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은희경 지음 / 창비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은희경이 갑자기 내 생활 속으로 들어왔다.
아주 우연한 기회로 2박3일간의 문학기행을 떠나게 되었고,
거기서 만나는 작가가 바로 은희경이다.
나는 은희경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서둘러 은희경을 샀다.

처음 읽으면서 드는 느낌은 뭐랄까 휴대폰이나 화장품, 악세사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인의 필수품이다.
한마디로 핸드백이나 여행 가방에 가장 잘 어울리는 소지품이다.
은희경 소설에 등장하는 생활인들은 살가우며 그럴 듯하다.
현대인들은 마치 그의 문장을 뜯어먹고 사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그에게 조금씩 뜯어먹히고 있다.

은희경 소설에는 우리와 닮은 사람들이 우리와 똑같은 일상을 견디며 살아가지만,
우리가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잘 해지지 않는 행위들을 시도한다.
로망까지는 아닐지라도 마음 한켠에 파놓은 판타지를 찾아가거나 품고 살아간다.
하지만 대개 이러한 시도는 보기좋게 좌절하고 말지만,
그 지점에서 독자들은 제 몫을 두둑히 챙겨 간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소설과 다르지 않은 구성방법이다.
그런데 은희경답다는 것은 무엇일까?
여기서부터 나는 최신작부터 역순으로 읽기로 한 방침을 후회하기 시작한다.

최근작으로 추론하건데, 은희경의 문체는 감각적이고 다소 씨닉한 데다, 사실적인 관찰력만은 정평이 난 듯하다. 삶의 자세에 대해서도 성찰에서 중용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나와 만난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이 작품은 과도기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상황전개가 빠르고 다소 조악하다는 느낌을 준다.
인물의 운명과 행위에 대한 이야기구조에 대한 계산을 과도하게 많이 해서 그런지,
메시지가 불분명하다.
반드시 메시지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등장인물의 궤적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일종의 신호가 될 수 있겠지만,
은희경의 인물들 중 선 굵은 존재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상황이 인물을 장악한다.
인물과 상황의 대결이 좀처럼 펼쳐지지 않는다.
이런 것들은 나의 '소설읽기'가 장편에 치우쳐 있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인물들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입이 벌어질 정도로 치밀한 묘사를 가지고 무엇을 하려는지 잘 모르겠다.

'새의 선물'부터 장편을 차곡차곡 읽고 이 책을 다시 읽어봐야 겠다.
일단 나의 '쓰기'와 맞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고,
역설적이게도 현대 독자들의 패턴을 추론할 수 있었다는 점에 만족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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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또 읽고
역사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 - 산월기(山月記) / 이능(李陵)
나카지마 아츠시 지음, 명진숙 옮김, 이철수 그림, 신영복 추천.감역 / 다섯수레 / 199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목록'에 들어있지 않았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는데, 그만큼 시사하는 바가 많았다. 나는 일단 계획이 성립되면 떠벌이고 다니는 편인데, 그것은 순전히 '완결성'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취재는 책에서부터 시작될지 몰라도, 사람에게서 완성되기 때문이다. 내가 생전 처음 술자리에서 만난 서울시립교향악단의 관계자에게 귀중한 정보를 듣게 될 줄이야 꿈에라도 생각했겠는가.

나카지마의 문학의 바탕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한학의 전통에 있다. 일례로 '제자'라는 작품의 전거는 공자가어, 논어, 사기, 춘추좌씨전 등 내가 주목하는 원전이다. 내가 소개를 받은 작품은 공자의 제자 자로를 중심으로 한 '제자'라는 작품이었는데, 아쉽게도 '제자'라는 작품은 작품집에 게재된 네 편의 작품 중에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산월기(山月記)'와 '명인전(名人傳)'은 지고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인간 욕망이 서로 다른, 하지만 서로 마주보고 있는 형세로 그려져 있다. 산월기는 절대적인 문장을 좇다가 인간세를 벗어나 아예 짐승이 되었고, 명인전은 활의 고수가 되려다 활을 잊었다.
지고지순한 경지에 도달하려는 욕망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진배없다. 당장 생각나는 것만 헤아린다면 '깊이에의 강요'(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산월기류로 분류될 것이고, '타원형 초상화'(에드거 앨런 포)는 아마 중간쯤에 위치할 테고, '달과 6펜스'(서머셋 몸)은 명인전에 위치할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나카지마의 서술 방식이다. 앞서 말한 두 작품은 '장자식 우화'라는 모양새를 따르고 있다. 우화라는 것은 말하고자 하는 지점을 명확히 하거나, 과장되게 만들어 호쾌한 담론을 이끌어낸다는 장점은 있지만, 그것이 하나의 '인간형'을 지향한다고는 볼 수 없다. 그나마 '산월기'라는 작품은 우화를 뛰어넘어 인간이라는 문제에 정면으로 다가가고 있기 때문에 더욱 예쁘게 보인다.

