸움을 벌이는 장면이 자주 묘사된다(이 점에 있어서는 알료사도 예외일 순 없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살인이라는 '악행'을 저지르지만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과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위해서 언제나 발벗고 나서는 '선행'이 소설 전체의 내용을 형성한다. 말 그대로 소설 속의 극단적인 반동인물 층의 구도를 살펴보면, 악인의 대표적 유형은《악령》에서 뾰뜨르 스쩨빠노비치 베르호벤스끼는 주인공인 스따브로긴의 하수인의 역할로 내적 투쟁의 결과로 얻어지는 사상을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명령을 받은 듯이 바쁘게 움직이는 주변인물의 색채가 명백하고 《죄와 벌》의 노파도 죽임을 당하는 원인을 제공하지만 언제까지나 수동적인 입장으로 주인공의 '초인론'아래 희생된 인물이며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에 나오는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는 어떤 고뇌 없이 조류에 이끌리듯이, 그것도 전체적이지 않고 자기가 받아들이는 내에서 흡수한, 제한된 사상을 통해 행동하는 '고정된 배경과'도 같은 인물이다. 《죄와 벌》의 스비드리가일로프도 악인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자기 나름대로의 무게 있는 사상이 전개되어 그것에 의해 행동하고 사랑의 순수함을 인정했으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선행을 실천했고, 고뇌 끝에 자기에게 벌을 내려 자살을 한 인물로 훗날의 라스콜리니코프라고 불리울 정도로 소설 전체적으로 진한 향기를 풍기는 인물이다(비록 많은 지면이 할애되지는 않았지만). 그런데 반대의 경우도 이런 논리로 나아가는 것은 무리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수동적인 악역도 성실하게 소설의 갈등을 생산해 내고 있으며 고뇌하는 주인공이든 절대 선이든지 적극적인 대립을 펼치는 능동적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런 표현이 허락된다면) 두 능동적인 인물계층간에 차이를 둘 수 없다.
  도스또옙스끼에 있어서 인생은 하나의 소설이고 소설은 하나의 인생이다(그리고 소설사 또한 그의 인생사이다). 우선 그의 소설 같은 인생을 얘기하자면, '네바강의 기적'이라는 독특한 체험을 한 도스또옙스끼는 눈에 들어오는 한 장면 속에서 소설 전체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체험 후 쓴 소설이 그의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이고, 발표된 그의 작품을 읽은 그리고로비치와 네크라소프가 감동한 나머지 새벽 4시에 그를 깨워 '새로운 고골리의 출현'을 축복한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한 일화이다. 후일 그의 진술에 의하면 가장 괴로웠던 시절에 그 기억은 작가로 하여금 가혹한 현실을 견딜 수 있게 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작품세계는 유형생활을 축으로 전후로 구분된다. 도스또옙스끼가 페트라셰프스키의 서클에 출입하면서 러시아 사회의 여러 문제인 농노제, 재판 제도, 출판 사정과 관련한 유토피아 사회주의, 무신론, 가족 제도 등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던 시기에, 프랑스 2월 혁명이 유럽을 강타하고 이를 두려워 한 러시아 정부가 그 서클을 감시한 끝에, 이듬해인 49년 봄, 서클 회원 30여 명을 즉각 체포하여 잔혹한 사형 집행의 연극을 꾸몄으나 총살 직전에 황제의 특사라는 명목으로 4년의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받는다. 이 시절의 이야기는 훗날 장편  《죽음의 집의 기록》에 상세하게 나타나 있다. 그에게 가장 큰 충격이었던 것은 일반 수인으로 대표되는 러시아 민중이, 지식인 정치범을 '도련님'이라 부르며, 그들에게 증오와 적대 감정까지 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자기들은 처음부터 민중에게서 너무나 유리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아주 강하게 그의 뇌리에 박혔다. 라스콜리니코프나 스따브로긴의 경우가 그런 부류에 해당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학우들과 이야기하기를 꺼려했을 정도로 폐쇄적인 환경 속에서 자신의 사상을 이룩하고, 행동을 하지만 그는 개인적인 근거에 의해서 행동을 한 것이었거나, 실제로 마르멜라도프와 같은 사람들의 입장을 가까이서 통감하지 못하고, 실제로 그들이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작용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스따브로긴은 지주 계급으로 민중들과는 처음부터 절연되어 있었고, 자신의 '참 생명'을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했던, 오히려 라스콜리니코프보다 개인적이었다. 그러나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의 3형제는 도스또옙스끼가 항상 빚진 것 같은 느낌을 완전히 극복한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이반 표도로비치는 스따브로긴과 같은 지주 계급이었지만 아버지에게 버려졌던 유년 시절에 아버지의 하인 그리고리의 곁에서 민중과 첫 발을 내딛은 것을 시작으로 대학을 자기 힘으로 마치며 산 체험을 듬뿍 한 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독특한 무신론과 유명한 '대 종교재판관'을 펼친다.

 이반은 너무나도 철저한 무신론자였기 때문에 오히려 이 지상에 충만된 피와 굶주림에 괴로워해야 했고, 현실로서 존재하는 인류의 불행은 그의 모든 비극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John Middleton Murry, 《도스또옙스끼의 文學과 思想》―

  알료사도 역시 대학을 다니다가 스스로 수도원에 들어가 조시마 장로 곁에서 가르침을 받고 장로의 뜻에 의해 속세로 내려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접하고 '행동하는 사랑'을 완성시킨 도스또옙스끼적 승리이다.
  도스또옙스끼는 그의 모든 사상이 총망라된 대작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을 끝으로 생을 마쳤지만 그가 폐동맥 파열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카라마조프가 형제들 제 2편의 계획을 세워서 (그가 갑작스럽게 죽지 않았다면) 그 이듬해에 쓸 심산이었지만 결국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이 유작 아닌 유작이 되고 말았다.
  이제 그의 인생사 같은 소설사를 보기로 하자. 도스또옙스끼는 자신의 소설 속에 끈질기게 표현했던 몇 가지 테마들이 있다. 그것은 죽음, 자살, 간질병, 신앙, 무신론 등 작가 자신의 생애와 인류의 생애와는 불가결한 요소들을 끊임없이 작가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특히 그 속에 기만의 요소가 가장 많다고 작가는 느꼈던 것이다.
  이 개개의 요소를 하나씩 분리해서 언급하는 것은 오류라는 것을 말해 둔다. 왜냐하면 그 요소들은 그의 작품 속의 인물들이 서로 사랑과 미움이 끈적끈적하게 섞이는 것과 같이 두세 가지의 요소가 거의 필연적으로 같이 작용하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죄와 벌》에 나타난 도스또옙스끼의 심리 묘사는 소름이 끼칠 만큼 정확하고 심오하다. 작가는 예리한 눈으로 도시의 비밀을 파헤쳤을 뿐만 아니라 암흑과 죄악을 그리면서도 그 속에 숨은 일부 밝은 면을 묘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성자의 심리를 이해하는 동시에 악마의 심리고 이해했다. 신앙과 배신, 죄악과 순결, 광명과 암흑 등 인간의 양면을 그는 예언자다운 투시력을 가지고 통찰했던 것이다.
―《죄와 벌》의 작품 세계―

