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또예프스끼 전집 - 전25권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외 22명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6월
평점 :
절판


오래전부터 그의 작품과 인생을 내 인생과 관계시켜서 주시했는데, 그것이 하나의 말을 이룰 만큼 그럴듯해졌기 때문에 쓴다.
먼저 기질, 성격, 분위기의 면에서 유사하다. 약간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에다가 니힐리즘적인 면이 그러한데, 이것은 내가 부정할 수 없다. 인물로 따지자면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라고나 할까? 게다가 도스또옙스끼(이름이 너무 치기 어렵다. 개스끼라고 하면 좋을 것 같은데, 건 너무하고 줄여서 도스끼라고 함)의 작품에 끊임없이 나오는 핵심 재료는 라스꼴의 친구 재간꾼이자 농담꾼 라주미힌(이름이 맞는지 불분명함)의 성격도 나는 갖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아주 침울해지기도 잘하지만 수월히 거기서 빠져나오기도 하고 운명의 명령으로 오랜 시간동안 그 안에 있어야 할 때도 있다. 게다가 '대인관계에서 위력을 발하는 농담의 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를 예의 주시하거나 예민한 사람들은 '능구렁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무도 누나 같은 사람은 '오버'라는 수식을 붙이기도 하는데 그러한 성격이 제일 두드러지는 순간은 아마 나와 한주먹성을 붙영놔둘 때가 아닌가 한다. 도스끼의 그러한 면에서 나오는 좋은 점들은 솔직히 내가 물려받고 싶은 거이기도 하고, 내가 영향을 받기도 한 것 같은데, 근본적인 성격이 맞물려야 그런 것이 가능하므로 아무튼 이것이 닮은꼴 베스트원이다.

두번째는 천박한 내 언어로 말하자면 '만병(晩兵)-만학의 구조를 살짝 따다가 지은 말'이라고나 할까? 나는 스물 여섯에 군에 들어갔었고, 도스끼는 서른 즈음인지 훨 넘어서인지 한번 더인지 암튼 무~쟈게 늦게 군대에 갔다. 그것은 도스끼의 인생 중에서도 전환점이 되며 그의 문학적인 측면으로 봐서도 연구가들은 전환점이라고 말하고, 그의 인생처럼 극적인 입대였다. 자세히 말하지는 않겠지만 도스끼 연구가들은 그의 문이 군대 사건을 중심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고 했다. 특히 나는 후기를 많이 좋아한다. 이보다 더 비슷해지기 위해서는 나는 군대가서 새파란 고참들한테 오만가지 능멸과 조롱을 당해야 하는데, 제발 그것은 닮고 싶지 않다.

세번째는 슬픈 거이기도 한 신체적 결함이다. 이점을 확대 해석하면 도스끼와 나의 만남의 문이 될 것 같다. 신체적 결함이라고 하기에는 내가 너무 건강한 편이지만 우격다짐으로 말을 더 하자면, 도스끼는 만성 간질을 앓았고 그 구체적인 시기는 자신이 선택하기도 하였을 테지만 대개 운명의 명령을 받았다.
늦게 깨달은 사실이지만 나는 사위(斜位) 증상이 있다. 생활상 거의 무리가 없는 증상이긴 하지만 작은 상을 지속적으로 쳐다보는 데는 무리가 많다. 게다가 작은 상을 지속적으로 쳐다보는 것을 업으로 삼을 경우는 가히 치명적이다. 약간 말을 더 하자면, 왼쪽 동공과 오른쪽 동공이 각도를 서로 협의해서 나오는 삼각형의 똥침으로 상을 쳐다보게 되는 게 일반적인 경우이다. 특히 책을 읽을 때는 왼쪽 동공과 오른쪽 동공이 더욱 긴밀히 협상해야 한다. 그런데 나의 경우는 왼쪽 동공과 오른쪽 동공이 불화하기 때문에 똥침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고 삼각형도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아서 엇갈린 엑스(X)자가 된다. 그것을 책의 글자라는 상에 비추면 당연히 글자가 붕 뜨게 되고 왼쪽 동공과 오른쪽 동공이 티격태격하는 만큼 출렁출렁하기 때문에 더 독서를 할 수 없다. 이것은 또 네번째 닮은꼴에 들어가야 할 테지만, 나같이 예민하고 섬세한(예민함과 섬세함의 차이점은 잘 모르겠지만) 기질을 가진 사람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에 휘말려 각종 합병증을 일으킬 위험이 크다. 지금도 그것 때문에 거의 하루 종일 신경을 쓰고 있어서 몸에서 꾸물럭꾸물럭 이상한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무도 누나가 '건강에 신경쓴다면'이라는 리플을 달았을 때 의미가 심장해서 죽는 줄 알았다.
이 상황에 대한 나의 대처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로 40만원에 해당하는 프리즘 안경을 써서 왼쪽 동공과 오른쪽 동공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고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대책이 아니란 점에서 '고래와 무리다'.
두번째는 서울에 있는 병원에서 안과 전문의와 상담을 추진하는 것인데, 이것은 군대 입대 시기와 관련돼 있기 때문에 불투명하다.
세번째가 가장 나닮은 대책인데, 과학적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나의 간절한 갈망으로 대처하고 있다. 나는 갈망의 힘을 믿는다, 믿고 싶다. 그것을 여친에게 얘기했더니 끄덕끄덕 하면서도 못내 미적지근함을 감추지 않기는 하였지만, 그 갈망을 통해서 연속해서 최고 세시간 정도 되는 눈밧데리의 힘을 얼마간 더 연장시킬 수 있었다. 이것도 역시 불투명하기는 마찬가지지만. 눈밧데리가 한 번 방전이 되면 일단 시원한 풍경을 찾아서 밖으로 나가는데, 다시 충전될 때까지는 얼마를 기다려야 할지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아마 내 생각에 한잠을 자야 돌아오는 것 같았다. 최악의 경우 내가 하루동안 줄 수 있는 눈의 힘은 세 시간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무리해서 나아갈 경우 눈의 크기를 아주 작게 해서 상을 억지로 꿰맞출 수는 있지만 그렇게 되면 나의 안면근육과 표정에 문제가 생긴다. 나는 눈을 크게 떠야 된다고 울엄마는 누누히 강조한다. 안그래도 엄청 강한 인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안경으로 커버해서 평생 렌즈 끼는 것도 주저하는데, 인상까지 더 더러워지면 그야말로 '난몰라'이다. 하 하 하 하 하 하 '어쩜좋아'다.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당태종은 장군상이어서 아주 강인한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신하들이 두려워서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고 하는데, 하루는 당태종이 최측근 신하에게 물었다. 그 신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고, 그것을 고치기 위해 한동안 하루에 한두시간씩 거울 앞에 서서 인상 예쁘게 하는 연습을 꾸준히 했다. 그 결과 인상이 좋아지게 되어 신하들이 맘놓고 말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사위의 한 원인-최소한 발견하게 된 원인-은 도스끼에게 있다.
2000년 여름의 일이다. 문학동아리에 있으면서 마지막으로 했던 행사가 '독서토론회'였는데, 내 후배 역시 도스끼를 마음에 들어하고 있었으므로 작가를 도스끼로 정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 '죄와 벌', '백치', '악령', '까라마조프 형제들' 등의 작품을 2주마다 토론에 붙이느라고 그 여름 내 손에는 도스끼의 책이 떠날 날이 없었다. 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후기 장편의 경우 단행본으로 따지자면 1000~2000페이지에 해당하기 때문에 위에 있는 굵직굵직한 책을 모두 합하면 적어도 5000페이지는 될 것이다. 아마 '까라마 형제들'을 마지막으로 토론하기 하루 전날이었던 것 같은데, 일이 있어서 미루다가 전날 1000페이지를 한꺼번에 읽었다. 그 때 글자가 상당히 깨졌기 때문에 책을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나의 미신으로 보아, 그것은 도스끼가 나에게 선사한 선물이라 생각한다. '너는 너무 걱정거리가 없어서 굵직하고 심오한 글줄을 만들어내기 힘들어. 그러니까 이거 하나 달고 힘좀 내렴.' 하고 도스끼가 자주 속삭이는 소리를 다른 귀로 듣는다.

다섯번째로 신비스런 호기심이다. 물론 작가라면 당연히 갖춰야 할 생명의 원천이지만, 나도 좀 유난하다는 생각이 든다. 뒤에 나올 끝내망설임장에서 내 호기심의 진수가 드러난다.
도스끼와 내가 다른 점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하나 고르자면 그 사람은 극적인 인생을 꽉 채운 사람이었고, 나는 살아있는 소시민인 관계로 이리저리 쏠리는 반거충이라는 점. 반거충이는 반거들충이라고도 하는데 무엇을 배우다가 다 이루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이란다. 꼭 나를 가리키는 단어인 것 같아 뜨끔하다. 이외에 내가 좋아하는 우리말은 '음전하다'는 말이다. 이것은 김수영 산문집에서 처음으로 봤는데, '말이나 행동이 곱고 점잖다'는 뜻이다. 이것 또한 내가 결여된 것 같아 못내 아쉽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나는 아이와 많이 닮은 어른이 아이들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아이와 멀어진다고 해서 그에게 어른이라는 칭호를 줄 수는 없다. 우리는 '어른스럽다'*에 대한 이상한 견해를 갖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은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들레르는 유년 시절 큰누이나 엄마의 품 안에서 오랜 시간 보호되지 못한다면 그가 아무리 위대한 천재라도 얼마간은 무미건조할 수밖에 없다고 조심스럽게 말한 적이 있는데, 이말처럼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천재여도 인간적인 감동을 주는데 한계가 있으며 정이 떨어질 것 같다. 지금 내가 의문에 부친 점은 다름아닌 '루소'**라는 사람인데 그가 아이를 좋아하는지 좋아하지 않는지는 끝내 해결을 보지 못했다. 이에 대한 보다 명쾌한 설명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을 기다린다.
도스또는 아이들을 주제로 한 소설을 쓰기로 마음 먹었으며 그것을 까라마 형제들에서 완벽하게 표현해 냈다. 그것을 쓰기 위해 아동연구가이자 의사인 벗에게 편지를 보내서 아이들에 대한 당신이 아는 모든 자료를 보내 줄 것을 간절히 부탁한다. 그래서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까라마 형제 안에 넣을 수 있었고 그것이 또한 까라마 형제의 핵심 주제를 형성한다. 뿐만 아니라 까라마 형제의 백미인 법정 안에서의 변호인 최후 변론에서는 실러의 '군도'라는 작품을 인용하며 유년 시절에 대한 중요성을 부각하며 이반과 알료사의 진지한 대화 안에서도 '어린이'와 유년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고 있다. 나도 그렇게 아이들을 좋아하고 싶다. 마냥 마음만으로 좋아하는 게 아니라. 이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 뒷부분에 별록을 첨가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도스또는 희와 비와 미와 신비와 사랑 등 모든 인간적 고민을 한몸에 집중시킨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내가 그를 닮으려고 하는 이유다.
나는 도스또옙스끼를 사랑한다.

