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C. 더글러스 러미스 지음, 이반.김종철 옮김 / 녹색평론사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것인가라니?
경제성장과 풍요는 같은 개념이 아니었던가?
경제성장은 우파든 좌파든 그 이데로로기적 지향에 관계없이 누구나가 동의하는 목표가 아니었나?
경제를 살리자, 경제가 어렵다는 말 한마디면 온 초목이 벌벌떨듯 덤비는 이 세계에서 말이다.

제목이 시사하는 바 그대로 이 책은 우리가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며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들의 정체에 대해서 다시 제대로 묻고자 한다.
당연한 상식, 패러다임은 정말로 당연한 것이고 올바른 것인가?

국가에 주권, 교전권, 군사권을 부여하면 사회질서와 국민의 안전을 보장해줄것이다라는 거짓말.
일본의 헌법은 교전권을 부여하지 않는단다. 뭐 일본이 원해서 그런 헌법이 생긴건 분명히 아니지만...
그래서 일본은 교전권이 인정되지 않는다. 헌법에서...
그래서 일본 군대의 이름도 자위대다.
하지만 자위권을 뺀 교전권이라면 침략권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데 현대사회에서 침략권을 헌법에 규정한 국가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고 있다.
이 지구상의 모든 전쟁은 자위를 위한 전쟁이라고 불리워진다. 모든 침략자들에 의해서...
자위권이라는 명목하에 국가에 폭력행사 권리를  부여한 결과는 엄청나다.
군대의 총부리는 외국에 대해서 겨눠지는 것 보다 훨씬 더 자주 훨씬 더 많이 자국민을 향해서 겨눠진다는 것이다. (통계에 의하면 지난 100년동안 국가에 의해서 살해된 사람은 약 2억명, 그 중에 자국의 국가에 의해 살해된 사람이 약 1억 3천만명이란다.)
자 이정도쯤 되면 군대가 과연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는가가 명백해지지 않을까?
국가에 폭력허가증을 발급한 결과는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매년 수많은 사람들이 군대를 통해 살인훈련을 받고 있다는 것. 그 경험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일까? 또한 군대를 통한 상명하달식의 군사문화의 보급이 끼치는 영향은?
평화교육은 아직도 미미한데 한쪽에서 평화를 얘기하면서 지구상 대부분의 국가들이 그정 정반대되는 살인기술을 계속 가르치고 있다는 이 모순.
그런데 더더욱 위험스러운 것은 자위권이라는 명목하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군대 자체의 폐지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보수든 진보든 군대의 민주적 개편이나 민주화에 대해서 얘기하지만 군대라는 존재 자체에 의문을 품고 그것이 페지되어야 할 악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 혹시 생각은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먼 미래에 실현될지도 모르는 하나의 이상으로서만 바라본다는 것.
이 정도면 자위권, 군대라는 개념은 신성개념이 돼버린듯하다.

경제발전은 어쨌든 우리에게 풍요를 가져다 줄것이라는 거짓말.
1949년 트루먼은 미국의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미국에는 새로운 정책이 있다. 미개발의 나라들에 대해 기술적 경제적 원조를 행하고, 투자를 하여 발전시킨다"는 정책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발전'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국가정책이 되었고, 제3세계를 변화시키고 발전시켜야한다는 미국의 당위가 성립되는 순간이었다.
미국의 힘에 기대서 이 논리는 전 세계로 퍼져갔고 이제 제국주의는 사라진다.
아니 제국주의가 발전이라는 논리로 옷을 갈아입고 변신을 한것이다.
그런데  이 말이 주는 효과는 마법적일정도로 환상적이어서 이제는 침략도 착취도 모두 발전을 위한 것으로 미화돼고 심지어는 착취를 받는 대상들 조차도 그것이 발전이라는 환상속에 빠져버리게 된것이다.
모두가 노력하면 언젠가 발전할 수 있다는 환상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모두가 미국이 말하는대로 발전한다면 지구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을 것이며,
그것이 미국을 비롯한 소위 선진국들이 원하는 바도 전혀 아니라는것이다.
경제성장은 결코 빈부의 격차를 해소할 수 없으며 오히려 빈곤을 이익이 나는 형태로 고쳐만드는 빈곤의 합리화만을 초래할뿐...