  그는 실제로 누구나 꺼리고 황당무계하다고 생각되는 어두운 부분을 터전으로 잡았다. 그것은 그의 전 작품 세계의 터전이라고 할 수도 있다. 거기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법정의 기록은 어느 누구의 소설보다도 스릴이 풍부하다. 왜냐하면 예술이 손을 대기 꺼려하거나, 또는 겉으로밖에 손을 대지 않는 인간 영혼의 암흑면에 빛을 던져 밝혀 주는 것이 바로 그러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도스또옙스끼의 증언, '《죄와 벌》의 작품 세계'―

 《죄와 벌》에서는 신앙의 표상인 소냐와 라스콜리니코프와의 대립에서 희미하게나마 무신론과 신앙의 대결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악령》에서는 스따브로긴이라는 분열된 사상의 인간에게서 인신사상과 러시아적 정교도 사상의 대립으로 표현되지만 그것은 따져본다면 대립이라기 보다는 기존의 신앙에 대항한 가능성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리라. 그리고 끝까지 부활시키지 않았다가 사후에 작가의 유품을 공개하면서 드러난, ―□스따브로긴의 고백―이라는 텍스트에서 승정 찌혼과 스따브로긴과의 대립이 나타난다. 이것이 전자보다는 더욱 확실한 대결이라고 보이지만 그 장은 그의 이 소설에서 자리잡을 만한 공간이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의 대작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에서는 이반 표도로비치와 조시마 장로와의 대결이 간접적인 형식으로 빛나는데 이반의 무신론은 작가의 그것과 거의 들어맞는다.

  나는 이 시대의 아들, 불신과 회의의 아들인 까닭으로, 최후의 날까지 이대로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얼마나 이것이나를 괴롭혔는지 모릅니다―신앙에 대한 이 갈망! 그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 부정의 평화의 순간을 나에게 안겨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은 이따금 나에게 완전한 평화의 순간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 만일 누군가가 나에게 그리스도는 진리의 바깥에 존재한다고 증명할 수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만일 진리가 실제로 그리스도를 추방해 버린다고 할지라도 나는 오히려 진리의 편에 서지 않고 그리스도와 함께 머무르기를 선택할 것이라고.
―도스또옙스끼의 서간문에서, J.M.마리《도스또옙스끼의 文學과 思想》―
 「나는 한평생 신 때문에 괴로움을 당해 왔었다」라고 그는 진술하고 있다. 그러한 그는, 이 한평생을 다 바쳐서, 전력을 다하여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이 질문에 대답하려고 노력하였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로 계속적으로 병사를 보냈다. 그 자신이 그러했었던 것처럼 죽을 때까지 인생과 격투해야만 하는 투사들을 보냈던 것이다.
―J.M.마리《도스또옙스끼의 文學과 思想》―

  조시마 장로 역할은 《악령》에서 제외되었던 승정 찌혼을 충분히 보완할 수 있었다. 조시마 장로는 자신의 산 경험으로 모든 무신론들을 분쇄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소냐는 자신의 행동으로서 진실로 신앙을 대표하고 있긴 하지만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위에서 언급되었던 뾰뜨르나 표드르 파블로비치와 같은 배경의 역할밖에 하고 있지 않다. 실제로 라스콜리니코프가 소냐 앞에 엎드려 그 유명한 한 마디를 했을 때 이미 소냐의 역할은 끝난 것이다. 소냐는 인도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라스콜리니코프가 인생의 새 출발을 하기 위해 찾아간 기회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리자베타! 소냐! 그 두 사람은 상냥한 눈을 가진 가엾고 온순한 여자들이다. 사랑해야 할 여자들이다. 왜 그 여자들은 울지 않을까? 왜 신음하지 않을까? 남에게 모든 걸 주면서 얌전하고 조용한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다……. 소냐! 소냐! 조용한 소냐!
 "난 지금 당신에게 무릎을 꿇은 게 아니오. 전 인류의 고통에 대해 무릎을 꿇은 거요."
 "어째서 이런 치욕스런 것과 천한 것이 이것과는 정반대인 신성한 감정과 더불어 당신 속에 공존하고 있는 거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소냐에게 갈 필요가 있을까? 다시 한 번 그녀가 우는 것을 보려고? 그렇지 않아도 그는 소냐가 두려웠다. 소냐는 그 자체가 가차없는 선고였고, 변경될 수 없는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에 가면 그녀의 길을 가느냐, 자기의 길을 가느냐, 두 가지 중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 라스콜리니코프, 《죄와 벌》 중에서 ―
 

  소냐와 같이 알료사도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에서 신앙의 표상이 되고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알료사는 빛을 향해 걸어가며 속세의 무관심과 무신론과 대항하는 투사이다.

  알료사는, 인간의 육체적 존재까지 일변하게 되는, 이 새로운 세계에 속하고 있다. 형들은 어둠 속을 방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료사는 빛 속을 걸어가는 인간이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형들의 이야기와 섞여 있는 것이다. 알료사가. 즉 생과 생의 육체를 갖추고 있는 긍정이라는 것은, 항상 얽히고 있는 것이다. 표드르 파블로비치, 이반, 드미트리, 구르센카 등은 새롭게 태어난 알료사 가운데 숨어 있는 미덕을 인정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 희망이 알료사 한 사람에게 걸려 있는 것이다. 알료사는 어느 승원도, 연장자도, 또는 그들 자신의 탐구까지 일찍이 주지 못하였던 것과 같은, 그들의 질문에 대한 해답이었으며, 이러한 인물의 창조는, 그 영구조화를 하나의 살아 있는 상징에 의해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도스또옙스끼의 최후의 노력을 장식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었다. 그는 이미 무시간의 세계에서 이와 같이 무서운 순간적 섬광 이외의 것을 견딜 수 있는 것은, 낡은 섭리 하에 있는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J.M.마리,《도스또옙스끼의 文學과 思想》―

  이 모든 빛나는 인물들은 도스또옙스끼를 따라서 하나의 가능성을 향해 전진하고 있는 것이고 말해주고 있는 것이며, 때로는 침묵하기도 하는 것이다.
-결론-
 
  이렇게 두서없이 나열해 보았다. 도스또옙스끼의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 것이고, 무엇을 건드리고 넘어가야 할지 시종 그런 싸움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필자의 편의를 위해 소설 속에 여러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에는 많은 제약을 가했다.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의 동생과 그의 어머니의 이야기나, 스비드로가일로프의 이야기, 《악령》에서 스쩨빤 뜨로피모비치의 이야기나,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에서 조시마 장로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필자 자신도 유감이며, 실제 이야기를 접하고 좀 더 객관적인 판단을 해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이제는 작가의 이야기도 결말로 가면서 주제가 명백해지고, 등장 인물들이 지치고 피곤한 기색이 점점 더 끝을 재촉하고 있는 듯 하다.
  그렇다면 도스또옙스끼는 왜 자신의 결론을 신앙과 강하게 연결시킨 것일까? 그 점에 관한 의문은 베이컨이 조금이나마 짚어 주는 것 같다.

