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만난 세상 - 대한민국 인권의 현주소를 찾아
국가인권위원회 기획, 박영희 외 지음, 김윤섭 사진 / 우리교육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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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란 단어는 항상 그리움, 동경, 여행 이런 감정들을 동반한다.
삶의 고단함에서 훌쩍 벗어난 자유로움.....
하지만 같은 길이라 하더라도 그 '길'에 세상이 담긴다면 그건 전혀 다른 의미로 와닿는다.
정착하지 못한 삶의 고단함.
아니 정착의 삶에서 ?겨나 떠도는 자의 고통과 아픔들로 가득찬 길이 되어버린는 것이다.

누가 그들을 길로 내몰았을까?
노동은 있으나 노동자가 아닌 비정규직 노동자들. - 삶의 기본적인 먹고 사는 문제에서조차 늘 벼랑에 매달려 있어야 하는 사람들.
이 땅에 삶을 찾아왔으나 그들을 위한 집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들과, 농촌 총각과 결혼한 이국의 여성들.
도심 여기저기 어디를 배회해도 막막한 길밖에는 그들을 받아주는 곳 없는 노인들.
다 말해 무엇하리...

그들에게 길은 삶에서 내팽개쳐져 찬바람을 오롯이 맞아야 하는 지지리도 궁상맞은 그런 '길'?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더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
개천에서는 그냥 미꾸라지만 나고 그리고 대물림한다.
학교는 더 이상 계급상승의 수단이 아니다.
부모의 계급과 경제적, 사회적 상황을 대물림하는 장소일 뿐이다.
지금 대한민국 교실에 가보라...
부모의 돈이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그들의 성적을  결정하고, 외모와 성격조차도 결정한다.
계급 상승의 희망마저도 사라져버린 사회.

잘사는 사람은 잘사는게 당연시 되어버리고 그의 자식들도 또한 잘사는게 당연시되어 버린다면, 이 대한민국에서 누가 길에 내팽개쳐진 사람들의 삶을 생각할까?
굳이 월드컵이 아니더라도 이들의 삶은 더이상 주목받지 않는다.
애써 외면한 결과, '아직도 그렇게 사는 사람이 있어요?'라는 호들갑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그래도 그들은 엄연히 존재하고 그래서 계란으로 바위치는 것 같아도 누군가는 이런 얘기를 해주는게 눈물나게 고맙다.
세상을 향해 아픈 이들이 아직도 이렇게 많이 살아있다고, 이건 아니라고, 왜 외면하냐고 소리쳐 줄수 있는 사람이 글이 눈물나게 반갑다.

지금은 같은 교실에 똑같은 교복을 입고 앉아 있지만, 그 실제 삶은 지금도 너무 다르고 앞으로는 더 달라질지도 모르는 그 아이들에게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되더라도 잊지 말아야 할 건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런 지금 세상이 옳은 건 아니지 않냐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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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대한민국 2 - 박노자 교수가 말하는 '주식회사 대한민국'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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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씨의 책을 읽을때면 나는 가끔 해보는 생각이 있다. 이 사람이 파란눈의 백인이 아니라 흑인이거나 동남아시아나 남미의 사람이었다면... 그래도 그의 글이 이렇게 한국사회에서 대표적인 논객의 대접을 받고 할 수 있었을까?(책을 읽다보니 뒤쪽에 실제로 나같은 생각을 가지고 질문을 던진 학생이 있더만....) 한겨레 21을 통해 그의 글을 처음 접했을때 사실 나 역시 그의 특이한 이력 - 오리지널 백인이면서 한국으로 귀화한 -에 끌렸었다. 그가 만약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의 귀화인이었다면 나 역시 그렇게 쉽게 호기심을 가지고 그의 글들을 읽었을는지는 알 수없다.

