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초로 아저씨의 세계화에서 살아남기 - 만화로 보는 자본주의와 세계화의 역사
엘 피스곤 지음, 김명신 옮김 / 부광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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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만화로 보는 자본주의와 세계화의 역사라는 부제를 달고있으니 만큼 이 책의 주인공은 글이 아니라 그림이다.
아닌게 아니라 멕시코의 저명한 정치풍자만화가라는 책 날개의 소개가 딱 맞게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핵심을 날카롭게 표현하고 있다.



부르조아 혁명인 프랑스혁명이 <자유, 평등, 박애를 얘기했지만 실상은 그것이 <부르조아의 상호 자유, 소비자들간의 평등, 그리고 구두쇠 박애>임을 적절히 알려준다. 자본주의가 시작 되었다.

 

 

 



자본주의가 곧 제국주의로 이행함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제국주의가 얼마나 많은 식민지를 만들었는지 그리고 또한 그것이 얼마나 많은 식민지인들의 해골탑 위에 쌓아진 부였는지 이보다 명쾌하게 얘기할 수 있을까?

 

 

 



자유시장은 계속 번성하고 뼈만 남아 누운 식민지인은 "이봐, 그래도 우리는 길가에 노점을 세우고 독점기업과 경쟁할 자유가 있다는걸 잊지마."란다.
자본주의의 자유의 본질은 식민지인들에게는 패배하고 굶어죽을 자유 아니었던가 말이다. 도처에 식량이 남아돌아도 자본주의의 자유경쟁은 식민지 가난한 이들에게 자유롭게 굶어죽으라고 외친다.

 




지금은 대부분의 식민지가 없어지지 않았냐고? 그래 형식상의 식민지는 이 자본주의로 일원화된 지구에서 그리 많지는 않다. 하지만 인류가 그간에 자본주의 맞서 싸움으로서 획득해낸 모든 권리와 성과를 부정하고 나온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은 이제 작은 나라들을 통째로 요리해 삼키려 하고 있다.

 

 


몇년전만 해도 라틴 아메리카는 미국에 원료만을 수출했지만 오늘날에는 훨씬 정교한 제품을 수출하고 있죠.ㅋ

그래요? 이를테면 어떤 것 말입니까?

당신네 돈이죠.

이런 약탈은 이제 세계화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불린다. 가난한 나라들은 더더욱 가난해지고 있다. 이 가난은 이제 죽음에 이르는 가난이다.




옛날 한겨레신문에 실렸던 박재동 화백의 만평을 연상시키는 그림.

그간 노동자들의 투쟁과 사회주의 국가의 존재 등으로 인해서 우리가 얻어왔던 그 쥐꼬리만한 권리들도 이제는 우리 것이 아니게 되고 있다.

정말로 이들에게 항복하는 것이 나을까?

 




멕시코는 재정적으로 생존 불가능한 기관을 없애야 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우선 멕시코인들부터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게 차라리 희망이 되어줄까? 대한민국은 다르다고 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간의 IMF사태, 한미 FTA를 보라고 얘기하면?


부시가 내 눈 하나와 다리 하나를 끔찍한 독재자 사담 후세인으로부터 해방시켰어. 넌 어떠니?

이제 더이상의 두려운 적이 아무것도 없어진 자본주의의 새이름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전 세계를 자신의 손아귀에 쥐고 있다. 그리고 그 지배를 유지하는 수단은 끊임없는 전쟁이다.