요번에 서점에서 도스또의 아내인 안나가 쓴 남편의 이야기를 본 일이 있는데, 그것도 재미있었다. 틈틈히 가서 다 읽어야겠다. 여친이 김승옥 소설은 맘잡고 읽어보라고 하는데 읽을까 말까 고민중이다. 너무 철학적이고 어려운 책만 읽는다고 작은 누나도 말했는데, 이렇게 가다가는 또 치우쳐서 균형을 잡기 힘들 것 같다. 소위 통속이라는 것도 한 번 읽어봐야겠는데, 이런~ 나는 아직도 고전(古典)에 고전을 거듭하고 있다우.
역시 밥을 먹었더니 문체도 늘어진다. 더 쓸까말까 고민중인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맞아! 아는지 모르겠지만 나 하나로 통신 일 짤렸다. 원래 4팀으로 운용하고 있었는데, 제주도의 신구간 때문에 8팀으로 만들면서 내가 투입되었다. 그런데 4팀으로 정상 운영할 수 있으니까 나는 필요없다고 하더라. 돈벌어서 대학원 등록금 빚진거 갚으려고 했는데, 그것이 끝내 아쉬울 것 같다. 이러한 결말은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인데, 생각해보면 참 그럴듯하고 내가 소설을 쓴다고 하더라도 이 결과만큼 극적이고 바람적이고 현명한 것은 없으리라고 확신한다. 나는 나의 인생을 주무르는 신적인 존재를 깊이 신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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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 전집 1 - 소설 다시 읽는 우리 문학 10
김유정 지음 / 가람기획 / 2003년 10월
평점 :
품절


서론


김유정 하면 떠오르는 것은 우선 남다른 문체와 해학성, 소박한 인물 창조, 시골 농촌의 내외(內外)를 꿰뚫은 묘사 등이다. 이런 것들이 한데 모여 그만의 강력한 개성을 만들어 낸다. 사실 소설가를 비롯하여 예술 종사자들에게 개성만큼 소중한 것은 드물다. 그러나 그의 소설을 목가적인 소설이니, 농촌소설, 순수문학 하는 말로 치부하려는 경향에 대해서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기존의 유정에 대한 평가는 다소 산만한 점이 없지 않다. 일단 유정의 소설 탐색을 질서 있게 구획하고 있는 평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필자는 이에 유정의 소설이 명백한 소설론 위에 씌어진 것이라는 점을 보이고자 한다. 유정의 소설을 보면 몇 가지 공통되는 사실을 얻을 수 있다. 첫째는 구연체(口演體)와 같이 끊어지지 않고 일정한 호흡을 유지하면서 나름대로의 억양을 살린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의 언어의 문제를 검토하며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대부분의 소설에 나타나는 해학성이다. 해학성 또한 구분 없이 쓰이는 경향이 없지 않은데, 이 글에서는 그의 해학을 세 가지로 구분할 것이다. 처절한 현실감의 증폭, 한국인 특유의 건강함, 생명의 치열한 몸부림이 그것이다. 이것은 그의 해학이 미적 기교가 아니라 사회 구조의 모순·갈등과 긴밀하고 극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셋째는 등장인물 군(群)이 향인(鄕人)이나 따라지 등 소시민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또한 유정 소설의 인물 계보를 분석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넷째는 사실적 소설 쓰기이다. 유정 소설의 한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실존 인물의 원용 또는 변용, 실제 지명 등의 사용이다. 이 점은 리얼리티를 확고히 한다는 점에서도 장점이 되고 있다.
유정의 소설은 이른바 '순수문학'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에는 '들어갈 수 있는 것'과 '들어갈 수 없는 것'이 구분되어 있다. 그가 순수문학을 의식적으로 취한 것은 역사적 사실과 연관해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것에 대한 일례로 참여와 순수의 역사를 보자면, 참여가 강력하기는 하지만 얼마 안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순수는 인류의 탄생기부터 끊임없이 변모해 왔고, 그 안에서 참여를 낳기도 했다. 그래서 순수와 참여의 관계는 극단적인 갈등 관계가 아니다. 궁극적으로 모든 인간은 혹은 인간과 관련된 것은 순수하다. 특히 당대처럼 문학에 대한 탄압이 무시무시했을 때는 외부적인 안식처가 된다. 순수를 외부적인 안식처라고 했다고 해서 현실도피인 것은 아니다. 순수로 사회모순을 그려 낼 수 없다는 판단은 순수라는 그릇을 제대로 보지 못한 편견일 따름이다. 그리고 어느 평자의 말처럼 그 시대의 거의 모든 소설들은 그 시대 나름의 어드밴티지(advantage)를 부여해야만 읽을 수 있다. 우선 시의성도 시의성이어니와 어디를 가나 진지하고 암울하기 때문에 읽는 맛이 나지 않는다. 그러한 의미에서 유정의 해학은 하나의 발견에 속한다.
전기(前記)한 바와 같이 필자는 유정이 소설언어에 대한 자각이 있었음을 인정하면서, 먼저 그의 시대 상황과 개인사를 살펴본 후, 작품을 분석하며 몇 가지 특징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통해 김유정이라는 작가의 면모를 드러내 보고자 한다.
이 글에서 다룰 작품은 자전소설인 『생의 伴侶』, 『두꺼비』, 그리고 어느 정도 완성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나, 해학이 곧잘 드러나 있는 작품, 인간의 내면을 탐구한 작품인 『산ㅅ골 나그내』, 『총각과 맹꽁이』, 『노다지』,『소낙비』, 『금따는 콩밧』, 『떡』, 『만무방』, 『솟』, 『봄·봄』, 『안해』, 『가을』, 『땡볕』『봄과 따라지』등이다.

본론


1. 시대상황
ㄱ. 문화운동의 수난
1930년대는 농민의 수난사와 문학계의 변화가 주목된다 .
1930년대에 들어와서 일본 제국주의 세력들은 또다시 야망의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일찍이 1910년에 완전히 한국을 독점 식민지화하는데 성공하고, 1931년 또다시 중국대륙으로 진출했는데 그것이 만주사변(滿洲事變)*이다.
이러한 침략전쟁에 임하며 일본군은 약해진 후방을 이용해 항일민족주의세력(抗日民族主義勢力)이 다시 일어날 것을 두려워해 한층 험악한 탄압정책(彈壓政策)이 개시했다. 3.1운동 이후 얼마동안 그들이 표방했던 문화정치는 자취를 감추고 일본도(日本刀)를 찬 경찰이 백성들을 마구 탄압하고 우롱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새로운 정책 속에 한국의 문화계는 이전보다 더 심한 탄압과 구속을 받게 되었는데, 그에 대한 구체적 현상은 집회의 자유, 출판의 자유, 언론의 자유에 대한 구속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가장 중대한 사건은 KAPF** 맹원들의 검거였다. 만주사변을 일으킨 바로 그해, 1931년 2월부터 8월 사이에 주요 KAPF 멤버 70여명이 검거되고 1934년에 이르러 2월부터 12월까지 약 80명이 다시 검거됨으로써 마침내 내리막길에 있던 KAPF는 해산되고 말았다. (1935년 5월 22일 당국에 해산계를 제출함)
또 제1차로 KAPF 멤버들이 검거될 때 좌익적(左翼的) 또는 민족주의적(民族主義的) 경향을 함께 지녔던 문인들의 단체인 신간회(新幹會)***도 해산되고 말았다.

*만주사변(滿洲事變)
) 1931년 9월 18일 류타오거우 사건(柳條溝事件)으로 비롯된 일본 관동군(關東軍)의 만주(지금의 중국 동북부)에 대한 침략정책. 만주에는 러·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이 획득한 특수권익이 있었으나, 중국의 국권회복운동이 거세게 일고, 소련이 1928년부터 추진한 제 1차 5개년계획의 진척 등이 관동군을 자극하여, 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 대좌 등이 중심이 되어 전만주를 점거할 계획을 모의하였다. 이들은 그 구실을 만들기 위해 봉천(奉天; 현 瀋陽) 외각의 류타오거우에서 스스로 만철(滿鐵) 선로를 폭파하고 이를 중국측 소행이라고 트집잡아 만철 연선(沿線)에서 북만주로 일거에 군사행동을 개시하였다. 일본군은 32년초까지 거의 만주 전역을 점령하고, 같은 해 3월 1일에는 일본의 괴뢰국가(傀儡國家)인 만주국의 성립을 선포하여 만주를 일본 침략전쟁의 병참기지로 만들었다. 국제연맹은 중국측의 제소(提訴)에 따라 리튼 조사단을 파견하고 그 조사보고서를 채택, 일본군의 철수를 권고하였으나, 리허성[熱河省]마저 점령한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33년 3월 국제연맹을 탈퇴하였다. 이를 계기로 일본 정국(政局)은 정당내각(政黨內閣)에 종지부를 찍고 파시즘 체제로 전환하였으며, 이 침략행위는 37년의 중일전쟁과 41년의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었다.

** KAPF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朝鮮 Proletariat 藝術家同盟)의 약칭.
1925년 8월 박영희(朴英熙)·김기진(金基鎭)·이호(李浩)·김영팔(金永八)·이익상(李益相)·안석영(安夕影)·송영(宋影)·이기영(李箕永)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모임. 그 이전, 22년 이적효(李赤曉) 등의 염군사(焰郡社)를 중심으로 한 활동, 23년의 박영희·김기진 등의 신경향파(新傾向派) 문학단체인 파스큘라(PASKYULA)의 운동이 있지만 이렇다할 활동을 찾아보기 어렵다. 카프가 사회적 거취를 분명히 한 것은 26년 《문예운동(文藝運動)》이라는 기관지를 내면서부터인데 소련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본뜬 이 운동은 몇 차례의 방향전환을 거듭하면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1차 방향전환은 27년의 자연발생적인 단계에서 계급 이데올로기에 의한 뚜렷한 목적의식을 강조하는 단계였고, 2차 방향전환은 31년을 전후하여 소장파들이 헤게모니를 잡아 카프를 초강경 노선으로 끌고 간 데서 시작되었다. 일체의 중도적 타협주의를 배격하고 전투적 계급주의를 내세웠으며 <전위(前衛)의 눈으로 사물을 보라>는 등의 명제를 제시하였는데, 이 때의 중심인물은 안막(安漠)·김남천(金南天)·임화(林和) 등이었다. 다음에 온 전환은 이른바 검거사건으로 이어지는 35년의 해산이었다. <무산자(無産者) 사건>·영화 <지하촌(地下村) 사건> 등이 발단이 되어 1931년 2월부터 8월까지 70여명이 검거되었고, 34년 2월부터 12월까지 80여 명이 검거되었는데, 이것은 세칭 <전주(全州) 사건>이라는 어느 연극단체의 삐라 살포가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이로써 카프는 35년 5월에 이르러 경찰당국에 해산계를 내게 되는데, 짧은 기간 동안 갓 도입한 이론에 대해서 활발한 논쟁을 벌인 반면, 거기에 수반하는 문학작품은 거의 생산하지 못하였다.

***신간회(新幹會)
1920년대 후반의 대표적인 항일단체. 1927년 2월 <민족 단일당 민족협동 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민족·사회 양주의자가 제휴하여 창립한 민족 운동단체이다. 안재홍(安在鴻)·백관수(白寬洙)·신채호(申采浩)·유억겸(兪億兼)·신석우(申錫雨) 등 34명이 발기인이 되어 초대 회장에 이상재(李商在), 부회장에 권동진(權東鎭)을 선임하여 출범하였다. 신간회는 <우리는 조선민족의 정치적·경제적 해방의 실현을 기함><전민족의 현실적 공동이익을 위하여 투쟁하기를 기함>이라는 정강정책(政綱政策)이 밝힌 바와 같이, 일제하의 합법단체이면서도 비타협적이고, 투쟁적이며, 급진적인 행동강령을 내세운 민족적 대표기관이었다. 여기에는 좌익계를 포함한 전민족 진영이 가담하여 전국에 200여명의 지회(支會)·분회가 조직되어, 30년 현재 회원수가 약 3만 9,000에 이르렀다. 신간회는 일본에까지 조직된 각 지회를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일본의 《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는 <배일선인(排日鮮人)> 가운데 저명한 인물은 거의 여기에 가입하였고… 이들이 집회 등에서 하는 언동으로 보아 이 운동의 도달점은 조선의 독립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반항적 기세를 선동하여 사안(事案)의 분규 확대에 힘쓰고…>라고 신간회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는 이를 계기로 독립운동을 지향한 민중대회를 열기로 하고 이를 계획하다가 조병옥(趙炳玉)·이관용(李灌鎔)·이원혁(李源赫) 등 44명이 체포되어 신간회의 뿌리가 흔들렸다. 한편, 신간회의 중앙간부진용이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은데 불만을 품은 좌익계가 민족주의계의 중요 간부들이 각종 사건에 관계되어 투옥된 사이를 이용하여 해산운동을 벌여 1931년 5월, 5년만에 해산되었다.




ㄴ. 출판사업의 융성
이러한 일제의 엄격한 통제도 문화 전반을 억제하지는 못했다. 서구문명의 도입과 그 발전은 30년대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빠른 템포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흐름의 원인은 전국민의 독립의지에서 비롯되고, 그 구체적인 행동은 서구의 고급문물에 대한 무조건적 수입이었다. 일제를 자극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문화는 얼마든지 발전해 갈 수 있었다. 1929년에는 「삼천리(三千里)」, 「문예공론(文藝公論)」, 「조선문예(朝鮮文藝)」 등이 창간되었는데 30년데에 들와 와서도 이와 같은 출판문환는 나날이 번성해갔다. 「신민(新民)」, 「신인간(新人間)」, 「신동아(新東亞)」, 「동광(東光)」, 「비판(批判)」, 「혜성(彗星)」, 「실생활(實生活)」, 「신계단(新階段)」, 「중앙」, 「학등(學燈)」 등의 크고 작은 잡지들이 30년대 들어와서 발간되기 시작했고, 1935년에는 문예지 「조선문단(朝鮮文壇)」의 복간, 1936년에는 「문장(文章)」과 「인문평론(人文評論)」의 창간을 보게 되었다.
이렇듯 1930년대 말기에 이르러서는 작품이 없어서 출판을 못할 정도로 작품활동이 극도로 팽창하여 외세의 제한을 뚫고 발전해 갔다.

