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아버지가 아부다비에서 일하고 계셨고 그 덕분에 우리가지낼 수 있는 보금자리를 그곳에 마련할 수 있었어요. 그나마 저희는 운이 좋은 편이에요. 다만 친정 어머니와 형제들을 예멘에남겨두고 떠나야 했기에 제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했었죠. 제가조국을 떠날 때 파괴되어 가던 예멘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요. 사람들은 폭격 소리를 들으며 두려움과 슬픔 속에서 살아가야 했어요. 그때의 감정들은 기억하고 싶지 않아요."
"그럼 친정 가족들은요?"
"친정 가족들은 제가 예멘을 떠나고 반년 뒤에 예멘에서 나와 사우디를 거쳐 말레이시아로 갔어요. 예멘에 있을 때 온 가족이 한 집에 모여 매일 얼굴을 맞대고 지냈던 때가 그리워요."
- P126

아랍 무슬림은 이렇게 생각한다. 아랍인 무함마드는 알라의메신저로서 선택된 신성한 존재이자 무슬림으로서 가장 모범적인 삶을 살았던 최고의 인격체라고, 동시에 무지의 세계에 머물러 있던 아랍인을 무지에서 이성의 세계로 안내한, 그래서 결국이슬람 문명의 토대를 마련하여 세계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위인이라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함마드에 대한 풍자는 더욱더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슬람에서는 사람의 우상화를금하기 때문에 무함마드의 성화도 그리지 못하게 한다. 즉, 무슬림에게 있어서 무함마드 풍자는 알라에게 죄를 짓는 행위이자선지자 무함마드에 대한 도리가 아닌 것이다. 종교를 떠나 무함마드에 관해 공부하고 알아갈 때 아랍 세계에 더욱 깊이 들어가아랍인들의 마음의 빗장을 여는 ‘열쇠‘를 쉴 수 있다.
- P150

"모든 사람은 꿈을 꾼다. 그러나 그 꿈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밤에 꿈을 꾸는 사람은 밝은 아침이 되면 잠에서 깨어나 그 꿈이 헛된것이라는 사실을 이내 깨닫는다. 반면에 낮에 꿈을 꾸는 사람은 위험하다. 그런 사람은 눈을 뜬 채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행동으로 옮긴다. 바로 내가 낮에 꿈을 꾼 자였다." - P164

사우디 재정 수익의 80퍼센트 이상이 석유 판매 수익이다. 그러나 석유 산업에 관여하는 사우디 노동력은 10퍼센트도 되지않는다. 나머지 사람들은 무엇을 하는 것일까? 거대화된 국가는각종 공공 부문에서 국민이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고, 국민은 그 자리를 하나씩 꿰차고 앉아 국가의 부를 창출하는 데 큰기여를 하지 못하는 수동적인 노동자가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현상이 산유국에 사는 사람들 개개인에게 숨어 있던 게으른 본성을 자극한 건 아닐까? 사우디에서 태어나 20년을 살아온 한한국계 청년이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형, 사우디에서는코앞에 있는 마트도 안 나가요. 전화해서 배달하죠."
- P193

와하비즘과 전통적인 아랍의 관습으로 인해 나타나는 사우디 사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남녀의 엄격한 구분이다. 이는 극도의 가부장적인 분위기를 조성해 왔다. 사우디에서는 남성 후견인 제도 마흐람 Mahram‘ 때문에 여성들은 혼자서 출국하거나 교육받을 수 없었고, 취업이나 결혼 또한 자유롭게 할 수 없었다.
- P202

없었기 때문이죠. 주말에도 집 안에 갇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야 하니 우울해질 수밖에 없는 거죠. 집 밖에 나가도 특별히 즐길 수 있는 문화 공간이 없을뿐더러, 가족의 허락 없이 나갔다가는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매를 맞기 일쑤였거든요. 그런 우리에게 탈출구가 생겼는데, 그게 바로 한국 드라마와 케이팝이에요..
한국 문화를 접하면서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고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어요. 같은 우울함을 경험했던 어머니들이 딸들의 모습을 보며 한국 드라마와 케이팝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오히려 딸들을 응원하게 되었죠. 리야드에서 열린 BTS 공연 때도 많은 팬이 어머니와 함께 왔었어요. 최근 몇 년 사이에 인터넷의 발달과 한류의 바람, 거기다 사우디의문화 개방이 맞물려 생긴 현상이에요. 아, 35년 동안 사우디에서문을 닫았던 극장이 2018년부터 다시 문을 연 건 아시죠? 이제점점 우리가 즐길 수 있는 공간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상상할 수없던 일들이 지금 사우디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 P209