당신은 저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니라고 100% 확신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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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초로 아저씨 대 어린왕자
    from 잡식성 귀차니스트의 책읽기 2009-07-29 01:44 
           마초로 아저씨는 세계화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고, 돌아온 어린왕자는 신자유주의의 우주에서 살아남기 위해 방황한다. 근데 공통적인건 세계화는 신자유주의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 그리고 마초로아저씨나 어린왕자나 둘다 살아남을 가능성이 별로 많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  마초로아저씨는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시작하여 자본주의라는 것 자체가 결국 신자유주의로 갈 수밖에 없음을, 그리고 그
 
 
 
소수성의 정치학 - No.1, 2007 부커진 R 시리즈 1
그린비 + '연구공간 수유+너머' 기획 / 그린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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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의 R은 혁명의 그 R이다.
이념이라고는 다 씻겨가버린 것 같은 시대에, 혁명이라고는 구시대의 유물 내지는 잔재로 퀘퀘먹은 냄새나 뿌리는 것으로 치부되는 이 21세기에 다시 혁명이라니.....

하지만 조금만 정직해져 볼까?
87년 이래로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었다고,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말이다.
민주화가 되었다면 고통받는 사람의 숫자가, 삶의 주변부로 몰려나는 사람의 숫자가 줄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왜 그 절대적 수치조차도 갈수록 늘어가고 있는지....
곳곳에서 국가와 사회에서 막다른데까지 몰리고 몰려 죽어가는 사람들이 왜 이리도 많은지....
혹시 민주화 된것은 세상이 바뀌었다는 실감을 느끼는 것은 일부 중산층 내지는 중산층 진입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일부에 대한 것은 아니었을까?
부자의 것을 나눠 가난한자의 삶을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의 것을 뺏어 어중간한 중산층의 입을 막은 것이 오늘의 한국사회는 아닌지....
그렇다면 민주화를 말하고 진보를 말하는 당신의 입, 나의 입은 위선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그래서, 그러므로 여전히 혁명의 R이다.
그러나 21세기 한국의 혁명은 더이상 87년의 그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이제는 무너진 사회주의체제에서 찾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부커진의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혁명은 뭘까?

87년 체제에 대한 대다수의 연구들은.... 87년 체제가 가지는 불안정성을 민주주의의 불안정성에서 찾고 있다.....이들에게 중요한 과제는 미완의 상태로 남아있는 87년 운도의 기획을 완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제의 완수를 위해 시민사회에서의 민주주의를 심화하고 시민사회의 민주적 요구를 반영하는 권력구조의 합리화를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에 의하면 이질적인 성분으로 구성된 대중은 시민이라는 하나의 고정된 주체성으로 환원되어 그 이질성과 다양성을 상실하게 된다. 더불어 시민이라는 주체성 외부에 있는 자들, 즉 이주노동자들, 장애인, 성매매여성 등과 같은 비-시민들은 한국사회의 질서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배제될 수 밖에 없다. (182-183쪽)

부커진의 필자들의 입장은 대체로 위에서 말하는 저 시민이라는 하나의 고정된 주체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이질성과 다양성의 존재들 자체에 주목한다. "
그들은 권력에서 이 사회에서 배제되어있다는 의미에서 소수자다.
그러한 소수자의 정치가 저항이 오늘날의 한국사회를 어떻게 관통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투쟁과 저항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묻고 대답하는 것이 이 책의 일관된 내용이라 하겠다.

오늘날 기존의 민주화 운동이라 불리던 것들은 -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하는 노동운동조차도 - 거의가 체제내의 운동으로,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정권의 토대를 한치도 건드릴 수 없는 그런 운동일뿐이다.
그러면 거칠것없어 보이는 자본주의 세상에  흠집을 내고 홈을 파고 돌발을 일으키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올해도 농사짓자고 얘기하는 대추리의 농군이며, 새만금 갯벌에서 삶의 터전을 지키는 어민이며, 대한민국법으로 포섭되지 않으며 끊임없이 이동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지키는 이주노동자의 삶과 투쟁이며, 이동권과 활동보조인의 법제화를 위해 싸우는 중증장애인들의 싸움, 그리고 KTX여직원들의 투쟁같은 비정규직철폐를 위한 노동자들의 싸움이 그것이다.
이러한 대중들의 끊임없는 탈주, - 국가가 정해준 틀, 법이라는 틀, 아니 아예 국가라는 틀 자체를 탈주하는 이들 소수자의 싸움과 연대야말로 21세기 혁명의 새로운 내용이다.