ㄷ. 농촌의 수난
농촌의 궁핌화는 토지수용(土地收用)-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植株式會社)-식량 수탈-고리채 등의 과정을 밟아 행해진다. 일본의 한국 토지 조사는 1910년에 시작되어 1918년에 끝난다. 그것은 <일본인의 사적(私的) 토지 수탈의 근거를 마련>해 준다. 그 토지 수탈은 1911년 토지수용령(土地收用令)에서부터 본격화 된다. 그렇게 수탈된 토지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거쳐 일본 농민들에게 배부된다. 합방 전에 동척(東拓)에 투자된 2,430정보가 1914년에는 653,956정보로 늘고, 1918년에는 다시 4500정보가 늘 정도로 토지 수탈은 악랄하게 행해진다. 1919년 이후에는 상당량의 토지를 빼앗긴 한국 농민들에게 식량 수탈이 시작된다. 한국쌀을 빼앗아간 대신에 한국 농민들에게는 만주의 잡곡이 주어진다. <총독부는 산미 증산 정책을 통해 한국 농민으로 하여금 자기가 먹지 않을 수 없는 긴박한 조건에 묶어> 놓은 것이다. 또 농민의 궁핍화를 촉진한 것은 고리대(高利貸)인데, 그 고리 대금은 대부분 일본 은행의 산업 자금이다. 그 결과 농민의 궁핍화는 극대화된다. 1930년의 조사에 의하면, 전소작농의 75%에 이르는 농민이 빚을 지고 있는데, 그것은 식산은행(殖産銀行)의 것이 39.2%, 동척(東拓)의 것이 14.6%, 금용 조합의 것이 17.4로 합계 70%를 넘고 있으며, 이자는 연 15∼35%의 것이다. 그 결과 농촌에서는 자작농의 감소와 소작농의 증가라는 계층적 분화가 촉진되며, 이농·이민현상이 생겨난다. 다음의 표는 그 실상을 잘 보여준다.

<표1> 1925년도 이농자
(1) 산업으로 분산 : 23,728(15.82%)
(2) 공작 잠업으로 분산 : 6,879(11.24%)
(3) 노동자·고용인 : 69,644(46.39%)
(4) 일본 이주 : 25,308(16.85%)
(5) 만주·시베리아 이주 : 4,224(2.88%)
(6) 가족 분산 : 6,835(4.55%)
(7) 기타 전업 : 3,492(2.27%)
합 150,112(100%)


이농자의 반 이상은 도시에 나아가 프롤레타리아트가 된다. 농촌이 빈곤해지니까 도시까지 빈곤해진 것이다. 1929년의 통계에 의하면 도시 생활자의 32.11%가 면세자로서 무직·극빈의 상태에 있다. 그 결과 생존권에 대한 투쟁으로 농촌에서는 소작쟁의(小作爭議)가, 도시에서는 노동쟁의(勞動爭議)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2. 작가의 개인사
-문학을 중심으로

김유정의 개인사를 굳이 그의 문학을 통해서 밝히려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인생 여정을 문학 안에 담으려고 했던 의도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독자는 쉽게 지나갈지 모르겠지만, 작가는 은연중에 자신의 출신 지명이나 현존했던 인물들을 혹은 실제 있었던 사실을 소설로 옮겨 놓은 것으로 유명하다. 예컨대 유정소설에 단골로 등장하는 뚝건달 뭉태(『총각과 맹꽁이』, 『안해』, 『봄봄』 등)는 현존했던 건달이며, 『봄봄』에서 데릴사위라는 미명으로 노동수탈을 당하는 사건은 실레마을의 봉필이라는 인물의 딸들과 데릴사위에 얽힌 사건을 따온 것이다.
김유정의 출생지에 관해서는 이설이 많다. 1908년 1월 11일 춘천부(春川府) 남내이작면(南內二作面) 증리(甑里-실레) 427번지 할아버지 김도사(金都事-司馬 任禁府都事)댁이라는 설이 그것이고 아버지가 강원도 춘성면 출신이고 김유정은 서울 출생이라는 설이 있으며 다른 여타의 기록에서는 江原道 春城郡이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의 문학적 여정을 논하므로 출생지에 관해서는 문제를 삼지 않겠다.

옥이는 도사댁 문간에서 개똥어머니를 놓치고는 혼자 우두커니 떨어졌다.
『떡』 중에서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읍에서 한 이십 리 가량 산을 끼고 고불꼬불 돌아들어가면 내닫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앞뒤 좌우에 굵직굵직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힌 아늑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치 음팍한 떡시루 같다 하여 동명(洞名)을 「실레」라 부른다. 집이라야 대개 쓰러질 듯한 헌 초가요, 그나마도 오십 호밖에 못 되는, 말하자면 아주 빈약한 촌락이다.
隨筆, 『내가 그리는 新綠鄕』 중에서

위 글에서 알 수 있듯이 강원도는 유정의 고향이자 문학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의 소설 안에서 고향의 산천은 물론이고 그와 얽혀 지내는 향인들의 삶까지도 구수하고 詩的으로 그려내고 있다. 또 『떡』의 한 부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도사라는 것은 할아버지의 관직명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소낙비』에 나오는 이주사(李主事)도 역시 성만 달리할 뿐 그의 아버지 김주사(金主事-司馬 任軍部主事)에서 따온 것이다. 이렇게 주사인 아버지 김춘식(金春植)과 어머니 청송심씨(靑松沈氏) 사이에 태어났으나, 어머니가 6살 때, 아버지가 8살 때 돌아가신다. 그 후로 형의 난봉과 폭행은 가족을 공포로 몰아넣고 유정의 생애에도 커다란 상처를 남긴다.

그는 사람 대하기를 극히 싫어하는 이상스러운 성질의 청년이었다. 범상에서 벗으러진 상태를 병이라고 한다면 이것도 결국 큰 병의 일종이겠다. ……그는 어려서 양친을 다 여의었다. 그리고 제풀로 돌아다니며 눈칫밥에 자라난 소년이었다. 그러면 그의 염인증(厭人症)도 여기에 뿌리를 박았을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형님이 한 분 있었다. 주색에 잠기어 밤낮을 모르고 난봉꾼이었다. 그리고 자기 일신을 위하여는 열 사람의 가족이 희생을 하라는 무지한 폭군이었다. 그는 아무 교양도 없었고 지식도 없었다. 다만 그의 앞에는 수십만의 철량이 있어 그 폭행을 조장할 뿐이었다.
부모가 물려주는 거만의 유산은 무릇 불행을 낳기 쉽다. 더욱이 이십오륙의 아무 의지도 신념도 없는 청년에 있어서는 더 이를 말이 없을 것이다. 그도 이 예에 벗어나지 않았다.…그는 술을 마시면 집안 세간을 부수고 도끼를 들고 기둥을 팼다. 그리고 가족들을 일일이 잡아가지고 폭행을 하였다. 비녀쪽을 두발로 잡고 그 모가지를 밟고 서서는 머리를 뽑았다. 또는 식칼을 들고는, 피해 달아나는 가족들을 죽인다고 쫓아서 행길까지 맨발로 나오기도 하였다. 젖먹이를 마당으로 내팽개쳐서 소동을 일으켰다. 혹은 아이를 우물 속으로 집어던져서 까무러친 송장이 병원엘 갔다.
이렇게 가정에는 매일같이 아우성과 아울러 피가 흘렀다. 가족을 치다치다 이내 물리면 때로는 제 팔까지 이로 물어뜯어서 피를 흘렸다.
『生의 伴侶』 중에서

이 소설은 유정이 죽기 전에 자전소설로 쓰다가 미완에 그친 장편 중 한 대목이다. 여기에 그의 비극적인 가족사가 한 개인의 성격을 바꾸어놓았다는 사실이 담겨 있다. 그의 소설 중에는 유난히 내외적 억압에 의해서 행동이나 성격이 비틀어진 인물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유정의 개인사와 무관하지 않다.
1920년부터 제동보통학교를 다니고, 1923년에는 4년제 휘문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5년을 다녔다. 조카 영수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유정은 음울한 분위기와 고뇌의 향취가 흠씬 풍기는 러시아 소설을 주로 읽었다고 한다. 1929년 21세의 유정은 연희 전문학원 문과에 입학하고 박록주(朴綠珠)라는 기생에게 구애한다.

그 상대가 화류계의 인물이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명렬군보다는 다섯 해가 위였다. 삼십이 가깝다면 기생으로 한고비를 넘어 시들은 몸이었다. 게다가 외양도 출중나게 남달리 두드러진 곳도 없었다. 이십 전후의 팔팔한 친구로는 도저히 매력이 느껴지지 않을 그런 인물이었다. …그는 자기의 머릿속에 따로이 저의 여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지극히 존경하는 한 여성이 있는 것이다. 그는 그 여성을 저쪽에 끌어내놓고 연모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명주는 우연히 그 여성의 모형이 되고 말았을 그뿐이겠다.
『생의 伴侶』 중에

기생을 사랑하는 대목은 그의 또 다른 자전 소설인 『두꺼비』에도 나오는데, 모두 주인공보다 다섯 이상의 연상이다. 그것은 어렸을 적 여의어 버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사랑 받지 못한 유정이 내는 몸부림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해 연희학원을 중퇴한다. 23세에는 고향에 내려와 야학을 시작한다.

망할 년두 참. 게다가 년이 시큰둥해서 날더러 신식 창가를 가르쳐 달라고 들병이는 구식 소리도 잘 해야 하겠지만 첫째 시체 창가를 알아야 부려먹는다 한다. 말을 그럴 법하나 내가 어디 시체 창가를 알 수 있냐. 땅이나 파 먹던 놈이 나는 그런 거 모른다, 하고 좀 무색했더니 며칠 후에는 년이 시체 창가 하나를 배 가주 왔다. 화로를 끼고 앉아서 그 전을 두드리며 네 보란 듯이 자랑스럽게 하는 것이 아닌가. 피었네 피었네 연꽃이 피었네. 피었다고 하였더니 볼 동안 옴쳤네. 대체 이걸 어디서 배웠을까. 얘 이년 참 나보단 수단이 좋구나, 하고 나는 퍽 감탄하였다.
그랬던 나중 알고 보니까 년이 어느 틈에 야학에 가서 배우질 않았겠나. 야학이란 요 산 뒤에 있는 조그만 움인데 농군 아이에게 한겨울 동안 국문을 가르친다. 창가를 할 때쯤 해서 년이 춘 줄도 모르고 거길 찾아간다. 아이를 업고 문 밖에 서서 귀를 기울이고 엿듣다가 저도 가만가만히 흉내를 내 보고 내 보고 하는 것이다. 그래 가지고 집에 와서는 히짜를 뽑고 야단이지. 신식 창가는 며칠만 좀더 배우면 아주 능통하겠다.
『안해』 중에서

야학을 하면서 아마 우리말과 문화에 대한 위기의식과 사명감을 느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조선의 소박한 군상들을 몸소 부딪치며 소설화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음직도 하다. 그리고 충남 예산(禮山) 금광 등을 전전한다.

꽁보는 더펄이 뒤를 따라오르며 달달 떨었다. 이게 지랄인지 난장인지, 세상에 짜정 못해먹을 건 금점 빼고 다시 없으리라. 금이 다 무언지. 요짓을 꼭 해야 한담. 게다 건뜻하면 서로 뚜들겨 죽이는 것이 일. 참말이지 금쟁이 치고 하나 순한놈 못봤다.
『노다지』 중에서

금광 경험이 유정에게 미친 영향은 인상적이다. 금을 소재로 한 작품만 『노다지』, 『금』, 『금따는 콩밭』이 있는데, 이것은 인간 본능의 한 전형을 말해줄 뿐 아니라 당시 시대상황을 증언하는 귀중한 사건이었다. 일본에서부터 유행한 광산은 조선으로 넘어와 농민들은 빚만 지는 농사 대신 광산으로 뛰어들었고, 『금따는 콩밭』과 같이 밭을 파내기까지 하는 활극을 연출해 냈다. 그만큼 상황이 처참했음을 반증하기도 하거니와 그로 인한 도덕성과 인심의 추락은 유정에게 잊지 못할 기억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소설화했다.
여기까지가 그의 소설에 나와 있는 생애이다. 그 이후로는 서울로 올라와서 작품 활동을 하고 九人會에 가입하고 하는데, 그에 대한 기록은 연보를 참조하기 바란다.