문제의 걸작은 '제자'와 '이능'(혹은 이릉)인데, 이들은 모두 명백한 실존인물과 역사적 사실에 의거한 문학적 형상화이다. 그만큼 이 작품들은 실망과 만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제자'라는 작품은 내가 만들려는 이야기와 가장 근접하다고 할 수 있다. 즉 이야기의 대상이 공자보다 한 세대 뒤의 인물이며, 포스트 공자의 시대를 예견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제자'라는 작품에도 역시 '자공'이라는 인물이 비중 있게 소개되는데, 자로와 자공을 한마디로 비교해서 '가슴과 머리'의 차이라고나 할까. 자로를 도드라지게 만들려는 설정이기도 하지만, 자공이 주는 아우라를 상당 부분 제거했기 때문에 '제자'라는 작품은 대부분의 '시대'를 잃어버렸다.
눈여겨 봐야 할 부분은 '포스트 공자'를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공자의 신격화와 공자라는 하나의 '타성'을 우려하고 있으며, 공자가 함유하고 있는 내적 모순의 양상을 '장자'정도는 아니더라도 '최측근'의 입장에서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는 점은 우리가 왜 '공자'를 직접적인 모델로 삼아서는 안 되는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공자가 아직까지 '신화'의 태를 벗지 못하는 이유는 누구도 '공자 이후'에 대해서 의제로 삼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작품은 '공자 이후'를 알리는 중요한 작품이다.
하지만 앞서 지적했듯이 이 작품이 '내적 성취'에 집착한 점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것은 '자로'라는 불립문자의 인물을 '언어적'으로 표현하려는 데서 오는 부조화일 수도 있다. 작품에서는 희미하게나마 '공자 - 공자제자', '자로-자공'의 대립구도가 펼쳐지기는 하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펼쳐보였다면 '산월기'나 '이능'보다는 '제자'가 돋보였을지도 모른다. (작품집의 대표작으로 언급되는 작품은 '산월기'와 '이능'이다.) 그리고 '포스트 공자'에 대한 내용을 대폭 생략한 나머지 흔적으로만 남게 만든 점 역시 아쉽다.

그러나 자공은 또 한 번 골탕을 먹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건 그렇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그렇게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책 103쪽)


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의문을 던지고 넘어간 점은 비겁하기까지 하다. 이런 식으로 문제가 드러나지 않는다. 단지 공자 시대의 불가피한 '이견'으로 치부될 뿐이다. 만약 이것이 중요한 '의견'이 되지 못하고, '이견'으로 정리된다면 공자의 신화는 더욱 번성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아쉬운 점은 '제자'라는 작품이 '유림 류'의 단점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는 데 있다. 평전과 소설의 영역을 헷갈리게 만드는 작품이라는 뜻인데, 비록 작가적 상상력과 문학적 형상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져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부분적인 스케치에 불과하다. 게다가 '전지적 작가'의 개입이 너무 심해서 읽는 내내 짜증이 났다. 혹시 내가 잘못 읽었나 해서 한번 더 읽었지만, 기분은 풀리지 않았다. 아마 당장 이야기의 시점을 선택하라면 나는 '관찰자 시점'을 택할 것이다.