보다 골이 깊었다. 독립 국가를 꿈꾸었던 쿠르드인은 이를 묵살한 영국에 분노를 품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살아가던 수니 - 시아 쿠르드는 멜팅폿 안에서 하나가 되기는커녕 인위적으로 조성된 이라크라는 하나의 정치 체제 안에서 더 큰 파이를차지하기 위해 상호 견제의 긴장감을 한순간도 늦추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강한 중동을 원치 않았던 영국이 오히려 이러한분열을 원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 P223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사담 후세인 정권은 무너졌다. 그리고 수십 년간 삭혀 왔던 시아 수니 간의 갈등, 시한폭탄이 폭발해 버렸다. 그동안 사담 후세인 정권하에 억눌렸던 시아파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정권을 잡았다. 반면 사담 후세인의 죽음과 함께 정치계에서 축출된 수니파 세력이 정치적인 배제에 불만을 품고 과격한 반정부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나아가 수니파는 알카에다, IS 등 수니파 테러 세력과 규합해 정부에 대항했다.  - P225

지금도 뉴스를 볼 때마다 생각한다. 이라크의 아픈 현실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영국의 철학자 마이클 오크숏MichaelOakeshott의 말을 빌려 이라크의 상황을 표현하자면, 이라크는 출발점도 없고 예정된 목적지도 없이 ‘수평을 유지하면서 마냥 떠있는 것이 유일한 목표가 될 수밖에 없는 끝없는 항해를 하고있다. 이라크 국민은 어딘가에 빨리 정박하기를 바라고 있지만,
그 시기가 언제가 될지 아무도 예견할 수 없다.
- P228

아랍 역사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미묘한 민족적 요소들이 있어더욱 판단하기가 어렵다. 사담 후세인, 그는 정말 나쁜 놈이었을까? 질문의 답이 궁금해 샤르자대학교 역사학과 나집교수님과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교수님은 자신도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라며 신중하게 결론을 내렸다.
"아직은 그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사람이야. 각자의 시각에서 본인의 의견만 있을 뿐이지." - P266

오늘날 아랍에미리트 국민은 과거에 선조들이 겪었던 힘겨운삶과 희생을 기억하며 살아간다. 각 토후국의 통치자들도 국민을 향해 "옛 선조의 고난과 역경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며 부단히 역사를 상기시킨다. 그러나 정작 이들에게는 선조들을 기억할 만한 유형 문화재가 거의남아 있지 않다. 실제로 에미리트인들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것은 ‘고난의 삶을 통한 인내와 끈기‘라는 정서적 유산뿐이다.
어떻게 하면 과거를 잊지 않고 살아갈 것인가? 이를 위해 두바이의 통치자 셰이크 무함마드가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냈다. 무형의자산을 형상화해 현대 건축물에 반영하는 것이다.
- P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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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도서관이 사라진 결정적 사건이 로마의 이집트 지배였다고 생각해.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수많은 서적을 이교도의 것으로 간주해 배척하고 없애 버렸지. 인간이란 참 어리석지않아? 수백 년 동안 쌓아 온 학문과 예술의 축적물을 또 다른 인간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불태운다는 게…….?"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수난은 7세기, 이슬람 세력이 이집트땅에 들어온 이후에도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P50

현대 사회에서 그 후손들은 자신의 신앙을 지키는 동시에이슬람 사회에서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가며 그들의 위치를 잘다지고 있다. 카이로 같은 수도권에서는 이집트 기독교인의 생활 수준이 꽤 향상되어, 재능만 있으면 차별 없이 좋은 직업을갖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다. 콥트교인인 사라 박사 또한 의사 집안을 일구고 이집트 사회에서 보란 듯이 상류층을 차지하고 있다. 오늘날 이 땅의 이집트 기독교인과 무슬림은 같은 언어를 쓰는 국민으로서 같은 동네, 같은 건물에서 이웃으로 살며 평화롭게 지내고 있다.
- P62

"최근 내전으로 인해 수많은 예멘 난민이 전 세계를 유랑하고 있어요. 이 사람들이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접하면서 자신의머릿속에 박혀 있던 문화적 프레임이 완전히 깨지고 있지요."
이것이 예멘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군요?"
"맞아요. 언젠가 내전은 끝나겠죠. 그때 세계의 곳곳에서 활동하던 우리 다음 세대들이 예멘으로 돌아올 거예요. 그리고 그들을 통해 새로운 문화가 예멘으로 자연스레 유입되겠죠? 이것이 예멘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틀에 큰 변화를 줄 수 있을 것이라 믿어요."
- P84