자 여기까지 일단 동의하자.
사실 동의 안할려고 해도 별로 그럴 부분이 없다. 적어도 내 능력으로는 말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오늘날 한국사회를 가로지르는 수많은 탈주들은 권력에 의해서 고정된 것들을 벗어나는 움직임들이다. 심지어 국가라는 고정불변인듯 보이는 괴물조차도....

그런데 여기서 근원적인 질문을 참을수가 없다.
과연 이러한 탈주들 만으로 사회의 변화가 가능할 것인가?
대추리의 농민과 이주노동자와 새만금의 어민이, 중증장애인이 연대의 손을 뻗고 어깨를 거는 날은 과연 올것인가?
그들이 분명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는 이 사회의 다른 면을 부각시키고 문제시하고 싸우는 것은 분명하지만 조직화되지 못한 이러한 탈주들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은 언제가 될것인가?
그리고 갈수록 지능적이고 고도화되어가는 자본의 횡포를 과연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부커진의 필자들은 의외로 낙관적인 듯하다.

하지만 우리는 좌절보다 몇 백 배 더 큰 희망을 보았다. 권력과 자본은 대중들을 추방하고 주변화하지만, 대중들은 그만큼 더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탈주하고 소수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권력과 자본은 추방을 명령했지만, 대중들은 그 명령을 거부하고 다른 삶을 실험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보았기에 거기에 몇퍼센트의 가능성이 있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웃음으로 답한다. 투쟁은 길을 묻지 가능성을 묻지 않는다.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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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10-08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투쟁은 길이라는 존재성 자체만 묻지는 않지요.길이면 일단 연대라는 이름으로 가능하겠지만 길의 방향에 대해서는 늘 끊없는 논쟁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대중은 시민과 소비자로 포섭되었는데...자칫 위험한게 ..소수자의 정치성이라는 것이 결국 탈시민화된 사람들을 시민화하자는 선에 머무는 것인지 아니면 그 너머를 지향하는 것인지 가끔 의문이생깁니다. 그런데 일단 전자라면 결국 기존 질서에 대한 미편입을 편입시키는 자유주의적 움직임에 준하지 않으며, 또한 그 너머를 지향한다면 역사적으로 이루어져온 세계와 인간이라는 존재와 한계성이라는 틀에 대해 너무 이론적 낙관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볼수 있지 않을까요.
소수자운동에 적극 동의합니다만 ...(소수자의 정치가 탈근대사회에서 전위가 되리라는 가능성에 대한 전망때문이겠지요..실제 그런 면도 많고..)..실제 부커진이나 수유팀들의 경우는 존재적 쪽팔림을 만회하기 위한 실천이라는 생각도 가끔 듭니다.그 이론적 경향에 대한 그동안의 평가때문에 생긴 선입견일겝니다.

바람돌이 2007-10-08 22:18   좋아요 0 | URL
위에 인용되었던 투쟁의 길이란 방향성 없는 투쟁을 얘기하는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가능성이라는 이름아래 이런 저런 회피의 이유를 대고 숨는 행위에 대한 비판이고 또한 투쟁의 당위성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생각하고요. 당연히 저들이 주장하는 것은 소수자들을 시민에 편입시키고자 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 너머를 지향하는 것은 분명한데 그 분명한 것의 상에 대해서는 그들 역시 아직은 구체화된 답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아니면 이 세계라는 것 자체를 끊임없는 투쟁의 연속으로 보며 이전의 사회주의가 제시햇던 하나의 이상향 내지는 목표지점에 대해서는 상정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저 소수자의 투쟁을 제대로 자리매김하고 그들(아니 우리들 전체라고 해야 되겠죠)사이의 연대가 이루어질때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지 않겠는가? (즉 시민사회론이나 시민계급의 투쟁은 이제 더 이상 사회를 변화시키는 동력이 되기 힘들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론적 낙관이라는 부분에서는 저도 일정정도 동의하고 의심을 품고 있습니다만 제 공부가 워낙에 얕다보니 혐의일뿐 뭐라고 반박하기는 힘들군요. 아 어려워요. 이들의 논의의 근거가 되는 철학자들이 푸코나 들뢰즈같은 이들이라고 생각되는데 개설서 수준을 벗어나서 그들을 읽어내기에는 옛날에 받은 상처가 워낙 커서 다시 잡아지지 않을 것 같군요.(읽다가 벽에다 집어던진 책들이여... ㅎㅎ)