박노자 그가 말하고자 하는것. 그것은 바로 대다수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 편견과 편견으로 인한 폭력에 대한 비판이다. 그의 비판은 그 스스로가 한국인이라 생각하기에 조금도 외부인의 체면치레나 외교적인 언사가 없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라는 인간속에 축적된 한국이 아닌 다른 문화의 경험덕택에 보다 객관적이고 명쾌하게 한국사회에 비판의 칼날을 들이댄다. (여기서 객관적이라 함은 누구나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한국의 제반 문화에 대해 일정의 거리두고 바라보기에 그가 성공하고 있다는 의미이다.남의 눈의 티끌은 보여도 내 눈의 들보는 안보이는 법이니까....)

박노자는 박통을 늘 다카키 마사오라 부른다. 그가 박통을 박정희가 아니라 다카키 마사오라 부르는 것은 박통의 친일 경력때문이 아니다. 사실 식민지 시대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다른 친일파들에 비하면 그의 업적(?)은 사실 미미하다고 할 것이다. 박통이 박정희가 아니라 다카키 마사오인 이유는 박통이 만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일본 군국주의 그 자체 아니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일본군국주의의 군사문화와 억압적 폭력적 통치체계가 여전히 이 나라를 병들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노자는 당신들의 대한민국 1편에서 박통정권의 해부에 그토록 많은 지면을 할애했던 것일게다.

박통이 이 땅에 심어놓은 일본군국주의에 대한 논의는 2권에서 보다 더 폭넓은 영역에서 짚어진다. 우리의 일상생활속에 뿌리박은 군사문화의 획일성 억압성이 어떻게 아직도 우리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가?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기 위해 인간의 외면을 규율하는 복장의 규격화 획일화는 아주 빠른 중학교 시절부터 시작된다. 우리 사회의 인권 수준이 그래도 나아졌다고 자부할 때 여전히 우리는 중학교 아이들의 복장부터 그들을 억압하고 있다. 누구나 상식처럼 생각하지 않나? 어릴때는 순수한 모습 그대로가 예쁜거야... 화장은 무슨... 머리도 단정하면 예쁘지...이런걸 상식이라고 하지 않고 억압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있는 박노자는 그래서 고맙다. 나의 진보성이란게 어느 수준인지를 자각하게 해주니까....

최근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낱낱이 보여주게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 역시 그의 비판의 칼날을 비켜가지 않는다. 그는 단순히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을 확보해야 한다는 수준에서 벗어나 대한민국이 제대로 된 국가가 되려면 진정한 아시아의 일원으로서 교육과 문화가 몽땅 아시아를 보다 중시하는 방향으로 방향전환을 하는 것만이 서구 제국주의가 저지른 역사적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글들을 읽고 있노라면 나자신이 벌거벗기워 지는 기분이다.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하지만 부끄럽다고 끝내버리는데 그의 글의 힘이 있는 것은 아니다. 비판은 쉽다. 대안을 마련하고 실천해나가는게 진정한 비판이다. 그는 끊임없이 한국사회의 대안을 모색한다. 그러므로 그의 글을 읽는 것은 부끄러움을 느끼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한다. 그러므로 유쾌하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넘어 우리들의 대한민국으로 바뀌는 그날 아마도 우리는 백인이 아닌 흑인 박노자, 또는 동남아시아 출신이나 남미 출신 박노자를 만날수 있을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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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06-02-05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비판은 쉽지요^^대안을 마련하고 실천해나가는게 진정한 비판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닿네요.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읽었던 때가 어렴풋이 떠오르네요^^

바람돌이 2006-02-06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2권은 1권보다 새롭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더 성숙해진 느낌이랄까.... 이 책 읽으면서 박노자라는 사람이 참 낙관적인 사람이구나 하는걸 느낄 수 있었어요. 그의 그 낙관의 힘이 저에게도 전염되는 느낌이랄까.... ^^

딸기 2006-02-10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스투...합니다. :)