아랍인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말과 음성, 몸짓으로 자유롭게 표현하기를 좋아한다. 아랍에서 수사학인 발라가 Balaghah가 발달한 이유이기도 하다. 레바논계 미국학자 필립 쿠리 PhilipKhur는 세계에서 아랍인만큼 문학적인 표현에 열광적으로 반응하고 말과 글에 감동하는 민족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아랍인은기쁨, 슬픔, 분노 등 마음속 감정을 솔직히 이야기하고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호소하기도 한다. 자신의 감정을 청자의 가슴에도달시키려 한다. 부끄러움이나 거리낌이 없다. 박사 과정에서같이 공부하는 친구 아스마는 과제를 할 시간이 없다며 수업 중에 큰 소리로 교수에게 자주 호소한다.
CC교수님, 제가 애도 봐야 하고, 무엇보다 우리 어머니가 아프신 거 아시죠? 제가 어머니 돌보랴 아이들 밥하랴 과제 할 시간이없어요! 제 상황이 너무 애처롭지 않은가요? 우리 어머니도 너무 불쌍해요! 그런데도 과제를 해야 한다고요?"
- P101

 이슬람 전파의 시작은 메카와 메디나였다. 이슬람으로 개종한 아랍인들은 이슬람의 기치 아래 사막을 발판 삼아주변으로 계속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이들은 사막 가장자리에거점 도시를 건설했고, 그 거점 도시에서 출격한 아랍인들은 주변 지역을 하나씩 정복해 나갔다. 중동학의 권위자 버나드 루이스Bernard Lewis는 사막을 바다에, 군사 도시를 항구 도시에 비유했다. 즉 아랍인들은 사막의 출구에 항구(군사 도시)를 설치한 후그곳을 기지 삼아 ‘낙타‘라는 배를 타고 주변 영토로 세력을 확장했다는 것이다.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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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젊은이는 초점 없는 시선으로 멍하니 앞만바라보았다. 극도의 피로감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안에서 솟구쳤고,
전쟁 초기부터 쌓인 온갖 고통, 온갖 분노와 함께 주체할 수 없는 흥분이 일었다. 죽어가는 친구를 보며 느끼는 울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졌다는 패배감, 영웅주의적인 애국심이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공허함으로 그는 운명에 대한 극단적인 반항심을 품게 되었다.  - P541

보수적인 부르주아들의 가슴속에서도 불타고 있었다. 프랑스는 피와돈이 말라가고 있었다.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항전을 고집하는 파리에대한 은근한 반감이 지방 점령지 전역에서 싹트고 있었다. 그는 목소리를 낮춰 강베타의 열렬한 선언을 암시하며 결론을 내렸다.
"아니, 아니! 우리가 극렬분자들을 지지할 수는 없어요. 결국 잔혹한죽음에 이르게 되니까 …… 저는 선거를 원하는 티에르 씨를 지지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공화정, 맙소사! 하지만 공화정을 반대하는 건 아닙니다. 필요하다면 그렇게라도 해야죠, 더 나은 게 나올 때까지."
- P625

달리샹 박사가 장을 이륜마차로 부이용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박사의 용기와 선의는 끝이 없었다. 바이에른에서 퍼지기 시작한 티푸스가 로쿠르를 휩쓸자 그는 집집을 다니며 환자를 치료했고, 그 외에도로쿠르 야전병원과 레미 야전병원 두 곳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부상병을 치료했다. 열렬한 애국심, 부당한 폭력에 대한 저항심으로 인해 그는 프로이센 당국에 두 번이나 체포되었다 풀려났다. - P630

수개월의 고통과 기아를 거치며 지칠 대로 지친 시민들, 이제 무위 속에서 악몽에 시달리는 시민들, 바야흐로 자신이 만든 유령 앞에서 의혹에 빠진 시민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리고 공공연하게 반란의 싹이 텄다. 시민들의 영혼을 헛되이 불태운 뒤 복수와 파괴의 맹목적 열망으로 변해버리는 환멸의 애국주의는 독일의 대대적인 포위 공격이 끝날 때마다 보이는 정신적 발작 가운데 하나였다.  - P648