마지막으로 수유팀에 대해서 하신 말씀에 대해서는 일단은 갈갈갈 웃었습니다. 하지만 뭐 웃었다고 해서 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건 아니고요. 글쎄 지금 시기에서 실천이란걸 어떻게 정의할까라는건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결국 그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세상을 바꾸는데 한 역할을 하고자 하는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진중권씨처럼 현재의 모든 논점에 개입하고 논쟁하고 하는 모습으로 나타날수도 있지만 그들의 경우처럼 철학적 바탕을 모색하고 미래에 대한 학문적 성찰을 이루어내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결국 어떤 기여를 하게될지는 더 두고봐야할 문제지 지금의 단계에서 이론적 편향이다라는 말은 좀 과한게 아닌가 싶군요.

2007-10-08 17: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돌이 2007-10-08 22:23   좋아요 0 | URL
뭘 심신이 폐허가 될때까지 싸우냐? 말 뽄대없게 하는거야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 나는 니 말에 틀린게 없다고 생각하는데 선배의 시비가 조금 도를 넘어섰던거지... ㅎㅎ
너무 상심하지 말고 그냥 털어버려라... 이놈의 영감탱이 다음주에 만나면 좀 따져주지 뭐... 이 책은 글쎄 너야 워낙에 꼼꼼하게 읽어내는 스타일이니 나보다는 어렵게 넘어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나는 사실 내가 모르는 부분 나오면 기냥 넘어가버리거든....ㅎㅎ) 그렇게 어려운 책은 아니니 고민말고 읽으셔. 옛날부터 이쪽 인간들 글이 왜 논리정연한 일관성 하나는 끝내줬잖냐? 나도 오랫만에 글 보면서 참 글 쓰는 스타일은 안 변한다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던데.... ㅎㅎ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아간 49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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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세기는 근대화=문명이라는 등식이 마치 상식인듯 만들어져가던 시대다.
하지만 그 이면이 얼마나 추악한 야만으로 얼룩져 있는지를 여기 이 사람들이 증언한다.

안네 프랑크나 체 게바라 안중근 같은 이처럼 모두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이도 있고,
갓산 카나파니(팔레스타인의 작가, 언론인)나 잭 시라이(스페인 내전에 의용군으로 참가한 일본인)라는 이처럼 이곳에서 처음 만난 이도 있다.
기존에 알던 사람이든 모르던 이든 이들의 삶이 증언하는것은 한가지다.
20세기가 인간을 얘기하고 정의를 얘기하는 이를 어떻게 억압하고 죽였나를 그들의 삶과 죽음이 웅변하고 있다는 것.

서경식씨에게 책을 쓴다는 것은 기억한다와 동의어인 것 같다.
그의 소년시대를 통해 재일조선인의 삶을 기억하고자 한 것도 그렇고,
쁘리모 레비를 통해 홀로코스트의 야만을 그리고 그 반동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야만을 기억하고자 하는 것도 그렇고....
삶 전체가 경계인일수 밖에 없었던 그의 존재가 어쩌면 예정한 삶이었는지도....