이에 비해 '이능'은 왜 대표작인지를 보여준다. '시대'가 흥미롭게 버무려졌으며 '인물의 대비'가 완숙하게 펼쳐진다. 게다가 '열전'의 문체를 유지함에도 불구하고 독자를 심심하게 하지 않는다. 이 지점을 나는 현대어에 대한 일종의 승리라고 보고 싶다. 사실 실존 인물, 그것도 역사적으로 멀리 떨어진 인물을 현대어로 풀어낸다는 것은 껄끄러운 일이다. 가능하다면 열전체나 우화체의 단순한 필체와 '전지적 시점'으로 펼치는 것이 현장감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능'은 또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이능'에게서 배울 점은 등장인물이 역사적 인물의 캐릭터를 가지고 있으며, 인물들의 '값'이 반영돼 있다는 점이다. 이는 전거를 최대한 기울여 인물에 대한 분석을 완성한 후에 집필을 했음을 증명한다. 내가 유의할 대목이다.

이 작품으로 하여금 나의 이야기는 피와 살을 더하게 되었으니, 이 책을 쓴 작가와 이 책을 추천해준 분께 감사를 드려야겠다. 이제까지 그려진 '역사의 인물들'은 대체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인물들이었다. 이 작품은 '걸어나온' 인물들을 그렸다고 하였는데, 이 점에 동의한다. 역사 속의 인물들은 반드시 '길'을 따라 걸어와야 할 것이다.

 

ps : 작품에는 신영복이 추천과 감역을 했으며, 이철수가 그림 작업을 했다. 이 또한 좋은 양념이 될 것이다.

 

※ 타이틀이 [자공리뷰1]이라고 되어 있는데, 전에 썼던 '자공리뷰1'은 이야기의 직접적 소재가 될 수 없으므로 '자공리뷰 외전1'로 바꾸었다. 그래서 '자공리뷰1'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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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01 12: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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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또 읽고
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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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 '자공리뷰'란 뭐란 말인가?

리뷰에는 두 가지 줄기가 있는데, 하나는 '목적성'을 가진 리뷰이며, 다른 하나는 '무목적성'의 리뷰이다. 하지만 무목적성의 리뷰라 할지라도 글을 쓴다는 '행위'는 일정한 방향을 가지고 있으므로 목적이 없다고 할 수 없으며, '무목적' 자체도 하나의 '목적'으로 생각할 수 있으므로 목적을 생각하지 않는 글을 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문제는 '목적성'을 가진 리뷰, 아니 목적을 가진 모든 글이다. 목적은 '결과'를 전제하기 때문에 목적에 대한 값어치가 결과에 따라 좌우되기도 하며, 결과에 관계 없이 목적 자체가 스스로의 의미를 만들어내기도 하는데,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들은 그것을 '역사'라고 부른다. 이런 말들이 '자공리뷰'와 무슨 관계란 말인가?
'자공리뷰'라는 말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말이며, 방금 전에 태어난 단어이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통용되지 않는 말이다. 나밖에 쓸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독점'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나한테만 소용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나는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에 살았던 '자공'이라는 사람을 모델로 '소설'을 계획하고 있다. 만날 수 없는 두 단어가 수천 년의 세월을 거슬러 어색한 조우를 했기 때문에 서로 친하지는 않겠지만, 이 글에 보탬이 되는 책에는 '자공리뷰'라는 타이틀이 들어갈 것이다. 모델이 될 만한 책은 사마천의 '사기열전', 좌구명의 '국어', '춘추좌전', 유향의 '전국책', 조엽의 '오월춘추', 여불위의 '춘추좌전', 최인호의 '유림1~2', 안영의 '안자춘추', 그리고 '공자가어', '논어'이다. 위에 소개한 책들은 대체로 '자공'이라는 카테고리에 담긴다. '달과 6펜스'는 매우 예외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소설'의 카테고리에 들어가야 합당하다. 이 예외적인 작품을 굳이 '자공리뷰'에 담은 이유는 자공이라는 인물을 '소설'로 그리려 하기 때문이다.