  시시한 철학은 사람의 정신을 무신론으로 기울게 하지만 심오한 철학은 사람들의 정신을 종교로 이끈다. 왜냐하면 인간의 정신이 흩어져 있는 파생적인 여러 원인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은 때때로 이 원인을 머물러 있어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지만, 그러나 그 원인이 서로 결합하여 하나의 사슬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인간 정신은 섭리나 신성으로 달아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 월 듀런트, 《철학이야기》베이컨 편 -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와 감격의 포옹을 하며 행복의 길로 새 출발하지만, 그는 실패했고, 또 자신이 끝까지 붙들고 있던 신념을 포기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부끄러워한 것은 깎아 버린 머리도 아니고 발에 걸린 쇠고랑도 아니었다. 그는 긍지에 상처를 받고 있었다. 병이 난 것도 그 상처받은 긍지 때문이었다. 아아, 그가 만약 자신을 죄인이라고 인정할 수가 있다면 그는 얼마나 행복하였을까! 그랬다면 그는 수치의 기분이나 굴욕도 모두 참을 수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그는 엄중히 자기 비판을 해 보았으나 발악 상태에 있는 그의 양심은 자기의 과거에서 특별히 무서운 죄를 발견할 수 없었고, 발견된 것은 다만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실패' 뿐이었다. 그가 부끄러워하고 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라스콜리니코프 자신이 그렇게 눈과 귀를 막힌 채 어이없게도 맹목적인 운명의 선고에 의해 바보같이 몸을 망쳐 버렸다는 사실, 조금이라도 자기 마음을 가라앉히려면 그 판결의 '무의미함'과 타협하여 그 앞에 굴복해야만 한다는 사실이었다.
-《죄와 벌》 중에서-

  그러나 그는 마지못한 포기가 아니라 자랑스러운 '포기'였던 것이다.
 
  그는 동료 죄수들을 보고, 그들도 역시 생활을 사랑하고 생활을 귀중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즉 그들 옥중에 있는 자들은 자유의 몸이었던 때보다도 한층 더 생활을 사랑하고 그 가치를 인정하고 중요시하는 것 같이 보였다. 그들 중 어떤 자, 예를 들면 탈옥수 등은 어떠한 무서운 고통이나 고문도 참고 있었다. 아무 것도 아닌 단 한 줄기의 햇빛, 밀림, 어딘가 사람이 모르는 숲속에 있는 샘 등에 그들에게 어째서 그토록 의미를 줄 수 있을까. 그 샘을 발견한 것은 재작년인데, 부랑자는 그것을 다시 만나는 것을 마치 연인과 만나는 것처럼 공상하고 그 샘이나 그 주위의 푸른 풀이나 덤불 속에서 지저귀고 있는 작은 새들 따위를 꿈꾸는 것이었다. 더욱더 열심히 주위의 현상을 관찰하면 할수록 그는 점점 더 이처럼 설명할 수 없는 실례를 수없이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자신도 몰랐지만, 그는 갑자기 뭔가에 끌려 그녀 발 밑에 내던져진 것 같았다. 그는 울며 그녀의 무릎을 끌어안았다. 처음 한 순간 그녀는 깜짝 놀라 얼굴이 마치 죽은 사람처럼 창백해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들부들 떨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일순간에 모든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눈은 한없는 행복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안 것이다. 그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한없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마침내 이 순간이 온 것을, 그녀는 이제 아무 것도 의심할 것이 없었다. …… 두 사람을 부활시킨 것은 사랑이고, 두 사람의 마음은 서로의 마음을 적셔 주는 마르지 않는 생명의 샘이 된 것이다.…… 변증법을 대신하여 생활이 찾아온 것이다. 따라서 의식 속에서도 당연히 뭔가 전혀 다른 것이 형성되어 나와야 할 것이다. …… 7년, 겨우 7년이 아닌가! 이렇게 마음이 행복해진 무렵의 어느 순간에는 둘 다 이 7년을 7일이라고 착각할 지경이었다.
- 《죄와 벌》 중에서
 

  《악령》은 어감 그대로 잔인한 책이었다. 스따브로긴은 그의 강한 지성을 움직여, 마침내 이론과 사색의 세계에 장대한 누각을 구축했다. 그 중 하나는 극히 종교적이며 민족적인 성격을 띤 러시아 국민의 메시아 사상이고, 다른 하나는 반종교적인 개인주의 사상의 최후의 극점인 인신사상이다. 그것은 스따브로긴의 몸에서 발한 불가사의한 자력에 의해 두 사람의 친구에게 압도적인 인상을 주었다. 즉 샤또프는 메시아 사상의 사도로 변하여, 자기의 신념을 다하다가 끝내는 흉도의 마수에 쓰러졌고, 끼릴로프는 인신으로서 자기 의지력의 극한을 측정하기 위해 환상적인 자살을 하여 스스로를 멸망시켰다. 그 뿐만 아니라 제 3의 사상적인 분파를 형성하는 혁명운동에도 관련을 가졌다. 이 세 인물들은 자기의 힘으로 서지 못하고 스따브로긴에게 의지하고 기대었기 때문인지 모두 자기의 길을 완성하지 못했거나, 완성했다고는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아무튼 이 소설의 모든 사건은 스따브로긴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역시 스따브로긴의 자살처럼 잔인한 최후를 맞는다. 우리는 스따브로긴의 스승이었던 쓰쩨빤 뜨로피모비치에게서나마 결론을 구하게 된다.