제로성장? 혹은 마이너스 성장?
경제성장 수치가 1%만 내려가도, 수출액이 조금만 줄어도 온나라가 금방이라도 망할 듯 난리다.
그러므로 수치의 상승을 위해서는 생명줄 농업을 내주더라도 자동차 몇대를 더 팔아야 한단다.
그러나 문제는 그 수치속에는 사회전체의 양적인 풍요만을 얘기할 뿐
그것이 누구를 위한 풍요인가? 진정으로 인간의 삶을 복합적으로 풍요롭고 행복하게 해줄것인가의 의문은 들어있지 않다.
그리고 누구도 잘 묻지 않는다.
일단은 성장하면 빈곤 문제도 좀 나아지지 않겠냐? 파이가 커지면 어쨋든 하층민이 분배받는 부분도 좀 더 커지지 않겠는가라고 강변할 뿐....
하지만 조금만 달리보자.
우리 경제는 아무리 불경기고 힘들고 어쩌고 해도 어쨌든 수치상으로는 전체적으로 주욱 성장해왔다.
그런데 왜 사람들의 삶은 갈수록 팍팍해지고 박탈감은 커지며 노동강도는 갈수로고 강해지는지....
이 당연한 의문을 우리는 왜 못해봤는지...
혹시 성장 또는 경제발전이라는 패러다임에 우리가 눈멀고 귀먼건 아닌지...
의문은 저항을 낳고 그것이 느리더라도 세상을 변화시키는 첫걸음이다.

민주주의라는 거짓말
민주주의는 더 이상 정신이 아니라 하나의 제도로 - 몇번의 선거와 정치형태로서의 공화제- 화석화되어버렷다.
대의정치를 민주주의라고 착각하는한 일부 세력에 의한 지배의 역사는 바뀌지 않는다.
가장 극단적인 억압의 기제인 군대가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허무주의에 빠져 무력감에 젖어있고, 자신과 관련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결정에 참여할 여유가 전혀 없는 사회.
그럼으로써 일부가 그 모든것을 누리고 결정하고 향유하는 사회를 민주주의라고 누가 이름붙였는가 말이다.

언어적 개념은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지지만 한 번 만들어진 개념은 인간의 의식을 속박한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진리들이 환상이라는것을 보여줌으로써 이제 우리는 거기서 벗어날 첫걸음을 내딛었다.
그 발걸음을 내딛을지 아니면 그저 환상에 안주해버림으로써 기만속에 자신을 가두어버릴지는 아직은 판단은 당신의 몫이다.
그러나 우리를 둘러싼 자연환경은 이미 붕괴되고 있고 그것은 조만간 우리에게 총체적인 변화를 요구할 것이다.
남은 것은 이제 우리가 더 이상 늦기전에 즉 최후의 순간 이전에 그것을 알아채고 변화시킬 것인가
아니면 너무 늦음으로써 자멸할 것인가만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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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넘어 2007-05-01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번지르르한 거짓말 참 많습니다...-.-;;;

바람돌이 2007-05-02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그 거짓말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믿어지는게 웃기면서도 슬프죠. ㅠ.ㅠ
 
호모 코레아니쿠스 - 미학자 진중권의 한국인 낯설게 읽기
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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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이 하는 얘기가 있다.
특히 박통을 그리워하는 어른들이....
우리나라 국민들은 국민성이 썩어서 안돼!  정신차릴려면 박통같은 사람이 다시 나와야돼 등등....
한때는 이 말에 대들다가 밥상이 뒤집어진 적도 있었고 그래서일까?
국민성이니 습성이니 어쩌고 하는 말에는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게 된게....
게다가 당시 난 세상에 국민성이니 하는 비과학적인 것은 없노라고,
모든 것은 결국 사회경제적 상황이 만들어놓은 환상이라고 주장하며 열렬한 사회과학주의에 빠져있던 때니 더더욱 그런 주관적인 냄새가 팍팍 풍기는 말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말이다.
이게 살아보니 웃기는게 여전히 국민성 어쩌고 하는 말에는 동의가 안되지만 묘하게도 인종이나 민족이 다르면 반응양식도 달라지는 뭔가가 보이는거다.
집단의식이나 행동양식, 반응양식??? 아니면 진중권의 표현대로 -뭐 거슬러올라가면 부르디외의 말이지만 - 하비투스=습속???
하여튼 뭐라 부르든 말이다.
어쨌든 이게 내가 아는 박통을 그리워하던 어른이 말하던 국민성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은 사족일테고....
구체적인 공통의 역사경험, 문화적 경험이 만들어놓은 공통의 대응방식이랄까?
어쨌뜬 이 또한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경험이 달라지면 변해갈 것임은 또 분명하다.