1인칭의 힘

1인칭 관찰자 시점 : 이야기속에 등장하는 보조인물안 "나" 가 주인공의 외면을 관찰하여
서술하는 방식


소설을 쓸 때 '시점'(視點)은 항상 고민이 되는 부분이다. 1인칭으로 쓸 것인가, 3인칭으로 쓸 것인가. '주인공 시점'으로 쓸 것인가, '관찰자' 시점으로 쓸 것인가? 아예 '신'이 되어버려? 시점을 번갈아가면서 한 작품을 쓸 수도 없는 일이다. 유력한 방법이라면 그런 시점을 성공적으로 사용한 작품들을 분석해 보는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달과 6펜스'는 1인칭 관찰자 시점을 성공적으로 적용했다고 할 수 있다. 작중인물은 독자들에게 '감질'이 오르게 하기도 하고, 때로는 예측불허로 몰고 가는 이른바 '끌고 당기기'의 귀재다. 이 1인칭 관찰자 시점은 도스또옙스끼의 '악령'과 비교할 수 있는데, '악령'에 비해서 관찰자의 성격이 매우 구체적이어서 소설 속에서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관찰자'가 아닐까 한다. 그 외에도 '관찰자'가 주인공이 경멸하는 '인습'에 동참하기도 하고, 주인공이 좇는 '절대성'의 진리를 꿰뚫어보기도 하고, 온갖 모순을 덮어쓰기도 하는 점, 화자로서의 한계를 낱낱이 '드러내'려 한 점, 중간에 '직접적인 역할'을 끝내고 구전에만 의지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간 점, 그 역시 '믿거나 말거나' 또는 '허허실실'의 비기를 발휘하며 리얼리티를 존중하면서도 '어렴풋한 진리'를 조준하고 있다는 점 등은 아마도 1인칭 관찰자 시점, 혹은 '달과 6펜스의 시점'이 보여줄 수 있는 미덕일 것이다.

1인칭의 이러한 매력에도 불구하고 '자공 이야기'는 1인칭의 서술 방법이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걱정이 든다. 일단 2,500년이라는 시간적인 간극을 '현대화'하는 어려움이 있다. 실존인물을 바탕으로 소설을 전개하는 방법은 '소설'과 '半 소설'이 있겠지만, 나는 '반 소설'의 색채를 예상해 본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나는 '전(傳)'의 형식을 취하려 하기 때문에 1인칭과 애초에 만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셈이다.
그리고 다른 이유는 매우 사소하지만, 어쩌면 이것이 결정적일 수 있겠다. 당시에는 철통같은 예법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현실적인 존재인 '관찰자'가 접근할 수 있는 기회는 한정돼 있다. 만약 그의 위치에서 접근할 수 없는 곳에 접근한다면 소설이 끝나기도 전에 '참수형'을 면하지 못하기 때문에 관찰자 시점 몹시 어려울 수도 있다. 물론 지인들의 이야기를 끌어들이는 '꼼수'를 쓸 수는 있겠으나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고 본다.

시점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이 소설에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 귀담아 들어야 할 몇 가지 미덕이 있다.

1. 정황묘사

나 같이 습작기를 벗어나지 못한 초보 작가들이 가장 빈번히 저지르는 잘못은 '순차적인 서술방식'을 보인다는 점이다. 그와 정반대에 있는 '선수'나 '꾼'들은 그것을 너무 습관적으로 '계산'한다는 점과 더불어 '과유불급'이 되기도 하지만, '달과 6펜스'는 특히 정황묘사에서 어떤 '양념'을 곁들여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