  '어딘가 이 우주에, 나보다 훨씬 바르고 행복된 무엇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쉴 새 없이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 나의 마음은 한없는 환희와 ―그리고 영광으로 가득 찹니다. 아, 내가 어떤 인간이었고, 또 내가 어떤 일을 하였든, 그런 일은 이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인간은 자기 개인의 행복보다도, 어디선가 완성되고 조용한 행복이 만인과 만물을 위해 존재한다고, 이렇게 자각하는 편이 훨씬 필요한 것입니다…… 인류 존재의 법칙은 모두 한 점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인간은 항상 뭔가 한없이 위대한 것 앞에 무릎을 꿇을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으로부터 무한히 위대한 것을 빼앗아 버리면, 그네들은 살아갈 수 없어, 절망한 나머지 틀림없이 죽어 버릴 것입니다. 무한하고 영원한 것이란 인간에게는 절대 필요한 것입니다. 마치 인간이 지금 깃들여 삶을 영위하고 있는, 하나의 이 조그만 유성과도 같이 …… 여러분 모두 다같이 이 위대한 사상의 만세를 부르지 않으렵니까! 영원하고도 무한한 사상! 어떤 인간이든, 사람은 모두 위대한 사상이 있다는 그 사실에 경건한 자세로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극히 우매한 인간까지도 뭔가 위대한 것을 필요로 합니다. 뻬뜨루샤2)……아, 나는 그 친구들을 한 번 더 만나고 싶어. 그들은 자기들 속에도 역시 영원한 사상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어. 전혀 모르고 있단 말이야!"
- 악령 -

  자신이 사랑하는 그루센카로 인해 물욕과 육욕의 상징인 아버지 표도르와 추악한 싸움을 벌이며 죽이겠다고 하루에 몇 번이고 생각했던 드미트리, 어떤 의미에서는 살인자 스메르자코프를 교사한 이반, 이 둘은 실제로 살인을 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를 죽였다. 그리하여 드미트리는 유죄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십자가를 짊어지며, 이반은 죄책감에 견디지 못해 섬망증과 악마와 대화하는 등의 정신분열에 빠져 불운한 최후를 맞이한다. 그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이 형제들은 아버지의 추악한 면밖에 배우지 못했다. 드미트리의 변호사 페츄코비치는 최후 변론을 한다.

 "배심원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우리의 자녀들 ― 이미 의젓한 청년으로 성장하여 사물에 대한 분별력이 확고히 선 자녀들이 이런 문제에서 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린 그들에게 불가능한 겸양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로서의 구실을 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태도는 특히 자기 동년배들의 훌륭한 아버지와 비교할 때,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청년의 마음속에 고통스런 의문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그 의문에 대한 답변은 언제나 상투적인 형태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너를 낳았다, 너는 아버지의 핏줄이다, 그러니까 너는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나를 낳을 적에 과연 나를 사랑했을까?' 하고 청년은 또 다른 의혹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더욱더 깊은 의혹 속으로 빠져들면서 '하지만 아버지가 나를 낳은 것은 나를 위해서였을까? 아버지는 그 순간에 필시 술기운의 자극으로 인해 걷잡을 수 없는 욕정에 사로잡힌 그 순간에, 나 같은 건 생각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가 사내아이인지 계집아이인지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고작해야 내게 음주벽을 유전시켜주었을 뿐― 이게 아버지가 나한테 베풀어 준 은혜의 전부가 아니냐…… 아버지는 나를 낳기만 했을 뿐, 나를 사랑해 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난 왜 아버지를 사랑해야만 하는가?(실러의 〈군도〉제 1막 1장, 프란츠의 고백) 하고 청년의 마음속엔 이런 의문이 도사리게 될 것입니다. 아아, 그러나 여러분은 이러한 의혹을 무례하고 잔인한 것이라고 생각하실 테죠. 그러나 청년에게 불가능한 겸양을 기대하지 마십시오.'천성을 문 밖으로 내쫓으면, 다음에는 그것이 창문으로 다시 날아온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금속'이나 '유황'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신비로운 관념의 명령을 추종하지 말고, 이성과 인도주의적인 정신의 명령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도록 합시다.…… '세상의 아버지들이여, 당신의 자녀들을 슬프게 하지 말지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행동한 후 비로소 우리 자녀들의 의무를 요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린 아버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자녀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우리의 자녀가 아니고, 우리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들 자신이 그들을 원수로 만들 것입니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 《카라마조프가 형제들》―

  모든 이야기야 이제 끝을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면 인생이 추구해야 할 열쇠는 무엇인가? 그것은 법열(法悅)3)이다. 스쩨빤 뜨로피모비치의 말처럼 이 세상의 1분. 1초도 인간에게 있어서는 모두 법열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누구나 그런 소중한 법열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완성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표도르 파블로비치처럼 서구의 무신론을 수박 겉 핥기 식으로 받아들여 무관심주의자가 되기 쉽고, 샤또프처럼 스따브로긴의 사상에 기대고만 있을 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머리부터 꼬리까지의 요동치는 법열을 겪으며 인간은 내적 성숙을 이룬다. 사실 새로운 진리를 깨닫는 것보다, 그것에 기뻐하고 감사할 줄 아는 데에 더 큰 힘이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에 인간이, 자신을 생과 대치시켜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것과 항쟁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면, 그때는 용감하게 이것과 싸워서, 필요하다면, 침착하게 죽어가야만 할 것이다. 이것을 행할 수 없을 때 어찌 인간이라 할 수 있겠는가. 참다운 인간은, 스스로의 정신을 따라 살아가는 용기를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만일, 자신의 생활을 자신의 사상에 일치시키려 하지 않을 것 같으면, 그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배신자에 불과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인간성을 부정하는 것이 되는 동시에 모든 인간성까지도 부정하게 될 것이다.
―도스또옙스끼, J.M.마리《도스또옙스끼의 文學과 思想》―

  관념의 필체는 모방할 수 있어도 관찰의 필체는 모방할 수 없다. 도스또옙스끼는 문학적 천재를 정의하여, 「문학에다 〈하나의 새로운 언어〉를 가져다 줄 수 있는 힘」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그가 '하나의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기 위해 고뇌했을 것을 생각하면, 우선 답답함이 앞선다. 실제로 그는 《악령》을 쓸 때, 고(稿)를 거듭하기를 열 번이나 하고, 새로운 인물(스따브로긴)이 '참 주인공'의 자리를 요구해 와, 종래의 주인공을 배경으로 두고, 1부를 말살하고 다시 써내는 헌신을 보이기도 하고, 《죄와 벌》을 쓸 때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단편적인 초고로 미루어볼 때 적어도 네 번이나 다른 방법으로 시도했다. 주인공의 일기체로 씌어진 것, 법정에서의 진술 형식으로 된 것, 살인 후 8년만에 출옥하여 회상하는 형식으로 된 것, 끝으로 현재 우리가 접하고 있는 3인칭이 그것이다.
  끝으로 도스또옙스끼가 문우(文友)에게 보냈던 회심의 편지를 인용하며, 나의 기나긴 글을 마치겠다.