3. 작품론
(1)언어
그의 언어는 해학과 관련하여 더욱 강한 무기가 된다. 그가 쓰는 문장은 표준어라기보다 口語體에 가깝고 그것도 소리나는 대로 적는 경우나, 그 지방의 특성에 맞게 변용되어 쓰는 것을 그대로 원용한 경우여서 김유정 전집을 제외하고는 다른 텍스트들이 모두 표기상의 혼란을 겪고 있다. 일례를 들자면 핀잔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를 전집에서는 <핀퉁이 ;『총각과 맹꽁이』>라고 했으나 소담출판사본(신동욱 외 편)에서는 <핀둥이>라고 기재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각 텍스트의 대조를 통해 알 수 있다.
구어체 문장과 비속어와 육두문자(肉頭文字) 섞인 농촌 어휘가 풍부하게 구사되면서 독특한 묘미를 풍긴다. 독자는 자연스럽게 농촌을 그릴 수 있게 되며 생동감을 느낀다. 『안해』를 보자.

우리가 요즘 먹는 것은 내가 나무장사를 해서 벌어드린다. 여름 같으면 품이나 판다 하지만 눈이 척척 쌓였으니 여름을 꺼먹느냐. 하기야 산골에서 어느놈 치고 별 수 있겠냐. 마는 하루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해들이고 그담날엔 읍에 갔다가 판다. 나니깐 참 쌍지개질도 할 글력이 되겠지만, 잔득 나무 두 지개를 혼자서 번차례로 이놈 저다놓고 쉬고 저놈 저도 놓고 쉬고 이렇게 해서 장찬 삼십 리 길을 한나절에 들어가는구나. 그렇지 않으면 은제 한 지개 한 지개씩 팔어서 목구녕을 추길 수 있겠느냐.

이렇게 짧은 호흡을 유지하면서 리듬감 있게 묘사해 나간다. 마치 옆에서 말하는 강담사(講談士)와 같다.

"빙모님은 참새만한 것이 그럼 어떻게 앨 낳지유?"
『봄봄』
"살재두 나는 인전 안 살 터이유!"
『총각과 맹꽁이』

이 두 상황은 모두 배신을 당하거나 억압을 당하는 주인공의 입에서 나오는 푸념 혹은 비명이다. 그러나 그것이 해학적 언어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웃음과 감동과 싸늘한 현실인식을 동시에 던져준다.

구루루 주는 밥이나 얻어 먹고 몸 성히 있다가 연해 자식이나 쏟아라. 뭐 많이도 말고 굴대 같은 아들로만 한 열다섯이면 족하지. 가만있자, 한놈이 일 년에 벼 열 섬씩 번다면 열다섯섬이니까 일백오십 섬. 한 섬에 더도 말고 십 원 한 장씩만 받는다면 죄다 일천오백 원이지. 일천오백원, 일천오백 원, 사실 일천오백 원이면 어이고 이건 참 너무 많구나,. 그런줄 몰랐더니 이년이 배속에 일천오백 원을 지니고 있으니까 아무렇게 따저도 나보담은 났지 않은가.
『안해』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조금은 엉뚱한 주인공의 생각은 건강한 활력이 되어 힘든 인생사의 한 희망이 된다. 그것은 또한 희망을 가질 만한 것이 이런 엉뚱한 것 밖에 없다는 현실 상황의 반증이 되기도 한다.

(2) 해학
ㄱ. 처절한 현실감의 증폭
김유정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개 꿈쩍 않는 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현실이라는 적이다. 그러나 주인공들은 대개 그것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살아가다 끝내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알기는 하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슬픔으로 그려질 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들이 소박한 심정으로 슬퍼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적 시대적 슬픔까지 아울러서 슬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생활에서 해학을 제거했을 때의 그 살벌한 적나라함은 소름이 끼칠 정도의 것이리라. 해학의 미적 효과는 숭고미의 엄숙성을 부정하는 표현적 기교이고, 중압감이나 고통으로부터 해방하는 효과를 가진다.

역시 떡이 나오는데 본즉 이것은 팟떡이 아니라 밤 대추가 여기저기 뼈저나온 백설기. 한번 덥석 물어떼이면 입안에서 그대루 스르르 녹을 듯 싶다. 너 이것도 싫으냐 하니까 옥이는 좋다는 뜻으로 얼른 손을 내밀었다. 대체 이걸 어떻게 먹었을까. 그 공기만한 떡덩어리를. 물론 용감히 먹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빨리 먹었다. 중간에는 천천히 먹었다. 그러나 이내 다 먹지 못하고 반쯤 남겨서는 작은아씨에게 도루 내주고 모루 고개를 둘렀다. 옥이가 그 배에다 백설기를 먹은것도 기적이려니와 또한 먹다 내놓은 이것도 기적이라 안할 수 없다. 하기는 가슴속에서 떡이 목고멍으로 바짝 치뻗히는 바람에 못 먹기도 한 거지만. 여기다가 더 넣을 수가 있다면 그것은 다만 입안이 남았을 뿐이다. 그러면 그 다음 꿀 바른 주왁 두 개는 어떻게 먹었을까. 상식으로는 좀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여간 너 이것은 하고 주왁이 나왔을 때 옥이는 조금도 서슴치 않고 받았다. 그리고 한놈을 손끝으로 집어서 그 꿀을 쪽쪽 빨드니 입속에 집어 넣었다. 그 꿀을 한참 오기오기 씹다가 꿀꺽 삼켜본다. 가슴만 뜨끔할 뿐 즉시 떡은 도루 넘어온다. 다시 씹는다. 어깨와 머리를 앞으로 꾸브리어 용을 쓰며 또 한번 꿀떡 삼켜본다. 이것은 도시 사람의 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허나 주의할 것은 일상 곯아만 온 굶주린 창자의 착각이다. 배가 불렀는지 혹은 곯았는지 하는 건 이때의 문제가 아니다. 한갓 자꾸 먹어야 된다는 걸삼스러운 탐욕이 옥이 자신도 모르게 활동하였고 또는 옥이는 제가 먹고싶은 걸 무엇무엇 알았을 그뿐이였다. 거기다 맛갈스러운 그 떡맛. 생전 맛 못보던 그 미각을 한번 즐겨보고자 기를 쓴 노력이다.
『떡』 중에서

생전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지 못한 옥이의 눈으로 당시의 가난하고 처참한 세태를 나타낸다. 어릴 적 한문을 배웠던 유정은 "마땅한 생업이 없으면 마땅한 마음이 나지 않는다."는 맹자의 가르침을 알고 있다. 그러한 논리는 순수의 상징인 어린이 옥이에게도 그대로 전달된다. 옥이는 자기 아버지더러 "망할새끼 저만 처먹을랴고 얼른 죽어버려라 염병을 할 자식."이라고 마음속으로 욕한다. 그것은 아버지가 놈팽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가뜩이나 없는 밥을 혼자 너무 많이 먹고 게다가 옥이의 몫까지 먹는 것같이 보였기 때문이다.
인물들이 봉변을 당하는 이유는 인물들이 꾸는 소박한 꿈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삶을 행복하게 살 이유가 있고, 행복을 맛보고 싶은 욕구가 정당하게 표현된다. 대부분 이야기의 반전은 그들의 소박한 꿈이 작용했을 때 정점을 이룬다.

사랑하는 안해가 있었고 아들이 있었고 집도 있었고 그때야 어딜 하로라도 집을 떠러져 보았으랴. 밤마다 안해와 마주앉으며 어찌하면 이 살림이 좀 늘어볼가 불어볼가. 애간장을 태이면 가튼 궁리를 되하고 되하였다. 마는 별 뾰족한 수는 없었다. 농사는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알고 보면 남는 건 겨우 남의 빗뿐. 이러다가는 결말엔 봉변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루는 밤이 깊어서 코를 골며 자는 안해를 깨웠다. 밖에 나가서 우리의 세간이 몇 개나 되는지 세어보라 하였다. 그리고 저는 벼루에 먹을 갈아 붓에 찍어 들었다. 벽을 바른 신문지는 누렇게 끼렀다. 그 우에다 안해가 불러주는 물목대로 일일이 나려 적었다. 독이 세 개, 호미가 둘, 낫이 하나,로부터 밥사발 젓가락 짚이 석단까지 그 담에는 제가 빗을 얻어온데, 그 사람들의 이름을 쭉 적어놓았다. 금액은 제각기 그 아래다 달아놓고, 그 사람들의 이름을 쭉 적어놓았다. 금액은 제각기 그 아래다 달아놓고 그 옆으론 조금 사이를 떼어 역시 조선문으로 나의 소유는 이것밖에 없노라. 나는 오십사 원을 갚을 길이 없으매 죄진 몸이라 도망하니 그대들은 아예 싸울 게 아니겠고 서루 의론하야 어굴치 않도록 분배하야 가기 바라노라 하는 의미의 성명서를 벽에 남기고….
『만무방』 중에서

유정의 소설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설명과 지식인의 등장 등이다. 이 둘은 서로 비슷한 것이기도 하면서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요소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야기에 나오는 중심인물의 지적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감동과 슬픔은 한층 더해진다."고 하였고, 그 후로도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소설에 지식인을 등장시켰다. 그러나 문제는 지식인들이 그 사회의 대표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지식인들은 아직 오지 않은 시대의 대표자가 될지언정 당대사회의 대표자는 될 수 없다는 것이 유정의 지론이다. 그래서 중심인물들은 자기가 겪고 있는 고난의 원인을 파악할 줄 모르며, 파악하는 것조차 염두에 없다. 다만 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이것으로 보아 유정 소설의 무게중심은 희망찬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희망이 좀 덜한 현재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현실의 고난과 갈등은 마땅히 설명할 것이 아니라 소설의 문장으로 이야기하여야 한다. 그런 소설언어 속에서 독자는 주인공 개인의 비참함뿐만 아니라 그 전형을 통해서 당대의 상황을 깊게 이해할 수 있다.

ㄴ. 한국인의 건강함
제목을 한국인이라고 달기는 했지만, 그것은 세계의 서민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건강함일 것이다.

"저 사촌형님께 쌀 두 되 꿔다 먹은 거 부대 잊지 말구 갚우." 하고 부탁할 제 이것이면 필연 아내의 유언이라 깨닫고는,
"그래 그건 염려 말아!"
"그리고 임자 옷은 영근 어머니더러 사정 얘길 하구 좀 빨아 달래우."
하고 이야기를 곧잘 하다가 다시 입을 일그리고 훌쩍훌쩍 우는 것이다.
『땡볕』중에서

이러한 모습은 파스테르나크의 소설 『닥터 지바고』에도 나오는데, 농부들이 지바고의 진찰에 보답하여 닭이니 염소니 달걀이니 하는 것들을 막 싸고 온다. 지바고는 안 받겠다고 사양하지만, 대가를 치르지 않고 진찰을 받으면 병이 더욱 도져서 죽는다는 논리로 막무가내 두고 간다. 그리고 투루게네프의 『사냥꾼의 일기』에서도 쓰러지는 나무에 눌려 죽게 된 농부가 빚진 닭 두 마리를 갚아 달라고 유언을 남기는 대목이 나온다. 그것은 빚지고는 편히 눈을 감지 못하는 서민적 양심에서 우러나온 것들이다.

지루한 한겨울 동안 움추렸던 몸뚱이가 이제야 좀 녹고 보니 여기가 근질근질 저기가 근질근질. 등어리는 대구 군실거린다. 행길에 삐쭉 섰는 전봇대에다 비스듬이 등을 비겨대고 쓰적쓰적 부벼도 좋고. 왼팔에 걸친 밥통을 땅에 나려논 다음 그 팔을 뒤로 제쳐 올리고 또 바른팔로 다는 그 팔굼치를 들어 올리고 긁죽긁죽 긁어도 좋다.
『봄과 따라지』 중에서

따라지의 사전적인 의미는 1. 노름판에서의 한 끗 2. 보잘것없고 하찮은 사람 또는 사물을 말한다. 본문에 보이는 바와 같이 깡통을 들은 거지가 봄의 기운에 저도 견딜 수가 없어서 밖으로 뛰쳐나온 모습이다. 이 따라지는 아무리 경찰에게 맞고, 골목으로 끌려가 혼쭐나도 절망할 줄 모른다. 아무리 현실이 고되더라도 결코 꺾일 줄 모르는 조선인의 건강함을 일개 따라지를 통해 작가는 표현하고자 했던 것 같다.

ㄷ. 생명의 치열한 몸부림

"빙모님은 참새만한 것이 그럼 어떻게 앨 낳지유?"(사실 장모님은 점순이보다 귀때 하나가 작다)
장인님은 이 말을 듣고 껄걸 웃더니(그러나 암만해두 돌 씹은 상이다) 코를 푸는 척하고 날 은근히 곯리려고 팔꿈치로 옆 갈비께를 퍽 치는 것이다.
더럽다. 나두 종아리의 파리를 쫓는 척하고 허리를 구부리며 그 궁둥이를 콱 떼밀었다. 장인님은 앞으로 우찔근하고 싸리문께로 쓰러질 듯하다 몸을 바로 고치더니 눈총을 몹시 쏘았다.
『봄봄』중에서

이 작품은 지주를 대신하여 마름이 소작인을 착취하는 실태를 그렸다. 마름이 곧 지주의 분신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노동력의 착취, 소작인의 비극, 비인간적인 횡포를 비판하고 있지 않다. 신랄하게 비판하고 폭로하고 개선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여기서는 해학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해학적으로 빗겨가고 있다. 농촌의 구조적 모순이나 갈등, 그리고 횡포와 착취를 공격하여 비판하려 하지 않는다. 해학적으로 접근하여 모순과 갈등을 드러내고 제시할 뿐이다.