그가 이 책에서 선택한 인물들 중 어떤 이 - 체 게바라나 아옌데같은 - 는 20세기의 인물로 누구나가 꼽을 인물이겠지만 그 외에도 의외이다 싶은 인물들도 많이 눈에 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일본의 패전후 조선인이면서도 전범으로 사형당해야 했던 조문상 같은 인물.
죽으면서 "천황폐화 만세"와 "조선독립만세"를 같이 외치는 모순을 함께 간직할 수 밖에 없었던 인물이다. 어디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부여받지 못한 경계인의 삶의 한 단면.
최근에야 그 삶이 조명되고 있는 가네고 후미코 역시 그런 경계에 선 인물이다.
일본인이지만 가난하고 불행했던 어린시절엔 조선에 와서 자신의 동족이 조선인들을 어떻게 학대하는지를 보고 자랐고,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는 조선인 청년 박열을 사랑했고 그와 사상적 동지가 되었다가 체포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그녀.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천황의 특사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받자 그 명령서를 찢으며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해버린 그녀의 정체성은 일본인이라 할 수 있을까?

20세기는 민족과 국가의 경계선의 시대였다.
여기가 아니면 저기 이렇게....
하지만 어디에서 경계선에 선 사람들은 넘쳐났고 그들은 그 때문에 고통받았다.
때로는 저항하는 이도 있었고 더 많게는 억압만 받다가 죽어갔다.
경계선은 그 자체가 이미 억압과 고통의 선이었던 것.
그러면 21세기는? 여전히 20세기의 경계들은 더더욱 굳건해지고 있다.
여기 실린 49인의 증언자들에게 우리는 뭐라고 얘기해야 할까?
야만의 시대를 끝내는 게 여전히 멀어보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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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7-10-08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이 살았던 모든 시대는 야만의 시대가 아니었을까 싶네요.
뭘 읽어도 야만의 냄새는 가득하니까요...
서경식 선생 글을 읽노라면 알싸하게 슬픈 호르몬을 유발시키는 메시지가 톡톡 씹히는 것 같지요. 저도 이 책 신청해 두고 있습니다.

바람돌이 2007-10-08 11:35   좋아요 0 | URL
모든 시대에 인간의 야만은 있었지만 20세기가 특별한건 아마도 그 야만의 희생양의 숫자가 어떤 시대와도 비교되지 않는다는 데 있지 않을까요? 서경식씨가 마지막에 여기에 이렇게 이름조차 올리지 못하는 수많은 난민들과 희생자들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코끝이 찡했습니다.
 
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 돌베개 / 200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서경식씨 책으로 읽은게 이번이 4번째인가 싶다.
근데 읽으면 읽을수록 그가 그저 한 작가가 아니라 바로 내 옆에 잘 아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번 책을 읽으면서는 그의 글 자체보다도 그가 가진 태생적인 슬픔이 내내 나를 끌고 다녔다. 
연인에게 손을 내밀듯 그의 아픔을 다독거려주고 싶은 심정이라고나 할까? 

디아스포라라는 생소한 단어는 원래는 '이산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이자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 세계 각지에 거주하는 이산 유대인과 그 공동체를 가리킨다'고 한다.

서경식씨는 이것을 좀 더 확대하여 근대의 노예무역, 식민지배, 지역분쟁 및 세계 전쟁, 시장경제 글로벌리즘 등 몇가지 외적인 이유에 의해, 대부분 폭력적으로 자기가 속해있던 공동체로부터 이산을 강요당한 사람들 및 그들의 후손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쓰고 있다.
결국 재일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서경식씨 자신이 바로 그 디아스포라인 셈이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강제적으로 벗어난 그들은 무엇하나도 확정적인 것이 없다.
그 사회에 속해있는 다수자들에겐 확고하고 안정적인 것들이 대부분 그들에겐 유동적이고 변화무쌍한 불안의 원인들이 된다.
나처럼 한국땅에서 당연히 주어진 국적과 모어와 모국어의 일치를 당연시하고 한국내의 공동체에 뿌리내린 삶은 고민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원래부터 그렇게 주어진 것일 뿐이다. 