  나는 대작의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것은 나의 결정적인 작품이 되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내가 창조하여 전편의 기초로 삼았던 인물은, 그 성숙에 몇 해가 걸렸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나는 당시에 아무 준비도 없이, 최초의 열의에 불붙은 그대로 이 작품에 손을 댔다고 한다면 틀림없이 모든 것을 망쳐 버렸으리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도스또옙스끼, J.M.마리《도스또옙스끼의 文學과 思想》―

주(註)
1) 1821년 모스크바 빈민구제병원 의사인 미하일 안드레예비치 도스또옙스끼와 마리야 표도로브나 도스토옙스카야 사이에서 7남매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문필활동을 시작한 것은 1843년 공병학교를 졸업해 페테르스부르크 공병대 제도과에 근무하다가 발자크의 《와제니 그랑데》를 번역해 호평을 받은 것으로 시작해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분신》, 《백야》, 《죽음의 집의 기록》, 《지하생활자의 수기》, 《죄와 벌》, 《악령》, 《백치》, 《카라마조프가 형제》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2) 뾰뜨르 스쩨빠노비치 베르호벤스끼의 애칭
3) 1. 〔불〕설법을 듣고 진리를 깨달아 마음속에 일어나는 기쁨
   2. 깊은 이치를 깨달았을 때와 같은 황홀한 기쁨
 
※ 참고로 외래어 규정에 의거한 정확한 표기는 '도스토예프스키'임을 밝힌다. 영어권 학자들이 우리나라의 언어를 장악하고 있어서 좀처럼 된소리나, 현지음 표기는 쉽지 않았을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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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전집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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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시 연구
-<희미함>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서론


기형도는 암울하고 부정적인 시세계를 갖고 있는 시인이다. 그의 시의 바탕을 이루며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상징적인 시는 「나쁘게 말하다」일 것이다.



어둠 속에서 몇 개의 그림자가 어슬렁거렸다
어떤 그림자는 캄캄한 벽에 붙어 있었다
눈치챈 차량들이 서둘러 불을 껐다
건물들마다 순식간에 문이 잠겼다
멈칫했다, 석유 냄새가 터졌다
가늘고 길쭉한 금속을 질질 끄는 소리가 들렸다
검은 잎들이 흘끔거리며 굴러갔다
손과 발이 빠르게 이동했다
담뱃불이 반짝했다, 골목으로 들어오던 행인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저들은 왜 밤마다 어둠 속에 모여 있는가
저 청년들의 욕망은 어디로 가는가
사람들의 쾌락은 왜 같은 종류인가
「나쁘게 말하다」 전문


필자는 기형도를 관찰하면서 굉장한 답답함을 느꼈다. 그 느낌이 어디서 오는지 고심하던 중 기형도에게 결여된 것처럼 보이는 특징을 보게 되었다. 동양의 시인이면서도 철저히 배제된 동양적 성향이다. 마치 메모나 수기를 적듯이 써 내려가는 문체와 사상은 서구적 허무주의·비관주의와 닮아 있고, 뿐만 그 극단인 죽음에 밀착되어 있다. 그래서 김현은 '누가 기형도를 따라 다시 그 길을 갈까봐 겁이 난'다고 우려하고 있으며, 안정효는 '이제 그의 몸은 냉각된 얼음으로 꽉 차버린 죽음 그 자체가 되어 버렸다'고 말하며 '죽음이 살다 간 자리'라고 덧붙이고 있으며, 그의 죽음을 시의 마침표가 되는 것처럼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시인의 슬픈 운명이 시의 운명까지도 좌우하는 것이 아니란 점에서 옳지 않다. 문관규는 「植木祭」를 분석하면서 유년 시대의 회상을 통하여 하강의 이미지를 드러내 보이다가, 그것과 결별하고 수직 상승의 이미지로 바뀌고 있다고 論究하고 있으며 이 때의 수직 상승의 이미지는 '통과제의를 겪는 시적 화자의 강한 의지를 표상하고 있다'고 덧붙이고 있다. 이 때 유년 시절의 회상, 혹은 결별의 이미지는 기형도가 가지고 있는 <여행, 방랑>의 이미지와 한 축을 이루고 있다.
上記한 몇몇 논자가 보여주듯이 기형도는 비관주의의 극단을 추구하다가 생을 마감한 시인이었던가 하는 의문이 필자가 기형도를 이야기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 의문 속에서 <희미함>의 이미지를 목도할 수 있었다. 그것은 물론 희망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대체로 절망적인 세계에 대한 작가의 觀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에 필자는 <희미함>의 이미지를 <떠남과 기다림>과 <유년·회상>이라는 이미지와 연관지어서 서술하고자 한다.


본론


1. 대체적인 세계의 색깔


서론에서도 언급했듯이 기형도는 세계를 음울하고 절망적인 분위기가 주도하고 있다고 보고, 그 안에서 보일 듯 말 듯한 희미한 빛의 분위기가 항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항쟁은 실로 아슬아슬한 형상이다. 기형도의 생각처럼 우리의 생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오래된 書籍」)이다. 그런데 기형도가 생각하는 생은 어두운 페이지가 전부일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배후에 드러나는 희미한 빛을 위해서 기형도는 성실하게 어둡고 음울한 세계를 그렸다.



노래는 침묵이 없으면 날 수 없는 가냘픈 새이다
-탈레스


이렇듯 시인은 <가냘픈 새>를 보기 위해서 침묵을 끈질기게 추구했던 것이다.



한 학기 내내 그는
모든 수업 시간마다 침묵하는
무서운 고집을 보여주었다
「소리의 뼈」 중에서


침묵의 형태는 죽음을 포함한다. 그리고 그 죽음은 `생명적인 것까지도 함축한다. 때문에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안개」)이 걸려 있기도 하고, '낮은 지붕들 사이에 끼인/ 하늘은 딱딱한 널빤지처럼'(「백야」)아무런 웅장함도 보여주지 못한다. 그러나 `생명체는 `생명체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 기억을 회상하며 그리움과 기다림을 가지고 있는데, 그 때 `생명체는 생명을 얻게 되며 죽음과 생명의 색깔이 중첩하게 된다. 때문에 기형도에게 죽음이란 '가면'을 벗은 삶인 것'(「겨울·눈·나무·숲」)이다.



어두운 차창밖에는 공중에 뜬 생선 가시처럼
놀란 듯 새하얗게 서 있는 겨울 나무들.
한때 새들을 날려보냈던 기억의 가지들을 위하여
어느 계절까지 힘겹게 손을 들고 있는가.
「鳥致院」 중에서

그러나 생명에 대한 그리움은 위태롭다. 죽음과 침묵과 무너짐은 항상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한번 꽂히면 김도, 어떤 생각도, 그도 이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한다
김은, 그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나는 블라인드를 튼튼히 내렸었다
또다시 어리석은 시간이 온다, 김은 갑자기 눈을 뜬다, 갑자기 그가 울음을 터뜨린다, 갑자기
모든 것이 엉망이다, 예정된 모든 무너짐은 얼마나 질서정연한가
「오후 4시의 희망」 중에서


대개는 이 <무너짐>의 포로가 되어 승복하지 않을 수 없다. <비탄, 불안, 증오>의 감정을 드러내면서.