우선 내가 무릎 장단을 치며 아리랑 타령을 한 번 부르는구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춘천아 봄의 산아 잘 있거라, 신연강 배 타면 하직이라. 산골의 계집이면 강원도 아리랑쯤은 곧잘 하련만 년은 그것도 못 배웠다. 그러니 쉬운 아리랑부터 시작할밖에. 그러면 년은 도사리고 앉아서 두 손으로 엉덩이를 치며 흉내를 낸다. ……그래도 하나 기특한 것은 년의 성의는 있단 말이지. 하기는 그나마도 없다면야 들병이커녕 깻묵도 그르지만 날이라도 틈만 있으면 저 혼자서 노래를 연습하는구나. 빨래를 할 적이면 빨랫방추로 가락을 맞추어 가며 이팔청춘을 부른다. 노래 한 장단에 바늘 한 꿰엄씩이니 버선 한 짝 기우려면 열 나절은 걸리지. 하지만 아따 버선으로 먹고 사느냐. 노래만 잘 배워라. 년도 나만치나 이밥에 고기가 얼른 먹고 싶어서 몸살도 나는지 어떤 때에는 바깥 밭둑을 지나가려면 뒷간 속에서 콧노래가 흥이 겨울 적도 있겠다.
『안해』중에서

가난에 찌들리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방편이랍시고 내놓은 것이 들병이로 나서겠다는 말이다. 그것도 생김이 박색중에서도 상박색인 안해가 말이다. 그러나 꿈쩍도 안할 것 같은 현실 앞에서 주룩들지 않고 자신의 엉뚱한 논리로라도 밀고 가려는 생명의 본능은 우리가 놓치지 않고 찾을 수 있다.

4. 인물 계보

얼핏 보면 유정의 작품에서 동일 주제가 반복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성실한 작가일수록 주제는 더 깊게 다루고, 폭을 넓혀가기 때문에 반복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동일 주제를 다룬 다른 작가, 예컨대 朴趾源을 들 수 있고, 沈熏을 들 수 있고, 李陸史를 들 수 있다. 작가는 하나의 주제를 다룬다. 유정에게 있어 하나의 주제는 바로 가난이다. 가난이라는 엄중한 적 앞에 주인공들은 비틀어가기도 하고 발버둥치기도 한다. 이제 가난을 주인공들이 어떻게 해결해나가려 하는지 계보를 통해 살펴보자.
ㄱ. 지푸라기 잡는 유형

가장 커다란 고난을 수화지화(水火之禍)라고 한다. 그 중에서 주인공들의 고난은 물에 비유된다. 즉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유형이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덕순이는 아내를 병원에 데리고 간다. 불가사의한 환자를 병원에 데리고 가면 월급을 주고 옷과 밥을 먹여준다는 동네 노인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정의 주인공들은 속설이나 옆 사람의 말에 기울어지는 경우가 많다. 아쉬우니까 아무리 어처구니가 없다고 하더라도 별 수 없는 노릇이다. 『금따는 콩밭』에서도 영식이는 수재의 발림에 넘어가 밭을 절단 내고 만다. 딴에는

1년 고생하고 킥 콩 몇 섬 얻어먹느니보다는 금을 캐는 것이 슬기로운 짓이다. 하루에 잘만 캔다면 한 해 줄곧 공들인 그 수확보다 훨씬 이익이다. 올 봄 보낼 제 비료 값, 품삯, 빚해 빚진 7원 까닭에 나날이 졸리는 이판이다. 이렇게 진지하게 살고 말 바에는 차라리 가로 지나 세로 지나 사내자식이 한 번 해 볼 것이다.
『금따는 콩밭』

라는 것이다.

"여보게, 자네에게 청이 있네."
재성이 목이 말라서 바득바득 따라온다.
그 청이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에게 돈을 다 빼앗기곤 구문이겠지. 시치미를 딱 떼고 나 갈 길만 걷는다.
"여보게 응칠이, 아 내 말 좀 들어!"
그제서는 팔을 잡아낚으며 살려 달라 한다. 돈을 좀 늘일까 하고 벼 열 말을 팔아 해 보았더니 다 잃었다고. 당장 먹을 게 없어 죽을 지경이니 노름 밑천이나 하게 몇 푼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벼를 털었으면 거저 먹을 것이지 어줍잖게 노름은…….
"그런 걸 왜 너보고 하랬어?" 하고 돌아서며 소리를 빽 지르다가 가만히 보니 눈에 눈물이 글썽하다. 잠자코 돈 2원을 꺼내 주었다.
『만무방』

재성이는 그 돈으로 다시 노름판으로 끼어 들 것이다. 노름을 하지 않고는 밑천을 마련할 길이 없다. 『소낙비』에서도 춘호는 자기 처더러 몸을 팔고 2원을 마련해 오라고 한다. 몸을 팔아 번 돈 2원으로 노름 밑천을 삼겠다는 것인데, 그것도 역시 불확실하기는 마찬가지이다.

ㄴ. 비윤리적인 행위 유형

가난에 찌들어 복만이는 제 아내를 소장사에게 팔았다. 유정 소설에서는 특히 성매매나 인신매매 등의 소재가 많이 나온다. 『솥』에서는 근식이는 들병이와 새살림을 차리기 위해 솥을 갖다 바친다. 그것은 자기 생활에 권태감이 밀려와서가 아니다. 유정 소설 어디를 봐도 그런 고상한 취미를 가진 등장인물들은 나오지 않는다. 오직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서이다. 유정소설에는 이 작품 외에도 『총각과 맹꽁이』, 『안해』, 『산골나그내』등에 들병이라는 소재가 나오는데, 들병이란 '술을 들고 다니면서 파는 여자'로서 상황에 따라서는 몸을 팔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이 소설 속에서 보면 결코 비윤리적이지 않다. 그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생활에 최선을 다한다. 아니,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필자가 사는 제주도는 그런 경험이 잘 없겠지만, 제주도를 떠나 본토에만 가도 굶어 죽었다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그런 상황을 잘 인식해야지만 인물들의 절실함이 제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ㄷ. 뚝건달 유형

아무리 노동을 해야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현실이기 때문에 유정의 소설에는 성실과는 오래 전에 담쌓은 건달이 많이 등장한다. 『소낙비』의 춘호, 『떡』의 덕화,『 만무방』의 응칠이, 『총각과 맹꽁이』의 뚝건달 뭉태가 그런 인물이다. 이러한 인물 유형들은 모두 가난의 소산들이며 우리가 그들에게 비윤리적인 점을 지적하여 비판할 수 있는 여지는 찾아보기 힘들다.
유정의 소설에는 부부의 유형이 나오는데, 대체로 부인은 현실적이고 행동적인 데 반해서 남편은 이상적이고, 체념적이거나 건달들이다. 어느 사회건 어려운 시대에는 여성이 억척어멈이 되는 것은 공통적인 것 같다.

결론

이렇게 몇 가지 유형을 통해 김유정의 소설을 분석해 보았다. 이로써 알 수 있는 사실은 김유정은 자신의 해학을 단순히 재미를 위해서 쓰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작가가 언어라는 무기를 날카롭게 깎아내듯이 해학이라는 무기로 모든 현실을 묘사해놓았다. 때문에 그의 소설을 읽고 낼 수 있는 웃음 속에는 묵직한 무언가가 담겨 있다. 그것은 지식인의 입장에서 농촌을 노래하는 목가적인 문학과는 다르다. 관광객이 농촌을 다녀오는 것과 그 농촌의 일원으로써 하루를 살아가는 것은 천양지차(天壤之差)다. 그래서 유정이 노래하는 풍경과 산골의 아름다움은 공허하지 않은 아름다움이다. 때로는 슬프기도 하고, 때로는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무엇인가 끝없이 생겨날 것 같은 생명의 원형을 유정은 잘 묘사해 놓았다. 그리고 가난 앞에 우리가 쏟아낼 수 있는 것은 무기력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가난 앞에서 등장인물들은 움츠려들지 않는다. 그런 모습은 읽는 독자로 하여금 힘을 준다.
필자가 보건대 그 때의 고난과 지금의 고난은 차이를 둘 수는 없겠으나, 지금의 우리가 조그만 고난 앞에도 쉽게 주저앉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우리는 너무나 이성적이기 때문에 불가능할 것 같은 노력들은 애초에 접어 버리기 일쑤다. 그러나 유정의 인물들은 전혀 얼토당토한 한 가지 속설에 매달리고 끝까지 실행해 나간다. 우리가 그들의 행위에 '실패'라고 이름지을 수 없는 이유는 너무나 많다. 그리고 그 실패가 우리의 실패와 구별되는 점도 많다. 한 가지만 들자면 그들의 실패는 '경험하여 본 실패'이며, 우리의 실패는 '경험하지 못한 실패'이다. 따라서 그들의 실패는 얻어먹을 것이 많이 있다. 그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실패에 대한 개념조차 가지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미련하게 행동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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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 구운몽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전사 이명준의 슬픔이 담긴 상여를 천천히 따라가며
-노래는 침묵이 없으면 날 수 없는 가냘픈 한마리 새다- 탈레스


작가가 스물 다섯 살에 자신의 분신을 그려 놓은 『광장』이라는 책은 작가와 함께 수십 년 동안 진화했다. 필자가 분신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작가가 소설 속의 주인공 이명준과 그 작품인 광장 안에 쏟은 애정이다. 얼핏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거듭된 판의 변화인데, 초판은 47쇄, 재판은 41쇄, 3판은 15쇄 4판은 26쇄가 찍힐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책이라는 사실이기도 하려니와 그가 작품 텍스트에 가한 작업의 변천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마치 도스또옙스끼를 보는 듯하다. 도스또옙스끼는 그의 역작 『죄와 벌』을 쓰기 위해 최소한 네 가지의 서술 방식을 시도했다고 하며, 『악령』이라는 소설을 쓸 때는 전반부를 다 쓰고 나서, 새로운 주인공의 발견으로 인해 모두 소각하고 다시 써 가는 열정을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텍스트는 언제나 미완성이라고 할 수 있으며 새로운 독자를 만날 때마다 변화하는 여러 가지 모습의 예술 작품이 된다. 그러한 배경 지식 하나만으로 광장은 여러 번 음미해야 할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텍스트는 문학과지성사刊 4판 26쇄본(2002. 8.16)을 사용하였다.