 아! 장군들! 그의 뇌리에스당의 장군들이, 그 향락적이고 무능력했던 장군들이 떠올랐다. 장군이 한 사람 늘었든 줄었든 그런 게 뭐가 중요한가! 그날 하루의 나머지시간도 똑같은 열광과 흥분, 그의 전망을 완전히 바꿔놓은 열광과 흥분속에서 마무리되었다. 거리의 포석조차 바라는 듯했던 무장봉기가 점점 확산하더니 예기치 않은 승리의 운명 속에서 대번에 사태를 지배했고, 마침내 밤 열시경 시청을 중앙위원회 손에 넘겨주었다. 그리고 중앙위원회 위원들은 자신들이 시청을 장악한 게 믿기지 않는 듯 놀라워했다.
- P651

그러자 말도 안 된다는 듯 격한 몸짓으로 모리스는 장의 손을 놓았다. 두 사내는 잠시 서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한 사람은 파리 전체를휩쓴 광기의 충동, 즉 저멀리서 온 질병, 황제가 뿌린 병균에서 비롯된질병에 사로잡혀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노동과 검약의 땅에서 자랐기에 상식과 무지로 무장한 채 상대적으로 건강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형제나 다름없었고, 연대감이 더없이 강고했다.
갑자기 군중이 떠밀어 서로 떨어지게 되자, 그들은 무척 아쉬워했다.
- P653

죽음을 모면한 모리스는 패배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고, 프로이센군과 맞붙어 번번이 패한 자칭 합법 정부군이 파리와 싸울 때는 엄청난용기를 발휘하는 걸 보고 어이가 없어서 화조차 나지 않았다.  - P655

화염에 휩싸인 주변건물들이 내뿜는 참을 수 없는 열기와 질식할 듯한 공기가 그의 몸을휘감았다. 포석 더미가 쌓인 십자로는 비처럼 쏟아지는 불똥과 함께 화재로 방어되는 진지, 불의 참호로 둘러싸인 진지가 되었다. 게다가 이것은 명령이 아니었던가? 바리케이드를 포기할 때는 동네에 불을 지를것, 불덩이 방어선으로 정부군을 저지할 것, 파리를 넘겨줄 상황이 닥치면 파리를 불태울 것. 벌써 화염에 휩싸인 지역은 바크가만이 아니었다. 그의 등뒤로 도시 전체가 불타는 듯 검붉은 하늘이 보였고, 멀리서뭔가 무너져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 P666

시라도 편히 쉬는 것이었다. 독일에서 끌려와 임의로 뒤섞인 포로 출신병사들은 파리를 향한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그리고 코뮌의 만행도 소유와 질서에 대한 존중심에 상처를 내며 장을 격분하게 했다. 온건한농부로서 그는 다시 땅을 일구고 결실을 거둘 수 있도록, 노동할 힘을얻을 수 있도록 그저 평화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화재는 가장 선한천성마저 잠재우며 미치도록 그의 화를 돋우었다. 승리할 수 없다고 해서 집을 불태우고 궁전을 불태우다니, 아. 그건 안 돼, 말도 안 돼! 그것은 날강도들이나 할 짓이었다. 그 전날 즉결 처형을 보고 통탄을 금하지 못했던 그도 이제 자제력을 잃었고, 고함을 지르며 눈이 뒤집힐 정도로 난폭해졌다.
- P667

 마침내 파리가 불타고 있어, 독일군의 포탄이 처마끝도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파리가 불타고 있어! 군터는 가슴에 맺혔던 응어리가 풀리는 듯했다. 포위공격으로 인한 격심한 피로, 혹독한 추위, 끊임없이 발생하는 난관 등이 여전히 독일군을 괴롭혔는데, 이제야 그 고통을 보싱빈는 기분이었다. 지방의 정복도 50억 프랑의 배상금도, 그 무엇도 이 파괴된 파리,
사나운 광기에 물든 파리, 청명한 봄밤에 스스로 불타올라 연기 속으로사라지는 파리만큼 승리의 자부심을 채워주지는 못했다.
- P673