-<비탄>의 정서-


그렇다면 도대체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
「여행자」 중에서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오래된 書籍」 중에서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진눈깨비」 중에서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 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중에서
내 苦痛의 비는 어느 날 그칠 것인가.
「孤獨의 깊이」 중에서


-<증오>의 정서-


분노 없이 살 수 없는 이 세상
「비가」 중에서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
「장밋빛 인생」 중에서
그대도 알 거야
노을이나 눈[雪] 욕설
바람 부는 것
「어느 날」 중에서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노인들 중에서」


-<불안>의 정서-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대학 시절」 중에서
내가 죽으면
내 이름을 위하여 빈 가지가 흔들리면
네 울음 섞이어 긴 밤을 잠들 수 있을까
「가을에」 중에서
쉽게 잠이 오지 않는 축축한 의식 속으로
실내등의 어두운 불빛들은 잠깐씩 꺼지곤 하였다.
「鳥致院」 중에서

이러한 감정들과 어둠, 죽음이 서로 격렬히 엉키면서 기형도의 시는 차라리 처절한 고통의 현장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 시인이 말하는 기형도의 전모가 아니라 전초전일 뿐이다.

2. <희미함>의 이미지

기형도의 시에서 익숙하게 만나게 되는 이미지는 <弱視>, <간유리> 등의 시어로 대표되는 <희미함>이다. 그것은 上記한 것처럼, 세계가 희망의 가능성을 워낙 조금밖에 보여 주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들의 눈과 귀는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약시>의 눈이나, <간유리>라는 매개를 통해서 볼 수밖에 없다.



느낌은 구체적으로
언제나 뒤늦게 온다, 아무리 빠른 예감이라도
이미 늦은 것이다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어느 푸른 저녁」 중에서


그렇기 때문에 항상 불안이 따라다니고, <예언, 환상, 동화, 선문답>의 분위기들이 기형도의 시들을 장식한다. 그것이 인간의 숙명이며, 자연과는 달리 세상을 살아가고 바라보는 인간의 天稟인 것이다. 즉,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길 위에서 중얼거리다」)할 수밖에 없는 숙명인 까닭에 <그리움>은 耳目口鼻나 四肢처럼 나를 대변하는 특성인 것이다.
그렇기에 세상을 살아가는 나에게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가는 비 온다」)며, 보들레르式으로 표현한다면 '떠나기 위해서 떠나는 사람만이 진정한 여행자'(『꿈꾸는 알바트로스』)이다. 그러한 희미한 인간 조건 속에서 희미한 희망과 생명은 조금씩 움트기 시작한다.


어둠에 가려 나는 더 이상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한다. 단 하나의 靈魂을 준비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나는 그대 窓門으로 다가간다. 가축들의 순한 눈빛이 만들어내는 희미한 길 위에는 가지를 막 떠나는 긴장한 이파리들이 공중 빈곳을 찾고 있다. 그대, 내 낮은 기침 소리가 그대 短篇의 잠 속에서 끼여들 때면 창틀에 조그만 램프를 켜다오.
「바람은 그대 쪽으로」 중에서


정채봉의 동화에서는, 인생이 고통 속의 강행군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인식한 딸이 아버지에게 '왜 삶에는 비오는 날이 이토록 많은가요?' 하고 묻는다. 아버지는 '인생에 햇빛만 비추면 사막이 된다'고 대답을 한다. 반대로 인생에 비만 내린다면 햇빛을 잊어버리는 죽은 시간을 살게 될 것이다. 그 안에 버티고 있는 中庸이란 빛과 어둠이 반반씩 섞여 있는 어둠침침한 황혼이 아니라, 몸 속에 새벽을 품고도 쉽사리 여명을 내주지 않으려는 칠흑 같은 밤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어둠 안에 무한한 빛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잠시 후에 내릴 여명이 있더라도, 영원한 어둠으로밖에 인식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빛이 내리기 전에 이미 삶의 거의 전부를 포기하고 마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여기서 <믿음>의 문제가 생긴다. 그 <믿음> 역시 인간의 아슬아슬하고 불안한 天稟을 타고났기 때문에 불확실하고 희미하지만, 그 자체로 생명을 갖고 있다.


이미 대지의 맛에 익숙해진 나뭇잎들은
내 초라한 위기의 발목 근처를 어지럽게 떨어진다
오오, 그리운 생각들이란 얼마나 죽음의 편에 서 있는가
「10월」 중에서


그 믿음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모진 대가가 필요하다. 믿음으로 나아가는 사람의 강렬한 확신, 죽음도 비웃을 정도의 담력과 치열한 성찰이 필요하다.


어느 영혼이기에 아직도 가지 않고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느냐. 네 얼마나 세상을 축복하였길래 밤새 그 외로운 천형을 견디며 매달려 있느냐. 푸른 간유리 같은 대기 속에서 지친 별들 서둘러 제 빛을 끌어모으고 고단한 달도 야윈 낫의 형상으로 공중 빈 밭에 힘없이 걸려 있다.

아느냐, 내 일찍이 나를 떠나보냈던 꿈의 짐들로 하여 모든 응시들을 힘겨워하고 높고 험한 언덕들을 피해 삶을 지나다녔더니, 놀라워라. 가장 무서운 방향을 택하여 제 스스로 힘을 겨누는 그대. 기쁨을 숨긴 공포여, 단단한 확신의 즙액이여.

보아라, 쉬운 믿음은 얼마나 평안한 산책과도 같은 것이냐. 어차피 우리 모두 허물어지면 그뿐, 건너가야 할 세상 모두 가라앉으면 비로소 온갖 근심들 사라질 것을. 그러나 내 어찌 모를 것인가. 내 생 뒤에도 남아 있을 망가진 꿈들, 환멸의 구름들, 그 불안한 발자국 소리에 괴로워할 나의 죽음들.