이명준은 밀실 혹은 온실 안에서 별 탈 없이 자란 '철부지 책벌레(p63)'이다. 철학과에 들어가 지적 유희를 즐기다가 광장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광장으로 나아가려 한다. 당시의 한국 사회는 그에 따르면 '비어 있는 광장'이었으며 밀실과 광장은 너무나 커다란 모순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광장다운 광장으로 가고 싶어했으며 그것은 곧 삶다운 삶이었다. 그러나 그가 사는 터전 안에서는 그런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고, 명준도 차차 밀실에 길들어 가고 있었으나, 그것이 그는 싫었다. 그에 동반하여 투사로서의 아버지에 대한 일말의 동경이 남아 있기는 했으나, 사상으로 경도 되어 가족과 사랑을 묻어버리는 그런 모습은 명준이 생각한 이상적인 모델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북으로 가서 겪게 될 환멸을 살짝 암시하는 역할도 한다. 명준에게는 사랑도 역시 고귀한 삶의 목표이자 가치였다. 진정한 사랑을 위해서는 무슨 대가든 지불할 의향이 있다. 이렇게 광장과 밀실, 개개인은 사랑이라는 빛으로 빚어져야 한다. 그러나 파괴와 경계, 증오와 기만만이 잔재하는 사회 안에서 명준의 영혼은 심각한 상처를 받게 되고 그것이 터전을 떠나게 되는 원인이 된다.
사실 전쟁 직후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어느 정도의 무력과 획일적인 반공 이데올로기가 필요불가결 하기는 하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것이 우리 나라 내에 가지고 있는 모순의 충돌이기는 하지만, 이미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강대국의 시종으로 전락하여 명령을 하달 받는 입장에서 진정한 광장이 나타나지 않는다. 허울만 있는 낯선 광장 하나가 우리 앞에 놓여져 있을 뿐이며, 각자는 그것에 소극적으로 적응하기 위해서 비굴한 밀실들을 만들었으니, 사회는 점점 폐쇄적인 貪利的이 될 수밖에 없다. 명준은 그러한 문제를 젊은이다운 패기를 가지고 무리하게 제기하였으나, 성공할 리가 없었다. 명준은 자기 자신 깨지지도 않을 것 같은 바위에 뛰어들어 산화함으로써 당대의 지식인과 시민들의 양심을 각성시켰을 것이다. 그러한 역할만으로 명준은 가치 있는 인물이다. 때문에 명준은 당대 사람들의 아픔이었으며, 공통문제였다. 그에 더하여 명준은 이상으로 가기까지 시행착오를 하나씩 드러내면서 많은 문제점을 노출시켰으며, 그 문제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자신과 같은 방랑인들의 실상이기도 하다. 그 모습을 들자면 사랑에 대해서는 소유와 관능적 쾌락이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으며, 또 다른 소유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 인애와 은혜를 소유하려 한 강한 욕구가 그것을 나타낸다. 지성에 대해서는 지적 유희라는 돌부리에 또 넘어진다. 장난 삼아 학교 신문에 작품을 투고하고, 방안에 누워 서재에서 책 내용 들추기 놀이를 하는 모습을 통해 나타난다. 그리고 사회의 일원에 대해서는 요령이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 黨內에서 자아비판을 하면서 그는 자신을 기만하며 적당히 넘어가고, 그것 때문에 자신이 미웠고 비참하였다.
그가 놓여 있는 현실과 이상까지의 거리는 너무나 멀다. 그리고 점점 더 멀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스스로 보여주었다. 후에 그가 긴급한 적정 보고서를 쥐고도 태연했고, '타고르호'에서 송환 포로들의 강력한 요구와 증오에도 태연할 수 있었던 까닭, 그리고 흔연히 母女 새의 품으로 뛰어들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러한 경험의 덕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유는 거침없이 달려가는 명준의 적극적인 기질이다. 이것은 왜 명준에게 인애가 아니고, 표면적으로는 더 많이 죄지은(배신한) 은혜였나 하는 문제도 해결해 준다. 인애는 탈을 벗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조그만 연정이 있었지만, 그것이 자발적으로 드러나지 못하고, 명준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서만 꿈틀하다가 도로 닫혀버리는 그러한 탈이었기 때문에 명준과 하나가 될 수 없었다. 은혜가 더욱 사랑스러운 이유도 거기에 있다. 탈을 벗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적극성의 증좌가 될 만하다. 작품 내에서 은혜의 모습은 공산주의의 탈 또한 벗은 것 같았다. 작가는 이 소설 속에서 여러 관념의 요소들, 즉 광장, 밀실, 코뮤니즘, 자본주의, 철학 등을 구사하고 있지만 그것을 근본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근본적이면서도 단순한 힘은 사랑에 있었고, 그 사랑 또한 적극적인 기질이 있을 때라야만 형상을 얻는 것이다. 그것이 실패일 때도 역시 많은 가치를 갖는다. 이런 이유로 하여 명준이 전사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어쨌든 산전수전을 겪으면서 명준에게는 진리의 조그만 틈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자신이 내딛어야 할 것은 무엇이며 존재의 이유까지도 거기에 담을 수 있는 틈이 점점 명준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그것이 환상의 모습으로 엄마 비둘기와 딸 비둘기라는 극도로 상징적이고 환상적인 소재를 사용하여 진리란 언제나 가려져 있으며 힘들게 찾아낸 진리라는 것도 어쩌면 환상의 다른 이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아주 슬픈 암시를 명준의 최후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명준의 자살이다. 남한과 북한이라는 현실적인 공간 속에서는 절대 찾을 수 없어서 "중립국"이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할 수밖에 없었지만 '중립국' 또한 명준의 이상을 간직하고 있는가 하는 것도 비관적이다. 죽음의 세계를 명준은 택했지만, 亡者에게는 다소 행복할지 모르겠지만 남겨진 우리로서는 더욱 절망이 아닐 수 없다. 살아 있는 우리에게 하는 이 항거는 잔인하기까지 하다.

필자가 감상문을 쓰기에 앞서 달아놓은 코멘트와 광장 안에서 나타나는 작가의 세계관이 궤를 같이 한다고 생각한다. 눈 쌓이고 강풍이 몰아치는 산 위에 가야만 얻을 수 있는 진리라는 꽃은 그것을 꺾기 위해 도전하는 사람에게만 모습을 비추며, 도처에 죽음이라는 함정이 깔려 있다. 이명준은 그것을 꺾었을까? 아니, 그렇지 못하다. 명준은 꽃의 모습을 보았을지 모르겠으나 앞서도 말했다시피 그것은 명준이 믿은 잠정적인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명준은 필자에게 그런 꽃이 있고, 거기 이르기 위해서 밟아야 하는 위험과 여러 조건들을 음유시인처럼 읊어주었다. 그래서 내 앞에는 눈 쌓인 산이 그려지는데, 당시 작가의 나이와 같은 스물다섯으로서, 작가와 명준은 합세하여 필자를 놀리는 것 같아서 언짢음을 감출 수가 없지만, 대답을 해야 한다. 그 선택이 요즘 필자를 괴롭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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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8
최윤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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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최윤의 소설『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이하 ‘꽃잎’)은 소설로서 묘한 구조를 갖고 있다. 일단 작품 안에서 뚜렷한 반동 인물이나 갈등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이 소설의 창작 의도와 일맥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글쓴이는 하나의 이야기에 여러 가지 시점을 배열하여 사태에 대한 다각적 조명을 은유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그 목소리는 다분히 신비롭고 희미하며, 메시지의 전도사는 가장 힘 없는 자, 그것도 제정신이 아닌 ‘소녀’를 필두로 세웠다. 즉 글쓴이는 5․18 참극의 현장에 모자란 소녀와 불안정한 장씨, 미미한 젊은이 몇몇을 담궜다가 끄집어 내서 소설 위를 걸어다니게 만드는 데 그들은 가슴 한 쪽에 결여를 하나씩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찾아 기약 없는 여행을 떠나는데, 이 이야기는 바로 ‘기약 없는 여행에 관한 기록’이다.

이 이야기의 시작점과 구조는 명확하다. 그날을 시작점으로 하는데, 정확히 말하면 그날 이후 싫지만 대면할 수밖에 없는 흔적․고통을 하나씩 걸머지고 인물들은 여행을 떠난다. 때문에 소설은 표면적 갈등보다 이면적 갈등에 더욱 관심을 쏟으며 장막, 희미함, 비정상, 약자의 이미지가 주를 이루는 것은 이 점을 더욱 부각시키려는 의도이다.
그것은 일종의 조직적 낯설게 하기이며 독자에게 커다란 물음표를 던지려는 글쓴이의 의도이다. 글쓴이의 언어로 표현하면 ‘바이러스’에 걸린 독자들은 그 ‘물음표’에 주목하기 시작했으므로, 시선을 소녀에게 맞춰둔 채 소녀의 비문법적이고 암호 같은 말들과 그보다 더 이상스런 행동들을 따르며 소설 끝까지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중심인물들의 대체적인 특징은 자신 안에 이중성, 모순성, 동요를 곳곳에 노출시킨다는 것인데, 그것은 그 폭력이 정당한가, 폭력에 대항하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정의와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혼란에 기인하며, 그것은 국가, 곧 나라에 대한 폭력과 이를 강요하는 권력 앞에 약자들이 놓이게 되는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것을 소설 속에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이 ‘장’이다. 장을 말할 때는 그가 일정한 벌이 없는 방랑아이며 초여름의 무더위, 짜증, 불안, 공격성 등의 이미지와 함께 보아야 한다. 무모한 공격성은 장면#2를 연상케 한다. 만약 나에게 이 소설의 첨삭 권한이 주어진다면 ‘장’에게 진압군에서 탈영하여 숨어산다는 조건값을 주고 싶다. 유리된 불만 많은 떠돌이에게는 일반적인 전형을 연상하기 어렵다. 때문에 ‘장’은 소녀가 필요한데 그 근거마저 한미하다고 본다. ‘장’이 자신의 소설적 캐릭터마저 반납하고 소녀에 매달릴 정도의 가치가 있었을까. 이 부분이 글쓴이가 가지고 있는 ‘소녀’와 ‘사건’에 대한 집착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제주도를 떠나지 않고서는 도저히 작가적 관점에서 이야기를 쓸 수 없었습니다.’

4․3을 다룬 소설 ‘순이 삼촌’의 저자 현기영의 회고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이 소설은 여러 시선을 가지고 ‘그날’을 조명하고자 한 작가의 세심한 의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의식’과 ‘단면적 불균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건’이 시종일관 은유와 환상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에 비해 소녀는 좀더 맹목적이고 적극적으로 짊어진 ‘짐’과 상대하려 한다. 소녀는 ‘가족’이라는 역사의 가장 실질적이고 명확한 주체를 상징하는데, 때문에 소녀의 숙제는 오빠를 찾는 것과 엄마의 그림자를 극복하는 것이다. 그 중간지점은 오빠를 닮은 ‘장’과의 동거였으며, 종착점은 죽은 이들에 대한 위로와 고행이다. 실제로 무덤마다 꽃을 꽂아주었으면서 소녀는 왜 다시 떠나야 했을까? 그것은 이 소설의 맨 첫마디에서 암시되고 있는 것 같다.

‘다른 수많은 소녀들이 여전히, 언젠가는, 성실한 시선과 충격에 마모된 몸짓으로 젊은 당신의 뒤를 좇아와 오빠라 부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녀는 장막의 형상에서는 자유로웠지만 더 어두운 자신의 허상, 역사의 진실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들 자신의 허상을 상대하러 떠난 것이다. 즉, 소녀는 떠나간 진실이며 우리들은 그 진실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글쓴이의 우려 섞인 속삭임은 아니었을까?
그러면 우리는 결론적으로 소녀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소녀는 희미한 진실의 흔적을 지닌 채 우리에게 걸어오면서, 동시에 우리로부터 떠나고 있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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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핵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
조셉 콘라드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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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핵심』- 무시무시한 진실


들어가기 전에


요즘 영문학 작품을 가지고 독서스터디 비슷한 것을 하고 있어요. 좀 쫓기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읽고 토론하고 배출하는 모양이 어느 정도 되는 것 같아요. 그 첫 작품이 암흑의 핵심은 아니에요. '테스'였는데, 아직 제가 정리를 못했네요. 비교적 짧은 분량인 이 이야기가 영문학 첫번째 후기가 되었군요. 두 주 동안 세 작품 정도 남았는데, 영문학 후기는 일단 5편이 될 것 같아요. 소설에 관해 후기를 쓰는 것은 낯설군요. 차라리 소설을 쓰듯이 후기를 남기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아무튼 제 사제 데뷔작이었습니다.



벌거벗은 진실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수년간 끌려다닌 끝에 삶을 위한 투쟁에서 도의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죄수들만이 살아 남을 수 있었다.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알게 모르게 온갖 방법과 수단을 쓸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잔혹한 폭력, 도둑질, 심지어는 친구까지도 팔아넘겼다. 어떻게 불러도 상관이 없겠지만 천만다행히도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던 소수의 우리들은 가장 훌륭한 사람들은 돌아올 수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빅터 플랭크, 『죽음의 수용소에서』 중에서


우리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암흑을 가끔 상상하지만, 진짜 경험해보지는 못한다. 대개 암흑을 끊임없이 그리는 가운데 그려진 그림이 암흑이라고 판단하기 쉽지만, 진정한 암흑은 우리의 상상보다는 오히려 본능에 호소하는 것 같다. 인간성의 심연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극단의 정글에서 제국주의는 드디어 분열된 자아를 드러낸다. 이 이야기는 화자인 말로가 콩고로 가는 제국주의의 기선을 타고 가는 선장으로서, 거기서는 이미 전설이 되다시피한 ‘커츠’라는 사람에게 점점 다가가는 틀로 진행된다. 어떠한 가식적 이념도 여지없이 알몸을 드러내길 요구하는 밀림 안에서 화자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분열된 이상이며, 그 이상을 둘러싸고 서식하는 ‘백인’들의 행태이다. 그가 '백인‘이라는 표현으로 그들과 단절하는 이유는 밀림이 이야기하는 진실과 그 진실의 세례를 온몸으로 견뎌낸 커츠라는 인물을 통해 서서히 드러난다. 그것이 지배인이 오래도록 건재하며 커츠가 죽음에 이르게 된 이유이다. 커츠는 콩고행 직전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제국주의가 표방하는 정의의 이념을 주창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제국주의는 목적이 분명한 제국주의임이 드러나자마자 커츠의 이상은 표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진실에서 통속적인 가치밖에 갖지 못한 지배인은 당당히 살아남고 보다 깊숙이 진실로 다가가려는 커츠와 화자는 죽음에 이르거나 죽음에 준하는 국면을 맞게 된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사뭇 그 지역에 고용되어 있었던 흔한 상인 중 한 사람이었을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의 명에 복종했지만, 그가 사람들에게 애정이나 두려움의 감정을 불어넣진 못했고 또 존경도 받지 못하고 있었지. 그는 그저 불안감만 불어넣고 있었던 거야. 불안감, 바로 그거였어. 어떤 명확한 불신감이 아니라 그저 불안감이었지. 그 이상은 아니었다구. 이런, 뭐라 할까. 이런 능력이 얼마나 효과적일 수 있는지는 알 수가 없지. 그에게는 일을 조직한다든가, 주도권을 잡고 일한다든가, 심지어는 질서를 잡는 재주 같은 것이 없었어. 그 주재소의 형편이 말이 아닌 상태에 있었다든가 하는 그런 몇몇 가지 것을 보면 그 점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었지. 그는 학식도 지성도 갖추고 있질 못했어. 그가 지배인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연유는 어디 있었을까? 그건 아마도 그가 병에 걸린 적이 없었기 때문일 걸세……. 그는 거기서 3년 임기를 이미 세 번이나 채웠으니까……. 일반적으로 뭇사람들의 체질이 그곳 기후로 인해 망가지는 판에 혼자서 기세등등하게 건강을 누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기 때문이야.
- 본문 중에서