그러면 결국 오늘 한국인의 그러한 공통의 습속을 만든 것은 무엇일까?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이행이 순조롭지 못했던 우리 역사에서 근대에 맞는 신체를 재빨리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군사적 규율이 동원됐고 이는 온 사회적 구성원들의 몸에 군사적 규율을 각인시킨다.
전근대적 습속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근대로의 이행과 또 근대의 신체를 그대로 간직한채 정보화사회로
급속하게 전환해버린 한국사회.
사실상 이런식의 논지 자체는 그리 새로울 것이 없는 주장이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 내가 알기로는 박노자씨나 한홍구씨의 경우 이 문제가 아니면 뭘로 책을 쓸까 싶을정도로 많이 얘기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다만 새로운 것은 역사나 정치, 사회 등 거대 담론에서 이러한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들 내부에서 일어나는 아주 사소한 습관들,  작은 사건들 속에서 이 문제를 풀어나가려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들이 책갈피 곳곳에서 펼쳐진다.
뭐 굳이 나는 자유롭다 나는 아니다라는 말을 꺼내기도 민망해진다.
대한민국이라는 땅덩어리에서 살고있는 이상 여기서 제기한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은 없을테니...
다만 그것을 바라보는 눈은 그렇게 익숙하지 않다.
같은 사건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기 - 이것은 어쩌면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는 것의 출발점인지도 모르겟다.

끊임없이 나를 다시 보기. 익숙한 것들을 뒤집어보기 - 나를 제대로 아는 길일테다.
그게 국민성이든 습속이든 뭐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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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맘 2007-04-17 0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진중권님의 책은 일단 관심이 가는 편이랍니다.

바람돌이 2007-04-17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진중권씨의 그 직설적인 화법을 좋아하는데 이 책 역시 마찬가지랍니다.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경식 지음, 박광현 옮김 / 창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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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유대인 학살이냐? 아우슈비츠냐?라고 어떤 사람은 빈정거린다.
그것은 기막히게 또 정신대냐? 그 과거에 좋지도 않은 얘길 뭐하러 자꾸 하냐?는 말과 너무나 똑같다.
후자의 말은 내가 재직하던 학교의 모 교장에게서 직접 들었던 말이다.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하는 귀막고 눈먼 인간들에게 묻고 싶다.
제대로 들어봐준적이 한 번이라도 있냐고?

쁘리모 레비는 우리에게 전혀 익숙치 않은 이름이다.
이탈리아 사회에 정착해 섞여 산지가 워낙 오래되어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건 쌍커풀이 있냐 없냐의 차이정도밖에 안된다고 생각하던 청년이 그다.
그 차이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이탈리아 북부에 진격한 독일군은 바로 그 사소한 차이 때문에 이 젊은이를 아우슈비츠로 끌고 간다.
아우슈비츠라는 逆유토피아에서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자에 속했다.
더더욱 운좋게도 돌아갈 곳을 완전히 잃어버렸던 많은 유대인과는 달리 그는 정든 고향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후의 그의 삶은 자신이 겪은 것을 증언하기 위한 삶이었다.
그것은 복수도 아니었고 원한도 아니었다.
그의 고민은 늘 인간이라는 존재를 이해하기 위한 데 가있었다.
그는 독일인을 이해하고 싶어했다.
이해하지 못하면 미워할수도 벌을 줄 수도 없다고 생각했기에.....
인간의 내면, 문화 속 어디에서 그런 잔혹함이 터져 나올수 있는지를 알고싶어했다.
그것만이 진정한 아우슈비츠의 끝을 낼수 있는 길이라 믿었기에....

하지만 끝내 그는 그 이해에 도달하지 못한다.
아우슈비츠는 사실 그 이전 제국주의 국가들이 모든 식민지에서 행하던 폭력의 반복이었다.
다만 유럽밖을 대상으로 하던 폭력이 유럽 내부로 향해졌다는 차이일뿐....
또한 그러한 제국주의적 침략과 인간말살은 지금도 계속되어지고 있다.
따라서 아우슈비츠는 끝나고 싶어도 끝날수가 없는 것이다.
거기다가 아우슈비츠라는 개념은 이제 오히려 새로운 폭력의 상징이 되기까지 한다.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모든 폭력에 대해 정치적 면죄부를 부여하는 말도 안되는 역할까지 담당하면서...