바람돌이 2006-02-10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 감사해요. ^^
 
당신들의 대한민국 2 - 박노자 교수가 말하는 '주식회사 대한민국'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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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서 보기에 우리의(대한민국의) '성공'을 가능케 한 것은 제대로된 노동 생산성의 향상이나 기초과학 성과의 장기적 축적, 내수시장의 원만한 성장이라기 보다는, 노동자로 하여금 말도 안되는 대우를 감수하며 죽도록 일하게 만드는 '생존공포'의 분위기다. 나는 <태극기 휘날리며>같은 화려한 영화를 재미있게 봐도 과연 그 전투 장면을 어렵게 연출해낸 수많은 엑스트라들이 일당으로 얼마를 받았을까 하는 궁금증을 떨쳐낼 수가 없다. 상품이 아무리 좋아도 그 상품을 만든 이들이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않았다면 '노예'노동의 결실을 즐기고 있다는 가책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는가?-15쪽

혁명이란 모든 객관적인 조건들이 두루 성숙되고 특별한 내외적 계기가 주어질때만 일어난다. 그런데 그러한 일이 가능하려면 수많은 준비작업들이 필요하고 그중의 하나가 바로 '의식'의 준비다. 지배자들의 담론이 얼마나 허황한 거짓인지, 지배와복종의 권력관계가 ㅇ러마나 야만적인 모습을 띠고 있는지, 지배자들이 우리에게 주입해온 '애국주의'나 '민족주의'가 전 세계적인 해방 투쟁에 얼마나 방해가 되는지... 이모든 것들이 대중적으로 이해되고 수많은 이들에게 '남'의 아픔이 바로 '나'의 아픔으로 느껴진다면 역사를 바꿀 만한 변혁이 가능해질 것이다. -22-23쪽

복장과 외모의 규칙을 체화하게 되면 일상적인 권위주의의 또 다른 담론과 행동방식들을 더 쉽게 받아들이게끔 된다. ...... 외모 결정권이 박탈된 개인의 내면에서 모든 외부적인 권력 압력에 저항하는 힘이 한층 약화되니 남의 내면을 다스리려는 권력자들이 남의 외모부터 다스린 것이다.

----->중학교만 들어가면 시작되는 복장단속. 이젠 지겨운데도 없어지지 않는 이유!!-35쪽

청소년의 성이 폭력 서클에서의 왜곡된 애정 행각이나 성폭력, 폭력적이며 남성 우월적인 음란물 열람으로 나타나기보다는, 차라리 서로에 대한 아낌과 존중을 바탕으로 한 따뜻한 키스나 평등하고 자유로는 결합으로 표출되는 것이 훨씬 낫지 않을까? 우리가 자연의 지혜를 따를 줄 알았다면 10대 후반 학생의 키스에 처벌을 가하는 대신 그들의 멋진 성장에 상을 주었을 것이다.

----> 나는 우리 아이가 10대가 되어 첫키스를 했을때 상을 줄 수 있을까? 아니면 남자친구와 독립하겠다고 했을때 지원해 줄 수 있을까? 내 속의 보수성이 여전히 살아있군.... 아직 멀었다.-45쪽

나는 민족주의자도 아니며 한국어가 다른 언어들에 비해 특별한 우수성을 보유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머나먼 미래에 세계 전체가 하나의 사회주의적 사회를 이뤄 만국의 언어가 하나로 통일되는 것도 즐겁게 상상해볼 수 있다. 그러나 현단계에서 다수 근로자들의 언어가 지식 사회에서 시민권을 잃어가는 것과 패권 제국의 언어가 사회 귀족 특권의 상징으로 부상하는 것은 사회의 대다수 피지배 구성원에게 피해를 줄 수 밖에 없다. 미안하지만 이는 결코 선진화가 아니며, 사회 양극화의 언어적 표현이자 동아시아 시대에 역류하는 대미 예속의 강화일 뿐이다.-63쪽