결혼을 해서 십칠 년이나 같이 살아온 사람이 처자를 버렸다면, 아내 되는 사람은 두 사람의 결혼 생활에 무슨 문제가 될 만한 점을 짐작이라도 했을 것 아닌가 말이다. (46쪽)
회사원과 여점원들, 오노레 드 발자크의 소설에서 막 걸어나온 듯한 노인들, 인간의 약점을 이용해 먹고사는 갖가지 직업의 남녀들이 있었다. (60쪽)
사실, 나로서는 잔뜩 호기심이 당기는 인물인데 그 사정을 조금밖에 알 수 없어 정말 감질이 났다. 마치 훼손된 원고를 읽어나가는 기분이었다. (107쪽)
그는 이제 탈진한 상태가 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말을 그치려 하지 않았다. 싸울 때 주고받았던 말을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되풀이했다. 그러다 보니 그 자리에서 하지 못했던 말도 생각나는 모양이었다. 그런 다음 자신의 어리석음을 또 한탄하는 것이었다. 왜 이렇게 하지 않았을까 속상해하고, 왜 그 말을 빠뜨렸을까 하고 자신을 탓하기도 했다. (154쪽, 백배공감)
캡틴 니컬즈의 말을 그대로 따르자면, 그때 스트릭랜드는 내가 여기에 적은 대로 말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이 가정에서 읽힐 것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진실을 희생시키는 면이 있더라도 집안에서 익숙하게 여겨지는 표현을 쓰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240쪽)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단편적인 것들뿐이다. 나는 이미 소멸해버린 동물을 뼈 하나만 가지고 그 형상뿐 아니라 습성까지 재구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생물학자와도 같은 입장에 있다. (246쪽)

위와 같이 원전을 시시콜콜하게 나열한 것은 글쓰는 나 같은 사람에게 주의를 주기 위함이다.
인도의 현자들이 '경전'을 만들 때 한 글자를 줄일 때마다 '큰절'을 했다고 한다. 글자수를 줄이는 것은 정신의 정수를 가다듬는 것이므로 지성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필요한 기술이다. 특히 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구질구질하게 이야기를 늘어놓기보다는 몇 마디만으로 몇 페이지에서 수십 페이지까지 절약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과감히 차용할 것이다.

2. 인물묘사

소설가들의 인물묘사는 대개 '골상학 전문가'들처럼 해박하고 치밀하지만 그런 수준에 오른 사람은 '중급' 정도라고 생각한다. 인물묘사의 백미는 무엇보다도 외모와 분위기와 주제와 내면과 개성을 복합적으로 드러내 주는 묘사가 아닐까. 정보값이 많은 묘사일수록 글자수도 경제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고 그 자체로 품위도 있다. 그런 인물묘사를 나는 '정황적 인물묘사'라고 부르기로 했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말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방안의 대화가 고루 이루어지도록 만드는 훌륭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25쪽)
그는 무감정한 미소를 띠었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내가 그 미소를 제대로 묘사할 수만 있다면 좋겠다. 매력적인 미소였다고까지는 할 수 없으되, 아무튼 평소의 침울하던 표정을 사라지게 하고 얼굴을 환하게 만들어놓는, 짓궂긴 해도 천성은 나쁘지 않다는 인상을 주는 그런 미소였다. 눈자위에서 시작하여 때로는 눈자위에서 사라져버리기도 하는, 그런 느릿느릿한 미소였다. 그것은 육감적이면서도, 잔인하다거나 다정하다는 느낌을 주기보다는 인간이 아닌 목신(牧神)의 환락 같은 것을 연상시켰다. (112~113쪽)
더크 스트로브는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꼴은 우스꽝스러웠다. 좀 초췌하고 여위기라도 했더라면 동정은 살 수도 있었으련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몸은 여전히 뚱뚱한 데다 불룩한 뺨은 잘 익은 사과처럼 불그레했다. ... 게다가 배까지 나오는 중이어서, 슬픔의 흔적이라곤 도무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 감성은 유별나게 섬세하면서도 행동은 투박했다. 남의 일에는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면서도 정작 자기 일에는 그렇지 못했다. 그처럼 허다한 모순을 안겨주고선 이 사내로 하여금 당혹스럽고 냉엄한 세상에 맞서게 한 걸 보면, 조물주의 장난이 잔인하기만 하다. (163~164쪽)

이 외에도 '달과 6펜스'의 작가(서머셋 몸)는 '모순'과 '대비' 또는 '모순적 대비'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줄 안다. 만약 주인공 스트릭랜드가 '지고지순한 예술성'을 추구하는 존재였다면 이 작품이 나에게까지 전달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스트릭랜드는 몹시 파렴치한 행위를 밥먹듯이 해대는 인물임과 동시에 '절대적 아름다움'을 평생 쫓아다닌 예술가의 혼이다. 이러한 '모순관계의 현실화'는 소설이라는 장르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아닐까 생각한다. 동시에 '리얼리티'를 '현실'과 구별짓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기도 한다. 현실 세계의 모습을 대충 본따서 보여주는 것이 '리얼리티'가 아니라 현실과 당당히 대결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현실이 리얼리티라고 생각한다. 시사저널 사태와 기자실 폐쇄 국면은 각각 개별적인 '현실'이지만, 이것을 '언론자유'의 판 아래서 '언론자유의 과잉, 언론자유의 빈곤, 언론자유의 왜곡'의 모습으로 무리없이 그려낸다면 그것은 현실과 구별되는 '리얼리티'가 아닐까.