그러나 모리스는 불타는 도시에서 눈을 떼지 않고 천천히, 힘겹게더듬거렸다.
"아냐, 아냐, 전쟁을 저주하지 마……… 전쟁은 나쁜 게 아냐, 전쟁은자기 할일을 할 뿐이야….."
장이 증오와 후회에 찬 고함으로 그의 말을 끊었다.
제기랄! 네가 여기에 누워 있잖아, 그게 다 내 잘못인데……… 전쟁이뭐가 좋다고 그래, 전쟁은 더러운 거야!"
환자가 모호한 몸짓을 했다.
"오! 전쟁이 뭐가 문제라는 거지? 이점도 많아!..… 유혈사태는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전쟁이란 죽음 없이 존재할 수 없는 생명이야."
- P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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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국왕의 발밑으로, 레미에서 프레누아까지 촘촘하게 포진한포병대들이 쉴새없이 몽셀과 대니를 공격했고, 스당을 넘어 북쪽 고원까지 화염에 휩싸이게 했다. 아직 여덟시가 채 못 되었다. 국왕은 전투의 필연적 결과를 기다리며 거대한 장기판을 응시했고, 자애롭고 무궁한 자연 속에 흩어진 조그만 병정들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였다.
- P262

영웅이 되는 건 멋진 일이지,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어.
배를 채우는 일, 그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었다. 맛있는 수프가 끓는 날이면 얼마나 사랑스러운 눈으로 냄비를 바라보았던가! 그러나 빵이 없는 날이면, 그들은 어린아이나 야만인처럼 불같이 화를 냈다.
"먹지 못하면, 전투도 못해." 슈토가 말했다. 젠장, 오늘 내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 P265

그러자 보두앵 중대의 병사들 사이에서 조소가 터져나왔다. 모리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경멸에 찬 야유를 쏟아붓는 슈토와 루베의 편이었다.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 그저 떠미는 대로가면 돼! 이제야 장군들끼리 마음이 맞는 모양이군. 그래, 더이상 자기가 옳다고 고집 피우는 자가 없는 건가! 이따위 장군들 밑에서는 잠이나 자는 게 상책이지 않겠어? 단 두 시간 만에 총사령관이 셋이라니.
도대체 뭘 해야 할지도 모르는 채 제각각 다른 명령을 내리는 건달 셋이라니! 모두가 기겁할 일이야, 그렇잖아, 이런 상황에서는 신이라도사기가 꺾일 테지! 배반이라는 비난이 다시 쏟아졌다. 뒤크로와 드 빔펜도 마크마옹처럼 300만 프랑을 받고 싶은 거라고!
- P286

"그런데, 그가 장에게 말했다. "뭐라도 좀 먹어야겠어.……… 지금 당장총에 맞아 죽을망정 배를 채우고 싶어!"
모리스는 배낭을 열었고, 떨리는 손으로 빵을 집어 허겁지겁 물어뜯었다. 총알이 씽씽 지나갔고, 포탄이 지적에서 폭발했다. 그러나 배를채우는 일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안중에 없었다.
"형, 조금 먹지 않을래?"
똑같이 굶주림에 시달리던 장은 얼이 빠진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어쨌든 먹고 보자. 나도 너무 힘들어."
- P362

바로 그때, 모리스는 장이 다시 눈을 뜨는 것을 보고 기쁨을 느꼈다.
장의 얼굴을 적실 물을 구하러 근처 개울로 뛰어갔을 때 오른쪽, 즉 거친 비탈로 둘러싸인 깊은 골짜기에서 아침에 보았던 농부가 커다란 백마에 매단 쟁기를 밀며 태연히 일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왜 하루를허송하랴? 전투를 한다고 밀이 자라기를 멈추고 사람들이 살아가기를멈추는 게 아니잖아.
- P371

기대를 넘어서는 완벽한 압승이었다. 이 광활한 계곡 앞에서 도로 위에 널린 수천 구의 시체는 너무도 작아 보여 빌헬름 국왕은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바지유의화재, 일리의 학살, 스당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아름다운 하루가 평온하게 저무는 이 시각, 무심한 자연은 너무도 눈부시게물들어갔다.
- P403

1780년에태어난 그의 할아버지는 나폴레옹 대군의 영웅 중 한 명으로 아우스터리츠 승전, 바그람 승전, 프리틀란트 승전의 주인공이었다. 1811년에 태어난 그의 아버지는 평범한 사무원으로 전락해 셴포필뢰에서 징세관으로 일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1841년에 태어난 그는 신사로 자라나 변호사로서 온갖 어리석은 유혹, 온갖 위대한 열정에 사로잡히기도했으나 이제 스당에서 패배해 하나의 세계를 끝장내는 재앙을 맞이했다. 이런 종족적 퇴화가 아니라면 어떻게 할아버지 세대에서 승전을 거듭했던 프랑스가 손자 세대에서 참패를 당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을까.
그의 가슴을 몹시 아프게 한 그 종족적 퇴화는 천천히 악화하다가 때가 되면 파국을 초래하는 가족력을 연상케 했다. 만약 승리했다면, 그는 너무도 용감하고 의기양양했으리라! 하지만 패배하자, 그는 여자처럼 신경이 쇠약해져 전 세계가 빠져드는 깊은 절망 속으로 굴러떨어졌다. 더이상 아무것도 없어, 프랑스는 죽은 거야. 목을 죄는 듯한 흐느낌이 터져나왔다.  - P440