인간의 기층과 기생하는 무리들



이 이야기는 커츠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마치 원심 운동을 하듯이 전개된다. 커츠는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다방면의 진실을 함의하고 있는 인물이다. 빛과 어둠과 진실을 모두 함유한 모순이 바로 커츠라는 인물 안에 그려져 있으며 어떤 이는 거기서 어둠을 살라먹기도 하고, 빛을 맹신하기도 한다. 화자가 처음 만난 회계 직원에게 커츠는 ‘주목할 만한 인물’인데, 그것은 ‘그 고장에서도 가장 오지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그는 다른 모든 교육소에서 수집한 상아를 모두 합친 것만큼 많은 상아를 보내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커츠라는 인물의 기층 중 가장 테두리를 형성하는 진실의 모습이다.



그분은 마치 천둥과 번개처럼 원주민들 위에 군림했던 겁니다. 원주민들은 일찍이 그런 걸 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아주 무서워했던 겁니다. 그분은 아주 무서운 사람으로 비쳤던 거지요. 우리가 커츠 씨에 대한 판단을 내릴 때는 여느 사람에 대한 판단을 내리듯이 할 수가 없다구요. 없고말고요.
- 본문 중에서


화자가 말하는 그의 마지막 제자라는 청년은 커츠를 위대한 이념을 갖춘 사상가로 보고 있었다. 사실 원주민들이 생전 보지 못했던 모습이란 것은 다름아닌 이념을 말한다. 이념은 죽음보다 강하다. 이념 아래 추장들은 매일같이 그의 앞에서 기어다녔던 것이며, 커츠씨가 화자에게 우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젊은 마지막 제자에게는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젊은이는 커츠에게 반항하다가 심판받은 자들의 목을 가리켰다. 커츠의 막사 양쪽 기둥에 하나씩 그들의 목은 박혀 있었다.



그는 내가 그곳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 하면서, 그 말뚝 위의 머리들은 커츠에게 반항한 자들의 머리라는 것이었네. 내가 웃으니까 그는 몹시 충격을 받는 듯했어. 반항자들이라니! 그간 원주민들을 적이니 죄인이니 일꾼이니 하는 말로 지칭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지만, 이제는 그들을 반항자라고 부르는 소리까지 듣게 되었던 걸세. 그 말뚝에 꽂힌 반항자들의 머리는 내가 보기에 완전히 진압되어 있는 듯했네.
- 본문 중에서


그러나 마지막 제자가 커츠와 같이 파멸에 이르지 않은 이유는 ‘이념’이 그를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이념’이 진실을 가려 주는 대신 그의 젊음을 자극하여 주었다.



나는 일종의 감탄이랄까 아니면 부러움이랄까하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지. 그 매력적 아름다움이 그를 충동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했고, 그로 하여금 위해를 받지 않도록 해주었던 거야. 그가 밀림으로부터 얻어내고자 한 것은 숨을 쉴 공간과 뚫고 나갈 공간뿐이었어. 그에게 필요한 것은 가능한 한 최대의 위험과 최악의 궁핍을 감수하면서라도 존속하며 전진하는 것이었거든. 일찍이 절대적으로 순수하고 비타산적이며 비현실적인 모험 정신이 한 인간을 지배한 적이 있었다면, 그 정신의 지배를 받은 사람은 다름 아니라 바로 그 얼룩백이 옷을 입고 있는 젊은이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
- 본문 중에서


 


하지만 그의 순수하고 젊은 헌신은 우상과 숙명론의 기만에 갇혀 있었다. 이들의 젊음은 ‘악한 의도’에 의해서 오용될 소지가 다분하다. 히틀러 유겐트의 젊은이들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악행을 저지르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진실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때문에 화자는 '그 헌신이야말로 일찍이 마주쳤던 위험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커츠의 약혼녀가 서식하고 있는 기층은 커츠의 기억이다. 그것은 본성이나 밀림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젊고 자상한 애인의 기층이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한번이라도 들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분의 친구가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거예요.> 그녀는 말하더군. <그분은 사람들에게서 가장 좋은 점을 찾아내어 그것을 방편삼아 사람들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곤 했지요.> 그녀는 감정에 겨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 <그건 위대한 사람들의 천품이기도 하지요.> 그녀는 말을 계속하고 있었어. 그런데 그녀의 나직한 목소리는 내가 기왕에 들은 적이 있는 불가사의함과 황폐함과 슬픔으로 가득한 다른 모든 소리들을 동반하고 있는 듯했지.
- 본문 중에서


그녀의 커츠에 대한 감정과 신념을 거짓이라고 하는 것은 부당할지 모른다. 그녀의 마음은 충분히 진실을 담고 있으며, 커츠 또한 감정을 속인 적이 없다. 그녀는 커츠가 마지막으로 한 말을 듣고 싶어한다. 화자를 전율케 했던 진실의 소리를 그녀에게 들려주는 것은 그녀에게 하나의 거짓을 조장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화자는 알고 있었다. 하나의 진실이 누군가에 의해서 거짓으로 둔갑하는 것은 우리들이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닌가. 차라리 적절한 거짓을 섞어서 그녀 나름의 진실에 위배되지 않을 정도로 타협하는 것이 화자에게는 최선의 선택인 듯 했다.



<그분의 마지막 한마디는 당신의 이름이었습니다.>
가벼운 한숨 소리가 들리더군. 그러자 어떤 끔찍한 희열의 외침, 생각하기조차 어려운 승리와 말할 수조차 없는 고통이 섞인 외침으로 인해 내 심장은 갑자기 고동을 중단하는 듯했어. <저는 그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걸 확신하고 있었지요…….> 그녀는 알고 있었다는 거야. 확신하고 있었다는 거야.
……
내가 커츠를 정당하게 대접해서 그가 실제로 했던 그 무서운 말을 그녀에게 들려주었다고 하더라도 하늘이야 무너지지 않았을 거야. 커츠는 자기가 정당한 대접을 받는 것을 원할 뿐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나는 그를 그렇게 대접할 수가 없었어. 나는 그녀에게 진실을 말할 수가 없었던 거야. 그 진실이 그녀에게는 너무 암울하게, 온통 너무 암울하게만 들렸을 테니까.
- 본문 중에서


그것은 이를테면 하나의 데드라인이다. 그 선을 중심으로 커츠와 화자의 군과 ‘백인들’이 나뉘어진다. 지배인이 커츠에게 불평을 하는 것도 일반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마지막 제자가 그 선을 넘어선 커츠의 모습을 희미하게나마 증언해준다.



그분은 너무 많은 고통을 겪었지요. 그래서 이곳 생활을 싫어했다구요. 그런데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떠날 수가 없었던 거예요. 나는 기회를 엿보아 그분에게 너무 늦기 전에 이곳을 떠나자고 간청해 보기도 했어요. 함께 떠나겠다는 제의도 했죠. 그럴 때면 그분은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지만 계속해서 남아있는 거에요. 또다시 상아 사냥을 하러 나선 후 몇 주일 동안은 보이지 않곤 했죠. 그는 이곳 원주민들 사이에서 자기 자신을 잊고 있었던 거예요. 아시겠어요?
- 본문 중에서



암흑의 핵심



핵심으로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각 기층을 하나씩 잡고 오르다가 비로소 기층과 대면하는 경우가 있고, 온갖 곳에 널려진 핵심의 강요에 못이겨 대면하는 경우가 있다. 화자에게 기층은 핵심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핵심이다. 그가 별다른 세계를 볼 줄 아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감수성만으로 눈을 뜬 것이다. 때문에 그는 콩고에 가기 전에 자기가 짐승과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고 화자가 콩고에 가서야 비로소 그것을 볼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들을 감싼 관습 때문이다.



자네들은 이해할 수가 없을 거야. 자네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나? 자네들이야 단단한 보도를 딛고 서서, 늘 자네들을 격혀라거나 덤벼들 듯 다정한 이웃들에 둘러싸인 채, 푸주한과 경찰관 사이를 조심스럽게 오가면서, 추문과 교수대와 정신병자 수용소 따위를 거의 종교적으로 두려워하며 살고 있으니 자네들이 어떻게 상상인들 할 수 있겠나? 경찰관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철저한 고독으로 인해, 그리고 다정한 이웃이 여론이랍시고 속삭여주는 경고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는 철저한 침묵으로 인해 한 인간의 자유로운 발길이 어떤 특정한 태초의 땅으로 인간을 이끌고 갈 수 있는지를 자네들은 아마 상상할 수 없을 거야. 이런 경찰관이니 이웃이니 하는 사소한 것들이 있느냐 없느냐가 실은 큰 차이를 이루는 법일세. 그런 것들이 사라지고 나면 자네들은 자네들 자신의 타고난 힘에 의존해야 하고 또 스스로 충실하게 살 수 있는 능력에 의존해야 해.
- 본문 중에서


콩고라는 땅은 화자의 오래된 본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이 화자로 하여금 소름끼치도록 만들었으나 비인간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이며, 커츠가 완전히 동화되어 버린 이유이기도 하다.



그 땅은 이 세상의 땅같이 보이질 않았어. 우리는 정복당한 괴물이 족쇄를 차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는 데만 익숙해 있었거든. 그러다가 거기서 괴물이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던 거야. 그건 이 세상 풍경이 아니었고, 게다가 그 사람들은……아니야, 그들을 인간답지 않다고 할 순 없었어. 내가 가장 괴로웠던 건 그들 또한 비인간적이지는 않았다고 하는 바로 그 생각이었어. 그런 생각은 서서히 떠오르는 법이지. 그들은 소리지르며 깡충깡충 뛰거니 제자리에서 빙빙 돌거니 하면서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었어. 그러나 그 광경을 바라보던 우리를 몸서리치게 한 것은 그들 또한 우리들처럼 인간이라는 생각, 그리고 그 야성적이고 열정적인 소동이 우리와는 먼 친족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어. 그건 흉측한 생각이지. 아무렴, 흉측한 생각이야. 하지만 우리가 참으로 용감한 인간이라면 그 무섭게도 솔직한 소동에 대해 우리가 마음 속으로 희미하게나마 맞장구치는 흔적이 있다든가, 우리가 태초의 밤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그 소동 속에 들어 있는 의미를 이해할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희미한 생각이 든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네.
- 본문 중에서


커츠와 화자는 밀림이 말하는 모든 인상들을 공유한다. 극한의 배고픔과 맞서는 인간에게 미신이니, 믿음이니, 원칙이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며, 도덕이나 사회성 같은 것이 낄 자리가 없다는 것은 너무나 엄연한 사실로 다가왔다. 우리들은 사실 이 진실로부터 도시와 사회로 도망간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화자는 이미 커츠의 분신이다. 아니, 이 미지의 자연과 인간들 모두 우리들의 분신이다. 그들은 다만 이 진실이라는 갈림길에서 각자 헤어졌을 뿐이다.