폭력의 가해자에게 보편적인 인간평등의 개념은 구호일뿐이다.
그러나 피해자들에게는 다르다.
인간이하의 극한을 경험한 사람들은 오히려 바로 그 개념을 구원할 역사적 책임까지 떠맡아버린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인간이하로 떨어졌다 살아남은 경험은 평생의 악몽이 되어 그를 따라다닌다.
인간이하를 감내하고 저항을 외면함으로써 살아남은 자의 수치심. 죄의식.....

이런 피해자들에게는 어쩌면 그 악몽의 기억이 오히려 원히 생생한 현실일지도 모르겠다.
밥을 먹고 사랑을 하고 술을 먹고 하는 일상이 오히려 꿈결같아 두렵지 않을까?
인간이 다른 인간을 그렇게 학살하고 있을때에도 어떻게 다른 한편에서는 일상이 유지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
그런 의문속에서 사는 이들의 삶이 늘 위태로울 것은 뻔한 일이다.

끝내 도달하지 못했던 질문의 대답.
단순히 학살에 가담했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상황을 만들어냈던 국민국가 전체의 문제점을 제대로 찾아내는 것.
그리고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내는 것.
또한 방관과 무지 역시 역사적 책임을 져야하는 죄악임을 인지하는것.
그 어느것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시대.
몇몇 전범의 처벌과 재판으로 모든 속죄가 이루어졌다고 착각하는 시대.
그것을 자신의 면죄부로 활용해버리는 사람들의 무신경함.
그럼으로써 태연하게 똑같은 죄악을 되풀이하는 시대
저자인 서경식씨가 쁘리모 레비를 통해 보여주고자하는 우리 시대의 초상이 아닐까?

나는 가끔 내가 대한민국인이라는게 부끄럽다.
피해자에서 어느 순간 가해자로 돌변한 내 나라 사람들을 볼때...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공공연한 무시와 학대는 또 아우슈비츠냐? 또 정신대냐?라고 묻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한다.
증언에 눈돌리고 공감하지 않는 사회의 무서움이다.
서경식씨는 글은 그러한 사회에 제발 들어달라고 애원하는 듯하다.
제대로 정말 제대로 들어보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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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7-01-08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대로 정말....제대로 들어보도록 하겠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어쩌면...맨날 하던 얘기가 아니니까 '뉴스'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수많이 킬해버린 많은 사연들도 제대로 들어보고 제대로 전해야했을텐데...우리는 늘 후끈 달아오른 오늘 얘기에만 관심을 둡니다. '들어라, 제발 들어라!'라는 님의 목소리를 제대로 각인해놓아야될텐데...^^;;

바람돌이 2007-01-08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냐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세기를 증언의 시대라고 하는데 그만큼 폭력이 심했다는 거겠지요. 우리가 그런 증언들에 좀 더 진지하게 귀기울이고 생각한다면 그런 폭력들이 좀 나아질 수도 있지 않을가 생각해봤습니다.

글샘 2007-02-11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오랜만에 제값주고 샀습니다.^^ 느긋하게 읽어봐야겠습니다.

바람돌이 2007-02-11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경식씨의 글은 천천히 음미하며 사색하며 읽기에 딱 좋은 것 같아요. 많은 고민을 던져준 책이었습니다.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경식 지음, 박광현 옮김 / 창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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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가 비교 불가능한 '유일무비'의 사건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아우슈비츠'는 '비교가능'한 사건이다. 비교 후에 도출된 대답은 그것이 과거 인간 또는 인간사회의 제도가 보여줄 수 있었던 냉혹함과 잔인함의 극한적 실례라는 것이다.
비교하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누가 어떤 동기로 비교하는가일 것이다. 내가 '아우슈비츠'와 한국의 감옥을 상상하면서 관계지은 것은 '아우슈비츠는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다'는 식의 언사로 나찌의 범죄를 상대화하려는 시도에 가담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지만 한국의 감옥이 아우슈비츠보다 낫다는 등의 말을 할 생각은 없다. 그것은 거기에서 감금되어 고문당하고 있는 당사자에게 '유일무비'하기 때문이다.-138쪽

저항의 의지조차도 전면적으로 파괴된 굴욕의 기억. 자신은 '카인'이라는 자기 고발. 증인으로 자신이 적격한지를 둘러싼 의혹(하지만 궁극적으로 '진정한 증인'은 죽은 자이며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자기 자신도 인간이라는, 수치심을 느껴야 할 종족의 일원이라는 생각..... 이렇게 몇겹으로 쌓인 수치의 감각이 자신의 몸을 갉아먹어가자 쁘리모 레비는 자신의 몸은 '심연의 바닥'에 내던진 것일까?-179쪽