그러면 서경식씨 같은 재일 조선인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그들은 우리와 같은  공동체적 기반을 가진 사람으로 봐야할까? 
아니면 일본땅에 살고있는 그저 타자일 뿐인것일까?
정답은 어디에도 없다.
그들은 일본 사회, 한국사회 어디에서도 소수자일뿐이며 두곳의 경계 어디쯤에서 늘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는 존재다.
숙명적 슬픔? 나같은 정착민은 근원적으로 이해할 수없는 그런 종류의 슬픔. 
그런 슬픔은 어떻게 안을수 있을까?
손잡음의 연대는 언제나 서로에 대한 동일시의 애정에서 시작된다.
너와 내가 같은 슬픔을 공유하고 있다는 그 연대감.
하지만 재일조선인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은 타자에 대한 경계 아니면 연민이다.
연민은 경계보다 낫긴 하지만 그것은 대등한 관계는 아니다.

그러면 정답은 있을까?
서경식씨가 이 책에서 명시적으로 그 정답을 얘기하지는 않는다.
이 세계의 수많은 망명자들 - 마르크스, 프리모 레비, 한나 아렌트, 재일조선인 예술가인 문승근 - 을 찾고 소개하면서 그는 그들이 바라보던 세상에 대해 얘기한다.
타자의 눈을 통한 세계 읽기. 그것은 정녕 내부자의 시선과는 다르다. 
이미 가진자의 시선으로 보는것은 변화의 가능성에 대해 무의미하다.
근대적 국가와 민족의 시선으로 무언가를 보는것은 이미 그것이 억압과 배제를 내포하고 있음을 그는 그의 글을 통해 낮은 톤으로 얘기한다.
그가 목소리 높여서 주장하지 않는것도 어쩌면 그의 태생적 슬픔의 한계라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진실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전달될 수 있는 힘을 가진다고 믿는다.
그의 나직하고 담담한 말속에서 나는 내부로는 너무나도 강렬한 열망을 만난다.
국경과 민족의 경계를 초월하는 인류애적인 발상. 그것이 세계를 이 암흑의 구덩이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나와 타자의 구별이 아니라 인간임으로 우리는 같다는 것. 그리고 누구나가 존중받아야할 존엄한 존재라는 것 - 그것이 어쩌면 디아스포라적인 가치관이 아닐까?
멀어보이지만 그래도 진리는 나직이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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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맘 2007-05-25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읽어야 할 책이 또 하나 늘었네요. 감사 ^ ^.

바람돌이 2007-05-25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관심가져주시는데 제가 더 감사하지요. ^^

난데다로 2008-10-02 0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한겨레 신문 디아스포라의 눈에서 서경식 교수가 쓴 글에 인용이 됐길래 찾아와 봤습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14751.html

바람돌이 2008-10-02 23:32   좋아요 0 | URL
한겨레신문 기사를 보니 1년도 더 전의 글이네요. 전 못보고 지나갔는데 이렇게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조금은 부끄럽고 또 조금은 기분좋은 하루였습니다. ^^ 근데 이런건 어떻게 찾아내신대요? ^^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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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20억의 인구가 먹고도 남을만큼의 식량이 생산되고 있다는데 왜 하루에 10만명이, 5초에 한 명의 어린이가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는가?

이런 끔찍한 질문에 대답하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이다.
때때로 내 아이의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이 눈물겹도록 고마워해야 될 일임을 깨닫게 되는 때가 있다.
바로 이런 글을 만나고 이런 뉴스기사를 접하고 할때이다.
제 자식 귀한것에 눈먼 에미는 한편으로 내 자식이 이런 상황이 아님에 안도하고 감사한다.
또한 한편으로 남의 불행에 빗대어 자신의 행운을 감사하는 이기심에 소름이 끼치기도 한다.

내 옆에 굶주리는 친구가 있다면? 또는 바로 내 이웃의 아이들이 굶어죽고 있다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걸 그 상태로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자신의 집에서 쌀이며 반찬이며를 퍼다 줄 것이며, 또 누군가는 행정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찾아봐줄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 옆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그런데 그것이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멀고 먼 남의 나라 또는 그리 멀지 않더라도 어쨌든 내 눈에 직접 보이는 것이 아니라면?
그건 그 나라의 일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내가 도운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다고?
그래 그렇게 우리는 딱 떨어진 거리만큼 무감각하고 무책임하다.
아니 애써 없는듯 모르는척 눈을 감는것일게다.