내가 보기에 그간 내가 체험해 온 것은 바로 커츠의 극한 상황이었어. 사실, 그는 마지막 한 걸음을 성큼 내딛으며 죽음의 문턱을 넘어갔던 거야. 그러나 나는 그 문턱에서 머뭇거리다 물러서도록 허용되었지. 아마도 그와 나 사이의 차이는 바로 거기에 있을 거야.
- 본문 중에서


그러나 진실에 가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인생이라는 건 우스운 것, 어떤 부질없는 목적을 위해 무자비한 논리를 불가사의하게 배열해 놓은 게 인생이라구. 우리가 인생에서 희망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우리 자아에 대한 약간의 앎이지. 그런데 그 앎은 너무 늦게 찾아와서 결국은 지울 수 없는 회한(悔恨)이나 거두어들이게 되는 거야. 나는 죽음을 상대로 씨름을 해왔어. 그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다툼 중에서도 가장 맥빠진 다툼이지. 그 다툼은 어떤 막연한 회색 공간에서 일어나는데, 발 밑에 딛고 설 땅이 없고, 주변에 아무것도 없으며, 구경꾼도 없고, 소란도 없고, 영광도 없고, 승리를 향한 커다란 욕구도 없고, 패배에 대한 커다란 두려움도 없고, 미지근한 회의(懷疑)로 가득한 그 진저리나는 분위기 속에서, 우리 자신의 정당함에 대한 많은 믿음도 없이, 또 우리 적수(敵手)인 죽음에 대한 믿음은 더더구나 없이 다투기만 하는 거야. 만약 이런 것이 궁극적 지혜의 형식이라면 인생은 우리 몇몇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어. 나는 내 삶에 대한 최종 판단을 내릴 마지막 기회를 간발의 차이로 놓쳤지만, 어차피 내게는 아무런 할말도 없었을 것임을 알고 굴욕감을 느꼈을 뿐이야. 내가 커츠를 주목할 만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어.
- 본문 중에서


이 무시무시한 진실의 모습을 직접 대면한 커츠는 단지 <무서워라! 무서워라!>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고, 화자는 커츠의 사랑스런 애인 앞에서 은폐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진실의 핵심이자 암흑의 핵심이며 은폐될 수밖에 없고, 그것을 아는 사람은 위험하거나, 배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니, 그보다 이 진실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진실을 가슴속에 품고 죽음의 장막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지도 모른다. 화자에 따르면 진실이란 위대하지만 비정하며, 우리들의 사회란 죽어가는 흑인 노예가 어색하게 두르고 있는 소모사(梳毛絲) 조각과 같다. 화자는 진실의 땅 위에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작업장에서 쫓겨나 서서히 죽음을 기다리는 흑인 노예의 비유를 통해 희미하게나마 그려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곳은 다름아니라 작업을 돕던 원주민 중의 몇몇 사람이 물러나서 죽음을 기다리는 곳이더라구.
그들은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음이 분명했다네. 그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었고 죄수들도 아니었지만 이미 이 세상 사람다운 데는 없이 질병이나 기아로 인해 죽어가는 검은 셩상들에 불과했으며 그 침침한 녹음 속에 어지럽게 누워 있었을 뿐이야 일정 기간의 고용 계약이라는 합법적 수단으로 해안 각처에서 끌려온 후 자기네 체질에 맞지 않은 환경에 내던져진 채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다가 지금은 병이 들어 비능률적인 노동자로 전락하니까 작업장에서 기어나가 그늘에서 쉬도록 허락되었던 거야. 이 죽어가는 형상들은 이제는 공기처럼 자유로웠지만 한편 공기처럼 엷은 존재들이기도 했어. 나무 그늘 속에서 반짝이고 있던 그들의 눈이 보이기 시작했어. 그래서 내려다보니까 바로 내 옆에 한 사람의 얼굴이 보이더군. 그 피골이 상접한 검은 몰골은 한쪽 어깨를 나무에 기댄 채 다리를 죽 펴고 누워 있었어.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가더니 우묵히 들어간 휘둥그런 눈이 나를 멍청하게 쳐다보는 거야. 그러나 그 안구의 깊은 곳에서 새어나오던 이미 시력을 잃은 듯한 흰 빛은 천천히 사라지고 있는 중이었어. 그는 젊은이 같았는데 혹시 소년이 아닌가도 싶었지만 우리로서는 그들의 나이를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웨덴 선장의 배에서 얻어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선원용 비스킷을 하나 그에게 내미는 일밖에 없었다네.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그걸 움켜잡긴 했지만 다른 동작이나 다른 눈길은 보이지 않더군. 그는 목에 하얀 소모사(梳毛絲) 조각을 두르고 있었는데 그것은 왜 두르고 있었을까? 그걸 어디서 구했을까? 그건 배지였을까, 장식품이었을까, 부적이었을까 아니면 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한 조처였을까? 혹시 어떤 이념이 그것과 관계되어 있기라도 했을까? 이런 생각이 들더군. 어쨌든 바다 건너에서 가져온 이 하얀 실 토막이 그의 검은 목에 둘러져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지.
- 본문 중에서



에필로그




“진실은 시간이라는 이름의 옷을 벗어버린 진실이지. 바보들이야 입을 벌리고 몸을 떨고 있겠지만,
용감한 인간이라면 진실을 알면서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을 것이네.”
- 본문 중에서

여기서 진실은 무엇인가?
→ 이 소설은 진실의 층위를 문제삼고 있다. 분열된 자아와 분열된 진실이라는 문제는 혼란된 시대상황만큼이나 우리들의 지적 체력을
요구하는 본격적인 문제들이다. 화자는 이 이야기에서 "백인들"과 나를 구분하고 있고, 오히려 "원시인"들에게 친근감을 느낀다.
사실 그것은 저자가 의도적으로 '뒤틀은 구조'이다. 여기서는 오직 '옷입은 원시인'과 '옷벗은 원시인'이 있을 뿐이다.
'시간'은 문명과 동의어이다. 이곳에서 원시인들이 보이는 원초적 행위들이 화자에게 익숙하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소름끼쳐 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전혀 다른 대상으로 보인다. 진실은 그들을 비웃고 있다. 물론 화자도 그
비웃음을 벗어날 순 없다. 진실은 화자에게도 좀처럼 속살을 보여주지 않으며 좀더 용감하다고 할 수 있는 커츠를 매혹시키고는
파멸에 이르게 한다. 여기서의 진실은 비정한 진실이자, 익살스러운 존재이다.


커츠는 어떠한 유형의 식민주의자이며, 그는 식민주의의 어떤 측면을 대변하는가?
→ 커츠는 식민주의 그 자체이다. 즉 식민주의가 가지는 온갖 생리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커츠가 콩고에 들어가기 전에 제출한
보고서에 의하면 그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을 계도해야 한다는 사상이 다분히 드러나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커츠의 궁핍함이 그려진다.
식민주의자들의 양면성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겉으로는 교화를 외치면서도 실질적인 이익을 끝까지 추구하는 식민주의 근성이다.
그 모순은 커츠의 막사에 걸려 있는 두 개의 목을 만나 여지없이 드러난다.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중
용감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교화시키려는 백인들의 가식이 똑바로 보인다. 그들은 위압으로도 누를 수 없고, 설득시킬 수도 없다.
명분과 정의가 없다는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해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화자는 그들이 '진압된 것일 뿐'이라고 하는 것이다.
커츠의 가장 통속적인 측면에 기생하는 지배인과 회계 직원은 좀더 노골적으로 식민주의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오로지
실적에 의해서만 커츠를 판단하고 있으며, 지배인은 더 나아가 '좀더 뽑아낼 수 있었는데, 커츠가 괜히 반발심만 키워서 일을 그르쳤다'
고 불평하기까지 한다. 커츠가 식민주의의 늪을 빠져나오려고 한 순간 "백인들"에게도 "진실"에게도 용서받을 수 없다.
커츠의 죽음이 어떤 '죄과'를 의미한다면 이것이 커츠의 명백한 죄과일 것이다.


말로는 왜 커츠의 약혼녀의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아주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는가?
→ 그것은 이 이야기가 다루고 있는 '진실 자체'의 문제를 함축한다. 커츠는 진실을 가지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상태다. 그가 진실을
말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오히려 왜곡될 수도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면 진실 자체는 이미 문제될 것이 없는 것이다.
진실은 절대적이지 않으며 때로는 조작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 진실이 그만큼 진실과 멀다는 것을 말하며,
최소한 진실의 작은 일부분일 뿐이라는 것을 말한다. 과학자들이 흔히 하는 오류는 순진하게 진실의 정당성을 맹신한다는 것이다.
아르키메데스가 그러했고, 갈릴레오가 그러했다. 우리는 그나마 진실의 편린을 정성스레 모아, 좀더 안정적인 진실의 상에 가까이
다가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말로가 커츠의 약혼녀에게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이다.


커츠는 자기 안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의 핵심’을 궁극적으로 인식하게 되는가?
→ 만약 '어둠의 핵심'을 '진실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면, 커츠는 이미 죽는 순간 진실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물론 진실의 제일보를
보여준 것은 커츠였으나, 이제는 말로가 진실의 증언자가 되고 있다. 진실의 모습은 커츠의 삶보다 더욱 복잡하다.
커츠가 죽은 이유는 진실의 모습을 온전히 사유하지 못한 이유가 크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진실은 어느 정도 관조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커츠는 출발부터 진실을 배반하고 있었고, 자신이
대면한 진실의 일부를 꽉 움켜잡고 동화되어 버린다. 깊고 어두운 수렁에 빠져들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말로가 암흑의 핵심에서 살아돌아온 것을 보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진실의 모습이 궁극적으로 어두운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말로는 왜 커츠에게 집착하며 동질감까지 느끼는가. 영국에 돌아와서도 커츠를 기억 속에서 지우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 말로가 커츠를 찾는 이유는 의무감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보다 호기심이 더 강했다. 그의 보고서를 이미 보았고, 그에 관한 이야기는
무수히 들었다. 그 이야기 속에서 말로는, 원주민들이 자신의 오래된 본성을 일깨워주었듯이, 오래된 영혼을 일깨워준 커츠를 만나고자 한다.
즉 커츠는 말로의 분신이다. 진실은 오래도록 두 영혼을 묶어두고 있었으며, 그 구속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둘에게 부과된 사명이다.
커츠가 그 속으로 먼저 들어갔다. 거기서 온갖 모순과 원초적 본성에 시달리며, 그것을 정확히 주시하는 마지막 순간에 '두렵다'는
일말의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너무 늦게 알아버린 것이다.
말로는 이 지점에서 커츠와 헤어진다. 진실은 커츠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말로를 놓아주지만, 오른손을 놓아주었을 뿐이다.
말로는 또다른 손을 펴보기 위해 커츠만큼의 무시무시한 모험을 감행해야 하며, 그때까지 '유보된' 것이다.


말로의 이야기의 등장인물 중 왜 말로와 커츠만이 이름을 가지고 있을까?
→ 만약 저자가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이름을 붙일 필요를 느낀 인물이 있다면 이 두 사람 뿐일 것이다. 나머지 인물들은 모두
'백인들'이나 '약혼녀', '지배인' 등으로 부를 수 있다. 이들은 진실의 핵심이 아니라 각 층에 서식하는 기식자들이며, 배경과 같은
인물들이다. 때문에 이들은 진실이 굳이 구속하려 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에서는 이름을 가진 두 명확한 인물을 구심점으로 그려진 수채와와 같다.


왜 말로의 기억 속에서 커츠는 ‘목소리’ , ‘담론’ , 또는 ‘달변’으로 이미지화 될까?
→ 말로는 진실의 허상이다. 진실인 듯 보이지만, 이미 이만큼 진실에서 빗겨져 있다. 이야기 속에서 실제로 화자가 말로와 대면하는
지면은 극히 적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모든 지면은 커츠에 관한 풍문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곧 진실이 자신의 몸을 숨기는
오래된 습관과 일치한다. 진실이 백일하에 드러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진실이 아니다. 커츠의 존재가 '목소리'나 '담론'으로 이루어진 것은
진실로 가기 위한 '이정표' 혹은 진실이 파놓은 '함정'일 수 있다.
오히려 진실은 말로가 커츠를 만나기 위해 겪어가는 과정 속에 녹아들어 있으며 그것이 또한 책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커츠는 분명 진실의 어느 부분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애초에 진실의 증언자는 말로이며 그의 '행동'인 것이다.


화자가 말하는 진실의 모습이 왜 이렇게 무시무시할 수밖에 없었는가?
→ 어느 시인의 말처럼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생명을 걸어야' 한다. 곧 진실을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저자의 진실은 희미하며 아슬아슬한 벼랑 위에 꽂힌 조그만 백년초와 같다.
그런 극단적이고 원초적인 조건이 없다면 진실은 쉬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저자에게는 명백하다.
이미 진실을 포기한 군상들이 이야기 곳곳에 널려있지 않은가. 그들의 모습을 보고 우리는 진실이라 부르지 않는 건 명백하다.
우리들이 옛 성인처럼 달관의 경지에 있지 않고서야 생활 속의 관조는 불가능하다. 더구나 이렇게 인간성이 말살되고 모순이 팽배한
곳 속에서 진실을 얻기란 콩고의 어둠 속을 탐험하는 것보다 요원한 일일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신념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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