왜 아우슈비츠의 생존자가 '인간이라는 수치'에 시달려야 했을까? 수치스러움을 모르는 가해자와 수치까지도 피해자가 고스란히 받아서 시달려야 하는, 이 부조리한 전도가 일어나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그가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교의를 실천하는 고덕한 성인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유대인은 인간 이하'라는 사상에 희생된 까닭에, 그 사상을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사상으로 대치해야 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독일인'도 물론 '인간'에서 예외는 아니다. 한 번 파괴된 '인간'이라는 척도를 재건하려고 하는 한, '인간'이 저지른 죄는 어김없이 그들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181쪽

나는 '아우슈비츠'가 단순하게 우리에 대한 도덕적 경종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근대에 기인하며, 지금도 현실 그 자체에 내재한다. 제국주의와 식민지 지배는 '일부 인간은 인간이하'라고 하는 사상, '인간은 비인간이다'라는 원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그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는 한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192쪽

아렌트는 그 후에 쓴 <집단의 책임>이라는 논문에서 '죄'와 '책임'의 개념을 명확히 구별한다. 그녀는 "우리 전부에게 죄가 있다"라는 호소가 현실에서는 실제 죄를 지은 자를 무죄방면하는 데 일조할 뿐이었다고 말한다. '죄'는 법적 개념이며, "엄밀한 의미에서 개인과 관련된다." 그와 다르게 정치 공동체의 성원이라면 누구나 짊어져야할 , 정치적 의미에서의 '집단적 책임'이 있다. 바꿔 말하면 '독일인'이라는 집단 중에서 '죄'를 지은 개인은 있지만 '독일인' 전체에 '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독일인 전체의 죄'라는 생각은 오히려 죄를 지은 개인을 은닉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독일 국민이라면 누구나 독일이라는 정치 공동체의 행위에 '집단적 책임'이 있는 것이다. -211쪽

증인이 없는 것이 아니다. 증언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편'의 사람들이 그것을 거부하고 있을 뿐이다. 그로테스크한 것은 '이쪽'이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는 '인간'이라는 이념이 보편적으로 공유된 단순 명쾌한 세계가 아니다. 단절되고 금이 간 세계다. 여기에서 '인간'이라는 말은 단절을 숨기는 미사여구일 뿐이다. 그렇더라도 단절 속에서 온몸으로 떨쳐 일어난 증인들이 '인간'의 재건을 위해서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이편'의 사람들은 보신이나 자기애때문에, 천박함과 나약함 때문에, 상상력의 빈곤함과 공감대의 결여 때문에 증인들의 모습을 바로 보지않고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장 아메리도 쁘리모 레비도 자살했다. 김학순 할머니는 1997년 12월 16일 이 세상을 떠났다. 폭력의 세기를 증언한 산증인들은 전 세계에서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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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와 전사 - 근대와 18세기, 그리고 탈근대의 우발적 마주침
고미숙 지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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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제는 '근대를 파헤치기'다.
여기서 근대는 단순히 역사적인 시간 개념만은 아니다.
계몽기 지식인들의 열렬한 찬사와 숭배의 대상이었고, 지금도 그러한, 아니 오히려 일상의 곳곳에 뿌리박힌 근대의 신화를 파헤쳐 그것을 해체하고자 하는 것이다.
근대성의 확보만이 살길이요. 문명의 길이요. 유토피아의 도래라고 곳곳에서 공공연하게 아니면 은밀하게 외치고 속삭이는 구속에서 이제는 벗어나보자고 얘기한다.

오직 출발지와 목적지만이 존재하는 기차를 닮은, 아니 기차와 함께 온 근대적 시간 개념
그 단선적인 시간개념과 목적지를 위해 산을 뚫고 강물을 통과하는 기차의 공간의 파괴는 오로지 생존경쟁에서의 우승열패라는 신화를 낳는다.
제국주의는 닮아야 할 모델이며, 식민지 조선은 부끄러운 존재가 된다.
근대가 낳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는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가른다.
지금은 아니라고 말할까?
이론으로서 제국주의는 더 이상 도덕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도 일상의 곳곳에 숨어있는 승자에 대한 찬미와 열망, 경쟁승리에 대한 예찬을 보라.
근대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이다.