끊임없는 내전에 시달리는 소말리아는 기아구제를 위한 정책은 커녕 국제사회의 지원조차도 불가능하게 만듬으로써 의도적인 살인을 벌이고 있다.
오늘도 브라질이나 필리핀의 대도시에서는 부자들이 먹고 버린 쓰레기를 뒤져 먹을 것을 찾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고...
심지어 그런 상황을 바꾸고자 최소한 국민들을 굶주림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들은 식량생산과 유통 소비를 통제하는 다국적 기업들에 의해 파괴되고 있다.
식량이 인간의 기본 생명을 지키기 위한 역할이 아니라 인간의 생존을 파괴하고 이윤을 위한 무기가 되는 체제를 과연 정상이라 부를 수 있을까?
자본주의 체제의 무서움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윤 창출 즉 돈이 되는 것이라면 내가 더 많은 돈을 쌓을 수 있는 것이라면 하루에 10만명이 굶어죽든지 말든지 남는 식량을 불태워 없애버릴 수 있는 비정함.
그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고도 그것이 자기 탓이 아니라 돈이 없는 그들의 문제라고 큰소리칠수 있는 죽일놈의 뻔뻔함.
정말로 말도 안되는 이 체제는 오늘도 잘 굴러가신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저 체제에 구멍을 내는건 가능하기나 할까?
그건 모르겠다.
다만 내 옆의 사람이 굶고 있는데 내입에 내 자식의 입에 밥들어가는것만 기특하다 훌륭하다 되지 않는것처럼 좀 떨어진 그들의 고통 역시 외면하면 안된다는 것 밖에는....
그걸 흔히 인지상정이라고 하는거 아닌가?

유엔조사관이었던 저자가 아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준것처럼 나는 또 내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아마도 더 이상의 굶어 죽는 아이들이 없어질때가지 이 책은 유효기간을 가질 터...

부디 바램이 있다면 지금은 어린 내 아이가 중학생쯤 되어 이 이야기들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될때는 더 이상 이 책이 읽지 않아도 되는 그런 책이 되기를......
그저 역사책 속에서 과거에는 그런 말도 안되는 일들이 일어났대라고 넘어갈 수있기를 바라는건 너무 큰 바램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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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11-18 21:59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갈라파고스 2007년 11월 도서목록에 있는 책으로 2007년 11월 8일 읽은 책이다. 관심분야의 책들 위주로 읽다가 알라딘 리뷰 선발 대회 때문에 선택하게 된 책인데, 이런 책을 읽을 수록 점점 내 관심분야가 달라져감을 느낀다. 총평 물질적 풍요로움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이기에 이 책에서 언급하는 "기아의 진실"은 가히 충격적이다. 막연하게 못 사..
 
 
마노아 2007-05-07 0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그때에 그런 날이 되었으면 좋겠어요ㅠ.ㅠ

바람돌이 2007-05-07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집 아이가 중학생쯤이 되려면 한 7년쯤 남았군요. 이윤에 의한 사고가 아니라 인간적 사고에 의한다면 충분히 가능할텐데.... 그 전에라도 할 수 있는걸 찾아야겠죠..

홍수맘 2007-05-07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님과 같은 큰 바램을 가져봅니다.

책읽는나무 2007-05-07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그랬음 좋겠어요.

바람돌이 2007-05-07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수맘님, 나무님 모든 사람이 이런 바램을 가지겠지만 자식을 키우는 부모들은 아마 더 크게 다가설것 같아요. 저도 제가 처녀적에는 이런 문제가 이론적인 또는 정책적인 문제로 해결해야 될 문제로 다가왔었는데 지금은 머리보다 마음이 먼저 아파지던걸요.