오오, 모순이여, 오르기 위하여 떨어지는 그대. 어느 영혼이기에 이 밤 새이도록 끝없는 기다림의 직립으로 매달린 꿈의 뼈가 되어 있는가. 곧이어 몹쓸 어둠이 갇히면 떠날 것이냐. 한때 너를 이루었던 검고 투명한 물의 날개로 떠오르려는가. 나 또한 얼마만큼 오래 냉각된 꿈속을 뒤척여야 진실로 즐거운 액체가 되어 내 생을 적실 것인가. 공중에는 빛나는 달의 귀 하나 걸려 고요히 세상을 엿듣고 있다. 오오, 네 어찌 죽음을 비웃을 것이냐 삶을 버려 둘 것이냐, 너 사나운 영혼이여! 고드름이여.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 전문


시의 초반부의 달의 모습은 전에 언급했던 非생명체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뒤에 보이는 달의 모습은 <귀>로 형용된다. 귀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생한 생명의 한 근간을 이루며 인간과 세계를 연결시킨다. 이렇게 非생명체에서 생명의 즙액으로 化하기 위해서는 고드름 같은 <사나운 영혼>이 필요하다. 이 때의 사나운 영혼은 모순을 몸으로 극복하여 <확신의 즙액>을 가슴속에 고이 담고 있어야 하며, <밤의 그 외로운 천형>을 견디며' 기꺼이 매달려 있을 정도로 세상을 축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사나운 모습을 기형도는 순간을 향유하다 사라지는 <고드름>에서 발견한다. 그나마 <고드름>은 일상에서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더 나아가 그것을 신성과 신비가 깃든 환상의 세계로 표현하기도 한다.


저녁노을이 지면
神들의 商店엔 하나둘 불이 켜지고
농부들은 작은 당나귀들과 함께
城안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성벽은 울창한 숲으로 된 것이어서
누구나 寺院을 통과하는 구름 혹은
조용한 공기들이 되지 않으면
한 걸음도 들어갈 수 없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그 城

어느 골동품 商人이 그 숲을 찾아와
몇 개 큰 나무들을 잘라내고 들어갔다
그곳에는……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본 것은
쓰러진 나무들뿐, 잠시 후
그는 그 공터를 떠났다

농부들은 아직도 그 평화로운 城에 살고 있다
물론 그 작은 당나귀들 역시
「숲으로 된 성벽」 전문


<神들의 商店엔 하나 둘 불이 켜지고>는 노을진 어두운 밤하늘에 별들이 하나둘 솟아나고 있는 모습을 은유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데, 램프가 지향하는 것은 기다림이다.

창문에 있는 램프는 집의 눈이다. 램프가 창문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 램프 때문에 또 집 전체가 기다리고 있다. 램프는 기다림의 커다란 표지이다.

이 <평화로운 城> 안에서는 당나귀, 구름, 공기, 농부가 서로 대화하고 한 식구가 되고 있다. 이것은 <非생명체-생명체-극대화한 생명>의 공동체 과정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것은 안타깝게도 <현실-이상-극단적 이상 혹은 환상>의 과정과 같은 궤를 지닌다. 그만큼 희소하고 희박한 비전이 기형도 시가 보여주는 세계관이며 그 희박한 가능성 안에서 시인은 진솔하게 웃고 또 울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희박한 가능성에 온몸을 걸고 사는 존재들을 기꺼이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아아, 사시나무 그림자 가득 찬 세상, 그 끝에 첫발을 디디고 죽음도 다가서지 못하는 온도로 또 다른 하늘을 너는 돌고 있어, 네 속을 열면.
「밤눈」 중에서


그리고 그런 존재들 또는 존재들의 사랑으로 인해 기형도는 <죽음, 고통, 겨울>을 절망의 눈으로만 바라보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


고맙습니다.
겨울은 언제나 저희들을
겸손하게 만들어주십니다.
「램프와 빵-겨울 版畵6」 전문


그리고 생명에 대한 강인한 확신에 도달한다. 나와 사나운 영혼인 <고드름>과 <밤눈>은 遊離된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일부이므로 고드름의 영혼에 모든 것을 맡기고 의연히


나는 살아 있다. 解氷의 江과 얼음山 속을 오가며 살아 있다.
「잎·눈[雪]·바람 속에서」 중에서

하고 외칠 수 있는 것이다. 이 때의 희미한 희망은 이미 시인에게 深淵한 실체를 보여준다.


가라, 구름이여,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해
이제는 어둠 속에서 빈 몸으로 일어서야 할 때
그 후에 별이 지고 세상에 새벽이 뜨면
아아,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 우리는
서로 등을 떠밀며 피어오르는 맑은 안개더미 속에 있다.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 중에서


그리고 이 재구성된 세계 안에서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비가2-붉은 달」)임과 동시에 현실세계로 투영된 모습으로 보면 '밤이면 그림자를 빼앗'기는 '누구나 아득한 혼자'(「노을」)이다.

3. <떠남과 기다림>의 이미지

<희미함>의 이미지의 다른 모습은 <떠남과 기다림>의 이미지이며 <유년·회상>의 이미지이다. 그것은 과거의 이미지이므로 희미하고, 갈망의 대상이므로 역시 희미하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떠남>은 <無目的>의 성질을 근본으로 하거나 해야 한다. <그리움(기다림)>은 이별을 전제하며 다시 재회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의 요소를 담지하고 있다. 이러한 이중의 관계가 기형도가 추구하는 리얼리티이다.


아직도 펄펄 살아 있는 우리는 이제 각자 어디로 가지?
「노을」 중에서


이렇게 화자는 자신 속에 있는 넘치는 생명력을 확인하며 떠나려 하지만 뚜렷한 목적 의식이나 목적지가 없는 <떠남>이다. <無目的의 떠남>은 <무책임한 떠남?과는 다르다. <無目的의 떠남>은 <떠남>을 수단으로 하여 어디로 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떠남>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이다. 문학이 점점 사회나 정신을 訓育시키는 效用論的인 관점에서 문학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순수주의적 관점으로 옮겨지고 있는 현상과 같다. 일단 추후에 다가올 시간은 잊어버리고, 현실을 강하게 부정하고 거기서 떠나야 할 필요가 있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기억이 오면 도망치려네
「그 집 앞」 중에서


화자는 눈을 감고 억지로 떠나려 하고 있다. 태연히 떠나지 못하고 도망치고 있다. 쉽게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훌훌 털고 가볍게 떠나는 자연을 동경한다.


아, 가랑잎 한 장 뒤집히는 소리에도
세상은 저리 쉽게 떠내려간다
「植木祭」 중에서


그런 자연을 닮으려 화자는 자신을 붙잡는 기억 하나 하나를 호명하며 화해를 하고 이별을 하려 한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 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빈집」 중에서


그런 이별이 여의치 않지만 화자는 자신의 더욱 깊은 기억과 내면을 믿고 있다.