'자공 이야기'를 온전히 그려내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소설이 재료가 될지 예측할 수 없다. 다만 이론에서 방법을 강구하기보다는 '작품' 속에서 이론을 만들어낼 것. 스트릭랜드와 같이 시행착오를 오랫동안 하더라도 그 '시행착오'는 바로 나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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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7-07-09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이 책을 참 재밌게 읽었는데, 너에게서 이렇게 활어를 회쳐먹는 느낌을 갖게될 줄은 몰랐다. ㅎㅎ
음. 자공리뷰라...! 알듯 모를 듯. 어쨌든 너의 리뷰는 생각해 볼만하다.^^

승주나무 2007-07-12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 누나//ㅋㅋ 자공리뷰는 아직 베일에 감싸 있어요. 실은 알맹이가 별로 없어서.. 거시기해요 ㅋ 앞으로 이런 '불온한' 리뷰를 많이 올릴 테니 많은 기대 바랄게요
 
일러스트 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지음, 뫼비우스 그림,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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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의 진화를 찾아나서는 신비로운 모험!

 

우리는 한번이라도 마음이 진실로 원하는 것을 위해서 위험을 감수해 본 적이 있었나? 하다  못해 학창 시절에는 대학에 가기 위해서 하고 싶었던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했고, 대학교에 가서도 취직 공부 때문에 학문다운 학문을 못해보고 대학문을 나서는 경우가 허다하다. 젊은이 산티아고는 평판을 얻기 위해서 성직자가 되길 바라는 부모의 바람을 뒤로 하고 목동이 되었다.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하룻밤의 강렬한 꿈을 표지로 삼아 삶의 터전이었던 양떼마저도 포기하고 단 하나 자신의 마음이 가리키는 ‘표지’를 향해서 긴 여행을 떠난다.

여행 중에 커다란 좌절을 경험하고 세속의 성공을 이루고 많은 안내자들을 만났지만 그것은 산티아고가 자신의 마음과 대화하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만물의 언어를 익히고 바람과 해와 사막과 이야기를 나누고 만물에 새겨진 신의 뜻을 따라 도달한 곳은 결국 자신의 마음이었다.

이 책은 초자연적인 신비와 자연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숙명에 대해서 동화처럼 잔잔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전체적인 뼈대는 연금술사가 금을 만들어내는 과정과 유사하다. 공장에서 제품을 만들 듯 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자연의 산물들을 자연의 언어에 따라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가열하여 금속 특유의 물질적 특징을 발산시키고 오직 만물의 정기만을 만들어 낸다. (137쪽) 연금술사에 의해서 절대적인 영적 세계와 물질 세계가 만나게 된다. (231쪽) 뿐만 아니라 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연금술사의 영혼조차도 함께 용해되어 불순물들이 제거된다. 이들이 만들어낸 금이라는 것은 단지 값어치 나가는 결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세계와 물질 세계와 인간의 영혼이 결합된 진화의 상징인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현자들, 즉 연금술사들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진화의 상징인 금이 전쟁의 신호가 되어 버렸다. (222쪽)