5공시절부터 빈민 개병제로 전락되고 만 국민개병제라는 엄청난 부담, 하릴없이 썩어야 할 잃어버린 3년에 대한 쓰라린 기억, 그리고 나처럼 썩는 대신 미국에서 공부나 즐겁게 한 돈과 백이 있는 놈에 대한 분노 등은 어디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가시적으로 병역을 면하게 된데다 우리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남이 됨으로써 우리의 국가주의적, 집단주의적 감정을 건드린 그(유승준)는, 국민개병제의 억압으로 인한 원한을 풀 수 있는 최적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유승준을 왕따시켜봐야 국민 개병제로 인한 심각한 문제들이 해결될 것도 아니지 않은가? 유승준에게 분노를 퍼붓는 것보다는, 군축과 모병제로 점차적인 전환을 모색하는 것이 훨씬 더 생산적인 해결법일 것이다.

--->이 땅의 예비역들에게 내가 하고 싶은 말..-124쪽

중고등학교에서 서구가 아닌 아시아 위주의 세계사를 배우고, 대학교에서 이슬람 문화 강좌를 교양으로 듣고, 방송과 신문에서 파키스탄의 소설과 방글라데시의 시에 대한 보도를 자주 접하면서 어릴 때부터 아시아의 구성원으로서 자라날 수 있는 나라가 되지 않는다면, 서구처럼 인종, 문화적 배타성 문제로 홍역을 치를 가능성이 많다.
-216쪽

외세 침략과 같은 외부적 모순들은 박물관의 전시에 반영되지만 '우리' 역사의 내부적 모순들은 주로 은폐된다. 예컨대 '민족의 우수성'을 만방에 알리는 불상의 조성이 사찰 노비의 강제된 노동과 국가라는 폭력 조직의 보시로 이루어졌다면 그건 부처의 가르침으로 보아 심각한 모순이다. 그러나 박물관은 비판의식을 가르치지 않는다. '아름다운 우리 역사'는 감상용이지 반성용이 될 수 없다.-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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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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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초에 무슨 일이었던지 내가 남편에게 이런 말을 던진적이 있었다.

여성문제에 대해서는 좌파도 우파도 없고 오로지 보수꼴통들밖에 없는 것 같다고...

그에 대한 남편의 대답은 그걸 이제 알았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거였다. 그리고 "야 미쳤다고 남자들이 페미니스트를 하냐? 그거 모르면 지 몸이 얼마나 편한데.... 기득권은 그렇게 쉽게 없어지는거 아니다. 특히나 이렇게 날때부터 골수 깊숙히 박혀있는 기득권은..."

아 그런거였구나? 단순히 아직 몰라서 이해를 못해서 그런게 아니였구나... 나도 한때는 박노해시인의 이불을 꿰매며를 읽으면서 적어도 운동권이라는 남자들은 가사일이든 여성에 대한 시각이든 뭔가 다를거라는 환상을 가진적이 있었다. 물론 그 환상은 오래지 않아 깨졌지만....

오랫만에 페미니즘에 대한 책을 들었다. 저자의 페미니즘에 대한 진단은 명쾌하다.

여성운동은 남자 시스템에 저항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남성의 세계관과 경험만을 보편적인 인간의 역사로 만드는 힘을 조금 상대화시키자는 것이다..... 여성운동은 여성이 '공적영역'에 진출하는 것을 넘어, 남성이 '사적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남성들이 집에서 노동하지 않는 한, 여성에게 사회진출은 이중의 중노동만을 의미할 뿐이다.

여성주의는 차이나 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차이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차이가 차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차이를 만든다.... 다른 타자들의 목소리를 배제하지 않는것, 이것이 진정한 보편주의 정치학으로서 여성주의 언어가 지닌 힘이다.