근대에 들면 더 이상 인간은 자연의 일부가 아니다.
만물의 영장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한다.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은 인간이다.(이 오만방자한 인간의 신화에 대해 이미 자연은 응분의 대응을 하고 있다.)

자연과 인간을 가르고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근대의 공간에 들어서게 되면 무엇도 그곳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성적욕망도 연애도...
근대성이 낳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는 위생학이라는 명분으로 인간의 몸 마저도 국가의 통제하에 두며,
인간의 존귀함의 이유를 뇌에 두면서 이성중심주의의 사고로 우리를 이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이유는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너무나도 흔한 대답을 상기하게 한다.
뇌의 절대화는 아마도 신체의 다른 모든 부분을 소외시키고 그것의 활동인 노동도 소외시키는 거겟지.
여전히 이 사회에서 노동이란 단어가 천시받고 있는걸 보면 뭐 틀린 말은 아닌듯하다.

이 책의 근대에 대한 해부는 통쾌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미심쩍다.
왜냐고? 나는 여전히 근대적인 인간이기 때문에....
모든 내용과 말들을 여전히 논리로 맞는가 아닌가로 판단하는 습성에서 여전히 나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럼으로 허준에 대한 얘기는 뜬금없다.
고미숙씨 당신 말이 틀렸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정말 그렇다고 맞장구쳐주기도 참 힘들다.
온몸으로 소통하고 생각하는 탈근대적인 사고방식이 없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근대에서 근대적 삶에서 벗어나는 삶은 어떤 것일까?
저자는 모든 것의 경계를 지우고 모든 경계의 사이공간을 복구하는 것.
그리고 그 공간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것.
공동체적 삶의 복원,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소통의 복원을 얘기하는듯하다.
책의 그 방대한 역사적 사례와 논증들을 생각한다면 결론은 너무 평범한 게 아닐까?
하지만 원래 진리란 평범한게다.
누구나 평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누구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지 않는가?
한마디로 근대를 벗어나자고 얘기하는건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삶의 어떤 부분을 일일이 규정하고 있는가를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그 속에 퐁당 빠져 있으니 말이다.
하늘이 안보이는 숲 한가운데 있으면서 그 숲 이외의 것을 하늘을 보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저자 고미숙씨가 얘기하는건 바로 그 숲에서 바로 그 하늘을 보자는 것일게다.

아직도 숲에 파묻혀 있는 나에게는 길잡이 같은 책이 되었다.
다만 아직도 나는 잘 모르겠다.
내가 그 하늘을 볼 수 있을런지....
그리고 그 하늘을 보는게 맞는 것인지....

************ 읽는데 정말 오래 걸렸다. 가장 바쁜 시기에 이 책을 잡았다는 불행도 있었고, 하지만 무엇보다 저자의 논지를 따라가는게 힘겨웠다. 이래 저래 고민도 많이 되고 생각할 거리도 많은 책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별점은 후하게 주자. 뭐.... 딱히 모든 걸 동의해야 좋은 책은 아니지 않은가? 나에게 공부를 좀 더 해야할 것 같다는 의욕을 불태우게 했고, 또 고민거리를 잔뜩 안겨줬으니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훌륭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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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넘어 2006-07-20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탈근대와 관련된 담론들을 엮어본 건데 저는 한편으로 이해하면서도 조금은 납득이 가지 않던 부분도 많았습니다. 마지막 부분의 연암과 다산을 비교할 때도 저는 연암의 경계를 뛰어넘는 자유로운 사고도 분명 우리에게 필요하지만 다산의 '전투성'도 중요하다 봅니다. 자칫 지적 유희에 젖어드는 것은 아닌 가 하는 생각도 들면서...

바람돌이 2006-07-21 0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납득이 가지 않던 부분이 꽤 있었던 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나 전체적인 논의가 결론적으로 어디로 흘러갈 수 있을까 하는 부분에서는 상당히 미심쩍었다고나 할까요? 이게 까딱 잘못하면 탈정치화 내지는 도인의 경지로 가지 않을까 싶기도 했구요. 다만 그동안 이런 류의 책을 상당히 오랫동안 안봤던 저에겐 뭔가 고민거리를 던져줬다는게 제 나름대로의 의미였던거죠. 연암과 다산의 비교에서는 저는 딱 80년대적 감수성과 전투성이 다산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러한 감수성과 전투성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 나름의 시대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발휘되는 방법, 공간 하여튼 뭐라 말하긴 좀 힘든데(아무래도 공부가 짧아서겠죠) 그런게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문제제기로 받아들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