그런 다음 그는 고통스럽게, 생각나는 대로 자기 의견을 말했다. 우리는 호되게 당한 거야, 그건 확실해! 하지만 모두가 죽은 것은 아니야열심히 일하고 벌어들인 것을 탕진하지 않는다면, 남아 있는 사람들만으로도 충분히 만사를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을 거야. 예를 들어 가정에서도 모두가 참고 견디며 저축을 하면, 최악의 상황에서도 언제나 출구가 보이는 법이야. 심지어 가끔은 따귀를 맞는 것도 나쁘지 않아, 곰곰이 생각하게 해주니까. 게다가 말이야, 만약 몸 어딘가가 썩고 있다.
면, 예를 들어 팔다리가 썩고 있다면, 그걸 도끼로 쳐서 잘라내는 게 온몸에 독이 퍼져 죽는 것보다 낫지 않아?
- P441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 정말 진절머리가 나요!" 프로스페르가 다시말했다. "저기 아프리카에 있을 때처럼, 힘들어도 뭔가 좋은 일을 하게해줘야죠! 그런데 이번에는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다시 제자리로왔다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만 시켰어요, 그건 정말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에요…… 게다가 불쌍한 제피르가 죽었고, 저는 완전히 혼자가됐어요. 그러니 다시 농사일을 시작해야죠. 안 그래요? 그게 프로이센포로가 되는 것보다 낫잖아요…..… 푸샤르 영감님, 영감님은 말도 가지고 계시잖아요. 한번 보세요, 제가 얼마나 말을 사랑하는지, 얼마나 말을 잘 돌보는지!"
- P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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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순간, 모리스는 온몸을 떨리게 하는 어둠 속에서 크나큰 의무감을 느꼈다. 그는 더이상 전설적인 승리를 거두겠다는 허황한 꿈을꾸지 않았다. 베르됭으로의 행군,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행군이었다.
그리고 죽어야 하는 이상 그는 그 죽음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 P91

당장의 전투를 꿈꾸며 애국적인 열정 속에서 입대한 지 육 주가 지났건만, 그가 한 것이라고는 전투와 무관하게 살았기에 구보에 익숙하지 않은 자신의 발을 혹사시킨 행군뿐이었다. 따라서 적군을 애타게 기다리면서 그는 아름드리나무 사이로 무한히 뻗은 듯한 그랑프레 도로를 초조하게 주시했다.
- P125

 아! 대패가 확실한데도 완조의안녕을 위해 사지로 급파되는 이 설망의 군대여, 이 파멸의 군내여 진격하라, 진격하라, 뒤도 돌아보지 말고, 빗속으로, 진창 속으로, 전멸을향해!
- P147

랭스에서 야영한 다음날 샹파뉴에서 병사들이 했던 즐거운 행군, 농담과 노래로 떠들썩했던 행군, 프로이센군을 따라잡아 격퇴하리라는 희망 속에서 배낭을 가볍게 들어올렸던 행군과는 전혀 달랐다. 이제 분노와 침묵 속에서 그들은 어깨를 짓누르는 소총과배낭을 저주했고, 지휘부를 더이상 믿지 않았으며, 절망에 사로잡힌 채채찍질을 두려워하는 가축떼처럼 전 만근 무거운 발을 그저 앞으로옮길 뿐이었다. 이 가련한 군대는 자기들의 십자가를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 P153

많이 배우지 못해 무식한 그가 보기에, 서로 조금씩만 양보하면 조화롭게 공존하는것보다 더 쉬운 것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많이 배운 모리스는 전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전쟁이 삶 자제요. 세계를 움직이는 법칙이라고 생각했다. 정의와 평화의 개념을 도입한 자는 불쌍하고 유약한 존재가 아닐까? 어차피 냉혹한 자연이란 끝없는 살육의 장일 뿐이니까.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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