이 책을 관철하는 기본적인 철학은 소통의 철학이며 소통의 정치이다. 페미니즘의 정치는 단순히 성적 구분으로서의 남성과 여성의 소통의 벽을 허물자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같은 여성안에서도 얼마나 많은 다른 삶의 존재 조건들이 있는가? 계급의 차이, 장애인/비장애인, 동성애자/이성애자, 서구세계/비서구세계 이런 다원적이고 복잡한 인간의 존재조건에서는 누구나가 피해자인 동시에 다른 입장에서는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뿐만 아니라 같은 여성운동의 내부에서도 얼마나 달라질 수있는지...그렇기 때문에 서로간의 소통이 얼마나 절실한지....

그럼 무엇으로 소통할 수 있을까? 인간은 모두 자신의 계급적 존재기반에 의해 사고한다. 이 세상이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자본가와 가진자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사회적 약자가 배려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분노한다. 하지만 그 분노는 어디까지일까? 딱 나의 계급적 존재기반까지였다. 나름대로 내가 약간은 진보적이라 생각했던 내게 찬물을 끼얹고 나를 다시 한번 정신차리게 해준다.

저자인 정희진씨가 예로든 2004년 성매매 방지법 이후 성판매 여성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생존권 투쟁'을 벌인 일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 때 나는 이 사건을 보고 한편으로 당황스러웠다.(아마도 당황스러웠던건 정치적인 또는 노동자의 집회에만 익숙하던 내가 감히 이 사회의 악이라 할 수 있는 성매매의 자유를 부르짖는 그들을 이해하기 힘들어서였을 것이다. 소위 부끄러운줄도 모르고라는 심정...) 이건 그들 개인의 처지나 상황에 대해서 동정할 수는 있지만 그들에게도 자기 목소리가 있고 할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나의 우월주의에 기반한 감정이었을 것이다. 이건 분명히 소통 불가의 상황이다. 나같은 사람은 그들을 내가 생각하는 좋은길로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결코 그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입장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성매매에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라는 사유방식하에서는 누구도 이 여성들과 소통할 수 없다. 소통이 없는데 어떻게 대책이 만들어질 것인가? 그래서 정희진씨는 성매매 찬반 논쟁을 넘는 다른 방식의 사유와 언어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건 아직 우리 여성운동이 갖지 못한 것이다.

나의 한계를 자각함과 동시에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유의 한계를 같이 사고하며 극복해나감으로써 소통의 장을 만들어가는 일상의 정치학 이 페미니즘 정치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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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6-01-21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얼른 읽어야할텐데... 요즘 아더왕에 빠져 있어서 말이지요. ^^;

바람돌이 2006-01-21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발로 연대기 저도 읽고 싶어요. 근데 이걸 사서 읽을까 도서관에서 빌려 읽을까 계속 고민중이예요. 도서관에 신청은 해놨는데 이게 책 들어오려면 또 몇달 걸리는지라.... ^^
 
대담 -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 대담 시리즈 1
도정일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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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 사건이 대한민국을 강타하면서 자연과학자의 철학에 대한 요구가 부쩍 강조되어져야 할 것 같은 세상이다. (물론 자연자학자 뿐이겠냐만.... 게다가 그렇게 생각 안하는 사람도 너무 많아 요즘 놀라운 대한민국이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하게 나온 책.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어떻게 보다 나은 세상을 같이 만들어가야 할까가 결국 이 책의 핵심주제이다. 자연과학이든 인문학이든 다른 식물 동물에겐 대단히 미안한 말이지만 어차피 인간에 대해 얘기하고 인간이 어떻게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것인가가 학문의 핵심 아니겠는가? 그런데 근대 이후에 와서 진행된 학문의 분화는 이 둘을 서로 별개의 것으로 간주하고 서로를 서로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을 연출해왔다. 전 세계적 학문풍토가 그러할진데 일종의 특권화된 전문가주의가 판을 치는 대한민국에서는 다른 학문에 대한 관심은 문외한의 간섭으로 치부되는 일도 비일비재한 것 같으니....

어쨌든 이 두사람이 만났다는 그 자체에 우리 학계의 나아갈 방향이 보인다고나 할까? 좀 거창해보이긴 하지만....