턱턱, 짧은 숨 쉬며 내부의 아득한 시간의 숨 신뢰하면서
천국을 믿으면서 혹은 의심하면서 도시, 그 변증의 여름을 벗어나면서.
「비가 2 - 붉은 달」 중에서


그렇게 하여 떠나지만 슬프도록 그리워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떠나버렸던 기억의 공간이다. 즉, 자신의 삶을 재구성해서 진정한 기억을 되찾기 위해 거짓되거나 퇴색돼버린 기억들과 결별하는 것이다.


예술은 완성되기 위하여 자기의 유년기로 돌아온다.

지혜는 우리를 유년 시절로 돌아가게 한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이때의 돌아감은 떠났을 때와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 기형도에게 있어서 그리움의 대상은 인물이다. 어릴 적 죽은 누이와, 여자 골목 대장이었던 <도로시, 잠시 머물다 간 집시>, 그리고 <詩人> 등이다. 非생명체로는 <밤눈>과 <고드름>을 들 수 있겠으나 엄밀히 말하면 그것들은 <그리움>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경이로운 대상>일 뿐이다. 기형도에게 있어서 그리움은 언제나 인간적인 속성을 갖는다. 기형도는 그리운 사람들을 자신의 生 안에 부활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히 화자 자신을 그리워하는 <그리움>의 방편이다. 사실은 화자 자신을 기다리는 것이다.
때문에 어쩌면 있지도 않았을 인물을 추억 속으로 꾸며서 만들어 내기도 하고, 그리워하던 인물과 실제 재회를 해도 어떤 감흥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완전히 그를 잊었다. 그는 그 해 가을 우리 마을에 잠시 머물다 떠난 떠돌이 사내였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는 우리가 꾸며낸 이야기였을지도 몰랐다.
「집시의 詩集」 중에서

너는 그 머나먼 대륙으로 떠나기 전에 딱 한번 우리 마을에 들렀었다. 가엾은 도로시. 너는 오지 말았어야 했다. 우리는 벌써 네가 필요 없었다. 너는 주근깨투성이, 붉은 머리의 말라깽이 소녀에 불과했다.
「도로시를 위하여 - 幼年에게 쓴 편지」 중에서


이렇게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나서 다시 자신으로 되돌아오는 원 운동을 기형도는 그의 시 속에서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좀 더 큰 원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하면서 자신이 겪었던 모든 기억들과 인물들을 불러모은다.
<詩人>은 기형도가 그리워하는 대상 중 가장 미지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는 「詩人 1」을 통해서 자신이 꿈꾸고 있는 詩人像을 그리고 있다.


나의 魂은 主人없는 바다에서 一萬 갈래
물살로 흘렀다. 一千 갈래는 고기떼로 표류
하였다. 그 중 너덧 마리는 그물에 걸리었다.
한 마리는 물에 오르자 곧 물새가 되어 날아갔다.
부리가 흰 물새는 한번도 울지 못하고 죽었다.
그는 하늘에 올라가 구름이 되었다. 물새의 魂은
九萬里 공중을 날다가 비가 되었다. 내릴 데
없는 물 같은 비가 되었다.
「詩人 1」 전문


4. 유년·회상의 이미지


기형도의 유년은 그가 표출하는 <기다림>의 원형이다. 그 때부터 그는 숙명적으로 기다림을 업으로 삼을 존재가 될 것임을 인식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의 詩 속에는 그런 원형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엄마 걱정」 전문


여기서도 그리움의 대상은 엄마이지만 엄마로 표출된 화자 자신을 더욱 그리워하고 있다. 이것은 「바람의 집 - 겨울 版畵 1」을 통해 더욱 극명히 드러난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바람의 집 - 겨울 版畵 1」 중에서


결론


지금까지 기형도 시에 내재해 있는 <희미함>이라는 이미지를 통해서 기형도가 파악하는 세계에 대한 觀을 고찰해 보았으며, 그것이 <여행, 방랑, 이별, 그리움, 기다림> 등의 불확실성을 갖고 있는 이미지들로 顯現하면서 풍성한 <희미함>의 이미지를 발현하고 있다. 이 때 이별은 자기 자신과 이별함을 뜻하며 여행은 무목적의 여행이지만 결국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기 위한 여행이었음이 밝혀졌다. 즉, 재창조된 자신으로의 회귀를 말함이다. 기다림 또한 여러 인물들을 기다린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철저히 자신을 기다리기 위한 장치가 마련되어 있음도 확인하였다. 그것이 유년의 회상일 때는 더욱 여실히 나타난다.
우리가 지금까지 기형도를 바라본 모습은 시인 자신도 알지 못하는 세계를 같이 바라보자는 입장에서가 아니라 시인이 남겨 놓은 것들을 해부하는 선에서 그쳤으니 그것이 아쉬운 점이다. 시는 독자에게서 언제나 시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래서 시를 논하는 사람은 시로써 시를 논해야 한다. 이것이 시 연구가 다른 연구와 차별되는 점이라 생각한다. 시인이 바라보는 광활한 미지의 세계에서 우리가 눈치챌 수 있는 부분은 아주 협소하리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죽은 시인과 남겨진 시인 혹은 시 독자들이 지향하는 바는 근본적인 입장에서는 같아야 하며 최소한 시인의 이 고백을 들어줄 정도의 정직성은 갖추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맹장을 달고도
草食할 줄 모르는
부끄러운 動物이다
긴 설움을
잠으로 흐르는 구름 속을 서성이며
팔뚝 위로 靜脈 드러내고
흔들리는 靈魂으로 살았다.

빈 몸을 데리고 네 앞에 서면
네가 흔드는 손짓은
서러우리만치 푸른 信號
아아 밤을 지키며 토해낸 사랑이여
그것은 어둠을 떠받치고 날을 세운
네 아름다운 魂인 것이냐

이제는 뿌리를 내리리라
차라리 웃음을 울어야 하는 풀이 되어
부대끼며 살아보자
발을 얽고 흐느껴보자

맑은 날 바람이 불어
멍든 배를 쓸고 지나면
가슴을 올쿼 솟구친
네가 된 나의 노래는 떼지어 서걱이며
이리저리 떠돌 것이다.
「풀」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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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5-11-23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논문같아요... ^^;;; 멋진 리뷰 잘 읽었습니다..

승주나무 2005-11-23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쓰면서 전집이 찢어져라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옛글을 뒤척이다가 발견했어요. '옛' 해봐야 그리 오래 되진 않았지만.. 암튼 감사합니다.^^

로드무비 2005-11-23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저하게 배제된 동양적 성향, 맞아요.
그의 시를 좋아하면서도 그런 점은 부인하기 어렵지요.
잘 읽고 갑니다.
라주미힌님 따라 왔습니다.^^

승주나무 2005-12-01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반갑습니다. 안도현 시인은 한때 좋아하다 지금은 헤어진 시인이며, 기형도는 지금 서먹서먹한 시인입니다. 제가 백석과 바람을 피고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