이 책을 읽으며 경계해야 할 것은 바로 ‘유명세’이다. 이 책의 모든 감명은 스스로 이해해야 한다. 많은 찬사와 호평이 이를 대신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이 작품은 ‘물질적인 금’이 되고 만다. 산티아고를 비롯해서 이 작품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과 자신의 삶을 동일시하여 대화를 나누고 책이 들려주는 만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마침내 감동을 발견해야 한다. 혹은 이 작품이 너무 예언적이지는 않은지, 산티아고의 여행과정이 너무 비현실적이지는 않은지, 등장인물들이 너무 빈번히 나타났다 사라지지 않는지 회의와 비판의 시선도 물론 독자들이 잃지 말아야 할 자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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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같은 것보다 다 다른 것이 더 좋아 - 이 땅의 모든 청소년에게 주는 철학 이야기
윤구병 지음, 이우일 그림 / 보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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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나라의 교육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모든 실패는 분명 원인이 있으며 교육 문제에도 원인이 있을 것이다. 원인에 대한 분석이 명확할 때 해결의 가능성도 열리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 문제에 대해서 손을 못 대는 이유는 무엇이 문제인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 공교육의 붕괴, 교권의 붕괴, 학원폭력 증가, 음란물 노출 등 산적한 현안만 있을 뿐 이에 대한 해법은 주먹구구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교육 문제는 어떻게 하면 해결될 수 있을까? 교육부가 말한 것처럼 방과 후 학습이나 삼불정책, 독서노트 강화 같은 정책을 시행하면 모든 교육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비싼 과외비를 내고 좋은 대학에 가면 교육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이런 해법으로는 교육에 대한 양극화만 심화될 뿐이다. 실패의 원인은 분명하다. 교육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이 없고, 그런 고민을 하는 교육자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저자는 철학을 가르치던 교수로서 교육계를 떠나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가 되었고 거기에서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가 이 땅의 모든 청소년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철학이야기는 우리 교육환경에 대한 강한 비판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비록 비판을 했던 때가 20년도 더 전의 일이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때문에 이 책이 아직까지 유효한 것이다. 이 책이 단지 교육자의 철학을 정리한 책이었다면 별다른 특징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이 다른 교육 철학 도서와 차별되는 이유는 ‘다양한 목소리’를 담았기 때문이다. 아이의 입장에서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거나 친구에게 편지를 쓰기도 하고, 아버지의 입장에서 아이에게 편지를 쓰기도 하는 등 다양한 목소리를 담고 있다. 담아내는 이야기는 현실 안에서 벌어지는 교육 문제의 실질적인 내용을 짚고 있다. 특별활동이나 학급활동, 체육 등 예체능 과목을 전부 폐지한 데 대한 학생의 불만이나 자살을 생각하는 친구에 대한 우려, 교육과 교육 행정의 괴리 등 현장에서 부딪힐 수 있는 문제들을 다루되 본질까지 꿰뚫고 있다. 게다가 권위적인 어른의 목소리가 아닌 또래 친구가 보내주는 편지의 형식을 갖추고 있기에 다정하고 편안하다.
주제와 관련된 짤막한 만화도 흥미롭다.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가 주된 틀이지만, 거기에는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온갖 모순이 담겨 있다. 예컨대, 공부를 하는 목적은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며, 좋은 대학에 가는 이유는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 이에 대해 꼬리를 물고 질문을 하다 보면 결국 목적도 없이 공부하는 허위가 드러난다. 그것이 어른들이 생각하는 세계이다. 결국 만화에서는 모순을 드러내며 화두를 시작하고, 글은 이에 화답해 문제의 구조적인 원인과 해결 방안에 대해서 친절하게 다룬다. 이와 같은 2원적인 구성이 이 책을 더욱 독특하게 만들고 있다.

이 책은 ‘교육’ 주변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삶에 대한 가치와 의미이다. 교육은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일 뿐이다. 우리는 누구나 배우는 사람으로 선생님이나 제자라는 구분이 없다. 궁극에 가서는 ‘깨달음’이다. 교육을 하는 사람이나 교육을 받는 사람이나 저마다 깨달음을 발견한다. 그것이 교육의 가치이다. 사람을 세상이라는 공동체에 참여시키는 것,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만드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자 책임이라면, 그 책임을 망각할 때 교육은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 대학에 가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사회적 정치적 지위를 얻는 수단으로 전락하면 그 안에 들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역설적이게도 교육에 억울하게 희생을 당하는 것이다. ‘꼭 같은 것보다 다 다른 것이 더 좋아’라는 이 책의 제목은 각자 다르게 태어난 사람들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것이 교육의 사명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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