두사람의 대담은 재밌다. 두 사람 모두 너무 어려운 말보다는 서로를 이해시키고 접합점과 달라지는 점을 찾기 위해 그리고 보다 나은 세상이란 결론을 위해 되도록 쉽게 자신의 애기를 풀어낸다. (고수는 원래 쉽게 말하는거 아닌가!! ) 도정일씨가 풀어내는 인문학, 신화의 세계, 최재천씨가 온갖 예로 설명하는 식물과 동물의 세계는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진진하다.

때로는 대립하고 때로는 만나고 때로는 서로가 서로의 입장을 거꾸로 얘기하기도 하는 과정은 대담이라는 것의 재미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걸 확연하게 느끼게 해준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왜만나야 할까? 이 두사람이 만나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무얼까?

도정일씨는 '과학과 기술, 종교와 예술은 삶의 토대이다." 라는 말을 인용하며 인문학의 영역인 종교와 예술, 과학의 영역인 과학과 기술 이 두영역이 모두 인간문명의 토대를 이룬다면 그 토대들 사이에 접합 교섭 대화가 없을 수 없음을 얘기한다. 결국 인문학이든 자연과학이든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학문이라는 점에서 공통의 지반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자연, 인간, 사회는 결국 자연과학으로도 인문학으로도 어느 한쪽으로는 절대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 둘의 만남에서 서로의 설명을 보충하고 듬성 듬성 나있는 구멍들을 메우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수많은 대담의 주제들을 통해 서로가 도달하는 결론은 결국 같은 결론이다.

도정일씨가 주장하는 사회는 '두터운 세계' - 다양성, 다수성, 다원성의 세계이다. 이 3다의 세계를 유지하는데는 무엇보다 '관용의 윤리학'이 필요한데 이때 관용이란 것은 강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자비가 아니라 다른 것, 타자, 타인, 차이에 대한 존중을 말한다. 나라는 존재, 나라는 주체가 타자에 대한 책임속에서 만들어진다는 생각이 필요한 것.

최재천 -호모 심비우스(공생 인간) -농업혁명이라는 것도 어찌보면 공생이다. 자연에서 혼자 사는 식물들을 데려다 키워주고 그 식물들이 공생을 통해서 굉장한 번식을 이룬 것. 바로 이 공생 덕택에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되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결국 요약하면 두터운 심비우스의 세계쯤이 아닐까? 여기서 다양성은 단순히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위해서 또는 좀 착하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요건쯤이 아니라 바로 인간생존이라는 절대절명의 과제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세계관으로 등장한다. 다양성에 대한 목소리가 이제야 나오고 있는 대한민국, 그러나 획일성의 신화가 곳곳에 뿌리박혀있는 대한민국에서 21세기의 화두는 당연히 이 다양성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잠시 생각해보는 농담 -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드는 가상상황이 인간이 만약 이대로 멸종한다면 아마 그건 우주 전쟁이나 자연 재해나 이런 것 보다는 바이러스에 의해서 일어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의 다양성을 파괴하고 파괴해나가는 오늘날. 가까운 미래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바이러스가 나타날지 누가 알 수 있을까? 그런데 우리가 그 바이러스를 알아보려고 해도 그것을 알수 있는 자연환경의 다양성을 이미 파괴해 버린 후라면? 뭐 같이 죽어야지.... 근데 다같이 공룡처럼 멸종한다고 생각하니 그것도 뭐 그리 슬픈 일은 아닐 것 같은 생각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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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6-01-19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이 다같이 멸종하면 그리 슬픈 일은 아닐까요? ^^a

바람돌이 2006-01-19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농담요. 그냥 혼자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죽음이 겁나고 안타까운건 미련이 많이 남아서인데 다같이 죽는다면 뭐 미련도 남을까 싶은 생각도.... 아마 체념에 가까운 상태가 되지 않을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